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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5일 11시 16분 등록
 

책은 선인가 악인가


  하얀 대리석 길을 따라 걸었다.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게 널찍하게 만들어진 길이다. 네모 반듯반듯한 대리석은 여전히 빛났지만, 세월의 무게만큼 닳고  이 길을 따라 누군가는 파티시간에 맞추어 급히 걸음을 옮겼을 것이며, 누군가는 유곽에 가기 위해 설레는 가슴을 안고 걸었을 것이며, 누군가는 ‘스콜라스티키아’여인의 목욕탕으로 가기 위해 걸었을 것이다.  아침 햇살을 받아 도열한 대리석 석주들은 눈부셨다. 로마의 소아시아 지방 수도로서 인구가 50만에 달했던 대도시 에페소스의 유적지는 그 이름만큼이나 웅장하고 방대했다.

  262년 대지진으로 거의 폐허가 된 에페소스는 지금 복원이 한창이다. 여러 유적지중 복원을 끝낸 켈수스도서관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헌정한 도서관으로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소아시아의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라’가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념하여 지은 건물로, 건축학적으로도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 당시엔 도시와 국가 간에 많은 장서를 보유하는 것으로서 문화의 척도를 삼는가 하면, 세와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최고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다음이 페르가몬의 도서관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귀족들의 취미가 ‘장서 수집’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아버지를 위하여 도서관을 헌정한 그 정신이 숭고하게만 느껴진다.

  2층으로 된 출입문 앞에 서면 아름다운 네 명의 여인들이 반겨주고 있다. 네 명의 여인은 제각기 지혜, 덕, 판단력, 학문을 상징한다. 이것이 켈수스도서관의 정신이기도 하다. 겹겹이 주름잡힌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들의 시선은 먼 곳에 두고 있다. 책을 보관했던 열람실이 궁금하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장서 12,000권을 소장했다는 켈수스도서관은 귀족을 비롯한 특수 계층의 사람들만 이용했단다.

  열람실 안을 한 바퀴 돌면서 그땐 어떤 책들이 꽂혀있었는지 궁금하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며, 이웃에 위치해 있는 밀레토스의 철인인 탈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책도 있었겠지. 셀축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서도 꽂혀있었을까? 이곳에서 깊이 있게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사교의 장으로 오고갔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책읽기를 통해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독서삼매에 빠지기도 하는 나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좋아한다. 그다지 넓지 않은 켈수스도서관 열람실을 천천히 거닐었다. 책을 앞에 놓고 기쁨에 떨던 바그너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이 책 저 책, 이 글 저 글을 뒤좇는 정신의 기쁨은 그 얼마나 다른가요!” 그는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은 ‘추운 겨울밤마저도 정겹고 즐겁게 느껴져 온 몸을 따사하게 해준다’ 그리고 ‘값진 양피지를 펼치면, 천상이 오롯이 자신에게로 내려오는 느낌’이라고 노래했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것이 또한 책이며, 골프도 칠 수 없는 서민들이 값싼 돈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책이기도 하다.

  벽감엔 학문과 예술의 여신인 아테나 상이 있었던 흔적만이 있다. 길지 않은 겨울햇살이  들어오는 벽면에 서보았다. 달빛 아래 이곳에 서 있으면 운치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빛은 모든 것을 미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파우스트는 왜 골방으로 들어온 달빛 아래서 그렇게 자신을 증오하면서 한탄했을까? 파우스트가 한탄하던 그 장면이 떠오른다.

  

  아아! 철학, 법학과 의학, 게다가 유감스럽게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 깊이 파고 들었거늘

  이 가련한 바보가

  조금도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다니!


심지어 파우스트는 자신의 방을 ‘저주받은 골방’이라고 표현했다. 파우스트박사는 평생을 책과 씨름했으면서도 왜 자신이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을까? 책과 학문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던 자신에 대해 위로의 말을 해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밤이었던가 보다. 파우스트는 ‘이제야 현인의 말뜻을 알겠노라’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 부른다.


정령들의 세계가 닫힌 것이 아니로다.

네 감각이 닫혀있고, 네 마음이 죽은 것이니라!

분발하라, 배우는 자여, 지상에 사로잡힌 네 가슴을

단호히 아침노을로 씻어 내라!


신이 내린 오감(五感)을 닫고 책에 빠져 살았던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과 같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제는 퀴퀴한 책과 활자에 빠진 자신을 구원할 필요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마음에 틈새가 생기면 용케도 찾아오는 사악한 무리들이 많다. 이때 메피스토펠레스가 찾아오는 것이다.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구속하는 이런 행위를 악으로 규정짓는 메피스토펠레스도 나쁘지는 않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공부밖에 모르는 샌님들의 한탄과 회의와 자성론은 줄줄이 이어진다.  조금 전까지 책과 학문을 찬탄했던 ‘바그너’ 는 마음이 달라졌는지 이런 말을 내쏟는다.


   아아, 이렇듯 서재에 갇혀 지내며

   겨우 휴일에나 세상을 볼까말까 하고

   그것도 겨우 망원경으로 멀리에서 바라보는 처지에.

   어떻게 세상을 설득하고 인도하겠습니까?


 야망이 컸던 바그너는 자신의 학문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파우스트는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면 세상을 설득할 수 없는 법”이라고 답해준다. 파우스트는 학자들을 두고 ‘그저 죽치고 앉아서 적당히 앞뒤를 꿰어 맞추고, 다른 이들이 남긴 잔치 음식 찌꺼기로 잡탕을 만들어 내고, 잿더미를 불어 초라한 불꽃을 피워 낼 뿐일’이라고 조롱한다.

  어느 한 노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자신의 공부를 내놓아야 하는데 ‘남이 침 발라놓은 소리들을 앵무새처럼 하고들 있다’고 꼬집었다. 장군죽비를 휘두르면서 평생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해 온 스님은 남의 소리를 인용해서 죽은 법문을 해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파우스트는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힘으로 극히 편안하게 청중들의 마음을 휘어잡아야한다”고 말한다.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켈수스도서관을 나왔다. 도서관 앞에서 달콤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은데 자판기도 없고, 상인도 없다. 도서관에서 몇 걸음 옮기지 않으면 왼발발자국을 새긴 대리석 판과 마주하게 된다. 발자국 옆에는 왕관을 쓴 여인이 새겨져 있다. 유곽을 알리는 세계 최초의 길거리 광고판으로 알려진 대리석 판이다. 그림의 의미는 ‘이곳엔 여왕처럼 예쁘고 우아한 여자들이 있습니다. 이곳을 출입하려면 당신 발의 크기가 그림보다 커야 합니다’라는 것이다. 주민증 대신에 발의 크기로 출입을 시켰던 로마인들의 사고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런데 도서관 앞의 유곽이라니, 아니 유곽 앞의 도서관이라니 서로 마주하고 있는 그 위치가 재미있다. 그 당시의 귀족들은 아침엔 도서관에서 활자를 통한 공부를 하다가 오후엔 유곽에서 여자들을 통해 살아있는 공부를 했음직하다. 골방에서 벗어나 세상 속으로 들어와 여자와 사랑도 나누고 여러 가지 환락을 맛본 파우스트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행복을 경직된 것에서 찾지 않네.

전율은 인류에게 주어진 최고의 것일세.

세상이 전율의 감정을 자주 베풀지 않을지라도,

인간은 감동해야만 엄청난 것을 깊이 느끼는 법일세.


닫히고 무디어진 감각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만끽한 파우스트는 인생의 참맛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메피스토펠레스가 꼭 악이 되고 사탄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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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5 17:40:05 *.182.111.5

이번 터키여행에서 에페소스를 가지 못한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누님 덕분에 에페소스의 켈수스도서관를 둘러보아서 즐거웠습니다.

도서관 맞은편에 유곽이 있다는 것에 이유가 무엇일까? 한참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파우스트의 노래에서 공감을 하게 되네요~^^

재미와 깨달음이 있는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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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06.26 09:49:53 *.85.249.182

에페소를 가지 못헸구나.

에페소는 유적지도 좋지만 많은 이야기가

산재해 있는 곳이라

승욱이가 갔다면 글소재를 많이

가져왔을 텐데.....

똥쟁이가 아니라 글쟁이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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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5 21:30:07 *.160.33.107

책이란 배워야하는 학생이 보거나 할 것 없는 사람들이나 보는거야.  

인생은 떨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살아야 삶이 되지.  

살아있음의 떨림은  사랑을 해야해.   술도 퍼마시고.  그러고도 신통치 않으면 책이나 볼까. 

책을 보다 시시해지면 책을 쓰는 것이고.    삶은 언어 따위로는 살아지지 않으니 ....  삶이 채워져야 책도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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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깔리여신
2012.06.26 09:47:19 *.85.249.182

사부님! 댓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사부님은 파우스트인가  메피스토펠레스인가 생각하면서요.^^

사부님의 글을 통해서 사람은 머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가슴으로 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니

눈이 허락한다면 죽을 때까지 활자를  읽어야 겟지요.

사부님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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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6 20:56:40 *.154.223.199

낯선 도시의 도서관을 거닐다니 깔리여신님은 책을 좋아하는 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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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8 13:29:43 *.85.249.182

콩두의 댓글이 큰 힘이 된다.

동네 도서관이라도 많이 거닐어야겟다고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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