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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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나 역시 마흔 인생을 돌이켜보면 잘 풀릴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큰 굴곡 없이 살았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름 공부해 서울로 대학 진학에 성공했고 대학시절 장학금도 몇 번 받았다. 전공 공부 외에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학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부지런히 살면 내가 원하던 인생을 손에 쥘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첫 번째 고비가 왔다. 취업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원하던 기자가 되기 위해 유명신문사에 서류를 제출했지만 무서류 전형인 한 곳만 빼고는 서류조차 통과 하지 못했다. 이어 눈높이를 낮추어 중견기업들에 지원했지만 여자대학 문과 출신을 환영하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내 말대로 교대 갔으면 오죽 좋았겠는가’라는 아버지 말이 듣기 싫어 필사적으로 구직활동에 매달렸지만 번번히 미끄러졌다. 결국 나는 작은 아버지의 소개로 작은 벤처기업에 들어갔다. 말이 좋아 영업부 마케팅팀이지 사장 비서 일부터 시작해 고객 의전 등등의 잡무가 나의 첫 직장에서의 첫 번째 일이었다.
그 시절 매일 아침 회사에 나가 있으면 숨이 턱턱 막혔다. 사장부터 사원까지 모두 엔지니어인 회사에서 내 자리를 찾기는 참으로 쉽지 않았다. 입사할 때 30여 명이었던 직원이 입사 3년 차가 되니 3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코스닥 황제주가 되어 언론의 하이라이트도 받았지만 여전히 나는 잡다한 업무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사장은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자신이 회사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라고 맹신하는 사람이었다. 입만 열만 인격모독적 언사를 서슴지 않았고 직원들 이메일까지 남몰래 감시했다. 그 때 나는 답답한 마음을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풀곤 했다. 언젠가 외국계 기업의 인사전문가가 쓴 책을 읽고 커리어 컨설팅을 받고 싶다는 매우 긴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 분과 전화통화까지 했지만 시간 당 10만원이라는 비용을 투자할 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나 보다. (당시 내 월급이 100만원을 조금 넘는 금액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컨설팅 비용이 너무 비싸다.) 결국 나는 부모님의 결혼 반대 문제까지 겹쳐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우리 사주로 받은 주식은 폭락에 폭락을 거듭해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고 얼마 간의 퇴직금만 남아 있었다.
결혼 후 몇 개월을 쉬다 PR대행사에 입사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PR제안서라는 것을 만들어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당당히 합격했다. 이후 착실히 홍보 업무를 전문적으로 배워 나갔다. 큰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니 외국 파트너 PR 회사의 고객사까지 나에게 떨어졌다.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 ‘스토커 신디’로 소문난 파트너였지만 웬일인지 나와는 코드가 잘 맞았다. 대행사 직원이 아니라 고객사 홍보 담당자라고 생각하고 일한 덕이었다. 얼마 후 나는 다른 홍보대행사로 옮겨가 일하게 되었고 한 때 내 고객이었던 다국적 제약회사의 홍보팀 대리로 입사했다. 연봉이 수천 만원이 오르고 근사한 명함이 생겼고 ‘을’의 모자를 벗고 ‘갑’의 모자를 썼다. 회사의 주요 제품 홍보를 담당하면서 성과도 만들어 냈고 해외에서 열리는 미팅에서 단독으로 발표하는 자리도 가졌다. 차기 팀장 교육에도 다녀오고 우수사원상도 거머쥐었다. 그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러자 또 다른 욕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더 넓은 곳에서 승부를 걸어보고 싶은 욕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제약회사에서 성공하려면 영업과 마케팅 경력이 필수다. 그걸 깨달았지만 그때 나는 벌써 홍보 경력 10년 차의 과장이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홍보팀에서 능력을 입증 받은 덕에 영업부로 넘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 다섯의 나이에 아이 둘이 있는 아줌마가 ‘가방을 든 약장수’가 되었다. 영업 첫 해의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강남지역의 개인병원들을 대상으로 골다공증 치료제를 담당했다. 10년 경력의 홍보 전문가라는 이력을 고객들에게 어필하고 기존의 영업사원들이 하지 않는 다양한 시도를 감행했다. 병원 오너들에게 병원 홍보를 위한 조언도 해주고 환자 유치를 위해 함께 뛰었다. ‘OOO에 대한 오해와 진실’ 시리즈를 프리젠테이션 자료로 만들어 발표하자 ‘약사인가?’라는 질문이 쇄도했다. (그 질문은 전문성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러자 마케팅팀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다. 브랜드 매니저의 역량이 있으니 영업 경력을 쌓은 후 마케팅팀으로 와서 일하라는 것이었다. 신바람이 났다. 내가 원하던 인생이 곧 내 눈 앞에 펼쳐질 것 같았다.
그렇게 영업 2년 차를 맞았다. 첫 해의 성과로 인해 나는 높은 목표 매출액을 할당 받았고 내가 담당한 시장의 성장률은 목표 매출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 뒤를 따라오던 경쟁자들이 나를 제치고 앞서나갔다. 나는 점점 더 조급해졌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까 점점 더 불안했다. 마케팅팀에 자리가 날 때 마다 나는 브랜드 매니저로 지원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당시 마케팅 팀장들이 나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조금 위였고 내 직급은 벌써 차장이었다. 마케팅 경력이 전혀 없는 차장을 팀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을 것이다. 매출은 더디게 올라가고 브랜드 매니저 면접에서는 자꾸 미끄러지고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하루를 어찌 보낼지 막막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책상도 없이 메뚜기를 뛰다 급히 나와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같이 술 마시고 놀던 동기들이 윗사람의 총애를 받으며 유망한 경력을 쌓는 것으로 보면서 울화가 치밀었다. 영업 2년 차 12월, 또 한 해를 영업사원으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 때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망설이지 않고 덥석 잡았다. 여기 있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옮겨간 부서는 교육팀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영업사원들이 활용하는 소프트웨어의 자료를 관리하고 결과를 분석해 영업 효율을 증대시키는 일일 담당했다. 처음 하는 일이었고 IT 스킬과 분석력이 필요한 일이라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몸과 마음을 다해 일했다. 그러자 신기하게 기회가 왔다. 새로 오신 부사장님께서 나에게 AP(Asia Pacific) 시장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맡기신 것이다. AP 지역의 교육 팀장들과 함께 일하며 영업 팀장들의 역량을 개발하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허락된 시간은 턱없이 짧았고 할 일은 태산이었지만 나는 일을 즐기며 신속히 진행시켰다. 다행히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고 AP 지역의 임원 미팅에서 그 결과를 발표하는 영광도 얻었다. 마케팅팀을 가지는 못했지만 여기서 승부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 해 초에 나는 영업효율화 부서의 팀장으로 승진했다. 관련 경력 1년 만에 팀장이 된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여성 팀장, 내가 원하던 그 모습이었다. 월급 봉투가 더 두둑해졌고 회사의 중요 정보들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제 본부장으로 거쳐 임원으로 승진하면 내가 원하던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역시 인생은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나보다 오래 이 일을 해오던 팀원과 심각한 불화가 생기고 말았다. 나 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 일에 대한 전문성을 훨씬 뛰어난 그였기에, 팀장 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팀장이 되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의 불화는 나를 매우 괴롭게 했다. 나를 믿고 따라 줄 것이라 믿었던 그에게 당한 배신은 나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악으로 깡으로 버텨오던 체력이 바닥을 찍으며 나의 인내력과 지구력이 완전 고갈되고 말았다. 부하직원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휘둘리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전열을 가다듬어 그와 전면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인데 마음은 점점 약해지고 도망갈 구멍만 찾으러 다니는 내가 미웠다. 효율을 위해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내 업무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느리더라도 다 함께 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지는 날이 오고 말았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은 마음의 칸막이가 잘 세워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문제와 존재를 구분하는 칸막이가 있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되 존재 자체로 확대시키지는 않습니다. 시험에 두 번 떨어지고 나서 ‘나는 인생의 실패자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는 시험에 두 번 떨어졌다’라고 생각합니다. – 문요한 『천 개의 문제, 하나의 해답』 중에서
돌이켜 보니 나는 내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나의 존재와 문제를 구분하지 못했다. 일이 인생의 모든 것이었기에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나의 존재는 쉽게 허물어졌다. 영업의 고수들은 소위 ‘마인드 콘트롤’의 고수들이다. 이들은 영업이 잘 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 매출 순위 꼴찌라 하더라도 자신은 우수한 영업 사원이라는 자긍심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성과에 따라 나의 존재가 좌우되었다. 매출이 생각대로 나오지 않을 때, 원하던 팀으로 옮겨가는 것이 쉽지 않을 때, 팀원과의 관계가 어그러져 리더십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 ‘나는 실패자다’라는 문구가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제작자로 손꼽히는 명필름 대표 심재명의 최근 작품인 ‘건축학개론’은 한국 멜로영화 사상 최다관객인 410만 명이 관람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명필름의 성과를 보면 영화 선구안과 퀄리티 조절 능력이 단연 충무로 최고”라며 “흥행하기 어려운 장르, 소개, 시나리오에 제작사의 색깔을 입혀 흥행시키는 감각이 놀랍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 인생에도 수많은 ‘실패’들이 존재한다. 2004년 설립한 ‘MK픽처스’는 야심차게 사업 확장을 꾀했으나 결과는 초라했다. 지금까지 만든 영화 중 수익이 -90%까지 떨어진 영화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청난 자기 모멸감과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하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는 역시 실패한 영화라고 그녀는 말한다.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제작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나는 실패한 영화제작자다’가 아니라 ‘이번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오늘도 ‘영원히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만년 대리처럼 일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실패를 거울삼아 끊임없이 도전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만 하는 말이다라는 말은 끔찍하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야 포기도 할 수 있다. 나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도 삶에는 언제나 업과 다운이 존재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다운의 시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내 삶의 문제들과 나의 존재를 동일시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대가 요즘 잘 풀리지 않는 문제들로 마음이 힘들다면 문요한의 조언대로 마음의 칸막이를 만들어보는 것을 어떨까?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칸막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업무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남편은 테니스를 치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한다. (테니스를 친 직후에 가장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나의 첫 번째 책을 위한 연구와 저술 활동에 몰입하며 희열을 느낀다. 업무와 나만의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다 보니 삶의 균형이 잘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제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크게 좌절하지 않는다. (최근 면접 직전에 두 명의 후보자가 도망(?)을 가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칸막이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 자신의 일에서 모든 것을 얻으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일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천직을 찾아 가는 과정에 있으니 가끔은 마음 속 칸막이로 나의 존재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그대도 기운 내라. 그대는 이미 멋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