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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7일 11시 54분 등록

<문명이야기> 윌 듀런트, 안인희 옮김, 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윌 듀란트는 미국사람이다. 1885 11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 애덤스에서 태어났다. 1885년은 우리나라에는 조선이 있던 때고, 1894년 갑오경장 10년 전쯤이고 고종이 새로 수리한 경복궁으로 이사 와서 입택 축하기념으로 나무를 심을 1888년보다 3년 전이다. 듀란트 가족이 윌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일 때, 안성 남사당패 여자 꼭두쇠 바우덕이가 경복궁 재건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을 위해 열심히 줄을 타고 있었겠다. 자동차의 첫 특허를 1886년에 냈으니까 윌 듀란트는 검정 마술사 모자를 쓰고 마차 타고 교회에 결혼하러 가진 않았겠다. 

 

윌 듀란트는 미구 매사츠세츠주 노스 애덤스와 뉴저지 주 커니의 카톨릭 부설 학교에서, 그 다음에는 저지 시의 세인트 피터스 카릴지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후 뉴저지주 사우스 오렌지에 소재한 세튼홀 칼리지에 자리를 잡고 라틴어와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쳤다. (1907~11) 이후 그는 이 평온한 신학교에서 뉴욕의 가장 진보적인 자유주의 교육 실험학교인 페레르학교로 자리를 옮겼다.(1911~13) 이 학교에서 1898 5 10일 러시아에서 태어난 아이다 카우프만이라는 제자와 사랑에 빠져 교직을 사임하고 그녀와 결혼한다.(1913) 그가 결혼한 러시아 신부는 그보다 13살이 어리다. 그러니까 신랑은 30, 신부는 17세쯤인가 보다. 여고에는 수많은 여학생들이 짝사랑만 할 동안 총각선생님과 결혼하느라 조혼 대열에 합류하는 학생이 가끔 있다. 이후 4년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1917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1914년부터는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 역사와 문학, 철학을 강의했는데 이 강의는 이후 13년간 주2회씩 이어졌다. 1926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철학이야기>의 성공으로 1년 후 교직을 떠날 여력이 생긴다. 그럼 이 강의가 그의 <철학이야기>의 짧게 날리는 잽이 된 건가? <철학이야기>도 연구원 커리큘럼에 작년에는 끼어있었는데 올해는 어떤가 시간이 부족해서 못 알아 보고 패스.

 

듀런트 부부는 가끔씩의 평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업 시간을(매일 8시간~13시간) <문명 이야기>에 바쳤다. 보다 철저한 준비를 위해서 1930년에는 이집트와 근동, 인도, 중국, 일본 등지를 직접 탐방하고, 1932년에 다시 일본과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폴란드 등지를 방문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문명이야기> 시리즈의 제1 <동양문명>(1935)이다. 이후 몇 번인가의 유럽 방문을 거쳐 제2 <그리스문명>(1939), 3 <카이사르와 그리스도>(1944)가 준비된다. 1948년 터미와 이카크, 이란, 이집트, 유럽 등지에서 체류하며 제 4 <신앙의 시대>(1950)를 저술하고 1951년에는 제5 <르네상스>(1953)을 출간했으며, 1954년부터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국에 대한 추가 연구를 시작해 종교개혁을 새롭게 조망한 제 6 <종교개혁>(1957)을 발표했다.

 

이들 저작을 준비하는데 있어 듀런트 여사의 역할은 매년 그 비중이 더욱 커져갔으며, 7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1961)에서는 기여도가 너무나 커서 책 표지에 두 사람의 이름이 공저자로 나란히 오르게 된다. <루이 14세의 시대>(1963) <볼테르의 시대>(1965)<류소와 혁명>(1968)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5년 제 11 <나폴레옹의 시대> 출간을 끝으로 50년에 걸친 이 대작은 완결된다. 에이리얼 듀런트는 1981 10 25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윌 듀런트도 그로부터 13일 후 11 7일에 96세를 일기로 그녀를 뒤따랐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평가라기 보담은 출판사에서 책의 날개에 친절하게 써준 최소한의 저자 소개를 읽어본 후의 개인적 느낌은 이 부부가 참 멋진 사람들인 것 같다. 한 가지 일에 이렇게 부부의 인생을 걸 수 있다니. 또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장수를 누린 후 같이 죽은 모습이 그들이 원래의 한 쌍이었던 쌍가락지처럼 캠벨 말에 의하면 영혼의 동질성을 나누어 가진 이와 재회하는 결혼을 한 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또는 그들)는 무척 유쾌하다. 재미가 있다. 문명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해서 하고 있는데 지루하지가 않다. 은근슬쩍 전체를 조망하면서 유러머스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어찌보면 아는 게 많은 이들의 쿨한 농담이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정신집중을 요하는 책임은 확실하다. 그건 이 부부가 각 대륙을 직접 방문해 가면서, 하루에 8시간 내지 13시간씩 성실하게 노동해서 마련한 역사적인 사실 때문이리라.

 

2.   내가 저자라면

 

1)   전체적인 뼈대와 목차

 

서곡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2장 아비뇽의 교황들

피렌쩨의 르네상스    3장 메디치 가문의 떠오름

                     4장 황금시대

                     5장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6장 밀라노

                     7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8장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9장 만토바

                     10장 페라라

                     11장 베테찌아와 그 영토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장 나폴리 공화국

 

의 구성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다루고 있다. 시대순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가문,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렇게 해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사전지식이 워낙 없는 나로서는 모르긴 마찬가지다. 필사하는 마음으로 목차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듀란트 부부의 서술 방식이 사실에 근거를 둔 유쾌한 이야기 들려주기 방식이라고 해도 일단 인물의 생몰연대, 역사적 사건이 나오자 암기를 요하던 역사 공부 자세를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 태도는 지끈거림과 거부감을 동반한다.     

 

2)   강점과 보완점

 

문체가 유려하면서 유쾌하다. 어떨 때는 헤로도토스와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는 것처럼 즐거울 때가 있었다. 한편 무척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의 아는 체 하는 유머를 구사한다. 지적인 자극을 주면서도 웃기니 그들이 쓴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물론 그리스문명은 안 읽을란다. 그건 지난 주에 읽었다.  

 

여전히 어렵다. 책을 어렵게 썼다기 보담은 낯선 인명과 지명, 그리고 남의 나라에서 이런저런 곡절 끝에 누가 죽고, 누가 어쩌고 저쩌고 한 걸 내가 다 알아야돼? 이런 질문이 들 때 그렇다. 세부적으로 상세하게 알고 싶지 않은데 역사적 서술을 하는 작가의 도덕성 때문에 상세해지면 힘들었다. 이것 또한 보완해 달라고 요구할 순 없겠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겪는 당연한 반응일테고 다시 읽으면 좀 더 즐거울 것도 같다.

 

3)   감동적인 장절

 

메디치 집안의 것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태도

 

358 그의 기본 원칙은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 화가여 보라, 들판에 나가거든 여러 사람들에 주의를 돌리고 사물을 차례로 하나씩 자세히 바라보고 이들 별 가치가 없는 것들 중에서 여러 가지를 골라내라물론 화가는 해부학, 원근법, 명암의 배치 따위를 탐구해야 한다. 윤곽선을 예리하게 강조하면 그림은 나무토막처럼 보인다. “언제나 인물이 그 머리를 가슴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게 만들라레오나르도 자신의 작품에 나타나는 우아함의 한 가지 비밀이 이것이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물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보여 줄 수 있는 동작을 만들어라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49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라비에라 해안의 장관을 절대로 잊지 않앗다. 산등성이로 왕관처럼 펼쳐진 마을은 경사로를 따라 푸른 바다와 연결되었다. 젊은 시인은 이것이 지상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50 법률 논문에서 그의 관심을 끈 것이라고는 수많은 고대 로만 문헌의 인용이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신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등을 찾아낼 수 있는 대로 찾아내 모조리 읽었다. 그들은 그에게 철학과 문학 양쪽ㅇ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부모가 죽자(1326)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아비뇽으로 돌아와 고전문학 및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327년 수난의 금요일에 한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사랑을 거부한 일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를 자기 시대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열광적으로 자세히 묘사했지만 그녀의 신원의 비밀만은 감쪽같이 감추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뮤즈가 그의 창조물이라고 여겼다.

 

55 그는 자신이 설파한 것을 손수 실천했다. 여행할 때는 고전 텍스트들이 아라비아나 중국 상인들이 제공하는 어떤 물건보다 더 값진 상품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찾고 사들였다. 살 수 없는 사본들은 손수 베꼈다. 그는 그리스에서 보내온 호메로스 한 권을 자랑으로 삼았고, 그것을 보내준 사람에게 에우리피데스의 필사본도 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 필사본을 휴대용 참고서적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이 책의 표지 안쪽에 친구들의 경력을 적어놓았다페트라르카는 이 작품들을 보면서 수많은 걸작들이 잊히거나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걸작품들 되찾는 일이 그의 정열이 되었다.

 

2. 나폴리와 보카치오

 

57 조반니 보카치오는 피렌쩨의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이름과 도덕성이 의심스러운 프랑스 아가시 사이에 맺어진 친분관계의 뜻하지 않은 결과로 삶을 시작했다. 사생아라는 그의 출신과 절반은 프랑스 혈통이 그의 성격과 역사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때 피렌체 근처에 있는 체르탈도로 옮겨와 계모 밑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살이 되자 나폴리로 보내져 그곳에서 금융 및 무역업자가 되기 위한 견습을 받았다. 페트라르카가 법을 싫어했듯이 그는 상업을 싫어했다. 빈곤과 시를 선택하면서 오비디우스에게 마음을 뺏겨 버렸다.

 

57 아버지는 그가 아름다움보다 돈을 더 사랑하도록 만들 수가 없었기에 그가 교회법을 공부한다는 조건으로 사업을 그만두는 일을 허용했다. 보카치오는 동의했지만 이미 사랑을 할 정도로 자라 있었다. 나폴리의 가장 쾌활한 숙녀는 마리아 다퀴노였ㄷ. 그녀는 현명왕 로베르의 사생아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정식 남편이 그녀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렸다.

 

59 대부분은 피암메타에게 바쳐진 것이엇고, 일부는 더 작은 불꽃들을 찬양한 것이었다.

 

3. 계관 시인

 

61 이 날 이후로 페트라르카는 새로운 명성과 새로운 적을 얻었다. 경쟁자들은 펜을 휘둘러 그의 월계관에서 잎사귀를 뜯어냈지만 오아들과 교황들은 그를 기꺼이 궁정에 맞아들였다.

 

62 몇 가지 성직록을 받으면서 그는 부를 경멸할 수 있을 만큼 생활이 풍족했고 문인 생활을 좋아할 만큼 소심했다.   

 

4. 리엔쪼의 혁명

 

67 리엔쪼는 페트라르카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유적과 고정에 의해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67 가난한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상인들은 이 미래의 호민관이 로마를 안전하게 만들어서 산업과 무역을 보호할 수 있을까 재보았다. 귀족들은 비웃으며 리엔쪼를 저녁 식탁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리엔쪼는 혁명이 일어나면 귀족들 중 일부를 골라 교수형에 처하겠노라고 공언했다.

 

69 리엔쪼의 이 고귀한 꿈의 붕괴 과정은 놀랍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자유가 그렇듯이 권력도 오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다. 리엔쪼는 현실정치가가 되기에는 웅변가로서 지나치게 위대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위대한 문구, 약속, 주장들을 스스로 믿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시의 시대에 중독되어 있었다.

 

73 그는 기사의 무장을 하고 궁전에서 나와 웅변으로 대중을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폭도들이 떠드는 통에 그의 목소리는 파묻히고 그들은 활을 쏘아댔다. 화살 하나가 그의 머리에 박히자 그는 궁전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폭도들은 문에 불을 지르고 안으로 들어와서 방을 약탈했다. 리엔쪼는 방에 숨어 서둘러 수염을 깍고 문지기의 망토를 입고 머리에 이불을 덮어썼다. 그는 들키지 않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황금 팔찌 때문에 들통이 나서 카피톨리니 언덕 계단으로 끌려왔다. 그 자신이 죄수들을 사형시킨 곳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 말을 들어줄 것을 청하고 말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능변을 두려워한 어떤 기술공이 칼로 그의 배를 질러서 말을 끊었다. 수많은 가짜 영웅들이 그의 죽은 몸에 칼을 찔러 넣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시신은 길거리를 통해 끌려 다니다가 죽은 짐승의 고기와 같은 꼴로 정육점 창고에 매달렸다. 시체는 이틀이나 그곳에 그대로 매달려 대중의 모욕과 개구재잉들이 던지는 돌을 감당했다.

 

5. 떠돌이 학자

 

75 14세기 초에 엔리코 스크로베니라는 야심에 찬 상인 한 사람이 고대 로마의 경기장 아레나에 있는 궁전을 사들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 죠반니 피사노와 가장 유명한 화가인 죠토를 초빙해서 자신의 새 저택에 속한 예배당을 장식하도록 했다.

 

6. 죠토

 

77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동요만이 피렌쩨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시민들은 도시보다는 자기들이 속한 당파에 더 충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부심 강한 시민 의식을 가졌다. 그들은 상당한 재산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썼다. 부유한 개인이나 조합들은 도시를 포장하는 비용, 하수구 건설, 물의 공급을 개선시키는 일, 공공 시장의 건설, 교회, 병원, 학교를 세우거나 고치는 일 등을 위해 돈을 내놓곤 했다.

 

80 상부교회의 이들 벽화들은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준다. 그리스도조차 그토록 대규모의 그림 전기를 얻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그림들은 구상과 구도가 대가의 것이었고 부드러운 분위기와 거침없는 조화가 즐겁다. 이 그림들은 비잔틴 양식의 완고함을 단박에 끝장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이와 힘과 개성이 결핍되어 있다. 정열의 색상이나 생명의 피가 없는 우아한 그림들이다.

 

80 어쨎든 죠토의 작품은 혁명이었다. 우리는 그의 잘못을 느낀다그러나 이는 그가 시작한 운동에 의해 발전된 회화의 기법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의 도안, 입체감, 원근법, 해부학 지식 등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적절하지 못하다. 죠토 시대 의학이 그렇듯이 미술은 막 인체를 해부하고 근육, , 인대, 신경의 위치, 구조, 기능 등을 배우기 시작하던 때였다.

 

80 죠토 시디에 누드를 탐색하는 일은 아직 드물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은 추문이었다.

 

81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도이치 음악과 마찬가지로 가족 단위로 물려받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집안, 작업장, 유파 등을 통해 기술을 전수받고 축적하면서 번성했다. 타데오는 죠토의 견습공으로 화가 일을 시작했다. 1347년에 그는 피렌쩨 화가와 건축가로서의 사업을 통해 엄청난 부자가 되어 그의 후손들은 미술의 후원자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83 오르비에토와 시에나 교회의 정면부는 정직한 건축이라기보다는 조각과 모자이크를 탁월하게 배치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교회의 의미는 기도나 찬양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이어야 하는데,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이 수평으로 층을 이루어 교차하는 것이 눈과 영혼을 피곤하게 만든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피렌쩨 교회는 1412년 이후로 이렇게 불리고 있다. 도시의 상징인 백합꽃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 교회는 꽃이라 보기는 어렵다. 부르넬레스코의 유명한 둥근 지붕만 빼면 이것은 아예 동굴 같다. 그 컴컴한 내부는 신에게 이르는 출입구라기보다는 단테의 지옥의 입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87 흑사병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를 폐를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고열에 시달리다가 피를 토하고 보통 사흘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는 임파선을 통한 전염으로 열이 나고 종기와 등창이 일어났다가 보통 닷새 만에 죽었다. 이 질병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면서 1348년에서 1365년 사이에 이탈리아 인구의 절반 가량이 죽었다.

 

93 <열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그런 명성을 얻은 것은 기법보다 오히려 그 도덕성에 힘입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이것은 이따금 미사여구를 포함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리에서 능변이고 생생하고 예리하며 생명에 넘치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처럼 맑다. 이것은 삶에의 사랑에서 나온 책이다. 천 년 동안 이탈리아에 생긴 최악의 재앙 속에서 보카치오는 그 생명력으로 아름다움, 유머, 선량함, 즐거움 등이 아직도 지상을 산책하고 있음을 볼 용기를 찾아냈다.

 

8. 시에나

 

94 1315년에 시모네 마르티니는 시 청사 건물에있는 대회의실을 <성모의 대관식> 그림으로 장식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성모는 법으로 보나 신학적으로 보나 이 도시의 여왕이었으므로 성모가 시 정부의 회의에 적절하게 참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9. 밀라노

 

98 마테오는 심각한 실수들을 저질렀지만 유능하게 통치했기에 그의 후손들은 밀라노에서 1447년가지 권력을 유지했다. 그들은 양심적인 경우가 드물고 자주 잔인했으며, 이따금 도가 넘쳤지만 멍청한 적은 없었다. ..유능한 행정관과 장군을 찾아내는 그들의 기술은 군대에는 승리를, 밀라노에는 부유함을 가져다주었다.

 

10. 베네찌아와 제노바

 

99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들은 바다에 맞서라고 선원들의 용기를 부추기며 제노바 상업로를 개척했다.

 

11. 14세기 트레첸토의 황혼

 

103 페트라르카는 모든 도시 모든 주인들을 음미하면서 베테찌아에 거처를 잡고 그곳에 7년간 살았다. 그는 루크레티우스를 제외한 라틴어 고전본 모두를 포함하는 장서도 함께 가지고 왔다. 한 편지에서 그는 소중한 장서를 베네찌아에 기증했으나 죽을 때가지 자신이 사용할 권한을 유지했다.

 

104 여기서 그는 번성할 때는 겸손을 불운에서는 용기를 권고한다. 지상의 승리나 재물에 행복을 연결시키지 말라고 경계한다. 그리고 치통, 비만, 아내를 잃는 일, 명성이 흔들리는 일 등을 견디는 법을 가르친다. 모두가 훌륭한 가르침이지만 이것은 모두 세네카의 책에 있는 것들이다.

 

105 그는 이제 정통 그리스도교로 마음을 돌리고 책을 팔아버리고 수도사가 될 생각을 했다. 페트라르카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중용의 길을 선택하라고 간청했다. 사랑의 시들과 단편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라틴과 그리스 고전을 진지하게 탐구하라고 권한 것이다. 보카치오는 존경하는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여 서유럽에서 최초의 그리스 인문학자가 되었다.

 

107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기를 바란다. 글을 쓰고 있을 때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다면 기도를 들리면서 눈물에 젖어 있을 때 말이다.” 일흔 살 생일인 1374 7 20일에 그는 책에 기댄 모습으로 분명히 잠들었다가 죽었다. 그는 유언장에서 긴 겨울밤에 추위를 막아줄 외투를 살 돈 50플로린을 보카치오에게 남겼다. 1375 12 21일에 보카치오도 죽었다. 향년 예순한 살 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앞으로 50년 동안 휴경 기간을 보내고 나서야 이 남자들이 심은 씨앗이 꽃을 피우게 된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기를 바라나?

 

12 전말

 

110 페트라르카가 성공했다면 아마도 르네상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분열이 르네상스에는 이로웠다. 큰 국가들은 자유와 예술보다는 질서와 권력을 키운다.

 

111 페트라르카는 비르길리우스와 키케로에 따라 자신의 태도와 문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영혼의 불멸보다는 명성을 더욱 많이 생각했다. 그의 시들은 이탈리아에서 인공적인 소네트를 만들어 냈지만 그래도 이런 소네트들은 셰익스키어 소네트가 나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의 열렬한 정신은 피코에게 전승되엇고 잘 연마된 형식은 폴리찌아노에게 전승되었다.

 

112 그렇게 해서 르네상스의 모든 기반은 페트라르카가 사망할 무렵에는 이미 완비되었다. 이탈리아 무역과 산업의 경이로운 성장과 열성은 르네상스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부를 모아들였다. 농촌의 평화와 정체에서 활력과 자극으로의 이행은 르네상스에 자양분을 줄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도시들의 자유와 경쟁에는 그 정치적 기반이 준비되어 있었다. 게으른 귀족 계급을 뒤집어 엎고 교육받은 왕자들과 활력에 넘친 시민 계급이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었다. 문자의 기반은 지방어(이탈리어어)의 진흥과 그리스와 로마 고전의 발견 및 탐구를 향한 열성 속에 들어 있었다. 미학적 기반도 이미 놓였다. 점점 커지는 부가 낡은 도덕의 제한을 깨뜨렸다. 상업 활동과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교와 만나게 된 일은 교리적, 도덕적으로 전통적 신앙과 방식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해 새로운 관용을 마련해 주었다.

 

2,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나는 단테를 읽을 때 그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사랑하는 여인인데 성모처럼 이상화해서 사랑하는)과 아비뇽유수에 대해 궁금했었다. 그 중 아비뇽시절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기쁘다.   

 

1.     바빌론 포로

 

118 그는 드물게 조합된 능력을 보였다. 곧 학문적 탐구와 행정적 기술의 조합이었다. 그의 통치아래 아비뇽 교황청은 부패하기는 했으나 대단히  유능한 관료조직으로 발전했다.

 

121 교황이나 아니면 세속의 왕자가 임명한 모든 주교나 수도원장들은 취임 사례비 명목으로 예상되는 1년 수입의 3분의 1을 교황청으로 보내고, 또 자신의 임명을 위해 애를 써준 여러 명의 중개인들에게 분통 터지는 선물을 주었다.

  

121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면 교회의 성직록이나 관직을 가진 사람은 모두 1년분 수입에 해당하는 액수를 교황에게 보내야 했다. (성직 취임세) 그 이후로는 해마다 수입의 10분의 1을 교황에게 바쳤다.

여기서 교회 십일조가 나왔나? 성경에도 근거가 있었던 것 같다. 내 수입의 1/10을 내 가족 아닌 이를 위해 회향, 나눔하는 것의 근거를 세워두면 어떨까?

 

124 페트라르카는 교황들에게 로마로 돌아갈 것을 그토록 간청했지만 빈곤이 순결에 도움을 주었던 경우만 빼고는 로마의 도덕성도 아비뇽의 그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125 아비뇽의 교황들 일곱 명을 살펴보면 오로지 한 사람만이 세속적인 즐거움의 삶을 살았다. 나머지 교황들, 곧 요한 22세는 비록 탐욕스럽고 매정한 사람이었지만 엄격한 금욕을 지켰고, 또 그레고리우스 11세는 전쟁에서는 인정사정없는 사람이었지만 평화시에는 모범적인 도덕과 경건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베네딕투스 12, 인노켄티우스 6, 우르바누스 5, 세 사람은 거의 성인과 같은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아비뇽에 있었던 모든 악덕에 대해 교황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 원인은 부유함이었다. 그것은 다른 시대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126 종교 개혁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바로 아비뇽 교황들의 바빌론 포로 시대와 뒤이어 나타나는 교황 분열 사건이었다. 그리고 교황청이 이탈리아로 돌아온 일은 교황의 위신을 회복시키고 파국을 100년 연기했다.

 

2.     로마로 가는 길

 

126 밀라노는 공공연히 교황들을 조롱했다. 우르바누스 5세가 밀라노로 두 명의 사절을 보내, 그곳 전제 군주인 비스콘티에게 파문령을 내렸을 때(1362)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사절들에게 교황의 교서를 먹도록 강요했다. 양피지와 비단 끈, 그리고 납으로 된 봉인 등이었다. 시칠리아는 만종반란(1282) 이후로 교황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감을 보였다.

 

127 인노켄티우스는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교황령 국가들을 되찾을 수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일을 열렬한 신앙을 가진 스페인 사람에게 맡겼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열정과 카스티야 대공의 기사도를 지닌 남자였다. 길 알바레즈 카릴로 데 알보르노즈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 밑에서 군인 노릇을 했고, 톨레도의 대주교가 되고서도 군인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제 어지디오 알보르노즈 추기경이 된 이 사람은 여전히 탁월한 장군이었다. 그는 피렌쩨 공화국을 설득해서 자기에게 군대를 조직할 자금을 가불해 주도록 했다. (이 일은 피렌쩨 주변의 전제 군주들과 노상강도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 힘보다는 영리하고도 정직한 협상을 통하여 그는 교황령 국가들을 포위하고 있던 작은 전제 군주들을 한 사람씩 물러나게 했다저 유명한 영국의 모험가 존 호크우드를 지혜로 이겨 포로로 만들고 용병대장들에게 신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아니라도 교황 사절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어냈다.

 

127 우르바누스 5세는 인노켄티우스 6세의 긴축과 개혁을 이어받았다. 그는 성직자들과 교황청에 기율과 정직성을 복구시키려고 노력했다. 추기경들의 사치를 허용하지 않고 법률가들의 속임수와 강탈을 통제하고 성직매매에 대해 벌을 내리고 성품과 정신이 탁월한 사람들을 고용했다. 그는 자신이 비용을 대서 천 명의 학생을 대학에 보내고 몽펠리에에 새로운 대학을 세우고 학자들을 후원했다. 그리고 자기가 교황으로 있던 기간에 마침내 그는 로마로 교황청을 옮기기로 했다. 추기경들은 이런 전망을 보고 두려워했다.

 

128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는 그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노력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교황권 회복을 황제의 이름으로 승인하고 겸손하게 로마로 찾아와(1368) 교황의 말을 이끌고 천사성(산탈젤로)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가고, 미사에서 교황을 도왔다. 그리고 우르바누스 5세의 집전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이것은 황제와 교황 사이의 해묵은 갈들을 다행스럽게 치유하는 일로 보였다.

 

3.     그리스도교도의 생활 1300~1424

 

132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서로 대립적인 두 가지 그리스도교도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종교재판과 성인들의 모습 말이다. 공정하기 위해서는 당시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교도들이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교회의 기본 교리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범하든 간에) 교회를 뒤집어엎으려는 활동은 신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며, 동시에 교회가 도덕적 팔을 펼쳐 옹호하는 세속 국가에 대한 반역이었다. 이 생각을 마음에 담고 있어야만 우리는 교회와 속인들이 모두 힘을 합쳐 저 노바라의 돌치노와 그의 아름다운 자매 마르게리타가 설교하는 이단 신앙을 사납게 억압한 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감동적이라기 보담은 이해가 가는 구절이다. 나는 늘 궁금했었다. 어떻게 신의 왕국의 세우려고 했던 중세에 가장 가혹한 마녀사냥과 종교재판, 그리고 성전의 이름의 학살이 진행될 수 있었는지. 이 글에서 대답 하나를 듣는다. 교회를, 또는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활동, 뒤엎으려는 활동은 신에 대한 반항이고,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고 보았다니. 이런 전제에서라면 그런 잔인한 일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정말로 생각이 문제구나. 신의 이름으로 더 가혹하고 잔인할 수 있구나. 

 

133 지금 보나파키우스 8세와 클레멘스 5세 치하에서 교황청은 묵시록에 나오는 창녀가 되고 말았다. 돌치노는 이렇게 주장하면서 스스로 파르카의 사도 형제라는 종교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고 교황의 권위를 거부했다. 그러고는 파타리노파(11세기), 발드라(12세기), 프란체스코 신비파(13세기) 등의 이단 사상을 뒤죽박죽으로 물려받았다. 그들은 절대적 순결을 고백했으나 각기 자신의 자매라고 주장하는 여자와 함께 살았다.   

 

133 마르게리타가 화형대에 끌려나왔을 때 그녀는 야위었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워서 신분이 높은 남자들은 그녀에게 이단 신앙을 버리고 결혼하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그런 제안을 물리치고 서서히 불에 타 죽었다. 돌치노와 그의 조수인 롱기노는 특별 대우를 위해 남겨졌다. 그들은 수레에 태워져 베르첼리 시내로 끌려다녔다. 이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뜨거운 집게로 그들의 몸에서 살점을 조금씩 뜯어냈다. 사지와 생식기는 비틀어서 몸에서 떼어 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겨우 죽음을 허락받았다.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야만성에서 관심을 돌려, 거룩함의 경지에 이르도록 영감을 주는 남자와 여자들에게서 효능을 계속 발휘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134 이들 전도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가 아니라 지리학의 발전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

 

134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오늘날에도 방문객들이 찾아가 볼 수 있는 평범한 방에서 태어나 살고 죽었다. 지상의 하찮은 곳에서 그녀는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오는 일을 도왔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심을 되살리는 일을 도왔다. 그 신앙심은 르네상스와 뒷날 국가 통일 운동 이후까지도 살아남았다. 열다섯 살 나이에 그녀는 성 도미니크의 고행교단에 합류했다. 이것은 수도사나 수녀가 아닌 3의 집단이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그대로 세속의 생활을 하면서 가능한 한 종교의 순결의 사업에 자신을 바치는 생활이었다. 카타리나는 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방을 거의 은둔처로 만들고 기도와 신비적 명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교회에 갈 때를 제빼고는 거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부모는 딸이 이렇듯 종교에 깊이 몰두하는 것이 두렵고 또 그녀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극히 힘든 집안일을 맡겼으나 그녀는 전혀 불평하지 않고 그 일을 해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을 위한 작은 구석을 따로 떼어놓았다.” 라고 말하면서 어린이와 같은 명랑함을 유지했다. 다른 소녀들 같으면 세속적인 사랑에서 얻으려고 하는 온갖 기쁨, 의심, 황홀경 등을 카타리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에서 구하고 찾아냈다. 고독한 명상이 점차 집중도를 더해 가면서 그녀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애인으로 여기고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 그녀는 주님과 마음을 나누고 환상 속에서 주님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성 프란체스코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얻은 다섯 군데의 상처에 대해 하도 오래 명상한 나머지 자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서 그 상처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다. 모든 육체의 유혹이란, 악마가 자신의 커지는 사랑을 방해하려는 간계라 여겨 물리쳤다.

그노시스, 또는 소피아와 함께 했던 여자에 대해 베껴 적으며 참 즐겁구나. 나는 저 성녀에게서 일상 속에서 고요히 충만했던 걸, 일과 속의 깊은 명상에 대해 배운다. 세상으로 나가서 무얼 하기 전 저런 고요함, 기쁨, 충만, 풍부함을 가진 채 가만히 있는 상태가 아름답고 귀하다. 내가 추구할 삶의 목적, 사명이 아닐지. 나는 자꾸만 무언가 눈에 보이는 어떤 걸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스승님은 나에게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그냥 너를 꽃 피워 들고 가만히 웃어라, 그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하신다. 나의 부처를 잃어버리지 않고 바르게 사는 일 단 한 개만이 나의 할 일이다.    

 

135 혼자만의 신앙심으로 3년을 보낸 다음 그녀는 이제 도시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여성성을 그리스도에게 바쳤듯이 그녀는 모성의 부드러움을 시에나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바쳤다.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 곁에 마지막까지 머물고 사형을 당할 죄수들 곁에서 영적인 위안을 주며 처형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함께했다.

언제든 자신의 준비가 가장 중요한 듯

 

135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해악은 인간의 허약함의 결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인류의 모든 죄악은 하느님 사랑의 대양 속에 삼켜져 없어지고 만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환자들은 치유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몬테풀치아노 마을은 그녀에게 사람을 보내 그리로 와서 서로 반목하는 집안들을 화해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피사와 루카도 그녀의 충고를 구했다. 피렌쩨는 아비뇽에 보내는 사절단에 합류해 달라고 청했다. 그녀는 점차 세상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인간 허약함의 결과라면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겠구나.

 

136 그녀는 극도로 고행을 해서 전설에 따르면 교회에서 받는 성찬용 빵이 유일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버렸다. 교황의 분열은 그녀의 삶에의 의지를 꺾어 버렸다. 교황 분열이 나타난 지 2년 만에 그녀는 죽었다(1380) 서른셋의 나이였다. 오늘날까지 그녀는 그리스도와 교회 다음으로 그녀가 사랑했던 이탈리아를 수호하는 성스러운 힘이다. 

 

137 이렇게 해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아름다운 것과 끔찍한 것이 그리스도교도 생활의 흐름과 혼란 속에 섞여 들었다. 이탈리아의 단순한 민중이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중간 계층과 상류층은 고대의 문화라는 오래 묵은 포도주에 절반쯤 취해서 고귀한 열정으로 르네상스와 현대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피렌쩨의 르네상스 1378~1534

 

3장 메디치 가문의 떠오름 1378~1464

1.     무대장치

 

144 이탈리아는 부와 예술과 사유에서 나머지 유럽지역보다 1세기는 앞섰다. 르네상스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들고 나서야 비로소 프랑스, 도이치 지역,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페인 등지에서 꽃피어났다. 르네상스란 시간상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과 사유의 방식이다. 그것은 상업, 전쟁, 사상의 통로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145 코시모 데 메디치는 자신과 친척들의 재산 및 궁전을 제공해서 피렌쩨 공의회(1439)에 찾아온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동방 정교와 가톨릭 교회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공의회를 찾아온 그리스 고위 성직자와 학자들은 그리스 문학에 대해 그 어떤 피렌쩨 사람보다 훨씬 뒤어난 지식을 지녔다. 그들 중 일부는 피렌쩨에서 강연을 했고, 도시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강연을 들으러 몰려들었다.

 

2.     물질적 기반

 

147 그런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피렌쩨는 13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유럽의 금융수도였다. 유럽 통화들의 환율이 피렌쩨에서 결정되었다.

 

149 피렌쩨 법의 결함은 그것이 관청 용어의 간략함을 보인다는 점과 도 법 자체를 빈번히 바꾸었다는 점이다. 파당, 음모, 폭력, 혼란, 무능력 등이 그 결과였다. 그리고 피렌쩨는 베네찌아의 안정과 권력에 작용한,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갈등과 토론이라는 전기를 띤 분위기가 맥박을 빠르게 하고, 감각과 정신과 재치를 날카롭게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피렌쩨를 들어올려 한 세기 동안 세계의 문화적 지도자로 만들었다.

 

3.     조국의 아버지 코시모

 

150 조반니 디 비치는 1428에 죽으면서 아들 코시모에게 훌륭한 이름과 토스카나 지역 최대의 재산을 남겼다.

 

153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가 그에게 상당한 액수의 대부를 요청했을 때 코시모는 에드워드 3세가 돈을 갚지 않은 것을 개의치 않고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왕은 화폐와 정치적 후원으로 그의 너그러움에 보답했다. 볼로냐의 주교인 토마소 파렌투첼리가 자금이 달려서 도움을 요청했다. 코시모는 그를 후원했다. 파렌투첼리가 교황 니콜라스 5세가 되자 코시모는 교황청 재정을 맡게 되었다. 그의 활동의 여러 줄기들이 서로 뒤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는 일찍 일어나 거의 매일 사무실로 나갔다. 미국의 백만장자와 똑같다. 집에서는 나무의 가지를 치고 포도나무를 보살폈다.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 절도있게 먹고 마셨다. 그리고 (노예 소녀에게서 사생아 아들을 얻은 다음) 조용하고 규율이 있는 가정생활을 했다. 그의 집에 들어 갈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의 개인 식탁의 소박한 식사와 그가 예의와 평화를 위해 외국의 귀빈들에게 내놓는 화려한 연회 사이의 대조에 깜짝 놀랐다. 그는 보통 인도적이고 온건하고 잘 용서하고 과묵하고 그러면서도 간결한 재치로 유명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그러웠고 가난하게 된 친구들의 세금을 대신 지불해 주었으며 품위 있는 태도로 자신의 권력과 자선을 감추었다. 오늘날 보티첼리와 폰토르모와 벤노쪼 고쫄리가 그린 코시모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중간키에 올리브색 얼굴빛, 허옇게 되어 빠지고 있는 머리, 길고 날카로운 코, 근엄하고 친절한 표정 등은 영리한 지혜와 조용한 강인함을 보여준다.

이 그림 한 번 보고 싶다.

 

154 코시모가 부와 권력 못지않게 문학, 학문, 철학, 예술 등을 보살핀 일은 이탈리아와 인류에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교육을 받은 취향이 있는 남자였다. 라틴어를 잘 알았고, 그리스, 히브리, 아라비아어 등을 겉핥기로 알았다. 충분한 폭을 지난 사람이라 다양한 것들을 평가할 줄 알았다.

 

155 니콜로 데 니콜리가 고대 필사본들을 사들이다가 파산하자 코시모는 그에게 메디치 은행에서 무제한 신용 대부를 해주고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뒤를 돌봐 주었다. 또 열렬한 서적상인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의 지도 아래 45명의 필사가들을 고용해서 살 수 없는 사본들을 베기게 했다. 이 모든 소중하 작은 것들을 그른 성 마르코 수도원의 방들에, 아니면 피에솔로 수도원에, 아니면 자신의 도서관에 보관했다. 니콜리가 6000플로린(15만 달러)에 상당하는 800종의 필사본과 많은 빚을 남기고 죽으면서 (1437) 16명의 친구들에게 자기 책의 처분을 맡겼는데 코시모는 자기가 빚을 떠맡는 대신 이 책들의 보관을 맡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합의가 되었고 코시모는 이 소장본들을 성 마르코 도서관과 자신의 도서관에 나누어 보관했다. 이 모든 소장품들은 아무런 비용도 받지 않고 선생과 학생들에게 공개되었다. 피렌쩨 역사가 바르키는 애국적인 과장벽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 문서들이 인류의 커다란 손실이 되도록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라틴 문서들이 사람들에게 무한한 이익이 되도록 도로 살아나게 된 것 등 이 모든 일에 대해 이탈리아, 아니 전 세계는 오로지 저 메디치 집안의 높은 지혜와 친절함의 덕을 입고 있다.”

 

4.     인문주의자들

 

157 이런 문화적 모험가들이 발견물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면 그들은 마치 승리한 장군처럼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왕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전리품을 할당받기 위해 넉넉하게 돈을 지불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비잔틴 작가들이 자기들의 도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언급한 수많은 고전작품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수많은 책들이 구제되어 대부분이 이탈리아로 옮겨졌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훌륭한 그리스 고전 사본들은 이탈리아에 있다. 

 

158 뒤이어 편집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렇게 발굴된 텍스트들은 연구되고 비교되고 교정되고 설명되었다. 나폴리의 로렌쪼 발라에서 런던의 토마스 모어 경에 이르는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158 레오나르도 부르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가르침에 너무나도 빠져든 나머지 낮 동안 그에게서 배운 것들이 밤에 꿈에 나타나곤 했다그리스어 문법이 모험이며 로맨스가 된 적이 있다는 것을 오늘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160 이탈리아가 점점 더 자신의 고전 전통을 회복하면서 고대 로마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그리스에 대한 경탄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라틴어를 살아있는 문학의 매체로 살려내었다.

 

160 르네상스는 그리스에서 라틴으로, 아테네에서 로마로 옮겨 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168 소피스트들의 시대 이후로 학자들의 사회와 정치에서 그토록 높은 자리로 올라간 경우는 없었다. 인문주의자들은 시 정부, 시 의회, 공작, 교황의 서기와 고문이 되었고, 호의는 고전적 찬양으로 보답하고 독이 들어있는 경구로 질책을 표현했다. 그들은 신사의 이상을 박차를 철거덕거리며 무기를 준비한 남자의 모습에서 해방시켰다. 인간 종족의 문화유산을 받아들임으로써 가치를 얻고 지혜의 단계에 도달한 완전히 발전된 개인의 모습이 신사의 이상이 되었다.

 

168 프랑이스 도이칠란트, 스페인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정벌할 준비를 하던 바로 그 시기에 이탈리아 학문의 명성과 달변의 열광이 북유럽을 정복했다. 한나라씩 새로운 문화와 접촉하면서 중세의 생각에서 현대로 이행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세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 문학과 철학에서의 변화는 인간의 정신에 지구의 일주와 탐색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인간을 교리에서 해방시키고 또 죽음에 대해 명상하기 보다는 삶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유럽인의 정신을 해방시킨 것은 탐험가들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재발견이 신대륙 발견보다 더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거로구나. 인문학이 도대체 뭘 어쨎길래. 그리고 지금 내가 인문학 책을 읽는 건 나에게 어떻게 르네상스를 가지고 올 건가? 어떤 르네상스?

 

168 인문주의는 미술에 가장 영향을 적게 미쳤다. 그것은 감각보다는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의 주요 후원자는 여전히 교회였고, 미술의 주요 목표는 여전히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의 집을 꾸미기 위한 것이었다.

 

168 점차 인문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더욱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르쳤다. (남자나 여자나 특히 벌거벗은) 건강한 인간 육체에 대한 경탄이 교육받은 계층에 널리 퍼졌다.

 

5.     건축 : 블넬레스코의 시대

 

171 블루넬레스코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실패한 다음, 속을 비운 달걀의 끝을 무디게 만들어서 테이블에 세웠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방식이라면 자기들도 할 수 있다고 항의하자 그는 자기가 성당의 지붕을 만들고 나면 그들은 비슷한 항의를 할거라고 대꾸했다.

 

171 피렌쩨 성당의 당당한 둥근 지붕은 지금도 사방에 연합군을 거느린 것처럼 붉은 지붕 피렌쩨의 파노라마를 지배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토스카나 지방의 언덕들이 줄을 이은 한 가운데에 장미꽃밭처럼 자리 잡고 있다.

 

6. 조각

 

1 기베르티

 

176 남쪽 문을 자세히 본 사람만이 그것이 도안과 주조에 25년이나 걸린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마치 모두가 이것이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섬세한 청동 돋을 새김이 되어야한다고 결정한 것 같았다.

 

176 그의 작업장은 천재들을 키운 미술학교가 되었다.

 

2 도나텔로

 

177 그는 기베르티의 작업장에서 일부만 배웠다. 머지않아 그는 손수 자기 길을 개척했고, 기베르티 돋을새김의 여성적인 우아함을 벗어나 힘에 넘치는 조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고대의 방식과 의도를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충성으로, 또 독창적인 개성과 양식의 무뚝뚝함으로 조각에 혁명을 만들어 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다윗>만큼이니 질리고 또 성 조지 만큼이나 대담한 독립적인 정신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기베르티의 그것처럼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욱 큰 범위와 높이에 도달했다. 그의 천재성이 성숙하자 그것은 무모한 생산력으로 걸작들을 만들어 냈다. 

 

179 이 작품에서 그는 전혀 아첨이 없이 그냥 한 사람을 표현하는 사실주의를 즐겁게 보여주고 있다. 도나텔로는 미술이란 언제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오랜 진실을 스스로 발견했지만 이 진실을 위해 의미심장한 형식을 선택하고 드러내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많은 명사들이 그의 끌에 자신을 맡겼다가 때론 실망하곤 했다. 제노바의 상인 한 사람은 도나텔로가 묘사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는 값을 깎았다….상인은 미술가가 이 작업을 위해 겨우 한 달간 일을 했으므로 그가 요구한 보수는 일당 반 플로린(12.5달러)인 셈이고 그것은 단순한 예술가로서는 너무 많은 요구라고 생각했다. 도나텔로는 이 사람은 콩이나 거래할 지성의 소유자라고 말하면서 흉상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흉상을 만들거나 사진을 찍거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이쁜 모습만을 보아주길 기대한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그의 내면을 보이는 대로 정직하게 그리고, 찍고 만들어 내면 돈을 내는 사람들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닐테다.

 

181 후원자와 조각가는 함께 늙어갔다. 코시모는 조각가를 잘 보살펴 주어 도나텔로는 돈 걱정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작업장 천장에서 아래로 내려뜨린 바구니에 돈을 넣어 두고 조수들과 친구들에게 자기하고 상의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 돈을 가져가라고 말했다. 코시모는 죽으면서 (1464) 아들에게 도나텔로를 보살펴 주라고 부탁했다. 피에로는 늙은 미술가에게 시골에 있는 저택을 주었지만 도나텔로는 곧바로 피렌쩨로 돌아왔다. 그는 시골의 햇빛과 곤충보다도 도시의 친숙한 작업장을 더 좋아했다. 그는 여든 살이 될 때까지 단순하고 만족스럽게 살았다. 피렌쩨의 모든 미술가들과 거의 모든 주민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마지막 길을 따라갔다. 그는 자신이 원한 대로 산 로렌쪼 성당의 지하실에 코시모의 무덤 곁에 묻혔다. (1466)

도대체 얼마나 존경하고 좋아하면 가족이 아니라 자기 후원자의 무덤 곁에 묻히고 싶을까?

 

181 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가 아름다움이 아니라 삶을, 단순히 힘차고 건강한 육체가 아니라 복잡한 성격이나 정신적 상태를 표현하려 한 것이 바로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3 루카 델라 로비아

 

184 여기까지는 전통적인 조각가의 기술을 따랐다. 그러나 그는 점토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루기 쉬운 이 재료를 가지고 대리석만큼이나 결이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점토로 형태를 만들고 표면에 여러 가지 화학 약품을 바르고, 특별하게 만들어진 가마에 넣고 구웠다.

이렇게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구나.

 

7      회화

 

1 마사초

 

184 1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회화가 조각을 지배했다. 15세기에는 조각이 회화를 지배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다시 주도권을 차지한다. 아마도 죠토의 천재성이 14세기에 도나텔로의 천재성이 15세기에,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와 티찌아노의 천재성이 16세기에 나타난 것이 이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천재는 시대 정신의 원 인상의 기능을 가진다.

 

186 교회는 회화가 저 차가운 대리석이나 침침한 청동 조각보다 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의 심장을 더욱 친근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르네상스가 발전하면서 미술이 그 범위와 목적을 확대하게 되었을 때 조각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회화가 앞으로 나섰다. 조각이 그리스 시대 최고의 표현방식이었듯이 이제는 영역을 넓히고 형태를 다양하게 하고, 또 기술을 발전시킨 회화가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그리고 특징적인 미술 영역이 되었다. 바로 르네상스의 얼굴이며 영혼이 된 것이다. 처음 시대에 이것은 더듬어 찾아야 하는 것이었고, 아직 미숙한 상태였다.

 

189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마사쵸는 탁월한 주인인 자연에게서 말고 다른 안내를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소용없는 헛고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완벽한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2 프라 안젤리코

 

190 프라 안젤리코와 더불어 회화는 미적인 표현이자 즐거움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수행이 되었다. 그는 많은 그림에서 기도 그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먼저 기도를 올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없었다. 사나운 삶에서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그는 모든 것을 보상과 사랑의 찬가라고 여겼다. 그의 주제들은 성모와 그리스도의 생애, 하늘에서의 축복, 자기 교단에 속하는 성인들과 총장들의 생애 등 변함없이 종교적인 것들이다. 그의 목표는 아름다뭉르 창조하는 동시에 신앙심을 불러넣는 것이다.

 

192 엘 그레코를 제외하고 어떤 화가도 프라 안젤리코처럼 그렇게 독특한 자기만의 양식을 만들어 낸 사람은 없다. 풋내기라도 그의 손길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3 프라 필리포 리피

 

193 두 살에 고아가 된 그는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주머니의 손에 양육되었다. 그가 여덟 살이 되어 카르멜 수도회로 들어가자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주어진 책을 읽지는 않고 대신 책의 여백에 만화를 그렸다. 수도원장은 그런 그림들이 탁월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마사쵸가 카르멜 교회에 그려놓은 벽화를 베끼게 했다.

 

194 그의 행실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가 여러 수녀원에서 그림을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프라토에 있는 마르게리타 수녀원에서 (바사리가 잘못 안게 아니라면) 스는 수녀이거나 아니면 수녀들을 감독하는 루크레찌아 부티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수녀원장을 설득하여 루크레짜아가 자기를 위해 성모의 모델리 되도록 했다. 그들은 곧 함께 도망쳤다. 그녀의 아버지가 야단을 치고 호소도 했지만 그녀는 예술가의 정부 겸 모델이 되어 여러 해 동안 성모 노릇을 하고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195 성적인 문란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어쩌면 바로 여자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 대문인지 필리포의 가장 섬세한 그림들은 성모 그림이다. 이들은 안젤리코가 그린 성모들의 영성을 지니지는 못하지만 부드러운 육체의 아름다움과 무한한 온화함을 표현한다.

이 사람도 뭔가 끌리는 데가 있다. 어릴 적에 엄마를 여의고 모성을 한없이 그리워했던 사람이다. 이런 배경을 지닌 사람에 대해 끌리는 나의 배경은 뭘까?

 

8. 그외의 예술

 

197 코시모 시대 피렌쩨 예술의 생동하는 생명력을 느끼기 위해서 앞에서 서둘려 살펴본 주요한 천재들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또한 예술의 옆 골목이나 뒷골목으로도 들어가 수많은 가게들을 방문하고 도공들이 점토를 주무르고 거기 그림을 그리는 작업장에도 가 보고, 유리 만드는 사람들이 유리를 불거나 잘라서 깨지기 쉬운 사랑스러움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도 보고, 금세공사들이 값비싼 금속이나 돌아 가지고 보석과 메달, 도장, 주화들 또는 의복이나 사람, 집이나 교회의 수많은 장식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도 보아야 한다. 일에 열중한 기능공들이 쇠나 구리, 청동을 두들기가건 돋을새김을 해서 무기나 꽃병, 그릇과 도구들을 만드는 소리도 들어 보아야 한다. 또 장롱 만드는 사람들이 디자인하고 목재를 다듬고 상감하고 표면을 만드는 것도 보아야 한다. 다른 노동자들은 굴뚝을 다듬어 만들거나 가죽을 연마하고 상아를 깎고, 조각품의 피부를 유혹적으로 만들거나 집을 장식하기 위해 섬세한 결을 만들어 낸다. 또 수도원으로 가서 수녀들이 이야기가 있는 벽걸이에 수를 놓는 모습도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하고 그런 일에 명예와 실체를 제공할만큼 지혜롭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자극해주는 주민들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아야 한다.

맞다. 이 말이 참으로 맞다. 이렇게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아름답다.

 

198 마지막으로 분류를 시도했고, 또 자기 시대를 종합한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살펴보기로 하자. 레온 바티스타 알레브티는 정치만 빼고 자기 시대의 모든 양상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199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요 예술가 치고 몇 가지 예술 분야에서 탁월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199 그는 그림을 그린 다음 아이들을 불러서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답을 잘 못하면 그림이 실패한 것이라고 여겼다.

 

200 대화편 <테오게니오>에서 주인공테오게니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명한 죽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이곳에서 내가 한가히 즐길 수 있는 일이지요. 성인이나 정치가가 위대한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서가로 가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제는 수많은 손님과 아첨꾼이 법석대는 당신의 궁전이 제공할 수 있는 그 어떤 교제보다도 좋습니다.

 

201 코시모가 죽고 1년이 지나 시간이 그의 영광을 무디게 하고 그의 잘못을 자꾸 들추어내려고 할 때 피렌체 시 의회는 그의 무덤에 가장 명예로운 비명을 세워주기로 결의했다. “파테르 파트리아이조국의 아버지라는 비명이었다. 그것은 합당한 말이었다. 그와 더불어 르네상스는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의 손자가 다스릴 때 르네상스는 가장 순수한 탁월함에 도달했다. 증손자 세대에 르네상스는 로마를 점령했다. 이런 왕조가 저지른 일부 죄악은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4장 황금시대 1464~1492

 

1.     통풍 환자 피에로

 

203 코시모의 아들 피에르는 쉰 살에 아버지에게서 부와 권위와 통풍을 함께 물려받았다. 이미 소년 시절부터 이 부자 병이 피에로를 괴롭혔다.

 

2.     로렌쪼의 발전 과정

 

204 피에로의 건강이 악화된 것을 알아챈 코시모는 순자 로렌쪼가 권력의 임무를 준비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소년은 요하네스 아르기로풀로스에게서 그리스어를 피치노에게서 철학을 배웠고 정치가, 시인, 예술가, 인문주의자들의 대화를 듣고 자라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육을 받았다. 그는 또한 전쟁 기술도 습득했다. 열아홉 살에 리펜쩨의 지도적 가문의 아들들이 출전한 창 시합 경기에서 그가 1등상을 받았다. “뒤를 봐주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용기로이룩한 일이었다. 이 시합에 나갔을 때 그의 갑옷에는 프랑스의 모토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르네상스의 테마라 할 만한 말로서 황금시대는 온다는 글귀였다.

 

204 피에로는 결혼이야 말로 연애 사건에 대한 확실한 치유책이라 생각하고 절ㄻ은이를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결혼시켰다.(1469) 이렇게 해서 메디치 집안은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두 가문 중 하나와 혼인으로 결합되었다. 이 기회에 피렌체 도시 전체가 사흘동안 계속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사탕 과자 5000파운드가 이 잔치에 소모되었다.

205 메디치회사의 재정이 국가의 재정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는 집안의 적이나 경쟁자가 권력을 잡을 경우 파멸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너무 젊다는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경험 많은 시민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가 주요한 모든 일에 대해서 그에게 자문을 해 주기로 했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이 위원회와 상의했지만 그러나 머지않아 그가 아주 훌륭한 판단력을 보였기에 그 누구도 더 이상 그의 지도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도 참 좋구나.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이런 자문기구를 두는데 실제로 자문은 않고 자문기구를 두었고, 자문위원을 선임해두었다는 것만으로, 그러니까 서류상으로만 확보하는 경우도 많은 듯 한다.

 

206 코시모, 피에로, 로렌쪼가 메디치 궁전과 정원에 수집해 놓은 미술품을 보고 더욱 놀랐다. 이곳은 이미 조각, 꽃병, 보석, 회화, 장식 무늬를 그려넣은 사본, 건축 유적 등을 위한 박물관이었다. 갈레아쪼는 이 한곳에서 나머지 이탈리아 전체에서보다 더 많은 수의 회화 작품을 보았노라고 단언했다.

 

3.     빛나는 사람 로렌쪼 일 마니피코

 

211 그의 품행은 그의 정신처럼 모범적이지는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의 종교적 믿음이 삶의 즐거움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히 성실한 마음으로 신앙 깊은 찬가들을 썼지만 전혀 양심의 가책없이 방종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들도 썼다. 이루지 못한 쾌락에 대한 것을 빼고는 후회를 몰랐다. 정치적 이유에서 못마땅해 하면서 맞이한 아내를 사랑한다기 보다는 존경했다. 그는 시대의 유행을 좆아 간통을 즐겼다. 그러나 그가 사생아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특징 중 하나이다.

 

212 파찌 음모 사건 이후로 그의 공적인 지출과 사적인 지출이 그의 회사로서는 지불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너그러운 위원회는 국가 재정에서 그의 빚을 지불해 주기로 결정했다. (1480) 이것이 그의 봉사에 대해, 또 공적 목적을 위해 사적 재정을 사용한 것에 대해 공정한 보상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횡령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13 질서가 번영을 누리는 동안 자유는 시들어 갔다. 당시 사람 하나는 이렇게 썼다. “이곳에는 강도도 밤의 소요도 암살도 없다. 밤이나 낮이나 모든 사람은 완전히 안전한 가운데 업무를 볼 수가 있다.” 구치아르디는 이렇게 말했다. “피렌쩨가 폭군을 가져야 한다면 이보다 더 낫거나 더 즐거운 폭군은 있을 수가 없다.” 상인들은 정치적 자유보다 경제적 번영을 더 좋아했다. 재산이 없는 계층은 공공사업이 늘어난 덕분에 계속 바빴고, 로렌쪼가 빵과 놀이를 공급해주는 한 독재정치를 용서했다. 마상 창 시합은 부자들을 유혹했고, 경마는 중산층에게 짜릿한 기쁨을 주었으며 축제의 행렬은 주민 전체를 즐겁게 했다.   

피렌쩨 도시국가에서 메디치 가문이 몇 대째 정치를 하는데 독재를 하는구나. 그 가문의 비호와 투자 아래 르네상스가 시작된 거고, 피렌쩨에서 시작된 것이 전체 이탈리아로, 또 이탈리아 것이 인근 유럽으로 흘러간거로구나. 경제적 번영과 독재 사이의 논란은 우리 나라에도 익숙하다. 그런데 메디치가문의 코시모에게는 조국의 아버지란 비명을 주었다. 그럼? 이 둘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은?

 

215 아마도 그들은 그가 없었어도 망가졌을 것이다. 베네찌아, 페라라, 밀라노의 품행이 피렌쩨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메디치 은행가들이 통치하던 피렌쩨의 도덕이 그래도 메디치 교황들이 통치하던 로마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교황이 다스리던 때보다 은행가들이 다스리던 때가 도덕성이 낫다니

 

216 한 나라를 다스리고, 재산을 관리하고, 마상 창시합에 나가고, 뛰어난 시들을 쓰고 예리한 감각으로 예술가들과 작가들을 후원하고, 학자 및 철학자들과 쉽게 섞이고, 농부와 어릿광대들과도 잘 어울리고, 출제 행렬에서 함께 행진하고 외설적인 노래들을 부르고, 부드러운 찬가들을 쓰고, 애인들과 놀아나고, 교황을 낳고, 유럽 전역을 통해 자기 시대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사람이라고 찬양받던 이 사람의 모습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덕성과 매너, 복합성과 다양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

 

4.     문학 : 폴리찌아노의 시대

 

219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글과 심각한 병에서 회복된 게 대한 감사의 심정에서 마르실리오는 다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왔다.

 

219 그의 안내를 받아 로렌조와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신앙으로 대체하지 않고 철학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들을 이용해서 그리스도교를 새로이 해석했다. 한두 세대 동안(1447~134) 교회는 너그러운 미소로 이러한 시도를 지켜보았다.

 

225 폴리찌아노는 정열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삶이나 사랑의 깊이을 맛보지 못했기에 시인으로서의 위대성이 부족하다. 그는 언제나 매력적이었지만 깊이가 부족하다. 로렌조를 향한 그의 사랑이 그가 아는 가장 강한 감정이었다.

이 말이 무찔러 들어온다. 후원자에 대한 사랑이 가장 강한 감정이라니 안타깝다. 왠지 그러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맛보는게 낫지 않을까?

 

 225 로렌조가 자신의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유머를 즐기지 못하고, 또 신앙심에 대해 어느 정도의 회의를 지니지 못하고 사랑에 대해 어느 정도의 특권을 갖지 않았다면 지금 알려진 그대로의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저건 다 나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깊이를 위해 저런 걸 가져야 하는 건가

 

229 풀치는 로렌쪼를 둘러싼 한 사람으로서 이탈리아인의 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는 교회에 대해 겉으로는 충실한 태도를 취했다. 성직자들은 그의 공손한 절에 속지는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교회 무덤에 매장하는 것이 거절되었다.

 

로렌쪼의 패거리가 한 세대 만에 그토록 다양한 문학을 생산할 수 있었다면 다른 도시들, 그러니까 밀라노, 페라라, 나폴리, 로마 등지에서도 비슷한 깨어남을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5.     건축과 조각 ; 베로키오의 시대

 

232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조각가이기도 했다. 조각은 건축 장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234 이 모든 것은 미노가 데시데리오에게서 배운 여성적인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눈을 즐겁게는 하지만 마음을 사로잡거나 심오한 것들은 아니다….미노는 스승 데시데리오를 너무 사랑해서 스승이 보여 준 예에 등을 돌리고 자연의 잔혹한 중립성 안에서 삶의 현실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36 마지막 순간 거친 십자가상이 그이 눈앞에 보였다. 그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그것을 치우고 도나텔로의 십자가상을 가져다 놓으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살았을 때도 그렇듯이 아름다운 물건들이 있는 곳에서 죽었다.

 

6.     회화

 

1 그를란다요

 

237 천재라는 낭만적인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르네상스 피렌쩨였다. 곧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정신에 이끌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38 그들의 기술과 용기가 늘어나고 또 세속의 후원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오래된 종교적 주제들과 더불어 고대 신화 이야기와 이교적인 육체의 풍성함을 주제로 선택했다. 그들은 자연을 작업장으로 끌어들이거나 그들 스스로 자연으로 나아갔다.

 

240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는 고대 도시의 아치, 목욕탕, 기둥, 도관 ,원형 극장 등을 탐구했다. 잘 훈련된 눈길을 지녔던 거는 자나 컴퍼스의 도움이 없이도 각 부분의 정확한 비율을 단번에 알아낼 수 있었다.

 

241 1490년에 예배당이 일반에 공개되었을 때 피렌쩨의 고위 인사들과 학자들이 이 그림들을 보러 몰려들었다. 사실적인 초상화들이 도시의 화제가 되었다. 토르나부오니는 완전히 만족감을 표현했다 당시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던 그는 화가에게 추가로 지불하기로 했던던 200두카트를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화가는 후원자의 만족이 돈보다 더 소중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형제들의 존경을 받았기에 동생인 다비드는 수도원장이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그 제자들을 위해 형의 천재성에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빵 덩이를 가져오자 빵으로 수도원장을 때려서 하마터면 그를 죽일뻔했다. 기를란다요는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업장을 개방해서 실질적인 미술 학교로 만들었다.

 

2 보티첼리

 

243 보통은 고전 신화의 장면을나체로 그리기를 좋아했다. 바사리는 이렇게 보고한다. “보티첼리는 많은 집에..많은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렸다.” 그리고 그가 삶에서 심각한 무질서를 보였다고 비난한다. 인문주의자들과 동물적인 정신들이 그를 한동안 에피쿠로스 철학으로 데려갔다.

 

 248 그는 마흔 살에 결혼하고 몇 년 동안 부모 노릇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맛보았다. 그러다가 마흔일곱 살에 간단한 편도선염을 앓다가 죽었다. (1505)

 

7.     로렌쪼의 시대가 저물다.

 

248 그의 아내는 1488년에 죽었다. 그는 그녀에게 정절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잃은 것은 지심으로 애도하고 그녀의 도움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부지런히 아이들의 교육을 감독하고 말년에는 피렌쩨와 자기 집안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을 결혼시키려고 애썼다.

 

249 나는 언제나 할아버지 코시모의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분은 공적인 일과 집안일을 똑같은 조심성으로 보살피셨다.

 

251 모든 폭군 중에서 그는 가장 신사적이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가 죽은 이후로 피렌쩨는 차츰 쇠퇴했고, 이탈리아에는 평화가 사라졌다. 

 

5장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 1492~1534

 

1.     예언자

 

261 주민들은 메디치궁전과 정원 그리고 피에로의 재정 대리인들의 집을약탈했다. 메디치 가문 4세대에 걸쳐서 수집한 예술품들은 약탕당하여 이리저리 흩어졌고, 남은 것은 정부가 주도하 경매에서 팔렸다.

 

2.     정치가

262 아직도 문맹이 더 많고 감정에 휩쓸리는 이런 사회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는 실용적인 것이 못된다 해서 연기되었ㄷ.

 

263 위반자들은 고문의 형벌을 받았다. 신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혀에 구멍을 뜷었다. 공성애자들은 잔혹한 형벌을 통해 신분을 추락하게 했다. 이러한 개혁을 실행을 돕기 위해 사보나롤라는 교구의 소년들로 도덕 경찰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경마와 행렬과 체조놀이와 품행 나쁜 친구와 음란한 문학과 춤과 음악학교를 피하기로 맹세하고 또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들 희망소년단은 교회를 위해 헌금을 걷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노름하려고 모인 사람들을 쫒아내고,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이라고 판정되면 여자들이 몸에 걸친 옷을 찢어 버렸다.

희망소년단이라니 무섭기만 하다.

 

3.     순교자

 

275 1498 3 25일에 프란체스코 수도사 한 사람이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설교를 하는 도중에 자신이 이 일을 떠맡았다. 그는 불의 시련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자고 사보나롤라에게 도전장을 내놓았다. 그는 도미니크 수도사(사보나롤라)를 이단이며 거짓 예언자라고 비난하고, 이어서 사보나롤라도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자기는 불 사이로 걸어가겠노라 제안했단 그는 자기들 두 사람이 모두 불에 데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희생을 통해 저 거만한 도미니크 수도사가 교황에서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이 도시에 불러들인 무질서에서 피렌쩨 시를 구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275 약속된 날짜가 되자 거대한 광장에는 기적 아니면 인간의 고통을 구경하면 즐기려는 인파로 넘쳐 났다. 이 장소가 내려다보이는 모든 창과 지붕은 구경꾼으로 가득 찼다. 광장 한복판에 0.6미터 넓이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장작더미가 만들어졌다. 목재와 수지와 기름, 화약 등을 섞어서 불에 타기 쉽도록 만든 더미였다.

 

277 피렌쩨 정부는 사보나롤라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의 당파도 살아남는다. 오직 그가 죽어야만 도시와 정부를 이렇게 심하게 나누어 놓은 당파들 간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렌쩨는 하도 분열이 심해서 외국 세력에는 피렌쩨와 동맹을 맺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고, 그 결과 내부의 음모와 외부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278 사보나롤라는 너무 긴장하고 지쳐서 고문을 받으면 금세 무너졌다. 그리고 자기에게 제시되는 답변을 무엇이든 인정했다. 그러나 회복되면 그 고백을 철회했다. 다시 고문을 하면 똑 굴복했다. 세 번의 시련을 겪고 나자 그의 정신은 붕괴되었다.

 

278 한 사제가 사보나롤라에게 너는 어떤 정신으로 이 순교를 당하느냐?” 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많은 고통을 받으셨다.”그리고 자기가 걸고 있던 십자가상에 키스를 하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당당하게 종말을 향해 걸어갔다. 도메니코는 순교자의 죽음을 죽게 된 것에 감사하여 찬미가인 테데움을 노래하면서 거의 즐거워했다. 세 사람은 교수대에 매달렸다. 소년들은 그들이 질식해 죽어갈 때에 돌을 던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그들 아래쪽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아올라 그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이 재는 성인의 유물로 여겨져 숭배되지 못하도록 아르노 강에 뿌려졌다. 일부 울보들은 죄를 덮어쓸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에 무릎을 꿇고서 울며 기도했다.

근데 사보나롤라는 왜 처형된거야?

 

279 사보나롤라는 중세가 살아남아 르네상스에 출현한 경우였다. 르네상스는 그를 파괴했다.

 

279 그는 용감하고 광신적으로 시대의 감각적이고 회의적인 정신에 맞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중세 성인들의 도덕적 열의와 정신적 단순성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다시 발견한 이교도 그리스의 찬양 노래를 부르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인 한계를 통해 또 용서할 수 있지만 그래도 짜증나는 이기주의를 통해 실패했다.

시대의 흐름을 그는 읽지 못했다. 맹목적 신념의 예. 나도 이런 면을 조심해야한다. 지혜로운 걸 많이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일용할 양식으로. 근데 일주일에 35시간씩 읽어야 할까? 하루에 두 시간씩만 읽고 싶구나. 힘들구나.

 

279 그러나 그의 기억은 개신교의 정신에 힘이 되었다. 루터는 그를 성인이라 불렀다.  

 

280 사보나롤라의 위대함은 도덕 혁명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에 들어 있다. 그는 인간을 정직하고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며 도 그리스도가 소수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성공한 일에서 사보나롤라가 실패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역명만이 인간의 일에서 진정한 진보를 표시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런 노력이 없이 인간 이외의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일, 역사상 있었던 유혈의 전복들은 일시적이고 소용도 없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4.     공화국과 메디치 가문 : 1498~ 1534

 

281 줄리아노와 죠반니는 온건하게 행동했고, 흥분에 물려 버린 대중은 이런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죠반니가 레오 10세가 되었을 때 지나치게 온건해서 성공적인 통치자가 되기 힘들었는 줄리아노는 피렌쩨 통치를 조카 로렌쪼에게 물려주었다. 이 야심에 찬 젊은이는 6년간 무모한 통치를 한 다음 죽었다. 파찌 모반에서 살해당한 쥴리아노의 아들 쥴리오 데 미디치 추기경이 피렌쩨에 탁월한 행정을 베풀었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고(1521) 난 다음에도 로마에서 계속 피렌쩨를 통치했다.

 

281 알레산드로 데 미디치가 이 가문의 연대기에 전례없는 억압과 잔인성과 음란함의 통치를 시작했다. (1531) 피렌쩨가 다시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3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5.     혁명 시대의 미술

 

282 파산의 위기에 몰려 있고 늘 지속되는 혁명에 말려든 국가는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건축은 더 심했다. 이런 난리 속에서도 살아남은 부자 몇 사람이 궁전을 짓는 덧없는 짓을 하기는 했다.

 

282 공작은 그에게 너무 박한 보수를 주었다. 조각가는 조각품을 때려 부수었다. 화가 난 귀족은 그가 이단이라며 종교재판에 고발했다. 토리지아노는 심한 벌을 받았지만 굶어죽음으로써 적들의 손길을 벗어났다.

굶어 죽음으로써이른 부분이 이 책의 냉소적인 유머다.

 

282 피렌쩨는 1492년처럼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위대한 예술가를 가졌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피렌쩨의 혼란을 피해 도망쳐 다른 곳에 명성을 남겼다.

 

284 피에로 디 코시모는 이 성을 스승인 코시모 로셀리에게서 얻었다. “능력을 가르쳐주고 또 행복을 늘려 준 사람이 자기를 낳아 준 진정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스승에게서 성을 얻는 정도로 고마와하는가?

 

284 피에로는 모임이나 우정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예술가로만 지냈다. 자연과 고독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과 풍경에 받아들였다. 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술을 두 명의 제자에게 남겼는데, 그들은 그의 예를 따라 스승을 능가하는 사람이었다. 곧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이다.

잘 못 어울리기 때문에, 사회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건 아닐까? 나는 자꾸 헤파이스투스가 생각나는군. 예술가가 되었다면 그는 이미 자기가 손으로 하는 일을 통해 구원받는 헤파이스투겠지. 그리고 자신을 알아봐주고 예술가로 살아가도록 훈련해준 스승(양부모) 또한 얻었으니 성공한 헤파이스투스다.

 

286 대부분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그도 일곱 살에 견습공 노릇을 시작하여 아주 빠르게 발전했다. 스승인 피에로는 젊은이의 도안 솜씨에 경탄했다. 그리고 휴일에 작업장 문을 닫으면 사르토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베키오 궁전의 500인실을 위해서 그린 유명한 밑그림의 모습들을 스케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피에로가 나이가 들어 아주 기벽스러운 사람이 되었을 때 사르토와 동료인 프란치아비죠는 자기들의 작업장을 차리고 한동안 함께 작업했다. 사르토는 아눈찌아타 성당 안뜰에 그림을 그리면서(1509) 독립된 경력을 시작했다.

기벽스럽다 :

·         기벽1 奇癖) [기벽] [명사] 남달리 기이한 버릇.

·         기벽2 (氣癖) [명사] 자부심이 많아서 남에게 지거나 굽히지 않으려는 성질.

·         기벽3 (嗜癖) [명사] 한쪽에 치우쳐서 즐기는 버릇.

 

286 사르토가 모델로 이용한 여성들 중 한 명으로 이 그림에도 등장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었다. 루크레찌아델 페데라는 여자였는데 가무잡잡한 얼굴,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죽어가던 며칠만 빼고 언제까지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잔소리꾼이었다.

 

288 사르토는 완전한 성숙에 이를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다. 1530년에 피렌쩨를 정복하면서 승리한 도이치 군이 도시에 질병을 가져왔고 사르토는 그 병에 희생된 사람의 하나였다. 아름다운 여자가 결혼할 때 가져오는 온갖 질투심을 그의 내면에 일깨웠던 그의 아내는 그가 열병에 시달리던 마지막 며칠 동안 그의 방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거의 불사의 삶을 선물했던 화가는 거의 아무도 없는 가운데 홀로 죽었다. 마흔넷의 나이였다. 1570년쯤 야코포 다 엠로리가 아눈찌아타 성당의 안뜰에서 사르토의 <그리스도의 탄생>을 베끼고 있을 때였다. 미사에 갔다가 나오던 노파 하나가 그의 옆에 멈추어 서더니 그림 앞쪽에 있는 모습을 가리켰다. “이게 나예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루크레찌아는 그보다 40년이나 더 오래 살았던 것이다.

 

290 시민들의 갈등, 사보나롤라의 청교도적 통치, 포위와 패배와 흑사병 등은 로렌쪼 시대의 즐거운 정신을 파괴하고 부서지기 쉬운 예술이라는 리라를 깨뜨려 버렸다. 그러나 위대한 현은 건드려졌고 그 음악이 바도 전체를 꿰뚫고 메아리쳤다.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6장 밀라노

 

1.     배경

 

293 피렌쩨, 베네찌아, 로마에만 탐구를 집중시킨다면 르네상스를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없다. 로도비코와 레오나르도가 함께 있던 밀라노의 10년은 피렌쩨보다 더욱 빛나는 곳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자유와 높은 지위는 만토바의 이사벨라 데스케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페라라의 아리오스토와 더불어 르네상스 문학은 정상에 도달하고, 매너의 세련됨은 카스틸리오네 시절 우르비노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294 나폴리는 기후로는 낙원이었다. 어느 곳이든 때에 따라서 도시들과 그 주변 지역은 맬서스의 자연이 인류의 번식을 조절하기 위해 열심히 공급하는 지진, 홍수, 가뭄, 회오리바람, 기근, 흑사병, 전쟁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도시에서는 오래된 수공업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생업을, 부자들에게는 사치품을 마련해주었다.

유식한 농담

 

294 노예도 소규모로 존재했다. 주로 부자들 사이에서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따금, 특히 시칠리아의 대규모 영지에서 자유노동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부 이탈리아에도 간혹 노예들이 있었다.

 

295 이것은 르네상스의 경제보다 오히려 그 도덕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상품의 생산이나 운송에서 노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295 좋은 물은 산에서 끌어들였다. 개인 집으로 직접 연결되는 일은 드물고 보통 예술 작품으로 고안된 공동의 샘에 연결되었다. 이 샘에서 물을 길어오면서 단순한 여자들과 게으른 남자들이 그날의 새로운 소식을 모아서 퍼뜨리곤 하였다.

이런 공동샘 한 번 보고 싶다.

 

296 전제군주들은 불안정했기 때문에 잔인했다. 자기들을 받쳐 줄 합법성의 전통이 없이 아무 때라도 암살이나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신변을 경호병으로 둘러싸고 언제나 독약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먹고 마시면서 자연에 따른 죽음을 맞기를 희망했다. 초기 몇 십 년 동안 그들은 술책과 매수와 조용한 암살을 동원하여 통치했고 마키아벨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가 주장하는 모든 기술을 다 실천에 옮겼다. 1450년 이후로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난 승인을 통해 약간 안전해졌다고 느꼈다. 그러자 국내 통치에서 평화적인 수단들을 취했다. 

이 문장이 나는 퍽 흥미롭다.

 

2. 피에몬테와 리구리아

 

298 사부아와 피에몬테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싸움터가 되었다. 아폴론(예술)은 이 두 지역을 마르스(전쟁)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급류에 역류하면서 르네상스의 완전한 흐름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3      파비아

 

302 통합과 조화의 감각이 없다. 전체에 대한 배려가 없이 모든 부분이 각기 주목받으려 한다. 그러나 각 부분은 사랑과 기술로 만들어진 작업이다.

 

4.     비스콘티 가문 1378~1447

5.     스포르짜 가마누 1450~1500

 

307 병사들과 함께 고난과 식량을 나누었기에 그들의 헌신을 얻었고 또 사람 숫자보다는 전략의 우세함을 통해 그들을 화려한 승리로 이끌었다.

 

308 새로운 밀라노 정부와 자기와 상의 한마디 없이 베네찌아와 평화를 맺자 그는 군대를 돌려 밀라노 공화국에 맞섰다. 그리고 도시를 포위해서 거의 굶어 죽게 만들었다. 도시는 항복했고, 그는 굶주린 주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도시로 들어갔다. 그리고 빵을 분배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열망을 잠재웠다.

 

310 로도비코는 육체적으로는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비스콘티 집안의 지성이 그 잔인성을 떼어버린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그의 온갖 잘못과 나쁜 짓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상 가장 문명화된 남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잘 생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대한 남자들이 그랬듯이 그도 또한 관심을 분산시키는 이 결함(잘 생긴 것)을 면제받았다.

이런 건조한 발랄함

 

311 13년 동안(1481~1494) 로도비코는 조카의 섭정 자격으로 밀라노를 통치했다. 쟌갈라아쪼 스포르짜는 통치의 책임이 두려워 수줍게 뒤로 물러서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자주 병에 걸려서 심각한 사건들을 다룰 능력이 없었다. 조카는 쾌락이나 질병에 빠져 기꺼이 국가 행정을 삼촌에게 맡겼다. 질투심을 지닌 채 삼촌을 존경하고 의심을 지닌 채 믿었다.

질투심을 지닌 채 존경하고, 의심을 지닌 채 믿는 이 분열적인 양가감정

 

312 밀라노는 이런 말에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로도비코가 가장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페라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와 함께 기뻐했다. (1491) 그는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생동하는 처녀성에 자신이 잘 어울리는 척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서른아홉 살의 나이에 여러 명의 정부를 두었고 그들은 그에게 두 아들과 딸 비앙카를 낳아주었다. 이 딸을 그는 자기 아버지 같은 이름의 정열적인 여자를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했다. 그의 아내 베아트리체는 르네상스 남자들의 이런 일부일처 방식에 대해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양육되었다.

밑줄 그은 부분 때문에 밑줄 그었다. 내가 양육된 방식

 

313 그녀의 매력은 삶에 대해 지닌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태도였다.

 

313 그런데도 누구나 그녀를 용서했다.

 

317 아내 베아트리체가 두 번째로 임신하자 그는 그녀를 결혼의 의무에서 해방시켜 주고, 루크레찌아 크릴벨리와 애정행각을 벌였다. 베아트리체는 참을 수 없는 슬픔으로 그의 부정을 견뎠다. 그녀는 이제 더는 노래와 즐거움을 사방으로 뿌리지 않고 두 아들에게만 몰두했다. …1497년에 베아트리체는 세 번째로 출산에 묶였다. 그녀는 아들을 사산했다. 그리고 반시간 뒤에 큰 고통 속에서 죽었다. 스물두살의 나이였다.

 

319 프랑스군이 노바라에 나타나자 로도비코는 자신이 거느린 오합지졸을 이끌고 사우러 나갔다. 그러나 군대는 첫눈에 충격을 받고 도망치고 말았다. 로도비코가 변장하고 도망치려고 하자 스위스 용병들이 그를 배신하여 적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1500) 그는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다만 <신곡> 사본을 파비아에 있는 도서관에서 가져다 달라고 말했을 뿐이다.

 

319 로도비코가 중병에 걸리자 루이 왕은 자신의 주치의인 메트르 살로몬을 그에게 보내고 또 밀라노에서 로도비코의 난쟁이 한 사람을 불러서 그를 즐겁게 해 주라고 시켰다.

 

6.     학문

 

320 로도비코와 베아트리체는 수많은 시인들을 자기들 주변으로 데려왔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하도 즐거운 것이어서 시인의 내면에 대작을 쓸 열성적인 헌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시를 쓰기 위해서 즐거움과 반대되는 것이 필요한가?

 

7.     미술

 

324 전제 군주의 통치는 이탈리아 미술에 하나의 은총이었다민주주의 제도에서라면 배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아름다움을 위해 투입했다. 또한 예술을 위해 인간의 노동과 천재의 결실이 그토록 많이 투입된 경우는 없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그 결과는 형식과 주제 면에서 너무나 자주 세속적인 지배자와 교회 권력가의 요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궁정의 특징과 귀족적 취향을 지닌 에술이었다. 많은 사람의 노동과 기여를 통해 공동체를 위한 선물과 영광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고귀한 예술이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사원들이 모두 그랬다.

 

7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1519

 

1.     발전과정 1452~1482

 

332 스케치를 잘 하기 위해서 자연에 있는 모든 사물을 호기심, 끈기, 조심성을 가지고 탐구했다. 그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은 과학과 예술은 그렇게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이었으나 곧 세밀한 관찰이었다. 그가 열다섯 살이 되자 아버지를 그를 피렌쩨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으로 데려가서 이 재능많은 예술가에게 아들을 견습생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했다. 교육받은 사람은 누구나 바사리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안다. 에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 중에서 왼편에 있는 천사를 그렸다는 것 그리고 스승은 이 천사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해서 그림을 포기하고 조각에 전념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예화가 있었구나. 또 한가지는 열 다섯살에 아들을 견습생으로 보낸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14, 15세 정도되면 르네상스 아이들은 견습을 할 만큰 자기의 앞날을 정한다. 아이인 시절은 초등학교까지로 보는 게 맞다. 잉태하여 젖 먹여 기르는 총 4년을 잘 보내고, 그리고 독일인지 어디는 13세 미만 어린이가 밤에 혼자 집을 보게 하면 부모가 처벌을 받는다 했지. 14, 15세부터는 선택권을 줘야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그렇게 자랐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좋은 예다.   

 

2.     밀라노 시절

 

339 수도원장은 (바사리의 말을 믿어도 된다면) 공작에게 찾아가 레오나르도의 게으름을 불평하면서 그가 어째서 때로는 몇 시간씩 붓질 한 번 안 하고 그림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공작은 수도원장에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지만 레오나르도는 아무 문제없이 공작에게 설명했다.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 그리고 (바사리가 덧붙이는 말에 따르면)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많이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두 가지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고 레오나르도는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에 어울리는 모습을 구상하는 것과 유다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그리고 자기는 어쩌면 너무나 자주 만나는 수도원장의 얼굴을 유다 얼굴의 모델로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슬쩍 덧붙였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지역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사도들의 모습에 도움이 될 만한 얼굴과 머리들을 찾고 있었다. 이런 탐색을 수없이 하면서 그는 여러 모습들을 선택해서 이 그림 안에 용해시켜 넣어서 걸작의 기적을 만든 개성 뚜렷한 머리들을 그토록 놀랍게 표현했다.

 자주 만나는 생활 속 인물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스케치를 해두면 그게 나중에 다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는 거로구나

 

340 여기서는 과격한 신체 활동 이상의 것이 있다. 정신이 탐색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 예술가가 하나의 그림 안에서 그렇게 많은 영혼을 드러낸 경우는 두 번 다시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들 사도들을 위해 수도없이 습작 스케치를 했다.

보고싶다. <최후의 만찬>

 

3.     피렌쩨 시절 1500~1501, 1503~1506

 

349 1503~1506년의 기간 동안 레오나르도는 이따금 모나리자 작업을 하곤 했다. 그것은 1512년 시 의원이 된 프란체스코 델 죠콘도의 세번째 아내 엘리자베타의 초상화였다. 1499년에 매장된 프란체스코의 아이가 엘리자베타의 아이였던 모양이다. 아이를 잃어버린 것이 아마도 라 죠콘다의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심각한 모습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351 마침내 일이 끝났을 때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그린 모든 초상화 중에서 가장 많이 완성된 이 작품이 아직도 미완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그림을 자신이 보관했다. 어쩌면 남편은 자기 아내가 자신과 손님을 향해서 여러 시간 동안이나 자기 집의 벽에서 그렇게 미소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4.     밀라노와 로마 시절 1506~1516

 

351 이런 그림을 명상해 보고 또 이렇듯 섬세한 붓을 놀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의 시간들을 가져야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레오나르도가 게으름을 피웠다는 우리의 판단을 바꾸게 된다.

 

 352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참지 못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하학으로 보냅니다. 어쩌면 겉으로 보기에 이토록 게으르던 순간에 레오나르도는 화가를 파묻고 아펠레스를 감추고, 파우스트로 바뿐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 탐구는 그에게 돈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5.     인간 레오나르도

 

354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1509에 나오는 플라톤의 고귀한 모습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일부 학자들에 의해 레오나르도의 초상화라고 불려 왔다.

 

357 그는 5000쪽에 달하는 글을 썼지만 단 한 권도 완성하지 못했다. 양으로만 따지면 그는 화가라기 보담은 저술가였다. 그는 자신이 120종의 원고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중 50종이 남았다. 그것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절반쯤 오리엔트 필체로 쓰인 것이다. ..그의 문법은 빈약하고 철자는 개인적인 특징을 지녔다……수많은 시대착오적인 특성들은 그가 산만한 역사적 지식만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훌륭한 저술가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물에 대한 서술처럼 몇 번은 능변을 시도하기도 했다. …분명 자신의 기록들을 출판할 의도를 품고서 여러 번이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살아서 단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몇 친구들은 정선된 원고를 볼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플라비오 비오도, 제롬 카르단, 첼리니 등이 그의 원고를 자기들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많은 글을 썼는데 단 한 권도 출간하지 못하다니 어쩐 일일까? 이 연구원 과정에 대한 나의 불안을 건드리네. 매번 마감을 맞추지 못하고, 칼럼은 지나친 자기 노출과 조악한 글이고, 핵심을 짚지 못하고또 뭐가 있지? 비관적이야.

 

358 그의 기본 원칙은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 화가여 보라, 들판에 나가거든 여러 사람들에 주의를 돌리고 사물을 차례로 하나씩 자세히 바라보고 이들 별 가치가 없는 것들 중에서 여러 가지를 골라내라물론 화가는 해부학, 원근법, 명암의 배치 따위를 탐구해야 한다. 윤곽선을 예리하게 강조하면 그림은 나무토막처럼 보인다. “언제나 인물이 그 머리를 가슴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게 만들라레오나르도 자신의 작품에 나타나는 우아함의 한 가지 비밀이 이것이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물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보여 줄 수 있는 동작을 만들어라

 

359 아마도 인간보다고 자연이 더 그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자연은 중립이고 악을 나쁜 것이라고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편견없는 눈길에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많은 풍경화를 그렸고, 그것을 소홀히 한다고 보티체리를 나무랐다. 그는 펜으로 정성스럽게 꽃들의 덩굴을 따라갔다. 나무, , 바위, , 구름, 호수 따위의 배경을 줌으로써 마법과 깊이를 첨가하지 않은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6.     발명가 레오나르도

 

360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를 고용했던) 로도비코나 체사레보르지아에게 이어서 레오나르도는 무엇보다도 기술자였다. 그가 밀라노 공작을 위해 계획한 축제 행렬은 정교한 자동 기계를 포함했다. 바사리는 이렇게 말한다. “매일같이 그는 쉽게 산을 없애거나 산에 구멍을 내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식과 설계도들을 만들었다. 지레, 기중기, 크랭크 등의 도움을 받아 무거운 무게를 들어올리고 끌어 갈 방도들을 고안했다. 항구를 청소하는 방법, 혹은 매우 깊은 곳에서 물을 퍼 올리는 방법 등을 궁리했다.

기술자 맞네

 

363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레오나르도의 실패한 암중모색과 또 다른 수많은 시도들을 거쳐 마침내 우리 시대의 빛나면서도 비극적인 승리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비행의 꿈 말이다.

 

7.     과학자 레오나르도

 

364 그는 거의 모든 과학분야를 건드렸다. 사유의 가장 순수한 형태인 수학에 열광적으로 몰두했다. 기하학적 형태들에서 분명을 아름다움을 느끼고 최후의 만찬을 위한 습작 페이지에 그런 형태들을 그려 놓기도 했다.

364 또한 천문학에 열광했다. 달을 크게 보기 위해 망원경을 만들자고 했지만 분명 그것을 만들지는 않았다.

 

365 그는 높은 산에서 동물의 화석을 보고 옛날에 바다가 이 높이에 이르렀었다고 결론 지었다.

 

369 그는 르네상스의 어떤 화가보다도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다루엇다. 후광을 빼고 성모가 자기 어머니의 무릎에 걸터앉게 하고, 아기 예수는 상징적인 양에 올라 타려 애쓰게 만들었다. 그는 물질에서 정신을 보았고, 영혼을 믿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혼은 오로지 물질을 통해서 그리고 변경시킬 수 없는 법칙과 조화를 이루어서만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혼은 육체의 부패와 더불어 부패 될 수 없다라고 썼지만 또 죽음은 생명과 함께 기억도 파괴한다그리고 신체가 없으면 영혼은 행동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라고도 썼다.

 

8.     프랑스 시절 1516~1519

 

372 그는 르네상스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토록 강하고 격렬하던 시대를 대표하기에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신시적이고 내성적이고 섬세했다. 그리고 보편인도 아니었다. 그의 다양성에는 정치가나 행정가의 자질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르네상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천으로부터 한 사람이 왔었다는 것, 그가 인류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8장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1.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380 우리는 그를 15세기의 대표적인 아탈리아 화가로 꼽지 아니할 수 없다. 그의 인물들은 거칠고 얼굴도 거칠다. 많은 사람들은 플랑드르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조용한 품위이며 근엄한 얼굴과 당당한 태도, 그리고 억누르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극적인 행동력이다.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도안의 조화로운 흐름이고 무엇보다도 피에로의 손길이 타협을 모르는 정직함으로 이상화나 감상을 물리치고 눈이 보고 정신이 파악한 것을 그대로 표현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2.     시뇨렐리

 

384 시뇨렐리는 유려한 장인이었다. 그는 해부, 포즈, 원근법, 단축 등에 대한 연구로 우릴르 놀라게 하고 또 구도와 장식에 인체를 이용해서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따금 그가 그린 성모들에는 부드러움의 흔적이 나타나고 또 로레토에 있는 음악가들은 식견있는 정신들을 매혹했다.

 

384 미켈란젤로는 시뇨렐리에게서 이런 해부학의 정열, 수단 속에 목적을 잃어버리는 이런 정열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시스타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에서 오르비에토에 시뇨렐리가 그린 벽화를 좀 더 큰 규모로 되풀이했다. 그러나 시스타나 천장에서 그리고 조각 작품들에서 그는 신체를 영혼의 목소리로 이용했다.

 

3.     시에나와 소도마

4.     울브리아와 발리오니 가문

 

394 쟌파올로는 음모에 동참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백 명이나 거리와 대성당에서 죽였다. 그리고 정부 건물에 죽은 자들의 목을 매달아 놓고 그들의 초상화를 거꾸로 걸어 놓았다. 이것이야말로 페루지아 미술의 실질적인 내용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굴복할 때가지(1506) 혼자서 도시를 통치했다. 교황에게 굴복한 다음에는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계속 통치했다. 그러나 그는 암살 말고는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줄을 몰랐다.

 

5.     페루지노

 

399 그는 현찰을 고집하고 외상을 거절했다. 그는 부를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붓을 잡는 손길이 떨리게 될 때 굶어죽지는 않겠노라고 확고히 결심한 사람이었다. 피렌쩨와 페루지아에 땅을 사들여, 한쪽 세상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어도 적어도 한 발을 땅에 딛고 있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페루지오의 캄비오에 있는 그의 자화상은 놀랄 정도로 정직한 자기 고백이다. 통통한 얼굴, 커다란 코, 붉은 모자 아래로 조심없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눈은 고요하지만 꿰뚫는 듯 하고 입술은 가볍게 경멸을 드러내고 굵은 목과 강력한 몸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속이기 어렵고 싸울 각오가 있고 자신감 있고 인간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한 인간이 있다. 바사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영혼의 불사를 절대로 믿지 않았다.”

바사리가 누구지? 자꾸 반복되네. 역사가인 듯 한데 윌 듀란트가 신뢰한 역사가인듯.

 

401 트레비에 있는 마돈나 델레 라그리메 교회를 위해서 그는 <동방 박사의 경배 1592>를 그렸다. 이것은 드로잉이 마비된 듯 하기는 하지만 일흔다섯 살 노인의 작품으로는 놀라운 것이다. 1523년에 그는 이웃한 폰티냐노에서 그림을 그리던 도중 전염병에 걸려서 아니면 노쇠함으로 죽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회개하지 않은 영혼에게 저승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보겠다고 말하면서 임종 성사를 거절했다. 그는 교회 묘지가 아닌 다른 곳에 묻혔다.

 

401 누구나 페루지노 회화의 결점들을 안다. 과장된 감상, 슬픔에 젖은, 인위적인 신앙심, 언제나 똑 같은 갸름한 얼굴과 리본 모양의 머리, 그리고 겸손하게 앞으로 숙인 머리, 심지어는 단호한 카토와 대담한 레오니다스까지도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이 대가는 독창적이기보다는 생산성이 높았다. 그의 그림들에는 행동과 생동감이 부족하다.

 

402 이 스승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풍부하게 만들어서 전해주고, 자신을 능가할 제자를 한 사람 키웠다. 라파엘로는 결점을 없애고 완벽해진 페루지노이다.

이런 제자에 의해 한 발 딛게 된다면 뭐랄까, 누구든 결점, 실수에 두려워 말고 자기 할 수 있는 최대 기량을 발휘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9장 만토바

 

1.     비토리노 다 펠트레

 

404 15세기 이탈리아를 전염병처럼 휩쓴 고전 학문에 대한 열풍에 사로잡혀 그는 파도바로 가서 여러 선생에게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수사학 등을 배웠다. 그들 중 어떤 사람에게는 하인 노릇으로 수업료를 대신했다. 대학을 마친 다음 그는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그리고 제자를 뽑을 때 출신이나 돈보다는 재능과 열성을 따졌다. 부자 학생에게는 그들이 가진 만큼 돈을 내게 하고, 가난한 학생에게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게으름뱅이를 참지 못하고 가혹하게 공부를 시켰으며 엄격한 기율을 지켰다. 그러나 대학 도시의 수선스러운 분위기에서는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비토리노는 학교를 베네찌아로 옮겼다.

 

2.     안드레아 만테냐 1431~1506

 

409 로마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영접을 받은 프란체스코 곤짜가 추기경, 여기서 특이할 정도로 사실적인 초상화들을 보게된다. 그들 중에는 얼굴의 주름살과 눈가에 매달린 눈물주머니로 해서 마흔셋의 나이보다 약간 더 늙어보이는 만테냐 자신도 들어 있다.

 

3.     세계 제일의 여성

 

412 베아트리체는 나폴리로 보내져 외할아버지의 궁정에서 생동감을 배웠고 이사벨라는 한동안 페라리를 이탈리아 수도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곳으로 만들어 주던 학자들, 시인들, 희곡 작가들, 음악가들, 미술가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여섯 살에 이미 그녀는 외교관들이 입을 딱 벌릴 정도로 지적인 소녀였다.

 

413 그는 난잡함에 대한 병사로서의 특권을 이용했고 아내가 첫번째 해산을 할 때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를 시작했다. 결혼 7년 뒤에 그는 브레시아에서 마상 창 시합 선수로 출전할 때 정부 테오도라가 거의 왕과도 같은 의상을 걸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했다. 이사벨라에게도 부분적으로도 잘못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녀는 약간 뚱뚱해진데다가 페라라, 우르비노, 밀라노 등지로 떠나 오래 머물렀다. 그렇지만 어차피 후작은 어느 경우라도 일부일처주의를 지킬 사람은 아니었다.

허난설헌을 생각하게 하는군. 똑똑한 소녀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고생을 한다. 근데 그 고생은 그 시대 여자들이 대부분 겪는 그런 류의 고생이다. 그게 그녀한테는 용납이 안되는 거지.

 

413 미술, 학문, 우정 등에 그녀가 마음을 다 바친 것은 부분적으로는 결혼 생활의 쓰라림을 잊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413 르네상스의 그 온갖 다채로움 중에서도 이사벨라, 베라트리체, 그리고 이사벨라의 시누이 엘리자베타 곤짜가 사이에 맺어진 다정한 관계보다 더 유쾌한 것은 없다. 르네상스의 문헌 중에서 그들이 교환한 애정 어린 편지들보다 더 섬세한 구절은 없다.

 

418 루벤스가 복제한 초상화는 아직도 삶의 역동성과 사랑을 지닌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8년 뒤에 벰보가 그녀를 방문했다가 그녀의 생기와 정신의 깨어 있음과 관심의 폭에 경탄했다. 그는 그녀를 여성들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행운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초상화 한 번 보고 싶네.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을 그림에서 어떻게 알아보지? 

 

10장 페라라 1378~1534

 

1.     에스테 가문

 

419 16세기의 처음 25년 동안에 가장 활발한 르네상스 중심지는 페라라, 베네찌아, 로마였다

 

420 니콜로는 통치 영역만큼이나 광범위하게 결혼을 해서 아내와 정부들이 긴 행렬을 이루었다. 특히 아름답고 인기가 있었던 아내 파리시나 말라테슽타는 의붓아들 우 고와 간통을 저질렀다. 니콜로는 그들 두 사람의 목을 베고(1425) 간통죄를 범한 모든 페라라 여인들도 똑같이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판결이 페라라의 인구를 줄어들게 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이 법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자신과 남에게 적용하는 원칙이 너무나 다르다

 

2.     페라라의 예술

 

426 페라라의 문화는 순수하게 귀족적이다. 그리고 그 예술은 소수에게만 열렬히 봉사하는 것이었다.

 

429 이러한 쇠퇴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벤베누토 티시(고향에서는 흔히 가로팔로)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두 번 로마를 방문하면서 그는 라파엘로의 미술에 매료되어 자기가 두 살 위였는데도 이 젊은 예술가의 작업장에 조수가 되었다.

대단하다.

 

3.     학문

 

430 페라라의 지적인 생활은 두 가지 뿌리를 갖는다. 대학과 과리노 다 베로나였다. 1391년에 세워진 대학은 자금 부족으로 곧 문을 닫았다. 니코로 3세에 의해서 다시 문을 연 대학은 레오넬로가 포고령을 내려 재조직하고 재정 후원을 하기까지 절반쯤 굶주린 생명을 유지했다. 이 포고령은 기념할 만 하다. 

 

하늘과 바다와 딸이 어느 날인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그리스도교도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오래된 의견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많은 빛나던 도시들이 폐허만 남아 땅 표면과 같은 높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복자인 로마조차도 먼지 속에 파묻혀서 파편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지혜라 부르는 신과 인간의 일들을 이해하는 것만이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그 권리를 보존한다.

이 말이 멋지다.

 

431 과리노는 1370년에 베로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5년 동안 살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그리스 사본들을 잔뜩 가지고 베네지아로 돌아왔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 상자들 중 하나가 사라졌을 때 그의 머리카락이 하룻밤 만에 하얗게 세고 말았다고 한다.

전설이 그가 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를 말해주네.

 

433 “어째서 나는 너와 함께 무덤으로 내려갈 수 없는 걸까?” 그녀는 죽은 시인에게 이렇게 묻는다.

 

4.     아리오스토

 

436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 탁월한 시인에게 접근할 때면 시가 번역이 불가능한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국어로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이탈리아가 로도비코 아리오스토를 시인들 중에서 단테 다음으로 꼽는 이유를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분노한 오를란도>를 영국인이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는 것 이상의 즐거움으로 읽는다. 그러나 우리는 단어를 듣지만 멜로디는 놓친다.

 

438 그는 <분노한 오를란도>를 쓰는데 10, 다듬는 데 다시 16년이나 들엿다. 그때마다 그는 노래를 덧붙였다. 그래서 마지막에 전체는 거의 39천행에 이르는데, 이것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합친 분량과 맞먹는다.

 

441 아리오스토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글을 쓴다. 그는 자신의 시구의 마법을 통해 우리를 비현실적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요정들과 마법의 무기들과 여러 가지 마법으로 신비롭게 만든다.

 

442 그는 영웅적인 행동이나 명령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어서 은퇴하자 행복했고 남은 8년간의 삶을 페라라에서 보냈다. 그는 도시 변두리에 땅을 사서 예쁜 집을 지었다. 그거은 아직도 아리오스토 거리에 남아 있고 국가가 관리한다. 건물 정면에 그는 호라티우스의 시행을 새겨놓았다. “작지만 나에게 알맞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상스럽지 않고, 내 자신의 재산으로 얻은 집그곳에서 그는 조용하게 살면서 이따금 정원 일을 하고, 매일 <분노한 오를란도>를 고치거나 더 늘렸다.

  

5.     그 이후의 영향

 

11장 베네짜와 그 영토 1378~ 1534

 

1.     파도바

2.     베네짜아의 경제와 정책

 

450 대운하의 유유한 물의 산책로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엇다. 이 길을 보고 코미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라고 표현했다.

자타 공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몇 개나 될까? 그리고 나는 그 중 몇 개를 직접 볼 수 있을까?

 

450 베네치아의 부는 더 많은 부분이 해상 무역에서 온 것이다.

 

450 이러한 상업은 베네찌아 공화국이 벌이는 사업의 재정을 담당하는 만큼 그 정치를 지배했다. 상인 귀족은 세습하는 권력 계층이 되었고, 그들이 국가의 모든 기관을 통제했다.

 

452 아드리아 해에서의 세력 확장은 적법한 변명으로 시작되었다. 지중해 가장 북단의 항구라는 베네찌아의 지리적 위치는 베네찌아의 행운이었지만, 그것은 아드리아 행의 통제권이 없이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부동항 확보,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소린데 이것과 비슷한 맥락인듯

 

453 유럽은 베네찌아가 그리스도교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도 다른 교황이 나서서 터키에 맞선 또 다른 십자군 전쟁을 제안했을 때 베네찌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 도시는 무역이 그리스도교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유럽과 의견이 같았던 것이다.

명분보다 이익이, 다른 어떤 것보다 생존이 중요하다.

 

3.     베네찌아의 통치방식

 

454 이 정부는 피렌제조차도 모방하려고 애쓰던 형태로서, 무역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부유해진 오래된 가문들의 폐쇄적인 소수 지배였다.

 

455 도시국가 내부와 외부의 음모를 막기 위해 대의회는 해마다 자체 의원들 중에서 국가안전위원회인 10인 위원회를 선출했다. 비밀스러운 회합과 재판, 여기 속하는 밀정과 신속한 처리 등을 통해서 10인위원회는 한동안 국가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 기관이 되었다.

 

456 대의회에 의해 임명된 40인의 판사들은 능률적이고 진지한 사법부가 되었다. 법령은 명료하게 표현되었고, 귀족에게나 일반에게나 똑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형벌은 시대의 잔혹성을 보여준다. 투옥은 최소한도의 빛과 공기만을 허용하는 좁은 감방에 갇히는 것을 의미했다. 채찍질, 소인찍기, 손발 자르기, 눈멀게 하기, 혀 자르기, 형차에 매달려 돌려 사지 찢어 죽이기, 그 밖에도 여러가지 섬세한 형벌들이 합법적이었다.

고문이다. 절 지옥도에서 본 것 같다. 단테의 지옥도 이랬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구나. 현물을 지고 나가는 물물거래의 고단하고 번거로운 방식에서 화폐를 통한 게 된 것처럼 죄에 상응하는 물리적 벌을 주던 것에서 다른 식으로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 과정에 질서를 위해 국가가 개입해 있다. 여기는 도시국가의 형태로.

 

456 행정부 조직은 아마도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물론 여기도 다른 모든 정붕서처럼 부정부패가 있었다. 공중위생국은 1385년에 만들어졌다.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고 늪이 형성되는 것을 막기위한 조처들이 취해졌다. 또 다른 정부 부처는 상품에 부과할 수 있는 최대 가격을 지정했다. 우편 및 특급 우편 업무는 정부 뿐 아니라 개인도 편지나 소포를 부칠 수 있도록 운영되었ㄷ. 국가에 봉사한 사람이 퇴직할 경우 연금이 나왔고, 그들이 죽을 경우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대비책도 마련되었다.

이게 왜 재미있지? 보건복지부에서 다룰 업무네. ‘공무원연금’ ‘교사연금도 국가에 대한 봉사를 기반한 건가? 이 직업이 그런건가?

 

4.     베네찌아의 생활

 

460 하층민의 생활은 언제나 독같이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이탈리아의 느긋함과 수다를 통해서 그리고 부자들도 진한 향기를 풍기는 사랑의 즐거움을 빼고는 다른 어떤 것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런 일상이 견디가가 약간 더 쉬웠다….다른 어떤 유럽 도시보다 이곳에 노예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주로 이슬람교 지역에서 수입되었는데 노동자가 아니라 집안의 하인, 개인 경호원, 유모, 첩 등으로 이용되었ㄷ. 피에트로 모체니고는 나이 일흔에 성적인 쾌락을 위해서 두 명의 터키 노예를 두어다. 어떤 베네찌아 기록에 따르면 성직자 한 사람이 여자 노예를 다른 성직자에게 팔았는데, 산 사람은 그녀가 임신한 시실을 알고 다음 날 계약을 취소했다. 상류층은 노예를 주었어도 게으름뱅이는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년이 되면 상업, 재정, 외교, 통치, 전쟁 등에서 활동했다. 우리가 가진 베네찌아 사람들의 초상화는 강하게 개성을 의식하고 있고, 자기들의 처소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지만 진지한 의무감을 지닌 모습들을 보여 준다.

노예를 이슬람에서 물건처럼 수입했다는 구절과 임신했으니 하자가 있는 물건 물러달라 반품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 놀랍다. 저것이 성직자와 일반 인을 막론하고 상식적이었겠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도 얼마나 저런 것이 많을까? 나는 특히 장애학생들과 같이 지내면서 내가 하는 어떤 행동들이 나중에는 장애가진 이들의 인권과 관련있는 범죄일까 대단히 두렵다. 이 직업은 복 짓기도 좋지만 죄 짓기도 좋다.

 

461 이 도시에는 교회, 광장, 바다가 어우러져 있기에 베네찌아 축제는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화려함과 축제행렬의 핑계는 아주 많았다….해마다 벌어지는 가장 큰 축제는 바다와의 결혼식이었다. 이것은 가장 평온한 베네찌아가 아드리아 해와 벌이는 엄숙하고 화려한 결혼식이다.

 

463 세속적인 방탕 및 신성 모독은 정통 신앙 및 주일의 경건함과 함께 이탈리아인의 성격에 들어있었다. 베네찌아 사람들은 일요일과 축제일이면 성 마르코 성당에 빽빽하게 모여들어 그곳의 모자이크나 조각상이나 돋을새김에 그려진 두려움과 희망의 종교적 치료제를 들이마셨다. 기둥이 늘어선 동굴 같은 교회의 신중한 어두움은 성상들과 설교의 효과를 집중시켜 주었다. 심지어는 창녀들도 피곤한 밤을 보내고 난 다음이면 그들의 직업의 표지로 달도록 되어 있는 노란 손수건을 잠시 감추고는 이리로 와서 기도로 자신들을 깨끗하게 씻었다. 베네찌아 원로원은 사람들의 경건함을 좋아했다. 그래서 총독과 국가를 온갖 종교적 제의의 경외심으로 둘러쌌다. 콘스탄탙니노플이 함락되고 난 다음 베네지아는 큰돈을 들여 동방 성인들의 유품을 사들이고, 그리스도가 입었다는 솔기 없는 겉옷을 사기 위해 1만 두카트를 내놓았다.

 

5.     베네찌아의 미술

 

1)     건축과 조각

465 감각적인 색채가 베네찌아 미술의 핵심이다. 심지어는 건축도 그렇다. 베네찌아의 많은 교회와 집, 그리고 상업적인 건물들은 정면부에 모자이크나 벽화들을 보여준다.

 

467 이들 백만장자들은 자기들의 둥지를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충성심의 거점들을 위해서는 상당히 돈을 절약했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성 마르코 성당은 1807년까지는 베네찌아의 대성당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이 성당은 총독의 개인 예배당 겸 도시 수호 성인의 사당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국가 종교에 속한 것이었다.

 

2)     벨리니 사람들

469 많은 힘들이 합쳐져 화가들을 후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여기도 교회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당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교회는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설교의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그림과 조각상들을 필요로 했다.

이게 바로 그 많은 성화들의 비밀이구나

 

470 베네찌아에서 국가는 벽화를 차지하기 위해 교회와 경쟁을 벌렸다. 벽화들은 정부의 장엄한 행사와 무역이나 전쟁의 승리를 찬양함으로써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취시켰다. 벽화들은 정부의 장엄한 행사와 무역이나 전쟁의 승리를 찬양함으로써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취시켰다.

예술가들에게 돈을 주어서 예술품을 만들게 할 수 있는 재력은 교회, 상인, 국가가 갖고 있었다. 이런 이들이 후세에까지 오래 남을 작품을 제작하는 동력을 제공했다. 나 같은 일상시민의 예술은 뭔가? 올림픽에 나가는 국가대표급 운동보다 하루 20분씩의 생활체육이 중요하듯 일상 속에서의 예술도 중요하다. 그건 뭘까? 요즘은 대부분 소비인 것 같다.

 

470 색채를 향한 베네찌아 방식의 직감은 어쩌면 동쪽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상인들은 상품뿐만 아니라 동방의 사유와 취향도 함께 수입해 들였고, 빛나는 타일과 도금된 둥근 지붕의 기억도 함께 가져왔다.

 

476 인간 식물이 이탈리아에서는 지상의 다른 어떤 곳보다 무성하게 잘 자란다는 알피에리의 호언장담이 다시 생각난다.

삼밭에서는 쑥도 곧게 자란다고 했지. 어떤 환경에 있느냐가 개인이 가진 역량만큼이나 중요하다. 변경연 역시 그런 환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     벨로니 일가에서 죠르죠네로

4)     죠르죠네

480 그는 열세 살이나 열네 살에 (1490년경) 죠반니 벨리니 밑에서 견습을 하도록 카스텔크랑코를 떠나 베네찌아로 보내졌다.

이 화가도 13, 14세에 직업 훈련을 시작했다. 스승이 필요한 시기다. 마을 상좌로 보내는 것이 생각나네.

 

484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수도사의 만남에 드러나 있는 고요한 감정의 깊이다. 그의 몸은 아주 섬세하고 그의 감정은 음악으로 고양되어 있다.

앞 서문의 그림은 민음사 출판사에서 독자를 배려해서 넣은 건지, 윌 듀란트가 넣은 건지 모르겠다. 그 조악한 흑백 그림에는 이 책 몇 페이지와 관련이 있다고 작은 설명이 붙어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본문에도 그림(1) 또는 (128)과 관련이 있다고 밝혀놓든,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옆에 보이도록 편집이 되어 있으면 좋았겠다. 이탈리아 예술품, 회화, 조각 등등등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바로 그것 옆에. 그럼 너무 책값이 많이 들고, 책 쓰는 공이 늘어날까?

 

5)     티찌아노 형성기 1477~1533

485 그 거친 솜씨로 판단해도 좋다면 티지아노는 서른 다섯 살에도 아직 죠르죠네의 가장 좋은 작품을 다라 잡으려면 한참을 더 발전해야만 했다. 그러나 괴테는 후세의 눈길로 이 작품에서 이미 위대한 작품을 향한 약속을 알아보았다.

어머, 괴테가 동시대인이었어? 그럼 이탈리아 여행을 한 것은 이런 시대를 거치는 이탈리아였어?

No 괴테는 1749년생이었다.

 

488 티지아노가 바쿠스에서 그리스도로 베누스에서 성모에게로 넘어갔다가 또 돌아왔다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그는 그런 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6)     덜중요한 화가들과 작품

491 로렌조 로토 부끄러움을 타고 경건하고 우울한 정신이었던 그는 베네찌아가 아주 편하지만은 않았다….자연이 상상의 배경이 아니라 사납고 압도적인 힘으로 등장하는 유럽 최초의 그림이다. …로토처럼 예민한 영혼은 때로 티찌아노보다 더욱 깊이 속을 꿰둟어볼 수 있다. 밀라논의 카스텔로에 있는, 로토가 그린 <소년의 초상>에서처럼 건강한 청춘의 광채를 그렇게 잘 잡아낸 예술가는 드물다.

 

494 베네찌아 기능공의 절반은 예술가들이었다.

6.     베네치아의 학문

1)     알두스 마누티우스

2)     벰보

501 사누도는 독특한 일상언어로 글을 썼다. 그의 친구 피에트로 벰보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인위적인 문체를 다듬느라 거의 반평생을 다 바쳤다. 벰보는 요람에 있을 때 벌써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는 부유하고 학식 있는 베네찌아 사람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밑줄 그은 이유는 독특한 일상 언어로 글을 썼다때문

 

501 거기서 그는 문학적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대단한 궁정의 여왕인 루크네찌아 보르지아를 향한 사랑에 빠졌다. 그는 로마에서의 그녀의 수상쩍은 행각을 다 잊고 조용한 우아함의 매력과 티찌아노 방식의 머리카락, 그리고 명성의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명성도 아름다움처럼 사람을 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 연예인, 운동선수, 작가어쨎든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도 유명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질수도 있구나.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504 그 자신은 노년에 피렌쩨와 베네찌아의 역사를 썼다. 이 책들은 아름답지만 생명이 없다.

피대로 쓰라는 건 자기 생명을 드러내어 쓰라는 거지.

 

어쩌면 유일하게 그의 펜에서 직접 흘러내온 이 편지는 추억을 불러들이고 있다.

 

7.     베로나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1534

1.     코레죠

513 이곳은 천재가 태어나거나 죽는 것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천재가 그곳에 머물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장소이다. 여기에는 그들을 교육시키고 형성할 중요한 예술이나 뚜렷한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513 베로니카 캄바라는 르네상스 위대한 여성들 중 한 명이다. 라틴어를 말할 수 있고 스콜라 철학을 알았으며, 교부 신학에 대한 주석을 쓰고, 페트라르카 방식의 섬세한 시를 썼기에 열번째 뮤즈라고 불렀다. 그는 작은 궁정을 예술가와 시인들의 살롱으로 만들고 저 낭만적인 여성 숭배가 널리 퍼지는 일을 도왔던 인물이다.

이걸 요즘 말로 하면 그녀는 영어를 비롯한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었고,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고또 뭐가 있을까?

 

520 (프란체스코 마쭈올리)는 고아로 태어나 화가인 두 아저씨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의 재능은 빠르게 성숙했다. 열일곱살에 그는 코레죠가 천장에 그림을 그렸던 성 죠반니 에반젤리스타 교회에서 그림을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521 그러나 이제 파르미지아니노는 자신의 불행과 가난에 물린 탓인지 열렬히 연금술에 빠져서 그림을 버려두고 금을 제조할 용광로를 세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성 죠반니 교회 지도부는 그가 일하러 돌아오지 않자 계약 위반으로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화가는 카살마죠레로 도망쳐서 증류기와 도가니에 미쳐 지냈다. 수염은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고 자기 몸과 건강도 돌보지 않아 감기와 열병에 걸렸다가 코레죠처럼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1540)

 

2.     볼로냐

 

522 우리가 레지오와 모데나를 어울리지 않게 서둘러 지나친다면 그것은 이 도시들이 칼이나 붓이나 펜의 영웅들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523 르네상스 볼로냐는 시민 건축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상인들의 조합은 우아한 상공의회소 건물을 세웠다. 법률가들은 인상적인 공증인궁정을 재건했다. 귀족들은 베빌라쿠아 같은 아름다운 궁전을 지었다. ..자랑스러운 행정부 건물은 새로운 정면부를 얻었고, 브라만테는 시의 청사를 위해 당당한 나선형 계단을 고안했다. 많은 정면부들이 거리 쪽으로 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선 아치 복도를 냈기 대문에 도시 중심부에서는 교차로만 빼고는 수 마일의 거리를 태양이나 비에 노출되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었다.

 

3.     에밀리아 가도를 따라서

 

530 그녀는 자신을 포로로 잡은 반군에게 자기를 풀어주면 성으로 가서 이들 군인들에게 항복하라고 설득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들은 동의했지만 아이들은 볼모로 잡아 두었다. 그러나 성에 들어가자 그녀는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수비대의 저항을 직접 지휘했다. 반군들이 그녀와 그 부하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녀는 성벽 꼭데기에서 자신은 뱃속에 아이를 임신하고 있으며 다른 아이들을 더 임신할 수 있다고 대꾸했다. 밀라노의 로도비코가 군대를 보내 그녀를 구원했다. 반군은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카테리나의 아들 오타비아노는 어머니의 철권 아래 포를리의 군주가 되었다. 앞으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4.     우르비노와 카스틸리오네

 

537 귀도발도와 엘리자베타의 궁정에서 토론된 문제들 중 하나는 인내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의 증거는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대답은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이런 물음,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네

 

540 아무런 관심도 없는 상태에서 자기보다 스물세 살이나 어린 이폴리타 토렐리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자 그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아이로 사랑했지만 곧 어머니로서의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자기가 전에 여자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경험은 그에게 깊고도 전에 없는 행복을 가져다주었다그러나 로마주재 만토바 대사로 일해 다라고 이사벨라가 계속 졸랐다. 그는 아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마지못해 로마로 갔다. 곧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아펜니노 산맥ㅇ르 넘어 사랑스러운 편지 한 통이 왔다.

 

딸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이 실망하실 거라곤 생각 안해요. 그렇지만 전보다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세 번이나 고약한 열 발작을 일으켰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고, 다시는 열병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더 쓰지 못하겠어요.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생각합니다. 고통으로 약간 지친 당신의 아내 이폴리타

이폴리타는 이 편지를 쓴 직후에 죽었다.

아름다운, 뭉클한 사랑이야기네.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기도 어렵지만 사랑해서든 우연에서든 혼인한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이것도 거의 사제급의 미션이다.

 

543 돌에 새겨진 가장 아름다운 말은 카스틸리오 자신이 아내의 무덤을 위해서 썼던 시구이다. 그녀의 유해는 이제 그의 뜻에 따라 그의 유해와 나란히 묻혔다.

 

나는 이제 사는 게 아닙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여

운명이 당신의 육체에서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갔으니

그러나 내가 당신과 같은 무덤에 눕고

내 뼈가 당신의 뼈와 합쳐지는 날 나는 살게 됩니다.

 

13장 나폴리 왕국 1378~1534

1.     너그러운 알폰소

2.     페란테

 

552 페란테는 이런 동시적인 도전들에 맞서 분노한 용기로 싸우고 적들을 쳐부수고 우울한 사나움으로 그들에게 복수했다. 그는 화해를 가장하여 적들을 한 사람씩 초대해서 아주 훌륭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는 일부는 디저트 이후에 죽이고, 다른 사람은 감옥에 가두고, 그 중 일부는 지하 감옥에서 굶어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부는 변덕스러운 쾌락을 위해 새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페란테에 적대적인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전쟁의 잔혹함일 지도 모른다.

적대적인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전쟁의 잔혹함이라는 데 한 표 던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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