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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30일 20시 39분 등록
 

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 창비, 2012


나도 분명 영화 ‘색.계’를 보았건만 탕 웨이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라면, ‘색.계’라는 키워드 하나로 책 한 권을 쓴 저자와의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일까? 저자는 이 영화를 전체로 다섯번, 부분으로는 스무번쯤 보았다고 한다. 안그래도 모범생 기질에 법학자라는 직업까지 겹쳐 철저하게 규범-계戒-의 세계에서 살아 온 저자가 사십대 중반을 넘어가며 문득 삶이 무료하다 느꼈고,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꺼내든 테마는 욕망, 바로 색色의 세계인 것.


친일 정보기관장 량 차오웨이는 철저하게 자신만 지키고 살아온 고독한 戒의 남자였다. 이를 유혹하는 탕 웨이는 낭만적인 色의 여자, 하지만 량 차오웨이가 탕 웨이를 만나 일탈에 빠져드는 色의 남자가 되었다면, 탕 웨이는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해 나선 戒의 여자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탕 웨이가 자신이 맡은 정부 역할에 빠져들게 되면서 색과 계의 경계는 온통 엉망이 되어 버린다.


이 정도만 읽어도 규범과 욕망이 얼마나 가깝게 섞여 있으며 칼같이 구분하기가 어려운지를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이 두 가지 사이에 엄격한 철조망을 쳐 놓고, 어쩌다 욕망에 빠져든 사람에게 돌팔매를 던진다. 여기에 등장한 사례는 신정아 사건의 변양균씨. 권력, 학벌, 스캔들...대중이 혹할 만한 요소를 다 갖춘 만큼 이 사건을 세간을 뒤흔들었지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중년 남성이 얼마나 되는가고 저자는 묻는다. 적어도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한다. 이 책에서 보여준 성장환경이나 기질, 고백의 수준으로 보아 그가 변양균씨에게 동조할만한 일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겨우 사진에 빠져 카메라를 사 들이는 수준의 욕망이지만, 그 두 가지의 욕망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오히려 저자는 변씨 같은 사람을 용기있다고 평한다. 그 정도로 중년 남성이라면 누구나 제 때 분출하지 못한 욕망을 찍어 누르고 있다는 얘기이다.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 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에너지’이기도 하며,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id'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색色,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 심지어 상대방을 고르는 기준도 색보다는 계에 속한 것들입니다. ... 에너지를 충분히 사용하고 누린 다음에야 어른이 되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지랄이라는 실탄을 거의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 일탈하는 아저씨와 사냥꾼이 된 아저씨는 정반대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란성쌍둥이, 욕망을 배출하는 방법이 조금 다를 뿐, 계의 사람들이지만 숨겨진 색의 농도만큼 더 맹렬하게 돌을 던진다는 점에서 사실은 색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4001”이 나오기 전부터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설명할 때마다 신정아씨 사건을 예로 들어 왔다고 한다.  ‘형사정책 강의’와 희생양 이론, 그리고 신정아 사건의 연결이 신기하기만 하다.  소설을 제외하고 이렇게 솔직하게 혼외 사랑을(결코 정사가 아니다) 묘사한 글은 흔치 않다며 “4001”을 사랑에 빠진 중년 남성의 심리를 정교하게 묘사한 논픽션이라 칭할 땐, 저자의 인문학적 감수성과 솔직함이 고마울 정도였다.  똑같이 억눌린 욕망에서 나온 행태라면 치정의 불구덩이에 빠져 본 사람과 옆에서 구경만 하며 비난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진짜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인가. 한 법학자의 글을 통한 色이 우리 사회의 이중성과 위선을 한 꺼풀 벗겨 내기를 바란다.


 ‘색.계’를 설명하기 편해서 신정아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저자의 투명할 정도로 냉정한 분석력이다. 한번은 학생들 사이에 김두식교수가 엘리뜨주의자라는 소문이 번졌다고 한다. 명문대 출신의 학생만을 편애한다는 것, 여기에 대한 저자의 반격은?


저는요,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거든요, 그렇게까지는, 결코!


고3때 갑자기 성적이 떨어져  교사들의 숱한 질책을 들었을 때부터 이 분석능력은 발휘되어 왔다. 무릎이 꺾일만한 좌절을 느끼기도 했지만 순간 그의 머리에 “이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고 대답은 “아니오!”였다.  잠시 교사의 역할에 충실하여 한마디씩 거들고 있을 뿐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꼽아봐야 열 손가락을 채우기도 어렵다, 그 차가운 진실을 받아 들이면 마음이 한결 편해 진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배우는 방법이고 혼자 서는 길의 출발점이며 심리적인 어른이 되는 지표이다. 이성교제로 혼란스러운 학생들에게도 이렇게 냉철한 잣대를 들이대니 그에게 가면 커플이 깨진다는 말까지 나왔단다.


결혼 전에 천번쯤은 자위행위를 하면서 오르가즘을 느껴본 남성이 단지 여성과의 성기결합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동정’을 자랑하며 파트너 여성의 성경험을 단죄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 단락을 옮길까 말까  망설여지는 것을 보니 교수요 변호사요 기독교도이며, 그 이전에 철저한 戒의 남자인 그가 이 책을 쓴 것이 얼마나 용기있는 일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우선 블로그에 연재한 후에 책으로 펴내자고 출판사와 얘기된 것을 번복했을 정도라고 한다.


글을 쓰면서 매일 조금씩 더 자유로워졌고, 매주 조금씩 더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글쓰기가 주는 치유의 효과를 경험한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이 책을 조용히 건네며 “이게 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이 나온 후 그는 달라졌다. 6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막강한 쇄신능력인가. 글 참 맛깔나게 잘 쓴다. 은근히 신경쓰이는 가족의 경험까지 들춰가며, 써머싯 몸의 장편掌篇소설 ‘사자 가죽’에 빗대어 쓴, 상류층과 중산층의 묘한 심리적 역학관계는 어느 사회학자 못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 준다. 나는 아무래도 그를 무조건 지지하는 5프로 안에 들어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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