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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7일 09시 5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윌 듀런트(will Durant)

 

1885 115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스 애덤스출생. 1981117사망

노스 애덤스와 뉴저지 주 커니의 카톨릭부설학교에서 수학

저지시의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와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학

뉴저지주 사우스 오렌지에 소재. 세튼홀 칼리지에 자리를 잡음, 그곳에서 라틴어와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침.

 

뉴욕의 가장 진보적인 자유주의 교육 실험 학교인 페레르 학교로 자리를 옮김

학교에서 러시아태생 아이다 카우프만(제자)와 사랑에 빠져 교직을 사임하고 그녀와 결혼

컬리비아대학에서 4년간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1917년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동 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침.

1914년부터 13년간 주2회씩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 역사와 문학, 철학의 강의.

1926년 출간된 <철학이야기>의 성공으로 1927년 교직을 떠남(경제적여유가 생김)

 

교직을 떠난 후 하루 8시간-14시간을 <문명이야기> 집필에 바침.

문명이야기 집필에 철저한 준비를 위해

1930년 이집트와 근동, 인도 중국 일본 증지를 탐방

1932년 일본과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폴란드 등지를 방문.1935<동양문명> 문명이야기시리즈 제1권 발행.

2 <그리스 문명>1939년과 <카이사르와 그리스도>1944 유럽방문을 몇 번 거친 후 발행.

4 <신앙의 시대>1950 1948년 터키와 이라크 이란 이집트 유럽 등지에 체류하며 준비

5 <르네상스> 1953년 출간

6<종교개혁> 1957년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국에 대한 추가연구를 시작하여 발간.

7 <이성의 시대> 1961년 이 책부터 듀런트여사 공동집필로 올림

<루이14세의 시대> 1963

<볼테르의 시대> 1965

<루소와 혁명>

<나폴레옹의 시대> 1975

 

문명이야기는 듀런트부부의 50년간에 걸친 작품임.

 

우연히 접한 스피노자의 철학서가 그를 철학의 길로 인도하고 그때부터 철학으로 인생의 방향을 잡고 교수가 되어 강의를 시작함. 그의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된 출판사에서 그의 강의를 소책자형식으로 출간하게 됨. 이것이 <철학이야기>인데 베스트셀러가 되어 듀런트 부부는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됨.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문명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결심하고 오랜 시간 연구하고 공부하며 11권의 대작을 완성함.

 

나의 의견

 

대작의 작은 부분을 접한 느낌은 좋은 파트너를 만나서,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평생 집필한 저자는 행복한 삶을 살다간 표본이란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 준 책에 대한 생각도 다르게 다가온다. 경제적 여유라는 부분은 느끼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왠지 듀란트란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심플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은 학교를 떠나게 만들지만 그와의 행복한 삶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고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시작한 강의라기 보다는 가볍게 시작한 강의가 14년이란 시간 동안 이어지면서 그것이 히트작이 되어 경제적 자유를 주었고, 주어진 자유를 선택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와 집필을 하면서 평생을 살다간 사람이란 참으로 멋진 자유인이란 생각이 든다.

 

(참고자료)

문명이야기, 윌 듀란트 저, 안인희 옮김, 민음사

네이버 백과사전 윌 듀런트 http://100.naver.com/100.nhn?docid=51609

네이버 책 철학이야기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29602

http://blog.aladin.co.kr/704638105/5010828

http://www.willdurant.com/home.html

http://www.powys-lannion.net/Powys/America/Durant.htm

http://en.wikipedia.org/wiki/Will_Durant

http://www.quotationspage.com/quotes/Will_Durant/

 

 

2.       내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1304-1375

 

48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는 천재를 배출하고 또 추방했네

 

49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리비에라 해안의 장관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산등성이로 왕관처럼 펼쳐진 마을은 경사로를 따라 푸른바다와 연결되었다. 젊은 시인은 이것이 “:지상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51 그녀는 그의 숭배를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멀리했으며, 그의 정열을 용감하게 거부했다.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이 한동안 진진했다는 사실은 뒷날 관능적 요소에 대한 그의 후회와, 거절당한 사랑의 정화시키는 영향에 대한 그의 감사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51 파테라르카는 한 편지에서 법률가들과 신학자들, 아니 자신의 하인조차도 운을 맞추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머지않아 “소들까지도 운을 맞추어서 울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51 강물을 따라 혹은 언덕들 사이로 산책하고, 무릎 꿇고 저녁 기도나 미사를 드리고, 방의 정적 속에서 동사와 형용사들 사이로 길을 찾아 헤매면서 다음 21년 동안 그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살아있는 라우라에게 바치는 소네트207편과 온갖 종류의 다양한 시들을 썼다.

 

52 그의 시가 담고 있는 생각이야 이방인이 번역할 수 있겠지만 주군들 그 음악을 번역할 수가 있을까?

 

54 라우라에게 바치는 소네트 사이로 그는 애인과 놀아나면서 사생아 둘이나 두었다.

 

54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산지와 숲과 강물 사이로 내가 어떤 즐거움을 지니고 방랑하는지 당신이 아실는지요”

 

55 겉으로는 카톨릭교의 모든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정신으로 고대와 더불어 살았다.

 

 

56 그가 보인 고대에 대한 관심의 부활은 인간과 지상, 감각적 즐거움의 정당성, 개인적인 불멸을 대체하는 인간의 영광 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를 키워 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는 중세의 관점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일반적인 동의에 따르면 페트라르카는 최초의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이 지상의 삶에 관심을 가질 권리를 명백하게 묘사한 최초의 작가이며, 또한 지상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증가시켰고, 부유함을 얻기 위해 노동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르네상스의 아버지였다.

 

그는 단체처럼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라틴어를 자신의 언어로 선택했다.

 

58 그녀를 피암메타(작은 불꽃)라 부르고 스스로 그녀의 불길 속에 타 버리기를 원했다. 교회법은 모두 잊었고, 전에 배운 계율도 모두 다 잊었다. 여러 달 동안 어떻게 하면 그녀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몰두했다. 혹시 그녀가 나타날까 하는 희망만을 품고 교회에 가고 그녀의 창문 앞으로 난 거리를 지나다녔다.

 

59 작은 불꽃은 다른 먹이를 찾아 나섰고 보카치오는 물러나서 시에 전념했다.

 

62 우리들 모두가 그렇듯이 그도 갈채를 좋아했다. 명성을 갈망하고 문학적불멸을 원했다. 르네상스의 전조시대에 일찌감치 벌써 그는 가장 오래 지속될 르네상스의 표지 하나를 지녔으니, 곧 명예를 향한 갈망이었다. 그는 경쟁자들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고 어리석게도 그들의 서툰 글귀에 답변을 했다. 그는(비록 부인하기는 하지만)단테의 인기를 보고 어느 정도 속을 태웠다. 또 단테의 사나움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잔인성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 무뚝뚝한 피렌째 사람(단테)에게 어떤 깊이가 있어서 가벼운 펜으로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정신의 절반이 프랑스 사람인 페트라르카는 너무나 세련되어서 세계의 절반을 함부로 욕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드높이고 지치게 만들 정열이 부족했다.

 

63 “철학은 머리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고, 섬세한 구별과 말재간을 늘어놓기 위한 것이다”

이 학문은 똑똑한 토론자를 만들어 내기야 하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고 했다. . 그는 철학 분야의 석사니 박사니 하는 높은 학위를 비웃었다.

 

68 스스로 법이 되는 일에 익숙해져 있던 귀족들은 자기 영지에서 행해진 범죄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일부는 많은 벌금을 냈다.

 

69 자유가 그렇듯이 권력도 오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다. 리엔쪼는 현실정치가 되기에는 웅변가로서 지나치게 위대했다.

 

73 리엔쪼는 방에 숨어 서둘러 수염을 깎고 문지기의 망토를 입고 머리에 이불을 덮어썼다. 그는 들키지 않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황금 팔찌 때문에 들통이 나서 카피톨리니 언덕 계단을 끌려왔다.

 

74 뒷날 이 집안사람들은 상속이나 암살을 통해 권력을 물려받았다.

 

76 아베로에스는 개인 영혼의 불멸성에 의문을 던지고, 그리스도교를 쓸모 있는 미신으로 여기고 교육받은 사람은 그것을 버린다고 말했다.

 

81 이따금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사실적인 초상화는 과거의 미술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동작에서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들이 비잔틴 미술의 경직됨과 어둠을 누르고 죠토가 승리한 요소들이다. 그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백 년 뒤 피렌쩨미술은 그의 모범과 영감을 이어 받았다.

 

타데오는 죠토의 견습공으로 화가 일을 시작했다. 1347년에 그는 피렌쩨 화가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겸손하게 “훌륭한 스승 죠토의 제자”라고 서명했다. 그는 화가와 건축가로서의 사업을 통해 엄청남 부자가 되어 그의 후손들은 미술의 후원자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82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천재들이 그렇듯 그도 여러 분야의 대가였다. 화가로서 그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부속 스트로찌 예배당에 채색 제단화인 <옥좌에 앉은 그리스도>를 제작했다.

 

83 건축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가장 덜 성공한 예술 분야였다.

 

84 상인들의 황금은 예술로 바뀌고 상인과 장인들의 시끄러운 가게들도 변하고, 산업적이고 반항적이고 격하기 쉽고 지적인 대중의 주택들도 변했다. 자아의 격렬함 속에서 르네상스가 태어났다.

 

이탈리아 문학의 최초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룩한 곳은 피렌쩨였다. 그곳에서 귀니첼리와 카팔칸티가 13세기말에 소네트이 완성된 형태를 만들었다. 그곳은 아니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단테는 이탈리아 서사 문학의 최초이자 최후의 진정한 음악을 피렌쩨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보카치오는 이탈리아 산문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고, 죠반니 빌라니는 가장 현대적인 중세 연대기를 썼다. 1300년 기념의 해에 로마를 방문하고서 마치기번이 강력한 과거의 폐허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처럼 빌라니도 한동안 피렌째 역사를 기록할 구상을 했다.

 

87 하나는 폐를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고열에 시달리다가 피를 토하고 보통 사흘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는 임파선을 통한 전염으로 열이 나고 종기와 등창이 일어났다가 보통 닷새 만에 죽었다. 이 질병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면서 1348년에서 1365년 사이에 이탈리아 인구의 절반 가량이 죽었다. 시에나의 연대기 기록자는 1354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친척도 친구도 수도사도 수도원장도 시체를 따라 묘지를 가지 않으며 관청도 죽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다. …도시의 많은 곳에 매우 넓고 깊은 구덩이를 파 이곳에 시체들을 던져 넣고 흙을 조금 덮었다. 구덩이가 가득 메워질 때까지 이렇게 켜를 이루며 계속되었다. 그러고 나면 또 다른 구덩이를 팠다. 나 아뇰로 디 투라는 …내 손으로 다섯 아이를 한 구덩이에 파묻었다. 시체들은 하도 얕게 덮여서 개들이 파내 시체를 먹고 도시 사방으로 시체의 팔다리를 흩어 버렸다. 벨도 울리지 않고 아무도 그 무엇을 잃어도 울지 않았다. 거의 누구나 다 죽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 이것은 세계의 종말”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믿었다.

 

92 미사여구를 포함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리에서능변이고 생생하고 예리하며 생명에 넘치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처럼 맑다. 이것은 삶에서 사랑에서 나온 책이다. 천년 동안 이탈리아에 생긴 최악의 재앙 속에서 보카치오는 그 생명력으로 다음다움, 유며, 선량함, 즐거움 등이 아직도 지상을 산책하고 있음을 볼 용기를 찾아냈다

 

96 시에나와 구비오, 산 지미냐노, 시칠리아등의 지역들은 르네상스를 견디고 살아남았다. 그들은 한 번도 죽지 않고 끈질기고 미묘하게 자기들의 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98 유능한 행정관과 장군을 찾아내는 그들의 기술은 군대에는 승리를, 밀라노에는 부유함을 가져다주었다. 모직물산업에 덧붙여 비단 산업을 육성했다. 그리고 도시의 무역을 확장시켜 줄수로들을 늘렸다. 그들은 신하들의 생명과 재산에 안전을 확보해줌으로써 자유를 잊게 만들었다.

 

98 인간에 대해 욕망의 승리, 그리고 욕망에 대해 순결의 승리. 승리에 대해 죽음의 승리. 죽음에 대해 명성의 승리. 명성에 대해 시간의 승리. 시간에 대해 영원성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99 14세기 이탈리아는 이토록 부유했다. 같은 시기에 백 년 전쟁을 벌였던 영국은 파산상태에 이르고 프랑스는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을 때였다.

 

100 이들 모험적인 기업가들은 1340년 무렵에는 복식부기를 발전시켰고, 1370년에는 해양보험을 개발했다.

 

100 나는 재 저택만큼이나 크고, 마스트는 저택의 탑들보다 더 높은….배들을 보았다. 그들은 물 위에 떠 있는 산들 같았다. 그들은 지구의 온갖 부분에서 짐작할 수 없는 위험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포도주를 잉글랜드로 꿀을 러시아로, 사프란과 기름과 린넨을 아시리아,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아라비아로, 목재를 이집트와 그리스로 나른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가득 싣고 돌아오고 이 물건들은 여기서부터 세계의 모든 곳으로 운송된다.

 

이렇듯 튼튼한 무역은 금융업자들에 의해 투자된 개인 기금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이들 금융업자들은 14세기에 이미은행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말은 그들이 환전 테이블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의자(banco)에서 유래한 것이다.

 

104그는 베네찌아에 머무는 동안 <황제의 의무와 미덕>과 연쇄 대화편인<행운과 불운을 위한 요법>등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번성할 때는 겸손을, 불운에서는 용기를 권고한다. 지상의 승리나 재물에 행복을 연결시키지 말라고 경계한다. 그리고 치통 비만 아내를 잃는 일 명성이 흔들리는 일 등을 견디는 법을 가르친다.

 

105 페트라르카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중용의 길을 선택하라고 간청했다. 사랑의 시들과 단편 소설쓰기를 그만두고 라틴과 그리스 고전을 진진하게 탐구하라고 권한 것이다. 보카치오는 “존경하는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여 서유럽에서 최초의 그리스 인문학자가 되었다.

 

107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기를 바란다. 글을 쓰고 있을 때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다면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에 젖어 있을 때 말이다. 일흔 살 생일인 1374년 7월20 그는 책에 기댄 모습으로, 분명히 잠들었다가 죽었다.

 

110 이탈리아의 분열이 르네상스에는 이로웠다. 큰 국가들은 자유와 예술보다는 질서와 권력을 키운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업적 경쟁은 십자군 전쟁을 도입하고 완성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경제와 복지를 발전시켰다.

 

2장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131 당신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해야 할 일은 교회의 진짜 보물인 양 떼를 모두 되찾는 일입니다. 양 떼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정말로 가난해 질 것이니까요…당신은 선의의 사랑과 평화의 무기로 사람들을 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전쟁의 무기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 d온 세계를 위해 무엇이 가장 좋은지 제가 하느님께 물어보니 오로지 평화! 평화!라는 답변을 받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를 위해 평화를!

 

132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서로 대립적인 두 가지 그리스도교도의 모습. 종교재판과 성인들의 모습말이다. 공정하기 위해서는 당시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교도들이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교회의 기본 교리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34 그녀에게 극히 힘든 집안일을 맡겼으나 그녀는 전혀 불평하지 않고 그 일을 해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을 위한 작은 구석을 따로 뗘어 놓았다라고 말하면서 어린이와 같은 명랑함을 유지했다.

 

137 이탈리아의 단순한 민중이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중간계층과 상류층은 고대의 문화라는 오래 묵은 포도주에 절반쯤 취해서 고귀한 열정으로 르네상스와 현대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피렌쩨의 르네상스  1378-1534

 

3장 메디치가문의 떠오름 1378-1464

 

142 페트라르카와 다른 수많은 이탈리아 학자들 덕분에 새로 발견된 고전 문헌들은 이탈리아 문학을 복구시켜 키케로 산문의 순수한 정밀함과 특성을 얻고, 베르길리우스 시구의 달콤한 음악성을 지니게 할 참이었다.

 

142-143 돈은 문명의 뿌리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기금과 교회의 기금이 필사본들을 사들일 돈을 지불했고, 이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중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리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교회의 교리를 의심하고 지옥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여자와 남자, 예술의 드러난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1434-1543)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파괴적인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계율,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143 이탈리아는 고대 문명과 무역이 이루어지던 지중해를 지휘하면서 그곳을 가로지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는 당시 플랑드르 지방을 제외하면 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더 도시와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북부 이탈리아는 한 번도 완전히 봉건 국가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 귀족들을 도시와 상인 계층에 복종하게 만들었다. 이곳은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과 알프스 이북 유럽의 교역 통로였고, 서유럽과 레반트지역(동부 지중해의 섬과 연안 제국)의 연결통로였다. 북부 이탈리아의 상공업은 이 지역을 가장 부유한 그리스도교 지역으로 만들었다. 모험적인 무역상인들은 프랑스의 年市연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흑해의 항구들에 이르기까지 어디든지 갔다. 그리스 아라비아 유대 이집트 페르시아 힌두 중국 사람들과의 무역에 익숙해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 교리의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

 

144 르네상스란 시간상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과 사유의 방식이다. 그것은 상업, 전쟁, 사상의 통로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당파 싸움은 삶과 사유의 기질을 더욱 달구었다. 경쟁하는 집안들은 권력을 추구할 때처럼 예술에 대한 후원에서도 경쟁을 벌였다. 여기서 최초는 아니지만 최종적인 자극이 덧붙여졌다.

 

145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정복당했을 때(1453)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피렌쩨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14년 전과 똑 같은 환대를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고대 텍스트의 필사본들을 지니고 왔다. 이렇게 다양한 영향들이 합쳐지면서 르네상스는 피렌쩨에서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피렌쩨는 이탈리아의 아테네가 되었다.

 

146 1300년에 이미 피렌쩨의 방직업계는 거액의 투자와 원료 및 기계의 중앙공급, 체계적인 노동분업, 자본 공급자가 생산을 통제하는 것 등 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1407년에 모직 의상 한 벌은 30개의 공정을 통과해서 생산되었고, 특수한 기술을 가진 노동자가 각 공정의 일을 맡았다.

 

146 피렌쩨 공장주들과 경쟁하는 외국 생산품은 상인과 금융업자들로 이루어진 정부가 매기는 보호 관세로 인해 피렌쩨 시장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147 일부 피렌쩨 회사들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에게 1365000플로린(34125000달러?)을 빌려 주었다가 그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바람에 파산했다(1345) 그런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피렌쩨는 13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유럽의 금융수도였다. 유럽 통화들의 환율이 피렌쩨에서 결정되었다. 1300년에는 이미 이탈리아 화물의 해상운송을 보호하기 위해 보험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1543년에야 비로소 도입된 제도였다. 1382년 피렌쩨 회계 장부에는 복식 회계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149 피렌쩨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했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피렌쩨의 주인들에 의해 통치를 받을 자유이고, 부자들 사이에서는 황제나 교황이나 봉건적인 장애물이 없이 도시와 속국을 통치할 자유를 뜻하는 것이었다.

 

150 피렌쩨에서 정치란 부유한 가문들과 당파들이 정권을 두고 벌인 갈등이었다.

 

152 관직에 선출되는 일은 몸에는 불리하고 정신에도 해롭다.

154 코시모가 시작하고 로렌쪼가 물려받아 게속 한 이러한 세력 균형 정책은 이탈리아 반도에 1450년에서 1492년에 이르는 수십 년간 평화와 질서의 시기를 마련해 주었고, 바로 이 기간 동안 도시 국가들은 부유해져 초기 르네상스를 후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56 인류에 대한 연구가 이제는 인간이 되어야했다. 인간 신체의 모든 잠재된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고 그의 감각과 느낌의 온갖 즐거움과 고통을 지닌, 또 그의 이성의 허약한 위엄을 지닌 것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풍성하고 완벽하게 나타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인문주의였다.

 

167 이승에서의 이런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후원자들의 열망이야말로 르네상스 시대 예술과 문학에서 가장 강력한 생산력을 가진 힘이었다.

 

168 아메리카 대류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세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 문학과 철학에서의 변화는 인간의 정신에 지구의 일주와 탐색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간을 교리에서 해방시키고, 또 죽음에 대해 명상하기보다는 삶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유럽인의 정신을 해방시킨 것은 탐험가들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169 위로 뻗어 올라간 아치와 높이 치솟은 둥근 천장을 지닌 고딕양식은 고통스러운 지상에서부터 위로 치솟아 하늘을 향하는 섬세한 정신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유함과 편안함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했다. 삶에서 도망치거나 그것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지상은 천국이 되고 그들 자신이 신들이 되고 싶었다.

 

180 모든 사람이 자신을 찬양하는 파도바에서 자신의 예술은 발전할 수 없다. 예술을 위해 피렌쩨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비판하는 그곳으로

 

두 사람 사이가 하도 가까워서 도나텔로는 극히 작은 암시만으로도 코시모가 원하는 것을 알아낼정도였다.

 

181 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자세와 도안에 너무 힘을 들였다. 또한 기베르티의 문이 보여 주는 것 같은 완성된 형식이 그에게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가 아름다움이 아니라 삶을, 단순히 힘차고 건강한 육체가 아니라 복잡한 성격이나 정신적 상태를 표현하려 한 것이 바로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는 인물상을 종교 분양에서 세속의 분야로 확대함으로써, 또 자신의 주제에 전례 없는 다양성과 개성과 힘을 부여함으로써 인물 조각을 발전시켰다. 수많은 기술적 난제들을 극복하면서 르네상스가 남긴 최초의 거대한 기마상을 만들어 냈다. 도나텔로가 배우고 성취하고 가르쳐 준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단 한 사람의 조각가만이 그보다 더 위대한 높이에 도달했다. 베르톨도는 도나텔로의 제자였고 위대한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183 르네상스의 많은 예술가들처럼 금세공사로 시작하여 작은 초서체 문자분야부터 도안의 섬세한 부분까지 배우고 돋을새김 조각으로 넘어갔다.

 

184 14세기 아탈리아에서는 회화가 조각을 지배했다. 15세기에는 조각이 회화를 지배했다. 16세게에는 회화가 다시 주도권을 차지한다. 아마도 죠토의 천재성이 14세기에, 도나텔로의 천재성이 15세기에,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와 티찌아노의 천재성이 16세기에 나타난 것이 이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천재는 시대 정신의 원인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186 조각이 그리스 시대 최고의 표현 방식이었듯이, 이제는 영역을 넓히고 형태를 다양하게 하고, 또 기술을 발전시킨 회화가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그리고 특징적인 미술 영역이 되었다. 바로 르네상스의 얼굴이며 영혼이 된 것이다.

 

189 저 대담한 누드, 우아한 의상, 놀라운 원근법, 사실적인 단축, 정교한 해부학적 디테일, 섬세한 단계를 드러내는 명암을 통해 깊이를 얻는 형태 등을 통해, 모든 사람을 바사리가 현대양식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출발을 느꼈다. 피렌쩨 근처에 있던 야망에 찬 화가들은 모두 이리로 와서 이 벽화를 탐구했다.

 

마사쵸는 탁월한 주인인 자연에게서 말고 다른 안내를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소용없는 헛고생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완벽한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199”인간은 자기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정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요 예술가치고 몇 가지 예술 분야에서 탁월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50년뒤에 오는 레오나르도처럼 알베르티도 열 가지 이상의 분야에서 거장 아니면 적어도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수학, 기계학,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시 연극 철학 시민법과 종교법의 분야였다.

 

4장 황금시대 1464-1492

 

211 “내 정신이 공적인 일들의 어수선함으로 혼란스럽고 내 귀가 시끄러운 시민들의 불평으로 멍멍할 때에 내가 학문에서 기분 전환을 찾지 않는다면 그런 투쟁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학문이라는 말로 그는 온갖 형식의 지식을 추구했다.

 

221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은 학교에서 항상 듣는 평범한 소리다. 인간의 몸은 땅의 원소들과, 천상의 정신과, 식물의 혼과, 하등 동물의 감각과, 이성과 천사의 정신과 신과의 유사성이 뒤섞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피코는 아담에게 들려주는 말의 형식으로 인간의 제한 없는 능력에 대한 신의 증언을 들려준다.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도 지상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너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새로 태어날 수도 있다.” 여기에다 피코는 젊은 르네상스의 높은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짐승은 어미 몸에서 나올 때 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고의 정신(천사들)은 시작부터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

 

237 아테네를 빼면 피렌쩨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미술과 미술가에게 중요성을 부여했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투었고, 또 마치 우리가 오늘날 배우와 여배우 이야기를 하듯이 미술가들의 일화들을 이야기했다. 천재라는 낭만적 개념을 만들어 내 것을 르네상스 피렌쩨였다. 곧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정신(라틴어로 genius, 곧 천재)에 이끌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37 회화는 점차 조각을 밀어내고 인기 있는 미술 장르가 되고 있었다. 화가들이 사라져 버린 고대의 벽화에서 아무런 가르침도 제약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38 그들의 기술과 용기가 늘어나고 또 세속의 후원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오래된 종교적 주제들과 더불어 고대 신화 이야기와 이교적인 육체의 풍성함을 주제로 선택했다. 그들은 자연을 작업장으로 끌어들이거나 그들 스스로 자연으로 나아갔다. 인간이나 자연의 그 어떤 것도 그들 눈에 예술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어떤 얼굴이라도 미술은 그 빛나는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은 세계를 기록했다. 전쟁과 정치가 이탈리아를 포로로 삼아 폐허로 만들었을 때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선과 색채, 그 생활과 정열을 뒤에 남겼다.

 

242 어쩌면 모든 미술가들은 이상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관능적인 사람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육체를 미적 감각의 최고 원천이며 기준으로 여기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243 “보티첼리는 많은 집에….많은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렸다.” 그리고 그가 삶에서 심각한 무질서를 보았다. 고 비난한다. 인문주의자들과 동물적인 정신들이 그를 한동안 에피쿠로스철학으로 데려갔다. 그는 분명 로렌쪼와 쥴리아노를 위해 <베누스의 탄생>1480년 을 그렸다. 새침 떠는 누드의 여인이 황금의 조개껍질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 나온다. 그녀의 긴 황금색 머리카락이 유일한 옷가지다.

 

249 평온한 마음과 여가를 품위 있게 즐기는 것보다 더 소망스러운 것이 무었이겠는가? 이것은 모든 선량한 사람이 원하는 것이지만 위대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일이다.

 

250 천천히 얻은 미덕이었지만 정치에서의 신중함, 단순하지만 설득력이 있는 논쟁에서의 언변, 행동할 때의 결단력과 용기 등은 몇 사람만 빼고 모든 피렌쩨 사람들에게 그의 가문이 피렌쩨의 자유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피렌쩨의 자유란 실은, 인구의 30분의1만이 투표권을 가진 민주주의체제에서 부유한 가문들이 착취의 우선권을 차지하기 위해 폭력과 속임수로 경쟁을 벌이는 자유였음을 기억했다. 로젠쪼는 자신의 권력을 온건하고 또 국가에 유리하게 행사했다.

 

5장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 1492-1534

 

253 세습 권력의 이점은 계속성이고 그 맹점은 평범함이다.

 

255 그는 부모에게 속세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저벼린 것을 용서해 달라는 온건한 편지를 써 보냈다.

257 너희는 돈을 버는 많은 방법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너희들이 합법적이라 부르지만 대단히 불공평한 교환방식을 찾아냈다. 너희는 도시의 관리자들을 타락시켰다. 그 누구도 고리대금이 죄라고 너희를 설득할 수가 없다. 너희는 영혼을 위험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지킨다. 아무도 높은 이자로 돈 빌려 주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아니 다른 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보로 여겨지는 판이다….너희들의 얼굴은 창녀의 얼굴이요, 그래서 너희는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너희는 즐겁고 좋은 삶은 이익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영혼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64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 인간은 천성적으로 미덕의 존재가 아니며 사회적 질서는 에고들, 가문들, 계층들, 종족들, 신앙들 사이의 공개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갈등 가운데서 유지되는 것이다. 피렌쩨 공동체에서 강력한 요소가, 본능의 배출구로서 혹은 이윤의 원천으로서 술집과 사창가와 도박장을 갈망했다.

 

279 사보나롤라는 중세가 살아남아 르네상스에 출현한 경우였다. 르네상스는 그를 파괴했다. 그는 부의 영향 아래서, 그리고 종교적 믿음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도덕적인 붕괴를 보았다. 그는 용감하고 광신적으로 시대의 감각적이고 회의적인 정신에 맞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280 사보나롤라의 위대함은 도덕 혁명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에 들어 있다. 그는 인간을 정직하고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며, 또 그리스도가 소수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성공한 일에서 사보나롤라가 실패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혁명만이 인간의 일에서 진정한 진보를 표시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런 노력이 없이 인간 이외의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일, 역사상 있었던 유혈의 전복들은 일시적이고 소용도 없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282 정치적 흥분의 시대는 보통 문학에는 자극제가 된다.

 

피렌쩨는 1492년처럼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위대한 예술가를 가졌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피렌쩨의 혼란을 피해 도망쳐 다른 곳에 명성을 남겼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가고, 미켈란젤로는 볼로냐로, 안드레아 산소비노는 리스본으로 갔다.

 

284 “능력을 가르쳐 주고, 또 행복을 늘려 준 사람이 자기를 낳아 준 진정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284 피에로는 모임이나 우정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예술가로만 지냈다. 자연과 고독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과 풍경에 받아들였다. 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술을 두 명의 제자에게 남겼는데, 그들은 그의 예를 따라 스승을 능가하는 사람들이었다. 곧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이다.

 

287 피렌째로 돌아온 사르토는 왕의 돈으로 자신의 집을 짓고 살면서 다시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88 사르토에게는 다양성이 부족하다. 그의 그림들은 너무 협소한 주제와 감정의 영역 안에서만 움직인다. 100장에 이르는 성모 그림은 언제나 똑 같은 이탈리라의 젊은 어머니이다. 보통의 모습에 사랑스럽고, 나중에는 싫증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누구도 구도에서 그를 능가하지 못했고, 해부학, 입체감, 도안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보다 뛰어났다. 미켈란젤로는 라페엘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피렌쩨에는 어린 친구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위대한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면 자네 이마에도 진땀깨나 나게 될 거야

 

289 피렌쩨는 예술 분야에서 하도 풍부해서 샤를 8세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침략자, 교황, 백만장자 등을 견디어 낼 수가 있었고, 아직도 여전히 섬세한 공예품들을 지니고 있기에, 르네상스200년 동안 이 한 도시에 감추어진 모든 보물을 다 탐구한 사람은 없다. 혹은 다만 100년만이라도, 미술에서 피렌쩨의 위대한 시대는 1430년 코시모가 망명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1530년 안드레아 델사르토가 죽으면서 끝났다. 시민들의 갈등, 사보나롤라의 청교도적 통치, 포위와 패배와 흑사병 등은 로젠쪼 시대의 즐거운 정신을 파괴하고 부서지기 쉬운 예술이라는 리라를 깨뜨려 버렸다.

그러나 위대한 현은 건드려졌고 그 음악이 반도 전체를 꿰뚫고 메아리쳤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 심지어는 프랑스 스페인 헝가리 도이칠란트 터키 등지에서 주문이 피렌째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미술가들이 그 지식과 양식을 배우기 위해 페렌쩨로 떼를 지어 찾아왔다. 페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루지노, 라파엘로 등등 피렌쩨 출신 미술가 100명이 이탈리아 도시 50군대와 외국으로 미술이라는 복음을 가져갔다. 50개의 도시들에서 시대의 정신과 취향, 부의 너그러움, 기술의 유산 등이 피렌쩨의 자극과 더불어 함께 작용했다. 알프스에서 칼라브리아에 이르는 이탈리아 전체가 그림 그리고, 목재나 돌을 다듬고, 건축하고, 구도를 잡고 노래하고 창의력의 열광 속에 빠졌다.  이렇듯 서두르는 열렬함으로 그것은 부유함이 곧 전쟁 속에 사라질 것이고 이탈리아 자부심은 외국의 폭군 아래 비천한 상태가 될 것이고 르네상스 인간의 놀랄 정도로 풍부한 정신에 맞게 다시 교리의 감옥 문들이 정신을 닫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6장 밀라노

 

297 전제 군주들을 전쟁만큼이나 교육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학교와 도서관을 세우고 아카데미와 대학들을 후원했다. 이탈리아의 도시마다 학교가 있었고 보통은 교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주요 도시에는 대학이 있었다. 인문주의자와 대학과 궁정의 교육을 통해서 일반적인 취향과 태도가 개선되었다. 이탈리아 사람 절반은 예술의 판관이 되었고, 모든 중요한 지역마다 고유의 예술가와 고유의 건축 양식을 가졌다. 교육받은 계층을 위해 삶의 즐거움이 이탈리아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퍼졌다. 태도는 상대적으로 세련되면서도 본능은 전례 없이 자유로웠다. 아우구스투스 대제의 시대 이후로 천재가 이렇듯 청중을 얻고 이토록 자극을 주는 경쟁 상대를 갖고, 또 이렇듯 자유로움을 누린 때는 달리 없었다.

304 그는 밀라노에서 파비아에 이르는 대운하를 마늘고, 알프스에서 밀라노를 거쳐 포 강에 이르고 다시 아드리아 해에 이르는 북부 이탈리아를 횡단하는 수로를 개통했다. 그리고 수많은 농지에 물을 공급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산업이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밀라노는 모직물 산업에서 피렌쩨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310 우리는 왕자들을 가르치는 것이지 학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경고했다. 그녀는 아들들이 통치와 전쟁의 기술에 능통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311 그는 자기 시대 가장 능숙한 외교관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때로는 동요하고, 자주 멀리 돌아가고, 항상 양식적이지는 않고, 이따금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은 르네상스 외교의 공통된 결함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외교에 필수적인 요소일지도 모른다.

 

313 베아트리체는 로도비코에게 왔을 때 열네 살 소녀였다. 그녀는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녀의 매력은 삶에 대해 지닌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태도였다.

 

323 르네상스 시대에 학문은 정열이 되고, 문학은 전쟁이 될 수도 있었다.

 

324 전제 군주의 통치는 이탈리아 미술에 하나의 은총이었다. 10명 이상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수도와 자기들의 추억을 장식할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을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였다. 이런 경쟁에서 그들은 민주주의 제도에서라면 배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아름다움을 위해 투입했다. 또한 예술을 위해 인간의 노동과 천재의 결실이 그토록 많이 투입된 경우는 없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그 결과는 형식과 주제 면에서 너무나 자주 세속적인 지배자와 교회 권력가의 요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궁정의 특징과 귀족적 취향을 지닌 예술이었다. 많은 사람의 노동과 기여를 통해 공동체를 위한 선물과 영광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고귀한 예술이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사원들이 모두 그랬다.

 

7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331 르네상스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은 1452년 4월 15 피렌쩨에서 약 95킬로미터 떨어진 빈치 마을 근처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결혼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녀를 유혹했던 피에로 단토니오는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피렌쩨의 법률가였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피레로는 자기처럼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레오나르도는 어머니의 사랑 없이 절반쯤 귀족적인 안락함 속에서 양육되었다. 아마도 이런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그는 아름다운 의상에 대한 취향과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얻었을 것이다.

 

333 당시 이탈리아에 동서애가 그토록 널리 퍼져 있었는데 오직 자신과 몇 명의 친구들만 그렇게 심문을 받은 것에 대해 레오나르도가 미심쩍게 여긴 것은 합당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가두었던 일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피렌쩨를 용서하지 않았다.

334 인체의 모든 자세와 행동, 젊은이와 늙은이의 모든 얼굴 표정, 동물과 식물의 모든 기관과 움직임, 들판에서 밀이 물결치는 모양에서부터 공중을 나는 새들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산들이 침식되거나 높아지는 것, 물과 바람의 흐름과 소용돌이, 날씨의 변화. 기압의 변화, 하늘의 무진장한 만화경,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끝없이 놀라웠다. 그것이 아무리 되풀이되어도 그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는 수천 페이지의 공책을 그들에 관한 관찰과 수많은 형태의 스케치로 채웠다.

 

335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시작하면서 너무 풍부한 상상을 했고, 세부적인 것들에 실험적으로 빠져들면서 자기를 잊었다. 원래의 주제를 넘어서 인간, 동물, 식물, 건축 형태, 바위, , , 구름, 나무들의 끝도 없는 모습을 신비스러운 명암으로 바라보았다. 그림의 기술적인 완성보다는 그 철학에 빨려 들어갔고, 의미를 드러내느라 바빠서 이 인물들에게 색을 주는 일처럼 덜 중요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 손에 넘긴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노동을 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손과 물감이 구체화시킨 꿈의 불완전함에 절망해서 떠나갔다. 이것은 몇 가지 예외를 빼고는 마지막까지 레오나르도의 성격과 운명으로 남을 특징이었다.

 

335 그는 피렌쩨에 이미 물렸다. 새로운 장소와 얼굴들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핏속에 솟구쳤다.

 

335 가장 빛나는 영주님, 전쟁 기계를 잘 알고 스스로 그런 것을 발명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제시하는 증거물을 충분히 살펴보고 또 생각해 보았거니와, 그들의 발명과 그 기계의 사용법이 지금 흔히 사용되고 있는 것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어느 누구에 대한 편견도 없이 감히 전하께 서신을 올려 제 자신의 비밀을 알리고자 합니다. 다음에 부분적으로 간결하게 서술하는 이 모든 것들을 필요한 시기에 전하의 마음에 맞게 보여 드릴 수 있다고 저 자신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336-337

1. 저는 다리(橋)들의 모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히 가볍고 강하고 또 이동이 매우 쉬운...

2. 포위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해자의 물을 말리는 방법과 무수히 많은 수의...사다리를 올리는 방버을 알며, 또 다른 기계

   들도 알고 있습니다.

4. 운반이 아주 편리한 박격포 모델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가지면 돌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리게 할 수 있고

5. 만일 전투가 바다에 면한 곳에서 이루어질 경우 공격과 방어에 효과적인 기계들과, 또 가장 무거운 대포의 불과 연기와

   폭약에도 견디는 배를 위한 설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6. 그리고 땅굴이나 비밀의 통로를 통해 일정한 지점에 도착할 방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만들수 있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참호나 강물 아래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7. 적이 공략할 수 없도록 안전하게 위를 덮은 수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포를 가진 빽빽한 적의 대열을 통과 할

   수 있고, 가장 강력한 군대라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이 수레들 뒤에서 보병은 아무런 방해도 손상도 안 입고 진격할 수

   있습니다. ...

 

339 수도원장은 공작에게 찾아가 레오나르도의 게으름을 불평하면서 그가 어째서 때로는 몇 시간씩 붓질 한 번 안하고

그림 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공작은 수도원장에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지만 레오

나르도는 아무 문제 없이 공작에게 설명했다.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 그리고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많이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두 가지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고 레오나르도는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에 어울리는 모습을 구상하는 것과 유다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340 그는 거리에서, 아니면 작업장을 갑자기 떠나 이 식당 건물로 날 듯이 달려와서 그림에 붓질 몇 번을 하고는 떠나곤 했다.

 

349 1503-1506년의 기간 동안 레오나르도는 이따금 <모나리자>작업을 하곤 했다. 그것은 1512년 시 의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죠콘도의 세 번째 아내 엘리자베타의 초상화였다. 1499년 매장된 프란체스코의 아이가 엘리자베타의 아이였던 모양이다. 아이를 잃어버린 것이 아마도 라 죠콘다의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심각한 모습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2-3년 동안 그녀를 작업장으로 여러 번이나 오게 했다. 그는 이 초상화에 자신이 지닌 모든 비밀과 뉘앙스를 다 쏟아 부어서 그녀를 부드럽게 빛과 어둠 속에 세우고 나무와 물, 산과 하늘이 있는 상상적인 원경으로 그녀의 주변을 둘러쌌다. 벨벳과 새틴으로 만든 의상을 주름지게 만들었는데 주름 하나하나가 모두 걸작이다. 입술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섬세한 근육들을 정열적인 세심함으로 탐구하고, 악사들을 불러 그녀를 위해 연주하게 해서 떠나간 자식을 기억하는 어머니의 괴로운 부드러움을 그녀의 모습에 일깨운 것. 이런 것들이 그가 그림을 철학과 합친 이 그림에 부여한 정신에 대한 암시가 될 것이다.

 

355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글을 읽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물의 진리는 섬세한 지성에게는 최고의 양식이지만 방황하는 지력을 위한 것은 아니다.

 

357 그는 너무 많은 능력들을 지녔기에 그들을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내 시간들을 낭비했다."

 

361 그는 일생의 절반가량을 인간의 비행에 대하여 생각했다. 톨스토이처럼 그는 새들이 많은 점에서 인간보다 우수하다고 여겨 부러워했다. 새들의 날개와 꼬리의 작동법을 탐구하고, 그들이 떠오를 때, 활주, 회전, 내려앉을 때의 역학을 상세히 연구했다. 그의 예리한 눈길은 이런 동작들을 열정적인 호기심으로 살펴보고, 그의 재빠른 펜은 그것을 스케치하고 기록했다. 그는 새들이 공기의 흐름과 압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관찰했다. 그리고 공기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371 그는 실천보다는 착상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8장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381 스승에게서 단호한 엄격함을 배웠고 미켈란젤로보다 앞서 남성적인 힘을 표현했다. 작업장, 병원, 교수대아래, 공동묘지 등 찾아낼 수 있는 한 어디서나 벌거벗은 인체를 찾아다녔다.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힘을 탐구했다.

 

383 어떤 죄인은 이빨을 부러뜨리고 곤봉으로 대퇴골을 부러뜨리는 고문을 받고 있다. 시뇨렐리는 이런 장면들을 즐거워했던 것일까? 아니면 신앙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것일까? 어찌 되었든 그는 (<적그리스도>의 한 귀퉁이에)구원받은 자의 평온함으로 이 난장판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

 

384 시뇨렐리는 유려한 장인이었다. 그는 해부, 포즈, 원근법, 단축 등에 대한 연구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 또 구도와 장식에 인체를 이용해서 우리를 즐겁게 한다.

 

9장 만토바 1378-1540

 

403 만토바는 행운의 지역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내내 오로지 한 가문이 통치했으므로 시끄러운 혁명과 궁정의 살인, 쿠데타 따위를 겪지 않았다.

 

404 제자를 뽑을 때 출신이나 돈보다는 재능과 열성을 따졌다. 부자 학생에게는 그들이 가진 만큼 돈을 내게 하고, 가난한 학생에게서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

 

405 운도와 노동으로 제자들의 신체를 형성하고 종교와 기율로 그들의 성격을 훈련하고 또 그림과 음악을 가르쳐서 그드릐 취향을, 수학, 라틴어, 그리스어, 고전 문헌 등을 가르쳐서 그들의 정신을 훈련시켰다. 그는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도의 행동과 이교도 지성의 날카로운 명료함, 또 르네상스 인간의 미적 감각 등을 하나로 합치기를 원했다. 건강한 신체, 성격의 강인함, 정신의 풍부함 등을 갖춘 완전한 인간이라는 르네상스의 이방(보편인)은 비토리노 다 펠트레에게서 첫 번째 형태를 갖추고 나타나고 있다.

 

413 미술, 학문, 우정 등에 그녀가 마음을 다 바친 것은 부분적으로는 결혼 생활의 쓰라림을 잊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416 그녀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만테냐, 페루지노, 프란치아의 회화 작품들을 가졌다.

 

10장 페라라  1378-1534

 

419 16세기의 처음 25년 동안에 가장 활발한 르네상스 중심지는 페라라, 베네치아, 로마였다.

 

421 특히 아름답고 인기가 있었던 아내 파리시나 말라테스타는 의붓아들 우고와 간통을 저질렀다. 니콜로는 그들 두 사람의 목을 베고1425년 간통죄를 범한 모든 파라라 여인들도 똑같이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판결이 페라라의 인구를 줄어들게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이 법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430 우리가 지혜라 부르는, 신과 인간의 일들을 이해하는 것만이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그 권리를 보존한다.

 

436 이탈리아사람들은 <분노한 오를란도>를 영국인이 세익스피어 희곡을 읽는 것 이상의 즐거움으로 읽는다.

 

443 작지만 나에게 알맞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상스럽지 않고, 내 자신의 재산으로 얻은 집. 그곳에서 그는 조용하게 살면서 이따금 정원 일을 하고, 매일 <분노한 오를란도>를 고치거나 더 늘렸다.

 

451 베네치아, 117개의 섬, 150개의 운하, 400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디운하(카날 그란데)의 유유한 물의 산책로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길을 보고 코미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라고 표현했다.

 

베네찌아의 상업중심지인 리알토에서는 세계의 절반 지역에서 온 상인들을 볼 수 있었다. 해상 보험이 이런 거래를 보호하고, 수출과 수입에 부과한 세금이 이 국가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451 베네찌아의 정치사는 그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453 이 도시는 무역이 그리스도교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유럽과 의견이 같았던 것이다.

 

455 도시 국가 내부와 외부의 음모를 막기 위해 대의회는 해마다 자체 의원들중에서 국가안전위원회인 10인 위원회를 선출했다.

 비밀스러운 회합과 재판, 여기 속하는 밀정과 신속한 처리 등을 통해서 10인위언회는 한동안 국가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기관이 되었다.

 대사들은 자주 10인위원회에 비밀 보고를 했고, 또 그 지시를 원로원의 지시보다 더욱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10인위원회의 칙령은 법적 효력을 가졌다.

 

459 15세기의 마지막 몇 십 년, 그리고 16세기의 처음 몇 십년은 베네찌아 생활에서 가장 화려한 광채의 시기였다. 터키와는 평화를 이룩하고, 아프리카 지역과 대서양의 입구를 둘러싼 지중해 지역에서 아직 심각한 위축을 겪기 전이라 세계 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이 베네찌아 섬들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460 상류층은 노예들을 두었어도 게으름뱅이는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년이 되면 상업, 재정, 외교, 통치, 전쟁 등에서 활동했다.

 

461 이 도시에는 교회, 광장, 바다가 어우러져 있기에 베네찌아 축제는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화려함과 축제 행렬을 펼칠 핑계는 아주 만았다. 총독의 취임, 종교적 축일이나 국가 경축일, 외국 귀빈의 방문, 다행스러운 평화조약의 체결, 여성들의 축제일, 성 마르코 축일과 또 각 조합 수호 성인들의 축일. 14세기에는 마상 창 시합이 축제의 으뜸 행사였다.

 

465 감각적인 색채가 베네찌아 미술의 핵심이다. 심지어는 건축도 그렇다.

 

469 베네찌아 예술의 영광은 성 마르코 성당과 총독 궁전 다음으로는 그 회화에 있다. 많은 힘들이 합쳐져 화가들을 후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도 교회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당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교회는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설교의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림과 조각상들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세대마다, 교회마다, 수도원마다 <수태고지><그리스도의 탄생><경배><성모마리아가 엘리자베트를 방문함><문안><어린이 학살><이집트로 도망감><그리스도의 변모><최후의 만찬><십자가에 매달림><그리스도의 매장><부뢀><승천><순교>등의 그림이나 조각을 소장하려 했다.

 

470 부자들은 바깥 풍경의 아름다움이나 실내에 있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자기들의 궁전의 벽에 갖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명성의 덧없음을 잠시 잊기 위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상원은 모든 총독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성 마르코 광장에 있는 행정관들조차도 무관심한 후세를 위해 자기들의 모습을 보존하려고 했다. 베네찌아에서 초상화와 이젤 그림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480 1507년에 베네찌아 사람들은 색채 없는 삶이란 죽은 것이라고 느꼈다.

 

493 저 격동하던 백 년 동안(1450-1550) 베네찌아 상업은 수많은 패배를 겪고, 베네찌아 회화는수많은 승리를 기록했다.

1470년에 이미 베네찌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496 베네찌아 여자들은 교육을 향한 가식이 적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매력적이거나, 아니면 어머니로서 자식을 많이 두었거나, 아니면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501 명성도 아름다움처럼 사람을 취하게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502 플라톤적인 사랑이라고는 해도, 세 젊은이와 세 아가씨보다 사랑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들의 입속에 벰보는 철학과 문학의 향긋한 혼합을 넣어 주었다.

 

503 쉰 살이 된 그는 온화한 플라톤 방식으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었다. 다음 22년간 그는 모로시나라는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그에게 세 아이를 낳아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명성이 베풀어 주지 못한 안락함과 위안과 염려와 보살핌을 주었다. 나이 들어 가는 지금 그것은 이중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504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렸네, 내 생명을 부드럽게 지켜 주던 마음, 자신의 생명을 잊고 내 생명을 사랑하고 유지해 주던 그 마음, 스스로 주인이었던 그 마음, 값비싼 장식과 꾸밈과 비단과 금과 보석과 보물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가 지닌 사랑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며(그녀 자신의 말에 따르면)만족했던 그 마음. 이 마음은 의복 대신 가장 부드럽고 우아하게 훌륭한 팔다리를 지녔다네. 그 마음은 이렇게 봉사할 때 즐거운 모습을 보였고, 또 내가 이 땅에서 만난 중에 가장 달콤하고 또 가장 품위 있는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네.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1534

 

519 그렇게 짧은 생애로 그가 이룩한 것은 엄청나다. 라파엘로가 처음 40년 동안 보여 준 것만 빼고는 레오나르도, 티찌아노, 미켈란젤로 그 누가 이룩한 것보다도 더 많았다. 코레죠는 선의 우아함, 윤곽이 부드러운 입체감, 인간 육체의 살아 있는 살결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아주 대등했다. 그의 색체는 흐느는 듯한, 빛을 발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것은 반사와 투명성이 살아 있고, 보라, 오렌지, 핑크, 청색, 은색 등의 색채로 뒷날 베네찌아 화가들의 빛나는 밝은 광채보다 더욱 부드럽다. 그는 명암법의 대가였다.

 

520 그는 종교적 주제들을 탁월한 부드러움으로 그렸지만 전체적인 관심사는 신체에 있었다. 신체의 아름다움, 동작, 태도, 즐거움 등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그림들든 16세게 이탈리아 예술에서 성모에 대한 베누스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13장 나폴리 왕국 1378-1534

 

549 베카델리으이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인간의 모든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자연과 신과 하나다. 따라서 우리의 본능도 선한 것이고, 쾌락과 행복을 향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도 인간의 삶의 적합한 목적으로서 그것의 추구가 정당한 것이다. 감각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모든 쾌락은 그것이 해롭다는 점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556 시칠리아는 르네상스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루리스타와 같은 몇 명의 학자와 안토넬로 다 메씨나와 같은 몇 명의 화가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그들은머지않아 훨씬 더 기회가 많은 이탈리아 본토로 건너가고 말았다. 팔레르모, 몬레알레, 체팔루 등지는 위대한 미술품을 간직하고 있지만 오로지 비잔틴과 이슬람교와 노르만 시대의 유품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땅을 소유한 봉건 영주들은 15세기보다는 11세기를 더 좋아했고, 기사 계급이 지닌 학문에 대한 경멸 혹은 무시를 그대로 지닌 채 살았다. 그들이 착취한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색깔이 풍부한 의상과 밝은 모자이크와 침울한 희망의 종교, 그리고 사랑과 폭력에 관한 노래와 단순한 詩시 말고 달리 문화적 표현을 찾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섬에는 1295년부터 1409년까지 아라곤 가문의 왕과 왕비들이 있었다. 이어서 다음 300년 동안 이 섬은 스페인 왕권의 보석이 되었다.

 

558 규모가 더 큰 예술들과 함께 이 모든 공예 분야와 또 이들 사랑스럽고 격렬한 폭발성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노동과 사랑, 속임수와 정치적 수완, 헌신과 전쟁, 성실함과 철학, 지식과 미신, 시와 음악, 미움과 유머 등이 모두 합쳐져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고, 또 메디치가 이끄는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다시 파멸에 이르게 했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

 

독자에게

서곡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1304-1375

2장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3장    메디치 가문의 떠오름 1378-1464

4장    황금시대 1464-1492

5장    사보나톨라와 피렌쩨공화국 1492-1534

6장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7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1519

8장    토스카나와 옴브리아

9장    만토바 1378-1540

10장 페라라 1378-1534

11장 베니찌아와 그 영토 1378-1534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1534

13장 나폴리 왕국 1378-1534

 

감동적 장절

 

142-143 돈은 문명의 뿌리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기금과 교회의 기금이 필사본들을 사들일 돈을 지불했고, 이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중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리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교회의 교리를 의심하고 지옥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여자와 남자, 예술의 드러난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1434-1543)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파괴적인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계율,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221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은 학교에서 항상 듣는 평범한 소리다. 인간의 몸은 땅의 원소들과, 천상의 정신과, 식물의 혼과, 하등 동물의 감각과, 이성과 천사의 정신과 신과의 유사성이 뒤섞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피코는 아담에게 들려주는 말의 형식으로 인간의 제한 없는 능력에 대한 신의 증언을 들려준다.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도 지상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너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새로 태어날 수도 있다.” 여기에다 피코는 젊은 르네상스의 높은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짐승은 어미 몸에서 나올 때 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고의 정신(천사들)은 시작부터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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