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 조회 수 2425
- 댓글 수 14
- 추천 수 0
책,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다 - 터키판 데카메론
터키 여행 가기 전에 나는 사부님에게 물었다. "이번 여행에서 어떤 책을 가지고 가면 재미있을 까요",
"혼자 가는 여행이면 '단테 신곡'이
좋겠지만, 동료들과 함께 가면 '데카메론'이 재미있을 거야" 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욕심 내서 두 권 모두 배낭에 넣었다.
첫 날, 비행기 안에서 '단테 신곡'의 <천국편>을
펼쳤다. 비록 천국과 가까운 푸른 창공을 날고 있었지만, 14시간
동안 비좁은 좌석에서 읽는 상황이어서 잘 읽혀지지 않았다. 일단 덮어두고, '데카메론'을 배낭에서 꺼냈다. 말하는
화자 10명의 구성이, 우리 동기와 딱 맞아 떨어져서,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술술 읽어내려 가는데,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 야릇한 욕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슬슬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이야기
출발부터 여권 사건 때문에 동료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나 둘씩 나를 챙겨주고 어디에 가든 한 명이 따라왔다. 또 다시
여권을 분실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의 '눈'만큼은 간섭 받지 않고 자유로웠다. 터키에 도착해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터번을 쓴 여인의 모습이었다. 푸른 눈빛 뒤로 아름다운 얼굴을 상상했다. 터번을 꽁꽁 둘러싼 여인일수록 미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데카메론'이라는 자유분방한 책을
읽어서인지, 생각과 행동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바꿔졌다. 터키 이스탄불 일정을 시작으로 파묵칼레, 안탈레, 카타도피아, 그리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9박 10일의 여정이었다. 모든 일정이 자유여행이어서, 이동수단은 도보, 전차, 버스, 비행기였다.
첫 날, 이스탄불부터 우리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호텔을 찾다가 골목에서 길을 잃고 있는 우리들을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Hey, My Brother!' 딱 봐도 한국인으로 보였는지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 왔다. 그 남자 옆에 어린 아이들도 있어서 경계를 풀고, 웃음에 화답하면서
길을 물었다. 그는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더니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었다.
"Give me the money!", 그것도 한 사람당 10불씩 말이다. 어찌나 황당하던지 무시 하고 갈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손에는 우리
전체 일정이 들어있는 책자가 있었다. 남자 4명이어서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설득해서 받아내야 하는지라, 우리나라
돈 천원으로 꼬셔보았지만 허사였다. 잠시 후에 나이가 지긋한 노인 분이 이 쪽으로 걸어오셨다. 노인과 눈이 마주친 그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책자와 천원을 건네주더니 꽁무니를 뺐다. 노인의 얼굴과 눈빛은 천사와 같았다. 누군가 그 시간 , 그 장소에 보내준 것처럼 따뜻하고 정겨웠다.
첫 날부터 제대로 낚여서 인지,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행동하자고 다짐했다. 눈 단속까지 철저히 하면서,
오죽했으면 보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곳의 아름다운 유적지와 웅장한 역사유물들은 잠시나마 그러한 나쁜 기억들을 시원하게 날려 보냈다.
둘째 날, 우리는 파묵칼레 공항에 착륙했다. 저녁 9시에 도착한 호텔 로비에는
30분 뒤에 밸리댄스 공연을 한다는 안내가 붙어있었다. 짐을 간단히 풀고 공연이 열리는
곳에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원한 맥주를 주문하고
동료들과 건배를 외쳤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밸리댄서는 매혹적인
푸른 눈과 늘씬한 몸매를 가졌다. 흔히 볼 수 있는 밸리댄서 복장보다 훨씬 화려하고 노출이 강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쾌한 음악과 현란한 춤 동작은 우리의 피로를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공연이 끝나는 가 싶더니, 댄서는 춤을 추면서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앞에 서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함께 추자고 하는
것 같아서, 내심 기분은 좋았지만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동료가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다.
"과장님, 팁 달라고 하는 것 같아요" 말이 끝나자 말자, 육감적인 댄서는 가슴을 내밀었다. 마치 그 속에 넣어달라는 의미인 것처럼 말이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른 지갑을 찾았다. 지난번에 여권을 찾아 헤매던 지갑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지폐는 보이지 않고 찰랑찰랑 소리만 났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동전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손에는 이미 동전이 들려있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깜짝 놀랬는지
다시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다.
"미쳤어요, 과장님! 가슴에 동전을 넣게요. 무슨 자판기인줄 아세요!"
"없는데, 어떻게 하니?" 이 와중에도 육감적인 댄서는 더 심하게 몸을 흔들었다. 보다
못한 동료 한 명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서 젖가슴에 쿡 찔러 넣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다른 테이블로 몸을
흔들면서 옮겨갔다. 어찌나 진땀을 뺐던지, 온 몸이 후끈거렸다. 하지만, 동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데카메론의 등장하는 푼수 주인공 '칼란드리노'가
된 것 같았다. 동료들은 아직도 내 손에 들여있던 동전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동전을 챙긴 나의 모습을 보았는지 박장대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
파묵칼레를 뒤로하고 우리는 세계적 휴양도시인 안탈랴로 이동했다. '변신이야기'에서 읽었던 그리스 신화 속 신들과 로마 황제의 대리석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는 안탈랴 고고학 박물관에 들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유적들의 모습은 보고 있으니깐
금방이라고 살아서 움직일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춤추는
무희 상'은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 결까지 표현해서 섬세함과 정교함의 극치였다. 그리고, 마침 그 곳에는 유명한
'지친 헤라클레스 상'이 특별전시 되고 있어서 더욱 인상 깊었다.
디오니소스의 축제 모습이 새겨진 석관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동료들은 이미 앞서 가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내 뒤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고 가려는데, 한 학생이 나에게 '한국인이 아니냐'고 물었다. 긍정의 웃음을 보여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워하면서 서툰 영어로 말했다.
"나는 한국을 좋아합니다, 한국 음악, 영화 너무 좋아해요"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함께 있는 한국인들 못 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내 동료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찾고 있는데, 왜 그러냐" 물었더니, 너무 멋있고 잘 생겼다고 말하지 않는가? 나는 잠깐 어리둥절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래서 나는 함께 찾아보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서로 반대편으로 흩어져서 동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출구
쪽으로 가니깐 동료들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앞서 여대생들의 대화내용을 동료들에게 말해주었다. 조금 전까지 지쳐있던 동료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얼굴에 금새 웃음꽃이 폈다. 그리고 저 반대편에서 여대생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거짓말 같은 내 이야기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려고 말이다. 남자 4명은
달려오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마치 디오니소스 축제가 그려진 석관의 요정들이 살아 움직여서 내게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동료 중 막내는 '이 곳에서도 나의 얼굴이
통하는 구나'라고, 다음 선임은 '내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라고, 여행
경비를 담당하는 동료는 '아~ 오늘 저녁 밥 값, 많이 나가게 생겼네'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지나쳐서는 뒤편에 있던 젊은 한국 대학생 친구들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나 보다 동료들의 허탈감이 더했을 것이다.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박쿠스 신' 석관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 곳에 들어갔다 나오면 '박쿠스 신'으로 변신이라도 할지 말이다. 하여튼 이 놈의 푼수 끼는 여행 내내
나를 따라 다니면서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