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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8일 11시 3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피터 드러커의 연구 및 번역가로 잘 알려진 작가.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 상과대학 을 졸업하였으며 대구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또한 대구대학교 총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2005년 명예퇴직하였다. 포틀랜드 주립대 객원교수,한국산업경영학회회장,한국인사조직학회 부회장, 한국국제경영학회 부회장,대구은행 사외이사를 역임하였다. 현재는 영원무역과 삼익THK 사외이사, TBC 대구방송 비상임이사, 그리고 태창철강의 경영고문으로 있다.

 

그는 1966년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경영의 실제』와 『기업의 개념』을 읽고 그에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1982 10여 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친 뒤 학자의 길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드러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92 12,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에 있는 자택에서 드러커를 처음 만났을 때 책보다 더 많은 클래식 음반이 서재에 꽂혀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2005년 드러커가 타계할 때까지 이재규는 매년 드러커를 만나 경영과 음악과 미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경북고 재학 중 성악을 배웠고, 서울대 상대 재학 중 홍릉제에서 푸치니의 〈토스카〉 아리아별은 빛나건만”, 나운영의달밤등을 불렀다. 2009년 연말 CEO 자선음악회에서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아리아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이수인의내 맘의 강물을 불렀다.

 

그의 저서로는 『이재규 교수의 3분 경영』『지식경영학원론』『인적자원관리론』,『피터 드러커에게 경영을 묻다』 등 20여 권이 있다. 번역서로는 피터 드러커의 『단절의 시대』『넥스트 소사이어티』『피터 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21세기 지식경영』『미래의 결단』『자본주의 이후의 사회』『2020년 기업의 운명』, 『한 권으로 읽는 피터드러커 명저 39권』,『피터 드러커의 지식역사』,『피터 드러커의 지식근로자』,『피터 드러커의 지식사회』등이 있다. 최근에는 『클래식 음악 에피소드』『발칸, 시간이 멈춘 그곳』『모차르트 인 오스트리아』『모차르트 읽는 CEO』『베토벤 읽는 CEO』 등 저술의 범위를 인문과 예술로 넓히고 있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사 연구의 모든 노력은 시대구분으로 귀착된다. 서양의 역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시대구분을 한다. (30)

1. 고대사회 : 5세기 말 서로마의 몰락까지

2. 중세시대 : 6세기~14세기

3. 르네상스 시대 : 14세기~16세기

4. 근대시대 15세기~19세기

5. 현대시대 : 20세기 이후

 

미래 학자 앨빈 토플러는 1980 <3의 물결>을 통해 역사 발전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여 제1의 물결(농업혁명과 농업사회), 2의 물결(산업혁명과 산업사회), 3의 물결(정보혁명과 정보사회)로 나누었다. (31)

 

피터드러커는 1993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지식의 의미와 기능 변화'라는 관점에서 사회와 인류의 발전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첫째 시식이 주로 인간의 내부에 적용되어 자시 자신을 알고, 인격을 연마하는 목적으로 사용된 고대사회에서부터 산업혁명 이전 시대. 둘째, 지식이 처음으로 인간 외부의 기게, 도구, 프로세스, 상품 등에 적용되어 자본 생산성을 향상한 산업혁명 시대. 셋째, 지식이 인간의 일하는 방식, 즉 생산방식에 적용되어 육체노동자의 생산성을 향상시킨 노동생산성 혁명의 시대(19세기 후반~20세기). 넷째, 20세기 후반부터는 노동생산성 향상 경쟁이 끝나고, 지식이 다른 지식과 결합하여 또 다른 지식을 창출하는 지식혁명 혹은 지식생산성 혁명 시대로 구분했다. (31)

 

이 책의 시대구분

드러커의 구분

(지식의 기능)

전통적 시대구분

근육의 시대

지식의 기능은 자기 수양

고대시대에서 14세기까지

과학의 시대

전환기

르네상스에서 산업혁명 이전

자본의 시대

(1차 산업혁명:1776~1873)

산업혁명

자본생산성 혁명

(지식과 자본재의 결합)

근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후반)

노동의 시대

(2차 산업혁명 : 1881~1991)

산업혁명

노동생산성 혁명

(지식과 육체노동의 결합)

근대와 현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

지식의 시대

(지식혁명 : 1991~)

지식생산성 혁명

(지식과 지식의 결합)

현대

(20세기 후반)

 

 

1부 근육의 시대 / 고대와 중세

 

수렵채집 사회의 인류의 조상들은 힘세고, 빨리 달리고, 나무 위로 더 높이 올라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올림픽의 캐츠프레이즈인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라는 세 단어는 수렵채집시대 조상들의 생활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 그러므로 수렵채집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근육이었다. 근육맨이 수렵채집 사회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36)

 

수렵채집 사회...생존을 위해서 넓은 숲과 초지가 필요...1인당 평균 10평방미터의 토지가 필요...건조지 농경에는 1인당 500평방미터가 필요...토지의 생산성이 대폭 늘자 토지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다시 건조지를 관개농지로 바꾸면 토지의 생산성이 더욱더 높아져서 1인당 평균 100평방미터면 충분...사람들은 다소 여유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생업을 위한 노동을 제외한 여가시간에는 차츰 생존과는 별 관계없는 장식품을 만들었다. 그것이 역사상 최초의 예술행위였다. (36)

 

농경사회의 승자는 당연히 농사를 지을 토지를 많이 보유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농토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토지와 노동에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사람일수록, , 근면이 승자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37)

 

농경민족이 생겨나서 촌락을 형성하자 수렵채집 사회의 후예격인 유목민족들은 수렵채집 활동보다는 농경민족이 생산한 곡식과 가축을 빼앗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농경민족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38)

 

농경민족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성을 축조하고, 튼튼한 성광과 건물을 짓고 도시를 형성한다. 그것이 바로 중국의 만리장성이고,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바빌론이다. 문명(civilization)은 어원은 '도시(city)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란 수렵채집시대에서 농경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생긴 하나의 사회적 제도인 것이다. (38)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행복의 공식을 물질적 수당능 욕구로 나누어 '행복=물질적 수단 / 욕구'로 표현했다. 그리고 대체로 물질추구적인 서양에서는 물질적 수단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금욕적인 동양에서는 욕구를 억제하고 체념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39)

 

유토피아의 조건은 1.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한다. 2. 외부의 침략이 없어야 한다. 3. 사회 내부적으로 평등해야 한다. (41)

 

유토피아 같은 상태는 사회를 정체시키고 만다... 훌륭하기는 하지만 따분하다. 더 잘살아보자는 욕구가 사라진다. (42)

 

고대 중국사회는 사회계급을 본()과 말()로 나누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또 식량을 생산하는 활동을 본이라고 했는데, 그런 일을 하는 관리와 농부를 우대했다. 그 밖의 소득활동은 말이라 하여, 그런 일에 종사하는 수공업자와 상인을 천시했다. 그래서 사농공상의 서열이 정착되었다. (45)

본말이 뒤집어진다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구나.

 

유토피아의 어원은 ou(no) topia(place)의 합성어로서 지상에는 없는 (no place) 이상향이다. 정녕 지상에서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이어서 지도자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49)

 

역사적으로 평등을 추구하여 잘사는 국가가 있었던가? 그 대답은 조금 궁색하다. 내부적으로 경쟁을 없앤 국가가 바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다. 사회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국가가 더 잘산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때는 자신들이 유토피아에서 산다고 착각하고 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보가 국경을 넘어 확산되면서 동구권은 하룻밤 만에 무너졌다. (51)

 

함무라비 법전의 특징은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 , 가해자는 같은 형태의 처벌을 받데 한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이다. "내가 당한 것만큼 갚아준다"라는 것은 분명 인간의 정의감을 충족시켜주는 구석이 있다. "내가 이만큼 아팠으니 너도 그만큼 아파야 한다"는 것이 교환의 공정성이다. 복수의 문화가 질긴 생명력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정의 구현의 한 양식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공정성은 정의의 조건이며, 복수의 문화에서 공정성은 교환의 공정성이다. (56)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이다. 대리인 관계는 어떤 사람(주주)이 정해진 범위 내에서 의사결정권을, 자신을 대신하는 다른 사람들(경영자)에게 의뢰함으로써 발행하는 관계로서, 이들(주주와 경영자) 사이에는 정보의 불균형, 감시의 불완전성 등으로 도덕적 위험이나 무임승차의 문제, 역선택의 문제가 발생한다. 대리인 문제는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계약관계에서 나타난다. (58)

 

초기 기독교(엄밀히 말해 가톨릭)는 로마제국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으마,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칙령을 발표하면서 공인을 받게 된다. 이로써 유럽문화의 한 축을 이루는 헬레니즘에 이어 헤브라이즘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로 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로마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이때부터를 동로마제국이라고 한다. ...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이라고도 하는데 비잔틴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거의 1천 년 동안 지속되다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패망한다. (60)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을 약탈했듯이 5세기경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이 서진하여 발트해 연안의 게르만족을 약탈하고 위협했다. 5세기 말 게르만족은 흉노족을 피하고 또 비옥한 땅을 찾을 목적으로 서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65)

 

봉건사회는 폐쇄적인 농업경제에서 한층 번성한 문명의 한 형태이다. 제후(가신)와 기사는 영주에게서 봉토를 받고, 그 대가로 영주에게 각종 의무와 봉사를 한다. 이러 사회에서 국가나 공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주와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그 의무를 수행한다. 중세사회를 지탱하는 두 제도는 봉건제도와 기독교였다. (66)

 

525년 베네딕투스는 수도원장으로서 중부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에 수도사 공동체를 세우고 공동체의 규율을 만들었다. 베네딕투스는 수도원을 종교적 신념과 사회 조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상적인 공동사회로 만들었다. (68)

 

성 베네딕투스가 "산을 옮기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곡괭이와 삽이다"라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70)

 

11세기 초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한 수도사는 이슬람교도들의 손에 넘어간 예루살렘을 되찾아야 한다고 교황에게 호소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에 공감하고 1095 11 27일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많은 군중 앞에서 교황은 "하느님이 십자국전쟁을 원하신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희들의 구원의 상징이며, 너희들은 거기에 거룩한 서약을 한 증거로 가슴과 어깨에 진홍빛 십자 문장을 달 것이다"라는 연설을 했다. 군중들도 "하느님이 그것을 원하신다"라고 호응했다. (71)

 

십자국전쟁의 시작을 종교 차원에서만 보는데, 사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유럽 문화의 한 축은 기독교 문화이다. 기독교 문화는 죄의 문화이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속에서 속죄를 해야 한다. 그런 심리를 잘 아는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에게는 죄를 사해주는 면죄부를 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 (더하여) 젊음이 넘치면 발산해야 하듯 사회도 힘이 축적되면 내외부로 쏟아낸다. .... 기독교는 10세기경 유럽 대륙 북쪽으로 교세를 넓히게 되었고, 게르만족, 바이킹족, 노르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생활 여건이 나아지고 신앙심이 두터운 기독교도들 가운데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교황은 아직도 전투욕에 넘치는 게르만족, 바이킹족, 노르만족의 힘을 발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교도를 쳐부수는 일석이조의 기회가 온 것을 인식한 것이다. (72~73)

 

중세의 문화는 봉건제도와 기독교 문화라고 집약된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은 봉건제도의 꽃인 기사계급을 몰락시키고 또 정신적 지주였던 기독교를 약화시키면서 중세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도시의 상인계급과 국왕의 힘은 더욱 강력해졌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왕권은 확고해졌다. 십자군 전재의 길목에 있었던 여러 상업도시들, 예를 들어 베네치아 제오아와 피렌체 등은 군수물자의 조달과 군대의 이동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부강해지게 되었다. (74)

 

고대 서양에서는 지식의 의미와 기능에 관해서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는 지식의 유일한 기능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을 움직이려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움직여야 한다." 플라톤(기원전 428~348),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현상의 연구에서 벗어나 인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을 지식의 기능으로 생각했다. (86)

 

1700년경까지 영국인들은 직업을 의미하는 말로써 존재주라는 뜻의 'crafts'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비밀이라는 뜻의 'mysteries'라는 말로 직업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어떤 기능의 소유자는 그 기능을 비밀로 하겠다고 자신이 속한 직업별 장인조합(guild)에 서약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인(mysteries를 터득한 master) 밑에서 도제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보고 배운 사람이 아니면 그 기능에 원천적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88)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기능 천시풍조는 극에 달했다. 당시 "신사는 손톱 밑에 기름때를 묻혀서는 안 된다."라는 규율이 있었다. 그것은 자본가와 기술자가 사회의 계급으로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신사 계급의 최후의 저항이었다. 그 결과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88)

 

과거 역사에서 보았듯이,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와 한자 상인이 활동하던 북유럽 도시는 경제적으로 번성했다. 물건을 만들고 판매하는 활동에 지식을 투입하고 유도한 사회는 상대적으로 발달했다. 요컨대 "상인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야말로 위대한 사회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상인은 원래 탐구가이자 발견자이고, 그리고 진보의 원동력이었다. 하이에크가 한 말 "우리 모두가 기업가다"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상이이다"라는 말로 바꾸어도 될 듯싶다. (89)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한 히포크라테스는 "지식은 학문을 낳고, 무지는 신앙을 낳는다"라는 말도 남겼다. 고대와 중세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새로운 지식의 발굴이나 확산을 막고 신앙에 매달리게 했다. (90)

 

 

2. 과학의 시대 / 르네상스에서 산업혁명 이전까지

 

은행(bank)이라는 단어는 의자(bench)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banco에서 유래했다. 당시 이탈리아 은행의 비품이라곤 의자와 책상, 그리고 금과 은을 측정하기 위한 저울이 전부였다. 따라서 파산을 의미하는 bankruptcy는 원리금을 돌려받지 못한 고객들이 그런 은행에 몰려가서 의자를 대려 부수었다는 의미다. (95)

 

1492년 로렌초가 죽은 그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바야흐로 이탈리아를 통하지 않는 신항로가 확보됨에 따라 동방무역의 주도권은 이탈리아의 해안도시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넘어가게 된다. (103)

 

메디치 가문과 푸거 가문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가족기업은 결국 4대를 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이 세상의 대부분의 기업들은 '가족기업'인데 가족 기업이 영구적으로 번영하려면 '가족'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기업이나 중기업의 전형적인 문제는 높은 자리는 대개 가족 구성원들에게 할애된다는 점이다. (107)

 

가업을 일으켜 가족에게 넘겨주려는 심리는 인간의 자유의 영역이다. 사회가 가족 기업의 경영권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평등의 영역이 아니라 혁명의 영역이다. 혁명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소수에게 혜택을 안겨주고 만다. 그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109)

 

콜럼버스 덕분에 스페인은 해양대국으로 발돋움했고,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탐험하고, 개발하고, 정학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콜럼버스에 영향을 받아 마젤란(1480~1521)과 바스코 다 가마 등이 잇따라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나섰고, 신대륙의 상권을 정부와 상인들이 공동으로 장악했다. (113)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지동설의 입증이 아니라 황금을 위한 것이었다. ... 콜럼버스에게 투자한 이사벨 여왕 역시 숭고한 이상이나 새로운 발견보다는 황금에 더 관심이 많았다. (115)

 

1501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이 인도항로를 개척함에 따라 유럽인들의 요리에 필수적인 향신료가 인도에서 직접 유럽으로 반입되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유럽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 온 사건이었다. (116)

 

신항로의 개척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유럽에는 시장이 발달하게 되고, 상인과 제도업자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금융조직이 발달하고 주식회사가 등장한다. 이를 역사적으로 상업혁명(commercial revolution)이라고 하는데, 16세기 상업혁명은 18세기의 산업혁명의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다. (117)

 

현대 세계를 여는 첫 번째 기술 혁명은 인쇄술이었다. 구텐베르크(1390~1468)가 인쇄기와 활판 인쇄술을 완성한 1455년 이후 약 50년간 인쇄혁명은 유럽 경제와 유럽인의 심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18)

 

인쇄혁명 이후 60년이 지나자 루터의 독일어판 성경이 출판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 성격은 가정 상비품이 되었고 평민들도 성경을 읽었다.... 성경이 인쇄되고 책 읽는 것이 권장되자 거꾸로 인쇄산업과 출판업도 번창해갔다. (119)

 

알렉산드르 6세 굥황이 바티칸의 재정을 탕진하고 상망하자, 뒤를 이은 율리우스 2세 교황은 교황청에 재정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1506년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에게 그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도 맡겼다. 1513년 레오 10세 교황(1521년 마틴루터를 파문했다)이 즉위했을 무렵 교황청은 거의 파산직전이었다. 레오 10세 교황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서 미켈란젤로와는 어릴 때 함께 자랐다. 레오 10세는 부족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고전적인 수법을 동원하기로 했다. 다시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 지역의 면죄부는 푸거 가문이 맡았다. 면죄부를 대규모로 발행하자 마틴 루터는 면죄부 발행에 반대하고 그 폐해를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입구에 붙이고 공개토론을 주장했다. 원래 루터는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이 95개조는 즉각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배포되면서 메마른 들판에 종교개혁의 불씨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던 것이다.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곧 다양하게 변형되어 루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도미노처럼 다른 개혁운동을 촉발시켰다. (120~121)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18세기까지 유럽인의 세계관은 종교적이었다. 의식주 같은 일상생활, 결혼, 시간개념 등도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다. 정치이론의 기초도 왕권신수설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에는 세상을 세속적,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이 싹텄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도록 불을 댕긴 것이 바로 과학혁명이다. 처음에는 천문학과 물리학에 변화가 있었고, 그것은 정신혁명으로 연결되었다. (122)

 

기업 또는 회사라는 용어 중에서 company '함께'라는 전치사 com ''이라는 뜻의 라틴어 'panis'의 합성어다. "한솥밥을 먹는다"와 같은 의미다. enterprise는 수행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entreprendre에서 나왔다. cooporation '신체'를 의미하는 라틴어 corpus 나온 말로 법인, 즉 주식회사를  인정한다는 firm '안정적이라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firmus에서 나온 말이다. (124)

 

17세기에는 네델란드의 튤립 투기가, 18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수탁회사 투기사건이 터졌다. 천재 아이작 뉴턴도 남해회사에 투자했다. 뉴턴은 초기에 100퍼센트의 수익을 올리고 주식을 팔았으나 참지 못하고 다시 사서 보유했고 결국 버블이 터지는 바람에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그리고는 "천체의 움직임은 센티미터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는데 주식시장에서 인간들의 광기는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37)

 

조시 산타야나는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투기와 거품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일본의 부동산 붐, 1990년대 전세계적인 IT열풍 등으로 이어졌고, 뒤따라 경기침체라는 깊은 후유증에 시달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금융의 재앙에 휘말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금융의 역사는 과거의 경험들로는 예측할 수 없는 이례적이고 극단적인 가격의 변동으로 가득하다. (138)

 

산업혁명 초기의 기술이 과학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다. 계몽주의가 그 역할을 했다. ... 계몽주의는 인간의 지성, 이성을 모든 판단의 중심에 내세우고자 하는 사상이다. ... 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고, 지식과 자유와 행복이 합리적 인간의 목표라고 보았다. (139)

 

베이컨에게 있어서 '지식의 목적'은 형이상학적 증명이나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 아니라, 인류의 생활 여건 향상이었다. (139)

 

계몽주의 사상의 중심 개념은 세 가지다. 1. 자연 과학을 인간 삶의 모든 면의 탐구와 이해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이 합리적, 비판적, 과학적 사고방식에 만자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와 충돌했다. 2. 인간 사회에 있어서도 자연법칙과 같은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과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3. 계몽사상가들은 사회의 개선, 좀더 나은 인간의 창조, 즉 진보를 믿었다. 계몽주의는 소수 엘리트에게 한정된 사건이었지만 결국 산업혁명에 이르는 불씨를 만들었다. (141)

 

계몽주의가 진행될수록 그 자체 내에 쇠퇴 요인이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종교를 찾으려는 이신론(理神論)은 개인의 위안과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또 추상적으로 이성을 너무 강조함에 따라 그와 반대되는 정신이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낭만주의로 알려진 문화운동으로 넘어가 흥분과 감동의 세계를 추구했다. 계몽주의와 18세기의 합리주의 및 물질적 유물론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낭만주의는 개인과 개성과 주관, 비합리성과 상상력과 환상, 자연스러움과 감성과 환상, 그리고 초월성 등을 강조했다. (142)

 

 

3부 자본의 시대 / 1776~1883

 

1776년은 인류 역사에서도 경영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다.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했다. ... 제임스 와트와 매슈 볼턴이 개량형 증기기관을 완성하고 공장에 설치한 것은 1776년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의 힘 대신 처음으로 증기기관의 동력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1776년 독립전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13년 후인 1789년 프랑스혁명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145)

 

미국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은 독립정신을 ', 자유, 그리고 행복(life, freedom, happiness)'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여기서 행복이란 물질적 풍요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도입되는 순간이다. 제퍼슨의 이상은 프랑스혁명이 내세운 구호, 자유, 평등, 박애로 이어졌다. 시민혁명(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은 물자를 직접 생산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형세를 낭비하는) 왕과 귀족과 성직자들의 전통적인 권위에 반발하여 무력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분야는 랭커셔 지방의 면직물 공업과 요크셔 서부의 웨스트 라이딩 지방에서 발달한 모직물 공업이었다. 모직물 공업이 발달하자 원료인 양모의 수요가 급격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양을 사육하는 목장을 만들기 위해 영주나 부농들은 온갖 가혹한 방법으로 농민들로부터 경작지와 공동 토지를 빼앗았다. 때문에, ()이 인간을 몰아낸다"는 말이 생겼다.

 

18세기 말에는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수요가 급증하여 근대적인 농업의 개량 즉, 자본제적 대규모 농장경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에 따른 농장 확대를 위해 진행된 또 한 차례의 인클로저 운동(공동이용이 인정되던 토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지임을 명시하는 것) 1801년 의회에서 법률로 제정됨으로써 급격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시골의 농지에서 쫓겨난 수많은 농민들은 도시 빈민이 되어 배회하게 되었고,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 도시에는 당시로는 대규모인 백여 명 정도의 노동자를 공요한 매뉴팩추어(manufacture, 수공업 공장)가 곳곳에 등장했다. (148)

 

스미스의 경제학은 시민사회의 생활원리였다. 그때까지의 봉건경제와는 다른 자본주의 경제학이었으며, 절대 군주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 스미스는 부를 물질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부의 생산을 노동의 생산력에서 구했고 부를 증진시키는 방법을 노동의 분업에서 찾았고, 그 기초 이론을 확립했다. 또한 스미스는 산업의 자유, 통상의 자유가 보장될 때 노동자의 고용이 극대화되고, 연간 생산물이 증가되고 따라서 국부는 증대된다고 보았다. ... 스미스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고 자연적 자유제도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자유방임이라고 한다. .... 스미스는 자유방임에 의한 생각의 증가가 사회정의라고 주장했다. (150)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면, 자유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에 최선이 되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애덤 스미스가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면'이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이기심(selfishness)으로 생각하거나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스미스가 시장경제의 원동력으로 강조한 것은 '자기 사랑(self-love)'이지 이기심이 아니다. 이기심을 법을 지키지 않는 무분별한 탐욕인 반면, 자기사랑은 법을 지키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151)

 

포드는 부품의 호환성뿐만 아니라 작업자의 호환성도 실현한 것이다. (154)

 

중세가 막을 내릴 즈음 수공업자조합, 즉 길드가 오히려 반자동화 운동에 나섰다. 1707년 독일의 뱃사공 조합원들은 숲 속에서 드니 파팽을 죽인 후 그가 만든 세계 최초의 증기선을 파괴해 버렸다. 실제로 증기기관이 선박의 동력으로 이용되기까지는 그 뒤로 한 세기가 더 흘러야 했다. (155)

 

프랑스는 1848년 노예제를 폐지했고, 포르투갈은 1858년 네델란드는 1863, 그리고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로 2세는 1864년 농노를 해방했다. 노예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미국이 남북전쟁을 치른 것은 1861~1865년이었다. (157)

 

뉴턴에 있어서 원인이란 '운동을 일으키는 물체에 가해지는 힘'이었다. (157)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1862)>을 통해 "아는 것이 없어, 다시 말해 배운 것이 없어서 빵을 훔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교육을 시키지 않은 사회의 책임이다."라고 강조했다. ....의무교육 제도가 확산된 것은 위고의 소설 덕분이었다. (159)

 

오언은 인간의 성격형성이론에 공헌했고, 협동조합이나 사회주의이론을 호가립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공장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는 일종의 협동조합주의를 주창하고 또한 실천했다. 오언은 자본 생산성의 향상에만 골몰한 사회에 대해 최초로 반성한 사람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전신으로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오늘날 논의 되고 있는 것과 같이 마르크스의 후예들이고, 다른 하나는 오언의 공동체주의에서 출발한 것이다. (160)

 

<백과사전>의 목적은 기존의 모든 장인들의 지식을 집대헝하고 체계화하여 도제가 아닌 사람들도 기술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었다. (163)

 

수공업장인 중심에서 기계 중심으로 생산방식이 변하게 되자 기게의 구입과 공장의 건설에 필요한 자본을 가진 자본가들이 순식간에 경제와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64)

 

기계의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은 영국이 노동자들이 1811년 정체불명의 지도자 러드의 주도 아래 집단을 조직하여 스스로를 러다이트(Luddites)라고 부르면서 영국 각지에서 기계장치를 파괴하고 돌아다녔다. .... 당시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의 영향으로 실업자가 증가했고, 임금은 체불되었으며, 물가는 급등했다. .... 수공업자들은 실업과 생활고의 원인을 기계의 탓으로 돌리고 '기계파괴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169)

 

철도는 산업 혁명을 일으킨 진정한 혁명 요소였다. 그 이유는 철도가 새로운 경제의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적 지리(mental geography)를 급속히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170)

 

앤드류 카네기..."사업가는 인생을 2기로 나눠, 전반기에는 부를 축적하고 후반기에는 축적되 ㄴ부를 사회복지를 위하여 투자해야 한다는 신ㄴ념을 피력했고, 부자로 죽는 것은 치용스럽게 죽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경영자의 참다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유명한 묘비명도 남겼다. "여기 자신보다도 더 우수한 사람을 자신의 부하로 삼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아는 한 인간은 누워있다. (187)

 

미국은 남북전쟁(civil war 1861~1865) 이후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20세기 미국의 공업 생산력 성장은 유럽이 이룩한 성과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193)

 

산업혁명은 경제혁명인 동시에 사회혁명이었다. 농업사회의 경우 영국 사회는 귀족을 포함한 지구계급과 농민이라는 계급 외에 산업 부르주아와 임금 노동자라는 두 계급을 새로 탄생시켰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직배계급인 지주계급을 비롯해, 3개의 사회계급이 존재하게 되었다. 귀족으로서 상류계급이었던 지주와 중산계급인 부르주아는 둘 다 유산계급이 되어 서로 이해관계가 맞았다.

 

1833년 영국의 공장법은 9세 이하의 아동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13세 이하 아동의 노동시간을 1주에 48시간, 성인은 하루 노동시간을 12시간으로 정했다. 1847년 공장법이 개정되었는데 부녀자와 18세 이하 아동의 근무시간을 1 10시간으로 규정했다. (194)

 

산업혁명 이전 농업사회에서는 농업노동 자체가 일상생활과 축제 그리고 여가생활과 통합되었던 것에 비해, 이제는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임금노동, 즉 근로시간과 비근로시간과의 구분이 명확해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로서는 당연히 노동시간의 단축을 요구하게 되었다. (195)

 

20세기 초 JP모건은 "어떤 사업을 하려면 그 분야에서 1위나 적어도 2위가 되지 않으면 이익을 얻을 수 없다. 3위 이하는 소용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훨씬 뒤, 이 말은 피터 드러커에 의해 1980년대 새로 GE의 회장이 된 잭 웰치에게 전해졌고, 웰치는 그 말뜻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다. 1981년 웰치는 GE의 회장이 되었다. 취약한 사업부문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드러커에게 자문을 구했다. 드러크는 오히려 웰치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다.

"지금까지 이 상업을 안하고 있었다고 합시다. 지금 이 사업을 시작하겠어요?"

"만약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 사업을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질문은 간단했지만 매우 큰 힘을 발휘했다. 웰치의 주조조정 정책, GE의 여러 사업부분 중 1,2위를 하지 못하는 부분은 포기한다는 정책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217)

 

미국의 19세기 후반 생산 현장의 경영관리자의 최우선 과제는 노동자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이었다. 경영자는 노동자를 신뢰하지 않았고, 노동자 측에서도 경영자를 신뢰하지 않았다. (230)

 

회사는 창업자가 사망하면 자동적으로 해산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이나 전문경영자에 의해 존속된다. 따라서 회사는 죽지 않는 인간 즉, 법인으로 취급되었다. ... 19세기 중반 철도 사업은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규모가 컸다. ... 따라서 초기의 철도경영자는 경영관리에 필요한 새 기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들은 운임과 운행 스케쥴을 표준화하고, 수백 마일이나 되는 열차의 운행을 동시화하고, 새로운 업무를 부서별로 분업화했다. (232)

 

산업사회가 된 곳은 예외 없이 '핵가족', '대중교육', '거대기업'이라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핵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고, 공장노동에 순응하게끔 집단으로 학교 교육을 받고, 사기업이든 공기업이든 대기업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다. (233)

 

1845년 엥겔스는 영국의 산업화 과정을 관찰하고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60~80년 전에는 모든 나라가 비슷했다. 작은 도시들, 소규모의 단순 작업, 많은 농부들이 있었다. 이제는 350만 인구의 대도시, 거대한 공장의 도시들, 기계로 생산하는 사업체, 밀집해서 살고 있는 도시민들, 한 도시의 3분의 2가 공장에서 일하면서 전혀 다른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와는 다른 도덕과 욕구를 안고 사는 전혀 다른 나라이다." (244)

 

마르크스 경제사항은 철학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헤겔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은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 인간 사회는 원시공산사회-->봉건사회-->자본주의 사회-->사회주의 사회라는 변증법적 도식에 따라 발전하며, 각 시대는 그 내재적 모순에 의해 붕괴되고 새로운 제도로 이행하므로, 자본주의 사회도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에 따라 필연적으로 소멸되어, 결국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로 옮겨갈 것이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역사의 필요성에 따라 등장했으므로 조만간 역사적으로 그 수명이 다하여 붕괴할 것이고 이상적인 사회주의가 건설된다는 것이었다. (245)

 

새로운 중간계층인 생산기술자들의 등장을 프레더릭 테일러는 보았지만 마르크스는 보지 못했다. 특히 인간자본이라는 주요개념을 인식하지 못하고, 노동과 자본을 단지 기계적으로 구분했다. 따라서 잉여가치의 창출도 노동과 자본, 기술, 경영관리의 복합적 산물로 보지 않고 단지 노동자의 기여로만 생각했다. (245)

 

결론적으로 마르크스 사상과 학설은 기계의 등장과 자본의 집중, 일부 천민자본가의 착취와 궁핍한 실직 노동자가 일시적으로 불균형의 상태에 있던,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1820~1880) 분석을 토대로 노동자로 하여금 자본가를 타도하라고 선동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246)

 

일이라는 것은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있었지만 일(노동)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작업자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더 오랜 시간 일하거나 더 열심히 일하는 것, 즉 노동투입의 증가뿐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19세기의 모든 경제학자들, 기술자들, 노동자들, 그리고 마르크스 역시 그런 신념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노동생산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일러는 일하는 방식을 과학적으로 바꾸면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작업에 과학적 지식을 적용한 결과 노동생산성은 실제로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다. (251)

 

 

4부 노동의 시대 / 1881~1991

 

당시 노동자 문제를 인간적으로 해결해보겠다는 테일러의 생각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지식의 역사에 있어 테일러보다 더 큰 영향을 준 인물도 드물지만, 테일러만큼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잘못 알려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토플러는 <3의 물결>에서 테일러를 생전에도 사후에도 프로이트, 벤저민 프랭클린 등과 나란히 칭송받았다고 했으나 사실은 테일러가 살아 있을 때 미국사회는 그에게 비판적이었다. (259)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본 테일러의 죄는 "세상에는 숙련을 요하는 작업은 없다"고 한 테일러의 주장이었다. 테일러는 육체노동에는 단순한 작업만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정한 방식대로 작업하는 노동자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생산성을 올릴 수 있으며, 그 결과 일류시민(first class man)이 되어 '최고의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테일러가 활동하던 시대에 사회적으로 막강한 노동조합들은 정부 소유의 병기창과 조선소였는데, 1차 세계대전까지는 미국의 모든 무기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이러한 노동조합들은 직업별 독점조합으로 중세의 길드와 유사했다. (260)

 

회원들은 작업에 대한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했으며, 작업 내용에 대해 비노조원과 애기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작업은 연구 분석될 수 있고, 또한 작업은 일련의 단순 반복적인 동작으로 나눌 수 있고, 각 동작은 올바른 방법으로 주어진 시간 내에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여 수행될 수 있다고 하는 테일러의 주장은 폐쇄적인 노동조합에게는 치명적 공격이었다. (260)

 

테일러는 공장에서의 경영권은 소유를 기준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우월한 지식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전문경영자를 요구했던 것이다. 전문 경영자는 19세기의 자본가들에게 있을 수 없는 과격한 이단이었던 것이다. (260)

 

테일러를 자극한 것은 능률향상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 소유주를 위해 이익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테일러는 생산성의 과실을 가장 많이 가져가는 것은 소유주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갖고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소유주와 노동자', ,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가 다 함께 생산성 향상에 관심을 갖고 지식을 작업에 적용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261)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의 핵심은 적정한 일과를 기준으로 계획적인 생산을 하는 과업관리 task management였다. 과업관리를 통해 근로자의 공정한 하루 작업량(a fair day's work)을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임금도 합리적으로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생산을 계획적으로 관리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일러는 노동자를 일류시민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261)

 

테일러는 태업이 생산성 저하를 가져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태업을 방지함으로써 노사간에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각종 태업을 중단하고, 노사관계를 개선하고 경영자측과 친밀하게 협동하고, 경영자측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협조를 받으면서 최선을 다해 최대속도로 작업을 하면 각 노동자 및 각 기계당 산출고를 평균 2배 정도 증가시킬 수 있다. 1900년대초 미국 및 영국에서는 여러가지 개혁론이 주창되고 있으나, 번영을 촉진하고 가난을 없애며, 고난을 적에 하는 데 있어서 태업 방지보다 효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은 없다. (263)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법에서 태업을 가장 중요한 방해요소로 보았듯이, 열정이라는 조직문화를 뿌리 내리기 위해서 제거해야 할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얼마 전에 로우 업무 환경과 관련한 책을 보고 '비방' 또한 제거해야 할 문화적 요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페이용의 경영관리론

기술활동, 영업활동, 재무활동, 보전활동, 회계활동, 관리활동... 페이욜은 관리활동을 별도로 구분하고 기업경영에 있어 중요한 활동이라고 강조했다. 페이욜과 테일러는 기업이라는 같은 대상을 다루었지만 접근방법은 서로 달랐다. 테일러는 공장의 하위직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페이욜은 경영자로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267)

 

산업사회를 뒷받침하는 세 개의 기중은 소위 3S이다. 표준화(standardization), 전문화(specialization), 단순화(simplification)이다. (268)

 

1913년 봄 디트로이트에 하이랜드파크 공장을 건설하면서 포드의 천재성이 다시 한번 발휘됐다. 작업자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대상인 자동차가 이동하는 이동식 조립라인(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272)

 

포드가 자동차 가격의 인하로 노동자들도 자동차를 살 수 있도록 한 것은 사치품의 대중화를 달성한 것이다. 사실 포드는 처음부터 마차를 타고 다니던 고소득층이 아니라 일반 시민을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 (272)

당시로서 블루오션 전략

 

포드자동차 종업원의 행동원칙과 고객서비스 원칙을 자서전 <나의 인생과 일(1926)>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밝히고 있다.

1. 미래에 대한 공포심도, 과거에 대한 자만심도 가지지 말 것.

2. 부당한 경쟁을 하지 말고 어떤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데 뜻을 둘 것.

3. 이윤은 서비스의 결과이므로 이윤을 우선시하지 말 것.

4. 제조업이란 가능한 최저의 원가로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것이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것. (273)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 대학 교수는 1997 <혁신가의 딜레마>에서 혁신을 존속성 혁신(sustaining innovation)과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으로 나누었다. 존속성 혁신은 기존 고객이 요구하는 성능을 충족시키는 혁신이고, 와해성 혁신은 기존 고객이 요구하는 성능은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전혀 다른 성능을 요구하는 고객의 욕구에 맞춰 진행되는 혁신을 말한다. 존속성 혁신이 지금 존재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다면 와해성 혁신은 새롭게 떠오르는 내일의 고객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다르다. (292)

 

기업들은 고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충실하게 지켰다. 하지만 이런 경영방법이 때로는 비능률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성공기업의 딜레마이다. 흔히 말하는 고객밀착이야말로 우량기업들이 실패하는 주요 원인이다. (293)

 

힐이 창조한 것은 '효용'이다. 힐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우편업무가 시민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우편서비스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은 효용, 가치, 그리고 경제적 특성을 바꾸는 '기업가적 전략'을 추진하는 경우 언제나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이다. (296)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보여준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는 새로운 기계적 발명을 한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의 효용에 초점을 맞추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낸 것이다.

 

조직의 계층구조의 원칙은 조직의 구조가 피라미드형의 계층제를 형성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계층제란 조직의 상하계층에 따라 상위자와 하위자의 역할이 차례로 배령되는 역할체계를 말한다. 계층제의 두 가지의 큰 원칙은 '명령일원화의 원칙' '감독범위의 원칙'이다. 명령일원화 원칙은 하위자는 항상 한 사람의 직속 상위직으로부터 명령과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312)

 

1914년 포드는 임금을 2배나 인상해주면서도 자동차 가격은 오히려 인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정으로 포드는 자신이 인정 넘치는 고용주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노동조합의 결성을 피하면서 수공업 생산방식의 자동차회사들을 코너로 몰아붙였다. .... 임금이 늘어나자 당연히 이직률은 떨어졌고, 돈을 벌어 고향이나 농장으로 되돌아 갈 꿈을 버리고 포드 자동차 공장을 평생의 직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 마음은 간사한 면이 있다. 포드 자동차를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자 이제는 자신들의 근로조건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열악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공장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근로자들은 근로조건과 근로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스트라이크를 하기 시작했다. .... 이러한 것들이 대공황 시기(1929~1939) 자동차 산업에 포드가 그렇게 싫어했던 노동조합이 성공적으로 출현하게 된 조건이 되었다. (334)

 

반기업 정서의 뿌리는 고대사회에서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교회의 가르침, , 이자 금지와 돈놀이로 부자가 된 사람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 .... 반기업 정서의 또 다른 뿌리는 책임과 결정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심리에서 찾을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상황을 1941년 자신의 첫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제목으로 삼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가 아노미에 빠지고 너무나 많은 자유를 쟁취한 젊은이들은 그 자유를 주체할 수 없어, 자신들의 자유를 떠맡아서 좋은 결정을 내려줄 사람을 요구했던 것이다. (342)

 

메이요...호손공장 실험...이처럼 다른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호손현상이라고 한다. 메이요의 결론은 객관적인 생산조건뿐만 아니라 작업자에서 종업원의 주관적, 사회적, 충족요건을 만족시켜 작업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공장은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350)

 

한나라 경제상황이 악화되어도 터무니없는 고가품과 사치품의 수요가 줄지 않고, 오히려 값이 비쌀수록 수요가 더 늘어나는 현상을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라고 한다. .... 1889년 시카고에서 쓴 첫 번째 저서 <유한 계급론>은 베블런의 대표적인 저서로 한 나라의 경제상황이 악화되어도 터무니없는 고가품 수요가 줄지 않고, 고급품의 값이 비쌀수록 수요가 더 늘어나는 현상을 부유층의 과시욕 때문이라는 사실을 관찰했다. (377)

 

 

5부 지식의 시대 / 1993~21세기

 

포드 배당금 지급 유보... 1917년 닷지형제를 중심으로 한 소송...미시건주 법원은 "영리 목적의 회사는 원칙적으로 주주들의 투자수익을 위해 조직되고 운영된다"고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헨리 포드가 개인의 돈을 사용해서 공익 목적의 사업을 하는데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겠으나 회사의 돈을 사용해서 그런 사업을 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회사도 자선이나 사회사업을 위해서 지출을 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지출을 함에 있어서는 일정한 장기적인 사업상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여기서 '장기적인 사업상의 이유'란 곧 회사 수익의 극대화와 그로 인한 주주들의 부의 증대를 말했다. (399)

 

20세기 중반...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사고방식은 자유방임주의 경제학과 사회적 다윈주의였다. 자유방임의 경제학에 따르면, 기업이 자신의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면 공익은 저절로 달성되고 따라서 별도의 사회적 책임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사회적 다윈주의가 주장하는 적자생존의 사상에 따르면 실패한 기업 또는 실패한 개인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당연히 실패할 만한 요인이 있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406)

 

우리가 아는 바대로 현대 경제에 있어 생산성 증가는 결코 육체노동자에 의해 달성될 수가 없다. 증가된 생산성은 언제나 육체노동자를 대신해 다른 것을 상요한 결과이다. 그런 대체품들 가운데 하나가 자본장비, 즉 기계에너지다. 그것이 자본 생산성 시대를 열었다. ...다시 말해 육체노동자를 경영자와 기술자와 전문가로 대체하고, 단순히 일하기 대신에 계획하기로 바꾼 덕분에 생산성이 증가했다. 좀더 열심히 일하기(work harder)에서 좀더 현명하게 일하기(work smarter)로 바뀐 것이다. (457)

 

피터 드러커는 "나는 결코 에언을 하지 않는다. 창 밖을 내다보고 현실을 관찰하고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아직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을 파악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그 미래를 파악하고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일어난 미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식사외의 새로운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가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미래를 예상할 수 있는 몇 가지 현상들과 추세는 파악할 수 있다.

1. 다음 사회는 산업구조가 지금 사회와는 다를 것이다.

2. 다음 사회는 인구구조가 지금과는 매울 다를 것이다. 평생교육산업

3. 다음 사회는 지식이 핵심자원일 것이고, 그리고 지식근로자가 노동력 가운데 지배적 집단이 될 것이다.  (458)

 

 

3. 내가 저자라면

 

<역사에서 경영을 만나다>는 고대에서 현재까지, 경영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기업과 경영자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저자는 지난 역사를 경영의 관점에서 근육의 시대, 과학의 시대, 자본의 시대, 노동의 시대, 지식의 시대 등 5개 시대로 나눈다. 그리고 시대별로 근면과 체념의 경제학, 유토피아, 혁명과 사회변화, 투기와 이성, 대혁명, 산업혁명, 자본가와 투기꾼, 농업사회와 산업사회의 충돌, 과학적 관리법과 노동생산성 혁명, 전기전쟁, 대량생산과 육체노동의 종말, 부의 세력 교체, 기업의 존재 이유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소개한다.

 

저자는 과거를 통해 본질적인 경영의 통찰력을 배우고, 과거의 사례를 통해 미래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한다. 책의 내용은 지겹지 않다. 하지만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보니 이야기의 팔할이 사건 중심이다. 하나의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통찰을 제시하는 부분은 부족하다. 그리고 양적으로도 사건의 개수가 너무 많다. 아마도 시대별로 적당한 숫자의 사건들을 배치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내가 저자라면 저자가 나누어 놓은 시대적 구분을 가져오고 그 안에서 의미 있는 사건들을 추려낸다. 나에게 의미 있는 사건을 나누는 기준은 시대별로 요구되었던 경영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수렵 채집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회 혹은 집단의 경영 방식을 정의한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필요한 중요한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통찰을 더해서 책 천체적인 내용이나 구성이 <경영 방식>이라는 포인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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