-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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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엄마와 딸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했던 엄마. 지난 3개월간 그런 엄마가 내게 내뿜었던 부정의 아우라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평소에도 전화를 자주 하긴 했지만, 뭔가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 전화를 했고,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면 ‘오늘은 어디서 노냐? 집에 몇 시에 들어 올거냐?’ 여느 엄마들과 다름 없이 그저 ‘엄마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딸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12시 안에는 들어갈거야’라는 대답에 평소라면 ‘그래, 적당히 놀고 들어와’라고 쿨하게 대답하던 엄마는 사라지고, 집에 들어가겠다던 시간을 어기는 그 순간부터 수십번씩 전화를 하는 엄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심지어 어느 날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들어가겠다고 얘기했으나, 약속 시간에도 여전히 술자리에 있던 내게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한층 격앙되어 있었다.
“야, 지금 몇 시야? 너 몇 시에 들어 온다고 했어? 10시? 근데 지금 몇신데? 너, 진짜 엄마 죽는 꼴 볼래? 넌 어쩜 이렇게 니네 아빠랑 똑같니?” 라고 버럭버럭 화를 내며 몸도 안 좋은데 ‘곧 끝나겠지’라고 생각하며 술자리에 앉아 있던 내 마음에 무게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만 느껴지는 말 한마디를 던져 주신다. 전화를 끊자마자,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먼저 일어서겠다며 술자리에서 가방을 집어 들고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아빠랑 내가 뭐가 같다는 거냐?’ 나 역시 기분이 상할대로 상해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 건, 그렇게 화를 내던 엄마가 집에 도착하면 언제나 세상 모르고 아주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시다는 거다. 차라리 전화로 화를 냈던 그 상태 그대로 내게 다시 화를 낸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매번 이런 식이다. 엄마는 늘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내게 마구 던진다. 그걸로 끝이다.
안 그래도 일과 진로 문제로 머리 속이 복잡한데, 엄마까지 나를 못살게 구니 이제는 정말 도망칠 구석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건 여전히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고 계신 엄마라서 내가 눈 뜨기 전에 엄마는 집에 없다는 것이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는 엄마와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나는 딸이 서로가 깨어있는 얼굴을 볼 시간이 매우 적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알 수 없는 화를 낸지 3개월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하루라도 빨리 동생이 있는 호주로 도망 가야겠다’고 생각한 어느 날. 드디어 엄마가 내던 화의 근원이었던 ‘엄마가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다. 마음먹은 날 새벽, 엄마는 자고 있는 나를 깨운다.
‘엄마, 오늘 일 못한다고 얘기 할거야. 그러면 그 일 못해서 못 받는 돈은 어떡할거야?’
자다 깨서 비몽 사몽인 내게 하는 그 말을 눈을 부릅 뜨고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또 한 마디를 하신다.
“너는 남들이랑은 맨날 희희락락 얘기도 많이 하고 맨날 늦게 들어오면서, 엄마랑 겨우 이렇게 이야기 할 시간에 눈도 제대로 안 뜨냐.”
눈 뜨고 정신 차리는 시간이 다른 엄마와 나. 그런 내게 엄마는 일방적으로 본인이 깨어 있는 시간에 이야기를 하자고 하신다. 나는 할 말이 없다. 물론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대화를 청하는 것이 일방적으로 엄마인 경우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엄마와 또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일방적으로 엄마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몇 주만에 서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지난 3개월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는 엄마. 힘겹게 이어오던, ‘엄마의 스트레스 주범이었던’ 그 일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오늘도 나는 그저 묵묵히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간간히 ‘아, 그래?’라는 짧은 호응만을 한다.
그런데 그 짧은 대화에서 나는 엄마가 정말 화가 났던 것이 ‘하기 싫은 그 일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을 하는 것은 괜찮으나, 그 일을 해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말도 안 되는 뒷담화’들. 그리고 그 뒷담화가 오고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쓸데 없는 오해들’이 문제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팠는데, 그 일이 해결됨과 동시에 엄마에게 몰려들었던 이유없는 두통-내게 큰 영향을 미쳤던-이 말끔하게 사라졌다는 것. 덕분에 엄마는 오늘 내게 전화를 한 통도 하지 않았으며, 얼굴을 마주 하며 웃으면서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대화 중에 엄마가 내게 한 마디 덧붙인다.
“니가 그 일 왜 그만뒀는지. 알겠어. 남들이 뒷담화하는 게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 일인지 몰랐지 뭐니?”
얼마 전 안정적이라 할 수 있는 직장을 그만뒀다고 고백하면서 엄마에게 ‘임원의 뒷담화’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는 얘기를 했었다. 당시에는 엄마가 이해를 잘 하지 못하고 ‘그래도 좀 참지 그랬니?’라고 내게 얘길 했었는데, 이번에 엄마가 비슷한 일을 겪으면서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 동안 엄마가 왜 그렇게 나한테 짜증을 내고 못살게 굴었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감시 받으면서 일하기 싫어하고, 알아서 자유롭게 본인이 일한 만큼 벌어가는 것이 편한 엄마가 ‘누군가의 감시’를 받으며 일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게다가 큰 딸이라고 하나 있는 건 제 앞가림도 못하고 있으니 답답할 만도 하다. 그런 내게 엄마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가 니네 아빠 살아 있을 때도, 네 사람을 먹여 살렸는데 말이야. 니네가 지금처럼 다 컸는데 아직도 니네를 먹여 살리고 있어야해? 넌 언제 엄마 먹여 살릴래?”
이 대화에서 엄마가 현재 겪고 있는 삶의 고통과 무게가 그대로 느껴진다. 나이 서른 먹은 딸래미가 생활비는 못 낼 망정, 엄마에게 여전히 빌붙어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엄마 입장이었어도 답답할 것 같다.
함께 있으면 어디 하소연을 할 때도 없을 정도로 보기 싫고, 함께 하기 싫은 존재였다가도 말 한마디에 바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나 역시 그렇게 나의 삶을 이해 받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엄마밖에 없나 보다.
#49.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2010년 12월 크리스마스, 첫 직장을 그만두게 된 직후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다. 하지만 그 때는 끝난 후에도 큰 감동이나 여운이 남지 않았다. 그때 그렸던 10개의 미래 풍광을 다시 읽어보았지만 ‘진짜 내것’이라는 느낌도 크게 들지 않았다.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물론 10개의 그림 중 간절히 원해서 이루어진 것도 있다. 첫 번째 그림으로 그렸던 연구원이 바로 그렇다.
당시에 여행을 다녀온 후 연구원이 되었다. 매주 과제를 충실히 해냈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부님은 졸업여행에서 내게
“쟤는 3번이나 도전해서 연구원이 됐는데 말이야. 막상 되고 나서는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정말 그랬다.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다. 술 마시고 놀던 나의 시간들을 포기했고, 나의 주말은 온전히 과제를 하는데 쏟아 부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고 과제를 하는 것은 어느 새 나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 역시 친구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하지만 매주 읽어야 할 책이 있었고, 주말까지 올려야 하는 과제들 덕분에 간혹 찾아 온 ‘힘들다, 우울하다’는 생각을 오래 붙잡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1년이 지나고서 책과 노트북에 쳐박고 있던 얼굴을 들어 주위를 둘러 볼 여유가 좀 생겼다. 함께 했던 동기들이 보인다. 한명, 한명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다.
가장 많은 변화와 성장이 보이는 사람은 루미언니였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루미가 똑똑해졌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대리석 덩어리 안에 갇혀 있던 다비드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그를 해방시킨 것처럼 루미언니 역시 그녀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에너지가 1년의 연구원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에너지는 그녀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엄청 밝게 비추고 있다.
라이프 아티스트 사샤 언니는 진짜 라이프 아티스트가 되었다. 주변이들에게 마음껏 나눠주고 싶은 삶에 대한 확신을 찾은 것 같다. 드디어 회사를 그만뒀고, 그녀에게 진짜 자유가 찾아왔다. 이제 언니의 아티스틱한 삶이 제대로 시작된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로 더 바빠지고 생기가 넘치는 걸 보니 말이다.
미선언니. 얼굴에 웃음기가 별로 없었던 미선언니는 정말 얼굴이 환해졌다. 1년 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졌고, 자신감이 넘친다. 땡칠이 중 그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그 에너지를 다른 이들에게도 충분히 나눠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완벽주의자 재경언니. 쉴 줄 몰랐던 그녀. 안식년 1년도 인정받고 싶은 자의 욕망을 충실히 보여줬다.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의 리스트를 적고 하나씩 지워가며 해냈다. 꿈벗, 연구원 웨버 등 쉬는 동안에도 언니는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맡아 해낸 것 같다. 그러던 중 땡칠이들에게 일을 하나씩 맡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언니에게 ‘여유’라는 단어가 조금씩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언니가 자신만의 휴식법을 찾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훈 오라버니. 연구원 1년 과정을 통해 훈 오라버니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쓰고 싶은 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 같다. 자신이 쓸 책이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책에 대한 확신’을 가지다니. 가장 부러운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오빠는 반나절 다니던 회사마저 때려치고, 글쓰기와 공부에 올인하고 있다. 그런 결단력과 확신이 참 부럽다.
패밀리스트 양갱 오빠. (먼저 오빠를 기억해내지 못한 것,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충남 당진과 서울을 오가며, 불규칙한 근무시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피곤한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우리 갱수 오빠. 연구원 1년의 과정은 오빠가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오라버니의 사진은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유쾌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그 사진들에 이야기와 감성을 담아낸다. 잃어버린 5만원을 찾아준 사건은 사람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일생 일대의 사건이었다. 연구원과정은 분출하기 직전의 활화산과 같은 사랑을 마구 분출하게 도와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연구원 과정을 끝까지 함께하진 못했지만, 자신만의 공간에서 팽팽하기만 했던 삶의 줄을 때로 헐렁하게 놓아줄 수 있게 된 경인오빠. 팽팽해서 언제 끊어질지 몰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조마조마하게 했던 경인오빠가 이제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변했나?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변하긴 했을텐데. 뭐가 변한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이런 생각과 진로,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찾게 되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연구원이 되고 싶었던 것은 ‘나를 찾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내가 책을 써야 하는지’를 발견했다. 함께 하기 위해 왔던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도 있고 다양하다. 죽기를 바랐던 한 사람이 선생님의 책을 발견했고,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까지 올 수 있었다. 내 책 역시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의 책을 읽고 ‘당신의 책 덕분에 내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라고 말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날 10년 후 ‘이 정도면 잘 살았다’라고 스스로 평가할 만한 미래의 10가지 풍광을 발표했다. 발표를 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차 올랐다. 이제야 비로소 그 동안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를 조금은 찾은 것 같았다.
ㅎㅎㅎ.. 언니... 정말,. 광합성이 가능해서 자급자족하며 살고 싶다.
시지푸스의 돌처럼 평생 안고 가야하는 형벌. 우리 엄마는 너무 오래 그 돌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더라고.
이제는 내가 그 돌을 함께 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요.
와우. 언니의 신조 "탁월함을 보이면 기회가 온다" 완전 공감. 언니처럼 꼭 이렇게 정의 내리고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는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과 실천이 있었던 듯. 그래서 지금까지 내게 많은 기회가 오고 있는 것 같고.
지난 주에 루미언니랑 훈오라버니와 술을 마시면서도 두 사람에게 물어봣는데.ㅋㅋ.. 두 사람도 잘 모르겠데.ㅋㅋㅋ
여행에서 돌아오니, 지금 당장 해야할 일들이 갑자기 많아졌어. 이제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고마워 언니~~~!!!!^^(이제 댓글을 달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ㅋㅋㅋ)
진희언니~~~~
댓글은 진작에 봤는데, 개인 사정상 이제서야 댓글을. ^^;;;
아....... 그날 저한테서 진정성과 절실함.- 무엇보다 이 절실함이란 단어가 너무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을 봐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책을 시작으로 이루고 싶은 내 꿈들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절실함인 것 같거든요.
막막하기만 한 내 인생. 절실함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정말, 엄마도 희생이 아닌 엄마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엄마의 이런 삶에 내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 한 구석이 무겁기도 하고.ㅜㅜ..
언니, 응원 고마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