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書元
  • 조회 수 2180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12년 5월 28일 12시 02분 등록

가족.JPG

 

아버님 기일로 고향을 다녀왔다.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마련해 가야 하기에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전이며 당면이다 마눌님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입장이라 시댁 제사를 치러야 하는 며느리 역할에 대한 의무를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 하였었다.

아무리 맞벌이를 하는 입장이지만 시댁 어르신 생신, 집안 대소사 등을 챙기는 것이 여자의 마땅한 숙명이라고 받아 들였었다.

그러던 어느 해. 오늘처럼 분주히 음식 장만하기에 바쁜 그녀의 뒷모습이 왠지 힘겨워 보였다.

“내가 거들게 있을까.”

“여기 전좀 뒤집어줘요.”

그까이꺼.

그런데. 이런. 뒤집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하지만 마음뿐.

음식이란 것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먹는 사람이야 편하지만, 준비하는 사람의 작업과 과정이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거기다 먹고 난 후의 개수대에 널린 식탐의 흔적들까지 애써 지워야하니.

 

제사음식은 더욱 그러하다. 부침개 반죽부터 시작해서 산적에 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00시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탕국 없이 지내면 안 될까요.”

이렇게 차린 음식들은 대체로 기름기가 많은데 예전에 가난했을 때야 쉽게 접하지 못하기에 반겼었으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어머니는 꼭 전통을 주장하신다.

“탕국 없이 제사가 되니?”

“그렇긴 한데 막상 해가지고 가면 드시지도 않으면서.”

그렇다. 나물이며 당면이며 이런 것들은 더운 날씨엔 쉽게 상하기에 바로 먹지 않으면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가야할 입장인데도 제사상 머리위에 올라가면 그뿐이다. 정성껏 준비해간 며느리도 속상하겠지만 남자인 입장에서 보아도 아깝기는 마찬가지. 거기다 다른 종교로 개종하신지가 몇 년째인데도 굳이 유교식 제사를 고집하시는 입장에다 오늘은 한마디를 더거드신다.

“귀신이 없는 게 아니야. 내가 어제 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너희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겠니.”

허허. 세 살 때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는 터이기에 그렇게 내 꿈에 나타나달라고 염원해도 나타나지 않던 아버님이 어머님 꿈속에는 곧잘 주연배우로 등장을 하시는 모양이다.

 

이렇게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세월의 흐름은 거스름이 없다.

자식의, 손녀의 나이가 젊음 혹은 중년으로 치달을수록 어머니의 형색은 모양을 달리하신다.

무좀 걸린 손톱, 세상 풍파에 시달린 험한 주름살의 물결, 주무시다 눌린 흰머리, 조금씩 들리지 않는 청각, 쉽게 일어서지 못하는 퇴행성관절염, 높은 혈압, 염려되는 당뇨.

나이가 먹어가는 것이 축복이라고들 하지만 나조차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어무이, 올해부터는 명절 제사를 조금 일찍 지내면 안 될까요. 서울에서 이곳까지 차표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당일 과일에다 여러 제수음식들 물가가 장난도 아니고…….”

넌지시 운을 띄우자 어머니는 선뜻 답변이 떨어지지 않는 눈치이다.

당신의 몸이 불편하심에도

큰집이 아님에도 제사를 떠받들며

번거로운 유교식 의례를 끝까지 강조하며

드시지 않고 버리면서까지 음식의 형식은 매번 갖추어야 한다는 당신의 논리는 무엇일까.

제사전후 때만 되면 여러 가지 준비로 매번 언쟁이 벌어지면서도 당신의 방식을 당신의 생각을 굳이 내세우시는 이유가 뭘까.

나도 그 연배가 되면 그러할까.

 

옆자리에서 같은 밥상을 하고 있는 형님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감정은 더욱 커진다.

장남이면서도 그렇게 무던히 속을 썩이며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문제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형이라는 사람. 그 곁에 예전에도 그러했었고 현재도 그러하고 앞으로는 어찌될지 모를 어머니가 형상으로써 앉아있다.

그런데 그것이 시간이 흘러서인가 이제는 아들과 어머니의 사이가 아닌 동반자로써의 존재로써 다가오는 것은 웬일일까.

“내가 너땜에 못살겠다. 동생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니. 제발 정신좀 차려라.”

“잔소리좀 하지마세요.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사이로 관례를 유지해 온지가 벌써 몇 십 년이 흘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형 환갑잔치해야 되겠네.”

농으로 던진 멘트가 이제는 현실로 와 닿아 나이가 들어가고 세월이 들어가고 시간이 들어간다.

그 간격의 유한함속에 우리는 아들로써 딸로써 어머니로써 아버지로써의 역할로 자리매김을 하며, 주어진 약속의 존재에 익숙해지도록 노력을 하기도 하고 일탈을 하기도 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때로는 버거움과 속상함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마눌님은 돌아오는 길목에 한마디를 내지른다.

“승호씨 하는 행동을 보면 어쩜 그렇게 어머니를 닮았는지.”

…….

고집스러움을 닮고 싶지 않았는데

평생을 운명과 팔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셨던 어머니가 그렇게 싫었었는데

그 속에서 탈출해 서울로 도망 온지가 몇 년인데.

그런데 닮았다고.

닮았다.

그런가.

나의 모습이.

그토록 부정하고픈 나의 모습이.

허허.

기억의 뒤안길로 밀어놓은 그 행동과 언행과 성격이 그렇게 닮았다는 말이지.

세상에는 여러 진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피로 맺어진 혈육이고 그중에 하나가 살과 살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이다.

인정하려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코 끊을 수 없는.

IP *.130.104.63

프로필 이미지
2012.05.28 19:16:27 *.154.223.199

102번째 칼럼 축하합니다.^^

정말 제사음식은 처치 곤란할 때가 많아요. 저희 집도 제사가 많아요. 저는 하나도 안 거들어요.

이런저런 풍경이 우리집 풍경을 떠올리게 하네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212 [33] 시련(11) 자장면 한 그릇의 기억 secret [2] 2009.01.12 205
5211 [36] 시련12. 잘못 꿴 인연 secret [6] 지희 2009.01.20 209
5210 [38] 시련 14.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 사람. secret 지희 2009.02.10 258
5209 [32] 시련 10. 용맹한 투사 같은 당신 secret [2] 2008.12.29 283
5208 [37] 시련. 13. 다시 만날 이름 아빠 secret [3] 2009.01.27 283
5207 [28] 시련(7)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secret [8] 지희 2008.11.17 330
5206 칼럼 #18 스프레이 락카 사건 (정승훈) [4] 정승훈 2017.09.09 1662
5205 마흔, 유혹할 수 없는 나이 [7] 모닝 2017.04.16 1663
5204 [칼럼3]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정승훈) [1] 오늘 후회없이 2017.04.29 1717
5203 9월 오프모임 후기_느리게 걷기 [1] 뚱냥이 2017.09.24 1747
5202 우리의 삶이 길을 걷는 여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file 송의섭 2017.12.25 1751
5201 2. 가장 비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 2018.03.05 1779
5200 결혼도 계약이다 (이정학) file [2] 모닝 2017.12.25 1782
5199 7. 사랑스런 나의 영웅 file [8] 해피맘CEO 2018.04.23 1790
5198 11월 오프수업 후기: 돌아온 뚱냥 외 [1] 보따리아 2017.11.19 1796
5197 (보따리아 칼럼)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은? [4] 보따리아 2017.07.02 1798
5196 12월 오프수업 후기 정승훈 2018.12.17 1801
5195 일상의 아름다움 [4] 불씨 2018.09.02 1806
5194 칼럼 #27)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법 (윤정욱) [1] 윤정욱 2017.12.04 1809
5193 [칼럼 #14] 연극과 화해하기 (정승훈) [2] 정승훈 2017.08.05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