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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7일 05시 54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윌 듀런트

 

부모     퀘백 출신의 이민자 가족

출생     1885 11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 애덤스

교육     노스 애덤스와 뉴저지 주 커니의 가톨릭 부설 학교

           저지 시의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 뉴욕 컬럼비아 대학

직업     세튼홀 칼리지(신학교)에서 교사 생활 -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

           페레르 학교로 자리를 옮김

결혼     페레르 학교에서 만난 13살 연하 제자(당시 15), 카우프만과 결혼. 결혼 위해 교직사임.

           사임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1914~1927 : 장로교회에서 역사, 문학, 철학 강의함.

           이 때의 강의 내용이 훗날, "문명 이야기"의 초석이 되었다.

이후     4년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 박사 학위 취득 1917

           동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침

저술     1926'철학 이야기'의 성공 : 내용은, 철학은 성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철학이 사회의

           진짜 문제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à 처음에 little blue book 시리즈로 출판되었으나

           하도 인기가 많아져서 하드 커버로 재출판되었다. 이 책으로 생계 문제가 해결된 듀런트

           는 교직을 떠났다. 이후 부부가 함께 '문명 이야기'의 저술을 위해 인생을 바치게 되었다.

 

1930  이집트, 근동, 인도, 중국, 일본 등지 탐방

1932  일본,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폴란드 탐방

1935 문명 이야기 시리즈 제1 '동양 문명'(1935) 출간

1939'그리스 문명'

1944  '카이사르와 그리스도'

1948년 터키, 이라크, 이란, 이집트, 유럽 탐방

1950  문명 이야기 시리즈 제4 '신앙의 시대' 출간

1953 문명 이야기 시리즈 제5 '르네상스'

1954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국에 대한 추가 연구

1957  문명 이야기 시리즈 제6 '종교 개혁'

1961  문명 이야기 시리즈 제7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 - 듀런트 여사 공저

1965'루이 14세의 시대'(1963) '볼테르의 시대', '루소와 혁명'

1975년 문명 이야기 시리즈 제11 '나폴레옹의 시대' - 마지막

 

그리하여 총 45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사망     부인 - 에어리얼 듀런트 1981 10 25(83)

           윌 듀런트 - 1981 11 7(96)

 

평가     윌 듀런트는 자신의 어린 제자와 도덕성을 아슬하게 넘나드는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생계

           수단을 포기해야 했다(교사 자격). 그 덕분에 생계를 위해 교회에서 작은 강의 자리를 얻

           어야 했는데 학교보다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강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

           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된 듀런트는 첫 책의 성공으로 드디어 밥벌이에서 벗어나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게 된다. 자기 마음속의 목소리에 충실하면, 자신이 살고

           자 하는 방향으로 길이 열리는 모양이다.

 

평가     부인과 동반자적 관계에 있었다. 보기 드문 훈훈한 케이스. 그러나 미성년자였던 에어리

           얼 듀런트에게 강요된 삶의 취향은 아니었을까?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편을 어쩔

           수 없이 돕고 있는 어린 부인의 이미지가 지워지지를 않네. 결과적으로는 좋아 보인다.

 

평가     퓰리처상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윌 듀런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문명을

           제대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매우 쉽게 문명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공부를 해보면 원서들을 잘 정리해둔 정리본만 봐도 그가 정녕 천재라고 생각된다.

           어렵고 복잡한 사실을 정리하여 쉽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두 배로 어려운 일이다.

 

 

 

 

 

문명 이야기

The story of civilization

 

6

우리 채은 르네상스 시대, 1304년 페트라르카의 탄생부터 1576년 티찌아노의 죽음까지의 기간에 이탈리아에서의 삶의 모든 국면을 전체적으로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 이 책에서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오로지 이탈리아에 국한한다.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1304~1375

 

1.르네상스의 아버지

 

49 그들은 배를 타고 제노바 해안을 지나쳤다.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리비에라 해안의 장관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산등성이로 왕관처럼 펼쳐진 마을은 경사로를 따라 푸른 바다와 연결되었다. 젊은 시인은 이것이 "지상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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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는 그에게 분명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볼로냐는 학생들의 장난기와 배움의 질서와 독립적인 사상의 흥분으로 넘치는 대학 도시였다. 14세기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인간해부학 강의가 있었다. 그리고 여자 교수들도 있었다.

 

50

페트라르카는 볼로냐의 정신은 좋아했지만 법의 문자는 싫어했다. …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신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등을 찾아낼 수 있는대로 찾아내 모조리 읽엇다. 그들은 그에게 철학과 문학 양쪽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엇다. 그는 그들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처럼 글을 쓸 것을 갈망했다. 부모가 죽자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아비뇽으로 돌아와 고전문학 및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327년 수난의 금요일에 한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사랑을 거부한 일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를 자기 시대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열광적으로 자세히 묘사했지만 그녀의 신원의 비밀만은 감쪽같이 감추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뮤즈가 그의 창조물이라고 여겼다.(그러면서 그의 모든 정열이 문학의 특권이라 여겼다.)

라우라. 로라 드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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è 왜 페트라르카는 단테와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을까?

 

55 여행할 때는 고전 텍스트들이 "아라비아이나 중국 상인들이 제공하는 어떤 물건보다도 더 값진 상품"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을 찾고 사들였다.

 

2.나폴리와 보카치오

 

57 나폴리에서 삶은 즐겁고 도덕은 편안하게 느슨했다. 여자들은 아름답고 접근이 쉬웠다. 시인들은 이런 사랑의 분위기에서 시를 위한 많은 주제와 자극을 찾아냈다. 이런 나폴리에서 보카치오는 성숙했다.

è 좋겠다.

 

58 페트라르카가 법을 싫어했듯이 그(보카치오)는 상업을 싫어했다. 빈곤과 시를 선택하면서 오비디우스에게 마음을 뺏겨 버렸다.

è 빈곤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수단을 일부러 선택하지 않았다. 빈곤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개념은 정말 매력적이다.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 삶을 돈에 묶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3. 계관 시인

 

62 페트라르카 - 말년에 그는 젊어 한때 치장과 의상에 그토록 신경 쓰고, 머리를 곱슬거리게 만들고 유행하는 신발에 발을 억지로 밀어 넣었던 일을 자조했다. … 명성을 갈망하고 문학적 '불멸'을 원했다. … 그는 (비록 부인하기는 하지만) 단테의 인기를 보고 어느 정도 속을 태웠다.

 

64 에피쿠로스의 이름이 무신론자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던 시대에 에피쿠로스를 찬양한다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4.리엔쪼의 혁명

 

71 리앤쪼가 아비뇽으로 호송되는 도중 어디서나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려고 떼로 몰려들었다. 용감한 기사들은 그를 보호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1352 8 10일에 그는 모든 사람이 불쌍히 여길만큼 비참한 몰골로 아비뇽에 도착했다. 그는 보클뤼즈에 있던 페트라르카를 청했다. 시인은 로마 사람들을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했던 사람을 보호하라는 낭랑한 호소문을 쓰는 것으로 답했다.

 

…. 그는 자유를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옹호한 탓으로 고발당했다. 그는 수도를 넘겨준 것이 아니라 지킨 탓으로 유죄이다. 그가 지금 고발당하여 교수대에서 속죄를 해야 할 최고의 범죄란, 로마 제국이 아직 로마에, 그것도 로마 시민들의 소유로 남아 있다고 감히 선언했다는 사실 뿐이다.

 

è 정치범의 탄압에 대한 시민의 투쟁. 르네상스 시대의 예. 리앤쪼와 페트라르카.

 

73 그러나 감옥 생활이 몸을 살찌게 하고 용기는 개뜨리고 한때 빛나고 겁 없던 호민관의 정신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의 정책들은 교황당 노선을 고집하고 젊은 시절의 대담한 용기는 없어졌다. 귀족들은 아직도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재산이 없는 계층은 그가 이제 유토피아에서 치유된 조심스러운 보수주의자인 것을 알자 그에게 등을 돌렸다 권력에 돌아온 지 겨우 두 달 만에 혁명적인 폭도들이 카피톨리니 언덕으로 몰려들어 외쳤다. "인민 만세! 배신자 콜라 디 리엔쪼를 죽여라!"

 

5. 떠돌이 학자

 

74 리엔쪼는 고대 로마를 부활시키는 데 실패했다. 고대 로마는 문학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죽었다. 페트라르카는 결코 죽지 않은 로마 문학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76 페트라르카는 자신보다 이전의 인문주의자였던 알베르티노 무싸토가 세네카 형식을 빌린 라틴어 희곡 [에쩰리노 이야기]를 슨 덕분에 1314년 파도바의 계관 시인이 된 것을 보고 분명 자극을 받았다.

 

페트라르카는 파도바 대학의 교수들 중 일부가 솔직하게 '아베로에스주의'를 펼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베로에스는 개인 영혼의 불멸성에 의문을 던지고, 그리스도교를 쓸모 있는 미신으로 여기고 교육받은 사람은 그것을 버린다고 말했다.

 

6. 죠토

 

79 파도바로 옮긴 죠토는 3년 동안 아레나 예배당의 유명한 벽화를 그렸다. 아마도 파도바에서 그는 단테를 만났을 것이다. 이미 피렌쩨에서 그를 알았던 것 같다. 항상 재미있고 이따금 날카로운 바사리는 단테가 죠토의 "가까운 동료이며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피렌쩨의 행정관 궁전 벽화에 있는 단테의 초상화를 죠토가 그렸다고 말한다. 시인은 [신곡]에서 예외적인 상냥함으로 이 화가를 찬양하고 있다.

 

80 치마부에와 죠토의 것으로 알려진 그림들을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는 성인을 기리거나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만큼이나 많다.

 

80 죠토의 도안, 입체감, 원근법, 해부학 지식 등은 고콩스렁루 정도로 적절하지 못하다. 죠토 시대 의학이 그렇듯이 미술은 막 인체를 해부하고 근육, , 인대, 신경의 위치, 구조, 기능 등을 배우기 시작하던 때였다. 만테냐와 마사쵸 같은 사람들은 이런 요소들의 대가가 되고, 미켈란 젤로는 그것을 완성해서 거의 맹목적 숭배물로 만들다시피 했다.

 

7. 열흘 이야기 (데카메론)

 

84 이탈리나 문학이 최초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룩한 곳은 피렌쩨였다. 그곳에서 귀니첼리와 카발칸티가 13세 말에 소네트의 완성된 형태를 만들었다. 그곳은 아니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단테는 이탈리아 서사 문학의 최초이자 최후의 진정한 음악을 피렌쩨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보카치오는 이탈리아 산문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고, 죠반니 빌라니는 가장 현대적인 중세 연대기를 썼다.

 

86 양심이 그녀(심리 소설인 [피암메타]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공주)가 정절을 지키지 않았음을 구짖자 그녀는 아프로디테 여신이 나타나 자신을 비겁하다고 야단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렇게 겁먹지 마라. '나는 남편이 있는데, 거룩한 하늘의 법 앞에 약속한 것이 내게 이런 일들을 금지하고 있는데…..'하고 말하지 마라. 이런 것은 공허하게 뽐내는 일이며 에로스의 힘에 맞서 천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하고 힘찬 왕자처럼 에로스는 자신의 영원한 법을 심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왕국의 다른 법에 대해 신경 쓰지 마라, 그는 그런 법들을 기본적이고 노예적인 규칙이라 여긴다."

 

1348년 흑사병이 돌기 시작한 직후 보카치오는 이 유명하고 매혹적인 연속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서른다섯 살이었다. 욕망의 열기는 시에서 산문으로 넘어갔다. 그는 미칠 듯이 사랑에 빠지는 일을 유머를 지니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피암메타도 흑사병으로 죽었다. 보카치오는 천연덕스럽게도 공을 가장 적게 들인 이야기 하나에 그 이름을 이용했다.

è 보카치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독특하다.

è 흑사병으로 생사가 오고 가는 상황에서 사랑은 유머가 되나? 이건 초월적 관점인가?

è 죽음이 닥치면 생을 확인하기 위해서 섹스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아내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남편, 산장에서 시체를 발견한 두 남녀가 시체 옆에서 섹스를 하는 영화, 그리고 흑사병이 도는 피렌체에서 데카메론을 쓰는 보카치오. 보카치오는 생의 확인을 위해 성적 표현에 탐닉했던 것일까? 아니면 죽음 앞에서 거칠 것 없어진 의지는 자연히 성으로 귀결되는가? 모든 억압을 뚫고? 마지막에는 성인가?

 

87 흑사병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폐를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고열에 시달리다가 피를 토하고 보통 사흘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는 임파선을 통한 전염으로 열이 나고 종기와 등창이 일어났다가 보통 닷새 만에 죽었다. 이 질병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면서 1348년에서 1365년 사이에 이탈리아 인구의 절반 가량이 죽었다. 시에나의 연대기 기록자는 1354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친척도 친구도 수도사도 수도원장도 시체를 따라 묘지로 가지 않으며 관청도 죽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다. …… 도시의 많은 곳에 매우 넓고 깊은 구덩이를 파 이곳에 시체들을 던져 넣고 흙을 조금 덮었다. 구덩이가 가득 메워질 때까지 이렇게 켜를 이루며 계속 되었다. 그러고 나면 또 다른 구덩이를 팠다. 나 이뇰로 디 투라는 …… 내 손으로 다섯 아이를 한 구덩이에 파묻었다. 시체들은 하도 얕게 덮여서 개들이 파내 시체를 먹고 도시 사방으로 시체의 팔다리를 흩어 버렸다. 벨도 울리지 않고 아무도 그 무엇을 잃어도 울지 않았다. 거의 누구나 다 죽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이것은 세계의 종말"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믿었다.

 

93 [열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그런 명성을 얻은 것은 기법보다 오히려 그 도덕성에 힘입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덕성이 완전히 순결한 것이었다 해도 분명 보존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구성이 완벽하다. … 이 작품의 산문은 이탈리아 문학이 다시는 능가하지 못한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이따금 미사여구를 포함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리에서 능변이고 생생하고 예리하며 생명에 넘치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처럼 맑다. 이것은 삶에의 사랑에서 나온 책이다. 천 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생긴 최악의 재앙 속에서 보카치오는 그 생명력으로 아름다움, 유머, 선량함, 즐거움 등이 아직도 지상을 산책하고 있음을 볼 용기를 찾아냈다. 한스 작스, 레싱, 몰리엘, 라퐁텐, 초서, 셰익스피어 등은 이 책을 읽고 경탄했다. 페트라르카 시문학 전부가 찬양받으면서 읽히지 않는 구역으로 들어간 데 반해 이 작품은 앞으로도 여전히 읽힐 것이다.

è 그 차이는 삶에의 사랑.***************

나도 삶에의 사랑으로 충만한 글을 쓰자.

 

8.시에나

 

96 [죽음의 승리]

잘 차려 입은 귀족들과 귀부인들로 이루어진 사냥 일행이 세 개의 열린 관에 이른다. 관 안에는 왕족의 시체가 썩어 가고 있다. 사냥꾼 한 명은 이 냄새에 질려 코를 막고 있다. 이 장면 위로 커다란 낫을 휘두르며 죽음의 천사가 날아간다. 공중에서는 은총의 천사들이 구원받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데려가고, 그 사이에 날개 달린 악령들이 죽은 사람 대부분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뱀들과 검은 수리들이 남자와 여자들의 벌거벗은 신체를 감고 그것을 먹고 있다. 아래쪽에서는 왕들과 여왕들, 왕자들, 주교들, 추기경들이 저주받은 자들의 구덩이 안에서 몸부림 친다. 이웃한 벽에는 동일한 화가들이 또 다른 거대한 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그려 놓았다. 오른편에는 또다른 지옥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중세 신학의 온갖 끔찍함이 여기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단테의 [지옥]이 여기서 동정심도 절제도 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9. 밀라노

 

99 결혼식 잔치의 남은 음식으로 1만 명의 남자를 먹일 수 있었다고 한다. 14세기 이탈리아는 이토록 부유했다. 같은 시기에 백 년 전쟁을 벌였던 영국은 파산 상태에 이르고, 프랑스는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을 때였다.

 

10. 베네찌아와 제노바

 

100 1339년에 시모네 보카네라는 선원들과 다른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혁명에 성공하고 제노바 총독이 되었다. 이런 총독 통치 방식은 제노바에서 1797년까지 계속되었다. 베르디는 한 오페라에서 이것을 기념했다.

è 베르디 탄생. 북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1813년에 태어남. 19세기 인물인데.

 

11. 14세기(트레첸토)의 황혼

 

105 보카치오는 젊은 날 [열흘 이야기]나 그 밖의 감각적인 시들을 썼던 것을 후회했다. 1361년에 죽어 가는 수도사 한 사람이 그에게 악한 삶과 쾌락적인 이야기들을 쓴 것을 책망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그가 고치기를 미루면 빠른 죽음과 지옥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을 맛볼 것이라고 예언했다.  …… 그는 이제 정통 그리스도교로 마음을 돌리고 책을 팔아 버리고 수도사가 될 생각을 했다. 페트라르카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중용의 길을 선택하라고 간청했다. 사랑의 시들과 단편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라틴과 그리스 고전을 진지하게 탐구하라고 권한 것이다.

è 권위자의 충고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응당 옳은 것이라고 여길만한 조언 역시 고차원의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충고일 수 있다. 페트라르카의 말을 들은 것은 실수였다.

 

12. 조망

 

108 게르만 종족의 침입으로 중앙 정부가 붕괴된 일, 6세기의 이른바 '고딕 전쟁', 이탈리아 대륙에서 룸바르디아와 비잔틴으로 나뉜 것, 교황과 황제의 대립, 그리고 알프스에서 시칠리아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세속적 권력이 나타나 교황을 포로로 만들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교황의 두려움, 즉 유럽의 영적 수뇌가 한 국가의 정치 지도자에게 복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져 이탈리아의 비통일을 만들어 냈다. 교황과 황제파는 이탈리아 전체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도시를 교호아당과 황제당으로 갈라놓았다. 이 갈등이 가라앉았을 때도 이 낡은 표현법은 새로운 갈등과 대립을 위해 이용되었으며, 미움의 용암이 삶의 모든 길로 넘쳐흘렀다. 황제당원들이 모자의 한편에 깃털을 꽂으면, 교황당원들은 다른 편에 깃털ㅇ르 꽂았다. 황제당원이 과일을 가로로 자르면 교황당원들은 세로로 잘랐다. 황제당원들이 흰 장미를 달면 교황당원들은 붉은 장미를 달았다. 크레마에서 밀라노의 황제당원들은 교회 제단에서 그리스도 조각상을 부수어 불태웠다. 이 조각상의 얼굴이 교황당원 방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당인 베르가모에서 몇몇 칼라브리아 사람들이 주막집 주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들이 마늘을 먹는 방식으로 교황당원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소심한 허약함, 집단의 불안정, 지배층의 미망 등이 다른 것과 낯선 것에 대한 항구적인 두려움, 의심, 혐오, 저주 등을 만들어 냈다.

è 마늘 먹는 방식에 대한 서술에 사용 가능.

è 미신적인 증오의 대립 구도. 늘 끊이질 않는다.

 

통일을 방해하는 이런 요소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들의 도시 입장에서 생각을 했다. 마키아벨리 같은 소수의 철학자나 페트라르카 같은 시인만이 이탈리아를 하나의 전체로 생각할 줄 알았다.

 

110 페트라르카가 성공했다면 아마도 르네상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분열이 르네상스에는 이로웠다. 큰 국가들은 자유와 예술보다는 질서와 권력을 키운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사업적 경쟁은 십자군 전쟁을 도입하고 완성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경제와 복지를 발전시켰다. 정치적 중심부가 여럿이기에 도시 국가간 싸움이 많았지만 이런 온건한 갈등은 백 년 전쟁에 의해 프랑스에 생겨난 것 같은 완전한 죽음과 파괴에는 이른 적이 없었다. 각 지역의 독립은 이탈리아가 외국의 침입에 대해 방어할 능력을 약화시켰지만, 도시들과 통치자들이 문화적 후원을 놓고 고귀한 경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건축, 조각, 회화, 교육, 학문, 시문학 등에서 서로를 능가하려는 열성을 지녔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는 괴테 시대 도이칠란트처럼 수많은 파리(Paris)가 있었다.

è 중국이 정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성장률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경제 시장에서 무한 경쟁을 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개방해서 경쟁사를 무한 경쟁 시키는 것.

 

111 그러나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탈리아의 절정을 위해 고대가 기여한 바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일은 잘못일 것이다. 르네상스는 혁명이기보다는 완성이었고, 중세의 성숙이 고대 사본과 예술의 발견보다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중세의 많은 학자들이 세속적인 고적 작품들을 알았고 사랑했다.

 

112 이렇게 해서 르네승사의 모든 기반은 페트라르카가 사망할 무렵에는 이미 오나비되었다. 이탈리아 무역과 산업의 경이로운 성장과 열성은 르네상스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부를 모아들였다.

 

2장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1. 바빌론 포로

 

122 "내가 교황청의 교회 기구들 안으로 들어갈 대마다 나는 중개자와 서기들이 자기들 앞에 쌓아 놓은 돈의 무게를 달고 그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늑대들이 교회의 통제 아래서 그리스도교 양 떼의 피를 마시고 있다."

 

124 페트라르카는 교황들에게 로마로 돌아갈 것을 그토록 간청했지만, 빈곤이 순결에 도움을 주었던 경우만 빼고는 로마의 도덕성도 아비뇽의 그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è 표현이 특이하다.

 

126 종교 개혁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바로 아비뇽 교황들의 바빌론 포로 시대와 뒤이어 나타나는 교황 분열 사건이었다. 그리고 교황청이 이탈리아로 돌아온 일은 교황의 위신을 회복시키고 파국을 100년 연기했다.

 

2. 로마로 가는 길

 

 

129 페루지아에서 교황 대리인의 조카 한 사람이 유부녀에게 지나치게 집착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도망치려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민 대표단이 조카에게 벌을 줄 것을 요구하자 교황 대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체 왜 이런 소동인가? 당신들은 프랑스 사람이 환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그 의미가 대단히 여러 가지로 해석되면서 교황의 사절들이 어찌나 미움을 샀던지 1375년에는 많은 국가에서 그들에 반대하여 연속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131 카타리나 - 당신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해야 할 일은 교회의 진자 보물인 양 떼를 모두 되찾는 일입니다. 양 떼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정말로 가난해질 것이니까요. …… 당신은 선의와 사랑과 평화의 무기로 사람들을 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전쟁의 무기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 또 온 세계를 위해 무엇이 가장 좋은지 제가 하느님께 물어보니 오로지 평화! 평화! 라는 답변ㅇ르 받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아 못 박힌 구세주를 위해 평화를!

 

1`35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해악은 인간의 허약함의 결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피렌쩨의 르네상스 1378 - 1534

 

3장 메디치 가문의 떠오름 1378~1464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가오는 이 시대를 '리나시타(la Rinascita)' 곧 재탄생이라 불렀다. 그들에게 이것은 천 년 동안이나 야만적인 중단이 있은 다음 고전 정신이 다시 부활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전 시대가 3,4,5세기에 게르만족과 훈족이 침입하면서 끝났다고 느꼈다. 고트족의 무거운 손길은, 시들어 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로마의 예술과 생명의 꽃을 부수어 버렸다. 위험할 정도로 불안정하고 장식적으로 기묘한 건축물과 조잡하고 거칠면서 게다가 어두운 예언자들과 메말느 성인들을 표현해서 울적한 조각품을 지닌 '고트족의(=고틱=고딕)' 예술이 또 다른 침입을 했다.

142 돈은 문명의 뿔이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기금과 교회의 기금이 필사본들을 사들일 돈을 지불했고, 이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중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리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교회의 교리를 의심하고 지옥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여자와 남자, 예술에 드러난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 (1434~1543) 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파괴적인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계울,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146 1300년에 페데리고 오리첼라리는 이끼에서 자주색 염료를 추출하는 비밀을 동양에서 가져온 덕분에 이런 성을 얻었다.(오르첼라 = 자주색 염료). 이 기술은 염색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고, 일부 모직 제조업자들을 오늘날 용어로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150 메디치 집안은 코시모의 고조할아버지인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가 대담한 상업과 현명한 재정 운영을 통해 집안의 재산을 모았고, 1314년에 정의의 수호자로 뽑혔다. 아베라르도의 조카손자인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는 1378년에 정의의 수호자였는데, 폭동을 일으킨 가난한 사람들의 생각을 옹호해서 가문의 인기에 토대를 마련했다. 살베스트로의 조카손자인 죠만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1421년에 정의의 수호자였는데, 1년 세금으로 소득 1퍼센트의 2분의 1을 징수할 것을 옹호함으로써 (그 자신은 그로 인해 심한 손실을 입을 것에도 불구하고 ) 집안의 인기를 더욱 높였다. 이것은 한 사람이 지닌 자본금의 7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이전에는 인두세를 매겼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과 똑 같은 액수의 세금만 내던 부자들은 메디치 집안에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153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가 그에게 상당한 액수의 대부를 요청했을 때 코시모는 에드워드 34세가 돈을 갚지 않을 것을 개의치 않고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왕은 화폐와 정치적 후원으로 그의 너그러움에 보답했다.

 

154 코시모가 부와 권력에 못지않게 문학, 학문, 철학, 예술 등을 보살핀 일은 이ㅏㅌㄹ리아와 인류에 커다란 행운이었다.

 

159 그러나 이탈리아가 점점 더 자신의 고전 전통을 회복하면서 고대 로마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그리스에 대한 경탄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라틴어를 살아있는 문학의 매체로 되살려냈다. … 그러나 그들은 [신곡] [노래 책[의 언어를 타락하고 망가진 라틴어라(거의 맞는 말이긴 하다) 여기고 단테가 이탈리아어를 선택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 결과 인문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문학의 원천과의 접촉을 잃었다.

è 예전에 이만방 선생님이 모차르트 역시 세속의 음악을 했기 때문에 당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는 의미의 강연을 했었는데 그 내용과 상통한다.

 

162 그는 자신의 책들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했고, 피렌쩨 젊은이들에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버리고 문학에 헌신하라고 가르쳤다. 부잣집 젊은이가 게으름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니콜리는 그에게 물었다. "삶에서의 목표가 무엇인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죠."하고 젊은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청춘이 지나고 나면 어떤 결과를 얻을 것 같은가?" 이 청년은 핵심을 파악하고 니콜리의 지도를 받았다.

 

169 위로 뻗어 올라간 아치와 높이 치솟은 둥근 천장을 지닌 고딕 양식은 고통스러운 지상에서부터 위로 치솟아 하늘을 향하는 섬세한 정신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유함과 편안함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했다. 삶에서 도망치거나 그것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지상은 천국이 되고 그들 자신이 신들이 되고 싶었다.

 

175 당신은 무한을 얻기 위해 애쓰고 나는 유한한 것을 위해 애쓴다. 당신은 당신의 사다리를 공중에 세우려 하고 나는 내 사다리를 지상에 세운다. …… 나로서는 내 집안의 명예와 명성이 당신 집안의 그것을 능가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마리의 커다란 개처럼 행동하기로 하자. 서로 만나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제각기 이빨을 드러내 보이고는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에 열중하고 나는 내 일에 열중하는 것이다.

 

178 폭군을 살해하려는 젊은 여인은 옷 주름에 파묻혀 있고, 적절하지 못한 평온함으로 살인을 감행하려 한다.

è 적절하지 못한 평온함.

 

184 14세기 아틸리아에서는 회화가 조각을 지배했다. 15세기에는 조각이 회화를 지배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다시 주도권을 차지한다. 아마도 죠토의 천재성이 14세기에, 도나텔로의 천재성이 15세기에,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와 티찌아노의 천재성이 16세기에 나타난 것이 이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천재는 시대 정신의 원인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192 엘 그레코를 제외하고 어떤 화가도 프라 안젤리코처럼 그렇게 독특한 자기만의 양식을 askask sos 사람은 없다. 풋내기라도 그의 손길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선과 형태의 단순함으 죠토로 되돌아간다. 폭이 좁지만 가벼운 색채 조합(금색, 주홍, 진홍, 파랑, 초록(은 밝은 영혼과 행복한 신앙을 반영한다. 인물들은 거의 해부학적 터치가 없을 정도로 너무 단순하게 표현된다.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고 너무 창백해서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수도사나 천사나 성인이나 모두가 거의 비슷하다. 거의 낙원의 꽃들과 같은 모습이다. 이 모든 모습은 온화한 헌신, 기분과 생각의 순수함을 지닌 이상적인 정신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이러한 이상적 정신은 중세의 가장 섬세한 순간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르네상스에 의해서는 두 번 다시 포착되지 않았다. 이것은 미술에 나타난 중세 정신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194 이 시간 이후로 코시모는 그를 가두었던 일을 후회하면서 그에게 원하는 대로 드나들 자유를 주었다. …… 그의 말대로 천재들이란 하늘의 형식이지 노새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그 이후로 그는 사랑으로 필리포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에게서 더욱 많은 헌신을 얻을 수 있었다.

è 천재를 남자로 바꾸어 보면?

 

195 성적인 문란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어쩌면 바로 여자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 때문인지 필리포의 가장 섬세한 그림들은 성모 그림이다.

 

197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하고, 그런 일에 명예와 실체를 제공할만큼 지혜롭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자극해 주는 주민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아야 한다.

 

199 (알베르티)는 그림을 그린 다음 아이들을 불러서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답을 잘 못하면 그림이 실패한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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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황금시대 1464~1492

 

203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 "자신들의 목적에 우아한 구실을 주기 위해 자유의 이름"을 빌려 혁명을 선포했다.

 

208 대성당에서 이런 의식이 벌어지느 ㄴ동안 살비아티 대주교, 야코포 데 파찌, 그리고 100명의 무장한 추종자들이 베키오 궁전으로 갔다. 그들은 "국민! 자유!"를 외쳐서 자기들의 목적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서 국민들은 메디치 편을 들엇다. 그들은 "공 만세"를 외쳤다.

 

214 로렌쪼가 직접 지은 시

 

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러나 쉽게 날아가 버리네

젊은이들과 아가씨들아, 지금 즐겨라

내일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니.

 

 

젊은 숙녀들과 젊은 연인들아!

바쿠스 만세, 욕망 만세!

춤추고 놀자, 노래를 부르자

달콤한 사랑이 네 가슴에 타올라라.

 

220 뒷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글로서 인문주의자들이 (대부분의 중세의 견해에 반대해서) 인간 종족에 대해 가진 높은 평가를 젊은 열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피코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은 학교에서 항상 듣는 평범한 소리다. 인간의 몸은 땅의 원소들과, 천상의 정신과, 식물의 혼과, 하등 동물의 감각과, 이성과, 천사의 정신과, 신과의 유사성이 뒤섞인 것이다."

 

221 그러고 나서 피코는 아담에게 들려주는 말의 형식으로 인간의 제한 ㅇ벗는 능력에 대한 신의 증언을 들려준다.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도 지상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너 자신을 믄달어 가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새로 태어날 수도 있다."

 

228 아스타로테는 정말로 지혜로운 악마였다. 풀치는 1483년에 이 글을 스면서 콜럼버스에 대해 놀랄 정도로 정확한 예언을 그의 입에 넣어 주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집즈롤터 해협)에 새겨진 "더는 나가지 말라(ne plus ultra)"라는 오래된 경구에 관해 아스타로테는 리날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이론인 잘못된 것임을 ㅇ라아라.

대담한 선원은 서쪽 파도를 훨씬 넘어 자신의 배를 몰아 갈 것이니,

지구는 바퀴처럼 생긴 것인데도

물결은 고요하고 평평ㅎ파거든.

옛날에 인간은 더욱 위대한 존재였어.

그리고 헤라클레슨느 자신이 헛되이 가로막고 있는

한계 저편으로 가장 형편없는 배라도

얼마나 멀리 나아가게 될지 안다면 얼굴이 빨개질걸.

인간은 다른 반구를 발견하게 될 거야.

모든 것은 하나의 공통된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이라

신의 신비에 의해 잘 균형을 잡은 지구는

별이라는 구체들 사이에 매달려 있지.

우리 반대편에도 도시와 나라와, 인구 많은 제국들이 있어.

옛날의 신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 채 말야.

그러나 보아라, 태양이 서쪽 길로 빠르게 가고 있지.

빛을 기다리는 종족들을 기쁘게 하려는 거야.

 

235 바사리가 들려주는 다음의 이야기는 아마도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그린 천사의 모습을 본 베로키오는 "다시는 붓을 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레오나르도가 그렇게 어린데도 자신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37 아테네를 빼면 피렌쩨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미술과 미술가에게 중요성을 부여했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투었고, 또 마치 우리가 오늘날 배우와 여배우 이야기를 하듯이 미술가들의 일화들을 이야기했다. 천재라는 낭만적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은 르네상스 피렌쩨였다. 곧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정신(라틴어로 genius, 곧 천재)에 이끌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45 1498년에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했다. 보티첼리는 르네상스의 가장 특이한 이 살인 행위에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이 비극이 있고 난 직후에 그는 복잡한 상징성을 담은 [비방]이라는 작품을 그렸던 것 같다. 고전적인 아치 통로와 멀리 떨어진 바다를 배경으로 세 명의 여인(사기, 속임, 비방)이 남루한 남자(시샘)의 안내를 받아 벌거벗은 희생자의 머리채를 끌고 법정으로 들어온다. 그곳에는 기다란 당나귀 귀를 한 판사가 앉아서 의심과 무지를 의인화한 여성들의 충고를 듣고서, 이 쓰러진 남자를 대중의 분노에 맡기려고 한다. 왼편에는 참회가 검은 옷을 입고 슬픔에 가득 찬 모습으로 벌거벗은 진실을 바라본다.

 

비방 보티첼리.gif

 

5장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 1492~1534

 

253 세습 권력의 이점은 계속성이고 그 맹점은 평범함이다. 피에로 디 로렌쪼는 아무 문제 없이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격과 잘못된 판단력으로 메디치 집안 통치의 기반인 인기를 잃어버렸다.

 

263 신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혀에 구멍을 뚫었고, 동성애자들은 잔혹한 형벌을 통해 신분을 추락하게 했다. 이렇나 개혁의 실행을 돕기 위해 사보나롤라는 교구의 소년들로 도덕 경찰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경마와 행렬과 체조놀이와, 품행 나쁜 친구와 음ㄹ낳나 문학과 춤과 음악 학교를 피하기로 맹세하고 또 머리를 짧게 잘랐다.

 

264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 인간은 천성적으로 미덕의 존재가 아니며 사회적 질서는 에고들, 가문들, 계층들, 종족들, 신앙들 사이의 공개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갈등 가운데서 유지되는 것이다.

 

271 사보나롤라의 사순절 기간 설교들은 로마를 향한 전쟁이었다. 교회가 세속적 권력의 확고한 토대를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한편 교회의 부가 그 타락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278 1498 5 23일에 피렌쩨 공화국은 아비를 죽이는 행동을 하였으니, 곧 공화국 창시자와 그 동료들을 처형했다. 수도사 의상을 빼앗기고 맨발이 되어 그들은 청사 앞 광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미 두 번이나 '허영'을 불태웠고, 또 불의 시련을 연출했다. 그 때마다 엄청난 구경꾼이 모여들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정부가 음식과 음료를 제공행ㅆ다. 한 사제가 사보나롤라에게 "너는 어떤 정신으로 이 순교를 당하느냐?"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많은 고통을 받으셨다." 그리고 자기가 걸고 있던 십자가상에 키스를 하고 다신느 말을 하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당당하게 종말을 향해 걸어갔다. 도메니코는 순교자의 죽음을 죽게 된 것에 감사하여 찬미가인 테데움을 노래하면서 거의 즐거워했다. 세 사람은 교수대에 매달렸다. 소년들은 그들이 질식해 죽어 갈 때에 돌을 던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그들 아래쪽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아올라 그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이 재는 성인의 유물로 여겨져 숭배되지 못하도록 아르노 강에 뿌려졌다. 일부 '울보'들은 죄를 덮어쓸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에 무릎을 꿇고서 울며 기도했다. 1703년까지는 해마다 5 23일이 되면 수도사들의 뜨거운 피가 떨어졌던 장소에 꽃들이 놓였다. 오늘날에는 포도에 난 장식판이 피렌쩨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 범죄의 장소를 표시해 주고 있다.

è 제임스 조이스의 동생이 형에게 장난으로 불러주는 테데움.

è 테데움이 유투브에서 바로 찾아진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새로운 모토가 생각나는군. "원하는 정보를 바로 손 안에". 경이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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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사보나롤라는 중세가 살아남아 르네상스에 출현한 경우이다. 르네상스는 그를 파괴했다. 그는 부의 영향 아래서, 그리고 종교적 믿음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도덕적인 붕괴를 보았다.

 

280

사보나롤라의 위대함은 도덕 혁명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에 들어 있다. 그는 인간을 정직하고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며, 또 그리스도가 소수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성공한 일에서 사보나롤라가 실패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혁명만이 인간의 일에서 진정한 진보를 표시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런 노력이 없이 인간 이외의 달느 것을 변화시키는 일, 역사상 있었던 유혈의 전복들은 일시적이고 소용도 없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289 1570년쯤 야코포 다 엠폴리가 아눈찌아타 성당의 안뜰에서 사르토의 [그리스도의 탄생]을 베끼고 있을 때였다. 미사에 갔다가 나오던 노파 하나가 그의 옆에 멈추어 서더니 그림 앞쪽에 있는 모습을 가리켰다. "이게 나예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루크레찌아는 그보다 40년이나 더 오래 살았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6장 밀라노

300 이런 열정적인 무질서 속에서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문학, 과학, 예술을 위해 마땅히 담당해야 할 몫을 다하지 못했다. 이 도시 출신 선장들은 바다를 열심히 탐험했으나 제노바의 아들 콜럼버스가 나타났을 때 제노바는 너무 겁이 많거나 아니면 너무 가난해서 그의 꿈을 후원할 수가 없었다.

 

309 람푸냐니와 비스콘티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을지아티는 잡혀서 몸 안의 뼈가 모두 부러지거나 탈골되도록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다. 그러나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동안 그는 후회하기를 거절하고 이교의 영웅들과 그리스도교 성인들이 모두 자기 행위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고전의 구절이면서 르네상스의 구절이기도 한 말을 내뱉었다. "죽음은 괴로우나 명성은 영원하다."

Mors acerba, fama perpetua.

 

317 휘회와 근심에 사로잡힌 로도비코는 고독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 종교 따위는 거의 생각지도 않던 이 강인한 남자는 오로지 한 가지 소원만을 빌었다. 얼른 죽어서 베아트리체를 다시 보고 그녀의 용서를 구하고 그녀의 사랑을 되찾고 싶다는 소원이었다.

 

324 전제 군주의 통치는 이탈리아 미술에 하나의 은총이었다. 10명 이상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수도와 자기들의 추억을 장식할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을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였다. 이런 경쟁에서 그들은 민주주의 제도에서라면 배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아름다움을 위해 투입했다. 또한 예술을 위해 인간의 노동과 천재의 결실이 그토록 많이 투입된 경우는 없었다.

 

7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331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결혼해 달라고 조르지 않아다. 그녀를 유혹했던 피에로 단토니오는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피렌쩨의 법률가였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피에로는 자기처럼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카테리나는 농부 남편을 맞아들였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피에로와 그 아내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어머니의 사랑 없이 절반쯤 안락함 속에서 양육되었다. 아마도 이런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그는 아름다운 의상에 대한 취향과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얻었을 것이다.

 

333 스물네 번재 생일이 되기 일주일 전에 레오나르도와 다른 청년 세 명이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피렌쩨 당국의 법원에 소환되었다.

 

335 레오나르도가 서른 살이 되던 1482년에 밀라노의 섭정인 로도비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망설임이나, 시간이 잔인할 정도로 짧다는 의식 같은 것은 아직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싹트는 힘들로 강해진, 청춘의 무한한 야망이 있을 뿐이다.

 

340 [최후의 만찬] 동작을 대신해서 그는 그리스도가 사도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리라는 예언을 방금 했고, 그래서 사도들이 각자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놀라움을 드러내면서 "나입니까?"하고 묻는 긴장된 장면을 선택했다.

 

350 "정열에 빠진 가엾은 애인들아! 자연은 당신들의 신경이 맹목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향하여 부조리한 갈망으로 타오르게 하고, 당신들의 두뇌로 하여금 우리의 매력을 아주 분별 없이 이상화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으니그래야만 당신들은 아비가 되는 것이겠지!

 

356 그의 호기심, 도착증, 민감성, 그리고 완전욕,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냈다. 즉 시작한 일을 완성할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363 레오나르도는 잘못된 생각을 쫓고 있었다. 인간의 비행은 활강을 빼고는 새를 흉내 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372 그러나 이 모든 한계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르네상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천으로부터 한 사람이 왔었다는 것, 그가 인류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8장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380 그는 르네상스의 중심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자기 속에 잠재된 완전성을 얻지 못했다. 아니면 자기 예술의 완전한 영향을 보여 주지 못했다.

 

388 15세기 마지막 무렵에 시에나는 좋건 나쁘건 그 이름이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진 예술가를 한 명 배출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죠반니 안토니오 바찌였다. 그러나 음란한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소도마라고 불렀다. 그는 아름다운 소년으로 동성애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별명을 즐거운 유머로 받아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호칭이라 생각했다.

è 쏘 쿨하다.

è 왜 르네상스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써내기 위해서는 팩트를 우선 알아야 한다.

 

399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막달레나]는 아주 아름다운 죄인이어서 신의 자비심이 아니라도 그녀를 쉽게 용서하게 된다.

 

9장 만토바 1378~1540

 

411 성 안드레아 교회에 있는 그(만테냐)의 무덤 위에는 청동 흉상(아마도 그 자신의 작품)이 놓였다. 그것은 50년 세월을 예술에 바친 한 천재의 쓰라림과 피로를 분노한 사실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불멸'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411 이사벨라, 세계 제일의 여성 - 그녀는 지식인이 되지 않고도, 혹은 매혹적인 여성이기를 중단하지 않고도 폭넓고 다양한 문화를 지녔다. 그녀를 보고 사람들이 경탄하는 것은 그녀의 생명력, 활기, 진짜를 알아보는 예리함, 취향의 완벽함 등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말을 타고도 밤새도록 춤을 출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이든 여왕이 될 줄을 알았다.

 

 

10장 페라라 1378~1534

 

423 남자들은 여자를 찾고 숙녀들과 신사들은 밤새도록 춤을 추고 조용한 날들에는 귀부인과 아가씨들이 기사 소설을 읽었다.

 

424 루크레찌아의 시녀 중 하나인 안젤라가 알폰소의 형제 둘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이폴리토와 쥴리오였다. 생각 없이 오만한 순간에 안젤라는 이폴리토에게 그의 전부를 다 합쳐도 동생의 두 눈보다 못하다고 조롱했다. 추기경은 자객 한 떼를 거느리고 쥴리오가 가는 길에 숨어 있다가, 자객들이 동생의 눈을 막대로 쑤시는 골을 바라보았다. 쥴리오는 맏형인 알폰소에게 가서 자신을 위해 복수해 달라고 호소했다. 공작은 추기경을 가두었지만 머지않아 그가 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 주엇다. 알폰소의 무관심에 마음이 상한 쥴리오는 또 다른 형제인 페란테와 더불어 공작과 추기경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발각되고 쥴리오와 페란테는 성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1540년에 페란테는 그곳에서 죽었고 쥴리오는 158년에 알폰소 2세에 의해 석방되었다. 50년을 감옥에서 보낸 다음이었다. 그는노인이 되어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50년 전에 유행하던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석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433 나의 불길이 이 싸늘한 얼음을 따뜻하게 한다면,

눈물으로 이 먼지를 살아 있는 육체로 바꾸어

네게 새로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대담하고 열렬하게

우리 소중한 인연을 끊어 버린 사람을 향해 외칠 것을,

"오 잔인한 괴물아! 사랑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라!".

 

442 자연은 그를 만든 다음 그 틀을 부수었다.

è 와우! 진짜 멋진 표현이다.

 

443 나는 그의 발에 키스를 했다. 그느느 성스러운 옥좌에서 몸을 굽혀 내 손을 잡고 내 두 뺨에 키스했다. 그 밖에도 그는 내가 지불해야 할 인지세의 절반을 면제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가슴은 희망에 가득 찼지만 몸음 비에 젖고 진흙으로 더럽혀진 채 나는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

è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 - 로 끝나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11장 베네찌아와 그 영토 1378~1534

 

450 그러나 아마도 베네찌아의 부는 더 많은 부분이 해상 무역에서 온 것이다. … 유럽의 어떤 나라도 이렇나 무역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454 적들조차도 베네찌아의 통치 방식에 경탄하여 그 구조와 기능을 탐구하려 사람을 보내곤 했다.

 

456 대의회에 의해 임명된 40인의 판삳르은 능률적이고 진지한 사법부가 되었다. 법령은 명료하게 표현되었고 귀족에게나 일반에게나 똑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형벌은 시대의 잔혹성을 보여 준다. 투옥은 최소한도의 빛과 공기만을 허용하는 좁은 감방에 갇히는 것을 의미했다. 채찍질, 소인 찍기, 손발 자르기, 눈멀게 하기, 혀 자르기, 형차에 매달아 돌려 사지 찢어 죽이기, 그 밖에도 여러가지 섬세한 형벌들이 합법적이었다.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은 감옥에서 목을 졸라 죽이거나 아니면 물에 빠뜨리거나 총독의 궁전 창문에 매달거나 화형했다.

 

461 아마도 중산층이 가장 행복한 계층이었으리라. 그들은 공적인 행사와 사적인 즐거움을 모두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즐겼다. … 부자들처럼 행운을 잡으려고 법석을 떨지도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처럼 애들을 먹이고 입힐 근심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463 세속적인 방탕 및 신성 모독은, 정통 신앙 및 주일의 경건함과 함께 이탈리아인의 성격에 들어 있었다.

 

470 베네찌아 군대와 함대가 거둔 승리들, 거의 위협적으로 다가온 파멸에서 영웅적으로 다시 일어선 것 등이 후원자와 화가들의 자부심과 상상력을 일깨우고, 자기들의 모습을 미술 작품에 새겨 넣었다. 부유함은 스스로 선함, 아름다움, 참됨 등으로 바뀌지 않는 한 아물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80 상인들의 창고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높은 가격에 예술가들이 고용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507년에 베네찌아 사람들은 색채 없는 삶이란 죽은 것이라고 느꼈다.

 

490 티찌아노는 1533년에 쉰여섯 살이었다. 그가 앞으로도 43년이나 더 살면서 지난 50년만큼이나 숱한 걸작들을 만들어 내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496 베네찌아 여자들은 교육을 향한 가식이 적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매력적이거나, 아니면 어머니로서 자식을 많이 두었거나, 아니면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496 1471년에 베르나르도 첸니니는 피렌쩨 인쇄소를 열었고, 폴리찌아노는 이에 당황해서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가장 멍청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천 권의 책이 되어 외국으로 퍼질 것이다."

 

504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렸네. 내 생명을 부드럽게 지켜주던 마음, 자신의 생명을 잊고 내 생명을 사랑하고 유지해 주던 그 마음, 스스로 주인이었던 그 마음, 값비싼 장식과 꾸밈과 비단과 금과 보석과 보물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가 지닌 사랑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며(그녀 자신의 말에 다르면) 만족했던 그 마음, 이 마음은 의복 대신 가장 부드럽고 우아하고 훌류유한 팔다리를 지녔다네. 그 마음은 이렇게 봉사할 때 즐거운 모습을 보였고, 또 내가 이 땅에서 만난 중에 가장 달콤하고 또 가장 품위 있는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네.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1534

 

513 이곳은 천재가 태어나거나 죽는 것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천재가 그곳에 머물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장소이다. 여기에는 그들을 교육시키고 형성할 중요한 예술이나 뚜렷한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514 그러나 16세기 처음 몇 십 년 동안 코레죠의 집안은 길베르트 10세 백작과 그의 아내 베로니카 감바라가 이끌었다. 그녀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여성들 중의 한 명이다. 라틴어를 말할 수 있었고 스콜라 철학을 알았으며 교부 신학에 대한 주석을 쓰고 페트라르카 방식의 섬세한 시를 썼기에 "열 번째 뮤즈"라고 불렸다. 그녀는 작은 궁정을 예술가와 시인들의 살롱으로 만들고, 저 낭만적인 여성 숭배가 널리 퍼지는 일을 도왔던 인물이다. 르네상스의 여성 숭배는 이탈리아의 상류층 사이에서 중세의 성모 숭배를 대체하고, 이탈리아 예술은 점차 여성적인 매력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521 그러나 이제 파르미지아니노는 자신의 불행과 가난에 물린 탓인지 열렬히 연금술에 빠져서 그림을 버려두고 금을 제조할 용광로를 세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è 누구랑 비슷하다. 반면교사 삼아야겠지.

 

527 프란치아가 라파엘로와 편지로 맺은 우정은 르네상스의 가장 즐거운 에피소드의 하나이다.

 

531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는 이 집안을 권력과 문화와 암살의 절정으로 이끌었다. 그의 많은 애인들은 몇몇 아읻르을 낳았는데, 때로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동시에 일어났다. 그는 세 번 결혼했고, 간통했ㄸ나는 명목으로 두 아내를 죽였다. 또한 딸을 임신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들을 범하려고 했는데, 아들이 칼을 빼들고 반항해서 겨우 모면했다고 한다. 그는 도한 자신에게 안기기보다 차라리 죽음ㅇ르 선택한 도이치 숙녀의 시신을 강간했다.

 

540 우르비노의 공작 궁정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산악 지방의 공기, 궁정의 모임, 품위 있는 대화와 엘리자베타에게 반해서 그곳에 11년을 더 머물렀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여섯살이나 위였고, 몸무게는 거의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부드러운 정신이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기 방 거울 뒤에 그녀의 그림을 감추어 두고 그녀를 찬양하는 비밀 소네트를 썼다.

 

544 나는 이제 사는 게 아닙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여,

운명이 당신의 육체에서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갔으니,

그러나 내가 당신과 같은 무덤에 눕고

내 뼈가 당시의 뼈와 합쳐지는 날 나는 살게 됩니다.

 

13장 나폴리 왕국 1378~1534

556 시칠리아는 르네상스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우리스파와 같은 몇 명의 학자와 안토넬로 다 메씨나와 같은 몇 명의 화가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머지않아 훨씬 더 기회가 많은 이탈리아 본토로 건나가고 말았다. 팔레르모, 몬레알레, 체팔루 등지는 위대한 미술품을 간직하고 있지만 오로조 비잔틴과 이슬람교와 노르만 시대의 유품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랑스러운 섬에는 1295년부터 1409년까지 아라곤 가문의 왕과 왕비들이 잇었다. 이어서 다음 300년 동안 이 섬은 스페인 왕권의 보석이 되었다.

 

558 규모가 더 큰 예술들과 함께 이 모든 공예 분야와, 또 이들 사랑스럽고 격렬한 폭발성 기질을 가진 사라들의 노동과 사랑, 속임수와 정치적 수완, 헌신과 전쟁, 성실함과 철학, 지식과 미신, 시와 음악, 미움과 유머 등이 모두 합쳐져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고, 또 메디치가 이끄는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다시 파멸에 이르게 했다.

 

 

 

 

 

 

 

 

 

 

내가 저자라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읽었다. 이탈리아는 나의 조국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감정 이입 없이 객관적으로 읽어내려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명 이야기 시리즈의 아시아편을 읽는다면, 그것도 한국의 전쟁사에 대해 읽게 된다면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은 어느 정도 누구나 애국심이 있다. 윌 듀런트가 이순신을 "지독한 조선의 장군"이라고 표현할 때 나의 눈은 저 "지독한"의 의미가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 되뇌이게 될 것이다. 윌 듀런트가 별 의미없이 갖다붙인 거북선에 대한 수식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만큼 문명을 아우른다는 것은 약간의 허점만 보여도 대국적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윌 듀런트는 철저한 고증과 무난한 성품으로 어찌저찌 책을 무난하게 써내었다. 그렇다고 듀런트가 표현을 자제한 것은 아닌데, 반격의 소지를 줄이는 방법을 그는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모순되는 형용사를 함께 서술하여 의미를 아리송하게 만든다.

 

P64. 이단자가 되기에 그는 너무나도 천재적이고 편안함을 좋아했다.

P65. 요한나는 옥좌를 되찾고 광채와 악덕으로 통치를 계속하다가

 

듀런트는 책의 구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시간순서대로 개진하면서, 동시에 주제를 덩어리로 묶어 내는 재주를 가졌다. 이 덩어리들을 잘게 나누어 소제목들을 하나 하나 붙여주었다. 마치 초콜릿 박스 속에 초콜릿 들이 하나 하나 개별 포장된 느낌이다. 조잡해 보일수도 있지만 역사 자체가 조잡한 것이므로 뼈대를 잘 잡아준다는 미덕은 높게 평가할 만한다.

 

매우 쉽게 읽힌다. 심지어 웬만한 청소년 역사서보다도 이해가 수월하다. 그가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한 저력이기도 하다. 다만 번역의 문제인지, 대명사가 남발되는 것 같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he, him)"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해를 하기 위해 도대체 ""가 누구였는지 소추해서 올라가려면 수많은 ""의 숲을 헤쳐야만 한다. 어차피 에세이가 아니라 정보전달서의 성격이 강하다면 대명사를 좀 줄이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풍부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어서 재미를 배가시킨다. 여기에 그림 자료들이 원색으로 같이 실려 있었더라면 (물론 매우 비싸지겠지만) 정말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호기심이 생겨서 구글링을 하게 된다. 그 수고를 책 안에서 좀 덜어주는 것,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책을 전집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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