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콩두
  • 조회 수 271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2년 7월 9일 11시 53분 등록

1.   저자에 대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인 앙드레 보나르씨는 이런 사람이 아닐까 이 궁리 저 궁리 해본다근거 없는 잡념을 내 즐거움을 위해 써 둔다.    

 

첫째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한 사람이다. 그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 말고도 그리스에 대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식성으로 와작와작 읽어댄 것 같고 그 과정을 무척 즐긴 것 같다. 어쩌면 남들에게 자랑말하지 않고, 나중에 써먹을 생각 없이 힘들고 다사다난했던 한 주를 보내고 토요일 퇴근 후, 남들은 바에 가고, 춤추러 가고, 산에 가는 동안 순전히 즐거움을 위해 취미 삼아 오래 묵은 그리스 책을 읽었을 수도 있겠다. 이런 문장을 읽고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220 그리스어로 된 플라톤의 저작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번역을 위해서가 아니라(유감스럽게도!) 그의 저술을 감각적으로 그러니까 한 입 깨물면 깔깔한 입안에 달콤한 즙이 흥건히 고이는 잘 익은 과일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생한 그리스어가 주는 관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플라톤의 문장이 상상을 뛰어넘는 희열로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며, 자신의 안에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언약을 일깨우며 자신의 존재 전체(영원히, 아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분리될 수 없이 하나가 된 영혼과 육체)를 사로잡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멸을 만들어내고 천사를 만들어내는 그의 문장이 인간의 부조리한 몽상(영원한 삶)을 마치 배고프면 한입 깨물어 먹는 빵조각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준다는 것도 느낄 것이다.    

 

그가 플라톤 저술만 사랑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본업이 그리스문학교수니까, 그 일을 30년 했고, <그리스인 이야기> 3권이 그가 평생 해온 연구와 작업을 정리하고 묶어내는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공식적인 은퇴를 준비하며 이곳저곳에 발표했던 전공 관련한 논문을 모으는 건 자연스러워보인다. 한편 소방호수에서 뿜어내는 물줄기처럼 내보이는 '그 외 하고 싶은 말’이 퍽 많다. 그리스문학 교수가 그리스 영웅서사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그리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읽고 심층분석해서 글을 써놓은 건 당연하겠다. 마찬가지로 인구 백만이 넘어가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양떼에게 풀을 뜯기며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테오크리토스 같은 후기 전원시인의 시, 왕립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연구한 학자들의 영향으로 유식한 격언시가 되어 버린 김빠진 맥주같은 시와 풍자적인 그리스소설에 대해 많은 구절을 인용해 놓은 건 존경스럽지만 감동적이지는 않다. 그건 부지런한 동종업자들도 하고 있는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 스위스의 눈덮인 산을 트래킹하고 크리스마스날 전나무에 장식을 매달고서 전통적인 스위스식 가족 만찬을 매해 벌였을 이 스위스 사람이 평생을 들여 그리스 문명에 대해 자체 연구한 것들에 대해 하고 있는 말들과 그가 사랑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야기, 인용들은 감동스럽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3권에서 역사가 투퀴디데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연극대본처럼 3개의 막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연극대본같은 역사서를 읽었겠다 추측한다. 뭣하러 읽으셨을까? 참 희안하다. 암튼 체력단련장에도 가기 곤란했던 약골에 언어장애가 있던 투퀴디데스가 48살에 전쟁에 병사로 출전한 삶의 이야기를 그가 역사서에서 다룬 관점과 같이 소개한다. 플라톤의 저작들 <국가>, <소크라테스의 변명>, <고르기아스>, <법률>, <향연>,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이 그리던 사회의 이상에 대해 말한다. 나는 대학교 1학년 전공필수 교육철학 시간에 막 학위를 딴 강사님의 입에서 주워듣던 동굴의 비유, 생산자, 군인, 철인 3계급에 대한 걸 내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감읍하는 형편이다. 요것만 다룬 게 아니라 플라톤의 삶과 스승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을 다룬다. 이상화된 철학자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까불락까불락 들려준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플라톤 저술인 걸 처음 알았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변명한 줄 알았다. 이렇게 말해놓고 '어, 아닌가?' 자신없어서 지끈지끈해지는 게 그리스문명, 또는 그리스인에 대한 나의 사전지식 현행수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 <동물에 대하여> 4, <동물의 생성에 관하여> 5권도 그가 읽은 것 같다. 헬로필로스의 <의학> 등등 그가 인용한 책의 제목을 읽다가 에이, 설마 이걸 다 읽었겠어? 재인용이라는 형식이 있잖아?’ 의심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가지 오류에 대한 예가 너무나 자세해서 아니야, 읽었을 수도 있었겠어. 에이 설마, 어쩌면한다. 악어에게 혀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 박쥐와 고래를 뭘로 분류했냐 이런 거다. 플라톤이 세운 학교 아카데메이아 학생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죽기 전까지 꼬박꼬박 출석했다. 그런데 의사 집안의 아들래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학은 스승의 관념론과는 달리 동물학, 생물학을 기반한다. 그러다 문득 1,2권을 읽다가도 나는 힙포크라테스의 저서들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기반한 기발한 사고의 흔적을 보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났다. 제네바 선서인가로 다듬어지기 전 고대 의사들의 선서를 원문 그대로 인용해놓으면서 노예를 차별하지 않는 힙포크라테스의 인본주의에 그가 경탄할 때 나도 따라 감동했다. 그는 조선후기 문장론을 공부하다가 선비정신에 대해 쓰게 된 정민교수님처럼 점점 넓어진걸까? , 내가 정민교수님말고 이런 학자의 예를 좀 더 알고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읽어본 것이 이게 다니 어쩔 수 없다. 이런 인물은 자기 전공분야를 중심으로 읽다가 그 시대 전체, 또는 문명에까지 관심 영역이 넓어진 사람, 그걸 남들에게 알리는 글을 쓴 사람이다.   

 

두 번째는 책의 날개에 나와 있던 저자 소개 중 그가 참여적 인문주의자라는 것의 뜻과 연유가 궁금했다. 샐리올리브 언니가 기회를 만들고 세린신이 자세히 정리한 1,2권의 번역자 김희균교수님과의 만남을 정리한 글을 읽었는데 잘 모르겠더라.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소심증때문에 낮에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했다. 자느라 인천에서 서울로 나서질 못했다. 이건 스트레스 받아서 선술집에 한 잔 하러 갔다가 술이 취해서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하고 비슷한 거다. 나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나의 취약성일테다. 1,2권과 3권의 느낌이 달랐다. 같은 작가의 책인데 왜 그럴까? 그게 번역자의 영향인지 문명의 발전기와 쇠망기의 차이인지 모르겠다. 나는 역자도 한 몫 한다고 생각했다. 3권의 번역이 훨씬 점잖았다. 나는 법학에서 박사학위를 가졌고 인생의 길찾기 과정에서 우연처럼 잠깐 프랑스어를 전공했던 이의 1,2권 번역이 더 좋았다. 입에 쩍쩍 들러붙었다.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추측했다. 그는 문명을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흥망성쇠를 기록하던 투퀴디데스는 개인의 호기심과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발전 원리를 후대에게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글을 쓰고 연구를 했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앙드레 보나르의 관점과 관심 역시 인류의 문명의 흐름, 또는 변화 원리에 있었을 거다. 그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고안했던 걸 실제로 적용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이기심을 없애려는 두 가지 장치, 가족에 대한 사랑, 사유재산을 갖지 않으려는 사제 계급의 실험이 공산주의의 실험과 통한다는 것도 알았다. 좌충우돌을 통해 스스로를 변모시켜가는 문명의 꿈틀거리는 생명을 그는 3권의 맨 처음에 이야기하고 있다. 3권은 시대별로 정리된 것이 아니다. 어떤 것에는 가중치가 있고, 어떤 것은 연대와 상관없이 편집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인용도서를 정리해놓은 자리에 누군가가 밝혀놓았다. (옮긴이가? 출판사가?) 나는 3권에서 기독교 문명을 통해 어느 정도 그의 관념론이 실험된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 헤피쿠로스가 특히 강조된다고 느껴졌다. 또 중간중간 과학의 발전과 관련된 인명-내게는 대부분 금시초문의 그리스식 이름이다-을 강조한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그가 취사선택한 것들이다. 그가 에피쿠로스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자취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류의 실험, 그리고 인본주의, 휴머니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산드로스를 정복군주로서의 면보다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또는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친위대로 등용하고, 결혼동맹을 맺은 세계시민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조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파프타쿠스의 장면, 반란을 일으킨 6천명 노예들이 십자가에 박힌 장면이 고대사회의 종말 예고편이었다고 강조한 건 또 어떤가? 특히 에피쿠로스로 끝을 맺은 것은 인간의 운명, 또는 살아가는 모습을 신에게도 죽음 뒤에게로도 넘기지 않고 행복을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걸 소중히 여긴다고 느꼈다. 냉전 중인 1950년대 그의 현재도 인류 또는 문명의 실험은 진행중이라는 의미로 읽었다. 중요한 건 사람의 행복이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자꾸 강조하는 듯 했다. 그가 평생 한 일을 정리한 책을 보면 그는 인류의 변화, 문명의 흐름을 지켜보는 인문주의자였다. 잘 알고 있으면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 또는 '아는 것'을 행동, 표현할 수 밖에 없었겠다 혼자서 끼워맞춘다. 그가 한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자료가 없는 건 그가 변방 사람이었기 때문일테지.

 

무엇보다도 문명이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나같은 문외한이 읽고도 겁먹지 않을 매우 재미있고 쉽고 발랄한 책을 그가 써준 게 감사하다. 쉽다고? 분량은 쉽지 않았다. 그리스문명을 소재로 문명에 대한 훌륭한 개론서를 읽는 즐거움이 컸다. 그것만으로도 인문주의자의 현실 참여라고 나는 생각했다.  

   

 

2.   내가 저자라면

 

1) 전체적 뼈대와 목차에 대해

1, 2권과 비슷함.

 

2) 강점과 보완점

1,2권과 비슷함. 3권은 지루했음, 덜 재미있었음.

 

3) 감동적인 장절

 

문명 자체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 한 부분

 

11 문명은 발전 과정에서 자연적인 존재들, 이를테면 식물들과 같은 단계를 밟는다. 씨앗이 배태되어 싹이 나며, 성장하고, 흔히 문명의 고전시대라고 하는 시기에 만개했다가 피었던 꽃이 시들고, 노화하며, 쇠락기에 접어들어 결국 죽는다. 어쩌면 문명은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문명은 다음 세대에 올 인간들을 위해서, 마치 귓가를 맴도는 과거에 대한 추억처럼 아련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후세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펼쳐나갈 때, 또 새로운 창작품을 내놓을 때 그 추억들을 적절히 아련히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후세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펼쳐나갈 때 또 새로운 창작품을 내놓을 때 그 추억들을 적절히 배합하기도 한다. 문명은 실패 속에서도 다시 말해서 특정 시기까지는 출산에 이르지 못하고 유산만 거듭한다 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무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희망의 불씨로 남아 있으면서 인류의 기억 속에서 다시 타오를 날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을 뒤채고 있는 것이다.

 

12 문명의 쇠락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첫째, 무슨 이유로, 또 어떠어떠한 조건들이 결합했을 때 인류 공동체가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게 되며 그 가치가 사라져갈 때 무엇을 상실하게 되는 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 모호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게 마련인 태동기보다 휠씬 극명하게 드러난다.

3권은 재미가 있겠구나. 서문에서 이런 것들을 다 밝혀놓는다. 서문이 가장 중요한 글이구나. 제일 나중에 제일 공들여 써야 하는 글인 것 같다.

 

12 문명의 내리막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쇠락기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불모의 시기가 아니다. 쇠락기에도 여전히 새로운 것들이 창조된다.

 

12 노화기에 접어든 공동체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호흡이 힘들어지면서 숨이 가빠오며 행동이 둔해진다. 요컨대 삶의 몸짓이 버거워진다. 늘 호흡하는 공기처럼 자연적인 기후이자 분위기였던 문명이 해체됨에 따라 매일 매일의 양식이었던 신앙이 동요됨에 따라 문명이나 신앙은 죽기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탐구하고 새로운 시와 지혜의 세계를 창조하며, 늙어갈수록 희망과 확신을 가져야 할 새로운 이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명의 쇠퇴기는 동시에 새로운 발견의 시기이기도 하다. 문명은 변화를 거듭할 뿐 죽지 않는다. 문명의 삶이란 말하자면 항구적인 태어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명은 죽지 않고 변화할 뿐이라 한다. 나의 문명 역시 그러하리라. 다음번에 읽을 책이 그리스문명 뿐만 아니라 다른 문명에 대한 것이지. 르네상스를 다루고 있던데 그럼 다른 문화권의 문명 이야기도 하는가? 지금은 문명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시기라고 들었다. 인간성 상실, 지구환경의 오염, 공동체 붕괴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에 기반한 인간학

 

256 생물학적 저술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문장들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의인화하며, 이를 지능을 겸비한 우주의 힘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힘은 각각의 종이 가장 조화로운 상태로 형성되도록 관장하며, 종들 간의 조화는 생명 활동 간의 협동 체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이 협업 체계는 지속적인 상승 움직임을 통해 모든 종들을 관류하면서 완벽한 인간을 추구한다. 특히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각각의 종이 지닌 이러저러한 기관의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변함없이 적용하는 원칙이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 조직하고 제조하며, 창의력이 풍부하다고 말한다. 자연은 원하고’, 원하는 목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다.’ 자연은 그러므로 창조하는 힘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주어진 조건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것으로 만족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신이 아니다. 자연은 개개인이라는 존재 안에 깃들어 있는 활력’, 신의 견인에 화답하는 성장충동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발도르프 교육의 식물학, 동물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을 생각했다. 그녀는 공립학교 중에서 발도르프 교육 이념을 가지고 만들어진 혁신학교의 교사였다. 인천에는 아직 혁신학교가 없다. 그녀의 강의를 듣다 보면 식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자꾸만 인간인 나에게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녀는 아이들과 식물을 관찰하고 길렀다. 발도르프교육에 대해 공부를 한 우리나라 교사들 중 1세대에 속했다. 그 생각이 자꾸 나네. 나 그거 더 배워보고 싶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 신전에 홀로 들어가 나는 누구입니까?” 물었다는 부분.

 

286 그가 이집트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떠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디오뉘소스 신의 무녀인 알렉산드로스의 어미니 올륌피아스는 자신의 꿈속으로 침대 속으로 그녀를 찾아오는 신의 환영을 늘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은 과연 누구의 아들인가? 알렉산드로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나의 사명, 소명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이 정복군주가 이 질문 때문에 이집트로 진군했다는게 신비롭다. 나 또한 자신에 대해 이런 질문이 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해야하는 거지. 그래서 가슴뛰는 삶을 살아가라고 했지. 콩두의 두 번째 뜻은 바로 콩닥콩닥두근두근이지.  그는 이 질문을 위해 이집트로 진군했다. 나는 어디로 진군하고 있을까? 지금은 그리스문명사로 진격중^^ 새벽에 2시간을 더 보내는 건 나로서는 이집트정벌만큼 힘든 미션이다.     

 

288 부하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서 성소에 들어간 그는 마음먹었던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신의 답변을 듣는다. 도대체 무슨 질문을 했으며 무슨 답변을 들었을까? 성소 밖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의 추궁에 알렉산드로스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웅변적인 침묵인가? 자신의 눈앞에서 베일을 벗은 신비를 관조하며 명상한 영혼의 침묵이 아니던가? 그 침묵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필립포스의 아들이 아니라 신, 즉 아몬 라에 의해 올륌피아스의 몸 속에 잉태된 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심오한 침묵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친구들의 추궁에 마지못해 신으로부터 그가 알고 싶었던 모든 대답을 들었다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만 던진다.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이 신탁으로 한결 공고해졌으며 이날 이후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우스의 아들. 그는 이제부터 제우스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만나는 스승과 제자의 만남 부분

 

149 플라톤도 이곳으로 온다. 그는 전적인 신뢰로 소크라테스를 대한 최초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적인 반박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근사한 놀이인가? 아니 그것이 과연 놀이란 말인가?

 

150 그가 스무살 되던 때부터 스승이 죽을 때까지 8년 동안 열성제자로 따라다니며 실행에 옮겨본 소크라테스식 대화에 대해서는 의혹과 불안감, 스스로에 대한 경멸, 신랄함만이 남아 있을 분이었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인간으로 정의로운 도시를 통치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아테나이의 어느 곳에 가면 정의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마음 속에서 대망이 무르익어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시를 만들겠다는 야망이었다.

 

154 플라톤의 관념론은 심각한 외상을 안고 있었다. 스크라테스의 죽음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였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니 그저 살기 위해서라도 그는 소크라테스가 계속해서 말을 하도록 해야 했다. 그의 모든 철학은 그가 고안해낸 문학적 픽션의 형태마저도 우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살아있으며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이 두 사람이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새로운 인물을 탄생시킨다. 다시 말해서 새로 태어난 플라톤이 새로 태어난 소크라테스, 즉 정의와 혼동되는 소크라테스, 정의로운 사람 그 자체인 소크라테스와 다시 만난다.

 

154 플라톤은 탁월한 그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통해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를 복권시킨다.  이 작품은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진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라는 작품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쓰였으며 가장 심오하고 가장  아름다운 <고르기아스>에서도 플라톤은 마침내 가면을 벗어던지고 칼리클레스 같은 소피스트들에 맞서서 소크라테스를 완벽하게 정의로운 자, 정의를 왜곡시키는 민주주의에 의해 죽음에 처하게 되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로 제시한다. 스승을 되찾으면서 플라톤은 그때까지 거부해오던 험난한 정치 참여의 길로 들어선다.

 

226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트라케 해안에 위치한 그리스 도시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플라톤은 그보다 43년 일찍 태어난 선배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의사였으며 필립포스 왕의 아버지인 아뮌타스 왕의 친구였다. 니코마코스는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에 속했다. 갈레노스에 따르면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에서는 이사들이 아들들에게 해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행하게도 그 같은 가르침을 받기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그런 관습은 그에겐 그저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불과했다. 열일곱 살 되던 해에 그는 학업을 위해 아테나이로 간다. 그곳에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입학한다.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구나.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가계가 의사 집안이었기 때문에 생물학에 더 친했을 수 있었겠다. 모든 것은 쌓여서 넘친다. 

 

226 이 두 철학자 사이에 존재하는 견해 차이를 두고 고대인들은 수군거리며 험담을 해대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냈다는 격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나는 플라톤을 좋아한다. 하지만 진리를 더 좋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 대해 플라톤은 어린 망아지가 엄마 엉덩이에 발길질 해대는 격이라 평했다. 이데아 이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스승과의 우정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플라톤은 예순 살이 넘었어도 자신의 철학을 고인 물처럼 가만히 가두어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정립한 철학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 가치를 확인하거나 문제를 제기했다. 스승과 제자의 우정은 이처럼 수렴되거나 상충하는 비판을 통해서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외에도 또 다른 방식으로 플라톤에게 변함없는 우정을 보였는데, 스승이 사망할 때까지, 그러니까 그 자신이 서른여덟 살까지 충실하게 아카데메이아에서의 대답에 참여한 것이 그 증거였다.

청출어람이라기 보담은 색깔을 달리했다. 제자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곰곰히 들여다보게 된다. 정민교수님의 황상과 정약용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스승과제자의 우정이라는 말의 울림이 크다. 나도 이런 사람이고 싶은데 내가 어버이를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 내가 오래된 지인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 이게 모든 장기적이고 소중한 관계의 틀이 된다. 문제가 많다.

 

쾌락주의자라 이름만 들어본 에피쿠로스가 소유한 재화/욕망의 분수에서 욕망을 엄청나게 줄여서 상정했던 소박한 사람이고, 평생 질병의 고통 속에서 지금 내 앞에서 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리는 소박한 방법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라는 부분. 그에게 바치는 꽃과 말을 통해 앙드레 보나르는 고통 속에서 평온했던 에피쿠로스가 우리 속에서 살아있다고 말했다. 그에게서 방향, 대안을 찾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579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커다란 기쁨, 커다란 쾌락을 경험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이때의 쾌락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하며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에 응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행복을 재화/욕망의 분수로 나타낼 때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들었다. 에피쿠로스는 재화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욕망의 정도를 필수적인 것으로 제한해놓고 있는 듯 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580 쾌락이란 자신의 욕구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이 욕구를 도저히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이를 제어하고 배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합당한 보상이다. 쾌락과 기쁨은 절제를 알고 온유와 용기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자들에게 보상을 내린다. 지나치게 방탕하고 타락했다는 비난을 받아온 이 교리에서 중심을 이루는 쾌락이라고 하는 개념은 사실 용기라고 하는 가장 고귀한 덕성의 소유를 전제로 한다. 용기는 흰 돛에 수놓은 붉은 줄처럼 그리스 민족에게서 태어난 첫째가는 덕목으로 그리스 역사 전체를 관류한다. 시간과 더불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크라테스 이후 용기는 현실 존중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토대를 둔 성찰하는 용기, 이성적인 용기로 변했다. …이러한 덕성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완벽한 평온을 보장해준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인간은 언제나 사는 것이 행복하다. ‘밥 한 술 뜨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등짝 눕히고 자는 것 이것이 에피쿠로스다. 그는 새벽이 되면 벌써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하고도 토론할 태세를 갖춘다.’고 한 고대인은 평했다. 이것이 적잖은 사람들이 방탕의 화신이라고 취급하고자 했던 자의 초상화다.

용기가 절제의 의미다! 놀랍군

 

592 (디오게네스)가 제시하는 처방은 에피쿠로스가 제정했으며 그의 <중요한 가르침> 속에 수록되어 보존되고 있는 테트라파르마콘과 다르지 않다. 이 처방은 열 두 개의 그리스 단어로 요약되는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신들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행복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은 오랫동안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이나 무신론을 신앙의 가장 위험한 적, 영적 지배를 위해 함락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해왔다.

신들과 죽음으로 모든 걸 미루거나 핑계대지 않고 행복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행복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뜻을 이어받고 있다고 보는건가?

 

575 에피쿠로스는 문명이란 경험과 노동의 열매라고 말했다. “시간과 인간의 노력이 모든 발명품들을 생산하고 이것들을 광명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문명이란 다름이 아니라 신에게 호소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을 믿는 것이다. 특히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키고 미쳐 날뛰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 우리의 소박하지만 확실한 지혜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면 우주는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며 더 이상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는다.

 

594 크고 작은 혁명들이 우리가 사는 우주를 전복시킨다혁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으며 때로는 이 흐름을 가속화한다. 새로운 계급, 새로운 민족, 계급없는 민족들이 이 세계를 관통한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유산은 그들의 것이다. 그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몽테뉴는 에키쿠로스에게서 잊고 있던 조상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그와 한 가족이 되었고, 그의 생각을 이어받았다. 가우디, 자유사상가들이 몽테뉴의 뒤를 이었고, 백과사전파가 에피쿠로스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인정했다. 헬레티우스는 행복에 대한 장문의 시를 썼고 <쾌락 예찬>이라는 글도 남겼다. 아나톨 프랑스, 앙드레 지드 등도 그에게 동조한다카를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를 인간 해방자들 중 한 명으로 예우한다.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는가? 인류는 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는가?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번역자로서 앙드레 보나르를 표현하는 듯한 구절을 만났을 때

 

220 그리스어로 된 플라톤의 저작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번역을 위해서가 아니라(유감스럽게도!) 그의 저술을 감각적으로 그러니까 한 입 깨물면 깔깔한 입안에 달콤한 즙이 흥건히 고이는 잘 익은 과일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생한 그리스어가 주는 관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플라톤의 문장이 상상을 뛰어넘는 희열로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며, 자신의 안에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언약을 일깨우며 자신의 존재 전체(영원히, 아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분리될 수 없이 하나가 된 영혼과 육체)를 사로잡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멸을 만들어내고 천사를 만들어내는 그의 문장만이 인간의 부조리한 몽상(영원한 삶)을 마치 배고프면 한입 깨물어 먹는 빵조각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준다는 것도 느낄 것이다.

그리스어를 번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읽기를 즐기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런 사람이었으리라. 내가 연구원 과정에서 읽는 책들도 이런 식으로 한 줄 한 줄 아껴서 야금야금 빨아먹고 싶은데 나는 타이핑을 즐기지 못하는구나. 또 월요일 낸 후에 보충하고 있다.

 

 

3.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쇠락과 새로운 발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11 문명은 발전 과정에서 자연적인 존재들, 이를테면 식물들과 같은 단계를 밟는다. 씨앗이 배태되어 싹이 나며, 성장하고, 흔히 문명의 고전시대라고 하는 시기에 만개했다가 피었던 꽃이 시들고, 노화하며, 쇠락기에 접어들어 결국 죽는다. 어쩌면 문명은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문명은 다음 세대에 올 인간들을 위해서, 마치 귓가를 맴도는 과거에 대한 추억처럼 아련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후세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펼쳐나갈 때, 또 새로운 창작품을 내놓을 때 그 추억들을 적절히 아련히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후세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펼쳐나갈 때 또 새로운 창작품을 내놓을 때 그 추억들을 적절히 배합하기도 한다. 문명은 실패 속에서도 다시 말해서 특정 시기까지는 출산에 이르지 못하고 유산만 거듭한다 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무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희망의 불씨로 남아 있으면서 인류의 기억 속에서 다시 타오를 날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을 뒤채고 있는 것이다.

 

12 문명의 쇠락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첫째, 무슨 이유로, 또 어떠어떠한 조건들이 결합했을 때 인류 공동체가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게 되며 그 가치가 사라져갈 때 무엇을 상실하게 되는 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 모호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게 마련인 태동기보다 휠씬 극명하게 드러난다.

3권은 재미가 있겠구나. 서문에서 이런 것들을 다 밝혀놓는다. 서문이 가장 중요한 글이구나. 제일 나중에 제일 공들여 써야 하는 글인 것 같다.

 

12 문명의 내리막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쇠락기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불모의 시기가 아니다. 쇠락기에도 여전히 새로운 것들이 창조된다.

 

12 노화기에 접어든 공동체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호흡이 힘들어지면서 숨이 가빠오며 행동이 둔해진다. 요컨대 삶의 몸짓이 버거워진다. 늘 호흡하는 공기처럼 자연적인 기후이자 분위기였던 문명이 해체됨에 따라 매일 매일의 양식이었던 신앙이 동요됨에 따라 문명이나 신앙은 죽기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탐구하고 새로운 시와 지혜의 세계를 창조하며, 늙어갈수록 희망과 확신을 가져야 할 새로운 이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명의 쇠퇴기는 동시에 새로운 발견의 시기이기도 하다. 문명은 변화를 거듭할 뿐 죽지 않는다. 문명의 삶이란 말하자면 항구적인 태어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명은 죽지 않고 변화할 뿐이라 한다. 나의 문명 역시 그러하리라. 다음번에 읽을 책이 그리스문명 뿐만 아니라 다른 문명에 대한 것이지. 르네상스를 다루고 있던데 그럼 다른 문화권의 문명 이야기도 하는가? 지금은 문명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시기라고 들었다. 인간성 상실, 지구환경의 오염, 공동체 붕괴 때문이다. 

 

12. 이 책에서는 그리스 세계에서 보자면 매우 암울했던 두 세기, 즉 기원전 4세기와 3세기를 조명하게 될 것이다. 바로 도시국가들의 쇠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세기다.

 

13 플라톤은 세속의 도시,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타락한 민주주의 대신 모든 영혼이 사후의 내세에서 만나게 되는 곳, 즉 천상의 도시, 천상의 왕국인 신성한 세계를 내세웠다. 이렇듯 그리스 문명은 쇠망하면서, 이와 동시에 사회와 사상의 격변을 통해 기독교의 세계를 마련했으며 이것이 기원전 4세기와 3세기에 나타나게 된 본질적인 지향점이라고 하겠다.

 

13 오래된 그리스 문명, 다시 말해서 기원전 5세기에 융성했던 건전하고 원시적인 문명, 그리스 민족의 이교도적인문명, 기원전 450년부터 400년 사이에 풍성하게 고전적인 작품을 생산한 그 문명은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았다. 이 문명이 쇠망하게 되는 정치적인 배경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역사학자, 누구보다도 그리스적인 정신, 즉 통찰력 잇고 냉혹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투퀴디데스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4 그리스 문명의 쇠퇴기에는 아마도 과학만이 발전을 계속한 거의 유일한 인간 활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과학은 예컨대 천문학이나 생물학, 기계학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가설을 정립했으며 이러한 가설들은  로마 시대와 중세라고 하는 암흑시대를 예외로 친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실험과 추리로 이어지고, 현재 우리가 사는 과학 시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모든 분야와 모든 방향으로 계승되고 추월되며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16 어린시절부터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을 좋아했던 라신은 <페드로>를 써서 에우리피데스를 계승하고 완성시켰다.

 

16 에우리피데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니체의 주장대로 비극을 파괴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비극을 지적으로 만들었으며, 발단 부분이나 대단원 부분에 약간 경직된 감이 있는 진행과정을 도입하거나 궤변가들이 주로 쓰는 논쟁기법, 즉 당대에 직면한 문제들(이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과는 딱히 관련이 없는 주제에 대한 논쟁을 차용함으로써 도식화했다.

 

16 요컨대 그는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개방적인 정신의 소유자였다. 어쩌면 지나치게 그런 편이었다. 그는 너무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그것을 잊는다거나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히 그의 작품에는 이따금씩 비극적인 행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장면들이 삽입되어 전체 분위기를 흐려놓는 경우도 있다.

 

17 인간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시인이 인간 행위에 대한 논쟁으로 새는 통에 극의 흐름이 처지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 덕분에 선배 비극 작가들은 알지 못했던 비극의 새 영역을 탐구 할 수 있었다.

 

17 서정시,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고대 말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소설, 르네상스 이후의 현대적 비극의 자양분이 되어줄 이러한 발견, 문학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라고 해도 손색없는 이 발견은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에게서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 에우리피데스만의 개성이었다. 요컨대 모든 쇠락은 새로움의 예고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볼 때, 에우리피데스는 대표적인 쇠락기의 시인이었다. 그는 고대 비극의 파괴자인 동시에 그 비극을 연장하고 젊게 만들어 르네상스로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하다.    

 

19 메데이아 공주는 우리에게 일종의 수수께끼로 제시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녀가 남편에게 버림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여자에 대해서는 몹시 격렬하고 사나운 불 같은 영혼을 가졌다는 점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21 “부조리라고 메데이아는 합창단을 향해 외친다. “아이를 한 번 낳느니 차라리 방패를 들고 전쟁터에 세 번 나가는 편이 나으리.” 여자들에게 전쟁터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남자와의 잠자리가 될 것이다. 메데이아는 적어도 그 잠자리를 지킬 권리가 있다. “그래, 여자는 비겁할 수 있고, 칼을 들이대면 무서워서 벌벌 떨 수 있어. 하지만 잠자리를 지킬 권리를 빼앗긴 여자보다 더 피에 굶주린 영혼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지.” 이런 식으로 합창단 여자들에게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한껏 고무시킨 다음 메데이아는 이제부터 남자를 상대로 혈전을 치르려고 하는 자신을 모든 여자들이 지지해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메데이아는 손쉽게 합창단으로부터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낸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메데이아의 힘을 본다. 메데이아는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래도 힘이 아주 센 자인 것이다. 스스로를 추스르는 메데이아의 절제력은 남에 대한 권능만큼이나 대단하다.

 

22 이 장면에서 남자들을 사로잡는 메데이아의 희한한 힘을 보게 된다. 드물게 보는 극단적인 정념과 극단적인 지성의 결합이 바로 이 힘의 원천이다.

 

22 메데이아의 지성은 정념이 소용돌이치는 순간에도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그뿐이 아니다 자신이 도달해야할 목표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정념적인 상황마저도 냉정하게 이용할 줄 안다.

 

22 그녀는 크레온 왕에게 지나친 불안감을 안겨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그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 정도, 딱 그만큼만 고통스러워할 줄 아는 영리함을 겸비했다. 나는 이것을 자신의 정념을 지능적으로 이용한다고 표현한다….진정한 고통의 이면에서 놀라운 기쁨이 솟구치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더 강하다는 판단에서 오는기쁨, 투쟁해서 무찌르고 말겠다는 기쁨메데이아는 이 장면에서 복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즉 하루라는 유예 기간을 얻었다.

 

24 그의 논리는 너무도 완벽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이다. 메데이아는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아손도 그 점을 인정하며,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도 없다고 말한다. 반면 메데이아는 그를 사랑했다. 따라서 사랑이 감사를 받아 마땅한 일이라면, 그는 사랑의 신 퀴프리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거나 바라거나 둘 중 하나다. 더구나 메데이아는 준 것보다 더 많이 받았거나 최소한 준 것만큼 받았다. 특히 거칠고 사나운 야만성이 지배하는 바르바로스(타지인)의 땅이 아니라 정의가 지배하는 그리스 땅에서 살게 된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행운이다. 이렇듯 정의하고 하는 말이 이아손의 두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이아손은 신성한 말들을 마구 남발한다. 

 

25 이아손이라는 인물의 이기주의에 대해서는 놀라운 정도로 정확한 분석이 이우러지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늘 그렇듯이, 우리 행동의 뿌리를 파헤치는 데에서 희열을 느낀다. 이아손 같은 인물은 흥미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동요시킨다. 이아손에게서 차마 고백하기 어려운 우리 자신의 치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억압당하고 잇는 것을 표현하는 재주야말로 에우리피데스 예술의 비법 중의 하나이다.

 

28 모성애와 복서의 악마는 때로는 연약한 살점 같아 보이는가 하면 때로는 강철같이 단단해 보이는 메데이아의 마음 속 벽을 사이에 두고 여섯 번씩이나 충돌한다.

모성애 vs 자매애 / 모성애 vs 형제애 변신이야기에서 나왔다. 다시 읽어보자. 

진시노다 볼린의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에서는 메데이아가 남편의 배신에 복수하기 위해 아이들을 살해한 걸 헤라원형에서 찾는다. 남편 제우스의 수많은 난봉질에 대해서 그 여자와 아이들을 찾아가 복수를 했지 결코 제우스를 향해 해꿎이를 하지 않았던 헤라처럼 메데이아도 어머니됨보다 아내됨을 우선했다고 보인다. 버트 헬링거의 <가족세우기> 책과 존 버나드 쇼의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치유>에는 아동학대로서의 대리배우자 노릇이 나온다. 이것과도 관련이 있을까? 메데이아는 끊임없이 나의 무언가를 자극한다. 이유를 모르겠네. 변신이야기에서 그게 가장 흥미를 끄는 신화였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게 나의 신화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나의 신화를 다시 써야 할 지 모르겠다.   

 

31 메데이아는 누구인가? 그녀는 물론 괴물이다. 하지만 우리와 너무도 가까운 괴물이다. 우리 중의 누구라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 보자. 메데이아는 무엇보다도 정념으로 미쳐가는 영혼이다.

 

33 메데이아는 복수의 성공,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가운데 완전히 파괴되었다.

 

33 우리는 메데이아의 죽음(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을 받아들이기 보다 그녀의 운명이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본성이 이끌어가는 운명이 종착 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말이다. 모든 성취가 그렇듯이 기 같은 성취를 통해서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이게 뭔 소린가? 메대이아의 죽음이 벌을 받은 게 아니라 완성이라니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 나타난 비극성

 

39 아가멤논은 말하자면 심리적으로 나약한 사람, 늘 마음만 있을 뿐 의지라고는 없는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그는 결코 악한 사람, 마음이 모진 사람이 아니다.

 

41 에우리피데스는 다신 한 번 우리의 본능(좋건 나쁘건 상관없다) 우리의 정당한 감정(가족애, 조국애, 명예욕 등) 이 명확한 사고나 단호한 의지, 모두가 동의하는 원칙 등에 의해서 절제되고 통제되며 제어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연에 의해 아무 방향으로나 튀며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는 데에 인간 조건의 비극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43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다고 믿는 그 딸을 지키려는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노력은사실 자신을 향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44 두 사람 모두 딸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약한 아버지는 모질지 못한 마음의 갈피갈피마다 딸과 연결이 되어 있는 반면 잘나고 강한 어머니는 딸을 재산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자신으로부터 재산, 그것도 평범한 재산이 아니라 평생 열심히 가꿔온 삶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재산을 가로채려는 건 파렴치하기 그지않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에도 사랑이라는 말은 유효할까?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철철 넘치는 모성애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은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을 회유할 수 없다. 클뤼타임네스트라고 하는 어머니의 고통은 순수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천박함과 뒤섞여 있다.

 

44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곁에 있을 때보다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의 곁에 있을 때 더 씁쓸한 고독을 느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나도 텅 빈 모성을 가졌다. 모성적으로 보이지만 내가 어머니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건 공의존 상태인지도 모른다. 이게 냉정함의 뜻이다. 따뜻하고 유순해보이지만 그런 걸 연기하는 것. 그럼 어쩌란 말이냐? 마음은 정확해서 그대로 느낄 텐데. 별수 없지 유모를 둘 수 밖에. 또는 후천적으로 내 심성 안에서 유모를 기를 수 밖에. 그건 뭘까?

 

47 오이디푸스를 파멸시키는 것은 지옥 같은 기계는 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소포클레스는 우리에게 그 모든 장치의 뒤에는 신이라는 작가가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그 존재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비극 <박카이>

 

61 <박카이>는 참으로 이상하고 묘한 작품이다. 적어도 이 작품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에우리피데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수수께끼를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으며 그는 이에 대한 상반되는 대답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신의 존재 여부, 신의 정의 또는 불의, 우주에서의 삶, 인간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신의 행동 등에 관한 수수께끼다.

 

62 <박카이>는 말하자면 비극 시인으로서의 에우리피데스를 이해하는 열쇠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극도로 상반되는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작품은 그가 신에 귀의했음을 보여준다.’ 에서부터 신에 대한 가장 확실한 거부를 나타낸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니 어느 말이 맞는지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우선 이 대단한 시의 분석을 시도해보아야겠다. 

사람을 홀리는 두 가지, 그리고 이성이 통하지 않는 두 가지를 아프로디테(사랑) 박쿠스(? 또는) 두 신이 대표한다. 뭘 어쩌라는 건가? 그냥 그런 일도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63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신비주의적 분위기는 마이나데스로 이루어진 합창단의 등장으로 한껏 고조된다. 무녀들은 피리와 북소리에 맞춰 전진한다. 무녀들은 자연 속에서 신을 섬기는 신자로서의 행복을 말한다.

 

65 곧 대지 전체가 춤을 추리라. 브로미오스가

일행의 선두에 서서 무리를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끌어 가면

선에 퍼지는 희열, 뛰어오르는 춤에 이어서

제물로 바쳐진 새끼 사슴의 가죽을 입고 바닥에서 뒹구는 희열

목이 잘린 희생양의 피와 날고기의 신선함을 맛보는 희열

프뤼기아, 뤼디아의 산 위에서

브로미오스가 에우오이라고 외친다.

대지에는 젖이 흐르고 포도주가 흐르며

꿀벌들의 감로가 흐른다.

자 빨간 지팡이를 봉홧불처럼 차켜들며

박코스가 걸음을 재촉한다.

박수로 장단을 맞추며 그는 합창단의 열기를 독려한다.

관능적인 그이 머리털이 하늘에서 흩어진다.

그의 음성은 천둥처럼 포효한다.

 

68 비잔티움 시대에 발표된 <예수의 수난>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몇 구절을 인용했다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펜테우스 앞에 선 디오뉘소스는 필라투스(빌라도) 앞에 선 예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펜테우스 : 내 감옥이 자네에게 이길 걸세

디오뉘소스 : 내가 원한다면 신께서 나를 구해주실 겁니다.

펜테우스 : 그런데 그 신은 어디에 있나? 내 눈앞에 나타나도록 해보게나

디오뉘소스 : 신은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계십니다. 당신의 세속적인 눈이 볼 수 없을 뿐입니다.

펜테우스 : 이 자를 체포하라. 이 자는 내가 대표하는 테바이를 우롱하고 있다.

디오뉘소스 : 나는 내가 가야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갑니다. 악은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기독교 고유한 것이 아니구나.

 

82 신은 인간의 삶을 포함하여 그것을 뛰어넘는 풍성한 삶 자체다. 신은 보편적인 삶의 흐름이며 인간을 그 흐름 속으로 이끈다. 모든 삶은 신성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 녹색의 초원에서 뛰어노는 새끼 사슴, 고독한 숲 속에 그늘을 드리우는 나뭇가지, 폭풍 속에서 뛰어다니는 박카이는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에 합류한다. 신은 이 모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피조물들의 교제다. 요동하는 산은 산이 거둬주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똑 같은 신의 숨결에 의해 활기를 얻는다. 춤을 추는 대지와 포효하는 야수들도 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춤을 추는 대지와 포효하는 야수들도 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똑 같은 흐름이 이들을 이어주며, 필요하다면 이 같은 교제를 단절시키려고 하는 자들을 상대로 반기를 든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살며, 바로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다. 인간은 대자연의 가장자리에 자기만의 고립된 세계를 구축하고는 그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그러니 이것은 신으로부터 분리되었으므로 지혜가 아니라 광기라고 해야 마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광기의 수수께끼를 다루었으며 광기를 분리라고 정의했다. 자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삶 전체가 그에게는 광기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 따위는 포기해야 한다. 이방인의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혜는 지혜가 아니기때문이다. 앞에 나오는 지혜(소위 인간의 지혜)에 중성적이며 매우 지적인 단어, 지혜에 인위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단어 소폰이 쓰인 반면, 두 번째 지혜에는 소피아 즉 인간이 비판 정신을 버림으로써 되찾게 되는 지혜가 쓰였음은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지혜로 쓰인 단어는 특히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오래된 여성 단어로 살아 있으면서 생산적인 지혜를 가리킨다.

 

83 박코스를 알게 되는 것은 기쁨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의 주요 테마다. 춤추고 노래하는 기쁨, 피리 소리와 포도주를 즐기는 기쁨, 아프로디테와 뮤즈들의 즐거움, 이것이 지적인 지혜를 단념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디오뉘소스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열리는 삶이다.  

 

86 신은 우리에게 죽음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우리와 더불어 이 세계를 춤추고 노래하게 하는 본질적인 힘이다. 신은 사는 기쁨, 쾌락이며 동시에 고통이다. 신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눈부신 신비다. 그러니 에우리피데스는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이고 명쾌한 정의로 이루어진 세계를 버리고 광기의 신과 총체적인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는 동물적인 기쁨만이 중요시되는 박코스 행렬에 합류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투퀴디데스와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

 

94 박식한 19세기는 박식한 방식으로 투퀴디데스를 망각 속에서 끌어냈다. 19세기 학자들은 투퀴디데스의 발명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과학적 역사, 즉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학문을 인정했다.

 

95 중복기술을 피하려는 역사가라면 누구나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마련인 선택의 원칙을 투퀴디데스는 다른 역사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물고 늘어졌다. 덕분에 그가 선택한 인물들은 도시 국가들 간의 전쟁 기록의 모범인 그의 저술을 통해서 모든 민주주의 또는 유사 민주주의 체제에서 활동하는 정치가의 상징적 의미로 부상했다.

 

95 아테나이 보수파의 지도자였던 니키아스는 교양인이었다. 아니 적어도 이 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애쓴 인물이었다. 그의 지성으로 말하자면 장군으로서의 일상을 근근히 수행할 정도였으므로 그다지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니키아스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우연으로 하여금 자기 대신 결정을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늘 결정을 미루는 탓에 내사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전개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는 지성만 결여된 것이 아니라 추진력도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99 클레온은 지성 외에 다른 덕목도 지니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에너지와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자만심을 꼽을 수 있다. 강철 같은 건강과 엄청난 활력이 그의 폭력성을 통해서 분출되는데 이는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클레온은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숭배하는 편이었다. 그를 가리켜 투퀴디데스는 인기 있는 연설가들 중에서 가장 폭력적이라고 평했다. 그는 항상 새로운 처형을 요구했다. 민간인 학살, 가혹한 보복 등이 그가 늘 주장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구제불능의 폭력 숭배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명예를 중시했던 니키아스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불명예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덕분에 죽음을 통해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클레온은 말하자면 비겁자가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것도 힘이 되겠다? 또는 살아가는 다른 방식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이들과 다른.  

 

101 투퀴디데스는 이항대립적인 리듬으로 생각하고 글을 썼다. 그의 글에서 모든 것은 대칭적인 구조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이따금씩 비대칭적인 요소들을 삽입시킴으로써 다양화를 꾀하고 우리의 주의를 끌며, 지나치게 단조로운 말장난이 될 수도 있었을 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요컨대 투퀴디데스는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썼다. 그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내면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 대화는 지나치게 압축적이고 밀도 높으며 일견 모순되는 것들이 집약되어 있어서 처음엔 모호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을 따라서 계속 이어지다가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이 미로 같은 길을 함께 따라 걷기로 결심한 독자들에게 어느 순간 명확해진다. 투퀴디데스에게는 단순하고 일의적인 인물이나 상황은 거의 없다. 각각의 존재는 항상 보이지 안는 이면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글을 써도 재미있겠다. 일기겠지만. 내 안의 목소리들을 다 들어주면.

 

103 투퀴디데스의 역사에는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특성이 있다. 그가 기록한 역사는 유용하고자 하며, 작가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 그가 서문에 써서 유명해진 문장에 따르면 한순간의 즐거움을 독자에게 선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저술은 영원을 위한 산물, 즉 미래세대들 위해 제공하는 재산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투퀴디데스는 역사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 법칙을 얼마든지 이해가능한 것이다. 그 법칙들을 안다는 것은 역사의 토대 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다. 물리학 법칙을 알면 물리적인 세계, 즉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것 같은 이치다. 투퀴디데는 아테나이 시민들을 위해, 아테나이의 주권자들을 위해, 정치가들에게 역사라고 하는 틀 위에서 개인과 민족을 행동하게 만들어주는 법칙을 알려주기 위해 글을 썼다. 이것이 그가 미래의 인간들에게 제공하는 미래의 인간들이 그들의 이성에 따라 도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게 될 영원을 위한 산물, 재산, 보물이다.

역사학자의 소명의식이 눈부시다. 그렇지. 과거를 움직여간 법칙을 알게 되면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다. 나도 이게 궁금하네.

 

107 그는 제국, 그러니까 아테나이 제국의 탄생과 형성, 성장의 역사를 연구했다. 그는 이 제국이 태어나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스 세계에 주어진 대단한 기회나 되는 것처럼 여기며 관찰했다. 

 

109 인간은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원초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은 이 힘을 존재를 위해 절대 파괴할 수 없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이 힘은 곧 살려는 욕망이다. 산다는 것은 우선 지속하는 것이며, 존재의 안전을 강화하는 것이다. 투퀴디데스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만 죽음과 맞선다.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복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하는 것이다.

소유와 지속, 이것이 생존 본능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익일 것이다. 이익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활동을 좌우하는 동기이다. 온갖 동기들이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투퀴디데스에 따르면 대중들을 움직이기 위해,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은밀한 동력을 발동시키기 위해 이익 또는 이익의 동의어(유용성, 소득, 이점 등)을 언급하지 않는 행동가란 없다. 이러한 단어들은 그의 작품을 관류하는 키워드다.

이런 관점이 퍽 흥미롭다. 나는 동의한다. 더불어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을 찾아서 비교해보시오

 

114 우리는 도시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투퀴디데스의 한계를 본다.

 

115 ‘…그가 이끄는 체제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 체제는 일등가는 시민에 의한 지배였다….’ 이는 단연 페리클레스에게 바치는 찬사다. 하지만 이 찬사는 아테나이 내부 체제(절정에 달한 민주주의)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투퀴디데스가 예외적인 지성의 소유자라고 소개하는 지도자에 의해 어느 정도 수정이 가해질필요가 있다는 사실의 인정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가체가 벌써 정점을 넘어선 민주주의가 쇠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데모스테네스와 도시국가 시대의 몰락

 

119 어떤 사람들의 삶이나 활동은 역사의 흐름에 올라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 그런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시도하는 일은, 아무리 예측 불가능한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마치 그들이 속한 민족 전체가 역사적으로 나아가게 될 방향에 미리 조율되어 잇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알렉산드로스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119 그런데 데모스테네스의 경우는 이와 아주 다르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 놀라운 언변은 그런 것들이라면 미리 힐책하고, 심지어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발현되었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그이 용기있는 행동 놀라운 언변은 그건 것들이라면 미리 힐책하고 심지어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발현되었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피곤에 지친 민족을 상대로 얻는 뒤늦은 승리,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와의 불균등한 투쟁, 연설가로서의 재능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반항적인 기질, 적대적인 행운, 그를 이미 내치는 역사에서 억지로 얻어냈다.  

이 두 문장은 이 챕터를 시작하는 부분이다. 나는 대부분의 첫 부분을 베꼈다. 그리고 요컨대이후도 무조건 베꼈다. 이 작가의 서술 방식인 듯 하다. 첫 문장과 첫 두 단락이 아름답고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나야 땡큐다.

 

120 일곱살 때 아버지를 여읜 탓에 부정직한 보호자들에게 많은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긴 그는 재산을 되찾기 위해 웅변술과 법률을 공부했지만 고작 일부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는 밥벌이를 위해서 변론 대필가, 즉 고객들을 대신해서 변론을 써주는 별 볼일 없는 이을 직업 삼았다. 몇몇 변론은 정치적인 변론이었다. 그가 쓴 변론에서는 물론 변호사의 능란함과 궤변을 찾아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데모스테네스만의 고유한 빛깔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그의 고유한 빛깔이라면 높은 정치적 도덕성, 특권은 남들을 위한 봉사의 대가여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 아테나이라는 국가의 영예에 대한 확고한 존중, 평화에 대한 사랑(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평화를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는 태도에서는 비켜나 있다.) 자폐 상태에 빠진 아테나이의 정책(아테나이에 대해 데모스테네스는 몇몇 조건만 충족된다면 여전히 위대한 시대를 맞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에 대한 반대 등을 꼽을 수 있다. 데모스테네스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 걱정 많은 어머니는 그를 체력 단련자엥서 멀찍이 떼어놓았다. 그는 건강했던 적이 없었다.

 

122 타고난 연설가였던 그의 신체적 결함 중에는 부정확한 발음도 빼놓을 수 없다. 감정이 고조되면 말의 이어지고 끊어짐이 불분명해졌으며 특정 음절을 발음할 때는 혀가 꼬이는 통에 말을 더듬었다. 게다가 숨이 짧은 탓에 문장 중간 중간에 숨을 쉬고 다시금 말을 이어야 했는데 문제는 그가 유난히도 길고 복잡한 문장을 애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언어장애가 있다. 부정확한 발음조음장애, 숨이 짧다.

 

123 데모스테네스는 연단에서 예리한 통찰력으로 필립포스이 야심을 고발했다. 그가 보기에 필립포스는 됫국가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통일된 그리스의 주인이 되기를 꿈꾸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130 그리스 최초의 민주적인 도시국가 아테나이 그리고 아테나이와 더불어 도시국가라고 하는 모범적인 정치체제에 충실했던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의 수호자는 오직 데모스테네스 한 사람 뿐이었따. 백 번을 양보해서 거의 한 사람뿐이었다고 해두자, 도시국가란 자유롭고 대등한 지위를 가진 시민들의 공동체이며, 최고 주권을 지닌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자주 독립을 소중히 여긴다. 데모스테네스에게 도시국가의 민주주의 체제란 그리스 문명이 낳은 가장 높옾 수준의 민주주의였다.

 

132 아테나이 민중들은 국가가 아테나이 제국으로 군림하며 축적한 부를 이용해서 용병을 하고, 그 용병들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자유시민들의 특권을 지켜주기를 원했다. 아테나이 민중들은 게다가 자신들의 새로운 주인들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것도 없었다. 이들은 이미 콩깍지 몇 접시, 다시 말해서 빵과 구경거리 들에 그들의 정치권마저 팔아버린 것이었다. 데메스테네스는 시민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비축해둔 자금이 적어도 전쟁 기간만이라도 군사비로 충당되어야 한다고 현역으로 활동하는 기간 내내 목청을 높였다. 그는 이 점을 민중들에게 직접, 집요하게, 서투르지 않은 방식으로 강조했다. 하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그는 아테나이 민중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그런 일은 자신들이 선택한 주인들에게 맡겨버리는 편을 선호했다. 이 주인들이란 그들이 마음에 들려고 애를 쓰는 아첨꾼에 불과했다.

 

137 기원전 338년에 벌어진 카이로네아아 전투는 결정타였다. 그리스 동맹군의 정예부대가 필립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기병대에 의해 전멸되었던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로스의 나이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3천 명의 아테나이 병사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도시 국가의 독립은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데모스테네스는 마흔여덟 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개 병사로 전투에 참가했다.

48세에 전투에 참가했다는 게 감동적이다. 자신의 신념에 철저하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 더 세상의 변화에 맞는 흐름이었다.  

 

플라톤의 정치적 대망

 

145 플라톤 이전에 그리스 문학은 시가 중심이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시인은 젊은 층은 물론 도시국가 전체의 교육을 담당했다. 플라톤 이후에 그리스 문학은 지혜, 과학, 철학이 중심이 되었다. 시인이 아니라 철학자, 학자가 개인과 도시국가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146 플라톤은 우화를 통해서 가르쳤다고 한다. 이 말은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146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을 내린 기원전 404년에 도시국가 아테나이가 멸망할 때 그는 이미 성인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는 아테나이에서 가장 고귀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쪽 조상들은 아테나이 마지막 왕의 후손들이었으며, 어머니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기원전 6세기에 민주주의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솔론이었다. 그러니 플라톤이라고 하는 젊은 귀족은 공직에 종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완벽한 교육, 즉 지성을 예리하게 정련하고 정치 생활을 위해 언어를 유연하게 가다듬는 최상의 훈련을 받았다. 게다가 잘 생기고 건강한 젊은이였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단연 돋보였다그는 도한 소피스트들이 능란하게 다루는 언어의 마술에도 매우 능란했다.

 

 147 플라톤은 어린 시절 체력단련장을 드나들던 무렵 이 언어 마술의 대가 소크라테스가 역설을 전개하고 반박을 발전시켜가는 광경을 자주 접했다. 삼촌 카르미데스와 어머니의 사촌 크리티아스, 경박한 알키비아데스 등 그보다 선배격인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 공세에 못 이겨 꼼짝없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토설해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들은 결국 소크라테스 앞에서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살지, 즉 삶의 방식의 선택 문제, 그리고 왜 그런 방식으로 살 것인지 즉 선택의 이유를 정당화해야 했다.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은 그들에게 기회였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을 수도 있다. 이는 플라톤에게도 매우 드문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파악되었는가 하면 어느새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소크라테스는 말하자면 플라톤의 소명이 될 자였다.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에 대해 더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건 선사들의 질문 방식과 비슷하가?질문의 전제가 되는 것에 대한 질문. 문제제기. 역시 천재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토양이 마련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토양이다. 개인이라기 보담은 개인을 포함한 전체가 환경으로 작용한다.

 

149 플라톤도 이곳으로 온다. 그는 전적인 신뢰로 소크라테스를 대한 최초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적인 반박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근사한 놀이인가? 아니 그것이 과연 놀이란 말인가?

 

150 그가 스무살 되던 때부터 스승이 죽을 때까지 8년 동안 열성제자로 따라다니며 실행에 옮겨본 소크라테스식 대화에 대해서는 의혹과 불안감, 스스로에 대한 경멸, 신랄함만이 남아 있을 분이었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인간으로 정의로운 도시를 통치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아테나이의 어느 곳에 가면 정의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마음 속에서 대망이 무르익어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시를 만들겠다는 야망이었다.

 

152 스물다섯살의 플라톤은 태생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기질적으로 정치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정치에 입문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만큼 당시의 정치판은 폭력과 불의가 난무하는 곳이었다아테나이의 혁명기간 동안 믿을 만한 친구도 동지도 없다고 고백했던 플라톤에게 전혀 예기치 않았던 가장 힘든 시련이 닥친다. 그가 은밀하게 품고 있던 의혹에도 불고하고 늘 존경하고 사랑하던 스승, 항상 그의 기대를 채워주는 대담을 이끌던 소크라테스가 시민 법정에 서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세도가들, 다시금 승승장구하게 된 민주주의 수호자들에 의해 법정으로 끌려간 이 위대한 철학자는 스스로를 거의 변호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판관들을 도발하며 죽음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154 플라톤의 관념론은 심각한 외상을 안고 있었다. 스크라테스의 죽음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였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니 그저 살기 위해서라도 그는 소크라테스가 계속해서 말을 하도록 해야 했다. 그의 모든 철학은 그가 고안해낸 문학적 픽션의 형태마저도 우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살아있으며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이 두 사람이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새로운 인물을 탄생시킨다. 다시 말해서 새로 태어난 플라톤이 새로 태어난 소크라테스, 즉 정의와 혼동되는 소크라테스, 정의로운 사람 그 자체인 소크라테스와 다시 만난다.

 

154 플라톤은 탁월한 그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통해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를 복권시킨다.  이 작품은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진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라는 작품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쓰였으며 가장 심오하고 가장  아름다운 <고르기아스>에서도 플라톤은 마침내 가면을 벗어던지고 칼리클레스 같은 소피스트들에 맞서서 소크라테스를 완벽하게 정의로운 자, 정의를 왜곡시키는 민주주의에 의해 죽음에 처하게 되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로 제시한다. 스승을 되찾으면서 플라톤은 그때까지 거부해오던 험난한 정치 참여의 길로 들어선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플라톤의 저술이었어? 난 처음 아는 진실이네. 우와, 나만 몰랐나?

 

155 그가 원하는 정치는 도대체 어떤 정치인가? 헛소리에 들떠 있는 아테나이에 제안하는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고르기아스>에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이 들어 있다. 진정한 정치란 복잡할 것도 없이 국가 안에 사는 시민들을 향상 시키는 것이다.

이 향상이 경제적 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각할 꺼리가 많은 말이다.

 

156 플라톤은 2년 동안 여행을 했다. 여행을 하면서 이방 민족의 경험과 과학적 개념들을 수집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이제까지 알려진 사람들 중에서 가장 박식한 학자로 성장했다….기원전 387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그는 아카데메이아를 세워 진정한 철학자들, 즉 미래의 국가를 통치할 인재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플라타너스가 느릅나무와 귓속말을 주고받는 그 정원의 오솔길에서 플라톤식 우정, 당파주의, 음모, 요컨대 학업과 변증법, 인간의 사고와 삶 중에서 아직 파헤쳐지지 않은 처녀지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 등을 통해서 열성적이고 결연한 젊은이들이 성장하게 될 것이다이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에너지의 보고였다. 이곳에서는 말하자면 폭발적인 힘을 제조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고대를 계승하게 될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다. 이 새로운 시대란 기독교 세계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국가>를 저술하고 이어서 <법륜>을 집필했다.

 

162 그는 어째서 아테나이 민주주의가 실패했는지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앞에서 노예제도의 영속성이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원인 밝히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당연히 치료법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추랄은 잘못되었을 지라도 그의 탐구는 대단히 흥미로다.  

 

163 플라톤이 구상한 국가에는 세 가지 계급이 존재하는데 이들 계급들은 수적으로 매우 불평등하다. 여기서 노예들은 그저 노동력을 제공하는 근육, 즉 도구에 불과하므로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 서로 다른 세 가지 계급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민주주의 경험의 실패였음을 함축한다.

그러네 그 계급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걸 의미하네 이런 식의 사고도 재미있다.

 

163 사회구조의 밑바닥에는 수적으로 가장 많은 노동자들(상인, 그리고 특히 장인들, 농부들)이 자리 잡는다. 이 계급은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의복, 식품, 주거지 등 공동체 전체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저술 전체를 통해서 교육 문제에 지대한 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저술 전체를 통해서 교육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플라톤이었지만, 노동자들에게 문화를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기껏해야 국가 전체의 출제 즉 종교를 통해서 이들이 국가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교육하면서 이들이 접하게 될 숭배의 대상의 이름이나 가르쳐주는 정도였다.

나는 이런 계급에 속해있는 것 같다. 그런데 TV나 제어되는 뉴스 말고 좀 더 고급한 정보의 소스를 접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답답하다. 답답하다.  

 

164 노동자 계급 위에 자리하는 계급은 군인 계급으로서, 플라톤은 이들은 수호자라고 불렀다플라톤은 전쟁이라면 악성 전염병만큼이나 혐오했다. 하지만 그는 평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마저도 상실한 나머지 제일 먼저 쳐들어오는 적 앞에 무릎을 꿇는 무기력함도 경계했다.

플라톤은 수호자의 교육에 가장 공을 들인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전통적인 귀족 교육 과목인 체육과 음악에 기초하고 있다. 음악이라고 하면 뮤즈와 관련된 모든 것, 즉 시, 엄밀한 의미에서의 음악, 그리고 춤을 아우른다. 운동과 예술을 통해서 군인 계급은 용기, 죽음에 대한 경멸, 그리고 스파르타나 테바이에서 융성한 서정시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도덕적 고귀함을 기른다.

 

164 플라톤이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의 시민에게는 절대 권하지 않는 시가 있으니 바로 비극 시다.  

 

165 요컨대 예술에 대해 지나치게 윤리 의식을 강요하는 형국이었다.

 

165 플라톤은 군인 계급에게서 사유재산을 향유하는 쾌락과 가정을 이루는 기쁨을 박탈했다. 군인은 땅이나 여자를 소유해서는 안되었다. 사유재산에 대한 욕심, 가정에 대한 관심이 이들을 국가를 위한 봉사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의 결혼이란 행정관들이 마련한 제비뽑기의 결과로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상태에 불과했다. 그나마 제비뽑기도 날조되기 일쑤였다. 한편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품을 떠나 국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성장하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자신들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일정한 나이 이상의 성인은 모두 아버지이고 어머니,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은 모두 형제고 자매였다. 플라톤은 이런 식으로 군인 계급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서 말이나 소의 종자를 개량하는 생산자들의 방식에서 받은 영감과 짐승과의 허무맹랑한 비교를 통해 작성한 우생학적 고려가 적잖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플라톤은 우생학적 고려를 통해서만 종자를 개량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군인 계급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개인적 이기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뿌리, 즉 사유재산과 가정에 대한 사랑을 아예 차단하는 강수를 두었다.그 어느 어머니도 자신이 낳은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이런 말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데 플라톤의 허황된 공상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혹시 구소련의 공산주의를 말하느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교회의 군사들, 바꿔 말해서 사제들은 전적으로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규정한 가톨릭교회에서 통용되는 청빈 서약, 정결 서원 등이야말로 재산과 여자의 공동 소유만큼이나 반자연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는 어쨎거나 돈이라는 미끼없이 또 여자라는 매개없이 개인으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해 전적으로 봉사하도록 한다는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

사유재산을 갖는 기쁨과 가정에 대한 사랑을 차단했다.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사제들이 종교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해 그러고 있구나. 이게 이기심의 근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사제들의 청빈 서약, 정결서원이 반자연적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인류의 80%이상이 한 번쯤 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건 이게 생존에 이익이 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랬지.

 

166 마지막 계급은 극소수의 행정관 철학자들로 이루어진다. 이들 행정관 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합리적인 추리력을 기르는 기하학에서 시작하여 다른 모든 학문들과 변증법, 이데아의 직관, 즉 플라톤의 철학 세계에서 유일한 실체계를 형성하는 객관적인 존재(, , )를 학습한 이후에야 비로소 통치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167 어린아이처럼 진실을 알 능력이 없는 일반 민중들에게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면 그뿐이다. 가령 우화를 들려준다거나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거짓말 중에는 이따금식 고귀한 거짓말이라고 할만한 것들도 있다. 어떤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위대한 플라톤이 이 정도까지 천박해질 수도 있었다. 나는 강력하게 내 의견을 주장할 마음은 없다. 이 시점에서는 플라톤이 국가 안에서 정의를 보장하고 철학자들의 통치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생각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중들에게는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치는 철학자들이 하는 거니까. 답답하다.

 

168 내가 보기엔 이 점이 플라톤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국가의 가장 이상한 면이다. 절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니. 그가 제안하는 국가에서는 진보가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 국가는 영원히 완벽한 존재로 제시된다. 플라톤이 보기에 이처럼 절대적인 정의가 균형을 이루는 국가에서 진보는, 아니 움직임, 동요는 퇴폐와 동의어가 될 수 밖에 없다.

절대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가짜다.  

 

플라톤식 아름다움과 환상

 

177 자신이 최초로 머물렀던 공간을 기억하며 함께 수감되어 있던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기쁨에 겨운 나머지 동굴로 다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예전에 앉아 있었던 곳으로 가서 동료들에게 빛을 향해 어렵게 올라갔던 일과 그 속에서 발견한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조바심 친다. 하지만 누가 과연 그의 말을 믿겠는가? 예전의 동료들은 그를 사기꾼 취급할 것이다. 심지어 동굴 속에 여전히 갇혀 있는 포로들은 그를 죽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플라톤이 사랑하던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닥친 비극이 바로 그런 게 아니겠는가?

 

178 동굴 속 포로들이 보는 모든 것 즉 입상들과 그 입상들의 그림자는 감각적 세계를 형성한다. 감각적 세계란 순수한 환영의 세계다. 그림자는 감각의 환영이며 꿈의 이미지에 불과하나 사람들은 마치 이것이 유일한 현실인 것처럼 이를 천박하게 맹신한다.

 

178 우리를 진정한 세계로 이끄는 험난하고 바위투성이인오솔길은 철학적 성찰, 변증법적 방식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

 

181 동굴의 우화를 보완하는 또 다른 신화적 이야기에서 플라톤은 우리에게 육체의 감옥에 갇히기 전에 천상을 주유하던 영혼을 보여준다. 여기서 영혼은 날개 달린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치에 비유된다. 두 마리 말 중에서 한 마리는 희색이며, 영광과 덕성, 진실을 모두 겸비했다. 이 백마는 우리의 고귀한 정념, 아름다움과 선함을 향한 우리의 본능적인 노력을 상징한다. 다른 한 마리는 통통하여 꼬였으며 검은색에 목은 짧고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으며, 콧구멍에 털이 잔뜩 났다. 이 검은 말은 우리를 불의로 이끄는 저급한 정념을 가리킨다. 이 상징적인 마차를 모는 마부른 바로 우리 영혼의 고귀한 부분, 즉 이성이다. 이성은 날개 달린 두 마리 말을 정면에서 몰아야 하며, 신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따라서 이 말들을 하늘로 올라가게 해야 한다.

이 비유 역시 많이 듣던 것 같다.

 

184 고대의 삶에서 플라톤의 사상이 상징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전환점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영혼의 추락이라고 하는 신화, 육체가 영혼의 무덤 또는 감옥으로 등장하는 이 반복적인 이미지, 육체와 영혼의 엄격한 분리, 이것은 모두 기독교 신앙의 이념적 토대를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185 오뒷세우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엘뤼시온 들판이라고 하는 죽은 자들의 낙원에서 그가 누리는 왕의 조건에 대해 묻는다. 아킬레우스는 갑자기 힘을 되찾은 듯이 분명하게 대답한다. “나는 저승에서 왕으로 지내는 것보다, 지상에서 태양아래에서 가난한 농부를 돕는 날품팔이 일꾼으로 사는 편이 더 좋다.” 이 한마디는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를 더할 나위 없이 잘 요약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고, 제삿상에 올려놓은 산해진미보다 살아있을 때 찬물 한 그릇을 조상에게 대접하는 게 낫다는 우리 말과도 통한다. 나는 이것보다는 좀 다음 생을 생각하는 면이 많은 것 같다. 다음 생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는 형태로

 

185 플라톤과 더불어 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영혼은 육체보다 먼저 태어나서 살며, 육체 이후에도 다시 말해서 영혼이 덕을 갖춘 가운데 지상에서 여러 번의 실존을 거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산다. 죽음은 사실상 여러 번씩 거쳐가야만 한다.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오래 전에 죽음을 맞은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 안에 살아있는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죽음으로 제자들과 헤어지게 된 소크라테스, 죽음이 그를 떼어놓음으로써 완성시킨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동안 우리는 고대적인 실존의 축이 슬그머니 이동하는 것을 느낀다.

 

187 ‘육체의 광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순수한, 부패, 염증, 육체의 오점등 육체에 대한 모멸적 표현으로 채워진 이 대목을 보라. 그리스 출신 작가의 입에서 나온 이 새로운 관심사를 보라!

 

189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쇠락이라고 하는 개념은 양면성을 지닌다. 호메로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핀다로스나 아리스토파네스라면 우리들 개인의 성숙에 장애가 되는 이 육체에 대해서 지혜로 비대해진 영혼을 위한 구실에 불과한 이 억눌린 육체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하지만 우리는 그런 대목을 통해서 고전적인 헬레니즘에서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헬레니즘의 길, 훗날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길로 한 발 전진한다. “육체의 광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순수한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순수한 본질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행복하도다. 그들은 신을 볼 것이다.”라는 말을 예고하는 것처럼 들린다.

다른 이름은 기독교다. 전지구적, 또는 서양의 어떤 문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계속 개인의 인생전환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이후 인생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분노의 매장량이 제법 많다. 그건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어떤 때는 내가 나의 안과 밖을 향해 칼을 쥐고 있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그것들이 좁혀져 들어올 때는 힘들다. 처해진 여건을 탓하지 말고 흐름과 생태를 잘 알아서 문명을 건설해나가야겠지.

 

189 설득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논리의 엄격함에 항복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말에 정서적으로 애착을 보이는 것일까? 이 대화편은 우리를 설득하기보다는 감동시킨다. 사실상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제시되는 논리라기 보담은 참가하는 자들의 충실함이다.

소크라테스의 태도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말이 맞다. 설득당하는 게 아니다. 죽음, 위기를 다루는, 접하는 방식을 통해 감동을 받는다.    

 

194 그건 극단적인 향유와 극단적인 상처의 결과로 영혼으로 하여금 영혼을 즐겁게 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이 매우 실제적이며 진정한 것이라고 믿데 된다는 것이라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일세. 각각의 고통과 쾌락은 말하자면 영혼을 고정시키고, 영혼을 육체에 묶어놓는 못이라고 할 수 있다네. 이로써 영혼은 육체와 너무도 닮게 되어 결국 육체가 영혼에게 들려주는 말보다 더 진정한 것은 없다고 믿게 된다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게서 믿음을 차용하며, 똑 같은 습관과 똑같은 태도를 공유한다면 순수한 상태로 다른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196 아테나이와 인류 공동체를 위해 그가 꿈꾸어온 정의의 왕국을 대담하게도 내세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이러한 방식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199 플라톤은 천국과 연옥뿐 아니라 불의 악마들에 의해서 단테식의 형벌이 자행되는 지옥까지도 상상했다.

단테식의 연옥, 지옥, 천국이 다 마음에 있다면 불교에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이 모두 마음 속에 있다는 것과 어떻게 같고 다른 지를 살펴보면 재미있겠다. 다음번에 신곡을 3번 읽기하게 되면 이걸 꼭 다루어 보리라. 중세식 세계관이긴 하겠지만. 뭐 어떤가 이런 게 다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201 플라톤은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이나 퓌타고라스 학파와 더불어 영혼의 불멸성을 자신있게 주장한다. ..이 주제는 그로부터 몇 세기 후 헬레니즘에 이어 그리스 로마 문명에서 발생한 서구 세계 공동체에서 오랜 기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신앙과 접근시켜 볼 때 발전 가능성이 매우 풍부하다고 하겠다.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발생 이전 마지막 몇 세기 동안의 혼란과 무질서, 그 후로도 발생하게 될 또 다른 혼란과 무질서의 난맥상 속에서 인간의 절망이 매달릴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확신이며, 가장 효과적인 위안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권위와 천재성으로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영혼의 불멸성이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로군. 그런데 그 수많은 이단 논쟁은 어쩌면 좋을까? 여러가지 에서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지든가, 아니면 같은 것이 여러가지 형태로 솟아나든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의하면 후자겠지.

 

204 궁핍해지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만심으로 아집만 강해진 아테나이는 농업 생산품(기름과 포도주)과 제조업 생산품(도기) 수출에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207 플라톤에게 노예제도는 하나의 현실이었다. 몽상적인 정신이 뿌리 깊은 현실주의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그는 노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노예들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논리적이고 명석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너무도 분명하게 꿰뚫어본 것, 요컨대 아테나이에서 노예제도는 경제 발전이라는 필요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216 그리스의 모든 문필가 중에서 플라톤은 어떤 의미에서 그로 인해 그리스 인본주의가 취하게 된 새로운 방향에도 불구하고, 가장 그리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화, 그것도 전통적으로 구전되어 내려온 신화는 물론 그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신화, 자신의 사고의 전개선상에서 도출되는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을 예시하기 위해 맞춤식으로 꾸며낸 신화까지도 대단히 사랑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그리스적이다.

 

220 그리스어로 된 플라톤의 저작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번역을 위해서가 아니라(유감스럽게도!) 그의 저술을 감각적으로 그러니까 한 입 깨물면 깔깔한 입안에 달콤한 즙이 흥건히 고이는 잘 익은 과일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생한 그리스어가 주는 관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플라톤의 문장이 상상을 뛰어넘는 희열로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며, 자신의 안에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언약을 일깨우며 자신의 존재 전체(영원히, 아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분리될 수 없이 하나가 된 영혼과 육체)를 사로잡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멸을 만들어내고 천사를 만들어내는 그의 문장만이 인간의 부조리한 몽상(영원한 삶)을 마치 배고프면 한입 깨물어 먹는 빵조각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준다는 것도 느낄 것이다.

그리스어를 번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읽기를 즐기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런 사람이었으리라. 내가 연구원 과정에서 읽는 책들도 이런 식으로 한 줄 한 줄 아껴서 야금야금 빨아먹고 싶은데 나는 타이핑을 즐기지 못하는구나. 또 월요일 낸 후에 보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체

 

225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 두사람은 비단 철학사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위대한 인물들이다. 둘 다 단연 천재급이다. 사실 천재라는 말은 요즘 너무 흔하게 사용된다. 그런데 천재란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까? 두 사람이 천재라고 하는 말은 (리트레 사전을 비롯한 몇몇 사전을 찾아본 결과)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작업, 즉 철학하는 일에 필요한 능력을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렸음을 의미한다. 천재라는 말은 그러니까 뛰어넘기, 새롭게 발견하기, 즉 창조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철학이 일종의 처세술이라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변화시킴으로써 기 기술을 구체적으로 바꾸어놓았으므로 두 사람 이후(알렉산드로스는 같은 시대에 활약한 세 번째 천재라고 할 수 있다.)의 인간들은 그전의 인간들과 같을 수가 없게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이 두 천재의 가르침으로 계몽된 대중들의 활약으로 하나의 문명이 변하게 된다. 과거의 무거운 옷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 문명은 곧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다. 과거에 그리스 혹은 헬라스 문명이라고 불리던 이 문명은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며 기독교 문명으로 완전히 변신하기 전까지는 이 이름을 유지하게 된다. 기독교문명이라고 하는 그럴듯한 신화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천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누구를 만난 이후에는 그 전과 같은 사람일 수가 없는 만남, 이게 바로 엄청난 일이다.

 

226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트라케 해안에 위치한 그리스 도시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플라톤은 그보다 43년 일찍 태어난 선배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의사였으며 필립포스 왕의 아버지인 아뮌타스 왕의 친구였다. 니코마코스는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에 속했다. 갈레노스에 따르면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에서는 이사들이 아들들에게 해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행하게도 그 같은 가르침을 받기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그런 관습은 그에겐 그저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불과했다. 열일곱 살 되던 해에 그는 학업을 위해 아테나이로 간다. 그곳에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입학한다.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구나.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가계가 의사 집안이었기 때문에 생물학에 더 친했을 수 있었겠다. 모든 것은 쌓여서 넘친다. 

 

226 이 두 철학자 사이에 존재하는 견해 차이를 두고 고대인들은 수군거리며 험담을 해대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냈다는 격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나는 플라톤을 좋아한다. 하지만 진리를 더 좋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 대해 플라톤은 어린 망아지가 엄마 엉덩이에 발길질 해대는 격이라 평했다. 이데아 이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스승과의 우정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플라톤은 예순 살이 넘었어도 자신의 철학을 고인 물처럼 가만히 가두어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정립한 철학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 가치를 확인하거나 문제를 제기했다. 스승과 제자의 우정은 이처럼 수렴되거나 상충하는 비판을 통해서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외에도 또 다른 방식으로 플라톤에게 변함없는 우정을 보였는데, 스승이 사망할 때까지, 그러니까 그 자신이 서른여덟 살까지 충실하게 아카데메이아에서의 대답에 참여한 것이 그 증거였다.

청출어람이라기 보담은 색깔을 달리했다. 제자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곰곰히 들여다보게 된다. 정민교수님의 황상과 정약용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스승과제자의 우정이라는 말의 울림이 크다. 나도 이런 사람이고 싶은데 내가 어버이를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 내가 오래된 지인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 이게 모든 장기적이고 소중한 관계의 틀이 된다. 문제가 많다.

 

228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왕은 아제 열 네살이 된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전담할 스승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점찍었다.

 

 229 철학자와 마케도니아 후계자의 만남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뮤즈의 성수(당시에 이미 문화는 속세로부터 멀어지지 시작한 것일까?)에서 2년 동안 지속되었다. 필립포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그를 불러들여 왕국의 통치를 맡기도 자신은 군사 원정길에 올랐다.

열여섯살이면 중3의 나이다.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나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첫사랑에 목숨을 걸 나이랬는데 어찌하여 이다지도 늦되는가? 어떤 이유인가? 더 긴 시간 교육을 받고 있는데. 나를 포함하여.

 

 231 그의 유언은 현재까지도 전해진다. 그의 유언은 그의 사생활의 몇 가지 면모를 보여준다. 첫번째 부인인 퓌티아스 공주의 사망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르퓔리스라는 노예와 오랜 기간 동거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니코마코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에게는 퓌티아스 공주에게서 태어난 딸도 하나 있었고 니카노르라고 하는 양자도 한 명 있었다. 유언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자 니카노르와 퓌티아스의 딸의 결혼을 지시했으며 동거녀 헤르퓔리스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스타게이라의 집이나 칼키스에 있는 여러 채의 집 가운데 마음에 다는 것 하나를 골라서 가지라고 명시했다.

현대 역사학자 중의 한 사람은 그의 유언에 대해서 정말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뛰어난 남편이며 애정많고 헌신적인 아버지인데다 선량하고 정직한 사내였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이 뛰어난 남편은 전혀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열렬하게 동성애에 탐닉했다는 사실을 참고삼아 덧붙인다. 동성애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플라톤과는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삶을 들어보니 더 재미가 있구나. 유언에서, 동성애에서. 가르침과 삶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함을 알겠다. 그리고 이 저자의 말투가 나는 재미있다.  

 

232 솔직히 우리는 동성애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탐닉했던 또 다른 사항에 훨씬 관심이 간다. 일시적인 호기심 차원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 탐닉은 바로 이 세계 전체, 즉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과 그 안에서 서식하는 모든 존재를 알고 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 이 세계의 의미를 꿰뚫어 간파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려는 불 같은 지적 호기심이었다. 과학의 기수, 과학의 초석을 정립한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의 성화를 전 인류가 나아갈 길을 향해 명예롭게 치켜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방대한 저술은 탐구의 방향성이나 새로운 분야의 발견이라는 관점에서 볼 대 무엇이든 알아야 하고, 일단 알게 된 것은 남에게 가르쳐주려는 그의 열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사실 이 같은 열정이란 모든 학자들의 첫째 가는 특성이면서 동시에 모든 학자들이 마지막까지도 끊임없이 보여주는 업적이기도 하다.

 

233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에서 생명체 연구만큼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의 일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없다. ..내려오는 그의 저작 전체 중에서 대략 3분의 1 정도가 여기에 할애되었다.

 

235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영혼만을 배타적으로 다루는 철학자들을 대놓고 비판한다. 그에게 영혼이란 모든 동물의 생명의 원칙이다. <영혼에 대하여>생명과 생명의 본질적 기능, 생명의 원칙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동물 각각을 연구했다기보다 인간을 포함하는 동물 일반을 모든 각도에서 조명했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요컨대 그는 동물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연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흥미롭다. 그는 영혼이 모든 생명의 원칙이라고 보았다. 저주가 담긴 나쁜 말을 들은 물과 아름다운 음악과 사랑의 표현을 들은 물들의 모양이 다르다고 했지. 이건 무생물에 대한 것일 테고, 사랑의 에너지를 받으며 익어가는 된장, 간장도 무생물의 예고, , 식물들과 동물들의 예가 많다. 그 생명들이 이 쪽 사람이 보내는 어떤 폭력과 사랑을 감지한다는 증거를 말해주는.

 

238 수천 가지 항목 중에서 고작 열 개 남짓한 오류라니.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방대한 처녀지인 생물계, 쥘 베른에 의해서 마침내 넘어서게 된 세계보다 훨씬 광대하고 훨씬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를 다루면서 불과 열 개 남짓한 실수만 남겼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성과인가?

이렇게 보는 게 합당하다. 성취한 것과 올라간 거리, 시간을 본 후 나머지 과오를 보는 것

 

238 요컨대 그는 인간에 대해서보다 동물에 대해서 훨씬 박식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약 50종의 동물을 직접 해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몸은 단 한 번도 해부한 적이 없었다. 몇몇 태아만이 예외였다. 예를 들어 두더쥐를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는 눈 주위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표피층을 벗겨냄으로써 동공, 홍채, 흰자위, 눈과 뇌를 이어주는 관 등 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차근차근 찾아냈다.

 

241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에 관한 연구>에서 이 문제에 대한 희한한 주장을 폈다. 그의 주장이라고 했지만 사실 당시 만장일치롤 통용되던 의견을 그대로 답습하던 것에 불과했다.

열 가지 오류에 대해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작가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만 타이핑 하고 있는데 그리스문학을 전공했다는 앙드레 보나르 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까지 읽었음에 분명하다. 신비하기만 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243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지른 실수의 대부분은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과도한 지적 욕구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이란 마라톤이며 인내심과 신중함을 요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있었다. 이 같은 격렬함은 그에게 도움이 되는 동시에 해가 되었다. 그 같은 지적 격렬함이 없었다면 과학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 같은 격렬함 덕분에 그는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신속하게 진리를 터득할 수도 있었다.

 

245 이국적인 동물들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던 그는 자신이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친근한 동물들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관심을 쏟았다. 가령 여러 개로 이루어진 반추동물의 위와 그 주변에 달린 주머니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상세하게 묘사한 그의 기술은 찬탄을 자아낸다.

, 고양이, , 말 이런 것들을 관찰했다는 말이구나. 생활 주변에서

 

245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아의 발달 과정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매일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관찰했다. 

 

256 생물학적 저술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문장들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의인화하며, 이를 지능을 겸비한 우주의 힘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힘은 각각의 종이 가장 조화로운 상태로 형성되도록 관장하며, 종들 간의 조화는 생명 활동 간의 협동 체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이 협업 체계는 지속적인 상승 움직임을 통해 모든 종들을 관류하면서 완벽한 인간을 추구한다. 특히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각각의 종이 지닌 이러저러한 기관의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변함없이 적용하는 원칙이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 조직하고 제조하며, 창의력이 풍부하다고 말한다. 자연은 원하고’, 원하는 목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다.’ 자연은 그러므로 창조하는 힘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주어진 조건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것으로 만족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신이 아니다. 자연은 개개인이라는 존재 안에 깃들어 있는 활력’, 신의 견인에 화답하는 성장충동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발도르프 교육의 식물학, 동물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을 생각했다. 그녀는 공립학교 중에서 발도르프 교육 이념을 가지고 만들어진 혁신학교의 교사였다. 인천에는 아직 혁신학교가 없다. 그녀의 강의를 듣다 보면 식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자꾸만 인간인 나에게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녀는 아이들과 식물을 관찰하고 길렀다. 발도르프교육에 대해 공부를 한 우리나라 교사들 중 1세대에 속했다. 그 생각이 자꾸 나네. 나 그거 더 배워보고 싶었는데.

 

257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서 가장 광범위한 분류는 우선 혈관 동물과 비혈관 동물의 분류로서 이는 오늘날의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의 분류에 해당된다.

 

258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치게 단순한 분류를 보란듯이 비웃는 특별한 종류의 동물들을 일일이 살핀다. 거창하고 현학적인 용어도 없이 상식에 입각한 그의 분류는 대체적으로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완성시킨 학문적 분류와 일치한다.

고래를 고래류로, 박쥐를 불완전한 사지동물로 분류한 예를 일일이 적어놓아야 할까? 그게 인용문 타이핑의 역할일까? 인제 이 인용문 타이핑에 대해서 좀 마음을 열었다. 가학적, 노동집약적 읽기 방식이라고 싫어했는데, 이젠 필사라는 개념을 넣었다. 필사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적는 걸 의미한다. 신경숙씨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듯, 그리고 공지영씨가 박경리씨의 소설을 필사하듯예가 소설가만 생각나는 건 원재훈 시인의 책 때문이다. 시인도 시를 필사했다고 했지. 누군지 생각은 안나지만. 필사는 독서의 즐거움의 한 방법이다. 손가락으로 네 개 다섯 개의 위를 만들어 씹어대는 거지. 나는 한우들과 함께 자라났다. 그래서 되새김질 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필사도 한 방법이다. 현대판 필사는 당연히 타이핑이다.

 

259 지금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식 분류에 대한 요약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과도하게 간단하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 철학자이자 석학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으며, 대중들을 위한 교양서를 표방하는 이 책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소개하기에는 그 업적이 너무도 풍성하다. 그러나 소박하게 현대의 위대한 생물학자가 그에 대해 내린 평가를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과도한 단순화가 그에게 가져다줄 수도 잇는 불이익을 최소한으로 줄여볼까 한다. “나에게는 린네와 퀴비에가 각각 방법은 다르지만 일종의 신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옛날 옛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하면 초등학생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찰스 다윈이 한 말이다.

 

262 한 마디만 덧붙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생물학 관련 저술들은 플라톤의 저술처럼 독자들을 흥분시키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처럼 언어의 마술사도 넓은 의미의 시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그의 장점이라면 과장이라고는 없는 간결하고 사물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장식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재한 그의 저작은 놀라운 방식으로 그러니까 세심하게 관찰되고 완벽하게 이해된 현실이 놀라운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강력한 현실주의자다. 동물의 세계라고 하는 현실은 그의 저작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정한 실존감을 드러낸다. 그의 글을 읽는 독자라면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동물들의 이 같은 실존감을 만끽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아주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실존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동시에 친숙하고 익숙한 실존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생명체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근원, 즉 욕망에 따라 자손을 번식해나가는 삶, 배고픔을 느끼는 삶, 허기를 달래고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치열한 삶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끌린다.   

 

 262 <니코마코스 윤리학> 의 한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보기에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진리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생명은 인간과 식물에게 공통적인 재화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자연 속에 기거하는 다른 존재들(인간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과 결합시켜 주는 것에 놀라며, 이어서 인간을 자연 속에 기거하는 다른 존재들과 구분하는 것에 놀란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고 해서 인간과 식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보다 더 그를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본주의는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나무들과 짐승들은 어느 정도 인간의 형제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관련 저작들을 읽다보면 바로 이러한 형제애가 뿜어내는 향취 때문에 어느 틈엔가 우리 입가에 슬며시 군침이 고이게 된다.

동물과의 근접성은 또한 더욱 인간적이 되는 또 다른 방식처럼 제시되기도 한다. 동물들도 고귀한 인간적인 정서를 느낀다. 그것은 생명 현상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고, 가장 유용한 감정들인 동시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맹목적인 감정들일 수도 있다. 우리의 철학자는 아니 우정의 시인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정이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이 감정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들과 대부분의 생명체에도 존재한다.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우정을 느끼며, 이는 특히 인간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심리 면에서나 신체적인 면에서 동물은 인간으로 이행하기 위한 밑그림이며 초벌 작업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과 인간의 심리적인 유사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구절을 남겼다. ‘대부분의 동물들에게는 인간에게라면 좀 더 차발화된 방식으로 나타날 심리 상태의 흔적이 분명 존재한다. 가령 유순함이나 사나움, 용기나 비겁함, 두려움이나 자신감, 대범함이나 교활함 등이다. 또 지적인 면에서 슬기로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인간의 감정과 닮은 이러한 감정들은 적지 않은 동물들에게서 관찰되며 이 같은 유사성은 우리가 앞에서 다루었던 신체기관들의 유사성을 상기시킨다.’

흥미롭다.

 

265 이 이중적인 주장은 우리의 동류성, 풀과 꽃, 나무, , 물고기, 야수들의 세계와 우리 사이의 형제애를 한층 더 공고하게 다져주며,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본주의란 궁극적으로 식물로부터 생겨나서 동물 전체를 관류하여 인간에게 이르는 생명, 살아있는 존재를 이성의 빛으로 인도하는 흐름을 가리킨다.

인디언의 세계관과 매우 비슷하지 않을까? 흥미롭다. 더 읽어보고 싶다. 인디언 부분과 아리스토텔레스 둘 다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성 또는 우애에 관하여

 

269 아무리 참을성 많고 아무리 능란한 손가락이라도 절대 풀 수 없다고 여겨졌던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앞에 두고 알렉산드로스는 그걸 풀기 위해 씨름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단칼에 그 매듭을 잘라버렸다. (이 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 실화이기를 바란다면 알렉산드로스는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 제국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신탁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승자의 몸짓으로 그 신탁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매듭을 잘라버린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고르디온을 손에 넣겠다는 꿈을 꾸면서 살았다.)

고르디오스의 매듭은 풍부한 생각꺼리를 주는 비유다. 새로운 것은 이전 것의 전제조건을 무너뜨리고 온다. 콜롬부스의 달걀과 비슷하다.

 

271 알렉산드로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들처럼 영광을 가져다준 예전 사회구조를 재건하려 들지 않았다. 이제는 너무 작아진 옷을 구차스럽게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았다. 그는 심사숙고 따위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통해서 단번에 인간들을 결집시키고 공동체를 통치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조해냈으며, 이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말하자면 군주가 통치하는 근대국가를 탄생시켰다.

나는 개인사에서 커다란 전환기에 있다. 그런데 지금 빈곤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전에 부모가 주던 것을 받지 못한다고 그 말라버린 젖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 돌려주고 나는 새로운 풍부한 곳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 버려두고 새로운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풍부해지는 지 모른다. 알렉산드로스를 읽는 기쁨이다.

 

273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필립포스처럼 전적으로 지능에 의존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관능적인 인물도 아니었다고 아리아누스는 주장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육체의 쾌락에 대해서는 상당히 절제하는 편이었으며, 정신적인 향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는 필립포스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아들이었다. 에페이로스 출신인 올륌피아사는 디오뉘소스 신의 열광적인 무녀로 광란적인 음악과 무용, 영혼의 고양에 취한 상태에서 일상의 지평을 넘어 새로운 거처를 발견하곤 했다.

 

275 그는 잔혹한 길거리 전투 끝에 테바이를 탈환한 다음, 이 헤라클레스와 디오뉘소스의 도시를 파괴할 것을 명했다. 시인 핀다로스의 집만 예외였다. 남자 주민들은 칼레 찔려 처형당했으며, 나머지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 수가 무려 3만 명에 달했다. 이처럼 가혹한 처벌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나이인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따라서 효과적인 경고가 되었다. 아테나이인들은 비겁하게도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사를 보내 그의 귀환과 테바이 폭동 제압을 축하했다. 사실 아테나이야 말로 그 폭동의 진정한 교사자였다. 하지만 테바이 진압은 그리스 전역에서 가증스러운 범죄, 그리스 문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쩌면 멋진 동방 세계에서 그가 만들어내려는 너무도 이상화된 그의 이미지를 부인하기 위해 선수를 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렉산드로스도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어쨎거나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테바이 사태가 입증하듯이 과격한 폭력성이 잠재하고 있었으며, 이는 어머니(열정적 성격)로부터 물려받았을 수도 있고 아버지(난폭한 성격)로부터 유전되었을 수도 있다.

 

276 그가 벌이는 원정은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복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277 다리우스의 병력은 알렉산드로스 병력의 20배 아니 50배가 될 수도 있었다. ..다리우스 3세는 용감무쌍하며 전략가로서의 기질이 뛰어난 무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치적 혜안이 부족했고, 감정이 폭발할 때만 에너지가 충천한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은 이미 붕괴되고 있었으며, 귀족들에게 알아서 영토를 방위하도록 내버려두었던 까닭에 제국 내부는 배신이라는 고질로 멍들어가고 있었다.

 

284 이 장면은 장엄하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사료 중에서 가장 신중하고 가장 건조한 문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아누스의 묘사인데도 그렇다. 대사들이 입을 열었다. 주군의 이름으로 제국의 절반, 그러니까 그리스 쪽 바다에서부터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지역과 1만 달란톤을 공주들의 몸값으로 지불하고, 다리우스 왕의 큰딸은 알렉산드로스와 결혼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동맹관계와 우정을 동시에 선사하겠다는 것이다.

 

286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2 12월에 이집트에 도착한다. 도착하자 마자 그는 이집트의 시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의 존재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열렬한 신앙심이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종교적 전통의 나라에 와서 비로소 만개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286 그는 멤피스의 아피스 신전에서 이집트 의식에 따라 재를 지냈다. 다른 신들 그러니까 이집트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신들과 마구 혼동해서 섬기는 여러 신들을 모신 신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분에 알렉산드로스는 쉽사리 제사장들의 마음을 살수가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관용의 정신이 샘솟았던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영혼은 남들이 다른 신들에 대해 갖고 있는 신앙을 건성으로 너그럽게 인정하기에는 원래가 너무나 종교적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기 안에 이 다른 신들을 영접했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신을 그저 너그럽게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받아들였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286 가가 이집트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떠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디오뉘소스 신의 무녀인 알렉산드로스의 어미니 올륌피아스는 자신의 꿈속으로 침대 속으로 그녀를 찾아오는 신의 환영을 늘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은 과연 누구의 아들인가? 알렉산드로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나의 사명, 소명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이 정복군주가 이 질문 때문에 이집트로 진군했다는게 신비롭다. 나 또한 자신에 대해 이런 질문이 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해야하는 거지. 그래서 가슴뛰는 삶을 살아가라고 했지. 콩두의 두 번째 뜻은 바로 콩닥콩닥두근두근이지.  그는 이 질문을 위해 이집트로 진군했다. 나는 어디로 진군하고 있을까? 지금은 그리스문명사로 진격중^^ 새벽에 2시간을 더 보내는 건 나로서는 이집트정벌만큼 힘든 미션이다.     

 

288 부하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서 성소에 들어간 그는 마음먹었던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신의 답변을 듣는다. 도대체 무슨 질문을 했으며 무슨 답변을 들었을까? 성소 밖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의 추궁에 알렉산드로스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웅변적인 침묵인가? 자신의 눈앞에서 베일을 벗은 신비를 관조하며 명상한 영혼의 침묵이 아니던가? 그 침묵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필립포스의 아들이 아니라 신, 즉 아몬 라에 의해 올륌피아스의 몸 속에 잉태된 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심오한 침묵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친구들의 추궁에 마지못해 신으로부터 그가 알고 싶었던 모든 대답을 들었다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만 던진다.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이 신탁으로 한결 공고해졌으며 이날 이후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우스의 아들. 그는 이제부터 제우스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292 알렉산드로스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그의 군대에게 이 도시들 중 하나를 마음대로 약탈하고 불 질러도 좋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훈령을 내렸다. …페르시아군이 번번이 이 도시에서 출발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의 정의를 구현하는 자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한다. 병사들에게 페르세폴리스의 약탈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에게 지나온 세월, 그러니까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줄곧 그리스 전체를 도요로 몰라넣던 페르시아인들의 적대행위로 인해 그리스인들이 겪어야했던 어려운 시절에 대해 보상을 해 준 셈이었다.

 

294 다리우스는 여전히 도주중이었다. 그는 메디아에서 카스피해 관문을 지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산과 사막을 가로질러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 그를 추격했다. 이따금식 밤낮없이 말을 달리기도 했다.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다리우스는 변함없이 출실한 개와 더불어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사트라프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비록 적장이었으나 그의 비참한 최후를 비통해 마지 않았다. 살해범을 잡아 모진 고통 속에서 죽게 한 다음, 제왕에 합당한 예를 다해 다리우스를 조상들의 묘에 묻어주었다. (기원전 330)

이 장면이 감동적이다. 전쟁은 어차피 죽고 죽이는 게임이지만 그 안에도 지켜야 할 약속과 예의가 있는 듯?

 

295 알렉산드로스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카스피해 동쪽, 인도 북쪽에 있는 나라들, 오늘날에는 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벨루치스탄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엔 각각 마르기아나, 박트리아나, 소그디아나라고 부르던 나라들을 정복하느라 3년을 보냈다. 이 지역에 여러 개의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최대로 잡아 16개 정도가 설득력 있는 숫자일 것이다.

 

296 그리스와 인도의 만남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고대사가 낳은 세 가지 인본주의 가운데 두 가지, 즉 그리스 인본주의와 불교식 인본주의(처음에는 브라만식 인본주의)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298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제국이 붕괴된 후에도 그의 동방원정에서 비롯된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 사이의 상업적, 문화적 접촉은 단절되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오히려 강화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생전에도 이미 그의 지시에 따라 네아르코스가 인더스 강 물길을 상류에서부터 하류까지 탐사했으며 오만 해와 페르시아 만의 동부 연안 탐사도 수행했다.

 

299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그리스 불교 예술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것이며, 기메 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힌두 형상들이 뿜어내는 매력적인 (강력한 의미에서) 평온함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문외한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이 보여주는 아폴론이나 아프로디테를 약간 닮은 듯한 인상으로 미루어 그리스 조각이 확실히 인도 고대 예술에 영향을 미쳤음을 믿으려 한다.

 

303 그는 자신을 통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정복했으며 자신에게 복족하는 모든 민족의 통합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는 이들 민족 사이에 화합이 지배하기를 원했다. 그리스인들과 바르바로스들 사이의 화합

 

303 그리스식으로 교육받은 오아이 바르바로스들과 원주민들에게 신뢰와 우정을 표하며 페르시아의 가장 고귀한 귀족들을 자신의 궁정에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고, 그들에게 행정이나 군사 분야의 요직을 맡기는 것에 대해서 마케도니아인들은 물론 그리스인들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니 못마땅하거나 비웃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말하자면 보자 보자 하니 왕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식이었다. 왕은 동양풍으로 옷을 입었으며 제왕 앞에서 깊이 몸을 숙이는 동양식 예법을 즐겼다. 그리스 출신 백성들의 허영심의 발로인지 정치적 계산인지 알고 싶어 했다….이도 저도 아니라면 항거를 해야 마땅한가? 왕을 살해하자는 음모가 결성되고 계책들이 꾸며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의 친위대에 페르시아 제후의 아들들도 선발하겠다고 하자 마케도니아인들의 참았던 분노는드디어 폭동으로 표면화되었다.

 

307 헤로도토스의 호기심과 즐거움, 열정은 인간 지성의 결정판이나 에너지 넘치는 활약상, 여러 나라와 민족의 진기한 풍습을 만날 때마다 자유롭게 폭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루타크코스와 동시대인들은 헤로도토스를 모욕적인 의미에서 야만인 애호가로 취급했다) 플루타르코스의 말대로라면 아시아 고원 지대까지 아테나이의 3대비극 시인들의 작품을 자기ㅗ 오게 한 이 페르시아 정복자가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이라는 작품을 열 번 이상 읽지 않았다고 믿어야 할 것인가?

 

308 이것이 알렉산들스의 생각과 행동에 자양분을 제공한 인본주의, 모든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이 뿌리 내린 인본주의였다. 그렇다면 호메로스는?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아스를 미치도록 좋아했다. 그는 저녁이면 잠들기 전에 일리아스를 읽고 또 읽었다. 머리맡에 칼을 함께 놓고 잘 정도였다. 이 죽음의 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간에 대한 격렬하고 역설적인 긍정으로 무장한 알렉산드로스,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던 그가 아킬레우스가 뤼카온을 내려치면서 한 말(그러니 이제 죽거라, 친구여, 너보다 훨씬 나은 파트로클로스도 죽었다)을 떠올리지 않았다고 상상할 수 없다.

 

311 간단히 말해서 필립포스와 올륌피아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양쪽 부모의 성격을 골고루 이어받았다. 그의 신비주의적인 기질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젼을 실현했을 때에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스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 알렉산드로스가 품고 있던 가장 대담한 꿈이었으며, 이집트 성소에서 은밀하게 신의 부름을 받은 그가 고대 사회, 그가 정복한 두 동간 난 사회의 단일성을 위해 내건 대원칙이었다.

 

311 신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며 모든 인간들은 그리스인이건 비그리스인이건 형제들이다. 모든 민족들(최소한 알렉산드로스가 알고 있는 민족들)은 서로에게 같은 감정을 가지고 화합속에서 살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수동적인 자세로 왕의 백성이 되어 복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와 더불어 제국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 같은 개념들과 그것들이 함축하는 늬앙스는 화합이라는 대원칙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316 알렉산드로스는 결혼식을 통해서 이민족 간의 피의 결합, 아니 플루타르코스의 표현대로 자식들의 결합을 통해서 두 나라를 하나로 엮어주는 정당한 사랑과 정직한 결혼을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했다.

통일교도 아마 이런 원칙에서 국제결혼을 진행하고 있지? 아마

 

319 알렉산드로스는 길들여지지 않아 거칠고,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청소년이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므로 평생을 야성적인 청소년으로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거친 야수라도 천재적인 야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인본주의에 사로잡힌 야수였다.  

 

322 플루타르코스는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알렉산드로스가 다음 세기,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도 마땅히 살았어야 했을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할 스토아 철학자 제논의 생각을 먼저 실행에 옮겼다고 주장한다. 제논은 모든 인간들은 이 세계의 시민이다모든 사람들에게 세계는 하나라고 주장했다. 제논은 모든 인간들이 똑 같은 목동 밑에서 풀을 뜯고 똑같은 성가신 일들을 겪는 양 떼처럼 똑 같은 삶을 누리기를 원했다.   

 

324 알렉산드로스는 누가 뭐래도 공간의 정복자였다. 그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영원히 파괴햇으며 그 대신 이집트, 페르시아, 인더스강, 펀자브 지역까지 자신의 제국을 넓혔다. 그는 후계자들에게 그 당시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제논은 그 이후에 등장한다. 제논은 공간의 정복자가 아니라 인류 공동체의 정복자가. 하긴 알렉산드로스도 인류 공동체의 정복자였다. 

 

324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의 원조, 즉 인류 문명에서 가장 먼저 이를 창안한 선구자들 중 하나이다. 그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문명이 아니라면 그 문명은 결코 오래도록 지속돌 수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325 기원전 323 6 13일 올륌피아스와 필립포스의 천재적인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갑작스럽게 오른 열을 이기지 못하고 평균 수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서른세 살도 채 안된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전쟁의 폭력성과 잔인함으로 데이고 찢어져서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인간적인 자비심으로 충만했던 천재의 육신을 장군들은 대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미래의 발아를 위해서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지상에 모셔두었다.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던 자의 시신을 끔찍할 정도로 방부 처리한 다음 서로 그 시신을 차지하겠다고 고함을 지르고 협박을 가했다.

 

질서라는 탈을 쓴 무질서, 두 명의 프톨레마이오스

 

330 새로운 시대를 장식하는 가장 놀라운 현상은 민중의 퇴장이다.

 

331 사실 군주들에 의해서 정립된 질서는 무질서에 가까웠다. 이 질서라고 하는 것은 무정부주의만큼이나 황폐하고 비생산적임이 곧 드러난다.

 

333 원정기간 내내 그는 그다지 열성적이지는 않지만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으로 젊은 왕을 보필하는 상식적인 인물이었다.

 

335 결론적으로 그는 가장 좋은 다시 말해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가장 방어하기 쉬운 이집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집트 태수로서 지위를 확보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서둘러 바뷜론을 떠나기로 했으나, 그래도 록사네의 해산과 돌아가신 왕의 장례를 기다릴 정도의 참을성을 발휘했다. 두 가지 중요한 행사가 끝나자 그는 기원전 323 11월 이집트를 향해 떠났다. 이집트에 정착한 그는 제국의 복귀를 위한 시도를 저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40년 동안이나 계속된 통치기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대외 정책은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첫째, 섭정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둘째,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제국으로부터 분할되어 생긴 국가들간의 균형을 이집트에 유리하도록 유지한다는 점이었다.

 

341 프톨레마이오스에게는 수사의 결혼식에서 맞아들였으며 결혼식이 끝난 후 곧 잊힌 아시아 공주는 제쳐두고도 두 명의 정식 부인이 있었다. 첫 번째 부인 에우리뒤케는 섭정의 딸로, 두 사람의 결혼은 일시적인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략적 결혼이었다. 반면 평민 출신으로 추측되는 베레니케와의 두 번째 결혼은 사랑에 의한 결합이었다. 두번째 결혼으로 첫번째 부인과의 결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에우리뒤케는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 후에 내쳐진다.

왕이든 누구든 정략결혼, 행사성 결혼, 명목에 의한 결혼 말고 사랑으로 인한 결혼이 필요하다. 그의 행복을 위해

 

349 프톨레아이오스는 죽은 왕비에게 여신에 해당하는 예우를 허락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 위치한 신전 대부분에 아르시노에의 입상이 세워지고 머지않아 아르시노에를 섬기는 신전이 건축되었다….새로 마련된 숭배의식을 제도화한다는 명목으로 이집트 신전에서 거둬들이는 수입의 일정 부분을 왕실 수입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인 꼼수가 있어서 진행되는 신격화다. 저런 신격화 정말 신물 넘어오는데 현실에서는 잘 몰라볼 때가 있다.

 

책의 전성시대, 알렉산드리아 : 도서관과 박물관

 

359 퓌타고라스 학파는 일종의 평신도회(거의 수도원에 해당한다) 를 세웠고, 그 안에서는 뮤즈 숭배가 학문 또는 과학적 탐구를 상징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는 전통이 있었다. 이 전통이 아리스토넬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에 의해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의 정립을 위해서는 학자들끼리의 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어쨎거나 이는 풍부한 발전성을 지닌 생각이었으며, 따라서 그 이후로 줄곧, 특히 근대에 들어와 근대와 현대 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반절을 일궈내고 있다. <동물에 관한 연구>가 굉장히 결과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학자들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361 박물관의 연구원들은 주로 학자, 시인이었으며, 드물게 철학자들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박물관 안에서 기거하면서 국가에서 주는 수당을 받아 생계 걱정없이 강의와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몇 명이나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362 이집트는 오랜 문화 국가이며 따라서 많은 소장품을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의 파라오들도 개인 도서관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 중 한 도서관에는 이집트 문자로 정신의 피난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362 에우리피데스로 말하면 그가 소유한 책들에서 건진 정수를 마치 녹차 거르듯이 자신의 비극 작품을 통해서 우려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한 분량의 장서가 구비된 개인 서가를 소유한 자로는 단연 아리스토텔레스를 꼽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아낌없는 후원 덕분에 서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책들에서 건진 정수를 녹차 거르듯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려낸 시인이라는 말이 참 좋다. 읽은 책들이 이렇게 작품에, 자신이 쓰는 글들에 우러나면 참 좋겠구나.

 

367 프톨레마이오스 8세 또는 백성들이 카케르케테스라고 부르던 에우에르게테스 2세의 통치기간 중이었다. 에우에르게테스가 선한 자를 의미한다면 카케르게테스는 그 반대를 의미한다. 이 인물은 끔찍한 범지를 저지른 장본인이다. 그는 자신의 친아들을 죽인 다음 시신을 토막 내서 부인, 그러니까 아들의 생모에게 생일 선물로 보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수도로부터 추방되었던 그는 내란을 틈타 다시 수도로 잠입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불을 지르고 피바다를 만들었으며, 박물관 출입은 금지하고 연구원들을 모두 추방했다.

 

368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했다. 페르가몬은 이 수출 금지 조치에 양피지의 발명으로 맞섰다. 양이나 염소 또는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양피지는 파피루스보다 휠씬 견고해서 문자를 기록하는데 더 효과적이었다. 이것은 서적의 교역이 한층 활발해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파피루스, 양피지처럼 만들기 어려운 재질에 글씨를 써서 책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370 여기서 박물관과 도서관, 두 기관은 설립 초기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는 힘 자라는 데까지 모든 그리스 문명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372 박물관 학자 연구원들은 그것이 설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결정론적인 철학을 설파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로터 형이상학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연구를 진행시켜 나가는 방향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박물관은 스토아 학파의 스토아 포이킬레나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 같은 하나의 철학 학교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학이었다는 말이다.

박물관은 학자 집단이었다. 국가에서 재정을 지원받으면서 연구를 했다. 좋은 제도 같음.  

 

373 기원전 3세기와 2세기 무렵에 활약한 위대한 수학자들은 대개 박물관에 살면서 강의를 하곤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면 단연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제로 쓴 기초 기하학 방법에 관한 논문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솔직히 가장 천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373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잔뜩 늘어놓을 수는 없으므로 유감스럽게도 그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374 학문 탐구가 시에 섣불리 적용되면 몸에 잘 안 맞는 옷을 이은 것처럼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한 법이다. 가령 아폴로니오스의 시는 이따금씩 매우 아름다운 구절도 눈에 띄긴 하지만 유식한 티를 내는 본문이나 주석 때문에 오염되어 있었다.

 

376 칼리마코스는 나는 증거가 없으면(그러니까 자료가 없다면) 아무것도 노래하지 않는다. “고도 말했다. 이건 사실이었다. 어떤 주제가 되었건 그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시인들은 자료를 찾았다. 말하자면 문학이라는 자원을 고갈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루 작품들은 데자부,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을 준다. 알렉산드리아 시대라고 해서 뛰어난 시적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박물관과 도서관에 머물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시는 학식있는 교양인의 시가 되어버렸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 : 아리스타프코스의 천문학

 

383 퓌타고라스 학파는 기원전 6세기 무려에 벌써 최초로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러한 주장을 내놓은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이데올로기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구는 절대적인 대칭성으로 말미암아 완벽한 형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이유에 불과했따. 왜냐하면 이들은 월식이 일어나는 것은 지구의 그림자 때문이며 이 그림자를 살펴보면 원의 형태가 찾아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87 아리스타르코스 체계를 댜략 간추리면 이렇게 된다. 지구는 하루에 한 번 자전을 하고 1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공전하며, 이 공전 궤도는 원형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체계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와 정확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을 공전하는 궤도가 원형이라는 오류까지도 동일할 정도다.

 

388 그는 지구가 자전을 한다거나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믿었던 고대 천문학자들을 인용했다. 필롤라오스와 헤라클레이데스, 그리고 아리스타르코스를 특별히 비중있게 인용하면서 그는 이러한 대목들이 나로 하여금 지구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이 인용문은 코페르니쿠스의 겸손함과 성실성을 고스란히 드러낼 뿐 아니라 현대 과학의 탄생에 고대 과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392 카톨릭교회는 19세기에 와서야 비로서 이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1615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던 갈릴레이는 로마에서 열린 종교재판에 참석해서 그 이론을 포기하겠다는 언약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돈다는 제안은 잘못된 것이며 이단이라고 만천하에 공포되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은 금서 목록에 올랐다. 카톨릭교회가 지구가 돈다는 내용의 저술을 출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최초로 결정한 것은 1822년의 일이다.

 

392 로마인은 천문학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겨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로마가 낳은 위대한 몇몇 문인들은 이 분야에 대해서 기가 막힐 정도로 문외한이었다.

 

393 이후 오랫동안 천문학은 한르에 관한 유사 과학에 지나지 않는 점성술에 자리를 내어준다. 나는 칼데아의 종교였다가 헬레니즘 문화지역으로 옮겨왔으며 수학자들을 비롯한 쟁쟁한 학자들이 연구에 몰두하던 분위기에 덩달아 학문 흉내 내기에 열을 올렸던 점성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겠다. 천문학이 그리스인들이 이루어놓은 업적 위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려면 르네상스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리학 : 퓌테아스와 에라토스테네스

 

398 한 명은 여행가이자 대륙 발견자, 해상 항로 탐험가인 동시에 학자인 퓌테아스이며 다른 한 명은 수학자인 동시에 지리학자, 지도 제작 전문가인 에라토스테네스다.

 

398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에서 인도를 발견할 무렵 거는 서방에서 주석의 바다와 호박의 바다를 발견한다. 퓌테아스의 목표는 주석 항로와 호박 항로를 발견하고, 주석의 바다(오늘날의 도버 해협)와 호박의 바다(오늘날의 북해)에 인접한 나라들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402 그의 책은 내가 이미 말했듯이 여행가이며 상인이며 동시에 학자였던 자의 기록이다. 퓌테아스는 헤로도토스나 다른 연대기 작가들처럼 바르바로스들의 풍습에 대단한 호기심을 보였다. 맛살리아의 무역, 생산지, 시장 등과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이런 식의 기록을 일상 속에서 해 나갈 수 있을까? 자기의 일상을 여행기를 적듯이

 

403 그의 저술은 그리스 소설가들에게 너무도 애용된 나머지 학자들에게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 모험 소설 작가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는데 그들은 퓌테아스가 묘사한 여러 나라들을 자신들이 상상하는 소설의 무대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퓌테아스의 정확한 묘사는 온갖 종류의 동화들, 심지어는 아랍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뱃사람 신드바드의 모험으로 전해진 인도의 동화들과도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여행기를 읽는 게 동화의 재료가 될 수도 있구나. 내가 직접 여행을 못 갔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나라에 못 갔으면 세계여행자의 여행기라도 읽어둬야겠구나.

 

403 모험가이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의 발견자라는 진면목을 지닌 퓌테아스는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가 쓴 시에서 아르고선을 타고 모험에 나선 원정대를 이끄는 (그런데 그가 과연 이끌긴 했던가?) 이아손보다 훨씬 매력적인 인물이여, 엄청나게 유식한 아폴로니오스 자신보다 훨씬 진지한 학자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자기 시대에만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405 에라토스테네스의 시는 천문학적인 동시에 지리학적이었다. 하지만 지구를 묘사한 일부분, 즉 지구의 다섯 개 지역에 관해 그가 노래한 대목으로 베르길리우스에 의해 인용된 부분만 지금까지 전해진다.

천문학적이면서 동시에 지리학적인 시라. 어떤 시일까? 별들과 지역의 이름을 막 말하나?

 

405 에라토스테네스는 기원전 195 80세로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이나 사서로 일했다. 그는 모든 분야의 학문, 당대의 모든 지식을 향해 열린 마음과 머리로 학문을 위해 헌신하는 충만한 삶을 살았다.

 

의학 : 아르키메데스, 헤론, 그리고 증기기관에 관하여

 

416 과학과 관련된 활동이 그리스에서 이집트로 옮겨오면서 생겨난 가장 놀라운 변화는 바로 시체 해부가 너무도 당연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보존하는 전통을 유지해온 이집트에서는 관습적으로 가족 친지들의 해부를 일종의 장례의식처럼 친근하게 여겼으므로, 박물관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을 위해서 인체 해부 금지라는 그리스적인 조항이 해제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18 헤로필로스의 생리학은 그의 모든 의술이 그렇듯이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해부학의 토대 위에서 꽃필 수 있었다.

 

421 우리는 이미 오뒷세우스가 뛰어난 뱃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조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말하자면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드는 인간의 전형이었다.

 

424 아르키메데스는 훌륭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열렬한 기계 마니아였다. 그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간단한 기계 다섯 가지, 즉 지렛대(“나에게 받침점만 주면 지구를 들어올릴 수 있다”), 쐐기, 도르레, 무한 나사, 권양기를 모아서 하나의 이론을 만들었다.

 

425 물론 파이의 계산은 아르키메세스가 이룬 또 하나의 개가이며, 오늘날 젊은 수학도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유용한 업적이다. 

 

428 헤론의 이 글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취관을 제작함으로써 아르키메데스의 수제자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는 그 증기기관으로 무엇을 했을까? 고대인들은 그걸 가지고 무얼 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아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발명품은 오늘날의 노르만디호나 퀸 메리호 같은 거대한 여객선이 대양을 가로지르게 해주는 엄청난 동력을 지녔음에도 고대인들은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테나이에서 알렉산드리아 또는 맛살리아로 오고 가는데 여전히 노 젓는 일꾼을 이용했다. 명품을 그토록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저변에는 사회적인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들은 과연 노 젓는 이들, 아니 보다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이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자신들이 이룩한 발명품을 이용할 줄 몰랐을까? 그들은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오랜 망각에 대한 설명이다.

기술이 있는 것하고 그걸 이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게 인문학의 영역일까? 이건 구체적인 사람에 대한 사랑, 또는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것인 듯 하다. 생활 속에서 찾아내야 할 듯 하다. 어디서 이런 창의성을 가지고 올 건가?

 

434 헤론이 자신의 발명품인 증기기관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려고 했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노예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런 게 지금 내게는 뭐가 있을까? 분명 잠재력을 쓰지 못하는 어떤 요소가 있다.

 

시로의 회귀 : 칼리마코스,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가 쓴 <아르고나우티카>

이 장의 이야기는 지루하다. 인용한 작품도 지루하다.

 

440 칼리마코스는 누구인가? 첫째 투쟁단계 별 볼일 없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지내온 비참한 시절이다. 퀴레네 지방 출신으로 알렉산드리라 변두리에서 작은 학교를 운영하면서도 자신은 시인이라고 믿고 시인이 되기를 열망했던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짬짬이 선언문에 가까운 시, 격언시, 전권을 지닌 군주에게 보내는 진정서 형식의 시들을 발표한다. 말하자면 그는 다소 방랑자적인 삶을 살면서 손쉬운 사랑과 수상쩍은 사랑을 적당히 즐겼다. 아니 적어도 시를 통해서 그런 척했다. 둘째, 군주에게 보낸 아첨이 제대로 먹혀들어가 성공을 이루는 단계로 박물관에서 웅변술 또는 시 교수직을 얻음으로써 대중의 칭송과 권력층의 총애를 받고 도서관의 공직을 맡으며 궁정 시인이 되어 녹을 받는다세번째 단계 질투심을 느끼는 경쟁자들이 거물급 시인의 험담을 일삼고 서른 살 미만의 젊은 세대들은 문학을 둘러싼 신구논쟁을 부추기거나 그저 무심한 듯 어깨만 으쓱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격언시나 풍자시 전쟁이 일어나면서 존경받는 거장의 이론들이 방어되거나 폐기된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증거까지 입수하여 확실하게 확보하기보다는 솔직히 그저 얼핏 보고 감을 잡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작품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들린다.

 

442 비유하자면 그는 빅토르 위고와 이따금씩 소홀함이 보이는 위고의 위대한 작푸모다는 호세 마리아 데 헤레디아와 그의 잘 가다듬어진 소품들을 추구했다고나 할까? 물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영감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칼리마코스 자신도 그 점을 잘 알았다.

 

450 시를 읽는다기 보담 교양인을 위한 관광 안내서를 읽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 부분에서 아폴로니우스는 최대한 많은 지명들과 그 지명들에 붙어 다니게 마련인 볼거리들을 빠짐없이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하다. 하지만 이 같은 일종의 각주는 그보다 더 서투를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하게 본문과 연결되어 있다.

읽기 싫을 것 같다. 지루하고.

 

472 메데이아가 아킬레우스와 저승에서 혼인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신탁이 실현되려면 우선 메데이아가 죽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헤라까지 들먹이며 간청하는 짓은 부조리하여 어이가 없다. 이런 식의 어불성설이 <아르고나우티카>의 네번째 노래에도 수두룩하다.

 

475 아폴로니오스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은 원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완전히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 그리스 최초의 소설가였다. 

 

테오크리토스의 낙원

 

489 전원시는 소설과 더불어 그리스인들이 마지막으로 발명한 장르다.

 

490 그리스의  시역사가 서서히 막을 내려가는 무렵에 서사시나 서정시, 비극 등 예전의 고귀한 장르들이 탄생할 때에 비해서 훨씬 뚜렷하게 드러나는 (아니 덜 모호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문학 장르의 탄생을 지켜본다는 건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전원 풍자 희극의 탄생 과정이 이의 선배격인 고귀한 장르들의 탄생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은 더더욱 흥미를 북돋운다.

 

492 나는 풀 먹이러 간다 는 뜻의 부콜리아스모스는 전원생활을 주제로 두 명의 목동이 번갈아가며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를 가리킨다. 즉흥적으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이 방식은 아곤, 즉 시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경합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유난히 경합을 즐겼음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다. 경합은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운동이며, 그리스식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감초 같은 놀이였다.

 

497 그의 발명이라는 것은 사실 민간 시, 대중 시의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를 그는 수집했다. 다만 민속을 사랑하는 애호가가 하듯이 무작정 수집한 것이 아니라 소재와 형태를 재가공하고 즉흥 연주자들의 들쭉날쭉한 수준을 일정하게 끌어올려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비록 테오크리토스가 책상물림 문인은 아닐지 몰라도 그가 문인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민간 전통에 문학적 존재감을 부여했다는 의미에서도 그렇고 전원 풍자 희극 작품을 지속적으로 집필했다거나 문학적 전통을 수립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호메로스가 구전된 영웅서사시를 바탕으로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썼듯 이이는 전원시를 채록했구나. 그 노래들을 소중하다고 여기다니 놀랍다. 우릴 옛노래들을 모으는 이들도 있겠지.

 

503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표현하는 진정한 양치기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말하는 방식은 매우 직관적인 동시에 전통적이다. 이들은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혜에 의거해서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속담을 자주 인용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당연히 시골에 만연한 미신들로 점철되어 있다. 거짓말을 하면 혓바늘이 돋는다느니 코에 뾰루지가 난다느니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침을 세 번 뱉어야 한다느니 늑대를 보면 말을 못하게 된다느니 하는 미신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벌이는 토론도 지켜볼만 하다. 시골 리듬인지라 토론도 느릿느릿 진행된다.

 

503 이들의 놀이장면도 흥미로운데 완전히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치기가 넘친다.

 

512 테오크리토스에게 자연과 사랑의 혼합, 즉 시는 독자들에게 예전처럼 삶의 방식이나 주음의 방식(가령 필요하다면 영웅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식) 이 아닌 삶으로부터의 도피, 망각으로의 달콤한 도피를 제안한다. “시는 인간의 기분을 치료한다. 시는 부드러움이지만 그 부드러움을 찾기란 켤코 쉽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부드러움이라는 말은 테오크리토스의 작품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 시는 인간에게 삶과 전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휴식이라고 할 수 있는 몽상, 삶에 대한 향수어린 사랑, 삶에 대한 달콤한 망각, 삶을 대신할 수 있는 몽상을 제공한다.

 

512 테오크리토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도시 사람들을 위해서 시를 썼다. 그는 그 자신이 피곤에 지친 사회, 사업가들과 공무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 자체가 그랬으며,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도 다르지 않다.)에 갇혀서 살았다. 코스 섬의 한적한 시골을 거닐었던 산책의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을 담은 <탈뤼시아>가 코스 섬에서 쓰였으며 시켈리아를 무대로 하는 전원시가 시켈리아에서 쓰였다는 주장은 그러므로 착오다. 착오치고도 상당히 저급한 착오다. 그건 테오크리토스의 시가 지닌 향수어린 어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지나치게 단순하고 비약한 사고력의 산물이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시골 새오할을 다룬 전원시, 한결같이 이상적인 빛 속에 젖어 있는 이 작품들이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거대 도시에서 마주하게 되는 망명생활의 고독감 속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쓰일 수 밖에 없었으리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을 지닌다.

도시에 살면서 전원을 그리워하면서 쓴 시로구나. 

 

다른 형태의 도피 : 헤론다스와 사실주의 풍자 희극, 그리스의 소설 <다프니스와 클로에>

 

521 세상에는 여러 가지 도피 방편들이 있다. 영웅들이 겪은 위험과 영예의 길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위대함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문학에 등을 돌릴 수도 있고, 일부러 인간의 비천함을 택해 온갖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가소로움과 우스꽝스러움, 쩨쩨함 등을 어처구니없이 웃어넘기는 대신 만천하에 고발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가 바로 추함, 찌푸린 얼굴을 그려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천박한 사실주의의 길이다. 시인 헤론다스가 풍자 희극을 쓰면서 택한 길이기도 하다. 덕분에 그의 풍자 희극은 그 안에 담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추함의 힘으로 인해 아름답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추함의 힘으로 아름답다니 이런 반어법이 있나?

 

522 생긴 그대로의 세계 속에서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되 마주한 그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스 문학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제일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위대함에 다가가려는 욕망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약점(여기서 나는 분명 약점이라고 말한다)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인 이 세계 속에서 그의 위치를 제대로 가늠해야 하며,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과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칙을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제까지 그리스 문학이 추구해왔던 목표다.

역시 여기서도 작가는 두괄식으로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다.

 

528 헤론다스의 풍자 희극 중에서도 천박함에 있어서 가히 압권은 <여자 파는 상인>이다. 이 풍자 희극의 주인공은 갈보집 주인이다. 밧타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코스 섬에서 거주 이방인자격으로 살고 있다.

천박함으로 압권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532 한 가지 사실은 반드시 인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헤론다스의 시는 그 은밀한 본질에 있어서 이제까지 살펴왔던 그리스적인 시, 문학, 삶과 전적으로 이질적이다. 그리스 문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우리피데스와 아리스토파네스는 물론, 호메로스와 박코스신의 여제사상 아르키메데스에 이르기까지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로고스, 즉 말이었다. 그리스 문학은 귀로 듣기 위하여, 몸으로 체험하기 위하여 존재했다. 어쨎거나 그것이 그리스 문학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헤론다스와 더불어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 애를 쓰는 말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실재를 천박한 실재를 모방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문학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는 분명 훗날 위대한 문학 작품들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었다.

 

533 기독교 시대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형태의 도피가 등장한다. 바로 그리스 소설이다. 문학사를 통틀어 이보다 더 간단한 시간 보내기, 심심풀이 오락, 놀이에 가까운 문학 장르가 있었을까?

 

542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하시라. 이 작품은 음란물이다. 적지 않은 문헌학자들이 그렇게 결정했다. 외설스럽고 석연치 않은 책이라고 말한 학자도 있었다. 그런 책이 현대에 들어와서 각광을 받는다는 것은 나쁜 징조라고. 도덕심으로 무장한 헬레니스트들은 거든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이 책이 당신 마음에 들었다면 당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존경할 만한 오세르의 아미요 주교의 판단은 달랐다. 성직자로서의 의무에 누구보다도 충실했으며 왕족 자손들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던 그는 롱고스의 소설을 최초로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이 작품에 대한 그이 사랑은 그가 번역한 구절구절마다 배우 나온다. 여쨎거나 감각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사랑을 노래하겠다는 작품이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란물, 다시 말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나는 음란물의 사전적인 의미도 확인해보았다.) 풍습을 저해하는 작품이라고 치부해야 하는가?

발랄하다. 재미있다.

 

에피쿠로스와 인간의 구원

 

나는 3권에서 몇 개의 장의 인용문을 먼저 타이핑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 에리쿠로스가 나오는 부분이다.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글을 다룬 부분도 그랬다. 에피쿠로스를 맨 나중에 넣은 작가가 이 철학자를 마치 대안처럼 제시한다는 느낌이다.

 

551 이제 그만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마무리를 짓다니? 아니 마무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매듭을 지어야 한다. 무릇 필자는 비록 정통적인 역사 연구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마무리 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역사는 계속된다.

더구나 이 마지막 권에서 내내 필자는 척박한 쇠락기, 척박하지만 한편으로는 약속으로 충만한 그 시기의 한 중심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끊임없이 피력했다. 이제 오랫동안 해온 작업에 이별을 고하면서 이 소중한 과거를 대표하면서 동시에 이 시기의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줄 한 인물을 골랐다.

바로 에피쿠로스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그저 친구가 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 그가 이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기를!

 

552 에피쿠로스는 대략 플라톤보다 한 세기 후, 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3세기 1사분기에 걸쳐 생존했던 인물이다. 그의 생각과 삶(환자로서의 삶)은 플라톤의 야심찬 관념주의에 대한 엄격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평온한,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고귀한 답변이다.

 플라톤의 저술과 관련해서는 잘 알다시피 매우 방대한 양에 이르는 모든 작품이 지금까지 모두 전해지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그보다 한층 더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라고는 고작 친구들에게 보낸 제법 두툼한 세 통의 편지, 흔히들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일컫는 80개의 경구, 그리고 그의 저작들에서 뽑아낸 열두어 쪽 정도의 발췌문이 전부다. 이처럼 대대적으로 그의 저작을 없애버린 의도는 그의 스승인 데모크리토스의 저작을 파괴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인간 해방자는 로마 시대의 위대한 시인 루크데티우스라는 수호자를 통해 다시금 빛을 본다. 루크테티우스는 특히 제자인 에피쿠로스의 생각을 거의 왜곡하지 않고 충실하게 소개함으로써 두 사람의 명예를 바로 세워준다.

에피쿠로스를 그의 스승인 데모크리토스와 함께 인간해방자라고 부르고 있다. 왜 그럴까?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는 이 작가, 앙드레 보나르를 소개하는 출판사 책날개 저자소개에서는 그를 실천하는 인문주의자라고 했다. 그는 어떤 실천을 한 걸까? 50년대에 소련의 앞잡이로 몰려서 재판을 받았다고 했다. 그 당시는 냉전이 첨예하면서 매카시즘이 날렸댔지. 매카시즘 요 정도 단어를 들어본 기억만 살짝 나는 정도의 상식을 나는 가지고 있는 부류다. 마르크스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사회주의 실험을 했다. 인류는. 그 실험의 목적은 사람은 어떻게 행복해질건가? 라는 질문에 대한 그 당시, 또는 누군가의 대답을 증명하는 거다. 90년대 초에 커다란 변화가 있기 전 강하게 대립하던 그 때 살았다. 이 작가는.

 

553 동시대인들이나 다음 시대의 사람들에게 에쿠로스와 그의 가르침만큼 열광적인 옹호와 극단적인 반대를 동시에 불러일으킨 사람이나 교리는 없었다. 몇몇 사람들에게 에피쿠로스는 일종의 악마였다.

그는 인간들에게 가장 천박한 유물론, 즉 먹고 마시는 유물론을 제시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라는 용어만 놓고 보더라도, 프랑스어에서 이 용어는 그다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다. 향락주의자, 감각주의자, 또는 이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아예 난봉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54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자, 에피쿠로스는 몇 해 동안 가난 속에서 망명자 생활을 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직 어린 나이에 거의 독학으로 행복의 비결을 터득했으며, 스스로 이를 실천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했다. 그 후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으나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진 터라, 이미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성찰로 단단하게 무장하고 있었으며,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요컨대 그는 열아홉살이라는 나이에 벌써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 나이에 그는 벌써 환자이기도 했다. 편지에서도 드러나듯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감수성을 소유한 그였지만 그의 몸을 갉아먹는 위와 방광의 병,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아무런 치료도 기대할 수 없었던 그 질병이 주는 고통으로 심신을 단련시킨 그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 질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하루에 두번씩 토한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행복하기를 원했으며 그러므로 행복할 것이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몸으로 느끼는 통증과 불편함을 주는 병을 가지고 살았구나. 이 철학자는.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동반하게 될 이 동행을 공부(수련, 철학이름이 무엇이든)의 재료 또는 도반으로 삼았구나. 

 

555 12년 동안의 고독한 명상, 고통스러운 방광염, 12년 동안의 검소한 생활 끝에 에피쿠로스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오래도록 고통과 곤궁함 속에 머물렀지만 이와 동시에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이들을 사랑하며 진실 속에서 사는 인간의 심오한 기쁨도 맛보았다. 그는 바로 이 사실, 기쁨의 체험, 즉 자신의 몸이 매일 겪는 고통 속에서 소중하게 발견하는 기쁨을 토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윤리 체계를 구축했다.

 

557 특히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 기쁨을 극대화시키려는 열망으로 에피쿠로스는 죽은 자들에게 해마다 제물을 바치라고 가르쳤으며,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기회인 생일날을 기념하고, 매달 20일에는 향연을 베풀 것을 지시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즐기기 위해(요 말보다는 기쁨을 같이 누리기 위해가 더 낫네) 생일잔치를 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선물을 주고 받고, 1달에 1번은 노는 날을 지정 준수하라 한다. 고대 철학자의 큐에 귀기울려볼까나?

 

563 플라톤은 이러한 재앙의 시기가 막 시작되려고 할 때 활동했다. 그는 그의 눈앞에서 시작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커다란 재앙이 될 것임을 예상했으며, 그보다 후배인 에피쿠로스는 바로 그 재앙의 한 가운데에서 살았다.

플라톤은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불안감에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한편으로는 그는 인간의 영혼은 심판을 받고 난 다음 지상에서 베푼 정의에 의해 보상을 받는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희망을 내세로 이동시켰다. 이는 물론 불의에 대한 벌을 받지 않으며, 인간이 되었건, 짐승이 되었건, 지상에서 다시 살라는 분부를 받지 않은 영혼에만 해당되는 경우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다. 그가 두번째 대안, 즉 인간 사회의 개혁을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특히 그의 저서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상을 통해 그가 상상하는 개혁을 전개해나갔다.

플라톤 편이 아니라 에피쿠로스 편에서 간략하게 요약해주니 플라톤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플라톤 편에서는 이해를 다 못했었다.

 

564 에피쿠로스는 플라톤의 두 가지 대안 가운데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적 상황, 어느 때보다 가혹해진 그 상황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대답은 동시에 플라톤식 관념주의에 대한 그의 답변이기도 하다. 에피쿠로스는 플라톤의 관념주의가 몽상적이며 잘못된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사회의 개혁에 관해서라면 에피쿠로스는 때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565 에피쿠로스 철학의 위대한 점은 플라톤이나 그의 뒤를 이은 기독교처럼 하늘로의 도피를 제안하는 대신 지상에서 무언가 할 것을 제안했다는 데 있다.

 

565 그에게 철학은 지식인들의 유희나 교수들을 위한 사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열한 작업이었다. ‘철학을 하는 척해서는 안된다. 병이 들었을 때에는 건강을 되찾으려는 척을 해서는 안되며 실제로 건강을 되찾아야 한다.’ ..행복은 기다려주지 않는 시급한 요구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짧다. ‘우리들 각자는 이제 막 태어난 것 같다는 심정을 안고 삶과 작별한다.’ 에피쿠로스는 이 같은 다급함을 안고 성찰했으며 진리를 탐구했다.

이 말은 독화살의 비유와 비슷한 것 같다. 독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독의 재질이 무엇인지, 화살을 만든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말고 독화살을 뽑고 해독을 시키는 게 더 시급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 내가 접한 불교의 첫 성격이었다. 고통을 없애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 했지. 근데 그 이야기를 에피쿠로스도 한 거네. 똑 같은 말이네.

 

566 인간은 불행하다고 에피쿠로스는 단언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기쁨을 위해 태어났다. 에피쿠로스는 기쁨의 필요성, 기쁨의 소박함, 기쁨의 즉각성에 대한 뿌리깊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566 우리가 가진 으뜸가는 두려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566 죽음 다음 가는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의 공포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 신에 대한 공포가 있다. 인간은 신들이 높은 하늘에서 그들을 살피고 관찰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며 신의 지고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이를 우습게 여기는 인간에게는 벌을 내린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신탁을 경청하며 제사장들에게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하며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묻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에는 엄청난 부조리와 광기, 심지어 때로는 범죄까지도 판을 치게 된다. 신화의 전통에 따르자면, 종교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루어지는 범죄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전쟁이 더 잔인한 이유를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읽은 것 같은데 아리까리….@@ 상대를 악으로 생각하니 더 극단적일 수 있다.

 

568 에피쿠로스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그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그에 따르면 자신의 교리를 요약하는 편지)에서 분명히 말한다. “육체는 존재한다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감각이 그걸 증명하며 이성은 이 사실에 입각해서 가설을 내놓아야 할 걸세물론 에피쿠로스 자신도 이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는 아주 멋진 방식으로 이성을 활용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무에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파종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으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이 될 테니까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겠으면 감각을 관찰하는 것에서 출발하라고 그가 내게 말했다. 내 몸의 느낌을 들여다 보라고 했다. 그날 나는 감정은 읽지 못했지만 목이 떨리고 긴장되어 있다는 것,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걸 관찰했었다. 감각감정--감정의 기반이 되는 사고(습관) 이런 순서였던가?

 

570 에피쿠로스는 우선 자신의 눈으로 보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는 원자론을 제시한 대선배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물리학을 완성했다.

 

575 에피쿠로스는 문명이란 경험과 노동의 열매라고 말했다. “시간과 인간의 노력이 모든 발명품들을 생산하고 이것들을 광명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문명이란 다름이 아니라 신에게 호소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을 믿는 것이다. 특히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이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키고 미쳐 날뛰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 우리의 소박하지만 확실한 지혜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면 우주는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며 더 이상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는다.

그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남는다. 이 두려움은 신에 대한 두려움에 비해서 훨씬 절망적이면서도 부조리하다.

 

576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는 한 통의 편지에서 그는 결정적인 논리를 통해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님을 입증해 보인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현재가 될 수 없다네. 그리고 죽음이 닥쳤을 때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없거든그러니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죽음과 접촉할 여지가 없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 우리의 동요는 귀신을 상상하는 어린아이가 느끼는 공포만큼이나 어리석다. 일단 죽고 나면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심할 것이다.

그러네. 정말 단 한 순간도 죽음과 접촉할 기회가 없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두 살아있는 나의, 미래를 당겨 걱정하는 데서 나왔네.

576 물론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이르기 전에 겪을 수도 있는 신체적인 고통까지도 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고통이라면 우리는 충분히 견뎌낼 만한 용기와 존엄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그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신체적인 고통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중환자였던 그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으며, 신체적 고통이 그가 느끼는 평화와 행복을 망가뜨리지도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그의 삶으로 보여주니까. 이 말이 가장 무겁다. 맞다 맞다 정말로 맞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큰 웅변, 가르침이 무엇일까?

 

578 모든 선의 원칙과 뿌리는 복부의 쾌락에 있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는 에니어그램 장형이었나? 가슴형이면 가슴에 있다, 머리형이면 이성에 있다 이렇게 말할까? 이렇게 사람에 따라 다를 거라고 예측하는 게 일종의 사고습관일 듯. 개인화 테마?

 

579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커다란 기쁨, 커다란 쾌락을 경험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이때의 쾌락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하며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에 응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행복을 재화/욕망의 분수로 나타낼 때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들었다. 에피쿠로스는 재화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욕망의 정도를 필수적인 것으로 제한해놓고 있는 듯 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580 쾌락이란 자신의 욕구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이 욕구를 도저히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이를 제어하고 배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합당한 보상이다. 쾌락과 기쁨은 절제를 알고 온유와 용기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자들에게 보상을 내린다. 지나치게 방탕하고 타락했다는 비난을 받아온 이 교리에서 중심을 이루는 쾌락이라고 하는 개념은 사실 용기라고 하는 가장 고귀한 덕성의 소유를 전제로 한다. 용기는 흰 돛에 수놓은 붉은 줄처럼 그리스 민족에게서 태어난 첫째가는 덕목으로 그리스 역사 전체를 관류한다. 시간과 더불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크라테스 이후 용기는 현실 존중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토대를 둔 성찰하는 용기, 이성적인 용기로 변했다. …이러한 덕성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완벽한 평온을 보장해준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인간은 언제나 사는 것이 행복하다. ‘밥 한 술 뜨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등짝 눕히고 자는 것 이것이 에피쿠로스다. 그는 새벽이 되면 벌써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하고도 토론할 태세를 갖춘다.’고 한 고대인은 평했다. 이것이 적잖은 사람들이 방탕의 화신이라고 취급하고자 했던 자의 초상화다.      

용기가 절제의 의미다! 놀랍군

 

581 우정, 다시 말해서 필요한 것을 나누고, 소박한 쾌락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제한적인 지혜의 결실이다. 그런데 우정에 의해서 이 지혜는 더 이상 제한적이지 않게 된다. 지혜가 인간공동체 전체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의 우정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개념이다.

582 그는 말하자면 누구나 찾아와서 목을 축이고 가는 넉넉한 샘물이었던 것이다.

 

586 에피쿠로스적 우정은 남자와 여자의 화해를 유도하며 이들을 해방으로 이끄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이상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에피쿠로스에게 우정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이다.

 

590 말이 나온 김에, 다른 어느 것보다도 비장하며, 에피쿠로스주의가 루크레티우스 시절에 맞이하게 되는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에 주목해보자. 다름 아니라 스파르타쿠스를 도와 폭동을 일으켰다가 카푸아노에서 로마에 이르는 대로상에 늘어선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노예 6천 명의 이미지다.

연극 스파르타쿠스 가 이런 내용이겠구나. 폭동을 일으킨 6천명의 노예를 처형해서 십자가형에 처해둔 장면을 상상하면 띵하다.  

 

591 대관절 누가 노예들의 반란과 그 반란에 종지부를 찍은 끔찍한 진압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루크레티우스는 로마의 기사로 생각이 올곧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편협한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에피쿠로스주의자로서 사고했지만 그의 사고는 노예제도라는 썩은 뿌리를 버팀목 삼아 힘겹게 연명하고 있는 그래서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회,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는 한 노예제도를 제거할 수 없는 사회의 테두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그의 무신론을 저주했으나 저주만으로는 그를 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592 (디오게네스)가 제시하는 처방은 에피쿠로스가 제정했으며 그의 <중요한 가르침> 속에 수록되어 보존되고 있는 테트라파르마콘과 다르지 않다. 이 처방은 열 두 개의 그리스 단어로 요약되는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신들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행복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은 오랫동안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이나 무신론을 신앙의 가장 위험한 적, 영적 지배를 위해 함락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해왔다.

신들과 죽음으로 모든 걸 미루거나 핑계대지 않고 행복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행복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뜻을 이어받고 있다고 보는건가?

 

594 크고 작은 혁명들이 우리가 사는 우주를 전복시킨다혁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으며 때로는 이 흐름을 가속화한다. 새로운 계급, 새로운 민족, 계급없는 민족들이 이 세계를 관통한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유산은 그들의 것이다. 그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몽테뉴는 에키쿠로스에게서 잊고 있던 조상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그와 한 가족이 되었고, 그의 생각을 이어받았다. 가우디, 자유사상가들이 몽테뉴의 뒤를 이었고, 백과사전파가 에피쿠로스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인정했다. 헬레티우스는 행복에 대한 장문의 시를 썼고 <쾌락 예찬>이라는 글도 남겼다. 아나톨 프랑스, 앙드레 지드 등도 그에게 동조한다카를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를 인간 해방자들 중 한 명으로 예우한다.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는가? 인류는 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는가?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IP *.114.49.16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