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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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물리고 밤을 활보하는 짐승들을 물릴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힘은 여명입니다. 찬란한 햇살 이전의 시간인
여명만으로도 숲은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둠 – 여명 – 햇살. 숲은 이 흐름을 따라 하나씩 깨어납니다. 새들이 단연 일등입니다. 요즘 같으면 삐유- 삐유- 울어대는 철새가 먼저, 뒤를
이어 조잘조잘 울어대는 작은 텃새들과 딱다구리 나무 뚫는 소리의 순서로 숲이 깨어납니다.
뒤이어 아랫마을 칠순을 넘기신 어른의 경운기 소리 통통통통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며 안개의 농담을 한 꺼풀 벗겨냅니다. 다음은 내가 일어나 늑대처럼 아-우-우-우 포효하여 숲을
깨우고, 그 다음은 동네의 목수 총각에게 매일 ‘돌대가리’라 구박받는 나의 개 ‘산’이
아-으-으-우’ 하품을 치며 마루 옆에서 기어나와 또 새벽 안개 한 꺼풀을 벗깁니다. 새들의
노래소리가 더욱 찬란하고 시끄러울 정도를 넘기고 나야 비로소 햇살이 군자산의 높은 해발을 넘어서며 이 숲으로 쏟아집니다. 이제 바야흐로 낮 짐승, 날 짐승,
걷는 짐승들의 시간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나절 치열한 삶이 숲 곳곳을
채웁니다. 다시 해질녘 새들의 노랫소리 찬연해졌다가 잦아들고 부엉이 푸-호-오 푸-호-오 울고 나면 어둠 사이를 헤집는 짐승들의 시간이 반복됩니다. 숲의
하루가 그렇게 어둠과 밝음 사이를 오가는 것을 반복하는 사이 숲은 저절로 깊고 두터워집니다.
자연의 모든 것은 그렇게 흐름을 타고 흐릅니다. 추위가 깊었다가 조금씩 물러나면서 대동강 얼음마저 녹인다는 우수를 맞고, 다시
개구리 입을 떼게 한다는 경칩을 맞습니다. 삼짇날이 되어야 제비가 돌아오고, 제비가 돌아올 즈음에야 뱀도 동면을 풀어 세상을 향합니다. 오묘한
일입니다. 물이 녹아야 수서곤충들도 먹이활동을 시작할 수 있고, 그래야
우화한 곤충들의 비행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 개구리도 먹을 것이 생기고 떠났던 제비도 돌아와
사랑하고 새끼를 만들 궁리를 하게 됩니다. 또 그래야 뱀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어집니다.
이렇듯 자연은 모두 시간의 흐름 위에서만 잠들고 깨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 만든 정치도, 꿈도 욕망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깨어나고 움직이고 날아오르기까지 참 많은 시간과 수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겨우내 신었던 털신을 벗을 시간이 되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털신을
벗는 것 조차 시간의 흐름 위에서만 허용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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