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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일 08시 02분 등록

그리스인 이야기 

앙드레 보나르 지음 / 김희균,양영란 옮김, 강대진 감수 





1. 저자에 대하여 (개인적 평가와 함께)

 그리스인 이야기 1권을 옮긴 김희균은 이렇게 말한다. 

 ‘우선 거간꾼의 농간이 장난이 아니다. 앙드레 보나르라는 이 사람은 해석학에 관한 한, 감히 말하건대,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다. 삽포의 시에서 상징주의를 끌어내는 재주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우리 세대에 견줄 바가 아니다. 그 농간에 빠져서 헥토르나 페리클레스, 소크라테스에게로 가보면, 그럴듯하게 꾸며서 그런지, 뭐 하나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인류의 모범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수십 수백, 그야말로 떼로 나를 맞는다. 불쌍하게 태어나서 용감하게 살다가 모범이 된 사람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건축, 법률, 의학까지 곳곳에 동상처럼 빽빽하다. 그저 놀랍고 약 오를 뿐이다. 뭐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많은지.’

 옮긴이 김희균 씨가 처음 <<Civilisation Grecque>>을 펼쳐보고, 이놈의 책에 낚이고, 그것을 쓴 저자를 평가한 대목이다. 앙드레 보나르에 대해 찾아보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렸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내 눈에 띄지 않았다. 저자를 조사하고, 옮긴이에 대해 대충 훑은 후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겨서 저자를 더 좀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내 눈에 밟힌 정보는 김희균 씨가 <<그리스인 이야기 1>>의 뒷부분에 실은 역자후기와 책 표지 안쪽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저자 소개밖에 없었다. 열악한 상황을 함께 공부하고 있는 연구원들에게 알리자, 모두 마찬가지였다. 한 연구원 동기는 김희균씨와 메일로 연락을 하여 저자에 대해 자료를 얻으려고 했지만, 옮김이인 김희균씨도 출판사 요청으로 그에 대해 알아보려 했으나 변변한 자료가 없다고 답변을 줬단다. 알아보려고 한 노력은 우선 여기까지, 아는 정보 내에서 앙드레 보나르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앙드레 보나르는 스위스인이다. 1888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났다. 나는 1983년에 태어났으니 나보다 약 1세기 전에 태어난 분이다. 그는 로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1915년부터 1928년까지 로잔 중학교와 고전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36년 그로노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이후 1957년까지 30년 동안 로잔 대학 그리스어, 그리스 문학 교수를 지냈다. 그의 직업은 대학 교수이자 작가였다. 그는 여러 저작들을 통해 고대 그리스에 생생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입히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글에서 지식인 사회 특유의 사변을 걷어내고,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을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대하듯이 읽도록 가르쳤단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불리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불어로 번역했으며, <<프로메테우스>>(1928), <<그리스의 신들>>(1940), <<안티고네>>(1942),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1944), <<오이디푸스 왕>>(1946), <<삽포의 시>>(1948), <<비극과 인간>>(1950) 등 그리스 관련 저서를 다수 남겼다. <<그리스인 이야기>>를 보면 그가 남긴 저서를 다 활용하여 집대성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저항한 ‘참여하는 인문주의자’였다. 자신의 작품 <<프로메테우스>> <<안티고네>> 등에서는 주인공에게서 저항과 참여 정신을 찾고자 했따. 1949년 ‘스위스평화운동’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평화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으나, 냉전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52년 ‘국제 평화수호자대회’ 참석자 동베를린으로 가던 중 스위스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고 한다. 그는 평화를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대와 법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풀려난 그는 그 후 그리스 문명사 연구와 집필에 매진하다 1959년 사망했다. 

 <<그리스인 이야기>>는 그가 평생 일궈온 그리스 관련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정말 앞서 소개한 작품들의 연구가 없었다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각각을 다 연구하고, 그것을 또 하나의 창조물로 엮어낸 저작물을 보니, 그는 그가 연구한 것을 아주 사랑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또, 그렇게 자신의 연구한 연구물들을 잘 활용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이 책에서 헬레니즘을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헬레니즘은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운명을 지배하기 위해 벌이는 모험의 시기로 간주된다. 1954년에 1권이 나왔으며, 1957년 2권이 출간 된 후 대학에서 은퇴하였다. 마지막 3권은 1959년 그가 작고하기 며칠 전에 출간되었다. 스위스에서 불어판으로 출간된 이 책은 같은 언어권인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미국, 포르투갈, 러시아, 루마니아, 일본 등지에서 일찍이 각국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그리스 문명사 분야의 세계적인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2011년 3월 31일에 1판 1쇄 한 걸로 보이는데, 책이 완성된지 약 50년 만에 우리 나라로 왔다.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내겐 정말 행운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시작으로 <<변신이야기>>, <<그리스 비극>>, <<오뒷세이아>> 등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작품들을 보게 되고, 보나르의 해석에 힘입어 더 유식해진 기분이다. 물론 나의 짧은 소견이 민망하고,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어떤가. 이 책을 읽게 되므로 얻게 된 지식과 지혜 그리고 비극을 보는 시각을 알게 됬으니 행운이 따로 없다. 

 행운을 가진 사람은 나 말고도 또 있다. 바로 앙드레 보나르다. 그는 평생을 바쳐 연구할 콘텐츠를 가졌다는 점에서 아주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한시 미학 산책>>의 저자 정민 교수가 연암 박지원을 깊이 연구하면서, 다산 정약용을 파헤치면서 출간하는 책들이 엄청 많은 것처럼 앙드레 보나르도 그리스에 꽂혔던 것 같다. 보나르는 그리스 작가들이 펴낸 작품들과 그리스 문명, 그리스의 사상, 그리스의 역사를 모두 들여다 보며 그들에게서 과거를 읽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그려냈던 것 같다. 양도 많고, 이해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읽는 내내 행복했다. 읽은 것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도 그렇고, 역설적인 해석의 묘미에 빠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그리스인 이야기 1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까지)

Chapter 1 그리스 문명의 탄생

p11 인간은 모두 원시인으로 시작했다. 

앙드레 보나르가 진화론을 따랐던 모양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인간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인 걸까? 아니면 둘 중 하나를 믿고, 그 믿음대로 살면 되는걸까? 이 문장은 우리의 근원, 어디서부터,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말한다. 인간은 모두 원시인이었다고. 


p15 문명은 원시인들의 토양에서 차츰 싹을 틔우고 자라 온 것이다. 필요하니까 발명을 했고, 우연히 기후가 좋아 생산량이 늘어났고, 그래서 문명을 이룬 것일 뿐이다.

 그럼, 잔인하기 그지없는 그리스 원시인들이 만들어낸 이 문명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그 정체를 차근차근 파헤쳐볼 것이다. 하지만 미리 성급하게 결론을 말하면, 그리스 문명은 바로 우리의 문명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문명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이다. 


<그리스인도 처음에는 원시인이었다>

p16 문명이란 무엇인가? 그리스 말로 문명화된 인간이라고 할 때, ‘문명화된’ 이라는 말은 ‘길들여진’, ‘교육을 받은’, 혹은 ‘접붙인’ 이라는 뜻이다. 문명화된 인간, 다시 말해서 접붙인 인간이란 좀 더 영양이 풍부하고 좀 더 맛이쓴 열매를 맺을 줄 아는 인간을 말한다. 

 문명화된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깨달아 알고, 자연에 대해 반격을 가할 수 있다. 문명은 인간을 생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모여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사람들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과학과 예술을 향유한다. 실재 세계는 물론이고, 예술 작품을 통해서 상상의 세계에서도 살아가게 된다. 실재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힘이 과학이라면, 상상 속에서 또 하나의 실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예술이다. 과학과 예술로 무장한 인간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이요 인간됨이다 .인간됨은 다시 새로운 발견과 창조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p18 요컨대 농부로 시작해서 뱃사람으로 진화해온 것이 그리스 문명의 내력이다. 

p19 그리스인들이 또 하나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은 시(詩)다. 사물을 시적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고심하던 그리스 민족은 소위 문학과 만난다. 

 그리스 말은 풀과 샘물처럼 부드럽고 힘찼으며, 미묘한 생각들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 사람의 마음속에서 각양각색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을 포착해낼 만큼 풍부했다. 부드럽고 강렬한 음악도 알았고, 잘 다듬어진 플루트의 음색도 알았고, 풀피리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문학이 아니었다. 


p20 기원전 7세기와 6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들은 사물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세상을 이루는 것들의 법칙을 알아내는 것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그리스의 과학은 이때 생겨났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알고 싶어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지식을 인간을 위해 요긴하게 쓰고자 했다. 수학을 만들었고, 천문학을 개발했다. 물리와 의학의 기본 지식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그들은 어째서 그것들을 발명하고 발견하는 데 매진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질문하고 싶었던 부분을 질문해줬다. ‘어째서?’, ‘봉사하기 위해서!’ 

 인간은 지적 호기심을 타고나는 가보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욕구가 없다면 아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욕구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힌다. 우리에게 지적욕구가 없었다면 문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p21 그리스 문명의 목적은 하나다. 자연에 맞서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것,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그리스 민족의 문명은 인간의 문명이었다. 인간에게 봉사하는 문명이었다. 


p22 <프로메테우스, 인간 진화의 신화적 증인>


p23 <무식한 유목민, 토착 에게인에게 문명을 배우다>


p27 크레테의 여인들은 그리스의 여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렸다. 기원전 5세기가 되어서도 그리스 여인들은 크레테 여인들과 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할 정도였다. 크레테 여인들은 아주 다양한 일을 했다. 최근에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에게해 주변에 산재해 있던 오래된 민족들에서도 여성의 지위는 아주 높았다고 한다. 어떤 민족은 모계사회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가계는 모계를 따라 전승되었다. 여인들이 오히려 여러 남자를 거느린 채 공동체를 지배했다. 


p31 <경쟁하는 도시국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도시가 형성되기에 유리한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는 도시가 형성되기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p34 우리는 흔히 나쁜 의미에서 야만족이라는 딱지를 붙이지만, 야만족의 본래 의미는 그리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p35 “자유롭고 싶고 누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스가 여느 민족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피게네이아는 “야만족은 노예를 키우고, 그리스 민족은 자유를 키운다”는 명언을 남겼다. 


p35 <척박한 환경이 바다 너머를 꿈꾸게 하다>

 산은 인간을 보호하지만 바다는 그럴 수 없다. 산은 경계를 나누지만, 바다는 경계를 허문다. 


p36 바다는 두렵고도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그리스 말로 바다는 ‘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길을 떠난다는 뜻이었다. 에게해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교통로였다. 유럽의 뱃사람들이 소아시아까지 가는 동안에 망망대해는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든 자그마한 육지라도 볼 수 있었다. 마치 아이들이 냇물을 건너기 위해 놓은 징검다리처럼 에게해 위에는 수많은 섬이 떠 있었다. 

 수 세기 동안 도적질이나 하면서 살았던 그리스 민족은 한편으로는 상인의 기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시인의 기질을 타고났다. 

 솔론과 아이스퀼로스와 헤로도토스, 플라톤의 여행은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이집트로 가고, 소아시아와 바뷜로니아에 다녀오고, 퀴레네와 시켈리아까지 갔다. 


p37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나침반 삼아 그리스인들은 위대한 이웃집을 찾아간다. 그리스인들은 바다를 넘으면 살기 좋은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로 가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8세기에 이민 행렬이 시작되었다. 밀레토스의 어부들은 흑해 주위에 90개가 넘는 도시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p37<올리브와 포도주의 나라>

 “그리스 문명은 배고픔을 먹고 자랐다.” 헤로도토스는 그렇게 고백했다. 


p40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진실의 거울’이라 부른다. 몇 잔 마시면 사람 속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말은 맞는 말 같다. ^^


p42 결국 사유재산 제도는 강자가 강자를 위해서 만든 제도였다. 


p43 장인 계급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들은 의사와 시인이었다. 

위대한 그리스 역사는 각종 사회계급이 발생하고 발전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문명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p44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한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후나 토지, 바다와 같은 자연조건도 있었고, 역사적인 사건이나 전설도 있었고, 계급 투쟁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도 한몫 거들었다. 이런 것들이 용광로처럼 섞여서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하면 소위 문명의 탄생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의 기적’이 만들어진 걸까? 그렇지는 않다. 어떤 학자들은 기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기적은 없다. 그것은 비과학적인 단어이고, 따라서 그리스답지 않다. 기적은 과학이 아니므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설명을 감탄으로 치환하는 것 뿐이다. 

 진실은 이렇다. 그리스 민족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그들의 수단을 가지고 문명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신이 기적처럼 나타나서 특별한 재능을 부여했을리 없다. 문명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분투해온 것들의 결과물이다. 그 안에 그리스 민족이 끼어 있을 뿐이다. 


p45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니다. 인류의 발전 단계에서 한 걸음 더 올라섰을 뿐이다. 그와 비슷한 예는 수도 없이 댈 수 있다. 

 그리스 문명은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문명이 발달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은 거꾸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면 세계가 다시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세계는 서로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다. 인간은 세계를 바꾸고 세계는 다시 인간을 바꾼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문명의 본질이다. 인간과 세계의 접합, 인간과 세계의 융합을 지향한다. 인간과 세계는 대립하는 당사자로서 서로 싸우고 투쟁한다. 그러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어나간다. 문명을 완성하는 것이다. 


Chapter 2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p49 호메로스는 인간의 고결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죽이고 죽을 뿐인 그들의 용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나선 자들, 그들의 희생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p50 전쟁에 투입된 인간들에게는 용기와 우정과 사랑이라는 무기가 있다. 연민은 복수보다 강한 법이다. 고결한 사랑을 아는 인간은 신만큼이나 위대한 법이다. 호메로스는 그런 인간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p52 젊은 영웅 아킬레우스는 힘과 민첩성, 열정과 용기를 갖춘 최고의 전사였다. 지는 법도 없었고 지치지도 않았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갖춘 아킬레우스가 구경만 하고 있자, 그리스군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아이아스는 소년들이 아무리 끌어당겨도 꿈적하지 않는 당나귀처럼 용맹으로 치면 아키렐우스에게 뒤지지 않는 전사였고, 오뒷세우스는 사람의 마음을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p54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싸움은 <<일리아스>>의 백미다. 


<<일리아스>>의 탄생

p55 호메로스가 이 모든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들이다. 호메로스는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을 엮어 하나의 시편에 담고, 하나의 드라마로 완성했을 뿐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던가. 작가에게는 전해지는 많은 에피소드들을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에 대한 창의적인 관점이 필요한것 같다. 자신만의 사유, 생각, 관점, 시각이 필요하다. 나만의 것이면 더 좋다. 그럼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내줄 수 있으므로. 


p56 그들은 지나간 시절의 전쟁 얘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요즘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 듣기를 좋아할까? 돈 잘 버는 법? 행복하게 사는 법? 좋아하는 일 찾는 법?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아할지 고민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그리스의 셰익스피어, 호메로스>

p58 호메로스의 재능은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는 데 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도 4명의 남자가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사의 품격’의 작가도 4명의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한 것이다. 작가들에게는 그러한 능력도 필요한 것 같다. 


p60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운명 앞에 한번 대들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아이아스와 디오메데스 : 묵직한 용기, 날렵한 용기>

p61 탈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용기는 묵직하다. 저항의 용기다. 


p63 공격은 몰라도 수비에는 아이아스만 한 전사가 없다.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는 죽으나 사나 자리를 지킨다. 말 그대로 단순한다. 경계석 같다. 돌처럼 서서 경계를 지킨다. 그가 있는 한 누구도 넘어올 수 없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그를 탑 혹은 벽이라고 부른다. 단단하기가 콘크리트 같다. 


 우리 뒤에 뭐가 남았는가?

 든든한 성채라도 서 있는가?

 아니다. 여기가 우리 죽을 자리다. 

 우리밖에 없다. 구원의 빛은 싸움에 있다. 

 

 기댈 것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두 주먹 불끈 쥔 힘으로

 여기서 끝내자. 내 목숨 내가 지키든지 

 아니면, 깨끗하게 끝을 보든지. 


 p66 호메로스는 디오메데스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가 싸울 때마다 투구 깃에 불꽃이 튀게 한다. 그게 디오메데스의 상징이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신과 싸운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디오메데스가 유일하다. 디오메데스만이 혼자서 아프로디테를 쫓고, 아폴론과 맞서고, 전쟁의 신 아레스를 친다. 디오메데스가 쓰러뜨린 트로이아 장수를 구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나서자 디오메데스는 미의 여신에게 대들었다. 감히 여신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이다. 


p68 그 순간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는 글라우코스의 셈법을 흐리게 했다. 

       금으로 된 무장과 청동으로 된 무장을 바꾼 것이다. 

       소 백 마리를 주고 고작 아홉마리를 받은 셈이다. 


디오메데스가 노골적으로 흡족해했다는 구절은 없다. 다만 디오메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호메로스는 이런 식으로 서사시의 진부함을 비트는 재주가 있다. 영웅이라고 해서 욕심이 없을 수 없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어보는 리얼리스트다. 


<파리스의 변명>

p69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파리스와 형 헥토르의 대립은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다. 


p72 사랑은 자기가 하지만 사랑 자체는 신의 속성이다. 따라서 파리스 안에는 두 가지가 공존한다. 하나는 경솔하고 비루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한 신이다. 한편으로 파리스는 보잘것 없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신 아프로디테를 몸에 담고 있다. 아프로디테의 충만함과 완전함, 경이로움이 그에게 있다. 파리스라는 인간의 생애는 결국 반쯤 신의 포로다. 


p73 헬레네는 정돈된 삶을 지향한다. 


p74 헬레네는 남편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헬레네로 인해 사단이 나고, 두 나라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것이야마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헬레네는 아프로디테를 닮아서 아름답다. 그리고 남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다. 


<아킬레우스 : 현재에 충실한 인간형>

p75 아킬레우스는 젊음과 힘을 상징한다. 


p76 그는 혈기왕성하다. 그래서 약한 자들은 주로 그에게 기댄다. 그가 힘센 자이기 때문이다. 


p78 아킬레우스는 산속 깊은 계곡에서 시작한 사나운 불길 같다고 했다. 빽빽한 숲에 불이 붙고, 때마침 광풍이 일어 불꽃이 사방으로 넘실댄다. 전쟁터에 나가면 아킬레우스는 꼭 그 불길 같다. 누구를 쫓기만 하면 반드시 끝을 보고야 만다. 그 학살의 기세가 너무 세서 검은 흙바닥은 금세 피로 물든다. 


p79 분노는 사람의 심장을 쇳덩어리로 만든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p83 아킬레우스는 삶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주 열렬히 사랑한다. 다만 그는 현재를 사랑할 뿐이다. 지금의 감정과 지금의 움직임만 사랑한다. 오로지 거기에만 충실하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삶이고 전부다. 살인도, 분노도, 눈물도, 사랑도, 연민도, 그는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무슨 철학자들처럼 공평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처럼 모든 것을 공평하게 끌어안는다. 고통도 기쁨만큼 즐겁다. 파트로클로스가 죽고 나서 아킬레우스는 학살의 즐거움에 몰두한다. 호메로스의 말대로 “그의 심장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때, “무기는 그에게 날개가 되어 사람들 위를 날아다니게 한다.” 


p84 무사하게 지나가는 삶보다는 명예로운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명예를 추구한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간다. 거기서는 죽음이 오히려 삶이다. 명예를 이루다가 죽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명예롭게 살게 될 테니까 말이다. 시대를 넘어 영원히 사는 길. 아킬레우스는 그런 길을 택했다. 


<헥토르 : 공동체를 사랑하는 고결한 인간>

p87 헥토르도 아킬레우스만큼 용감한 사람이지만, 그 둘은 성격이 다르다. 아킬레우스는 천성적으로 용감한 사람이고, 헥토르는 배워서 용감해진 사람이다. 훈련을 통해 용기를 배웠고, 그것이 그의 몸에 녹아든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하면 신이 나는 사람이지만, 헥토르는 전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헥토르의 용기야말로 최상급의용기다. 두려움이 뭔지 알지만,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p89 헥토르의 용기는 사색과 품위에서 나온다. 

 헥토르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때로 본질을 꿰뚫는 아름다움이 있다. 

 헥토르가 갖춘 품위는 그저 단어로서 존재하는 품위가 아니다. 헥토르의 품위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데 있고, 필요하다면 조국을 위해 죽는 데 있고, 아내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데 있다. 헥토르의 용기는 현자들의 용기와 다르다.


p91 헥토르는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힘보다는 통합하게 하는 힘이 더 강하다고 믿는다. 


p94 헥토르에게 죽음의 순간은 투쟁의 순간이다. 그는 신들이 점지한 운명에 맞서는 인간이다. 훗날 다음 세대들이 위대했다고 칭송해 마지않을 인간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으려 한다. 

 호메로스의 인본주의에는 이처럼 진실하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 가족을 사랑하고 보편적 가치를 숭상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사랑하며 싸우는 인간이 있다. 헥토르가 그렇다. 그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죽음과 싸운다. 그의 부르짖음은 더 나은 인간의 모습을 향한 부르짖음이다. ‘다음 세대’인 우리가 그 부르짖음을 듣게 되기를 헥토르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p92 <<일리아스>>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있었고, 그들이 인류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이끌어왔으며,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Chapter 3 오뒷세우스와 바다 

p99 호메로스의 두 번째 서사시는 인간이 이룬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바다를 장악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뱃사람들과 상인 계급의 노래>

p105 크게 보면 <<오뒷세이아>>는 안내도다. 모험을 즐기는 자들, 선원들, 이민자들, 쇠를 구해서 무기를 만들고자 하는 부자들을 위한 여행 안내서다. 


<세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p109 기원전 8세기, 뱃사람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처참한 삶이었고 짐승만도 못한 삶이었다. 자연치고도 가장 혹독한 자연을 맨주먹으로 맞서는 일이니까 말이다. 


p111 결국 오뒷세우스는 남들보다 먼저 미래를 본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위험한 존재들이 들끓는 땅이지만, 그리스 민족은 여기저기에다 커다란 도시를 세울 것이다. 벌써 기초공사를 시작한 곳도 있고 말이다. 

 모험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행하고 나면 남들보다 먼저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모험이란 그런 것이다. 


p112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차 있는 인물이다. (오뒷세우스) 

이 구절을 읽을 즈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인간은 이제 무엇을 발견하러 떠날 것인가? 우리의 호기심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우주에도 집을 짓고 온다던데...... 우주 너머에는 무엇을 있을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바다 건너 어떤 땅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이미 다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외부로 뻗어나갔던 호기심이 이제 인간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는 더이상 바다 건너 미지의 땅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궁금해 한다. 인간의 정신 세계. 뇌 속. 인간의 마음. 심리.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리스 철학자들도 인간의 내면에 대해 궁금해 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려왔지만, 어떤 보편적인 것에 대한 질문, 본질의 추구에서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각 개인의 내면세계 탐구로 향해가고 있는 것 같다. 외부로 향했던 호기심이 이제 내부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질을 분석하고, 내가 누구인지, 아주 많은 개성들을 분석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무궁무진한 세계로 인간의 호기심이 뻗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호기심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것이 궁금하다. 이것 자체를 알고 싶다. 내가 파고들어가고 싶은 콘텐츠. 나는 평생 무엇을 파헤치면, 깊숙히 연구하면 평생에 걸쳐 엮어내는 저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 나의 호기심에게 묻는다. “WHAT????”


바다에 대한 꿈과 투쟁의 기록

p112 자연은 오뒷세우스에게 공포의 대상이고 꿈꾸는 대상이고, 바라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자연을 마주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다시 창조하기도 한다. 동물들은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전부지만, 인간은 자연을 다시 창조한다. 자연의 힘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워진다. 인간이 사는 세계를 아름답게 건설한다. 이와 같은 창조의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파이아케스인들과 나우시카아 공주가 사는 섬 이야기다. 


p118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헤엄치는 법을 배우는 그리스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오뒷세이아>>다. 아이들은 글도 <<오뒷세이아>>로 배운다. 읽고 암송하면서 저절로 글을 익힌다. <<오뒷세이아>>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민족의 시다.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 오뒷세우스>

p118 문제가 닥치면 오뒷세우스는 늘 생각한다. 행동하기 전에 궁리한다. 위험한 일이 닥칠 때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짓은 생각이고 궁리다. 잔꾀를 부리는 수준이 아니다. 훨씬 더 정교한 생각을 한다. 오뒷세우스가 문제를 푸는 방법은 단순하고 확실하다.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는 자신을 ‘아무도 아니다’이라고 소개해서, 나중에 퀴클롭스가 “no one이 내 눈을 멀게 했다”라고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지혜를 낸다. 


p120 어떤 싸움에서도 오뒷세우스는 바다와 운명에 물러서지 않는다. 기필코 자기 몫을 지킨다. 그의 무기는 용기와 지혜다. 우스워 보이지만 그것은 보통 무기가 아니다. 사람과 사물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무기다. 


p121 오뒷세우스는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이다. 인간의 지혜는 실질적이고 창조적이다. 세상에 대한 의미 없는 지식을 쌓아놓은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그런 지혜다.

지혜의 대명사 솔로몬. 한 명 더 알게 됨. 오뒷세우스. <<오뒷세이아>>를 읽을 때는 모험에 집중하고, 스토리에 집중해서 오뒷세우스가 어떤 인물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는데, 도움을 많이 받게 됐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으며, 모험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를 사랑하는 아버지로만 파악했었는데, 그에게 지혜가 있었음을 인식하니 그가 새로운 인물로 보인다. 


p122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인간이 모범이고, 다음 세대의 모범이다. 호메로스가 만들어낸 미래형 인간이다. 


Chapter 4 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p126 서정시라면 최소한 아르킬로코스나 삽포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르킬로코스는 한마디로 말해서 유럽 서정시의 아버지다. 

아르킬로코스의 시는 무엇보다도 간결하다. 규칙적인 리듬을 탄다. 그러면서 사랑과 풍자를 노래하는데, 말 많은 영웅담과는 확실히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아르킬로코스의 서정시 전통은 삽포가 이어 받는다. 삽포가 서정시의 꽃을 피우고, 최고조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파로스의 서정 시인>

p129  신은 가장 견디기 힘든 슬픔 가운데서도 치유를 예비하나니, 그것은 자꾸만 단단해지는 우리들 심장이다. 오늘은 내가 아프고, 내가 피 흘리며, 내가 울부짖을 것이며, 내일은 네 차례라고 하자. 그리고 이제 슬픔은 여인네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단단하게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영웅담 대신 사랑과 풍자>


<사랑하며 꼬집는 독설가>

p135 아르킬로코스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죽이고 보니 겨우 일곱 명 잡자고 우리 천 명짜리 군대가 생난리를 피운 거로군. 

영웅의 업적을 칭송하기는 커녕, 영웅의 굴욕을 폭로하고 있다. (호메로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p138 여우는 할 줄 아는 게 많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하나밖에 모른다. 그래도 그 하나 덕에 명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시대에 대한 독설>

p140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의 시구들을 가득 채운 그 ‘명예’를 참을 수가 없다. 명예는 봉건사회의 덕목이고, 우매한 대중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명예롭기보다는 행복해야 한다. 즐거워야 한다. 그게 바로 아르킬로코스의 철학이다. 


p141 아르킬로코스는 인생이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하며, 그를 위한 투쟁만이 가치 있다고 말한다. 

 서사시에서 영웅은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킨다. 아킬레우스도 그렇고, 헥토르도 그렇고, 심지어 여자인 헬레네도 그렇다. 죽음으로써 다음 세대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아르킬로코스는 다르다. 죽음은 그저 사라지는 거라고 본다.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 

 죽고 나면 명예는 잊히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살아 있으라. 살아 있음의 멋을 즐겨라. 죽음은 상실에 불과하다. 


p143 아르킬로코스의 핏속에는 자유가 흐른다. 

 그가 숙명적으로 품고 살아야 했던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는 시를 하나 보자. 

 

 가슴이여, 내 가슴이여, 고칠 길 없는 내 가슴이여. 

 힘을 내라. 적들에 맞서 반격을 준비하라. 

 사악한 자들의 늪에서 실족치 마라. 

 이겼다고 교만에 들뜰 일도 아니고 

 졌다고 빈집에 웅크려 있을 일도 아니다. 

 승리를 즐기고, 패배를 쓰라려 하되, 지나치지 마라. 

 삶에 언제나 있을 높낮이를 배우라. 

 모르는 곳에서 고통이 문득 닥쳐오리니. 

 내 가슴이란. 


p147 아르킬로코스를 기점으로 서사시가 막을 내리고, 참여시가 등장하게 된다. 

Chapter 5 열 번째 뮤즈, 삽포

p151 삽포는 이상한 나라다. 경이로운 세계다. 옛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수수께끼’다. 


<최초의 여성 시인>

 p151 기원전 600년경, 레스보스 섬의 뮈틸레네. 삽포는 아프로디테와 미의 세 여신, 뮤즈(시, 음악, 학예를 관장하는 여신)를 숭상하는 여성 종교 단체의 장이었다. 


p152 삽포는 결혼을 했고, ‘금꽃’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으며, 삽포이 제자도 모두 결혼을 할 것이다. 결혼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행복의 완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진실하고, 직선적인>

p155 그를 보노니, 보는 것만으로도 붉어지는가. 

영혼의 길을 잃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은 볼 수 없고, 입을 말할 수 없으며, 

몸 전체가 불타고 바뀌는구나. 

  • 삽포 시의 흔적이 있는 라신의 사랑 노래


p155~156 삽포의 시 


그대 앞에 얼굴을 맞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저 사람은 아무래도 

신인가 보다. 


웃음이 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그대를 

본 순간

입술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혀에 물기가 없으며 

작은 불꽃이 일제히 피부 아래로 흐른다. 

눈은 볼 수 없고 

귀는 우- 우- 거릴 뿐. 


흐르는 땀은 무엇이며

몸은 어째서 떨리지 않는 곳이 없는가. 

풀포기보다 더 파래진 나는 

아마 이대로 죽는가 보다. 


p157 삽포의 시는 솔직하고 과학적이다. 삽포는 사실만 적는다. 감정이 주가 아니다. 감정이 남긴 결과를 보고하는 게 주다. 무슨 연애시처럼 형용사가 난무하지 않는다. 명사와 동사만 쓴다. 그걸로 모든 상처를 표현하고, 모든 사건을 보고한다. 


p158 삽포가 너무도 솔직하고 정확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은 사랑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가운데 절정은 당연히 내 몸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장면이다. 

 어둠 가운데 불이 타오르고 있다. 시인은 어둠을 그리고 어둠 속에 불꽃을 지른다. 그 불꽃이 중요하다. 감정도, 그 감정이 향하는 대상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독자들은 그냥 불꽃만 보면 된다. 이제 그 불꽃은 끝까지 장렬하게 타오를 것이고, 완전히 타서 사라질 것이다. 어둠 속에 빛나는 불꽃, 그것이 삽포의 사랑이다. 


삽포 이전의 사랑은 불탄 적이 없다

p158 그녀가 최초다. 


p159 삽포 이전의 사랑은 불탄 적이 없다. 물론 사랑이 사람의 가슴을 데워 무딘 감각을 일깨운 적은 있다. 희생과 욕망과 부드러움을 자극하고, 심지어 잠자리로 연인을 이끈 적은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기쁨을 얻었고, 후회와 슬픔을 얻었다. 하지만 삽포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다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p160 삽포의 에로스는 몸에 남은 상처로 표현될 뿐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프다. 상처가 남는다. 사지가 다 부서져 나가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쓰라린다. 그게 사랑이다. 따라서 삽포에게 사랑은 끔찍한 짐승을 닮았다. 알 수 없는 세상의 힘이고, 쿵쿵거리며 엄습해오는 짐승의 발자국이다. 


다시 에로스가 온다. 사지를 부수며 고문하는, 

부드럽고 고통스러운 그는 내가 이길 수 없는 괴물이다. 


아무리 재주가 좋은 인간이라도 이 사랑이라는 것을 길들일 수 없다는 의미다. “이길 수 없는 괴물” 대신 “맞서 싸울 수 없는 야수”라고 하는 편이 좀 더 나을 듯하다. 


p161 “산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떡갈나무를 꺾어 넘어뜨리듯이, 사랑이 내 영혼을 흔들고 있다.” 


<서정시의 꽃이 활짝 피다>

p161 모든 감정에는 대상이 있다. 누구를 만나서 기쁘고, 누구로부터 멀어져서 슬프다. 그렇게 우리는 기뻤다, 슬펐다는 반복한다. 


p163 사람이란 때로 세세히 알고 있는 것보다도 잘 모르는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목소리만 비슷해도 걸음걸이만 비슷해도, 삽포는 고통과 기쁨에 젖는다. 목소리나 걸음걸이만 봐도 사랑인 줄 안다. 그것이면 족하다. 기호 하나가 삽포에게는 전부이며, 기호 하나로 대상과 나는 합체하여 이윽고 폭발한다. 


p164 때로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더 생생할 수도 있다. 주로 깜깜한 밤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외로이 침대에 누워 지금은 없는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할 때,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데, 그게 너무도 생생하다. 그래서 눈을 감고 온 감각을 모아 들어보면, 그는 정말 어둠 저편에서 두터운 어둠을 뚫고 거짓말같이 살아온다. 


p167 사랑과 우리를 이어주는 방식은 현실세계의 소통과는 차원이 다르다. 말로 아는 것이 아니다. 보고 아는 것이 아니다. 형상을 보고 아는 게 아니다. 소리로 아는 게 아니다. 그냥 아는 것이다. 이렇게 삽포의 시는 현실에서 벗어나 순수한 존재의 세계로 들어간다. 


<호메로스의 적대적 자연, 인간과 교감하는 삽포의 자연>

p173 쓰라리고 아팠던 사랑의 시간이 지나 세상은 고요해지고, 고요한 밤하늘을 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사랑의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별빛이 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사랑은 나와 적절한 거리에 올라붙어 빛난다. 그 틈을 비집고 새소리가 들리고, 꽃이 피고, 나뭇가지가 소리를 낸다. 그러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고, 사랑 노래는 자연에 대한 노래로 바뀐다. 


<젊음의 꽃망울을 사랑한 시인>

p176 

젊음의 꽃망울을 사랑했다. 

사랑이 왔다. 

그것은 반짝임이었고, 순간이었다. 


Chapter 6 솔론과 민주주의 

p182 희극에 들어 있는 촌철살인의 언어들은 시민들에게 삶의 진실을 알려주었으며, 인간과 운명의 어긋남이 비극을 통해 애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있었으며, 거리에서, 가게에서, 광장에서 철학적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상과 천상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이 쯤 내 마음 속에서 떠오른 생각 하나. 기원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발견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문명을 만들어 가기 위해, 생각해내고, 창조해 내야 할 것들이 주변에 많았으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물론 우리도 마차가지이지만. 평생 알려고 해도 다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발견한 많은 것들을 먼저 배워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미 발견된 것들이 너무 많고 문서화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먼저 주입으로 머리에, 정신에 넣어야 한다. 수학만 해도 피타고라스의 정리, 원주각의 성질, 최단거리는 직선인 것 등 정말 많은 정의와 정리, 증명과 성질등을 배워야 한다. 그들이 이뤄낸 문명의 결과가 현재 학생들에게,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발견과 발명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들이 되었다. 음, 그들이 행복한 것일까? 우리가 행복한 것일까? 학생들은 말한다. 그냥, 아무것도 모른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발견된 많은 지식들이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에겐 그들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그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들이 발견할 당시의 상황처럼 교과서가 씌여지고, 학생들이 수학 개념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토론하고, 합의점을 찾아 정의를 내리고, 성질을 발견하여 정리를 만드는 작업을 한 후 수학자들이 마련해 놓은 것들과 비교 분석하며, 진리를 알아 간다면, 더 좋은 수업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학생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그것들이 왜 필요한지 느낄 수 있을까? 아, 이러려면 교사들도 다시 공부해야 할 것이다. 많이 공부하고, 교육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이다. 새로운 교육과정이 나오려나? 이런 생각을 했다.)


민주주의의 태동 : 화폐의 등장과 상인의 부상 

p187 민주주의라는 찬란한 기차가 전진하는 길에 ‘돈놀이’와 ‘노예제도’, ‘성차별’이 얼마나 답답한 방해물이었는지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이제 막 민주주의라는 꽃이 피어야 할 시기에 동전이 만들어지고, 역사의 물길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p188 귀족은 피도 피지만 후천적인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의 효과성 


<귀족이자 시인이자 자수성가한 상인>

p188 시인이자 입법자였던 솔론의 얘기를 중심으로 풀어보기로 한다. 

 

p189 솔론은 할 일을 다 끝내고 법제도를 완성한 다음에도 해외로 나간다. 그런 호기심이 솔론을 키웠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젊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솔론은 스스로도 “하루라도 뭔가 배우지 않은 날이 없다”고 고백한다. 


p191 살라미스를 내준 게 아테나이구나. 

나는 차라리 폴레간드로스나 

시킨노스 사람이라 불리겠다. 

지중해 전체가 떠들 거다. 

살라미스도 내준 아테나이인이라고. 


이제 진격할 때가 아닌가. 

아름다운 살라미스를 위해 싸우자. 

우리를 짓누르는 수치를 벗어던지자. 

시는 민중을 선동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귀족과 평민의 중재자>

p193 아테나이를 죽어가는 민주주의에서 구할 유일한 희망, 그것은 지형이었다. 


<빚을 탕감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다>

p197 솔론의 개혁 조치, 즉 빚을 탕감하는 조치로 인해 부자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을 물론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그동안 너무 많이 해먹었다. 그걸 밷어내게 한 것뿐이다. 솔론은 빚 때문에 신음하는 농민들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더 이상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했다.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당시 그리스 어느 도시에도 이런 획기적인 법은 없었다. 앗티케 반도가 처음이었다. 

요즘도 푸어가 많다던데. 하우스 푸어, 워킹 푸어, 학자금 푸어, 전월세 푸어, 웨딩 푸어. 예전보다 더 일하고, 더 많이 버는 데도 푸어가 되는 현실은 왜 일까? 빚을 지고 살아야만 살 수 있는 구조. 일년에 4천만원 씩 30년 벌면 12억 벌 수 있는데, 아파트 값이 몇 억 씩 하니, 평생 내집마련 못하고 살며, 빚내고 이자내며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 솔론이 필요한 때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빚을 탕감하는 조치가 필요한 것 같다. 


<외로운 개혁주의자>

p198 과감하고도 단호한 개혁 조치를 단행하면서 솔론이 특히 신경 썼던 점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솔론은 두 계급 모두에 대해서 전선을 그었다. 그럼으로써 정의를 지키고자 했다. 이 첨예한 계급 갈등의 시기에 정의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최초의 시민 법정>

p200 가장 부유한 시민들은 가장 높은 공직으로 가는 대신에 부담도 더 지도록 했다. 


<최초로 노예제도에 반기를 들다>

p202 솔론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이 엄청난 일을 기획하고 완성한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정의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솔론은 신을 믿는 것처럼 정의를 믿었다. 정의가 그에게는 신이었다. 


Chapter 7 노예와 여자 

<노예제도 위에 서 있는 민주주의>

<노예는 왜 생겨났을까?>

p208 포로를 노예로 삼기 시작한 것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관여했던 첫 번째 상행위는 노예를 사고파는 일이었다. 전쟁 포로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발전의 동력은 바로 돈이었다. 


p210 사람을 사냥해서 노예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 시장에 내 놓을 싱싱한 사람을 사냥해왔었다고 한다. 사람을 사냥하다니...... 망연자실.  


<생각하고 말귀를 알아듣는 기계>

p211 “연장도 가끔은 다듬어주어야 하고 잘 들게 하려면 기름칠도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노예에게 밥을 주는 것이다. 


p212 우리의 처락자 플라톤은 확실한 원칙을 제시했다. 즉 재물은 용도가 다르다. 용도가 다르면 대우도 다르다. 대우가 다르다고 해서 불만을 품는 것은 노예가 할 일이 아니다. 노예는 재물이고, 재물의 용도는 주인이 정하는 것이지, 노예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풀어주고 말고는 주인 마음이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꿈꾸는’ 철학자도 그런 말을 지껄였다. 


p213 그 문명에서조차 노예사냥이라는 비인간적인 일들이 버젓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문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문명 국가로보이는 그리스도 실상은 노예제 사회였다. 도대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문명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노예들의 역할>


<노예제도라는 암 덩어리>

p222 분명한 사실은 노예제도는 암 덩어리와 같다는 점이다. 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가로막는 암이다. 기계가 발달하지 않아서 노예를 쓴다. 그렇다면 노예를 쓰는 한 기계를 서둘러 발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노예제도는 기계의 발명을 늦추는 요인이 된다. 기계가 없으면 노예를 쓰면 되고, 노예제도가 존속하는 한 별로 걱정할 게 없다. 

 이와 같은 기계와 노예 사이의 악순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즉 과학 발전의 동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과학 발전을 방해하게 된다. 

 노예제도는 발전의 장애물이다. 


p223 결국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p224 에우리피데스는 그런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노예는 천한 사람이고, 시민은 그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점을 부인한 최초의 작가였다. “많은 노예들은 노예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지만, 영혼만큼은 시민들보다 더 자유롭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휴머니즘이고, 이론다운 이론이다. 


<여성은 집안일 돌보는 부속품>

p232 문제는 어떻게 해서 여성의 지위가 이처럼 낮아졌는가 하는 점이다. 어떻게 전설에 나오는 안드로마케와 알케스티스가 아스파시아가 되었는가 말이다. 아무 존재감 없는 아내가 되고, 첩이 되고, 아이낳아주는 농가 되고,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언젠가 여성들이 한 번 크게 진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계사회의 지도자라는 지위에서 떨어져 그리스 고전주의 시대의 가장 비천한 인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여자는 남자와 싸움에서 진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니라 금속을 발명하고 전쟁을 하게 된 시점부터 여성이 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민주주의>


Chapter 8 신과 인간

<신들의 탄생>

p240 다른 원시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에서 종교가 발생한 이유도 인간의 무력함 때문이다. 세상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다


p241 사람들은 신이 개입한 거라고 믿었다. 좋은 쪽일 수도 있고, 나쁜 쪽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인간이 모르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낯설다. 그리고 놀랍다. 신이란 그런 것이다. 두려운 힘이며,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힘이다. 그 힘 앞에 놓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경외’라는 단어를 썼다. 


p247 즉 대지는 곡식을 키우고, 우리를 키운다. 그리고 우리가 죽고 나면 대지의 신이 우리를 품어, 대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데 사용한다. 곡식이 우리를 키우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곡식을 키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지하세계로 되돌아가야 한다. 지하세계는 무섭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영생을 준비하는 곳이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낳은 괴물 이야기>

p250 사람들이 배를 탄 이유는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로 바다를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다에서 사람들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고, 세계에 대한 인식의 눈을 떴다. 


p250~251 퀴클롭스 : 인간에 대해 적대적, 반사회적, 배, 법, 의회도 다 싫어함. 

 카륍디스 : 지나는 배들을 모조리 삼킴

스퀼라 : 턱 세 개와 죽음처럼 시커먼 이빨이 달린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키르케와 세이렌 : 인간을 유혹하는 요정. 


p251 자연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하게 된 신들>

p256 호메로스의 말을 빌리면, 신들 사이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따라서 플루트를 들고 나와 멋들어진 춤 한판을 추든, 음악에 맞춰 몸을 감미롭게 흔들어대든, 신들은 즐거워할 것이다. 그들 자신이 인간의 형상과 다르지 않고, 인간처럼 춤과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올륌포스에서 내려와 신전에 기거하게 된 신들>

p256 신을 인간으로 제일 먼저 조작한 것은 호메로스였다. 


p259 도덕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혹시 나쁜 결과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그래서 생긴 게 도덕률이다. 하지만 신들에게는 그따위가 필요 없다. 


p260 그리스 사람들이 신을 예배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신과 같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한계를 뛰어넘고 싶다. 신처럼 존재의 기쁨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신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p260 ‘오만’한 인간에 대해 신들은 분노한다. 신들은 ‘질투’가 많은 존재라서 인간이 자기들과 비슷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요컨대 ‘오만’과 ‘질투’는 고대 종교의 영원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사람들은 두 개념을 던져 버린다. 즉 신에 맞서면서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스 비극에는 수도 없이 그런 장면이 나온다. 비극이 비극인 이유는 인간이 신에 대항하여 무모한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p261 그리스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신을 끊임없이 의인화해서 그리스 종교가 노리를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서 보여주는 일이다. 인간이 다다라야 할 최호 지점이 올륌포스 신이다. 그 간격을 그리스 사람들은 끊임없이 좁혀가고 있다. 

그리스 종교는 인간을 닮으면서 힘을 잃었다. 신들은 그리스 국가와 합쳐지고 말았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신들의 역할도 바뀐다>

p266 그리스 사람들은 자유를 좋아하지만, 무한정한 자유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모이라가 바로 인간과 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유보다 위에 있는 원칙이다. 거기서 모이라가 세사엥 질서를 부여한다. 비유하자면 중력의 법칙, 별들의 운행 법칙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 인과법칙 같은 세상의 버빅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법칙이 혹은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인간의 목적이란 궁극적으로 그 법칙 혹은 질서를 언젠가 알아내는 데 있다고 믿는다. 


<종교가 아닌 인간 중심의 철학>

p269 기원전 5세기,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이 힘을 얻던 시대에는 정의로운 신이 인간의 영혼과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아이스퀼로스의 영원한 주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Chapter 9 비극 : 아이스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p273 그리스인의 업적 가운데 가장 고결하고 위대한 것은 비극이다. 비극은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 속에 존재하는 공포와 희망의 버무림이다. 그것들을 잘 결합해서 완벽한 작품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비극이다. 


p275 비극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즉 “주인공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 주인공의 액션을 내 액션으로 혼동하는 것”이 비극이다. 


 그렇다면 비극의 주인공은 누구를 적으로 삼아 싸우는가? 무엇보다 인간들의 삶에서 늘 부딪히는 것들과 싸운다.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억압하는 것들과 싸운다. 주인공이 싸우는 이유는 불의가 승리하면 안 되기 때문이고, 죽음이 덮치면 안 되기 때문이고, 법죄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나라의 법도가 폭력의 법도에 물러서서는 안되기 때문이고, 적들을 정복해서 문명인으로 탈바꿈시켜야 하기 때문이고, 신이 인간의 정의를 훼손하게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고, 제아무리 힘 센 신도 인간의 자유를 훼방 놓게 허락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의 주인공은 인간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싸운다. 힘들어도 용기 있게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p277 비극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자연에 대적하는 인간, 프로메테우스>

p282 내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이유는

죽어 없어질 인간에게 선물을 하사한 탓이오. 

훔쳐온 불꽃

가늘고 깊은 회향풀 줄기 속에 넣어두었다가 

인간들에게 주었으며, 

그로써 인간은 모든 기술을 습득하여

나날이 발전하게 되었으니. 


p285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전형이다. 

자연의 노예에 불과한 인간에게 이성과 지혜를 준 프로메테우스를 찬양한다. 


p287 우리가 프로메테우스를 응원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우스에게 맞서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을 목도한 시인은 신의 불의에 맞서 일어선다. 그동안 수많은 인간들이 겪어온 고난을 생각해보면, 제우스가 인간을 몰살하려고 했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때마다 영웅들은 반항했고, 저항했다. 아이스퀼로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도 같은 저항정신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신의 정의와 운명 사이의 화해>

p295 아가멤논의 내면에서 일어난 싸움의 기록이다. 

 소용돌이 그득한 아울리스 바닷가,(where)

 돛을 매고 떠날 준비를 하며

 병사들이 웅성거리는데

 아카이아 함대의 수장 아가멤논은 (who)

 운명의 장단을 맞추며

 제 발로 액운을 쫓아가는 구나. 

(중간 생략)


 “안 따르면, 운명이 나를 칠 것이고

 따르려면 저 어린 자식을 죽여

 가정과 가문을 조각 ㄷ내고

 고귀한 피를 내 손에 받쳐

 제단에 뿌려야 하리니. 


 어느 쪽도 내 길이 없다. 

 이대로 험한 바다에 나가 

 내 소중한 전우들을 잃어야 하는가. 

 제단에 딸자식의 피를 뿌리고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바람을 잠재워야 하는가. 

 신들은 이 길을 원하는가. 

 피로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는가. 


 p299 누굴 죽일지는 신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p300 캇산드라의 독백중에서 


 무섭도다, 저 계략. 

 보이는 구나, 

 지옥의 올가미. 

 함정, 그래, 음모.

 이불 속 공범, 살인자. 

 복수의 여신들이여, 내려오소서. 

 돌로 저 살인자를 쳐죽이소서. 

 죽이소서. 


p302 <<아가멤논>>부터 지금까지 관객들은 더러운 욕정과 죄악의 구렁텅이들을 지나왔다. 왕이고 왕비인 인간들조차 저렇게 싸구려 욕망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죽이더니, 갑자기 반미치광이들처럼 날뛰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사람다운 남매 둘이 나타나 무대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있다. 

 

p303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 합창단이 모두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여기다. 


p304 오레스테스 : 어떻게 해야하지? 어머니를 죽여?

 퓔라데스 : 신의 말을 따를래, 사람들 말을 따를래?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게 낫지 않을까? 


p305 그런 의미에서 <<코에포로이>>는 운명과 맞선 싸움에서 결국은 지고야 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에우메니데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오레스테스의 재판 부분이다. 이 재판은 모든 비극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p306 재판 결과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렸다. 반은 무죄, 반은 유죄 평결을 내린 것이다. 이때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아테네 여신은 오레스테스의 편을 들었고, 그래서 무죄 석방되었다. 


 그럼으로써 운명은 정의로 바뀌었다. 

 

p307 운명 대신 섭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꾼 시인?

p307 아이스퀼로스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첨예한 싸움을 과감하게 건드린다. 신들과 인간이 결국 조화 가운데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시인은 그 시점에서 신의 세계조차 정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Chapter 10 시민 페리클레스 

p311 예수가 태어나기 500년 전에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있었다. 한 시대에 자기 이름을 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p312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 장본인이다. 

페리클레스에게는 네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페리클레스는 머리가 좋다. 

 둘째, 말을 잘한다.

 셋째, 아테나이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넷째, 사심이 없다. 

 지능과 웅변, 애국심, 성실성, 결정적으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를 잘 이해하고 있고, 아테나이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p313 조형예술을 발전시킨 것도 그리스 민족의 심장에 생명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 

“용기가 자유를 낳고, 자유가 행복을 낳습니다. 우리가 이 두려운 전쟁 앞에서 용기를 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일깨웠고, 그로 인해 그리스 사람들은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페리클레스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누구나 예견하지만 제대로 대비할 수 없는 죽음 때문이었다. 죽음이 계획의 완성을 방해했다. 또 한편으로는 페리클레스가 가지고 있던 애국심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르게 읽었기 때문이다. 즉 아테나이 제국주의로 읽은 것이다.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했던 명연설가>

p317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페리클레스가 대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그는 이성의 화신이었다. 창조적이고 열정적이고 과학적이고 정확하며 예술적이고 통찰력이 넘쳤다”고 한다.


<민주주의, 꽃피자마자 시들다>

p318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페리클레스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한 바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듣기에는 기분 나쁠지 몰라도, 페리클레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p322 페리클레스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는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에 방해가 되었고, 심지어 시들게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제국으로 가는 길>


<아테나이 제국과 억압적 민주주의>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

p330 ‘순수한 아름다움’의 절정이었다.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 시민들의 심미안 자체가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했다. 


p334 파르테논은 페이디아스의 걸장 중의 걸작이다. 

 사실 페이디아스와 소포클레스와 페리클레스는 한팀이었다. 그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것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안티고네>>라는 작품을 쓸 당시에 소포클레스는 조달청의 재정 담당이었다. 즉 동맹국에서 징발된 물자들을 배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왕>>같은 대작을 쓰고 있다고 해서 시민으로서 중요한 공직을 수행할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다. 정치 성향은 서로 다르지만 세 사람 공히 같은 시대에 아테나이를 이끌었다. 소포클레스는 연극으로, 페이디아스는 아크로폴리스 재건축으로, 페리클레스는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다. 


p335 파르테논은 수학 공식 속에 갇힌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건축물이다. 수학이 아닌 감성을 건드리는 건축물이다. 파르테논에는 질서가 있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살아 숨 쉬는 질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파르테논에 쓰인 직선은 실제 직선이 아니다. 마치 우리 삶에서 마주치는 직선들이 완벽한 직선이 아닌 것과 같다. 원도 마찬가지다. 고르지가 않다. 파르테논에 구현된 수학은 딱 떨어지는 수학이 아니다. 조금씩 빗나간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예술적으로 약간씩 뒤튼 것이며, 그럼으로써 각면들이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다. 파르테논은 살아 있는 건축물로 만든 힘은 바로 비틀기에 있다. 


p336 도대체 이 건축물에 어느 것 하나 아귀가 맞는 것이 없다. 그게 오히려 건축물 전체에 안정감을 주고, 역동성을 부여한다는 이 기막힌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르테논은 한마디로 영원하다. 그것도 부동자세의 영원함이 아니라, 움직임의 영원함이다. 

 

p339 이처럼 파르테논 신전을 구성하는 수학은 생명체의 수학이다. 

 파르테논은 로잔 성당에 비해 작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멎게 하는 위엄이 있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규모보다 비율이 중요하며, 신전을 보고 나면 크기 생각은 잘 안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파르테논 앞에 섰을 때,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굳이 과장할 생각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파르테논을 보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행복하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를 볼 때 느끼는 행복과 비슷하다

건축물을 보면 느끼는 감정이 몇 개 있다.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웅장함에 눌려 기가 꺾기거나, 세세한 조각과 무늬들을 보며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깃들었겠구나 한다. 건축물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아주 제한적이다. 근데 앙드레 보나르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행복을 느낀단다. 생명체를 볼 때 느끼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단다. 사진을 찾아 봤지만,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잘 느낄 수 없다. 사실 6.5도 8.3도의 기울기는 아주 미세하기에 눈으로 알아차리가 힘들다. 기둥들이 안정감 있게 모여있는 모습을 식별해 내고 싶었는데 사진으로는 불가능했다. 실제로 보고 싶다. 신혼여행은 그리스로 가야 할 까보다. 생명체를 보는 듯한 행복감에 젖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즐거운 신혼여행이 되지 않을까? 


<영광과 실패>

p343 페리클레스의 영광과 실패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닫게 된다. “문명은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문명이라야 한다” 그리스 문명은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과 용기라는 열매를 주었다. 하지만 그 열매 속에는 쓴맛이 도사리고 있다. 그게 없어지기 위해서는 다시 몇 세대가 더 흘러야 했다. 



그리스인 이야기 2 (소포클레스에서 소크라테스까지)

 Chapter 1 안티고네의 약속

p11 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  


p12 사실 비극이란 아테나이 민중들을 민주주의와 시민 자유의 옹호자로 만들어 준 역사의 압력에 그들의 시적인 언어로 기록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 : 한계를 초월하려는 영웅의 투쟁>

p13 비극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로운 인간들의 교육이야말로 시인 본연의 임무였다. 비극은 원칙적으로 상당히 교육적인 장르다. 

 시인이 관객에게 보여주는 극적인 투쟁 장면은 인간 본성이 지니는 힘의 확장, 초월, 인간을 영웅으로 끌어올리는 투쟁을 담고 있으며, 이는 비극의 고유한 주제이기도 하다


p14 영웅의 죽음은 비극적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비극적인 것은, 우리 인간의 현실에서, 소포클레스와 그와 동시대를 산 인간들의 경험 속에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신들의 존재다. 신들은 인간의 초월, 영우응로 피어나려는 인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 비극들은 하나같이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인간, 장애물에 부딪힘으로써 미지의 세계와 대면해 위대함의 새로운 차원을 열려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p14~16 그렇지만 연속되는 시련을 통해서 인간 조건이라고 하는 좁디좁은 감옥은 차츰 넓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영웅의 승리와 죽음이 담보가 된다. 비극은 항상 지속되고 변화하는 인간 세상의 미래를 다루며, 이를 표현하고 변화시킨다. 


아니, 그 어떤 위대한 비극도 완전히 끝나는 법은 없다. 모든 비극은 마지막까지도 열려 있다. 새롱누 별들을 향해 열린 고아대한 하늘을 어떤 약속들이 유성처럼 관통한다. 비극은 존재하는 동안, 곧 그 비극을 태어나게 한 조건들을 털어내고 다른 사회에서 여러 형태로 변신해가는 동안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기도 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빛나기도 하며, 그 위대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기도 한다. 모름지기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들의 영속성은 일너 식으로 설명된다. 


<안티고네와 크레온, 대립되는 가치의 충돌>

p16 과거의 언어로 우리에게 가장 현대적인 가르침을 주는 작품도 바로 <<안티고네>>다. 


p20 고대의 시인은 감상이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거부한다. 


p21 안티고네는 말하자면 인간 존재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떨어져버리지 않을 것임을 보장해주는 담보였다. 


p22 이 어슴푸레한 빛(새벽빛인지 석양빛인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가운데에서, 우리는 ‘무적의 에로스’를 찬양하는 합창단과 함께, 우리를 고양시키는 진실을 찾아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p24 여주인공이 생을 마감하는 고통과,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비판하려 드는 노인들 앞에서 고독의 씁쓸함을 노래하는 안티고네의 탄식 장면, 이 근사한 절구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적인 주제 중 하나를 보여준다. 


p25 비극에 으레 등장하는 주제, 즉 삶에 대한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죽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제를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 찬란하게 빛나는 진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26 그리스 비극은 공포가 인생의 영원한 모습임을 모르지 않는다. 공포는 단호하게 극을 휘어잡고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닮은꼴 성격, 상반된 영혼>

p27 <<안티고네>>는 가치관의 문제를 제기한다. 


p28 <<안티고네>>에서는 어디까지나 실존의 갈등, 개성이 강하고 각자 다르게 생긴 인간들, 개인들의 갈등이 작열한다. 

 모든 시인들 중에서도 비극 시인은 자신 안에서 또 우리 안에서 싸움을 벌이는 자식들, 그렇지만 결국 시인 자신이자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자식들의 불협화음을 통해서만 목소리를 들려준다. 


p29 동일한 성격을 지닌 정반대의 영혼, 타협할 줄 모르는 결연한 의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투지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불관용과 가차 없음으로 부정한 의지. (안티고네와 크레온)


p31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안티고네는 이스메네에게 일침을 가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셋째 딸 코딜리아와 같은 생각이다. 


“전부를 주지 않을 거면 아무것도 주지 말 것”


p32 모름지기 모든 고귀함은 배타적이다. (앙드레 보나르는 안티고네가 사랑하는 하이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평가들의 의견과 함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감)


<안티고네, 개인의 양심의 상징>

p37 무릇 모든 열정이 그렇듯이, 이 사랑은 안티고네의 내면에서 굶주린 불길처럼 활활 타오른다. 이 불길 속에서 다른 모든 사랑은, 단 하나의 강렬한 사랑의 불꽃 주변에서 빛을 잃은 채 한 줌의 재로 타버린다. 


p39 “나는 증오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p41 시인이 창조한 이 인물은(안티고네) 이 대목에서(위의 대사) 창조자인 시인마저도 넘어선다. 세월마저도 넘어선다.......


<크레온, 국가 권력의 상징>

p41 반면 크레온에게 모든 것은 이기심이다. 나는 이 말을 고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이기심 말이다. 


p43 크레온의 본성은, 그의 원칙에 입각해서 볼 때, 불임성이다. 그가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모든 진실은, 이 저주받은 땅에서 머리로 받아들이는 진실이며, 공허한 진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임성이 뭘까? (질문)


p43 이 위대한 왕의 본질은 따지고 보면 두려움이다. 무기력과 연결되는 두려움. 


<우리와 닮아 미워할 수 없는>

p44 안티고네의 고독은 인간이라고 하는 모든 피조물이 생의 마지막 투쟁에서 보여주는 불가피한 고독이다. 


p45 반면 시인의 천재성이 탄생시킨 모든 고통 받는 인물들, 그 인물들에게로 향하는 연민의 한가운데에서 크레온은 가장 참담한 고독을 맛보아야 한다. 


p46 우리는 안티고네이면서 동시에 크레온이며,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소포클레스의 천재성과 예술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다. 그는 너무도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등장인물 각각의 삶에 동참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인물들이 우리 앞에 등장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에 우리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동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의 삶을 발견한다. 


<대립하는 가치들의 화해와 조화로운 삶>

p49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가 우리의 내면적인 삶이 지니는 무질서를 환하게 조명하는 것은 결국 그것으로부터 질서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비극적인 갈등으로부터 그는 우리의 풍요로운 감정들의 단순한 나열을 뛰어넘는 즐거움, 즉 이것들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이것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비극 작품 <<안티고네>>는 그러므로 우리 인간 존재가 안고 있는 무수히 많은 형상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그 균형 속에서 우리 주변에 놓인 사물들의 총체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세계는 스스로를 지탱하고 설명된다. 


p50 그 결과 우리는 인생의 복합성, 인간 존재와 그 존재의 단일성, 의미가 지니는 풍요로움이 주는 기쁨을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맛보게 된다. 모든 것이 전체를 이루는 가운데 풍요로움 속에서 우리의 삶을 포착하며, 그 삶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p53 안티고네가 자유라면, 크레온은 운명이다. 


<개인의 자유가 꽃피는 사회에 대한 약속>

p55 우리는 비극 한가운데서 인간적인 새로운 세계, 안티고네가 더 이상 고통 받지 ㅇ낳을 세계, 크레온이 더 이상 참담해하지 않아도 좋을 세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이제까지 자신을 분열시키던 검을 들고 운명과 동등한 위치에서 맞서 싸움으로써 비극적인 힘을 무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Chapter2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p61 특히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뮈론과 폴뤼클레이토스,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뤼시포스 등 고전시대의 세 거장들은 모두 청동 조각 전문가들이다. 


<나무로 신들의 형상을 깎다>

p63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첫 번째 연장, 즉 손을 훈련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p64 “신화는 단순히 그리스 예술의 병기창일 뿐 아니라, 그리스 예술을 기른 젖줄”이기도 했다. 


<그리스 최초의 조각, ‘사모스의 헤라’>
p69 그런데 사실 신은 ‘재현’될 수 없다. 세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을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벌거벗은 남자의 입상 쿠로스>

p70 쿠로스는 첫째 젊음으로 충만한 신을 의미한다. 


p74 앞으로 나와 있는 다리는 항상 왼쪽 다리다. 여기서 우리는 이집트 조각이 그리스 조각에 미친 영향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예술은 하나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것을 정면성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 법칙은 이집트 예술 전반에 나타나며, 그리스 예술은 500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법칙에서 탈피했다. 


<옷을 입은 여자의 입상, 코레>

p79 그리스 조각에서 의복은, 남자가 그것을 입는 경우, 또는 여자가 그것을 벗는 경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막힌 수단이 된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으로 재현한 신의 이미지>

p80 인간이라고 하는 피조물을 점점 더 확고한 방식으로, 곧 살집과 더불어 살아 있는 모습처럼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구나 조각가들은 자신들이 끊임없는 열정을 기울여 파헤쳐가는 인체를 신의 몸이라고 간주했으므로 그 의미는 한층 더 증폭된다. 남자와 여자의 몸, 그거슨 신에 대한 가장 나은 재현, 신의 가장 정확한 이미지였다. 결국 그 같은 이미지를 조각하면서 그리스 예술가들은 그리스 민족이 섬기는 신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말 할 수 있다. 


p85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몸에 대한 사랑, 이것이 바로 석조 조각가의 창조력을 이끄는 이중의 방향타다


<부동자세에 움직임을 부여한 조각가, 뮈론>

p86 자연에서도 이따금씩 그렇지만 예술에서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몇몇 시도가 있는 듯 마는 듯하다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새로운 것이 태어나곤 하기 때문이다. 


p87 뮈론은 그의 작품 ‘원반 던지는 사람’과 더불어 우리를 행동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가 안내하는 세계에서는 불현듯 움직임이 최고의 권위로 지배하며, 인간은 균형에 의해서 지탱되는 힘에 취한다. 이런 점에서 뮈론은 조각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대인인 아이스퀼로스가 연극에 있어서 행위의 창시자인 것처럼 말이다. 


<고전주의 : 인간이라는 피조물과 진리에 대한 애정>

p92 고전주의 시대의 조각 작품 가운데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으로서의 본분 또는 신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자들이 누리는 고귀한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 


<가장 이상적인 인체 비율의 탄생>

p92 폴뤼클레이토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그리스 예술의 결정적인 시기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사실주의적인 완벽함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따라서 고전주의적인 인본주의의 정점에 위치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p95 폴뤼클레이토스는 틀림없이 퓌타고라스로부터 배웠을 텐데, 인간의 구조에서 숫자가 가지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이를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걸작품이란 머리카락 한 가닥의 차이까지 찾아낼 만큼의 수많은 계산의 결과”라고 말했다. 


<신들을 조각하는 거장, 페이디아스>

p96 “예술에는 완벽의 정도가 있으며, 이는 자연에 성숙한 정도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라고 라브뤼예르는 말했다. 페이디아스의 천재성은 정확하게 이 성숙 지점에 위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예술은 상고 시대 예술에 비해서 훨씬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금 일종의 원시인, 그러니까 고전주의 이전 시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p97 페이디아스는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고, 사물들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p99 그만큼 고대에 신들은 인간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다. 


<대중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신들>

p100 평화란 그가 보기에 그리스 민족의 용기와 지혜의 산물이었다. 


p103 어쨌든 ‘신을 만드는 사람’이 빚어낸 제우스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는 모름지기 위대한 작품이란 세기를 거듭하면서 꾸준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Chapter 3 과학의 탄생 :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p107 인류의 역사에서는 마치 폭발처럼 갑작스럽게 새로운 형태의 행동이나 사고가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그리스, 그러니까 이오니아에서 기원전 7세기 말 무렵에 탈레스와 그를 따르는 학파와 더불어 과학, 즉 합리적인 과학 지식이 출현한 것도 그런 식이었다. 


p108 아닌 게 아니라 합리적인 과학과 ‘신화’를 서로 배척하는 대립되는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이 두 가지가 오랜 세월 동안 뒤섞여 있었음을 부인하는 처사나 마찬가지다. 또 이 두 가지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장애를 극복하고, 우주와 우주를 지비해나는 법칙으로 인해서 인간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왔음을 모르는 척하는 처사다. 


<신화와 과학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

p108 지극힌 순진한 상태로나마 이 과학은 인간이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이며, 언어와 사고는 사회생활의 결과물임을 간파했다. 또한 당시의 과학은 스스로를 기술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인간이 주변 환경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p109 활의 발명은 구석기 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6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활은 저장된 에너지를 사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활은 엄연히 기계에 해당한다. 

 적대적이며 이상하고, 비극적인 외부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보호할 새롱누 수단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운명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리를 고안해냈다. 인간에게 윤리란 살고 죽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굶주림에 대항해서는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다양한 방식을 생각해냈다.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계곡에서는 기원전 60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2천 년이라는 기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기술 혁명이 고대 문명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상의 집결지, 이오니아>

p116 화폐, 은행, 어음 - 이오니아의 발명품

 그런데 이 모든 발명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며, 우리 시대, 아니 우리의 아득한 후손들에게까지 전수되어야 할 가장 훌륭한 발명은 뭐니 뭐니 해도 과학의 발명이다. 


<신을 배제하고 세계를 설명하다>

p117 탈레스는 단순한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몇몇 촌철살인의 경구들 중에서 그의 천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무지는 무거운 짐”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p118 과학의 목적은 흔히 말하듯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p121 탈레스에게 물은 원초적인 물질로, 이 원초적인 물로부터 흙이 생겨났으므로, 흙이란 물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공기와 불도 수증기, 즉 물의 발산물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은 물에서 태어나며 물로 돌아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최초의 유물론자, 탈레스>

p123 당시에 그리스인들은 이미 기하학적인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언제나 그렇듯이 정확한 기술에서 출발하는 이 학문을 발명해냈다. 훗날 수학이라고 불리게 될 학문은 앗쉬리아인들과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


p124 그리스인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이유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학 기하학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첫째는 항해였고, 둘째는 신전건축이었다. 


p127 그리스인들은 이렇듯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기하학이라고 하는 학문을 창조했다. 

 덕분에 인간들은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엄격한 법칙을 읽을 수 있었다. 


<탈레스의 후계자들>

p131 탈레스는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연구하지 않았다. 과학이란 연구자들의 협업이 있어야만 발전할 수 있다. 

우선 (1)아낙시만드로스가 있다. 그는 최초의 지도를 작성했다. 


p132 ‘그노몬’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로, 이를 이용해서 해시계를 만들었다. 그노몬은 쇠막대인데, 이것을 평평한 땅에 수직으로 세워 그림자의 변화를 관찰했다. 


크세노파네스 : “황소와 발, 사자에게 손이 달려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이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서 신을 재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황소와 말, 사자로 신의 모습을 재현할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나 엠페도클레스


p133 탈레스의 후계자들이 발견한 것중 하나는 천체에서 해마다 진행되는 태양의 정확한 움직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음(音)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정확한 수학적 값어치의 발견이다. 기원전 5세기에 일부 학자들은 이것에 친숙했던 것이다. 


<상식의 조롱거리가 된 천재>

p134 과학이란 참으로 인간에게는 어렵기 그지없는 정복의 대상이다. 상식에 도전해야 하며, 상식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고대 유물론자의 사라진 저서들>

p135 데모크리토스는의 유물론은  그와 탈레스를 갈라놓는 한세기라는 시간 속에서 파르메니데스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도전을 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반대 의견을 반박함으로써 또 안정과 변화를 동시에 뛰어넘음으로써 데모크리토스는 자신만의 답을 찾아갔으며 나름대로 자연의 체계를 정립해갔다. 여기에는 이들의 세부적인 논쟁은 건너뛰고, 데모크리토스가 세운 자연의 체계를 살펴보려 한다. 


p138 데모크리토스는 수학에 대해서 글을 썼다. 그의 수학적 발견을 증언한 아르키메데스에 따르면 뛰어난 논문들이라고 한다. 

그의 저작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원자설, 최초의 무신론적인 학설>

<인간은 “물과 진흙 속에서 태어난 우연의 산물”>
p143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과 진흙 속에서 태어난 우연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물질을 사랑한 이유로 가장 핍박받았던 학자>

p147 우리가 그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는 분명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소명을 타고났는지를 확인해줄 것이다. 인간이 원초적 진흙에서 나왔다고 믿었던 만큼, 그는 우리를 열광적으로 흥분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진화의 한 지점에 도달했으며, 앞으로의 진화를 만들어갈 장본인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p148 “자고로 자기 고향에서 인정받는 선지자는 없는 법”이라고 라퐁텐은 평했다. 


Chapter 4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 운명에 화답하기 

p151 이제 다시 인간의 삶과 세계를 파헤치는 또 다른 방식, 즉 그리스 비극으로 돌아가보자. 

과학 이야기를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문학적 인간이 되었나? 그리스 비극이 내게 이렇게 흥미 진진한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오이디푸스 신화>

p152 신들이 방향타를 쥐고 이끄는 이 세계에서 과연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고귀하고 영예로운 인간의 파멸>

p153 “관객들은 보시오. 끝까지 꽉 조인 태엽, 그런까 한 인간의 계산된 파멸을 위해 지옥 같은 신들이 완벽하게 구축한 장치가 한 인간의 일생을 따라 천천히 풀려가는 과정을 지켜보시란 말이오.”


장 콕토가 현대적으로 해석한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는 이런 말로 막을 올린다. 


p156 오이디푸스는 진실되며 참된 인간이다. 그가 높은 영예를 누리는 것은 마땅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에게 느끼는 첫인상이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같은 장소에, 그러니까 계단 위쪽에 두 눈이 피범벅이 된 채 나타난다. 고귀함의 정점에 대비되는 비참함의 절정을 나타내는 이미지다. 


p157 그런데 관객들에게는 모든 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며 신이 미리 세워놓은 계획에 따른 빈틈없는 실행이지만 오이디푸스에게는 돌발적인 사고와 우연의 연속으로 비친다. 

우리의 삶도 이럴까? 이런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존재인가? 


<눈부신 진실 앞에서 스스로 두 눈을 찌르다>

p160 왕비는 라이오스 왕이 ‘삼거리에서’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세부 사항이 오이디푸스의 잠재의식을 파고들어, 그때까지 잊고 있던 기억들을 뒤흔들어놓았다. 


p164 여기서 시인은 적절한 꾀를 내어 문제의 목동이 공교롭게도 삼거리 살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하인과 동일 인물이 되도록 극을 전개시킨다. 이 대목에서 소포 클레스가 보여주는 경제의 원칙은 극 전체가 지니는 간결한 구성 스타일에 잘 어울린다. 


진실은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장님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p165 현기증 나게 몰아치던 극중의 행위는 갑자기 서정적인 기나긴 탄식으로, 이별과 회한, 자신으로의 회귀가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멈추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극의 말미에서 행위는 주인공의 마음속으로 내면화되기 때문이다. 


<인간 조건에 대한 성찰, 그리고 계속되는 삶>

p166 우리는 파멸의 운명을 맞은 오이디푸스의 내면에서 또 다른 삶이 박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삶은 이제 곧 늠름하게 전진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이 자신을 향해 던진 그 돌들을 주워 새로운 무기로 삼을 것이다. 그는 싸우기 위해 다시 살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삶은 인간 조건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성찰을 거친 후의 삶이 될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종반부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성찰이다. 


<이제는 오이디푸스가 신들에게 화답할 차례>

p167 비극적 울음을 운다는 것은 숙고하는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머리로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극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시적인 작품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고 그 의미를 지적인 언어로 재구성하려 드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신에 대한 반항>

p168 우리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오이디푸스는 결백하다. 죄를 지은 자는 신이다. 라고. 


p174 아니, 당사자인 오이디푸스가 분통해하지 않는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분기탱천한단 말인가? 그와 더불어 우리는 신들의 질서, 정의를 넘어서 인간에게 부과되는 그 질서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

p174 분개심, 반항심이 첫 번째 반응이라면, 이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성찰의 두 번째 단계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릇 모든 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의 조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열어준다. 

 이 작품은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최고의 권한을 지닌 한 인간이 인간을 거부하는 자, 곧 신과 충돌하는 비극을 다루고 있따. 

 시인은 오이디푸스를 완벽한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는 지혜, 판단력, 어떠한 경우에도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통찰력을 구비하고 있다. 그는 또한 결정력, 에너지, 행동에 생각을 불어넣는 능력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가 가능한 사람이다. 그리스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고스와 에르곤, 즉 사고와 행동의 주인이다. 요컨대 그는 생각하고 설명하며 행동하는 사람이다. 


p175 숙고를 통한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항상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숙고를 통한 행동, 공동체를 위한 행동의 주체, 이것이 고대인들이 생각한 완벽한 인간이었다. 


p179 두눈을 찌르는 행위는 그 엄청난 결과로 인해 우리를 극의 가장 심오한 의미, 의미의 정점으로 이끈다. 

 운명이 그에게 마련해놓은 벌을 그는 스스로 요구했고,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그가 한 최초의 몸짓이었다. 신들도 자유로운 인간인 그를 어찌할 수 없을 터였다. 오이디푸스는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의지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격렬하게 합류했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인 것 같다. 신을 한순간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대목이다. 


<신의 뜻에 대한 지지와 해방>
p180 이처럼 비극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의미는 지지인 동시에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p181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이중적인 움직임인 사랑. 여기서 사랑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현실과 그 현실이 부과하는 조건을 존중한다는 것이며, 둘째, 살아 있는 피조물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삶을 향한 도약을 뜻한다. 


p182 또한 오이디푸스는 이 질서와 조화, 실존의 충만감에는 위협이 따르며, 그 위협은 위대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망가뜨린 세계를 지지한다. 그 세계는 설령 우리가 사는 세계를 향해 어떤 시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신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p183 신은 수수께끼이며 질서다. 신은 고유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 신은 모든 것을 알며, 전능하다. 그러니 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신이 우리 인간을 살아하낟고 말하기 어렵다고 해도, 적어도 우리 인간 이장에서는 신의 지혜,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지혜와 협약을 맺었다는 결론 정도는 내릴 수 있을 것이다. 


p186 이처럼 인간은 운명에 대답했다. 인간을 복속시키려던 운명의 시도에 인간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노년에 다시 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오이디푸스>

p191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그러므로 평화와 투쟁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흐름의 끝에 놓여있다. 그의 죽음은 투쟁의 결과이며 기다림의 완성이다. 


p192 오이디푸스는 세 가지 덕분에 시련 속에서도 버텨왔노라고 딸에게 말한다. 세 가지 중 첫째는 인내다. 그는 ‘사랑하다’의 의미도 담고 있는 이 용어를 선택하여 제일 앞에 두었다. 두 번째로는 체념을 꼽는다. 이 체념 또한 존재와 사물들에 대한 사랑과 혼동될 수도 있따.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면서 가장 효과적인 덕목은 ‘영혼은 단호함’, 즉 불행마저도 어찌지 못하는 자연적인 고귀함, 관대함이다


p198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것처럼 보인다.(가령 니체 같은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게 보일 것이다). 운명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 말이다. 


<죽음, 삶의 투쟁 끝에 찾아오는 평화와 휴식>

p202 소포클레스는 죽음만이 인간의 삶을 완성시켜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건 그에게 별다른 충격이 아니었다. 인간은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났다. (오이디푸스는 아예 대놓고 “나는 고통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산다는 건 고통과 마주칠 위협 속에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고통으로 내모는 삶의 한시성은 동시에 우리의 해방을 완성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인간도 고통을 벗어날 재간이 없는 것일까? 우리의 노력이 고통을 줄이는 데 몇 퍼센트나 영향을 줄 수 있을까? 


p203 소포클레스는 죽음에 대해 평화, 삶의 감추어진 원천인 이 평화 말고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 


p206 인간은 운명을 이기고 넘어서며, 천재성이나 불행을 통해서 영웅들의 하늘을 수놓는다. 오이디푸스와 소포클레스도 이 하늘에서 당연히 한자리씩 차지할 권리가 있다. 


Chapter 5 핀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승리자를 찬미하는 테바이의 시인>

p216 핀다로스는 “인간을 위한 모든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가지 유형의 남자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세 가지 유형의 남자란 “뛰어난 영감을 지닌 시인, 아름답게 치장한 남자, 영광으로 빛나는 남자”들이다. 


<전재옵다 운동 경기가 관심사>

p217 기원전 490년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480년과 479년에 페르시아 전쟁을 겪게 된 것이다. 


p218 인간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체를 온전하게 소유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젊음이 주는 아름다운 팔다리”가 그에게는 인간의 삶이 정복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다. 이 가치는 지속적인 의지와 육체적, 도덕적 금욕이라는 값을 치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그리스 언어의 대가>

p224 치욕에 답하기 위해 그의 시가 존재한다는 식이다. 


p225 첫 행부터 마지막 행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보기 드물고 환상적인 꽃처럼 피어나는 문체가 탄생한다. 


<군주들의 조언자>

p226 그는 그들의 조언자이자 친구였다. 조언자인 동시에 칭송자라고 하는 어려운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토대로 단호한 도덕적 강론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때문에 그보다 훨씬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박퀼리데스에게 적잖은 주문을 빼앗겼다. 


p229 “오,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삶을 갈구하지 마라. 대신 너에게 주어진 활동의 장에 지치도록 탐닉하라.”


p230 “비록 가진 것 없이 비천하다고는 하나, 나는 위대한 사람 가운데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네.” 자부심에 가득 찬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알고 있노라고 선언한다. 그는 시인이므로 그가 쓴 송가들이 그에게 영예를 안겨준다. 히에론처럼 막강한 권력자가 드물듯이 자신처럼 위대한 시인도 드물다는 암시가 아니겠는가. 한순간 우리는 그보다 훨씬 후대에야 등장하는 프랑스 시인의 메아리를 미리 듣는 듯 하다. 


<해묵은 신화에 순수한 아름다움을 불어넣다>

p233 아름다움은 감정 속에도 태도 속에도 깃들어 있다. 아름다움의 이 두가지 체제에는 고귀함이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모든 태도, 모든 감정이 한결 같이 위대함을 지향한다. 


<테론을 위한 송가>

p234 핀다로스는 비극적인 정서를 지닌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신들의 선의와 신성함을 말하는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 전체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희망하는 방향으로 경도되어 있다. 


p240 핀다로스에게 인간의 생존이란 매우 소박한 형태를 취했다. “인간의 지속은 영원하다. 자손이 없어서 망각 속으로 떨어지게 되는 종족이 아니라면 영원히 살 것이며, 그런 종족은 고통 따위는 알지 못한다.”


<찬미하며 충고하는 시인>

p244 히에론의 첫째가는 덕목은 핀다로스가 다른 시에서도 밝혔듯이 영혼의 단호함이다. 


p245 고귀한 군주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최악의 잘못은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 다시 말해서 ‘원숭이’처럼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군주의 덕목과 이상을 제시하다>

p247 “이들 중에서 청춘을 아무런 위험도 없이 그냥 시들어버리게 하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만의 고유한 고귀함이 뿜어내는 매력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이들은 고귀한 삶, 쉽지 않은 삶을 택했다. 


p248 “아름다운 시가 지닌 음성은 영원히 울린다. 그 음성 덕분에 비옥한 대지의 공간과 바다를 가로질러 아름다운 행위의 영광이 꺼지지 않고 찬란하게 빛난다.” 


Chapter 6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p252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같은 독립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을 이 땅의 다른 민족들과 확연하게 구별 짓는 특징이다. 


<호기심 많은 최초의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

p254 헤로도토스는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궁금했을까? 그는 모든 것에 대해서 궁금했다. 사람들이 무얼하면서 어떠게 사는지가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진기함에 대한 취향이 때론 오류를 낳다>


<기아라는 비참한 현실과 지리학의 탄생>

p260 다만 그와 같은 천재성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 모두 갖추어지더라도 반드시 그 천재성이 발현된다는 법은 없으며, 오히려 전혀 발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음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과학과 문학은 그런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세계 일주>>, 바뷜론 이야기 

p265 “페르시아인들은 자식이 다섯 살이 되면 교육을 시작하며, 이교육은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이들이 가르치는 것은 말타기, 활쏘기, 진실을 말하기, 이렇게 고작 세 가지뿐이다.” 


p266 여하튼 당시 그리스의 직접적인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놀라움이 되고, 심지어 감탄이 되기도 한다. 


<헤로도토스가 상상한 지구, “납작한 원 형태”>


<스퀴티아의 풍습과 점술을 소개하다>

p269 헤로도토스가 먼저 강조하는 것은 침략에 맞서서 저항하는 스퀴티아인들의 독창성이다. 적이 침략해오면, 이들은 일단 퇴각한다. 자신들이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광대한 들판으로 적군을 유인하는 것이다. 이들은 풀이 무성한 드넓은 들판이라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할 뿐 아니라 들판을 가로지르며 이들에게 방어선을 제공하는 큰 강의 도움도 받는다.


p273 그리스인들은 고귀한 품성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다른 인간들과 가까운  존재임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측면에서의 인간성을 통해서 그런 느낌을 공유했다. 잔인하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의 인본주의는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관념론이나 이상주의에만 치우친 인본주의가 아니었다. 


<식인 풍습에 관한 기록>

<판타지에 가까운 인도 이야기>

p278 “인도의 동쪽에는 모래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들이 있다. 그런 사막에서는 개보다 조금 작지만 여우보다는 큰 개미들을 볼 수 있다.” 이 개미들은 원래 마르모트였던 것 같다. 인도 사람들은 마르모트를 ‘개미’라고 부르는데, 그건 녀석들이 땅을 파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일 강의 수원을 찾아>


<그리스적이지 않은 것에 매혹된 역사가>

p285 헤로도토스가 섭렵한 나라들 중에서 이집트는 진실과 진기함이 동시에 담긴 역사와 지리를 추구했던 헬도토스의 진가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나라였다. 


p286 그의 연구가 맞건 틀리건, 그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신비를 파헤치고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그의 끈기야말로 미래에 대한 가장 값진 약속이기 때문이다. 


p287 그는 기쁨에 들떠서 아주 희한한 의식들을 수도 없이 끌어 모았다. 그는 도를 넘는 엉뚱함을 대면했을 때도 충격에 빠지거나 분노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스의 풍습과 다른 것일수록 이 유유자적하고 열린 정신의 소유자를 매혹했다. 그는 어느 순간 이집트에 대해서, 일부 민간 설화나 새뮤얼 버틀러의 <에리훤>>같은 소설에나 나옴직한 “거꾸로 가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정립하고서는 즐거워했다. 


p292 이집트 이야기 : 페로가 실명의 벌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끝났을 때 받은 신탁. 남편 외에 다른 남자라고는 알지 못하는 여자의 소변으로 두 눈을 씻으면 시력을 되찾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페로스는 제일 먼저 아내의 소변으로 눈을 씻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풍습이 다름을 인정했던 열린 정신의 소유자>

p293 풍습은 일상적인 실천에 집착하는 각각의 종족의 사고방식 위에서는 마치 굴레처럼 짓누르는 반면, 풍습 총체에 대한 인식, 즉 종족 각각의 풍습이 다양하며 따라서 서로 모순될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은, 역사가들에게는 정신의 해방을 도와주는 도구로 작용한다. 


p294 어느 날 다레이오스는 가까이 지내는 그리스인들에게 얼마를 주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육신을 먹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레이오스는 사람들이 칼라티아이라고 부르는 인도인들을 오게 했다. 이들에게는 돌아가신 부모의 육신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다레이오스는 그리스인들이 보는 앞에서 칼라티아이들에게 물었다. 통역이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그대로 옮겨주었다. 얼마를 주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시신을 화장하겠는가? 그러자 인도인들은 언성을 높이면서 제발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처럼 풍습의 힘은 막강하다!


Chapter 7 인본주의 의학의 꽃, 힙포크라테스 

p297 힙포크라테스는 오랜 전통에 의지해가면서, 기원전 5세기에 의학의 프로메테우스로 부상했다. 


<<힙포크라테스 전집>>, 성소 중심의 의학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향

p302 <<힙포크라테스 전집>>은 주로 세 부류의 의사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이론에 치중하는 의사들, 즉 모험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철학자들 부류다. 두 번째는 이들의 대척점에 위치한 크니도스 학파에 속한 의사들로서, 이들은 사실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 번째는 힙포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즉 코스 학파의 의사들이다. 이들은 관찰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관찰 결과만을 가지고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세 번째 부류의 의사들은 말하자면 실증적인 정신의 소유자들로서, 자의적인 추축을 거부하고 항상 이성에 의지했다. 


<이론만 중시하는 궤변적 의학>


<관찰된 사실만을 맹신하는 크니도스 학파>

p308 이처럼 의사들의 묘사는 상당히 표현이 풍부하다. 일부 특징들은 주목을 끈다. 가령 환자는 숨을 쉬기 위해서 질주하는 말처럼 “콧구멍을 열고, 여름날 찌는 듯한 더운 공기 때문에 기진한 개들처럼 혀를 길게 내민다.” 이런 이미지들은 매우 정확하면서 충격적이다. 


p311 “신체의 본질이 의학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메스를 쥐고 심장을 적출한 필리스티온>

p313 두 개의 심실은 인간 생명의 원천이다. 그곳에서부터 강이 흘러나오면서 인체 내부 전체에 물을 공급한다. 이 두 심실에 의해서 영혼의 거주지에 관개용수가 공급된다. 이 생명의 원천이 말라버리면, 인간은 죽게 된다. 


p314 학문이란 진실과 ‘적절한 통찰력’, 시행착오 같은 것들이 절묘하게 혼합되는 가운데 서서히, 아주 서서히 축적되어간다. 학문의 축적은 아주 오랜 세기가 지나도록 바벨탑 이야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학자들이 저지른 실수들은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적잘한 통찰력만큼이나 도움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수란 언제나 수정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힙포크라테스 전집>>에 대한 간략한 분석이 이제 막 태동기에 들어선 새로운 학문의 갈지자 횡보를 보여주는 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코스 섬의 의사, 힙포크라테스>

p317 처음에 인간은 야생 동물이나 마찬가지로 모든 식재료를 날것으로 먹었다. 이 과격하고 거친 섭생 방식은 높은 사망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보다 훨씬 ‘유순한’ 섭생 방식을 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질병만 보지 않고 사람을 보다>

p321 “혼자의 몸을 살피는 일은 거창한 작업이다.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언어, 추리력 등을 모두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단어, 즉 추리력이라고 하는 말이야 말로 우리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p322 오랜 시간 담금질해온 방법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밀도 높은 문장으로 유명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험은 유동적이며, 판단은 어렵다.” 


p323 힙포크라테스가 정의하는 의학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정신 신체 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생태계 및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인간을 다루는 의학을 가리킨다. 


p325 힙포크라테스는 병을 고치는 의사이기보다 건강을 지켜주는 의사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인본주의 의학을 꽃피우다>

p327 “지성을 의술의 어느 분야에나 적용해야 마땅하다”


p328~329 힙포크라테스는 대부분의 경우 성찰이라는 말을 정신의 항구적인 태도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이를 지속을 의미하는 시제와 함께 사용한다. 


p334 자연은 스승없이 행동한다. 

깨달음은 곧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 문명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고전적인 주제다. 


p335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유동적인 경험”의 현장에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의사는 겸손하지만 매우 효율적인 생명 제조자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무가 아닌 현실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의사도 그가 환자의 몸에서 발견한 것, 즉 관찰되고 활용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부터 건강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힙포크라테스 선서>

p335 학문의 발전은 결과의 축적보다는 방법의 정당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p336 높은 지적 수준, 겸손함, 사고의 고양, 이 모든 것이 힙포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그 자신도 실천에 옮긴 도덕적 태도를 통해 동시에 찬란하게 완성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의술에 대한 열정>

p341 “사소한 실수”라면 환자 앞에서 인정해야 한다. 의사는 오랜 기간 양식 있는 스승 밑에서 수련을 거쳤으므로 대체로 심각한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로 인해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면, 환자 앞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환자의 안정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의사는 자신의 실수를 기록으로 남겨 후배들이 지침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조금 의아했다. 심각한 실수를 인정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그럴까? 의료 사고도 운명인가? 인간은 모두가 다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인데 말이다. 흠, 뭐라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p343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의술에 대한 사랑은 의사의 인류애를 받치는 두 기둥이다. 


<노예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는 의학>

p346 더구나 의사가 환자를 판단하는 어조가 환자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동일한 것을 보면, 힙포크라테스의 인본주의가 추구하는 학문적인 관심과 인간에 대한 호의를 짐작할 수 있다. 


Chapter 8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p349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이라면,  모든 종류의 웃음이 동시에 들어있는 웃음이다. 풍자적인 웃음과 기쁨의 웃음이라는 두 개의 축을 가진 웃음이다. 그러니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웃음을 포함할 수밖에. 


첫째, 분노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웃음이다. 

p351 그런데 순(順)웃음도 있음을 잊지 말자.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가장 기본적인 재화들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웃음이다. 


p352 “인간은 살아 있는 생명체 중에서 웃을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웃음은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이라고 말이다. 

 풍자적인 웃음과 서저적인 웃음, 이렇게 두 부류의 웃음은 분리하기도 어렵지만 공통된 기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치유의 기능이다. 아르스토파네스는 자칭 아테나이 사회의 ‘선생님’, 아테나이 민중을 가르치는 교육자였다. 웃음은 그가 제공하는 치료법의 한 부분이다. 되찾은 기쁨 속에서 인간은 충만함을 만끽하고, 사회는 균형을 찾는다.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 즉 정화 작용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에게 상식을 돌려주는 웃음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모두 환자들인데, 웃음이 우리에게 건강을 되돌려준다. 

 서로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로 묶여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두 가지 웃음은 현실과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거나 서로 대립하는 것을 억지로 떼어놓지 않는다. 

웃음이 치료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웃음 치료사’들을 지지해줄 수 있는 강력한 증거를 발견했다. 그리스인 이야기에는 없는게 없구나. 감탄함. 


<분노를 머금은 풍자의 웃음>

p358 희극의 역사에서 병정의 가면은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라는 인물만큼이나 널리 애용되었다. 


p360 한편 아리스토파네스는 동시대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던 소크라테스에게 현학적인 학자의 가면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p361 “민중을 지배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지. 잘 섞고, 주물럭거리고, 여러 가지 재료들을 한꺼번에 범벅을 만들고 달콤한 몇 마디 말로 대중들을 사로잡고, 고기찜을 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말을 하는 거라니까.” 


<기쁨으로 충만한 서정적인 웃음>

p363 그 기쁨의 웃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 웃음은 앗티케 시골 마을의 잔치에서 온다. 


<한바탕 웃음으로 드러나는 희화적 진실>

p369 그의 희극이 풍자적인 동시에 서정적이라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랄한 분노의 감정을 분출하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비아냥과 독설, 권력자들에게나 민중들에게 퍼붓는 가장 천박한 쓰레기로 뒤덮인 진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외설스러움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시’라고 하는 왕관을 쓰고 나온다. 


<전쟁없는 도시를 꿈꾸는 <<아카르나이인들>> >


<  <<뤼시스트라테>>, 여자들의 파업 선언>

p373 평화를 너무도 간절하게 사랑하는 까닭에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절제를 강요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파네스가 던진 질문이다. 

 

p374 그가 고안해낸 상황. 천재적인 단순성이 빛나는 설정은 무대에서 과감하도 못해 음란한, 그렇지만 너무도 유쾌하고 건강해서 남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여인들이 자연의 법칙을 거부한 결과는 대단히 치밀하게 전개된다. 

 연인들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다. 


p375 이 작품은 모든 인간에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 곧 평화를 사랑하며, 아니 그보다 더 원초적으로 삶에 대한 사랑과 한바탕 웃음이 들어 있는 작품이다. 삶에 대한 사랑이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육체적인 사랑과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을 통해서만 영속될 수 있지 않은가? 


<아테나이 민중의 소망을 담은 <<평화>>  >

p380 그의 상상력이 빚어낸 행동들은 무척 환상적이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현실, 즉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스 민족이 요구하는 평화라고 하는 현실을 더 깊이 들어다보도록 이끈다. 


<팍팍한 현실에 웃음을 주는 풍자 시인>

p381 오히려 ‘파라다이스’ 즉 인간이 어느 때라도 갈 수 있는 유일한 정원, 인간에게 노동과 노동의 결실, 일용할 양식과 휴식을 동시에 제공하는 유일한 정원, 특히 그리스인들이 피조물간의 원초적인 형제애, 동물들과 나무들과의 우정, 신들과의 친근한 교류 등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정원을 선사하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한다. 이 정원은 바로 자연이다. 


<자연과의 합일에서 원초적인 기쁨을 찾는 <<새>> >

p390 새들은 이제 인간의 신이 되었다. 신들은 인간이 행복과 빵을 얻는 자연 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지, 우리를 신으로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우리에게서 예언자 뮤즈를 얻게 되는 셈이지. 

 미풍과 계절, 

 겨울, 여름, 따뜻한 햇볕을 알려주는 뮤즈. 

 우리는 당신에게서 멀리 도망가지 않아. 

 저 높은 곳, 구름 속에서, 

 제우스처럼 근엄하게 앉아 있지 않는다니까. 곁에 있으면서, 

 우리는 당신에게, 당신과 당신 아이들에게, 

 당신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부와 건강,    

 생명과 평화, 젊음, 춤과 축제, 

 그리고 ...... 새 젖도 주겠어. 


 p391 새 젖이라는 단어는 물론 농담이다. 새의 젖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리스어로는 ‘완벽한 행복’을 뜻한다. 


아리스토파테스는 풍자 시인인 동시에 즐거움, 삶과 자연, 자연 속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세속적인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기도 하다. 

 

p392 그는 웃음 속에서 새들로 하여금 새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신통계보학을 전개시키게 한다. 


p395 아리스토파네스는 꿈을 꾸고, 신명나는 놀이를 벌인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꿈과 놀이를 벌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과 놀이는 깊이 숨겨진 우리의 본성, 우리의 과거, 우리의 조상, 우리 민족에게서 애써서 퍼올려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꿈과 놀이는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무 사이에서 놀기만 한다고 해서, 새와 나무를 사랑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새들에 대한 숭배를 떠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라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했다. 


p396 아리스토파네스가 자연 속에서 찾아낸 존재와 사물들을 희극을 위해 사용하기를 멈추고, 문득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 대목도 있다.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헛소리의 망령에 혼을 빼앗긴”것 같은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아리스토파네스는 “신의 음성”인 매미나 꾀꼬리처럼 평소 과묵함 속에 침잠해 있던 자연이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음성에 불과해 보인다.


Chapter 9 지는해

p403 오포라는 막바지에 접어든 여름의 영광을 뜻한다. 오포라는 동시에 이제 막 시작되려는 가을을 의미한다. 태양은 이제 지평선을 향해 내려간다.


<문명의 황금기에 드리워진 그늘>

p403 하나의 문명은 역사가 재미삼아 즐겨보는 일종의 놀이, 미래의 학자들에 의해 분류되어야할 관습과 작품의 덩어리가 아니다. 하나의 문명이란 오히려 하나의 민족이 자신들과 남들을 위해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기회, 아니 일련의 기회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전쟁과 내부 분열>

p404 우선 전쟁의 상시화를 들 수 있다. 전쟁은 2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고삐 풀린 제국주의>


<민주주의의 붕괴>

p410 문화적 창조 행위는 기원전 6세기부터 5세기 말엽까지 풍성하게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의 말기에 해당하는 기간에는 창조가 창조를 낳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었다. 


p414 “난 민중을 알죠. 그자들을 어떻게 낚아야 하는지 안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내 사유물이나 다름없죠”라고 그는 말한다. (클레온)


<소송 망국 아테나이>

p417 판관들에게 매일 필요한 만큼의 소송을 제공하기로 한 협약 조항을 정치가들은 정확하게 준수한다. 이것이 바로 아테나이의 불행이다. 정치가들은 밀고자들에게 부탁한다. 한몫 두둑하게 챙길 수 있는 일에 자신들이 직접 뛰어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밀고자들은 아테나이 민주주의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최악의 기생충이었다. 


<시민의 감소와 노예의 급증>

p424 자유노동력 대비 노예노동력의 급증은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노예 급증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도시국가들의 점진적인 쇠퇴를 기다려야 한다. 도시국가들의 점진적인 쇠퇴에는 그리스 문명이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대두된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는데, 우리는 아직 그 시기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니 미래를 너무 성급하게 앞당기지는 말자. 


<쇠락하는 도시>

p426 헬레니즘 시대의 막바지를 지배하는 비참함의 이미지가 그리스의 지평선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리는 그 이미지가 온갖 부정한 방식으로 긁어모은 부의 이미지와 더불어 아리스토파네스의 예언자적인 희극 <<플루토스>>에서 내내 중첩되어 나타난 것을 본다. 


p427 아테나이의 삶에서 돈이 가지는 위력을 <<플루토스>>보다 더 잘 표현한 작품이 없다.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비참함의 문제를 주제로 제시한다. “돈에 대한 사랑이 우리 모두를 지배한다”고 극중 인물이 선언하지 않는가. 

돈이 가지는 위력이라.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돈’ 때문에 인간의 삶이 좌지우지 되는 것은 매한가진가보다. 돈을 떠나 살 수는 없어도, 돈의 지배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인간에게 봉사하라고 만들어 놓은 돈이 인간의 봉사를 받고 있으니, 비참함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p431 그리스 민족은 전쟁과 비참함, 퇴행을 거듭하는 제도, 문학과 예술, 이성과 지혜, 지칠 줄 모르는 용기 등과 더불어 앞으로 천 년 동안 줄기차게 뛸 것이다. 


Chapter 10 소크라테스라는 수수께끼

p435 독특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했던 그의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의 죽음이 가져온 엄청난 다산성이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들 또는 적수들 중에서 일군의 증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진술은 비록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러 세기에 걸쳐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과 그가 일생을 바친 진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p436 그에게는 진리가 삶보다 더 소중했던 것일까? 


<소크라테스 문제 : 어떤 소크라테스가 진짜인가?>

p436 우선 아리스토파네스가 있다. 그는 기원전 423년,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 <<구름>>을 발표했다. 이 무렵 소크라테스는 마흔 여섯 살이었다. <<구름>>이 발표된 이후로도 24년이나 더 활동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희생양에게 “잘난 체하는 타지인 학자”의 가면을 씌웠다. <<구름>>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특성을 지녔다. 무신론자이며 젊은 층을 타락시키는 자. <<구름>>에 나타난 이 두가지 특성은 그로부터 24년 후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고소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기록의 힘. 말의 힘. 시인의 예언력 등을 캐취할 수 있다. 


p437 소크라테스 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 플라톤,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팁포스


p439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측 증인 : 소크라테스 고소문 작성자 폴뤼크라테스가 적격이다. 

치근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구가 대거 쏟아져 나왔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말을 보존하고 있다는 전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이 대다수다. 


p441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파네스와 플라톤,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팁포스, 크세노폰, 그리고 다른 모든 증인들이 언급하는 사실들이 일치할 때에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간주하려 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엄격성은 말도 안 된다. 어떤 사실에 대해 증인들의 말이 만장일치로 수렴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일, 제일 수상쩍은 일이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증인들은 모두가 같은 대담에 참석했던 것도 아니다. 역설적인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한날 한시에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들이 소크라테스를 같은 시기에 안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단 말인가? 나이와 직업, 기질, 사고 등 모든 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이거나, 최소한 비슷한 증언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더구나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을 증언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서 증언해야 한다는 말이다. 


p442 소크라테스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해석이 모두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으며, 따라서 그가 실존했던 인물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444 소크라테스는 소일거리가 아니다. 그는 우리를 살아가도록 만드는 생명체다. 역사적이고 직설적인 생명체, 요컨대 하나의 통합체다. 나는 그를 그렇게 간주할 것이다. 다양한 증언들 중에서 나에게 충격을 주는 것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에 충격을 가한 것들을 택해 나를 인도하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p445 이 인물을 잡으려고 하면 아이러니라는 그럴싸한 가면 속으로 달아나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선사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물은 최초의 철학자>

p445 그는 신동은 아니었다. 마흔 살이 되어서야, 그나마도 신이 그에게 신호를 보냈기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이방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 그리스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지혜가 담긴 그 글귀를 읽었다. 이리저리 한눈파는 순례자의 눈으로 한번 쓱 읽은 게 아니었다. 젊은 시절 내내 그의 마음속에서는 “너는 누구냐? 너는 무슨 쓸모가 있느냐? 너는 무엇을 아느냐? 네가 아는 것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등의 질문이 메아리쳤다. 

오, 지금 내게 하는 질문 같다. 네가 아는 것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p446 그는 열렬하면서도 동시에 숙고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ㄷ. 열정적인 기질과 냉정한 이성을 겸비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되, 분별 있게 그렇게 하고자 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인들은 그에게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 즉 신들과 인간들에 대해서 말해주는 존재였다. 


p447 시인들과의 교류는 그에게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뭉서을 추구하는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흔히 ‘자연철학자’라고 불리던 이 학자들이야 말로 그에게 인식의 열쇠를 건네준 장본인일 것이다. 이들은 그에게 세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소크테스는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머지않아 살기 위해 그가 풀어야 하는 유일한 질문,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시인들처럼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우주를 탐색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식과 별똥별을 아무리 탐구한다 한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안에서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 인간 각자의 안에서 소곤거리다가 문득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학생들이 매일 같이 하는 질문. 수학 배워서 뭐해요? 살면서 쓸일도 없는데...... 한다. 아무래도 철학과목이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에 들어와야 할 것 같다. 우리 안에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 인간 각자의 안에서 소곤거리다가 문든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교육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인데, 도대체 왜 지식만을 주입하고 있는것일까? 새로운 교육과정이 필요한 때이다. 근데 왜 철학은 교과목에 넣지 않았을까? 아무도 그 해답을 모르기 때문일까? 해답을 원한다기 보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아주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고민해보게 기회를 열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교과목 편성에 대한 의문이다.  


<영혼의 산파>

p448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그에게 가르쳐줄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데,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인간으로서의 진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p449 산파였던 어머니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에 종사한 셈이다. 


p450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영혼을 생산해내는 기술을 창조하고 싶어했다. 


점진적인 학습 끝에 소크라테스는 마침내 그가 찾던 것이 무엇인지,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는 인간으로부터 인간 안에 깃들어 있으며 인간과 관계있는 진실을 이끌어낼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에 관한 학문을 찾고 있었다. 그는 결단력 있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산파였던 어머니의 직업을 물렵다는다. 인간의 영혼이 잉태하고 있는 진실의 열매로부터 영혼을 꺼내주는 산파가 될 것이었다. 


 그는 영혼의 산파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러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 얼마나 오랫동안 암흑 같은 시간 속을 달려야 했던가? 진실을 찾겠다는 의지로 점철된 그 어려운 길에서, 정신적인 장애물들과 중첩되는 육체적인 장애물들은 또 얼마나 많이 만나야 했던가? 

후배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암흑 같은 시간 속을 계속 달리고 있다는 그녀에게 이 부분을 발췌하여 주고 싶다. 계속 생각만 하고 있다고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아주 큰 힘이 될 것 같다. 소명을 발견하는 일이라는 것이 쉽게 되지 않기에 더 값지고, 발견하면 축복이 되는 일일거다. 조급히 생각하지 말고, 생각과 고민을 놓치지도 말고,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어두운 터널을 계속 달리길, 가길 바라본다. 나도 마찬가지다. 


<무지를 폭로하는 거리의 철학자>

p451 내면의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이 소명,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명을 그는 어느 날 델포이의 신을 통해서 분명하게 전달받는다. 틀림없이 고집스렁누 거부의 대가였을 것이다. 


신탁이 옮읆은 증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 해준 신탁)서는 이미 정립되어 있는 모든 지혜를 찬찬히 검토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p452 오직 그만이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할 정도로 현명했으므로, 그것은 적절한 처사였다. 

참으로 희한한 직업이며, 참으로 희한한 현자였다. 30년 동안 줄곧 그는 질문하고, 반박하며, “바람을 뺐다.” 30년 동안 줄곧 그는 모두를 비웃었으며, 그 자신도 비웃음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도 1인 기업. 스스로를 고용한 사람. 직업을 창조해 낸 철학자였다. 


p452 30년 동안 그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으며, 빈축을 샀고, 절망하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p454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소크라테스가 여러 세기를 앞서가는 선구자이며, 낡은 외투만 하더라도 소크라테스를 기념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즐겨 입게 될 그 외투가 수도사의 제복이 될 것임을 알 도리가 없었다. 


p455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내린 정의를 요모조모 뜯어본다. 그중에서 어느 단어의 의미가 모호한 것 같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이어진다. 이 모호한 단어를 정의해보세. 혹은 요리나 말 사육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사례를 하나 들어보세. 두 사람의 대담은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 다시 시작된다.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움과 명백함, 겉보기엔 에둘러 가는 것 같지만 정곡을 찌르는 지적으로 가득찬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예” 또는 “아니요”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퍼붓는 이 추남 앞에서, 그럴듯하게 들리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선수인 정치가는 번번이 말을 중단당하고, 반듯한 논리에 의해 추궁당하면서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는 급기야 법은 불법이라고 버럭 결론을 짓게 된다. 그리고 정의란....., 에, 또, 정의란... 그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 


p456 하지만 대중들은 일단 실컷 웃긴 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불안 심리가 발동한다.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뭘하자는 걸까? 말을 이용한 대량 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로라하는 인사들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자들의 입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이끌어내려는 집요함은 뭐란 말인가? 


<소피스트들의 전성시대>

p459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코스 등은 새벽 동이 트기 무섭게 아테나이의 유복한 집안 ㅈ럼은이들이 이들 집의 문을 두드릴 만큼 인기를 누렸다. 


<영원한 의심자>

p461 한편 아테나이의 평균적인 시민들에게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영원한 의심자, 끊임없이 질문으로 대화 상대방의 사고를 마비시키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개념을 거부하고 무지함을 고백하라고 권유하는 이 인물은 소피스트들 중에 단연 최고였다. 


p462 좀 더 은밀한 대담을 나누는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머릿속에서 지적인 나태함에 의해 차곡차곡 쌓인 잘못된 개념들을 깨끗하게 비우는 세척 작업을 한 후, 오류에서 벗어나게 된 그들의 영혼이 진실을 열망한다면, 그때부터 어머니가 늘 하던 산파 작업을 통해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들의 내부에 깃들어 있던 지혜를 끌어내도록 인도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의 소재가 되다>


<두 가지의 오해 : 무신론자, 타락시키는 자>

p466 기원전 423년에 공연된 작품에서 두 가지 죄목을 거론하여 그에게 선고를 내렸듯이, 기원전 399년 법정에 제출된 기소장에도 이와 똑같은 두 가지 죄목이 명시되어 있었음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현자는 얼마나 신에 근접해 있는가. 아마도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접근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p467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민족을 고양시키고, 이들에게 진정한 선에 대한 의식, 즉 선택이 주는 위험성과 고귀함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p470 “나한테 중요한 단 한 가지는 바로 거리로 나가, 젊은이가 되었건 노인이 되었건, 당신들을 만나, 그처럼 열정적으로 당신들의 육체나 재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영혼과 그 영혼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이다. 나의 사명은 당신들에게 부는 덕성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덕성이야말로 인간들에게 번여으이 원천이자 공적, 사적 재화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p474 그의 가르침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오늘날까지 여전히 살게 되었다. 


<재판>

p475 소크라테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자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조차 업섹 되었다고 한다. 


p479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면, 그 결정은 내가 아닌 당신들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들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유죄 판결>

p482 무엇이 되었든 벌을 제안한다는 것은 스스로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일이었고, 판관들로 하여금 가장 참담한 불의, 즉 죄없는 사람을 벌하도록 방관하는 일이었다. 


“나에게 보상을 달라, 그게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p483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진실은 한층 더 강력하게 공격해올 겁니다. 진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의 소리는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만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대화>

p486 부당하게 형을 선괍ㄷ은 시민은 법이 정한 형벌을 피해도 좋은가? 부당하게 형을 선고받았다고 해서 그 자신도 불의를 행하고, 악에는 악으로 대할 권리를 가지는가? 불복종 행위를 통해서 무질서의 사례가 되어도 좋은가? 도시로부터 이제까지 받았던 온갖 혜택들을 그 도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답해도 좋단 말인가? 분명 그렇지 않다. 악은 언제나 악이며, 따라서 항상 피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입에서는 이 같은 논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p487 소크라테스를 심판한 판관들은 법을 무시하라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유죄라고 선고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그 사람이 탄원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죽어서 영원한 이름을 남기다>

p487 생애 마지막 날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하루 종일 죽음과 죽음이 인간의 이성에게 선사하는 불멸에의 희망에 대해서 토론하며 보내기를 원했다. 


p488 그가 추구한 불멸성은 혼자서만 좋아라 만족하는 그럴듯한 거짓말이 아니라 이성의 확실함을 토대로 정립되는 깨달음의 불멸성이었다. 

그와 함께 탐구하던 이들이 내세운 모든 반대 의견들을 그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반대 의견들은 그에게 논증을 좀 더 단단하게 다지고, 그가 저지른 실수를 고치라는 재촉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삶으로부터 치유되어야 마침내 무지로부터도 치유될 수 있는 건 아닌지.......


p488~489 크리톤이 물었다. “소크라테스, 자네를 어떻게 매장해야 하겠나?” 

소크라테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야 뭐, 마음대로 하게나. 물론 자네들이 나를 붙잡을 수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말일세.” 용감한 크리톤은 조금 후면 시체가 되어 버릴 그의 육신을 감히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그는 영원히 살아남으리라고 판단했어야 마땅한 핵심 덩어리 앞에서 어떻게 매장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반드시 알아두게나, 크리톤. 부정확하게 말을 하는 건 영혼에 해악을 가하는 거라네.” 

 그러니 죽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듯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육신의 해체가 그의 삶의 종착역이 아니며, 그가 제자들의 영혼 속에서 지속하게 될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우리가 이해했다면 말이다. 이 충성스러운 영혼들은 그 후 그를 기리는 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곳, 끊임없이 지식 탐구라는 모험을 시작하는 장소가 되었다. 





3. 내가 저자라면

 <<그리스인 이야기>>는 재밌었다. 일차적으로 내가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한 앙드레 보나르의 해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아는 내용에 새로운 시각을 더하니 아니 기쁠 수 있겠는가. 이차적으로는 교육학을 배우면서 또는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웠던 철학자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어 기쁘다. 특히 2권의 맨 마지막 장을 장식한 소크라테스는 그동안 아주 단편적으로 알다가 그가 사명을 찾은 사건부터 그의 대화법의 예를 볼 수 있었고, 재판에서 그가 마지막까지 주장했던 내용들을 엿볼 수 있어 기뻤다. 물론 이것도 그를 다 알 수 있었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음을 알지만, 그동안 내가 가진 지식에서 좀 더 나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 학생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부분도 많을 것 같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그가 고민하고, 자신을 찾아갔던 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은 부분이다. 

 저자소개에서도 말했지만 앙드레 보나르는 평생에 걸쳐 연구한 것을 3권의 책으로 요약했다. 한 인물과 그 인물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리스인들의 특성을 보여주고, 그리스 문명의 변천과정을 보여줬다. 가장 마음이 뜨거웠던 부부은 1권의 5번째 삽포의 이야기다. 삽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도 왠지 그녀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그녀의 작품의 활활 타올랐기 때문이다. 2권의 첫번째 안티고네의 약속과 네번째 오이디푸스에 관한 해석도 흥미 진진했다. 헤로도토스에 대해 읽을 때도 즐거웠다. 

 한번 읽어서 분석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챕터마다의 연결성은 시대의 흐름으로 보였다. 물론 겹쳐지고 앞뒤가 바뀐것 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지만 역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들을 분석하고, 작품을 소개했다. 문학과 과학 장르를 넘나들었는데,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다면 문학과 과학을 따로 나눠 구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을 읽다가 과학을 읽다보면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시인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많이 흥분되고 즐거웠는데, 과학이야기를 볼 때는 조금 지루했다. 그것은 독자인 나의 책임도 있겠지만 아쉬운 부분이었다. 물론 중간 중간 끼어들어갔기 때문에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아우룰 수 있었다. 장르별로 그리스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새로운 시도가 될 것 같다. 

 3권을 읽으면서 이번주에  더 자세히 논해보도록 하겠다. 



<그리스인 이야기 1권>

차례 

1. 그리스 문명의 탄생

2.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3. 오뒷세우스와 바다

4. 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5. 열 번째 뮤즈, 삽포

6. 솔론과 민주주의

7. 노예와 여자

8. 신과 인간

9. 비극 : 아이스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10. 시민 페리클레스 


<그리스인 이야기 2권>

차례

1. 안티고네의 약속

2.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3. 과학의 탄생 :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4.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 운명에 화답하기 

5. 핀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6.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7. 인본주의 의학의 꽃, 힙포크라테스

 8.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9. 지는 해 

10. 소크라테스라는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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