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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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수술이요?”
화상을 입은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발바닥의 피부를 옮겨야 한답니다. 덤덤히 작은 수술이라고 말하는 의사선생님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상처가 생각보다 심하다며 큰 병원을 가보라 해서 왔지만 수술이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14개월짜리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커다란 병원 침대에 혼자 뉘여 수술실로 들어보냈습니다.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입니다. 마취 가스에 제대로 된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아이를 안아줄 수도 없습니다. 작은 아이 몸에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거든요. 조심하지 못하는 아이는 손의 붕대를 늘 풀어내지만 붕대를 감아주는 의사를 그저 바라봅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던 아이를 관장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저 금방 끝날거라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널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던 엄마는 점점 작아집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지요. 아이를 먹게 할 수도 없고, 붕대를 풀지 못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안아주고 달래주는 것 뿐이었지요.
다른 사람이 아픈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사랑만 있습니다. 사랑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느 것 하나 도움이 되지 않지요. 때 되면 배고파지는 내가 싫어집니다. 아이가 화상을 입게 만든 나의 부주의가 못 견뎌집니다. 다쳐서 힘든 아이 앞에 멀쩡한 내가 미안해집니다.
김애란님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아름은 조로증입니다. 아름에게는 시간이 빨리 흐르지요. 하루가 다른 이들의 3~4일쯤 되나 봅니다. 아름은 말합니다.
“아플 때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철저하게 혼자라는. 고통은 사랑만큼 쉽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더욱이 그게 육체적 고통이라면 그런 것 같아요.”
아름의 말에 공감합니다. 상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게 어떤 고통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지도 모릅니다. 그 고통 앞에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아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기띠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를 안고 병원 모험을 얼마나 다녔던지요. 소아과에 가서 또래 아이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바깥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했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안고 동요를 부르며 깜깜한 병동을 도는 것은 매일의 일과였지요. 한 시간쯤 지나 잠든 아이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엄마였지요.
아름은 한 소녀에게서 메일을 받습니다. 소녀는 아름에게 힘이 되어줍니다. 아름은 처음으로 비밀을 공유하고, 마음의 설렘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메일의 주인공은 열일곱 소녀가 아닌 서른여섯 아저씨였지요. 앞을 못 보게 된 아름 앞에 찾아온 아저씨에게 아름은 말합니다.
“우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 직접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만날 수 없을 테지? 하지만 너와 나눈 편지 속에서, 네가 하는 말과 내가 했던 얘기 속에서, 나는 너를 봤어. 그리고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그 자리에 있어주었던 것 고마워.”
아름은 서른여섯의 아저씨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일곱의 서하에게 말을 합니다.
삶의 힘든 장면에서는 혼자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누구도 나와 대등한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을 보는 마음은 쉽지 않습니다. 이해해준다고 하기에는 이기적이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는 무능력하지요. 문득 생각해 봅니다. 모두가 해결책을 바라는 걸까요? 물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이는 매력적인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우리가 쓸모없는 사람인 걸까요? 그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우리가?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이의 아픔을 백퍼센트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오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옆에 있는 우리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아픔으로 악악 거리며 울어대는 하니의 옆에서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아무것도 못해주는 나를 질타했지만 그게 내가 없어도 되는 이유는 아닙니다.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존재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픔의 긴 터널을 지날 때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기만 하는 귀찮은 존재에게도 사람은 위안을 느낍니다. 아름 역시 소녀에게 위안을 느꼈던건 아닐까요.
아픈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애정이 없다면 옆에 있어줄 수조차 없습니다. 나의 시간을 쪼개어 혹은 나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 아픔이 있는 사람의 옆에 있어주세요. 지금은 비록 그가 아픔에 가리어 나의 노력을 몰라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고 하여 내가 쓸모 없는 존재는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이건 마음의 상처건 극복해야 하는 건 당사자입니다. 다음날 아침 씻은 듯 낫게 해줄 수 있는 건 신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할 수 없는 건 제쳐두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메달려야 합니다. 하니의 발바닥을 빨리 아물게 할 수는 없지만 발이 되어 나들이를 갈 수 있습니다. 아픔에 칭얼대는 아이를 품에 품어 줄 수 있습니다. 눈이 동그란 아이를 위해 한 시간 동안이라도 자장가를 불러 줄 수 있습니다. 회복속도를 빠르게 하지도 못하고 아픔을 덜어줄 수도 없지만 그 시간을 함께 해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면 노래라도 불러주세요. 아주 어린 날 엄마가 우리를 펑온히 잠재우기 위해서 불러주었던 자장가라도. 그렇게 나의 온기를 전해주세요. 넌 지금 힘들지만 나는 너에 곁에 있을 거라는 말을 소곤거려 주세요. 아픔에 발버둥치는 사람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세요.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커다란 것을 해주는 것이지요. 그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해줄 수 없는 아픈 그의 곁에 있어주는 대단함.
지금도 아프고 힘들어 하는 이를 위해 현실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자책은 그만 두세요. 대신 온 마음을 다해 그 사람을 안으세요. 상대의 아픔에 아파하고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을 기뻐해 주세요. 그것이 우리가 상대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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