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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일 03시 37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1. 앙드레 보나르(Andre Bonnard, 1888~1959)

 

 1888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났다. 로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1926년 그르노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5~28년 로잔 중학교와 고전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이후 1957년까지 30년동안 로잔 대학 그리스어/그리스 문학 교수를 지냈다. 대학 교수이자 작가로서 여러 저작들을 통해 고대 그리스에 생생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입히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글에서 지식인 사회 특유의 사변을 걷어내고,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을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대하듯이 읽도록 가르쳤다.

 

 그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저항한 참여하는 인문주의자였다. 자신의 작품 <프로메테우스>, <안티고네> 등에서는 주인공에게서 저항과 참여의 정신을 찾고자 했다. 1949스위스평화운동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평화활동을 계속 이어났으나, 냉전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52국제평화수호자대회참석차 동베를린으로 가던 중 스위스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여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 그의 혐의였다. 그러자 스위스에서도 마녀사냥이 벌어지고 있다는 외침과 함께 구명운동이 벌어졌고, 그를 지지하는 내용의 전단지 8만장이 전국에 뿌려졌다. 1954년 재판에서 그는 소련의 스파이입니다라는 검찰의 주장에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 이적행위일 수는 없습니다라고 맞섰지만, 결국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 후 그리스 문명사 연구와 집필에 매진하다가 1959년 작고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불리는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불어로 번역했으며, <프로메테우스>, <그리스의 신들>, <안티고네>,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 <오이디푸스 왕>, <사포의 시> ,<비극과 인간>등 그리스 관련 저서를 다수 남겼다.

 

2. 저자에 대한 평가

 

<그리스인 이야기>는 그가 평생을 일궈온 그리스 관련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나는 <그리스 이야기>을 읽으면서 앞서 접했던 원문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작품의 배경을 이야기하고, 주인공의 심리는 마치 작가 자신의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살아 숨쉬게 했다. 그리고, 그리스 작가의 위대함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려주었다.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는 고작 50년 정도였지만, 그 안에서 창조되고 만들어진 작품들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리스의 유산은 서양 문명의 정신이 되었다. 유럽의 이름조차도 제우스가 납치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인 '에우로페'(Europe)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런 유럽 정체성의 원류는 그리스 문명에 있다. '올림픽 경기' '마라톤 경기'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훨씬 더 심층적인 다른 관념들이 존재한다. 그 관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피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 이러한 관념들은 인류 보편을 향한 열망에 기반을 둔 그리스 문명이다.

 

지금도 유럽을 비롯한 수 많은 나라에서 그리스 신화와 문학 그리고 철학에 관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스 문명'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앙드레보나드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시작해서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리스 고전 저작들을 해석하면서 그 이유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그리스인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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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그리스 문명의 탄생

 

16 문명이란 무엇인가? 그리스 말로 문명화된 인간이라고 할 때, ‘문명화된이라는 말은 길들여진’, ‘교육을 받은’, 혹은 접붙인이라는 뜻이다. 문명화된 인간, 다시 말해서 접붙인 인간이란 좀 더 영양이 풍부하고 좀 더 맛있는 열매를 맺을 줄 아는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문명이란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서 생산력이 늘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그 문명 덕에 사람들이 목숨을 보전한다.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원시인들은 그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면서 살다 갈 뿐이지만, 문명화된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깨달아 알고, 자연에 대해 반격을 가할 수 있다. 문명은 인간을 생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모여 살 수 잇도록 해준다.

 

17 실재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힘이 과학이라면, 상상 속에서 또 하나의 실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예술이다. 과학과 예술로 무장한 인간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이요 인간됨이다. 인간됨은 다시 새로운 발견과 창조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17~18 늘어나는 인구를 먹이기 위해 말과 보리를 흑해 북쪽에 가서 얻어오려면 바다를 건너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냥을 하던 민족이 농사를 짓게 되면 채식주의자로 변해야 하는 것처럼,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유목민도 배를 타야 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고, 그러다가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그리스 사회는 훨씬 더 세련된 주변 문명을 힐끗 훔쳐보게 되는 것이다.

19 그리스인들이 또 하나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은 시다. 사물을 사적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고심하던 그리스 민족은 소위 문학과 만난다.

 

21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알고 싶어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지식을 인간을 위해 요긴하게 쓰고자 했다. 수학을 만들었고, 천문학을 개발했다. 물리와 의학의 기본 지식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그들은 어째서 그것들을 발명하고는 발견하는데 매진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에게 득이 되고, 인간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다.

 

27~28 그리스인, 정확히 말해서 아카이아인이 에게인에게서 배운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농사와 뱃일이다. 한편으로는 농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부였던 그리스인의 특성은 그리스의 것이 아니라 크레테의 것이다. 그리스인을 먹여 살리고, 그리스의 시편들을 가득 채운 주제들은 크레테로부터 배운 것이라는 얘기다.

 

28 바다에 관한 한 그리스인들은 에게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에게인의 배는 멀리 시켈리아까지 항해했지만, 그리스의 배는 에게해를 넘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해안선을 따라 찔끔찔끔 내려가거나 이 섬 저 섬으로 옮겨 다니면서 도적질을 일삼았다. 그리스인에게 바다는 교역의 장이 아니라 범죄의 거점이었다.

 

29 트로이아 전쟁에 얽힌 수많은 일화들이 영웅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전쟁의 원인은 순전히 경제적인 것이었다. 강도들 간의 세력 다툼이었다. 이 구질구질한 전쟁의 기록이 바로 (일리아스).

 

30 아테나이에는 비극이나 희극, 서정시 경연이 열렸다. 상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었다. 담쟁이넝쿨로 만든 관을 씌워주거나 무화과나무 한 무더기를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승자가 누리는 영예는 대단했다. 가령 승자를 위한 기념비가 세어지기도 했다. (안티고네)를 출품한 소포클레스는 장군이 될 정도였다.

 

35 산은 인간을 보호하지만 바다는 그럴 수 없다. 산은 경계를 나누지만 바다는 경계를 허문다. 그리스 민족이 산속에 꼭꼭 숨어 지낸 것만은 아니었다. 도시가 아무리 산 쪽으로 박혀 있어도 바다와 멀지 않은 동네였을 뿐이다. 그리스의 바다는 그렇게 모든 도시들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36 그리스 말로 바다는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길을 떠난다는 뜻이었다. 에게해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교통로였다. 유럽의 뱃사람들이 소아시아까지 가는 동안에 망망대해는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든 자그마한 육지라도 볼 수 있었다. 마치 아이들이 냇물을 건너기 위해 놓은 징검다리처럼 에게해 위에는 수많은 섬이 떠 있었다.

 

37 그리스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야만족들은 수천 년 전에 이미 문명국으로 진입했으며, "우리 그리스 민족"들은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의 바다는 다랑어나 정어리를 잡는 곳이 아니었다. 다른 인류와 교통한 장소였고, 위대한 예술 작품과 발명품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바다 너머에는 광활한 평원 가득 밀이 자라고, 대지와 하천에는 금맥이 숨어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나침반 삼아 그리스인들은 위대한 이웃집을 찾아간다.

 

37 요컨대 지중해는 그리스의 바다였다.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그리스 도시들은 "웅덩이 주위에 널린 개구리처럼" 번져나갔다. 꾸륵꾸륵, 지중해 주위에 그리스인의 소리가 넘쳐났다. 바다를 통해 그리스의 문명이 발전해나간 것이다.

 

39 변덕스런 하늘과 딱딱하게 굳은 땅에서는 곡식보다는 올리브나 포도가 제격이었다. 곡식 뿌리는 물 있는 데까지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없으니까 말이다.

 

39 그리스인에게 올리브기름가 포도주는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한편으로는 화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진게 별로 없는 나라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아테네 여신의 선물이기도 한 회색 올리브 열매는 일상생활을 떠받치는 기둥과 진배없엇다. 기름을 짜서 음식을 튀기고, 불을 밝히고, 물 대신 세수를 하고 손발을 문질렀다. 지중해처럼 무리없는 동네에서는 올리브기름보다 좋은 보습제가 없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로 귀중한 음식이었다. 디오뉘소스의 선물인 포도주는 축제가 열리거나 친구들이 찾아오거나 하는 특별한 날에만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그거도 그냥은 아까워서 물과 섞어 마셨다.

 

40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진실의 거울'이라 부른다. 몇 잔 마시면 사람 속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스 반도 전역에 걸쳐 산기슭에는 막대로 떠받친 포도나무가 즐비했다.

 

43 장인 계급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들은 의사와 시인이었다. 의사들은 조합을 결성해 나름대로 규칙을 세우고, 비법을 전수하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진통제나 처방전을 팔고 다녔다. 그 처방전이 바로 의사들의 사유재산이었음은 물론이다. 마찬가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 형태의 시편들은 시인들의 재산이었다.

 

44 그래서 '그리스의 기적'이 만들어진 걸까? 그렇지는 않다. 어떤 학자들은 기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기적은 없다. 그것은 비과학적인 단어이고, 따라서 그리스답지 않다. 기적은 과학의 차원이 아니므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설명을 감탄으로 치환하는 것 뿐이다.

 

45 그리스 문명은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문명이 발달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은 거꾸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면 세계가 서로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다. 인간은 세계를 바꾸고 세계는 다시 인간을 바꾼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문명의 본질이다. 인간과 세계의 접합, 인간과 세계의 융합을 지향한다. 인간과 세계는 대립하는 당사자로서 서로 싸우고 투쟁한다. 그러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어나간다. 문명을 완성하는 것이다.

 

Chapter 2.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49 호메로스는 지금부터 그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인간의 고결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죽이고 죽을 뿐인 그들의 용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나선 자들, 그들의 희생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자기 대를 이을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죽음을 앞둔 늙은이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적장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49~50 장군들은 탐욕과 야망에 들떠 있다. 장군들이 섬기는 신은 전능하며 힘이 세다. 가끔씩 시기에 불타고, 사소한 이익에 흔들리고, 곧 죽을 인간들에 대해서는 무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전투가 있고,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에 투입된 인간들에게는 용기와 우정과 사랑이라는 무기가 있다. 연민은 복수보다 강한 법이다. 고결한 사랑을 아는 인간은 신만큼이나 위대한 법이다. 호메로스는 그런 인간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죽음의 그늘이 가득 드리워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역설적으로 곧 끝나고 말 생에 대한 찬사이고, 목숨보다 그리고 신보다 더 위대한 인간들에 대한 증언이다.

 

50 호메로스는 기원전 12세기 초 트로이아 전쟁의 한 장면을 택한다. 전설이 되어버린 트로이아 전쟁은 오늘날 그리스 본토라고 불리는 뮈케나이의 아카이아인들과, 소아시아의 아이올리스인들 사이의 경쟁심이 발단이 되었다. 이 가운데 시인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끄집어냈다. 첫째는 아킬레우의 분노이고, 둘째는 그리스 연합군을 이끄는 뮈케나이의 왕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알력이고, 마지막 셋째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아을 정복하는 장면이다.

 

54 아킬레우스는 <일리아스>를 좌지우지하는 엔진이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마음속에서 감정의 격랑을 일으켰고, 이로써 도무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킬레우스가 들썩였다. 그리고 일단 움직이기만 하면 아킬레우스를 막을 자가 없었다.

 

55 그들이 차용한 운율은 규칙적이고 간결했다. 매끄럽고 기억하기 쉬웠다. 그런 즉흥시들을 취합해서 만든<일리아스>는 이미 반쯤 잊힌 아이올리스인들의 언어를 그 나름의 시적 리듬 속에 녹아들게 하고 있다. 풍부한 형용사와 생생한 운율을 섞어서 손색없이 아름다운 서사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58 우리가 그리스 최초의 서사시라고 부르는 이 작품은 상인 계급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 글이 없던 시절 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것을 호메로스라는 이오니아 시인이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야기들을 재구성해서 파피루스에 글로 남긴 것이 바로 <일리아스>.

 

58~59 한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데(호메로스이 시에는 묘사라는 게 전혀 없으므로, 묘사의 방법을 쓸 수는 없고)몸짓하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호메로스의 재능은 바로 거기 있었다.

 

   다음은 디오레스 였다

   운명의 화살이 그를 향했다.

   전선에서 디오레스가 뒤로 쓰러졌다.

    그는 친구들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이 구절처럼 하나의 동작으로 단번에 그 사람을 표현 할 수 있는 시인이 몇이나 될까? 이 장면에서 디오레스는 삶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살고 싶은 것이다. 그게 고스란히 디오레스를 설명한다.

 

60 그에 비하면 케브리오네스의 죽음은 훨씬 더 단순했다 말 그대로 용감한 자의 죽음이라 조용하고 순수했다. 사방이 전쟁의 소음으로 가득한 가운데 그는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트로이아인들과 아키아인들은 서로 달려들어 살육했다.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가운데 놓고 창들이 쉴 새 없이 부딪쳤다.

    시위을 벗어난 화살 깃이 날아가고

    바윗덩어리가 방패를 쿵쿵 때렸다.

    하지만 소용돌이 가운데 그는 평화롭게 누워 있었다.

    준마를 부리던 그 현란한 몸짓은 다 잊은 듯했다.

 

  확실히 호메로스는 핵심을 찌르는 재주가 있다. 주시하는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단 하나의 몸짓으로, 단 하나의 동작으로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61~62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용기는 묵직하다. 저항의 용기다.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시쳇말로 근수가 많이 나간다. 그의 용기는 따라서 바위처럼 단단하다. 누구도 옮길 수 없다. 호메로스는 아이아스의 용기를 표현하기 위해 고전적인 서사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비유법을 쓴다. 가령 이런 것이다.

 

    곡식 밭을 지나는 당나귀는

    목동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갈비뼈 몇 대가 부서지든 말들

    밭으로 달려 들어가 곡식 대를 뜯고야 만다.

    다른 목동들도 몰려와 당나귀를 매질한다.

    그래봐야 애들 몽둥이질쯤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곡식으로 배울 채우고 마는 걸 보라.

    우리의 아이아스가 꼭 그 꼴이다.

 

  아이아스의 용기는 고집스럽다. 달려들어 공격하지도 않는다. 수퇘지 같은 몸은 공격형이 아니다. 성격도 꼭 그렇다. 바보는 아니지만, 단순하다. 어렵고 복잡한 것은 싫어한다. 그리스 전령들이 아킬레우스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단순한 아이아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깟 브리세우스 때문에 칼을 거두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말이다.

 

     그 한 여자 대신 일곱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전리품도 더 얹어준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공격은 몰라도 수비에는 아이아스만 한 전사가 없다.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는 죽으나 사나 자리를 지킨다. 말 그대로 단순하다. 경계석 같다. 돌처럼 서서 경계를 지킨다. 그가 있는 한 누구도 넘어올 수 없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그를 탑 혹은 벽이라고 부른다. 단단하기가 콘크리트 같다.

 

64 아이아스는 절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는 전쟁이 '장난'이 아닐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

 

    기댈 것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두 주먹 불끈 쥔 힘으로

    여기서 끝내자. 내 목숨 내가 지키든지

    아니면, 깨끗하게 끝을 보든지.

 

64 아이아스의 용기는 스파르타식이고, 로마식이다. 스파르타도 후퇴란 없었고, 호라티우스도 티베리스 강 다리 위에 발 말뚝을 박았다. 명령이라면 서서 죽고 마는 용기가 아이아스의 용기다. 훗날 플루타르코스가 차용해서 수많은 문학에서 베껴썼지만 원조는 아이아스의 호메로스다.

 

65 손에 쥔 창도 디오메데스를 닮아 반쯤은 미쳐 있다. 그 스스로 고백하기를, "이놈의 창은 내 손 안에만 들어오면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66 호메로스의 비유법을 따라가 보면, 디오메데스는 확실히 특이한 인간형이다. 농부들이 애써 쌓아놓은 둑과 과수원 철책을 송두리째 쓸고 지나가는 물살을 닮았다. 호메로스는 디오메데스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가 싸울 때마다 투구 깃에 불꽃이 튀게 한다. 그게 디오메데스의 상징이다.

 

66 그는 정열적이다. 하지만 정열에도 색깔이 있다. 아킬레우스의 정열이 우울하고 엄숙한 것이라면 디오메데스이 정열은 밝고 경쾌하다. 광신도의 열정이다.

 

67 바로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네가 디오메데스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아테네 여신은 전차를 모은 디오메데스 옆에 서서 전열의 중심으로 돌진하라고 충동질한다. 그러면서 히뫄 용기를 불어넣고 잇다. 아테네 여신은 디오메데스에게 "저 놈이야. 아레스, 저놈이 원흉이야!'라고 말한다.

 

68    그 순간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는 클라우코스의 셈법을 흐리게 했다.

      금으로 된 무장과 청동으로 된 무장을 바꾼 것이다.

       소 백마리를 주고 고작 아홉마리를 받은 셈이다.

 

  디오메데스가 노골적으로 흡족해했다는 구절은 없다. 다만 디오메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호메로스는 이런 식으로 서사시의 진부함을 비트는 재주가 있다. 영웅이라고 해서 욕심이 없을 수 없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어보는 리얼리스트다.

 

70 마누라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한테 파리스는 꾸지람을 듣는다. 그럼에도 그는 잘도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때마다 변명도 횡설수설이다.

 

    알아, 알아.

    승리란 이사람에서 저사람으로 늘 자리를 옮기는 법이니까.

    옷 좀 입을 테니까 기다려.

    먼저 가 있으면 뒤따라가든지.....

    내가 오히려 형보다 먼저 도착할걸.

 

70~71 하지만 파리스는 겁쟁이치고는 특이한 유형이다. 겁이 나서 전쟁터를 슬슬 피하지만 자존심과 자만심까지 내다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아름다운 용모를 뽐내기를 좋아한다. 전투 중임에도 어깨에 걸친 표범 가죽이 자랑스럽고, 여자처럼 땋아 내린 애교머리를 애지중지한다. 남자라면 모두 바깥에 나가 싸우는데, 혼자 여인네들 틈에 남아 활을 닦고 있다. 용모에 신경 쓰고, 제 몸은 끔찍이 챙기고, "온갖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는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다. 조롱거리인 것은 맞지만, 중요도로 보면 여전히 주인공급이다.

 

71~72  미의 여신이 내게 준 선물을 욕되게 하지 마라.

        신이 준 것은 마음대로 버릴 수 없다.

        은총이기 때문이다.

        은총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뻔뻔한 젊은 친구, 말하는 꼴이 가관이다. 그는 천하의 헥토르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헥토르에게 대들고 잇다.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는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프로디테로부터 잘생긴 외모를 받았고, 여자 꼬이는 재주를 받았다. 미와 사랑은 신의 것이고, 신의 은총이다. 그러니 내가 잘생겼고 여자 잘 꼬인다고 욕하지 마라, 그것은 신을 욕하는 것이다. 파리스는 그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선택한 길이 아니다. 선택을 받았을 뿐이다. 파리스라는 인물은 그런 의미에서 신의 대리인이다. 다른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종교적 체험을 한 건지도 모른다.

 

73     , 침대로 갑시다. 기쁨을 맛보러 갑시다.

       이렇듯 욕망이 나의 심장을 장악한 적이 없소.

       사랑스러운 당신을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몰래 끌어내어

       험한 바다를 헤쳐 크라나에의 섬에 나란히 누웠을 때도

       오늘만큼 떨리지 않았소 정말로 사랑하오.

       당신을 향한 욕망이 나를 송두리째 삼키고 있소.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자는 파리스가 아니다. 아프로디테가 파리스를 이용해서 말을 하고 있다. 아무리 비천한 인간이라도 아프로디테가 선택한 인간은 근사해진다. 파리스도 마찬가지다. 헥토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지만 말이다.

 

     트로이아인들이 네 몸 위에

     돌무덤을 쌓을 것이다.

 

74 헬레네는 남편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헬레네로 인해 사단이 나고 두 나라가 송두리째 파쾨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또한 호메로스의 재주다. 호메로스는 현모양처로 살고자 하는 소박한 여인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올려놓는다. 그 여인 때문에 수많은 인간들이 서로 살육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러니는 호메로스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신들의 작품이다. 신은 인간의 질서니 인간의 법도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신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질서를 따르는 헬레네를 포로로 삼아서 인간 세상을 흔들어 놓는다. 헬레네는 아프로디테의 먹잇감이다. 아프로디테가 헬레네 속에 들어온다. 헬레네는 아프로디테를 닮아서 아름답다. 그리고 남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다.

 

75 프리아모스의 말대로 "헬레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욕을 하려면 신을 욕해야 한다."

  헬레네는 아름다움을 갈구하지 않았다. 꾸민 적도 없고, 꾸밀 의지도 없다. 다만 신으로부터 받았을 뿐이다. 헬레네의 아름다움은 운명이다. 그래서 더욱 쓰리다.

 

78 호메로스는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농사일을 빗대어 아킬레우스의 파괴본능을 설명하기도 했다.

 

     소가 흰 보리를 짓밟기 시작하면

     음매 우는 소의 발끝에서

     보리 알들이 탈곡되어 삐져나오듯이

     아킬레우스의 말발굽 아래

     사람과 방패가 반은 밟히고 반은 짓이겨졌다.

     차축도 피로 물들고,

     마차 바퀴에서 튀어 오른 핏방울은

     마차 난간을 붉게 칠하고 있다.

     영광을 향해 달려가는 펠레우스 아들의 손은

     어느새 피로 칠갑이 되었다.

 

  핏빛으로 사방을 물들이는 힘, 아킬레우스는 호메로스의 시에서 주로 그렇게 표현된다. 그는 기본적으로 잔인하다.

 

79 나의 아킬레우스가 기본적으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이다. 그것이 아킬레우스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열쇠다. 그는 우정에 약한 만큼 증오에도 약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 감염되어 있고, 영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지만,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인간이다. 따라서 감정의 포로가 되기 쉽다. 우리는 위카온을 불쌍하게 여기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분노로 들끓고 잇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람의 심장을 쇳덩어리로 만든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79 아킬레우스는 상수라기보다느 변수다. 지배자라기보다는 피지배자다. <일리아스>에는 총 네개의 축이 있다. 브리세이스, 아가멤논, 파트라클로스, 헥토르다 아킬레우스는 축이 아니다. 네 개의 축 사이를 제 감정에 못 이겨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는 데 불과하다.

 

80     친구는 죽었다.

       창에 뚫린 그의 몸은 막사 입구에 다리를 두고 누웠으며

       전우들이 슬피 운다.

       다른 생각 없다.

       학살과 피를 원한다.

       적들의 신음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다.

 

81     운동경기는 끝났다.

       전사들은 배로 흩어졌다.

       밥을 먹고 달콤한 잠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친구 생각에 울고만 있다.

       모든 것을 길들이는 잠도

       그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파트로클로스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이리저리 뒤척일 뿐이다.

       함께한 날들이 떠오른다.

       수많은 전투, 끝도 없이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던 날들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웅크려도, 바로 누워도, 엎드려도

       눈물이 난다.

       문득 일어나 슬픔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앞세워

       바다로 갔다.

       곶과 범선 위로 해가 떠올랐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달고

       친구의 무덤 주위를 세 바퀴 돌았다.

       다시 막사로 돌아와 시체를 내려놓았다.

       헥토르의 얼굴은 먼지 속에 처박혀 있다.

 

  다들 잠든 밤에 감정 하나가 얼마나 단단하게 아킬레우스를 장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분노가 의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강한 분노는 강한 행동으로만 풀린다.

83 아킬레우스는 삶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주 열렬히 사랑한다. 다만 그는 현재를 사랑할 뿐이다. 지금의 감정과 지금의 움직임만 사랑한다. 오로지 거기에만 충실하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삶이고 전부다. 살인도, 분노도, 눈물도, 살아도, 연민도, 그는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무슨 철학자들처럼 공평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처럼 모든 것을 공평하게 끌어 안는다. 고통도 기쁨만큼 즐겁다. 파트로클로스가 죽고 나서 아킬레우스는 학살의 즐거움에 몰두한다. 호메로스의 말대로 "그의 심장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때", 무기는 그에게 날개가 되어 사람들 위를 날아다니게 한다."

 

83 아킬레우스는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죽음은 없다. 왜냐하면 현재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두 번씩이나 아킬레우스는 경고를 받았다. 헥토르를 죽이면 자신도 죽게 될 거라고.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살아서 "이 땅의 짐"이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 아킬레우스의 말크산토스는 사람처럼 말을 할 줄 안다. 전선으로 나가면서 크산토스는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예견했다. 아킬레우슨느 그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왜 나한테 죽음을 얘기하지?

    알아. 내가 부모를 멀리 떠나와 죽고 말 운명인 줄.

    그래도 멈출 수 없어. 가야지 트로이아 전사들을 맞으러.

    아킬레우스는 크산토스를 전선 맨 앞줄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84 그는 명예를 추구한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간다. 거기서는 죽음이 오히려 삶이다. 명예를 이루다가 죽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명예롭게 살게 될 테니까 말이다. 시대를 넘어 영원히 사는 길, 아킬레우스는 개인을 넘어 인류 전체의 범주로 들어온다. 무덤도 필요 없고, 비석도 필요 없다. 후세의 인간들이 두고두고 기억해주기를 그는 바라고 있다.

 

86 <일이아스>에서 이 장면이 특히 감동적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도무지 아킬레우스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또 한 번 재주를 부린 것이다. 쇠로 만든 사람의 초상에 휴머니즘 한 줄기를 훅 불어넣은 셈이다.

 

86 어떤 의미에서 헥토르는 호메로스가 선택한 인물이다. 특히 모범적인 인간을 고를 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헥토르를 고른다. 알다시피<일이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고, 트로이아 전쟁에서 이긴 쪽은 그리스인이었고, 호메로스도 그리스인이다. 호메로스가 제아무리 공정하려고 해도, 그리스 민족주의를 통째로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호메로스는 제일 좋은 것을 적장에게 주었다. 호메로스라는 작가를 휴머니스트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다.

 

87 아킬레우슨느 천성적으로 용감한 사람이고, 헥토르는 배워서 용감해진 사람이다. 훈련을 통해 용기를 배웠고, 그것이 그의 몸에 녹아든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안드로마케에게 고백했듯이, 그는 용감해지는 법을 배워야 했고 최전선에 나가 싸우기 위해 훈련을 받은 데 지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헥토르의 용기야말로 최상급의 용기다. 두려움이 뭔지 알지만,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88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헥토르는 침묵 가운데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화해의 조건은 뭐가 좋을 까 궁리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이 무슨 미친 짓이고, 비겁한 생각인가.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아니다. 나는 아킬레우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힘없는 여인들처럼 무참하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비겁하게 성안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다. 나약한 생각들은 젊은 날의 사랑처럼 헥토르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갔다.

 

     청춘남녀가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바위 밑에서 나무 밑에서 이야기나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89 아킬레우스는 용감해지기 위해서 무슨 생각 따위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헥토르의 용기는 사색과 품위에서 나온다.

  헥토르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때로 본질을 꿰뚫는 아름다움이 있다. 어느 날 동생 폴뤼다마스가 아주 불길한 계시를 받았으니 전투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다. 폴뤼다마스가 말한 계시는 실제 일어난 일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헥토르의 생각으로는 계시란 확실한 것이 아니며, 계시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싸우기를 택했으므로, 이렇게 대답한다. "가장 확실한 계시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거다." 지금은 평범하게 들리겠지만, 신의 게시가 지배하고 누구도 신의 계시를 거스르려 하지 않던 시대에는 놀라운 발상이다. 특히 헥토르처럼 신심이 깊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89~90 헥토르의 용기는 현자들의 용기와 다르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용기는 일상과 동떨어진 머릿속에 존재하는 용기이지만, 헥토르의 용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용기다. 

  헥토르는 조국을 사랑한다. "신성한 땅과 아버지의 백성들"을 사랑한다. 모든 희망이 무너질 때까지 그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92~93 헥토르가 보여주었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인류 전체에 대한 믿음은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헥토르는 누구보다도 아내와 자식을 사랑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이 기본적인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에게 조국이란 성벽과 요새와 그 속에 사는 트로이아인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즘의 국가라는 개념과도 다르다) 조국이란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래서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고 자유롭게 살게 해 주고 싶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헥토르가 조국을 사랑한다는 뜻은 '살붙이'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안드로마케와 그의 아들 아스튀아낙스는 헥토르가 말하는 조국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다. 싸우러 나가기 전에 그는 안드로마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 트로이아와 왕과 여기 이 용감한 백성들이 다 죽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트로이아에 닥쳐올 불행보다도 어머니와 왕과 적들의 칼에 무참하게 쓰러질 내 형제들의 비참한 죽음보다도 훨씬 더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 갑옷을 입은 아카이아인들이 당신의 자유를 빼앗아갈까 봐, 당신을 슬프게 할까 봐..... 당신은 낯선 사람들의 옷을 짜고, 물을 긷고, 살기 위해 서라면 뭐든 해야 하겠지. 당신이 남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나마저 죽고 나면 당신도 많이 울 텐데. 다른 거 없소. 그저 당신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당신이 어리론가 끌려가는 걸 보기 전에, 흙이 나를 빨리 덮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오."

 

93 확실이 이 두 부부의 마지막 대화에는 고전문학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무엇인가가 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사랑하고 존경한다. 헥토르는 아내를 사랑할 때도, 아이들을 사랑때도, 아내와 자식들을 한 사람으로 사랑한다. 살붙이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헥토르에게는 다른 것이 아니다.

  헥토르는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했다. 칼을 놓치고 아킬레우스 앞에서 죽어가면서, 헥토르는 사랑을 했고 평화를 꿈꾸었다.

 

94 너무도 또렷이 헥토르는 운명을 알아차렸다. 죽음은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와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조차 헥토르는 새로운 의지를 길어낸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쏟아낸다.

     운명이 나를 삼킨다. 그러나 나는 싸우지 않고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

     람이 아니다.... 다음 세대들이 똑똑히 볼 수 잇는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나는

     완성할 것이다. 싸우고 사랑하다가 죽을 것이다.

 

94 헥토르에게 죽음의 순간은 투쟁의 순간이다. 그는 신들이 점지한 운명에 맞서는 인간이다. 훗날 다음 세대들이 위대했다고 칭송해 마지 않을 인간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으려 한다.

  호메로스의 인본주의에는 이처럼 진실하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 가족을 사랑하고 보편적 가치를 숭상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사랑하며 싸우는 인간이 있다. 헥토르가 그렇다. 그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죽음과 싸운다. 그의 부르짖음은 더 나은 인간의 모습을 향한 부르짖음이다. '다음 세대'인 우리가 그 부르짖음을 듣게 되기를 헥토르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95 <일리아스>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잇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있었고, 그들이 인류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이끌어왔으며,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Chapter 3. 오뒷세우스와 바다

 

99~100 <오뒷세이아>에서도 작가는 <일리아스>와 비슷한 작업을 했다. 즉 오뒷세우스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다음 문학 작품으로 빚은 것이다. 이건 빼고 저건 늘리고 하는 식으로 솜씨 좋게 손을 대서 작품을 완성했다. 그리고 작품의 중심에 오뒷세우스를 올려놓았다.

 

100 <오뒷세이아>의 작가는 같은 재료를 오뒷세우스 중심으로 배열했다. 인물도 이야기도 오뒷세우스를 향한다.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뒷세이아>의 작가는 시인이기에 앞서 창조자다.

 

104 하지만 그리스 민족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다급한 아이템은 금속이었다. 쇠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구할 수 있었지만, 주석은 그리스 일대에 전무했다. 주석은 구리를 청동으로 만들어준다. 모양도 잘 나오고 쉽게 깨지지 않는 청동을 얻기 위해서는 주석을 찾아 나서야 했다.

 

104 기원전 8세기의 인간들을 흥분시키는 이 주석을 구할 곳은 두 군데였다. 최소한 지중해 일대에서는 그랬다. 흑해 끝 카우카소스 산맥 아래 콜키스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였다. 흑해 주석 광산으로 가는 길을 제일 먼저 연 것은 밀레토스 사람들이었다. 그 때문에 코린토스와 칼키스에서 떠난 그리스인들은 다른 길을 잡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멧시나 해협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올라간 것이다.

  오뒷세우스가 지나간 길도 바로 이 길이었다. 크게 보면 <오뒷세이아>는 안내도다. 모험을 즐기는 자들, 선원들, 이민자들, 쇠를 구해서 무기를 만들고자 하는 부자들을 위한 여행 안내서다. 그리스 사회의 온갖 잡동사니들의 척후병 역할을 한 것이 오뒷세우스였던 셈이다.

 

105 호메로스는 그런 영웅에 관한 전설을 여기저기서 수집하여 오뒷세우스 위에 덮은 것이다. 바다 너머 어딘가에 사는 거인 이야기, 둥둥 떠다니는 섬 이야기, 배를 산산조각 내거나 삼켜버리는 괴물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오뒷세우스가 두 번씩이나 올라간 마녀의 섬,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하는 나무 이야기도 다 주워들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뒷세이아>는 아라비안나이트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귀향하는 얘기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구전되던 이야기 모음집이다.

 

105 속지 말아야 한다. <일리아스>에서도 오뒷세우스가 나외만, 거기서 그는 웅변가이자 외교관이고 훌륭한 장수다. 테르시테스를 꾸짖던 위엄 있는 장수다. 그가 배를 잘 탄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딧세이아>의 오뒷세우스는 신드바드나 로빈슨 크루소가 겪었음직한 모험을 떠나는 인물로 둔갑한다. 오뒷세우스르 중심으로 전래동화를 다시 엮었기 때문이다.

 

106 하지만 호메로스는 그런 진부함에서 한참 벗어나 잇다. 순서를 바꿀 뿐만 아니라, 증거가 제시시되는 상황과 의미까지 변주한다. 극의 구성을 달리한다.

 

111 오뒷세우스도 바다를 무서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좋아한다. 넓디넓은 바다만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바다는 자석이다. 무엇보다 바다에서는 돈을 벌 수 있다. 바다를 넘어가야만 보물을 찾아올 수 있다. '금과 은, 상아를 원하는 자라면 반드시 통고해야 하는 곳이 바다'였다.

 

112 오뒷세우스는 황금에만 눈먼 자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 인물이다. 새로운 것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선원들이 그렇게 말렸음에도 퀴클롭스의 소굴로 쳐들어가고야 만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담대하게 하는가.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퀴클롭스를 만나러 간 이유는 타이르기 위해서다. 손님한테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굴지말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괴상한 괴물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 살을 뜯는 거인'을 보고 싶었고, 키르케를 보고 싶었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이와 같이 <오뒷세이아>에는 세계에 대한, 혹은 존재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있다. 그리스인에게 자연은 위험한 존재들이 사는 무서운 곳이다. 동시에 신비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 신비를 보고 싶고, 샅샅이 뒤지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알고 싶다. 오뒷세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문명인이다.

 

115 나우시카아의 가족들 모두 금빛 심장을 지녔고, 천국의 주민답게 착하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파이아케스인들은 뱃사람들이 짝사랑해온 족속이다. 그들의 배는 심지어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아간다고 한다. 타고 잇는 자가 마음속에 원하는 길로 인도해준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안개 속에 헤맬 일도 전혀 없다.

 

118 <오딧세이아>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민족의 시다. 바다를 처음으로 알게 되기까지 그들이 겪었던 일들의 기록이다. 꿈과 투쟁의 기록이고, 지침서다. 호기심에 가득 찬 용감한 사람ㄷ르은 오뒷세우스를 흉내 내며 바다로 떠났다. <오뒷세이다>라는 안내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고 나서 불과 몇 백 년 안에 지중해는 그리스 민족의 호수가 되었다. 요지를 장악했고 중요한 길목도 죄다 확보했다. 그렇다. 그리스 민족의 시는 읊조리고 마는 시가 아니다. 시 자체가 하나의 생생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던 자들도 들썩이게 하는 힘으로 가득하다.

 

118 <오딧세우스도 그냥 뱃사람이 아니다. 자연 앞에서, 운명 앞에서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모범이다. 문제가 닥치면 오뒷세우스는 늘 생각한다. 행동하기 전에 궁리한다. 위험한 일이 닥칠 때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짓은 생각이고 궁리다. 잔꾀를 부리는 수준이 아니다. 훨씬 더 정교한 생각을 한다. 오뒷세우스가 문제를 푸는 방법은 단순하고 확실하다.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120 어떤 싸움에서도 오뒷세우스는 바다와 운명에 물러서지 않는다. 기필코 자기 몫을 지킨다. 그의 무기는 용기와 지혜다. 우스워 보이지만 그것은 보통 무기가 아니다. 사람과 사물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무기다. 그렇다고 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마침 적당한 장소에 있었던 포도주 가죽부대와 올리브나무 말뚝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혜다. 오뒷세우스는 지혜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망치와 못으로 들보와 나뭇조각을 이어 위험에서 빠져나왔다. 필요한 때는 사탕발림을 구하하고 '악의 없는' 거짓말도 한다. 그런 것들이 오뒷세우스가 가진 무기였다. 게다가 오뒷세우스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안다. 나우시카아 공주도 그를 사랑하게 되고, 아들도 아버지를 따르고, 아내도 남편도 믿으며, 오랜 하인들도 주인 편을 든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나 유모 에우뤼클리아도 마찬가지다.

 

121 그는 자신의 손으로 신혼 침대를 만들었듯이 자신의 힘으로 행복을 되찾고 공고히 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뒷세우스는 만드는 자이고, 장인의 선조다. <오뒷세이아>를 처음부터 한번 훑어보라. 오뒷세우스는 온갖 것을 다를 줄 안다. 목수이고, 항해사이며, 석공이고, 마구장이다. 도끼와 쟁기와 배의 키를 자유자재로 다른다. 칼을 다루듯이 인간의 도구를 다룬다. 하지만 그가 만든 것 중 최고 걸작은 다름 아닌 가정이다. 행복한 가정.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을 친구로 포섭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호메로스가 말하듯이, 오뒷세우싀 '악의 없는 지혜'가 반짝이는 대목도 바로 거기다.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스퀼라와 바다 소용돌이가 도사리는 자연이라는 끔찍한 운명 앞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오뒷세우스가 앞서 싸우고 있다. 인간이 온전하게 이 세상에 살면서 자연을 정복해가는 길을 몸소 보여주고 잇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인간의 모범이고, 다음 세대의 모범이다. 호메로스가 만들어낸 미래형 인간이다.

 

Chapter 4. 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125 시인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질구레한 감정을 노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꾸로 형식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리듬이 자유롭고 풍부해진다. 악기 연주 없이 시만 읽어도 사람들은 그걸 노래로 들을 정도다.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이다.

 

129  "모두가 울고 모두가 슬퍼하도다, 페리클레스여. 울지 않는 시민이 없으

      , 축제에도 향연에도 기쁨이 없다. 차라리 폭풍우가 부자들을 집어삼켰

      더라면! 이다지 심장이 터지지는 않았을 것을! 그러나 친구여, 신은 가장

      견디기 힘든 슬픔 가운데서도 치유를 예비하나니, 그것은 자꾸만 단단해

      지는 우리들 심장이다. 오늘은 내가 아프고, 내가 피 흘리며, 내가 울부짖

      을 것이며, 내일은 네 차례라고 하자. 그리고 이젠 슬픔은 여인네들의 몫으

      로 남겨두고 단단하게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132 이처럼 아르킬로코스의 시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오블레는 순결한 사랑의 상징이었고, 아르킬로코스는 예술가다운 균형 감각을 동원해서 자기 사랑을 표현했다. "은매화 가지와 장미 한 송이를 손에 쥐고 티 없이 즐거워하는데, 아름다운 머릿결이 내려와 어깨와 목덜미를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든지, "향기로운 머릿결과 가슴은 늙은이의 심장도 깨울 듯하다"든지 하는 고상한 언어가 나왔다. 아르킬로코스는 "기쁨에 넋을 잃은 까마귀"였고, 네오불레는 "할퀴온(동지 무렵 바다 위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풍파를 가라앉히고 알을 까는 전설 속의 새 -- 옮긴이)처럼 날개를 퍼득거"렸다. 그리하여 아킬로코스 자신은 '그녀를 향한 욕망으로 난파되었"으며, "누운 채, 신이 허락한 사랑의 아픔으로 뼈마디가 뚫리는"듯 쓰라렸다.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욕망이 사지를 분해하고 장악하는데, 흥겨운 시도, 축제도,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133 가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한데 섞인 시도 보인다. 방향이 다른 두개의 행위가 하나의 시 속에 공존하고 잇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네오불레의 손을 만지고 싶다.... 그로 달아오른 그녀

     몸에 내 몸을 밀어넣고, 허벅지끼리 마구 문지르고 싶다.

 

  시인은 네오불레를 사랑한 만큼 미워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위 시구에 나타난 표현은 좀 심했다.

 

134 이후 아르킬로코스는 줄곧 타소스를 위해 살았다. 시인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군인으로서 말이다.  "내 삶에는 두개의 군주가 잇따. 하나는 에뉘알리오스이고, 다른 하나는 여신 뮤즈다." 즉 한편으로는 이름난 장군의 오른팔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신 뮤즈다." 즉 한편으로는 이름난 장군의 오른팔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신 뮤즈의 대변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군인으로서 그의 삶은 힘들고 괴로웠다. 그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빵도 창을 꽂아 먹고, 이 스마르 포도주도 창으로 휘젓고, 취하면 창끝 위에 벌렁 드러눕는" 그런 삶이었다.

 

138 아르킬로코스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다. 독설은 독설이되, 수가 높은 독설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여우는 할 줄 아는게 많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하나밖에 모른다. 그래도

     그 하나 덕에 명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아르킬로코스가 할 줄 아는 게 바로 "상처 준 자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일이다."

  아르킬로콕스는 그런 싸움을 하고 있다. 싸움의 와중에서 여린 아르킬로코스도 당연히 상처를 입겠지만 말이다.

 

140 가난한 부르주아의 시대정신은 자유다. 그들은 아직까지 잔존해 있던 귀족 계그을 거부하고 귀족 정치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르주아도 거부한다. 전통을 통째로 거부한다.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귀족의 이데올로기든,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든 상관없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현실정치에서 계급 투쟁을 하지만, 자세가 달라졌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개인, 그것이 바로 아르킬로코스다.

 

140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의 시구들을 가득 채운 그 '명예를' 참을 수가 없다. 명예는 봉건사회의 덕목이고, 우매한 대중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명예롭기보다는 행복해야 한다. 즐거워야 한다. 그게 바로 아르킬로코스의 철학이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즐거움을 잃어버리는구나.

 

  이 한줄의 시구와 <일리아스>를 비교해보라. 가령<일리아스>에서는 "나서라, 겁쟁이여! 굴복은 가장 처절한 패배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우리는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라고 수도 없이 외쳐댄다. 하지만 아르킬로코스는 <일리아스>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르킬로코스는 인생이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하며, 그를 위한 투쟁만이 가치 있다고 말한다.

 

141 죽음으로써 다음 세대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아르킬로코스는 다르다. 죽음은 그저 사라지는 거라고 본다.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

 

    죽고 나면 명예는 잊히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살아 있으라. 살아 있

    음의 멋을 즐겨라. 죽음은 상실에 불과하다.

 

142 아무리 사랑이 위중한 것이었어도 그 때문에 포로가 되지는 않는다. 감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것을 아르킬로코스는 공공연히 고백하고 있다. 엄숙한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142 아르킬로코스는 방패야 "새것을 구하면 그뿐"이라고 했다. 왜 새것을 구하겠는가? 다시 싸우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아르킬로코스라는 전사는 겁쟁이가 아니다. 그는 틀림없이 다시 싸울 것이다. 다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143 영웅 중심의 서사시가 사실은 기존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그는 정확하게 짚었다. 그래서 그것과는 다른 인간형을 창조하고자 했다. 아르킬로코스는 전사지만 솔직한 전사다. 용감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중요할 뿐이다.

 

143 비로소 해방된 한 인간으로서 아르킬로코스는 자유주의자에 가깝다. 마치 개의 목에 끔찍한 상처를 남기는 끈을 한사코 거부하는 여우(라퐁테의 우화에 나오는 길들여지지 않은 여우)를 닮았다. 목에 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바로 자유다.

 

145 아르킬로코스는 영웅을 믿지 않는다. 대신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시민들을 믿는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임박한 죽음에 맞선 전우들, 그들을 믿는다. 겁쟁이들은 다 도망쳤고, 이제 시민들이 남았으며, 아르킬로코스는 그 중심에 서 있다. 이보다 더 그리스적인 것은 없다. 고대 사회를 지탱해온 힘은 용기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용기가 인류를 구했다. 헥토르가 그렇고, 소크라테스가 그렇고, 아르킬로코스가 그렇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특별히 미화할 필요도 없다. 그저 용기있게 자기 자리를 지킨 자들이 중요한 것이다.

 

Chapter 5. 열 번째 뮤즈, 삽포

 

160   다시 에로스가 온다. 사지를 부수며 고문하는,

      부드럽고 고통스러운 그는 내가 이길 수 없는 괴물이다.

 

  "이길 수 없는 괴물"이라는 투박한 번역으로는, 삽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괴물'이라고 말한 이유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한편으로는 부드럽게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속성을 가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아무리 재주가 좋은 인간이라도 이 사랑이라는 것을 길들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길 수 없는 괴물"대신 "맞서 싸울 수 없는 야수"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어쨌거나 사랑에 대한 삽포의 수사는 이처럼 은유적이다. 기어 다니는 짐승이며, 괴물 같고, 엄청나게 힘이 센,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사랑이 지금 삽포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다.

 

161 "산에서 불어온 세찬 바람이 떡갈나무를 꺽어 넘어뜨리듯이, 사랑이 내 영혼을 흔들고 있다."

  삽포는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에 빗대어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삽포가 경험한 사랑은 태풍처럼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힘이다. 그리고 지금 삽포의 영혼은 사랑으로 인해 뿌리째 뽑혀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짐승이나 바람처럼 무서운 사랑은, 억지로 버티고 선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납기 그지없는 신을 닮았다.

 

162    웃음이 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이걸 가지고 무얼 알아낸단 말인가. 삽포의 몸과 영혼에 불을 붙이는 것은 고작 휙! 소리밖에 없다. 아니면, 그저 '순간"적으로 힐끗 본 것밖에 없다. 그러면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진짜로 놀라운 것은 이 인과관계의 비대칭성이다. 원인은 털끝만한데 결과는 엄청나다. 그 차이가 너무 커서 어지럽다. 우리는 삽포가 얼마나 지독한 아픔을 겪고 있는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잇다. 하지만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소리 하나, 웃음 하나만 보인다. 당연히 경악할 수밖에 없다. '저런 조그만 소리가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낳다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보면, 그 대상이란 거꾸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삽포의 시를 몇구절만 떼어놓고 보아도, 우리는 시가 가지는 엄청난 에너지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저쪽 대상은 그저 스윽 보여주기만 해도 된다. 그런 다음에 이쪽을 묘사한다. 이쪽은 사지가 부서지고 온몸이 전복된다. 대상을 한 번 살짝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렇게 커다란 에너지가 용솟음친다.

  눈을 씻고 봐도 저쪽은 보잘것없다. 떠나간 여인의 발소리, 누군가의 얼굴빛, 부드러운 목젖, 화환을 얹은 머리, 가볍게 들어올린 팔, 주로 그런 것이다. 심지어 "보잘것없는 것"도 대상이 된다.

 

163 사람이란 때로 세세히 알고 있는 것보다도 잘 모르는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미감하게 반응한다. 목소리만 비슷해도 걸음걸이만 비슷해도, 삽포는 고통과 기쁨에 젖는다. 목소리나 걸음걸이만 봐도 사랑인 줄 안다. 그것이면 족하다. 기호 하나가 삽포에게는 전부이며, 기호 하나로 대상과 나는 합체하여 이윽고 폭발한다.

 

164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도 삽포에게는 기호가 된다.

 

      이제는 누구도 아낙토리아의

      부재를 기억하지 않는구나.

      그 우아한 걸음 걸음과

      빛나는 얼굴을 나는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아낙토리아는 어디 가고 없다. 그럼에도 없는 아낙토리아아가 시인을 울린다. 그중에서도 두가지가 생생하다. 물론 그것 말고도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면 충분하다. 두 가지로 아낙토리아는 부활하는 것이다. 자분자분한 발소리와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바로 그것이다.

 

173 신비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다. 사지를 부숴버리고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 같은 사랑을 견디는 힘이 여기서 생긴다.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손짓을 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쓰라리고 아팠던 사랑의 시간이 지나 세상은 고요해지고, 고요한 밤하늘을 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사랑의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별빛이 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사랑은 나와 적절한 거리에 올라붙어 빛난다. 그 틈을 비집고 새소리가 들리고, 꽃이 피고, 나뭇가지가 소리를 낸다. 그러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고, 사랑 노래는 자연에 대한 노래로 바뀐다.

  이처럼 삽포의 시에서는 사랑이 불탄 후에 자연이 부화란다. 사랑 불꽃이 자연의 몸체에 들어가 빛을 발한다.

 

      사랑하는 귀린나, 안녕.

      그리움에 불탄 가슴에서 한 방울 물처럼 튀어

      되돌아오는구나.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거리만큼 간절하게 안녕.

 

174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영원히 떠났다.

        "솔직히 죽을 것 같아요."

        눈물로 대신하던 마지막 말

        "이 잔인한 운명을 어떻게 해요.

        저는 떠나고 싶지 않은데."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었지.

        "기쁘게 떠나라. 나를 기억하라.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네가 잊었다면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날들을

        상기시키리라.

        장미와 제비꽃과 사프란으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 땋은 머리를 길게

        늘인 채, 늘 내 옆에 앉아 있었지.

        그때 목에 두른 취할 듯 진한 꽃목걸이에서,

        왕의 몰약 같은 향기가 퍼져 나오던걸....."

 

  이런 시를 보면, 세계가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길과 우리의 마음이 세계로 향하는 길을 삽포는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다. 외부와 내부 간의 물질적 궁합에 정통한 게 화확자에 견줄 많하다.

  삽포는 그런면에서 모더니즘의 예후라고 할 수 있는 시를 썼다. 삽포의 시 세계는 동시에 두 가지를 조종한다. 하나는 바깥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로운 마음속 세상이다. 종래 시들은 하나를 먼저 묘사하고, 나머지를 나중에 묘사했다. 마치 두 개가 다른 세상이라고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삽포는 바깥세상과 우리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마음이란 바깥세상에 대한 대응이고 파동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음은 정교하고 날카롭다. 바깥세상의 하찮은 움직임들을 모두 잡아낼 만큼 민감하다. 삽포의 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삼투하고, 존재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175 삽포를 끊임없이 들뜨게 한 건 결국 젊음과 꽃망울이었던 것 같다. 밝은 태양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젊음과 꽃망울이 삽포에게는 무한한 기쁨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곧 사라진다. 젊음이 그렇고, 꽃망울이 그렇다. 그래서 아룸다움이란 종내는 한순간이었으리라.

        젊음의 꽃망울을 사랑했다.

        사랑이 왔다.

        그것은 반짝임이었고, 순간이었다.

 

Chapter 6. 솔론과 민주주의

 

182 200년 동안 그리스의 심장은 아테나이에서 뛰었다. 희극에 들어 있는 촌철살인의 언어들은 시민들에게 삶의 진실을 알려주었으며, 인간과 운명의 어긋남이 비극을 통해 애절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있으며, 거리에서, 가게에서, 광장에서 철학적 언어들의 쏟아져 나왔다. 지상과 천상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188 말도 안 되는 구분법이었음 물론이고, 투쟁의 본질을 호도하는 악의적인 이분법이었다.

 

197 솔론의 개혁 조치, 즉 빚을 탕감하는 조치로 인해 부자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그동안 너무 많이 해먹었다. 그걸 뱉어내게 한 것뿐이다. 솔론은 빚 때문에 신음하는 농민들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더 이상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했다.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당시 그리스 어느 도시에도 이런 획기적인 법은 없었다. 앗티케 반도가 처음이었다.

 

199    나는 가난한 자에게나 부자에게

       똑같이 공평한 법을 만들었다.

       탐욕에 눈이 멀어서 나를 모함하는 자들은

       시민들 편이 아니다.

       내가 그들의 말을 들었더라면

       시민들이 내 편을 들었을 리 없다.

       나는 개들에게 둘러싸인 늑대처럼 싸우고 있다.

 

  아래와 같은 구절에서 보면, 극단적인 요구에 맞서 과감하게 저항하는 솔론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두 들판 사이의 경계석처럼 서 있다.

 

  이렇게 고백하는 솔론 특유의 어투에서 개혁주의자의 외로움을 읽을 수 있다. 솔론은 그런 외로움 가운데 아테나이의 개혁을 추진해갔다.

 

201 이처럼 시민들이 민회에 참석하고 배심원이 되는 솔론의 아테나이에서 국민 주권주의는 이미 실현된 셈이다. 굳이 민주주의가 아니었다고 우길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시민들이 투표를 하게 되면 시민들이 정부가 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이제 기원전 6세기, 아테나이는 시민들의 아테나이가 되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연설가의 주장을 듣고 국가 대소사를 결정했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부터 파르테논 신전을 짓는 것까지, 그리고 아크로 폴리스에 출입문을 세우는 일까지, 시민들이 투표로 결정했다. 프랑수아 페넬롱의 말처럼 "그리스는 시민이 결정하고, 시민은 연설이 좌우"하게 된 것이다.

 

203  솔론은 이런 식으로 부자의 탐욕이 가져올 수 있는 재앙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조국에 필요한 것은 정의로운 법이라고 선언한다.

  "아름다운 법만이 질서와 조화를 가능하게 한다."

  "법의 힘으로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고, 사람들이 지혜로워진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솔론은 결국 입법자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동시에 가슴속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시인이자 애국자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솔론을 그렇게 정의했다. 정의로운 자라고 말이다. 솔론의 바람대로,그리스 민주주의는 바야흐로 정의를 구현하게 될 것인가.

  그러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노예의 희생 위에 서 있다.

 

Chapter 7. 노예와 여자

 

209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관여했던 첫 번째 상행위는 노예를 사고파는 일이었다. 전쟁 포로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발전의 동력은 바로 돈이었다.

 

212 이 대목에서도 우리의 철학자 플라톤은 확실한 원칙을 제시했다. 즉 재물은 용도가 다르다. 용도가 다르면 대우도 다르다. 대우가 다르다고 해서 불만을 품는 것은 노예가 할 일이 아니다. 노예는 재물이고, 재물의 용도는 주인이 정하는 것이지, 노예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풀어주고 말고는 주인 마음이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꿈꾸는' 철학자도 그런 말을 지껄였다.

  거듭 말하지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들이 갖다 쓰는 "연장"에 불과했다.

 

213 문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문명 국가로 보이는 그리스도 실상은 노예제 사회였다. 도대체 인간을 위한 존재하지 아는 문명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불러도 된다면 그리스 문명이 바로 그런 문명이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문명, 언제든 야만 상태로 회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슬아슬한 문명이었던 것이다.

 

222 노예제도는 발전의 장애물이다. 과학자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과학은 인간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과학이다. 최소한 그것이 과학의 존재 이유 중 하나다. 만약 과학적인 연구와 발견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 과학은 의미가 없고, 곧 소멸하고 만다.

 

223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전쟁은 복종하기로 되어 있는 자가 복종하지 않을 때 그들을 굴복시키는 수단이다." 이런 얼통당토않은 얘기가 우리가 위대한 철학자라고 추앙해 마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결국 사람의 생각이 라는 것은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24 에우리피데스는 그런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노예는 천한 사람이고, 시민은 그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점을 부인한 최초의 작가였다. "많은 노예들은 노예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지만, 영혼만큼은 시민들보다도 더 자유롭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휴머니즘이고, 이론다운 이론이다.

 

225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지향한다. 가난한 자도 없고 부자도 없고, 시민도 없고 노예도 없다. 인간은 모두 신 앞에서 평등하다. 그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노예를 기반으로 세워진 고대 사회에는 치명적인 가르침이다.

 

225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자유가 신장된다는 것, 그것은 맞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다. 사회적 억압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교묘하다.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말라고. 노예제도는 그만큼 달콤한 제도라서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Chapter 8. 신과 인간

 

240 그런 면에서 그리스의 종교는 자유분방하다. 버릴 수도 잇고, 변절 할 수도 있다. 믿음 자첵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그저 예식을 치를 때 어떤 자세를 취하라는 지침에 지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인사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다. 조금 더 발전된 형태라고 해봐야 신에게 키스를 날리는 정도일 뿐이다. 일반대중들도 그렇고, 그들보다 조금 더 나은 식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믿음은 가벼운 몸짓이었다.

 

241 오뒷세우스가 보여준 것처럼 고대 사회의 인간도 웬만큼은 똑똑한 사람들이다. 생각할 줄도 알고, 어떠 행동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안다. 따라서 위협하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나간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기도 하고, 실패하는 경우 있다. 생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때 인간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이 세상에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있구나. 내 뜨새도 안 되는게 있구나'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산이 개입한 거라고 믿었다. 좋은 쪽일 수도 있고, 나쁜 쪽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인간이 모르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낯설다. 그리고 놀랍다. 신이란 그런 것이다. 두려운 힘이며,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힘이다. 그 힘 앞에 놓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경외'라는 단어를 썼다. 경외로운 존재, 그것이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존재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스 종교는 결국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243 이처럼 포세이돈이 한편으로는 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닷물을 상징하게 된 내력은 별거 아니다. 이어니아에서는 뱃사람ㄷㄹ이 주로 포세이돈을 신으로 섬기고, 펠로폰네소스 같은 마른땅에서는 말 다루는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포세이돈은 또 지진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했다. 고대 사람들은 물이 지하로 내려갔다가 작은 틈새를 뚫고 분출할 때 지진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43 허리 아래는 말이고 허리 위로는 사람인 켄타우로스는 시와 예술과 관련이 있다. 원래 켄타우로스라는 뜻은 '물을 묶고 있는 자'라는 뜻이다. 즉 펠리온과 아르카디아의 산에서 세차게 내리치는 물살을 쥐고 있는 괴물이 켄타우로스다. 그런데 마침 그 펠리온과 아르카디아가 시인들의 고향이라서 켄타우로스는 덩달아 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245 그리스 말로 데메테르는 '곡식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호메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데메테르는 이아시온이라는 인간과 곱게 간 밭을 침대 삼아 정분을 맺었고, 그 사이에 태어난것이 플루토스다. 플루토스란 부자라는 뜻이다

 

247 엘레우시스 교단은 바로 이 '아름다운 씨앗' 코레의 귀환을 축하하는 축제를 열었다. 이로부터 여덟 달 동안은 씨앗이 대지를 만나 행복한 합일을 이룬다. 그리고 다시 그다음 넉 달은 헤어져 살게 된다.

  8개월이라는 시간은 곡식 창고의 문이 열리는 시점부터 기산한다. 가을 씨뿌리기를 위해서 문이 열리고, 곡식들은 금세 자란다. 10월에 뿌려진 씨는 1월을 제외하고 겨울을 나면서 훌쩍 자라고, 4월 말이면 열매가 익기 시작하며, 5월 추수해서 6월에 탈곡한다. 그런고 나면 거두어들인 알곡은 다시 창고로 돌아가고, '씨앗의 꽃' 코레는 지하세계로 돌아간다. 코레의 귀한에도 심오한 뜻이 있다. 새로운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코레가 지하로 내려가서 땅을 비옥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로 시작하는 성경구절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251 이처럼 자연이란 한편으로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 일단 키르케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들어가면, 돼지로 변하든 사자로 변하든 인간은 고향을 잊어버린다.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모든 괴물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인간이 금지된 구역으로 들어가고, 양면성을 띤 자연의 포로가 되어 어두컴컴한 세계로 들어가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힌다.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이 끝나면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251 그런 자연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오뒷세우스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연에 이길 수 있었다. 영웅이라는 말은 쓰지말자. <일리아스>에서 나오는 디오메데스와 다른 전사들이 영웅이다. 그들의 머리에서는 빛이 나온다. 하지만 오뒷세우스는 그렇지 않다. 그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인간으로서 자연에서 견디는 것이고, 싸우는 것이고, 이기는 것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견디는 것이고, 사회와 긴밀한 끈을 놓지 않고 잇다. 아내와 지식을 붙잡고 잇다. 자신의 영토를 사랑하고, 일을 좋아한다. 창조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생각하는 머리가 잇었고, 집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 이난당뭉르 자연도 어쩌지 못했다.

 

252 그때쯤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치부하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의 성질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괴물 같은 신과 잔인한 요정에게 인간의 얼굴을 입히게 되었다. 그래야 좀 더 이해 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바다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수많은 의인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바다의 왕자 포세이돈은 <일리아스>의 전사처럼 말을 타고 다닌다. 돌고래와 상어와 고래들이 장난스럽게 포세이돈의 주위를 맴돌고, 포세이돈이 끄는 말은 물살을 성큼성큼 넘어 다닌다. 포세이돈은 집도 잇고 암피트리테라는 배우자도 있다.

 

259 호메로스의 말대로 "눈물은 인간의 것이고, 웃음은 신의 것이다."

 

265 헤파이스토스나 아테네와 비슷하게 인기가 있었던 신이 바로 돌무더기에서 진화한 헤르메스다. 헤르메스는 장난기 많고 명민한 신임, 여행자와 상인, 자영업자, 무역상의 신이다.

 

267 모이라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성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전혀 추측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모이라는 세상의 질서이고, 지금은 어폄풋하지만 언젠가는 인가의 힘으로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즉 인간 위에 군림하는 모이라도 인간의 생각 혹은 인간의 과학, 인간의 이성 바깥에 잇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결국 우리가 사는 우주는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그리스 사람들은 알아차리고 있다. 우주라는 단어는 '질서'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267 그리스 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그리스 사람들이 만들어내 인간 중심의 철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호메로스의 시대를 지나 고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훨씬 더 가까워졌다. 원래 신이란 전형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족속이었다. 이제 신과 가까워진 그리스 사람들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은 정의로운가, 하는 질문이다. 인간보다 힘이 센 신의 정의롭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그리스 사람들은 도무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Chapter 9. 비극: 아이스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273 비극은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 속에 존재하는 공포와 희망의 버무림이다.

 

275 그 주인공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인류를 꽁꽁 얽어맨 족쇄 사이에 희미하게 난 틈을 영웅들이 먼저 비집고 나갈때, 관객들도 영웅의 뒤에 서서 그 틈을 넓혀 가고 싶은 마음에 몸을 움찔거린다.

 

277 주인공도 관객도 모두 인간이다. 그래서 같이 싸웠고, 주인공의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잇다. 운명과 대적하다 맞은 죽음에서 관객들은 오히려 희망을 본다. 언젠가 운명을 넘어서리라는 희망을 본다. 그게 아니라면 죽음과 비극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이 이상한 족속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278 이 투쟁이 다른 면으로 그대로 투영된다. 부자들의 자리에 잔인하고 자의적이며 무서운 운명의 신이 잇고, 가난한 자들의 자리에 인간보다는 조금 더 강하고 용감하며 위대한 영웅들이 있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싸우고, 인류를 위해 싸운다.

 

287 맞다. 프로메테우스가 지기는 했지만 정복당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프로메테우스를 응원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우스에게 맞서기 때문이다.

 

303 크뤼타임네스트라는 아직도 어젯밤 꿈이 생생하다. 아기 뱀을 낳고 젖을 먹이는데, 뱀이 가슴을 무는 바람에 피를 쏟았다.

 

313 투퀴디데스의 증언을 보면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그리스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고 한다. "용기가 자유를 낳고, 자가 행복을 낳습니다. 우리가 이 두려운 전쟁 앞에서 용기를 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테나이 시민들 앞에서 했던 이 말은 그리스 사람들 전체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일깨웠고, 그로 인해 그리스 사람들은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게 되었다.

 

317 페리클레스가 숭상하는 종교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세계 위에 군림하고 있는 신이며, 다른 하나는 그 신이 현현한 인간이었다. 신의 위대한 힘은 인가에게 구현되었고, 페리클레스는 그걸 믿었다. 행복과 발전과 정의와 명예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을 믿었고,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공동체는 발전해갈 것이라고 믿었다.

 

327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의 실체였다. 이 민주주의는 철저하게 노예들 위에 세운 민주주의다. 또한 조공국의 재산과 땀이 피 위에 세운 민주주의였다.

 

329 따라서 아테나이의 민주주의는 억압하는 민주주의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이에게 영광이고 이익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에게는 영광도 이익도 없다.

 

334 사실 페이디아스와 소포클레스와 페리클레스는 한 팀이었다. 그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것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이다. <안티고네>라는 작품을 쓸 당시에 소포클레스는 조달청의 재정 담당이었다. 즉 동맹국에서 징발된 물자들을 배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왕>같은 대작을 쓰고 있다고 해서 시민으로서 중요한 공직을 수행할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다. 정치 성향은 서로 다르지만 세 사람 공히 같은 시대에 아테나이를 이끌었다. 소포클레스는 연극으로, 페이디아스는 아크로폴리스 재건축으로, 페리클레는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다.

 

335 파르테논은 수학 공식 속에 갇힌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건축물이다. 수학이 아닌 감성을 건드리는 건축물이다. 파르테논에는 질서가 있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살아 숨 쉬는 질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파르테논에 쓰인 직선은 실제 직선이 아니다. 마치 우리 삶에서 마주치는 직선들이 완벽한 직선이 아닌 것과 같다. 원도 마찬가지다. 고르지가 않다. 파르테논에 구현된 수학은 딱 떨어지는 수학이 아니다. 조금씩 빗나간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예술적으로 약간씩 뒤튼 것이며, 그럼으로써 각 면들이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다. 파르테논을 살아있는 건축물로 만든 힘은 바로 이 비틀기에 있다.

 

336 게다가 천장을 떠받친 기둥도 크기가 제각각이며, 직각이 아니다. 기둥 사이의 거리도 모두 다르다. 도대체 이 건축물에는 어느 것 하나 아귀가 맞는 것이 없다. 그게 오히려 건축물 전체에 안정감을 주고, 역동성을 부여한다는 이 기막힌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르테논은 한마딜 영원하다. 그것도 부동자세의 영원함이 아니라, 움직임의 영원함이다.

 

337 파르테논은 직각으로 세운 기둥 위에 얹어진 돌무더기가 아니라, 전체가 피라미드처럼 하늘을 향해 금세라도 비상하려는 자세다.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343 페리클레스의 영광과 실패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닫게 된다. "문명은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문명이라야 한다." 그리스 문명은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과 용기라는 열매를 주었다. 하지만 그 열매 속에는 쓴맛이 도사리고 있다. 그게 없어지기 위해서는 다시 몇 세대가 더 흘러야 했다.

  문명은 푸른 사과다. 태양이 더 내리쬐어야 붉은 사과로 변할 것이고, 아직은 태양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는 아직 어린 문명이다. <오뒷세이아>저자의 말마따나 태양이 그리스를 더 키워줄 것이다.

 

그리스인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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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안티고네의 약속

 

14 시인은 영웅을 비난하지 않는다. 영웅의 추락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죽음을 보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불꽃의 장벽, 황금의 장벽을 뚜렷이 깨닫게 된다. 바로 그 장벽 너머를 거처로 삼는 신들은 인간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도약을 갑작스럽게 막아버린다. 따라서 영웅의 죽음은 비극적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비극적인 것은, 우리 인간의 현실에서, 소포클레스와 그와 동시대를 산 인간들의 경험 속에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신들의 존재다.

 

16 대부분의 비극은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끝이 난다고? 아니, 그 어떤 위대한 비극도 완전히 끝나는 법은 없다. 모든 비극은 마지막까지도 열려 있다. 새로운 별들을 향해 열린 광대한 하늘을 어떤 약속들이 유성처럼 관통한다. 비극은 존재하는 동안, 곧 그 비극을 태어나게 한 조건들을 털어내고 다른 사회에서 여러 형태로 변신해가는 동안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기도 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빛나기도 하며, 그 위대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기도 한다.

 

17 단연 비극의 여왕으로 꼽히는 <안티고네>는 우리가 고대부터 간직하고 있는 모든 비극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약속을 담고 있다. 과거의 언어로 우리에게 가장 현대적인 가르침을 주는 작품도 바로 <안티고네>. 제대로 감상하기에 가장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18 이처럼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담하는 행위나 거부하는 행위와 관련하여 그들의 쟁점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관객들에게 자신들을 알린다.

 

18 안티고네는 외삼촌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한다. 신들의 법, "글자로 쓰이지 않은 법", 영원한 법, 양심을 지배하는 법, 정신 나간 왕이 제멧대로 정한 법보다 더 높은 법에 복종했노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19 영웅적인 두 자매는 한순간도 진정으로 서로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만나지 못한다. 두 자매는 소모적인 얄궂은 어긋남 속에서 서로를 스쳐갈 뿐이다.

 

20 하이몬은 절대 크레온 왕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그를 설득하고자 할 뿐이다. 하이몬은 만일 약혼녀의 목숨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다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을것이 틀림없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발언할 뿐이다. 하이몬에게 남성적인 효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이 장면은 놀라운 준엄함으로 돋보인다. 사랑의 감정을 쏟아내고, 이를 대사 속에 녹여내는 데 치중하는 현대극이라면 이 상황을 감상적이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거부한다. 그러기는 커녕 아버지 앞에 선 하이몬의 입에서 행여 사랑에 대한 암시가 한마디라도 튀어나올까 봐 노심초사한다. 하이몬이 안티고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 그러는건 아니다. 만일 그가 아버지에게 공동체의 이익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는 남자라면, 그런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그는 자신의 열정을 자제하고 이성의 소리만을 입 밖으로 토해낸다.

 

24 모처럼 자부심이라는 갑옷을 벗어놓은 안티고네는 홀로 맨몸으로 벽에 기대 선다.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어울리는 장면이다. 운명이 인질로 잡은 자들을 일렬로 늘어놓는 벽.

 

24 죽기 전에 주인공이 산 자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마지막으로 소중한 태양빛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정당하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은 강점과 약점을 두루 지닌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전지전능한 운명과 일대일로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25 비극에 으레 등장하는 주제, 즉 삶에 대한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죽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제를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라고 하는 인물울 통해 찬란하게 빛나는 진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5~26 비극적인 갈등의 끝이 늘 그렇듯이, 인간과 운명은 결승점을 100미터 남겨두고는, 한껏 고조된 의지와 불끈 솟은 근육을 무기로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테이레시아시의 장면을 포함하여 합창단이 부르는 통곡과 희망의 양 기둥을 이룬다. 두 기둥이 지니는 정반대되는 의미는, 파국을 눈앞에 바로 이 극적인 순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27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온통 피와 눈물범벅인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숨죽이고 지켜보았던 인간의 형상들이 유령으로 변해버린 그 순간, 동굴에서 자신의 베일로 목을 맨 안티고네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순간, 이렇게 공포가 첩첩으로 쌓인 바로 그 순간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환희가 우리를 휘감는다. 안티고네가 우리 안에서 살아나면서 밝은 빛을 발한다. 안티고네는 눈을 멀게 하고 가슴으르 태워버리는 진실이다.

  이와 동시에 신들의 노여움을 샀지만 도저히 비난할 수 없는 크레온도 또 다른 형제처럼 우리 가슴속에서 빛을발하기 시작한다. 무릎 꿀은 아비와 우리 사이에 놓인 축 늘어진 하이몬의 주검은 온유함과 연민의 호수처럼 우리의 빈으로부터 크레온을 보호한다.

 

31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안티고네는 이스메네에게 일침을 가한다.

 

31 한 사람은 자기 아들에게, 또 한 삼은 자기 동생에게 "전부를 주지 않을 거면 아무것도 주지말 것"을 강요한다. 자신이 택한 절대적인 선택을 남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다. 안티고네의 성격은 절대로 크레온보다 덜 '독재적'이라고 할 수 없다.

 

32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상반되는 분노로 인해 우리는 매 순간마다 겨우 종이 한 장의 두께에 목숨이 달려 있는 긴박감을 맛보게 된다.

 

32 안티고네가 하이몬이 처한 비극적인 입장으로 모르는 척하고, 약혼자의 이름을 다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비극만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평가들은 입을 모은다. 마음 약한 사람들은 이 같은 평갈 확신하면서, 소포클레스가 이스메네의 입을 빌려 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야말로 안티고네의 대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사랑하는 하이몬, 당신 아버지는 정말로 당신을 모욕하는군요!"

 

33 안티고네는 오로지 형제의 우애만을 고집한다. 폴뤼네이케스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그녀의 관심을 돌려놓을 수 있는 다른 모든 감정은 밖으로 내동댕이 친다. 아니 적어도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밀어넣는다.

 

35 그의 성격으로 인한 광신주의가 빚어낸 결정은 주변에 그의 요새를 구축한다. 상상의 요새 속에 갇힌 그는 자신이 그곳의 주인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는 유폐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요새는 아들을 향한 사랑도, 상식도 연민도 아니 지극히 단순한 상황 인식마저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다. 누가 과연 이상태, 크레온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이 희한한 포위 상태를 타개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광적인 태도는 스스로를 고독으로 몰아갔으며, 그리하여 그는 모든 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를 구하려는 사람들마저도 그는 적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궁수들처럼 나를 겨냥해보거라. 모두 나를 겨냥하란 말이다.

 

35~36그런데 성격 외에도 투쟁에서 매우 중요하며 사람됨됨이를 결정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영혼의 품격이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의지가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놀랍게도 닮은 성격이 드러난다. 이와 동시에 두 사람의 영혼이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나마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했던데 대해서 놀라게 된다. 요컨대 성격의 윤곽이 유사한 것과 비례해서 영혼의 윤곽은 완전히 다르다. 이 본질적인 차이 덕분에 안티고네는 외로운 죽음을 맞으면서도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반면, 살아 있는 크레온은 평생 고독의 멍에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듯 두 등장인물에게서는 팽팽하게 맞서지만 완전히 반대 방향을 향해 치닫는 의지가 엿보인다. 동등하게 굳건하면서 전혀 반대되는 의지.

 

39 하지만 안티고네의 성격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은 바로 안티고네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다. 그녀는 폴뤼네이케스를 조국의 적으로 증오하기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증오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이것이야말로 타고난 연인, 사랑에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는 연인의

심성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리스어 표현의 강도는 번역을 통해서 제대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태어났다"고 안티고네가 말한다. 이는 곧 이것이 나의 천성이다. 나의 존재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태어났는데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것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 사랑을 통한 교감 속에서 살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다.

 

40 오빠의 주검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안티고네는 인간의 의지에 저항할 힘, 전적으로 신의 뜻에 순종할 힘을 얻는다.

  그러니 사랑이 마음을 열어주는 힘을 지녔음을, 마음을 비옥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힘을 지녔음을 인정하자.

 

41 이 말은 안티고네의 미래에서, 안티고네 스스로를 넘어서는 곳에서, 그러니까 안티고네의 깊은 심성, 아니 안티고네에게 닥치게 될,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운명에서 끄집어낸 선언이기도 하다. 비극적인 갈등이 가하는 폭력에 의해서 시인에게서 끄집어낸 말이기도 하다. 시인이 창조한 이 인물은 이 대목에서 창조자인 시인마저도 넘어선다. 세월마저도 넘어선다....

 

42 확실히 크레온은 아내와 아들, 백성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가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그의 힘을 입증하고 그를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자아를 충족시키는 도구이자 이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들의 행복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오로지 이들을 잃게 될 때에만 상처를 입을 뿐이다. 그는 이들의 실존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뿐이지만, 그나마도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못한다.

 

43 소포클레스는 이 사람은 틀렸고, 저 사람이 맞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저급한 부류의 작가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등장 인물들을 너무나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모두 옳다. 우리는 마치 현실 속의 인물을 대하듯이 그들 각자의 입장을 지지하며, 우리 자신의 경험에 입각해서 그들의 진실을 체험한다.

 

48 우리는 안티고네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에 앞서서 크레온의 묵직한 흙으로 빚어졌다. 그렇지 않다고 저항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극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 작가가 예술적 기량과 애정을 가장 발휘해야 는 부분은 바로 이 같은 통찰력 있는 연민이 담긴 대목이다. 즉 우리는 '심술궂은' 등장인물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심술궂은' 등장인물들을 마음 밖으로 내치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예술적인 진실과 우리가 느끼는 쾌감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ㅇ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속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48 이렇듯 소포클레스는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형상들을 일깨운다. 그는 꾹 다문 우리의 이블 열게 만든다. 그는 우리의 말 못하는 복잡한 의식 세계를 밝은 빛 가운데로 이끈다. 우리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수치심 때문에 제품에 어둠 속으로 사그라진 모든 것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은 우리들 각자자가 느끼는 갈등이며 우리를 위험으로 몰아가는 갈등이다. 갈등이 대미를 장식할 때 우리는 심하게 동요한다.

49 하지만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가 우리의 내면적인 삶이 지니는 무질서를 환하게 조명하는 것은 결국 그것으로부터 질서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비극적인 갈등으로부터 그는 우리의 풍요로운 감정들의 단순한 나열을 뛰어넘는 즐거움, 즉 이것들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이것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비극적인 주제를 서로 대립시키면서도 인간을 풍요로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감정들 가운데 그 어느것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시인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낱낱이 보여준다.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새로운 전투로 이끄는 마술적인 음악으로 우리를 매혹한다.

 

51 크레온에게 질서의 극한은 파시즘이다.

   모든 것이 국가에 귀속된다고 믿는 크레온의 세계에 비해서 안티코네의 우주는 훨씬 광대하다.

 

51 인간이 공표한 법, 국가의 이름으로 말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법은 양심이라는 영원한 버에 우선할 수 없다고 안티고네는 말한다.

 

52 안티고네는 모두로부터 버림받았거나 모두로부터 격리되었다, 결국 모두로부터 여왕이자 지고하고 숭고한 진실의 주인으로 추앙받는다.

 

53 안티코네가 추구하는 진실의 확신성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안티고네가 자유라면, 크레온은 운명이다. 이것이야말로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지니는 궁극적인 의미이며, 그로 인해서 우리가 맛보는 기쁨의 중추라고 할 수 있다.

 

53 역사상의 모든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항상 국가의 권력과 충돌해왔다. 공동체는 반드시 필요하며,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크레온은 이를 설득력 있게 대변한다. 그 자신이 바로 공공질서가 요구하는 엄격하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한 모든 것의 현현이다.

 

Chapter 2.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64 예술가는 많은 시에서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표현된 신들에게 인간 남자와 여자의 형태를 부여했다. 이렇듯"신화는 단순이 그리스 예술의 병기창일 뿐 아니라, 그리스 예술을 기른 젖줄"이기도 했다.

 

70 상고 시대 그리스 예술은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벌거벗은 남자의 입상인 쿠로스와 옷을 입은 여자 입상 코레, 이렇게 두 부류다.

 

74 하지만 힘과 매력, 이 모든 것은 실제 현실이라기보다 하나의 약속에 가깝다. 움직임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아무런 몸짓도 보여주지 않는 이 조각상들은 걸음조차 떼어놓지 않는 부동자세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76 당시만 해도 빨간색, 황토색, 파란색 등의 선명하고 명랑한 색채들이 여인상의 머리카락이며 아름다운 의복 등에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이는 예술가가 조각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꾸미고 싶어서였다기보다 단순히 눈에 띄는 색채를 통해서 석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79 옷을 입은 여인상, 즉 코레에서 예술가의 관심사는 여인의 인체라기보다 복합적인 주름 연구였던 것이다. 의복의 주름은 천의 종류가 무엇인지, 어떤 스타일의 화장을 했는지, 몸의 어느 부분에 주름이 놓이게 되는지 등에 딸라 그 형태가 무궁무진하다. 어쨌거나 주름의 역할은 몸을 가리면서 동시에 몸의 형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82 그리스 사람들에게 신은 벌거벗은 소박한 젊은 청년, 아름답게 치장하고 상냥한 표정을 짓는 젊은 처녀였다.

 

82 이 세상에서 젊은 청년의 벗은 몸이나 곱게 수놓아진 천으로 만든 의복을 걸친 여자의 우아함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것이 인간들이 신에게 바친 것이며, 인간들이 신에게 바친 것이며, 인간들이 신을 보는 방식이었다. 신들이란 바로 이런 존재였다. 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환하게 빛나는 대리석 외에 다른 언어란 있을 수 없었다.

 

82~83 엄격하면서 부드러운 선에서 배어 나오는 온화함과 단호함을 지닌 인체의 아름다움은 경직된 가운데 너무도 감동적이고 강력하며, 신체에는 물론 영혼에까지도 막강한 설득력을 불러일으킨다. 이 아름다움은 그리스인들이 재현한 청소년기의 환한 젊음으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영원불멸을 일깨워준다. 이것이 바로 영원불멸의 신에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바친다고 하는 의미다.

 

85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몸에 대한 사랑, 이것이 바로 석조 조각가의 창조력을 이끄는 방향타다.

  여기에다 진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도 덧붙여야 한다. 인체의 골격과 근육에 대한 지식을 나날이 키워가는 조각가의 의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조각가는 인체를 재현함에 있어서 항상 어제보다 발전된 지식으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야말로 조각가가 신에게 바치는 첫째가는 봉헌물이었다.

 

87 뮈론은 그의 작품 '원반 던지는 사람'과 더불어 우리를 행동의 세계로 안내한다.그가 안내하는 세계에서는 불현듯 움직임이 최고의 권위로 지배하며, 인간은 균형에 의해서 지탱되는 힘에 취한다. 이런 점에서 뮈론은 조각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대인인 아이스퀼로스가 연극에 있어서 행위의 창시자인 것처럼 말이다. 두사람은 각자 인간의 힘의 한계를 탐험한다. 조각가가 움직임에 있어서 균형의 법칙을 존중하지 않으면, 조각상은 쓰러지고 만다. 원반이 양손에서 빠져나간 직후 운동선구가 경기장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88~89 이 작품은 순간을 포착한다는 의미 외에도 개인의 잠재력과 그것의 변화까지도 포착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원반 던지는 사람'의 단계에서 우리는 이미 인체 골격과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토대를 둔 조각가의 사실주의가 단순한 현실 복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상은 재생되기에 앞서 조각가에 의해 다시 한 번 성찰되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89 인간이라는 피조물과 진리에 대한 조각가들의 애정은 그들의 작품에서 다른 모든 부족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나타난다.

 

95 폴뤼클레이토스는 손바닥(손바닥의 폭)을 단위로 하여 신체의 각 부위와 이들 각 부위 사이의 관계를 계산했다. 각각의 길이가 손바닥 몇개에 해당하는지, 신체 각 부위의 관계가 어떤 숫자로 환원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가 그렇게 해서 걸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95 "걸작품이란 머리카락 한 가닥의 차이까지 찾아낼 만큼의 수많은 계산의 결과"라고 말했다.

 

98 인간은 자연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특권은 자연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고, 이를 지배하기를 원하며 이를 변화시키려는 데에 있다. 그는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야만성을 길들여 신들이 이 지상에, 우리 자신 안에 임하도록 하는 것만이 인간이 이룩해야 할 최초이자 유일한 진보라고 암시한다. 페이디아스는 정의와 선의를 통해서 행복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평정심에 도달하고자 한다.

 

Chapter 3. 과학의 탄생: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116 얼핏 보아서는 아르킬로코스의시와 이오니아의 쿠로스, 그리고 탈렛와 그의 제자들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사상 사이에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 발명품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험난한 투쟁을 통해서 얻어낸 자유로운 지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산물이라는 점이단. 이때의 자유란 사고의 자유만이 아니라 행동의 자유까지도 아우른다.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그 같은 자유를 획득했으며, 매일 매일의 행동을 통해서 그 자유를 지켜나갔다.

 

117 탈레스는 단순한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전적으로 실용적인 목표를 세웠다. 동시대 시민들은 그를 현자라고 불렀다. 그는 일곱 현자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현자라니, 도대체 어떤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지혜를 가진 현자란 말인가? 그가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몇몇 촌철살인의 경구들 중에서 그의 천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무지는 무거운 짐"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118 이처럼 과학은 실용성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과학의 목적은 흔히 말하듯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 것이었다. 과학은 사물과의 접촉에서 비롯되었으며, 감각에 의존했다. 어쩌다가 감각적인 명백함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곧 그곳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이것이 과학 발전의 첫째 조건이었다. 과학은 논리와 이론의 정립을 요구하지만, 가장 엄격한 논리와 가장 대담한 이론이라도 궁극적으로 실제 활용이라는 시련을 거쳐야만 했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과학은 사변적인 과학의 태동에 필요한 토대인 것이다.

 

119 이들은 가령 매번 팔을 움직일 때마다 이 움직임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를 살폈다. 원인과 결과를 우연에 맡기지 않고 엄격하게 연결시켜 주는 체계를 정립한 결과 과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121 탈레스에게 물은 원초적인 물질로, 이 원초적인 물로부터 흙이 생겨났으므로, 흙이란 물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공기와 불도 수증기, 즉 물의 발산물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은 물에서 태어나며 물로 돌아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124 그리스인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이유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기하학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첫째는 항해(당시 그들은 이미 원시적인 형태의 카누 단계를 벗어난 배를 만들었고, 성능이 더 나은 선박을 제조하기 위해서 기하학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였고, 둘째는 신전 건축이었다.

 

134 나는 늘 하늘만 바라보며 사는 철학자가 지나가는 길에 무언가를 놓아두고 그를 비틀거리게 만들어, 이제 구름 속에 잇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자기 발치에 있는 것들에 대한 것으로 옮겨놓을 때가 되었다고 충고한 밀레토스의 아가씨를 고맙게 생각한다.

 

한편 라퐁텐은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녀석,

   네 발 밑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주제에,

   머리 위에 있는 것을 읽어보겠다고?"

 

  , 애처럽고, 그렇지만 위대한 탈레스! 어느 누가 감히 당신보다 더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었단 말이오?

  과학이란 참으로 인간에게는 어렵기 그지없는 정복의 대상이다. 상식에 도전해야 하며, 상식의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139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자신의 두뇌만을 이요해서, 누군가가 원자를 분해하고 물질을 파괴하기 훨씬 전에 물질은 파괴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될 경우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밀랍판과  뽀죠학 막대기, 그리고 자신의 두뇌만 가지고 , 과학이 실체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139~140 원자는 그 수가 무한하며 영원하다. 원자는 또한 빈자리에서 움직인다. 이 움직임은 원자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물질과 공존한다. 물질처럼 움직임도 원초적이다. 원자들은 각기 다른 형태, 크기에 따른 무게를 제외하고는 다른 부류의 고유한 성질은 지니고 있지 않다

 

140 이 원자들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말하자면 이들도 고저도, 중간도, 끝도 없는 세계에서 "아무 방향에서나 서로 충돌"한다. 데코크로토스의 이 같은 주장에서 그이 자발적인 직관의 정확성으로 뚜렷하게 간파할 수 있다. 그에게 자연은 "아무 방향으로나 마구 튀어 오르는 원자들"이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원자들 각각의 운동 경로는 그러므로 교차하게 되며, 그 결과 서로 스치고 흔들리며 높이 튀는가 하면 충돌하고 엉킨다. 결국 "무더기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141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다. 수많은 원자들이 구형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그 안에서는 가장 무거운 원자들이 구의 중심을 차지하고, 가장 가벼운 원자들은 가장자리 쪽으로 밀려난다. 가장 무거운 원자들은 대지를 이룬다. 이 대지 내부에서 가장 가벼운 원자들은 물을 이루고, 물은 대지의 표면에서 움푹 파인 곳에 깃들어 있다. 이보다 더 가벼운 원자들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형성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인 대지는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무한한 공간 안에 형성되어 있는 여러 세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히 많은 세계가 존재하며, 이들 세계 각각은 고유한 태양과 행성, 별들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 태양과 별, 행성들은 형성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사라져가는 단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설명에는 세계가 생성되고 보존되는 과정에 창조나 초자연적인 힘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로지 물질과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143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과 진흙 속에서 태어난 우연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연과 인간이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원칙에 의해 설명되며, 죽음 이후의 삶은 단호하게 부인되는 원자 체계 안에서 종교는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이 된다. 데모크리토스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 특히 죽음과 대면해서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146~147 "그렇지만(나는 여기서 솔로빈의 결론을 인용한다) 최근에 이루어진 분석에서 우리에게 비친 우주의 이미지는 데모크리스토스가 상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우주란 무한하며 영원히 움직임을 계속하는 우주 공간에 흩어져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데모크리토스라고 하는 위대한 사상가의 명철함과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물질에 존엄성을 부여한 것이다. 비록 그로 인해 데모크리토의 명성에 금이 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업적임엔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서 그는 신체와 영혼의 결합물인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킨 것이다, 우리가 그의 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는 분명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소명을 타고났는지를 확인해줄 것이다. 인간이 원초적 진흙에서 나왔다고 믿었던 만큼, 그는 우리를 열광적으로 흥분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진화의 한 지점에 도달했으며, 앞으로의 진화를 만들어갈 장본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Chapter 4.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운명에 화답하기

 

153  "관객들은 보시오. 끝까지 꽉 조인 태엽, 그러니까 한 인간의 계산된 파멸

      을 위해 지옥 같은 신들이 완벽하게 구축한 장치가 한 인간의 일생을 따라

      천천히 풀려가는 과정을 지켜보시란 말이오."

 

155 자신들의 삶이라는 이 탱크를 그곳까지 몰아온 게 바로 자신들이건만 이들은 알 까닭이 없다. 탱크는 이제 막 이들을 덮쳐 짓밟을 기세다.,

 

160 이오카스테의 말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자신의 결백을 확신했다. 그런데 지옥 같은 기계에는 확신을 의심으로, 안심을 불안으로 바꾸어놓는 자그마한 용수철 하나가 있었고, 이오카스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이 용수철을 건드렸다.  무심코 흘러나온 단어 하나가 그것이었다. 왕비는 라이오스 왕이 '삼거리에서'살해당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세부 사항이 오이디푸스의 잠재의식을 파고들어, 그때까지 잊고 있던 기억들을 뒤흔들어놓았다. 오이디푸스는 문득 오래전 여행지에서 지나갔던 삼거리를 떠올렸다. 어떤 마부와 벌인 싸움도 기억해냈다.

 

167 비극적인 울음을 운다는 것은 숙고하는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머리로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극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시적인 작품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고 그 의미를 지적인 언어로 재구성하려 드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를 감동시키는 모든 작품은 우리가 꽉 막힌 정신의 소유자가 아닌 한 우리의 지성에도 큰 울림을 주며 우리의 존재 전체를 휘어잡는 것이 사실이다.

 

169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단 말인가? 잘못을 한 건 신이다. 신만이 어떤 합당한 이유도 없이 그 모든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도록 획책했으며 그 결과 범죄라는 파국을 맞게 되었다. 신은 인간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함으로써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것 같은 경우에만 개입하기 때문에 한층 더 반발심을 일으킨다.

 

173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는 인간을 공연히 핍박한다ㅏ고 신들에게 맹비난을 퍼부으려고 하는데, 정작 죄인으로 지목된 당사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 극중 행위가 모두 폭발하여 결국 오이디푸스의 얼굴까지 덮치는 이 엄청난 장면, 주인공과 더불어 그의 운명이 고통의 바다처럼 펼쳐지는 광대한 이 장면은 이 비극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오이디푸스는 이제야 그에게 몰아친 타격이 어디에서 오는지 깨닫는다. 그는 외친다. "아폴론, 그래, 아폴론 신이야. 동지들이여, 내 모든 불행은 오로지 아폴론으로부터 왔네!"

  그는 자신이 "신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하지만 그는 신들 대해서 그 어떤 증오심도 품지 않는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어쩌면 신들을 박탈당했다는 것이 아닐까. 그는 신들과 분리되었다고 느낀다.

 

174~175 시인은 오이디푸스를 완벽한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는 지혜, 판단력, 어떠한 경우에도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통찰력을 구비하고 있다. 그는 또한 결정력, 에너지, 행동에 생각을 불어넣는 능력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이건 그리스어의 번역이다)'가 가능한 사람이다. 그리스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고스와 에르곤, 즉 사고와 행동의 주인이다. 요컨대 그는 생각하고 설명하며 행동하는 사람이다.

 

175 그가 운명에게 보이는 유일한 허점이 있다면 단지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조건을 지배하는 우주의 법칙에 복종한다는 사실뿐이다.

 

176 우리는 모든 행위에 노출되어 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인간 오이디푸스는 당연히 더 많은 행위와 대면해야 한다.

177 앞에서 나는 그 깨달음이 가혹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우리의 경험과 너무도 잘 부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진실 앞에서 오히려 눈이 부시다. 진실이 주는 기쁨은 우리를 분노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문득 모든 인간의 운명의 전범으로 다가온다.

 

179 극의 결말에서 자신의 두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는 신만이 유일한 예언자임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빛 있는 그대로의 우주를 볼 수 있도록 비춰주는 빛을 얻게 되었으며, 예상을 뒤엎고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얻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두 눈을 찌르는 행위는 그 엄청난 결과로 인해 우리를 극의 가장 심오한 의미, 의미의 정점으로 이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무대에서 드러나는 순간 어째서 관객들은 공포로 경악하는 대신 희열로 전율하게 되는가?

 

179 운명이 그에게 마련해놓은 벌을 그는 스스로 요구했고,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그가 한 최초의 몸짓이었다. 신들도 자유로운 인간인 그를 어찌할 수 없을 터였다. 오이디푸스는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의지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격려하게 합류했다. 그의 에너지는 이 특별하고 끔찍한 행위, 그를 향한 세계의 적대감만큼이나 치열한 그 행위에 깃들어 있다.

 

180 오이디푸스는 장님으로 사는 편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깨달음, 즉 불행을 통해 신의 행위에서 얻은 깨달음에 부합시킨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신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의 뜻에 보내는 이 같은 지지, 성찰을 통한 용기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이 지지는 어느 정도의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이중적인 움직임인 사랑. 여기서 사랑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현실과 그 현실이 부과하는 조건을 존중한다는 것이며, 둘째, 살아 있는 피조물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삶을 향한 도약을 뜻한다.

 

184 창조이기도 한 사랑 안에서 보내는 지지. 이와 동시에 얻는 해방감. 오이디푸스는 문득 파멸을 딛고 우뚝 일어선다. 그리고 외친다.

  "나의 잘못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인간들 중에서 그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자는 없다. 나를 빼고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불행에 협력하여, 스스로 그 불행을 정점으로 몰아간 순간, 그가 숙고 끝에 결정한 행위를 통해서 신들이 그를 향해 빚어낸 불행의 절대적인 이미지를 완성하는 순간,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추었고, 그는 그 바퀴를 넘어섰다. 오이디푸스는 장벽의 다른 쪽으로 건너갔다. 신의 존재를 깨닫고, 신은 엄정하게 정의할 수는 없으나 확실한 존재임을 인정한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신을 경험한 순간부터, 그는 신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는 신에게서 심판하는 자로서의 기능을 제거했으며, 자신이 그를 대신함으로써 신을 축출했다.

 

185~186 우리가 짊어지고 태어난 고난의 거대함으로 대신할 수 있을 이 위대함은 자신을 파멸시키고자 그 악을 만들어낸 자에게 원망이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그 악을 보상하기로 결심한 자의 위대함이다. 신들이 밝은 태양빛 아래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 위대함을 오이디푸스는 평화 속에서, 깜깜한 밤이 주는 평화가 아닌 영혼의 별밤이 주는 평화 속에서 복원시켰다. 이 위대함은 신들의 선물, 은총, 배려 등으로부터 순수하게 정화되었으며, 신들의 저주, 신들의 공격, 신들이 주는 상처를 자양분으로 삼으며, 명철함과 결단력, 자아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운명에 대답했다. 인간을 복속시키려던 운명의 시도에 인간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202 소포클레스는 우리에게 이 우주의 중심에는 신들의 가혹한 무관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그러움도 함께 자리하고 있음을, 그리고 인간(그러니까 동일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이 두 가지를 모두 만날 수도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203 삶의 의미는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이 의미는 영국 해군의 하얀 돛에 그어진 붉은 선, 사고가 나면 선체의 위치를 알려주는 그 붉은 선처럼 작품을 꿰뚫고 있다. 이렇듯 죽음을 다른 작품 전체에 삶의 소중함이라는 가치가 향수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 의미는 마지막 장면, 신들이 오이디푸스의 육신에 주는 보잘것없는 선물에 의해 정점에 도달한다.

 

Chapter 5. 핀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216 시인은 이 세 미녀의 이름을 부른다. “, 그대. 아글라이아(영예를 관장한다). 그리고 그대, 조화에 이끌리는 에우프로쉬네(지혜를 의미한다. 핀다로스는 모든 지혜가 시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그리고 그대, 사랑의 노래를 전파하는 탈리아(아름다움과 젊은, 환희를 주관한다)…. 탈리아여, 승리의 환희 속에서 발걸음도 가볍게 행진하는 무리를 보라…. 나는 아소피코스를 찬미하려고 왔다. 그대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올림피아드에서 승리를 거두었노라….” 승리를 거둔 젊은 운동선수 아소피코스는 고아였다.

 

228 가까운 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코로니스의 몸이 장작더미 위에  올려지고, 헤파이스토스의 활활 타오른 불꽃이 코리니스를 감싸자, 신은 갑자기 코로니스가 품고 있던 씨앗을 기억해낸다. “안돼, 나의 영혼은 나의 피로 생겨난 아들이 이처럼 애통하게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 없어.” 아폴론이 한 걸음을 떼어놓자 그의 앞에서 불길이 열렸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아이를 떼어냈다. 아폴론 신은 아이를 케이론에게 맡겼고, 케이론은 그 아이를 의사로 키운다. 이상이 아스클레피오스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다.

 

233 만일 네가 죽음에 직면한 형제를 구하는 쪽을 원한다면, 상반되는 너희 둘의 운명을 하나로 만들어라. 네 삶의 반은 지하에서 그와 더불어 살 것이며, 너와 더불어 그의 삶의 반은 하늘의 황금 궁전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폴뤼데우케스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생각을 거듭했다. 카스토르의 감긴 눈을 다시 뜨게 할 것이며, 그의 활기찬 목소리를 다시 들을 것이다.

 

248 영웅적인 삶, 고귀한 삶, 이것이 군주들에게 제시된 본보기였다.

그대가는 가장 확실한 불멸성이 보장되는 명예와 영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이 시인이었다. 핀다로스는 외친다. “덕성이 시인의 노래에 의해 지속성 속에 자리 잡는다.”

  또 이런말도 한다. “아름다운 시가 지닌 음성은 영원히 울린다. 그 음성 덕분에 비옥한 대지의 공간과 바다를 가로질러 아름다운 행위의 영광이 꺼지지 않고 찬란하게 빛난다.”

  이 감탄스러운 행은 어떠한가? “시인의 노래가 없다면, 모든 덕성은 침묵 속에서 죽음 맞는다.”

  어째서 이 같은 열정과 확신이 가능할까? 그것은 시인의 봉사와 군주의 봉사가 모두 신을 위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Chapter 6.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253 마침 그는 자신의 저술에 히스토리아이’, 즉 당시로는 조사라는 의미만을 지녔던 단어로 제목을 붙였다. 헤로도토스 이전에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책이기도 하고 지리책이기도 한 자신의 저술에 조사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헤로도토스는 과학적인 조사의 토대 위에 이 두 학문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렇기는 해도 헤로도토스는 기질상 지리학적이나 민속학적인 연구에 먼저 이끌렸으며, 역사적 사실 연구는 그보다 뒷전이었다. 이 같은 특징은 그의 저술에서 시종일관 감지된다.

 

255 요컨대 그는 진기한 이갸기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기에 진기함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을 차마 단호하게 내치지 못했다. 이야기가 진기하면 진기할수록 그는 이끌렸고, 도저히 사실 같지 않다고 판단했더라도 서둘러서 그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했다.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 조사자로서의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이라고 믿었을지라도 모른다.

 

256 요컨대 그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며,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이지만 전적으로 진실한 사람이었다.

 

265 가령, 교육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문장을 남겼다. 이 문장은 내용의 정확서으로도 감탄을 자아낸다. “페르시아인들은 자식이 다섯 살이 되면 교육을 시작하며, 이 교육은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이들이 가르치는 것은 말타기, 활쏘기, 진실을 말하기, 이렇게 고작 세 가지뿐이다.” 아닌게 아니라 페르시아인들의 종교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진실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뒷세우스의 나무랄 데 없는 거짓말에 찬사를 보내는 그리스인에게 이보다 더 놀라운 가르침은 없을 것이다.

 

278 대륙의 남쪽 끝에 위치한 지역들은, 헤로도토스가 보기에 가장 소중한 자연 자원의 보고였다. 가령 인도는 황금의 땅이고, 아라비아는 온갖 향료의 땅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주민들의 풍습보다는 동양에서 그리스로 전달된 풍성한 부가 어떻게 수확되는지에 한층 흥미를 보였다.

 

282 클뤼타임네스트라, 아이스퀼로스가 살무사라고 부른 그 여자는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어머니를 살해함으로써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한다. 헤로도토스는 <오레스테이아>를 읽었거나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마치 <오레스테이아>살무사 버전을 쓴 것 같다.

 

291~292 , 얼마나 헤로도토스의 시중함과 정직함을 잘 드러내는 대목인가! 그는 포이닉스를 그림으로만보았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전설적인 새를 묘사하면서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실수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Chapter 7. 인본주의 의학의 꽃, 힙포크라테스

 

298 호메로스는 그 작품에서 무려 141종의 상처를 취급하며 상당히 정확하게 이를 묘사한다. 그의 시에 따르면, 의사라는 직업은 자유시민들의 몫이었으며,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의사 한 명은 여러 사람의 목숨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304 틈틈이 각 식품으로 야기될 수 있는 복부에 가스가 찰 위험, 배변 및 이뇨 효과, 영양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서론 부분의 뜬구름 잡기식 이론(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구름>이라는 작품에서 이런 종류의 의사들을 한껏 조롱했다) 뒤로는 반복적인 구토의 효험, 부패성 대변의 위험성, 산책의 활용 등에 대한 무수히 많은 지침들이 이어진다. 저자는  보통사람들, 즉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느라 건강을 살피기 위해 일을 손에서 놓을 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이 같은 식이요법을 정립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308 이처럼 의사들의 묘사는 상당히 표현이 풍부하다. 일부 특징들은 주목을 끈다. 가령 환자는 숨을 쉬기 위해서 질주하는 말처럼 콧구멍을 열고, 여름날 찌는 듯한 더운 공기 때문에 기진한 개들처럼 혀를 길게 내민다.” 이런 이미지들은 매우 정확하면서 충격적이다.

 

313~314 필리스티온은 이보다 훨씬 미묘한 관찰도 여럿 남겼다. 가령, 근육조직의 차이를 통해서 정맥과 동맥을 구분해내기도 했다. 그는 심장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뾰족한 끄트머리는 오직 좌심실만으로 되어 있고, 이 좌심실의 조직은 우심실의 조직보다 훨씬 두껍고 질기다는 것도 밝혀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관찰의 결정판은 바로 판막의 발견이다.

 

314 학문이란 진실과 서서히, 아주 서서히 축적되어간다. 학문의 축적은 아주 오랜 세기가 지나도록 바벨탑 이야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학자들이 저지른 실수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적절한 통찰력 만큼이나 도움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수란 언제나 수정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317 그는 의사의 조상이라면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실증적이면서 소박한 임무에 전념하는 사람, 그의 표현대로라면 요리사여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319 요컨대 인간들은 거칠고 센 식품들을 부드럽게 만들었으며, 이것들로 반죽을 하고 끓이고 굽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이 타고난 체질에 동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식품을 가공하는 데 성공했고, 그 덕분에 영양분을 섭취하고 성장하며 건강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그런데 이 같은 탐구와 발견 과정을 뭉뚱그려서 말하는 데 의학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319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어디에선가 의학을 다른 예술과 비교하면서 코스의 거장 힙포크라테스를 아르고스의 폴뤼클레이토스나 아테나이의 페이디아스처럼 당시 최고의 조각가들과 동급으로 다루었다.

 

320 이렇듯 제멋대로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각들은 환자를 검진하는 방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단순한 관찰의 테두리를 뛰어넘으며 거장의 머릿속에서 결정적인 단어가 튀어나오게 된다. “환자의 몸을 살피는 일은 거창한 작업이다.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언어, 추리력 등을 모두 응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단어, 즉 추리력이라고 하는 말이야말로 우리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322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험은 유동적이며 판단은 어렵다.” 의사로서 쌓아 올린 경력 전부, 다시 말해서 실패와 위험, 그리고 마침내 임상을 토대로 하는 학문, 어려움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진단을 내림으로써 질병을 정복하게 되는 그 경력이 모두 이 한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여기서 경험은 유동적인토양에 어렵사리 뿌리를 내린 추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323 힙포크라테스가 정의하는 의학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정신 신체 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생태계 및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인간(육체와 영혼)을 다루는 의학을 가리킨다.

 

323 탐구의 방대함에 눈의 신속함이 더해져야 한다. 질병의 진행을 좋은 쪽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기때문이다. 저 유명한 힙포크라테스적 안색(사망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안색)’의 묘사는 거장의 예리한 눈썰미를 입증한다.

 

324 두 눈이 빛을 피한다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흥건히 고일 때, 눈동자가 중심축에서 바깥쪽으로 빠졌거나, 한쪽 눈이 다른 눈보다 작아졌을 때, 몹시 흔들리거나 앞으로 툭 튀어나왔을 때 또는 유난히 안으로 쑥 들어갔을 때, 동공에 물기가 없거나 흐릿할 때, 이 모든 신호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또한 양 입술이 벌어지거나 아래로 축 처지고, 차갑거나 완전히 핏기가 가셨을 때에도 곧 사망하리라는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 <경과 예측>의 저자는 말한다.

 

324 의사는 아무리 바빠도 부정확하고 감각에 의거한 판단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325 그는 병을 고쳐주는 치료사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건강이라고 하는 가장 소중한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자 노력했다. 힙포크라테스는 병을 고치는 의사이기보다 건강을 지켜주는 의사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325 그는 의사가 각 개인의 생활양식을 알아야 치료는 물론 환자에게 올바른 위생 생활습관을 알려주는 데에도 유용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326 힙포크라테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습 연구를 발전시켰으며, 토양과 하늘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특성을 결정짓는 데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요컨대 그는 한때 민족정신세계라고 부르던 분야를 개척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327 학문의 폐쇄성에 익숙한 우리 현대인들의 정신은 힙포크라테스가 수집한 사실들의 무진장한 다양성과 방대함에 놀라고, 그것들이 인간의 건강이라고 하는 오직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327 <힙ㅍ크라테스 전집> 중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힙포크라테스 논문이(이 논문들은 얼핏 보기에는 관찰 결과를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해 보인다.)에 서는 강한 의지가 돋보이는데, 바로 수집된 사실들을 이해하고, 거기에 인간에게 유용한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의지다.

 

327~328 그는 여러 증세를 꼼꼼하게 기록한다. 특히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신호를 즉시, 다시 말해서 진료 첫날부터 하나의 총체로 간주하고 여기에 주의(마음과 지성)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인다.

 

328 <머리의 상처>편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속수무책일 경우라도 최소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뼈가 부러지고 타박상을 입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타박상만 입었는지, 그리고 상처가 사선 방향으로 나면서 타박상 또는 골절을 동반했는지, 아니면 타박상과 골절이 동시에 이루어졌는지 등을 판단하기 위해 지성을 동원해야 한다.” 의사의 정신은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관찰 내용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328~329 힙포크라테스는 대부분의 경우 성찰이라는 말을 정신의 항구적인 태도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이를 지속을 의미하는 시제와 함께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철한다  항상 마음에 품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힙포크라테스는 그의 내부에서 관찰하게 된 사례를, 즉 눈을 통해서, 청진을 통해서 촉진을 통해서 의미를 지니게 된 자료들로부터 얻을 수 있 사고를 마음에 품고 있었고, 이를 자양분 삼아 사고를 키워나갔다. 힙포크라테스는 어려운 문제와 정면대결을 가능하게 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수단인 인내심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330 “정확한 진단은 진단을 내린 사람 스스로를 놀라게 한다. 적절한 치료는 동료들을 동료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데 환자를 놀라게 하는 것은 정확한 예측이다.”몰론 유머 섞인 평가다.

 

330 병석에 누워있는 환자는 말하자면 풀기 어려운 매듭이다. 과거가 되었건 현재가 되었건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그는 그런 처지가 되었다.

 

330~331 예측(예측이 긍정적이지 않을 경우 환자에게는 비밀에 부치는 경우도 많다)이란 의사의 사고 작용을 통해서, 관찰 결과 드러난 복잡하게 뒤엉킨 신호들을 질서정연하게 바로잡는 것이다.

 

331 힙포크라테스가 쓴 논문에서 다양한 형태로 곧잘 등장하는 근사한 표현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징후들을 살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지적 성실함이 가득 담겨 있으며 희망이 담겨 있기도 하다. 생명이란 너무도 복잡한 현상이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비록 그것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단이더라도) 생명을 구하려고, 시도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성공하기도 한다.

 

332 “의사들에게는 그러한 종류의 문제들을 드러내놓고 토론하는 습관이 없다. 설사 토론을 한다고 해도 틀림없이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대중을 사이에 의학계 전체에 대한 불신이 다시금 부상하게 된다. 불신이 도를 넘게 되면 의학은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급성 질환의 경우, 임상의사들은 저마다 의견이 달라서 이 의사가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고 처방한 것이 다른 의사에게는 나쁜 처방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식이라면, 의학은 똑 같은 새를 놓고도 그 새가 왼쪽으로 날아가면 길조요, 오른쪽으로 날아가면 흉조라고 하는 점술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점쟁이들도 똑같은 현상을 놓고 정반대의 점괘를 내놓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방금 제기한 문제는 지극히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의술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하고 싶다. 이 문제는 모든 환자들의 회복을 위해서, 건강한 모든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의 체력 증진을 위해서 크게 공헌 할 수 있는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문제는 모든 이들과 관련이 있다.”

깊은 양식이 느껴지는 이 대목은 몰리에르의 작품들을 상기시킨다. 전체적으로 빈정거림이 느껴지는 가운데 저자의 분노, “지극히 아름다운문제를 제기하는 의학에 대한 열광 등이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333 힙포크라테스는 자신이 정립해가고 있는 학문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 한계는 인간의

본성과 동시에 우주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소우주로서의 인간과 대우주로서의 세계는 각각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같은 사고방식에는 자연적인 세계에 부여되는 신화적인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로지 철저한 사실주의만 있을 뿐이다. 힙포크라테스는 질병과 사망에 관한 의학을 정복 하는 데에는 높다란 벽이 가로막고 있음을 인정했다.

 

333 힙포크라테스이 목표는 자연의 치유 행위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얼핏 보기엔 매우 소박하다. <전염병 V>에는 자연은 질병을 고쳐주는 의사라는 대목도 나온다. “자연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에 길을 열어준다. 자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혀는 혼자 알아서 모든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것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고,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은 자연이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알아서 이행한다.” 이런 대목도 있다. “자연은 스승 없이 행동한다.” 인간의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임우인 의사는 말하자면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신체 속에서 그를 도와주는 자기편을 만난다. 환자에 대한 일상적인 치료는 그러므로 의사역할을 하는 자연의 행위에 적당한 길, 개별적인 각각의 사례에 적합한 길을 열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신체는 고유의 적극적인 활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체는 이 다양한 활력소들을 활용해서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의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의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하려고 하는 인체의 행위에 대해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는 절대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 도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334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사실의 관찰을 통해서 얻게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에 따르면, 각 신체기관은 자신들의 사멸에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생물학적 힘의 보고다. 인간 개개인의 활력을 주고 생명을 유지시키는 이 힘의 균형을 아는 의사는 환자를 도와줄 수 잇다. 깨달음이 곧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 문명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고전적인 주제다.  

 

335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유동적인 경험의 현장에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의사는 겸손하지만 매우 효율적인 생명 제조자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무가 아닌 현실에서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의사도 그가 환자의 몸에서 발견한 것, 즉 관찰되고 활용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부터 건강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346 지식에 대한 놀라운 식욕, 이성적인 추론에 의해서 생생한 활력을 얻는 연구의 엄정성,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을 향한 헌신,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베푼 우정으로 말미암아 힙포크라테스 의학은 당당히 기원전 5세기 무렵의 인본주의가 표방하던 가장 높은 고지를 차지한다. 아니, 적어도 신분고하를 따지지 않는 그의 인간에 대한 보편적 우애 정신만큼은 그 고지마저도 훌쩍 뛰어넘는다.

모든 인간들에게 몸의 구원을 제공하기 위해 어렵게 전진해나간 힙포크라테스 의학은 무지의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약속이었다.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의학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한 베이컨의 말을 잊지 말자.

 

Chapter 8.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351 순웃음은 우리 안에서 나무와 꽃의 아름다움, 농장과 숲 속에서 노니는 짐승들의 그늘진 우아함을 일깨워주며, 새들의 끈임없이 재잘거림에 귀 기울이게 해준다. 순웃음은 우리의 자연스러운몸짓, 사랑의 몸짓과 더불어 만개하는 생리적인 웃음, 기쁨으로 충만한 서정적인 웃음이다.

 

352 이 세계의 아름다움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으로 사는 기쁨,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기쁨을 표현한다. “인간은 살아 있는 생명체중에서 웃을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라블레는 그의 작품 <가르강튀아>의 서두에서 이를 아주 근사하게 재해석했다. “웃음은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이라고 말이다.

 

352 풍자적인 웃음과 서정적인 웃음, 이렇게 두 부류의 웃음은 분리하기도 어렵지만 공통된 기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치유의 기능이다. 아르스토파네느는 자칭 아테나이 사회의 선생님’, 아테나이 민중을 가르치는 교육자였다. 웃음은 그가 제공하는 치료법의 한 부분이다. 되찾은 기쁨 속에서 인간은 충만함을 만끽하고, 사회는 균형을 찾는다.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 즉 정화 작용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에게 상식을 돌려주는 웃음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모두 환자들인데, 웃음이 우리에게 건강을 되돌려준다.

 

366 들판이나 정원에 핀 꽃들을 알았으며, 하늘을 나는 새들의 이름과 노랫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관목 숲에 사는 요정의 음성을 들었다. 가래와 괭이를 다룰 때면, 금속의 연장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며 가슴 깊이 농부들이 느끼는 기쁨을 맛보았다.

 

370 아리스토파네스를 굉장한 인물 창조자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희극적인 행위의 창조자다. 그의 희극 작품들 중에서 괴상한 상황에서 출발하지 않는 작품은 아주 드물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작품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거나, 사회적 또는 도덕적 균형의 법칙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출발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곧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각종 불화로 좀먹어가는 인간의 삶, 도시의 삶에 질서와 상식을 되찾아주게 된다.

 

371 아리스토파네스는 언젠가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살게 되기를, 잔칫날처럼 가족들이 손에 손을 잡고 한가로운 시골에서 산책을 즐기게 되기를 소망했다.

 

375 <뤼시스트라테>에는 풍기 문란을 부추기는 점이라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모든 인간에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 곧 평화를 사랑하며, 아니 그보다 더 원초적으로 삶에 대한 사랑과 한바탕 웃음이 들어 있는 작품이다. 삶에 대한 사랑이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육체적인 사랑과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을 통해서만 영속될 수 있지 않은가.

 

380 아르스토파네스는 구제 불능의 현실주의자다. 그는 현재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한층 더 치열하게 파고들어 그리스 민족이 미래의 현실이라고 부르는 먼 앞날의 현실까지도 알려주려 애를 쓴다. 이 미래의 현실을 그는 상상력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발견한다. 그가 상상해낸 연극적 행위들은 그의 희극을 일종의 시간여행기로 만든다. 그리고 이 점은 평화를 주제로 쓴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통용된다.

 

395 그리스인들은 신화나 고고학 발굴 작업에서 드러나듯이 소리개와 비둘기, 뻐꾸기와 백조, 제비와 꾀꼬리를 사랑했다. 신화는 변신의 의미를 전복시킨다. 백조가 시간이 지나면서 제우스로 변하는 식으로, 역방향의 변신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대중의 의식, 농부의 기억은 새들을 숭배하는 종교에 대한 막연하고 어렴풋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395 아리스토파네스는 꿈을 꾸고, 신명나는 놀이를 벌인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꿈과 놀이를 벌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과 놀이는 깊이 숨겨진 우리의 본성, 우리의 과거, 우리의 조상, 우리민족에게서 애써서 퍼올려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꿈과 놀이는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무 사이에서 놀기만 한다고 해서, 새와 나무를 사랑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새들에 대한 숭배를 떠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라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진지했다.  

 

Chapter 9. 지는 해

 

401 이제까지 그리스 문명 황금기의 몇몇 작품을 소개했다. 이 황금기는 더도 아니고 고작 50년 정도 지속되었으며, 주로 기원전 5세기 후반부를 가리킨다.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50년이라고 하면, 어느 여름날 하루 정도나 될까……”정오의 열기 속에서, 태양 때문에 정신이 나간 매미는 소리를 지른다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노래했다. 그리스 문명의 정오에는 천재적인 작품을 내놓느라 산고를 겪는 인간 종족의 오장육부에서 끌어낸 기쁨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412 페리클레스는 아닌 게 아니라 아테나이 내부에 국가가 먹여살려주고 즐겁게 해주기를 기다리는 백수 시민들을 대량으로 탄생시킨 장본이었다. 국가는 이들에게 봉급을 주고, 공연장에 갈 돈을 대주었으며, 그 대신 펠로폰네소스나 트라케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414 그에게 아첨은 민중을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난 민중을 알죠. 그자들을 어떻게 낚아야 하는지 안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내 사유물이나 다름없죠라고 그는 말한다.

 

415 그는 판관들이 제대로 숙성했는지 혹은 익어가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무화가 눌러보듯이 꾹꾹 찔러본다. 그는 말하자면 심연 같다. 남의 것 빼앗아가는 데에 있어서 는 단연 카륍디스(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딸로 엄청난 대식가, 하루에 세 번 바닷물을 마실 때마다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옮긴이). 또한 개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접시를 핥아 먹듯이 섬들을 집어삼킨다. “그뿐 아니다. 그는 지고의 주권자 민중, 즉 데모스에게는 보잘것없는 부스러기만 건네주면서 장작 자신은 커다란 조각을 혼자서 착복한다.시대가 변했어도 우리의 은유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422 도시 간의 전쟁, 파당으로 인한 전쟁, 민주주의의 붕괴 등으로 말미암아 노예제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예제도는 고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한편 고대 사회를 붕괴시키는 지반 무른 토지이기도 하다. 노예들은 기원전 4세기 초반 무렵 사회의 진정한 생산 계급이 되었으며, 적어도 아테나이에서는 생산에 종사하는 유일한 계급이었다.

이 무렵 노예의 값은 무척 쌌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시장에 나온 인간 재화가 넘쳤기 때문이다. 노예 한 명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도 지극히 미미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불쌍한 자유인보다 유지비가 훨씬 덜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영업이나 농촌의 노예노동이 점점 더 번성하게 되었다.

 

425~426 노예제도는 그러므로 물질적인 재화에 국한된 생산의 원천이고, 그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가장 활성화된 수단이었으나, 이와 동시에 점점 더 무거워지는 부담이요, 끔찍할 정도로 거추장스러운 짐이었다. 이 짐으로부터 고대 사회를 구원해줄 수단을 기대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었다.

 

Chapter 10. 소크라테스라는 수수께기

 

445 그는 신동은 아니었다. 마흔 살이 되어서야, 그나마도 신이 그에게 신호를 보냈기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게 되었다. 그는 끈끈이대나물 껍질 같은 피부 속에 들어 있는 괴상망측한 정신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는 이 여혼,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이방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 그리스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지혜가 담긴 그 글귀를 읽었다. 이리저리 한눈파는 순례자의 눈으로 한번 쓱 읽은 게 아니었다.

 

446 시인들은 그에게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 죽 신들과 인간들에 대해서 말해주는 존재였다. 어린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혼자 떠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그리고 핀다로스에게도 당신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447 소크라테스는 머지않아 살기 위해 그가 풀어야 하는 유일한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시인들처럼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우주를 탐색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448 잠정적으로 과학을 도외시하며 인간에 대한 인식만을 추구하는 철학을 택하다니, 이 얼마나 치명적인 선택인가! 소크라테스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 정신, 아니 당시 표현대로라면 인간 영혼의 정복만큼 그가 집착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고려할 때, 명확한 규범에 따라 정신적인 학문을 정립시키기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성큼성큼 여러 세기를 건너뛰기를 즐겼다……

 

450 그가 마음에 둔 자재는 바로 인간의 영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영혼을 생산해내는 기술을 창조하고 싶어했다.

 

450 점진적인 학습 끝에 소크라테스는 마침내 그가 찾던 것이 무엇인지,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는 인간으로부터 인간 안에 깃들어 있으며 인간과 관계있는 진실을 이끌어낼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에 관한 학문을 찾고 있었다. 그는 결단력 있게 자신의직업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산파였던 어머니의 직업을 물려받는다. 이간의 영혼이 잉태하고 있는 진실의 열매로부터 영혼을 꺼내주는 산파가 될 것이었다.

그는 영혼의 산파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452 참으로 희한한 직업이며, 참으로 희한한 현자였다. 30년 동안 줄곧 그는 질문하고, 반박하며, “바람을 뺐다”. 30년 동안 줄곧 그는 모두를 비웃었으며, 그 자신도 비웃음을 당했다.

 

457 소크라테스는 또한 우리는 이제까지 기도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십시오. 하는 식의 구복적인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신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465 시민 법정에 끌려나온 자는 분명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였다. 시민 판관들의 머릿속에 아스토파네스의 작품이 너무도 뚜렷이 각인되어 있던 터라, 그들은 재판정에 서 있는 소크라테스가 극중 인물과는 다른 소크라테스임을 깨닫지 못했다. 결국 아테나이인들은 시인의 천재적인 작품 덕에 그들을 사로잡게 된 소크라테스의 유령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468 모방이나 강요에 의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식의 유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 민족을 합리적인 이성에 따라 행동하며, 법이나 권력(또는 신을 향한 맹목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덕성에 따라 행동하는 성인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홰냐하면 행복이란 덕성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74 어찌 되었든 그의 가르침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오늘날까지 여전히 살게 되었다.

 

479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로부터 정의로운 행위를 이끌어 내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목숨을 몇 년 더 연장해주는 차원을 떠나 사회의 병폐 중에서도 최악의 병폐인 불의로부터 시민들과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다. 피고 소크라테스가 주도한 논쟁의 최종목표는 아테나이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면, 그 결정은 내가 아닌 당신들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 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들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480 소크라테스는 그 말들을 잠재웠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힘주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신이 당신들에게 내려준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사형에 처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할 겁니다.” 그는 계속 판관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말을 쏟아냈다.

이 얼마나 얄미운 시건방이란 말인가! 판관들은 고함을 질러 이 오만방자한 연설을 뚝뚝 끊었다.

481 두 번째 변론에서 드러나는 소크라테스는 한층 더 가혹하며, 그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아테나이인들에게 던지는 호소는 한층 더 준엄하고,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임무, 남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그 임무에 대한 증언은 자부심으로 한층 더 격앙된다. 법정이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으며, 죽음만이 그가 가장 사랑했던 자들의 가슴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을 그는 외친다. “나에게 보상을 달라. 그게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483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진실은 한층 더 강력하게 공격해올 겁니다. 진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의 소리는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483  이들은 계속해서 살 것이나 소크라테스 자신은 죽음으로써 그들 곁을 떠나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운명이 나은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신만이 아시겠지요.”

신의 전지하심만이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었다. 신이라고 하는 이 신성한 단어가 아테나이의 신들을 우습게 여겼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자가 아테나이인들 앞에서 한 마지막 말이었다.

 

488 혹시 누가 아는가? 삶으로부터 치유되어야 마침내 무지로부터도 치유될 수 있는 건 아니지

489 육신의 해체가 그의 삶의 종착역이 아니며, 그가 제자들의 영혼 속에서 지소가게 될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우리가 이해했다면 말이다. 이 충성스러운 영혼들은 그 후 그를 기리는 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곳, 끊임없이(‘소크라테스식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비록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앞세운 이성을 타파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말이다) 지식 탐구라는 모험을 시작하는 장소가 되었다.

 

■ 내가 저자라면

 

<그리스인 이야기> 1권에서는 그리스 문명의 태동기를 조명하였으며, 이어서 2권과 3권은 그 문명이 만개하다가 쇠락기에 접어드는 과정을 다루고 그렇게 된 원인을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1권에 나오는 대표적인 그리스인은 먼저 <일리아스> <오뒷세우스>를 쓴 호메로스다. 다음으로 그리스 서정시의 대표인 아르킬로코스와 삽포에 대해서 소개하고, 그리스 민주주의 창시자인 솔론과 그 시대의 그리스 비극을 노래한 아이스퀼로스, 마지막으로 아테나 민주주의를 완성한 페리클레스를 이야기하고 있다.

2권에서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을 시작으로 그리스 과학을 탄생시킨 탈레스와 데모크리토스를 이야기하고, 다시 '그리스 비극'으로 돌아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을 말한다. 그리고 승리자를 찬미하는 테바이의 시인 '핀다로스'<역사>의 헤로도토스, 인본주의 의학의 꽃 피운 힙포크라테스, 희극적인 행위의 창조자인인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마지막으로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저자가 그리스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소중한 유산들을 사건이 발생한 시간을 중심(연대순)으로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비슷한 내용들이 서로 떨어진 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와 있다. 그리스가 멸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1권과 2권으로 멀리 떨어져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경우, 독자들이 몰입해서 접근하기가 힘든 구조다. 1권에서 '호메로스'의 두 작품인 <일리아스> <오뒷세우스>처럼 나란히 이어져 있다면, 이전에 읽었던 감동을 집중해서 몰입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이 책의 구성을 잡아본다면,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에 관한 chapter를 연결해서 배치해 놓으면 어떨까? 그리고 그리스 문명이 쇠퇴하게 된 원인에 대해 서술해 놓은 '노예와 인간', '지는 해'에서 말하는 문명의 그림자를 함께 구성해 놓으면 책의 흐름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chapter 위에 큰 제목을 놓고 그 안에 소 제목으로 하여 구성을 잡아본다면, 다양한 독자의 관심을 부분별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몰입을 통해서 깊고 넓게 내용을 음미할 수 있다.

 

1. 그리스 문명의 탄생

2. 서양정신의 기원, 그리스 고전

   1)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2) 오뒷세우스와 바다

   3) 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4) 열 번째 뮤즈, 삽포

   5) 핀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6)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3. 그리스 비극의 대표

   1) 아이스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2) 안티고네의 약속

   3)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시민 페리클레스

4. 그리스 문명의 영웅들

   1)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2) 과학의 탄생: 탈레스, 데모클리토스

   3)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4) 인본주의 의학의 꽃, 힙포크라테스

   5) 소크라테스라는 수수께끼

5. 그리스 민주주의의 영광과 몰락

   1) 솔론과 민주주의

   2) 시민 페리클레스

   3) 신과 인간

   4) 노예와 여자

   5) 지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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