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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8일 08시 27분 등록

A. 저자에 대하여

1. 괴테는 ? 1749. 8. 28 - 183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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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항상 나를 특별히 운이 좋은 행운아라고 치켜세우곤 했네.

나 또한 불평할 생각은 없고 내 인생 역정을 탓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의 삶은 힘들게 노력하고 일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네. 75년간의 내 생애에서 단 한 달이라도 진정으로 즐거웠던 때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걸세. 그것은 바위를 끊임없이 굴리면서 계속해서 밀어 올리려는 시도였네.

나의 연대기가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해줄 걸세.

모두들 안팎으로 너무 지나치게 내게 활동하기를 요구했네.”

 

나의 참다운 행복은 시를 마음속에 떠올리고 창작하는 일이었지. 만일 내가 공적인 일과 활동을 좀 더 멀리하고 고독하게 살 수 있었더라면 한층 더 행복했을 거네. 그리고 시인으로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냈을 거네.

하지만 <괴츠>나 <베르테르>를 쓴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어떤 현자의 말이 내 경우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즉, 누군가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세상 사람들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고심한다는 말이었네. 세상에 태어나 이름을 널리 떨치거나 높은 지위에 올리는 것은 좋은 일이네. 하지만 나 정도의 명성과 지위를 갖추고서도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침묵을

키는 수밖에 없었네.”

청년 시인 요한 페터 에커만은 10년 동안 괴테의 집을 1000회가량 방문해 나눈 대화를 생생하게 글로 기록했다.

만년 대문호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백이 위로를 준다. 일상조차 특별하고 위대할 것 같은 그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번민과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생각하면.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그것에 있지 않다.

그가 75세가 되어서야 깨달은 성찰 “참다운 행복은 시를 마음속에 떠올리고 창작하는 일”이었다는 고백을 통해, 행복은 “타고난 천직과 터득한 일에 힘쓰는 일”임을 일깨우는 데 있는 듯하다.

 

2. 작가 괴테연보  1749. 8. 28 - 183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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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생가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1710-1782)는 명목상의 황실 고문관으로 법학을 공부한 부유한 인사였으며,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1731-1808)는 프라크푸르트 시장의 딸로서 천성적으로 활발하고 명랑.

 

1750년 (1세) 누이동생 코르넬리아가 태어났다.(그 이후 출생한 남동생 둘, 여동생 둘은 모두 출생 후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다)

 

1753년(4세) 크리스마스날 할머니로부터 인형극 상자를 선물 받았다(지금도 프랑크푸르트의 괴테하우스에 보존 되어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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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8세) 조부모에게 신년시를 써서 보냈다(보존되어 있는 괴테의 시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

 

1759년(10세) 프랑스군이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하였다. 군정관토랑 Thoranc 백작이 2년쯤 괴테의 집에 머무렀는데, 그를 통해 소년 괴테는 미술과 프랑스 연극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65년(16세) 10월에 라이프치히로 가서 대학에 입학하였다. 베리쉬 Behrisch, 슈토크 Stock, 외저 Oeser 등의 예술가들과 사귀며 문학과 미술 공부를 하였고, 그리스 연구가 빙켈만 Winckelmann의 글을 읽고 계몽주의 극작가 레싱 Lessing의 연극을 관람.

 

266 1766년(17세) 1) 식당 주인 쇤코프의 딸 케트헨을 사랑하여 교제하였다. 그녀에게 바친 시집 「아네테 Annette」는 베리쉬에 의해 보존되었다.

 

1767년(18세) 첫 희곡 「연인의 변덕 Die Laune des Verlieben」을 썼다(이듬해 4월에 완성).

 

1768년(19세) 케트헨과의 애정 관계를 끝냈다. 6월에 빙켈만의 살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7월 말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행으로 돌아왔다.

 

1769년(20세) 이전 해 11월에 시작한 희곡「공범자들의 Die Mit-schuldigen」을 완성.

 

1770년(21세)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눈병 치료차 슈트라부르크에 온 헤르더 Herder와 교우하며 문학과 언어에 관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2) 10월에 근교의 마을 제젠하임에서 그곳의 목사 딸 프리디리케 브리온 (Friederike Brion)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771년(22세) 프리데리케와 자주 만나며 그녀를 위한 서정시를 많이 썼다. 교회사 문제를 다룬 학위 논문은 민감한 내용 때문에 불합격되었으나 대신 그에 준 하는 시험에 통과하여 공부를 마쳤다. 8월 프리데리케와 작별하고 고향으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으나 문학에 더 몰입하였다. 슈투름 운트 드랑의 성향이 짙은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엔 GÖtz von Berlichingen」의 최고를 썼다.

 

1772년(23세) 아버지의 제안에 따라 베츨라의 고등법원에서 견습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만나 3) 샤로테 부프 Charlotte Buff를 연모하게 되었으나 약혼자가 있는 여자이므로 단념하였다. 이 못 이룬 사랑의 체험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des jungem Werther」의 소재가 되었다.

 

1773년(24세) 「괴츠」를 출간하고, 슈트라스부르크 시절부터 구상했던「파우스트 Faust」의 집필을 처음 시작하였다. 시「마호메트 Mahomet」,「프로메테우스 Pro-metheus」를 쓰고, 오페레타 「에르빈과 엘미레 Erwin und Elmire」의 집필 시작.

 

1774년(25세)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시작하여 4월에 완성하였다. 「클라비고 Clavigo」를 썼다. 당대의 대시인 클롭슈톡과 편지를 교환.

 

1775년(26세) 4) 프랑크푸르트 은행가의 딸 릴리 쇠네만을 사랑하여 약혼하였으나 반년쯤 후에 파혼하였다. 희곡 「스텔라Stella」를 썼다. 칼 아우구스트 karl August 공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를 방문.

 

1776년(27세) 바이마르 (당시 인구 6,000명 정도의 도시)에 머물기로 결심하고, 7월 추밀원 고문관에 임명된 후 정식으로 바이마르 공국의 정사에 관여하였다. 5) 궁정여관(女官) 샤로테 폰 슈타인 Schalotte von Stein 부인과 깊은 우정 관계를 맺고 그녀로부터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1780년(31세) 희곡 「타소 Tasso」를 구상하였다. 「파우스트」의 원고를 아우구스트 공 앞에서 낭독하였다. 그 원고를 궁정여관 루이제 폰 괴흐하우젠이 필사해 두었는데, 그것이 훗날 「초고 파우스트 Urfaust」의 출간을 가능하게 했다.

 

1782년(33세) 황제 요제프 2세로부터 귀족의 칭호를 받았다.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의 집필을 시작.

 

1786년(37세) 식물학과 광물학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칼아우구스트 공, 슈타인 부인 헤르더 등과 휴양 차 칼스바트에 체재하다가 몰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 로마에서 화가 티슈바인, 앙겔리카 카우프만, 고고학자 라이펜슈타인 등과 교우하며 고대 유적의 관찰에 몰두하였다. 「이피게니에」를 운문 형식으로 개작.

 

1787년(38세) 이탈리아 체류를 연장하고 나폴리와 시칠리아 섬까지 돌아보았다. 「에그몬트」를 완성하여 원고를 바이마르로 보냈다.

 

1788년(39세) 6월에 스위스를 거쳐 바이마르로 돌아왔다. 귀환 후 슈타인 부인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6) 평민 출신의 크리스티아네와 불피우스와 만나 동거 생활을 시작하였다.(후에 괴테의 정식 부인이 되었다). 실러와 처음 만났으나 절친한 관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실러는 괴테의 주선으로 예나 대학의 역사학 교수 자리를 얻었다.

 

1789년(40세) 크리스티아네와의 사이에 아들 아우구스트가 태어났다. 당대의 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와 친교를 맺음.

 

1790년(41세) 괴셴 판 괴테전집에 「파우스트 단편 Faust, ein Fragment」을 수록하였다. 색채론과 비교 해부학 연구에 몰두.

 

1791년(42세) 바이마르에서 「에그몬트」가 초연.

 

1792년(43세) 프랑스 혁명군에 대항하는 프러시아 군에 소속되어 베르텡 공방전에 종군하였다.

 

1793년(44세) 연합군의 일원으로 프랑스군 점령지인 마인츠 포위전에 참가하였다가 8월에 귀환하였다. 그 체험을 살려 희곡 「흥분된 사람들 Die Aufgeregten」을 썼다.

 

1794년(45세) 새로 건립된 예나의 식물원을 맡아 관리하였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개작을 시작하였다 실러와 《호렌Horen》지 제작에 함께 협조하면서 가까워졌다.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처음으로 만났다.

 

1797년(48세) 서사시 「헤르만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를 집필하였다. 실러의 격려와 독촉으로 「파우스트」에 다시 매달려 <헌사>, <천상의 서곡>, <발푸르기의 밤>을 집필.

 

1805년(56세) 5월에 실러가 죽었다. 괴테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내 존재의 절반을 잃은 것 같다>고 술회.

 

1806년(57세)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바이마르가 점령되었다. 크리스티아네와 정식으로 결혼식.

 

1808년(59세) 「파우스트」 1부가 출간되었다. 소설 「친화력Wahl-verwandtschaften」을 구상하고 집필을 시작하였다. 9월에 어머니가 별세하였고, 나폴레옹과 두 차례 회견.

 

1810년(61세) 칼스바트와 드레스덴으로 여행.

 

1811년(62세) 자전적 기록이 「시와 진실 Dichtung ung Wahrheit」에 전념하여 9월에 1부를 완성하였다. 「에그몬트」에 대한 베토벤의 편지를 받고 2부를 집필.

 

1812년(63세) 베토벤의 음악을 곁들인 「에그몬트」가 초연되었고, 칼스바트에서 몇 차례 베토벤을 만났다. 「시와 진실」2부를 집필.

 

1813년(64세) 「시와 진실」3부를 완성하고, 「이탈리아 기행 Itali-enische Reise」의 집필을 시작.

 

1814년(65세)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의 시집 「디반Divan」을 읽고 자극을 받아 「서동시집 West-ostlicher Divan」에 착수하였다. 라인과 마인 지방을 방문.

 

1815년(66세)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희곡 「에피메니네스의 각성」이 공연되었고,「서동시집」에 수록할 140편 정도의 시가 씌어졌다.

1816년(67세) 아내 크리스티아네가 중병으로 사망하였다. 「이탈리아 기행」1부를 완결하고 곧 2부의 집필에 착수했다. 잡지 《예술과 고대 Uber Kunst und Altertum》의 발간을 시작.

 

1817년(68세) 영국 신인 바이런의 시를 탐독.

 

1819년(70세) 「서동시집」을 마무리 짓고 출판.

 

1821년(72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완성하여 출간.

 

1823년(74세) 괴테 숭배자 애커만 J.P.Eckermann이 찾아와 조수가 되었다. 그는 「만년의 괴테와의 대화 Gesprache mit Goethe in den lezten Jahren seines Levens」의 필자로 유명.

 

1828년(79세) 칼 아우구스트 공이 사망.

 

1829년(80세) 「파우스트」 1부가 다섯 개 도시에서 공연되었다. 「이탈리아 기행 」전편이 완결.

 

1830년(81세) 아들 아우구스트가 로마에서 사망.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1831년(82세) 「시와 진실」과 「파우스트」2부를 완성하였다. 82회 생일을 일메나우에서 보냈다.

 

1832년(83세) 3월 22일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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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우스트에 나오는 괴테명언

1 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영원히 여성성이 우리를 인도한다.

 

2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다.

 

3 Am Abend schätzt man erst das Haus 저녁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집의 고마움을

알게 마련이다.

 

4. 선한 인간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 지라도, 항상 바른 길을 알고 있는 법이다.

 

5. 내 청춘을 내게 돌려다오! 그 억제되지 않던 충동들을, 고통에 가득찬 절절한 행복을,

증오의 힘과 사랑의 위력을

 

6. 번쩍이는 것은 순간을 위해 생겨난 것이니, 참된 것은 후세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는 법 이다.

 

7. 중요한 것은 행위이지 명성이 아니다.

 

8. 업적과 행복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바보들은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바보들이

현자의 돌을 갖고 있다해도, 그 돌맹이에겐 현자 주인이 없는 것이다.

 

9.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것이다: 자유도 생명도 그것을 매일 매일 싸워 얻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

 

10,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는 너무도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내 이제 최고의 순간을 맛보노라!!!

 

4. 괴테의 일생

흔히 자녀교육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가 회자된다.

다방면의 체계화된 과외로 세계적 대문호가 됐는가 하면 33세에 귀족(남작)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괴테가 천재성을 발현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 부모의 역할이 컸다. 여관업을 하던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아버지 요한 카스파어 괴테는 명예직인 황실고문관을 재력으로 얻었지만 평생 직업을 갖지 못했다.

신분적 지위에 콤플렉스를 느낀 부친이 아들만은 당당한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괴테에게 문학과 예술, 언어, 종교 등 전 과목에 걸쳐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게 했다.

열 살의 나이에 괴테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등 고대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을 섭렵했다.

 

괴테의 어머니 카타리나도 괴테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데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는 독일어를 읽는 수준이었지만 괴테를 잠재울 때 전래동요를 자장가의 리듬에 맞춰 불러주었다. 카타리나는 괴테가 잠들기 전에 이야기를 한 편씩 들려주면서 결말 부분은 들려주지 않고 완성을 해보라고 했다. 이야기의 뒷부분을 상상하며 추리하고 창작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다.

 

괴테가 천재성을 발현하는 데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으로 시인이자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폰 실러가 꼽힌다.

실러는 괴테보다 열 살 연하였지만 10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10년 이상 우정을 나눴다.

“자네는 내게 또다시 청춘을 안겨주고, 나를 또다시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네.” 실러가 46세로 요절하자 괴테는 자신의 ‘존재의 반’을 잃었다며 슬퍼했다.

 

괴테를 키운 것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고, 괴테 역시 두 번이나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부친은 아들이 20대에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이탈리아 여행을 권유했다. 당시 바이마르에서의 공직 생활로 바빴던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미뤘다.

 

괴테는 마침내 37세 생일날 밤 마차에 몸을 싣고 이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

당시 괴테는 오랜 공직 생활로 녹초가 되어 있었고 ‘충전’이 필요한 시기였다.

바이마르에서의 생활은 안정된 반면 창작은 침체상태였다. 2년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은 다시 예술의 세계로 돌아가는 재탄생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내가 로마 땅을 밟은 날은 나의 제2의 탄생일이자 내 삶이 진정으로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한다”며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전후로 인식의 문을 새롭게 열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발견한 ‘고전의 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스 비극을 새롭게 쓴 《이피게니아》는 여행 중에 완성한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천재성을 완성하게 한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에게 불행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괴테는 아들 아우구스트에게 자신의 비서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괴테와의 대화》 저자)을 동행시켜 자신의 여정대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했지만 로마 여행 중에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독일인들에게 괴테가 있고 영국인들에게 셰익스피어가 있으며 중국인들에게 이백, 두보가 있다면 러시아인들에게는 푸시킨이 있다.

 

어쩌란 말인가! 나는 철학, 법학과 의학, 아니 신학까지도 공부해 보았다. 열과 성을 다해 속속들이 공부했다. 그래 봤자 나는 여전히 형편없는 바보야!" 괴테(1749~1832)가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은 죽음을 몇 주 앞둔 때였다. 괴테는 스물 갓 넘어서부터 파우스트 박사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일생을 건 역작이라고 하는 이유다.

 

세상에 나온 지 180년 된 '파우스트'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인간의 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틴어 파우스투스는 학자 이름으로 원래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 당대로 해석하면 인문주의적 교양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파우스트 박사는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판다. 그 유명한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이다. 문제는 그다음. 영혼을 팔아버린 뒤 파우스트는 세속적 즐거움과 초월적 쾌감까지 맛보았는데, 천사가 마지막에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해주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괴테는 여기서 인간의 태생적 불완전성과 후천적 노력을 하나의 해답으로 제안한다. 신이 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신을 가슴에 품고서 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향해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괴테가 생각하는 '인간의 완성'이며, '파우스트'가 지금도 정전(正典)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독일의 작가 괴테는 “모든 것을 젊을 때 구해야 한다. 젊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빛이다. 빛이 흐려지기 전에 열심히 구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열심히 찾고 구한 사람은 늙어서 풍성하다”라고 말했다.

 

5. 괴테와 미술

세계적 문호의 가려진 이면 ‘미술가로서의 새로운 괴테’를 소개하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 기사는 괴테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는 특집기사로 실린 것 중 일부를 편집한 것이다.

이 글에서 발견한 사실은 그의 ‘인식의 틀’이며, 파우스트 마지막에 자신의 눈을 멀게 한 부분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눈은 내가 세계를 파악하는 기관이었다.” 라는 그의 이야기에서 괴테를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50여년 동안 바이마르에 머물면서 재상을 지내기도 했고 정치가로서, 행정가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색채론 등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던 자연과학자로서, 그야말로 전인적이며 역동적인 삶을 누렸다. 흔히 그를 단순한 작가 또는 예술가로서 평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인간 전체를 경외의 대상이나 인격 형성의 사표로 삼는 이유도 그러한 점에 있다 하겠다.

 

미술에 대한 괴테의 관심이나 열정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많은 그림을 남겼으며, 활발하게 미술품을 수집하기도 했고, 저술이나, 편지, 대화 등을 통해 미술에 대해 많은 언급을 했고, 그뿐 아니라 미술 잡지 등을 발행하고 예술 동호 모임을 주선하기도 함으로써 단순한 미술애호가 이상의 활동을 하였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직접적 관찰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 이를 다시 형상화 시키는 괴테 특유의 인식방법이나 문학적 표현 방식은 사물에 접하는 그의 미술적 시각에 힘입은 바 크며 자연과 마음의 조화와 합일을 지향하는 그의 세계관은 미술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 철학, 자연과학 등 그가 관심을 가진 모든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미술은 괴테에 있어서 그의 분주한 사고와 활동, 인격 형성에 밑거름이 되고 원동력이 된 유기적 전체의 한 고리라 말할 수 있다.

 

화가 괴테는 오랜 기간 동안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 왔다. 화가로서의 그의 재질이나 작품의 질적 수준에 대한 엄밀한 평가 이전에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왕성한 습작 활동에서 우리는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가 그린 그림만 해도 2천7백여 점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을 소재별로 보면 풍경화와 건축물이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1/4이 초상이나 인물, 나머지 1/4이 자연과학과 연관된 습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을 인격 형성의 한 과정으로 생각한 아버지의 교육 방침에 따라 괴테는 9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미술품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시의 많은 명망가들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유산 상속자였던 괴테의 아버지도 약 1백여 점의 미술품을 수장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는 17세기 네델란드의 사실적 화풍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출입도 빈번했다. 사물에 대한 괴테의 경험적, 시각적 접근 방식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졌음을 괴테는 그의 자서전적인 기록인 ≪시와 진실≫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눈은 내가 세계를 파악하는 기관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화가들 틈에서 살면서 대상을 작품에 견주어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다 … 무엇을 보든 나는 그 속에서 그림을 보았다.” 젊은 시절 한때 그는 화가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도 있었고 주위 사람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림 보다는 언어적 표현에 더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774년에 발표되어 물의와 선풍을 일으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은 찬연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마음 속에 그려놓은 그림에 압도되어 더 이상 아무런 그림도 그릴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지만 이후 자연과 인간의 내면, 그리고 예술의 표현 가능성의 문제는 괴테 예술관의 주요 화두로 등장하게 된다.

 

천재성과 독창성을 표방하던, 이른바 슈투름드랑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그의 그림들은 대개 외적인 객관적 형태 보다도 내적인 느낌이나 ‘창조적 시각’을 중시하여 떠오른 착상을 가벼운 스케치로 옮겨 놓는 형태가 많았다. 1775년 스위스 여행에서 그의 그림 수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알프스의 거대한 자연 풍광에 압도된 그는 잠시나마 규범적인 틀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화법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극복해내고자 했다. 원근적인 구도나 입체적인 구성을 동원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대신 그는 직접적인 인상을 연필과 펜과 붓을 사용한 간단한 필치로 소묘적으로 암시하는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추상적인 효과까지 이루어 낸다.

 

바이마르로 이주한 1775년 이후 그는 집중적으로 그림 작업을 했다. 따분하고 딱딱한 관직 생활에서 그림 그리기는 일종의 정신적인 안정과 위로의 역할을 했다. 이 시기 그는 베르테르와 마찬가지로 그림이나 글로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림의 소재로는 황혼이나 달빛에 어린 경치가 주로 등장한다. 목탄이나 분필 등을 사용해 선이나 윤곽이 불분명하고 희미한 흑백의 명암만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는 이 그림들의 대부분이 바이마르 생활 초기에 괴테의 삶과 창작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슈타인 부인에게 바쳐진 것이며 괴테가 자신의 그림을 마음의 거울이나 마음의 전달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탈리아 여행(1786-1788)은 괴테의 생애에 있어서, 그리고 문학사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유럽의 고대 문화 유산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그의 문학과 예술관, 그리고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독일문학의 또 하나의 거목인 쉴러와의 문학사적 우정이 맺어진 것도 이 시기이며 문학사에서는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을 기점으로 이후 쉴러가 사망한 1805년까지의 시기를 바이마르 고전주의라 일컫는다. 조화와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독일 고전주의의 이념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정신 생활에 끼친 막대한 영향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한편 괴테 개인에게도 이 여행은 10여년간의 바이마르 생활, 그리고 연상의 유부녀였던 슈타인 부인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사랑의 구속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마에서 그는 그의 초상화로 유명해진 티시바인의 집에 기거하면서 립스, 앙겔리카 카우프만, 마이어 등 당대의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스스로 화가로 자처하면서 이들에게서 수채화와 유화의 기법을 배우기도 했고 그림에서 선과 구성의 의미, 작품화의 복잡한 과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사실은 미술에 대한 이론적, 실제적 관심과 열기가 고조된 바로 이 시기에 괴테가 문학가와 화가로서의 자신의 재질과 가능성에 대해 결정적인 진단과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여행 출발 때부터 하루하루의 일과와 단상, 미술 체험 등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는 기행문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자신이 “미술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실토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사실은 내게는 문학이 제격이라는 사실이다… 로마에 오래 머물면서 얻는 장점은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스 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삼는 괴테의 이러한 의고전적 전향은 적어도 문학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이피게니에≫, ≪타소≫를 비롯한 절제된 형식과 인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일련의 작품이 쓰여지면서 쉴러와 더불어 독일문학의 전성기를 열게 된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 로마에서 돌아 온 이후 괴테는 미술에 대한 자신의 의고전적 이념을 프로그램으로 삼아 미술잡지를 창간하고 현상 응모를 통해 고대의 전형성을 보급, 유지시키고자 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당시 낭만주의의 새로운 경향, 즉 주관주의적, 경건주의적, 뒤러 지향주의에 대한 반발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괴테의 이러한 예술정책적인 시도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에 별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더구나 19세기 초 사회 분위기가 정치색이 짙어지고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이 적어지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괴테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을 표명하면서 미술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다음과 같이 변호하고 있다. “활발하고 진취적인 이들은 즐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스스로 해보고 싶어지고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게 되면 결국에는 스스로 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림은 감각적이고 경험주의적인 괴테에게 있어서 ‘진정한 직관적인 인식’에 도달하는 주요한 수단과 방법이었으며 미술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아울러 자신의 창작과 조화로운 인간상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한 중요한 관건이라 말할 수 있다.

 

글과 그림의 만남: 파우스트 삽화 한때 그림으로 표현이 불가능하다고도 여겨지기도 했던 ≪파우스트≫에 관련된 삽화는 삽화에 관한 최근의 문헌 목록이 근 30면에 달할 정도로 오랜동안 많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괴테 자신의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괴테가 삽화의 시각적 상상력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한 계기가 되기도 한 들라크르와의 그림을 비롯해 19세기에는 립스, 코르넬리우스, 레치 등이 주로 ≪파우스트 1부≫를 소재로 삼아 삽화를 그렸다. 20세기에는 케테 콜비츠, 에밀 놀데, 오스카르 슐레머, 빌리 바우마이스터, 헤겐바르트, 바를라흐, 살바도르 달리 등 저명한 화가들이 단순한 텍스트 장식의 삽화의 기능을 뛰어넘어 비교적 독창적인 화법으로 파우스트를 재해석해 냈다. 특히 슬레포크트와 막스 베크만은 ≪파우스트 2부≫를 위해 각각 5백10여 점의 석판화와 1백43점의 펜화를 남기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에 알맞은 말을 찾으려는 격렬한 욕구가 있지만 이 보다 더 강렬한 욕망은 다른 사람이 말로 표현한 것을 눈으로 보려 하는 것이다 … 소설이나 시에 나타난 인물을 잘하든 못하든 자신의 능력껏 우리 눈 앞에 보여주는 화가를 우리는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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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8 08:28:46 *.107.146.144

내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와 내가 저자라면은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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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9 22:58:37 *.68.172.4

저자 정리가 대박이네요...-_- 상향 평준화... 제가 엄청 곤란해저부렁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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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0 14:56:34 *.120.78.130

ㅎㅎ 이준 ..정말 허접하게 저자 조사를 한동안 했엇지.

사부님 말씀 " 책을 알려면 저자 조사를 철저히 해라...그래야 그 책을 이해할테니.

그 이후로 정신 차렷음... 하다보니 시간은 많이 들지만

사부님 말씀이 진리여...더 많이 보이는거 가터 아직은 눈꼽 만큼이지만 ~

이준 힘내...넌 나보다 더 잘 할수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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