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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2일 02시 45분 등록

꼭 책을 써야 할까?”

 

이 책은 자기비하에 빠져있던 작은 아이가 그래 한 번 사랑해보자.’라고 마음먹은 순간 시작되었습니다. 철저히 나의 욕구에서 탄생한 거지요.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은 하는데, 이해할 수는 있는데 잘 되지 않았던 아이의 투쟁의 흔적입니다. 당시 나는 절실했고, 그만큼 열심이었지요. 공부를 하고, 쓰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하루하루 나아졌지요. 주제에 집착한지 몇 달이 지나자 상황은 그대로이나 변한 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니? 책을 쓴다고 이것보다 더 나아지겠어?’ 라는.

 

책을 쓰고자 했던 것은 나의 목표였고, 나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메달렸습니다. 마치 이 한권에 목숨을 건 사람마냥 매진했지요. 사나흘 굶주린 자가 허겁지겁 음식을 밀어넣는 모양새였습니다. 어느덧 배불러진 자는 이런저런 음식을 골라내어 트집을 잡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나의 손은 느려지고, 머릿속에는 다른 것들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작가 공지영님은 작가가 배고플 때 좋은 글이 나온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처음 목표를 설정하고 걸어갈 때는 없는 열정도 샘솟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 가진 열정은 미지근해지고, 주변의 것들에 시선이 돌아갑니다. 세상에는 나를 자극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느덧 목표는 조금 늦게 이루어져도 괜찮은 것이 되고 그것을 넘어 꼭 이루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되어갑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는 주인공 산티아고가 머물다간 크리스털 그릇 가게 주인인 나이든 상인이 등장합니다. 그가 하는 말이 꽤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오직 메카만을 꿈으로 간직하고 싶어. 마음속으로는 벌써 수천 번 사막을 가로질러 성스러운 반석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고, 율법에 따라 그 바위를 만지기 전에 광장을 일곱 바퀴 돌고 있는 나 자신을 눈앞에 그려보았지. 나는 이미 내게 일어날 일이며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 그리고 함께 나눌 대화와 기도까지 상상해보았어. 다만 내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절망이 두려워 그냥 꿈으로 간직하고 있기로 한 거지.”

현실에 그대로 남아 있고 싶은 것, 그것은 어쩌면 목표를 이루고 났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두려운 것은 아닐까요? 모든 것을 걸고 매진했는데, 결과가 내가 바란 만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근거없는 불안감. 그 불안감이 나의 열정을 퇴색시키고, 나를 지금 이대로도 괜찮잖아.’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나는 언덕위에 있는 크리스털 그릇 가게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요. ‘꼭 해야 하나?’ 라는 마음 뒤에는 해낸다고 얼마나 달라지겠냐는 불안이 숨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진 내가 장담되지 않은 결과에 쏟아 부을 노력이 견딜 수 없어지는 거지요.

 

빨강의 바인더를 들쳐봅니다. 나는 잘 잊어버리고 산만한 녀석이라 어느 시점에 바인더를 마련했습니다. 잘 잊어버려서 메모를 시작했는데 산만함 때문에 메모를 하나의 노트에 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바인더를 만들어 글, 조언, 인용구, 메모, 순간 스쳐간 문장, 낙서들을 모아두었습니다. 날렵했던 녀석은 시간이 지나며 뚱뚱해졌죠. 지금은 들고다니기에 무서운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서문이 나오지 않아 끙끙댄 낙서들, 목차가 떠오르지 않아 다른 책의 목차를 필사했던 적도 있지요. 그것들이 모두 모여 책에 대한 기록이 되어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책을 쓰기 위해 울고 웃던 내가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 이것들을 들춰보자면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꿉니다. 상처도 아픔도 사랑의 설렘도 옅어집니다. 목표를 향한 열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밀어붙이던 추진력은 어디가고, 지치지 않던 체력도 다해갑니다. 그 자리를 불안이 메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안주할 수 있는 핑계거리를 찾나봅니다.

 

목표를 향해 걸어가던 나의 모습이 예전보다 괜찮아 졌다는 건 썩 좋은 신호입니다. 적어도 내 목표가 제대로 된 방향이라는 걸 알게 해주니까요. 그렇다고 여기서 안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 목표에 도달해도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가보지 않은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으니까요. 정상을 향해 가던 등산객이 산 중턱에서 정말 좋은 장소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 곳이 산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끝까지 가봐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을 봐야 합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최적의 장소를 찾기 위해서 끝까지 가봐야 하는 거지요.

 

라틴어 격언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Vox auditat perit, Litera scripta manet” 해석하자면 말은 바로 사라지나 기록된 글은 남는다.’의 의미이지요.

기록은 글자들의 단순한 배열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알려주지요. 누군가의 눈에는 정리가 되지 않은 낙서일 뿐이라도, 읽어주지 못할 글이라도 나에게는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서 울고 웃었던 지난날의 내가 있습니다. 힘겨웠던 시간을 견뎌온 살아있는 내가 있습니다. 그때의 나를 보며 마음이 뭉클해지고, 이 목표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왜 내가 여기서 멈추지 못하는지 다시금 새기게 됩니다. 초등학교시절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일기의 의미를 이제야 깨닫다니 나도 어지간히 열등생인 모양입니다.

 

굳은 결심도 열광했던 비전도 끝까지 간직하는 자가 이룰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있다면 기록을 시작하세요.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증거를 남기세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우리는 빨리 잊어버리는 존재랍니다. 멋지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목표를 향해 걷는 살아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담아요. 기록들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얼마나 원했는지, 얼마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힘든 시간을 어떻게 넘겨왔는지, 왜 아직도 걸어가야 하는지.

 

시간이 또 흐르면 바인더의 빨강이 분홍으로 옅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당신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다면 바인더는 아직 빨강입니다. 그 안에 있는 내가 지금까지 빨강의 색을 띠고 있으니까요.

 지금 당신에게 목표가 있다면 그래서 걸어가고 있다면 단 한줄이라도 좋으니 기록을 남기세요. 그 안에 당신의 부스터가 숨어있답니다

 

 

사진 (6).JPG 사진 (7).JPG  

최신 프로그램이 도처에 널려있는 지금, 손으로 적고 메모를 붙여가는 아날로그적인 나의 모습이 조금 부끄럽지만 그 안에 있는 열정과 불안을 떨쳐내기 위한 노력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IP *.7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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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2 06:56:31 *.166.205.131

루미의 열정과 노력이 부럽고 자랑스럽다!

빨강 바인더도 부럽고.

난 작은 아이디어 노트 하나만 가지고 다니며

일상의 스쳐가는 대화들을 적거나 꼭지글 구상을 하지.

한 꼭지를 쓰고나서는 잘 들쳐보질 않아.

루미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말야.

나도 아날로그적 바인더를 써볼까나~

회사에서 네이버, 다음도 못쓰게 한다고 공지가 뜬 이마당에...

 

루미의 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느낌.

잘 다듬고 덜어내고 살을 붙여서 루미의 모든 것이 담긴

첫 책이 탄생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아니함!

나도 열심히 따라갈께~~^^

 

근데 '당신의 부스터'는 무슨뜻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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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4 00:21:22 *.70.11.31

부스터. 같은 말 승압 변압기. 오빤 이해하지 않을까? ㅋㅋㅋ

로켓이 발사되는 순간 쓰는 거라는데...

나는 이 개념을 카트라이더에서 빌려와서... 쩝....

순간적으로 부웅~~~~ 하고 나가는 힘... ㅋㅋㅋㅋ

바인더가 원노트랑 같은 의미인 것 같아요.

나는 그런 프로그램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언제든 쓸 수 있는 것들이 좋아요.

그것들은 언제든 한데 모을 수 있지요.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 그러나 검색은 단점......... ㅋㅋㅋㅋ

오라버니도 오라버니 방식을 만드시길.

난 책을 한 권 낼때마다 바인더를 한권씩 만들 계획~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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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2 09:35:36 *.252.144.139

루미의 여행가방은 항상 단촐하다.

입고온 옷으로 며칠을 버티고 치약을 빌려쓴다.

그런 루미에게 빽빽하게 필기된 토피카 바인더가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루미는 이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나봐.

루미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책을 나에게 내밀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이작가, 화이팅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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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4 00:25:42 *.70.11.31

내 몫의 수건까지 가져온 언니에게 감사를~

꽃무늬 수건을 잊지 못할꺼얌~~ ㅋㅋ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살아나가는 방식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이 길은 생존의 의미지요.

그렇지 않으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ㅋㅋㅋㅋ

이작가... 내 친구 말고는 처음으로 들은 호칭이네요~ ㅋ

이래서 언니를 사랑해~~~ 정말 너무 좋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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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2 11:27:44 *.38.222.35

오오... 예전에 얘기했던 바인더가 저렇게 채워지는거였군!!!

훌륭하다~~~~

나는 몇 번 쓰다가 말았는데..ㅋㅋㅋ..

 

지금도 여전히 '써야하는데...'라는 생각만. 머리 속에 동동동 떠나니지.ㅎㅎ

 

꼭 책을 써야지. 사부님 말씀처럼 책을 쓰고 나면 더 좋은 사람도 만나게 될테니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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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4 00:28:19 *.70.11.31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듯 하다.

나는 낙서를 즐기는 사람이라 글씨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ㅋㅋ

너는 원노트를 사용하도록 하거라... 나는 익숙해지는 데만 시간이 걸린다..ㅠㅠ

꼭 책을 써야지... 좋은 사람 만나기 위해서...

뭥미??? 주객전도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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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4 03:19:26 *.220.138.26

루미님의 독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정해놓고, 꾸준히 글을 올리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부웅~하고 날아가는" 이야기도, "기록을 시작하라"는 이야기도 마음에 담아갑니다.

<말하는 건축가>영화 속의 故정기용님도 그렇게 자신이 했던 작업을 기록으로 남겨둔 것을 영화에서 봤습니다. 

그 기록들이 그분의 건축작품이 되었고, 그 기록들이 갤러리에 전시되어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타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저도 루미님을 따라 기록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다음 글도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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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23:32:03 *.70.10.123

쇠북님의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르실 거예요^^

쇠북님도 꿈이나 목표를 향한 열정이 있으신 분이라 더욱 와 닿았나 봅니다.

제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했던 일이 도움이 되셨다니 너무 기쁘네요~~

더욱 힘을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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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5 09:19:54 *.114.49.161

연구원 공부하고 쓰고 행동으로 옮기면 하루하루가 나아진다는 말씀이시죠?

이 말에 솔깃 합니다.

저도 그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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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23:34:03 *.70.10.123

저는 책을 쓴다는 목표를 늦게 잡은 사람입니다.

처음 연구원도 책을 쓰겠다는 목표가 아니었지요.

어쩌다보니 나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콩두님은 저보다 훨씬 빠르실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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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6 15:02:37 *.111.206.9

오, 훌륭한데요. 특히 바인더에 손으로 쓰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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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23:36:20 *.70.10.123

모든 자료의 문서화가 가능한 시대라 아날로그가 감동인 모양이예요~ ㅋㅋㅋ

체계적인 면이나 효율성을 따지자면 뒤떨어지겠지만

새겨지는 면에서는 훌륭한 도구인 듯 해요.

특히... 저처럼 잘 까먹는 사람에게는 말이예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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