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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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출장이 잦은 편이다. 교통수단은 기차, 버스, 자가용이다. 그 중에서 자가용을 주로 이용하는데, 이상하게도 차를 타면 생각이 많아진다. 글을 쓸 때에는 아무리 애써도
잘 떠오르지 않던 생각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쏟아져 나온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드라이브를 하면서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린다고 한다. 나의 경우도 가끔 괜찮은 영감이 떠오르긴 하지만, 대부분 잡생각들이다. 문제는 생각 중에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발생한다. 네비게이션이 달려있어도 좌회전해야 하는데 쭉 직진해서 가거나, 톨게이트 나와서 부산 방향인데, 서울 방향으로 가버린다. 물론 옆에 누군가 있으면 조금 나은 편이다. 그래서 아내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네이게이션 안내에 집중한다. 이상한 곳으로 가지 않게 네비게이션보다 앞서 말해준다. 똑똑한 인간 네비다.
왜 운전을 하면 평소 잠잠하던 생각들이
떠오르게 될까? 회사 사무실의 좁은 공간에서 일하다가 넓은 도로 위로 나와서 생각의 물꼬가 트여서일까? 아니면 도시의 숨막히는 빌딩 숲을 달리다가 시골 산 길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향수에 젖기 때문일까? 늘 정해진 시간 속에 주어진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내 생각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잠시 틈을 내서 산책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시인 '테오크리토스'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시인은 피곤에 지친 사회, 사업가들과 공무원들로 이루어진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 갇혀 살았다. 그 고대의 도시는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와 다르지
않다. 시인은 시골에서 성장했으며 자연을 사랑하나, 도시에
살면서 끔찍한 권태를 경험한다. 점점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되살린다. 상상 속에서 어린 시절의 풍경을 재창조한다. 시인은 고단한 세계에서
나무와 풀밭, 푸른 바다에 대한 향수를 길어 올렸으며, 시골
생활에 대한 부러움을 전파했다. 그리고 청춘의 샘, 자연의
세계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천진함을 발견하며, 도시 사람들에게 낙원의 모습을 선물했다.
이번 주 출장 중에 나는 해인사를 들렀다. 아내를 처음
만날 때 기도하며, 내 마음을 비운 곳이다. 해인사 입구를
지나 산 속으로 펼쳐진 고목들을 보면서 테오크리토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차 안에서 떠오른 생각이라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창 밖으로 지나간
풍경들을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녹음을 했다. 마이크 달린 이어폰을 핸드폰에 연결한 다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주절주절 말하다 보니 잡생각들이 여기 저기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유난히 빛나는 아이디어 하나를 건져냈다. 보석을 얻은 사람처럼 신이 났다. 운전대를 두들기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이번 주 칼럼 주제는 바로 이거야!"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산 속으로 걸어 올라갔다. 테오크리토스가 시칠리아 섬을 거닐면서 자연을 마음 속에 담아냈듯이 직접 자연을 느끼고 싶었다. 비가 쏟아졌다. 고개를 들고 빗방울을 맛보았다. 맛있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렸다. 해묵은 생각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길 기도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숙소는 오래된 산장이었다. 기와지붕에 미닫이 문으로 양쪽 문을 열자 해인사 산 자락이 내 방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주인장에게 책상 하나 빌려서 <그리스 이야기3>를 펼쳤다. 해인사에서 그리스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조금 이상해서일까? 잘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덮고, 비 내리는 해인사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고대 그리스 시인들은 자연을 보면서 그 순간의 느낌을 어떻게 글로 표현했을까? 아마도 복잡한 생각이 많지 않아서 모든 감각 속에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으리라, 그래서 눈은 사진기가 되고, 귀는 녹음기가 되어 자연을 넉넉히 기록했을 것이다.
옆 방도 문을 열고 있어서 그런지 조그만 소리라도 다 들렸다. 모녀가 휴가 온 모양이었다. 지나가면서 잠깐 방 안 풍경을 보았을 때, 책상 위에 책과 종이들이 어지럽혀져 있는 모습이 글 쓰는 사람 같았다. '자연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어느 작가라도 똑같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산사의 공기를 깊게 마셨다. 그리고 팬티만 걸치고는 침대에 누웠다. 옆방에서 모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얘야,
옆 방에 아저씨에게도 과일 가져다 드려라"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바지가 걸린 벽으로 다가가려다 책상에 걸려 넘어졌다. 욱신거리는
무릎을 움켜지고는 과일을 건네 받았다. 그 날밤 손바닥 만한 거미가 천정 위에 붙어 있었지만, 내버려두었다. 벽을 타고 내려오던 거미줄을 타고 내려오던 산사에
묻힌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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