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샐리올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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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2일 부터 6월 9일 사이에 하루를 모험의 날로 정할 것.
-하루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만나는 사람? 일어난 사건? 그 사건에 대한 나의 의식? )
하루는 사람, 장소,(공간) 시간, 공기, 아름다움, 추함, 의식, 경험, 기억,에너지등으로 만들어짐. 태양의 뜨고 짐으로 만들어짐, 사건, 뉴스등
- 이 하루를 특별히 모험의 날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
끌림의 법칙에 의해 , 일상과는 다른 날이었기 때문에 선택함.
- 이 하루는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
파란색을 좀 더 깊은 의미로 바라 보게 되는 날.
여성학에서 배운 푸른 색과 핑크의 이중적 경계의 무너짐.
나는 무엇에 미쳐 살고 있는가? 미쳐 살 것인가?
- 이 하루는 터닝 포인트일 수 있을까 ?
생각의 전환, 경계의 확장, 開眼으로의 터닝 포인트, 창의적인 의미
색을 특허를 낸다? 창의성의 확장.
만난 사람?
이브 클랭 (Yves Klein) 화가
출생-사망 1928년 4월 28일 (프랑스) - 1962년 6월 6일
일어난 사건?
이브클랭의 작품을 만남으로 나의 창의성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식이 생김
유화 1961년 La Grande Bataille (대격전)
그 사건에 대한 나의 의식?
깨달음, 기쁨, 열정, 도전의식, 즐거움, 환희,
등장인물
리움 봉사자.
성빈- 나의 아들
미셸 - 버지니아주에 독일인 남편 톰과 살고 있는 부산 할머니
이브 클랭 - 프랑스 예술가
김미루 -도올 김용옥의 딸, 행위& 전위예술가
때 : 2012년 6월 5일 11시~ 5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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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클랭의 파란색 (IKB)을 통해 만난 나의 의식
Chapter 1 내 파란 의식을 따라서 시간 오후 6시
청바지, 청사진, 청출어람, 블루오션, 블루칩, 아바타, 블루베리, 김연아의 공통점은?
글자 그대로 모두 푸른색과 관련이 있다. 푸른색은 젊음과 실용, 희망, 밝은 미래 , 신비로움, 이상향등을 상징한다. 여자 피겨의 경우 '푸른색 의상이 프리스케이팅의 우승을 담보한다는 속설이 있다. 김연아 선수도 푸른색 의상을 입고 금메달을 땄다. 요즘 김연아는 주류광고로 교생실습으로 잠시 시끄럽다. 올라가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내려오는 길이다. 난 김연아나, 박태환 같은 국민적 영웅들이 좀 잘 내려오길 어느 때부터인가 기대한다.
일찌기 푸른색을 독특한 감정으로 바라본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푸른색은 깊어질수록 우리를 무한한 것으로 이끌며, 순수, 그리고 궁극적으로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운다." 칸딘스키는 몇 년 전 알게 된 러시아 화가이자 러시아 전역에 60개가 넘는 박물관과 뮤지엄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를 둔 덕에 어려서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런 경험이 칸딘스키를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푸른색을, 억눌린 인간의 감정을 자유롭게 하고 진실한 감정을 투시하는 매개체로 바라 보았다. 내게도 푸른색이 자유와 연결이 되는지 잠시 나를 들여다본다. 잘 모르겠다.
블루라하니 영화 그랑 블루가 생각난다. 그랑블루 영화의 의식수준은 600이 넘는다. 머릿속의 기억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의 기억을 연결해주는 매체에 의하여 다시금 그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 매체를 통한 반복되는 기억은 다시 만나게 된다는 믿음과 만남과 만남 사이의 공백을 메꿔 준다. 그런 푸른색에 얽혀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브 클랭을 난 2012년 6월 5일 만났다. 리움 미술관에서!!! 시간 오후 3시경
이브클랭 출생- 1928년 4월 28일 (프랑스) 사망- 1962년 6월 6일
아! 50년전 이브클랭은 자신이 죽기 전날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는 34살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다. 아마도 심장마비였으니까 그는 50년 전 내일이 자기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모른 채 어디선가 무언가를 하고 있었겠지? 그러고 보니 남편도 심장마비였다. 내일은 현충일이다. 휴일이라 좀 마음이 가벼운 날이기도하다. 워커힐에 가서 오랜만에 놀려다 아! 아들이 왔지? 안되겠다, 그 녀석 Care하는 것이 우선이니까...난 깜빡 깜빡 까먹을 때가 있다. 혼자 오래 지내다보니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져서 일까? 아무튼 그냥 휴일을 서울서 지내기로 하고 오전에 코칭강의 간단한 것 하나 마무리 하고 리움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시간 오전 열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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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리움 미술관 오전 11시
리움은 한남동에 있다. 리움 생긴지 얼마 안 되어 미국의 종교 신학자 모건 교수를 모시고 간 기억이 새롭다. 그 땐 예약제였는데, 예약제가 별 효용이 없었는지 이젠 예약하지 않아도 갈 수 있다. 명윤이랑 모건 교수를 모시고 리움을 들러 인사동에 불교미술 박물관을 갔었다. 리움은 널찍널찍한 공간에 단아한 작품 하나를 두고 전시장을 만든 것에 비해 환경이 열악한 불교미술 박물관은 옹기종기 좁은 공간에 여러 작품을 꾸역꾸역 집어 넣은 것이 정말 대조되던 풍경이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다. 예약제라 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때도 외국 교수가 오늘 밤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사정 이야기를 하고 떼를 써서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 1-2시간 정도 아쉽게 전시장을 빠져 나온 생각을 하며 오늘은 가면, “뽕을 빼리라.” 하고 작정을 하고 나선다.
서도호 기획전이 막 끝나고 짐을 정리 하는 중이라 아쉬웠지만 그것 아니라도 볼거리가 많으니. 어느새 이미 엎질러 진 물은 빨리 포기 하는 나를 발견한다. 아 ! 어제 올 것을 ,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하는 뒤 돌아 봄이 없는 나를 발견한다. 생각보다 지나간 것에 미련을 빨리 버리는 군. 그래 쿨해진 거야. 그래도 철거 직전의 작품 두 개에 마음은 간다.
본 전시장을 들어가기 전에 바깥 쪽에 있는 작품들도 둘러보고 봉사를 하고 계시는 분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아주 맑고 단정한 느낌이 드는 분이다. 안내를 맡고 있는 분 같아 이것 저것 여쭤 보았다
“ 일주일에 한번 나와서 봉사 하고 있어요. ” “아! 그러세요? 좋으시겠어요 좋은 작품들도 많이 보시고...”
갑자기 미국에 미셸이 떠오른다. 2009년 난 우리 아들을 미국 아무도 없는 버지니아에 유학을 보냈다. 학교 입학도 시키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워싱턴 여행도 할 겸 좀 일찍 들어가 여정을 함께 시작했다. 학교 근처에 여장을 풀고 학교 근처 여기저기를 둘러보기로 했다. 여러 여행 코스가 있었다. 유명한 산, 동굴부터 뮤지엄까지. 성빈에게 어디가고 싶냐고 물어보니 “엄마 좋은데 가자구요.” 하는 말에 “엄만 그럼 당근 박물관이지 너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우린 버지니아에 있는 셰난도 뮤지엄에 가기로 결정하고 일찍 서둘러 떠났다. 그리 크지 않지만 평화로운 아담한 도시에 있는 아름다움 뮤지엄이었다. 초대 워싱턴 친구의 저택을 뮤지엄으로 만든 장소인데, 저택은 고풍스러운 영국풍의 주택으로, 그리고 한 곳엔 미술품을 전시중이었는데, 당시엔 피카소와 샤갈의 소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영국풍 저택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막 나오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시끄러운 한국말을 하는 아주머니 소리가 들렸다. “ 아이고 여기 이 시골까지 어떻게 한국분이 오셨다 말이고? ” “아, 너무 좋다. 너무 반갑다.” 하시며 그 분은 우리 모자를 향해 총알같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하셨다. 그러더니 급기야 당신은 여기 뮤지엄 봉사자라고 소개하시며, 오늘 원래 오는 날이 아닌데 한국서 온 친구 때문에 오늘 오게 되었다고 하시며 당신이 한번 더 뮤지엄을 안내하겠노라 하고 이층으로 올라 가셨다.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나 내가 서울서 2-3달 전 코칭을 했던 사장님을 아는 분이셨다. 그러자 그분은 더 기뻐하시며 당장 집으로 가자시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일이라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렇게 하기로 하고 볼일을 보고 집으로 찾아가겠노라 약속했다. 우린 3시간 후 다시 상봉했다. 여러 이야기를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모르고 하다가, 엄청난 폭우를 뚫고 밤이 늦어서야 숙소에 올 수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집으로 돌아오는 2시간 내내 성빈은 정신없이 잔다.
다음날 아침 난 성빈일 블루 릿지 하이스쿨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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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했다. 무슨 섭리일까? 다행히 미셸은 청소년 교육에 관심이 많은 선생님 출신이라 성빈이를 미국에 있는 동안은 자신이 돌봐주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을 한 것이다. 난 내일이면 이제 아들과 헤어져야 하는 시간인데,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신 없는 미셸을 만나지 않았으면 아들과 마지막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참으로 힘들고 쓸쓸했으리라...난 그 보름의 여정 가운데 신의 섭리 신의 인도하심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Chapter 3 . 리움 미술관 오후 2시 반
난 다시 리움이다. 4층 고려시대 청자로부터 3층의 이조백자 그리고 고미술과 불교관련 미술 작품을 둘러보니 다리가 아프다. 난 역시 투박한 백자보다 수려한 모습의 교태어린 청자가 더 끌리는 날 발견한다. 앉아서 간단한 점심을 먹으려니 샌드위치는 다 팔렸다. 4층부터 내려오다보니 시간이 벌써 점심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오후 2시 30분을 가리킨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이제 현대 작품들이 전시되 있는 뮤지엄 2로 이동.
난 거기서 이브클랭을 만났다.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은 눈부신 지중해의 푸른 바다색을 영혼 깊은 곳으로 침잠시키며 자랐다. 그래서 푸른 색에 관한 몰입은 스스로 안료를 섞어 만든 청색을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KB)라 이름붙일 만큼 대단했다.
1960년에 이르자 그는 마침내 '인체측정' 연작으로 명명된 작업을 하나의 엄숙한 의식(儀式)처럼 진행했다. 이 작업에서는 누드상태로 안료를 칠한 여성 모델들이 클랭이 직접 작곡한 연주와 지시에 따라 바닥에 깔린 종이 위에 뒹굴어 다님으로써 신체 자체가 창작행위의 주체이자 객체가 되는 충격적인 장면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회화의 물질성의 거부가 낳은, 행위의 강조라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된 그의 해프닝 예술의 진면목으로 평가되어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갑자기 도올 김용옥 교수의 딸 김미루가 떠오른다. “우리 문을 여는 순간 6백 파운드(약 270kg) 이상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돼지들이 놀라서 한꺼번에 일어나는 거예요. 꽥꽥대는 돼지들의 비명과 덜컹거리는 소리에 엄청나게 무서웠죠. 손에 진땀이 흠뻑 날 정도로요. 사실 돼지가 무섭지는 않았어요. 농장 주인에게 들킬까봐 무서웠죠(웃음)."
이브클랭에게 몸을 그림의 소재가 되어준 세 여인은 파랑으로 몸에 범벅을 했다. 또 21세기 김미루라는 여자아이는 돼지가 2400마리나 있는 공간에서 몸을 돼지들과 비벼대며 104시간 즉 나흘하고도 8시간을 우리에서 공존했다. 과연 그들은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김미루를 얼른 네이버에서 찾아 보았다. 나는 돼지를 좋아하고, 돼지는 나를 좋아한다 (I Like Pigs and Pigs Like Me)’ 그런데 나는 돼지를 싫어한다. 돼지고기 냄새는 용케 알아내어 다 뱉어 버리곤 하던 어린시절이 잠시 스친다.
클랭은 3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진 계기는 '푸른색에 미친 작가"라는 수식어 때문이다. 그는 푸른색을 우주의 신비적인 에너지를 통해 가장 비물질적이며 추상적인 색이라 여기고 이상적인 염료를 개발했다.
1957년에는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 (INTERNATIONAL Klien Blue IBK)라 불리는 짙은 푸른색으로 특허까지 취득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색을 특허로 등록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브 클랭은 푸른색에 몰입하는 정도가 거의 광신적이었다. 일반사람들과는 다르게 그의 눈에 비친 푸른색은 신비로운 것이었고 종류도 수백 아니 수천가지 였다.
위 작품을 보라
" 작품이 어디 있는 거야!"
"푸른색 물감으로 애들이 장난 친 것 같은데......."
하지만 이것은 푸른색에 인생을 전부 건 한 예술가의 위대한 (?) 작품이다. 난 무엇에 인생을 전부 걸고 있는 것일까? 사랑에? 일? 명예? 돈? 세상에 기여하는 것에? 난 뭐에 인생을 걸고 있지? ....
Chapter 4 . 리움 미술관 오후 네시 반 - 밤까지
난 건축학 개론에 나왔다는 Takeout 드로잉이란 카페를 가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동네 가서 밥을 먹자는 친구 말에 그냥 난 발길을 돌린다. ‘난 역시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데 이 친구는 늘 익숙한 곳으로 회귀를 하는군. 그래 집에 가서 클랭이나 더 찾아보자. 나는 그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느리고 답답한 스마폰 검색으론 성에 차지 않는다
양친이 모두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브 클랭은 어린 시절 미술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아,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타고난 DNA는 역시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군 이런 생각이 스친다.
클랭이 직접 작곡한 곡인 '단음 교향곡'(1949)이 연주되는 가운데, 벌거벗은 여인들의 몸에는 푸른색의 페인트가 롤러로 칠해졌다. 정장을 차려입은 관객들은 이 나신의 여인들이 바닥에 놓인 커다란 캔버스 위에서 구르고 움직이는 것을 지켜봤다. 클랭은 심장발작으로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혁신적인 신체 작품들은 많은 20세기 미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쳤다.
2012년 6월 5일은 클랭의 국제적인 푸른색(IKB)을 만난 날이었다. 클랭의 국제적인 푸른색은 1960년에 이브 클랭이 IKB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낸, 짙은 울트라마린 색을 가리킨다. 푸른색은 붉은 계열과 대비되어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던 색이었다. 우리 아들은 파랑을 좋아한다. 난 조금씩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냉정으로 보여지는 파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거의 성인이 다 되어서다. 어렸을 적 분홍이나 빨강은 여자아이들의 색, 파랑은 남자 이런 명확한 경계가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계가 용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여성학에서의 색의 만남이었다. 보통 신생아들 옷을 입힐 때 사내 녀석들은 하늘색, 그리고 여아들은 분홍색을 입힌 다는 이론이었다. 난 성빈이가 태어났을 때 노랑색 프랑스산 옷을 의식적으로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난 500호도 넘어 보이는 이브클랭의 대격전을 만나며 파랑에 대한 해석을 다시 하게 되었다. 자유? 1957년에 그 색이 처음으로 완성되었을 때, 클랭은 그것을 "모든 기능적 정당화로부터 해방된, 파랑 그 자체"라고 말했다. 해방, 자유, 그러고 보니 태극기 의 반도 파란색이다. 클랭에게 파랑은 순수한 빛과 공간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가 파랑에 미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색과 그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다. 파랑에 광신적으로 미쳤던 그는 결국 그를 떠올릴 때 블루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난 무엇에 광신적으로 미쳐 있나를 생각해 본다. 무엇에 미칠 것인가? 난 내가 죽었을 때 무슨 색으로, 무엇으로 기억될까?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