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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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M 브라운 / 백상열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저자에 대하여
Robert Mcafee Brown
1920년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콜럼비아대학과 아머스트대학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도 옥스포드, 성 앤드류, 노틀담 등의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했고, 유니온 신학교, 스탠포드대학 등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쳤다. 선교신학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면서, 해방신학 연구다로서도 깊잉 있고 예리한 비판적 안목을 보여주었다. 그의 주요 저서 가운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Bible speaks to you), <새로운 기조의 신학>(Theology in a New Key), <뜻밖의 소식>(Unexpected News) 등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변역/출판되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 귀
서론
13.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잡는 것은 세상의 무질서에 대한 항거의 시작이다. -칼 바르트
16. 기도와 같은 "영적인" 문제는 정치와 같은 "해방"의 문제와는 분리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것이다.
18. 자본주의 사회의 끝없는 경쟁 속에서, 그들의 외형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경쟁의 압력을 이길 수 있는 방법과 그들의 그러한 마음을 채워 줄 마음의 평화, 그리고 파괴적인 혼돈의 힘을 평정케 할 온갖 방도를 찾고 있다.
19. 이 책은 영성과 해방이 동일한 것을 말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임을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접근방식을 제공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 하나를 선택할 필요도 업고 가능성조차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23. 갑판이 깨끗이 정리됨으로써 새로운 제안이 출범할 수 있게 된다.
29. 구별들, 이분법들 --> 이것들은 우리 삶에 의미를 더해주거나 또는 좋은 해명의 도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지, 이 세상은 어떠한지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도록 할 뿐이다. 기만은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엄청난 속임수인 것이다.
34. 독재자들 : 네 운명을 받아들이라. 육체적 중노동 가운데서 '영적' 해방을 찾아라,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 그러면 하느님이 저 세상에서 갚아주실 것이다.
오해들
영성은 저 세상적이다.
영성은 개인주의적이다.
영성은 소수에게만 유보된 노력이다.
영성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동력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해방은 이 세상적이다.
해방은 지나치게 공동체 지향적이어서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한다.
해방이 지나치게 "사람들에 의한" 노력이 됨으로서 "민중"의 일부가 아닌 사람들은 소중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
해방이 변화를 위한 노력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내면적인 삶을 위해서는 아무런 여지도 없다.
단순한 종합을 한다고 해도 탁월한 기만은 극복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48. 하나로 합쳐져야 할 두 개의 분리된 세계가 있다고 하는 저 탁월한 기만의 전제를 우리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러한 전제의 가정 안에서 작업한 것이고, 그리고 탁월한 기만을 제거하기보다는 그것을 확증하는 결론을 만들어냈다.
49. "물러남과 되돌아옴", 일상생활의 혼잡과 모방성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은 때로 중요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필요한 일이며, 그리하여 일상의 세계에서는 우리들에게 숨겨져 있는 보다 깊은 실제와의 접촉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뿐 아니라 하느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도 새롭게 일게 된다. 그리하여 이 깨달음의 선물들을 다시금 우리들의 일상의 삶의 요구 속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된다.
☞ 영웅의 모험과 귀환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51. 물러남은 그 자체로서 고귀한 것이나 그것은 또한 '되돌아옴'을 위한 것이다.
52. 시나이 산의 모세는, 자 이제 하느님을 발견했으니 여기서 콘도미니움이나 한 채 짓자고 하면서 산 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52. 토인비 "고독 속에서의 변모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다. 변모된 인격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애초에 유래한 사회적 환경으로 되돌아가는 것 뿐이다."
53. "물러남과 되돌아옴"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그것을 다른 두 세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변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단일 세계의 한 부분에 잠시 집중하는 한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 사진이 '물러남과 되돌아옴'을 위한 지금 이 순간의 좋은 도구가 되는 이유는, 사진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부분에 잠시 집중하게 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본다면..
57. 하느님의 창조 속에는, 처음에는 매우 고독하게 시작했을지라도, 마침내는 모든 것이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63.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저 특별한 바위의 특별한 색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재서 하늘의 푸르름을 보면 우리는 즐거운 마음이 생기는가? 어째서 기록된 어떤 것은 우리에게 분노를 자아내고 또 기록된 미가 우리에게서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가?
63. 이 모든 경우에 일어나는 것은 사진을 넘어서, 사진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우리의 견해를 넘어서 비범한 실재로 인도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들이다.
63. 충만한 삶이란 만질 수 있는 뼈대 안에서의 만질 수 없는 현존을 포함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저것 없이는 이것을 결코 가질 수 없으며 마침내 그것들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mindfulness
66. "내적이고 보이지 않는 은혜"(용서, 권능의 부여, 하느님의 임재에 관한 의식)는 "외적이고 보이는" 그리고 일상적인 평범한 표식(한 조각의 빵, 한 잔의 술, 한 모금의 물)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70. 성서는 온갖 잡동사니의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71.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과 대결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한 인간의 수단인 것이다.
73. 성서는 매우 세상적인 책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매우 세상적이기 때문에.
74. "구원"의 본래적 의미는 건강, 전체성, 유익한, 건전한, 온전한 이다. 곧 분열의 극복!
75. 성서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느님은 한 백성, 한 공동체를 계약의 관계로 불렀고, 아브라함, 사라, 아모스, 드보라 같은 개인들은 그 공동체외의 관계에 의해서 그들이 진정 누구인지를 발견한 것이라고 말한다.
76. 사캐오는 "주님, 나는 이제 비로소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또 속임수를 써서 돈을 모아왔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장 사람들에게 제가 착복한 것을 네 배로 갚도록 하겠습니다."
☞ 회개란 이렇게 구체적인 것이다. 정의와 공동체와의 새로운 관계회복!
78. "너희는 너희의 잘못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 어떻게 그것을 바로잡을 것인가?"하고 예언자는 묻는다. "그렇다면 들어라 야훼께서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즉 정의를 행하고, 부드럽게 사랑하며, 하느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다." -미가 6:8-
☞ 의롭게 행한다는 것은 자비를 베푸는 것과 하느님과 함께 겸손히 걷는다는 뜻, 어느 것이 먼저 와도 같은 말이다.
84. 때로 훌륭한 작가는 맨 첫 장을 나중에 쓰기도 한다.
85. 지금 여기서의 삶에는 엄청난 가능성이 있다.
87. 창조는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 엔트로피의 법칙을 이겨내기 위하여. 무기력에서 살아있음의 경험으로!
89. 화육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삶, 육의 삶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하느님에 관한 것으로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적 제한성, 좌절, 분노 등을 겪는 분이다. 우리는 어딘가 딴 곳에 가서 하느님을 찾을 필요는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이미 와 계시고 거기서 우리를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95. 기도, 명상, 금식, 내적 자성 등은 전통적인 훈련들이다. 예수께서는 그 중 어떤 것을 제안하셨을까? 위의 것 중 그 어느 것도 예수께서는 제안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그는 수건과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다가 지금 막 먼지나고 당나귀 똥이 널려져 있는 길을 샌들 신은 발로 걸어 온 더럽고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신다.
95. 일그러진 발가락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예배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98.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세상은 예수께서 이러한 말을 하는 순간 그 즉시 하느님의 지배로 바뀌어 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세상은 새롭게 보이고 피하거나 또는 전투적으로 들어가야 할 낯선 영역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사져야 할 고향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 주위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상적인 것들은 우리가 전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의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99.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 다음의 마르코의 말은 "회개라할"이며 그것은 "뒤돌아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라.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재건설의 조건은 허물어뜨리고 흩어버리는 것이다.
101.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자아추구로부터 영성으로 바꾸어준다.
102. "예배"는 그저 단순히 "민중의 일" 또는 "민중이 하는 일"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어디에서 하든지 사람들이 하는 그 일"을 의미했던 것이다.
105.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형제와의 관계를 올바로 수립해야 하며 그 행위는 이미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수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10. 흔히 말하는 "거룩"은 흔희 말하는 "세속"의 도움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거룩"과 "세속"을 분리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여기 만큼 어려운 곳도 없다.
111. 주의 식탁에서 빵을 떼는 "단순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해서 그들로 하여금 민중들 가운데서 방이 결핍된 상태를 영구화하는 억압적 구조를 깨뜨리는 보다 복잡한 행동에 참여토록 한다.
113. 삶이란, 꽃이 상징하듯이, 서로 주고받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서로에게 주는 선물의 행위인 것이다. 꽃은 시들고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125. 마르틴 부버 "피조물은 하느님에 이르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 자체가 바로 하느님에 이르는 길이다. 인간은 서로 나란히 살도록 창조되었고 인간의 삶은 서로 함께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129. 사랑은 사람들 사이에 가능한 가장 깊은 교제를 가능하게 하며 또한 함께 나누는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본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존재할 때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며 거기에 '영원한 당신'이 있는 것이다.
133. 만약 내가 배가 고프다면 그것은 신체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내 이웃이 배가 고프다면 그것은 영적인 문제다. -니콜라이 베르쟈에프-
133. 우리 시대에 있어서 거룩에 이르기 위해서는 행동의 세계를 지나가야 한다. -댁 함마슐드 유엔 사무총장-
134. 영적 = 위험한 것, 그것이 모험을 요구하고, 우선적인 것을 변경시키며, 소중한 우리의 자아를 포기하도록 하며, 우리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리고 질서 있는 우리의 삶에 불안을 주고 위험을 줄지 모르는 여러가지 것들을 요구한다는 사실!
141. 소브리노 ,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145. 구띠에레스 "영성은 공동체의 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사막의 고독과 위험을 개척하면서 통과해 가는 민중의 순례다. 이러한 영적 체험이 우리가 마셔야 하는 우물이다. 이러한 영성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약속을 앞당기는 것이다."
145. 처음부터 끝까지 구디에레스는 영성에 관해 진수하고 있다. 구티에레스는 시종일관 해방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148. 하나는 다른 것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독특하다.
156. "세계는 있는 그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세군도-
158. 바울은 "세상과의 연대를 비파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순응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금욕주의는 그것이 "미래를 위해서 현재에 저항할 때는 혁명적인 것이 된다."
159. 필요 이상으로 내가 더 가지거나 필요한 것 보다 네가 덜 가지게 되면 나는 이미 너에게서 "도둑질"을 하게 되는 셈이고 따라서 훔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163. 영성과 해방의 일치에 대한 회복은 책속의 모든 글에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야 한다.
164. 희망은 아름다운 두 딸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이다. 분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며, 용기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다. -어거스틴-
168. 우리가 하느님의 실재를 어떻게 축하할 수 있겠는가? 파티를 여는 것이다!
176. 죽음은 슬픔과 함께 희망으로 축하된다. 한 가족에 대한 대학살, 마을에 대한 방화, 살인부대의 "방문", 커피농장 일꾼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 또는 탁아소 등에 대한 무지막지한 습격이 있을 때, 사람들은 장례식을 위해 모여든다. 참석자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 그들은 차례로 대답한다. 프레센테!(나 여기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살해된 희생자들의 이름이 차례로 호명된다. 그때 참석자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죽은 자들을 대신해서 대답한다. 프레센테!(나 여기 있습니다!)
177. 우리가 그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은 그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위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과제를 떠맡는다.
185. 우리가 역사의 무대로 나서야 한다. 영성과 해방, 해방과 영성, 프락시스, 샬롬... 등을 선포하는 행위들은 단지 칭송받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표지와 지침들로서 우리를 향해 거기 있는 것이다. 이것이 따라야 할 그 길이라고 그것들은 우리를 향해 말한다. 너는 길 옆에서 단지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무대로 나서야 한다. 너는 이제 공동체의 일원이다. 너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당신이 구하는 그 생명은 결국 그 누군가의 것이 될 것이다.
이 책에 대하여
이 책을 읽은 것이 대학교 2학년 쯤 되었을 꺼다. 그때 나는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옳음과 그름, 진보와 보수로 세상을 보았다. 저자는 나를 호되게 내리치고 통합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절판되어 검색조차 안되는 책이 되었다.
개교회 중심적인 보수적인 교회의 설교에 염증을 느끼던 나는 사회 참여적인 신학도 있다는 것에 환호했었다. 특히 '영성과 해방'이라는 이 책의 관점은 신선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이웃과 함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지극히 물질적인 한 조각의 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질 수 있다는 말이 나의 이분적인 사고를 깨뜨렸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야 할 현실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 뒤에 '회개하라'라는 마가의 말이 과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힘이 되었다.
이 책의 영향으로 난 바로 창신동의 민중교회를 찾아가 공부방 자원교사 활동을 시작했다. 창신동 그 언덕길을 오르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들과 내가 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교 근처에서 재개발로 인한 철거민 대책위가 생겼을 때에는 그곳에 공부방을 만들어 아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진보적인 기독동아리 활동을 했고, 작은 민중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나의 20대를 만들어준 책이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신학의 관점을 전해주는 책이다. 개념적인 이야기들이 많고 그를 뒷받침해주는 사실적 이야기가 부족하다. 어찌 보면 강단위에서 행해지는 설교, 선포와 같다고나 할까? 구체적인 사실의 분석이 더해진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세상의 모습은 어떠한지 더 명확히 그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직관형의 사람들 뿐 아니라 감각형의 사람들에게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서 더 대중적인 책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균형 잡힌 시각, 그러나 새로운 시각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여기에 구체성을 더해 '일상적인 것에서 고귀한 것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대중적인 글을 쓰도록 노력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