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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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제발 묻지 않았으면 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결혼 하셨어요?”
나는 아이 엄마입니다. 남편은 없지요. 나이를 먹다 보니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난처합니다.
한 두 번 보고 지나칠 분들이 결혼 했냐고 물어오면 “네. 했어요.” 라고 대답합니다. 역시 그런 분들이 결혼은 아직이냐고 물어오면 “네. 아직이예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들과의 관계에서는 나의 결혼 여부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계가 지속되는 분들이 물어오는 건 다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솔직해 대답해야 하지요. 나의 결혼 여부는 중요한 일이 아니나 관계에서 속이거나 숨기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잖아요.
질문은 나에게 현실을 설명할 것을 요구합니다. 최대한 간단하게 끝내고 싶은데 그것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네” 라고 답할 경우 따라나오는 질문은 “남편 분은 뭐하세요?” 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음을 말해야 합니다.
“아니오.” 라고 답할 경우 “소개팅 하실래요?” 라는 질문이 따라올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아이가 있음을 말해야 합니다.
대답을 하고 나면 정적이 흐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시간이 멈춥니다. 누군가의 목에서 꿀꺽하며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립니다. 파티가 한창일 때 흥이 깨어집니다. 잠시 후 아무 일 없다는 듯 상황은 계속됩니다. 난 싫습니다.
누구에게나 공개하고 싶지 않은 상황 하나쯤은 있게 마련입니다. 대학에 떨어졌든, 취업에 실패했든, 부끄러운 실수를 했든. 감추어 말하고 싶지 않은 상황들이 있지요. 나만 알고, 그게 아니라면 소수만 알고 묻어둘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닌데. 서로가 만나는 데 있어서 내 결혼 여부가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제발 이 질문만은 하지마라.’ 속으로 기도하는데 사람들은 꼭 그걸 물어옵니다.
순간의 정적. 싫습니다. 그들의 머리가 돌아가는 만큼 내 머리도 돌아갑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어느 정도는 사정이 궁금할 테고, 왜 이런걸 물었냐며 자책도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 사정을 보고 그들의 상황에 안도할 수도 있고, 날 안쓰럽게 볼 수도 있겠지요. “이젠 괜찮아요.” 라고 대답해주고 싶은데 그들은 나에게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점점점(.....)의 시간이 흐른 후 화제는 다른 곳을 향해있습니다.
내 상황이 일상적이라 싫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이라 더욱 싫습니다. 남들 다 하는 일이라 끔찍합니다. 더 싫은 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작아지는 나입니다.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보아도 머릿속은 복잡합니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사고만 치던 문제아라고 생각할까요? 대책 없는 말괄량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나마 부모 잘 만나 호사를 누리는 철없는 어린아이? 혹시나 이 일로 나와 거리를 두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나는 더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데, 그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이 일로 그들이 나에게 대한 선입견을 가질까 걱정됩니다. 그들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욱 움츠러듭니다.
니체는 “Amor Fati”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운명애(運命愛)’라 번역되는 데 운명이라는 어쩌지 못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니체는 조금 어렵지만 이 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운명에 처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변화시킬 수 없는 순간도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노력만으로 탈출구를 만들어낼 수 없는 순간이지요. 그 어쩔 수 없는 순간까지 나의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으로 운명을 극복하고,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하라는 의미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있는 법입니다. 결과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멀어지는 가족들을 한데 모으려 노력했습니다. 깨져가는 가정을 이어 붙이려 노력했습니다. 많이 울고 많이 고민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할퀴며 서로의 상처를 더할 뿐이었지요. 함께 있는 시간이 끔찍한 시간이 되어갔습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지요. 그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누구에게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신이 나라면 나와 같은 사람이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그 상황에 서 있었더라면 그리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래도 그 선택에 아픔을 느끼며 지금까지 힘차게 걸어왔노라고. 그러니 나를 그 상황만으로 판단하지 말아달라고. 이런 얘기를 다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드러난 결과만이 아닌 나는 누군인지 읊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구요. 하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상황은 나에게 괜찮다는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걸요. 그렇다고 우리의 노력이 모두 허사는 아닙니다.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공부가 헛된 것이 아니듯. 결혼을 하지 못했다고 우리의 사랑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듯. 취직을 하지 못했다고 모든 이력서가 허사는 아니듯. 어느 다른 상황이더라도 우리의 노력이 쓸모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쩌지 못한 상황을 안아주어야 합니다.
나의 어쩌지 못한 상황을 안을 때 다른 사람을 안아 주는 건 차라리 쉽게 느껴집니다. 그 사람의 반응도 어쩌지 못한 반응일 테니까요. 그 사람들이라고 나의 상황에 숨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머릿속으로 ‘내가 왜 이 질문을 했지?’ 라며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까지 안아줄 수 있습니다.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요.
수용을 배워야 합니다. 받아들임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은 일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해보면 됩니다. 하지만 오늘은 되지 않았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용은 포기와는 다릅니다. 포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등을 돌리고 널브러져 있는 거라면 수용은 되지 않았음을 받아들이고, 오늘의 노력을 칭찬하는 거지요. 노력했던 나의 행위를 칭찬해주고 다시 한번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겁니다. 그것의 최상은 웃음입니다. 웃음으로 나의 노력을 보상하는 겁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질문에 대답을 할 때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군요.
나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할 때 웃기 시작했습니다. 웃음의 첫 번째 목적은 내가 괜찮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두 번 째는 당신의 당황스러움을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썩 괜찮은 대답도 발견했습니다. “결혼은 아직인데 아이는 있어요.” 사람들은 뜻을 해석하고 나는 활짝 웃어줍니다. 간혹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부연 설명도 해줍니다. 웃는 얼굴과 함께요.
사람의 인생 전반이 노력이 아닌 운명이라는 것을 전부 다 믿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거센 풍랑앞에 서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거대한 파도 앞에 배가 난파되었다고 모든 것이 선장의 탓은 아닙니다. 나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상황 역시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이 상황에서 무엇을 택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웃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웃어 주기로 해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찌 할 수 없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은 어찌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메여 지금의 자신을 굳혀 가지 말아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운명이라 치고, 오늘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즐겨요. 우리의 과거가 만들어낸 상황 앞에 활짝 웃어요. 오늘 나에게 난처한 질문을 한사람 앞에 활짝 웃어 보세요. 웃는 것도 숙달되면 더 잘 웃는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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