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 조회 수 2213
- 댓글 수 6
- 추천 수 0
조선소(造船所) 연가
(May Day에 부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 국내 고용유발 효과 1위 산업, 반도체 산업에 이은 두 번째의 국가 경제적 위치, 전 세계 수주 실적/생산 실적 1위, 연간 400척에 이르는 건조량, 매출의 90%를 해외로 수출하는 효자 산업, 업계 종사자 약 18만 명.
산업에 대한 화려한 수식이 철 지난 양복을 차려 입은 투박한 농부만큼이나 나에게는 어색하다. 비록 산업 전체를 싸잡아 지칭할 때는 그 화려함이 돋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에게 그런 수사는 어디까지나 객체의 이야기로 들릴뿐이다.
어느 산업이든 잘 나가는 시기에 그 화려함의 대부분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의 몫이다. 이때 남 말하기 좋아하는 언론은 그들의 윗자리만큼이나 우아한 경영의 치적을 선전하기 바쁘다. 반면, 부진을 면치 못할 때는 생산성을 입에 오르내리며 노동자의 기술력을 탓하며 갑자기 노동자에서 ‘머릿수’로 바뀌어지고 이내 易의인화 되어 ‘내 피 같은 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경영학의 아버지라 추앙 받으며 과학적관리법을 주창한 제국의 ‘테일러’라는 사람은 ‘노동자에게 머리가 왜 있는 것인가?’라며 앵글로 색슨 특유의 무식함을 학문화 시키기도 했지만(나는 왜 그런 천박한 학문에 경도되었는지) 오늘날 진보된 경영’기술’은 Great Work Place를 운운하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자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어떤 시기를 놓고 보아도 배를 만들어 내는 조선소의 노동자들의 면면은 말처럼 그리 우아했던 적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머릿수’에 지나지 않는 잉여다.
그 때문일까. 모아놓은 잉여, 8천명의 인생이 제 각각의 연장을 들고 있는 조선소는 칼리 여신이 지배하는 성소(聖所)와 같다.
축구장 세 배 크기의 거대하지만 말 못하는 짐승 같은 배가 ‘끄응’하고 물에 뜨는 순간은 그녀의 모성적 평화가 주는 환희다. 한편, 작업 중에 추락하여 골수를 쏟아내거나 철판에 허벅지가 끼여 뼈가 으스러질 때는 그녀의 비인간적이고 무가치적인 권능이 주는 잔인함이 함께 한다. 조선소는 그 대립물들이 마치 ‘자가 생산을 위한 양극화’인양 움직이는 인간의 성소인 것이다.
그래서다. 많은 수식어 중에 유난히 내 시선이 멈추어 지는 곳은 업계 종사자의 수. 그들이 먹여 살릴 가족과 전, 후방 산업의 연관 종사자까지 합하면 기십만을 족히 넘기고도 주리*(거스름돈의 사투리 말)가 남을 그 머릿수다. 나의 시선을 만유인력으로 잡아당겨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예전, 조선소에서 당신의 젊음을 바친 사람이 키운 자식이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한 여름 60℃를 넘어가는 철판에서 꿈쩍 않고 불질을 했고 할머니는 새벽이슬이 처진 어깨를 적셔도 선체(船體)에 붙어있는 녹을 긁어내고 또 긁어냈다. 세상 가장 밑바닥의 일터, 그래 맞다, 그 일터를 특별히 일러 우리들은 ‘조가다’라 불렀다.
내 나이가 지금 내 자식들의 나이와 같았을 때, 용접 불똥으로 구멍 뚫린 아버지의 런닝은 새하얀 런닝보다 익숙했고, 할머니 속옷에 파스텔처럼 물든 녹물은 처음부터 그런 줄 알았다. 어느 순간 당신들이 그 일도 힘에 부처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잦은 파업과 사고로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동료들의 죽음 자리, 그 옆자리에서 당신들의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 공포를 눌러가며 다시 일해야 했고 열악한 노동 환경을 위해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 간 동료의 얼굴과 내 자식새끼의 얼굴을 포개고는 애써 고개 숙이며 끝내 일해야 했음을.
값싼 감정에 호소하는 노동운동가(그들의 가치를 결코 폄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진 진정한 ‘예수’의 모습이라 생각한다)의 절규는 적어도 나에게는 필요 없다. 그때 보다 나아진 게 없는 산업의 현실이 이미 나에게는 자의든 타의든 내 소명이 되었다. 그네들의 딸린 식구들, 그 푸른 작업복을 아침 저녁으로 봐가며 크는 그들의 자식 새끼들을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일할 수 없다. 그들 하나하나는 그네들의 등을 보고 자라는 제 자식들의 영웅이며 매일 환희와 공포, 떠남과 귀환을 반복하는 영웅들이니 말이다. 나는 그 ‘왜소한’ 영웅들의 일터의 경영 전반을 다루는 일이니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식은 땀을 내어도 모자랄 일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거창한 의도를 계승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아직도 잉여로 남아 있는 ‘천한 밑바닥’(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케케묵은 말로 ‘천함’에 대한 변명을 생각하지는 마시라. 우리 마음속에는 아주 명징하게 그 기준이 자리잡고 있을 터)을 생각하자. 이 땅에 영웅이 아닌 노동자는 없고 모두가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하는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 ‘존재 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다. 내 안의 영웅을 깨우듯 내 부모와 주위의 모든 ‘영웅’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일어나 한참을 박수 친다. 내일은 May Day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