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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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에게 행복을 친절함을
그리고 눈물겹도록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는 사람
보이지 않는 인연도 이 세상에 존재함을 알게 해준 사람
- 인연 / 피천득 -
세계 1위의 자살율! 하루 40명이라는 자살통계는 병원에서는 좀 더 가까운 실체로 다가옵니다. 성공률은 희박해도 농약을 마시고 실려오는 경우는 흔한 경우에 속합니다. 새벽에 복도 방충망을 도구로 뜯고 투신하는 환자도 있었습니다. 반면 수술실에서는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15시간에 걸친 심장수술을 진행하고, 신생아실에서는 940g 의 저체중 미숙아가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이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습니다. 최고점을 오르고 최저점을 내리달리는 롤러코스터처럼, 존엄한 생명존중의 가치와 무참히 버려지는 인간 존재의 오르내림은 어지러움과 현기증을 느끼게 합니다.
가해학생, 피해학생, 고위험 자살군, 극단적인 선택 등 요즘 신문을 장식하는 현실을 접할 때마다 저는 피천득 선생님의 인터뷰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1910년 4월 21일에 출생하여 97세에 별세하신 시인이자 수필가요, 영문학자입니다. 그의 글은 일상의 소재를 서정적이고 섬세한 문체로 그려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 같다’하여 붙여진‘금아琴兒’라는 호처럼, 딸이 갖고 놀던 인형을 갖고 노는 영원한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책 ‘인연’은 한국 수필문학의 백미로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소년 같은 진솔한 마음과 꽃같이 순수한 감성, 성직자같이 고결한 인품과 해탈자 같은 청결한 무욕의 수필..’ 故 박완서 선생은‘모든 군더더기를 떨어내고 남은 마지막 모습은 아름답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배울 수 있는 책’이라 평했습니다. 서울대 명예교수로 거장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유명작가의 길을 걸었지만, 장식품 하나 없는 아파트에서 소탈한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은, 담백하고 간결한 그의 책을 닮았습니다.
6년 전, TV 에서 우연히 피천득 선생님이 나오신 인터뷰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흔이 넘은 연세라고는 믿기 어려운 순수한 얼굴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이 끝나갈 무렵, 사회자는 가볍게 지나가는 듯한 표정으로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청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였습니다.
시인이고 수필가이니 젊을 때 문학작품이나 시를 많이 읽으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죽음을 앞둔 모리 교수가 했던‘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와 같은 말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눌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버리지 말아라.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자기 자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
자신을 지켜라”
귀로는 말씀을 듣고, 눈으로는 순수한 눈빛의 그분 얼굴이 겹쳐지면서, 코끝이 시큰해지더니 입에서는 탄식같은 한숨이 나왔습니다. 구순의 할아버지가 전하는 세월이 담긴 진심을 듣고 있자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몰아쳤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몸이 병들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병이 몸에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몸과 마음이 아프면 자신을 함부로 하거나 학대할 때도 있습니다.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를 보고 있으면, 사람의 삶이란 것이 죽음을 향해 가는 미련한 생존시계일 뿐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자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묻는다면 할아버지는 무어라 하실까요? 할아버지의 책이 답을 말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과의 인연이 소중한 것처럼 자신과의 인연 또한 소중히 여기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신을 지켜내는 용기와 치유에 대한 희망을 가지라 말하시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결코 자기 자신을 버리지 말라던, 천천히 가슴에 울려 퍼지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공유하고 싶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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