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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0일 19시 27분 등록

기린, 뭘보고 있니.JPG

 

저게 뭐지.

몸은 사슴 같고 꼬리는 소 같고, 발굽과 갈기는 말과 같으며 빛깔은 오색인 태어나서 처음 보는 친구하나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겼네.

그런데 그가 나에게 다가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이런 잠이 깨었다.

아웅~

따사로운 햇살아래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던 차 이게 무슨 꿈이람.

도대체 어떤 친구일까.

가만있어보자.

언젠가 우리 조상이라고 불리던 그 상상속의 동물이 아닐까.

맞아.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어. 오래전 신화속의 조상님이 세상을 구원한 것처럼 우리들도 언젠간 큰일을 할 거라고.

에이, 개꿈일거야.

끊임없이 날아드는 파리 떼 하나도 못 쫓아 절절매고 있는 나 자신인데. 허참.

그런데 이제야 무더위가 조금 가셨구먼.

거시기하게 더웠었는데 스콜이 좋긴 좋아.

 

내 이름은 기린(麒麟)이야.

오래전 국어 시험 문제로 이런 것이 나왔었다지.

어느 시인의 시를 소개하며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여’라는 구절이 문장에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짐승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무식한 몇몇 학생이 정답인 사슴이 아닌 나를 꼽았다지 아마.

허허. 웃음이 나오네.

 

보다시피 나는 하체도 길지만 상체 부분 중 목이 삐죽하게 전봇대처럼 솟아나와 있어.

당신 눈에는 샤프하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 내 모습은 기형아 그 모습 그대로였어.

균형이 잡히지 않아 뒤뚱 거리며 걷는 내 모습에 동료들은 펭귄이 걷는 것 같다고 무척이나 놀려 대었었지.

고개만 까닥거리는 형태가 무척이나 웃겨 보였다나.

그래서였을까. 나는 고민이 많았어.

왜 나는

초원 위를 누비는 사자처럼 멋있는 갈기가 없는 거야.

왜 나는

퓨마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없는 거야.

왜 나는

표범처럼 빠른 다리가 없는 거야.

단지 있다면 멀대 같이 큰 키에 가늘디가는 다리뿐.

거기다 겁은또 얼마나 많은지.

이런 나를 보고 남들은 순박하게 생겼다고들 하였지.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야.

그것뿐인 줄 알아.

물을 마시거나 바닥에서 먹이를 집을 때에는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모를 거야. 주둥이가 땅에 닿을 때까지 긴 앞다리를 양 옆으로 한발자국씩 벌려야 하기에 체조선수처럼 매번 곡예를 하듯이 모션을 취해야하지.

그러고 나서 일어나면 얼마나 다리가 저리는지. 아마도 군에 입대해서 신병시절 다리 쨀 때 그 모습을 연상하면 나의 고통이 이해가 될 거야.

잠자리에 들 때에도 나는 보통 서서 잠을자. 남들처럼 편하게 누워 자고 싶은데 그러다 위험한 동물들이 출현하면 다리를 곧게 펴서 도망갈 때 너무 힘들기 때문이지.

껑충껑충 뛰어 다니는 모습도 그러했고.

어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이른 새벽 잠이 깨었지.

지나치리만치 적막한 가운데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날따라 느낌이 야릇했어.

그럼에도 매번 일어나서 치렀던 의식행사를 빼놓지는 않았어. 국민체조로 몸을 풀은 다음 네발을 꼿꼿이 땅에 디뎌 머리를 최대한 치켜 세운다음 멀리 저 멀리 세상의 끝을 바라보았지.

그런데.

세상에.

뽀얀 먼지바람이 일어나고 있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어.

나의 시력과 감각을 조금 더 총동원해 보았지.

이런, 큰일이 났지 뭐야.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던 거야.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정신이 없는 가운데 다급한 마음을 애써 삭이며 나는 있는 힘껏 소리 높여 외쳤어.

“얘들아. 큰일 났어. 지진이 난 것 같아. 얼른 일어나 도망쳐야해.”

그런데 친구들이 뭐라 그러는 줄 알아.

“무슨 소리야.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거늘. 헛것을 본거 아냐. 괜히 곤하게 잠들어 있는데 깨우기는.”

평소 시력이 어둡기로 소문난 코뿔소가 툴툴대며 말하였어.

“하하하. 네 말대로 설사 지진이 났다고 쳐. 그럼 이 커다란 몸뚱이에 너희 친구들을 태우고 휑하니 달려갈 테니까 나만 믿고 걱정 붙들어 매셔.”

평소 텅치 큰 것을 자랑하는 코끼리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였어.

“어흥. 너는 나에게 직속 보고도 안하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조직사회의 생태도 모르니.”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사자가 말하였어.

“아니야. 내 기다린 키로 바라보니 저기 전방 수십 킬로미터 너머에서 땅이 우리를 향해 집어 삼키듯이 달려오고 있는 게 보이지 뭐야. 빨리 대책을 세워야해.”

“나 참. 귀찮게 호들갑은.”

위험을 인지 못하는 그네들에게 나는 일일이 호소를 하였고 경계경보의 사이렌을 울려 대피를 종용 하였지.

나의 호들갑에 반신반의하던 친구들도 분위기가 심상찮은지 가재도구를 급하게 챙겨들고 절벽위의 동굴로 찾아 들어갔어.

그런데 얼마 후 숨어있는 동굴 앞까지 정말로 세상이 꺼지듯이 바위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거야.

얼마나 지났을까.

무서움에 숨을 죽이며 서로 껴안고 있는 우리들 앞에 별빛이 비추자 그제야 모두들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정말이네. 기린 네 말이 맞았구나. 허허. 키만 삐죽이 크고 무슨 쓸모가 있을까 여겼더니만 네덕분에 우리가 살았구나. 고맙다.”

나는 쏟아지는 칭찬세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어.

겁 많고 힘이 없고 낯가림도 심했던 내가 위험한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내가 이렇게 친구들을 구하다니.

우리네 선조들의 예언이 맞았던 거야.

 

나는 언제나 그러했듯 지금도 이곳에 서서 밀림을 내려다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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