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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 이윤기 옮김
1. 저자에 대하여
캠벨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완성하고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저는 190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44년을 살았습니다. 1948년 6월 10일 오늘, 드디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원고를 다 썼습니다. 그동안 내가 관심 갖고 있었던 분야에 대해 공부한 것들과 우드스턱에서 5년 동안 읽은 책들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여 방대한 양을 가진 신화와 종교에 대한 것들을 비교 분석 하였습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많은 책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책을 저술하고, 연구에 임한 존경하는 사상가, 철학자, 의사, 작가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인물로는 정신분석학자인 융,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단테, 오비디우스, 플라톤과 그 밖에도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책으로는 성서, 불경, 시 등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면서 무엇보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신화의 기저에 깔리 공통 분모를 알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동시에 저는 이 책을 통해 한가지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융파 심리학의 입장(인간은 무의식 속에다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집단 무의식을 고유하는데, 꿈의 구조물인 원형 패턴은 곧 고대의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타낸다는)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 인간의 정신 운동을 규명하는 한편 현대 문명에 대해 하나의 재생 원리까지 제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신화, 옛 이야기, 동화, 민간 전승, 역사적인 기록, 학술 조사서를 가리지 않고 영웅의 무대면 무엇이든 종횡무진으로 이 책에 모두 등장시켰습니다. 특정 영웅이 누비던 시대는 물론, 그 영웅 이야기가 허구인지 실제인지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제 세계에서는 수메르 신화의 이난나, 그리스 신화의 야손, 나바호 인디언의 쌍둥이 형제, 정복자 나폴레옹이 모두 다 유사한 이야기의 주인공, 즉 영웅일 수 있습니다.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습니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른바 <꿈의 작업>, 즉 응축, 치환, 형상화 작업은 신화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무대가 다르고 사건이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에 투사된 영웅, 말하자면 인간의 집단이 그려낸 영웅 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폴로든, 동화 속의 왕자든, 듀톤의 신 오딘이든 부처든, 모든 영웅은 일정한 영웅의 싸이클을 따릅니다. 그 싸이클에 대해서는 책을 읽어보십시오. 책에 3단계로 잘 정리해 놓았답니다. 서로 접촉에 엇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 신화와 심층 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되는 영웅의 상징 체계를 분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가운데서 하나의 영웅, 그러니까 모든 영웅 신화의 본(원형)이 되는 하나의 영웅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되도록이면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지 않고, 우리가 나날의 생활에서 만나는 문제와 관련시키거나, 세계 여러 나라의 예화를 넉넉하게 소개함으로써 여러분이 시적 상상력으로 이를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평소 신화에 대해서 특히 원질 신화, 우리의 원형을 찾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끝이 곧 시작이며, 죽음이 곧 탄생이라는 오묘한 진리의 탐구에 한발 들여놓으실 수 있습니다.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드러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제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제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저는 제 다음 책을 위해 또 작업실로 향합니다. 다잡한 자료들이 책 꼴로 나와 여러분 손에 가게 되고, 여러분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니 가슴이 뜁니다. 부디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모양으로든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p5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 교의에 녹아들어 있는 진리를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를 상대로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 큰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는 상징으로 분식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분식되다 : 내용이 없이 거죽만이 좋게 꾸며지다./ 실제보다 좋게 보여 지려고 사실이 숨겨지고 거짓으로 꾸며지다.
p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言外)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古文集編輯者)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고는 정신분석학의 안내를 받기 어렵다.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 금과 옥조 : 금이나 옥처럼 귀중히 여겨 꼭 지켜야 할 법칙이나 규정
어쩌면 저자가 동양 및 서양, 현대, 고대 그리고 원시 전설의 차이를 개관하고 나서 추측해 낸 이 신화의 상사성(相似性)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인류의 심성에 대한 근본적, 보편적 관심에 치중한 나머지 종족의 심리적 다양성을 무시한 모든 교과서 및 해부도에도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이다. 많은 신화나 인류의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은 아니다. 일단 이런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 명사 : 상사(相似)
1 . 서로 모양이 비슷함.
2 . <생물> 종류가 다른 생물의 기관이 발생학적으로 기원은 다르나 형상과 기능이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현상. 예를 들면, 새의 날개와 곤충의 날개 관계, 또는 잎이 변하여 된 완두콩의 덩굴손과 줄기가 변하여 된 포도나무의 덩굴손 관계 따위이다.
3 . <수학> [같은 말] 닮음(1. 두 개의 기하학 도형이 각이나 길이의 비가 같음).
조셉 캠벨의 말을 한 장 반 읽고 나니 왠지 더 친근해진 기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말을 통해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엿볼 수 있어 책 읽기의 방향을 알아차릴 수 있어 좋았다. 머리말에서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했던 저자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아주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차례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와 꿈
p13 재미삼아 귀를 기울여보는 콩고 주술사의 잠꼬대 같은 주문이나, 점잖은 취미로 읽어보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노자 경구집(老子警句集)의 얇은 번역본이나, 이따금씩 깨뜨리고 보는 견고하기 그지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이나, 기괴한 에스키모 요정 이야기의 빛나는 의미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즉 변화무쌍한 듯 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p14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인간의 신화에는 끊임없이 살이 붙어 왔고, 이러한 신화는 인가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 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顯現)한 것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들을 저자가 써주었다. 특히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말에서 더 궁금증이 증폭한다. 신화가 내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신화를 배워야 하는 것일까? 평생 신화를 접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떡하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신화를 이루고 있는 것일 수 있으므로. 계속 읽어나간다.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해주길 바라면서.
오늘날 많은 분야의 과학은 이 수수께끼의 분석에 공헌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라크와 하남(河南), 크레타와 유카탄의 폐허를 탐사하고 있고, 인종학자들은 오브 강의 오스티아크 인, 페르난도포 섬의 미개인들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 일군의 동양학자들은 우리 성경의 히브리 이전 시대 사료(史料)를 비롯한 동방의 신성한 기록을 우리 앞에 열어보였다. 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지난 세기에 민족 심리학 분야에서 시작된 연구에 박차를 가해 언어, 신화, 종교, 예술의 발달, 그리고 도덕률의 심리학적 기틀을 확립하고자 노력해 왔다.
이 분석을 통해 나온 연구 결과들을 알고 싶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씌어진 당시가 1948년이므로 60여년이 흐른 지금 많은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아직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나름의 결론을 내리기 힘들지만 끝까지 앞에서 질문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읽어나가야 할일이다.
p16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너무 빨리 모태를 떠난다. 미완성인 상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위험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주는 방벽은 어머니이고, 이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궁 내 체재 기간intra-uterine period은 연장된다.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이원일체(二元一體) 상황dual unit을 형성한다.
양친이 곁에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유아는 긴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격 충동을 일으킨다. 어머니의 속박을 받아도 유아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Bambino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유아가 죽음과 사랑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은 널리 알려진 오이디포스 콤플렉스의 바탕을 형성한다.
p18 성생활의 병리학적인 모든 혼란은, 발육이 억압당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장병길 역, 『꿈의 해석』)
p19~21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보낸다.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使臣)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정신 분석학은 이러한 이미지가 스스로 기능하게 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자아 발달의 위기는, 민간 전승이나 꿈의 언어에 노련한 전문가의 감시안(監視眼) 앞에서 저질러진다. 이 전문가가 시험과 비전(秘典)을 관장하는 원시림 성소(聖所)의 주의, 즉 고대 비법 전수자 ancient mystagogue나 영혼의 안내자로서의 역할과 성격을 떠맡게 된다. 의사는 신화 영역에 관한 현대의 명인이며, 그 비방과 영험이 있는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의사의 역할은, 신화나 동화에서 주문으로 무서운 모험의 시련과 위기에 몰린 영웅을 도와주는 노현자 wise old man의 역할과 같다. 의사는 갑자기 나타나, 무서운 용을 죽일 수 있는 빛나는 마법의 칼이 어디 있는지 일러주고, 영웅을 기다리는 신부와 보물이 쌓여 있는 성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며, 영웅의 치명적이 상처에다 고약을 발라주고, 마침내 원수를 물리치고는 어느 황홀한 모험을 떠난 길을 되짚어 정상적인 생활이 기다리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이런 이미지에 유념하고 원시 종족 사회나 과거에 융성했던 문명 세계로부터 보고된 갖가지 제의를 검토해 보면, 우리는 이러한 제의의 목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적 삶의 패턴은 물론, 무의식적 삶의 패턴까지 변화를 요구하는 변형의 문턱을 넘게 하려는 데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p22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 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까지 참고 할 것)
p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한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렇게 20대까지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도 그렇게 살고 있다. 이걸 깨주고 싶다. 어른으로 가는 길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진짜 어른이 되는 교육을 하고 싶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倒錯)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년,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p24 마땅히 정신 분석가들이 등장하여 가면 쓰고 푸닥거리하던 무당이나 할례하던 요술사의, 고금을 꿰뚫는 지혜와 가르침을 다시 외쳐야 할 때가 왔다. 그래서 우리는 뱀에 물리는 꿈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득한 옛 비의의 상징이, 여기에서 해방되는 순간에 놓인 환자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비의적 이미지는 우리 심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이미지들이 신화와 제의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꿈을 통해 내부에 나타나게 된다. 그래야 우리의 에너지가 심해의 바닥이나 진부하고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유아의 놀이방의 동화책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 .G. 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轉化)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phallus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염증이 이미 심장을 죄고 있었을 테고 한때 사랑의 유혹이었던 지복(至福)의 약속으로 부르는 것은 삶이 아니고 죽음일 터이다.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에서 무덤이라는 자궁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그것은, 꿈의 본질처럼 눈앞에서 곧 녹아버릴, 견고한 물질의 세계를 향한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흐름이다.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이야기 일 뿐이다.
p27 발명이란 참 요사한 것, 미궁을 완성한 다이달로스는 입구를 찾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왕비가 낳은 괴물 미노타우로스도 이 안에 갇혔다. 미노타우로스는 크레타의 세력권 안의 정복당한 나라에서 공물로 실려온 살아 있는 선남 선녀를 먹고 살았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왕 쪽이었다. 그는 자기 허물을 알고 있던 참이어서 왕비를 비난할 수 없었다. 왕이 된 이상 한 개인일 수 없는데도 그는 공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이익으로 취했던 터였다. / 전통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매리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이것은 장인에게나 왕에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개인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 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서로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은 힘뿐이다.
p28 빛나는 칼이 든, 일격으로, 일거수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땅을 자유롭게 할 대속자인 영웅을 부르는 절규다.
여기서는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한다.
산 속에는 적막조차 없이
마른 천둥만 우르릉거리고
산 속에는 고독조차 없는데
갈라진 흙담 문간에
비웃으며 으러렁대는 시뻘건 얼굴들
p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해우이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 여신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며, 항구 불변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p30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 de-tachment>과 <변용 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우리 유아기의 도깨비들과 은밀한 협력자들, 어린 시절의 마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 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은 없다. 우리가 상실해 버린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더 높이 솟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세대, 나아가서는 우리의 문명 시대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을 얼마간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저 위대한 천품의 시혜자, 시대의 문화 영웅(한 나라뿐만이 아닌 세계 역사상의 귀인)이 도리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 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앉은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기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즉 자기가 속한 문화권의 유아기 악마에게 싸움을 걸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 G. 융의 소위 <원형 심성>과의 동화작용을 시도한다.
p31 융 박사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이(Psychology and Religion, par, 89) 원형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다. 니체의 다음 글과 비교해보자. <잠잘 때나 꿈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사고를 꿰뚫어 체험한다. 내 말은, 수천 년 전에 인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꿈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꿈은 우리를 인류 문화의 이런 상태로 데려가고, 그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p33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든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p34 우리는 어둡고 궂은 길을 가야 마침내 평화의 강, 혹은 우리 영혼의 목적지로 통하는 탄탄대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양이지요. (Frederic Pierce, Dreams and Personality, pp. 108~109)
p35 꿈을 꾼 사람은 유명한 오페라 여가수인데, 이정표가 있는 대낮의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귀가 안팎으로 열린 사람에게만 들리는 희미한 소명(召命)의 모험길로도 들어설 뜻을 세운 사람답게, 예사롭지 않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초라하고 질척한 거리>를 홀로 가야했다. 이 여가수는 영혼의 어두운 밤, 단테의 <우리 삶에도 도정에 도사린 어두운 숲> 그리고 지옥같은 구렁텅이의 비애도 알고 있었다.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단테의 <<신곡>> <지옥편> part 3, 1-3)
이 의미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정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굴절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에서 우리는 수백가지로 굴절된 모티프와 만나게 된다.
p36 이 판도라 상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신들의 선물인데, 이 안에는 존재의 고통과 축복의 씨앗뿐만 아니라 미덕과 희망까지도 들어 있다.
이 상자의 도움으로 꿈꾸는 사람은 강을 건너 반대편 언덕에 이른다.
p37 그리고 이 기적 같은 일을 통하여, 극히 어렵고 위험한 작업인 자아 발견과 자아 발전을 꾀하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바다 건너편에 정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을 한 타래 준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p38 사소한 것일수록 손쉬운 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p38~39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게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p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p40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p41 시공(時空)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드는 죽음, 우리들이 흙으로 돌아가려 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 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amor fati>,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현대 문학은 우리들 앞에, 우리들 주위에, 우리들 내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단하게 부서진 형체를 직시할 용기와 눈길을 부여 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대학살의 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당한 곳에서, 비난도, 만병 통치약을 외칠 수도 없는 곳에서 비극 예술의 중요성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유효하다.
p42 이 모든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성취한 보잘 것 없는 이야기는 얼마나 초라하고 눈물겨운가. 우리는 실패와, 상실과, 환멸과, 냉소적 무위의 쓰라림이 이 세상의 선망받는 자들의 피를 말린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선망 받는 자들의 피를 말린다? 다시 읽고, 그 뜻을 헤아려 볼 부분
그러나 행복을 다루는 동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 고대에 이러한 동화나 신화나 신곡은 비극 이상의 고급스러운 이야기, 심오한 진리, 난삽한 깨달음, 건전한 구성물, 완벽한 계시로 받아들여졌다. /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앤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超絶性)( -사물의 진행이나 발전이 더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달한 상태) 으로 읽히어야 한다. / 과거에는 삶과 죽음이 투쟁하던 곳에서 이제는 영속적인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냄비 속에서 끓는 물이 거품의 운명에 대해, 우주가 은하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그러하듯이 시간의 우유성(偶宥性)(-사물이 일시적으로 우연히 가지게 된 성질)에 대해 무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p43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p44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磨損)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느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3. 영웅과 신
p45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原質神話, monomyth)의 핵심unclear unit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분리)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입문)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로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회귀)
p47 정각수(보리수) 아래의 부처와 십자가 나무(Holy Rood, 구원의 나무) 위의 그리스도는 유사한 것으로, 원형적인 세계의 구원자와 태고의 유물인 세계수(世界樹, World Tree) 모티프를 통합한다. 이 테마의 변형은 앞으로 소개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발견될 것이다. 부동의 자리와 갈보리 산은 세계의 배꼽 World Navel, 혹은 세계 축 World Axis의 이미지다. 대지의 여신에게 자신의 권리를 확인시키는 모습은 전통적인 불교 예술의 불상에 나타나 있다. 고전적인 부처의 좌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손가락은 가볍게 땅에다 대고 있다.
p48 중요한 것은 Buddhahood, 즉 정각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不立文字) 오직 정각에의 방법 Way 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형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의 불립 문자 교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의 근간을 이룬다. 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지만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 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에서는 한자를 Muni, 즉 <조용한 자> 라고 한다. 부처가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종교를 세웠지만 그 가르침의 궁극적인 요체는 침묵 속에서만 전수된다.
p50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영웅의 모험)/ 장소가 어디 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을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해우이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모험의 고전적인 단계를 두루 꿰는, 수많은 영웅적인 인물을 따라가 보아야 할 듯하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當代)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 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p51 전체적인 목차와 뼈대에 논의 할 수 있도록 친절히 설명해 놓은 부분
첫번째 단계, 즉 <분리>, 혹은 <출발>의 단계는 제1부, 제1장에서 다섯 개의 소제목으로 나뉜다. 즉,
3. <소명의 거부>, 혹은 신으로부터의 우매한 도주,
4. <초자연적인 조력>, 즉 어느 수준까지의 모험에 도전한 사람에 대한 뜻밖의 도움,
<시련과, 입문의 성공>은 제2장에 6개의 소제목으로 소개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8. <여신 Magna Mater과의 만남>, 혹은 다시 찾은 유아기의 행복,
그리고 (6) <궁극적인 홍익(弘益)>이다.
<회귀와 사회와의 재통합>은 정신 에너지가 세계로 흘러들어오는 연속적인 순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고, 영웅이 속한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의 오랜 후퇴에 대한 변명이 되나, 영웅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필요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웅이 부처처럼 승리를 거두고 완전한 정각 상태에 들어버린다면 이 경험의 만족감이 세상의 슬픔에 대한 그의 기억과 흥미와 희망을 없앨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경제적인 문제에 발목 잡힌 사람들에게 이 깨달음을 전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도 하다. 그러나 영웅이 입문의 모든 시련을 향해 차례로 올라가는 대신, 프로메테우스처럼 단도 직입적으로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폭력이나 기지로써, 혹은 운에 힘입어), 그가 의도하던 세상을 위한 홍익을 손에 넣어버린다면 그가 지닌 힘의 불균형이 부작용을 일으켜, 프로메테우스가 자기의 불경스러운 무의식이라는 바위에 갇혔듯이, 내-외적인 시련을 당하게 된다. 또 한편, 영웅이 자신의 뜻으로 안전하게 사회로 귀환하면 그가 도우려던 사람으로부터 오해받고 무시당하게 되어 결국 그의 행적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세번째 장에서는 6개의 소제목으로 이런 측면의 논의에 결론을 내릴 것인데, 6개의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 즉 (1) <회귀의 거부>, 혹은 버림받은 세계, (2) <불가사의한 도주> 혹은 프로메테우스의 도주, (3) <외부로부터의 원조>, (4) <회귀 관문의 통과>, 혹은 일상의 세계로의 회귀, (5) <두 세계의 주인>, 그리고 (6) <살기 위한 자유>, 즉 궁극적인 홍익의 성질과 기능이다.
p53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은 성공한 영웅에게 계시로 하사된 세상의 창조와 멸망의 엄청난 환상을 펼쳐 보인다. 제1장 <유출(流出), Emanation>은 무(無)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우주의 형상을 다룬다. 제2장 <처녀 잉태(혹은 단성생식)> 에서 여성적인 힘의 창조적, 보상적 역할을 일별하되, 먼저 만유의 어머니 Mother of the Universe로서의 우주적 스케일, 이어서 영웅의 어머니로서 인간적인 단계를 다룬다. 제3장 <영웅의 변모>는 인간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갖가지 형태로 영웅이 등장하는 전형적 단계를 통해 인류의 선사적 역사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제4장 <소멸>은, 처음에는 영웅의 예언된 종말, 이어서는 드러난 세계의 예언된 종말을 그린다.
우주 발생적 순환은 모든 나라의 신성한 문헌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고, 그것은 영웅의 모험에 새롭고 흥미로운 전기를 부여한다.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이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p54 여럿이 되신 하나이시되, 나뉨이 없는 하나 그대로시니, 이 모두가 그리스도시라. 성인의 글은 계속된다.
<나는 내 집에서 그 분을 뵈었다. 일상의 사상(事象) 가운데서 그 분은 뜻밖에 나타나시어 나와 하나가 되시고 내게로 들어오시고, 내게로 뛰어드시는데 가운데에 걸리시는 일이 없어 흡사 불이 쇠를 녹이는 듯하고, 빛이 유리를 지나가는 것 같더라. 이어 그 분은 나를 불같이, 빛같이 만드셨고 나는 내 앞에 보이는 것, 멀리서 보이는 것으로 변했다. 이 기적을 그대에게 설명할 바를 알지 못하니....... 나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며 신의 은총을 입음으로써 신이라.>
p55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p55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흘므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顯現)을 나타내는 듯하다.
p58 신의 은총은 영혼의 양식이다.
/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
p61 고대 도시는 사원같이 건설되어 있다. 네 방향으로 네 개의 문이 있고 맨 중앙에는 이 도시 건설자의 성역이 자리잡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 상징에 갇힌 채 살고 일한다. 이와 같은 정신에서 국가적, 세계적 종교의 판도도 모체인 도시의 바퀴살 주위로 밀집되어 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기독교가 그렇고, 메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가 그러하다.
p62 신화에서는 한 자락 풀잎도 구제자의 모습을 가릴 수 있고, 이 방랑하는 구도자를 구도자 자신의 가슴에 있는 지성소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 개념을 초월한다. 미덕은 자기 중신적인 자아를 완화시켜 범개인적 중심성을 지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고통이나 쾌락, 미덕이나 악덕, 우리의 자아 혹은 남들의 자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p63 시인 블레이크Blake도 비슷한 말을 한다.
사자의 포효, 이리의 울부짖음, 성난 바다의 광란, 그리고 피를 부르는 칼은 인간의 눈에는 과분한 영원의 편린들이다.
p64 둘은 싸울 수밖에 없었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남들을 싸우게 하는 것이니라.
도덕 군자가 의분을 금치 못할 대목에서, 비극 서사시인이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낄 대목에서,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을 향해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제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
1 영웅에의 소명
p71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p72 개구리가 등장하는 운명의 갈림길이 곧 <모험에의 소명>인 것이다. 전령관의 부름은, 여기 이 예화에서 보이듯이 구원에 이르는 길 일 수 있으나 당사자 일대기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크든 작든, 삶의 단계가 정도가 어디에 이르러 있든, 이러한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깊은 인생>의 영감이 이 문단에서 나온것이 아닐까? 나도 글을 쓰기 위해 문턱 앞으로 성큼 다가가야 할 것이다.
p72 이러한 소명을 받은 장소로 전형적인 곳은 깊은 숲속, 큰 나무아래, 샘가....... 운명의 힘을 전하는 전령관은 혐오감을 주는, 참으로 하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p73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부왕(父王)과 함께 누리던 특권과 행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왕의 자식의 경우든, 에덴 동산의 낙원을 떠날 만큼 성숙한 신의 딸 이브의 경우든, 사바 세계의 마지막 지평을 뛰어넘는 순간의 전심 전력하는 미래 부처의 경우든 위험, 안심 입명, 시련과 극복, 그리고 탄생이라는 신비의 기이한 신성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는 똑같다. /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告知者)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혹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 다산성(多産性)의 상징인 야수(동화에서처럼), 또는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p75 소녀는, 잎양버들 근처에서 고슴도치 한 마리를 발견했다. 소녀가 잡으려고 하자 고슴도치는 나무 뒤로 돌아가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소녀는 고슴도치를 잡으려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고슴도치는 자꾸만 올라갔다. 소녀는 결심했다. / 변형의 때가 무르익은 정신은 끊임없이 이런 전령관을 산출하는 데 아래에 소개하는 두 사람의 꿈이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참고)
p77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 그리고 이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p78 왕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찾아나설 준비가 되는 순간, 적당한 전령관이 때맞추어 나타났다.
p80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는,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重心)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 동화에 나오는 공주가 그랬듯이, 모험은 우연한 실수로 시작될 수도 있다.
이 절에서도 그랬겠지만, 필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이러한 예를 다양하게 소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령 프레이저가 <<황금 가지>>에서 그랬듯이) 필자는 이 책의 각 장을 풍부하게 꾸밀 수 있었다. 그러나 원질 신화의 주류를 건드리는 대신 각 절마다 이 세계 여러 곳에서 채집되는 대표적인 구전 중에서 놀라운 예를 실으려고 했다. 이 책을 쓰면서 필자가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니만큼 독자 여러분은 다양한 유형의, 갖가지 독특한 예화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이르면, 독자 여러분은 방대한 양의 신화를 읽게 될 것이다. 독자는 모든 신화가 각 원질 신화를 인증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겠지만 필자가 바라기로는, 각주에 실린 책들을 일별하면서, 방대한 이야기 중의 일부를 한가하게 즐겨주었으면 한다.
2 소명의 거부
p81 다른데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너희를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
어리석은 자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가 파멸하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놓았다가 나동그라진다.
p82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게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p85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p87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가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다소간 일어날 수 있음도 물론이다. (신경증, 정신병, 겁을 집어먹은 다프네의 혼비백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 일종의 주어진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파업 혹은 폐기라고나 할까, 그 결과 변형의 힘은 문제를 새로운 자장(磁場)으로 끌어내는 수가 있다. 이 자장에서 문제는 한순간 마침내 풀릴 수 있는 것이다.
3 초자연적인 조력
p95 네 발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손을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네 머리를 꽃가루처럼 내려놓아라. 그럼 네 발은 꽃가루, 네 손은 꽃가루, 네 몸은 꽃가루, 네 마음은 꽃가루, 네 음성도 꽃가루, 길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잠잠하여라. (꽃가루는, 서남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 믿어지는 심적 에너지의 상징이다. 이 꽃가루는 의식에서 악령을 몰아내고, 삶의 상징적인 길을 알아내는데 널리 쓰인다. 영웅의 모험에 대한 나바호 족의 상징 체계를 더 깊이 알고 자 하는 독자는 Jeff King, Maud Oakes, 그리고 Joseph Campbell의 Where the Two Came to Their Father A Nabaho war Ceremonial, Bollingen Series, I 2nd ed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pp 33-49를 참조할 것. )
p96 모태 안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이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약속은 현재를 지탱케 하고 과거와 미래까지 주관한다. (따라서 알파이자 오메가다).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단계에 이르는 삶의 문턱을 넘어면서, 그리고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우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의 지성소에,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 Mother Naut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러시아 원정에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지의 중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p98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번재 통고다.
p105 이렇게 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 자만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이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4 첫 관문의 통과
p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서 만족한다./ 심지어 표시된 경계선 안에 안주하는 데 만족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p109 아르카디아의 신 판Pan은 , 마을 경계 밖의 무방비 구역에서 사는 위험한 존재 중 가장 유명한 고전적 실례로 알려져 있다. 실바누스 Sylvanus와 파우누수 Faunus는 이 판의 라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판은 이 뿔 피리를 불어 요정들을 춤추게 했다. 사튀로스는 이 판의 남성적인 동반자이다. 판은, 실수로 자기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괴롭히는데 이때 인간이 판에 대해 갖는 감정은, <당황Panic>, 공포, 그리고 엄청난 경악 같은 것이다. 하찮은 실수(나뭇가지를 꺾는다든지 잎을 나부끼게 하는 따위의) 때문에 침입자의 마음속에는 가상적인 위험에 대한 자각이 싹튼다. 이 때 침입자는, 공황 상태에서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판은, 자기를 섬기는 인간에게 자비를, 즉 자연의 건강법이란 은혜를 베풀기도 한다. / 이 관문을 지나면 우주적 근원이라는 성역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p110 이것은 최초의, 혹은 보호적인 관문 수호자의 정체를 밝혀주는 꿈이다. 모험 당사자는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새로운 경험역(經驗역)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p111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p112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p113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무모한 영웅이 관문 통과에는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p114 항아리는 깨드려버려야 짐이 가볍지 않겠습니까?
이런 속임수는 조심해야 하는 법!
p117 오무기 태자는 다섯 차례의 공격에 실패, 다섯 군데가 붙은 채 도깨지의 몸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태자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한편, 도깨비는 도깨비대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는 필시 인간이라기보다는 사자, 아니 귀인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범인은 아니다. 나 같은 도깨비에게 붙잡힌 신세가 되었는데도 떨기는 커녕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구나. 내가 이 길목을 지킨 지 오랜데도 이 같은 자와 대적하긴 처음이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도깨비는 감히 잡아먹을 생각은 못하고 태자에게 물어보았다 .
[젊은이여,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어찌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인가?]
태자가 이 물음에 대답했다.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p118 이제 독자들도, 다섯 가지 무기를 지닌 태자의 말 뜻을 헤아렸으리라.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이 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 부처, 바로 그분이었다.
(각주) 벼락vajra은, 속제의 허망한 현실을 분쇄하는 부처의 영적인 힘(불멸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화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의 하나다. 절대자 the Absolute, 혹은 아디 부다가 티베트 상징에서는 Vajra-Dhara(티베트 어로는 Dorje-Chang), 즉 <금강고>를 쥔 사람으로 표상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와 아카드,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에서 전해져 내려우는 신상도, 금강고와 같은 형태의 벼락을 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후일 제우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
다섯 가지 무기를 가진 왕자의 비유는 이러한 주제를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적, 육체적 성격에 의존하거나, 이를 과신하는 자는 실패한다는 교훈도 더불어 주고 있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감각적인 경험, 즉 다섯 가지 감각인 다섯 가지 무기의 와중에 휘말릴 수 있으면서도, 고유의 도덕적 힘으로 이를 제압하고는 자기 자신과 남을 해방시키는 영웅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p119 우리가 오감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 번째 무기가, 명(名)과 형(型)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 여기에서 상황은 일전한다. 태자에게 도깨비는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풀려난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현상계의 마력이 무너지자 그는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신(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신적인 정령)이 된다. 종국적인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될 때 세상이 그렇게 되듯이 그 역시 신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p120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5 고래의 배
p120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p122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프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 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있다. /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p124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2 입문
1 시련의 길
p128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p129 프쉬케는 개미 대군의 도움을 받아 명령대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초록빛 갈대가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이번에는 독수리가 다가와 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높은 탑루가 프쉬케에게 명계로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주고, 카론에게 줄 동전과 케르베로스에 줄 뇌물까지 주어 그 길을 다녀오게 했다.
영웅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역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p128)
p133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 충동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굳이 현대적인 의미의 어휘를 쓰자면,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 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p135 꿈꾸는 사람의 특수한 정신병적 장애는 곧잘 감정적인 성실성이나 힘으로 나타나는 수가 있다.
p129 우리의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 (비신자인 경우, 아니면 신자라고 하더라도 계승받은 믿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납득할 수 없을 경우)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 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
(각주) C. G. 융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전(前)세대 사람들이 모두 이런저런 형태의 신을 믿고 있었으니만큼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심적 인자, 즉 무의식의 원형으로서의 신을 재발견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상징 체계의 철저한 붕괴뿐이다....... 하늘은 우리를 위해 물리학자의 우주 공간이 되어주었고, 신이 사는 천상계는 과거지사를 돌이켜보는 추억의 장(場)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마음은 자라고> 은밀한 불안은 우리 존재의 뿌리를 갉아 먹고 있다.>
/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에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p142-143 수메르의 신화는 서구 세계의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수메르의 신화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니키아 전통 및 성서 전통(회교와 기독교를 잉태시킨)의 근원이 동시에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이교적 종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 원래 시련의 나라를 향한 출발은 초보적인 정복과 예언의 힘을 얻기 위한 길고 험한 여로만을 표상했다. 이제 영웅은 용을 죽여햐 하고 몇 번이고 위험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된다.
2 여신과의 만남
p144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이로써 영웅은 천저(天底), 천정(天頂), 혹은 땅 끝, 우주의 중심점, 신전의 성소, 혹은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방 속에서 위기를 맞는다.
p145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豫兆)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 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봇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어머니 (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p150 만유의 어머니의 신화적 표상은 우주에 대해, 그 우주의 존재를 윤택하게 하고 지켜주는 최초의 여성적 속성을 부여한다. 환상이란 원래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어린아이, 주위의 물질 세계에 대한 성인의 자세에는 밀접하고도 노골적인 상응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 전통에는, 자신을 정화하고, 안정을 유지하고, 마음을 가시적 세계의 자연 속으로 입문시킬 목적으로, 이러한 원형적 심상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교육적인 이용 방법이 전해져 왔다.
p153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테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p155 왕자는 노파를 껴안고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왕자가 입을 맞추고 물러서는데 보라, 화용월태, 세상 어디에 그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랴 싶은 미녀가 바로 앞에 서 있는게 아닌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결은 백설 같았고, 팔은 포동포동하면서도 여왕의 기품을 갖추고 있었고, 손가락은 가늘었으며, 다리는 곧고 길었다. 부드러운 흰 발과 땅 사이의 구두는 하얀 구리로 만든 것이었고, 입고 있는 망토는 진홍색의 가장 질이 좋은 양털로 만든 것, 가슴엔 하얀 은제 브로체가 달려 있었다. 진주 같은 이빨, 제왕의 풍모에 값하는 눈, 딸기 같이 붉은 입술....... 왕자가 탄복한 나머지 중얼거렸다.
‘아, 아름다움이 은하를 이루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p156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마르지 않는 샘을 지키는 수호 여신(퍼거스나 악타이온, 그리고 외로운 섬의 왕자도 이 여신을 발견한다) 영웅에게, 저 중세의 음유 시인이나 궁정가인이 말하던 이른바 <온유한 마음>을 요구한다. 여신은, 악타이온의 동물적 욕망으로도, 퍼거스의 결벽에 가까운 도사림으로도 파악되지 않았다. 오직 니알의 부드러움에 의해서만 그 정체가 드러났다.
새들의 초록빛 숲 그늘에 깃들이듯
사라은 온유한 마음속에 깃들인다
이치로 보면
사랑 이전에 온유한 마음이 없었고,
온유한 마음 이전에 사랑도 없었다.
태양이 솟을 때 빛도 발할지니
태양에 앞서 빛은 있을 수 없다.
불길 속이 가장 뜨겁듯
사랑은 부드러움 속에서만 뜨겁게 타오른다.
p157 여신 (모든 여성에게 현현되는)과의 만남은 사라으이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3 유혹자로서의 여성
p159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해우이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용어가 일반인에게 생소해서 영웅의 문제는 일반인의 삶과 무관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대한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 세계 도처에 널린 영웅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모험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어떤 계층에 속한는 사람에게든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여기에 광의의 술어로 공식화시켜 본 것이다. 우리는 이 일반적인 유형과의 비교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혀내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p160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보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p161 이 세상만사가
나에게 진부하고 짜증스럽고, 무익한 허섭스레기로 보이는구나. 싫구나, 참으로 싫구나, 자라서 씨앗을 맺을 이 잡초투성이의 뜰이 자연 안에서 무성한 이 잡초가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이 싫구나. (Hamlet 1, 2 129-137)
왕비를 차지했을 때 오이디포스가 맛보았던 순진한 기쁨이, 그 왕비의 정체를 알고부터는 심한 정신적 고뇌로 바뀐다.
p162 자기 시체 같은 육신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그는 이제 순수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생, 병, 사뿐만 아니라 자기 적들로부터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순수한 존재, 선의 정수, 부동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 원래 타성적이고 추악한 존재인 이 육체의 모든 제약을 떨쳐버리라! 육체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한번 속에서 토한 것을 (그대 육체를 토해 내듯)다시 생각하면 혐오감만 더해지느니.
p165 그러나 수도원의 두꺼운 벽 안이라고 해서, 외딴 광야라고 해서 여성이라는 존재로부터 온전하다고는 볼 수 없다. 은자의 살이 뼈에 붙어 있고 그 맥박이 고동치는 한 삶의 이미지가 그의 마음에 폭풍을 일으키는 일을 막기 어렵다.
p166 약속의 땅으로 갈 때 거쳐야 하는 광야에는 불길 같은 비사(飛蛇)가 득시글거린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아직까지 우리 앞 길을 막고 우리 기를 완전히 꺾을 수 있는 놈은 없었다. 천국에 이르는 길에는 사자의 소굴과 표범의 산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끔찍한 마귀떼도 있다....... 우리는, 마귀의 무대이며 마귀의 목표이기도 한 이 땅, 시온을 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귀가 도둑 무리와 은거하고 있는 이 땅의 초라한 나그네다.
4 아버지와의 화해
p170 아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즉 지난날 존재했던 예민한 유아기의 장면이 전면으로 투사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교육적으로 백해무익한 이러한 우상 숭배에 집착한다는 것은 당사자를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잠재적인 성인의 정신을 아버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온전하고 현실적인 견해로부터 당사자를 봉쇄하게 된다. <화해>, 즉 <하나되기>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신(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을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p174 어머니가 그에게, 아버지는 태양 마차를 모는 <포이보스> 즉 <빛나는 자>라고 일러준 일이 있기 때문이다.
p175 하늘과 땅이 똑같은 열을 받을 수 있도록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않도록 하여라. 너무 높이 올라가면 하늘이 탈 것이요, 너무 낮게 내려오면 땅에 불이 붙을 것이어서 하는 소리다. 그 한가운데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p177 포이보스의 마차를 타고 가던 파에톤 여기 잠들다.
비록 실패했으되, 그 용기는 아주 가상하지 않은가.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 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준다.
/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대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p178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구너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p184 (각주) 어떤 방법으로 어떤 지역에서, 갖가지 고대 문명의 신화적 문화적 패턴이 이 지구의 구석까지 전파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단언하거니와, 우리 문화 인류하갖들이 연구한 소위 <원시 문화> 중 자생적인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원시 문화란, 전혀 다른 지역에서, 대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풍토 그리고 다른 종족에 의해 발전한 풍습이 어느 지역에서 채용, 변질, 형식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p185 기독교 교회 (타락과 구원, 십자가형과 부활, 세례를 통한 <거듭남>, 빰을 치는 안수례의 입문 의식,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상징적인 행위의 신화>를 통하여 우리는 엄숙하게, 때로는 효과적으로 입문의 권능을 비추는 이들 불사(不死)의 이미지에 합류한다.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은 이러한 신성한 절차를 통하여 현상계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불사의 존재를 향한 초월의 희망을 획득할 수 있었다.
p192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腱)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때닫는다.
p194 아들이 아버지를 알 나이가 되면 시련의 고뇌가 이미 그의 내부에 태동해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행복이 기다리는 현존의 완전한 현현이다.
5 신격화
p198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劫)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합리적인 마음에 의해 자각된 이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 이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즉 동일의 비이원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층면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영원의 보석이 탄생과 죽음의 연화 속에 들어 있다는, <옴 마니 밧메 훔>인 것이다.
p200 낙원은 <대립적인 것이 공존>하는 곳이었는데, 이제 인간은 낙원의 울타리에 의해 하느님에 대한 환상과 하느님 형상에 대한 회상으로 부터 단절되었다.
/ 즉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함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환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
p203 영웅은 의식(儀式)을 통하여 남성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p205 에고는 이러한 토템과 제식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된다. 무리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회전체에 헌신할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 세계의 나머지 부분(그러니까 인류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은, 그 구성원들의 동정과 보호와는 상관없는 세계로 밀려난다. 왜냐하면 나머지 세계는 그들이 믿는 신의 보호권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랑과 증오의 두 원리가 서로 헤어지는 극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인류의 역사에는 이러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대신 세계를 정화하고 싶어진다. 성도(聖都)의 율법은 이제 구성원의 집단(종족, 교회, 국가, 계층)에만 적용되고, 이윽고, 재수가 없어서 이웃이 된 할례받지 않은 자, 야만인, 이교도, 토인, 혹은 이방인에 대한 성전(聖戰)의 기치가 오른다. (양심에 거리끼기는 커녕 경건하게 예배라도 드리는 기분으로 기치를 올리는 것이다.)
세계는 서로 싸우는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가 토템, 국기, 그리고 집단의 숭배자들이다.
p206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p207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 하는 게 가능해진다.
구세주가 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을 끝내 꺼렸던 복음은 하나님은 사랑이며, 하나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각주) 칼 메닝거 교수는 유대교 랍비, 개신교의 목사, 카톨릭의 신부가 이따금씩 개괄적인 그들의 이론적인 차이에서는 화해하는 일이 있으냐, 영생과 관련된 종규(宗規)나 규정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면 그만 사정없이 갈라서고 만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메닝거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교회 강령은 모두 완벽하다. 그러나 이러한 종규나 규정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는 자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한낱 말장난이 되고 만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라마크리슈나가 이미 내린 바 있다.
<신은 각기 다른 신도, 시대, 국가에 맞추느라고 서로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 그 교리에는 여러 가지의 길이 있다. 그러나 길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심 전력으로 어느 길이든 따라가면 누군든 신에 이를 수 있다. 얼음 과자를 가로로 먹든 모로 먹든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 먹든 달콤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신에 대해 인간이 해답을 냈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신’이라는 단어 속성 자체가 인간이 해답을 내리기엔 어려운 단어 아닌가? 우리는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어떠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동물이라는 데 있다. 나는 아직 어떠한 결론도 입장도 내세우지는 않지만 우리가 보는 어떤 현상, 그래왔다는 역사로만 섣불리 신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신을 잘 모르는데서 범하는 오류같다. ‘해답’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지금 내게 드는 생각이다.
p209 육계(六界) 미망의 도시 가운데
으뜸가는 소인(素因)은 악업에서 나온 죄악과 우매함이다.
여기서 중생은 좋고 싫음에 의지하니, 언제 이 좋고 싫음이 다르지 않음을 알 틈이 없다.
오호라, 좋고 싫음의 무상함이여.
만상이 본래 비었음을 알면,
그대 마음에 대자 대비가 일어나리라.
그대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알면
남을 섬길 수 있으리라.
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각주) 현상계의 무상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계에서 얻은 하찮은 경험으로 불멸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이다.
p211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아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 <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 (따라서 우리는 이 몸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듬 몸,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난다. 이전에는 별 생각 없이 읽고 ‘아!’ 이랬었다면 지금은 이 제목이 심오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죽었는데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일이다.
p212 그러나 이어서 우리는 기적적으로 재생한다. 이때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다.
p213 (119각주) nirvana라는 동사는 <분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어서 이동시킨다는 뜻이 아니고, 불 같은 것을 불어서 꺼버린다는 뜻이다. 기름을 따라 삶의 불길이 잠잠해지듯이, 마음이 제어되면 그 마음의 주인은 <열반의 평화>, <신 안에서의 자포자기>에 이른다. 평화에 도달하는 것은, 불길에다 기름을 끊음으로써인데, 이를 달리는 <이해를 초월한다>고도 일컫는다.
p214~215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적으로 빗나간 욕망과 적의 때문에 비현실적인 공포와 애증의 이중 감정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해 주는 기술이다. / 불교의 팔정도는, 이치를 올바르게 보는 정견(正見), 정견으로 본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正思惟), 진실한 지혜로 구업(口業)을 닦는 정어(正語),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는 정업(正業),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정명(正明), 꾸준히 매진하는 정정진(正精進),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정념(正念), 진실한 지혜로 선정에 드는 (正精)이다.
별, 어둠, 등잔, 환영, 이슬, 거품, 꿈, 섬광, 그리고 구름.
이런 것들을 마땅히 보이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p216 그렇다면, 환자를 소생시키는 치료의 현대적인 목적은 고대의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도 달성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다만 보살이 지나온 여로의 주기가 클 뿐이다.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 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힌두교에도 익히 알려져 있다.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 욕심이 없고 대자 대비하고 현명한 사람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각주) 이것은 이블린 언더힐 여사가 말한, <밀교의 목적, 진정한 합일의 삶, 천상적 풍요 상태, 신성화>가 완벽하게 실현된 상태다. 그러나 언더힐 여사는 토인비 교수가 그랬듯이 이것이 기독교에만 있는 사상이라고 가정하는 실수는 범하고 있다. Salmony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양의 판단은, 자기 확인의 필요성 때문에 현재까지 곡해되어 왔다고 하는 편이 안전하다.>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의 28대 조사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p218 영원한 생명이 그들 안에 깃들여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 그들과 만물이 사실은 영원한 생명임을 아는 사람은 소원을 성취시키는 나무 숲에 거하며 불사의 영주(靈酒)를 마시고, 들리지 않는 도처의 영원한 화음을 듣는다.
p222 <나무, 바위, 불, 물,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각주) 임제선의 비조 임제가 어릴 적에,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 법당 안에서 방뇨하자 스승이 몹시 꾸짖었다. 어째서 거룩한 부처님 계신 곳에서 방뇨하느냐는 꾸중을 듣자 임제가 되물었다. [그럼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을 일러 주십시오. 거기에 가서 누겠습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배우고, 알고 있다. 하지만 삶을 살 때 그 사실을 잊곤 한다. 임제의 스승도 그것을 잊고 있었나보다. 청출어람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그것을 깨우쳐줬으니.
p222~223 보살 신화의 세번째 경이로움은, 첫번째 경이로움(양성적인 형상)이 두번째 경이로움(찰나와 영원의 동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차원의 언어로 일컬을 때 시간의 세계란 곧 위대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아버지에 의해 끼쳐진 생명은 그 안에서 어머니의 어둠과 아버지의 빛으로 합성된다.
6 홍익
p225 (134 각주) 공-세계/ 영원-찰나/ 열반-삼사라/ 진리-미혹/ 정각-연민/ 신-연신/ 적-친구/ 죽음-탄생/ 벼락-방울/ 보석-연화/ 주체-대상/ 얍-윰/ 양-음/
p226 보통 영웅 같으면 모진 시련을 겪을 터인데도 선택된 자는 별 방해도 받지 않고, 또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
p227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음식은 끊임없이 생명을 부여하고 형체를 만드는 우주적 근원의 권능을 상징한다.
p231 육체와 영혼의 양식, 마음의 평화는 다름아닌 만병 통치약, 즉 마르지 않는 젖꼭지가 내리는 은혜다.
p232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천국을 떠나며넛 단테는 이렇게 쓰고 있다.
듣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 작은 쪽배에 있는 그대들이여. 노래를 부르며 저어가는 나의 배를 뒤따르라. 그리고 돌아서서 그대들의 물가를 굽어보라. 나를 잃으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바다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지 마시라.
내가 지나는 물은 일찍이 아무도 건넌 바 없다. 미네르바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아폴로는 내 길을 인도하며, 아홉 뮤즈는 내게 북두칠성을 일러준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 무용해지고, 이곳을 지나면 모든 느낌이 죽는 경지다. 등산객이 내렸다가, 돌아갈 때 다시 타는 산악 지대 철도의 종착역 같은 곳이어서, 여기엔 산을 좋아하나 고산의 위험을 두려워하는 무리가 있다. 상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다할 길 없는 천복의 가르침은,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옷으로 위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동화는 다분히 황당하다. 그리고 심리학에 대한 독서가 위험할 수도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각주) 정신분석학의 주제를 다룬 출판물은 꿈의 재료가 된 상징과 무이식에 대한 그 꿈 재료의 의미와, 정신에 대한 그 재료의 효과와 작용까지 분석한다. 그러나 위대한 거장들이 그러한 상징을 의식적으로, 비유에 이용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더구나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은 여과되지 않은 환상을 짐짓 계시로 착각한 신경증적 환자 (물론 그리스 ㄷ로마의 위대한 거장들은 접어두고)라는 성급한 가정까지 엿보인다. 같은 뜻에서 많은 문외한들은 정신분석의 결과를 프로이트 박사의 이른바 <호색적인 마음>의 산물이라는 생각까지 한다.
p235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신학의 분위기에서와는 달리, 익살은 철두철미 신화적인 것의 시금석이다. 우상으로서의 신들의 존재는 존재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연출하는 유쾌한 신화는 그들 수준의 마음과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나 배후의 무(無)에 이르게 한다. 이 무의 경지에서 보면 삼엄한 신학적 교리는 교육적인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학적 교리의 기능은 무능한 지성을, 구체적인 사실과 사상의 덩어리로부터 비교적 순화된 공간으로 이행시킨다. 이 공간에서는, 궁극적인 은혜로 모든 존재(천상적, 지상적, 혹은 악마적인 것까지)는 덧없고 주기적인, 단순한 행복과 불안의 유아적 꿈과 비슷한 상태로 변해보인다. 티베트의 어느 라마 승은 서양에서 온, 이 방면에 생소하지 않은 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이들 신들은 실재하지만 달리 보면 이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p245 이날 이때까지도 육체적 장생불사는 여전히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
p248 육체의 불로불사를 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동자를 크게 해서, 육체와 그 종자인 개성이 더 이상 시야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로불사는 현실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의 경지인 것이다.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천상적인 것도 도(道)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p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空)에 대한 자각이다.
단테가 정신적 모험을 마지막 한 걸음까지 마치고 천상의 장미에 싸인 삼위 일체 신Triune God의 상징적인 환상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성부, 성자, 성신의 형상을 두루 경험한 그에게도 아직 한 가지 경험이 더 유보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
베르나르가 내게 눈짓과 함께,
저 위를 보라는 듯 미소짓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나의 눈이 점점 밝아지면서,
저 지존의 빛줄기 속으로,
자꾸만 빨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내가 본 환상은, 말로 할 수 없었으니,
말이 그 나타난 바에 승복하고,
기억 또한 압도당했다.
p250 <눈이, 말이, 마음이 하릴 없다.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한다. 이를 남에게 가르칠 방도도 알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알려진 바와도 같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까지 초월해 있다.
생명의 원천은 개인의 핵이며,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찾아낸다-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내부의 뚜껑을 열어젖힐 수 있을 때 그렇다. 게르만족의 이교 신 오딘은 이 무한한 어둠 속의 지식을 꿰뚫어볼 작정을 하고, 고난의 시련을 겪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나는 비바람 몰아치는 나무에
꼬박 아흐레 밤을 걸려 있었던 듯하다.
나는 창에 상하여, 나 자신인 오딘에게 바쳐졌다.
뿌리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는 그 나무 위에서
3 귀환
1 귀환의 거부
p253 근원을 투사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한다. /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詩文),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천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p255 프로이트 학파에서 말하는, 변동하는 자아 체험의 극적인 시간적 세계 아래 잠김 무으식 상태에서, 이 만세 전의 노인은 시간을 초월하여 잠 속에서 영원히 삶을 지속했다.
p256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르 ㄹ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흘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은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제 길을 찾아 신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저를 동아리로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끝납니까? 안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모두, 주님이신 신이시여, 당신의 손으로 꾸미신 계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이 태어나고, 고통을 받고, 나이를 먹고, 죽는 헛된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동안 그들은 죽음의 주재자와 맞서다 갖가지 정도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 모두가 당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저 역시 당신의 희롱에 말리어 이 세상의 제물이 되고, 허물의 미로를 방황하고 자아 의식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렸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대, 당신의 실제(끝없고 자비로운)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2 불가사의한 탈출
p261 영웅의 도망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은 남은 다른 사물들이 영웅 대신 대답하여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p262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p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 융 박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조셉 캡벨 선생님도 우리처럼 북리뷰를 해 놓으셨겠지? 이곳 저곳에서 정신분석학자들의 말이 인용되는 걸 보면...... 지금 내가 타자 치고 있는 일이 더 뿌듯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p264 교리적 상징의 유용한 기능은, 개인이 무턱대고 나서지 않는 한 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과 가족을 떠나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황하고, 심연의 거울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무서운 만남 자체가 그에게 재앙일 수 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꽃피어 왔던 전통적인 상징체계는 이때 영약으로 작용하여, 살아 있는 신의 치명적인 공격 무대를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p268 이자나기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는 순간 죽음을 실상을 알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생의 의지로 충만해 있던 그는 바위를 들어 그 창조의 세계와 사멸의 세계를 막았다. 그때부터 이 바위는 우리의 눈과 무덤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p269 두 세계의 상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실수, 즉 인간의 약점이라는, 사소하나 치명적인 증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소한 일만 피하면,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터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 외부로부터의 구조
p269~270 옛말마따나 <세상을 버린 자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오려 하겠는가? ‘거기’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그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은 그를 부른다. 그가 속해 있던 모듬살이는 그 모듬살이를 떠나 있는 자를 질투하여, 영웅이 안주하고 있는 집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만일 영웅(무추쿤다 같은)이 거부하면, 문을 두드린 무리는 영웅의 거부를 배신으로 여기고 반격하는 것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웅이, 어떤 장애물 때문에 문을 두드리는 무리들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경우(이 경우에도 죽음과 유사한, 절대적인 상태의 행복을 누리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문을 두드린 자들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고, 영웅은 이들의 행동을 통하여 원래 속해 있던 모듬살이로 귀환한다.
p271 그러나 맛을 들이고 나니 기름방울 떨어지는 속도는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라벤은 그래도 대롱을 한 토막 뜯어내어 먹었다. 이 순간 기름이 파도처럼 그 방으로 밀려들어 등잔불을 꺼버렸다. 동시에 방이 앞뒤로 몹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의 요동은 나흘이나 계속되었다. 라벤은 지쳐 쓰러졌고, 그가 쓰러지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사방에서 진동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그랬을 뿐,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고 방도 요동을 멈추었다. 라벤이 가장 중요한 동맥을 잘랐기 때문에 고래가 죽어버린 것이었다.
p275 신토 전통
(각주) 외국에서 전래한 부츠도우, 혹은 <부처의 도>와는 달리, 일본인들의 전통적, 국민적 종교인 <신들의 도> 즉 신도는, 윤회에서 해탈하게 하는 권능(가령 보살이나 부처의)과는 전혀 다른, 삶과 관습(일본의 정신, 조상의 힘, 영웅, 천황, 살아 있는 부모, 살아 있는 자식)을 지켜주는 존재를 섬기는 종교다. 그 예배 방법은 마음을 정결케 하고 또 정결케 하고 또 정결한 마음을 유지하는 일이다.즉, <무엇이 절대적인 것인가? 이는 성수로 몸을 씻음이 아니요, 바르고 도덕적인 길을 따름>이며,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바른 덕과 진심을 따름이지 많은 제물을 바치는 일이 아닌> 것이다. / 순수성은, 여신 아마데라스의 신성한 자기 숭배라는 엄숙한 전형을 좇아 신성이 스스로를 현현케 하기 위해 존재한다. 침묵으로 모든 비밀을 낱낱이 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은 은밀히 교감하도다. 위의 모든 인용문은 가토 겐치의 <<신도란 무엇인가?>>
p276 그러나 거울과 칼과 나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된 형상의 장을 상징한다. 거울을 통하여 신은 자신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 기쁨은 현현 혹은 <창조>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칼은 벼락에 해당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이 나무는, 기독교도들이 동지(크리스마스)에 가정에 장식하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p280 이제 우리는 이 여행의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모험은 서곡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신화 영역에서 일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귀환 관문의 통과
p281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고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나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 순교는 성자나 하는 것이지만, 범인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중요한 것은 있는 법인 바,이런 것들을 들의 백합처럼 멋대로 자라게 버려둘 수는 없다.
p282 하지만, 인류가 약삭빠르면서도 우매했던 몇천 년 세월을 통해 수십만 번 제대로 가르쳐지기도 했고, 그릇 가르쳐지기도 했던 것을 어떻게 다시 가르친단 말인가? 이것이야 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형상을 나타낼 것이며, 다차원의 의미를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한 쌍의 대립물에 대한 정의의 시도가 무의미한 데, 어떻게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는 말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空)을 설명한단 말인가?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하는 것일까?
p284 힌두교도들은, 깊은 잠 속에서 자아는 통일되고 따라서 지복을 누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깊은 잠을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순지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간에 근원적인 흑암의 세계 방문을 통해 우리는 원기를 얻고 정신을 충전시킨다고 해서 우리 삶 자체가 그로 인해 개혁되는 것은 아니다.
p286 이미 그는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그러나 이 다른 세상의 조건이 좋은 상황 때문에 그에게 부과되는 귀환의 어려움은 그만큼 더 컸다.
p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p289 속세의 지식이라는 과일 맛은 정신의 집중점을 영겁의 세계에서 말초적 위기의 순간으로 옮겨놓는다.
p290 많은 예에서 우리는, 신성한 인물의 절연은 그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가 속한 사회를 위한 예방책으로 권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신성한 미덕에는 일촉에 즉발하는 고폭성이 있어서, 터지거나 방전하거나 누출되지 않도록 예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291 그리고 신화(가령 오비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라는 개론서에 모아둔 수많은 신화 같은)는 고도로 집적된 전력의 중심과, 주위 세계의 비교적 낮은 전압의 전력장 사이의 허술하던 절연체가 갑자기 무력해질 때 생기는 충격적인 변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p294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 기억 속에서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신비스러운 반지는 영웅이 그곳에 간 적이 있음을 시사한다. /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 한다.
5 두 세계의 스승
p297 신화는, 이미 변모한 신비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 경우 변모의 순간은, 마땅히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고구되어야 할 귀중한 상징인 것이다.
p298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받는 자들이다.
여기에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영원의 순간이 자기 개인의 운명에 대한 카마르 알 자만의 로맨틱한 자각 너머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우리는 여기에서 심연을 꿰뚫어보는, 심오한 참으로 심오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 / 지금 우리가 관심 갖는 상징 체계이지 역사성은 아닌 것이다.
p304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우주를 상징하는 인물의 혈통 및 능력은, 의미론적이기라기보다는 다분히 역사적인 요소에 따라 결정된다.
p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예수의 변모는, 개인적 의지를 소각시켜 버린 추종자들, 즉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에 의해 <인생>, <개인적 팔자>, <숙명>이 제거된 지 오래인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다.
p306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마 16:25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간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즉 <자기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p307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6 삶의 자유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p313 탈리에신의 시 (p311~312)
이 시인의 노래 중 대부분은 자기에게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에 다 바친 것이다. / 듣는 자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불멸의 존재에게 눈을 돌리고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이로써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 영원이라는 왕자가 세계라는 공주에게 입맞출 때 잠자던 공주의 저항은 끝난다.
4 열쇠
p317 원래 이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와 손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화나 옛 이야기의 윤곽은 원래 애매한 법이다.
p318 영웅이 고래의 배 안에서 불을 일으키는 행위는 성스러운 결혼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p319 따라서 문화가 신화 시대의 시점에서 현실적 시점으로 옮겨옴에 따라 낡은 이미지는 감지되거나 증명되기 어려워진다.
신화는 그저 초인간을 다룬 로망스 정도로 읽혔다.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1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p325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이후,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 /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p326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형해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자료이 가치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화가 꿈과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 몽환 상태에 빠지는 샤먼과 입문사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지혜에 어두운 사람들도 아니고, 유추에 의한 전달 원리에 무지몽매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실제의 의식(儀式)에서 구사하는 메타포는 수세기(아니 어쩌면 수십 세기)동안이나 고찰되고 탐구되고, 논의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사상과 생활의 지주로서 그들이 속한 사회에 봉사해 왔다. 그들의 효과적인 입문 의례 양식의 연구, 경험, 이해를 통해 젊은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배워왔고 노인들은 지혜를 얻어왔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 정신의 원천적 에너지와 접해 왔고 이 에너지를 기능하게 해온 것이다. 그들은 불합리하게 신경증적 투사라는 방법을 통해 무의식을 실제 해우이에다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완숙하고, 온당하고 실재적인 이해를, 엄격한 통제 아래 유아기적 원망이나 공포로 되돌려놓는 것일 뿐이다.
p327 노자,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스도 혹은 모하메드에 의해 거론된 전승적 상징(도덕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전교한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에 의해 채용되었던) 덕분에 우리는 암흑이 아닌 깨어 있는 의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간단하게 공식화한 이 보편적인 교리는, 이 세계의 가시적인 모든 구성물(사물과 존재)은 펴냊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歸巢)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부르고, 멜라네시아인들은 <마나>, 수우족 인디언들은 <와콘다>,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 존재를 <리비도>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우주적 현현이 바로 우주 자체의 구조이며 우주의 변화인 것이다.
p330~331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마음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다채롭고 유동적이고 변화 무쌍하고 복잡한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 제의와 신화의 기능은, 유추작용을 통해 이를 볼 수 있게 하고 이를 촉진시키는 기능이다. / 마음과 감각이 감지할 수 있는 형상과 관념은 초월적인 진리와 개방성을 암시하도록 제시되고 조정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 (공(空),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개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각주) 섬김을 받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이 이차적 성격의 자각은 세계에 산재하는 거의 모든 종교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회교, 유대교에서는, 신이라는 존재는 궁극적인 존재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의 신봉자에게 있어서, 개인이 자기네 신인 동형적 신이 설정한 한계의 초월을 이해하기는 비교적 어렵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상징의 혼란이 야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 사상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편협한 맹신(盲信) 풍조가 생겨났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천국, 지옥, 신화적 시대, 올륌포스 산 및 그 밖의 신들의 거처는 모두 무의식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이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전후항을 바꾼 즉 <무의식=형이상학적 영역>이라는 등식이다. <보아라,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타락 이미지의 의미는 초의식super-consiousness이 무의식 상태로 흘러갔음을 뜻한다. 우리가 우주적 능력의 근원은 보지 못하고 그 능력에서 투사된 현상계의 형태만 볼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응축되었기 때문인데, 이 의식의 응축 현상은 초의식을 무의식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징표로서 세상을 창조한다. 구원은 초의식으로의 귀환과, 이에 따른 세상의 소멸에 있다. 이것은 우주 발생적 순환, 세계 현현의 신화적 이미지, 그리고 비현현 상태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중요한 테마 및 공식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탄생, 삶, 죽음은 무의식으로의 하강 및 회귀로 볼 수 있다. 영웅은, 살아 있을 동안에, 창조 과정 중에는 지각되지 않는 초의식의 요구를 알고 이를 대리하는 자다.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나타낸다.
나는 내가 꼭 임용고사를 합격하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새로운 삶으로 입문할 수 있었다. 내가 꼭 정교사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나를 풀어주는 순간 내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나도 영웅인가? 나도 내 삶의 영웅일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p332 신의 왕국은 내재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외재적인 것이기도 하다. /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분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물론 현대의 종교학도들은 이러한 상징을, 다른 인간의 무지의 소치로 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징후, 즉 형이상학에서 심리학에, 혹은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에 이르는 축도로 볼 수도 있따. 전통적인 방법에 따르면, 상징에 대한 명상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상징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타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우주의 순환
p333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p334 순환적 대화재(大火災)에 관한 스토아학파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영혼은 세계혼 혹은 <원초적인 불>로 환원된다. 이 우주적 소멸이 끝나고 새로운 우주의 형성(키케로의 이른바 혁신)이 시작되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반복하고, 모든 신, 모든 인간은 그전에 하던 역할을 다시 맡는다.
p337 신화가 원래 철학적 공식의 설명인지, 아니면 철학이 신화로부터의 추출물인지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신화가 지금부터 아득히 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며, 이점은 철학도 마찬가지다. 신화를 창조하고 이를 보배로이 가꾸어 전승시킨 옛 현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고대 상징의 비밀을 분석 및 투시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철학사의 관념은 잘못된 가정 위에 세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령 추상적 형이상학적 사상은, 그런 사상이 역사상 현존하는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서 시작된다는 그릇된 가정이 그렇다.
p338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번재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즉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p339 잠의 심연 속에서는 에너지가 재충전되지만 일을 하다보면 이 에너지는 고갈된다. 우주의 생명도 고갈되면 재생되어야 한다.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을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원자 안팎에 충만해 있는 침묵의 계시록이다.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로 보여도 신화 체계는 마음을, 가시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3 허공에서- 공간
p342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만하다>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p343 우주 발생 주기의 첫 단계는 무형에서 형상에 이르는 과정을 나타낸다.
4 공간의 내부에서 - 생명
p348 우주 발생적 유출의 첫번째 결과는 이승적 단계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고, 두번째 결과는 이 틀 속에서 생명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p353 우주란 껍질은 공간에 떠 있는 세계의 뼈대요, 그 안에 있는 풍요한 생식력은, 식을 줄 모르는 자연계 생명력의 역동성을 나타낸다.
p356 이러한 신화 체계에 따르면, 우주에 있어서는 개체이든 창조적인 어버이든 그 영속적인 근본은 하나이며 따라서 동일하다.
p357 비슷한 사고 방식은 플라톤의 <<향연>>에도 등장한다.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펜하우어에 이른바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에 대한 앎>을 손에 넣은 셈이다. 바야흐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해서 이 세상을 한유하며>, <오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겨잊인 것이다.
5 하나에서 여럿으로
p358 신화 속에서는 부동하는 원동력, 즉 살아 있는 전능자가 관심의 중시믕로 떠오를 때마다 우주의 조형에 대한 초자연적인 자발성이 뒤따른다. 각 구성요소들은 응축하여 자기네들의 뜻대로, 혹은 창조자의 말 한마디에 움직인다. 저절로 깨어지는 우주적 알꺽ㅂ질의 부분부분은 외부의 도움이 없이도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초점이 살아 있는 존재로 옮겨지면, 즉 공간과 자연의 파노라마를 거기에 거주하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 우주적 풍경에 갑작스런 변모의 그늘이 진다. 세계의 형상은 더 이상 살아 있고, 자라고, 조화를 이루는 사사으이 패턴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완고하게 정지하거나 타성에 머문다. 우주적 무대의 지주가 다시 세워지거나 만들어져야 한다. 땅은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만들어 내고, 인간은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p365 신화에는, 창조된 세계가 우리의 짐작과 다른 예가 얼마든지 등장한다.
6 창조의 민화
p367 몬타나의 블랙피트족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 보아라. 네 운명을 네가 골랐다. 인간에겐 끝이 있을 것이다>
세계의 정돈, 인간의 창조, 운명의 결정은 모든 원시 창조자 이야기의 전형적인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지의 여부는 지금 알기 어렵다.
p372 이 어리석음 뒤로는 단일한 원인(제 자신의 살을 찢는 둔한 자)이 세계의 이원적 결과(선과 악)의 틀에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야기란, 외양만큼은 순진하지 않다.
(각주) 인간이 감독하고 통제한다고 하더라도 우주는 그 감독과 통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넓고 무자비한 우주가 사실은, 우주가 관여하는 무서운 사건과 함께 정연하게 계획되고 직접적으로 관리되는 여로라는, 순진한 무지가 당연시되고 있는 찬송가나, 설교나, 기도를 들을 때면 나는 이보다 훨ㅆ니 이성적인 남아프리카 종족의 가정을 떠올린다. 어느 관측자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들은, 신은 선하고 만인의 행복을 바라지만 불행히도 그에겐 멍청한 아우가 있어서 언제나 신의 일에 훼방을 놓는다고 말한다.> 그들의 이러한 가정은, 어느 정도 진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의 멍청한 아우는, 만일에 대해 무한한 선의를 가진 전지 전능자가 설명하지 않는 삶의 어려움 및 터무니없는 비극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이것은 모든 신화에서 계승되어 내려오는 사고 방식이다. 우주 역시 악의 대리자인 반항자를, 광대의 역할로 조형해 낸다.
p373 민간 신화들은 초자연적 발산물이 공간적 형식을 취해 돌입해 들어오는 순간에만 창조 설화를 흡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신화들은 인간의 상황을 평가한다는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위대한 신화들과 차이가 없다. 이런 신화 체계의 상징적인 등장인물은 의미상(특징 및 행적에서도) 고급 종교의 성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치하며, 이 등장인물이 넘나드는 불가사의한 세계는 위대한 계시의 세계, 즉 깊은 잠과 깨어 있는 의식 사이에 놓인 세계와 시간, 하나가 여럿으로 갈라지고 여럿이 하나와 화해하는 지대와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2 처녀 잉태
1 어머니 우주
p374 세계를 생성시키는 아버지의 정기는, 변용하는 매체(세계의 어머니)를 통해 다수의 지상적 체험으로 변한다. 이 세계의 어머니는, <‘물 위의’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고 <<창세기>>1장 2절에 언급된 원초적 요소의 화신이다. 힌두 신화에서 이 세계의 어머니는, 여성적인 형상으로 등장하는데 자아가 모든 피조물을 생성시키는 것은 이 여성적 형상을 통해서다. 다소 추상적으로 이해하자면, 그녀는 세계의 경계를 이루는 틀, 즉 우주적 알의 껍질인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자가번식하는 절대자를 움직여 창조의 행위를 유발하는 유혹자인 것이다.
2 운명적 모태
p383 마오리는 최초의 남성을 만들고, 이를 므우에트시라고 불렀다. 마오리는 이 므우에트시를 드시보아 바닥에 넣고 응고나 기름을 채운 응고나 뿔을 주었다. 므우에트시는 드시보아에서 살았다. (이야기 참고)
p388 창조 이후의 세 단계는 각각 세계의 발달 시기를 나타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발달 과정의 패턴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즉 거의 예견된 것이었다. 이것은, 최고 신의 경고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전능자인 월인은 자기 운며으이 자각까지 박탈당하려하지는 않는다. 호수 바닥에서의 대화는, 영원과 찰나의 대화, <존재하느냐 마느냐>는 <결정적인 대화>다. 끌 수 없는 욕망은 마침내 오랏줄을 받는다. 즉 행동이 시작된다.
3 구세주를 낳는 자궁
p389 이제 문제는 인간이 사는 세계다. 열왕의 실제적인 심판과, 천상적 계시의 주사위인 사제들의 가르침에 주눅이 든 나머지 의식의 장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인간의 이야기라는 대 서사시는 목적이 서로 모순되는 분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인간의 시야도 이제는 좁아져 오직 가식적이고, 손에 잡히는 존재의 표피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심연을 투시할 전망은 이제 사라졌다. 인간 고뇌의 의미 심장한 형상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사회는 오류와 재난 속으로 빠져든다. <소자아>는 <대자아>의 재판석을 강탈했다.
이것은 신화에 나타나는 영원한 테마요, 선지자의 목소리로 듣는 귀에 익은 절규다. 사람들은 이 영혼과 육체가 더불어 뒤틀린 세계에서 다시 한번 화신한 심상의 시가를 읊어줄 사람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우리는 우리의 전승 신화에 버릇 들어져 있다. 신화는 어느 곳에든, 갖가지 얼굴로 존재한다.
p390 이런 이야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 주제나 흐름이 어찌나 똑같았던지 초기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악마가 이 기독교 성경 이야기를 위작하여 도처에다 뿌려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처녀수태)
p392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4 미혼모의 민화
p393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의 각 장에 우글거리는, 신들이 창조한 요정들은 아예 가면 무도회를 방불케 한다. 유피테르(제우스)는 황소, 거위, 그리고 황금의 비로 변신하기도 한다. 우연히 삼킴 잎사귀 한 장, 호도 한 알, 아니면 바람 한 점이, 만반의 준비가 끝난 자궁안에서는 생명으로 잉태할 수 있다. 잉태하는 능력은 도처에 널려 있다. 종작없는 생각, 혹은 시대의 숙명이 구세주인 영웅이나 세계를 파멸시키는 악마를 잉태케 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3 영웅의 변모
1 최초의 영웅과 인간
p396 이제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이제 우주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p397 그의 자식 세대가 깨어 있는 의식이라는 일상의 세계로 부상한 것이다.
p398 영웅적인 업적이나, 인류 문화의 기초 작업은 다 이런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러한 업적은 원형적 인간 및 초인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다. 말하자면, 정열의 절제, 예술의 폭발적인 발달, 겨엦 구조의 태동, 문화적인 기관의 대두를 통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월우의 화신이나, 운명의 팔괘라는 초월적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희망에 따라 행동하는 완전한 인간 정신이었다. 따라서 우주 발생적 주기는, 다가오는 시대의 인군의 전형이 될 인간의 형상을 한 황제의 손으로 넘어갔다.
p399 그는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자연의 힘을 통제하는 것을 가르쳤다.
2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시절
p400 그러나 인간적 영웅은, 후세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하강>해야 한다.
p402 앞에서 기술한 바 있지만 영웅의 첫번째 과업은, 우주 발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업은, 심연에서 일상의 삶으로 귀환하여 조물주적 잠재력을 가진 인간적인 변환 자재자가 되는 것이다.
p406 거룩한 천사들이여, 나는 깨어 있는 것도 자는 것도 아닌데,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리 있겠는가. 나는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을 능히 보고 능히 아니, 그대들도 이제 내가 이 죄인이며 독신자를 어떻게 하는지 알게 되리라. 이제 내 저 자를 치도록 하겠다.
p409 요약건대 이렇다.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이곳은 의외의 존재, 자비로운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의 영역이다. 천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아기를 도와주는 동물, 어부, 사냥꾼, 쪼그랑 할머니, 혹은 농부가 나타나기도 한다. 동물들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은 지그프리트처럼 생명의 나무 뿌리를 파먹는 땅귀신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 작은 방에서 혼자 자라면서 (이런 이야기는 도처에 널려 있다.) 이 어린 세상의 신참자는, 헤아리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권능이 있음을 배운다.
p410 신화는 그러한 체험을 견디고, 거기에서 살아나오는 데는 범상하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개가 힘이 세고, 영리하고, 또 지혜롭다. 헤라클레스는 여신 헤라가 요람으로 보낸 뱀을 죽인다. 폴리네시아의 마우이는, 어머니에게 요리할 시간을 주느라고 태양을 꾀어 그 운행을 늦추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은, 별과 달과 태양을 주관하는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실재를 깨닫기에 이르렀다. 예수는, 논쟁에서 이른바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어린 시절 부처는 어느 날 나무 그늘에 놓여지게 되었는데, 유모는 나무 그림자가 오후 내내 움직이지 않고, 아기는 요가적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걸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p413 유아기 이야기는 영웅의 귀환 혹은 그의 정체가 드러남으로 그 결론에 이른다. 즉 오랫동안 묻혀 지내던 영웅의 암흑기가 끝나고 그의 진정한 성격이 노출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상당한 위기가 따른다. 영웅의 권능이, 인간 사회에서 소외, 축출을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양상은 토막나거나 사람들 기억에서 해소되어 버리고, 재난이 몰려온다. 그러나 재난이 지나가면 새로운 권능의 창조적 진가가 드러나고 세계는 다시 영광의 새 형상을 얻는다. 이러한 십자가 위에서의 고난과 부활의 주제는, 영웅 자신의 몸, 혹은 그가 속한 세계가 맞는 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
3 전사로서의 영웅
p419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물결이 물밑의 바닥에서 번져나오듯, 우주의 형상도 이 근원에서 둥글게 퍼져나간다.
p420 저의 나무, 제 거처의 어머니신, 고귀한 귀부인이시여, 산 것은 모두 짝으로 있어 새끼를 치는데 저만은 혼잡니다.
p421 바로 이 배꼽에서, 영웅은 자기 운명을 자각하러 떠난다. 그의 장년기 행적은 세계에다 창조적인 힘을 쏟아붓는다.
장성한 바이나뫼이넨이 노래하기를
호수가 부풀어오르고, 대지가 요동하며
구릿빛 산이 흔들리고
거대한 바위가 울렸다.
산이 열리고
해변에서는 돌멩이가 흩어졌다.
영웅이자 방랑 시인의 시구가 신통력이 있는 마법의 주문으로 울린다. 이와 비슷하게 영웅이자 전사의 칼날이 창조적 근원의 에너지로 빛난다.
p422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영웅의 기본적인 임무는, 그러한 괴물과 폭군을 퇴치하고 그 인간의 삶의 무대를 정화하는 것이다.
4 애인으로서의 영웅
p428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p430 처녀가 귀뜸해 준 대로 따른 쿠훌린은, 마법의 전사로부터는 무술을 배웠고, 딸로부터는 결혼 지참금도 없는 결혼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그는 자기 미래도 설계할 수 있었고 처녀와 사랑도 나눌 수 있었다.
p431 영웅이라는 당당한 존재 앞에서 갖가지 장벽, 족쇄, 깊은 구멍은 차례로 정복된다. 숙명적인 승리자의 눈은 어김없이 상황이라는 요새의 틈을 읽어내고, 그의 주먹은 그 틈을 출입구로 뚫어낼 수 있다.
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wow~!”
p432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과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심장한 개념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첫번째 영웅의 상징이 명검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상징은, 권위의 홀장, 혹은 율법서다. 첫번째 영웅의 특징적인 모험이 신부(신부는 곧 삶이다)를 얻는 것이라면, 두번째 영웅의 특징적 모험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곧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다.
p434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p434~435 이제 근원에 접한 영웅은 중심의 정적과 조화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p436 왕이니, 신하가 복종함은 당연하나 그 왕이 신의 예배에 소홀하면 그 집 안에는 적막이 깃들이는 법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이면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 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인간의 시각이 평형 상태의 인간적 측면으로 기울어질 때, 천상적 능력의 체험은 그것으로 끝난다. 한 사회를 관류하던 사상도 사라지고, 오직 힘만이 그 사회를 동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황제는 도깨비 같은 폭군(헤롯, 니므롯)이 되며, 세계는 이 손 안에서 구원되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6 구세주로서의 영웅
p440 크리슈나는 애곡하는 그들을 보고, 존재의 뿌리되는 지혜로 그들을 위로했다.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우주 발생 주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당한 판단과 오류의 규칙 바른 갈마듦(교체 반복)은 시간적인 사고 방식의 특징이다. 우주의 역사에서도 그렇고 국가의 역사에서도 그렇다. 심령에 의한 조형(유출)과 무(無)로의 소멸, 젊음과 늙음, 탄생과 죽음, 형상을 창조하는 생명력과 타성적인 죽음의 중압은 영원히 갈마드는 것이다. 생명이 태동하고 이어 형상이 빚어지면, 쇠퇴가 따르고 이윽고 운명에 농락당한 잔해만 남는 것이다. 현명한 황제가 통치하는 황금기는 삶의 순간순간의 충동에 따라, 폭군이 지배하는 황무지 시대가 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창조주였던 신도 종국에는 파괴자가 된다.
p441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p442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10:34~37)
이 말씀에 대한 통찰력, 깨달음이 내게도 생기면 좋겠다.
7 성자로서의 영웅
p443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 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갑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의 마지막 장
내가 쓰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나에게 계시된 것을 써왔고, 가르쳐왔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하잘것없다. 이제 바라건대, 내가 가르치는 시대가 끝났듯이 내 삶 또한 그러하기를.......
p444 삶의 너머에 존재하는 이런 영웅은, 신화를 초월한 영웅들이기도 하다. / 정신이 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
프로이트 학파에서는, 우리는 항상 어머니를 취하고 아버지를 살해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이 십자가의 관문 너머에 신 아넹서의 천복이 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길(태양의 문)이어서 그렇다.
어려운 부분. 많은 부분이 다 어렵지만.......
8 영웅의 죽음
p445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p449 생전에 이원적인 균형을 상징하던 영웅은, 죽어서도 이미지를 합성한다. 샤를마뉴처럼 영웅은 잠을 자다가도 운명의 때가 되면 일어난다. 그는 다른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있다.
p454 위대한 신화가 다 그렇듯이 이 이야기는 꽤 유머러스하면서도 의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깨어있다.
p456 그러나, 격정과 염려와 약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진 신들은 참을성 있게 견디며 말한다.
<제행이 무상하구나. 태어난 것, 모습을 나타낸 것, 죽기로 마련된 것들이 어찌 이를 피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가 없구나.>
4 소멸
1 소우주의 끝
p458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릴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p459 즉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p461 이제 그대는 그분의 보좌 앞에 서시게 됩니다. 우리 역시 그곳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모두가 모일 그곳은 아주 넓답니다.
p462 이 반추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느끼면 사자는 이 승으로 되돌아와 다음 단계의 경험을 준비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모든 단계의 삶을 경험하고, 마침내 우주적 알이란 벽을 깨뜨릴 수 있게 된다. 단테의 <<신곡>>은 이 단계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대우주의 끝
p468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십만 년이 지나면, 우주의 순환 주기는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p469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기간 동안, 보다 작은 단위의 주기들은 결국에 가서 종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이 오랜 세월에서 몇 년 정도의 차이가 난들 어떠랴?
p472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1 변신 자재자(變身自在者)
p477 신화의 해석에는 최종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프로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의 전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p47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사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2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p479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p480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은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분질이었음을 깨닫는다.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종교적인(순전한 주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를 피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의식은, 견디기 어려운 계절과 풍요의 계절을 함께 거느린 이 놀라운 한 해의 주기를 함께 차님했고, 일 년의 주기는 인간 집단의 계속 되는 삶의 순환을 표상한다.
p481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은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두 길 : 사회적인 의무와 대중적 제의와는 정반대로 향하는 다른 길)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에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의상과 아무 상관도 없다. /
p482 우리는 선한 사람일 수도 있고, 죄 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못한다. 이러한 호칭은 단지 지리적인 우연, 생년월일이 다르고 수입이 다른 우연을 나타낼 뿐이다. 우리의 핵은 무엇일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기본적인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
p482 명상에 드는 입문자는 준비 작업으로서 자기 마음과 정신을 세속적인 사건에서 분리시키고, 자신을 존재의 핵으로 몰고 간디. /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한 아무개 씨는 내성적이며 초연한 인간이 된다./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p483 영웅은 어디를 떠돌든,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는 자기의 본질적 실재에 머문다. /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내부에 잇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개인은 율법 안에서 자기를 읽고, 우주의 전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재생한 것이다. 세계를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3 오늘날의 영웅
p484 현대인은,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듯, 새벽의 태양이 어머니 밤의 자궁을 빠져나오듯이, 현대인은 고대의 무지로부터 빠져나왔다.
사회의 구성 단위는, 이제 종교적 내용물의 전달자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조직이다. 이 경제적, 정치적 조직의 이상은 신성한 무언극을 통하여 천상의 형상을 끊임없이 물질적 우위와 자원의 우위를 겨루는 세속적인 국가를 지키는 데 있다. 신화 체계가 가득 담긴 지평의 꿈에 잠긴, 격리된 사회는 이제 착취의 대상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보한 사회 안에서도, 제의, 도덕률, 예술이라는 고대 인류 유산의 흔적은 조락의 길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신화 체계 (이제는 거짓으로 알려진)가 위대한 조정 수단으로 통용되던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시대 사람들이 안고 있던 문제와는 정반대되는 문제인 것이다.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p485 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인 승리는 몯느 종교 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은 무익한 위치로 끌어내려, 오늘날에는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나머지 6일간은 물론 기업 윤리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이 판을 친다. 그러한 가짜 신앙은 제대로 기능하는 세계에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지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진화다. 그래야 세속적인 삶의 의무와 행위를 토앻,우리 모두에게 실제로 내재하고 또 그만큼 효과적인, 보편적인 신인의 이미지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이를 의식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486 모든 일은, 현대 세계의 살아 있는 심성의 심층에서는 물론, 전지구가 한 덩이로 맞붙은 거대한 전장에서 길고 무서운 과정이라는 전혀 다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p488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분담하는 것이다.
역자 후기
p489 <명저(名著)>라고 일컬어지는 책이 무슨 해독이 끼치는 바 있을까만, 역자는 나름의 까닭이 있어서 <명저의 해독>이란 말을 더러 은밀히 생각에 울린다. 이른바 <명저>에 걸려 있는 고압의 전하(電荷)가, 여유로운 정신으로 사상(事象)을 대하여야 할, 그러니까 사상(思想)이 덜 여문 독자와의 만남에서 예사롭지 않은 방전 현상을 일으키고, 이 방전 현상의 체험이 독자로 하여금 그 감독의 여신(餘燼)으로만 사물을 파악하게 하는 편집증적 색안경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를 위로하는 역자후기이다.
p490 인간적인 것을 앞세워 관심하는 분야의 책이다.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토마스 만의 참으로 무릎에 손이 가는 말이 있듯이, 인류 일반이 공유하고 있는 오리엔테이션의 현대적 양상이 바로 이 분야와 맥을 함께 하지 않을까 싶다.
p492 지금은 <꼭 읽어야 할 책>과 <꼭 펴내야 하는 책>을 같이 놓고 보는 출판인이 그리 많지 않은 시대다. 그래서 이 분의 용기와 고집이 빛난다. (정병규님께 이윤기가 하는 말)
3.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머리말
프롤로그 원질신화 -신화와 꿈/ 비극과 희극/ 영웅과 신/ 세계의 배꼽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 영웅에의 소명/ 소명의 거부/ 초자연적인 조력/ 첫 관문의 통과/ 고래의 배
제2장 입문 - 시련의 길/ 여신과의 만남/ 유혹자로서의 여성/ 아버지와의 화해/ 신격화/
홍익(弘益)
제3장 귀환 - 귀환의 거부/ 불가사의한 탈출/ 외부로부터의 구조/ 귀환 관문의 통과/
두 세계의 스승/ 삶의 자유
제4장 열쇠
제2부 우주 발생적 순환
제1장 유출 - 심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우주의 순환/ 허공에서-공간/
공간의 내부에서-생명/ 하나에서 여럿으로/ 창조의 민화
제2장 처녀의 잉태 - 어머니 우주/ 운명적 모태/ 구세주를 낳은 자궁/ 미혼모의 민화
제3장 영웅의 변모 - 최초의 영웅과 인간/ 인간적인 영웅의 어린 시절/ 전사로서의 영웅
애인으로서의 영웅/ 황제로서, 폭군으로서의 영웅/ 구세주로서의 영웅/
성자로서의 영웅/ 영웅의 죽음
제4장 소멸 - 소우주의 끝/ 대우주의 끝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 변신 자재자/ 신화, 제의, 명상의 기능/ 오늘날의 영웅
역자 후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프롤로그, 제1부, 제2부, 에필로그로 크게 4부분으로 나눠져있다. 무엇보다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해주는 브릿지 역할을 하는 문장들이 몇 군데 발견된다. 그래서 어려운 내용을 계속 읽어나가 독자가 길을 잃을 때 쯤 다시 한 번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해, 관점에 대해 환기시켜준다. 그런 점에서 호흡이 긴 책을 읽어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독자로서 좋았던 부분이다. <예) p401 제 1부 <영웅의 모험>에서, 우리는 심리학적이라고 해도 좋을 첫 번째 관점에서 그의 구원적 행적을 검토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관점에서 이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 따라서 이 장에서는 먼저 영웅이 불가사의한 어린 시절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
프롤로그에서 3번째에 소개된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의 순서에 따라 1부를 구성하여 큰 뼈대를 잡아주고 시작하니 전체적 뼈대의 연결고리가 탄탄하게 엮이게 됐다. 하지만 프롤로그에 소개한 것과 1부가 탄탄하게 연결 된 것에 비해 2부는 연결고리가 조금 약했지만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영웅의 변모’를 많이 다뤄주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의 3번째 부분에서 오늘날의 영웅에 대해 다뤄줌으로써 독자들이 멀게 또는 지어낸 이야기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신화가 우리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적용되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들어 줬다.
탄탄한 뼈대와 목차 덕분에 체계적으로 잘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각 꼭지 아래 나오는 내용들이 워낙에 크고, 심오하기에 비루한 이해력으로 다 이해하지 못했고, 처음 훑어 볼 때와 두 번째 읽을 때 좀 다르고, 마지막으로 치면서 곱씹을 때 달랐던 것을 보면 다시 읽으면 아마도 또 다른 이해와, 생각들이 생겨날 것으로 기대된다.
캠벨을 처음 만난 <<신화의 힘>>에서도 느꼈지만 캠벨을 다양한 신화 속에서 흐르고 있는 공통적인 뼈대를 논하려는 노력이 많이 보인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자가 말했듯이 그는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진리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자료를 엮고 해석하고 풀어내는 데 공을 들였다. 그 점에 대해서 아주 높이 사고, 존경스럽다. 그는 자신만의 사상, 생각의 뿌리가 깊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대해서 쓴다면 나는 영웅의 이야기를 먼저 제시하고 독자가 많은 영웅들의 모습에서 한 가지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도록 구성해 볼 것 같다.
제1부에서 영웅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뤄주고 제2부에서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3단계 표준 궤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제3부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영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이야기 해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4부에서 저자에게 있어서 진리가 드러낸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독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써주고 싶다.
세린낭자의 저자에 대해서는 '새로쓰는 저자 서문'인데요^^ 저도, 조셉캠벨도 노트 필기를 했을 거라고, 타이핑을 열나게 하고 있는 모습에 정당성을 부여했어요. 이 부분 읽으면서 빙긋 웃었어요. 세린낭자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어서 예문으로 든 성경 구절이 통째로 와 닿을 때가 많은가 봅니다. 임용시험 상관없이 '되려는 교사'의 모습을 구현해 가는 모습이 그 깨달음에서 시작되었군요. 멋져요. 학교 안에 있으면 임용시험 합격으로 자기 계발의 노정이 중단된 경우도 많이 보아요. 저도 그 교만과 태만에서 자유롭지 않아요. 성실하고 긴(^^이게 감동적이에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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