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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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고독한 시간을 찾아서
대학은 내 인생 초반 20년의 결과물이다. 보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오감을 자극할만한 갖가지 욕망들을 꾹꾹 누른 채 20년의 시간을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린다. 그 길에서 우리는 부모님들에게 항상 듣던 말이 있다. “대학 가서 니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쩌면 우리들의 목표는 대학이 아니라 ‘자유’였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자유’를 꿈꾸며 대학에 가려고 애를 썼고, 다행히 한 번에 대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며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던 자유였기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다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해 보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드럼 배우기’, ‘아는 사람 많이 만들기’, ‘장학금 받아보기’ 등등.
드럼을 배우기 위해서 음악 동아리에 들어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동아리방에 들러 열심히 책을 두드리며 드럼 연습을 했다. 사회에서 보기 드문 팬플룻을 연주하는 동아리라서 드럼과 함께 팬플룻도 배울 수 있었다.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갈 수 있는 모든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 그리고 참여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장학금도 탈 수 있는 ‘근로 장학생’을 신청했고, 교목실에서 근로를 하며 타과 선배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학과 내에 있는 학회, 학회 활동을 통해 알게 된 학생회 사람들,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연구실의 연구원까지 지원을 했다. 학과 공부가 재미있지 않았던 나는 공부보다 대학 생활에서 즐길 수 있는 다른 것들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그렇게 4년간 학교를 다니며 쓴 돈은 학비만 2500만원 정도이고, 생활비까지 더하면 4천만원 정도가 되는 것 같다.
부모님이 마련해 주신 1학년 두 학기의 학비를 제외하고 나머지 6학기의 학비는 모두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이 때 받은 대출금은 졸업하고 6년 뒤인 서른에 비로소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4년간의 대학생활 덕분에 나는 학사학위를 취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디에서든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물론 학위 외에도 졸업 후 꾸준히 만나고 연락하는 친구와 선 후배들이 남았고, 언제든 나를 반겨주는 동아리가 있다.
그런데 4학년이 되던 해, 취업을 앞두고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알 수가 없어서 막막하기만 했다. 나를 둘러싼 관계, 공간들은 있었지만, 정작 ‘나’는 그 곳에 없었다. 자기소개서를 낼 때마다 서류조차 통과되지 않았고, 결국 첫 사회생활은 나를 먼저 찾아서 받아주는 곳에서 시작하게 된다. 사회생활의 첫 단추를 끼고 5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내가 ‘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5년간 일했던 곳을 나와 두번째, 세번째 직장에 갈 때까지도 나는 도대체 내가 무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무슨 일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내 인생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고, 더 이상 이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첫 직장 3년차가 되던 해에 나는 상사와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때마침 서점에 들렀다가 상사와의 관계에 도움이 될 만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 책이 너무 좋아 저자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웹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저자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돈이 안 드는 유일한 길은 연구원이 되는 것이었다. 연구원 지원 공고가 나기를 기다렸고, 연말에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의 역사를 스무 페이지에 담아 지원을 했다. 처음에는 1차에서 불합격, 두 번째 지원했을 때는 2차에서 불합격했다. 그리고 직장생활 5년차에 세 번째 도전을 해 드디어 합격. 오래 일한 첫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려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년간 나는 매일 술과 사람들로 보내던 평일의 저녁 시간을 책과 씨름하며 보냈다. 책과 담 쌓고 지내던 내가 책을 통해 좋은 스승들을 만나게 되고, 저자들의 생애와 글을 통해 그들이 던져 주는 메시지들에 감동하는 시간을 보냈다.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보내던 주말 시간은 글을 쓰는데 전부 투자했다. 매주 새로운 책에서 내 가슴 속 깊은 감동의 울림을 준 메시지를 고르고, 짧은 내 인생을 되돌아 보며 그와 관련된 나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당연하게 혹은 무심코 스쳤던 나의 과거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한번, 그리고 다섯번에 걸쳐 내게 던지 ‘왜’라는 질문으로 나는 각 문장이 내 마음속에 큰 울림을 주는 이유를 알 수 있었고, 그와 관련된 잠자던 경험들을 깨울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헀고, 남들과 달리 강하게 뿜어내고 있었던 분노의 에너지도 찾아냈다. 이렇게 매주 하나씩 ‘나’를 발견해 갔다. 고독의 깊이가 깊어질 수록, 나에 대한 고민 역시 깊어져 갔다. 하지만 대학 4년간 학점도 포기하며 만들었던 인간관계의 폭은 하루가 다르게 좁아져 갔다. 고독의 시간을 보낸 지 1년이 지났다. 대학 4년을 보낸 후에 느꼈던 허탈함이 아닌, 아직은 표현하기 힘든 어떤 희열이 존재하고 있었다. 책을 통해 ‘나’를 찾은 이 경험은 곧 내게 ‘조금 더 일찍 나를 찾을 수 있었더라면…’이란 아쉬움을 남겼다.
조셉캠벨이 생각난다. 독일 유학을 하던 중 대공황으로 어지럽던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 취직이 어렵던 그때 준비하고 있던 박사 논문을 접고 뉴욕의 우드스탁 숲 속에 있는 일년에 20달러짜리 오두막에 세 들어 살기 시작한다. 4년간 그는 최소한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재즈 밴드에서 섹소폰을 부는 시간을 제외하고 오두막에 쳐 박혀 끊임없는 독서를 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캠벨은 독서로 일정 궤도에 오르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즐거움이란 삶에 대한 깨달음이고, 이는 또 다른 깨달음을 유발한다. 그는 우드스탁에서 보낸 4년간 마음에 드는 작가 있으면 붙잡고, 그 사람이 쓴 책은 모조리 읽었다. 그리고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다 읽었다. 그렇게 캠벨은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고, 관점이 생기자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조셉 캠벨이 부러웠다. 내게 주어졌던 대학 4년의 시간이 캠벨이 우드스탁에서 보냈던 4년의 시간과 같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대학교에 쓴 학비정도면, 4년간 충분히 많은 책들을 사서 읽을 수 있다. 스무살에서 10년이 지난 후에야 우연히 내게 찾아온 고독의 시간을 스무살로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지난 1년간 찾았던 ‘나’를 조금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겪고 있는 방황의 시기 역시 빨리 찾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캠벨에게 열렸던 새로운 세상이 이미 내 앞에 펼쳐져 있을 지도 모른다.
아쉽다. 내게 고독의 시간이 너무 늦게 찾아온 것 같아서, 더 빨리 찾지 못해서 많이 아쉽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한편으로는 감사하다.
그렇지만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다.
“무척이나 외롭고 힘든 고독의 시간이 그대를 찾아 온 적이 있나요?”
이 자식 힘든게냐? 간만에 글이 짧네.
읽는 이로서 편하기는 하다만 무에 그리 바빴나, 뭐가 복잡했던건 아닌가 생각하게 되네.
뭐.. 어제 낮술하고 있다는 말에 별일 없구나 하기는 한다만은.....
난 고독이 싫었다. 고독보다는 함꼐하는 시간에 의미를 두었던 사람이지.
여전히 나는 고독으로 침투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깔깔 거리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쓰레기도 재활용이 된다고...... (고독 사들인 훈이 오빠 화내는 건 아니겠지?)
고독도 필요할 때는 해야하는 법인가 보더라.
그리 하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더라.
고독도 좋고 웃는 것도 좋다. 웃을 땐 가장 크게 웃고, 고독할 땐 찌질할 정도로 고독한 게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나 밖에 감당할 사람이 없고, 누구와 무게를 비교할 수 없는 거라면 그래도 되는 거지.
짜식, 고독 끝났냐?
생각해보니 내 문제는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사람들이 전망좋다는 곳으로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려 경주마처럼 질주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내가 이룬 성취들이 나의 고단함과 허무함을 위로해주었지만 한계에 이르자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중년을 앞두고 길을 잃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네 문제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인지, 뭘 잘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너를 받아주는 곳으로, 문이 열린 곳으로 덥석덥석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구름처럼 흐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원인을 파악하면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법, 네가 그 해답을 찾길 바란다.
너의 우드스톡의 시대는 지금이다. 지나간 날 속에서 찾지마라. 책속에서만 우드스톡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방황이 있는 곳에, 슬픔이 있는 곳에, 고독이 있는 곳에 우드스톡은 있다. 우드스톡이란 네가 진심을 다하는 곳이다.
그 일 때문에 네 하루가 온통 해지는 곳이다. 늦었다 하지 마라. 나도 우드스톡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이기를 바란다.
미나야.
작년에 미선이는 하루에 100번 씩 웃었다. 요새는 시도 때도 없이 실실대지 않더냐.
루니는 내게 매일 인사 편지를 보냈다. 이제 그만두라고 해도 여전히 보낸다. 그러더니 똑떡해 지지않더냐
너는 내게 매일 전화 하도록 해라. 네 목소리가 행운을 부를 수 있도록. 내가 못 받더라도 빠지지 말고 해라.
그만두라고 할 때 까지 매일 하도록 해라. 언젠가 네 목소리가 비단 같아지면 우드스톡의 자유가 찾아 온 것이다.
사부님~~~~
우드스톡의 시대는 지금이라는 말씀에 울컥 눈물이 날뻔했습니다.
방황, 슬픔, 고독 이 있는 곳이 우드스톡이라는 말씀이 왜 이렇게 제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걸까요?
정말, 지금이 그런 때라서 그런가봅니다~~
그리고 매일 전화하시는 말씀에 또 한번 눈물이 날뻔했네요...
제가 정말 자신없는 것 중에 하나가 전화통화하기인데 말이죠..ㅜㅜㅜ...
루미언니에게 매일 인사하라고 하셨을 때, 루미언니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어느 정도 상상이됩니다.ㅋ
미선언니와 루미언니처럼 무언가 변화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목요일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가는 기차랍니다..
그래서 오늘에서야 사부님 댓글을 보았습니다.. 내일부터 전화드릴게요 사부님~~~~!!!!!^^;;;
제 목소리가 비단 같아져 제게 찾아온 우드스톡에서의 시간에 자유가 찾아오길 진심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해요, 사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