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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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맞서는 자者
오늘도 어김 없다. 또 그에게 고성과 질책이 칼날같이 꽂힌다. 비수를 온 몸으로 받고 있는 그는 커다란 눈을 힘겹게 꺼엄뻑거린다. 맞잡은 자신의 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침묵한다. 그의 상사는 연신 비열한 욕설과 힐난으로 그의 살을 후벼 팠고 날리는 말들은 그의 인격까지 찢어버린다. 고함 속에는 알 수 없는 현학적인 용어가 섞여 있고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제 모국어로 해도 될 말을 굳이 어법에도 맞지 않은 영어 형용사를 지껄이는 지적 권위주의 또한 잊지 않고 섞어낸다. 지켜보는 사람은 숫제 이것이 그의 상사가 느끼는 즐거움인 양하다. 힐책의 말미에 잘잘못을 스스로 대답하라며 종용하는 그의 상사에게 그는 항상 유구무언이다. 매주 금요일 오전에 있는 확대 간부회의 모습이다. 나는 매주 이 회의에 가장 아랫사람으로 참석하고 있고 회의를 마치고 나올 적 마다 잠시 내려 놓은 자아와 의식을 주워담느라 애를 쓴다. 데자부를 느끼는 듯 매주 같은 모습이 반복된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턴가 욕을 보인 그 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이 갔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며 짓는 그네들의 미소와 호방한 웃음의 의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장면 하나를 상상해 보자. 여러 사람 앞에서 한 사람이 그들도 어찌하지 못할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다. 그 폭력은 당하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문제다. 그러면 그 폭력을 보는 나머지 사람의 심리상태는 폭력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폭력을 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훨씬 앞선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들은 폭력이 몰고 올 고통의 두려움을 모면하려는 방어기제다. 이후 나머지 ‘모난 돌’의 대처 방식은 스스로 거친 표면을 쳐내 버리거나 혹은 두꺼운 무엇으로 덮여버리고는 끝내 자아를 숨기는 방법을 택한다. 자신을 표면처리하고 나면 남는 것은 주눅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목적은 단 하나, 어느 누구도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인데 이런 주눅의 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인간은 주로 동물을 다룰 때 이 방법을 쓴다. 가늘게 살아있는 마지막 야생까지 죽여놓는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을 길들일 때가 아니라 사람을 길 들일 때도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는 모습을 종종 본다. 눈치 챘겠지만 지난 우리의 모습이 그러했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군대에서도 그러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지만 불과 수 년 전까지 난무했던 폭력의 풍경이다. 조금 확장해도 무리가 아니라면 戰後, 우리는 꽤 오랫동안 병영문화의 사회였다. 주눅이 대중화된 사회였다. 국가 폭력, 지식 폭력, 언어, 가족, 학벌, 조직, 성, 권위 등 온갖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앞에서 개인은 없었다. 발을 맞추어야 했고 구호가 같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적극적인 제재를 받거나 소극적으로 차가운 외면을 받아야만 했다. 눈치의 문화를 만연시켰고 나의 표면이 거친가를 항상 자문하게 했다. 남들과 보폭을 맞추려 자신의 안구를 항상 돌려야 했고 쓸데없이 남과 비교했다.
그러나 이것은 꽤나 효율적이다. 그리고 강력하다. 개인을 잊고 조직에 봉사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울타리를 튀어 나가지 않는 종마는, 개인은, 대중은 얼마나 통제하고 관리하기 쉬운가. 또한, 그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면 가공할 만한 힘을 발휘하게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전체주의가 폭력적 위력을 발휘했던 이유가 여기 있지 않겠는가. 가까이는 나치즘, 파시즘이 그럴 것이고 멀리는 왕정과 중세의 봉건사회가 그러했을 터다. 가끔씩 나타나는 주눅들지 않는 인간도 문제되지 않는다. 대다수 주눅든 사람들이 스스로 찍어낸다. 눈치의 문화는 다수의 ‘주눅들’이 ‘튀는 자’에 대한 집단적 히스테리를 분출시키게 했고 더 이상 자신과 같지 않은 ‘하나’를 마녀사냥하고 효율적으로 없애준다. 눈치와 주눅을 넣은 다음 여기에 애국이라는 양념을 버무린 뒤 잘 믹스하면 ‘충성’이 나온다. 이를 다시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면 ‘자발적 복종’이 생산되는 메커니즘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소시민적 두려움이 이 주눅의 사회에서 양산된 하나의 ‘복종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시대의 산물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슬퍼졌다. 폭력을 당한 그 한 사람이 아닌 것에 위안을 삼고 오늘 하루도 무사했다는 안심의 표징으로 다 같이 웃어 보여야만 돈독해지는 동지의식에 슬프다. 그리하여 그들은 ‘금요사태’를 벗어나고 나면 그리도 웃어댔던 것인가. 아프다. 버트런드 러셀이 말했는지 모르겠다. ‘모든 권위에는 그 반대의 권위가 항상 존재한다’ 했는가. 분명 어디선가 그의 상사 또한 제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또 다른 권위 앞에 오늘도 자괴할 것이다. 그의 상사를 잠재우는 그 또 다른 권위도 마찬가지겠다. 비약이라도 좋다. 생각을 멈추지 않고 이어가 보자. 그렇다면 맨 마지막의 권위는 무엇인가. 슬프다면 맞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마지막 권위를 찾아 내어 뽀개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이내 알아차린다. 그 마지막 권위가 ‘시간’임을 스스로 단정짓고 戰意를 내려놓는다. 어찌하여 시간인가. 그를 욕하는 그의 상사는 인간이고 어떠한 인간이라도 모든 권위는 살아있을 때의 권력에서 나오는데 그 ‘살아있음’을 결정하는 것은 신도 아니고 조물주도 아니고 절대자도 아니다. 태양도 아니고 달도 아니다. 그 모든 창조와 파괴가 ‘시간’에 복종하고 있다. 맞는지도 모르고 틀린 지도 모른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핏대 세우며 ‘이 모든 극악무도는 시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괴테가 메피스토의 이름으로 시간에 대한 고민을 이와 같이 마무리 지었다고 이해한다.
‘어째서 지나갔다는 거냐?
지나갔다는 것과 전혀 없다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영원한 창조란 도대체 무엇이냐?
창조된 것은 무 속으로 휩쓸려가게 마련이다.
지나가 버렸다 여기에 무슨 뜻이 있지?
그야말로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데도 마치 무엇이 있었던 양 뱅뱅 맴돌고 있다. 나는 오히려 영원한 허무가 좋단 말이다.’
창조란 없다. 시간 속에서는 단지 하나의 ‘사태’로 기록될 뿐이다. 창조된 것은 필연적으로 붕괴되게 되어 있다. 시간이 그리 만든다. 붕괴된 자리에서 다시 창조되게 되어 있다. 시간이 또한 그리 만든다. 그 안에서 잗다란 권위에 뱅뱅대고 돌지 말자. 악마 메피스토는 시간을 버리고 영원한 허무를 택했으나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노력하는 한 자유를 위해 방황하기로 한다. 나는 이제야 마음에 안정을 찾는다. 그 방황에는 내가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편승해도 되겠다는 믿음 때문이다. 비록 자아를 내려 놓았다 주워 담았다 하는 주눅든 인간이지만 이 세상 모든 맞서는 자들을 응원한다. 응원하다 보면 닮아가겠지. 흐린 날 태양이 사라졌다고 징징대지 말자. 그 너머에서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태양을 생각하자. 그리하면 언젠가 나도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버티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스스로 자신을 재편할 수 있는 주인임을 천명하고 복종하는 자로 살지 않을 것임을 보여내는 날 말이다. 그 때까지 ‘조용히 간직했던 분노를 가지고 나아가자. 그것이 분명 승리를 가져다 주리라.’
재용^^
일 주일도 훨씬 더 지나서 다시 읽으러 왔어요. 지금은 정신이 엄청 맑아요.
기출 단어를 메모한 건, 일단 자주 보니 반가웠고요, 그 단어가 보여주는 반대쪽을 생각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생각은 다 지 생각이고요, 틀릴 때가 100% 예요. 이게 재용이라고는 생각 안해요. 아시죠? ㅋㅋㅋ
잗다란, 천박한 이런 단어 뒤로 재용은 자잘한 것 뒤에서 흐르거나 버티고 있는 굳건한 것에 기반한 품위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가? 이런 연상을 했어요.
주눅 들게 하는 폭력, 그걸 애국과 섞으면 충성이 된다는 말, 상사를 고함치게 하는 그 뒤에 있는 권위, 그 뒤의 권위...그 뒤에는 시간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어쨎든 노력하는 한 가지게 될 방황하게 될 자유를 응원하겠다는 구절들이 무찔러 들어오네요. 이 글을 쉽게 읽을 수 없었던 건 이런 여러 단계의 깊은 생각들로 쉽지 않게 씌어진 글이어서겠네요. 재용의 깊은 책읽기가 뒤에 있겠지요. 항상 보고 배우고 있어요. 감사해하고 있구요.
다시 이 글을 읽으러 들어올까 모르겠어요. 늦은 댓글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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