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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7일 06시 03분 등록

문명이야기 - 르네상스 5-1

-. 윌 듀런트 지음

-. 안인희 옮김, 민음사, 2011

 

 

■ 저자에 대하여

 

1. 탄생과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1985 ~ 1907)

 188511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North Adams)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캐나다인인 Joseph Durant Mary Allard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저지에 있는 가톨릭 교구의 부속학교에서 선생님 수녀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종교의 열정이 강한 그였기에 그가 성직자가 되는 것에 대한 어떤 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00년 그는 성 베드로 학교에 입학을 하고, 1903년에 학교의 도서관에서 다양한 철학자와 무신론자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확고하게 가졌던 종교에 대한 신념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종교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2. 스피노자의 만남과 평생 반려자와의 결혼(1907 ~ 1925)

 1907년에 졸업을 하고 뉴저지의 South Orange의 세튼 홀 대학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와 기하학 등을 가르쳤다.(1907~1911) 1909년 그가 속해 있던 비밀조직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 마르크스를 통합하려는 연구를 시작한다. 이때 스피노자를 만나면서 그의 삶에 철학자로서의 길이 열렸다. 이후 그는 이 평온한 신학교에서 뉴욕의 가장 진보적인 자유주의 교육 실험 학교인 페레르 학교로 자리를 옮기는데(1911~1913), 이 학교에서 1898 5 10일 러시아에서 태어난 '아이다 카우프만'이라는 제자와 사랑에 빠져 교직을 사임하고, 191313살 연하인 그녀와 결혼한다. 이후 4년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1917년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1914년부터는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 역사와 문학, 철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이 강의는 이후 13년간 주 2회씩 계속 이어졌다.

 

3. '철학이야기'의 성공으로 '문명이야기'을 쓰다.(1926~1957)

 1926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철학 이야기'의 성공으로 1년 후 교직을 떠날 여력이 생긴 듀런트 부부는 가끔씩의 평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업 시간을(매일 8시간에서 14시간) <문명이야기(The Story of Civillization)에 바쳤다. 보다 철저한 준비를 위해 1930년에는 이집트와 근동, 인도, 중국, 일본 등지를 직접 탐방하고 1932년에 다시 일본과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폴란드 등지를 방문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문명 이야기> 시리즈의 제1 <동양 문명>(1935)이다. 이후 몇 번인가의 유럽 방문을 거쳐 제2 <그리스 문명>(1939)과 제3 <카이사르와 그리스도>(1944)가 준비된다. 1948, 터키와 이라크, 이란, 이집트, 유럽 등지에서 체류하며 제4 <신앙의 시대>(1950)를 저술하고, 1951년에는 제5 <르네상스>(1953)를 출간했으며, 1954년부터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구에 대한 추가 연구를 시작해 종교 개혁을 새롭게 조망한 제6 <종교 개혁>(1957)을 발표했다.

 

4. '문명이야기'의 완결은 공동저자인 아내의 헌신으로 가능했다.(19~1957)

 <문명이야기>을 쓰는데 있어 듀런트 여사의 역할을 매년 그 비중이 커져 갔으며, 7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1961)에서는 그 기여도가 너무나 커 책 표지에 두 사람의 이름이 공저자로 나란히 오르게 된다. <루이 14세의시대>(1963) <볼테르의 시대>(1965), <루소의 혁명>(1968년에 퓰리처상 수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5년 제11 <나폴레옹의 시대>(의 출간을 끝으로 50년에 걸친 이 대작은 완결된다. 에이리얼 류런트(Ariel Durent) 1981 10 25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윌 듀런트도 그로부터 13일 후 11 7일에 96세를 일기로 그녀를 뒤따랐다.

 

5. 저자에 대한 평가

윌 듀런트는 50년에 걸쳐 인류의 문명사를 관찰한 열한 권의 저작인 <문명이야기>을 완성했다. 인류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는 그의 책을 통해서 경이로운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권력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희로애락에서 역사적인 정치가, 사상가, 예술가, 시인들이 가지는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적인 약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와 그렇지 않고 휩쓸려서 고통을 겪게 되는 어리석음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윌 듀런트의 곁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 에이리얼이 있었다. 이들은 1913년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거의 같은 시기에 죽기까지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삶의 동반자였고, 이상적인 동료관계였다. 이러한 행복한 결혼생활이 수 많은 저작을 만들어낸 밑거름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인류의 어두운 역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그의 글은 냉철함과 긍정적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나 또한 나의 아내와 함께 공동의 관심사를 가진 일을 평생에 걸쳐 함께 하고 싶다. 그리하여 윌 듀런트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고 마음이 솟아난다.

 

6. 출저

역사 속의 영웅들(윌듀런트 지음, 안인희 옮김, 황금가지, 2002)

이탈리아 문학의 연구(한형곤 지음,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9)

http://cinchmina.tistory.com/entry/16-Will-DurantJoseph

사진출저 : 타임지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 이야기

 

 

■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50 페트라르카는 볼로냐의 정신은 좋아했지만 법의 문자는 싫어했다. "나는 부정직하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직하게 행동할 것을 바라기 어려운 기술을 습득하는 일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내 성향에 어긋났다." 법률 논문에서 그의 관심을 끈 것이라고는 "수많은 고대 로마 문헌의 인용"이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신 베르킬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등을 찾아낼 수 있는 대로 찾아내 모조리 읽었다. 그들은 그에게 철학과 문학 양쪽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는 그들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처럼 글을 쓸 것을 갈망했다. 부모가 죽자(1326)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아비뇽으로 돌아와 고전 문학 및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50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327년 수난의 금요일에 한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사랑을 거부한 일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를 자기 시대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열광적으로 자세히 묘사했지만 그녀의 신원의 비밀만은 감쪽같이 감추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뮤즈가 그의 창조물이라고 여겼다.(그러면서 그의 모든 정열이 문학의 특권이라 여겼다.) 그러나 밀라노에 있는 암브로시아 도서관에 소장된 베르길루우스 사본의 여백에 적혀 있는 글은 그가 아마도 1348년에 썼던 것으로 여겨진다.

 

  미덕으로 빼어난 사람, 그리고 내 노래를 통해 널리 찬양을 받은 사람 라우라가 처음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추후 1327년이 되는 해, 4월의 여섯 번째 날, 아비뇽 산타클라라 교회에서의 첫 번째 시각에 그 빛은 지상에서 꺼지고 말았다.

 

51 그는 음유 시인들의 땅인 프로방스에서 살았다. 음유 시인들의 노래의 메아리가 아비뇽에도 살아 있었다. 그보다 한 세대 전에 젊은 단테가 그랬듯이 페트라르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유 시인이 되어 자신의 정열을 수많은 시구로 바꾸었다.

 

51 그는 이탈리아 소네트 형식을 물려받아 그것을 어려운 운율 형식으로 만들었고 여러 세기 동안 이 형식이 이탈리아 시문학의 기본 틀을 이루었다. 강물을 따라 혹은 언덕들 사이로 산책하고, 무릎 꿇고 저녁 기도나 미사를 드리고, 방의 정적 속에서 동사와 형용사들 사이로 길을 찾아 헤매면서 다음 21년 동안 그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살아 있는 라우라에게 바치는 소네트 207편과 온갖 종류의 다양한 시들을 썼다.

 

52 지금도 페트라르카의 저 찬란한 언어는(자음에 대해 모음이 거둔 빛나는 승리)아름다움의 최고봉을 이루고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아무도 그 봉우리를 다시는 정복하지 못했다. 그의 시가 담고 있는 생각이야. 이방인이 번역할수 있겠지만 누군들 그 음악을 번역할 수가 있을까?

 

55 이 땅의 발치로부터 그는 문학의 세계 절반을 움직였다. 그는 친구들과 교황들과 왕들에게, 그리고 죽은 작가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를 향해 긴 편지를 써 보내기를 좋아했다.

 

55 겉으로는 가톨릭교의 모든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정신으로는 고대와 더불어 살았다. 호메로스, 키케로, 리비우스 등이 살아 있는 동료들인 것처럼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자신이 영웅적인 로마 공화정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불평했다. 자신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 하나를 라일리우스라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55 르낭을 그를 가리켜 "라틴 서방에 고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도입한 첫 번째 현대인"이라고 불렀다.

 

56 그는 인간이 지상의 삶에 관심을 가질 권리를 명백하게 묘사한 최초의 작가이며, 또한 지상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증가시켰고, 부유함을 얻기 위해 노동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르네상스의 아버지였다.

 

57 나폴리에서 삶은 즐겁고 도덕은 편안하게 느슨했다. 여자들은 아름답고 접근이 쉬웠다. 시인들은 이런 사랑의 분위기에서 시를 위한 많은 주제와 자극을 찾아냈다. 이런 나폴리에서 보카치오는 성숙했다.

 

58 보카치오에게 마리아는 아프로디테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였다. 세상에 그녀의 금발 머리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 없었고, 그녀의 악동 같은 눈길보다 더 유혹적인 것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피암메타(Fiammetta, 작은 불꽃)라 부르고 스스로 그녀의 불길 속에 타버리기를 원했다.

 

62 말년에는 자신의 생김새보다는 업적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자랑은 가장 위대한 성인들만이 피할 수가 있는 결점이다. 그의 편지들은 매력적이고 빛나는 것이지만 겸손한 척하는 태도와 솔직한 자부심이 없었다면 더욱 빛났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그렇듯이 그도 갈채를 좋아했다. 명성을 갈망하고 문학적 '불멸'을 원했다.

 

63 붓보다 더 가볍고 동의하기 쉬운 부담도 없다. 다른 즐거움들은 우리를 매혹하는 동안에 우리를 망가뜨리거나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펜은 즐거운 마음으로 붙잡고 만족한 심정으로 내려놓는다. 그것이 그 주인과 대가(大家)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수천 년 뒤에나 태어날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 지상의 즐거움 중에서 문학()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으며,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보다 더 온화하고 믿을 만한 것도 없다. 그렇듯 적은 노력이나 갈망을바친 것만으로 삶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주인과 그토록 함께하는 것은 달리 없다.

 

63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 형태와 소리로 드러난 아름다움, 자연과 여자와 남자의 아름다움에 민감해야만 했다.

 

64 마흔이 넘은 뒤로는 여자를 육체적으로 건드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문학적 활동과 아내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신체와 정신의 힘이 대단히 커야만 한다.

 

19 에피쿠로스의 이름이 무신론자라는 말과 동의로 사용되던 시대에 에피쿠로스를 찬양한다는 용기를 보여 주였다.

 

69 자유가 그렇듯이 권력도 오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다. 리엔쪼는 현실정치가 되기에는 웅변가로서 지나치게 위대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위대한 문구, 약속, 주장들을 스스로 믿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위해 중독되었다.

 

78 이제 예술가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대의 사조를 받아들여 조합이나 그룹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산품에 자기 이름을 밝혀 놓았따.

 

78 페트라르카가 14세기의 시문학을 지배했듯이 죠토 디 본도(Gitto di Bondone) 14세기의 회화를 지배했다. 이 예술가는 사방을 돌아다녔다는 점에서 페트라르카와 우열을 다투었다. 화가, 조각가, 건축가, 자본가, 세속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예술적인 개념, 실용적인 장치, 재치 있는 답변 등으로 무장하고 죠토는 평생 동안 루벤스 방식의 자신감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79 파도바로 옮긴 죠토는 3년 동안 아레나 예배당의 유명한 벽화를 그렸다. 아마도 파도바에서 그는 단테를 만났을 것이다. 이미 피렌재에서 그를 알았던 것 같다. 항상 재미있고 이따금 날카로운 바사리는 단테가 죠토의 "가까운 동료이며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피렌쩨의 행정관 궁전(바르젤로)벽화에 있는 단테의 초상화를 죠토가 그렸다고 말한다. 시인은<신곡>에서 예외적인 상냥함으로 이 화가를 찬양하고 있다.

 

81 그렇다면 파도바와 아씨시에 있는 죠토의 작품이 미술사의 한 경계표가 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눈길을 모든 각도에서 관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리듬 있는 구성이다. 그리고 조용한 움직임의 품위이며, 부드럽고 빛나는 색채와 탁월한 이야기 서술의 흐름, 깊은 감정조차도 표현이 절제된 것, 그리고 시끄러운 장면들을감싸고 있는 장엄한 고요함이다. 이따금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사실적인 초상화는 과거의 미술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동작에서 복 느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들은 비잔틴 미술의 경직됨과 어둠을 누르고 죠토가 승리한 요소들이다. 그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백 년 피렌쩨 미술은 그의 모범과 영광을 이어받았다.

 

92 보카치오는 나폴리의 느슨한 즐거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대단히 자주 관능적인 표현으로 사랑을 생각했다. 그는 기사도의 사랑 방식을 비웃었고, 단테가 돈키호테라면 자신은 산초 판자의 역할을 맡아 했다. 두 번 결혼했으면서도 그는 자유연애을 믿고 있었던 듯하다.

 

104 그는 번성할 때는 겸손을, 불운에서는 용기를 권고한다. 지상의 승리나 재물에 행복을 ㄴ결시키지 말라고 경계한다.

 

104 이 무렵 그는 가장 위대한 산문 작품인 <유명한 사람들의 생애>를 썼다. 로물루스에서 카이사르에 이르는 로마 명사(名士) 31명의 전기들이다. 카이사르의 생애에 바쳐진 8절지 350분쪽 분량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카이사르의 생애에 대한 가정 철저한 서술이었다.

105 그는 이제 정통 그리스도교로 마음을 돌리고 책을 팔아 버리고 수도사가 될 생각을 했다. 페트라르카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중용의 길을 선택하라고 간청했다. 사랑의 시들과 단편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라틴과 그리스 고전을 진지하게 탐구하라고 권한 것이다. 보카치오는 "존경하는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여 서유럽에서 최초의 그리스 인문학자가 되었다.

 

107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기를 바란다. 글을 쓰고 있을 때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다면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에 젖어 있을 때 말이다.

 

110 페트라르카가 성공했다면 아마도 르네상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분열이 르네상스에는 이로웠다. 큰 국가들은 자유와 예술보다는 질서와 권력을 키운다.

 

112 르네상스는 혁명이기보다는 완성이었고, 중세의 성숙이 고대 사본과 예술의 발견보다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증세의 많은 학자들이 세속적인 고전 작품들을 알았고 사랑했다. 그 작품들은 보존한 사람들은 수도사들이었다.

 

2장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122 "내가 교황청의 교회 기구들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중개자와 서기들이 자기들 앞에 쌓아 놓은 돈의 무게를 달고 그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늑대들이 교회의 통제 아래서 그리스도교 양 떼의 피를 마시고 있다.

 

124 언어의 대가인 페트라르카는 욕설의 어휘를 총동원해서 아비뇽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신앙심 없는 바빌론, 지상의 지옥, 악의 수채통, 세계의 하수구, 여기에는 믿음도 자비심도 종교도 신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 세계의 모든 오물과 허약함이 여기 한데 모여 있다. ..... 늙은 남자들이 뜨겁게 달아올라 비너스의 품속으로 거꾸로 뛰었다. 나이도 품위도 권력도 잊고 마치 차기들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치와 술 취함과 음란함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수치 속으로 달려든다.

 

125 그러므로 아비뇽에 있었던 모든 악덕에 대해 교황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 원인은 부유함이었다. 그것은 다른 시대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네로 시대의 로마, 레오 10세 시대의 로마, 루이 14세 시대의 파리, 오늘날의 뉴욕과 시카고 등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뉴욕과 시카고에서 대부분의 남녀들은 착실한 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온건한 정도로만 악덕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35 혼자만의 신앙심으로 3년을 보낸 다음 그녀는 이제 도시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여성성을 그리스도에게 바쳤듯이, 그녀는 모성의 부드러움을 시에나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바쳤다.

135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해악은 인간의 허약함의 결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인류의 모든 죄악은 하느님의 사랑의 대양 속에서 삼켜져 없어지고 만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환자들은 치유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피렌쩨의 르네상스 1378~1534

 

3장 메디치 가문의 떠오름 1378~1464

 

142 일찍이 이 말을 한 사람들은 이 사건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이'재탄생'을 역사적 전망을 가지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니면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그 구성 요소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대의 재탄생 이상의 일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돈, 악취를 풍기는 부르주아의 돈이 필요했다. 능숙한 경영과 싸구려 노동력이 만들어 낸 이윤, 동쪽으로의 모험적인 여행과 알프스 산을 넘은 험한 여행 끝에 물건을 싸게 사다가 비싸게 팔아서 남긴 이윤, 조심스러운 계산, 투자, 대출 등으로 만든 이윤. 이자와 배당 금이 쌓여 만든 돈, 그래서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관직과 애인을 사고도 돈이 넉넉하게 남아돌게 되어서야 비로소 미켈란젤로나 티찌아노 같은 사람의 힘을 빌려 부()를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예술의 숨결로 행운을 향기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142~143 돈은 문명의 뿌리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기금과 교회의 기금이 필사본들을 사들일 돈을 지불했고, 이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중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리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교회의 교리를 의심하고 지옥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 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여자와 남자, 예술에 드러난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1434~1543)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파괴적인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계율,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143 로마에 아그리파가 세운 판테온은 1400년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숭배의 장소라는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포룸 광장에서는 아직도 키케로와 카이사르가 카틸리나의 운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라틴어는 카이사르가 카틸리나의 운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라틴어는 여전히 살아서 통용되는 언어였다.

 

144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맨 먼저 탄생한 것과 아주 동일한 이유로 피렌쩨에서 맨 먼저 탄생했다. 조직화된 산업, 상업의 확장 그리고 은행가들의 활동 등을 통해 꽃의 도시 피렌쩨는 14세기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베네찌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이 시대 베네찌아가 거의 모든 에너지를 쾌락과 부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면, 피렌쩨 사람들은 아마도 소란스러운 얼치기 민주주의의 자극을 통해 사상과 재치와 모든 종류의 기술을 대단히 예리하게 발달시켰다. 그러한 요소들은 이 도시를 이탈리아의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당파 싸움은 삶과 사유의 기질을 더욱 달구었다. 경쟁하는 집안들은 권력을 추구할 때처럼 예술에 대한 후원에서도 경쟁을 벌였다. 

 

145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정복당했을 때(1453)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피렌쩨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14년 전과 똑같은 환대를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고대 텍스트의 필사본들을 지니고 왔다. 이렇게 다양한 영향들이 합쳐지면서 르네상스는 피렌쩨에서 형태를 잡아 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피렌쩨는 이탈리아의 아테네가 되었다.

 

148 피렌쩨는 정치 역사는 현대 국가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맨 먼저 오래된 토지 소유 귀족들에 대한 상업 계층의 승리(1293)이고, 그 다음에는 '노동 계급'이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해 벌이는 싸움으로 이루어진다.

 

149 피렌쩨에 꼭 어울리는 좋은 결과는, 갈등과 토론이라는 전기(電氣)를 띤 분위기가 맥박을 빠르게 하고, 감각과 정신과 재치를 날카롭게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피렌쩨를 들어 올려 한 세기 동안 세계의 문화적 지도자로 만들었다.

 

153그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의 개인 식탁의 소박한 식사와 그가 예의와 평화를 위해 외국의 귀빈들에게 내놓는 화려한 연회 사이의 대조에 깜작 놀랐다. 그는 보통 인도적이고 온건하고 잘 용서하고 과묵하고 그러면서도 간결한 재치로 유명했다. 가난한 살들에게 너그러웠고 가난하게 된 친구들의 세금을 지불해 주었으며 품위 있는 태도로 자신의 권력과 자선을 감추었다.

 

158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훌륭한 그리스 고전 사본들은 이탈리아에 있다. 페트라르카에서 타쏘에 이르는 300년 동안 이 사람들은 미칠 듯한 정열로 사본들을 수집했다. 니콜로 데 니콜리는 이런 열정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을 바쳤다. 안드레올로 데 오키스는 도서관에 책을 추가하기 위해 자신의 집, 아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포지오는 책 이외에 다른 것을 위해 돈이 쓰이는 것을 보면 고통을 느꼈다.

 

166 이들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단테 사이의 천 년은 비극적인 오류요,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일로 여겨졌다. 성모와 성인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전설들은 그들의 기억에서 빛이 바래고, 이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호라티우스의 양성애적인 송가들이 그들의 마음을 차지했다. 위대한 성당들은 야만적으로 보였고, 벨베데레 아폴론을 바라본 눈길, 그것을 만져 본 손길에는 수척한 성인들의 조각상이 모든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168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세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 문학과 철학에서의 변화는 인간의 정신에 지구의 일주와 탐색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간을 교리에서 해방시키고, 또 죽음에 대한 명상 하기보다는 삶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유럽인의 정신을 해방시킨 것은 탐험가들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168~169 그러나 점차 인문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더욱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르쳤다. (남자나 여자, 특히 벌거벗은) 건강한 인간 육체에 대한 정직한 경탄이 교육받은 계층에 널리 퍼졌다. 르네상스 문학에서 삶을 다시 인정하게 된 일과, 저승에 대한 중세 방식 사유에 저항하게 된 일은 미술에도 세속적인 경향을 부여했다. 이탈리아의 아프로디텔르 성모의 자리에 앉히고, 이탈리아의 아폴로를 성인 세바스찬으로 묘사함으로써 로렌쪼 마니피코와 그 이후 시대의 화가들은 이교의 모티프들을 그리스도교 예술에 도입했다.

 

169 "이 비참한 고딕 건축물을 창안한 사람은 저주를 받아라!" 이렇게 안토니오 필라레테는 1450년에 외쳤다. "야만적인 사람들이 이런 것을 이탈리아에 들여 온 것이 분명하다. 이 유리벽들은 이탈리아의 태양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171 크루넬레스코의 달걀 이야기는 온 세상에 다 알려진 것이다. 그가 다른 예술가들에게 달걀을을 세우는 법을 보여준 이야기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실패한 다음 그 속을 비운 달걀의 끝을 무디게 만들어서 테이블에 세웠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방식이라면 자기들도 할 수 있다고 항의하자 그는 자기가 성당의 지붕을 만들고 나면 그들은 비슷한 항의를 할 거라고 대꾸했다. 그가 이 주문을 따냈다. 14년 동안(140~1434)그는 간혹 중단기를 겪으면서 이 작업에 매달렸다. 수많은 난관들과 싸우면서 대략 39.9미터 크기의 둥근 지붕을 성당 벽의 꼭대기로 들어올렸다.

 

175 그러나 코시모 시대 피렌쩨에서 조각기 최초의, 그리고 가장 유명한 승리를 거둔 분야는 돋을새김 분야였다.

 

178 그의 가장 섬세한 작품은 코시모의 주문을 받고 1430년에 주조되어, 메디치 궁전 안마당에 놓였다가 지금은 바르젤로 미술관에 있는 청동의 <다윗>이다. 여기서 뻔뻔스러운 누드 모습이 르네상스 조각에 등장하고 있다. 젊은 신체의 호가고한 감촉을 지닌 날렵한 소년, 옆모습이 지나치게 그리스인과 닮은 얼굴, 그리고 투구는 분명 너무 그리스 방식이다. 여기서 도나텔로는 사실주의를 옆으로 밀쳐내고 상상력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더욱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거의 대등한 작품이다.

 

179 도나텔로는 미술이란 언제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오랜 진실을 스스로 다시 발견했지만, 이 진실을 위해 의미심장한 형식을 선택하고 드러내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많은 명사들이 그의 끌에 자신을 맡겼다가 때로 실망하곤 했다.

 

179~180 교회 앞 광장에 현대 최초의 중요한 기마상을 세웠다.(1453) 의심의 여지없이 로마에 있는 말을 탄 아우렐리우스 상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얼굴과 분위기는 철저히 르네상스 방식이다. 이상적으로 표현된 철학자 황제가 아니라 분명히 동시대의 인물인 것이다. 두려움 없고, 가차 없고, 강력한 베네찌아 용병대장 '가타멜라타(달콤한 고양이)상이다.

 

184~185 1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회화가 조각을 지배했다. 15세기에는 조각이 회화를 지배했다. 16세기 회회가 다시 주도권을 차지한다. 아마도 죠토의 천재성이 14세기에, 도나텔로의 천재성이 15세기에,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와 티찌아노의 천재성이 16세기에 나타난 것이 이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185 조각이 이 일을 해내기에는 시간과 노고와 돈이 너무 엄청나게 들었다. 성급하고 풍부하던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이교의 이상이라는 이중의 영역을 표현하기에는 회화가 훨씬 더 쉬웠다.

 

185~186 르네상스 미술은 신체와 영혼, 얼굴과 표정을 다 잡아내려고 했다. 그것은 경건함, 애정, 정열 고통, 회의, 관능, 자부심, 힘의 온갖 영역과 감정을, 그것의 표현을 찾아 내려고 했다. 오직 끈질긴 천재만이 대리석 청동, 점토 등으로 이런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기베르티와 도나텔로가 그렇게 햇을 때 그들은 조각의 영역 안으로 회화의 방식과 원근법과 뉘앙스를 도입하고, 생생한 표현을 위해서 황금시대 그리스 조각에서 요구되던 이상적 형식과 평온한 조화를 희생시켰다.

 

186 조각이 그리스 시대 최고의 표현 방식이었듯이, 이제는 영역을 넓히고 형태를 다양하게 하고, 또 기술을 발전시킨 회화가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그리고 특징적인 미술 영역이 되었다. 바로 르네상스의 얼굴이며 영혼이 된 것이다.

 

189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마사쵸는 탁월한 주인인 자연에게 말고 다른 안내를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소용없는 헛고생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완벽한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190 프라 안젤리코와 더불어 회화는 미적인 표현이자 즐거움이면서 둥시에 종교적 수행이 되었다. 그는 많은 그림에서 기도 드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먼저 기도를 올리지 안호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없었다. 사나운 삶에서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그는 모든 것을 신의 보상과 사랑의 찬사라고 여겼다.

 

191 수도사들이 어떤 여행자라도 받아들여서 환대를 하도록 되어 있는 병원 입구 위에 걸리 아치형 창에서 안젤리코는 나중에 그리스도임이 밝혀지는 나그네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든 나그네를 그리스도를 대하듯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193 내가 또 다른 아펠레스(고대 그리스의 화가-옮긴이)였다는 것이 내 자랑이

     되지 않게 하소서.

 

     , 그리스도여, 내가 얻은 모든 것을 당신의 신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일부는 지상을 위한 일이었고 일부는 천국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나 죠반니는 토스카나 도시 피렌쩨의 자식었습니다.

 

201 어떤 통치자도 일찍이 코시모처럼 지혜롭게 너그러운 적이 없었다. 아니면 인류의 발전에 그렇듯 순수한 관심을 가졌던 경우는 없었다. 피치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플라톤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그러나 코시모에게 입은 덕도 그에 못지 않다. 그는 플라톤이 내게 개념을 주었던 그 미덕들이 나를 위해 현실로 만들었다." 그의 통치 아래서 인문주의 운동은 활짝 꽃피어났다.

 

4장 황금시대 1464~1492

 

211 그는 피치노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내 정신이 공적인 일들의 어수선함으로 혼란스럽고 내 귀가 시끄러운 시민들의 불평으로 멍멍할 때에 내가 학문에서 기분 전환을 찾지 않는다면 그런 투쟁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학문이라는 말로 그는 온갖 형식의 지식을 추구했다.

 

213 그는 영향력을 발휘해서 강한 국가에 맞서 약한 국가를 방어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나라들 사이의 이익 추구와 싸움을 화해시키고, 모든 전쟁 원인을 싹부터 잘라내려고 애썼다. 이 행복한 10년 동안(1480~1490) 피렌쩨는 정치, 문학, 예술에서 그 영광의 절정에 도달했다.

 

213 귀치아르디니는 이렇게 말했다. "피렌쩨가 폭군을 가져야 한다면 이보다 더 낫거나 더 즐거운 폭군은 있을 수가 없다." 상인들은 정치적 자유보다 경제적 번영을 더 좋아했다. 재산이 어는 계층은 공공사업이 늘어난 덕분에 계속 바빴고, 로렌쪼가 빵과 놀이를 공급해 주는 독재 정치를 용서했다. 마상 창 시합은 부자들을 유혹했고, 경마는 중산층에게 짜릿한 기쁨을 주었으며 축제의  행렬은 주민 전체를 즐겁게 했다.

 

216 유럽 전역을 통해 자기 시대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사람이라고 찬양 받던 이 사람의 모습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덕성과 매너, 복합성과 다양성을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221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 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짐승은 어미의 몸에서 나올 때 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고의 정신(천사들)은 시작부터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하느님 아버지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

 

224  천사들의 찬양을 받기 위해 하늘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

     이것을 보자마자 쓸어올렸네.

     그 순수한 빛깔의 손으로 이 게으른 머리카락을,

     친절하고 상냥한 그 얼굴.

     그 눈길로부터 불꽃같은 영혼, 그 달콤한

     사랑의 영혼을 그녀는 내 영혼을 향해 던졌네.

     그것을 알아챈 순간

     완전히 불타오름을 내 어찌 피할 수 있으리.

 

237 천재라는 낭만적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은 르네상스 피렌쩨였다. 곧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정신에 이끌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43~244 그는 분명 로랜쪼와 쥴리아노를 위해 <베누의 탄생>(1480)을 그렸다. 새침 떠는 누드의 여인이 황금의 조개껍질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 나온다. 그녀의 긴 황금색 머리카락이 유일한 옷가지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서풍이 바람을 일으켜 그녀를 해변으로 불어 보낸다. 왼편에서는 꽃무늬가 들어간 흰옷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시모네타일까?) 여신에게 그 사랑스러움을 가릴 외투를 주고 있다. 이 그림은 우아함의 걸작이다. 이 그림에서 도안과 구도가 모든 것이다. 색채는 오히려부수적이고, 사실성은 무시되고 있으며 모든 것은 떠다니는 선의 리듬을 통해 공기와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져 있다.

 

5장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 1492~1534

 

262 베키오 궁전에는 이런 대회의를 개최할 방이 없었으므로 시모네 폴라유올로에게 내부를 개조해서 500인실을 만들돌고 했다. 이 방에서 분과별 회의가 가능했다. 8년 뒤 이 방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서로 마주보는 벽에 벽화를 그리는 그 유명한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

 

263 이러한 개혁의 실행을 돕기 위해 사보나롤라는 교구의 소년들로 도덕 경찰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경마와 행렬 체조 놀이와 품행 나쁜 친구와 음란한 문학과 춤과 음악학교를 피하기로 맹세하고 또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들 희망 소년단은 교회를 위해 헌금을 얻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노름하려고 모인 사람들을 쫓아 보내고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이라고 판정되면 여자들이 걸친 옷을 찢어 버렸다

 

264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 인간은 천성적으로 미덕의 존재가 아니며 사회적 질서는 에고들, 가문들, 계층들, 종족들, 신앙들 사이의 공개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갈등 가운데 유지되는 것이다. 피렌쩨 공동체에서 강력한 요소가, 본능의 배출구로서 혹은 이윤의 원천으로서 술집과 사창가와 도박장을 갈망했다.

 

279 그러나 미술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프라 바르톨로메오는 사보나롤라 초상화에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 페랄의 지롤라모의 초상화"라고 적었다.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자주 듣고 그의 설교문을 열심히 읽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서 붓을 움직이고, 또 제단 뒤편에 두려운<최후의 심판>을 이끌어 간 것은 바로 사보나로라의 정신이었다.

 

280 사보나롤라의 위대함은 도덕 혁명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에 들어 잇따. 그는 인간을 정직하고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며, 또 그리스도가 소수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성공한 일에서 사보나롤라가 실패한 것이 ㅈㄴ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혁명만이 인간의 일에서 진정한 진보를 표시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런 노력이 없이 인간 이외의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일, 역사상 있었던 유혈의 전복들은 일시적이고 소용도 없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282 1520~1524년 사이에 미켈란젤로는 추기경 쥴리오 데 메디치를 위해서 성 로렌쪼 예배당에 에 새로운 성구실을 고안했다. 단순한 4각형에 아담한 둥근 천장을 가진 이 방은 오늘날 미켈란젤로의 가장 섬세한 조각들이 들어 있는 방, 곧 메디치 무덤으로 온 세계에 알려져 있다.

 

286 대부분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그도 일곱 살에 견습공노릇을 시작하여 아주 빠르게 발전했다. 스승인 피에로는 젊은이의 도안 솜씨에 경탄했다. 그리고 휴일에 작업장 문을 닫으면 사르토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베키오 궁전의 500인실을 위해서 그린 유명한 밑그림의 모습들을 스케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288 그 음영(깊이와 입체감의 명료함)의 대가둠은 티찌아노와 틴토레토와 베로네제의 풍성한 색채보다도 더욱 끌리는 면이 있다. 사르토에게는 다양성이 부족하다. 그의 그림들은 너무 협소한 주제와 감정의 영역 안에서만 움직인다. 보통의 모습에 사랑스럽고, 나중에는 싫증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울 뿐이다.

 

289 미술에서 피렌쩨의 위대한 시대는 1430년 코시모가 망명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1530년 안드레아 델사르토가 죽으면서 끝났다.

 

290  그러나 위대한 현은 건려졌고 그 음악이 반도 전체를 꿰뚫고 메아리쳤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 심지어는 프랑스, 스페인, 헝가리, 도이칠란트, 터키 등지에서 주문이 피렌쩨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미술가들이 그 지식과 양식을 배우기 위해 피렌쩨로 뜰 지어 찾아왔다.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6장 밀라노

 

306 그러나 아버지 쟌갈레아쪼에게서는 한곳에 앉아 있는 요기로 나타났던 것이 필리포에게서는 한 곳에만 앉아 있는 용기로 나타났던 것이 필리포에게서는 한곳에만 앉아 있는 소심함으로 나타났다.  그는 늘 암살 공포에 시달렸고, 인간의 믿을 수 없는 속성에 대한 괴로운 신념에 시달렸다. 그는 밀라노의 포르타 죠비아 성에 틀어박혀 먹고 뚱뚱해지고, 미신을 품고 점성술사들을 좋아했다.

 

310 그는 잘생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대한 남자들이 그랬듯이 그도 또한 관심을 분산시키는 이 결함(잘 생긴 것)을 면제 받았다. 그의 얼굴은 너무 통통하고 코는 너무 길고 구부러진 데다 턱은 지나치게 넓고 입술은 너무 꼭 다물어졌다.

 

314 피렌쩨가 사보나롤라 앞에서 벌벌 떨면서 사랑과 예술의 허영들을 불태우던 시기에 음악과 느슨한 도덕성이 로도비코의 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남편들은 아내들의 사랑을 눈감아 주고 그 대가로 자기들도 바람을 피웠다. 가면무도회가 빈번했고 수많은 즐거운 의상들이 수많은 죄악을 가려 주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마치 이 도시의 성벽 안에 빈곤이 활개 치고 있지 않다는 듯이, 마치 나폴리가 밀라노를 붕괴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다는 듯이

 

326 대성당이 쟌갈레아쪼 비스콘티의 기념비이고 파비아 수도원(체르토사 디 파비아)이 로도비코와 베아트리체의 사원이라면, 대병원(오스페달레 마죠레)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짜의 단순하지만 당당한 기념비이다.

 

7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331 르네상스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은 1452 4 15일에 피렌쩨에서 약 95킬로미터 떨어진 빈치 마을 근초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결혼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녀를 유혹했던 피에로 단토니오는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피렌쩨의 법률가였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피에로는 자기처럼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카테리나는 농부 남편을 맞아들였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피에로와 그 아내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어머니의 사랑 없이 절반쯤 귀족적인 안락함 속에서 양육되었다. 아마도 이런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그는 아름다운 의상에 대한 취향과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얻었을 것이다.

 

332 그가 열다섯 살이 되자 아버지는 그를 피렌쩨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으로 데려가서 이 재능 많은 예술가에게 아들을 견습생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했다. 교육받은 사람은 누구나 바사리가 전해 주는 이야기를 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중에서 왼편에 있는 천사를 그렸다는 것, 그리고 스승은 이 천사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해서 그림을 포기하고 조각에 전념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333 당시 이탈리아에 동성애가 그토록 널리 퍼져 있었는데 오직 자신과 몇 명의 친구들만 그렇게 심문을 받은 것에 대해 레오나르도가 미심쩍게 여긴 것은 합당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가두었던 일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피렌쩨를 용서하지 않았다.

 

334 그러나 실은 그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인체의 모든 자세와 행동, 젊은이와 늙은이의 모든 얼굴 표정, 동물과 식물의 모든 기관과 움직임, 들판에서 밀이 물결치는 모양에서부터 공중을 나는 새들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산들이 침식되거나 높아지는 것, 물과 바람의 흐름과 소용돌이, 날씨의 변화, 기압의 변화, 하늘의 무진장한 만화경,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끝없이 놀라웠다. 그는 수천 페이지의 공책을 그들에 관한 관찰과 수많은 형태의 스케치로 채웠다.

 

335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시작하면서 너무 풍부한 상상을 했고, 세부적인 것들에 실험적으로 빠져들면서 자기를 잊었다. 원래의 주제를 넘어서 인간, 동물, 식물, 건축 형태, 바위 산, , 구름, 나무들의 끝도 없는 모습을 신비스러운 명암으로 바라보았다. 그림의 기술적인 완성보다는 그 철학에 빨려 들어갔고, 의미를 드러내느라 바빠서 이 인물들에게 색을 주는 일처럼 덜 중요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 손에 넘긴 것이다.

 

339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 그리고(바사리가 덧붙인 말에 따르면)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많이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두 가지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고 레오나르도는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에 어울리는 모습을 구상하는 것과 유다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그리고 자기는 어쩌면 너무나 자주 만나는 수도원장의 얼굴을 유다 얼굴의 모델로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슬쩍 덧붙였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지역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사도들의 모습에 도움이 될 만한 얼굴과 머리들을 찾고 있었다. 이런 탐색을 수없이 하면서 그는 여러 모습들을 선택해서 이 그림 안에 용해시켜 넣어 이 걸작의 기적을 만든 개성 뚜렷한 머리들을 찾고 있었다. 이런 탐색을 수없이 하면서 그는 여러 모습들을 선택해서 이 그림 안에 용해시켜 넣어 이 걸작의 기적을 만든 개성 뚜렷한 머리들을 그토록 놀랍게 표현했다.

340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의 뒤편에 있는 세 개의 창문을 통하여 풍경을 도입했다. 동작을 대신해서 그는 그리스도가 사도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리라는 예언을 방금 했고, 그래서 사도들이 각자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놀라움을 드러내면서 나입니까?”하고 묻는 긴장된 장면을 선택했다. 성찬식 장면이 선택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13개의 얼굴은 모두 움직이지 않은 채 판에 박힌 듯한 진지함으로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여기서는 과격한 신체적 행동 이상의 것이 있다. 정신이 탐색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 예술가가 하나의 그림 안에서 그렇게 많은 영혼을 드러낸 경우는 두 번 다시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들 사도들을 위해 수도 없이 습작 스케치를 했다. 이들 중 일부, 즉 큰 야고보, 빌립보, 유다 등은 오직 렘브란트와 미켈란젤로하고만 견줄 수 있는 섬세함과 힘찬 필치로 그려져 있다.

 

344 그보다 스물두 살 아래인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부러진 코와 그토록 대조를 이루는 레오나르도의 아름다운 모습에 분개했고, 또 가난했던 그는 레오나르도가 그렇게 부유한 생활을 유지할 경비를 어디서 찾아내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347 그해 10월에 피렌쩨 정부의 수반인 핑트로 소데리니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게 베키오 궁전 500인회의실 벽에 벽화를 그려 달라고 제안했다.

 

350 여러 세기를 통하여 그녀에게 행운을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 미소이다. 눈 속에 방금 나타난 생기와 입술의 양끝이 유쾌하게 살짝 올라간 모습. 그녀는 대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인가?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연주하는 악사들의 노력을 향해서일까? 아니면 수없이 많은 날들을 애쓰고도 끝을 내지 못하는 화가의 부지런함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모나리자가 미소 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여성이 남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정열에 빠진 가엾은 애인들아! 자연은 당신들의 신경이 맹목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향하여 부조리한 갈망으로 타오르게 하고, 당신들의 두뇌로 하여금 우리의 매력을 아주 분별없이 이상화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으니…. 그래야만 당신들은 아비가 되는 것이겠지! 이 보다 더 웃기는 일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도 덫에 걸리기는 마찬가지. 우리 여자들은 당신들의 그런 열중보다도 더 호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그래도 사랑스러운 바보들아,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여전히 기쁜 일이고, 사랑을 받을 때면 삶이 되살아난다.”

 

351~352 아니면 모나리자가 보여 주는 것은 레오나르도 자신의 미소였던 것일까? 여성의 손길의 부드러운 접촉을 연상시키지 않는 도착된 영혼의 미소. 사랑이나 천재에게 외설스러운 해체 말고 다른 운명은 없다고, 인간의 건망증 속에 가물거리며 스러져 가는 작은 명성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던 영혼의 미소일까?

 

356 그의 장점은 그의 단점들의 더 나은 측면이다. 성적인 도착증은 아마도 그에게 일에 몰두할 여지를 남겨 주었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민감함은 보통 사람의 눈길에는 보이지 않는 현실의 단면들을 그에게 열어 보였다. 그는 특이한 얼굴을 가진 사람의 뒤를 좇아 수많은 거리들을 통과하여 하루 종일 따라 다니다가 나중에 작업장에서 마치 그 모델을 이리로 데려온 것처럼 훌륭하게 그 얼굴을 스케치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일 강은 현재 지상의 모든 바다에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을 바다로 내보냈다.” 따라서 모든 바다와 강은 셀 수 없이 여러 번이나 나일 강의 입을 통과한 셈이다.”

 

356 그의 호기심 도착증, 민감성, 그리고 완전욕,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냈다. 즉 시작한 일을 완성할 능력이 없거나 의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그는 구성, 색채, 혹은 도안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 모든 예술 작품을 시작했다가 해결책이 발견되는 순간 작품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술은 구상과 도안의 문제이지 실질적인 실천이 문제가 아니었다. 실행은 그보다 못한 정신의 작업이었다. 아니면 그는 자신의 끈질긴, 마지막에는 끈질기지 못한 손길이 실현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섬세함, 중요성, 완성도 등을 자신에게 요구했다가 절망에 빠져 노력을 포기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바로 그 같은 경우다. 그는 너무 빨리 한 가지 일이나 주제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너무 많은 일들에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통합하는 목표, 주도하는 이념이 없었다. 보편인(전인)’은 빛나는 부분들을 이어 붙여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능력들을 지녔기에 그들을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내 시간들을 낭비했다.”

 

357 그는 5000쪽에 달하는 글을 썼지만 단 한 권도 완성하지 못했다. 양으로만 따지면 그는 화가라기보다 저술가였다. 그는 자신이 120종의 원고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중 50종이 남았다.

 

358 그의 기본 원칙은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 화가여, 보라, 들판에 나가거든 여러 사물들에 주의를 돌리고 사물을 차례로 하나씩 자세히 바라보고 이들 별 가치가 없는 것들 중에서 여러 가지를 골라내라.”

 

364 그의 시대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방법을 실험보다는 경험과 동일시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기억하라, 물에 대해서 논할 때는 먼저 경험을 인용하고 나서 이치를 말하라.” 한 사람의 경험이란 현실의 극히 미세한 단편 이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자시의 경험을 독서로 보충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대리 경험인 셈이었다.

 

364 “어떤 생각을 논함에 있어 권위를 인용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작업하지 말고 자신의 (경험의) 기억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자기 시대 사상가들 중 가장 덜 신비적이었다. 연금술과 점성술을 거부했고 한동안은 모든 점성술사들이 거세되기를기대했다.

 

364 “수학이나 수학에 기초한 그 어떤 요소를 적용할 수 없을 경우 확실성이란 없다.” 그리고 당당하게 플라톤의 말을 되풀이했다.” 수학자가 아닌 사람은 내 작품의 어떤 부분도 읽지 말 것.

 

369 그는 어떤 구절에서는 겸손과 열렬함으로 신에게 말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 서는 신을 자연, 자연의 법칙, ‘필연성과 동일시했다. 생애 마지막 시기까지 신비적인 범신론이 그의 신앙이었다.

 

370 그는 단순한 유언을 했으나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교회의 모든 성사를 요구했다. 한번은 이렇게 적었다. “하루를 잘 보내면 그 잠이 달다. 그렇듯이 삶을 잘 보내면 그 죽음이 달다.”

372 그는 르네상스의 인간이 아니엇다. 그토록 강하고 격렬하던 시대를 대표하기에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신사적이고 내성적이고 섬세했다. 그리고 보편인도 아니었다. 그의 다양성에는 정치가나 행정가의 자질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르네상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천으로부터 한 사람이 왔었다는 것, 그가 인류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8장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382 오늘날 우피찌에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도 아마 로렌쪼를 위해 그렸을 것이다. 성모는 크지만 아릅답고, 배경에는 벌거벗은 남자들이 그려져 잇다. 여기서 어쩌면 미켈란젤로는 도니의 <성가정>을 위한 암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391 서쪽으로는 토스카나, 남쪽으로는 라티움, 그리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변방지대에 막힌 채 산이 많은 움브리아 지방이 이곳저곳에 테르니, 스폴레토, 아씨시, 폴리뇨, 페루지아, 구비오 같은 도시딜을 자랑한다.

 

9장 만토바 1378~1540

 

401 누구나 페루지노 회화의 결점들을 안다. 과장된 감상, 슬픔에 젖은, 인위적인 신앙심, 언제나 똑 같은 갸름한 얼굴과 리본 모양의 머리, 그리고 겸손하게 앞으로 숙인 머리, 심지어는 단호한 카토와 대담한 레오니다스까지도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407 그는 고대 로마에 빠져 그 영웅들을 이상화하고 그 예술을 숭배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 절반은 로마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미술은 이러한 젊은 날의 사랑을 통해 많은 장점을 얻었고 동시에 결함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런 모범으로부터 도안의 당당한 품위와 엄격한 순수성을 배웠지만 그러나 그의 그림은 조각적인 형태의 돌과 같은 냉정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411 “라 프라마 돈다 델몬도.(세계 제일의 여성)” 시인 니콜로 다 코레죠는 이사벨라 데스테(Isavella d’Este, 에스더 가문의 이사벨라)를 이렇게 불렀다. 소설가 반델로(Bandello)자유롭고 너그러운 이사벨라에게서 무엇을 최고라고 칭찬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상냥한 아름다움, 절도, 지혜,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태도 중에서 말이다. 그녀는 교육받은 르네상스 여성을 역사상 걸작의 하나로 만들어 주는 교양과 매력을 대부분 지녔다. 그녀는 지식인이 되지 않고도, 혹은 매혹적인 여성이기를 중단하지 않고도 폭넓고 다양한 문화를 지녔다.

 

416 그녀는 극성스럽게 값을 흥정했다. 소박한 나라의 재정이 그녀의 생각을 받쳐 주기에는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수집품은 작지만 물건마다 각 분야에서 소중한 것들이다. 그녀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만테냐, 페루지노, 프란치아의 회화 작품들을 가졌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죠반니 벨리니에게 끈질기게 그림을 부탁했다. 그들은 그녀가 현찰보다는 찬사로 보상하는 사람이라고 여겨 그녀의 부탁을 물리쳤다. 또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그림이 무엇을 나타내야 하고, 어떤 것을 그려야 하는지 항상 간섭했다.

 

418 또한 남편 쟌프란체스코나 아들 페데리고가 정치적 재앙의 가장자리에 설때마다 이들 정복자들을 한 사람씩 유머로, 아첨으로, 매력으로 홀렸다. 1519년에 아버지 뒤를 이어받은 페데리고는 유능한 장수이며 통치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부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만토바 궁정을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아마도 이런 모욕을 피해 이사벨라는 로마로 가서(1525) 다른 아들 에르콜레를 추기경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다. 클레멘스 7세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추기경들은 그녀를 환영하고 콜론나 궁전에 그녀 일행을 위해 살롱을 만들어 주었기에 그녀는 그곳에 오래 머물고 있다가 로마 유린 기간 동안(1527)이 궁전에 갇히게 되었다. 그녀는 그 유능함을 이용해서 거기서 도망치고, 아들에르콜레를 위해 간절히 바라던 추기경 자리를 얻고, 승리에 가득 차서 만토바로 돌아왔다.

 

10장 페라라 1378~1534

 

423 사람들 생활의 중심점은 12세기의 대성당이었다. 엘리트 그룸은 니콜로 2세가 외국의 침략이나 내부의 폭동에서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1385) 거대한 성(카스텔로)을 더 좋아했다. 7세대에 걸쳐 복구하고 형태를 변화시키면서 이 성의 거대한 탑들은 아직도 도시의 중앙 광장을 지배하고 있다.

 

424 공정함을 위해 당시 성직 임명이 적절함과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시대의 외교적 결합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야겠다.

 

436 내게 샤를과 그의 군대가 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림자 속에 쉬면서 부드럽게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추수하는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본다. , 그대 나의 필리스여, 너의 하얀 손을 가지각색 꽃들 사이로 뻗쳐 네 목소리가 만드는 음악에 맞추어 내게 화관 하나를 짜 주렴.

 

440  분노하고 불친절하고 거친 사람들이

     바닷가 야수에게 바친

     아름다운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

     자연이 처음으로 그녀의 사랑스러운 형태를 빚을 때처럼

     알몸으로 가장 작은 베일 한 조각도

     그 살결의 하얀 백합과 붉은 장미들을 가리지 않았으니,

     한여름 더위도 한겨울 추위도 망가뜨리지 못한

     아름답게 빛나는 팔다리에 어린 저 광채를.

 

     그에게는 그녀가 설호석고나 대리석으로

     조각가가 기술을 다해 만든 조각상을

     바위에 붙여 놓은 것으로 보였으리,

     그가 만일 그녀 뺨의 장미와 하얀 꽃 사이로

     흘러내린 맑은 눈물이

     사과처럼 단단한 젖가슴을

     적시는 것을 못 보았다면, 그리고 산들바람이

    황금빛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을 못 보았다면.

 

아리오스토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글을 쓴다. 그는 자신의 시구의 마법을 통해 우리를 비현실적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요정들과, 마법의 무기들과 여러 가지 마법으로 신비롭게 만든다.

 

11장 베네찌아와 그 영토 1378~1534

 

449 많은 해자로 둘러싸인 성에 안전하게 앉은 베네찌아는 이탈리아 본토의 정치적 흥망성쇠에 대해 면역을 가진 듯이 보였다. 이 도시의 부와 힘은 점점 커져서 마치 이탈리아의 머리에 옥좌를 놓고 앉은 여왕처럼 보였다. 1495년 프랑스 대사 자격으로 이곳에 도착한 필립 드 코미네는 이 도시를 가리켜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승리에 가득 찬 도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적대국인 밀라노에서 온 피에르토 가솔라는 그 아름다움과 당당함과 부를 묘사할 길이 없다고 여겼다. 117개의 섬, 150개의 운하, 400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대운하(카날 그란데)의 유유한 물의 산책로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길을 보고 코미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라고 표현했다.

 

459 15세기 마지막 몇 십 년, 그리고 16세기의 처음 몇 십 년은 베네찌아 생활에서 가장 화려한 광채의 시기였다. 터키와는 평화를 이룩하고, 아프리카 지역과 대서양의 입구를 둘러싼 지중해 지역에서 아직 심각한 위축을 겪기 전이라 세계 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이 베네찌아 섬들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돈으로 섬들마다 교회들을 세우고, 운하 주변으로 궁전들이 벽처럼 늘어서고, 궁전마다 소중한 금속과 값비싼 가구들로 가득 채우고, 여자들은 아름다운 의상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뛰어난 화가들을 잔뜩 배출하고, 벽걸이를 단 곤돌라의 화려한 축제와 가면을 쓰고 벌이는 사랑놀이가 흘러넘치고, 바다에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469 베네찌아 예술의 영광은 성 마르코 성당과 총독 궁전 다음으로는 그 회화에 있다. 많은 힘들이 합쳐져 화가들을 후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다른 곳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도 교회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했다. 당시 글을 읽을 수 잇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교회는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설교의 효과를 지속시키키 위해서 그림과 조각상들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세대마다, 교회마다, 수도원마다 『수태고지』, 『그리스도의 탄생』, 『경배』, 『성모마리아가 에리자베트를 방분함』, 『문안』, 『어린이 학살』, 『이집트로 도망감』, 『그리스도의변모』, 『최후의 만찬』, 『십자가에 매달림』, 『그리스도의 매장』, 『부활』, 『승천』, 『순교』등의 그림이나 조각을 소장하려 했다.

 

476 『레오다노의 총독』을 보라. 이해의 깊이, 눈의 예리함, 벨리니 손길의 재치 등은, 이탈리아의거의 모든 강대국과 알프스 북쪽 유럽까지 합세한 기습에 맞서 베네찌아 사람을 지휘하여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남자의 확고하고 침착한 힘을 잡아 내고 있다!

 

482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색채보다는 구상에 있었다. 드레스덴 미술관의 가격을 측정할 수 없는 보물인 『잠자는 베누스』를 그렸을 때 그는 어쩌면 그녀가 수누하게 감각적인 의미에서 유혹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는 유혹적이다. 동시에 이 작품은 베네찌아 미술이 그리스도교 주제에서 이교도 주제 및 감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베누스에는 도발적이거나 암시적인 요소는 없다. 그녀는 불확실한 이유에서 자연 속에 완전히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다. 붉은 쿠션과 하얀 비단 의상을 깔고 누었는데, 오른팔로 머리를 받치고, 왼손이 나뭇잎 노릇을 하고, 완전히 드러난 다리 하나가 그 아래 감추어진 다리 위해 걸쳐져 있다. 미술 작품이 여성의 몸의 부드러운 살결을 이렇게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자연스러운 포즈의 우아함을 이렇게 드러내 주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벌거벗은 미녀와 어울리기 힘든 순수함과 평화가 깃들어 있다. 죠르죠네는 여기서 스스로 선악을 넘어 미적 감각이 욕망을 누르도록 만들고 있다.

 

487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의 사랑』은 현대적인 제목을 달고 잇어서 티찌아노가 되살아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 그림이 처음으로 언급되었을 때는(1615) 『치장한 아름다움과 치장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도덕이 아니라 이야기를 치장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세속적인나체는 티찌아노의 그림 중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밀로의 베누스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스러운숙녀도 세속적이다. 보석을 박은 허리띠가 눈길을 끌고, 비단 드레스는 만져 보라고 재촉 하는 것 같다. 그녀는 아마도 『플로라』와 『화장하는 여인』을 위해 포즈를 취했던 바로 그 풍만한 여자일 것이다. 충분히 오래 바라보는 구경꾼은 이 두 모습 뒤에 있는 복잡한 풍경을 보게 된다. 식물과 꽃들과 두툼한 관목의 숲, 양떼를 몰고 가는 양치기, 두 명의 연인들, 토끼를 쫓는 사냥꾼과 개들, 도시와 그 탑들, 교회와 그 종탑들, 죠르죠네 방식의 녹색 바다, 구름 낀 하늘.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우리가 모른다 해도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잠시 머물도록만들어진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파우스트가 생각한 영혼의 가지가 아닌가?

 

488 티찌아노가 바쿠스에서 그리스도로, 베누스에서 성모에게로 넘어갔다가 또 돌아왔다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그는 그런 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1518년 그는 프라리 교회를 위해서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을 제작했다. 곧 『성모의 승천』이었다.

 

490 여기서 잠시 티찌아노 베첼리를 그대로 놓아두기로 한ㄷ. 그의 후기 경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533년 이후로 그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가 된 사람(카를 5세 황제)이 관련된 정치적 사건들의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티찌아노는 1533년에 쉰여섯 살이었다. 그가 앞으로도 43년이나 더 살면서 지난 50년만큼 이나 숱한 걸작들을 만들어 내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503 예민한 벰보는 친구들인 비비에나, 키지, 라파엘로 등이 죽은 다음 로마가 유령의도시라고 느꼈다. 그래서 페트라르카처럼 그는 파도바 근처 시골집에서 건강과 편안함을 찾았다. 쉰 살이 된 그는 온화한 플라톤 방식으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었다. 다음 22년간 그는 모로시나라는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그에게 세 아이를 낳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명성이 베풀어 주지 못한 안락함과 위안과, 염려와 보살핌을 주었다.

 

504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렸네, 내 생명을 부드럽게 지켜 주던 마음, 자신의 생명을 잊고 내 생명을 사랑하고 유지해 주던 그 마음, 스스로 주인이었던 그 마음, 값비싼 장식과 꾸밈과 비단과 금과 보석과 보물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가 지닌 사랑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며(그녀 자신의 말에 따르면)만족했던 그 마음. 이 마음은 의복 대신 가장 부드럽고 우아하고 훌륭한 팔다리를 지녔다네. 그 마음은 이렇게 봉사할 때 즐거운 모습을 보였고, 또 내가 이 땅에서 만난 중에 가장 달콤하고 또 가장 품위 있는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네.

 

그는 그녀가 죽어 가면서 남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을 당신에게 맡겨요.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그 애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드려요. 그들은 모두 당신의 아이들입니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속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주님의 성체를 평화로운 영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한참 쉬고 난 다음 그녀는 덧붙였어. “하느님과 함께하세요.” 그리고 몇 분 뒤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네. 삶을 통해 고단하게 방황하던 나를 밝게 비쳐 주던 성실한 별이었던 그 눈을 말일세.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1534

 

519 그렇게 짧은 생애로 그가 이룩한 것은 엄청나다. 라파엘로가 처음 40년 동안 보여 준 것만 빼고는 레오나르도, 티찌아노, 미켈란젤로 그 누가 이룩한 것보다 도 더 많았다. 코레죠는 선의 우아함, 윤곽의 부드러운 입체감, 인간 육체의 살아 잇는 살결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아주 대등했다. 그의 색채는 흐르는 듯한, 빛을 발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것은 반사와 투명성이 살아 있고, 보라, 오렌지, 핑크, 청색, 은색 등의 색채로 뒷날 베네찌아 화가들의 빛나는 밝은 광채보다 더욱 부드럽다. 그는 명암법의 대가였다.

 

531 그들은 음모, 배신, 칼의 도덕 말고 다른 어떤 도덕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들의 현실을 힘없이 반영한 것이다. 피와 철이 잉크로 바뀌었을 분이다. 현실에서 비스마르크의 정책이 니체의 펜을 통해 책으로 바뀐 일과 같다.

 

541 딸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이 실망하실 거라곤 생각 안 해요. 그렇지만 전보다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세 번이나 고약한 열 발작을 겪었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고, 다시는 열병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더 쓰지 못하겠어요.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생각합니다.

                                                

                                             -고통으로 약간 지친 당신의 아내 이폴리타-

 

543 쥴리오 로마노가 이 기념묘를 설계하고, 벰보는 이 무덤을 위해 우아한 비명을 작성했다. 그러나 돌에 새겨진 가장 아름다운 말은 카스 틸리오네 자신이 아내의 무덤을 위해서 썼던 시구이다. 그녀의 유해는 이제 그녀의 뜻에 따라 그의 유해와 나란히 묻혔다.

 

          Non ego nunc vivo coniunx dulcissima vitam

          Corpora namque tuo fata mean abstuleunt,

          Sed vitam tumulo cum tecum condar in isto,

          Iungenturque tuis ossibus ossa mea:

 

          나는 이제 사는 게 아닙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여,

          운명이 당신의 육체에서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갔으니.

          그러나 내가 당신과 같은 무덤에 눕고

          내 뼈가 당신의 뼈와 합쳐지는 날 나는 살게 됩니다.

 

13장 나폴리 왕국 1378~1534

 

556 시칠리아는 르네상스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우리스파와 같은 몇 명의 학자와 안토넬로 다 메씨나와 같은 몇 명의 화가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머지 않아 훨씬 더 기회가 많은 이탈리아 본토로 건너가고 말았다. 팔레르모, 몬레알레, 체팔라 등지는 위대한 미술품을 간직하고 있지만 오로지 비잔틴과 이슬람교와 노르만 시대의 유품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땅을 소유한 봉건 영주들은 15세기보다는 11세기를 더 좋아했고, 기사 계급이 지닌 학문에 대한 경멸 혹은 무시를 그대로 지닌 채 살았다. 그들이 착취한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색깔이 풍부한 의상과 밝은 모자이크와 침울한 희망의 종교, 그리고 사랑과 폭력에 관한 노래와 단순한 시()말고는 달리 문화적 표현을 찾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섬에는 1295년부터 1409년까지 아라곤 가문의 왕과 왕비들이 있었다 이어서 다음 300년 동안 이 섬은 스페인 왕권의 보석이 되었다.

 

558 규모가 더 큰 예술들과 함께 이 모든 공예 분야와, 또 이들 사랑스럽고 격렬한 폭발성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노동과 사랑, 속임수와 정치적 수완, 헌신과 전쟁, 성실함과 철학, 지식과 미신, 시와 음악, 미움과 유머 등이 모두 합쳐져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고, 또 메디치가 이끄는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다시 파멸에 이르게 했다.

 

 

 

 

 

 

■ 내가 저자라면

 

<문명이야기>-르네상스편은 1304년 페트라르카의 탄생부터 1576년 티찌아노의 죽음까지의 기간에 이탈리아에서의 삶의 모든 국면을 전체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그 삶은 유럽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 로마 문명으로 복귀하려는 '르네상스'을 의미한다. <문명이야기>-르네상스편 5-1은 크게 세 가지 줄기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페트라르카'라는 인물중심으로 그가 활동한 이탈리아 도시와 그가 만난 사람들과 그가 남긴 작품들,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그 시대의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번째 피렌체의 르네상스(1378~1534)는 메디치 가문의 성장을 통해 르네상스의 중심도시인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세 번째 이탈리아의 축제행렬(1378~1534)은 르네상스 시대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 '레오나르도 다빈치'을 중심으로 주변 도시와 그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렇게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인물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위대한 영웅들이 살았던 도시와 지배세력, 문학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큰 제목을 인물중심으로 나눠보면 어떨까?

1. 르네상스의 아버지 '페트라르카'

2. 르네상스를 이끈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로렌쪼'

3. 르네상스를 완성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 책은 앞서 읽었던 <그리스인 이야기>보다 다소 낯설었다. 아무래도 이탈리아 문학 예술가들이 생소해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 서두에 자리잡고 있는 예술작품들의 사진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진을 보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좋은 느낌을 가졌다. 하지만, 책장을 앞뒤 반복하며 들춰보는 수고스러움이 시간이 지나자, 불편함과 실망으로 변해버렸다.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이 있는 지면에 사진이 함께 있어야 작품을 바라보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 보면서, 예술가에 대한 매력에도 흠뻑 빠져볼 수 있으리라.

보카치오와 그의 작품 '데카메론'이 나온 시대적 배경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으며, 후반부에는 그 동안 이름으로만 인식되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위대한 영웅의 인간적인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내가 만약 저자라면, 독자의 흥미와 재미를 읽는 동안 유지하기 위해서 시대적 상황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르네상스 지도'을 펼쳐주고 싶다. 책 속에 각 장의 제목으로 달려있는 지명의 이름이 계속해서 언급이 되는데, 지도 하나 들어있지 않아서, 사건의 상황들을 그려보고 전개시켜 나가기가 힘들었다. 낯선 내용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지도를 통해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면, 딱딱하고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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