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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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1919년 5월 베른을 떠나 몬타뇰라로 이주했습니다. 마흔 둘 중년에 찾아온 존재의 위기에 직면하여 내린 선택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를 연구하는 ‘내면으로 향하는 길’을 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테신,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 담겨 있는 수십 장의 헤세의 그림은 하나같이 매우 밝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합니다. 겨울보다는 푸른 계절을 그린 그림이 대부분이고, 밤 풍경보다 낮 풍광이 많습니다. 인물화는 거의 없고 풍경화의 수가 압도적입니다. 그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그림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3,000점이 넘는 헤세의 그림 중에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헤세는 그림 그리면서 현실을 잊었습니다. “나는 접는 의자를 펼쳐놓는다. 그것은 집에서 야외로, 의무에서 기쁨으로, 문학에서 그림 속으로 소풍을 갈 때 나의 친구이자 동반자이다.” 그에게 소설 쓰기가 진지한 성찰의 과정이었다면 그림 그리기는 순수한 유희였습니다. 이 유희가 절망에서 그를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안의 생명력을 몬타뇰라의 자연에서 찾았습니다. 내면의 열정을 꽃과 나무와 호수와 구름, 밝은 빛깔을 가진 소박한 주택들에 투사하고, 투사의 대상을 도화지로 옮겼습니다. 투사는 자각하지 못하면 사람을 투덜이나 냉소주의자로 만들지만, 투사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이는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헤세는 말합니다.
“내 손에는 스케치용 간이의자가 들려 있다. 이것은 내 마술 기구이자 파우스트의 외투이다. 이것의 도움으로 나는 수많은 마술을 연출했고, 무의미한 현실과 싸워 이겼다. 등에는 배낭을 메었다. 그 속엔 조그만 화판, 수채화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 작은 물병, 아름다운 이탈리아 산(産) 도화지 몇 장, 여송연, 그리고 복숭아 한 개가 들어 있다.”
그림을 그릴 때 그는 구름이었고, 집이었고 문이었습니다. 나무였고 꽃이었고 호수였습니다. 빨간색이었고 파란색, 주황색이었습니다. 빛나는 색깔이었습니다. 그림에 몰두할수록 삶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습니다. 세상을 잊기 위해 찾아간 자연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고, 현실을 피하기 위해 빠져든 그림이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주었습니다. 그는 미술로 충전한 에너지를 소설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헤세는 소설로 자기 안의 여러 존재를 살아보고자 했고, 그림을 그리면서 내면의 생명력을 여러 색깔로 표현해보자 했습니다. 그 여정에서 나온 것이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 등의 작품입니다.
그는 회화를 통해 현실을 극복했습니다. 1924년에 쓴 어느 편지에서 “그림이 없었다면 나는 시인으로 이 자리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다음 해에 쓴 편지에서도 “내 생에 가장 힘든 시기에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가 나에게 위안을 주고 나를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헤세에게 그림은 취미 이상이었습니다.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였습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소설과 시를 볼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헤세에게 회화는 마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나름의 마법이 필요합니다. 그대는 어떤 ‘파우스트의 외투’를 가지고 계신가요?
* 헤르만 헤세 저, 정서웅 역, 테신, 스위스의 작은 마을, 민음사,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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