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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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계유, 갑술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에 일고여덟 살이었다. 병에 오랫동안 시달리어 음악, 서화 혹은 칼, 거문고, 골동 등 모든 잡물을 제법 좋아했을 뿐더러 더욱이 지나는 손님을 모아놓고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옛이야기로써 마음을 여러 모로 위안시켰으나, 그 깊숙이 스며든 울적한 증세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 박지원의 『민옹전』 중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사상가, 소설가인 박지원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는가? 그의 아들 박종채는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초리’라는 말로 부친의 용모를 묘사했다. 귀신이 도망갈 정도의 양기를 지녔다는 그가 한창 때에 우울증을 앓았다니 참으로 놀랍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고 난 후 인생무상을 깨닫는 중년도 아니고 청운의 꿈을 품고 입신양명을 다짐해야 하는 청년의 나이인데 말이다. 그의 우울증은 불면증에 거식증을 동반하는 중증이었고 앞의 글에서 보듯이 음악, 서화, 칼, 거문고, 골동과 익살과 유머로 달래보았으나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나 역시 30대 후반에 혹독한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당시 나는 마흔을 앞두고 허무감과 불안감에 억눌려 길을 잃은 채 서 있던 때였다. 다행히 나는 혼자 고민하지 않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생각이 열린 사람이었다. 전문의의 처방에 따라 약을 복용하고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해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자 증상은 조금 나아졌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얼마 후 회사를 그만두고 휴식을 갖자 나의 우울증은 자취를 감추었다. 고미숙은 우울증을 ‘몸적 사건’으로 파악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우울증은 몸의 기운이 외부와 소통할 통로를 찾지 못해 기운이 아래로 처지면서 울결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병은 몸의 기운적 배치를 바꾸고,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어야 낫는다. 나 역시 존재 방식을 회사원에서 자유인으로 바꾸자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머리가 깨닫지 못한 문제를 몸의 신호로 감지하는 경우들이 있다. 나는 강인한 정신력만 있다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몸이 보내는 신호를 나약한 마음의 표현이라 윽박지르며 무시했다. 병이 생기면 튼튼하게 타고 나지 못한 몸을 원망하며 각종 처방에 기대어 빨리 낫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고미숙의 주장에 100% 동의한다.
큰병일수록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는 메시지에 해당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삶은 계속된다. 건강이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병을 생의 선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큰병에 걸린 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자신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 역시 우울증을 극복한 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의식하며 돈과 명성을 쫓는 불나방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남이 뭐라 해도 내가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되면서 나는 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몸과 마음을 보살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병은 새로운 인생을 살라는 몸의 신호요, 신의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효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몸 일기’를 쓰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작년 안식년 휴가 때 100일 동안 목표를 설정하고 진행상황을 기록하는 100일 프로젝트라는 것에 몇 번 참여했는데 이때가 나의 몸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는 유용한 기회가 되었다. 한번은 하루에 1시간 동안 산책을 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다 덜컥 병이 난 적이 있었다.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노는데 병이 나니 황당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때 한의원을 찾았는데 내 몸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의사는 나는 타고나길 ‘작은 전구’라 했다. 작은 전구의 빛은 그다지 밝지 않다. 장착된 충전기 또한 크지 않으니 금방 소진된다. 하지만 그만큼 빨리 충전되기도 한다. 그러니 욕심을 줄이고 자주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한의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런 소음인 체질이 오히려 관리를 잘해 오래 살 수 있다는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아울러 선천적으로 심장이 그리 튼튼하지 않으니 무리를 하지 말라는 당부와 잠은 8시간 이상 자고 식사를 잘 챙겨먹으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100일 동안 일지를 쓰다 보니 나의 몸 상태가 어느 때 나빠지는지에 대한 패턴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꼭 한 달에 한 번 정도 몸 상태가 나빠졌는데 생리주기와도 연동했다. 아울러 스트레스를 받을 때, 잠이 부족할 때, 식사를 제때 하지 않을 때, 육체적으로 무리를 할 때면 급격히 몸 상태가 나빠졌다. 먼저 일어나기 미안해 새벽까지 자리를 지킨 모임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앓았다. 욕심 때문에 사나흘 무리하면 그 다음 하루는 꼭 탈이 났다. 나는 밥을 잘 챙겨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을 내 속도에 맞추어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내 몸이 내 욕망을 따라가지 못함을 원망하지 않고 평화롭게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작은 전구인 내 몸에 맞는 욕망을 가지고 재충전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다.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건강법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음식은 밥물이 걸죽하게 고인 것이며 가장 훌륭한 삶은 담백하고 진솔한 일상이다. 이빨을 맞부딪히는 고치법이 좋고 맨손체조와 식후 100보 걷기, 생각은 적게 하고 몸은 많이 움직이는 것을 추천한다. 일을 하지 않고 노는 것도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권상(피로한 것)은 오히려 한가한 사람에게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가한 사람은 몸을 움직여 기력을 쓰는 때가 많지 않고 배불리 먹고 앉아 있거나 눕는 경우가 많으니 이리 하면 경락이 통하지 않고 혈맥이 막혀 노권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허준은 사람은 항상 힘을 써야 하되, 너무 피로할 때까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영위가 잘 흐르고 혈맥이 고르게 퍼지게 일하는 정도가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지도리는 좀을 먹지 않는 이치와 똑같다고 말한다.
휴식에 있어 ‘어떻게 쉬는가’ 뿐 아니라 ‘언제 쉬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나는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면 쉬어야 할 때를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1년 반 동안의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조직에 복귀한 나는, 몸의 신호에 충실하게 달림과 멈춤을 결정한다. 왕복 2시간 동안의 출퇴근 시간에서 1시간 정도는 걷는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집을 나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8시가 다 된다. 집에 있을 때보다 활동량이 많아지니 집에 오면 눈꺼풀이 저절로 감긴다. 그래서 나는 ‘밤 10시 반 취침, 아침 6시 반 기상’ 원칙을 고수하며 8시간 수면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 아침은 꼭 먹고 출근하고 점심과 저녁식사도 되도록 건강식으로 챙겨먹는다. 저녁 모임은 되도록 10시 전에 마치고 집에 귀가한다. 일에 너무 큰 욕심을 내지 않도록 마음을 닦으며 페이스를 조절한다.
당신은 아마 나처럼 자신이 가진 전구 크기에 만족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구가 깜빡일 때면 잠시 그런 것이라 방치할 수도 있고 저러다 말겠지 싶어 무관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당신의 몸이 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그 소리를 듣고 휴식의 시기를 가늠해 본다면 건강한 삶을 꾸려가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쉬어야 할 때는 몸이 아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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