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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9일 01시 12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 는 그리스인 이야기 1,2의 내용으로 대체합니다.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쇠락과 새로운 발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메데이아>

 

12 문명의 쇠락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첫째, 무슨 이유로, 또 어떠어떠한 조건들이 결합했을 때 인류 공동체가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게 되며, 그 가치가 사라져갈 때 무엇을 상실하게 되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 모호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게 마련인 태동기보다 훨씬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화기에 접어든 공동체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호흡이 힘들어지면서 숨이 가빠오며, 행동이 둔해진다. 요컨대 삶의 몸짓이 버거워진다. 늘 호흡하는 공기처럼 자연적인 기후이자 분위기였던 문명이 해체됨에 따라, 매일 매일의 양식이었던 신앙이 동요됨에 따라, 문명이나 신앙은 죽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탐구하고, 새로운 시와 지혜의 세계를 창조하며, 늙어갈수록 희망과 확신을 가져야 할 새로운 이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명의 쇠퇴기는 동시에 새로운 발견의 시기이기도 하다. 문명은 변화를 거듭할 뿐 죽지 않는다. 문명의 삶이란 말하자면 항구적인 태어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è 문명의 실존주의? 문명의 죽음을 직시할 때, 진정한 문명을 깨닫게 된다.

 

14 고전시대의 경우, 물리적인 세계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은 현대 의학의 진정한 아버지로 추앙받는 힙포크라테스라는 위대한(몰리에르[프랑스 고전주의 시대의 극작자, 저자는 여기서 그의 1666년 작품 <<마음에도 없이 의사가 되어>>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는 그를 표적으로 삼아 비아냥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는 위대하다) 인물로 상징되었다.

è 끌린다. 무슨 내용일까?

 

비극의 완성, 에우리피데스

15 특히 니체 같은 사람들에게는 신랄한 혹평을 받았는가 하면

 

16 그렇다. 에우리피데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니체의 주장대로 비극을 파괴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비극을 지적으로 만들었으며, 발단 부분이나 대단원 부분에 약간 경직된 감이 있는 진행 과정을 도입하거나 궤변가들이 주로 쓰는 논쟁 기법, 즉 당대에 직면한 문제들과는 딱히 관련이 없는 주제에 대한 논쟁을 차용함으로써 도식화했다.

 

최최의 여성 심리 비극, <메데이아>

 

21 그래, 여자는 비겁할 수 있고, 칼을 들이대면 무서워서 벌벌 떨 수 있어. 하지만 잠자리를 지킬 권리를 빼앗긴 여자보다 더 피에 굶주린 영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

è 와우, 정말? 정말 그런가? 남자에 대한 정복욕이 대단하다. 정말 사랑한 모양이다.

 

22 그 뿐만이 아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정ㅇ념적인 상황마저도 냉정하게 이용할 줄 안다. 크레온 왕을 마주하는 이 장면에서 메데이아는 연기를 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왕 앞에서 고통스러워하기만 할 뿐이다.

 

26 아이들을 죽이기로 말이다. 그것만이 이아손에게 확실하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이다.

è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는 적에 의해 처참히 죽임을 당하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보나르는 복수를 위해서였다고 쓰고 있다. 나는 보나르의 입장에 찬성하는 편이다.

 

29 나의 분노는 나의 결심보다 강하다네.

 

32 지배에 대한 끔찍한 갈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악마로 변해버렸으며, 그 악마를 그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나머지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 것이다. '악마'는 그녀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힘일까? 아니면 도저히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존재의 비이성 속에 늘 깃들어 있던 분노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며, 오직 그 힘이 자신의 의지보다 강하다는 것만 안다.

è 아르키메데스와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오로지 따를 뿐이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 나타난 비극성

37 이와 동시에 등장인문들의 감정선은 고정적이 아니며, 우연과 신의 의지 또한 그에 못지않게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매 순간 우리를 영웅의 죽음이 아닌 구원 쪽으로 잡아당긴다. 그 결과 극중 행위는 복잡해지고, 끊임없이 반전이 일어나며 수많은 부침이 생겨난다.

 

39 아가멤논은 말하자면 심리적으로 나약한 사람, 늘 마음만 있을 뿐 의지라고는 없는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43 그런데 이 여장부는 온 힘을 다해 전력투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냐고? 열매 안에 이미 벌레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마음속에 난 흠집으로 인해 자식을 향한 비통한 노력이 거짓으로 울리기 때문이다.

è 나는 앙드레 보나르의 해석이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에 대한 편견이 억지 해석을 낳고 있다. 자식이 죽을 때 어머니가 비통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지아비가 그 원인이라면 자연히 사랑과 신뢰가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아비를 떠나 새로운 지아비를 찾게 될 것이고 새로운 지아비와 함께 전의 지아비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실천하는 여자라면 대단한 여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애초에 거짓된 모성을 가진 괴물이기 때문은 아니다. 모성은 그저 모성일 뿐이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다고 믿는 그 딸을 지키려는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노력은 사실 자신을 향한 이기주의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속한 것을 누군가가 빼앗아가려 하므로, 그녀는 절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같이 화를 낸다.

è 자식이 죽을 때 분노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식에 대한 소유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가?

è 보나르가 "메데이아" "클리타임네스트라" "지배와 소유욕에 대한 욕망"으로 해석한 것은 긍정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성에게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다. 정도

 

44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철철 넘치는 모성애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은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을 회유할 수 없다.

è 남편에게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빤히 안다면 굳이 울 필요도 없었겠지.

 

52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모호한 가운데 투쟁을 벌이면서, 불행 속에서 사는 형제자매들, 흔히 사회라고 하는 기제의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공동의 싸움'이 문제되는 대목에 등장하는 여러 단어들이 이를 암시한다. 사회라고 하는 기제는 운명의 교묘한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것일까? '사회'란 사실 그런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었던가?

 

54 에로스의 화살은 쌍둥이 화살, 신에 대한 감사의 이중적인 화살로 표현된다. 이 화살은 화살로 인하여 파괴되는 삶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이율배반적인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늘 이런 식이었다. 코스모스의 아름다움, 우주의 아름다움은 항상 우리 인간의 조건이 지니는 공포와 더불어 날실과 씨실처럼 짜였다.

 

58 그리스 비극은 우리를 공포와 동시에 희열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우리의 마음은 야성적인 희열 속에서 춤춘다.

è 일반적으로는 긍정하지만, 이피게네이아의 사례에서 공포와 동시에 희열을 느낄 수 있는가? 오로지 공포와 분노만이 있을 뿐이다. 희열이라고 한다면, 클뤼타임네스트라에 의한 복수에서 찾을 수 있겠지. 공포와 희열은 이피게네이아가 아니라 클뤼타임네스트라이다.

 

비극 박카이

 

62 박카이는 말하자면 비극 시인으로서의 에우리피데스를 이해하는 열쇠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극도로 상반되는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작품은 그가 신에 귀의했음을 보여준다"에서부터 "신에 대한 가장 확실한 거부를 나타낸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의견이 분분했다.

 

65 자신의 영혼을 행렬 가운데 들게 하며, 정화를

통해서 박코스 신도가 된다……

 

제물로 바쳐진 새끼 사슴의 가죽을 입고 바닥에서 뒹구는 희열,

목이 잘린 희생양의 피와 날고기의 신선함을 맛보는 희열,

è 디오니소스는 초월의 희열을 의미하는 신인가? 인간 이상의 자유를 맛보는 바코스 신도들.

 

67

하지만 합창단은 또다시 스스로를 새로운 신이라고 자처하는 자를 축하하는 노래를 부른다. 디오뉘소스는 기쁨을 나누어주는 자다. 그와 함께한다면 고통은 사라지고 웃음과 쾌락, 뮤즈와 사랑이 찾아온다. 그러니 그를 모르고서 스스로를 현자로 알고 있는 자들은 불행할지어다. 합창단의 밝은 노래, 욕망을 고양시키기 위해 너무도 이교도적인 노래는 희한하게도 복음서를 상기시키는 단어들을 담고 있다. 가령 이런 가사를 보자. "신은 현자들과 똑똑한 자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찾지 못하도록 감춰놓았다." 또 이런 가사도 있다. "정신이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도다!" 정말로 놀라운 에우리피데스가 아닐 수 없다. 신비에 관한 그의 감수성은 여러 세기를 앞선다.

è 보나르는 디오뉘소스의 속성을 잘 간파하고 있다. 그런데 왜 서두에서는 "신을 믿고 안믿고"의 신앙 문제로 말문을 열었을까? ""의 일반적 의미가 아니라고 본다.

 

69 디오뉘소스 : 나는 내가 가야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갑니다. 악은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è 나는 도덕성의 위에 있습니다.

 

70 신은 자연 그 자체로, 마음먹기에 따라 한없이 너그러울 수도 있고, 한없이 폭력적일 수도 있으며, 아무도 그를 저지할 수 없다.

è 디오뉘소스는 곧 자연인가?

 

71 목동의 이 이야기는 펜테우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기적이라면 질색이었다. 펜테우스 왕은 질서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에 거슬리는 이 새로운 종교에 더욱 강경하게 저항했다. 왕에게는 군대가 있었다. 그는 산에 대항해서도 싸울 수 있었다. 초자연적인 것을 이성적인 것에 복종시키고야 말 것이었다.

è ,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펜테우스는 질서를 관장하는 신이라면 굴복했을 것이다. 신은 기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곤 한다. 가령 초자연적인.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질서를 만든 주체 역시 신이기 때문이다. 만든 자만이 파괴할 권능을 가지고 있다. 신이 질서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인 모순을 가진 이유이다.

 

73 그때 갑자기 신의 어조가 바뀐다. 한 순간 신은 인간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더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이 아닌가. 디오뉘소스는 그러니 이제 인간을 장악하려고 마음먹는다. 선의의 증표였던 온화함은 감언이설이 되어버렸다.

è 신의 "신격"은 인간의 상상 이상으로 훌륭할 것이라고 믿는 일부 종교에서는, 꽤나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진 셈이지. 그러나 신의 신격이 반드시 훌륭할 이유는 없다. 선은 전능하니까.

 

75 우리는 그가 장중함 속에서 나타나리라고 기대한다. 장중함은 폭발한다. 우리는 또 그가 정의 속에서 나타나리라고 기대한다. 정의는 무시무시하다. 우리는 또 그가 너그러움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한다. 그는 아가우에의 뉘우침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다. 그는 이를 뿌리친다. 아가우에를 위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가우에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애원한다. 하지만 비극적인 갈드으이 끝에서 신이 인간에게 선고하는 판결은 "때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그대는 나를 너무 늦게 알았노라"라고 디오뉘소스느 말한다. 인간 아가우에는 다시 애원한다. 그렇지만 신에게서 듣는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나는 신이다."

è 명문단이다. 확실히 보나르는 글맺음을 잘한다. 의도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è 아가우에는 신에게 이용당한 것이므로 굳이 잘못을 뉘우칠 필요조차 없다. 그를 사면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 애초에 이용당했기 때문에.

è "우리는 주님의 몽당연필." 이런 자의식으로 과연 제대로 살아갈 수나 있는지나는 잘 이해가 안 된다.

 

78 펜테우스에게는 다른 면도 있다. 그는 그가 무찌르고자 하는 종교에 대해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80 (신은) 은총을 제안하나 실제로 내리지는 않는다. 은총이 신의 선물임을 감안할 때, 이는 결국 신이 은총을 거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펜테우스야말로 에우리피데스와 가장 가까운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건 바로 이 대목에서다. … 하지만 펜테우스처럼 에우리피데스도 신을 갈구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기보다는 상대방, 즉 신이 문을 닫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è 매력적인 해석인데, 그렇지만 디오뉘소스를 일반적인 ""으로 범주를 확장하기에는 디오뉘소스만의 상징적 의미가 너무 특수하지 않나? 디오뉘소스를 신의 구원 문제로까지 결부시키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본다.

 

81 신은 여기에서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틀림없이 의식의 신이 아니라 자연의 신, 이 세계의 신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아야 한다. 신은 산속에 있다. 신은 산속에서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 창조적 행위를 보여준다. 신은 샘이 솟아나는 곳에, 짐승들이 뛰노는 곳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숲과 산의 감춰진 일상 속에 있다. 신은 인간의 삶을 포함하며 그것을 뛰어넘는 풍성한 삶 자체이다.

è 디오뉘소스적인 신의 의미

 

83 스스로 미친 자, 즉 영감을 받은 자가 됨으로써 인간은 자기 안에서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87 그런데 신 또한 행동에 있어서는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법칙, 우리 의식을 지탱하는 정신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고 할 때, 다시 말해서 신은 그 자신이 윤리 의식이며, 불완전한 인간의 발 아래에 놓인 혼돈의 심연인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추구하는 완벽성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우리 안을 확실하게 비춰주는 빛이며, 정의와 사랑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과연 디오뉘소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è 내 말이 그 말이다.

 

<박카이>에서는 신이 삶의 충만함인 동시에 가장 고결한 의식의 완벽한 이미지여야 한다는 이중적인 필요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에우리피데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무너지는 순간들이 눈에 뛴다.

è 아니다. 에우리피데스는 헷갈린 적 없다. 헷갈리고 있는 것은 보나르 바로 자신이다. 스스로 해석을 양가적으로 모호하게 해놓고 이를 원작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치사한 행위이다.

 

투퀴디데스와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

 

97 고질적인 우유부단으로 인해 그는 늘 가장 느리게 해결되는 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보였다. 마치 목표에 도달할까 봐 겁을 먹은 사람 같았다.

 

교양인으로서의 덕목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가 나약한 인간, 정치판에서의 명성에만 좌우되는 인간이라는 사실까지 감추어지지는 않는다.

 

104 흔히 투퀴디데스는 무신론자였다고들 한다. 모든 학자는 무신론자일 수밖에 없다. 신을 살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105 우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사건은 합리적인 원인의 결과로, 필연성의 지배하에서 발생한다.

 

내 저술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과 인간의 정념이 언젠가 초래하게 될 유사한 사건들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109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보았던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원초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은 이 힘을 존재를 위해 절대 파괴할 수 없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이 힘은 곧 살려는 욕망이다. 산다는 것은 우선 지속하는 것이며, 존재의 안전을 강화하는 것이다. 투퀴디데스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만 죽음과 맞선다.

 

114 그런데 역사에서 '틀림없이'라는 게 가능할까? 역사가 특출한 한 개인의 행동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인정해야 하는 걸까?

 

데모스테네스와 도시국가 시대의 몰락

120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탓에 부정직한 보호자들에게 많은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긴 그는 재산을 되찾기 위해 웅변술과 법률을 공부하지만, 고작 일부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128 아테나이인들에게 어느 정도로 애국심이 결여되엇으며, 그 누구보다도 자유를 구가하는 민족인 아테나이인들을 치명적인 무관심에서 끌어내기 위해 데모스테네스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연설을 보자.

 

132 아테나이 민중들은, 데모스테네스가 절망적인 용기를 담아 말했듯이, 이미 노예가 되기를 택한 것이다.

 

137 데모스테네스는 마흔 여덟 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개 병사로 전투에 참가했다.

 

142 데모스테네슨느 자신이 처음에 맡았던 자리와 정당에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 그는 평생 동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달라지지 않기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플라톤의 정치적 대망

 

155 그런게 그가 원하는 정치는 도대체 어떤 정치인가? 헛소리에 들떠 있는 아테나이에 제안하는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고르기아스>에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이 들어 있다. 진정한 정치란, 복잡할 것도 없이 국가 안에 사는 시민들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를 담당한 자들은 다른 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시민들을 보다 정의롭게, 보다 낫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 반면, 그들에게 정의를 주는 것은 불행에 대비해서 그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며, 그들에게 덕성을 길러주는 것은 그들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다.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며,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유일한 재화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가 행동에 돌입하기에 앞서서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역설 중의 하나("불의를 감내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는 자보다 훨씬 행복하다." 이 역설은 소크라테스의 역설인 동시에 오르페우스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에 맞추어 정립해야 할 것이다.

è 왜 오르페우스적인가?

 

165 한편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품을 떠나 국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자신들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일정한 나이 이상의 성인은 모두 아버지고 어머니,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은 모두 형제고 자매였다.

 

플라톤식 아름다움과 환상

 

175 제법 깊은 동굴이 하나 있고, 그 동굴 안에는 사람들이 동굴의 바닥만을 볼 수 있는 자세로 묶인 채 앉아 있다. 그들 뒤로는 모닥불이 있고, 모닥불과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장소 사이에는 벽이 세워져 있다. 벽 뒤로는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이들이 운반하는, 생명체의 모든 형태를 재현한 작은 입상들이 벽 위쪽으로 보인다. … 포로들은 그러므로 그림자를 현실이라고 여긴다.

è 플라톤은 출신이 너무 고결해서 이데아 같은 것이나 생각해내고 있었다.

 

179 이 전범들을 플라톤은 이데아 혹은 본질이라고 불렀다. 이데아라고 하는 말은 플라톤 철학에서 우리 정신의 사고가 아닌 우리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완벽한 것, 즉 창조되지 않고 원래부터 존재하며 불멸의 것, 영속적이며 변질되지 않는 것, 물질적인 세계, 감각 세계의 부질없음을 인정하며, 변증법적인 인식 방식에 따라 단계적으로 훈련받은 철학자의 영혼만이 관조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데아를 제외하면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è 이데아의 순기능이군. 결국 완벽해보이는 그 무엇도 이데아는 아니므로 겸허해질 수도 있겠지.

 

185 그런데 플라톤과 더불어 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영혼은 육체보다 먼저 태어나서 살며, 육체 이후에도, 다시 말해서 영혼이 덕을 갖춘 가운데 지상에서 여러 번의 실존을 거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산다.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오래전에 죽음을 맞은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 안에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죽음으로 제자들과 헤어지게 된 소크라테스, 죽음이 그를 떼어놓음으로써 완성시킨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우리는 고대적인 실존의 축이 슬그머니 이동하는 것을 느낀다. 현재의 삶, 기쁨과 고통, 용기와 나약함, 지혜와 무지 속에서 사는 일시적인 현재의 삶은 더 이상 그에 앞서서 수많은 시인들과 현자들이 역설한 것처럼 우리의 가장 값진 재산, 우리 존재의 가장 확실한 중심이 아니다. … 죽음을 넘어서 플라톤 안에서 사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자신인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미래인 플라톤은 지상에서의 삶은 "죽음의 학습"에 불과하다고 힘을 주어 주장한다.

è 굉장히 긴 열거형 문장이다. 보나르가 감정이 격해진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지상의 삶에 대한 수식어가 꽤 긍정적인 것을 보아 플라톤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반박하고자 하는 여지를 보이기도 한다. 보나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생에 대한 미련이기도 하겠지. 그 역시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 플라톤에게 감정 이입이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è 일단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경멸했던 데에는 자신의 신분이 고귀하였고 때문에 중우정치에 휘말리는 것에 대한 회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존경하던 스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민주주의가 위대한 사상가를 죽일 수 있다면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만큼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제자였던 플라톤에게 가장 큰 정신적 트라우마였다. 이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여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일, 이를 위해서는 육체보다 영혼을 더욱 높게 평가해야 했다. 바로 이런 배경 때문에 플라톤은 이데아와 이승 이후의 세계를 꿈꾸게 된 것이다. 확실히 소크라테스는 살아서보다 죽음으로써 많은 것을 가르친 듯하다.

 

189 내가 위에서 인용한 대목은 <파이돈>에 나온다.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겠노라고 주장한다.

è 영혼의 불멸성 주장에 관한 시나리오를 짜도 재미있을 것 같다.

 

195 "사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님을 누가 알겠는가?"라는 에우리피데스의 말을 인용하고 설명하면서, <고르기아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우리가 이미 죽은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죽어서 우리의 무덤인 육체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삶,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 삶은 이미 죽음이며, 우리에게 온갖 부조리한 행동을 저지르게 만들며, 정념의 방탕을 가져오는 무분별이다. 우리의 영혼은 선명함과 밝음이라는 질서를 갈구하는 데 반해서 우리는 일종의 죽음 - 무질서 속에서 산다. 질서를 소유하고 있는 영혼은 실존을 소유한다. 자기 안에 실존이라는 재화를 간직하고 있는 영혼은 선하며 행복하다.

è 그러나 영혼은 없다. 영혼이 실존인 것이 아니라, 실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è 필멸의 운명에 대한 허무주의. 어차피 죽을 것이므로 이는 곧 죽은 것과 등가이다. - 에 대한 대안으로 찾아낸 것이 육체와 영혼의 분리이다. 그리고 영혼을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영혼이 영원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무형의 것이 반드시 영원한가? 이런 무지막지한 가정 때문에 별의별 이론이 탄생하는 것이다. 옳지 않은 프톨레마이오스적 천체관 때문에 복잡한 천체운동론이 필요했던 것처럼.

 

201 이처럼 플라톤은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이나 퓌타고라스 학파와 더불어 영혼의 불멸성을 자신 있게 주장했다.

 

209 플라톤은 그의 저서 <법률>에서 자유시민이라면 기계와 고나련된 직업ㅇ르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11 그런데 절대적 행복이라면 무엇을 말하는가? 마침내 육체를 떨쳐버리고 지고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도록 허락받은 영혼의 행복을 말한다.

è 그러므로 육체 노동은 천한 것이다.

 

213 <고백록>의 다음 장면은 너무도 유명하다. 정원에서 기도 중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에서 노래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들은 것 같았다. 아이는 "이걸 집어서 읽어봐, 일걸 집어서 읽어봐"라고 노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얼마 전부터 그의 손을 떠나지 않던 바울 사도의 책을 집어들고 아무 데나 펴서 읽었다.

 

216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하나의 문장이 소박하게 그러나 눈을 번득이게 한느 섬광처럼 이번 장에서 보여주려고 한 내용을 요약한다.

"기독교를 준비하기 위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생명체

 

225 둘 다 단연 천재급이다. 사실 천재라는 말은 요즘 너무 흔하게 사용한다.

è 나는 보나르보다 천재를 많인 남발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234 이 소고들 가운데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감각과 감성적인 것에 대하여>, <수면과 각성에 대하여>, <생명의 길고 짧음에 대하여>, <젊음과 나이 듦에 대하여>, <삶과 죽음, 호흡에 대하여> 등이다. 특히 <꿈을 통한 예언에 대하여>는 관찰력, 양식, 과학적 정신이 낳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è 읽어보고 싶다.

 

235 아리스토텔레슨느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영혼만을 배타적으로 다루는 철학자들을 대놓고 비판한다. 그에게 영혼이란 모든 동물의 생명의 원칙이다.

 

236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 자연의 모든 부분에는 경이로움이 깃들어 있다. 헤라클레이토슨느 부엌의 아궁이 불을 쬐고 있는 그를 보고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이방인 방문객들에게 다음과 같인 말했다고 하지 않던가. '들어들 오게, 부엌에도 신들이 계시다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합목적성'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까? 그는 각각의 존재, 각각의 기관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특별한 운명을 위해 자연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합목적성이다. 자연은 그에 따르면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 생명체들이 타고난 이 운명, 궁극적인 존재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 세계가 지닌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매 순간 기쁨의 절정을 맛볼 수 있었다.

 

243 그는 과학이란 마라톤이며 인내심과 신중함을 요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251 J.M.르블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은 지면에서 멀어지느냐 가까워지느냐에 따라 지능의 습득에서 가까워지느냐 멀어지느냐가 결정됨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 식물이라고 하면 영양을 공급하는 기관인 뿌리가 직립 자세일 때와는 정바대되는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마래서 식물은 '머리'가 땅속에 들어가 있으므로, 감수성을 상실함은 물론 지능도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è 그럴싸 하지만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과학적 엄밀함은 그럴싸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 경각심을 일깨운다.

 

255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슨느 노골적으로 생물 불변론자, 다시 말해서 비진화론자였다.

 

256 그는 자연에 대해서 "조직하고 제조하며, 창의력이 풍부하다"고 말한다. 자연은 "원하고", 원하는 목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다." 자연은 그러므로 창조하는 힘이라기보다 더 나은 것을 위해 주어진 조건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신이 아니다. 자연은 개개인이라는 존재 안에 깃들어 있는 "활력", 신의 견인에 화답하는 "성장 충동"이다.

262 아리스토텔레스는 강력한 현실주의자다. 동물의 세계라고 하는 현실은 그의 저작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정한 실존감을 드러낸다.

è 보나르는 용어를 혼동되게 쓴다. 현실주의자라는 용어는 현대의 철학사관의 하나인데 이것이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다. 이 명제는 성립하는가? 보나르가 지나치게 용어를 광의적으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263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본주의는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수많은 나무들과 짐승들은 어느 정도 인간의 형제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관련 저작들을 읽다 보면 바로 이러한 형제애가 뿜어내는 향취 때문에 어느 틈엔가 우리 입가에 슬며시 군침이 고이게 된다.

è 정말로군침. 이었을까? 번역자가 이상하게 번역한 게 아니라면이는 마치, 동식물을 번역할 때 우리가 식욕을 느껴서 군침을 돋운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별로 좋지 않은 비유같다.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성 또는 우애에 관하여

 

272 (필리포스) 그는 결코 도덕적인 가치 때문에 행동에 저해를 받는 일이 없었다. 그는 밥 먹듯이 그럴듯한 거짓말을 뿌렸으며, 약속을 어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군대의 통솔자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맹성과 참을성으로 매 순간 자신은 물론 그가 이끄는 장병들에게 변함없는 충성심과 애착을 불어넣었다.

 

(알렉산더) 자신의 운을 드러내고 말고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승리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목표를 정하면 그는 곧장, 그의 열정이 식이버리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그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290 다시 한 번 기병대의 선두에 선 알렉산드로스는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사들의 심장부를 뚫고 나가면서 격렬한 백병전ㅇ르 펼쳤다. 잠시 저항하는 듯하던 페르시아군의 사기가 떨어지면서 전투는 또다시 알렉산드로스의 승리로 끝났다. 결과는 참담했다. 마케도니아 족에서는 불과 100여명의 사망자가 나온 데 비해 페르시아 쪽에서는 수십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è 그러면 거의 1000 : 1인 셈인데, 그게 가능한가?

 

292 알렉산드로스는 축제 분위기에 휩사인 그의 군대에게 이 도시들 중 하나를 마음대로 약탈하고 불 질러도 좋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훈령을 내렸다.

 

305 그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허영심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렇지 않다. 허영심이라면 아마도 손톱만큼이나 될까 말까 할 정도일 테니 얼마든지 양해 가능하다. 그보다는 위대함의 절정에 도달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지극히 정당한 자만심이라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312 그의 원정 동안 적어도 두 번에 걸쳐서 알렉산드로스는 공개적으로 형제애에 대한 확신과 화합 속에서 모든 인간을 하나로 결합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행ㅆ다.

 

315 알렉산드로스는 궁에서 나와 그를 향한 사랑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망연자실한 그의 군대를 보았다.

è 어찌 보면 한 사람의 야망을 위해 수만명의 인생이 희생당하는 것인데, 왜 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사랑하였는가? 왕은 군사들의 자아실현에 이바지 하였는가?

 

324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의 원조, 즉 인류 문명에서 가장 먼저 이를 창안한 선구자들 중 하나다. 그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문명이 아니라면 그 문명은 결코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è 그런 의미에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는 정당화되는가? 합의하의 정복은 가능한 일인가? 이것은 늘 정복자의 논리이곤 했겠지.

 

질서라는 탈을 쓴 무질서, 두 명의 프톨레마이오스

 

334 알렉산드로스가 숨을 거둔 다음 날, 라고스의 아들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장군들이 모인 가운데 후계라는 어마어마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è 먼저 제기했기 때문에 일단은 이집트라는 유리한 칼자루를 쥘 수 있었던 것 같다.

 

346 시나 산문으로 아부하는 재주를 가진 자들에게 남매간의 결혼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통치를 상징하는 대단한 발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를 제우스와 헤라의 히에로스 가모스, 즉 성스러운 혼인에 비유하면서 정당화했다.

 

350 왕은 너무도 많은 행운을 누린 나머지 언제까지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오직 자신만이 불멸의 비밀을 발견했노라고 자랑했다.

è 그렇게 살고 죽는 게 나쁠 건 없겠지. 이들의 삶은 가십 거리를 되겠지만 특별히 귀감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책의 전성시대, 알렉산드리아 : 도서관과 박물관

 

362 이집트는 오랜 문화 국가이며 따라서 많은 소장품을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의 파라오들도 개인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 중 한 도서관에는 이집트 문자로 '정신의 피난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367 카케르게테스는 자신의 친아들을 죽인 다음 시신을 토막 내서 부인, 그러니까 아들의 생모에게 생일 선물로 보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수도로부터 추방되었던 그는 내란을 틈타 다시 수도로 잠입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불을 지르고 피바다를 만들었으며, 박물관 출입을 금지하고 연구원들을 모두 추방했다. 이 사건을 두고 아테나이오스는 "수많은 문법학자, 철학자, 기하학자, 의사들이 세계 도처에서 유랑하며 구걸하듯이 그들이 아는 것을 가르치는 극빈자로 전락했다."고 묘사했다.

è 윤리가 무너지면 문화가 퇴행한다.

 

370 10세기가 넘도록 명맥을 유지해오던 두 기관은 인간의 기억 속에 너무도 찬란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두 기관을 둘러싼 전설이나 신화가 중세까지도 모든 문예부흥을 지배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 같은 영속성 덕분에 고대와 현대를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 : 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

 

379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와 아르키메데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아이스퀼로스나 페이디아스만큼 대단한 천재들이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천재성을 쏟아붓는 대상은 바뀌었다. 이들은 더 이상 새로운 건축물을 축조하지 않고, 비극 3부작을 통해 세곌르 재편성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과학을 정립해나갔으며 물리적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è 이놈의 천재 타령

 

383 퓌타고르사 학파는 기원전 6세기 무렵에 벌써 최초로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386 아리스타르코스 - 그가 태양중심설을 주장한 저서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ㄴ 태양과 달의 크기와 거리라는 저서만이 전해질 뿐이다. 이 책에서 그는 고대에는 처음으로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크다고, 거의 300배나 크다고 주장한다. … 여기에 대해서 그는 기하학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지구상에서 충분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점을 밑변으로 하고 태양을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그릴 수 있는 반면, 태양 아닌 다른 별들과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è 매우 훌륭한 근거이며 발상이다. 그런데 왜 난 아리스타르코스의 이름을 처음 듣지?

 

지리학 : 퓌테아스와 에라토스테네스

 

403 요컨대 모험가이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의 발견자라는 진면목을 지닌 퓌테아스는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가 쓴 시에서 아르고선을 타고 모험에 나선 원정대를 이끄는 이아손보다 훨씬 매력적인 인물이며, 엄청나게 유식한 아폴로니오스 자신보다 훨씬 진지한 학자임에 틀림없다.

 

408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재는 작업에도 착수했으며, 탁월한 방법을 사용하여 사실과 매우 가까운 수치를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태양광선이 모두 평행하다는 전제 하에.

 

의학 : 아르키메데스, 헤론, 그리고 증기기관에 관하여

416 기원전 300년경에 태어난 헤로필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 2세 재위 기간 동안 박물관에서 최초로 의학을 강의한 인물이다.

 

425 물론 파이(수학 기호)의 계산보다 훨씬 파급력이 크다. 물론 파이의 계산은 아르키메데스가 이룬 또 하나의 개가이며, 오늘날 젊은 수학도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유용한 업적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쉬라쿠사이 포위가 계속되던 기간 중에 스스로에게 제시한 문제 풀이에 몰두하다가 로마 병사의 손에 죽었다.

 

427 헤론의 <기체학>에서 그리스어로 이 기계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 위에 공 하나가 축 위에서 움직인다."

428 헤론의 이 글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취관을 제작함으로써 아르키메데스의 수제자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이 확실하다. … 이 발명품은 오늘날의 노르만디호나 퀸 메리호 같은 거대한 여객선이 대양을 가로지르게 해주는 엄청난 동력을 지녔음에도 고대인들은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테나이에서 알렉산드리아 또는 맛살리아로 오고 가는 데 여전히 노 젓는 일꾼을 이용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기술적, 심리적 이유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난마처럼 얽혀 있지만, 그처럼 긴 망각,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품을 그토록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저변에는 사회적인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è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è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증기기관을 활용되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과연 노 젓는 이들, 아니 보다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자신들이 이룩한 발명품을 이용할 줄 몰랐을까? 그들은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귿르은 그렇게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오랜 망각에 대한 설명이다.

è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긴 수천년 동안 증기 기관을 생각해낸 사람이 한 두 명은 아닐 것이다. 이를 필요로 하는 시점을 만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431 헤론보다 앞서서 요즘 말로 로봇을 만드는 일에 빠져들었던 선배들 중에 아르퀴타스는 나무로 만든 비둘기들을 하늘에 날려서 플라톤으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플라톤은 이들이 "기하학으로 하여금 비물질적이며 순수하게 지성적인 세계로부터 마치 노예들처럼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사물로 하강하게 함으로써 기하학을 타락시키며, 기하학이 지난 존엄성을 훼손시킨다"면서 진노했다. 플라톤은 또한 "손의 노동을 요구하며, 노예적인 직업에나 어울릴 법한 자료를 사용한다"고도 비난했다.

è , 역시 플라톤. 고리""분해.

 

손을 쓰는 일을 노예적이라고 간주하는 편견은 궁극적으로 응용 역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질적 저하를 가져왔으며, 이를 고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보다 더 빨리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결과론적으로 아시아에서 산업혁명이 더 빨리 일어났더라면, 플라톤의 이러한 가치관은 과학적 도태의 원인으로 언급될 것이 뻔하다.

 

노예제도는 기계의 사용을 저해한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è 노예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과학이 발전하였다. 이 역시, 윤리가 개선되어야 발전이 있다는 예로 사용될 수 있을까?

è 혹시 아시아인들은 너무 부지런했나? 꼼수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434 결과적으로 이 증기기관 일화는 대단히 교훈적이다. 이 이야기는 문명이란 대중의 상승 의지가 있을 때에만 발전 과정 중에 부딪히게 되는 일정한 장애를 넘어설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다. 현대에 들어와 드니 파팽(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던가!)과 와트의 증기기관을 사용하게 된 것은 17세기, 19세기에 부르주아 계급의 상승과 맞물린다. 그런데 이에 비견할 만한 어떤 상승 의지가 처음 구상되었을 당시의 헤론의 증기기관을 부양할 수 있었겠는가

 

435 희망이 있는 한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로의 회구 : 칼리마코스, 로도스의 아폴로니우스가 쓴 <아르고나우티카>

442 물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영감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칼리마코스 자신도 그 점을 잘 알았다. 하지만 영감이 고갈되고, 누구나 별로 힘들이지 않고 5막짜리 비극을 뚝뚝 써내거나, 장단단격 육각시로 신화적인 주제를 가지고 24새 노래로 구성된 서사시를 시도해볼 정도로 창작이 식은 죽 먹기가 되어버린 시대에, 시가 다시 어려워져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시를 구하는 길이었다. 고전의 답습으로 특징지어지는 관학풍으로부터 시를 구해내려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다. 시에서 고전의 답습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49 도합 5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각각의 인물마다 전기적인 요소가 첨부되어 있으며, 심지어 그 인물이 태어난 고장의 특산물까지도 적었다. 말하자면 그리스의 지리를 가르치는 교과서 같은 모양새를 한 셈인데 이만저만 지루한 것이 아니다.

è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보나르는, 자기 책은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455 오뒷세우스는 매번 운명에 응답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그의 자질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아손은 그렇지 못하다. 예측하지 못했던 불행 앞에서 그는 당황한다.

è 두 인물의 비교

 

466 이 대목에서만큼은, 죽음을 끌어안으려고 다가가는 이 장면, 삶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 대문에 결국 포기하게 되는 자살의 문턱까지 다가가는 이 장면에서 시인은 그 누구도 모방하지 않는다.

 

472 , 이제 마무리를 지어보자. <아르고나우티카>는 한마디로 실패작이다.

è 그런데 보나르는 왜 실패작을 다루고 있는 것이지? 지면이 아깝지도 않나? 까는 것으로 즐거움을 찾거나 아니면 자신의 확신에 찬 비평력을 과시하려는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백조의 노래"처럼 자신의 유작이 될 책에서 남의 작품을 비방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자신의 고유하고 고질적인 특성에 충실한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뭐 쓰고 싶은대로 쓰는거지.

 

475 어쨌거나 그의 이름에는 영예가 따라다닌다. 아폴로니오스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은 원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완전히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 그리스 최초의 소설가였다.

 

테오크리토스의 낙원

 

486 "그리고 만일 당신이 보디게 내가 너무 거칠고 퉁명스럽다면 나를 상대해줄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내가 참나무 장작을 마련해놓았으니 화롯불 곁에 앉아만 있어요. 나는 혼자서 슬픔을 견딜 테니까난 당신이 입술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저 손등에나 키스할 겁니다…"

è 나는 폴리페모스를 좋아하는데, 이런 재해석은 생각보다 감동적이지 않다. 원본의 짧고 온전한 느낌 그대로를 느낄 수가 없다. 왠지 이 말을 하는 폴리페모스는 연민을 활용할 줄 아는 노련한 연애꾼 같은 느낌이 든다. 일단 말이 너무 많다.

 

496 예술, 즉 원석 상태인 시적 금속을 세련된 귀금속으로 변신시키는 연금술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누가 감히 어느 지점에서 예술이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출발점은 분명 온전히 대중적인 곳, 대지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농부 기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확실하다.

è 농부 기질이라는 표현, 괜찮았다.

 

505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온 세상을 주고 싶은데, 실제로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노래밖에 없다.

è 2AM의 노래가 생각나는군. 진부하다.

 

512 테오크리토스에게 자연과 사랑의 혼합, 즉 시는 독자들에게 예전처럼 삶의 방식이나 죽음의 방식(가령 필요하다면 영웅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식)이 아닌 삶으로부터의 도피, 망각으로의 달콤한 도피를 제안한다.

è 3의 공간을 잘 찾아낸 듯 하다. 제시가 탁월하다. 그 동안 잊고 있던 부분이다.

 

513 테오크리토스는 피곤에 지친 세계를 본떠서 시를 썼다. 돈이면 만사형통인 이 세계에 그 자신도 심한 염증을 느꼈다. 그는 이 고단한 세계에서 나무와 풀밭, 맑은 물에 대한 향수를 길어 올렸으며, 양치기들의 소박한 생활에 대한 부러움을 전파했다. 그는 말하자면 청춘의 샘, 자연의 세계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천진함을 새삼스럽게 발견했다는 일종의 환상(어쩌면 환상 이상 가는 그 무엇)을 선사했다.

 

이것은 시에 관한 매우 현대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더 이상 삶의 원칙이 아니라 삶을 뛰어넘으며, 삶 너머에 있다. 요컨대 시는 이승이 아닌 다른 세상, 곧 천국이다.

 

다른 형태의 도피 : 헤론다스와 사실주의 풍자 희극, 그리스의 소설 <다프니스와 클로에>

 

522 그런데 이번엔 헤론다스가 택한 길, 내가 천박한 사실주의의 길이라고 표현한 그 길을 잠시 따라가 보자.

è 그런데 보나르는 죄다 "사실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그에게 사실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532 새로운 경향: 천박한 현실을 모방하는 문학

이제 실재를, 천박한 실재를 모방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문학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는 분명 훗날 위대한 문학 작품들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었다.

 

544 사랑은 이제 서서히 저물어가는 맑게 갠 날에, 아름답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여인과 함께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남자와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다.

è 수긍한다. 그러면 확실히 "사랑" "사랑"이겠지. 영광스러운 사랑. 추억하고 싶은 사랑.

 

에피쿠로스와 인간의 구원

 

551 … 왜냐하면 그건 대표적인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 숭배만큼 정신에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정신을 숭상하는 정신은이게 뭔지 알겠나? 너무 잘 알지.

프랑스시 퐁주, <대지>

è 왜 마지막 소주제에 이 글을 인용하였을까? 보나르는 물질에 대해 생각하는가?

è에피쿠로스는 물질로 환원될 수 있는 개념인가?

 

553 그는 인간들이 쓸데없는 두려움과 고답적인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온한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해방자이며, 치유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준 치료사다. 사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 아니 얼마든지 치유 가능한 어리석음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루크레티우스는 '기품 있는 열정'이라고 표현되는 문체를 빌려, 이렇게 선언했다. "근느 신이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지혜라고 일컫는 삶의 법칙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자신이 정립한 학문을 통해 인간의 삶의 법칙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자신이 정립한 학문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수많은 폭풍과 수많은 암흑으로부터 끌어내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

è 엄청난 격찬이군. 결국 보나르도 에피쿠로스에게 수렴하는가?

 

% 에피쿠로스를 읽다가 너무 좋아서 한 부를 복사했다.

 

561 경제가 와해되어가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삶은 너무도 불확실한 나머지 모든 것이 우연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러니 새로운 신, 새로운 숭배가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튀케(우연을 의미하는 이름) 여신은 이렇게 해서 창조되었다. 튀케 여신 숭배는 점점 확대되었다. 인간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문을 통해서 자연관 사회를 움직이는 안정적인 법칙을 탐구하던 그 인간들은 이제 세계와 인간의 조건에 대해 무모하고 우연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들의 삶엔 안전판이 결여되어 있었다! 에피쿠로스의 시도 또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563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세계는 이미 파괴가 예정된 세계, 따라서 불안 속에서 살 ㅅ n밖에 없는 세계였다.

 

564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지상의 양식이라는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지상의 양식분명 그렇다. 에피쿠로스는 플라톤의 첫 번째 대안, 즉 내세에서의 지복을 약속하는 노선은 따라가지 않았다. 이 제안은 그가 보기에 너무 안이할 뿐 아니라 기만적이었다. 그는 영혼불멸을 믿지 않았다. 그는 인간들에게 즉각적으로, 현재의 삶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소박하고 제한적인 행복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확실하고 누구나 자신의 두 손으로 길어 올릴 수 있는 행복을 말이다.

è 뒤에도 나오지만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은 도스토옙스키와 에피쿠로스와 명맥을 함께 한다. 나는 메일 주소를 gide10을 쓴다. 당연히 앙드레 지드를 의미한다.

 

565 진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한순간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빨리 치료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행복은 기다려주지 않는 시급한 요구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짧다. "우리들 각자는 이제 막 태어난 것 같다는 심정을 안고 삶과 작별한다."

에피쿠로슨느 이 같은 다급함ㅇ르 안고 성찰했으며 진리를 탐구했다.

 

569 육체는 존재한다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감각이 그걸 증명하며, 이성은 이 사실에 입각해서 가설을 내놓아야 할 걸세."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무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파종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으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이 될 테니까."

è 플라톤이 말한, 육체보다 먼저 존재하는 영혼 같은 것은 없다.

 

572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뒤를 이어 그의 이론을 한층 발전시켜나가면서 이 세계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본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기본 입자들이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소멸하지 않고 변하지도 않으며 더 이상 쪼개지지 않고 영원히 운동을 지속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573 그러니 실제로 그는 무신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사이세계에서 행복과 지고의 평화 속에서 사는 신들이 왜, 무엇 때문에 인간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인간들에게 해를 주겠는가? 신들은 자신들의 지복 외에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575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절을 했을 때나 마찬가지로 그것을 의식조차 할 수없다. 우리의 존재, 존재한다는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입자들은 모두 부패한다. 모든 복합물이 분해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이는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게다가 문제의 부패나 분해가 일어나는 순간이면, 그걸 의식해야 하는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현재가 될 수 없다네. 그리고 죽음이 닥쳤을 때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없거든." 그러니 우리는 단 한순간도 죽음과 접촉할 여지가 없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 우리의 동요는 귀신을 상상하는 어린아이가 느끼는 공포만큼이나 어리석다. 일단 죽고 나면,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심할 것이다. 우리는 한 세기 전에 살고 있지 않았다고 통곡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앞으로 한 세기 후에 살아 있지 못하게 되었다고 통곡을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이르기 전에 겪을 수도 있는 신체적인 고통까지도 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고통이라면, 우리는 충분히 견뎌낼 만한 용기와 존업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그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신체적인 고통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중환자였던 그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으며, 신체적 고통이 그가 느끼는 평화와 행복을 망가뜨리지도 않았다.

 

고통이 잠시만 중단되면, 단순한 필요, 아주 기초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이 타고난 소명을 수행하는 데 충분하다.

 

576 인간의 본질을 구원한다.

 

577 이들 광인들은 항상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한다. 사실상 이들은 에피쿠로스가 말했듯이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을 찾아다니느라 바쁜 나머지 삶을 살 겨를이 없다. 현자는 삶이란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안다. 삶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날, 이날의 매 순간이다. 즐거움의 매 순간은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선의 원칙과 뿌리는 복부의 쾌락에 있다."

 

그는 자신이 획득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을 통해서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이 귀중한 재산은 자신의 삶이 멈추지 않는 한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음을 잘 알게 되었다.

 

594 아나톨 프랑스, 앙드레 지드 등도 그에게 동조한다카를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를 인간 해방자들 중의 한 명으로 예우한다.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는가? 인류는 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는가?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595 이제야 비로소 원자들을 볼 수 있게 되다니

 

 

 

 

 

 

 

 

 

 

 

 

 

 

 

 

 

 

 

 

 

내가 저자라면

 

 

 

 

그리스인 이야기 3권을 읽었다.

 

저자인 앙드레 보나르는, 흐르듯이 책의 내용을 읊은 것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잘 읽힌다. 거칠 것 없이 자유분방하게 흐르는 깊은 강 같다. 다만, 깊이가 일정하게 깊기만 하지는 않은 것 같다. 3권의 대미를 장식하는 에피쿠로스에 관한 고찰은 참으로 탁월하다. 그러나 클뤼타임네스트라나 메데이아에 관한 분석은, 분석 방향의 자유를 감안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단어 하나 하나를 선별한 진중함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용어가 부정확하다. 혹은 지나치게 광의적으로 쓰고 있다. 보나르가 제시한 문학가들은 대개 "사실주의"라고 정의되고 있다. 사실주의란 사전적 정의로 19세기 후반에 성행한 문학의 경향을 일컫는다. 그리스 고대 시기의 인물을 두고 19세기의 일반 사조를 뜻하는 용어를 쓸 때는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현실주의"라는 용어도 자주 쓰고 있다. "실존"이라는 용어도 많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강력한 현실주의자다. 동물의 세계라고 하는 현실은 그의 저작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정한 실존감을 드러낸다.

 

저서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지다보니 겹치기식 사유가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용어를 고심해서 선별하지 않은 탓일까? 어쩌면 작가가 선호하는 사유의 방향을 여기 저기에 남발한 것은 아닌지? 내가 이 점을 특별히 경계하는 이유는, 나 역시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실존"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용해왔는데 스스로도 식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실존에 대한 심각한 고찰 없이 왠지 그럴싸하고 문맥에 그럴듯하게 맞는다는 이유로 여기 저기 남발하다 보면, 스스로 B급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 훌륭한 글은 사유의 깊이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천재"에 관한 언급이 지나치게 많고 중복된다. 이는 식상함을 넘어 작가의 강박증을 의심하게 한다. 의학 수업 내내 노벨상 수상자에 관해 이야기 하는 기초 의학 교수의 욕망이 무엇인지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1, 2권의 주제들은 그리스 문화에서 핵심 화두들로 그 중요성에 큰 이견을 보이기 힘들었는데 3권에서는 아무래도 저자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과학사를 짚은 것은 정말 좋았다. 개인적으로 과학사를 중요하게 치는 나로서는 참 좋은 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 문학가들의 작품을 전하면서, 그 마저도 작가 스스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뒤에 작품의 의의를 마지못한 듯 달기는 했지만) 굳이 책에 실을 필요가 있었을지? 왜냐하면 일단 일반 독자에게는 사진 지식이 없으므로 흥미도가 0인 상태인데, 막상 읽었을 때에도 그리 큰 흥미를 유발시키기 않기 때문이다. 연구원들과 중간 평가를 하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3권은 재미없다는 논평이 많았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읽기를 그만 두겠지. 가장 가치있는 맨 마지막의 에피쿠로스까지는 읽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큰 딜레마일 것이다. 작가는 말하고 싶은데, 독자는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책. 과연 작가는 흥미로운 내용을 당의정 삼아, 쓰고 싶은 바를 패키지로 끼워팔 수 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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