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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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라, 순간아. 너 정말 아름답구나.
‘어린이집이 끝나고 집에 와서 그렇게 아무것도 안 시키고 내버려 두면 아이가 뒤쳐진다 생각하지 않으세요? 우리 애 다니고 있는 레고 학원이라도 보내세요. 지각능력도 좋아지고 창의력 발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우리 애도 그거 하고 난 후로 몰라 보게 똑똑해 진 것 같고요. 요새는 그런 거 다 시켜야 친구도 사귀고…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해놔야…’
어느 날 아내가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며 이러 저러한 얘기들을 했다. 듣기 거북하고 안타까운 말들을 쏟아내었고 나는 그러려니 하고 듣고 넘기면 될 것을 치미는 화를 삭이지 못했다. 신념을 흔드는 주위의 유혹이 생각보다 너무나 빨리 시작되고 있었고, 인지하고 있는 것 보다 이 사회가 훨씬 거칠게 미쳐 돌아가고 있음을 내 아이로 인해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기분이 나빴던 이유는 내가 화가 치민 이유와 다르지 않았다.
아이 나이는 이제 5세, 만으로 겨우 4년하고 1/6세다. 나는 이 아이에게 사회적으로 미끈한 직업을 가진 거창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제 부모를 보고 자랄 것이니 제 분수도 잘 알아 갈무리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나중에라도 나는 이 아이가 찌질하게 학원이나 돌아다니는 아이가 되는 것을 보아주진 못할 것 같다. 나는 적어도 되지 않을 내일의 ‘훌륭한 사람’을 위해 오늘, 그리고 지금의 자유가 저당 잡힌 불행한 아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 제 아비와 어미가 지금도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을 불편해 하는 얼굴을 하며 쓰윽 경쟁에 밀어넣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상품으로 길러지는 아이, (체제 기득권자들이 신봉해 마지 않는)경쟁력이라는 천박한 단어 속에 아이들은 질식한다. 자신의 가치가 늘씬한 대학교 이름과 얼마 되지 않는 ‘연봉’으로 매겨지는 사회에서 아이들의 행복이 안중에 있는 사람들은 없어 보인다. 전교 2등만 줄 곧 하던 중학생 여자 아이가 전교 1등을 하고 나서 제 어미에게 ‘이제 됐어?’라는 네 글자를 남기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미친 사회다. 그 미친 굿판과 아내가 들었다는 이웃 아주머니 말은 다르지 않아서 그 말 속에 아이의 숨통이 가늘게 이어가는 것만 같다. 아이의 영혼을 죽이는 그 말이 어느새 나에게도 와서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얹혀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물었다. 너는 어떤가?
아이가 네 등을 보고 자란다 하지 않았나? 네 생활도 언제 있을 지도 모르는 ‘내일’에 오늘을 저당 잡혀 살고 있지 않느냐? 그것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미루고 있지 않느냐? 그럴싸한 말들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해대지만 결국, 너는 무엇이 다른가?
사고 치지 않고 말 잘 들어 여기까지 온 것은,
그 얄팍한 middle class value를 종교처럼 신봉하고 끝내 포기 하지 못하는 것은,
교양 있는 말투와 곱상한 얼굴을 하고 5세 아이에게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학원 다니라 부추기는 아주머니의 그것과 다른가? 나에게는 단절이 필요하다. 적어도 내 신념을 ‘내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제’와 단절이 필요하며 악마의 유혹으로부터의 단절이 필요하다. 행복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오늘’이 필요하다.
아이의 행복이 나의 ‘오늘’로 비약되었다만 괴테의 일화는 그 ‘오늘’을 얻어낸 이야기로 손색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26세의 괴테는 아버지가 권유했던 이탈리아 여행 대신 칼 아우구스트 공의 초빙을 받아 바이마르로 옮겨가 정치권에 몸을 담게 된다. 그 후 10년 동안 자신의 사랑하던 문학을 놓고 정치인으로 변신해 있던 괴테는 고위 관직을 맡아 행정 능력을 발휘하면서 뭇사람들의 찬탄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산적한 국사에 몰두하느라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점점 무더져 갔고 작가로서의 명성도 서서히 잃어갔다. 결국 한때 그에게 안정과 명예를 가져다 주었던 바이마르가 이제는 구속감만 강요하는 감옥과 같아졌다. 그런 상태에서 괴테는 자신이 37세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모여든 지인들 곁을 살며시 빠져나와 별다른 짐도 없이 역마차에 몸을 싣고 훌쩍 이탈리아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괴테는 말한다. ‘정말이지, 지난 몇 년 동안은 마치 병이 든 것 같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곳을 내 눈으로 바라보며 이곳에서 지내는 것 뿐이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데, 그 때는 정말 라틴어로 씌어진 책 한권, 이탈리아 지방의 그림 한 점조차 바라볼 수 없었다.’ (‘괴테의 그림과 글로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참고)
괴테가 여행한 이탈리아는 인류에게 ‘왼쪽 젖가슴’이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지루한 어제를 끊어내고 내일을 다시 시작하는 자궁이었다. 그 자궁 같은 일상과의 단절이 결국 파우스트를 낳았고 괴테 자신의 새로운 ‘오늘’을 낳을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궁지에 몰린 제 신념을 지키기 위한 괴테의 마지막 몸부림은 행복의 단 한 순간,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말할 수 있는 그 순간을 파우스트에 녹여 놓았다.
내 가치관과 대단할 것 없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신념이라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신념의 포기 또는 그것에 무릎 꿇은 대가로 받을 모든 가치와 맞버틸 수 있는 ‘오늘’을 가지는 일이다. ‘멈추어라, 순간아! 너 정말 아름답구나!’를 바로 지금 외치는 일이다.
내 끝까지 현실에 방황하고 자빠지더라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어제와 맞버티리라.
우리 학교의 정신과 교수님이 아이를 키우던 당시, 전화를 받았답니다. "몇 동에 사는 엄만데요, 정신과 교수님이라면서요? 그런데 항상 애를 놀이터에 내보내서 놀게 하더라구요... 그렇게 아이를 유아기에 놀게 하면 나중에 공부를 잘한다는 연구 결과라도 있나요?" 그 전화를 받고 우리 정신과 교수님은 말했답니다. "그냥, 애라서 놀게 시키는 건데요." 그러자 그 엄마는 전화를 툭 끊었대요. 그 당시, 놀이터에 딱 두 명의 아이만 놀았는데 각각 다른 집 정신과 의사 자식들이었답니다.=_=
저도 아이를 낳을지 낳지 않을지는 모르겠고, 또 만약 낳게 된다면 "스파르타"식으로 공부를 강훈시킬 생각이지만 떠밀려서 시킬 생각은 없어요. 전의 오프 수업 때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유년기의 추억"은 평생 회귀하게 되는 버팀목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정말 잘하고 계신 거라고 생각 됩니다. 잘 나가는 자식이 아니라, 행복한 자식을 키워내는 부모가 진정 위대한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재용 오빠 글은 꾸준히 진심과 진중함이 느껴집니다. 이번 글도 참 좋아요!^^
'네 생활도 언제 있을 지도 모르는 ‘내일’에 오늘을 저당 잡혀 살고 있지 않느냐?'
이 부분 정말 공감가요.
사람들 대부분은 보장받지 않은 미래를 위해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나도 그렇고.
그래서 가끔, '그럼 오늘은?' 이란 의문을 가져요.
'맨날 내일만을 위해 살면, 그럼 오늘은...!!!'
찬란하게 빛날지 말지 모르는 한 순간을 위해 모든 오늘을 버리기 보다
참되어 후세에 남을 오늘들을 살아 보는 것도 참 좋은 생각인듯.
그리고 레고는 사주면 되요. 하고 싶다고 하면. 뭐 그런걸 돈주고 학원에 다녀요. 이상해요.
(오빠 글 멋져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글로 엮어내기 힘들면 하기 힘든데..
오빠는 참 잘 엮어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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