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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4일 01시 50분 등록

52. 피로사회 한병철

 

1.     저자에 대하여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에 1982년 당시 학부를 마치고 독일으로 가 프라이부르크와 뮌헨에서 철학과 독일 문학, 천주교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 후 바젤 대학에서 철학과 강사로 재직하였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2010년부터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의 철학/미디어이론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문분야는 18세기에서 20세기 철학, 윤리, 사회철학, 현상학, 문화철학, 미학, 종교철학, 미디어철학 등이다.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 사상가들을 배출한 독일의 서점가에서는 요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즉 자분주의적 인간상을 고발하고 있는 책들이 독일인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맹목적인 경쟁, 완성에 대한 집착, 성과를 위한 자기 착취 등 자본주의에 병든 인간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특히 최근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 다큐멘터리 저널리스트인 플로리안 오피츠의 <슬로우> 그리고 유명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컬럼니스트 클라우스 베를레의 <완벽주의의 함정> 등이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피로사회>자본주의화된 인간은 스스로를 착취한다라는 메시지를 담아 2010년 독일에서 출간 당시 전 독일이 그에게 열광했다. 까닭 모를 우울증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원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야만 하고, 무조건 할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긍정이 인간을 피곤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계를 넘어서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하는데, 한계를 뛰어넘어 더 많은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사회 구성원 전반을 짓누르고 있는 번아웃신드롬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도올 김용옥 만나다.

한병철 : 독일의 김용옥이라고 할 수 있는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가 총장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분은 강의 한번 하면 3000명씩 모일 정도로 독일 사회를 자극하는 사람이에요. 도올 선생님은 왜 동양사상을 서양에 알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십니까?

 

김용옥 : 한 교수가 독일어로 <피로사회>와 같은 책을 쓴다는 것은 독일 정신세계로 들어가 독일인으로 써야 하는거죠. 그래야 독일 사람한테 읽히는 거에요. 나는 <논어>, <대학>, <중용>, <효경> 같은 동방 고전 한글 번역 시리즈를 내고 있어요. 내 책들은 독일어로 번역하면 독일 사람들이 못 읽어요.

: 독일어 잘하는 사람이 번역을 해도 이해를 못할 거에요. 동양 사상을 서양에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양철학 얘기를 하지 않는 겁니다. 서양의 언어로 서양과 다른 사유의 상황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죠. <피로 사회>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피로사회>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장자>의 무용지용 즉 쓸모 없는 것의 쓸모입니다. 하지만 서양사람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자가 아닌 서양작가들을 통해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이지요.

 

: 그것이 유일한 통로일 겁니다. 한교수는 독일어 속에 살고 있고, 나는 한국어 속에 살고 있는 거죠.

 

: 서양인들은 동양철학 번역서를 그들의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하이데거가 <도덕경>을 번역했는데, 노자의 를 기독교의 과 연결하는 것처럼요.

 

: <도덕경>도를 도라 하면 상도가 아니다는 구절에서 상도를 한국사람들조차 영원한 도로 번역합니다. 영원 불변이란 개념은 전통적 동양 사유와 거리가 멀어요. 동양인에게 모든 도는 시간 속에서 항상스러운 도, 항상 시간과 더불어 가는 도라는 의미죠. 이런 얘기를 평생해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한국말이 얼마나 서양화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저는 하이데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데리다 연구로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서양철학자입니다. 15권의 책을 독일에서 펴내긴 했으나, 늘 동양적 사유를 염두에 두고 있죠.

 

: 동서양을 떠나 인류의 가장 큰 과제는 막세 베버가 이야기하듯 초월적 신화로부터 벗어나는겁니다. 그런데 공자, 맹자 등은 신화가 아니에요. 역사적 상황이고 적나라한 인간의 이야기지요. 이데아적인 전제가 없어요.

 

: 서양철학,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주의 조차도 신화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에서> ‘피로개념을 접해 본적이 있죠. 이성을 서양 전통의 기하학적 이성이 아닌 넓은 생물학적 의미로 재정의합니다. 인간이 더 잘살기 위해 하는 노력이 다 이성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에게 피로란 이성-삶의 엔트로피를 줄여주는 생명의 약동 같은 것-의 반대개념입니다. 즉 피로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인거죠.

 

: 제가 피로사회에서 하려는 말과 같습니다. ‘성과사회라고도 규정하는데 이는 삶을 좋게 가꿔나가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 많이 내는 데 중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에 인간을 착취하던 힘이 타인의 강제와 규율이었다면, 현대는 자기가 자신을 착취합니다. 우울은 성과사회의 질병이죠.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 시대의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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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얇은 책이다. 페이지수도 얼마 되지 않고, 글씨도 작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듯 했다. ‘우울이 내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라니. 그것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외치게 만든 사회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게 만드는 사회에서 남들은 다하는데 내게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지는 패배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것도 허상에 불과한데 말이다. 모두가 허상에 젖어 있으면서 그 허상 때문에 괴로워한다. 저자의 책에 왜 독일인들이 열광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의 통찰에 사랑을 듬뿍 담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참고자료>

1)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B%B3%91%EC%B2%A0

2)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703653&cloc=olink|article|default

3)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225173

 

2.     내가 저자라면 내 책에 적용하기

-       간결하다 : 얇고 가벼운 것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이 참 좋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어서.

-       인용문의 활용 : 저자는 본문 사이에 한나 아렌트 등 다양한 서양철학자들의 의견을 공유하고, 비판한다. 인용문을 보자마자 이 사람은 인용되는 모든 책들의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구나.’란 느낌이 들었다.

-       피로사회/우울사회로 나누고 피로사회만 작은 목차로 나뉘어져 있다. 목차만 봐도 저자가 무엇에 더 무게를 두고 전달하려는지 알 수 있다.

-       저자가 한국사람인데 왜 굳이 다른 이가 번역을 했을까? 라는 의문은 들었다. 저자가 직접 썼다면, 더 쉽게 쓸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전문용어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서, 번역을 너무 어렵게 한 것 아닌가? 란 생각이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내 책에 활용하기

특히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였다. p6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 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p7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 긍정성의 과잉. 무조건 할 수 있다. 시크릿. 끌어당김의 법칙. 온갖 자기계발서와 성공학에서 이야기하는 단어들이 떠오른다.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없다. 본인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범위도 다양하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p12

→ 타자성보다는 이질성이라는 단어가 더 와 닿는다. ‘다름으로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다양한 기준들. 정답을 정해놓고, 오답을 가려낸다. 그러면서 사회는 점점 평준화된다. 다양성 역시 사라졌다. 그런데 이제 다름이 아닌 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차이차별과 다르다고 한다. 다양성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가능이란 없어졌다.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p13

 

이민자나 난민은 위협이라기보다는 짐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p15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궁핍한 시대에 사람들은 흡수와 동화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과잉의 시대에 이르면 문제는 거부와 배척이 된다.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과잉은 인류 전체의 저항력을 떨어뜨린 위험으로 작용한다. p18

→ 거부와 배척. 이는 정치권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덜 가지는 것이 전체의 저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출현은 대한민국 전체, 아니 그 동안 무심하고 거부했던 젊은 사람들의 저항력을 응집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p19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p21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p22

→ 무조건 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창조성의 발현이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창조성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긍정이 대량화 되어도 버텨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치기 십상이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p23

→ 경영, 특히 자기경영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거북스럽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p24

→ 성과사회는 우울증과 낙오자를 만든다는 내용에 완전 공감한다. 남들과 비교해 스스로가 뒤쳐진다고 생각하기에 우울해지는 것이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생상선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p25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 우울한 자가 되려고 하는 자기 자신은 과연 무엇일까? 자기 자신의 모습조차 스스로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제시하는 틀 안에서만 자기를 그리려 한다. 그리고 그 틀이 아무리 애써도 맞지 않는 사람은 곧바로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수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p27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p27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과연 일과 능력의 피로 중 어떤 것에 더 큰 영향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하던 일과 능력은 얼마만큼이었을까? 그들은 왜 그 사회적 요구에 그토록 부응하려고 애썼는가?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p28

 

성과주체는 승과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p29

 

깊은 심심함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p31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p32

→ 단순한 분주함. 재생과 가속화라는 단어가 지금 단순작업을 하고 있는 내게 와 닿는다. 나는 단순하게 분주하고 싶지 않다.

 

사색적 삶은 아름다운 것과 완전한 것이 변하지 않고 무상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존재 경험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삶의 기본 정조는 사물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조작 가능성이나 과정성에서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감이다. p34

 

오직 깊은 주의만이 눈의 부산한 움직임을 중단시키고 제멋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연의 손을 묶어둘수 있는 집중 상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사색적 집중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면 시선은 그저 불안하게 헤매기만 할 뿐, 아무것도 표현해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 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p36

→ 부산한 자가 높이 평가 받은 시대가 없었다니. 희망적이다. 그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활동적 삶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 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개인의 삶이 근대에 와서 인류 전체를 지배하는 삶의 흐름 속에 완전히 잠겨버렸으며 아직 남아 있는 능동적인 개인적 결단의 가능성은 오직 더 잘 기능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p39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 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노동을 통해 인류의 익명적 삶의 과정 속에 용해되어버릴 만큼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p40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p41

→ 밥과 존재. 밥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호모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 신분 증명 서류가 없는 사람들, 무법의 공간에서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산소 호흡기에 묶인 채 간신히 연명만 하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p43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p44

 

사유의 체험에 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카토의 경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p45

→ 아 요즘 내 생활과 100% 싱크. 공감된다.

 

원래 이 경구는 키케로가 <공화정에 대하여>에서 자기 말의 근거로 삼은 것으로, 아렌트가 인용한 부분에서 키케로는 광장과 북적대는 궁중에서 벗어나 사색적 삶의 고독 속으로 돌아갈 것을 독자에게 촉구하고 있다.

그녀는 바로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무엇보다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p46

 

보는 법의 교육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47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지금까지 무조건 ‘yes’를 외쳤던 나를 돌아본다. 같이 일 하자고 하면 별다른 고민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사색이 필요하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48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 그래서 여유가 중요하다.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p49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p50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절시킬 것이다. p51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p52

→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는 힘이 내게 필요하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p53

 

바틀비의 경우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는 무위의 부정적 힘도 아니고 정신성에 본질적인 중단의 본능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런 의욕도 없는 무감각 상태의 징후이다. 바틀비는 결국 그러한 의욕 상실과 무감각으로 몰락하고 만다. p56

 

바틀비 역시 결국 그런 무덤 속에 떨어져 완전한 고립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복종적 주체이다.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 표징인 우울증의 증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은 바틀비의 감정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p57

→ 과연..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 복종적 주체로서 완전한 고립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열등감, 실패에 대한 불안 등이 감정목록에 필수적인 삶 중에

 

아직 관습과 제도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바틀비는 우울한 자아-피로를 초래하는 과중한 자아의 부담을 알지 못한다. p58

→ 이 문장을 보는 순간. 현 시대의 결혼한 여성과 미혼인 여성이 떠오른다. 관습과 제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 물론 정확히 대입하고 비교하기엔 무리가 따를 수 있겠지만.

 

바틀비는 자기 자신을 지시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지도 않는 형상이다. 그는 세계 없이, 멍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존재한다. p59

 

자네에게 여기 있다는 것이 비난 받아야 할 죄가 되는 건 아닐세. 그리고 보라구. 여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슬픈 곳도 아니야. 저기 하늘이 있고 여기 풀이 있어.

 

죽음의 왕국 한가운데 유일한 생명의 신호로 남아 있는 작은 잔디밭은 그저 희망 없는 허무감만을 강화할 따름이다. p61

 

단식곡예사에게 자유의 감정을 주는 것은 오직 거절의 부정성뿐이다. p62

 

월가의 이야기탈창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탈진의 이야기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외침은 한탄인 동시에 고발이다. “, 비틀비여! , 인간이여!”

 

피로사회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p66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지쳤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함께 그렇게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사람,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p67

→ 피로는 모든 감각들을 마비시키나보다.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는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피로는 특별한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한다.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 한트케는 이를 두고 눈 밝은 피로라고 말한다. p69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합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p72

 

미주

하이데거의 불안뿐만 아니라 스르트르의 구토역시 전형적인 면역 반응이다. 실존주의는 강한 면역학적 특징을 지닌 철학 담론이다. 실존주의 철학의 자유에 대한 강조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질성과 타자성 덕택이다. p76

 

관용이란 본질적으로 면역학적 범주이다. 관용되는 것은 바로 이질성이기 때문이다. p77

 

우울사회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자기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p82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자처하는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p83

 

프로이트적 자아가 해내는 일이란 무엇보다도 의무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에게서 초자아의 위치를 점하는 것은 양심이다.

칸트의 주체 역시 프로이트적 주체와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분열된다. 이 주체는 어떤 타자의 명으로 행동하지만 그 타자는 자기 자신의 일부인 것이다. p84

 

이러한 양심의 일이란 인간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얻게 되는 일이지만, 인간은 이성적 판단으로 자기가 그 일을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명에 따라 행하도록 강제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의 분열 때문에 칸트는 양심을 지닌 주체를 이중 자아또는 이원적 인격으로 규정한다. p85

 

나르시시즘에서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소멸하는데, 이는 자아가 결코 뭔가 새로운 것. ‘다른 것과 마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 마주치는 모든 것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자아 속에서 익사한다. 경험하는 인간은 타자와 마주한다. 경험은 이화적이다. 반면 체험은 자아를 타자 속으로, 세계 속으로 연장시킨다. 따라서 체험은 동화적으로 작용하다. p88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 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히스테리는 심적 억압, 금지, 부인과 같이 무의식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부정성을 전제한다. p90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 없는 인간이다. 더욱 일반화하여 말한다면 후기근대의 자아는 성격이 없다. 카를 슈미트는 진짜 적이 단 한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내적 분열의 신호라고 말한다.
→ 적이 단 한명에 그치지 않는다. 적이 많지 않은 나로썬. 이후에 오는 내적 분열의 신호라는 말이 절대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는다.

 

슈미트가 살아 있다면 페이스북의 수많은 친구들은 그에게 후기 근대적 자아가 성격 없고 무형적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여겨질 것이다. p91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p92

 

지칠 줄 모르는 우울증의 부상은 20세기 전반에 주체가 겪어내야 했던 변형의 두 차원을 관통한다. 이 두 차원이란 심리적 해방과 정체성의 불안정, 도는 개인의 주도권과 행동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p93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 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고엏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속에서 마모되어 간다. p95

 

부재하는 자와의 부정적 관계가 멜랑콜리의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서함으로써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멜랑콜리가 비범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었다면 우울증은 비범한 것이 대중화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에 평등을 더한 것이며, 민주적 인간의 전형적 질병이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자주성에 지쳐버린사람, 즉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힘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는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p97

 

우울증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오는 것이라면, 멜랑콜리는 히스테리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부정성의 현상이다. p98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것이다. p101

→ 나와 경쟁하기보다 그저 지금 이대로의 나로서도 행복하고 싶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면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p103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은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 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p104

 

호모 사케르는 신의 명령을 위반하여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자를 말한다. p105

 

우리 모두를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저주는 성과의 저주이다.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성과주체, 호모 리베르, 자기 자신의 주권자, 자기 자신의 경영자를 자처하는 주체는 바로 이러한 성과의 저주에 빠져 스스로를 호모 사케르로 만든다. 그러니까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니체의 주권적 인간은 실은 탈진한 성과주체에 대한 문화비판적 대항 모델로서 여유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p111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p113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p114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p121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 한병철이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남과의 상대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가 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오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증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p123

→ 절대 경쟁까지는 이해가 됐다. 한가지만 잘하면 뒤에 이어지는 ‘20개의 가까운 교과목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매력적이었을 이 구호가 결국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 착취하는 성과주체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이 의견은 실로 놀랍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교육의 형태란 무엇일까? 결국 교육은 각자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주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각자가 가진 재능과 능력을 따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 이들은 무엇이든 잘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각자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정해져 있다. 탁월하게 잘 할 수 있는 것, 적당히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죽어도 잘 해낼 수 없는 것. 이런 교육이 가능해진다면, 포기를 알게 될 것이다. 적당한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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