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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7일 11시 26분 등록

문명이야기 5-1

윌 듀런트 ․ 안인희 옮김

 

1. 저자에 대하여

 윌듀란트.jpg

출생 : 미국 메사츄세스 North Adams
부모 : 퀘백으로부터 이민 온 프랑스계 캐나다oseph Durant와 Mary Allard

 

그의 활동 및 저서

윌 듀런트는 많은 토픽을 다루어서 썼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효과를 얻어냈다. 그는 철학을 여러사람들이 알리기 위해 시도했다. 그의 노력은 ‘철학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와 ‘철학의 향연(The Mansions of Philosophy)’와 그의 아내 에이리얼의 도움을 받아 저술한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에 잘 나타나 있다. 윌 듀런트는 인간이 가진 약점이나 변덕스러움까지도 포용하는 인류를 보는 관점을 부드럽게 향상시켰다. 그는 유럽은 아시의 하나의 돌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동양의 유산(Our Oriental Heritage)’를 지적함으로써 유럽중심주의라는 편견과 역사는 그리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과 동양의 역사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편견을 지적하였다. 그의 책에 쓰여진 Mohanmmedan(이슬람교도)나 Negro(흑인) 등의 용어는 명명법의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에 <철학 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는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용 소책자 시리즈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고, 1926년 Simon과 Schuster에 의해 하드커버 책으로 다시 출판되었고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로 인해 듀런트는 세계 여행을 여러차례 할 만큼, 그리고, 40년에 걸쳐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를 저술할 수 있는 경제적 독립을 얻었다. 그는 가르치는 것에서 은퇴해서 11권이나 되는 문명이야기를 저술했다.

 

그의 학력 및 직업

1900년 세인트 페터 상급학교(St.Peter's Preparatour School)에서 수학하고, 나중에 세인트 대학(Saint Peter's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동등한 급여와 여성 선거권, 노동자들의 좀더 나은 근로환경을 주장하였다.) 1907년 졸업하였다. 그는 Brisbane의 뉴욕 이브닝(New York Evening Journal)에서 일주일에 10달러를 받고 리포터로 일하기도 했다. 거기서 그는 성범죄에 대한 몇 개의 기사를 썼다. 1907~1911 뉴저지의 사우스 오렌지 시에 있는 세튼 홀 대학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쳤다.자유 교육 실험학교인 페레르 근대학교(the Ferrer Modern School)에서 가르쳤다.알덴 프리먼(Alden Freeman)은 서포터로서 그의 유럽 여행을 도왔다.

 

그의 사랑

자유 교육 실험학교에서 그는 13살 연하인 에이리얼(Ariel)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Chaya Kaufman 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였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에덜(Etherl)을 낳았고, 루이스(Louis)는 입양한 아들이다. 그의 아내 에이리얼은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을 저술하는 데 공동 저자로 기여하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서로 better person으로 만들어 주는 좋은 부부관계아 아닌가 생각했다. 나 또한 이렇게 살고 싶다.

윌듀란트와 부인.jpg  

 

결혼 후 활동

1913년 그들을 서포트하기 위해서 장로교회에서 적은 급여로 ‘문명 이야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지자인 프리먼이 콜롬비아 대학의 학비를 지불해 주었다. 1917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 윌 듀런트는 이때 ‘철학과 사회의 문제(Philosophy and the Social Problem)이란 첫 번째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철학은 사회의 실질적은 문제를 피해왔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의철학 교수로 재직하엿다. 시민권 운동(The Civil Rigts Movement)을 불러온 브라운 판결이 있기 10년전 1940년대 초반에 “상호의존 선언문(Declaration of Interdependence)”의 시민권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 선언문은 1945.10.1 연방의회 의사록에 소개되었다. 그의 저서 <문명 이야기>는 총체적인 역사로 불리우며, 한 시대를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하며, 몇몇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의 예찬을 거부한다. 그것은 단지 문명의 일대기를 저술한 것을 목표로 한다. 단지 어느 한 전쟁, 정치, 위인이나 악인의 전기 뿐만이 아니라 문화, 예술, 철학, 종교 그리고, 여론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의 죽음 그는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아내와 나란히 로스 엔젤레스에 있는 Westwood Village 기념공동묘지에 묻혀있다.

 

그의 저서

철학 이야기 The Story of Philosophy (1926)

Transition (1927)

The Mansions of Philosophy (‘철학의 기쁨 The Pleasure of Philosophy’으로 재출간) (1929)

The Case for India (1930)

Adventures in Genius (1931)

The Pleasures of Philosophy (1953)

그의 아내 Ariel과의 공동저서

The Lessons of History (1968)

Interpretations of Life (1970)

A Dual Autobiography (1977)

The Story of Civilization

The Story of Civilization(1935~ 문명이야기 1권 간행)

The Life of Greece (1939),

Caesar and Christ (1944),

The Age of Faith (1950),

The Renaissance (1953),

The Reformation (1957),

The Age of Reason Begins (1961),

The Age of Louis XIV (1963),

The Age of Voltaire (1965),

Rousseau and Revolution (1967; Pulitzer Prize, 1968),

The Age of Napoleon (1975).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

The Greatest Minds and Ideas of All Time(2002)

역사 속의 영웅들 Heroes of History : A Brief History of Civilization from Ancient Times to the Dawn of the Modern Age(2001)

 

 

나의 평가

윌 듀란트에 대한 자료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원 선배들이 해놓은 북리뷰를 많이 참고 했다. 특히 그 중 강훈 선배가 해 놓은 그와 스피노자와의 만남은 내게 인상적이었다. 옮겨본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리포터, 시간 강사 등 몇몇 직업을 전전하게 되는 부분에서 나는 아주 조금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그러는 기간 중에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소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점도 귀감이 된다. 특히 그가 일하는 대학의 신학교 비밀 조직을 통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 마르크스를 통합하려는 연구 등을 통하여 인류의 삶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전개하게 됐다. 그러던 중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위대한 사상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스피노자’다. 그는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를 보고 자신의 철학자로서의 삶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윌 듀런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물론 책을 통해서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의 삶에 좋은 안내자가 되는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스피노자를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를 <<철학이야기>>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스피노자는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전부를 단번에 읽어 버리지 말고 조금씩 몇 번이고 나누어서 읽어라. 그리고 그것을 다 읽고 나면 간신히 그것을 알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다른 주석서를 읽고) 그 다음 다시 책을 읽어라. 그러면 그것은 새로운 책같이 느껴질 것이다. 두 번째 그것을 다 읽고 나면 여러분들은 철학의 영원한 애호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윌 듀란트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대를 산 작가이다. 먼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때 벌어들인 수익으로 40년 동안 쓴 대작을 남기고 갈 수 있다는 그의 삶이 부럽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곡 1300~1377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1304~1375)

1. 르네상스의 아버지

p48 아레쪼. 이곳에서 15~16세기 동안에 르네상스를 유명하게 만ㄷ느 죠르죠 바사리와, 한동안 르네상스를 수치스럽게 만든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태어난다.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는 천재를 배출하고 또 추방했다.

 

p49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라비에라 해안의 장관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젊은 시인은 이것이 “지상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p50 법률 논문에서 그의 관심을 끈 것이라고는 “수많은 고대 로마 문헌의 인용”이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신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등을 찾아낼 수 있는 대로 찾아내 모조리 읽었다. 그들은 그에게 철학과 문학 양쪽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는 그들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처럼 글을 쓸 것을 갈망했다. 부모가 죽자(1326)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아비뇽으로 돌아와 고전 문학 및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327년 수난의 금요일에 한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사랑을 거부한 일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를 자기 시대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만들었다.

<내적 사건>

그는 그녀의 모습을 열광적으로 자세히 묘사했지만 그녀의 신원의 비밀만은 감쪽같이 감추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뮤즈가 그의 창조물이라고 여겼다.(그러면서 그의 모든 정열이 문학의 특권이라 여겼다.)

 

p51 그는 이탈리아 소네트 형식을 물려받아 그것을 어려운 운율 형식으로 만들었고 여러 세기 동안 이 형식이 이탈리아 시문학의 기본 틀을 이루었다. 강물을 따라 혹은 언덕들 사이로 산책하고, 무릎 꿇고 저녁 기도나 미사를 드리고, 방의 정적 속에서 동사와 형용사들 사이로 길을 찾아 헤매면서 다음 21년 동안 그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살아 있는 라우라에게 바치는 소네트 207편과 온갖 종류의 다양한 시들을 썼다.

 

p52 지금도 페트라르카의 저 찬란한 언어는(자음에 대해 모음이 거둔 빛나는 승리)아름다움의 최고봉을 이루고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아무도 그 봉우리를 다시는 정복하지 못했다.

 

p53~54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도 먼저 즐기고 묵인하고 난 다음에 피곤해하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p54 그는 로마의 고대 광장(포룸)의 유적에 깊이 마음이 움직였다. 고대의 힘과 장엄함이, 버려진 중세의 수도 로마의 빈곤과 더러움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페트라르카는 사랑에 감상적으로 휘말린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자연의 풍경에서 ㅈ르거움을 얻는다는 점에서도 루소를 예고하고 있다. “산지와 숲과 강들 사이로 내가 어떤 즐거움을 지니고 방랑하는지 당신이 아실는지요.”

 

p55 그는 친구들과 교황들과 왕들에게, 그리고 죽은 작가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를 향해 긴 편지를 써 보내기를 좋아했다.

겉으로는 카톨릭교의 모든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정신으로는 고대와 더불어 살았다.

 

르낭은 그를 가리켜 “라틴 서방에 고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도입한 첫 번재 현대인”이라고 불렀다.

 

p56 일반적인 동의에 따르면 페트라르카는 최초의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이 지상의 삶에 관심을 가질 권리를 명백하게 묘사한 최초의 작가이며, 또한 지상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증가시켰고, 부유함을 얻기 위해 노동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르네상스의 아버지였다.

 

2. 나폴리와 보카치오

p57 죠반니 보카치오는 피렌쩨의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이름과 도덕성이 의심스러운 프랑스 아가씨 사이에 맺어진 친분 관계의 뜻하지 않은 결과로 삶을 시작했다. 사생아라는 그의 출신과, 절반은 프랑스 혈통이 그의 성격과 역사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때 피렌쩨 근처에 있는 체르탈도로 옮겨 와 계모 밑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p58 보카치오. 그는 그녀를 피암메타(Fiammetta, 작은 불꽃)라 부르고 스스로 그녀의 불길 속에 타 버리기를 원했다. 교회법은 모두 잊었고, 전에 배운 계율도 모두 다 잊었다. 여러 달 동안 어떻게 하면 그녀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몰두했다. 혹시 그녀가 나타날가 하는 희망만을 품고 교회에 가고 그녀의 창문 앞으로 난 거리를 지나다녔다. 5년 동안이나 그렇게 그녀를 쫓아다녔다.

(보카치오의 내적사건)

 

3. 계관 시인

p61 로마의 결핍 속에서도 시인들은 현재를 잊고 과거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p62 우리들 모두가 그렇듯이 그도 갈채를 좋아했다. 명성을 갈망하고 문학적 ‘불멸’을 원했다. 르네상스의 전조 시대에 일찌감치 벌써 그는 가장 오래 지속될 르네상스의 표지 하나를 지녔으니, 곧 명예를 향한 갈망이었다. 그는 경쟁자들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고 어리석게도 그들의 서툰 글귀에 답변을 했다. 그는 (비록 부인하기는 하지만) 단테의 인기를 보고 어느 정도 속을 태웠다. 또 단테의 사나움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잔인성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 무뚝뚝한 피렌쩨 사람 (단테)에게 어떤 깊이가 있어서 가벼운 펜으로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정신의 절반이 프랑스 사람인 페트라르카는 너무나 세련되어서 세계의 절반을 함부로 욕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타리아를 드높이고 지치게 만들 정열이 부족했다.

 

p63 붓보다 더 가볍고 동의가 쉬운 부담도 없다. 달느 즐거움들은 우리를 매혹하는 동안에 우리를 망가뜨리거나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펜은 즐거운 마음으로 붙잡고 만족한 심정으로 내려놓는다. 그것이 그 주인과 대가(大家)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수천 년 뒤에나 태어날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지상의 즐거움 중에서 문학(글)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으며,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보다 더 온화하고 믿을 만한 것도 없다. 그렇듯 적은 노력이나 갈망을 바친 것만으로 삶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주인과 그토록 함께 하는 것은 달리 없다.

 

그리고 “행복한 적은 드물고 보통 기죽어 있던 변덕스러운 기분”을 이야기한다. 위댛나 작가가 되기 위해 형태와 소리로 드러난 아름다움, 자연과 여자와 남자의 아름다움에 민감해야만 했다. 음악을 사랑한 그는 특히 류트 연주에 능했다. 그림도 숭상했는데 친구들 중에는 시모네 마르티니도 있었다. 여자들도 그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러 번이나 그의 거의 은둔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 활동과 아내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신체와 정신의 힘이 대단히 커야만 한다.”

(작가는 박식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문단이다. 작가는 세상을 이야기 해야하기에 세상을 잘 알아야 한다. 세상은 인간, 예술, 정치, 문화, 경제, 사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될까? 작가는 인간의 감정, 지식, 지헤, 욕망, 육체, 이성, 영혼 등에 대해 박식할수록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4. 리엔쪼의 혁명

p69 이 낙천적인 공화주의자는 교황 자신을 파괴시킬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닐까?

 

자유가 그렇듯이 권력도 오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다.

 

p71 시인은 로마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했던 사람을 보호하라는 낭랑한 호소문을 쓰는 것으로 답했다.

 

5. 떠돌이 학자

 

6. 죠토

p77 중세의 피렌쩨를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피렌쩨는 산업과 정치가 너무 고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쩨를 숭배하기란 쉽다. 이 도시는 그 부(富)를 미의 창조에 바쳤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의 청년기에 그곳에서는 르네상스가 한창이었다.

 

p78 페트라르카가 14세기의 시문학을 지배했듯이 죠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는 14세기의 회화를 지배했다.

 

p81 눈길을 모든 각도에서 관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리듬 있는 구성이다.

그로부터 백 년 뒤 피렌쩨 미술은 그의 모범과 영감을 이어받았다.

 

p84 자아의 격렬함 속에서 르네상스가 태어났다.

 

7. 『열흘 이야기(데카메론)』

p84 이탈리아 문학이 최초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룩한 곳은 피렌쩨였다.

 

p86 “그렇게 겁먹지 마라. ‘나는 남편이 있는데, 거룩한 하늘의 법 앞에 약속한 것이 내게 이런 일들을 금지하고 있는데……’ 하고 말하지 마라. 이런 것은 공허하게 뽐내는 일이며 에로스의 힘에 맞서 천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하고 힘찬 왕자처럼 에로스는 자신의 영원한 법을 심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왕국의 다른 법에 대해 신경쓰지 마라, 그는 그런 법들을 기본적이고 노예적인 규칙이라 여긴다.

 

p89 “나는 정직하게 살고 있으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

 

p92 그는 기사도의 사랑 방식을 비웃었고, 단테가 돈키호테라면 자신은 산초 판자의 역할을 맡아 했다.

 

p93 이 작품의 산문은 이탈리아 문학이 다시는 능가하지 못한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이따금 미사여구를 포함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리에서 능변이고 생생하고 에리하며 생명에 넘치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처럼 맑다. 이것은 삶에의 사랑에서 나온 책이다. 천년 동안 이탈리아에 생긴 최악의 재앙 속에서 보카치오는 그 생명력으로 아름다움, 유머, 선량함, 즐거움 등이 아직도 지상을 산책하고 있음을 볼 용기를 찾아냈다.

 

8. 시에나

9. 밀라노

p97 “그들은 평생을 시시한 문제들에 대한……싸움으로 보낸다. 그들 모두에 대한 나의 평결을 들어 보라. 그들의 명성을 그 육체와 더불어 죽을 것이요, 단 하나의 무덤만 있으면 그들의 이름과 뼈들ㅇ르 묻기에 충분할 것이다.” (페트라르카가 법률가들에 대해 이야기한 것)

 

p98~99 페트라르카는 파비아 혹은 밀라노에 있는 비스콘티 궁정에 8년간 머물렀다. 이 편안한 복종의 기간에 그는 이탈리아 ‘3행시’ 형식으로 「승리(Trionfi)」라고 불리는 시를 썼다. 인간에 대해 욕망의 승리, 그리고 욕망에 대한 순결의 승리, 승리에 대한 죽음의 승리, 죽음에 대해 명성의 승리, 명성에 대해 시간의 승리, 시간에 대해 영원성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10. 베네찌아와 제노바

p102 성 마르코 광장의 건물들이 아직 완전히 둘러서지 않았는데도 페트라르카는 “세계의 한계 안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을까”생각했다.

 

11. ‘14세기(트레첸토)’의 황혼

p104 그는 베네찌아에 머무는 동안 『황제의 의무와 미덕』과 연쇄 대화편인 『행운과 불운을 위한 요법』등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번성할 때는 겸손을, 불운에서는 용기를 권고한다. 지상의 승리나 재물에 행복을 연결시키지 말라고 경계한다.

 

p105 소택지를 말리고, 식량 공급을 확보하고, 교회를 유지하고, 병든 사람과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학자들을 보호하고 후원할 것을 설파했는데 모든 명성이 학자들의 펜 끝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보카치오는 젊은 날 『열흘 이야기』나 그 밖의 감각적인 시들을 썼던 것을 후회했다.

보카치오는 “존경하는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여 서유럽에서 최초의 그리스 인문학자가 되었다.

 

p107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기를 바란다. 글을 쓰고 있을 때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다면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에 젖어 있을 때 말이다.” 일흔 살 생일인 1374년 7월 20일에 그는 책에 기댄 모습으로, 분명히 잠들었다가 죽었다. 그는 유언장에서 긴 겨울 밤에 추위를 막아 줄 외투를 살 돈 50플로린을 보카치오에게 남겼다. 1375년 12월 24일에 보카치오도 죽었다. 향년 예순한 살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앞으로 50년 동안의 휴경 기간을 보내고 나서야 이 남자들이 심은 씨앗이 꽃을 피우게 된다.

 

12 조망

p110 프라하가 아니라 로마를 수도로 삼고 “제국의 정원”인 이탈리아에 통일과 질서와 평화를 복구하시라.

이탈리아의 분열이 르네상스에는 이로웠다. 큰 국가들은 자유와 예술보다는 질서과 권력을 키운다.

 

p112 르네상스는 혁명이기보다는 완성이었고, 중세의 성숙이 고대 사본과 예술의 발견보다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중세의 많은 학자들이 세속적인 고전 작품들을 알았고 사랑했다. 그 작품들을 보존한 사람ㄷ르은 수도사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르네상스의 모든 기반은 페트라르카가 사망할 무렵에는 이미 완비되었다.

 

p113 상업 활동과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교와 만나게 된 일은 교리적․도덕적으로 전통적 신앙과 방식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해 새로운 관용을 마련해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모든 길은 르네상스로 통하고 있었다.

 

 

2장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1. 바빌론 포로

p124 신앙심 없는 바빌론, 지상의 지옥, 악의 수채통, 세계의 하수구. 여기에는 믿음도 자비심도 종교도 신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 세계의 모든 오물과 허약함이 여기 한데 모여 있다. ……늙은 남자들이 뜨겁게 달아올라 비너스의 품속으로 거꾸로 뛰어든다. 나이도 품위도 권력도 잊고 마치 자기들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치와 술 취함과 음람함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수치 속으로 달려든다. ……사통, 상피붙기, 강간, 간음이 교황청 놀이의 음탕한 즐거움이다.

(언어의 대가인 페트라르카는 욕설의 어휘를 총동원해서 아비뇽을 위와 같이 서술했다.)

 

p126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니 이름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리스도교인 사람이 극소수가 되고 말았다.

 

2. 로마로 가는 길

p126 시칠리아는 ‘만종 반란’(1282) 이후로 교황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감을 보였다.

 

p127 우르바누스 5세. 그는 자신이 비용을 대서 천 명의 학생을 대학에 보내고 몽펠리에에 새로운 대학을 세우고 학자들을 후원했다.

 

p129 베네딕트 수도복을 입은 채 보잘것없는 침상에 누운 모습이었다. 그는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입장을 허용하라고 명령을 내려 두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와서 가장 고귀한 사람의 광채가 얼마나 공허하고 짧은지 눈으로 볼 수 있었다.

 

p130 1375년 초에 65개 도시 국가들이 교황을 자기 도시의 시민적 수장이며 정신적 수장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1376년에는 겨우 하나의 도시만 교황 편에 남았다. 알보르노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중부 이탈리아가 다시 교황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p131 당신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해야 할 일은 교회의 진짜 보물인 양 떼를 모두 되찾는 일입니다. 양 떼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정말로 가난해질 것이니까요. ……당신은 선의와 사랑과 평화의 무기로 사람들을 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전쟁의 무기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 또 온 세계를 위해 무엇이 가장 좋은지 제가 하느님께 물어보니 오로지 평화! 평화! 라는 답변을 받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를 위해 평화를!

 

3. 그리스도교도의 생활 : 1300~1424

p132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서로 대립적인 두 가지 그리스도교도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종교 재판과 성인들의 모습 말이다. 공정하기 위해서는 당시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교도들이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교회의 기본 교리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134 “나는 내 마음속에 예수님을 위한 작은 구석을 따로 떼어 놓았다.”

 

p135 젊은 남자들은 그녀 곁에서 버릇이 된 허풍을 그만두고, 나이 든 남자들은 의심을 버리고 단순하고 위안을 주는 그녀의 철학을 경청했다.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해악은 인간의 허약함의 결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인류의 모든 죄악은 하느님 사랑의 대양 속에 삼켜져 없어지고 만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p136 성 베르나르디노. 그의 생애의 순수함과 고귀함이 그의 설교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부여했다.

 

p137 이렇게 해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아름다움 것과 끔찍한 것이 그리스도교도 생활의 흐름과 혼란 속에 섞여 들었다. 이탈리아의 단순한 민중이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중간 계층과 상류층은 고대의 문화라는 오래 묵은 포도주에 절반쯤 취해서 고귀한 열정으로 르네상스와 현대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피렌쩨의 르네상스 (1378~1534)

3장 메디치 가문의 떠오름 (1378~1464)

1. 무대장치

p141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가오는 이 시대를 ‘리나시타,’ 곧 재탄생이라 불렀다.

 

p142 고트족(=고틱=고딕)

고대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에 힘입어, 그리고 로마 포룸 광장의 교훈적인 페허를 통해서 고전 시대의 기둥과 처마도리가 다시금 소박한 위엄을 갖춘 사원과 궁전들을 만들어 낼 참이었다. 폐트라르카와 다른 수많은 이탈리아 학자들 덕분에 새로 발견된 고전 문헌들은 이탈리아 문학을 복구시켜 키케로 산문의 순수한 정밀함과 특성을 얻고, 베르기릴우스 시구의 달콤한 음악성을 지니게 할 참이었다. 이탈리아 정신의 햇빛이 북유럽의 안개를 뚫고 나왔다. 남자와 여자들은 중세의 두려움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을 숭배하고, 부활의 기쁨으로 공기를 가득 채울 참이었다. 이탈리아는 다시 젊어질 참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대의 재탄생 이상의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관직과 애인을 사고도 돈이 넉넉하게 남아돌게 되어서야 비로소 미켈란젤로나 티찌아노 같은 사람의 힘을 비렬 부를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예술의 숨결로 행운을 향기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돈은 문명의 뿌리다.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중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충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하고가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리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교회의 교리를 의심하고 지옥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여자와 남자, 에술에 드러난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 (1434~1543) 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파괴적인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계율,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p144 르네상스란 시간상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과 사유의 방식이다. 그것은 상업, 전쟁, 사상의 통로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p144 이 시대 베네찌아가 거의 모든 에너지를 쾌락과 부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면, 피렌쩨 사람들은 아마도 소란스러운 얼치기 민주주의의 자극을 통해 사상과 재치와 모든 종류의 기술을 대단히 예리하게 발달시켰다.

당파 싸움은 삶과 사유의 기질을 더욱 달구었다.

 

p145 코시모 데 메디치는 자신과 친척들의 재산 및 궁전을 제공해서 피렌쩨 공의회(1439)에 찾아온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동방 정교와 카톨릭 교회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공의회를 찾아온 그리스 고위 성직자와 학잗르은 그리스 문학에 대해 그 어떤 피렌쩨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을 지녔다.

2. 물질적 기반

p149 피렌쩨에 꼭 어울리는 좋은 결과는, 갈등과 토론이라는 전기를 띤 분위가가 맥박을 빠르게 하고, 감각과 정신과 재치를 날카롭게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피렌쩨를 들어 올려 한 세기 동안 세게의 문화적 지도자로 만들었다.

 

3. “조국의 아버지” 코시모

p150 피렌쩨에서 정치란 부유한 가문들과 당파들이 정권을 두고 벌인 갈등이었다.

 

p151 그곳에서 그의 온화함과 재산은 그에게 많은 친구를 만들어 주었다.

 

p152 “관직에 선출되는 일은 몸에는 불리하고 정신에도 해롭다.”

“메디치 사람들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리고 포폴로와 대중의 지지를 받아 최고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코시모는 이따금 폭력을 가미한 영리한 온건함으로 권력을 사용했다.

“국가는 주기도문으로 통치되지 않는다.”

 

p153 그의 활동의 여러 줄기들이 서로 뒤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일찍 일어나 거의 매일 사무실로 갔다. 미국의 백만장자와 똑같다. 집에서는 나무의 가지를 치고 포도나무를 보살폈다.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 절도 있게 먹고 마셨다. 그리고 (노예 소녀에게서 사생아 아들을 얻은 다음) 조용하고 규율이 있는 가정 생활을 했다. 그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의 개인 식탁의 소박한 식사와 그가 예의와 평화를 위해 외국의 귀빈들에게 내놓는 화려한 연회 사이의 대조에 깜짝 놀랐다. 그는 보통 인도적이고 온건하고 잘 용서하고 과묵하고 그러면서도 간결한 재치로 유명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그러웠고 가난하게 된 친구들의 세금을 지불해 주었으며 품위 있는 태도로 자신의 권력과 자선을 감추었다. 오늘날 보티첼리와 폰토르모와 벤노쪼 고쫄 리가 그린 코시모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중간키에 올리브색 얼굴빛, 허옇게 되어 빠지고 있는 머리, 길고 날카로운 코, 근엄하고 친절한 표정 등은 영리한 지혜와 조용한 강인함을 보여 준다.

 

p154 코시모가 부와 권력에 못지 않게 문학, 학문, 철학, 예술 등을 보살핀 일은 이탈리아와 인류에 커다란 행운이었다.

충분한 폭을 지닌 사람이라 다양한 것들을 평가할 줄 알았다.

 

p 155 그리스 문서들이 인류의 커다란 손실이 되도록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라틴 문서들이 사람들에게 무한한 이익이 되도록 도로 살아나게 된 것 등 이 모든 일에 대해 이탈리아, 아니 전 세계는 오로지 저 메디치 집안의 높은 지혜와 친절함의 덕을 입고 있다.

 

4. 인문주의자들

p156 메디치 통치 아래서, 혹은 그들의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이 이탈리아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이것은 종교에서 철학으로, 천국에서 지상으로 관심을 돌린 일이며, 깜짝 놀라는 한 세대에게 세속적 사유와 예술의 풍부함을 보여준 일이었다. 일찍이 아리오스토는 학문에 미친 이런 남자들을 ‘우마니스티(인문주의자들)’라고 불렀다. 고전 문화의 연구 (고전 인문학)를 ‘우마니타(인간의 속성)’ 혹은 ‘리테라에 우마니오레스(더 많은 인간의 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인류에 대한 연구가 이제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인간 신체의 모든 잠재된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고 그의 감각과 느낌의 온갖 즐거움과 고통을 지닌, 또 그의 이성의 허약한 위엄을 지닌 것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풍성하고 완벽하게 나타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인문주의였다.

p160 그래서 르네상스는 그리스에서 라틴으로, 아테네에서 로마로 옮겨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1500년 세월이 사라지고 키케로와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와 세네카의 시대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문체가 실질보다 더 중요해지고, 형식이 내용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p162 “삶에서의 목표가 무엇인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죠.” 하고 젊은이가 솔ㅈ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청춘이 지나고 나면 어떤 결과를 얻을 것 같은가?” 이 청년은 핵심을 파악하고 니콜리의 지도를 받았다.

레오나르도 브루니(L Bruni)는 네 명의 교황 밑에서 서기를 지내고 이어서 피렌쩨 시 의회 서기가 되었다. 그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그의 유려한 문체를 통해서 플라톤 문체의 화려함이 처음으로 이탈리아 세계에 완전히 알려졌다.

 

 

p163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문제가 많은 인물은 포지오 브라치올리니였다. / 그는 고전 사본들을 찾느라 언제나 제 길에서 벗어나곤 했다.

 

p165 대다수의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그 윤리학이 근거를 잃어버린 것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p166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가 대중의 상상력과 도덕성의 요구에 어울릴 뿐, 해방된 정신이 진지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신화인 것처럼 행동했다.

 

p167 이승에서의 이런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후원자들의 열망이야말로 르네상스 시대 예술과 문학에서 가장 강력한 생산력을 가진 힘이었다.

 

p168 문학과 철학에서의 변화는 인간의 정신에 지구의 일주와 탐색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간을 교리에서 해방시키고, 또 죽음에 대해 명상하기보다는 삶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유럽인의 정신을 해방시킨 것은 탐험가들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5. 건축 : 브루넬레스코의 시대

p169 그러나 부유함과 편안함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했다. 삶에서 도망치거나 그것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지상은 천국이 되고 그들 자신이 신들이 되고 싶었다.

 

p172 천재들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탄식했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교도로 살았다. 그리고 세상에 자신의 선의의 향기를 남겼다. ……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보다 더 진귀하고 탁월한 사람은 없었다.

(브루넬레스코)

 

6. 조각

1. 기베르티

p175~176 기베르티의 작품이 가장 훌륭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 스물다섯 살이던 이 청년은 그의 유명한 청동 문의 처음 한 쌍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앞에 그림 참고)

 

2. 도나텔로

p177 그는 기베르티의 작업장에서 일부만 배웠다. 머지않아 그는 손수 자기 길을 개척했고, 기베르티 돋을새김의 여성적인 우아함을 벗어나 힘에 넘치는 조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고대의 방식과 의도를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충성으로, 또 독창적인 개성과 양식의 무뚝뚝한 힘으로 조각에 혁명을 만들어 냈다.

 

그의 천재성은 기베르티의 그것처럼 바르게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욱 큰 범위와 높이에 도달했다. 그의 천재성이 성숙하자 그것은 무모한 생산력으로 걸작들을 만들어 냈다.

 

p179 도나텔로는 미술이란 언제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오랜 진실을 스스로 다시 발견했지만, 이 진실을 위해 의미심장한 형식을 선택하고 드러내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p180 이상적으로 표현된 철학자 황제가 아니라 분명히 동시대의 인물인 것이다. 두려움 없고, 가차 없고, 강력한 베네찌아 용병대장 ‘가타멜라타(달콤한 고양이)’상이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을 찬양하는 파도바에서 자신의 에술은 발전할 수 없다. 예술을 위해 피렌쩨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비판하는 그곳으로.

 

p181 그러나 그가 아름다움이 아니라 삶을, 단순히 힘차고 건강한 육체가 아니라 복잡한 성격이나 정신적 상태를 표현하려 한 것이 바로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3. 루카 델라 로비아

p183 루카 델라 로비아는 여든두 살까지 살면서 긴 생애의 세월을 잘 이용했다. 그의 명성은 도나텔로의 명성을 넘어섰다.

 

7. 회화

 

1. 마사쵸

p184 1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회화가 조각을 지배했다. 15세기에는 조각이 회화를 지배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다시 주도권을 차지한다. 아마도 죠토의 천재성이 14세기에, 도나텔로의 천재성이 15세기에,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와 티찌아노의 천재성이 16세기에 나타난 것이 이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천재는 시대 정신의 원인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p186 오직 끈질긴 천재만이 대리석, 청동, 점토 등으로 일너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오로지 마사쵸만이 새로운 정신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은 머지않아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라파엘로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었다.

 

p187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원근법의 기술을 가르친 사람은 누구인가?

브루넬레스코, 기베르티, 도나텔로는 이 문제에 접근했다.

“이 원근법이란 얼마나 멋진 것인가!”

우첼로에게는 그림의 밭고랑에서 평행선들이 점차 가까워지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회화가 공간과 깊이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올로에게 있어 이것은 미술사의 그 어떤 일보다도 위대한 일로 여겨졌다.

 

p188 마사쵸는 원근법의 원리를 적용하여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자기 세대 사람들의 눈길을 열어 주고 또 회화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준 인물이다.

 

토마소 귀디 디 산 죠반니. 그는 일찍이 붓을 들고서 그림을 시작했는데 어찌나 그리기를 좋아했던지 그만 다른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의복, 자기 자신, 수입, 빚까지 죄다 잊었다.

(몰입의 예)

 

p189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마사쵸는 탁월한 주인인 자연에게서 말고 다른 안내를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소용없는 헛고생을 한 뿐이라는 사실을 완벽한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2. 프리 안젤리코

p189 이렇게 흥분시키는 새로움 한가운데서 프라 안젤리코는 조용히 중세적인 자신의 길을 갔다.

 

p192 엘 그레코를 제외하고 어떤 화가도 프라 안젤리코처럼 그렇게 독특한 자기만의 양식을 만들어 낸 사람은 없다.

 

3. 프라 필리포 리피

p193 튼튼한 마사쵸와는 반대로 온화한 안젤리코 계열에서, 영원성보다는 삶을 선택한 남자의 예술이 나타났다.

 

p196 아름다움을 창조한 사람은 누구나 기억할 가치가 있다.

 

8. 그 외의 예술

p197 우리는 도한 에술의 옆 골목이나 뒷골목으로도 들어가 숨낳은 가겓르을 방문하고 도공들이 점토를 주무르고 거기 그림을 그리는 작업장에도 가 보고, 유리 만드는 사람들이 유리를 불거나 잘라서 깨지기 쉬운 사랑스러움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도 보고, 금세공사들이 값비싼 금속이나 돌을 가지고 보석과 메달, 도장, 주화들 또는 의복이나 사람, 집이나 교회의 수많은 장식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도 보아야 한다.

p198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정치만 빼고 자기 시대의 모든 양상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피렌쩨는 거의 괴물처럼 완벽한 그를 환호성으로 맞아들였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수학, 기계학,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시, 연극, 철학, 시민법과 종교법의 분야였다. 그는 이 모든 주제들에 대해서 글을 섰고 회화에 대해서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어쩌면 레오나르도에게도 영향을 미친 논문을 남겼다.

 

p200 유명한 죽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은 이곳에서 내가 한가히 즐길 수 있는 일이지요. 성인이나 정치가나 위대한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서가로 가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제는 수많은 손님과 아첨꾼이 법석대는 당신의 궁전이 제공할 수 있는 그 어떤 교제보다도 더 좋습니다.

 

p201 어떤 통치자도 일직이 코시모처럼 지혜롭게 너그러운 적이 없었다. 아니면 인류의 발전에 그렇듯 순수한 관심을 가졌던 경우는 없었다. 피치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플라톤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그러나 코시모에게 입은 덕도 그에 못지 않다. 그는 플라톤이 내게 개념을 주었던 그 미덕들을 나를 위해 현실로 만들었다” 코시모가 죽고 1년이 지나 시간이 그의 영광을 무디게 하고 그의 잘못을 자꾸 들추어내려고 할 때 피렌쩨 시 의회는 그의 무덤에 가장 명예로운 비명을 새겨 주 기로 결의 했다. “파테르 파트리아이”, 곧 “조국의 아버지”라는 비명이었다.

 

4장 황금시대 (1464~1492)

1. 통풍 환자 피에로

p203 그러나 그에게는 코시모가 가진 지성과 천재성 그리고 전략이 없었다. (피에로)

 

2. 로렌쪼의 발전 과정

p204 소년은 요하네스 아르기로풀로스에게서 그리스어를, 피치노에게서 철학을 배웠고, 정치가, 시인, 에술가, 인문주의자들의 대화를 듣고 자라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육을 받았다. 그는 또한 전쟁 기술도 습득했다. 열아홉 살에 피렌쩨의 지도적 가문의 아들들이 출전한 창 시합 경기에서 그가 1등 상을 받았다. “뒤를 봐주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용기로”이룩한 일이었다. 이 시합에 나갔을 때 그의 갑옷에는 프랑스의 모토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르네상스의 테마라 할 만한 말로서 “Le temps revient”, 곧 “(황금)시대는 돌아온다.”라는 글귀였다.

 

p209 로렌쪼는 어떤 공동체도 한 개인을 위해 오래 희생을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3. 빛나는 사람 로렌쪼 일 마니피코

p210 삼십 대에 접어들었지만 르네상스라는 온실에서 남자들을 빨리 성숙했다.

 

p211 단호한 눈썹과 무거운 턱은 그의 정신이 지닌 너그러움, 그의 에법의 매력,ㄱ ㅡ리고 재치의 생동성, 그 정신의 시적 감수성 등을 감추었다.

 

p213 질서가 번영을 누리는 동안 자유는 시들어 갔다.

 

p214 1. 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러나 쉽게 날아가 버리네

젊은이들과 아가씨들아, 지금 즐거라

내일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니.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함께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낸다네.

 

이들과 이들의 요정들과

그 패거리들은

언제까지나 축제일

젊은이들과 아가씨들아, 지금 즐겨라

내일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니

 

14. 젊은 숙녀들과 젊은 연인들아!

바쿠스 만세, 욕망 만세!

춤추고 ㄴ로자, 노래를 부르자

달콤한 사랑이 네 가슴에 타올라라

 

4. 문학 : 폴리찌아노의 시대

p218 그들은 흐르는 샘물 옆 풀밭에 몸을 기대고 누워, 걱정스럽고 바쁜 도시 생활과 조용하고 치유 효과가 있는 시골 생활을 비교하고, 활동적인 경력과 명상적인 경력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알베르티가 시골의 명상을 찬양하는 데 반해 로렌쪼는 성숙한 정신은 국가에 대한 봉사와 세계의 상업에 종사하는 일에서 가장 완벽한 기능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p219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로렌쪼 다음으로 흥미로운 인물은 죠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백작이다.

폴리찌아노는 그를 보고 자연이 주는 몯느 선물을 내면에 모아 놓은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서술했다. “키가 크고 섬세한 모습에 얼굴에는 신성의 어떤 요소가 빛나고 있다.” 예리한 눈길과 지치지 않는 탐구열, 기적과도 같은 기억력, 종교적 박식함, 여러 언어에 능통함 등을 지닌 인물로 여성들과 철학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p220 그의 정신은 모든 철학과 모든 신앙에 대해 열려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아첨했지만 그는 짧은 생애의 마지막까지 매력적인 온건함을 유지했다. 오직 배움의 정확성과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순진한 믿음의 영역에서만 과격성을 띠었다.

 

p220~221 피코 :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은 학교에서 항상 듣는 평범한 소리다. 인간의 몸은 땅의 원소들과 천상의 정신과 식물을 혼과 하등 동물의 감각과, 이성과, 천사읮 신과, 신과의 유사성이 뒤섞여 있다.”

 

피코는 젊은 르네상스의 높은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짐승은 어미의 몸에서 나올 때 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고의 정신(천사들)은 시작부텅 영원히 만들어진 존재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

 

p225 폴리찌아노는 정열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삶이나 사랑의 깊이를 맛보지 못했기에 시인으로서의 위대성이 부족하다. 그는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깊이가 부족하다. 로렌쪼를 향한 그의 사랑이 그가 아는 가장 강한 감정이었다.

 

p228 말라지지는 어째서 신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아셨으면서, 그러니까 루시퍼가 복종하지 않고 영원히 게속되는 저주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으면서 그를 창조하셨을까 궁금해한다. 아스타로테는 그것만은 지혜로운 악마도 풀 길이 없는 수수께끼라고 고백한다.

(이런 궁금증은 예나 지금이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는 것 같다.)

 

5. 건축과 조각 : 베로키오의 시대

p232 그의 「옥좌에 앉은 성모」 보다 더 사랑스러운 성모 조각은 드물다. 그가 만든, 정직하게 성격을 보여 주는 「필리포 스트로찌」를 능가하는 흉상은 드물며, 또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있는, 역시 같은 스트로찌의 무덤보다 더 섬세한 무덤은 드물다. 베네데토가 산타 크로체 ㅅ어당에 만들어 놓은 것보다 더 우아하게 다듬어진 강단은 없다. 또한 산 제미냐노의 성당에 있는 산타 피나의 제단처럼 완벽에 가까운 제단은 극히 드물다.

 

6. 회화

1. 기를란다요

p237 천재라는 낭만적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은 르네상스 피렌쩨였다. 곧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정신(라틴어로genius, 곧 천재)에 이끌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p238 인간이나 자연의 그 어떤 것도 그들 눈에 에술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어떤 얼굴이라도 미술은 그 빛나는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은 세계를 기록했다.

 

벤노쪼 고쫄리는 “대단히 탁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끈질기다는 점에서 자기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능가했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일부는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p239 그는 내면에 삶의 즐거움을 지녔던 사람이다. 삶의 유쾌한 파노라마와 위대함의 영광을 사랑했다.

 

p240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제단화에 상상력과 섬세한 우아함을 한 단계만 덧붙이면 곧 바로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에 이르게 된다.

 

2. 보티첼리

p242 어쩌면 모든 미술가는 이상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관능적인 사람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육체를 미적 감각의 최고 원천이며 기준으로 여기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p244~245 그는 깊이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언제나 내면에 한 줄기 금욕의 소망을 품어 왔엇다.

 

p245 아마도 이 시기에 보티첼리는 단테의 『신곡』 삽화를 그렸을 것이다.

 

1498년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했다. 보티첼리는 르네상스의 가장 특이한 이 살인 행위에 충격을 받았다.

 

p246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는 「신비의 강탄」은 보티첼리의 마지막 걸작이다. 어지럽지만 색채가 풍부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리듬이 있는 우아함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천상의 행복을 숨 쉬는 듯이 보인다.

 

5장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 (1492~1534)

1. 예언자

p253 세습 권력의 이점은 계속성이고 그 맹점은 평범함이다.

그는 격렬한 성정, 중간급 정신, 흔들리는 의지력, 경탄할 만한 의도 등을 지녔다.

 

p258 사보나롤라의 말에 따르면 문학과 예술은 이단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그냥 그리스도교도인 척 하고 있을 뿐이다.

 

p259 사보나롤라는 다음 번 설교에서, 충성스러운 개는 뼈다귀 하나를 받은 대가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짖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선물을 경멸했다.

 

2. 정치가

p263 “여러분의 개혁은 성령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한다. …… 현세의 선행이 정말로 중요한 도덕적 종교적인 복지를 만들어 낸다. 여러분이 만일 ‘국가는 주기도문으로 통치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으면 이것은 폭군의 통치잉며, 억압을 위한 통치이지 자유를 위한 통치가 아님을 기억하라. 좋은 정부를 원한다면 그것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p264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 인간은 천성적으로 미덕의 존재가 아니며 사회적 질서는 에고들, 가문들, 게층들, 종족들, 신앙들 사이의 공개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갈등 가운데서 유지되는 것이다.

 

3. 순교자

p271 사보나롤라의 사순절 기간 설교들은 로마를 향한 전쟁이엇다. 교회가 세속적 권력의 확고한 토대를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한편 교회의 부가 그 타락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p275 약속된 날자가 되자 거대한 광장에는 기적 아니면 인간의 고통을 구경하며 즐기려는 인파로 넘쳐났다.

 

p277 피렌제 정부는 사보나롤라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의 당파도 살아남는다. 오직 그가 죽어야만 도시와 정부를 이렇게 심하게 나누어 놓은 당파들 간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잇을 것이다. 피렌쩨는 하도 분열이 심해서 외국 세력에는 피렌제와 동맹을 맺는 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고, 그 결과 내부의 음모와 외부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p279 사보나롤라는 중세가 살아남아 르네상스에 출현한 경우였다.

 

p280 사보나롤라의 위대함은 도덕 혁명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에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혁명만이 인간의 일에서 진정한 진보를 표시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4. 공화국과 메디치 가문 : 1498~1534

p281 피렌쩨가 다시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3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5. 혁명 시대의 미술

p282 그러나 언제나 파산 위기에 몰려 있고 늘 지속되는 혁명에 말려든 국가는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렌쩨는 1492년처럼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위대한 예술가를 가졌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피렌쩨의 혼란은 피해 도망쳐 다른 곳에 명성을 남겼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가고, 미켈란젤로는 볼로냐로, 안드레아 산소비노는 리스본으로 갔다.

 

p287 살비 수도우너 식당에서 사르토는 「최후의 만찬」으로 레오나르도에게 도전했다. 동일한 순간, 동일한 주제를 선택한 것이다. 곧 그리스도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을 선택했다.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6장 밀라노

1. 배경

p293 로도비코와 레오나르도가 함께 있던 밀라노의 10년은 피렌제보다 더욱 빛나는 곳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자유와 높은 지위는 만토바의 이사벨라 데스테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우리는 피에드몬테에서 시칠리아에 이르는 비할 바 없는 이탈리아 반도를 여유를 가지고 통과하면서 여러 도시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르네상스의 다성 합창을 들어 보아야 한다.

 

p297 인문주의자와 대학과 궁정의 교육을 통해서 일반적인 취향과 태도가 개선되었다.

 

2. 피에몬테와 리구리아

p297 북서부 이탈리아와 오늘날 남부 프랑스를 이루는 장소에 사부아-피에몬테 공국이 자리 잡았다. 1945년까지 계속된 이곳의 왕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속국으로서 움베르토 1세 백작이 건설한 이 작은 나라는 ‘초록 백작’ 아마데우스 6세 치하에서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

 

p300 이런 열정적인 무질서 속에서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문학, 과학, 예술을 위해 마땅히 담당해야 할 몫을 다하지 못했다.

그 어떤 계층도 정신의 탐험을 하기에 넉넉한 돈을 비축하지 못했다.

 

3. 파비아

p301 제노바와 밀라노 사이에 티치노 강을 따라 고요한 고대 도시 파비아가 자리 잡고 있다.

페트라르카는 이곳을 가르켜 “현대 예술의 가장 고귀한 산물”이라고 불렀다.

 

p302 전체에 대한 배려가 없이 모든 부분이 각기 주목받으려 한다. 그러나 각 부분은 사랑과 기술로 만들어진 작업이다. 아마데오가 만든 네 개의 르네상스 창문만 떼어 놓고 보면 그에게 인류가 기억할 만한 예술가라는 칭호를 부여해 줄 만하다.

 

4. 비스콘티 가문 : 1378~1447

p306 그러나 아버지 쟌갈 레아쪼에게서는 한곳에 앉아 있는 용기로 나타났던 것이 필리포에게서는 한 곳에만 앉아 있는 소심함으로 나타났다. 그는 늘 암살 공포에 시달렸고, 인간의 믿을 수 없는 속성에 대한 괴로운 신념에 시달렸다.

 

5. 스포르짜 가문 : 1450~1500

p307 프란체스코 스포르짜는 르네상스 병사의 이상이었다.

 

p308 그리고 빵을 분배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열망을 잠재웠다.

스포르짜 가문은 짧고도 찬ㄹ나한 경력을 시작했다.

공작으로 올라섰다고 그의 성격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 단순하게 살고 열심히 일했다.

그가 만들어낸 사회질서는 도시에 번영을 되찾아 주어서 고통의 기억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희마하게 만들었다.

 

p310 죽어가면서 고전의 구절이면서 르네상스의 구절이기도 한 한 말을 내밷었다. “Mors acerba, fama perpetua.” - “죽음은 괴로우나 명성은 영원하다.”

대부분 위대한 남자들이 그랬듯이 그도 또한 관심을 분산시키는 이 결함을 면제받았다.

 

p313 그녀의 매력은 삶에 대해 지닌 순수하게 즐거워 하는 태도였다. (베아트리체)

그녀가 그렇듯 죄 없는 즐거움을 사방에 발산했기 때문이다. ‘

 

로도비코의 보살핌 속에서 그녀는 젊은 영혼의 매력에 정신의 우아함을 덧붙였다.

 

p317 파비아 수도원에 있는 이 단순한 기념비는 오늘날에도 남아서 로도비코와 밀라노를 위해, 그리고 베아트리체와 레오나르도를 위해 짧고도 찬란하던 시간이 이제 끝났음을 알려 주고 있다.

 

p318 비극은 빠른 속도로 무르익었다.

 

p319 백 년 전에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의 한 사람인 지롤라모 티라보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의 온갖 지역에서 큰 명예와 풍부한 보상을 확신하고서 그의 우정으로 몰려들어온 수많은 지식인들을 생각해본다면, 얼마나 많은 유명한 건축가와 화갇르을 그가 밀라노로 초대했는가를 돌아본다면, 또 얼마나 많은 고귀한 건물들을 그가 세웠는지, 훌륭한 파비아 대학을 세우고 후원한 일, 그리고 밀라노에 온갖 종류의 학문을 위한 학교들을 열었던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 모든 일 말고도 온갖 민족의 학자들이 그에게 본내 화렿나 찬사와 헌사들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그가 지금까지 살았던 최고의 통치자였다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6. 학문

p320 시인의 내면에 대작을 쓸 열성적인 헌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p323 그렇더라도 그의 학식으로 인해 그는 그 시대 가장 바쁜 학자였다. (로도비꼬)

르네상스 시대에 학문은 정열이 되고, 문학은 전재잉 될 수도 있었다.

 

7. 미술

p324 전제 군주의 통치는 이탈리아 미술에 하나의 은총이었다. (후반부 참고)

많은 사람의 노동과 기여를 통해 공동체를 위한 선물과 영광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고귀한 예술이다.

 

p326 로도비코와 그의 궁정의 판단에 따르면 밀라노에서 탁월한 에술가는 레오나르도가 아니라 브라만테였다. 레오나르도는 이 시기에 자기 능력의 일부만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브라만테)

 

p329 베르가모의 보석은 코렐오니 예배당이다. 이 유명한 베네찌아 용병대장은 바로 이곳 출신이었다. 그는 자기의 뼈를 묻을 작을 예배당을 원했고, 자신의 승리들을 기념하게 위해 조각 무덤을 소원했다.

 

 

7장 레오나드로 다빈치 (1452~1519)

p331 르네상스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은 1452년 4월15일에 피렌쩨에서 약 95킬로미터 떨어진 빈치 마을 근처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어머니의 사랑 없이 절반쯤 귀족적인 안락함 속에서 양육되었다. 아마도 이런 어린시절의 환경에서 그는 아름다운 의상에 대한 취향과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얻었을 것이다.

 

p332 스케치를 잘하기 위해서 자연에 있는 모든 사물을 호깃미, 끈기 조심성을 가지고 탐구했다. 그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은 과학과 에술은 그렇게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이었으니, 곧 세밀한 관찰이었다.

 

p333 “가장 사랑하는”, 혹은 “가장 소중한”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그들을 가장 아름다운 것(존재)들을 찾아내 소유하고 그 가장 비열한 부분을 사용하느라 열광할 것이다. 생식 활동 및 생식 기관의 활동이란 아주 역겨운 것이서서,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해우이자의 장신구, 혹은 억눌린 충동이 아니라면, 자연은 인간 종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p334 레오나르도 속에 숨어 있는 수학자가 언제나 그의 속에 숨은 화가와 협동하면서도 경쟁을 벌였다.

(내 속 두 얼굴은?)

 

p335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시작하면서 너무 풍부한 상상을 했고, 세부적인 것들에 실험적으로 빠져들면서 자기를 잊었다.

그림의 기술적인 완성보다는 그 철학에 빨려 들어갔고, 의미를 드러내느라 바빠서 이 인물들에게 색을 주는 일처럼 덜 중요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 손에 넘긴 것이다.

 

2. 밀라노 시절 : 1482~1499

p335 레오나르도가 서른 살이 되던 1482년에 밀라노의 섭정인 로도비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망설임이나, 시간이 잔인할 정도로 짧다는 의식 같은 것은 아직 없었다. 거기에는 오로지 싹트는 힘들로 강해진, 청춘의 무한한 야망이 있을 뿐이다.

 

p339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 그리고 (바사리가 덧붙인 말에 따르면)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많이 한다.

 

이런 탐색을 수없이 하면서 그는 여러 모습들을 선택해서 이 그림 안에 용해시켜 넣어 이 걸작의 기적을 만든 개성 뚜렷한 머리들을 그토록 놀랍게 표현했다.

 

3. 피렌쩨 시절 : 1500~1501, 1503~1506

p344 그보다 스물두 살 아래인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부러진 코와 그토록 대조를 이루는 레오나르도의 아름다운 모습에 분개했고, 또 가난했던 그는 레오나르도가 그렇게 부유한 ㅅ애활을 유지할 경비를 어디서 찾아내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p347 그해 10월에 피렌쩨 정부의 수반인 피에트로 소데리니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게 베키오 궁전 500인회의실 벽에 벽화를 그려 달라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p348 일부 관찰자들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판단은, 오직 후세의 화가들이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 표현을 좋아하는 레오나르도의 성향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강력한 근육과 악마적인 힘을 향한 미켈란젤로의 취향을 선택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했다.

 

p351 사랑이나 천재에게 외설스러운 해체 말고 다른 운명은 없다고, 인간의 건망증 속에 가물거리며 스러져 가는 작은 명성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던 영혼의 미소일까? (모나리자)

 

4. 밀라노와 로마시절 : 1506-1516

p351 ㅈ가가가 저녁 산책시간에, 혹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누워서 다음 날 작업할 장이나 페이지나 구절을 만들어 보고, 또 맛깔스러운 형용사나 매혹적인 구절을 정신의 혀 위에 굴려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5. 인간 레오나르도

p355 “사물의 진리는 섬세한 지성에게는 최고의 양식이지만 방황하는 지력을 위한 것은 아니다.

p356 “혼자 있을 대면 너는 완전히 너 자신의 것, 남과 함께 있을 때는 절반만 너 자신. 그러므로 동무의 무분별함을 따라 너 자신을 낭비하지 마라.”

“자연의 가장 중요한 선물은 자유다.”

고통스러운 민감함은 보통사람의 눈길에는 보이지 않는 현실의 수많은 단면들을 그에게 열어 보였다.

 

p357 너무 많은 일들에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통합하는 목표, 주도하는 이념이 없었다. 그는 너무 많은 능력을 지녔기에 귿릉르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시킬 수가 없엇다. “나는 내 시간들을 낭비했다.”

 

“과거에 대한 것과 지리에 대한 지식은 지성을 아름답게 꾸며 주고 자양분을 준다.”

 

p358 그의 기본 원칙은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은 달느 예술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인물이 그 머리를 가슴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게 만들라.” 레오나르도 자신의 작품에 나타나는 우아함의 한가지 비밀이 이것이다.

‘인물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보여 줄 수 있는 동작을 만들어라.’

 

p359 자연은 중립이고, 악을 나쁜 것이라고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편견 없는 눈길에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많은 풍경화를 그렸고, 그것을 소홀히 한다고 보티첼리를 나무랐다.

 

6. 발명가 레오나르도

p361 그는 일생의 절반가량을 인간의 비행에 대해 생각했다.

 

p363 지식을 향한 열정이야말고 인간의 가장 고귀한 특성이다. 전쟁과 범죄에 충격을 받고, 능력의 이기심과 빈곤의 영속성에 낙담하고, 수많은 민족들과 세대들이 미신과 경박한 믿음을 가지고 삶의 짧음과 품위 없음을 잊기 위해 겉만 꾸미는 것에 마음이 슬퍼질 때, 인류의 정신과 마음속에 삼천 년 동안이나 비행의 꿈이 간직되어 있었음을 보게 되면 어딘지 구원받은 느낌이 든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레오나르도의 실패한 암중모색과 또 다른 수많은 시도들을 거쳐 마침내 우리 시대의 빛나면서도 비극적인 승리에 이르기까지 게속된 비행의 꿈 말이다.

 

 

7. 과학자 레오나르도

p364 사유의 가장 순수한 형태인 수학에 열광적으로 몰두했다.

“수학자가 아닌 사람은 내 작품의 어떤 부분도 읽지 말 것.”

 

p366 그는 눈에 대해 경탄했다. “이렇게 작은 공간이 우주 전체의 영상을 담을 수 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리고 오래전 과거의 영상을 연상하는 정신의 힘에 대해서는 더욱 더 경탄했다.

 

p369 “오 놀라운 필연성이여! 최고의 이성을 가지고 그대는 모든 작용들이 그 원인에서 나온 직접적인 결과이게 하는구나. 모든 자연의 활동은 취소할 수 없는 법칙에 의해, 가능한 가장 빠른 과정으로 그대에게 복종한다. 이 말ㅇ느 19세기 과학의 자랑스러운 울림을 갖고 있다.

 

8. 프랑스 시절 : 1516~1519

p371 여러 방향을 향한 그의 정신이 우리를 홀려서 그가 실제 이룩한 것을 고장하도록 만들곤 한다. 그는 실천보다는 착상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p372 그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천으로부터 한 사람이 왔었다는 것, 그가 인류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경탄하게 된다.

 

8. 레오나르도 유파

 

 

8장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1.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379 바티칸 벽화는 뒷날 라파엘로의 더욱 강렬한 붓에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도로 지워졌다.

 

p380 세상은 피에로의 책들을 잊고 그의 회화들을 다시 발견했다.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도안의 조화로운 흐름이고 무엇보다도 피에로의 손길이 타협을 모르는 정직함으로, 이상화나 감상을 물리치고 눈이 보고 정신이 파악한 것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르네상스의 중심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자기 속에 잠재된 완전성을 얻지 못했다.

 

2. 시뇨렐리

p381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힘을 탐구했다.

 

 

3. 시에나와 소도마

p388 15세기 마지막 무렵에 시에나는 좋건 나쁘건 그 이름이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진 에술가를 한 명 배출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죠반니 안토니오 바찌였다. 그러나 음란한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소도마라고 불렀다. 그는 아름다운 소년으로 동성애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별명을 즐거운 유머로 받아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호칭이라 생각햇다.

 

p390 그는 에술을 안내하는 깊은 영혼이 없이 솜씨 좋은 손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시에나에서 그를 이어받은 사람은 도메니코 베카푸미였다.

베카푸미가 죽으면서 시에나의 르네상스는 끝났다.

 

4. 움브리아와 발리오니 가문

p391파브리아노는 눈에 띄지 않지만 주도적인 인물이다.

 

p392 아씨시는 움브리아 예술의 영적인 원천이었다.

 

5. 페루지노

p395 망토와 칼(음모)로 이루어진 이런 통치 아래서 문학과 미술은 논랄 정도로 번성했다. 성모를 경배하는 정열적인 마음을 지니고도 추기경들을 업신여기고, 가까운 친척을 죽이는 사람이면서 독창적인 글을 좋아하거나 미술에 빠져들었다.

 

p397 기술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의 이야기는 이 방을 르네상스 미술에서 가장 즐거운 유산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p399 한쪽 세상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어도 적어도 한 발을 땅에 딛고 있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페루지오 캄비오에 있는 그의 자화상은 놀랄정도로 정직한 자기 고백이다.

 

p402 이 스승은 자신의 목적을 다했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풍부하게 만들어서 전해주고, 자신을 능가할 제자를 한 사람 키웠다. 라파엘로는 결점을 없애고 완벽해진 페루지노이다.

 

9장 만토바 (1378~1540)

1. 비토리노 다 펠트레

p405 그는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도의 행동과 이교도 지성의 날카로운 명료함, 또 르네상스 인간의 미적 감각 등을 하나로 합치기를 원했다. 건강한 신체, 성격의 강인함, 정신의 풍부함 등을 갖춘 완전한 인간이라는 르네상스의 이상은 비토리노 다 펠트레에게서 첫 번째 형태를 갖추고 나타나고 있다.

비토리노는 가난하지만 소질이 있는 사람들도 이 학교에 들어와야 한다고 고집했다.

 

2. 안드레아 만테냐 : 1431~1506

p407 이교와 그리스도교는 인문주의자들이 쓴 모든 글에서보다 이 벽화들에서 더 생생하게 통합되었다.

 

p411 ‘불멸’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3. 세계 제일의 여성

p411 “라 프리마 돈나 델 몬도.(세계 제일의 여성)” 시인 니콜로 다 코레조는 이사벨라 데스테를 이렇게 불렀다.

그녀는 교육받은 르네상스 여성을 역사상 걸작의 하나로 만들어 주는 교양과 매력을 대부분 지녔다.

그녀를 보고 사람들이 경탄하는 것은 그녀의 생명력, 활기, 진짜를 알아보는 예리함, 취향의 완벽함 등이었다.

 

p413 르네상스의 그 온갖 다채로움 중에서도 이사벨라, 베아트리체, 그리고 이사벨라의 시누이 엘리자베타 곤짜가 사이에 맺어진 다정한 관계보다 더 유쾌한 것은 없다.

 

p414 자신의 성품, 의상, 매너, 정신을 다 동원하여 대사들과 추기경들을 유혹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외교술의 일부였다.

 

10장 페라라 (1378~1534)

1. 에스테 가문

p419 16세기의 처음 25년 동안에 가장 활발한 르네상스 중심지는 페라라, 베네찌아, 로마였다.

 

p421 니콜로의 아들 레오넬로는 아주 드문 인물이었다. 너그럽고 힘차고, 섬세하면서도 유능하고, 지적이면서도 실질적이었다.

이 후작은 사도 바울로가 세네카에게 보낸 것으로 여겨지는 편지들이 가짜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학자이기도 했다.

 

2. 페라라의 예술

p426 페라라의 문화는 순수하게 귀족적이다. 그리고 그 예술은 소수에게만 열렬히 봉사 하는 것이었다.

 

p429 이러한 쇠퇴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벤베누토 티시(고향에서는 흔히 가로팔로)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두 번 로마를 방문하면서 그는 라파엘로의 미술에 매료되어, 자기가 두 살 위였는데도 이 젊은 예술가의 작업장에 조수가 되었다.

 

3. 학문

p430 페라라의 짖거인 생활은 두 가지 뿌리를 갖는다. 대학과 과리노 다 베로나였다.

하늘과 바다와 땅이 어느 날인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그리스도교도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오랜 의견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많은 빛나던 도시들이 폐허만 남아 당 표면과 같은 높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복자인 로마조차도 먼지 속에 파묻혀서 파편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지혜라 부르는, 신과 인간의 일들을 이해하는 것만이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그 권리를 보존한다.

 

p431 그의 강의는 하도 인기가 있어서 학생들은 겨울의 호된 추위에도 미리 찾아와 그가 강의하기로 되어 있는 교실의 잠긴 문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인문주의자들이 흔히 그랬듯이 독설이 담긴 글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p433 어째서 너는 나는 너와 함께 무덤으로 내려갈 수 없는 걸까?

 

p434 흥분 많은 우리 시대에, 심지어 평화로운 시기에도 적대적인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벌이는 창 시합에 마음이 흔들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4. 아리오스토

p436 우리는 단어를 듣지만 멜로디는 놓친다.

(제2외국어의 배움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p438 그러나 다른 살마들을 수도 없이 찬양하면서도 그는 단 한번도 보야르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채무자에게 영웅으로 여겨지는 채권자는 없는 법이다.

 

p441 아리오스토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글을 쓴다. 그는 자신의 시구의 마법을 통해 우리를 비현실적인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요정들과, 마법의 무기들과 여러 가지 마법으로 신비롭게 만든다.

그는 탁월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부드러운 아이러니로 살짝 양념을 친다.

그는 완전히 시인이었기에 시를 위해 아름다운 형식을 만들고 다듬느라 자신을 다 써버린다. 목적이나 삶의 철학을 고귀하게 하느라 쏟아 부을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p442 자연은 그를 만든 다음 그 틀을 부수었다.

시인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p444 그는 죽기 오래 전에 이미 고전이 되어 있었다. 23년 전에 이미 라파엘로는 바티칸에 있는 벽화 「파르나소스」에서 인류의 잊을 수 없는 목소리들인 호메로스와 베르길라우스, 호라티우스와 오비디우스, 단테와 페트라르카 사이에 그의 모습도 그려 넣었다.

 

p445 아리오스토의 언어를 완전히 아는 사람, 그의 유쾌함과 감상의 뉘앙스를 잡아낼 수 있는 사람, 그의 멜로디 풍부한 꿈의 음악에 완전히 반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이다.

 

5. 이후의 영향

 

11장 베네찌아와 그 영토 (1378~1534)

1. 파도바

p448 지친 도시는 독립적인 도시 국가라는 사치를 포기하고, 외국 정부이긴 하지만 유능한 행정부 아래 번영을 누리면서 베네찌아 영토의 교육 중심지가 되었다. 라틴 그리스도교의 모든 세계로부터 학생들이 새로워진 파도바 대학으로 몰려들었다.

 

100년이 지난 다음에도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파도바여, 예술의 온상이여.”하고 말하고 있다.

고대 미술을 공부할 것과 새로운 원급법 기술을 익히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준 두가지 가르침)

 

2. 베네찌아의 경제와 정책

p449 이도시의 부와 힘은 점점 커져서 마치 이탈리아의 머리에 옥좌를 놓고 앉은 여왕처럼 보였다.

 

p450 대운하의 유유한 물의 산책로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길을 보고 코미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라고 표현했다.

이 당당함을 지탱하는 부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 일부는 수많은 산업에서 얻은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베네찌아의 부는 더 많은 부분이 해상 무역에서 온 것이다.

베네찌아 상선들은 수많은 항구에 못븡르 드러냈다.

 

p451 물의 미로에 갇힌 베네찌아는 식량을 수입해서 주민을 먹여 살렸다.

 

3. 베네찌아의 통치 방식

p457 도덕적으로 이 정부는 이 시대 다른 정부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형법 분야에서는 오히려 더 나빴다. 이익의 많고 적음에 따라 동맹을 맺거나 깨뜨렸다. 정책을 막는 데 망설임이나 충실함의 감정 따위는 없었다. 이것은 르네상스 권력의 규범이기도 했다. 시민들도 이런 규범을 따랐다. 그들은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이 베네찌아가 거두는 모든 승리를 승인했다. 국가의 힘과 안전을 자랑으로 삼고, 국가가 필요로 하면 그 시대 다른 사람들과 비할 수 없는 애국심과 완전한 봉사를 국가에 바쳤다. 그들은 하느님 다음으로 총독을 존경했다.

 

 

4. 베네찌아의 생활

p459 15세기 마지막 몇 십 년, 그리고 16세기의 처음 몇 십 년은 베네찌아 생활에서 가장 화려한 광채의 시기였다.

 

p461 아마도 중산층이 가장 행복한 게층이었으리라. 그들은 공적인 행사와 사적인 즐거움을 모두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즐겼다. 그들은 교회의 하위 성직자, 정부의 관리, 그 밖에 의사, 변호사, 교육자, 또 산업체와 조합의 관리직, 외국과의 무역에 나타나는 수학적 계산, 역내 무역의 통제 등의 일을 했다. 부자들처럼 행운을 잡으려고 법석을 떨지도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처럼 애들을 먹이고 입힐 근심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이 도시에는 교회, 광장, 바다가 어우러져 있기에 베네찌아 축제는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화려함과 축제 행렬을 펼칠 핑계는 아주 많았다.

 

p462~463 1506년에는 수도사이며 배우이자 음악가인 프라 죠반니 아르모니오가 에레미타니 수도원에서 라틴어로 「스테파니움」을 공연했다. 최초의 현대 희곡이었다.

 

5. 베네찌아의 미술

p465 감각적인 색채가 베네찌아 미술의 핵심이다. 심지어 건축도 그렇다. 베네찌아의 많은 교회와 집, 그리고 상업적인 건물들은 정면부에 모자이크나 벽화들을 보여준다.

 

p467~468 역사에 더욱 중요한 것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교회이다.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는 줄여서 프라리, 곧 수도사 교회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것은 밖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지만 내부는 유명한 베네찌아 사람들의 무덤으로 세월을 두고 명성을 얻었다.

 

2. 벨리니 사람들

p469 당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교회는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설교의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림과 조각상들을 필요로했다.

(그 시대 억압되어 있던 창조 욕구의 분출 뿐만아니라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 위해서도 작품은 필요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쏟아지는 작품들에 대해 이유가 될만한 부분이다.)

 

p470 그들은 명성의 덧없음을 잠시 잊기 위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베네찌아에서 초상화와 이젤 그림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5세기 중엽까지 베네찌아 회화는 천천히 발전했다. 베네찌아 사람들이 여기에 자기들이 사랑하기 시작한 색채와 삶을 담을 수 있음을 깨달았을 때, 아침 햇살을 받은 꽃처럼 베네찌아 회화는 유례없는 광채를 내기 시작했다. 색채를 향한 베네찌아 방식의 직감은 어쩌면 동쪽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p471 가장 큰 영향은 시칠리아나 아니면 플랑드르 지방에서 왔다. 안토넬로 다 메씨나는 상인으로 성장했고, 젊은 시절에만 해도 자신의 이름이 미술사에서 수백 년 동안이나 전해지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p472 베네찌아에서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제자드르 중에는 야코포 벨리니가 있었다. 그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짧지만 핵심을 이루는 한 왕조를 창시한 사람이다.

 

p473 말년에 그는 가장 위대한 그림들을 그렸다. (섣부른 판단을 하면 안된다는 말씀! 동창회는 30년 후에나 가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p474 젠틸레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브레라) 일흔여섯의 나이에 그가 속한 성 마르코 수도회를 위해 그린 것이다.

 

p474~475 그는 색채의 영광을 드러낸 최초의 베네찌아 사람이었다.

 

p475 그리고 이들 그룹화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성 욥의 성모」이다. 이것은 죠반니가 유화로 그린 최초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리고 베네찌아에서, 그러니까 세게에서 가장 빛나는 색채를 가진 그림의 하나이다.

 

p476 인간 식물이 이탈리아에서는 지상의 다른 어떤 곳보다 무성하게 잘 자란다는 알피에리의 호언장담이 다시 생각난다.

 

p477 세대가 흐르면서 베네찌아 예술은 그 지식을 축적하고,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면서 절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3. 벨리니 일가에서 죠르죠네로

 

4. 죠르죠네

p480 1507년에 베네찌아 사람들은 색체 없는 삶이란 죽은 것이라고 느꼈다.

 

p481 그는 류트 연주에 뛰어났으며, 그림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보다 육체를 가진 살아 있는 여자들을 좋아했다.

 

1500년에 잠시 베네찌아에 들렀던 레오나르도에게서 어쩌면 신비롭고 꿈결같은 부드러움의 표현, 음영의 섬세함, 그리고 세련된 태도 등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것들은 비극적으로 짧은 순간 그를 베네찌아 미술의 정상으로 만들었던 요소들이다.

 

p482 그러나 성모의 발치에 있는 녹색과 보라색의 능라는 색채와 디자인의 기적이다.

풍경은 희미해지면서 레오나르도 풍의 신비로움 속에서 하늘과 바다가 서로 하나로 녹아들고 있다.

 

5. 티찌아노 - 형성기 ; 1477~1533

p485 그러나 괴테는 후세의 눈길로 이 작품에서 이미 “위대한 작품을 향한 약속”을 알아보았다. (티찌아노)

 

p486 티찌아노는 백 살의 수명을 부여받은 사람에 알맞게 천천히 발전했다.

(현대인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은 말. 조급증을 버릴 수 있도록!)

 

p489 “1518년 5월 20일. 어제 티찌아노가 그린 그림이 걸렸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프라리 성당의 「성모의 승천」을 보는 것은 감각이 예리한 사람의 삶에서는 하나의 삭너이다.

 

6. 덜 중요한 화가들과 작품

(제목을 수정했으면 좋겠다. 덜 중요한 화가들이라는 것이 맘에 걸린다.)

p493 티찌아노는 그를 가리켜서 “선 자체처럼 선하고, 미덕 자체처럼 미덕을 지닌”사람이라고 불렀다. (로토)

 

 

6. 베네찌아의 학문

1. 알두스 마누티우스

p495 베네찌아는 인문주의 운동에 두드러진 기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문주의는 여기서 가장 고귀한 예의 하나를 가진다.

 

p496 베네찌아 여자들은 교육을 향한 가식이 적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매력적이거나, 아니면 어머니로서 자식을 많이 두었거나, 아니면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아레티노는 여기서 안전하게 교황과 왕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몇 세기 뒤에는 바이런이 여기서 교황과 왕들의 몰락을 찬양했다.

 

그사이에 베네찌아 인쇄업자들은 그 시대, 어쩌면 모든 시대에 가장 아름답게 인쇄된 책들을 생산했다.

 

p499 알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구』서문에 이렇게 썼다.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책들을 공급받아야 한다. 이런 공급이 확실하게 될 때까지 나는 쉴수가 없다.” “당신이 누구든, 빨리 일을 보고 신속하게 떠나 주시기를 알두스는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이곳은 일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p500 이제 그리스의 영광은 그것을 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비추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2. 벰보

p501 벰보의 가장 행복한 시절 페라라에서 보낸 시기였다. 스물여덟에서 서른 여섯의 나이였다. 거기서 그는 문학적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대단한 궁정의 여왕인 루크레찌아 보르지아를 향한 사랑에 빠졌다.

 

p503~504 다듬어지지 않은 평민 방식 표현들이 그의 취향을 망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 하찮은 것들을 치워 버리게.”라고 벰보는 친구에게 말했다. “그런 쓸모 없는 것들로 기품 있는 남자가 되지는 않으니까.” 모든 라틴어는 키케로르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모든 이탈리아어는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그는 이탈리아를 향해 주장했다.

그 자신은 노년에 피렌쩨와 베네찌아의 역사를 썼다. 이 책들은 아름답지만 생명이 없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렸네. 내 생명을 부드럽게 지켜 주던 마음, 자신 의 생명을 잊고 내 생명을 사랑하고 유지해 주던 그 마음, 스스로 주인이 었던 그 마음, 값비싼 장식과 꾸밈과 비단과 금과 보석과 보물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가 지닌 사랑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며 (그녀 자신의 말에 따르면) 만족했던 그 마음. 이 마음은 의복 대신 가장 부드럽고 우아하고 훌륭한 팔다리를 지녔다네. 그 마음은 이렇게 봉사할 때 즐거운 모습을 보였고, 또 내가 이 땅에서 만난 중에 가장 달콤하고 또 가장 품위 있는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네.

 

삶을 통해 고단하게 방황하던 나를 밝게 비쳐 주던 성실한 별이었던 그 눈을 말일세.

 

7. 베로나.

p505 죠반니 포르데노네는 경쾌한 에너지와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었고, 재치와 칼을 준비하고 어디서나 무슨 일이라도 감행할 사람이었다.

 

p507 베로나 건축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은 바사리가 말했듯이 “저 드문, 전인적인 천재” 프라 죠콘도였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센 강에 두 개의 다리를 건설했다.

로마에서 죠콘도는 라파엘로, 쥴리아노 다 상갈로 등과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맡았지만 같은 해에 죽었다. 잘 보낸 삶이었다.

 

p509 르네상스, 어쩌면 모든 시대의 가장 아름다움 메달을 만든 사람은 베로나에 속했다.

심오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철학적인 겉모습을 띠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아주 꼼꼼한 장인 정신과 역사를 조명해주는 보물이다.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1534)

1. 코레죠

p513 이곳은 천재가 태어나거나 죽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천재가 그곳에 머물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장소이다. 여기에는 그들을 교육시키고 형성할 중요한 예술이나 뚜렷한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p519 그렇게 짧은 생애로 그가 이룩한 것은 엄청나다. 라파엘로가 처음 40년 동안 보여준 것만 빼고 레오나르도, 티찌아노, 미켈란젤로 그 누가 이룩한 것보다도 더 많았다. 코레죠는 선의 우아함, 윤곽의 부드러운 입체감, 인간 육체의 살아 있는 살결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아주 대등했다.

그는 명암법의 대가였다.

 

2. 볼로냐

p522 이탈리아 무역로의 주요 교차로에 위치한 볼로냐는, 인문주의가 스콜라 철학을 쫓아내면서 피렌제에 지적인 주도권을 넘기기는 했어도 경제적으로는 계속 번성했다.

 

p525 볼로냐에서는 조각이 건축과 경쟁을 벌였다.

페라라 출신의 두 화가가 볼로냐 화가들을 이런 비잔틴 양식의 ‘죽은 엄숙함’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p526 이들 벽화들이 “도시에서 프란치아에 대한 존경심을 만들어 냈기에 그는 신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주문들이 그에게 쏟아졌는데, 그는 아마도 자기 능력 이상으로 많은 주문을 받았던 모양이다.

 

3. 에밀리아 가도를 따라서

p531 이런 범죄만으로 그의 에너지를 다 소진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유능한 장군이었고, 가차없는 용감성과 군인의 삶에 따르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는 확고한 끈기로 유명했다.

 

4. 우르비노와 카스틸리오네

p534 아드리아 해에서 내륙으로 20마일 떨어진 곳, 로레토와 리미니 중간에 아페니노 산맥의 장고나에 높이 가려진 곳에 있는 작은 우르비노는 15세기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문명화된 중심지의 하나였다.

 

p535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우정을 나누고 또 자신이 후원해 주는 예술가, 학자 시인드로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자신이 이 나라에서 가장 폭넓은 지식인이었다.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했고, 『윤리학』, 『정치학』, 『물리학』을 아주 철저히 알고 있었다. 그는 철학보다 역사를 더 중히 여겼다. 인간의 이론의 망을 추적하는 것보다 인간 행동의 기록을 탐구함으로써 삶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p537 귀도말도와 엘리자베타의 궁정에서 토론된 문제들 중 하나는 “인내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p542 “신체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아름다움의 원천은 아니다. …… 아름다움은 신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열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많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은 중세의 튼튼한 기사도를 창백한 플라톤적 사랑으로 바꾸어 놓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마지막의 실망인데, 여성들은 이런 마무리를 용서해 줄 것이다.

 

13장 나폴리 왕국(1378~1534)

1. 너그러운 알폰소

p547 그런데도 알폰소는 인문주의라는 열병에 걸려서 고전 학자들을 어찌나 후하게 후원해 주었던지 그들은 그를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불렀다.

 

p548~549 베카델리의 주장에 따를면 우리는 인간의 모든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자연과 신은 하나다. 따라서 우리의 본능도 선한것이고, 쾌락과 행복을 향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도 인간의 삶의 적합한 목적으로서 그것의 추구가 정당한 것이다. 감각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모든 쾌락은, 그것이 해롭다는 점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짝짓기 본능을 가지고 있으면 평생동안 순결을 지킬 본능을 분명 갖지 않았다. 따라서 그러한 절제는 자연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일 뿐 미덕이라고 설교되어서는 안 된다. 베카델리는 이 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처녀성이란 오류요 낭비다. 기생이 수녀보다 인류을 위해 더욱 가치가 있다.

 

2. 페란테

p553 폰타노가 라틴어 시와 똑같은 유려함과 우아함을 지닌 이탈리아어 시를 썼더라면 우리는 그를 역시 두 가지 언어로 작업했던 페트라르카나 폴리찌아노와 동급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들은 과거를 배회하는 것만큼 현재에도 잘 어울리는 훌륭한 양식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p556 시칠리아는 르네상스에서 떨어져 있었다.

팔레르모, 몬레알레, 체팔루 등지는 위댛나 미술품을 간직하고 있지만 오로지 비잔틴과 이슬람교와 노르만 시대의 유품들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 땅을 소유한 봉건 영주들은 15세기보다는 11세기를 더 좋아했고, 기사 게급이 지닌 학문에 대한 경멸 혹은 무시를 그대로 지닌 채 살았다. 그들이 착취한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색깔이 풍부한 의상과 밝은 모자이크와 침울한 희망의 종교, 그리고 사랑과 폭력에 관해 노래와 단순한 시 말고 달리 문화적 표현을 찾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섬에는 1295년부터 1409년까지 아라곤 가문의 왕과 왕비들이 있었다. 이어서 다음 300년 동안 이 섬은 스페인 왕권의 보석이 되었다.

 

p558 우리는 때로 미술관을 걷다가 피곤해지면, 페라라의 스키파노야 궁전이나, 뉴욕의 모건 도서관이나,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같은데 아직도 감추어져 있는 이러한 필사본들의 세밀화를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서 기쁜 마음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이제까지 읽은 책 중 가장 목차와 뼈대가 가장 잘 짜여진 책이었다. (오래된 책들 중에서.) 책이 쓰인 시기가 현제와 가장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서곡, 피렌제의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로 나뉘었고, 뒤로 갈수록 내용이 많아졌다. 각 주제에 하위 항목은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뼈대를 세웠다.

 

<서곡>은 인물과 작품, 그리고 도시 위주로 구성이 되어있다.

<피렌쩨의 르네상스> 부분은 메디치 가문, 황금시대,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으로 크게 나눈 후, 하위 항목으로 건축, 조각, 회화, 그 외의 예술 등으로 나눈 것이 특징이다. 완전히 같은 소 제목으로 나눠지지 않았지만 일관성 있게 내용을 나눈 것이 보인다.

<이탈리아 축제 행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제외하고는 도시를 소제목으로 삼고 소제목 아래도 각각 그 도시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 또는 그 도시의 비중있었던 가문, 학문 등에 대해 소개했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부분이었는데, 한 인물에 대해 깊이 있고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해주니 흥미로웠다.

 

너무 많은 양을 다루기 때문에 사실 한번 읽고는 잘 정리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쏟아졌던 작품들에 대해, 그 작품을 만들었던 인물들에 대해 알고 나니 유럽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럽여행을 앞둔 대학생 친구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일류와 이류, 또는 정통과 아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모방대신 창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을 들끓게 했다. 또한 지금의 미술 분야는 어떠한지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억압 받았던 중세를 지나, 얻게 된 자유의 시대 르네상스에서 기존의 것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보였고, 그것을 벗어던져버리고 싶은 인간의 욕구도 볼 수 있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신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고대에도, 중세에도, 르네상스 시대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인간과 신은 늘 갈등하기도 하고, 화합하기도 하며, 함께 살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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