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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2일 10시 38분 등록

A. 저자조사

4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으며 최고의 극작가로 칭송받는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英서 셰익스피어의 생일 기념 행사

2012년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인 동시에 셰익스피어의 탄생일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의 448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햄릿 멕베스 등 작품 속의 인물들이 거리 퍼레이드를 펼쳤습니다. 또 셰익스피어의 다양한 작품들이 무려 37개의 언어로 공연됐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맥베스 공연에서 보던 전통 의상을 입은 인물들이 거리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 책의 날이었던 어제는 셰익스피어의 생일이었는데요. 셰익스피어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작은 마을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거리에서는 축하 행진이 열렸습니다. 또 셰익스피어의 유명 작품들이 무려 37개의 언어로 공연됐는데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포르투갈어로, 햄릿은 리투아니아어로 공연돼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죽은지 450년이 지나도 그가 불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셰익스피어의 출생과 교육 환경

생명력이 있는 그의 언어는 인간의 경험과 내면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살던 엘리자베쓰 통치 시대는 영토 확장에의 탐험, 발견의 시대였다. 영국 번영의 절정기이자 영어에 대한 자부심을 갖던 시기였다.

 

1564년 영국의 작은 마을 스트레드퍼드에서 태어났다.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4-26일 세례를 받는다. 생후 3일후 세례 받는 풍습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해는 전염병이 심각하게 돌아 수천명이 목숨을 잃던 해이기도 했다. 7월과 8월 9월에 가장 많고 연말이 되어서야 전염병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존과 메리 부부의 세 번째이자 장남이었다.(두 누나가 생명을 잃음)

그는 어려서는 유복한 집안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장갑, 가죽을 파는 상인에서 사채업과 모피를 통해 마을 유력인사가 되고 치안관까지 오른다. 당시 교육을 중요시 하는 것에 반해 학교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그는 아버지 덕분에 학교를 가서 라틴어와 영어를 배운다.

 

그는 활달한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아 신앙심도 좋았다. 여름엔 새벽 3-3:30에 일어나 (겨울은 5시기상) 아침 일찍 세수를 하고 아버지에게 검사를 맡곤 했다. 일주일 중에 목요일은 학교가거나 아버지와 장에 갔다. 학교에 가면 영어를 라틴어로 라틴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공부를 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좋아하는 작품은 오비디어스의 변신이야기 였다. 8세엔 라틴어로 말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엔 학교에서 라틴어로 말을 하지 않으면 체벌을 가하곤 했다. 오비드는 셰익스피어 마음에 폭력과 낭만의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이른다. 그는 로마 권력자나 영웅에 관심이 많아서 후에 줄리어스 시저,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콜리올라누스 등을 집필한다

.

그런 교육 배경을 갖고 있던 그가 극장에 처음 흥미를 느낀 것은 시골에 찾아온 유랑극단 때문이었다. 또한 아버지는 열 한살인 아들을 데리고 백작 성에서 열리는 축제에 데려가곤 했는데,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리는 축제행사였다. 이런 유년의 기억덕분에 희극을 쓰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대학을 가지 못했는데, 아버지의 무역업이 하향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고 이 때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시기를 사라진 세월이라 한다. 그가 사라진 세월에 사람들은 군인,(작품에 군인이 많이 등장) 선원, 이탈리아,(작품배경)를 다녀왔다던지, 시골 학교교장으로 있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14살까지 학교를 다녔다.

 

2) 셰익스피어의 결혼과 가족 그리고 일

그의 부인 앤은 여덟살 연상의 여자였다. 셰익스피어 18살 때 아이를 갖고 그해 11월에 혼인을 한 후 6개월 후 아이가 태어난다. 당시 교회재판소에서는 셰익스피어 부부에게 혼전 성행위에 대해 죄를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교회에서 만인 앞에서 사과를 해야 하는 수치와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일을 경험해야 했는데, 앤과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그로부터 10년 뒤, 1580년대 런던에서 일을 한다.

 

셰익스피어의 자녀로는 큰 딸 수잔나와 햄넷(아들)과 쥬디스(쌍둥이)가 있다. 그는 가장이 되었으나 안주하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1592년 런던에서 배우자 극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그는 뜻밖의 큰 성공을 거둔다. 그의 갑작스런 성공은 사람들의 질투를 받는다. 심지어 한푼어치의 가치밖에 없는 형편없는 작품이라 논평을 사람들은 하기도 했다. 동시대의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1592년 동료에게 보낸 서한에서 셰익스피어를 언급한 기록이 있어 이때쯤에는 이미 그가 런던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극작가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참고로 로버트 그린은 서한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해 “학식 낮은 촌뜨기가 벼락출세를 하더니 누구 못지않게 잘 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다. 배우의 가죽으로 둘러 쌓인 심장을 뽐내며 운도 맞지 않는 시를 떠벌린다 하고 돈에 쪼들리고 감사할 줄 모르는 소인배라 비난한다. 이런 비난에도 상관없이 그의 진로는 갈수록 탄탄 대로였다. 그는 계속 큰 성공을 거두는데, 초기 작품 중 요즘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헨리 6세의 1부는 만명의 대중에게 슬픔을 자아낸 성공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대중에게 인상을 남긴 작품이기도 했다.

 

그는 다양한 소재로 글을 쓰는 재주가 있었다. 여러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창적 희극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탈리아 소설을 소재로 하여 ‘신사’를 쓰고, 로마초기 역사극을 쓰기도 했다. 영국 역사극으론 헨리 6세가 있으며, 리처드 3세가 절정의 작품이다.

소네트도 그는 여러 편 썼는데, 그의 후원자이자 연인인 백작을 소네트 소재로 삼기도 한다. “경에 대한 애정은 끝도 시작도 없습니다. 그 싸우스 햄프턴 백작은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 백작의 주변에는 잘생기고 젊은 사람이 많았고 백작의 외모에 셰익스피어가 끌린듯 하다. 소네트는 일반적으로 기술적인 시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다. 소네트 사연으로는 백작에 대한 애정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인용되는데 사람들은 두 남자를 연인관계로 예측하였다. 또한 경쟁자도 있었는데, 또 다른 시인이 백작을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후에 소네트 130편엔 흑발의 연인이 나온다. 이 소네트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랑을 그리는 시인데, 자신을 경멸하기도 하고. 그런 사랑에 빠진 자신을 분노하고 있다. “흑발의 여인- 아무나 탈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집착한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지만 그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있음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작품을 볼 수 있다. 당시셰익스피어는 아주 상업적인 작가였다. 극장주들은 극장연극에 대해 아주 많은 분량의 대본을 요구하곤 했다. 셰익스피어는 런던에 사는 동안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오로지 연극에만 몰두했다. 오전에 리허설, 그리고 오후엔 공연을 하고, 저녁엔 선술집에서 글을 썼다. 당시엔 종이도 비쌌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양초나 등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집에서 글을 쓰는 것 보다 선술집에서 글을 쓰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그가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가족들은 계속 그의 고향인 스트레퍼드에서 머문다. 그는 ‘사랑의 헛수고’, ‘한여름밤의 꿈’등을 발표한다. 그는 아주 바삐 일주일 내내 불려다니기 일쑤였는데, 극작가과 배우를 겸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런던에서 고향까지는 2-3일의 여정이 소요되는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잘 못갔을 것으로 예상됨. 사순절엔 연극공연이 금지되곤 했다. 그는 극에서 자신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연상의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아라.는 충고를 극을 통해서 한다.

“너도 연하의 연인들 만들어라. 그래야 사랑이 오래가지.”

- 십이야 2막 4장 내용

 

1590년대 런던은 또다시 전염병이 휩쓴다. 무려 일주일에 천명이 죽을 때도 있었고, 증상이 나타나면 70%가 목숨을 잃는 무서운 병이었다. 일주일에 사망자가 2-30명 정도되면 극장은 문을 닫아야 했다. 작가인 토마스 데커는 런던을 휩쓴 전염병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공포가 혈관을 흐르며 내 몸을 뻣뻣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머릿속은 산소가 부족하다. 펜에서는 쓸개즙보다 더 쓴 잉크가 눈물처럼 쏟아진다.” 죽음에 매혹되는 상황은 그의 작품에서도 드러나는데, 납골당, 햄릿의 묘지 장면에 죽음을 그리고 있다.

 

3) 1596년 여름 8월 -셰익스피어의 잔인한 여름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가족에 슬픔이 닥친 해이기도 하고 셰익스피어에겐 어느 해 보다도 고통스러운 여름이었다. 그의 아들 햄넷의 장례식이 1596. 8.11 있었다. 그의 나이 11살로 사망한 것이다. 그 일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대가 끊기게 된다는 의미였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많은 돈도, 부동산, 재산을 물려 받을 집안에 남자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그는 존왕 3막 4장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묘사하고 있는데,

‘방안에 가득한 아들 잃은 비통함이 침대에서 일어나 나에게 오네.

아들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말을 걸어오니 아들의 모습이 기억나도다.

아들의 텅 빈 옷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네.

 

1590년대 후반이 되자 그는 인생에 깊이 있는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햄릿은 아들을 잃고 햄릿을 무척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햄릿 3막 1장의 내용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거나 고통의 큰 물결을 무기로 막아 끝내 버려야겠지.‘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고통은 계속된다. 배우들은 런던 극장과 재 임대계약을 하지 못하고.

템즈강 건너 매음굴이 가득한 홍등가 싸우스워크에 새 극장을 세운다. 바로 그 극장이 글로브 극장 (10%의 지분으로 돈을 많이 번다)인데 그 극장의 첫 작품은 줄리어스 시저였다.

 

그는 언어를 이용해 완벽한 극 세상을 창조하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셰익스피어의 대사에 매혹되는 대중들은 그의 시각적 언어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햄릿 처음 6줄 - 아주 늦은 밤의 추운 겨울날씨가 낮에 보더라도 날씨가 상상될 정도였다. 그는 시각적인 언어를 많이 이용, 관객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극작가였다. 등장인물의 세부적인 성격이나 무대방향 지시를 하는가 하면 간단한 무대배경에 오로지 대사만이 울려 퍼지게 하는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간단한 무대배경과 언어만으로 된 대사는 청중들에게 충분히 그의 언어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여자주인공 역할도 아주 경험이 많은 남자들이 연기하곤 했는데, 로미오와 줄리엣 중에서 줄리엣은 아직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이 맡기도 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아버지 왕의 유령역할도 했다는 것을 소네트에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배우로서의 경험은 희곡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시인이라고 소개 했다. 언어를 통해 증류 작용을 일으키는 사람은 당연히 시인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극의 주제는 다양한 곳에서 따오곤 했다.

버나드 쇼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 하곤 했다. 셰익스피어 이야기는 마치 전에 누군가 이야기 한듯 한 것이다. 그는 완벽한 창작극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나 씌여진 작품을 잘 정리하기도 했다

.

그러던 그에게 1600년대 작품의 변화가 일어난다. 즉 삶을 더 깊이 통찰하여, 더 복잡하고 깊이 있는 작품을 써 나갔다. 그의 완숙기에 씌여진 작품으로는 햄릿등이 있는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이 나올 때가 된 것이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제임스 1세 즉위 하자 셰익스피어가 속한 극단은 왕과 귀족들을 위한 궁정배우가 된다. 당시 최고의 극작가였던 셰익스피어 가문에 몇 년 전부터 문장을 사용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1604~ 1607녀에 쓴 작품으로는 오셀로, 맥베드, 리어왕이 있는데, 그의 작품들 중에는 비극이 중심을 차지하는 듯 하다. 우리는 극 전체에 폭력과 긴장감, 인간에 대한 통찰. 덕분에 그의 작품에 끌린다. 내면의 여행, 영혼의 성장에 대한 글을 쓰도록 그의 내면의 무언가가 부추긴 것은 아닐까?

인간에 대한 심리에 깊은 관심이 강하게 나타나는 극을 많이 썼는데, 오셀로에서는 질투를, 리어왕에서는 권력을 빼앗긴 늙은 남자에 대한 고통을 표현했다. 그러나 단순히 늙은이의 비극을 다루었다는 것 때문에 리어왕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런 인간의 고통을 표면으로 드러내기까지 오랫동안 깊이 고민했다는 것에 무게를 둔다. 또한 그는 리어왕에서 일관된 분노를 보여준다. 소심한 햄릿 왕자에서도 그는 또 다른 의미의 햄릿의 분노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중 장면을 통해 인간이 처한 상황을 잘 반영해 내고 있는데, 그도 인간인 이상 열망과 고통을 여러가지로 표현한 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딸들을 걱정하는 셰익스피어를 볼 수 있다. 딸을 염려하는 아버지 상을 태풍등에서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풍의 대사

‘거대한 지구의 삼라만상도 사라져 버리지. 환상처럼 흔적도 남지 않지

인간은 꿈과 같아서 인생은 긴 잠으로 끝을 맺네‘

 

글로브극장이 불이 나면서 그는 극장을 떠나 은퇴한다. 그는 부유했고 마을에서 두 번째로 큰 집의 주인이자 존경 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서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우선 유산을 물려줄 아들이 없었고, 자신이 죽으면 벌어질 일을 걱정하며 그는 장녀와 큰 사위에게 재산을 상속한다. 아내 앤에게는 그의 집에서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준다는 유산을 남김. 그렇게 언어에 섬세했던 그가 유서는 감정적으로 막 쓴 느낌을 줌. 어느 날 밤 술자리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이 화근이 되어 고열에 시달리가다 숨을 거두는데 자신의 생일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글을 묘비명: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 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고향에 있는 무덤 묘비에 새겨진 이 시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지만 역시 확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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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셰익스피어 사후

오늘날 세계 문학의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지만, 만약 그의 사후에 작품집이 간행되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지 모른다.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지 7년 뒤인 1623년에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존 헤밍과 헨리 콘델이 그의 희곡 가운데 18편을 모아서 출간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판 2절판](퍼스트 폴리오) 작품집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간행된 적은 있었지만, [초판 2절판]은 그때까지의 여러 가지 판본을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최대한 바로잡은 최초의 비판본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그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벤 존슨이 전집 출판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는 셰익스피어를 "부드러운 셰익스피어, 아름다운 시인.“이라고 칭송한다. 벤 존슨은 “그는 한 시대를 위한 작가가 아니라 온 시대를 위한 작가”라고 격찬했고, 괴테는 자신은 셰익스피어의 소유물이 되었다고 고백했고, 빅토르 위고는 “셰익스피어가 곧 연극”이라고 단언했으며, 조이스는 무인도에 떨어질 경우에는 단테보다 셰익스피어의 책을 들고 가겠다고 장담했고, 심지어 버지니아 울프조차도 [자기만의 방]에서 뿌리 깊은 성차별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와 똑같은 문학적 재능을 지닌 누이”에 관한 비유를 든 바 있다.

 

1899년 처음 그의 연극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셰익스피어 원작 영화도 수백 편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헨리 5세](1944)와 [햄릿](1948), 프랭크 제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1968) 등이 유명하다. 가장 독특한 영화로는 일본의 거장 감독 쿠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의 숲](1957)과 [란](1985)이 손꼽히는데, 각각 [맥베스]와 [리어 왕]을 일본 중세 사극으로 각색해 호평을 받았다. 최근에는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작품을 교묘하게 재구성하고 현대적으로 풍자한 코미디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가 아카데미상을 휩쓸며 새삼 이 극작가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인공을 맡는다는 것은 배우에겐 최고의 영예였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야기와 언어로 인간들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는데 있다. 끊임없는 셰익스피어 극은 변신을 시도 하는데, 그의 대사는 결정적인 고백과도 같다. 는 언어를 교묘하게 다루고 인종과 국가의 구분도 없는 인류 공통의 무언가를 창조해 내었다. 그는 뛰어난 만담이자 타고난 이야기 꾼이었으며 그는 끊임없이 살아 마치 물과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바로 세상에 남긴 풍부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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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셰익스피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

1. 순수 완전 창작의 작가는 아니었다. 그는 고대 로마나 인근 이탈리아등 주변 여러 곳에서 소재를 구해서 창의적으로 구성 정리 했다.

2. 인간의 내면의 깊은 곳에 대한 통찰이 뛰어났다.

3.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로 극을 통한 즐거운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4. 어려서 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이야기들이 극에 들어 있다.

5. 극작가일 뿐 아니라 배우이기도 했고,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시인 이라 소개했다.

6. 딸 둘 아들 하나등 세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의 죽음으로 말년으로 갈수록 두 딸에 대한 걱정, 상속할 아들 없음에 대한 허탈함등이 극을 통해 드러난다.

7.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그의 극작가 절정기에 씌여진 극이다.

8. 그의 작품은 400년 이상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으며, 당대 최고의 배우들의 그의 작품 주인공이 되곤 했다.

9. 인간 내면의 존재 탐구, 영혼의 성장에 관심이 있었던 셰익스피어만큼 사람들을 변화시킨 작가는 드물다.

10. 그의 작품은 마치 세계만국의 공통어처럼 인종, 국가를 넘어 인간의 존재 심연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B. 내가 저자라면

중학교 들어가서 셰익스피어의 스펠링을 외울 때 Shakespeare 샤케스피어라고 보이는대로 읽으며 외웠던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 원문을 대조하며 볼 수 없기에 아쉬웠지만, 군데 군데서 단어의 연금술사 맛을 조금은 맛 볼 수 있었다. 햄릿, 리어왕, 맥베쓰 세 작품 중 난 리어왕이 가장 변형 하고 싶고 저자에 대해 강한 저항을 느끼는 작품이었다. 왜냐하면 리어왕은 세 딸 중 두 딸에 대한 배신, 막내딸의 사랑의 진실함등을 다룬 작품인데, 난 이번엔 읽으면서 나에게 좀 다른 시각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어왕이 오랜 세월 세 딸 중에서 진심으로 사랑을 준 딸은 코널리아 였던 것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닮아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내리사랑의 법칙으로 막내딸을 더 끔찍이 여겼는지 작품에서 나와 있지는 않지만 결론은 리어왕이 진정 사랑한 딸을 막내딸이란 인상이 강하다. 물론 두 딸의 아버지에 대한 배신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고너릴이나 리간의 대사에서 문득문득 막내를 향한 질투의 감정이 느껴진다. 큰 딸인 고너릴보다는 둘쨋 딸인 리간이 더 그 질투는 심했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둘째 콤플렉스도 보이는것도 같다. 아무튼 리어왕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한 딸도 큰 딸이 아니라 둘째딸 리간의 집에서부터 시작이었고, 부부는 어쩜 그리 닮는지 사위들의 성품도 큰 사위와 둘째 사위는 다른 면보를 보이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아들을 잃고 말년으로 갈수록 딸들에 대한 걱정, 자신이 죽고 난 후 유산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한 것을 보면 이런 작품을 쓴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리어왕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자기 안에서 찾는 성숙함으로 결말을 보였다면 또 어땟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리어왕 : 내가 그런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내 잘못은 무엇이며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자기 잘못의 원인을 안에서보다는 바깥에서 고너릴과 리간의 배은망덕에서 찾는다.

 

셰익스피어가 실제 유산 상속을 첫째딸과 내과의사인 사위에게만 한 것과 리어왕은 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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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2 10:40:16 *.107.146.178

햄릿, 맥베쓰, 리어왕 세 작품의 무찔러드는 글귀는 첨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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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 햄릿/리어왕/맥베드-윌리엄 셰익스피어 file 학이시습 2012.06.12 4178
1753 #10_햄릿.리어왕. 맥베스_세익스피어 [6] 길수 2012.06.12 4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