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이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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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4일 나는 필리핀 클락공항으로 출발하기 위해 회사에서 오후 근무를 마무리 하고 출발 시간이 밤 9시여서 6시경에 인천 공항으로 짐을 싸들고 차에 올랐다.
달리는 차에 창문을 내렸더니, 서해의 바다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 하였고
밤 공기는 여전히 싸늘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잠시 밤 공기속으로 찾아오는 나의 의식 속에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출장은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을 위해 지금 떠나고 있는 것이다.
사전에 프로젝트 관리자로부터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내용들을 기억 나는 데로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머리 속에 떠오를 것 들은 현재의 진행 상황과 앞으로의 해야 할일 들이 빽빽하게 적힌 작업 지침서가 들어있는
첨부 파일들이 떠 올랐다.
나와 동행할 사업 부장은 고객 미팅 주선 과 킥오프 행사의 사전 준비를 위해 하루 전 먼저 필리핀 현장으로 떠난 상태 이기 때문에
홀가분한 느낌을 갖고 내 몸을 비행기에 맡겼다.
필리핀 클락 공항에 내리니 스콜이 왔다 간 건지 땅은 축축하게 적혀 있었다. 짐을 찾아
들고 문을 나서니, 먼저 온 프로젝트 메니저 인
김양택 PM(Project Manager)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공항에 나와
반겨 주었다. 우리는 기다리는 차편에 몸을 옮겨 숙소로 향했다. 양택이는 지나가는 건물 등을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줄려고 애를 섰다.
나는 몇 년 전 잘 아시는 교수님으로부터 필리핀 클락에 있는 미모사 라는 골프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골퍼들에게 겨울 동계 훈련 장소로 딱 이라는 것이다.
겨울이니 따뜻한 곳에서 골프치고 쉬면서 휴가 처럼 친구들끼리 와서 놀다 간다는 이야기 였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다 보니 골프장 캐디도 왠 만한 한국말 정도는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늘집에는 신라면을 포함해서 한식 음식이 준비 될 정도로 모든게 친숙한 환경 이라고 한다.
대한 민국 남자들에게 잘 알려진 곳으로 해외 골프 여행을 가보면 부러울게 없을 정도로 편리하게 주변을 한국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아침 7시에 게스트 하우스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풀리지
않은 피곤 때문에 침대에서 잠깐 눈을 부쳤는데 밖에서 나는 노크 소리에 잠을 깨었다.
문을 열어보니 나 보다 하루전에 출발해 온 사업 부장 과 PM인 양택이가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 하고 있으니 샤워하고 식당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때 시간은 오전 11를 가르치고 있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주섬 주섬 옷을 입고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구수한 밥 냄새와 잘 끊인 생선 매운탕이 준비 되어 있었다. 우리는 오후 일정 등을 함께 공유하면서 잠시나마 식사로 인한 즐거운 시간등을 보낼 수 있었다.
오후 일정은 고객사 사장님과 임원들이 함께하는 전반적인 프로젝트 상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시간이 준비 되어 있었다.
양택이와 사업부장, 그리고 내가 참석하였다.
고객사 사장님은 우리에게 차를 권하면서 이 곳은 본인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친거나 다름 없는 꿈의 산실이라고 했다. 미팅 후 우리는 공장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변에 6개의 공장들이 가동 되고 있었고, 일하는 현채인 만 해도 8500명 정도가 이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아웃도어 OEM(주문자 생산방식) 업체로 세계 유명 브랜드에 베낭을 납품하는 아주 건실한 중견 어웃도어 업체이고 올 해 매출액이 약 1,300억 규모를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이 회사의 경쟁력은 다른 OEM업체와는 달리 디자인 센타를 운영하고 있는데, 외국 유명 브랜드 바이어들이 이 곳을 방문하면 디자인 센타와 업무 협의를 같이 하는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었다.
나름데로 제품 개발 전문성과 아이디어등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신 제품 개발 영역까지도 일정 부분 역할을
수행 할 수 있는 회사 였다.
그 날 저녁 고객사 사장님이 나를 불러 술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내가 묵고 있는 곳에서 약 5분정도 떨어진 곳에 이 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영빈관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사장님은 푸짐한 음식과 블랙라벨 17년산을
꺼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 날 저녁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술잔을 권하며 지나온 세월들을 이야기 했다.
물론 나 보다 연배가 5살 정도 많으셨다. 그는 서울 공대 기계설비 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 중공업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 했다.
그 후 어머님께서 병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난 뒤, 아버지의 강권으로 고향으로 돌아 왔으나, 가정 형편 상 생존을 위한 새로운 일을 하기로 결심 하였다.
처음 회사를 차려 5년 정도는 닭장을 개조한 곳에서 프래스를 찍어내는 생산 공장 일을 시작 했다고 한다.
처음 환경은 열악하여 출입문을 열고 나가면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여름에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변 냄새 때문에 외부인, 특히 바이어들을 데려 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이번 프로젝트 하는 목적에 대해서 말 해줬다. 현재 공장사정은 어느때 보다도
수주 실적이 좋고, 약 2년 정도 물량이 확보되어 있어서
추가로 신설 공장을 2,3개 정도 확장해야만 물량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한다.
재고 파악이나, 관리 프로세스와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커가는 회사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여서 이번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심 했다고 한다.
물론 경영자의 이런 고민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고민 하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말하기도 하면서 서로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되었다.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 나눴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가까워진 느낌 이였다. 밤이 꽉 찬 시간이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에게 인사를 나누고 헤에져 숙소로 돌아 왔다.
몸을 씻은 뒤 나는 침대에 앉았는데 심장이 가쁘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친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업 후 이미 만들어진 회사에 들어가서 마켓팅,재무,조직 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맡아, 마치 대기업 안에서 한 부품처럼 살아갈 수 있지만,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 이를 적용하는 일을 거의 없다고 한다.
회사를 새로 만드는 일은 MBA 과정에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MBA 에서는 새로운 회사부터 시작하여, 큰
회사로 변모 하는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의 지난 25년의 시간은 너무도 바쁘고 치열한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 조직적 압박속에서
여유가 없는 사람처럼 앞만 보면서 달려왔다. 물론 여유롭게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주어진 도전 과제들을 찾아 몸으로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50살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 버렸다.
나는 지난 4월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인 꿈벗 모임에 참석한 후, 나의
‘존재와 밥’을 화해 시킬 수 있는 승부사업 과 성장사업
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미래 풍광 10개를 만들어 봤다.
10대 풍광 안에는 “꿈에
그리던 안식년을 가져 보는것”,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일을 같이 해 보는 것”등이 들어 있다.
장택수 사장님께 물었다. 다시 회사를 시작하라고 한다면 또 하실 수 있습니까?
그는 지금까지도 부딪치면서 해 왔는데, 부딪치면서 하면 되지요....그러면서 나를 보고 웃는다. ..."회사 만든 처음 5년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도 나를 믿어주지 않고, 내가 보아도 말이 안되는 일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주를 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 분에게는 지난 17년이 자기의 꿈을 이루는 시기 였지만, 생존을 위한 몸부림 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젊음과 땀을 쏟아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에게도 고민은 있다.
자기가 이 회사를 얼마나 더 키울수 있는지, 어디까지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인지...도전적인 모습 뒤에는 지치고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몇년전 해외 바이어에게 회사를 매각할 마음으로 거래를 했는데 살려는 쪽에서
공장을 스리랑카로 이전 하겠다고 말 하는 소리를 듣고, 생각을 바꿔 매각 절차를 중단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필리핀은 예전 만큼
인건비가 싼 지역이 아니였다.
인건비가 싼 다른 곳으로 생산 설비를 옮기면 바로 이득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공장 이전을 해야 하다는 것이다. 그는 필리핀 현지 공장에서 같이 근무하는 현채인들을 한 가족 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내 회사 처럼 생각해 온 그들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회사를 팔아 돈은 벌 수 있을지 몰라도 지난 17년 동안 함께 일해온 현채인들은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그는 생각을 바꿨다. 지금처럼 회사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고민은 더 많아진 것 같다. 회사가 지속 성장을 하기위한 투자는 계속 되어야 하고 반대로 개인 빚이 늘어 간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 머리속에서 맴돌고 있는것은 17년전 닭장을 개조해서 시작한
조그만 회사가 이제는 해외 공장 8개(필리핀 소재,베트남 2개) 종업원 8,500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회사로 바꿨다.
사회적 책임도 훨씬 커졌기 때문에 경영자의 도덕적 윤리의식도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었다.
밤은 깊숙히 스며 들지만 내 마음속에는 또 하나의 다른 영웅을 만나는 것 같았다.
적막이 이어졌다
5월 25일, 둘째날 아침을 먹기 전에 간단하게 사워를 하고 오늘 된 킥오프 행사에서 무엇을 강조 해야 하는지를 생각 해 봤다.
“현업의 참여”와 “지속적인 프로세스 개선 활동을 위한 조직 체계”를 갖추는 일도 강조 사항임을 노트에 적었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종신이 목소리 이다. "대표님 식사 하시게 식당으로 내려 오세요"
킥오프 행사는 오후 5시가 되어서 진행 되었다.
필리핀 현채인을 위해 모든 순서는 영어로 진행 되었고 고객사 사장님의 격려사에 이어 나의
순서가 되었다.
나는 안 주머니에서 준비한 원고를 꺼내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중요한 구절이 나올때는 원고에서 눈을 뗀 뒤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강조포인트를 어필 하고져 했다. 그들은 박수를 치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 보기도 했다.
이렇게 10여분이 지나고 나는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 왔다.
고객사 사장님은 흐믓한 얼굴로 나의 손을 잡아주며 인사 해 줬다. 하사장님, 수고 하셨어요!
무대는 축하 공연 순서로 이어졌고, 식사와 계속되는 여흥으로 분위기는 고조 되었다.
누군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장기 자랑처럼 춤도 추고, 즐거워들 했다.
나는 그날 밤 비행기로 돌아오는 일정 때문에 숙소로 돌아와 짐을 꾸리고, 영빈관에서 다시
모였다. 사장님을 포함한 대 부분의 임원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우리는 건배 제의를 이어 가면서 몇잔의 폭탄주를 마셨다.
밤10시경 공항으로 출발 할 차량이 대기 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남아 있는 직원들을 가슴으로 안아주고 그들을 격려해 주었다.
다음으로 정택수 사장님과 고객사 임원분들과도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공항으로 향했다.
변경연 연구원이란?..... 미래의 작가들이고, 스스로를 고용 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수련을 하는 것은 앞으로의 삶을 위함 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해…
나는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상태로 지금 행복한 순간을 누리고 있다.
앞으로 나의 25년은 내 생의 가장 황홀하면서, 자유로움으로 꽃을 피울 수 있는 시기을 맞이
하리라!!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25년은
타인을 위한 시각으로 비쳐지는 나에게 집중 했다면, 이미 시작된
25년은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꽃망울을 피어내는 절정의 시기가 되어가리라.
나는 전에 없던 습관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날때 마다 나의 내면을 탐색하기도 하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몸을 맡겨 보기도 한다.
승무원 소리가 들린다.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인천 국제 공항에 도착 합니다"
짐을 꾸려 들고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나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영웅적인 삶을 살아온 자의 울림을 느끼면서…여유롭게 발걸음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