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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6일 01시 11분 등록

55.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

 

1.     저자에 대하여 엄기호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를 이수하고, 문화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는 말처럼 지금 선 자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겪은 것들을 글로 쓰는 정신노동자이자 활동가이다. 세계화를 공부하기 위해 세계를 떠돌다가 2001년부터 3년간 필리핀에 사무실을 둔 국제 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 및 태평양 사무국에서 일을 했다. 교육을 성찰하기 위해 대안학교와 강단에서 사랆을 만나다가 서울시 청소년 직업체험 센터 하자글로벌학교 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교육 등의 말들을 현장에서 성찰한 이야기로 바꾸어 낮게 더 낮게, 쉽게 더 쉽게전달하려 애쓰는 인문학자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이 책 또한 덕성여대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문화인류학 강사로 일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쓰고 토론한 내용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세상, 즉 정치와 경제, 가족과 연애, 돈과 소비 때로는 생명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경험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어떤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공유한 지적 대화의 기록이다.

 

그를 만났던 한 자제는 그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꾸 질문만 던지는 쌤이 살짝 미워지려 했다. 근데. 알겠다. 그가 왜 질문을 퍼부어대는지.

그러면서도 왜 답은 해주지 않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이 말을 하기 전 저자의 제자는 이렇게 말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서 암담하고 슬프기만 했던 그 시절.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왜 정치에 관심이 없냐고, 어린 것들은 이기적이라고.

이런 얘기를 내게 했다면 피 터지게 싸웠을 것이다. 그래, 나의 20대는 그랬다.

무능하거나, 준비없는 십대를 보냈던 것은 아니지만, 내게 닥친 20대는 너무 암담했다.

 

그떄보다 조금 덜 치열하게 살아도 되는 지금.

내가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지금. 분노가 차오른다.

나의 20대가 힘들었던 것은 내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어도 되었던 것이다.

 

늦었지만, 어렸던 나에게 위로를 보낸다.”

 

인권연구소 의 활동가이기도 한 저자는 “’천재 한 명이 수십만을 먹여 살린다는 망령부터 추방하라고 말한다. 다음은 그가 쓴 칼럼의 내용이다.

 

왕따와 학교 폭력에 대한 모든 대책은 하나로 귀결된다. ‘피해자가 말을 해야 한다는 것.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너 용기를 내어 말을 하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다.

청소년기에 청소년들의 세계는 그것이 전부이지만 그 세계는 의외로 작고 힘이 없다. 어른들이 개입한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피해자들에게 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무고한 죽음이 있으면 그제서야 고민을 말했더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운 소리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그 절실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초점은 왜 말을 할 수가 없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말을 해도 해결될 수 없기에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피해자가 말을 한다면 해결할 수 있었을까? 주변에 있는 한 초등학생이 친구들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발견한 부모가 담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상담을 요청했다고 하자. 그 때 담임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별일 아니라고 치부하거나 명확한 증거와 피해 사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은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체계적으로 만드렁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기량과 노력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시스템은 평균의 질과 수준을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0’에 가깝다. 신뢰가 ‘0’인 사회에서 시스템에 호소할 수 없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거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무고함과 진실을 죽음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죽음으로써 비로소 공론화가 시작되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학교의 명성과 위신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서울대에 보냈는가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나머지 학생들이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천재 한 명이 수십만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으로 한 명만 돌보고 수십만을 내팽개치고 있는 수월성 교육이라는 망령부터 당장 추방되어야 한다.

 

저자는 강의 때마다 토론을 하고 글을 써오게 한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아이들을 북돋아주기 위해서였다. 20대에 대한 주류 담로닝 답답했고, 종종 무서울 정도로 단정하고 단죄했다. 아이들은 주눅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 역시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을 단정하고 단죄하는 이유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팽창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달리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는 사회에서 사는 아이들. 이들의 투쟁은 이전 시대와 다르다. ,우파를 막론하고 20대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고, 많은 문제들을 개인의 몫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고시공부를 하는 도서관은 내일 앉아 있지 않기 위해 앉아 있는 곳, 지나가는 곳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꿈이 없는 유목민이 아니라, 돌아다니도록 밀려나는 피난민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의 경험과 언어를 통해 우리 사회를 비추고 드러냈다. 다음 책에서는 이들이 자신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주류 담론이 20대에게 없다고 하는 관계적 가치들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들여다볼 예정이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다양한 삽질을 통해 누군가를 기쁘게 했고, 누군가로 인해 기뻤던 경험을 함께 발견하고 있다. 이런 삽질이공동체를 만드는 경험이었음을 북돋아 주고 싶다. 동시에 이런 가치들이 현재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어떻게 포획되었는지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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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공감이 많이 되어 줄을 쫙쫙 그어가며 읽은 책이다. 머리 속에 표현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부분들이 저자의 책을 통해 정리될 수 있었다. 더불어 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어떤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강의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다양한 20대들의 이야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통된 것들. 대학생활에서 저자를 만난 학생들은 어쩌면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주어진 그 기회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이 훨씬 많으니 말이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알게 된 것 같다. 나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후배들을 만날 때, 나도 기성세대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과 어떤 대화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매번 고민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1)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저자 프로필

2)     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C%97%84%EA%B8%B0%ED%98%B8&os=771664

3)     http://www.cyworld.com/ceylontii/10470175

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1112119245&code=940401

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2&aid=0001945393

 

2.     내가 저자라면 내 책에 적용하기

-       내 책과의 차별점이라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청춘들의 다양한 시선과 사고를 보여준다. 매우 큰 장점이다. 특히 수업이란 특수성을 반영하여, 깊이 사고한 흔적이 보여서 참 좋다.

-       이 책을 통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의 구체적인 표현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어떤 사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느낌을 여러 저자들의 언어에서 발견했다.

-       대학, 가족, 사랑, 등 이 책에서 사용한 키워드들이 내 책의 목차를 고민하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덕분에 지금까지 썼던 칼럼에서 보충하면 좋을 부분들을 발견했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내 책에 활용하기

::: 들어가는 글 | 너흰 괜찮아:::

 저야말로 대세가 시키는 대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온 셈이죠.” p8

대세... 초중고를 거쳐 대학에 가고, 스펙을 쌓고, 취업을 준비하는..??

잉여죠

지은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별다른 표현이 필요 없었다. p10

 

성장에 대한 강요

아니, 전혀 한심하지 않아.” 지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너흰 괜찮아.” p11

 

우리 사회가 20대들, 대학생들을 포획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내가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에서 하고자 한 작업이었다.

포획의 중심에는 성장에 대한 신화 혹은 강요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은 성장해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교육을 받고 사람을 만나고 자기 일을 하는 이유는 성장하기 위해서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고, 즉각적인 욕망을 억누르며 자기 인생을 기획하고 계획하는 삶이 바로 성장하는 삶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의 대학생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p12

이런 것이 성장이라면, 성장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평생 피터팬으로, 철 들지 않는 어른으로 남고 싶은 것인가보다.

 

어린애들처럼 좋은 것만 먹고 싶다고 칭얼거리지 말고 현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에 자신을 맞추며 살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파가 이야기하는 성장이다.

반면 좌파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지금의 청년들을 비난한다. 이들은 청년들이 소비주의에 물들어 자기만 생각하고 물질적인 욕망과 풍요에만 신경을 쓰지 도통 사회적 존재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20대는 세상과 불화해야 하는 시기인데 너무 적응을 잘해서 잘 지내기만 한다.” “혼자 살겠다고 자기계발서에 매몰되어 있다.” “겁에 잔뜩 질려서 세상의 불의를 향해 짱돌을 들 배짱도 힘도 없는 것이 지금의 20대들이다.” p13

 

도덕적 비난이 된 성장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언어를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고, 그 세상에 개입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봐야 하는 것은 누가 힘든 일을 하지 않고서도 대학을 다닐 수 있는가이다. 그것은 과외만으로도 꽤 큰 돈을 벌 수 있는 일부의 대학생들이거나 혹은 부모를 잘 만난 몇몇 학생들이 아닌가? p15

 

좌와 우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의 대학생들을 성장하지 않은 존재, 즉 언어가 없는 존재라고 전제해버리고 있다.

→ 언어가 없다.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 기회, 통로가 없다. 기회나 통로가 있다면 이미 그들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올 것이다.

 

뒷문으로 성장하다

이 책은 그 리포트 더미에서 추려내고 정리한 학생들의 이야기이자 그들과 나의 대화이고 내가 그들에게, 그들이 나에게 던진 질문들의 덩어리이다.

이 책은 애초부터 20대들, 그 중에서도 대학생들이 다른 세대와 어떻게 다른지를 강조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내용도 형식도 20대들에 대해서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20대들에게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p17

 

많은 교육의 현장에서 교사와 부모들은 자신들의 학생과 자식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그토록 궁금해하면서 그들을 대하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좌파든 우파든 20대가 문제라고 하는 이야기, 혹은 우리 사회가 20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며 그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이야기 안에서 20대들을 대하는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자신은 무엇을 함께할 수 있고 무엇을 함께할 수 없는가에 대한 성찰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책은 내가 지난 2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지적 대화의 기록이다. p20

 

학문이란 ‘sample’에서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인 ‘example’을 뽑아내는 과정이다. p21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대학에 와서 실망한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대부분이 손을 드는 것이 지금 대학 교육의 현실이다.

 

성장은 무엇인지 되물어야 한다.

첫 번째로 이들은 자신이 말하는 성장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만 가능한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는 지금의 시대가 과연 그러한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이 시대가 그런 성장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는지를 물으며 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언어와 페다고지가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p24

 

삶은 더 이상 예측 가능하지 않다. 인생은 기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맡겨지고 있다. 즉 우리는 그 동안 성장이라고 생각하던 모든 전제가 다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p25

 

탈정치화라든가 소비주의적이라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덕적 판단의 언어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우리가 그만두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인간은 삶에 대해 새로운 질문이 많아질수록 세상을 새롭게 살아갈 용기가 더 많아지는 존재라고 믿는다. 질문과 함께, 질문에서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인간은 새로운 사회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p27

→ 이미 정해진 정답이 아닌 새로운 질문이 많아질수록 새롭게 살아갈 용기가 많아진다는 것은 매우 희망적이다. 누구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바닥을 치는 자존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 내 인생에 대해 좀 더 상상하고 좀 더 관심 갖되, 날 동정하진 마세요!_지은

 

1부  어쨌거나 고군분투

대학1 |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다

택시를 타거나 미용실에 가거나 밖에서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기면 처음 묻는 것이 학교의 소속이다. 나는 그때마다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혼란스럽다. 나는 분명 연세대학교 학생이 맞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할 때면 얼굴이 뜨거워진다.

 

특히 서울에서 온 학생들은 자신들이 서울에 남는 데 실패하고 원주로 유배를 왔다는 열패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학생들은 매지병이라는 우울증을 앓게 된다. 심할 경우 매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는 학생도 있다.

문화생활이 가능한 원주 시내로 나가는 데는 버스로 40분이 넘게 걸린다.

학교생활에 대한 답답함과 짜증은 곧 분노가 되었다.

 

통학생에게 동아리 활동이나 과에서 하는 모임, 혹은 친구들과의 저녁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저녁이면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다. p38

 

빌딩숲에서 나무숲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은 어둡다. ‘내가 여기 취직하고 만다, 아오.’

 

새벽이면 강남역이나 삼성역에는 경기도 인근에 있는 지방 캠퍼스로 학생들을 나르는 통학버스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신발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와 양말에 척척한 기운이 느껴지면 편입이라도 해서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에 울컥하게 된다. p39

 

대학 서열이라는 체제

대학생들의 정체성이란 이처럼 대학의 안과 밖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서열 체제 에서 내가 다니는 대학이 어떻게 분류되는가에 따라 형성된다. p42

 

대학마다 건물 벽에는 온갖 선전물이 넘쳐난다. “대학평가 O!”라는 구호에서부터 고시 OO명 합격”, “취업률 O라는 자랑이 대부분이다. p43

 

박용성 이사장은 중앙대를 삼성이 인수한 성균관대보다 더 나은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하였다.

학생부터 대학, 기업까지 우리 사회는 모두가 대학 서열 놀이에 빠져 있다. p44

 

그는 김예슬 이전에도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을 거부하고 대안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 동안 그들의 대학 거부에 대해서 누가 관심을 보였던가를 되묻는다. p45

 

이 친구뿐만이 아니다. .고대를 다니면서도 서울대 근처만 지나가도 꿀린다는 학생들이 허다하다.

꼭대기의 딱 한 자리, 그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패자이다. 우리 사회는 이 대학 서열 체제의 덫에 단단히 빠져 있다. p46

 

대학2 | 우린 아직 인간이 아니다

김예슬 선언을 처음 읽었을 때, 솔직하게 들었던 생각은 사실 어쩌라고였다. 뒤에 가서 이것저것 곱씹어보며 생각을 수정하긴 하였지만, 그렇게나 나는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p48

→ 김예슬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왠지 모르게 불편했고, 무조건 지지할 수는 없었던 내 마음의 해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덕성여대 <길혜미 선언문>, 아무도 관심 안 가져줬을 것 같아요.

김예슬 명문대 중퇴가 길혜미 보통대 졸업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니

그냥 문득…. 한국에서 대학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p50

 

청춘은 찬란, 했다, 옛날에는

이들에게 김예슬은 386의 진정한 후배로 받아들여진다.

386들에게 대학생이란 청춘의 상징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이 특권이 괴로웠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특권을 부정하여야 했다. 그래서 사회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기득권인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프랑스의 68세대들은 현재의 세대들이 사회로부터 과감하게 탈주하려고 하기보다는 사회에서 빵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고 기를 쓰는 한심한 종자들이라고 비난한다. p53

 

김예슬의 용기에 대한 예찬은 곧 다른 대학생들의 비겁함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다.

김예슬 선언을 보면서 다른 대학생들에게 너희는 왜 움직이지 않느냐고 질타하는 사람들은 다른, 보통의, 많은 대학생들이 어떻게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맨 꼭대기만 살아남는 구조에서 한 번도 제대로 셈이 되어본 적이 없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잉여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넘어 이미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신들이 잉여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경험하며 자학하게 된다.

 

잉여가 된 지성인

대학생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더 이상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구조의 변화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학생은 무척 다양한 층위를 가진 존재이다. p58

 

잉여가 무엇인가? 남아도는 인생이란 뜻이다. 남아도는 인생이기에 이 사회에 필요한 그 무엇도 아니다. 한 학생의 말처럼 불필요한 존재이다. p58

 

자유가 잉여를 자학케 하나니

사회의 바깥으로 완전히 튕겨져 나가 잉여가 될 자유, 아니면 그 잉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칠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

→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내 친구들은 잉여를 선택하고 있다. 잉여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은 원하지 않는다.

 

대학생 때에 책을 많이 읽어봐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꽉 짜여 있는 스케줄러와 함께 바쁘게 스펙을 쌓으며 살아가기도 해야 한다. p59

 

대다수 기업들이 제시하는 자기소개서 양식을 채우려면 대학생들은 정말이지 가랑이 찢어지게 뛰어다녀야 한다.

대학생들은 자유로운 시간에 책도 많이 읽어야 하지만 동시에 전공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사회적 네트워크도 넓혀야 하지만 동시에 스펙을 쌓기 위해 세상과 단절되기도 해야 한다.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기도 해야 하지만 학점 관리도 해야 한다. p60

→ 그래서 이런 천편일률적인 형태의 자기소개서로 뽑은 인재들, 만족스러운가? 묻고 싶다. 기업들에게.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시장의 무능을 자유의 이름으로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린 것이 바로 스펙의 실체이다.

 

체제는 완벽하게 승리하였다. 청춘을 자학하는 잉여로 만들어서 말이다. 자기를 계발하는 주체의 이면은 자학하는 주체이다.

→ 사회가 청춘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를 견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들은 극단의 선택으로 자살을 한다.

 

나는 내 인생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며, 꿈이 무엇이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p61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곧바로 성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부터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p62

 

대학에서 더 이상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대학 자체가 이미 사람의 성장에 별로 관심이 없다. 대학의 가치는 오로지 얼마나 많은 학생을 생존시켰는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p64

 

인간이 되기는 쉽지 않겠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이템으로 바꾸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또한 아이템으로 바라보는 속물. 그런 속물을 동물이라고 부른다.

 

당신(김예슬)은 썩어버린 작은 사회에서도 배우지 못한다고 인간으로 살지 못한다고 나왔습니다. 더 썩은, 작은 사회를 이렇게 만든 큰 사회에서도 인간으로서 살지 못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궁금합니다. p68

 

2. 뒷문으로 성장하다

정치 혹은 민주주의 | 혁명에 냉소한다

 

신성불가침한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좌와 우, 1세계와 제3세계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서 주장해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이다.

때문에 기성세대들, 특히 젊은 시절 자신의 청춘을 민주주의를 위해 바쳤던 사람들은 지금의 대학생들이 탈정치화 되었다고 비판한다. p75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할 것인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브이 포 벤데타>의 명대사를 인용하며 정부가 국민들에게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는데 현 정부는 억압과 통제를 하며 국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모름지기 민주주의 시민의 가장 큰 의무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를 참여와 비판을 통해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p76

 

사회가 잘못되었다면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가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민주시민의 자세라고 말한다. p79

 

세상을 왜 바꿔야 하나?

영화는 항상 감동적인 승리와 함께 이 나지만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그 엔딩 자막 이후’, 그것이 더 중요하다. 거기에 진짜 삶이 있다. p80

 

대법관도 브이가 죽였고 모든 계획도 브이가 꾸미고 실행했으며 국민들이 일어서게 만든 것도 브이라면서 일이 이 지경이 되면 브이는 이미 오남용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브이가 죽든 죽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않게 되어버린다고 지적한다.

 

사실은 그 엔딩 이후야말로 우리가 영웅 없이 본격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p81

 

도영은 자신의 글을 읽고 너는 보수적이야라고 말하는 바로 그러한 판단과 정치를 비웃는다. 도영의 언어에 따르면 그러한 언어는 이미 무엇을 성찰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원적으로 자신의 틀에 단순히 대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단순 대입이란 이미 선동당한 것이고 세상에 대한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힘을 잃은 태도이다. p82

→ 나 역시 대화를 하다 보면 이런 판단을 하고 막 내뱉게 된다. 비폭력대화를 연습해야겠다.

 

쇼가 정치가 되는 동안 민주주의의 주인이라는 국민은 연도에 서서 손이나 흔들어대는 장식품으로 밀려난다. p84

 

뭘 해도 내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혜교와 도영의 냉소주의는 아직은 가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다만 가치가 배반당한 현실에 던지는 냉소주의이다. p85

 

비판과 분석이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p86

 

기성세대는 20대에게 아무것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 없다. 사유하는 방식도, 혹은 혁명 그 너머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도. 맹목적이게도 자신들의 뜨거웠던 추억만을 알려주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인 듯 이야기할 뿐이다. p87

 

혜교는 많은 대학생들이 시위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라면 기성세대가 대안이라고 내놓는 것마저도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p88

 

본질을 알기 때문에 자세한 것들을 시시콜콜하게 알아볼 필요도 없다. 진정한 냉소주의이다. p89

 

기성세대가 말했어야 하는 것은 그러면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실천의 언어였어야 한다. p90

 

냉소의 힘에 의지하여 냉소적이기 때문에’,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그들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p91

 

이들에게 찧고 까불고 노는 자유는 공기와 같다. 이런 오락을 방해하고 금지할 때 이들은 자신의 일상이 정치에 의해서 심각하게 방해 받고 있다고 느끼고 정치적으로 움직인다.

→ 왜냐면, 우리는 미래의 계획, 성장 보다는 ‘지금 현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트위터가 혁명을 일으켰다고 말하지만, 사실 트위터가 정치의 새로운 도구가 되었다기보다는 트위터를 통하여 정치가 일종의 오락이 되었다고 해야 맞다. 인증샷을 찍어서 올리고 트위터로 개념놀이를 하는 것, 그것에 동참하는 것이 게임만큼이나 재미있기 때문에 이들은 움직인다. p92

 

도덕이 된 민주주의가 문제다

속물들은 도덕이 사기임을 잘 안다

도덕을 자기를 돌아보기 위한 윤리로서가 아니라 남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로서 필요로 한다.

돌이켜보자. 지금처럼 도덕이 모든 사회적/정치적 현상들을 평가하고 사람을 단죄하는 강력한 무기로 사용된 적이 있던가? 노무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망신당하게 해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 검찰의 조사는 그를 도덕적으로 파탄내기 위한 무기였다.

 

브이의 행동은 살인이라는 비윤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 중의 하나였다. p95

 

과정까지도 옳을 경우에만 선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목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  p96

 

한국의 진보 세력은 민주주의가 정치적 언어에서 한쪽에서는 냉소주의로 다른 한쪽에서는 속물들의 윤리적 언어로 전환하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p97

 

교육 | 학교라는 이름의 정글

상실, 성장의 조건

너무 당연한 말이겠지만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장 때문이다.

 

성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키워드가 영화의 중심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상실과 자기 세계의 붕괴이다. p101

 

학교는 폭력과 억압으로 작동한다

한국의 교육은 학생들의 성장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아니라 대학에 가기 위한 도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p102

 

아이는 자신이 조퇴해야할 것 같다고 전화를 할 때에는 이미 참지 못할 정도로 아픈 상태인데도 엄마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며 서러움에 펑펑 울었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다쳐왔던 것이다. 엄마는 그때야 깨달았다. 아이의 말을 진정으로 듣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좋은어른들은 아이들이 그들의 말을 흘려 듣는다고 비난하지만 사실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던 것이다. p103

 

말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다

대개의 영화들은 핵심적인 네댓 아이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마련인데 이 영화는 아이들 스물여섯 명 모두에게 골고루 발언의 기회를 준다.

 

이 학생의 말처럼 한국 교육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보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p107

 

열린 교육에 갇혀 자라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경험한 열린 교육은 조용히 있을 자유, 혹은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였다. p109

→ 열린교육. 이 나라의 네이밍 센스 하나는 칭찬할만 하다. 대한민국과 삼성은 이런 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애플은 그들의 상품을 이야기할 때, 추상적으로 이야기해도 소비자들은 찰떡같이 알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삼성은 그럴 수 없다. 하나하나 사실적으로 콕콕 찍어서 얘기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그렇지 않은데, 포장해서 그렇다고 믿게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대안학교에서는 공교육과 달리 학생들에게 사물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였겠지만, 학생들에게는 고통일 뿐이었다. p110

 

자신들의 선택이 어떤 결론에 이르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감수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교실은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았다

이 영화가 교실에 대한 영화로서 가장 불편하게 읽힐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교실 안에서의 권력관계가 거의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p113

 

정말로 학교 안에서 인간관계는 우정에 기반을 둔 친구 관계인가?

 

조금만 돌아보더라도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이 우정의 공간이기는커녕 엄청나게 권력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집이 잘살고 못살고, 힘이 세고 약하고에 따라 학교와 교실은 촘촘하게 위계화되어 있다. ‘우정은 그 권력의 벽을 넘지 못한다. p114

→ 아… 이 질문을 보는 순간 완전 머리를 한대 제대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우정.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지방이라서 그럴수도 있지만, 우정에 기반을 둔 친구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왠만한 도시들의 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약자가 아니라 덜떨어진 존재로 인식된다. 맞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폭력은 정당화된다. p115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가능한가

교사나 학생이 아니라 P짱의 시선에서 영화를 읽다 보니 이 영화는 뜻밖에 대단히 반교육적인 텍스트로 해석되었다.

 

생명은 고귀하지만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돼지는 처량하다. 이 때문에 한 학생은 돼지여,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라고 이야기한다. p117

 

애초부터 P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할 목소리가 없는 벌거벗은 삶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백해야 하는 것은 소속 변경과 편입을 시도해야 하는 학생들이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경계를 넘게 하는 이 사회의 작동 방식이 가진 윤리이다.

 

두려움을 통하여 생명을 대하도록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폭력이다. p119

 

학생들이 가장 믿지 않는 말은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한 교육이고 사랑이라는 말, 바로 그 거짓말이다.

→ 나도 어릴 적에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하면 정말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뭐가? 라고 생각했다.

공교육은 폭력이지만 대안학교의 교육은 사랑이라는 주장에 학생들은 냉소하고 지겨워한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교사들에 의해서 토론이나 글쓰기를 강요받고 있다고 반발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사랑역시 강요와 폭력으로 경험하고 있다. p121

 

가족 | 멀쩡한 가족은 없다

철없는 자식이 되는데도 자격이 필요하다

성장한다는 것은 부모의 그늘에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성장이란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않고 제 손으로 벌어먹고 제 힘으로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 힘이 생긴 사람이 자율적인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을 나오는 것,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부모로부터의 독립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지방의 학생들이 기를 쓰고 서울로 올라오거나 가급적이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려던 이유도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집과 대학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학생들은 자취생들을 부러워하였다. 이들은 대학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자유를 한편에서는 만끽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어서 빨리 대학을 졸업해서 독립하는 꿈을 동시에 가졌다. P125

 

요즘에는 반대로 집을 나오지 않고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부모의품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여 캥거루족’,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하여 힐레콥터 맘하는 말이 유행어가 된 지도 오래되었다.

 

이 세대 전부가 어리광을 부리는 떼쟁이가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누가 그렇게 떼쟁이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떼를 받아줄 수 있는 부모들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있다.

 

관리하는 엄마와 그 관리를 행복하게 받아들이면서 말끝마다 우리 엄마가….”를 붙일 수 있는 떼쟁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는 특권층인 셈이다.

 

대다수 대학생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머리에 짊어지고 산다고 토로한다. 한 해에 부모로부터 뜯어내야 하는 돈이 최소 천만 원이 훌쩍 넘는다. 문제는 이 돈을 들여 대학을 다녀도 졸업하고 취직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밑 바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이란 집에서 불필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민폐를 끼치는 존재이다. 중하위권 대학으로 내려갈수록 학생들이 이고 지는 죄책감의 무게는 더 커진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밥버러지’, 부모 피 빨아 먹는 드라큐라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10년만에 가족은 벗어나야 하는 탈출과 독립의 대상에서 자괴감과 죄책감을 자아내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p127

 

서울의 아주잘나가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아니면 과외 알바를 구하기는 쉽지 안다. 대부분 하루 종일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일하고 시급 몇 천 원을 받는 편의점이나 주유소 알바 자리밖에 없다. 이런 장시간 노동 알바를 하면 공부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된다. 이것은 곧 학업 경쟁에서 낙오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다시 취업 시장에서의 도태, 탈락으로 이어진다. p120

 

외로운 가족, 겉도는 가족

이 학생이 보기에 자신의 가족은 외롭다.

오히려 외부 사람, 이웃에게 친절하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p131

 

가족, 너무 편하다. 그런데 너무 서로 모른다.

 

왜 가장 중요한데 가장 무관심한 존재가 되는 걸까? p132

 

가족은 감정노동의 공동체

우리 다 가족이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알고 있지만 관심 밖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시간을 가족에게는 잘 허용해주지 않는다. p133

 

가족을 하숙집이 아니라 가족으로 만드는 것, 그것을 감정노동이라고 부른다.

감정노동이란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의 화와 억지를 참아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혼자 있을 땐 상대방을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래서 감정노동은 인간이 수행하는 노동 중에서 가장 에너지 소비가 많은 피곤한 노동이다.

가족은 감정노동 공동체이다.

한국의 갖고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쉬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을 대신하는 것이소통이다. p134

 

모두가 그렇게 집에서 쉬려고만 할 때 그들이 쉬기 위해서 집을 편안하게 만들고 그들의 정서를 돌봐주는 일은 순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감정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엄마뿐이다. p135

 

소통의 폭력을 넘어

우리는 화목한 가족이란 구성원 간에 소통이 활발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즉 말이 많은 가족이란 뜻이다.

정말 대화를 많이 하는 가족이 화목하고 서로 배려하는 가족인가?

통념대로라면 말끝마다 엄마가 그러는데를 남발하는 캥거루족과 우리 아들은….”을 입에 달고 사는 헬리콥터 맘의 관계가 가장 이상적이고 화목한 가족이다. p137

 

그러나 대다수의 가족들은 그렇게 합리적이고 의사소통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그 소통의 실체가 무한정 피곤하고 감수해야 하는 노동임을 잘 안다.

 

보통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소통과 그 소통에 의한 갈등이 이 결손가족에게는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하게 삭제되어 있다. p138

 

지애에 따르면 우리의 가족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영화에 나오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가족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는 또래 학생이 모범적으로 늘어놓는 이야기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p141

 

학생들의 리포트를 읽고 그들과 토론을 하면서 나는 소통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지고 가족이 하는 경험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상적인 가족, 제대로 된 가족이라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 p142

 

사랑 | 이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짜증, 불안, 분노, 이기심, 집착이 폭발하는 것이 바로 연애라는 것이다.

나를 진정으로 괴롭게 한 것은 전화한다고 하고 하지 않은 그도 아니고, ‘나와 데이트해줄 시간은 없는데 친구들과 술 마실 시간은 있는 그도 아니고, ‘나와 밥 먹으면서 야구 중계에만 정신 팔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않는 그가 아니라, 그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기대했던 나 자신이었다.

 

우리는 연애시장에서 좀 더 완벽한 짝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몸값을 높이려 갖은 노력을 한다. p144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무너짐이란 곧 찌질함이다. 사랑은 자존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자아의 무너짐이 아니라 무너질지도 모르는 자존심을 어떻게 해서든 추슬러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쿨함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도덕이자 미학이다. 쿨하지 못하다면 최소한 쿨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 p147

 

사랑,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

청년들의 다른 처지를 다 이해한다는 사람조차도 사랑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강경한 입장에 선다.

연애만큼 지독한 감정노동이 있을까? 그 고통스러운 감정노동마저 달콤하게 인내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바로 사랑이다.

 

모르는 존재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경험이다.

실연 또한 일대 사건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을 실연의 바로 그 순간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p149

 

사랑, 서사가 가능한가?

일요일이면 교회에서 살았지만 오전 예배만 나가기로 하였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줄였다. 문학 모임에도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책도 더 이상 사보지 않기로 했다. 그 동안 자신이 소설을 쓰기 위해 세상을 바라보고, 읽고, 대화하던 창을 스스로 닫은 셈이다. 준석에게 이 모든 것은 세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라는 세상을 얻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껏 살아온 세상과 절연해야 함을 배웠다. p150

→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이런 사랑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 줄 수 있는 사람. 그렇다고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나도 양보해야 할 부분이 생긴다. 그렇게 서로 기꺼이 양보할 수 있는 사람과의 사랑을 꿈꾼다.

 

준석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꿈이고,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만들고 즐기던 오늘의 삶이다. 그녀와의 사랑을 완성해나가기 위해 현재를 미래로 끝도 없이 유예해야 한다.

그러나 준석은 이 서사를 그려내면 그려낼수록 더욱 불안해진다. p151

 

삶은 미래를 위해 유예되어서는 안 된다. 유예를 한다고 해서 보장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거나 감수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삶은 어차피 불확실하며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서사적 사랑이란 불가능하다. p152

 

불안하지 않은 사랑이 있는가

그래서 아예 연애와 사랑, 우리 시대의 시나리오 모두에 냉소하면서 고고하게 자신의 취미 생활을 즐기고 남들과 만나는 것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속되는 부등가교환도 싫고, 전통적인 규범 놀이도 싫다는 것이다. ‘초식남’, ‘건어물녀라고 부르는 친구들이다. p156

 

다만 성훈은 발정난 개처럼 상대를 찾아안달복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애 강권하는 사회를 거부할 뿐이다. 그냥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 같이 사는 것이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연애의 모습이다.

 

성훈은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연애라는, 사랑에 대한 이 시대의 시나리오를 믿지 않는다. 이 시대의 사랑이란 너무 값비싸고 소모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p156

 

사랑, 비싸다

연애가 피곤한 사업이 되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다. p157

 

부등가교환과 전통적인 규범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애의 피곤함에는 돈 문제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p158

 

가난하면 사랑도 힘든 세상이다. 잠시 쉬고 가는 데만 2만원을 하는 모텔비만 하더라도 만만치 않다. 원주캠퍼스 같은 지방대의 경우에는 주변의 눈을 피하려면 차를 타고 멀리 움직여야 한다. 차를 가진 남자가 장땡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섹스 한 번 하는데도 이들은 고군분투를 해야 한다. <한겨레21>기사처럼 사랑은 88만원보다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랑의 등가교환을 선호한다. 사랑에도 주판알을 튕길 만큼 계산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다. 그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새로운 방식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등가교환이야말로 동등성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새로운 형식이다.

 

사랑, 인프라가 필요하다

따라서 반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의 사랑을 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대학생들이 사랑을 사랑답게 나눌 어떤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는가. 주는 것도 없이 이들이 점점 더 사랑의 가치를 잃어간다는 비난만 하고 있다.

 

청소년 때야말로 이들은 사랑의 열병에 몸살을 앓고 사랑 때문에 삶을 내던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대학에 온다. 그래서 이들이 대학에 올라와 고민하는 것은 사랑의 가치가 아니라 사랑을 지키고 유지하는 방법이다.

 

여자 친구와 자신의 생애를 새롭게 기획하면서 사랑의 서사를 꿈꾸는 준석의 고군분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주거와 교통, 무엇보다 취업이라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p161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부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은 그들의 권리 목록에서 누락되어 있다. p162

 

자기들의 방이 아니라 삭막한 모텔이나 비디오방과 같은 빈 공간을 전전할 수 밖에 없는 것, 문자 그대로 피난민들이지 않은가?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남의 눈치나 보아야 하는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모텔과 비디오방을 말한다고 해서 이들의 파닌민 같은 삶이 단지 섹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들이 사랑을 계산적으로 한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이들에게 허용된 것은 지속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일시적인 섹스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반려혹은 동반이 무엇인지를 이들은 경험할 수가 없다.

→ 결혼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이란 제도에 들어가겠다는 생각보다는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반려자’ 혹은 ‘동반자’로 이미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였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이 아름다웠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하지만 친구들은 결혼이란 제도권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저자의 이 말에 매우 공감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결혼을 해서 제도로 묶여야 한다’는 강요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같이 상상하고, 같이 성찰하며, 같이 만들어가는 공간에서만 서사가 가능하다. 그런데 함께 가꿀 삶의 공간이 없다.

삶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어떻게 사랑이 임시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p163

 

소비 | 팔리기 위해 나를 전시한다

누구나 수용해주는 곳, 이분법이 아닌 다분법으로 나누어 때가 되면 서로 뭉치기도 하다가 다시 자신의 길을 가고, 그 와중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가며 이 과정을 즐겼다.

한국에 와서 나는 옷장을 두 개 가지고 있다. 한 곳에는 입고 싶어 샀던 원피스들과 뉴욕에서 입었던 청치마들이 들어 있고, 한 곳에는 청바지가 들어 있다. 한국에서 나는 하나의 옷장만을 사용한다.

 

자신의 스타일을 어디까지 표현하고 나누고 즐기는지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욕망과도 일치한다. 그것이 주위의 의식에 지배당하고 억압되면서 나는 갈등에 빠졌다. 자아를 고수할 것인가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내 욕망, 자유의 옷장을 닫아걸고 현실의 옷장만을 열고 있다. p165

 

편안한 트레이닝복은 예의가 없는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아이템이 된 트레이닝복은 누구나 갖춰야 하는 강박이 된다.

 

전시, 필사적인 인정투쟁

진태는 매일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고통스럽다. 자신에게는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는 것이라고 속삭이지만 거울 앞에 서면 이 옷은 이미 유행이 지난 옷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한다. p167

 

스타일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내가 너와 다르지 않음을, 곧 같은 무리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나를 드러내기남과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기’, 얼핏 보면 이율배반적인 이 두 가지는 소비를 통해 동시에 드러나야 한다. p168

→ 정말 피곤한 스타일이다. 나는 그냥 나 대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만 좀 쳐다보고 수근거리라고. 얘기하고 싶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서 다른 존재임을 부각시키려고 하지만 동시에 너와 같은 트렌드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려고도 한다. p169

 

남자들에게는 힐을 신는 여성들이 안쓰러워 보이지만여자라면 발의 통증 정도는 화려함과 황홀함을 위해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회사원들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사 먹고는 바로 그 앞 스타벅스에서 6천원짜리 커피를 사 마시는 것도 자신만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타인과 나 모두에 대한 인정투쟁이다. 인정투쟁이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p172

 

명품을 사기 위해 걷는 백화점이라는 공간, 그 공간에서의 서비스, 그리고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 속에서 만들어지는 동류의식,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소비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즉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다. p175

 

다이어트, 몸이 최고의 아이템이다

몸은 옷 안에 감추어진 자연이나 스타일을 통해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 드러나야만 하는 문화이다. 우리는 몸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잘 가꿔진 몸이야말로 자신을 팔릴만한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갖춰야 할 아이템이다. p176

 

건강하고 노동을 잘할 만한 몸이 아니라 보기 좋고 자기관리를 잘한 듯 보이는 몸으로 포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몸을 가꾸는 일이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자기관리에 실패하였다는 것은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말이다. 잉여를 자초하는 짓이다. p177

 

그래서 다이어트는 자기 자신과의 인정투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아름다워지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p179

 

진아는 체중을 감량한 이후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기숙사 지하 운동실에 내려가 체중을 잰다. 음식을 많이 먹은 저녁에도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체중을 잰다. 혹시나 체중이 늘어나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먹고 싶다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많이 먹게 된 날에는 먹은 음식들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그리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p180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 끝없는 고생을 해야 하는가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다이어트를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려는 순간 엄청난 고독과 고립을 감수해야 한다. p181

 

자기관리와 자기감시 사이에서

<동물의 왕국>을 연상케하는 학생들의 다이어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시대 윤리의 실체가 자기관리가 아니라 자기감시임을 알게 되었다.

이 동물원에서 누군가가 욕망하는 몸, 누구나 바라보는 몸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러닝머신 위에서 죽도록 뛰어야 한다. p182

 

트위터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자유롭게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잘표현하기 위해서 고심한다.

우리는 강의실에서 오가는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품평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야기한다. “파워포인트에는 파워도 없고, 포인트도 없다.” 넘쳐나는 소통의 도구들 속에서 성찰과 소통은 드라마틱하게 줄어들었다. p183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전시해야 하는 동물원이 된 사회에 사생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누군가가 자기를 꿀벅지라고 불러주면 섹시하다는 뜻이니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을 하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상품화에 대한 감수성이 없느냐며 이 학생은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품평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것은 곧 내가 사회적으로 존재할 만한 가치와 의미를 획득했으며 인정투쟁에 승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p185

 

| 돈은 자유다

돈 욕심이 없다 보니 직업도 돈 많이 버는 직업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남보다 좀 더 부담없이 선택한다. p186

 

사실 아무도 돈을 대놓고 찬양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돈에 대해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대단히 불온하게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돈을 죄악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돈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엄청난 비난과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돈이 곧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돈을 무시하는 것은 도덕에 대한 무시이며, 곧 삶 그 자체에 대한 무시이기도 하다.

 

돈은 속임수다

그러나 돈의 실체를 다른 방식으로 깨닫는 학생들이 있다. 아르바이트로 자신의 학비와 생계를 유지해가는 학생들이다. p189

 

이것저것 나름대로 많은 일을 하면서 돈에 대해 주현이 느낀 바는 돈은 생명이라는 점이다. 20대의 일정 시간과 내 힘을 투자하고 지식을 팔고 몸을 판 결과가 그 돈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액면가로만 측정할 수가 없다.

 

성용의 말을 빌리면 군 입대 전까지는 부모님의 수입이 얼마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고, ‘땅 파면 돈이 나오는 줄알았다고 한다. p190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과외같이 상대적으로 손쉬운 돈벌이가 아니라 고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많은 부분은 한국의 아르바이트 노동이 처한 열악한 현실에서 기인한다. p191

 

자원봉사자를 뽑은 것도 아니면서 경력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아예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곳도 많다. 엄연한 고용 관계임에도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 식이다. 그래도 학생들은 경력을 위해 참고 일할 수밖에 없다. p192

 

소비는 무지를 먹고 살며, 돈은 무지를 통해 작동한다. 알면 먹을 수 없고, 입을 수도 즐길 수도 없게 된다. 알면 돈도 다치고, 소비자도 다친다.

 

삶을 옥죄는 학생 빈곤

요즘 대학생들은 소비주의에 빠져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쓰면서 살지 않는다. 또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자기가 쓰는 데 아쉽지 않을 정도로만 벌고 쓰면서 살고 싶어 한다. p194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돈은 행복이 아니라 자유이다. p196

 

서연이 죽을 만큼 힘들어도 돈을 버는 이유는 이렇게 돈을 벌어서 자신이 자유로워졌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시간적 자유는 빼앗겼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다. 무엇보다 용돈이 모자라서 부모에게 비굴하게손을 내밀 필요도 없으며 자신이 돈을 어떻게 쓰건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돈은 정말 자신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말한다. p197

 

사실 돈은 그 자체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대신 우리에게 미래의 쓸모를 약속한다. 우리는 언제든 돈을 쓸모와 교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종잇조각에 불과한 돈을 열심히 모은다.

 

그런데 앞장에서 본 것처럼 사랑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미래로 연기되는 사랑, 흔히 이야기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당장 등가교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등가교환의 지표가 바로 이다. 돈은 유예지만 돈을 통해 우리는 비유예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p199

 

고민만 많을 뿐 학교를 다녀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무엇을 얻어가고 있다는 느낌보단 늘어가는 과제와 교수님들의 요구 속에 만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김예슬 선언을 인터넷에서 접했을 때 난 딱 두 가지 생각을 했다. 부럽다. 나도 용기 있게 그만 두고 싶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만두었겠지. 집이 잘사나? p198

 

돈이 자유라는 말의 의미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이상이다.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고 존재의 박탈이다. 돈은 행복이 아니라 자유이다. 돈을 돈으로 봄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돈을 통해서 자유로워진다. p199

 

고립의 다른 이름은 외면이다. 혜교는 자신의 어려움은 어느 정도 감수하고 살 수 있지만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살 자신은 없다. 이미 어머니는 자기 가족이 살고 있는 몇 평 되지 않는 빌라를 답답해하신다. 아버지는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택시에서 숨죽여가며 일해야 한다. 이 두 분을 외면할 수 없다.

이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돈을 통하지 않으면 절대 다른 인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행복을 좇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히려 현주는 사랑에 대해서는 그토록 쿨해지라고 요구하는 이 사회가 왜 돈에 대해서는 그렇게  쿨해지지 못하는지를 되묻는다. p201

 

 

그래서 현주는 돈이 좀 없더라도 불편하게 사는 것을 감수하려고 한다.

그런 현주도 돈 때문에 서럽고 좌절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하는 것, 그것이 돈이기 때문이다. p202

 

이들에게 자유란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시절의 그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자유이다.

부자인 아이들은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을 수 있으니 좋은 성적을 맞을 수 있다. 그들도 적약이라는 단어를 배우지만 살 수 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산층의 아이들은 자신이 노력하면 어쩌면 삼성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삼성의 CEO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가난한 아이들은 대를 물려 내려온 가난함이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우리 세대의 자유란 그리고 지금 통용되는 자유란 계층적 경제적 차등에 따른 제한된 선택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 계층적, 경제적 차등에 따른 제한된 선택의 자유. 아. 정말 슬픈 말이다.

 

자유란 내가 무엇인가를 소비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이 자유가 선택의 자유이다. 이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소비자가 아니면 고립된 삶을 살거나 주변 사람을 외면하며 살아야 한다. p204

 

그리고 돈의 흐름 혹은 틈새

도영이 이렇게 화려한 성취를 했음에도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초라한 경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고객을 모으는 집객과정이 본질적으로 는 나이트클럽 삐끼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란다. p207

 

이곳에서 순수한 창조적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돈과 자본의 개념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 것인가를 알았다. 뿐만 아니라 이 시장경제 체제라는 현실에 완전히 순응하거나 혹은 이것을 완전히 거부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안고 대안을 제시하는 법으 ㄹ배웠던 것 같다. p208

 

대학에 들어와 백화점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을 도와주면서 자본주의의 인 백화점에서 돈이 만들어내는 극과 극을 체험하였다.

 

돈을 쓰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고, 돈을 버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p209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대학생들은 돈의 바깥에 있는 이런 새로운 사회를 조금씩 경험하고 있다. p210

 

열정 | 잉여, 열정과 삽질 사이에서

어째서인지 내 불꽃 같은 열정은 삽질에만 발현된다. 불행하게도 나는 대학 진학, 학점 관리 등 일생에서 정말로 중요하다고 말해지는 것들에는 조금 열정이 부족한 듯 싶다. p212

 

아무래도 다음 날 학교에 가기 위해 잠이 들기보다는 자신의 현재 욕구에 너무나도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물론 가끔 스스로에게 드는 회의와 한심함이 3그램 정도는 있지만, 욕구에 충실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이 정도는 감내해야지 머. p213

 

삽질을 무시하지 마라, 너는 그 무언가에게 한 순간이라도 열정적인 삽질을 한 적이 있었는가? 고로 나는 오늘도 삽질을 한다.

 

여진은 엄마가 하는 말 중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너는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살고 싶냐?’는 말이라고 한다. 엄마가 볼 때는 자기가 놀러만 다니는 것 같지만 자기도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한다.

 

대다수 학생들은 이런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온다. p214

 

대학에 들어올 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들어오는 학생은 드물다. 대부분은 대학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게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생각해볼 틈도 없이 바로 4년이 지나고 졸업이 다가온다.

 

삽질, 잉여들의 열정

잉여인간이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인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인간이다. 특별한 목표도 없이 남들이 하는 기본만 하는 인간, 아니 그것조차도 하지 않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이 잉여인간이라면 명진은 바로 자신이 잉여인간이라고 순순히 인정을 한다.

특히 방학이 오면 명진은 남이 자놓은 시간표대로 자신은 그냥 따라하는 것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면서 여지없는 잉여인간이 되어버리고 만다고 한다.

 

잉여인간이라고 하여 전혀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혜연의 이야기처럼 잉여들은 잉여라서 전혀 엉뚱한 곳에다가 온갖 노력을 퍼붓고 살아간다. 밥 먹고 사는 데 도움 안 되는 그런 일들 말이다.

 

혜연은 잉여들의 또 다른 특징이 끈기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을 쏟아 붓기는 하지만 하나에 집중하지 못한다. 하나를 하다가 곧 귀가 팔랑거리면 다른 아이템으로 넘어간다.

→ 오. 완전 공감.. 얼마 전 ‘끈기 부족’이란 키워드가 떠올랐는데!!!

이것저것 건드린 아이템은 많은데 그 중에서 성취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뭔가를 이룬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마저도 오래 끌지 못하고,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열정을 삽질이라고 부른다. p217

 

선영은 열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왜 열정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되물었다. 우리는 열정을 바치면 그만큼 값진 것이 돌아오리라고, 혹은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p219

 

경화는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하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열정을 바쳐왔다. 중학교 때는 청소년문화기획단에 목숨을 바쳤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여행에 미쳤다. 미친 듯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최근에는 퍼거슨의 음악에 푹 빠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열정을 다한 것들은 하나같이 이 사회에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물론 경화는 자신의 그런 경험들이 다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그러 경험들이(자신을 변화시키면서)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스펙이 되지 않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대가가 없다는 이유로 무언가에 대한 열정을 너무도 쉽게 삽질로 만들어버리면서 우리는 오히려 세상의 가치에 얽매이고 너무나 많은 것을 버린다. p220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가 말하는 뜨거운 열정이다. 자신만을 위한 열정 말이다. 누구를 위한 것도, 누구와 경쟁하여 이기는 것도, 어떠한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닌 자기만족적인 열정. _선영

 

삽질이라고 불리는 잉여들의 열정은 그 자체가 목적인 유희이다.

열정이란 원래부터 밥도 쌀도 안 나오지만, 정말 비생산적이지만, 그러면서도 사회의 가치로는 전화되지 않는 삶의 원동력을 생산한다. p221

 

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재미이다. 재미가 있어야 참여를 하고 재미가 있어야 동료로 맞이한다.

 

근대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최적화의 원리’, 즉 무엇을 하더라도 효율적이고 최적화된 형태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리하여 일요일을 금요일로 만들 것을 요구한다면 해커의 윤리는 금요일을 일요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놀이를 노동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놀이처럼 하는 것이다. p222

→ 노동을 놀이처럼 할 수 있다는 것. 좋다!!!

 

교환을 위해, 축적을 위해 열정을 다해야 하는 순간 열정은 고문이 된다.

대다수 학생들이 이런 자기만족적이고 대가 없는 열정을 팬클럽 활동에서 느껴봤다고 말하였다. p223

 

가상이든 무엇이든 빠순이라는 말은 아이들과 팬의 관계를 우상과 숭배자로 만들지만 열정을 쏟는 이들에겐 서로가 삶의 동반자, 우정의 관계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쏟아 부은 열정,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열정이 무력화되다

잉여들의 삽질보다 더 비참한 운명에 처한 것이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열정이다. p224

 

차라리 모를 때는 순수하게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지만 내부 사정을 잘 알게 되면 도저히 그 일을 이전처럼 열정적으로 할 수 없게 된다. p226

 

대학생들의 열정은 단지 자신들이 젊음의 가치와 열정을 얼마나 높이 사는지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일 뿐이다. 그래서 이 장식품들은 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 절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기획해서 새로운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p227

 

그런데 이 보기 드문 삼위일체,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맞아떨어지는 행운을 만들고 누렸지만 요즘 은경은 지친다고 한다. 밤을 새우고 백 개가 넘은 샘플을 만들면서도 절대 지치는 법이 없었던 은경이지만 요즘 너무나 피곤하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해야하기 대문이다. 지금까지는 옷 만드는 일에만 매달리면 되었지만, 이제는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면접 준비도 해야 한다. 아무짝에도 도움 되지 않는 토익 점수를 만들어야 하고 있는 척하는 기술을 배워 면접 준비도 해야 한다. p228

 

열정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열정을 불태우는 동방신기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괜찮아라는 자기 위로가 돌아갈 뿐 정작 이윤은 기획사가 다 가져가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한 일이니까 괜찮다고 말하면 이런 착취에 가까운 일을 당해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동방신기 타코야끼까지 나왔다. 동방신기 이름만 갖다 붙이면 그대로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익은 고스란히 기획사로 돌아간다. p230

 

나는 인간들이 꼭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누리고 사는 삶이 있었으면 한다.

이렇게 영화계에서부터 패션, IT업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열정을 다 바치면서 착취를 견뎌내고 있다. p231

 

이 착취구조가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노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달려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노동을 하는 이유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우리 시대는 돈을 조금 벌더라도 자아 실현을 할 수 있는 노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다. 여기서 창의 노동 혹은 열정의 자발적 착취가 시작된다.

 

지혜의 업무는 인터넷이나 잡지에서 필요한 패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이를 오리고 붙여 정리해서 이사에게 넘기면 이사는 그 정보를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정보로 탈바꿈시켰다. 이런 정보를 필요로 하는 회사에 그것을 넘기면 회사로 엄청난 돈이 굴러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지혜가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 20만 원이었다. p232

 

지혜는 다시 한 번 항의한다. 노예라고 해서 바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이다. 바보처럼 자신들이 착취를 당하는 것도 모르고 불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는 이 노예들은 그것을 감수하면서도 간다고 말한다.

 

삽질과 열정은 다시 자본이 착취할 수도, 교환할 수도 없는 순수한 유희에서 만난다. p233

→ 이런 곳이 필요하다.!!!

 

조금 긴 결론 | 다시 교실에서

세상은 20대들에게 슈퍼맨이 되라고 한다. 성적은 당연히 좋아야 하지만 성적에만 목을 매서도 안 된다. 성격과 사회성이 좋아야 하지만 정에 매여도 안 되고 철저히 경쟁적인 약육강식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제도에 충실하면서 자기 경험도 많아야 한다. 한마디로 슈퍼맨이 되거나 죽으라는 이야기이다.

 

대학이 분류되고, 대학생들이 분류된다.

똑같이 대학을 비판해도 명문대생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비판이 되고, 지방대생은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요구로 다루어지면서 그들의 처지가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얼마나 비참한지에 초점이 맞추어질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분류표, 즉 우리의 정치를 성찰하기보다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p237

 

진보적인 쪽에서는 정치적으로 철딱서니가 없는 존재로, 보수적인 우파들로부터는 경제적으로 철딱서니가 없는 존재로 비난 받는다. 정치적 주체로서, 경제적 행위자로서의 이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매우 드물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때 비로소 나의 말할 권리는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는 말을 하는 나의 용기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방의 듣는 의무를 요청한다. 이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들려야 한다는 것은 이들의 거칠고 정리되지 않고 울퉁불퉁한 목소리를 우리가 진지하고 꼼꼼하게 듣는 훈련이 되어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p238

 

우리는 길고, 반복되고, 우물거리고, 때로는 모순되건 비약인 이야기를 참지 못한다. 누군가 이야기의 핵심과 요점만을 빨리 빨리이야기해주기를 바란다. 이런 감수성으로는 절대 그들을 이해할 수도,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들에게는 말할 권리는 있지만 들을 권리가 없는 셈이다.

 

그들은 나의 지적 파트너였으며 도반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물은사람으로서의 나의 기록이다. p238

 

그 과정에서 나는 이들의 사유의 힘을 발견하였다.

 

내가 이들에게서 동등한 사유의 힘을 강조하는 이유는 서문에서 말한 성장의 신화때문이다. 우리가 이들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들이 생각 없이 살아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각, 즉 성찰은 성장의 지표이다. 따라서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말은 곧 이들이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옮겨간다.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 생각이다.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였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의 전체를 통해 이들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전혀 다르게 경험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우리가 20대들을 두고 아이템이나 탐하는 동물이 되었다고 비난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야말로 생존에 묶인 동물인 셈이다. p240

 

내가 이들의 사유의 힘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가는 나의 지적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언어를 찾는다는 점에서, 나는 학생들과 나의 관계를 도반이라고 생각한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입장의 동일함. 그것이 관계의 초고 형태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을 공유한 공동체가 아니라 질문을 공유한 공동체이다.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공동체가 오래 갈 수 있다. p241

 

질문을 봉쇄해버린 사회에는 그 어떤 미래도 기대할 수 없다. 질문에 우리 스스로를 개방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끝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끝이 없기 때문에 냉소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이야기를 이어감으로써 윤리적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질문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승산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오직 물을 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p242

 

개념과 사유의 힘

학생들은 철학적 사유를 대단히 좋아하고, 사유의 힘에 압도되고, 또 매혹된다. p244

 

복지국가의 대통령은 따뜻한 가부장의 이미지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며 자신이 마치 시혜를 내리는양 포장하지만, 알고 보면 연극에서 이 배역을 맡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바쁘다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목표로 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시간을 나의 통제 아래 두면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상태이다. 그러나 분주함은 늘 바쁘게 무언가를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이고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p247

 

집단지성, 그들의 삶 속에 이미 있다

“’는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아무런 필요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실제로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의 의식은 존재한다. p250

 

학생들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하고 짜릿한지 깨달아갔다. 또한 자신들 안에 이미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유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p251

 

상처를 보며 무성은 라는 고유함은 아픔에 대해 자신도 헷갈려하는 의식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 흐리멍덩해지는 기억도 아니고 몸에 남은 이 상처, ‘몸뚱이자체라고 결론지었다.

 

인간을 의식이 아니라 몸으로 이해하는 데서 인간 이해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자신의 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늘 몸을 의식하면서 말을 해야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몸뚱이로만 존재하는 이들은 구경의 대상이지 인권의 주체가 아니다. p253

 

자신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틀어도 인문학적인 개념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금방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나다라는 주장을 그것만으로 소개하면 그냥 웃고 말지만 이 말이 그리스도교에서 신의 이름인 야훼, 여호와의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는 사실만 일깨워주어도 금방 자신들의 말이 품은 무게를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을 한 학생은 그리스도교의 신과 동급으로 자신을 사유했다는 데 놀라워한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나는 수업이란 이들이 가진 사유의 힘을 집단적인 지성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흐름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어쩌면 이것이 내가 계속 글을 쓰고,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는 힘이 쎄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곳은 믿음이 아니라 행동이다.

진리가 가진 힘은 강력하다. ‘진리는 더 이상 의심하거나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 된다. 나아가 이 진리는 세상만사를 해석하고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공식적언어가 된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정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256

 

도덕에 맞서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은 명품을 걸치건 보세 상품을 걸치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소비에서도 자기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소비자본주의의 상술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교과서적인 비판이다.

 

오히려 내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이러한 도덕적 주장이 우리에게 어떠한 정치적 효과를 내는가이다. p258

 

논리는 간단하다. 인권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짐승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피의자에게는 법이 정한 절차 내에서 범죄가 확증되기 전까지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무죄추정의 원칙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인간만이 가진다. 인간만이 얼굴을 통하여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말을 한다. 인간의 얼굴에는 표정이 있기 떄문이다. p259

 

인지상정, 즉 인간의 공감 능력은 우리 사회의 서열 체제 앞에서 멈춘다. 아니 인간을 인지상정이라고 이해하는 그 도덕적 마음이 비윤리적인 인간 서열 체제를 승인한다. 여기에서 도덕이 반윤리로 타락한다. p260

 

이 때문에 인간에 대해 가장 도덕적인 언어로 무장한 학생들이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싸늘한 마음을 갖게 된다. 도덕이 반윤리를 승인하며 바로 이것이 현실 정치의 역할이다. 인간을 서열화하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자로 갈라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지 않은가. p261

 

다시 교실에서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장소에서 환대하는 행위이다. 그에게 나의 장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의 장소를 그와 공유하며 우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행위이다. 이 환대를 통하여 나는 그와 함께 세계를 만든다. p262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모두를 환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연쇄살인범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디서 활성화되고 어디서 멈추는가?

 

민족과 국가, 인종과 종교,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인간의 공감 능렭은 분할되어 있다.

인간 됨의 핵심이라고 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떤 분류표에서 멈추었다.

 

나는 이것이 수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됨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이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가진 무게를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수업이라고 믿는다. p263

 

좋은 선생을 만나야 하고, 좋은 책을 만나야 하며, 또한 좋은 동료를 만나야 한다. 우리는 그러면서 성장해나간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학생들이 좋은 책과 선생, 그리고 동료를 만나게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만남을 죄악시한다. 좋은 책보다는 자기계발서나 토플 책을 펼쳐야 하고, 좋은 강의보다는 만만한 강의를 들어야 한다. 동료들과 협업을 통해서 집단지성을 발휘하기보다는 노트조차 빌려주어서는 안 되는 살벌한 공간이 지금의 대학이다. p265

 

그가 떠나고 싶지 않았던 곳은 대학이라기보다는 대학에서 허용되었던 아지트들, 즉 몇 개의 교실과 동아리방 같은 작은 구멍일 것이다 .대학이 스스로의 과 지배를 철회한 예외적인 공간인 몇몇 교실과 자치 공간들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현실은 대학의 위기 또는 대학의 죽음이 아니다. 죽은 대학이 이런 조그마한 구멍들조차 용납하지 않는 리바이어던과 같은 괴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확한 현실이다.

 

불가능한 곳에서 가능함을 상연하는 것, 그것보다 멋진 혁명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여기가 내가 선 자리이다. 한 현인의 말처럼.

여기가 너의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 지금 여기서 뛰어봐야겠다.

IP *.38.222.35

프로필 이미지
2012.05.18 14:10:51 *.114.49.161

로두스가 뭔가 네이버에 검색했어요 -_- 여전히 뭔지 모르겠네요.

길지 않은 책인데 저렇게 많은 인용문을 타이핑하셨군요.

저는 이 북리뷰 읽으며 이해하고 싶은 한 사람 떠 올렸어요. 

공동체를 이뤄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친구분들 이야기가 부럽네요.

프로필 이미지
2012.05.20 15:39:09 *.70.30.162

콩두님..

http://blog.daum.net/cyberjaju/13734350

여기 잘 나와있네염..

 

.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셨기를..^^ (저도 확실히 정의내리진 못하겠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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