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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8일 11시 56분 등록

지옥과 천국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과제 제출의 마지막 클릭을 하고, 서둘러서 집을 나섰다. 홀가분한 기분과 함께, 이제서야 여행하는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도착한 인천공항, 출국 수속을 진행하는 직원들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지갑 속에 여권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내 차례가 될 때까지 여권을 찾지 못했다. "여권, 주시겠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났다. 어제 저녁, 여권을 복사하고, 정작 여권은 복사기에 놓아둔 것이다. 그리고, 지갑 안에는 필요도 없는 종이 쪼가리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직원에게 순간 내뱉은 말은 "여권, 없으면 안되나요?" 였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인 걸 알면서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이 없다는 직원의 표정을 보고서야, 현실을 직감했다. 내일 뜨는 비행기 좌석도 없었다. 또 다시 시작되었다. 뭐든지 처음 시작할 때, 꼬이는 불행 말이다.

가족들은 이미 처갓집에 내려가 있고, 나를 도와줄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내 집 근처에 누가 가장 가까이 살고 있을까?' 였다. 바로 앞 동에 살고 있는 대학 동기가 생각났다. 전화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했다.

", 승욱아 왠 일이니?" 평상시 전화도 안 하던 동기가 밤 늦게 전화했으니, 놀란 목소리였다.

"나 지금, 인천공항인데, 우리 집에 가서 여권 좀 퀵으로 보내 줄래" 마치 옆에 있는 물 한잔 갖다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참 황당한 부탁이었다.

"잠깐만, 나도 지금 집에 없는데, 남편한테 부탁해 볼께, 기다려 봐", 그리고 나는 열쇠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10분 뒤에 전화가 왔다.

"남편이 퀵 불러서 보냈어, 시간 내에 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도착하면 전화 줘" 나 또한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1시간 30분 안에 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시간까지 못 오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가는 비행기 좌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버스 타고 올 때에도  2시간이 걸렸는데,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더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퀵 아저씨에게 돈은 넉넉히 드린다고 말해 놓고, 기다렸다. 이미 출국 수속을 마친 동료들은 출국 비행장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시간 내에 오지 않으면, 그냥 너희들끼리 가라고 말해 놓았다. 나 혼자 공항에 남았다.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너라는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러니? 그 동안 무엇을 잘못했길래, 또 이런 시련을 당하는 거니? 너의 운명에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구나"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앉아서, 단테 <신곡> '지옥편'을 펼쳤다. 책 속에서 무슨 죄를 지으면 이렇게 시련을 받는지 알고 싶었다.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중립자들, 지체 높은 이단자들, 마음속으로 자연과 신의 혜택을 무시한 사람들' 나는 이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인간의 재주는 대체로 가능한 한 자연법칙에 따르고 있다, 마치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과 같이."

 '내가 너무 욕심 내서 살아온 것일까?, 신과 자연의 흐름에 순종하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살아온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거구나' 라고 해석해 보았다.

이제 5분 남았다. 어디쯤 왔는지 퀵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다.

"다 왔어요, H게이트로 나오세요" 전화를 끊고 달려나갔다. 아저씨 모습이 천국의 천사와 다름없었다. 차에 날개를 달고 온 모양이었다. 너무 고마웠다. 나는 사례를 하고는 출국 수속을 밟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무사히 터키행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사건은 내 의지대로 살아온 결과가 아니라, '이번 여행을 잘 다녀오라는 액땜이구나, 그리고 출발 전에 신께 올린 재물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9 10일 동안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지만 '인천공항에서 퀵 부른 사나이'라는 오명은 지울 수 없었다.

IP *.194.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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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12:07:03 *.107.146.173

인천공항에서 퀵 부른 사나이'라는 오명은 지울 수 없었다..

이런건 오명도 아니라네

출발 전 신께 올린 액땜 제물이었구만 ...ㅎㅎ

참 우린 살면서 천국과 지옥을 많이 경험하지 ?

수고많았고  무사히 자알 다녀와 다행이다.

똥쟁이의 터키 유람기를 기대하며..짜자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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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17:33:21 *.194.37.13

벌써, 동네 방네 소문이 다 났습니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다니고 다니겠습니다.

그래도 똥쟁이 보다는 나은 애칭이어서 상관없습니다.

 

이번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터키에서 사고 친게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동료들이 저에게 "에피소드 제조기"라는 별명도 붙여 주었습니다.

아참 그리고, 이탈리아 시칠리 섬이 고향인 남자도 사귀었습니다.

기대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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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13:25:35 *.39.134.221

엄청 재밌다!!

남의 일이라...ㅋㅋㅋ

예상 밖이네. 찬찬한줄 알았더니. 그 와중에 책이 눈에 들어오드나?

 

잘 다녀온 후기는 다음편에 기대만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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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8 17:26:57 *.194.37.13

이 사고로 더 멋진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은 탓에 좌석이 변경되었거든요, 그리고 제 좌측과 우측에 앉은 사람과

10시간 동안 이야기하면서 인연을 만들었습니다.

퀵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았죠. 

기대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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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9 08:48:09 *.36.72.193

'그 와중에 책이 눈에 들어오드나?' 길수 행님 댓글에 100% 공감. ㅋㅋ

'숙제나 해야겠다.' 이런 보상 심리였을까?

 

10시간 동안 이야기하며 인연을 만들려고

여권 놓고 왔었다고 해버리면 ㅋㅋ 이상하려나?

즐거운 여행 기록을 보며 부러웠고, 또 한편으로 오빠의 여행 나날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 정말 좋았습니다.

가서 우리 생각 많이 했지요?^^

8월에는 함께 갑니다. 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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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9 13:08:07 *.182.111.5

여행이라는 환경이 인연을 만들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버스 타고 있는 옆사람에게 말걸기가 어려운데,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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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21:00:36 *.166.205.131

조마조마 했겠네요.

그 긴장감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대단!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겠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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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3 01:09:14 *.194.37.13

가끔씩 일어나는데, 남들은 경험해보지 않은 수준이어서

이제는 무덤덤합니다.

이번에도 허탈하다 못해 웃음만 나오더라구요.

그리고, 꼭 갈 수 있다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퀵 아저씨와의 대화입니다.  

"도로가 꽉 막혔든데, 좀 더 달려서 가면 수고비를 더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저녁 10시에 고속도로가 막힌다고 해서 직감했습니다.

시간내에 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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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2 04:50:00 *.128.229.115

너는 자석이구나.  무수한 재미부스러기들이 마구 달라 붙는구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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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3 01:13:41 *.194.37.13

변경연에 와서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행운까지 달라 붙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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