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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3일 03시 21분 등록

작가에 대하여

 

조셉 캠벨

 

웹에서 조셉 캠벨이라는 이름을 찾으면, 그는 각종 스토리텔링의 전략적 도구와 함께 검색된다. 대표적인 비교신화학자로서 그가 세계 신화들의 원형을 간파해낸 덕분이다. 사람들은 영민하게도 검증된 텍스트를 찾아내어 기꺼이 받아들였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심지어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도 평소 캠벨을 몹시 존경하였으며 <스타워즈> 제작에는 그의 영향이 컸음을 시인했다.

 

캠벨은 1904년에 태어난 뉴요커이다아일랜드 출신들이 사회의 중하류층을 형성하던 시절임에 반해, 그는 꽤 잘사는 축에 속했다. 종교는 로만 카톨릭이었고 유년기의 학교 역시 카톨릭 계열을 나왔다. 그는 부모와의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릴 때부터 캠벨의 아버지는 아들을 다양한 문화 공간에 데려다주었다.

 

그는 6살때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버팔로 빌의 와이드 웨스트 쇼를 보았다. 이 쇼는 상영한지 2년 만에 천만명 이상의 관중이 봤을 정도로 큰 인기였다. 서부시대의 인디언 정벌을 다룬 내용으로, 당연히 또래들은 말을 타고 달리는 기병대장 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캠벨은 인디언들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다. 악당으로 왜곡된 인디언이지만 그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하는 모습에 연민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기병대장에 당당히 맞서는 기상에 탄복한 까닭일까? 이 쇼가 계기가 되어 캠벨은 뉴욕역사박물관이나 도서관에서 미국 원시 문화에 대해 더 공부하였으며, 그 결과 미국 원시 문화가 기독교적 교리에 매우 흡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것이 캠벨이 비교신화학을 하게 된 첫 번째 계기였다.

 

캠벨의 10대 초기에 1차세계 대전이 있었지만, 그는 별 탈 없이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후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배웠다. 그러나 곧 인문학에 흥미가 생겨 1922년에 콜롬비아 대학으로 편입하여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배웠다. 그가 육상 선수로 활약한 것도 이 시기이다. 0.5마일 레이스는 당시 세계 기록에 불과 0.5초 뒤진 것으로 당시 뉴욕시의 기록을 깬 것이라고 한다. 그는 모이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계주 주자로서의 경험을절정 경험”의 예로 들었었다. 이는 캠벨에게 개인의 능력으로 인한 "영웅" 대접을 받게 된 최초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1924(20)에 그는 가족과 함께 인생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했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배에서 그는 20대 후반의 말끔한 한 인도인 청년을 만났다. 그는 훗날 위대한 사상가가 된 크리스나무르티(1895-1986)였.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시점과 장소, 그리고 캠벨의 생애를 고려하면 이는 운명적 만남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동양철학에 대해 토론하였고, 이것이 캠벨이 힌두와 인도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실제로 캠벨이 모태 종교인 기독교의 한계에 과감히 의문을 품고, <종교는 사실이 아닌 상징>이라는 주장을 과감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이해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은 아서 왕 전설을 연구하여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마침 천운이 그를 다시 유럽으로 이끌었는지, 그는 이 논문으로 특별 장학금을 받아 1927년부터 파리의 소르본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이곳에서 아서왕 전설을 심도있게 공부하였으며 이에 필요한 다양한 언어를 배웠다. 파리는 미국과 다른 유럽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느 천혜의 도시였다. 당시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의 시기였다. 캠벨이 "생의 의미가 아닌 살아있는 경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는(Follow your bliss)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캠벨은 그 곳에서 같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 화가 피카소 등을 연구하였고,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였다.

 

캠벨은 파리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불과 1년만인 1928년에는 뮌헨 대학으로 가서, 산스크리트와 인듀-유럽어쪽의 언어들을 공부하였다. 독일에는 괴테와 프로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뮌헨에서 캠벨은 괴테와 토마스만 등의 문학과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섭취했다. 프랑스와 독일에 머무는 동안, 캠벨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불어와 독어를 익혔다고 전해진다. 미국으로부터의 물리적 거리감은 캠벨에게 사유의 자유를 확장시켰다. 특히 뮌헨 시절, 크리슈나무르티로부터 촉발된 불교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는 이 시점에 가톨릭 신자로서의 삶을 버렸다.

 

그는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1929년은 세계대공황이 시작되던 해였다. 그는 경제적 사정으로 할 수 없이 원치 않는 귀국길에 올랐다. 결국 박사학위를 포기한 채 취직 자리를 알아보려 하였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는 수십통의 이력서를 썼지만 어디에도 취직하지 못했다. 그는 시대의 우울을 극심하게 알았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캠벨은 조각가 지망생이던 여동생 앨리스와 함께 우드스톡으로 갔다. 그 곳의 숲속에 있는 작은 집을 빌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극빈한 와중에 독서에만 심취하기로 하였다. 이 시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캠벨의 독서는 무려 5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이 시기 동안, 캠벨은 대학 때부터 익힌 재즈 색스폰을 밴드에서 불고 그 댓가로 연명할 돈을 벌었다. 그러나 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법. 캠벨은 가난이 마음의 빈곤으로 잠식해들어오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의 탐독이 역사의 캠벨을 만들었다. 관심있는 분야가 생기면 그에서 파생되는 책을 닥치는대로 읽어가는 캠벨식 독서법은, 그를 시대의 지성으로 재탄생시켰다.

 

캠벨은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면서 1933년에야 겨우 모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고, 1934년에 사라 로렌 대학의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그 곳에서 예전 제자였던 진 에드만과 결혼하였다. 에드만은 마사 그레이엄의 제자로 훗날 뛰어난 일류 무용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들은 아이를 가지지 않았지만 캠벨이 말한 "반드시 느낌이 말해주는" 삶의 동반자였다. 캠벨은 1972년에 사라 로렌스 대학을 은퇴할 때까지 38년간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의 80세 생일에는 1000여명의 지인과 제자들이 생일 파티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는 1987년에 식도암 합병증으로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949년에 초판된 것이다. 그는 비교신화학자로서 세계 각국의 신화 간에 드러나는 상사성에 주목했다. 즉 지역적, 시간전 경계를 넘어 인간사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고 반복되는 원질신화를 체계화하였다. 바로 이 점이 모든 스토리텔링의 구심점에서 조셉 캠벨을 찾을 수 있는 이유이다.

 

캠벨은 더 나아가, 신화의 상사성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던지는 화두를 놓치지 않는다. 신화의 상징성이 왜곡되는 것을 경계하고 우리 시대의 영웅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이 점에서 캠벨은 마치 영웅의 계시록을 쓴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캠벨 그 자신이 메시아이자 영웅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캠벨은 종교나 선구자의 감투를 마다한다. 그가 박사학위의 권위에서 초탈하고 우드스톡으로 귀의한 순간, 그는 부처가 되기 보다 보살이 되기로 하였다. 그는 "너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그러니 너의 신을 나에게 강요하지 마라."는 역지사지의 주장을 스스로도 지켜냈다. 그의 탈권위는 오히려 독자들에게 신화의 보편성을 납득시키며 그의 미래 제안을 조용히 따르게 한다.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머리말

 

5

종교 교의에 녹아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ㅁ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를 상대로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 큰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는 상징으로 분식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저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1)   상징의 문법을 터득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2)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 à 그 유사성이 한 눈에 두드려져 보이고, 여기에서 유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이러한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을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è  나는 캠벨이 여러 부인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든다.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13

즉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한느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 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15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정신 의학에서 떠오른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다. …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ㅇ르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sbdyur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서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7

이원일체 따라서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불행한 아버지는 다른 현실로부터, 자궁 안에서와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이 지상의 천국을 침범한 최초의 틈입자다. … 원래 <나쁜 것>, 혹은 <어머니가 없는 상태>에다 쏟던 공격의 화살을 아버지에게로 돌린다. 유아가 죽음과 사랑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 행위는 오이디포스 콤플렉스

è  왜 죽음의 충동이지?

18

어머니로부터 성적 충동을 분리시키고, 아버지에 대한 질투

 

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19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ㅇ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보낸다. … 알라딘의 동굴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는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자아 발달의 위기는, 민간 전승이나 꿈의 언어에 노련한 전문가의 감시안 앞에서 저질러진다.

 

22

이러한 제의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통과 제의는 이런 단계의 마음가짐이나, 애착이나, 생활 패턴으로부터 심적으로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형식상으로 특이하고 극히 가혹한 단절의 체험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통과 제의 후 느슨한 휴지 기간 à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입문자.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3

인간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è  사랑은 어느 나이에나 가능한 것 아닌가? 사랑은 어른의 놀이.

 

이 이미지들이 신화와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꿈을 통해 내부에 나타나게 된다. 그래야 우리의 에너지가 심해의 바닥이나 진부하고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유아의 놀이방의 동화책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염증이 이미 심장을 죄고 있었을 테고 한때 사랑의 유혹이었던 지복의 약속으로 부르는 것은 삶이 아니고 죽음일 터이다.

 

28

권력 망자(세습에 의하지 않고 힘으로 정권을 잡은 참주)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저승, 전설,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집안,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심성, 우정과 도움을 빌미로 내민 그의 손길에 시들어버린 생명인지도 모른다.

è  나는 권력망자인가?

 

아무리 세상에선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사자다.

 

T.S.Eliot the waste land

여기서는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한다.

산 속에는 적막조차 없이

마른 천둥만 우르릉거리고

산 속에는 고독조차 없는데

갈라지 흙담 문간에

비웃으며 으르렁대는 시뻘건 얼굴들

 

29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이 있어야 한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 여신의 복수만인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이며, 항구 불변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죽음이 승리한느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30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ㅇ르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 <변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과정은, 회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이긔 무의식이다.

 

30

요컨대,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않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르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융의 소위 <원형심상>과의 동화작용을 시도한다.

 

31

이러한 <영원한 꿈들>은 악몽이나, 고통받는 개인의 광기에서 나타나는, 마구잡이 상징적 형태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33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34

우리는 어둡고 궂은 길을 가야 마침내 평화의 강, 혹은 우리 영혼의 목적지로 통하는 탄탄대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양이지요.

 

35

귀가 안팎으로 여린 사람에게만 들리는 희미한 소명의 모험길로도 들어설 뜻을 세운 사람답게, 예사롭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초라하고 질척한 거리>를 홀로 가야 했다.

 

37

극히 어렵고 위험한 작업인 자아 발견과 자아 발전을 꾀하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바다 건너편에 정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교적 무의식적으로 시민 및 종족으로서의 정례를 따름으로써 대부분 위험 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역시 구원ㅇ르 받기는 마찬가지다. 대속자들에 의해 아득한 옛날, 인류에게 주어져 수천 년간 계승되어 온, 사회의 상징적 도움이라는 미덕, 통과 제의, 은총으로 입은 성사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38

실타래 사소한 것일수록 손쉬운 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 다이달로스는 à 장인,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 정의의 정상적인 결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태표해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2 비극과 희극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

 

해피 엔딩은 허위 진솔로 경멸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보아온 한, 이 세계에는 하나의 종말, 즉 죽음, 붕괴, 의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던 형태가 사위어감에 따라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비극적 카타르시스 연민과 공포의 체험을 통한 비극 관람자 감정의 순화 또는 정화는, 손발이 잘린 우두신 디오뉘소스를 위한 축제와 비의적 연극의 기능이었던 초기의 제의적 카타르시스(과거의 오점과 독소, 죄악과 죽음의 오염으로부터의 사회의 순화)에 상응한다.

 

비의적 연극에서 명상하는 정신 = 죽을 팔자를 타고 태어난 육체가 아니라, 한 동안 육체에 깃드느 영속적인 생명의 원리와 합일하며, 실재가 허깨비로 분장(고통받는 자와 보이지 않는 원인으로)하고 있을 동안, <인간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던 비극>우리 필멸의 육체를 찢고 해체할 때, 우리들 자신은 바로 그 밑바닥으로 녹아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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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 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쑬의 체험을 구성. 그 기쁨, 구원의 황혹은 바로 그 안에 있다.

 

현대 문학은 우리들 앞에, 우리들 주위에, 우리들 내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담하게 부서진 형체를 직시할 용기와 눈길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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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앤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으로 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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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뚤히고, 오래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3 영웅과 신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분리>, <입문>, <회귀>의 화개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

모세

유태인 민간 전설

 

50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 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51

그러나 영웅이 입문의 모든 시련을 향해 차례로 올라가는 대신, 프토메테우스처럼 단도 직입적으로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폭력이나 기지로서, 혹은 운에 힘입어) 그가 의도하던 세상을 위한 홍익을 손에 넣어버린다면 그가 지닌 힘의 불균형이 부작용을 일으켜, 프로메테우스가 자기의 불경스러운 무의식이라는 바위에 갇혔듯이, -외적인 시련을 당하게 된다.

 

54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영웅 à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

 

 

4 세계의 배꼽

 

48

생명나무, 즉 우주 자체는 바로 이곳에서 자라난다. 생명나무, 즉 우주는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 뿌리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으로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59

이를 발가락으로 그리는 것은, 독수리가 발로 둥지를 짓기 때문이다.

 

62

신화에서는 한 자락 풀잎도 구제자의 모습을 가릴 수 있고, 이 방랑하는 구도자를 구도자 자신의 가슴에 있는 지성소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65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70

공주님, 저를 보살펴주시고, 저를 친구나 짝궁으로 삼아주시고, 공주님의 예쁜 식탁 옆에 안제 해주시고

 

그러나 공주는

이 건방진 개구리가 뭐라고 떠들어대는 거야. 물가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놀기나 하지 뭐, 인간의 친구가 되겠다니, 말이나 될 법한 일이야?

 

71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 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전령관 개구리

전령관의 부름은, 구원 또는 죽음

 

전령관의 등장 = 자아의 각성이라고 불리는 단계 암시, 사춘기의 도래.

 

소명은 언제늬 변용의 신비,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72

프로이트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렁누 동물은 무의식 심층을 상징한다. 여기엔 징그럽고,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지의 혹은 지진한 요소, 원리, 그리고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75

야수의 배에서 들리는 소리는 서른 쌍 정도의 사냥개가 짖으면 내단느 듯한 소리였다. 그러나 야수가 물을 마시자 그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76

고슴도치와 함께 하늘에 이르렀다.

 

77

변형의 때가 무르익은 정신은 끊임없이 이런 전령관을 산출하는데

 

이 세계의 문학 가운데서 모험에의 소명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실례 네 가지 조짐

부처

 

2 소명의 거부

 

소명에 응하지 않는, 조금은 답답한 경우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신성이 그 자식의 적이 된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è  우리 멋대로 살면 안되나? 그러면 과연 어떻게 될까? 정말로 여지없이 신성의 적이 될 것인가?

 

83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다프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 처녀는 부모의 상으로 후퇴하여 거기에서 보호를 받았다. … 정신분석학 보고서에는 이런 위험한 유아기 고착의 사례가 얼마든지 나온다.

è  나는 그 동안, 모든 신화를 꽤나 정치적인 프리즘으로만 봐왔던 것 같다.

 

87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서은 창조적ㅇ니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다소간 일어날 수 있음도 물론이다(신경증, 정신병, 겁을 집어먹은 다프네의 혼비백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격이 이 새롱누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92

얼마를 기다려야 삶을 부정하는 마법을 깨울 힘이 생겨 두 아버지의 분노를 삭일 수 있게 될까?

è  나는 과연, 결혼해야 할까? 캠벨이 말한 느낌이 반드시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야지.

 

3 초자연적인 조력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95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테세우스 아리아드네

단테 신곡 베아트리체, 성모

괴테 파우스트 그레첸

트로이아 헬렌

 

이러한 존재는 자비로운 힘, 즉 숙명적인 보호 세력을 표상하고 잇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 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기원한다.

 

97

나폴레옹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

 

4 첫 관문의 통과

 

106

세계 각 종족의 신화에는, 집단이 거주하는 지역 밖, 한적한 곳에서 만나면 집단의 구성원을 협잡하는 위험한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107

미지의 땅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근친 상간 리비도와 부친 살해의 데스트루도는, 거기에서 폭력의 위협과 가공의 휘험한 환희를 암시하는 형태로, 도깨비는 물론, 신비스러운 정도로 매혹적이고 향수를 유발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이레네스으로 개인과 사회에 다시 투사된다.

 

러시아 농민 숲속의 야성녀

 

109

아르카디아의 신 판 마을 경계 밖의 무방비 구역에서 사는 위험한 존재 중 가장 유명한 고전적 실례. 판은, 실수로 자기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괴롭히는데 이때 인간이 판에 대해 갖는 감정은, 당황, 공포, 그리고 엄청난 경악 같은 것이다. 하찮은 실수 때문에 침입자의 마음속에는 가상적인 위험에 대한 자각이 싹튼다. 이때 침입자는, 공황 상태에서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한다. … 이 관문을 지나면 우주적 근원이라는 성역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112

그제서야 처녀의 팔꿈치와 무릎 관절이 거꾸로 구부러지고 있는 걸 발견한다.

è  진짜 무섭다!!

 

그러나 이 뱀, 즉 메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섬 사람들은 이 뱀은 자기를 본 사람의 친척으로 변한다고 믿는다. 자기 생활권이란느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능 반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113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무모한 영웅이 이 관문 통과에는 실패할 수 있음

 

117

젊은이여,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어찌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인가?

 

태자가 이 물음에 대답했다.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느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ㄴ으 전생의 부처, 바로 그 분이었다.

 

51) 각주 벼락(vajra), 속세의 허망한 현실을 분쇄하는 부처의 영적ㅇ니 힘(불멸의 깨달음)을 의미한느 것으로, 불화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의 하나.

 

하늘에 있으면 땅에도 있다.

 

119

미래의 부처는 그에게 법을 가르쳐 조복시키고, 스스로를 부정하게 한 다음, 숲에서 보시를 받는 정령으로 화신케 했다. 도깨비를 깨우친 태자는 숲을 빠져나와 숲 어귀의 인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가던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120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è  어디서는 자아를 찾으라고 하고, 어디서는 자아를 붙여두고 떠나라고 하고

 

5 고래의 배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 =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

 

122

관문의 통과가 자기 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

 

123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징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예비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사람들 가운데엔 그저 물리적으로 신전 수화자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이렇나 괴물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될 수 는 없다. 침입자가 이 성전으르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è  반성하게 하는 대목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으로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2 입문

 

1 시련의 길

 

129

<어려운 임무> 쿠피도를 찾는 프시케

 

132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39

우리의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응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139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코란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대황천 이난나 여신

142

, 이난나여, 황천의 유령은 완전한 것, 이난나여, 황천의 의식에 대해서는 묻는 것이 아닙니다.

 

발가벗긴 채 이난나는 왕좌 앞으로 인도되었다. 이난나는 공손하게 절ㅇ르 했다 .황천의 일곱 판관, 즉 아눈나키는 에레쉬키갈의 왕좌 앞에 앉아 죽음의 눈길로 이난나를 노렵왔다.

 

143

시련은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에대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원래 시련의 나라를 향한 출발은 초보적인 정복과 예언의 힘을 얻기 위한 길고 험한 여로만으르 표상했다. 이제 영웅은 용을 죽여야 하고 몇 번이로 위험한 ㅈ아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è  미제로 남는 것이 실패는 아니다.

 

 

2 여신과의 만남

 

144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145

그 침대 밑엔느 투버 틴타이, 즉 타오르느 샘이 있었다.

내 맹세코 이르거니와, 여기서 좀 쉬기로 하리라

 

잠자는 여성 = 여주인공,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è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이런 의미가 있을 줄이야

 

152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다.

 

153

악타이온은 성자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è  니체 등에게 영향을 준 여인 살로메, 슈만과 브람스의 클라라 등

è  여인 스스로 영웅이 될 수는 없나? 여자가 영웅인 경우, 신화는 어떻게 변형되는가?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한,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드리게 한다.

 

여성은 감작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154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6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è  노파에게 키스하자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한 이야기. 즉 보는 눈에 따라 다르다. 조루즈 상드의 소설이 생각난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è  베오울푸의 마녀

 

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161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순간의 대변자 햄릿은 그래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 왕비를 차지했을 때 오이디포스가 맛보았던 순진한 기쁨이, 그 왕비의 정체를 알고부터는 심한 정신적 고뇌로 바뀐다. 햄릿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아버지의 도덕적 이미지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햄릿과 마찬가지로 오이디포스도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에 등을 돌리고, 그 근친 상간의 악몽을 주는 사치스럽고, 교정 불가능한 어머니의 세계보다 훨씬 어두운 왕국을 향하는 모험가로 변한다. 삶의 배후에 있는 삶을 찾아나서는 모험가는 그녀의 유혹을 물리치고,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에테르 속으로 날아들어가야 한다.

è  10cm, 버스커 버스커 등의 인디밴드들의 사랑 노래에서, 여성의 있는 그대로 (눈꼽, 통통한 손목 등)을 그대로 좋아한다는 가사가 등장한다.

 

162

이렇게 되면 영웅은 육욕의 여신과 더 이상 순진한 평화에 안주할 수 없게 된다. 여신이, 이 시점에 이르러 죄악의 여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시체 같은 육신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그는 이제 순수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생, , 사뿐만 아니라 자기 적들로부터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순수한 존재, 선의 정수, 부동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원래 타성적이고 추악한 존재인 이 육체의 모든 제약을 떨쳐버리라! 육체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한번 속에서 토한 것을(그대 육체를 토해내듯) 다시 생각하면 혐오감만 더해지느니.

 

166

우리는, 마귀의 무대이며 마귀의 목표이기도 한 이 땅, 시온을 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도둑 무리와 은거하고 있는 이 땅의 초라한 나그네다.

 

4 아버지와의 화해

 

166

하느님의 분노의 활이 굽혀지고 시위에 화살이 걸렸습니다. 정의가 여러분 가슴에 살촉을 겨누고 시위를 당깁니다. 한순간 화살이 여러분의 피를 마시게 하는 것은, 약속도 아니고 은혜도 아닌 하느님의, 노한 하느님의 의지일 뿐입니다.

아버지가 가진 악마적 측면을 노출시킴으로써 뉴 잉글랜드 교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71

여성의 마법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분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è  , 나의 여성은 어디에 있을까?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73

잔인한 아버지는 쌍둥이를 쪄 죽일 요량으로 뜨거운 한증만 곳에다 처넣었다. … 태양은 두 아들이 참 자랑스러웠다. 이제 만족한 것이었다.

è  아버지는 왜 필요하지?

 

갖가지 시련을 다 치른 자를 집안으로 용납하는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주의를 요하는가는,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에톤의 불행한 행적이 잘 그려내 보이고 있다.

è  호부호형

 

177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 되었ㅇ르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옜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한 ㄴ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름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얾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미니가 그때까지 <> <>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여기엔 새로운 경쟁자적 요소가 틈입한다. 즉 아들은 세계를 섭렵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고 딸은 섭렵된 세계 자체가 되는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 상대로 삼는 것이다.

 

181

너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182

토하면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제가 모두 죽는다. 나머지 피는 소년 위에다 뒤집어씌운다. 이대부터 근 한달간, 소년은 사람의 피 이외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단. 이 피는 야밍가라고 하는데 ,야밍가란 이렇나 율법을 만든 신화적인 조상을 말한다.

 

183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먹는 의식적인 행사를 엿볼 수 있다.

 

190

분명히 자기 모순적인 아버지의 신비

 

191

이러한 사실은, 태양의 문을 통해 우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은혜는, 다른 존재를 징벌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벼락의 에너지와 동일함을 뜻한다.

è  제우스가 벼락의 신인 것과 상통한다.

 

비라초카의 특징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하고 감동적인 대목은, 비라코차 고유의 것인 저 눈물이다. 생수는 신의 눈물이다. 여기에서 <모든 생명은 슬프다>는 비관적인 어느 수도승의 통찰은, <과연 생명>이라고 찬탄한느 아버지의 낙관적인 확신 속으로 수렴된다. 자기 손이 창조한 생명의 고뇌를 익히 자각하고 혹심한 고통, 머리를 터뜰니느 듯한 미망의 불길, 자기가 창조한 자기 참해적이고, 쾌락적이고, 분노에 떨고 있는 우주를 생생하게 의식하는 이 신은 삶이 삶을 점화시키는 행위를 승인한다.

 

192

그가 사출하는 정액은 곧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è  이게 무슨 말일까?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 가 없다.

è  인과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순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한느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ㅇ르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업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느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을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느다.

 

성서의 [욥기]에서, 하느님은,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을 거들떠보지 ㅇ낳는>신실한 종의 사람됨을 굽어보긴커녕 오히려 그를 괴롭혔다. 하인들이 갈데아 군병들에게 도둑을 당한 것이나, 아들 딸이 무너지는 지붕에 깔려 죽은 것도 그들에게 죄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다. 욥에게 무슨 허물이 있길래 벌이 내린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정직하고 용기가 잇었으나 더할 나위 없는 불행을 당한 욥은 자기에게 허물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 엘리후는, 욥이 스스로를 하느님보다 더 공명 정대하다는 것은 독인이라고 공격했다.

야훼는, 폭풍 속에서 욥에게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한 일을 윤리적으로 변호할 생각은 없고 욥에게, 하늘에서 하는 식으로 땅에서도 해야 한다면서 자기 존재를 과장해서 말하기만 한다.

 

193

말하자면,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중심에서 비롯되는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느 것이다. 이 범주야말로 [욥기], 전지전능한 야훼에 의해 완전하게 부서져, 끝까지 부서진 형태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에게는, 야훼의 계시가 자기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 욥은, 끔찍한 불가마 안에서 견디는 용기와 전지전능한 신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개념 앞에서 결코 파괴나 굴복당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위대한 계시에도 맞설 수 있음을 증명한 영웅이었다. 우리는 그가 한 말을, 그저 두려움에 떠는 자가 한 말로만 해석할 수가 없다. 그의 말은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으로 <예언된> 것을 능가하느 그 뭔가를 <목격한> 사람의 말이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위로하던 자들은 무색해진다. 욥은 새 집, 새 하인, 새 아들 딸을 상으로 받는다. <그후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대 손을 보았다. 욥은 이렇게 수를 다 누리고 늙어서 세상을 EJSKST.>

è  욥의 이야기는 내가 성서에서 가장 궁금해하던 부분이다.

è  욥에 대한 캠벨의 해석이 꼭 듣고 싶었는데, 여기에서 발견하여 매우 기쁜다.

 

5 신격화

 

관세음보살 존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대자대비로 굽어보시는 주>라고 불린다.

 

196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거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을쏘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만물에는 불성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197

세상이 보살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살이 세상, 즉 연화를 들고 있다. 고통과 쾌락은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가 고통과 쾌락을 깊은 휴면 상태로 구속하고 있다.

è  주객전도! 매우 충격적인 시각이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라고 한느 존재, 그의 형상,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이다.

 

198

양성구유적 성격, 즉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음의 성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남성과 여성의 성격을 두루 갖추는 예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리 생소하지 않다.

è  어떤 영화에서 신은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를 번갈아 내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형태가 이분적이기 때문에 신이 인간의 감각에 맞게 현현한 예이다.

 

199

, 찬양할지라, 거룩하신 이께서 첫 사람을 지어내실 때, 그를 양성으로 만드셨다. 영성을 다른 형태로 후퇴시켰다는 사실은 완전성에서 이원성으로의 타락을 상징한다. 이어서 선악의 이원성이 나타내고, 하느님이 걸으시던 낙원에서의 추방과 낙원의 울타리가 세워졌다는 것은 당연한 순서. 낙원은 <대립적인 것이 공존>하는 곳이었는데, 이제 인간은 이 낙원의 울타리에 의해 하느님에 대한 환상과 하느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200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환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

 

203

즉 그들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세계의 샘은 동일한 것이다.

 

204

이윽고 아버지가 왔다. 그는 미지의 신비로 아이를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비의의 전수자였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평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를 상징한다. 그래서 <살해당한 것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머리를 자르는 습속이 있는 사회(가령 뉴기니아에서처럼)에서는 단순한 복수전이 아닌, 머리 자체를 숭배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뿐만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도 여기에서 비롯되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은 끊임없이 집단 폭력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사회나 종족 집단에서 노인들은 토템 의식이라는 심리적 마법으로 자라나는 아들 세대로부터 자위를 도모한다. 그들은 도깨비 같은 존재로서의 아버지를 연출하는 한편,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어머니임을 아들들에게 보여준다. 새로운 대규모 낙원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낙원은, 아직도 조직적인 공격 계획이 세워지고 있는 전통적으로 적대하던 종족이나 인종은 끼워주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적인 모든 <선한> 요소는 집단의 평화로 수렴되고 <악한> 모든 것은 외부로 투사된다.

è  국가간의 문제를 평화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목표로 뭉뚱그려 바라봐오진 않았나.

 

205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대신 세계를 정화하고 싶어진다. 성도의 율법은 이제 구성원의 집단에만 적용되고, 이윽고, 재수가 없어서 이웃이 된 할례받지 않은 자, 야만인, 이교도, 토인, 혹은 이방인에 대한 성전의 기치가 오른다(양심에 거리끼기는커녕 경건하게 예밸가도 드리는 기분으로 기치를 올리는 것이다.)

 

206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래대 주고 누가 겉올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 너희가 많일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이게마 ㄴ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207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시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08

현학적인 올가미

실제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 à 퇴영적인 효과를 발휘

아버지의 이미지를 토템의 차원까지 퇴영시키기도 한다. 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났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모두 중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지를 확인받기 위해 불려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만만치 않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는 구절을 보아 그렀다. 전문 성직자들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구세주의 십자가는 한 국가의 깃발이라기보다는 민주적인 상징이다.

 

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윤식()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212

어서 야훼꺼로 돌아가!

그분은 우리르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주신다.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살려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주시리니,

우리는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그러니 그리운 야훼님 찾아나서자.

그의 정의가 환히 빛나 오리라.

어김없이 동터오는 새벽처럼 그는 오시고,

단비가 내리듯

봄비가 촉촉이 뿌리듯 그렇게 오시리라.

è  자클린 뒤 프레의 <엘가 협주곡>을 생각하자.

 

213

보살에 대한 첫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 여신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입문자는 남성과 여성은 둘이 아니라 쪼개진 완두의 두 쪽임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화해 과정에서는, 아버지는 성을 선행하며, <>라는 대명사는 말의 방편이고, 지도적 원리로 확립된 부자 관계의 신화는 말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è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는 아브락삭스가 나온다. 이 신은 선과 악의 신이다.

 

두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è  불교가 매우 마음에 든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è  캠벨이 박사학위를 단념한 것과 관련이 있을까?

 

214

삶의 욕망 (불교의 <카마> <욕망>과 일치하는 <에로스> 혹은 <리비도>)과 죽음의 욕망(불교의 <마라>, <적의와 죽음>과 일치하는 <타나토스> 혹은 <데스트루도>, 내부에서 인간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주위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두 개의 추진력이다.

 

그러나 이 두 가르침의 목적은 같지 않다.

정신분석학 à 무의식적으로 빗나간 욕망과 적의 때문에 비현실적인 공포와 애증의 이중 감정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

종교 à 개인을 일반적인 미망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 미망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217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 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른느 것이다. …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 Jivan mukta, 욕심이 없고 대자 대비하고 현명한 사람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218

등은 굽었지만 정신만은 영원히 젊은 선인들

 

222

보살의 세번째 경이로움은, 첫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시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è  어렵다.

 

224

이것은 대립물의 벽이 허물어지고 입문자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낸 신의 시계 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위대한 모순에 대한 진술이다.

 

6 홍익

 

226

영웅이 모험을 쉽게 끝내는 예는, 여러 동화나 육화한 신의 행위에 관한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보통 영웅 같으면 모진 시련을 겪을 터인데도 선택된 자느 ㅂ졀 방해도 받지 않고, 또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 샘은 세계의 배꼽이고, 불타는 물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며, 돌고 있는 침대는 세계의 축이다. 만상이 잠드는 성은 꿈속에서 의식이 도달하는 궁극의 심연이다.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 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곧 죽음이다.

è  일본 만화에서 천신이 지나치게 힘이 막강하게 표현되는 경우, 범인인 주인공이 힘겹게 버티고 있던 괴물 앞에 나타나 어깨만 한 번 밀치는 것으로 물리쳐버리곤 한다.

è  왜 쉬운거지? 쉬운 모험이 재목을 증명한다면, 힘든 모험 끝에 영웅이 된다는 것과는 모순 아닌가?

 

232

우리 모두가 우믜식 속에 간직호가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 그러나 세상을 온통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235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신학의 분위기에서와는 달리, 익살은 철두철미 신화적인 것의 시금석이다. .. 교육적인 미끼 이러한 신학적 교리의 기능은 무능한 지성을, 구체적인 사실과 사상의 덩어리로부터 비교적 순화된 공간으로 이행시킨다. 이 공간에서는, 궁극적인 은혜로 모든 존재(천상적, 지상적, 혹은 악마적인 것까지)는 덧없고 주기적인, 단순한 행복과 불안의 유아적 꿈과 비슷한 상태로 변해보인다. 티베트의 어느 라마 승은 서양에서 온, 이 방면에 생소하지 않은 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어떻게 보면, 이들 신들은 실재하지만 달리 보면 이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è  문맥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게 어떤 상관 관계이지?

 

243

그대가 저 풀을 손에 넣으면,

떠나온 땅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 풀은 우주적인 바다의 바닥에서 자라고 있었다.

 

248

육체의 불로불사를 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동자를 크게 해서, 육체와 그 종자인 개성이 더 이상 시야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로불사는 현실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의 경지인 것이다.

è  모이어스와의 인터뷰에서 모이어스, 당신은 당신 그 자체입니다. 라고 말한 대목과 상통한다.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250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

이것은 최고의, 그리고 궁극적인 시련이다. 영웅의 시련일 뿐만 아니라 신 자신의 시련이기도 하다. … 이 세상의 모든 형체는 불가해한 신비, 즉 원자를 조립하고 별들의 궤도를 통제하는 권능을 가진 우주적 힘을 반영한다.

 

생명의 원천은 개인의 핵이며,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내부의 뚜껑을 열어젖힐 수 있을 때 그렇다. 게르만족의 이교 신 오딘은 이 무한한 어둠 속의 지식을 꿰뚤어볼 작정을 하고, 고난의 시련을 겪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꼬박 아흐레 밤을 걸려 있었던 듯하다.

 

251

그러나 기적 중의 기적은 폭발한 뒤에도 재생되고 부활하여 참 존재의 광휘로 영광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3 귀환

 

1 귀환의 거부

 

그러나 영웅이 이 책임을 회피한 예는 너무나 많다. 실제로 많은 영웅들이, 불로 불사 여신의 축복받은 섬에 아예 영원히 눌러 앉아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257

다른 말로 하자면, 무추쿤다는 회귀하는 대신 이 세상으로부터 한 차원 더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기로 마음 먹었다. 누가 감히 그의 결심이 무분별하다고 할 것인가?

 

2 불가사의한 탈출

 

260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은 민간 전승에서 즐겨 다루는 부분이다.

 

261

영웅의 도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뒤에 남은 다른 사물들이 영웅 대신 대답하여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262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법

 

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을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è  이게 영웅의 도망과 무슨 상관인가? 다음의 융의 해석으로 설명함.

 

264

공포에 질려 혼비백산 도망치는 영웅이 추격자 쪽으로 던진 불가사의한 장애물은 공격해 오는 천상의 사냥개의 속도를 지연시키거나 흡수하여, 영웅을 그가 얻은 전리품과 함께 안전하게 고향으로 귀한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영웅이 물어야 하는 통과세가 늘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269

두 세계의 상화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란,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 도망에 실패하는 신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비극이지만, 성공하는 신화는 신용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 외부로부터의 구조

 

275 여신으로서의 태양 모티프는 고대 신화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280

말하자면, 신화 영역에서 일상 현실로 귀한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즉하지 않으면 안된다.

 

4 귀한 관문의 통과

 

281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영웅은 그 모험을 완성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갇힘으로써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두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와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 <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순교는 성자나 하는 것이지만, 범인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중요한 것은 있는 법인 바, 이런 것들을 들의 백합처럼 멋대로 자라게 버려둘 수는 없다. … 초월의 세계에서 보내진 은총은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어 버리니, 다른 영웅이 나와 말씀을 새롭게 설명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282

하지만, 인류가 약삭빠르면서도 우매했던 몇천 년 세월을 통해 시숩만 번 제대로 가르쳐지기도 했고, 그릇 가르쳐지기도 했던 것을 어떻게 다시 가르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 지구의 역사는 순환 주기의 조화로운 형상을 드러내 보이면서 영겁토록 흘러갈 뿐이다.

 

291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 그는 깨어 있는 채로 깊은 잠이라는 천복의 은혜를 체험했고, 믿어지지 않는 모험이라는 튼튼한 액막이를 지니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기 대문에 일상의 엄연한 환멸에 직면하고도 자기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5 두 세계의 스승

 

297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 신은 한 곳에 붙박혀 있지 않고 이곳 저곳을 가볍게 떠돌아다닌다고 주장한다.

 

신화는, 이미 변모한 신비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 경우 변모의 순간은, 마땅히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고구되어야 할 귀중한 상징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변모한 다잇의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302

주님은 바람이시고, 죽음이시고, 불이시고, 달이시고, 물의 왕이십니다. 주님의 최초의 인간이시고, 조상 중의 조상이십니다. …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어지럽고 두렵습니다. 주님의 다른 형상을 보여주소서.

 

크리슈나가 대답했다.

[아르쥬나여, 나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 내 요가 능력으로,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휘황찬란하고, 우주적이고 영원 무궁하고, 태고 이래 존재해 온 내 형상을 보여주었다그러나 이 무서운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너무 두려워하거나 황송해하지 말아라. 공포를 떨쳐버리고 이제 나의 다른 형상을 보아라.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306

예수는 똑 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자기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6 삶의 자유

 

영웅이 불가사의한 여행을 끝내고 귀환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본질에 이르기까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308

사람이 마치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고 새 것을 입는 것처럼,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그 실재도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 것으로 옮겨가신다. 칼이라고 해서 이를 벨 수 없고, 불이라고 해서 이를 태울 수 없으며, 물이라고 해서 이를 적실 수 없고, 바람이라고 해서 이를 시들게 할 수 없다.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313

이 시인의 노래 중 대부분은 자기에게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에다 바친 것이다. … 듣는 자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불멸의 존재에게 눈을 돌리고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탈리에신은 마귀를 두려워했지만, 바로 그 마귀에 의해 삼켜졌고, 그래서 재생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4 열쇠

 

영웅의 모험 도표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

è  맵 설명 중

 

317

구조가 단순한 원질신화가 보이는 다양한 변화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19

많은 신화의 후반부에서 중심적 이미지는 건초 더미에 바늘이 떨어지듯 부수적 삽화와 윤색된 부분에 숨겨진다. 따라서 문화가 신화 시대의 시점에서 현실적 시점으로 옮겨옴에 따라 낡은 이미지는 감지되거나 증명되기 어려워진다.

 

신화는 그저 초인간을 다룬 로망스 정도로 읽혔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322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가?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세례에 대한 일반의 해석은 <원죄를 씻는 의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재생이라는 측면보다는 정화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차적인 해석이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326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되어 온 심리학이다.

 

그러나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327

그들은 불합리하게 신경증적 투사라는 방법을 통해 무의식을 실제 행위에다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완숙하고, 온당하고 실재적인 이해를, 엄격한 통제 아래 유아기적 원망이나 공포로 되돌려놓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330

분화되지 않았으면서도, 도처에서 개체화된 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기관에 의해 좌절당한다. 인간인 지닌 감각능력의 형식과 인간이 지닌 생각의 범주는 이 권능의 현현 그 자체이다.

 

331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è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러니는, 그런 신을 상징으로 이해하면서 신을 믿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캠벨은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동시에 mother nature를 믿고 있다. 마치 최근의 책 <시크릿>처럼. 모이어스 역시 캠벨의 설명이 자신의 신앙은 전혀 훼손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동시에 그도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

 

우리가 우주적인 능력읜 근원은 보지 못하고 그 능력에서 투사된 현상계의 형태만 볼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응축되었기 때문인데, 그 의식의 응축 현상은 초의식을 무의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2 우주의 순환

 

333

신화에서도 우주질서의 연속성은 근원으로부터의 통제된 힘의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신이란, 이 흐름을 통제하는 법칙의 상징적 구현체다. 신들은 세계의 새벽과 더불어 태어나 석양과 더불어 소멸된다.

 

335

쟈이나교도들은 시간을 끝없는 순환으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12개의 살, 혹은 시대를 가진 바퀴로, 12개의 살 또는 시대는 여섯씩, 두 짝의 시대로 나뉜다.

 

337

이 쟈이나교의 끊임없이 도는 열두 개의 살이 달린 바퀴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네 기간의 주기에 해당한다.

 

동양 철학의 기본 개념은 이러한 회화적 양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가 원래 철학적 공식의 설명인지, 아니면 철학이 신화로부터의 추출물인지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신화가 지금부터 아득히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며, 이 점은 철학도 마찬가지다. 신화를 창조하고 이를 보배로이 가꾸어 전승시킨 옛 현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고대 상징의 비밀을 분석 및 투시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철학사의 관념은 잘못된 가정 위에 세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령 추상적 형이상학적 사상은 그런 사상이 역사상 현존하는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서 시작된다는 그릇된 가정이 그렇다.

 

338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첫번째 단계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 총체적 사실 인식

두번째 단계 꿈 체험의 단계 : 꿈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

세번째 단계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

 

330

우주 발생적 순환은, 비현현의 숙면 영역에서 비롯, 꿈을 통하여 깨어나 있는 대낮, 그리고 다시 꿈을 통하여 시간을 초월한 어둠에 이르는 보편적 이식의 통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342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è  미하일 엔데의 네버엔딩 스토리를 보면, 꼬리와 꼬리를 문 두 마리의 뱀이 나온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è  씩씩하게 라는 말에서 연민이 느껴진다.

 

4 공간의 내부에서 생명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

 

언어가 풍성해졌다.

언어는 어렴풋한 인식 안에 있었다.

 

 

우리 위의 하늘은 하와이키와 동거하여 땅을 낳았다.

 

352

한처음, 이 세상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세계는 존재했다. 세계는 발전하여 알이 되었다. 이 알은 일 년을 기다렸다. 그러다 이윽고 갈라졌다. 갈라진 두 부분의 알껍질 중 하나는 은이 되고 또 하나는 금이 되었다

 

353

<공간은 넚게 펼쳐진 것이 아닌, 오목한 형상으로 끝이 없다. ‘존재하는 것존재하지 않는무한 위로 떠 있는 껍질이다.>

 

우리의 현대생물학이 다루고 있는 생명의 진화는, 우주 발생 주기의 첫 단계를 그 주제로 삼고 있다. 물리학자들이, 태양의 쇠잔과 우주의 극단적인 고갈과 더불어 온다고 주장하는 세계의 파멸은, 탕가로아의 방화가 남긴 상처로 예고되고 있다. 결국 세계의 창조자-파괴자에 의한 세계 파괴의 효과는 점진적으로 늘어나 마침내 모든 것이 지복의 바다에 귀속하게 되는, 우주 발생 주기의 제2단계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354-355

한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바로 그다>라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누가 말을 건네오면 <, >라는 말로 서두를 삼은 연후에야 자기가 만난 다른 사람이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두려웠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두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è  도대에 무슨 이 때문”??

[내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한느가? 나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불행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행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로 인함이다. 그는 짝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남녀가 부둥켜 안고 있는 형상만큼 커졌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인 이 형상을 둘로 나우었다. 형상은 남편과 아내로 나뉘었다그래서 이 인간의 몸은(아내를 얻기 전에는) 쪼개진 강낭콩의 반쪽 같았다그는 아내와 교합했고 여기에서 인간이 태어났다.

 

아내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저이는 자신의 형상에서 나를 만들었는데 어떻게 나와 교합할 수 있을까보냐, 내 스스로 숨어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

è  이해가 잘 안 된다. 안되는 이유가 뭐지?

드디어 그는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물을 지었으니, 내가 곧 창조자다.)

 

5 하나에서 여럿으로

 

358

신화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하나의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의 능력은 스스로 기능해 나간다. 다른 한 양식에 따르면, 주물주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우주 순환의 다음 단계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365

이중 초점의 모순 우리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장미는 십자가에 의해 인류에게 피어나는 장미이다.

 

6 창조의 민화

 

미개한 종족의 신화들 가운데 단순한 기원 설화는 우주 발생적 순환을 깊이 암시한느 신화와 대조를 이룬다.

è  이를 어떻게 구분하지? 구분하는 주체는 누구지?

 

368

세계의 정돈, 인간의 창조, 운명의 결정은 모든 원시 창조자 이야기의 전형적인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지의 여부는 지금 알기 어렵다.

 

370

호의적인 창조자와는 사사건건 반대 입장에 서는 광대도 신화와 민담에는 자주 등장한다. 긍정적 측면에서 존재의 어려움을 대변하고 나서는 것이다.

 

372

우주 역시 악의 대리자인 반항자를, 광대의 역할로 조형해 낸다. 악마(탐욕스러운 돌머리이자 예리하고 영리한 사기꾼인>는 언제나 이런 광대다. 이러한 광대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는 승리하나, 그들 자체나 그들의 업적으 무대가 초월적인 차원으로 옮겨지면 간단히 사라지고 만다.

 

373

그럼에구 불구하고 민간 신화들은 인간의 상황을 평가한다는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위대한 신화들과 차이가 없다.

 

2 처녀 잉태

 

1 어머니 우주

375

이 원초적 여성은, 배우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처녀다.

 

377 어머니는 먼저 세게의 질서를 부여했다.

 

379

머리 하나 가득 물을 뒤집어쓴 채,

손으로 파도에 저항하여,

이윽고 인간은 바다로 나왔다.

이윽고 영웅은 파도 위로 나왔다.

 

2 운명적 모태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384

내가 뭐라더냐. 너는 필멸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내 넌에게 동류를 하나 내려주리라.

 

385

<때가 되었다.>

 

내 너에게, 필멸의 길로 들어섰다고 경고하지 않더냐? 하지만 너에게 다른 여자를 보내주겠다. 내 너에게 모롱을 주겠다. 모롱고는 너와 2년을 살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내 모롱고를 다시 부르리라.

 

387

하지만 자고 싶은걸

è  왜 사람은 자고 싶을까? 사람이 성욕을 느낀다는 것은 참 신비로운 일이다.

388

그러나 살아 있는 전능자인 월인은 자기 운명의 자각까지 박탈당하려 하지는 않는다. 호수 바닥에서의 대화는, 영원과 찰나의 대화, <존재하느냐 마느냐> <결정적인 대화>. 끌 수 없는 욕망은 마침내 오랏줄을 받는다. 즉 행동이 시작된다.

 

3 구세주를 낳은 자궁

 

389

이제 문제는 인간이 사는 세계다. … 인간 고뇌의 의미 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사회는 오류와 재난 속으로 빠져든다. <소아자> <대자아>의 재판석을 강탈했다.

이것은 신화에 나타나는 영원한 테마요, 선지자의 목소리르 듣는 귀에 익은 절규다. 사람들은 이 영혼과 육체가 더불어 뒤틀린 세계에서 다시 한번 화신한 심상의 시가를 읋어줄 사람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è  현실인식이 매우 긍정적인 캠벨 아니던가?

è  메시아를 기다리는 뉘앙스를 많이 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는 캠벨 자신이 아닌지.

 

392

나는 지고의 존재 시바를 만나고자 합니다. 시바는 고독과 흔들리지 않는 집중의 신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같은 고행으로 그분의 심적 균형을 깨뜨리고 나를 사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청년이 말했다.

시바는 파괴의 신입니다. 시바는 세계의 파괴자입니다. …

처녀가 대답했다.

[그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이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뭇느 상관이 있ㅇ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그러자 청년은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바로 시바였다.

 

4 미혼모의 민화

 

393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극단적인 허구성 때문이 아니고, 전형적인 영웅의 삶의 주요 모티프를 무의식적인 해학으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à 처녀 잉태,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행의 출발, 시련, 아버지와의 화해, 미혼모의 정실 확정 및 입적, 사칭자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영웅이 친자로 확인되는 등의, 전형적 영웅의 모티프.

 

 

3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396

첫째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 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주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현현된다.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400

이러한 관점은, 영우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렇나 관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곙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미더질 수도 있다.

 

402

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404

이러한 전설적인 전기들은 유형화한 유아기의 도피와 귀환의 주제를 상당히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409

문제는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의 외부로 던져졌다.

 

413

즉 오랫동안 묻혀 지내던 영웅의 암흑기가 끝나고 그의 진정한 성격이 노출되는 것이다.

 

3      전사로서의 영웅

 

419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따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물결이 물밑의 바닥에서 번져나오듯, 우주의 형상도 이 근원에서 둥글게 퍼져나간다.

 

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대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425

우리는 동화 [거인을 죽인 소년 잭]에서, 그리고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같은 영웅의 업적을 그린 고전에서 읽어 이런 영웅적인 행위에 익숙해져 있다.

 

4      애인으로서의 영웅

 

428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431

신부의 침대에 드는 전제 조건으로 제시되는 어려운 임무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영웅 신화에도 등장하는 모티프다. 이러한 패턴의 이야기에서 처녀의 부모는, 영웅을 구속하는 족쇄 역할로 등장한다. 이 과제에 대한 영웅의 해결책은 용을 살해하는 모티프와 조응한다.

 

5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그러나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434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6      구세주로서의 영웅

 

438

영웅의 행위가 위대한 것은, 사람들이 상상속에서나 할 수 있으리라고 헤아리던 일을 현실적으로 바로 눈앞에서 해치우는 데 있다.

 

440

크리슈나는 애곡하는 그들을 보고, 존재의 뿌리되는 지혜로 그들을 위로했다.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441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 시험자, 무섭과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도 성취될 수 있고, 그 의지를 거스르고도 성취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신이, 그에게 스스로 자식을 위한 제물이 되라는 의지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è  스타워즈를 생각나게 한다.

è  갑자기 궁금하다. 다른 동물이나 곤충에게서도 신화를 읽을 수 있을까? 가령 사마귀는 교미를 할 때 암사마귀가 숫사마귀를 잡아먹는다. 이런 곤충의 생활은 인간사와 특징이 다르므로 신화적 해석으로 비유되어 표현되긴 힘들겠지?

è  캠벨이 목록화한 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전형적인 예들인데, 완전히 다른 내용의 신화는 없을까? 캠벨은 상사성에 관한 책을 쓴 것이라고 하지만. 물론 상사성이라는 카데고리로 묶인 이야기들 간의 상이성을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다만 상사성으로 묶이지 않는 전혀 다른 신화들은 없냐는 것이다.

 

442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7      성자로서의 영웅

443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 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è  왜 불멸해야 하는가? 이렇게 살 바에야

 

8      영웅의 죽음

 

448

그대가 정말, 죽음이라고 불리는 자인가?

죽음이 대답했다.

내가 이 무서운 이름으로 불린다.

그대와 가지 않겠다. 그대의 배덕을 보여다오.

아브라함이 죽음에게 말했다. 죽음은 자기 배덕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머리가 둘인데, 하나는 뱀의 얼굴이요, 또 하나는 칼날 같았다. 아브라함의 종들은, 무시무시한 죽음의 모습을 보고 모두 죽었지만, 아브라함은 주님께 기도드려 그들을 모두 되살렸다.

 

내 친구 아브라함을, 내 의로운 자들의 초막이 있고, 내 성자 이삭과 그 품안에 있는 야곱의 거처며, 고난과 슬픔과 근심 대신 평화와 기쁨과 영생이 있는 천국의 낙원에 들게 하여라.

 

454

위대한 신화가 다 그렇듯이 이 이야기는 꽤 유머러스하면서도 의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깨어 있다.

 

456

여래의 마지막 말은 이러하다.

축복받은 자는 첫번째 무아에 이른다. 첫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두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두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세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세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네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네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의식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공간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으로 들어간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가 감각의 휴식 상태에 이른다.

 

 

4 소멸

 

1 소우주의 끝

 

460

부처의 죽음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심령에 의한 조형의 기간을 거쳐 되돌아나오는 능력은, 살아생전에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는가에 달려 있다. 신화는 무수한 장애물을 돌파해야 하는, 영혼의 여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465

내 몸의 부분 부분에, 신들에 딸리지 않은, 신들의 것이 아닌 부분이 없다. 토트 신이 내 몸을 지키시니 어느 때, 어느 시든 내가 바로 레다. 나는 폭력에 물러서지 않고, 내 손으로도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466

이윽고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명계의 날이 밝는 장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혼과 우주는 결국 하나임이 드러난다.

 

2 대우주의 끝

 

468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여보게들, 십만 년이 흐르면, 우주 순환 주기가 다시 시작된다네. 이 세계는 파멸에 들 것이고, 바다느 마를 것이네. 이 넓은 땅, 산들의 왕인 수메루 산이 불에 타, 바라마의 세계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네. 그러니 여보게들, 선의를 이 땅에 넘치게 하소. 연민과, 기쁨과, 평등이 여기에 넘치게 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고, 집안 어른들을 섬기소.

è  파멸을 직시할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것이 바로 우주가 부서지는 시점인 회겁이다.

 

473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 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이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

 

신화의 해석에는 최정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신화 체계는, 진실만 말하는 고대의 해신 프로테우스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 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는 타오르느 불꽃에게도 말ㅇ르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478

신화의 체계 정의

프레이저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

뮐러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

뒤르켐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

쿠마라스와미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

교회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더허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è  더불어 신화가 왜 만들어졌으며, 왜 필요했는지 알고 싶다.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2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있다. 개인은 한 구성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살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280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은 개인과 사회르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è  엄청나게 대범한 발언인데.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è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말이다.

 

겨울이 오는 것을 막겠다는 부족적 의식이 전해진 적이 있던가? 오히려 모든 의식은, 자연의 휴식과 더불어 오는 이 혹한의 계절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준비를 촉구한다.

 

481

이 세계는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에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의상과 아무 상관도 없다.

482

나는 저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죽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들도 아니다. 내 몸은 병들거나 나이를 먹는다. 내 팔, 내 눈, 내 머리,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니다, 내 직관력이 아니다.

 

3 오늘날의 영웅

 

 

과학적인 연구 방법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변형시킨 나머지 저 유서 깊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느 상징의 우주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토해 낸 신기원을 예고하는 숙명적인 선언처럼, <신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

è  숙명이 맞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484

그러므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신화체계가 위대한 조정 수단으로 통용되던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시대 사람들이 안고 있던 문제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ㅇ느 개인에 귀착된다.

 

오늘날에 이루어져야 하는 영웅의 업적은, 갈릴레오의 세기에 이루어졌던 업적이 아니다. 그때는 암흑 시대였지만 지금은 광명의시대다. 그러나 비치 있었던 곳이 지금은 어둠에 싸여 있다.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è  어떻게?

 

488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 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è  캠벨은 영웅을 자신과 독자가 아닌 제 삼자로 보고 있다.

è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거나 개인들에게 영웅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power of one개인만이 중요한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내가 저자라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세상의 책들은 다들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그 중에는 결정적인 책도 분명히 존재한다. 영어에서는 crucial이라는 용어로 쓰일 법하다. 책의 역자 이윤기는 자신에게 감전 현상을 일으킨 명저들을 4권 거론하면서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들었다. 그런 책의 역자가 되었으니 참으로 영광스러울 것이다.

 

캠벨은 참 치밀한 사람이다. 책 한권의 구조를 매우 잘 짰다. <천의…>의 내용부터가, 세계의 각종 신화(특히 영웅 신화)의 상사성을 분석한 책이니, 캠벨은 과히 타고난 분석가이다. 분석에는 조직력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책은 서두에 어떤 방식으로 화제를 이끌어 나갈 것인지, 그 전략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대체로 캠벨의 책은 구성과 내용에서 두문법을 따른다. , 핵심 문장과 내용은 앞쪽에 다 있다. 박자로 따지면 강약약 과 같다. 그러므로 캠벨은 프롤로그에서 원질신화를 설명한다.

 

다음부터는 영웅의 모험담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다. 영웅이 출발, 입문, 귀환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간은 종적 진행한다. 각 지점에서는 해당하는 세계의 신화들을 함께 비교 분석함으로써 횡적 진행한다. 이렇게 구성된 종횡은 참 체계적이며 책을 읽어나갈수록 사례가 누적되어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종적 방향을 뼈대라고 한다면, 그 척추 안을 흐르는 신경섬유로서 척수에 해당하는 이야기도 있다. 인도의 아름다운 왕자와 공주의 신화(혼인을 거부하여 곧 생을 거부하던 그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사랑에 빠져 생으로 입문한다)를 흥미롭게 연결시켜 나간다. , 논픽션에 픽션의 재미를 더해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하는 효과를 강화했다.

 

2부에서는 보다 더 세부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야 할 핵심 주제 4개 정도를 다룬다. 유기성은 확연하지 않지만 개수가 적어서 산발적 느낌을 주지 않는다. , 유출, 처녀의 잉태, 영웅의 변모, 소멸이 그것이다. 2장의 영웅 이야기에서는 영웅의 탄생과 소멸까지 한정된 범주를 다루고 있다면, 3장의 주제는 개방적이다. , 신화의 어떤 점을 화제로 삼느냐에 따라 무한한 텍스트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제3장에서 아직 캠벨이 주목하지 않은 신화의 주제들이 꽤 있으리라 생각된다. 가령, 여성의 입장에서 본 신화의 해석 등이다. 전혀 새로운 텍스트들이 모일 수 있을 것이다.

 

캠벨은 영웅의 일대기를 거의 다 설명해 갈 무렵에는 도표까지 동원하여 이해를 돕는다. 315 페이지의 마인드맵을 닮은 도표는 시간의 방향을 보여줌과 동시에, 회귀의 구조를 하고 있다. 동시에 시간성과 회귀성의 직선, 원으로 분리되는 두 개의 반원으로 세계가 양분되는데 이는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의 도표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다만 목적에 맞지 않게 한 눈에 이해가기 수월하지 않아서 모델을 조금 더 수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캠벨 이상으로 가능하다면.

 

끝으로 에필로그를 실어, 책의 시대적 소명, 즉 영웅의 <홍익>을 가지고 책은 회귀한다. 한 마디로 유기성의 결정체이다.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고 흠모의 마음을 품은 이래, 그 마음을 더욱 확신시켜주는 저서였다. 읽는 내내 행복하였으며 이 결정적인 책을 알게 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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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6 17:45:39 *.154.223.199

레몬 잘 읽었습니다.

조셉캠벨이 계주 주자였고, 재즈 색스폰을 불어서 생활비에 보탠 적이 있고, 우드스탁에 여동생과 같이 들어갔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맞아요. 두문법, 그래서 밑줄 긋기가 수월했어요^^

스토리텔링의 전략적 도구와 함께 검색되는 군요. 저도 영화와 영웅여정을 비교해서 쓴 책을 한 권 갖고 있어요.

그 책에서 다룬 영화를 1/5만 봐서 책 읽다말고 던져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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