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2012년 7월 9일 08시 44분 등록

요즈음 출장이 잦은 편이다. 교통수단은 기차, 버스, 자가용이다. 그 중에서 자가용을 주로 이용하는데, 이상하게도 차를 타면 생각이 많아진다. 글을 쓸 때에는 아무리 애써도 잘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쏟아져 나온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드라이브를 하면서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린다고 한다. 나의 경우도 가끔 괜찮은 영감이 떠오르긴 하지만, 대부분 잡생각들이다. 문제는 생각 중에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발생한다. 네비게이션이 달려있어도 좌회전해야 하는데 쭉 직진해서 가거나, 톨게이트 나와서 부산 방향인데, 서울 방향으로 가버린다. 물론 옆에 누군가 있으면 조금 나은 편이다. 그래서 아내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네이게이션 안내에 집중한다. 이상한 곳으로 가지 않게 네비게이션보다 앞서 말해준다. 똑똑한 인간 네비다. 

 

왜 운전을 하면 평소 잠잠하던 생각들이 떠오르게 될까? 회사 사무실의 좁은 공간에서 일하다가 넓은 도로 위로 나와서 생각의 물꼬가 트여서일까? 아니면 도시의 숨막히는 빌딩 숲을 달리다가 시골 산 길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향수에 젖기 때문일까? 늘 정해진 시간 속에 주어진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내 생각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잠시 틈을 내서 산책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시인 '테오크리토스'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시인은 피곤에 지친 사회, 사업가들과 공무원들로 이루어진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 갇혀 살았다. 그 고대의 도시는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와 다르지 않다. 시인은 시골에서 성장했으며 자연을 사랑하나, 도시에 살면서 끔찍한 권태를 경험한다. 점점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되살린다. 상상 속에서 어린 시절의 풍경을 재창조한다. 시인은 고단한 세계에서 나무와 풀밭, 푸른 바다에 대한 향수를 길어 올렸으며, 시골 생활에 대한 부러움을 전파했다. 그리고 청춘의 샘, 자연의 세계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천진함을 발견하며, 도시 사람들에게 낙원의 모습을 선물했다.

 

 이번 주 출장 중에 나는 해인사를 들렀다. 아내를 처음 만날 때 기도하며, 내 마음을 비운 곳이다. 해인사 입구를 지나 산 속으로 펼쳐진 고목들을 보면서 테오크리토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차 안에서 떠오른 생각이라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창 밖으로 지나간 풍경들을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녹음을 했다. 마이크 달린 이어폰을 핸드폰에 연결한 다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주절주절 말하다 보니 잡생각들이 여기 저기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유난히 빛나는 아이디어 하나를 건져냈다. 보석을 얻은 사람처럼 신이 났다. 운전대를 두들기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이번 주 칼럼 주제는 바로 이거야!"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산 속으로 걸어 올라갔다. 테오크리토스가 시칠리아 섬을 거닐면서 자연을 마음 속에 담아냈듯이 직접 자연을 느끼고 싶었다. 비가 쏟아졌다. 고개를 들고 빗방울을 맛보았다. 맛있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렸다. 해묵은 생각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길 기도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숙소는 오래된 산장이었다. 기와지붕에 미닫이 문으로 양쪽 문을 열자 해인사 산 자락이 내 방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주인장에게 책상 하나 빌려서 <그리스 이야기3>를 펼쳤다. 해인사에서 그리스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조금 이상해서일까? 잘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덮고, 비 내리는 해인사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고대 그리스 시인들은 자연을 보면서 그 순간의 느낌을 어떻게 글로 표현했을까? 아마도 복잡한 생각이 많지 않아서 모든 감각 속에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으리라, 그래서 눈은 사진기가 되고, 귀는 녹음기가 되어 자연을 넉넉히 기록했을 것이다.

  

옆 방도 문을 열고 있어서 그런지 조그만 소리라도 다 들렸다. 모녀가 휴가 온 모양이었다. 지나가면서 잠깐 방 안 풍경을 보았을 때, 책상 위에 책과 종이들이 어지럽혀져 있는 모습이 글 쓰는 사람 같았다'자연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어느 작가라도 똑같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산사의 공기를 깊게 마셨다. 그리고 팬티만 걸치고는 침대에 누웠다. 옆방에서 모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얘야, 옆 방에 아저씨에게도 과일 가져다 드려라"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바지가 걸린 벽으로 다가가려다 책상에 걸려 넘어졌다. 욱신거리는 무릎을 움켜지고는 과일을 건네 받았다. 그 날밤 손바닥 만한 거미가 천정 위에 붙어 있었지만, 내버려두었다. 벽을 타고 내려오던 거미줄을 타고 내려오던 산사에 묻힌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IP *.182.111.5

프로필 이미지
2012.07.09 13:29:55 *.166.160.151

상상이 된다. 왠 과일은 준다고 해서...멀쩡한 총각 무릎을 찧게 만드느냐고...!!

비오는 해인사 좋다....

프로필 이미지
2012.07.10 08:40:32 *.194.37.13

해인사는 저를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입니다.

아내와의 인연을 연결해 준 것만 해도 그렇구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하게 만들어줘서 옆 방에 있는

사람에게도 과일을 건네주는 것 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2.07.09 20:13:50 *.36.15.97

오빠 혹시, 사랑방 손님?=_= 그 여자분 이름은 옥희.ㅋㅋㅋㅋ

 

갑자기 므흣해지는 해인사...

 

지송.

프로필 이미지
2012.07.10 08:43:47 *.194.37.13

그러고 보니, 내가 사랑방 손님이 되었네~^^

어떤 분인지, 무슨 글을 쓰는 물어보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어,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서 평생 못 잊을 것 같아 .

 

프로필 이미지
2012.07.10 13:12:11 *.114.49.161

아, 점점 어리버리 에피소드가 늘어나네요.

딴 생각하다가 딴 길로 가버리기(크하하하), 바지 가지러 가다가 책상에 걸려 넘어지기(크하하하)....

점점 1빠로 제출하는 완벽남의 틈새가 보이면서 사랑스러워지는 듯^^

하지만 이런저런 아이디어 속에서 출장 숙소를 해인사 보이는 데다 잡는 걸 딱 잡아채시다니

출장 모험가가 되실듯!  

 

프로필 이미지
2012.07.11 08:40:52 *.182.111.5

아직도 부족한 게 너무 많습니다. 그건 빈틈이 많다는 것이죠.

넉넉한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그 빈틈이 채워지고 있어서

즐겁습니다. 그때마다 에피소드가 하나둘씩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짐해 봅니다.

'마음만큼은 여유있게 살면서, 나도 사람들의 빈틈을 사랑으로 채워줘야지'라구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092 나의 오지 [1] 장재용 2012.07.17 2071
3091 #15. 7월 오프수업 - 내적 외적 탐험 [2] 한젤리타 2012.07.17 2263
3090 7월 오프 수업 - 내적 외적 사건 [2] [1] 세린 2012.07.17 2437
3089 7월off수업_내적 외적사건 [1] 서연 2012.07.17 2374
3088 나의 내적 탐험 이야기 학이시습 2012.07.16 2397
3087 7월 off수업-내적 외적사건 [4] id: 깔리여신 2012.07.16 2300
3086 해줄 것이 없어 미안해(수정) [6] 루미 2012.07.10 2296
3085 #37. 신치의 모의비행-서른살생일 [8] 미나 2012.07.09 2505
3084 쉼표 열둘 - 멀리가려면 함께 가라 file [8] 재키 제동 2012.07.09 2620
3083 나의 문명 전환 [6] 콩두 2012.07.09 2369
3082 원형극장에서 부르는 노래 [6] id: 깔리여신 2012.07.09 2524
3081 김교수와의 만남(공개) :) [7] 세린 2012.07.09 2349
3080 Louisvuitton과 문명 그리고 의식성장에 관한 소고. file [11] 샐리올리브 2012.07.09 2164
3079 쌀과자 #14_인간활동의 동기 [4] 서연 2012.07.09 2155
3078 최초의 여성 심리 비극 ‘메데이아’ 를 읽고 생각 한다. [10] 학이시습 2012.07.09 3584
» #14.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 '테오크리토스' file [6] 한젤리타 2012.07.09 2747
3076 길을 거스르다 [7] 장재용 2012.07.09 2437
3075 단상(斷想) 105 - 도시의 그날 하루 file [1] 書元 2012.07.08 2407
3074 #36.신치의모의비행-누가날위해울어줄까 [6] 미나 2012.07.03 2365
3073 [재키제동이 만난 쉼즐녀 3] 로레알 키엘 이선주 상무 file [18] 재키 제동 2012.07.03 8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