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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3일 11시 0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지난 번은 조셉 캠벨의 걸어온 길에 대해서 말했다두 번째는 그의 삶에 영향을 준 인물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천의 얼굴을 한 영웅의 원용이 된 분석심리학의 거장 칼 구스타프 융과 청년 시절, 조셉 캠벨이 즐겨 읽었던 작품의 저자인 제임스 조이스토마스 만이다.

 

#1 예전 저자소개 자료(첨부화일)

 

1. 칼 구스타프 융(1875 ~ 1961) : 인간 정신의 깊은 바다를 연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C.G. 융은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자기자신의 무의식과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분석 작업을 통해서 얻은 방대한 경험자료를 토대로, 원시종족의 심성과 여러 문화권의 신화, 민담,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종교현상들을 비교 고찰한 결과, 인간심성에는 자아의식과 개인적 특성을 가진 무의식 너머에 의식의 뿌리이며 정신활동의 원천이고 인류 보편의 원초적 행동 유형인 많은 원형(原型)들로 이루어진 집단적 무의식의 층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자율적으로 보상하고 개체로 하여금 통일된 전체를 실현케 하는 핵심적인 능력을 갖춘 원형 즉, 자기원형이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의 학설은 병리적 현상의 이해와 치료뿐 아니라 이른바 건강한 사람의 마음의 뿌리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고 모든 인간의 자기통찰을 돕는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시대적 문화, 사회적 현상의 심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신학, 신화, 민담학, 민족학, 종교심리학, 에술, 문학은 물론 물리, 수학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2. 제임스 조이스(1882~1941) : 시대를 앞서간 작가, 20세기 가장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

현재 그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의식의 흐름을 비롯해 그가 작품에서 사용했던 수많은 기법들을 현대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는 작가로는 버지니아 울프, T.S. 엘리엇, 엔서니 버제스, 그리고 존 업다이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이름만으로도 조이스가 현대 소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대가로 인정받기까지 그의 삶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부유했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실직으로 막을 내리고, 그 후 가난은 평생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생활, 딸의 정신병, 그리고 말년에 얻은 안과 질환으로 그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이보다 조이스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조국이, 그리고 세상이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블린 사람들>,<젊은 예술가의 초상>,<율리시스>, 그리고 <피네간의 경야>등 그의 대표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역시 의식의 흐름이다. ‘의식의 흐름은 정신분석학에서 유래된 용어로, 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고의 자유로운 연상 작용을 의미한다. 19세기 소설가들은 사실주의 전통에 입각해 등장인물의 외적인 모습과 행위를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실재에 접근하려고 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생겨났고, 이것은 소설에 있어서 등장인물과 삶에 대한 새로운 서술 양식을 요구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의식의 흐름기법이란 작자의 직접적인 언급이나 해설이 없이 작중인물의 사상과 감정 그리고 반작용들이 거의 말이 사용되지 않고 표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적독백과 구별되는데 이 의식의 흐름이 의식적인 사고의 계선(界線)에서 인물의 심리과정의 자유로운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정규적인 구문이나 문법을 무시하고 상징적인 동기(symbol-motifs)를 사용함으로써 심리세계(心理世界)를 묘파하는 방법인 데 비해, 내적독백은 의식적으로 제어된 사고를 보다 직접적인 언어표현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뜻한다.

 

3. 토마스 만 (1875~ 1955) : 20세기 전반의 가장 위대한 독일 작가, 비판적 리얼리스트

 

그는 독일 뤼벡의 참정의원을 지낸 아버지로부터 냉철한 사고와 도덕적 기질을, 독일인과 브라질인의 혼혈인 어머니로부터 감각적이고 자유분방한 예술가 기질을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가족은 뮌헨으로 이주했다. 토마스 만은 잠시 보험회사 견습사원으로 있다가 뮌헨 대학에서 청강하면서 문학의 길을 준비했다. 청년 시절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사람은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였다. 토마스 만이 문학 활동을 시작한 1890년대 중반에는 자연주의가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반합리주의적 문예사조인 신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상징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문화사 및 문학적 견지에서 볼 때, 토마스 만은 19세기 전통적 문화 체제를 부인하고 새로운 혁신을 지향하는 20세기 문화의 발판인 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업고 있다.

1926년 장편소설 <부덴드로크()의 사람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은 그의 명성과는 달리 의외로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쉽지 않은 독일작품 중에서도 토마스 만의 글을 특히 더 어렵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은 대부분 간결한 문장으로 끝나는 법이 없고, 글 자체도 건조체에다 만연체이며, 내용 또한 언제나 이중적 의미를 띤다. 일반 독자의 경우 몇 년을 벼르고 별러 단단히 결심한 후에야 비로소 토마스 만의 장편을 손에 들게 되지만, 애석하게도 얼마 읽지도 못하고 그만 책장을 덮어버린다.

토마스 만은 흔히 말하는 잔잔한 인간미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는 망명 시절 많은 사람을 도왔지만 그에게 친구다운 친구는 없다. 스무 살 무렵부터 60여 년간 매일 오전 9부터 12까지는 어김없이 창작 작업에 물두했기 때문에 친교라고 일컫는 그런 관계를 맺기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이고 경솔했으며, 예민하기로는 프리마돈나 같고, 거만하기로는 테너가수 같았다고 한다.

 

4. 출저

출처: C.G. 융 기본저작집8권 영웅과 어머니 원형

(C.G. 융 지음,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 번역위원회 번역, 솔출판사, 2006)

인간과 상징(C.G. 융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6)

위대한 예술가 제임스 조이스(프랭크 스타텁 지음, 김경혜 옮김, 랜덤하우스, 2006)

토마스 만 읽기의 즐거움(윤순식, 살림출판사, 2005)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 머리말

5p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종교 교의에 녹아 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를 상대로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 큰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는 상징으로 분식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우리 아이들이 문득 엉뚱한 질문을 할 때마다 아이 수준에 맞는 대답을 하기 위해 식은땀을 흘려본 적이 있다. 말하는 가운데 진실을 왜곡 하지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6p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 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6p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 하지만 그 진리를 어느 종교에 편향된 교리여서는 안 된다. 그 본질을 알아야 한다. 나는 그것을 끝없이 탐구하는 자세로 살아야겠다. 항상 삼가 하고 진리를 볼 수 있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14p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프롤로그

14p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7p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제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이라는 이원일체 상황(Dual unit)을 형성한다. 지그문트 포로이트는 50년 전에 성인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오이디포스 콤플렉스로 지적한 바 있다.

 

17p 유아가 죽음과 사랑의 충동을 구분하는 숙명적인 행위는 지금은 널리 알려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의 바탕을 형성한다.

 

19p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혹은 벌건 대낮에 아니면 정신 착란을 이용하여 갖가지 부질없는 몽상과 기이한 상념과 공포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허상을 마음으로 올려보낸다.

 

21p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한다.

 

23p 내 환자 중 하나는 뱀이 동굴에서 나와 자기 사타구니를 깨무는 꿈을 꾸었다. 그가 이 꿈을 꾼 것은, 분석을 믿고 자신을 친모 복합(mother complex)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23p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28p 권력 망자는 세계의 신화, 민간 전승, 전설 심지어는 악몽에도 익히 등장하는데 그 특징은 어디서건 동일하다. 그는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다. 그는 <내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권리에 걸신들린 괴물이다. 그가 저지른 황폐의 참상은 그의 세력권 안에 두루 널려 있는 것으로 신화와 동화는 한결같이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집안,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심성, 우정과 도움을 빌미로 내민 그의 손길에 시들어버린 생명인지도 모른다.

 

29p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29p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내현>(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 여신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을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30p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 detachment> <변용 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withdrawal)의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역을 평생토록 우리 내부에 간직한다. 우리 유아기의 도깨비들과 은밀한 협력자들, 어린 시절의 마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 뿐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어도 의식할 수 없는 삶의 잠재력, 우리들 자신의 또 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

 

30p 영웅이 첫단계에서 하는 일은, 하찮은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진정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심성의 인과가 시작되는 곳으로 물러 앉는 일이다. 그리고 영웅은 난관을 헤쳐나가되 자시 식으로 그 난관의 뿌리를 뽑고 한달음에 쳐들어가 C.G. 융의 소위<원형 심상>과의 동화 작용을 시도한다.

 

32p 우리가 찾고, 동화해 나아가야 할 원형은, 인류 문화의 연대기를 통해 제의, 신화, 그리고 상상력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촉발해온 기폭제다. 이러한<영원한 꿈들>은 악몽이나, 고통받는 개인의 광기에서 나타나는, 마구잡이 상징적 형태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두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38p 사소한 것일수록 손쉬운 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다이달로스),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38p 아리아드네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사람에게로 달려가 보자. 그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亞麻)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 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 이 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를 훑고, 간추리고 헝클어진 실무더기에서 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38p~39p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p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 레오 톨스토이 백작, 안나 카레리나의 정신적 의절(義絶)을 그린 소설의 서두 -

 

40p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43p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 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43p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43p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성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전설이 실재의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경우라도 승리의 행위는 꿈 같은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지 실물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 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 앞으로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에 명심해야 할 글이다. 실제 내가 경험한 것을 나열하고 단순한 느낌을 투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승리를 묘사해야 한다. 어두운 부분을 지나가는 주인공의 심리, 그것을 통과한 뒤에 주인공이 만끽하는 희열을 그려보자.

 

44p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뜷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 지금 미친 듯이 글을 읽고 책상을 울리도록 타이핑을 치는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44p 시간은 영광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세계는 더할나위없이 천사적인, 더할나위없이 단조롭고 요정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하늘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44~45p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monomyth)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47p(주석) 이것은 서양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태에 대응하는, 동양 신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정각수(보리수)아래와 부처와 십자가 나무(Holy Rood, 구원의 나무)위의 그리스도는 유사한 것으로, 원형적인 세계의 구원자와 태고의 유물인 세계수(World Tree) 모티프를 통합한다. 이 테마의 변형은 앞으로 소개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발견될 것이다. 부동의 자리와 갈보리 산은 세계의 배꼽World Navel, 혹은 세계 축 World Axis의 이미지다. 대지의 여신에게 자신의 권리를 확인시키는 모습은 전통적인 불교 예술의 불상에 나타나 있다. 고전적인 부처의 좌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은 가볍게 땅에다 대고 있다.

 

50p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 그리스인들은, 인류 문명에 대한 최초의 지원으로서의 불과 프로메테우스의 초월적인 행적을 전했고, 로마인들은 세계적인 그들 도시의 창건에 관련된 아이네이아스를 떠올리며 폐허가 된 트로이아를 떠나 무서운 사자의 나라 저승으로 따라나섰다. 장소가 어디 건, 그들의 관심(종교적,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53p 보잘것없는 영웅이든, 탁월한 영웅이든, 그리스 영웅이든, 야만족의 영웅이든, 이방인의 영웅이든, 유태족의 영웅이든, 영웅의 행장은 본질적을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이야기는 영웅의 행위를 주로 물리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고급 종교에서는 영웅의 행적이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험의 형태, 등장인물의 역할, 마침내 승리의 내용물에는 놀라울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

 

54p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54p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의 아들>, 이 이름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지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55p 나는 높은 산 위에 서서 거인과 난장이를 보았다. 천둥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 나는 자세히 들으려고 다가갔다. 그 분은 나에게 이르셨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 그 동안 내 삶은 무언가 되기 위해서높은 곳에 존재한 대상은 나와는 다른 인간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둘이 하나라면, 지금까지 다른 존재의 껍데기만 좇아왔던 것입니다. 내 속에 진짜 알맹이가 있었는데 말이죠. 어쩌면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음에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찾고자 했던 영웅이 내 안에 존재하고, 단지 나의 길을 걸어가면 찾을 수 있었을 것을…….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내 안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진리가 가슴 깊이 새겨지는 순간입니다. 어디에 가든 나는 나와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어루만지며 따뜻한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힘든 고난이 와도 툭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주저 앉지 않을 것입니다. 내 안에 든든한 내가 있는데, 무엇이 두렵고 부끄럽겠습니까? 영웅은 이렇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앞으로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간 것 같습니다.

 

55p 이 둘(영웅과 그의 궁극적인 신,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은 결국, 이 세계의 신화에 다름 아닌 단일한 유형적 신비의 표리로 받아들여진다. 위대한 영웅은 위대한 행적을 통해, 이 다양한 얼굴이 사실은 하나임을 알고, 또 남들에게 알리게 된다.

 

55p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 이 흐름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음식물의 순환, 역학적으로는 에너지의 흐름, 영적으로는 은총의 현현(顯現)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단일한 생명력의 세 단계에 걸친 압출을 나타내면서 다양하게 변한다.

 

58p 풍성한 수확은 신의 은총의 표적이다. 신의 은총은 영혼의 양식이다. 번개를 풍요를 약속하는 비의 전조인 동시에 신이 방출한 에너지의 현현이다. 은총, 양식, 에너지…… 이러한 것들은 나날의 삶이 있는 이 땅으로 내려오는데, 이것들이 내려오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을 뿐이다.

 

59p 높은 산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면, 하늘이 사방에서 땅을 감싸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인즉, 바로 하늘이 감싸준 이 둥근 공간 안에 사람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린 것은 단지 둥지일 뿐만이 아니라 티라와-아티우스께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어주신 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은, 또 친척, 부족, 종족을 대신 나타내기도 한다.

 

60p 가정의 난로, 신전의 제단은 땅이라는 바퀴의 중심이며, 만유의 어머니의 자궁인바, 이 어머니의 불이 곧 생명의 불이다. 그리고 오두막 위쪽의 구멍(혹은 돔의 꼭대기, 첨탑, 정탑)은 하늘의 바퀴통, 혹은 중심점이고, 태양문은 생명의 불에 사른 번제물의 냄새가 이 땅의 바퀴통에서 오르는 연기의 축을 따라 천상의 바퀴에 이르게 되듯이, 영혼이 현재에서 영원으로 회귀하는 통로다.

 

60p 축과 축이 만나면 두 바퀴는 회전한다. 태양문을 통한 에너지의 순화은 연속적이다. 신은 이 태양문을 통하여 하강하고 인간은 이를 통하여 상승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61p 영웅이 태어났고, 역사했고, ()로 돌아간 곳이면 어디든 표지가 서 있고 성역화되어 있다. 완전한 중심을 나타내고 고취시키기 위해 거기에 사원이 세워지기도 한다. 까닭인즉, 이런 곳은 풍요를 향한 돌파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풍요를 향한 돌파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어떤 사람은 영원을 깨닫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곳은 보람 있는 명상의 촉매가 될 수도 있다.

 

61p 이런 사원은 대체로, 중심에 있는 성역이나 제단을 영원한 자리의 상징을 삼고, 세계의 지평선의 네 방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설계한다. 그래서 사원의 경내로 들어가 성역에 접근하는 사람은, 거기에 사원이 있게 한 영웅의 행적을 모방하게 된다. 이 참배자의 목표는, 생명 지향, 생명 부흥 양식의 기억을 내부로부터 환기시키는 한 수단으로서의 보편적인 패턴을 연습하는 것이다.

 

61~62p 전세계의 회교도 사회에서 하루에 세 차례씩 행해지는 기도도 세계라는 바퀴의 살처럼 일제히 카아바 Kaaba를 향한다. 카아바는, 개인 및 전부를 알라의 의지로 <굴복 islam>시키는, 살아 있는 거대한 상징이다. <코란>이 이르듯이, 이는 <너희가 행하는 바 진리를 보여줄 수 있는 분은 그분이기 때문이다.> 부연하거니와, 큰 사원은 어디에든 세워질 수 있다. 결국, <전체>는 도처에 있으며, 도처가 권능의 자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는 한 자락 풀잎도 구제자의 모습을 가릴 수 있고, 이 방랑하는 구도자를 구도자 자신의 가슴에 있는 지성소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62p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62p 헤라이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덕이 높을 필요도 없다. <욥기>에 나오는 신처럼 그들은 인간의 가치 척도를 저만큼 앞지른다. 마찬가지로, 신화도 위대한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는 다루고 있지 않다.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 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 개념을 초월한다. 미덕은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완화시켜 범개인적 중심성을 지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고통이나 쾌락, 미덕이나 악덕, 우리의 자아 혹은 남들의 자아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62p 초월적인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63p 사자의 포효, 이리의 울부짖음, 성난 바다의 광란, 그리고 피를 부르는 칼은 인간의 눈에는 과분한 영원의 편린들이다.

 

64p “둘은 싸울 수 밖에 없었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남들을 싸우게 하는 것이니라도덕 군자가 의분을 금치 못할 대목에서, 비극 서사시인이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낄 대목에서,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을 향해 온전한 모습을 피어난다. 신화의 재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 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65p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66p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1부 영웅의 모험

 

72p 갑자기 등장한 세력 집단의 예비 선언처럼, 기적같이 등장하는 개구리의 존재는 <전령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개구리가 등장하는 운명의 갈림길이 곧 <모험에의 소명>인 것이다. 전령관의 부름은, 여기 이 예화에서 보이듯이 구원에 이르는 길일 수 있으나 당사자 일대기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죽음일 수도 있다. 전령관은 귀한 역사적 사명의 수행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의(秘儀)에서 알 수 있듯이, 전령관의 등장은, <자아의 각성 the awakening of the self>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암시하고 있다.

 

72p 이러한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72p 이러한 소명을 받는 장소로 전형적인 곳은 깊은 숲 속, 큰 나무 아래, 샘가……. 운명의 힘을 전하는 전령관은 혐오감을 주는 참으로 하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세계의 배꼽에 대한 상징으로 인식한다.

-> 몇 년 전에 기()에 대한 책을 읽고 숲 속에 있는 나무를 만지고 다녔다. 단순히 두 손으로 나무를 잡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나무의 기를 느끼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손이 따뜻해져 온다. 좀 더 있으면 나무와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을 얻는다.

 그 다음으로 나무보다 기()가 충만한 씨앗을 만져본 일이다. 안면도 자연휴양림내 산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거대한 야자 씨앗이다. 평일 날, 아무도 없어서 씨앗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나무보다 빨리 손이 따뜻해져 왔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뜨거워 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이지 않는 힘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손을 떼고 나서도 얼마 동안 가슴이 뜀박질했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나를 뚫고 지나가려는 느낌, 자신의 생명을 어디엔가 표출하려는 힘이었다. 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73p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부왕과 함께 누리던 특권과 행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왕의 자식의 경우든, 에덴 동산의 낙원을 떠날 만큼 성숙한 신의 딸 이브의 경우든, 사바 세계의 마지막 지평을 뛰어넘는 순간의 전심 전력하는 미래 부처의 경우든 위험, 안심 입명, 시련과 극복, 그리고 탄생이라는 신비의 기인한 신성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는 똑같다.

 

73p 동화에 나오는 징그럽고 욕지기나는 개구리나 용은, 태양을 입에 물고 솟아오른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73p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혹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 다산성의 상징인 야수(동화에서처럼), 또는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77p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77p 막내 공주의 세계에서처럼, 황금 공이 샘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 뒤, 주인공은 잠깐이나마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오나, 생의 의미는 느끼지 못한다. 이때, 어떤 힘에 대한 일련의 조짐이 나타난다.

 

78p 그러나 부왕의 이런 조치는 오히려 그 시기를 빨리 익게 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이 젊은 왕자는 육체적 쾌락에 진력을 내고, 다른 경험에 목말라했기 때문이었다. 왕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찾아나설 준비가 되는 순간, 적당한 전령관이 때맞추어 나타났다.

 

80p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름<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낙원일 수도 있고 위험의 도가니일 수도 있는 이 운명적인 영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표상된다. 가령 오지, , 지하 왕국, 해저, 천상, 비밀의 섬, 험한 산 꼭대기, 혹은 꿈꾸는 상태로 표상되는 것이다.

 

81p 너희는 불러도 들은 채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아 나에게 등을 돌렸다가 파멸하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놓았다가 나동그라진다.

    예수의 길을 두렵게 여겨라,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82p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신의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생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실패했고, 우리가 보았듯이 엄청난 불운을 겪어야 했다.

 

82p 신성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산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82p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패쇄인 미궁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지 모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83p , 사랑스럽되 눈멀고 약한 자여,

    내가 바로 그대가 찾던 그이니라!

    나를 몰아내던 그대는, 그대 내부로부터 사랑까지 몰아내었다.

 

83p “, 여정이여, 페네우스의 딸이여, 멈추시오! 그대를 좇는 나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그대는 내가 누군지 모르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이오. 원컨대 걸음을 늦추시오. 그래야 내가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어서, 걸음을 멈추고 그대를 사랑하는 이 몸의 정체를 물어보아 주시오.

 

83p 아폴론 신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처녀는 계속해서 달아났다. 아폴론은 할말도 다 하지 못했다. 달아나는 모습까지도 그에겐 아름답게 보였다. 바람이 다프네의 사지를 드러나게 했고, 맞바람이 다프네의 옷깃을 물결처럼 흐르게 했다. 다프네의 아름다움은 도망치고 있어서 차라리 돋보였다.

 신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가족이 떠오른다. 우리 아버지와 동생, 언젠가 꼭 마음의 열리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기도한다.

 

88p 신경증적인 유형과 생산적인 유형을 비교해 보면 전자는 자기 자신의 충동적인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양자는 평균적인 유형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자기를 현재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균적인 유형은, 의지력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다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89p 여자에 등을 돌려야 알라 신을 돈독히 섬길 수 있고,

    여자에게 고삐를 잡히는 사내는 물거품이 된 희망으로 벌금을 문다.

    여자는 요상한 새 노리개를 찾을 때면 사내를 구박하게 마련이니,

    사내는 하릴없는 학문에 천 년 세월을 허송 세월 하는구나……

 

93p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와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護符)를 준다.

 

95p 노파는 말을 마치고 <이방 신들의 깃털>이라고 불리어지는 호부를 주었는데, 이 호부란 두 개의 산 깃털(살아 있는 독수리로부터 뽑아낸 깃털)을 붙인 굴렁쇠 하나와, 두 사람의 생명을 보전케할 산 깃털 하나였다. 지주녀는 또 마법의 주문도 한마디 가르쳐주었는데, 이 주문을 거듭 외면 적의 분노가 가라앉는다는 것이었다.

 

95~96p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지주녀는 그 줄로써 태양의 운행을 통제할 수 있다. 우주 태모의 보호를 받는 영웅은, 어떤 가해도 받지 않는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테세우스가 미궁의 모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단테의 작품에서 베아트리체와 성모라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그레첸, 트로이아의 헬렌, 그리고 성모로 나타나는, 영웅의 보호령이다.

 

96p 성모여, 당신은 살아 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성모여 당신은 하도 크시고 은혜로우시어, 그 은총을 입되 당신을 거스르지 않는 자는 날개 없이도 나는 소원을 이루겠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구하는 자는 물론, 미처 구하지 못하는 자에게까지 두루 미칩니다. 당신의 자비, 당신의 연민, 당신의 품위, 당신의 온갖 미덕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모두 하나가 됩니다.

 

97p  드물지 않게 초자연적인 외부 조력자는 형태상 남성으로 나타난다. 동화에서, 영웅에서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를 해주는 것은 숲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인 것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와 메르쿠리우스이고, 에집트에서는 토트(따오기 비슷한 신)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령이다.

 

98p 보호자인 동시에 위험한 적이며 모성적이기도 하고 부성적이기도 한 이 후견과 방향제시의 초자연적 원리는 그 내부에서 무의식의 모든 다의성을 통합한다. 따라서 의식적인 개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체계 및 우리가 따르는 안내자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후원은 우리의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영역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110p 이것은 최초의 혹은 보호적인 관문 수호자의 정체를 밝혀주는 꿈이다. 모험 당사자는 특정 구역의 수호자에게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살아서든 죽어서든 경험역을 지나려면 같은 세력의 파괴적 측면을 극복하고 이 특정 구역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116p “들어라 도깨비야, 그대는 아직 내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나는 다섯 가지 무기를 지닌 태자다. 그대가 진 치고 있는 이 숲으로 들어오면서 나 역시 활과 칼 같은 무기는 애시당초 믿지를 않았다. 그래, 나는 이 숲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오직 나 자신에 의지하고자 했다. 내 이제 그대를 가루로 만들 테니 그리 알아라

 

117~118p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그대가 나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벼락은 삭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벼락은 그대 뱃속에서 그대를 갈가리 찢어 필경은 그대 목숨을 빼앗을 것이다.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이 두려워하겠는가?”

 

118p 그가 자기 뱃속에 있다고 한 무기는 다름아닌 <지혜>라는 무기였다. 실제로 이 젊은 영웅은 전생의 부처, 바로 그 분이었다.

 

120p 태양 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123p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128p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이 국면은, 기적적인 시험과 시련을 다룬 세계의 문학을 창출해 왔다.

 

128p 영웅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역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129p <어려운 임무>라는 모티프의 실례 가운데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잃어버린 애인 쿠피도(에로스)를 찾는 프쉬케의 경우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기본적 역할이 역전된다. 즉 신랑이 신부를 찾으려고 애쓰는 대신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얻으려고 목을 늘이며, 엄부가 청년으로부터 딸을 지키려고 애쓰는 대신, 시기심 많은 어머니인 베누스(아프로디테)가 신부로부터 자기 아들 쿠피도를 감추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133p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135p 나는 엄청나게 센 힘에 끌려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무시무시한 심연이 있고, 여기저기엔 그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바위가 있었다.

 -> 나의 꿈에서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어딘가로 끌려 가는 것은 누군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 물 속에서 나를 찾은 것은 왜일까? 그 영혼은 나를 깊은 물속에서 잠겨있는 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기 위함이 아닌가? 그래서 깊은 심연에 있는 나의 자아를 수면으로 끌어올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깊은 물 속에서 잠자고 있던 나를 밖으로 끌어내어 진정한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136p 성 불구자였지만 정신분석가의 지시로 상당히 호전된 어느 남자의 꿈이다.

 나는 차에 탔지만 운전할 줄은 알지 못했다. 내 뒤에 앉아 있던 사내가 가르쳐주었다. 운전이 제대로 되어 우리는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에는 많은 여자들이 서 있었다. 내 애인의 어머니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136p 다음 꿈을 꾼 사람은 처녀성을 잃고 고민하던 어느 처녀였다.

 돌 하나가 날아와 내 자동차의 앞유리를 깨뜨렸다. 이제 나는 폭풍우 속에 그대로 몸을 내어맡긴 셈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자동차로 목적지에 이를 수 있을까?

 

137p 다음 꿈을 꾼 사람은 저널리스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시인이었다.

 나는 땅에 누워 있는 반 마리의 말을 보았다. 날개가 하나밖에 없어서 말은 일어나려고 애쓰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139p 우리들이 이어받고 있고, 세계 각처에서 수집된 신화와 전설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직은 인간임을 보여주는 조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142p 발가벗긴 채 이난나는 왕좌 앞으로 인도되었다. 이난나는 공손하게 절을 했다. 황천의 일곱 판관, 즉 아눈나키는 에레쉬키갈의 왕좌 앞에 앉아 욱음의 눈길로 이난나를 노려보았다.

 -> 신화와 영웅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나의 옷은 거추장스러워 진다. 조금씩 그들의 마음을 알아갈수록 나는 옷을 벗는다. 진리의 문구에 눈이 닿았을 때는 나는 이미 벌거벗고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원시상태 그대로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추장스러운 모습이 싫다. 나를 마주할수록 주변인의 시선들이 두렵지 않다. 벌거벗은 채로 글을 써 볼까?

 

144p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로 표상된다. 이로써 영웅은 천저, 천정, 혹은 땅 끝, 우주의 중심점, 신전의 성소, 혹은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방 속에서 위기를 맞는다.

 

145p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153p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철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156p 왕도란 싸움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160p 현대의 정신분석가 진료실에서는, 영웅 모험의 각 단계가 환자의 꿈과 환각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정신분석가는 조력자, 즉 입문식의 사제가 되어 환자의 무의식이 바닥의 깊이를 잰다. 그리고 최초의 단계가 끝나면 환자의 모험은 항상 어둡고, 무섭고, 욕지기나고, 마술 환등 속에서 보는 듯한 공포의 여행으로 진행되게 마련이다.

 

160p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168~170p 대부분의 신화에서 자비와 은혜의 이미지는 정의와 분노로 표현된다. 이렇게 해서 이 정의와 분노 사이에 균형이 생기고, 인간은 파멸을 겪는 대신 어려움을 근근히 이겨나간다. 시바는 신도 앞에서 우주적 파멸의 춤을 추면서도 손으로는 <두려워 말라>는 시늉을 한다.

 두려워 말라, 모두가 신 안에 거하리니. 오고 가는 형상(그리고 육신 역시)은 춤추는 내 팔다리의 한순간 휘저음이다. 나를 아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169p 주석(201p 그림참조): 뻗고 있는 오른손은 북을 들고 있는데, 이 북을 친다는 것은 시간, 즉 창조의 으뜸 원리인 시간을 친다는 뜻이다. 뻗고 있는 왼손은 불을 들고 있는데 이 불을 창조된 세계를 파괴하는 불이다. 두번째 오른손은 <두려워 말라>는 손짓을 하고 있고, 두번째 왼손은 들고 있는 왼발을 가리키고 있다. 이 손은 코끼리를 상징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코끼리는, <세상이라는 밀림을 헤쳐나가는 존재> 말하자면 신적인 안내자다). 오른발은 마귀인 난장인, <무지>의 등에 올려져 있다. 이는 신으로부터 물질에 이르는 영혼의 여행을 뜻한다. 그러나 왼발은 들리어져 영혼의 해방을 상징하고 있다.

 시바신

 

 그런데 <코끼리 형상을 한 손>이 가리키는 왼발은 <두려워 말라>고 한 이유를 보충 설명하고 있다. 신의 머리는, 창조와 파괴의 역동성 안에서도 조용하고 반듯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이 창조의 파괴의 역동성은 팔의 흔들림과 천천히 구르는 오른 발꿈치의 리듬으로 상징된다. 이것은, 모든 사상의 중심은 항상 고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시바 신의 오른쪽 귀고리는 남자의 것이고, 왼쪽 귀고리는 여자의 것이다. 이는 신이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시바의 표정에 떠올라 있는 것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부동의 움직임을 주관하는 존재, 세상의 행복과 고통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이 양자를 품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다. 거칠게 요동하는 머리카락은 인도 요기의, 손질하지 않은 긴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데, 이 머리카락이 인도 요기의, 손질하지 않은 긴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데, 이 머리카락이 목하 생명의 춤과 더불어 흩날리고 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배우고, 은둔의 명상을 통해 깨친 실채는, 보편적이고 비이원적인 존재-의식-행복이라는 동일한 실제의 두 가지 측면이기 때문이다. 시바의 팔찌, 팔고리, 발목고리, 그리고 브라만 사는 살아 있는 뱀이다. 이는, 그가 뱀의 권능에 의지해서 아름다움을 얻었음을 뜻하다. 뱀의 권능은, 신비스러운 신의 창조 에너지다. 시바의 머리카락 사이로는 죽음을 상징하는 두개골이 보이고, 파괴의 주를 상징하는 이마의 장식, 세상에 그가 내리는 은총인 출생과 풍요의 상징인 초생달로 보인다. 그의 머리엔 흰 독말풀 꽃이 꽃혀 있다. 바로 독약을 만드는 풀이다(디오니서스의 포도주와 미사에 사용되는 포도주와 비교해 보라). 머릿단 속에는 여신 간지스의 작은 이미지도 숨겨져 있다. 이는, 그가 머리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간지스의 충격을 받아내어, 인류의 육체적 정신적 안식을 위해 이 생명과 구원의 물을 부드럽게 땅으로 흘리기 때문이다. 이 신의 춤추는 모습은 상징적인 글자인 옴AUM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의식의 네 가지 상태와 그 체험의 장을 나타내는 언어적인 상징이다( A는 깨어나는 의식상태, U는 꿈의 의식, M은 꿈꾸지 않는 잠을 뜻하는데, 이 신성한 음정을 싸고도는 침묵은 언표되지 않은 초월성이다. 이 문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책, 338-340쪽과 341쪽의 각주 15)를 참조할 것). 이렇게 해서 신은 신도의 안팎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형상은, 인각된 이미지의 기능과 가치를 보여줌과 동시에, 우상 숭배자들에게 긴 설교가 필요없는 까닭을 설명해 준다. 신도들은 깊은 침묵속에서, 그리고 홀로 이 천상적 상징의 의미에 젖을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참배자들도 신처럼 팔고리와 발목고리를 패용할 수 있는데, 이는 신의 뜻이 그러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신도의 장식은 뱀 대신 불사를 상징하는 금(삭지 않는 금속)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불사가, 육신의 아름다움인 신의 신비스러운 창조의 에너지인 것이다.

 

170p 주석(201p 그림참조): 삶의 갖가지 양상과 지역적 관습은 신인 동형의 다른 우상에서 유사하게 복제되고 번안되고 따라서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삶 전체가 명상의 보조 수단이 되고 신도들은 항상 침묵의 설법 가운데서 사는 것이다.

 브라만의 사(), 인도의 4 카스트() 중 위로 3 카스트(이른바 환생한)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무명실이다. 이 실은 머리 위에서 오른팔 위로 지나 왼쪽 어깨 위에 얹혔다가 몸을 빗겨 지나(가슴과 등) 오른쪽 엉덩이에 닿는다. 이것은 환생 중의 재생을 상징하는데 실 자체는 관문, 혹은 태양의 문을 표상한다.

 

171p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이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웅은, 아버지의 끔찍한 얼굴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을 다른 곳에다 기울인다(즉 지주녀, 혹은 성모).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71p 나바호족의 쌍둥이 전사는 지주녀의 충고와 호부를 받아 길을 떠난 뒤, 무너져 내리는 바위산, 사람을 토막내는 무서운 갈대숲, 걸리면 갈가리 찢기는 선인장 밭, 끊는 사막이라는 험한 길을 지나 마침내 아버지인 태양의 집에 이른다. 문 앞에는 두 마리의 곰이 지키고 있었다. 두 마리의 곰은 쌍둥이 전사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지주녀가 가르쳐주던 주문을 외자 곰은 잠잠해졌다. 곰에 이어, 한 쌍의 뱀, 바람, 번개가 차례로 쌍둥이를 위협한다. 이들은 마지막 관문의 수호자들이었다.

 

177p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 <>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여기엔 새로운 경쟁자적 요소가 틈입한다. 즉 아들은 세계를 셥렵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고 딸은 섭력된 세계 자체가 되는데 있어서 어머니를 경쟁자로 삼는 것이다.

 

180p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위대한 아버지 뱀의 몸 <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상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대신 남근을 세운다.

 

190p 분명히 자기 모순적인 아버지인 신비는, 비라코챠Viracocha라는 이름의 선사적인 페루의 이야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비라코차의 관은 태양이다. 그는 양손에 벼락을 들고 있고 그의 눈에서는, 세계의 계곡에 사는 생명을 소생시키는 비가 눈물로 흘러내린다. 비라코치는 만유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자다. 그런데도 지구에 내린 그의 모습을 전하는 전설에는 그가 누더기 차람에 손가락질이나 받는 거지로 등장한다.

 

190p 이 이야기는, 베들레헴 여관 문전을 기웃거리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문전에서 걸식하던 제우스와 헤르메스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장난꾸러기 신 에드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신화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는 주제다. <코란> <어디로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 신이 계시도다>라는 말을 이를 암시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속에 숨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191p 자연계의 부수적인 양극성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즉 이글거리는 태양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고, 한 쌍의 대립적인 원소인 불과 물의 배후 에너지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192p 시간의 본질은 유동하며, 한 순간 존재하던 것의 흐름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은 유동하며, 한순간 존재하던 것의 흐름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다. 신의 자비,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을 통해, 이 데미우르고스(조물적)적 인간 중의 인간은 저 고해로 몸을 내맡긴다. 그러나 행위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경우, 그가 사출하는 정액은 곧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195p 티베트, 중국, 일본의 대승 불교에서 가장 영험이 있는 분으로 믿어지고 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살은 연꽃을 들고 다니는 관세음보살이다. 이 분은 존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대자대비로 굽어보시는 주>라고 불린다.

 

196p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신의 은혜 안에서 중생을 돕는 존재로, 중생의 존재 안으로 삼투한다.

 

196~197p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고 신적인 상태 divine state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만물에는 불성이 있으니>, (같은 말을 달리 하자면)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197p 세상에는 도처에 보살(존재와 본질이 대각에 이른 자)이 있고, 보살의 광명을 받고 있지만, 세상이 보살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살이 세상, 즉 연화를 들고 있다. 고통과 쾌락은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가 고통과 쾌락을 깊은 휴면 상태로 구속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라고 하는 존재, 그의 형상,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이다.

 

206p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빰을 치거든 다른 빰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는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207p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207p 구세주가 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은 끝내 꺼렸던 복음은 하느님은 사랑이며, 하느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자질구레한 신조, 예배의 방법, 교회 행정조직의 설립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서양 신학자들은 여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무슨 중요한 종교 문제인 양 덤빈다)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가르치는 일 자체에 부수적인 문제가 생기는 정도의 현학적인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 퇴영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207p 주석 107)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되<(마태28:19)>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윽박지르거나 약탈하거나 속권에 넘기지는 말라고 일렀다.<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마태10:16)

108) 칼 매닝거 교수는 유대교 랍비, 개신교의 목사, 가톨릭의 신부가 이따금씩 개괄적인 그들의 이론적인 차이에서는 화해하는 일이 있으나, 영생과 관련된 종규나 규정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면 그만 사정없이 갈라서고 만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메닝거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교회 강령은 모두 완벽하다. 그러나 이러한 종규나 규정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는 자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한낱 말장난이 되고 만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라마크리슈나가 이미 내린 바 있다. <신은 각기 다른 신도, 시대, 국가에 맞추느라고 서로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 그 교리에는 여러 가지의 길이 있다. 그러나 길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심 전력으로 어느 길이든 따라가면 누구든 신에 이를 수 있다…… 얼음 과자를 가로로 먹든 모로 먹든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 먹든 달콤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 단순히 교단이 틀리고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이단으로 규정짓는 한국 교회의 모순을 말해주는 것 같다.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규정을 우선시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신보다 자신을 믿는 인간의 모습이다. 교회가 사업화되면서 신의 믿음도 상업화 되는 것 같다. 전도 또한 자신의 믿음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모양새다. 이런 점에는 나는 라마크리슈나가 내린 해답이 명쾌하다.

 

213p 보살에 대한 첫번째 경이로움은 바로 이것, 즉 보살이라는 존재의 양성구유적 성격이다. 이 보살과 만남으로써 분명히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 서로 만난다. 신화의 대립적인 모험이란 여신과의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다. 여신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입문자는 남성과 여성은 둘이 아니라 <쪼개진 완두의 두 쪽>임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화해 과정에서는, 아버지는 성()을 선행하며, <>라는 대명사는 말의 방편이고, 지도적 원리로 확립된 부자 관계의 신화는 말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살 신화에서 주목해야할 할 두 번째 경이로움은, 보살이 삶과, 삶으로부터 해탈의 차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살이 열반 Nirvana을 단념한다는 사실로 상징되고 있다. 열반이란 말은,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끈다>는 뜻이다.

 

215p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215~216p , 어둠, 등잔, 환영, 이슬, 거푸, , 섬광, 그리고 구름. 이런 것들은 마땅히 보이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보살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생각을 초월하는 진리(이는 언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라고만 불린다) 안쪽에서 다시 바깥의 현상계를 바라보면서 보살은 이미 안에서 깨달은 동일한 존재의 바다를 바깥에서도 지각한다.

 

216p <형상()은 빈 것<>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빈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빈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218p 영원한 생명이 그들 안에 깃들여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 그들과 만물이 사실은 영원한 생명임을 아는 사람은 소원을 성취시키는 나무 숲에 거하며 불사의 영주를 마시고, 들리지 않는 도처의 영원한 화음을 듣는다. 이들을 일러 신선 Immortality이라고 한다.

 

219p 손님은 뜰길을 따라 들어와, 허리를 구부리고 문을 들어서야 한다. 이어서 그림이나 꽃꽂이, 소리를 내며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에 예를 표하고 바닥에 정좌한다. 통제된 단순성에 의해 지배되는 극히 단순한 분위기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 안에서 무한한 존재의 비밀을 안은 침묵으로 일관된다. 손님은 자신과 관련된 경험을 묵상할 수도 있다. 다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축소된 우주를 명상하고, 그 축소된 우주와 불사의 선인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222p <나무, 바위, , ,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無情物)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222p 주석 129) 임제선의 비조 임제가 어릴 적에,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 법당 안에서 방뇨하자 스승이 몹시 꾸짖었다. 어째서 거룩한 부처님 계신 곳에서 방뇨하느냐는 꾸중을 듣자 임제가 되물었다. <그럼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을 일러주십시오. 거기에 가서 누겠습니다.

 

223p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224p 이것은 대립물의 벽이 허물어지고 입문자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낸 신의 시계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위대한 모순에 대한 진술이다. 남성의 형상 오른 손에는 그 자신과 쌍을 이루는 벼락이 있고 왼 손에는 여신을 상징하는 방울이 있다. 벼락은 질서이자 영원성이며, 방울은 <교화된 마음>이다 방울소리는 피조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순수한 정신을 가진 자들이 듣는 영원의 아름다운 소리다. 따라서 이 소리는 내면의 소리다.

 실제로 이와 똑같은 방울은 기독교 미사에서 성별(聖別) 선언의 능력을 통해 하느님이 빵과 포도주에 강림할 때 사용된다. 기독교도들이 읽는 의미도 동일하다. <말씀은 곧 육신이다> <보석이 연화 속에 있다>인 것이다.

 

231p 육체와 영혼의 양식, 마음의 평화는 다름아닌 만병 통치약, 즉 마르지 않는 젖꼭지가 내리는 은혜다. 올륌포스 산은 그 끝이 하나에 이르도록 솟아 있고, 제신과 영웅들은 거기에서 암브로시아(신들이 먹는 불로불사의 음식)로 잔치를 벌인다.

 

 

235p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신학의 분위기에서와는 달리, 익살은 철두철미 신화적인 것의 시금석이다. 우상으로서의 신들의 존재는 존재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연출하는 유쾌한 신화는 그들 수준의 마음과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나 그 배후의 무()에 이르게 한다. 이 무의 경지에서 보면 삼엄한 신학적 교리는 교육적인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학적 교리의 기능한 무능한 지성을, 구체적인 사실과 사상의 덩어리로부터 비교적 순화된 공간으로 이행시킨다. 이 공간에서는, 궁극적인 은혜로 모든 존재(천상적, 지상적, 혹은 악마적인 것까지)는 덧없고 주기적인, 단순한 행복과 불안의 유아적 꿈과 비슷한 상태로 변해 보인다. 티베트의 어느 라마 승은 서양에서 온, 이 방면에 생소한지 않은 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이들 신들은 실재하지만 달리 보면 이들은 실재 하지 않는 것입니다.”

 

248p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靜溢)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 합일은, 곧 바라보는 사물과 사람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가 자연을 보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연과 우리의 마음이 합일된 것입니다. 지나가다 다친 새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또한 마음으로 합일된 것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고 느끼는 그대로 마음이 가는 것이 합일입니다. 생각이 끊어진 곳에 도가 있습니다.

 

248p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249p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든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어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리 우주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에 대한 자각이다.

 

 

253p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헤의 시문, 황금 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도 한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천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 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256p 내 주심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지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을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256p 이윽고 저는 제 길을 찾아 신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저를 동아리로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끝납니까? 안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모두, 주님이신 신이시여, 당신의 손으로 꾸미신 계약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이 태어나고, 고통을 받고, 나이를 먹고, 죽는 헛된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동안 그들은 죽음의 주재자와 맞서다 갖가지 정도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 모두가 당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저 역시 당신의 희롱에 말리어 이 세상의 제물이 되고, 허물의 미로를 방황하고 자아 의식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렸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대, 당신의 실제(끝없고 자비로운)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262p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업이다.

 

264p 교리적 상징의 유용한 기능은, 개인이 무턱대고 나서지 않는 한 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 준다는 거이다. 그러나 그가 집과 가족을 떠나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황하고, 심연의 거울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무서운 만남 자체가 그에게 재앙일 수 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꽃피어 왔던 전통적인 상징 체계는 이때 영약으로 작용하여, 살아 있는 신의 치명적인 공격무대를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269p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76p 거울과 칼과 나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된 형상의 장을 상징한다. 거울을 통하여 신은 자신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 기쁨은 현현 혹은 <창조>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칼은 벼락에 해당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280p 이제 우리는 이 여행의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모험은 서곡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신화 영역에서 일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281p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282p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288p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360도라는 원의 중심각도 전체성을 뜻한다. 힌두교나 푸라나에 따르면 신들의 1년은 인간의 360년에 해당한다.

 

290p 신성한 인물 속에 충만한 이 신성성, 주술력도, 훌륭한 양도체와 다름없는 대지와의 접촉으로 방전, 고갈되어 버린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신성한 인물이나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은 이 신성성, 주술력이 방전, 고갈되지 않도록 땅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물에게 그 신성한 실체가 목구멍에 이르기까지 충만되어 있도록 하려면, 전기용어를 빌려 말해서, 이러한 인물과 대지 사이엔 절연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신성한 미덕에는 일촉에 즉발하는 고폭성이 있어서 터지거나 방전하거나 누출되지 않도록 예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93p 여자의 욕정은 남자의 욕정보다 더 사나운 법. 이윽고 공주는 자기가 품었던 욕정을 깨닫고 자기 자세를 수습했다. 공주는 자기 자신의 태도를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 공주는 그의 손가락에 끼여 있던 그의 반지(그가 뽑아간 자기 반지가 아닌)를 뽑아 자기 손가락에 끼고는 그의 온몸에 고루 입을 맞추었다. 이윽고 공주는 한 손을 그의 목 밑으로 넣고 다른 한 손으로도 그의 어깨를 안아 자기 젖가슴 쪽으로 바싹 당긴 채 그의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298p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받는 자들이다.

 

305p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305p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케나 우파니샤드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305~306p 크리슈나는 아르쥬나가 익히 보아온 모습을 보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베다(經典)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무서운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보시(布施:널리 베푼다)를 행한다 하더라도, 또 의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또 의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네가 본 나의 이 최고의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을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예수는 똑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6p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 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 부딪치는 순간을 직면할 때, 살려고 긴장하며 힘을 준다면 몸은 크게 다치고 만다. 하지만, 그 상황에 힘을 풀고 몸을 맡겨버리면 충격은 당신 속에 흡수되어 지나가 버린다. 상황 속에 몸을 맡겼을 때 하나됨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나는 경험했다.

 

307p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307p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의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308p <사람이 마치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고 새 것을 입는 것처럼,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그 실재도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 것으로 옮겨가신다. 칼이라고 해서 이를 벨 수 없고, 불이라고 해서 이를 태울 수 없으며, 물이라고 해서 이를 적실 수 없고, 바람이라고 해서 이를 시들게 할 수 없다. 벨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은 모든 존재의 심연에 두루 퍼져 불면이요. 부동이다. 따라서 이 실재는 언제나 하나이니라.>

 

313p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영웅의 모험

 

317p 구조가 단순한 원질신화가 보이는 다양한 변화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화 중에는 전체 이야기의 전형적인 요소(시련 모티프, 도망 모티프, 신부 사취)의 한두 가지를 따로 떼어 부연 하는 설화도 있고, 일치된 연속 이야기(가령 <오딧세우스 이야기>처럼)로 꿰어맞추는 설화도 있다. 다른 인물과 에피소드가 녹아 들어올 수도 있고, 단일의 요소가 되풀이 되거나 상당히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319p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는 그 영원히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322p 기독교를 향한 우리들의 입문 의식이었던 이 세례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예수의 말에는 이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의 말씀에 니고데모가 물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세례에 대한 일반의 해석은 <원죄를 씻는 의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재생이라는 측면보다는 정화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차적인 해석이다. 또 설혹 전통적인 탄생의 이미지가 기억되고 있다 해도 이에 선행하는 결혼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 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 나는 운이 좋게도 세례를 받을 때, 머리에 물을 뿌리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었다. 온전히 온 몸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세례를 받았다. 물 속에 들어갈 때, 잠시 동안 숨을 못 쉬는 느낌을 통해서 죽음을 느끼고,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새로 태어남을 느꼈다. 직접적인 체험도 중요하지만, 본인 스스로 어떤 의미를 두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세례를 받음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하느님 안에서 천복을 누리고, 사랑을 하고 진리를 통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325p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27p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간단하게 공식화한 이 보편적인 교리는, 이 세계의 가시적인 모든 구성물(사물과 존재)은 편재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331p 정신분석학자들은 천국, 지옥, 신화적 시대, 올륌포스 산 및 그 밖의 신들의 거처는 모두 무의식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현대의 심리학적 해석 체계의 열쇠는 바로 <형이상학적 영역=무의식>이라는 등식이다. 이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면 전후항을 바꾼, <무의식=형이상학적 영역>이라는 등식이다. <보아라,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

 

332p 영웅의 모험은, 그의 살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나타낸다. 이 순간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우리의 살아 있는 죽음의 어두운 벽 너머의 빛의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다 .

 

333p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상징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타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333p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즈테크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4(곧 물, , 공기, )가 각 세계의 주기를 끝맺는다. 즉 물의 시기는 홍수로, 흙은 지진으로, 공기는 바람으로, 그리고 현재의 주기는 불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338p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각성),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에 관한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 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

                                                                                                    

339p 우주 발생적 순환은, 현현의 세계로 나아갔다가 미지의 침묵이 지배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힌두교에서는 성스러운 음절인 < AUM>으로 이 신비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A>는 깨어 있는 의식을 나타내고, <U>는 꿈 의식, <M>은 깊은 잠을 나타낸다. 이 음절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은 미지의 것으로, 그저 <네 번째>로만 불린다. 이 음절 자체는,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 신을 뜻하나, 침묵은 순화의 개방 및 폐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영원한 신이다.

 보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 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339~340p 신화는 이 순환 속에 머문다. 그러나 신화는 이 순환을 침묵에 둘러싸인 형태, 순환과 침묵이 서로 삼투하는 형태로 드러낸다. 신화는, 존재하는 원자 안팎에 충만해 있는 침묵의 계시록이다. 신화는, 고도로 세련된 형상화 작업을 통하여 마음과 가슴을, 모든 존재를 채우고 둘러싸고 있는 궁극적 신비로 향하게 하는 풍향계다.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보여도 신화 체계는 마음을, 가시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현현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342p 성 토마스 아퀴나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342~343p 오히려 신화 체계의 문법을 숙지하고 나면 비극적이란 표현은 천만부당하게 느껴진다. 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존재는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꿈으로 존재한다.

 꿈 속에서 그런 것처럼 신화에서는 이미지가 최상의 경지에서 우스꽝스러운 상태에 이르기까지 안주하지 못하고 뜻밖의 각성 체험을 통하여 끊임없이 모욕을 당하거나 충격을 받는다. 마음이 정상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마음이 좋아하는 이미지나 전통적인 이미지에 안주하려 할 때 신화 체계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미지가 메시지 자체라고 옹호하면 안 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눈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 무용하고, 마음이나 신앙이 좇지 못하는, 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던져진 그림자로 파악되어야 한다. 평범한 꿈이 그렇듯, 이러한 신화도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 나는 환타지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꿈 이야기도 쫗아 한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아마도 나의 이야기도 신화적인 세계, 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를 쓰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나의 키워드를 이 책에서 알아냈다. 신화와 꿈이다. 내가 쓰는 이야기가 어떤 장르가 되었든지, 앞으로 내가 이야기를 그려나가는데 있어서 정보 수집의 키워드는 신화와 꿈이다.

 

347p 하늘과 땅이 서로 나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혼돈이라고 불리어지는 어둠의 거대한 덩어리였다. 여기에서 다섯 요소(五大)의 정기가 형상을 갖추니, 이어 다시 노인으로 변했다. 첫 번째로 나타난 현인은 누런 노인이니 곧 흙의 주인이고, 두 번째는 붉은 노인이니 곧 불의 주인이었으며, 세 번째로 어두운 노인이니 곧 물의 주인이었다. 네 번째로 나타난 것은 나무 왕자(木公)로 나무의 주인이었고, 다섯번째는 쇠 어머니(金母)이니 곧 쇠붙이의 여주인이었다.

<중국의 오대(五大)는 土, , , , 金이라는 오행(五行)이다.>

 

353p 우주란의 껍질은 공간에 떠 있는 세계의 뼈대요, 그 안에 있는 풍요한 생식력은, 식을 줄 모르는 자연계 생명력의 역동성을 나타낸다.

 <공간은 넓게 펼쳐진 것이 아닌, 오목한 형상으로 끝이 없다. 존재하는 것존재하지 않는무한 위로 떠 있는 껍질이다.>

 

356~357p 이 세상에 현현하기 전의 각 영혼과 정신은 한 덩어리로 똬리진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땅에 내리면서 두 부분은 서로 나뉘어 서로 다른 몸에 살게 된다. 결혼할 때가 되면, 찬양할진저, 영혼과 정신을 아시는 거룩하신 이께서는 이를 예전대로 묶어주시니, 이 둘은 다시 하나의 몸, 하나의 영혼이 되어, 한 인간의 오른편과 왼편이 된다…… 그러나 이 결합은 남자의 행위, 그가 세상을 사는 방법의 영향을 받는다. 그가 정결하고, 그의 행동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으면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짝이었던 영혼의 여성적인 부분과 제대로 짝하게 된다.

 

357p 이 신비주의의 경전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는 대목을 주석하고 있다. 비슷한 사고 방식은 플라톤의 <향연>에도 등장한다.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인간,동물,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에 대한 앎>을 손에 넣은 셈이다. 바야흐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해서 이 세상을 한유하며>, <,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경지인 것이다.

 

365p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을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373p 민간 신화들은 초자연적 발산물이 공간적 형식을 취해 돌입해 들어오는 순간에만 창조 설화를 흡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신화들은 인간의 상황을 평가한다는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위대한 신화들과 차이가 없다.

 이런 신화 체계의 상징적인 등장인물은 의미상(특징 및 행적에서도) 고급 종교의 성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치하며, 이 등장인물이 넘나드는 불가사의한 세계는 위대한 계시의 세계, 깊은 잠과 깨어 있는 의식 사이에 놓인 세계와 시간, 하나가 여럿으로 갈라지고, 여럿이 하나와 화해하는 지대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380p 우주적 여신은, 여라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389p 이것은 신화에 나타나는 영원한 테마요, 선지자의 목소리로 듣는 귀에 익은 절규다. 사람들은 이 영혼과 육체가 더불어 뒤틀린 세계에서 다시 한 번 화신(化身)한 심상의 시가를 읊어줄 사람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우리는 우리의 전승 신화에 버릇 들어져 있다. 신화는 어느 곳에든, 갖가지 얼굴로 존재한다.

 

390p 어느 날 마리아는 항아리를 들고 우물 가에 서 있었는데, 주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마리아여, 축복을 받으라. 네 자궁은 하느님께서 거하실 차비가 끝났음이라. 하늘에서 빛이 내려 너에게 거할 것인즉, 그 빛은 너로 인하여 세상을 비출 것이다

 

392p “그 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이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으로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400p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과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며,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 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09p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이곳은 의외의 존재, 자비로운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의 영역이다. 천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아기를 도와주는 동물, 어부, 사냥꾼, 쪼그랑 할머니, 혹은 농부가 나타나기도 한다. 동물들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은 지그프르트처럼 생명의 나무 뿌리를 파먹는 땅귀신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 작은 방에서 혼자 자라면서 (이런 이야기는 도처에 널려 있다) 이 어린 세상의 신참자는, 헤아리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권능이 있음을 배운다.

 

410p 신화는, 그러한 체험을 견디고, 거기에서 살아나오는 데는 범상하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개가 힘이 세고, 영리하고, 또 지혜롭다.

 

419p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물결이 물밑의 바닥에서 번져나오듯, 우주의 형상도 이 근원에서 둥글게 퍼져나간다.

 

422p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428p 적과 싸워서 장악하는 주도권, 괴물과 싸워서 획득하는 자유, 폭군의 족쇄에서 풀려난 에너지는 여성으로 상징된다. 이 여성은, 수 많은 용을 죽인 영웅의 애인이며,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유괴되어 온 신부며, 부정한 애인으로부터 구출된 처녀다. <영웅과 영웅의 상대역인 여성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처녀는 영웅 자신의 <다른 한쪽>이다.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그러나 영웅이 자기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사상에 현혹될 때 영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432p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심장한 개념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영웅의 상징이 명검이라면 두 번째 영웅의 상징은, 권위의 홀장, 혹은 율법서다. 첫 번째 영웅의 특징적인 모험이 신부(신부는 곧 삶이다)를 얻는 것이라며, 두 번째 영웅의 특징적 모험은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곧 보이지 않는, 미지의 존재다.

 

434p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 체계다.

 

434~435p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영웅은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증거한다. 스승으로서(모세), 혹은 황제로서(후앙 티), 그의 말은 곧 법이다. 이제 근원에 접한 영웅은 중심과 정적과 조화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는 수많은 동심원이 퍼져나가는 중심인 세계의 축World Axis, 세계 산 World Mountain, 세계수 World Tree에 비추인 영상이다. 그는 대우주 Macrocosm의 완벽한 소우주적 거울 microcosmic mirror이다. 이제 그에게서 은총이 만방으로 퍼져나간다. 그의 언어는, 생명의 바람이다.

 

440p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444p 삶의 너머에서 존재하는 이런 영웅은, 신화를 초월한 영웅들이기도 한다. 그런 영웅들은 이 삶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다루려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을 신화도 다룰 수 없다. 그들의 전설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나, 경건한 자세와 그들의 전기와 전하는 교훈은 진부한 상투적 문구에서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들은 형상의 영역을 떠나 고귀한 존재의 화신이 하강하는 곳, 보살이 머물렀던 곳, <거대한 얼굴>의 옆모습이 <현현하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신비에 싸여 있던> 옆얼굴이 드러나면, 신화는 부차적인 언어이며, 침묵이 궁극적인 언어가 된다. 정신이 신비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남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445p 영웅의 전기 마지막 장은 영웅의 죽음, 혹은 (저승을 향한) 떠남의 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전생애가 요약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음에 겁을 먹는다면 그 영웅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마땅히 무덤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453p 샘 속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소년에게 달려와 소년을 껴안으면서, 자기네 자식이 집으로 들어왔다고 즣아했다. 이렇게 해서 소년은 아버지와 고모들을 찾게 되었다. 소년은 거기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찾았노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소년은

 <이제 이 곳에 살 필요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고는 집을 떠나 샘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거기에 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소년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458p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이것은 바로 개인이 소멸되는 순간, 사자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기도다. 즉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462p 단테의 <신곡>은 이 단계들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연옥편>은 육신의 욕망과 행위에 얽매인 영혼의 창달함을, <정화편>, 육신의 경험이 영혼의 경험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천국편>은 정신적 자각의 단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471p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따로 와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에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지 말아라. 그런 일이 꼭 일어나고 말 터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473p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모을 것이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고 연해지고 잎이 돋으며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 에필로그

478p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479~ 480p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무명의 세포가 사라지듯이, 개인이 속한 세대는 사라지고, 시간을 초월한 형상만 남는다. 이러한 초개인(super individual)을 수렴하려는 비전의 확대를 통해, 개인은 이전 보다 더 고상해지고, 풍부해졌으며, 또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이제 인간의 시야는 넓어졌다.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482~483p 나는 저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죽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들도 아니다. 내 몸은 병들거나 나이를 먹는다. 내 팔, 내 눈, 내 머리,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니다. 내 직관력이 아니다.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그런 경지에서는 되돌아나올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경지에서 미합중국, 어이어디에 사는 모모 씨라는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사람도 없다. 요컨대 사회와 의무는 분리된다.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한 아무개 씨는 내성적이며 초연한 인간이 된다.

 이것이, 나르키소스가 호수를 내려다보는 단계이며, 부처가 보리수 아래 앉아 명상하는 단계다. 그러나 이 단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필요한 단계이지 목적은 아닌 것이다.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 단계가 끝나면 입문자는 본질 자체처럼, 고삐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돌게 된다. 뿐인가? 세계라는 것 역시 그 본질이다. 개인의 본질, 세계의 본질…… 이 둘은 하나다.

 

483p 이 표적의 중심에 이르면, 이기주의나 이타주의의 문제는 사라진다. 개인은 율법 안에서 자기를 잃고, 우주의 전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재생한 것이다. 세계는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486p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국부적인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선전이 난무하는 것이다. 난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협박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다.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나의 부모님, 직장 상사, 동료들, 지하철에서 마주친 사람들, 나와 인연이 맞닿아 있는 사람들, 나의 스승 이 모든 사람들이 신을 모습으로 나의 인생을 주관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설정들이 떠오른다.

 

487~488p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가 아닌 <>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88p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 역자후기

489~490p <우주의 역사>(M. 엘리아데, 정진홍), <샤마니즘>(M. 엘리아데), <인간과 상징>(C.G. , 졸역, 1977), 그리고 본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같은 저자의 4권으로 된 주저 <신의 가면>이다. 이러한 책들은 신화학, 종교학, 심리학적 관심을 두루 싸잡는, 말하자면 인간적이 것을 앞세워 관심하는 분야의 책이다.

 

490p “시인적 본성은 심리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고, 심리학적 관심은 신화에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토마스 만의, 참으로 무릎에 손이 가는 말이 있듯이, 인류 일반이 공유하고 있는 오리엔테이션의 현대적 양상이 바로 이 분야와 맥을 함께 하지 않을까 싶다. 

 

490p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융파 심리학의 입장(인간은 무의식 속에다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집단 무의식을 고유 하는데, 꿈의 구조물인 원형 패턴은 곧 고대의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타낸다는)을 원용하면서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 인간의 정신 운동을 규명하는 한편 현대 문명에 대해 하나의 재생 원리까지 제시하려는 야심적인 작품이다.

 

492p 오랜 세월, 우리 숨 줄이 닿아 있던, 우리 육즙이 층층이 묻어 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되,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 신화나 종교를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와 경직된 흑백의 논리에 길들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걸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랜 역사 살림을 꾸려온 민족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곳 없던 민중의 문화가 <미신>으로 업어치기를 당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 정신과 각자의 자유를 겨운 정신적 편력의 간증이 <사탄>의 소리 수작으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중의 문화와 종교를 고루 짚어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뜻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크게 ‘1부 영웅의 모험‘2부 우주 발생적 순환’(목차 오타로 수정함)으로 나뉜다. 4장씩 소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영웅의 모험에서 소 제목과 내용의 연결 흐름이 좋지만 ‘2부 우주 발생적 순환에서는 큰 제목부터 따로 떨어진 느낌이 난다. 소 제목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자는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가지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라고 언급했다.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다. 그렇다면 ‘2부 우주 발생적 순환의 또한 앞서 말한 세 단계의 공식을 활용하거나 큰 제목을 <영웅의 재탄생>으로 바꾼다면 연결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리고 상징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한 만큼 단순한 약호(略號)나 두문자(頭文字)을 활용하여 제목을 정하고 구성을 잡았다면 신화와 상징의 관계를 부각되고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담겨있는 수 많은 이야기도 1부에서는 인용한 이야기들이 저자의 사상과 잘 어우러져 중심을 잘 잡고 있는데, 2부에서는 신화, 옛이야기, 동화, 민화 등 너무 여기 저기 등장시켜서 내용과 접목하여 힘들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여러 나라의 영웅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욕심을 버린다면 주제와 어울리는 이야기를 가지고 길게 이어나갈 수 있고 그러므로 해서 독자의 가독성 또한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인간의 마음이 신화 시대부터 오랜 진화의 과정을 밟아 오는 동안 신화적 요소는 하나의 <바탕되는 틀>이 되어 무의식이 가장 중요한 내용물을 구성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얼굴을 가진 영웅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 가지 아쉬움 점이 있다면 오늘날의 영웅의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면서 공감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다. 비록 현대의 영웅 이야기가 여러 이해관계로 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다뤄보고 싶은 마음이다. 아니면 위대한 영웅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도 좋은 흐름으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환타지 영화와 소설을 좋아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을 떠올려 보았다. 앞으로 내가 그려가고 싶은 주인공도 가상으로 만들어 등장시켜 보기도 하고, 캠벨이 이야기한 영웅 모험의 표준 궤도에 대입시켜 여행을 떠나 보내기도 했다. 그러서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구나, 전혀 동 떨어진 상상 속의 삶이 아닌 현실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나를 찾아 떠나는 모험도 결국에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나를 재발견하면서, 처음부터 영웅이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여행이 되었다.

이 책은 처음 프로로그 부분에서부터 나를 붙잡았다. 한참 머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히려 뒤쪽보다 앞에서 감명 깊은 내용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구절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이제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내 안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진리가 가슴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어디에 가든 나는 나와 마주할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어루만지며 따뜻한 사랑을 전할 수 있어 좋다. 힘든 고난이 와도 툭 털고 일어날 수 있으며, 다시 주저 앉지 않는다. 내 안에 든든한 내가 있는데, 무엇이 두렵고 창피하겠는가? 이렇게 영웅들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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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9 06:28:52 *.154.223.199

한젤리타 브라더시여^^ 시바의 사진과 영웅의 모험도를 스캔까지 한 성실한 리뷰 잘 보았습니다. 성실하고 정성이 듬뿍 든 리뷰에 마음이 가다듬어 집니다. 파랑색, 빨강색과 초록색 글자까지....와 대단하십니다. 신화와 꿈이 글쓰기의 주제가 될거라구요? 그리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신다구요? 3번 읽기 책으로 팔팔이들이 책을 엮어보세요 라는 사부님의 말씀에 미리 한 권씩 정했지요. 번개모임에서요. 거기서 한젤리타님이 변신이야기를 맡고 제가 신곡을 맡는다고 읽었어요. 세린낭자가 보내준 메일을 통해서요. 독실한 크리스찬인 한젤리타님이 어떻게 변신이야기를 고르셨을까 궁금했는데 이해가 됩니다. 신화와 꿈을 이후 글쓰기의 주제로 선뜻 삼고 싶을 만큼 거기 매료되시는군요. 잘 알았습니다. 또 알아가겠습니다.

 

저자에 대한 조사에도 감탄했어요. 다른 책들을 찾아가며 조셉캠벨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에 대해 조사를 하셨군요. 토마스 만이 60년동안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작업을 한 줄은 처음 알았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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