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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2일 21시 49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윌 듀런트

 

1885 11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 애덤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퀘백 출신의 이민자 가족이었는데, 캐나다-프랑스 출신 어머니는 그에게 그리스도의 사도 이름을 지어주었다. 윌 듀런트는 노스 애덤스와 뉴저지 주 커니의 가톨릭 부설 학교에 다녔다. 이 곳은 선생님이 수녀였고 그는 신학 공부에 충실했기 때문에 모두들 그가 목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저지 시의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에 다니게 되었고 이 곳의 선생님은 예수회로 윌 듀런트에게 졸업하자 마자 예수회를 섬길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1903, 그가 18살이 되던 해 윌 듀런트는 저지시의 공공 도서관에서 다윈, 헉슬리, 스펜서, 헤겔 등과 같은 매력적인 무신론자들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 후 듀런트는 성직자가 되기 바라던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사회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듀런트는 1907년 졸업 후 뉴욕 이브닝 저널에 기고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 이 일은 주당 10달러를 버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의 지저분한 사건들, 가령 성범죄와 같은 기사를 다루어야 했는데 이 일은 한 때 목사 지망생이기도 했던 듀런트에게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편집장은 그를 이해하고 좀더 그에게 맞는 직업을 택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세튼홀 칼리지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쳤다. 그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나 칼 맑스의 저서들을 공부하였다.

 

세튼홀 칼리지는 훌륭한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듀런트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큰 감명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스피노자의 인성 - 그의 철학대로 인생을 살며 청빈함과 단순함, 진솔한 삶의 수칙을 지키는 것,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 - 이 그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는 책의 대부분을 암기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던 자신의 인생을 깨닫고 과감히 과거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가 새로운 삶을 결심하며 나섰을 때 그가 가진 것은 고작 네 권의 책과 40달러였다. 그는 그대로 뉴욕으로 갔다. 그의 부모는 수년이 지난 후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떠난 아들을 겨우 용서할 수 있었다.

 

그는 맨해튼에서 자유주의 실험 학교인 페레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곳에서 지원자였던 알덴 프리먼은 아직 수줍음을 버리지 못한 윌 듀런트를 위해 유럽으로의 여름 여행을 제안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윌은 그의 제자였던 한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 아직 어린 학생이었던 카우프만과 결혼하기 위해 듀런트는 교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 장로교회에서 역사, 문학, 철학을 강의하였다. 그 동안 알덴 프리먼은 그가 컬럼비아 대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수업료를 지원하였다. 듀런트는 그곳에서 생물학과 심리학, 철학을 공부했다. 그 사이 딸이 태어났고 이 손녀를 통해 오랫동안 서먹하던 어머니와 화해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역사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지인의 권유로 <버클의 문명 이야기, 소개>를 읽게 되었다. 듀런트는 큰 영감을 받았으며 동시에 저자인 버클이 이미 죽었으며 그가 문명의 기원으로부터 19세기까지 계획해두었던 문명에 대한 저술을 단지 소개부분까지만 썼음을 알게 되었다. 듀런트는 그 과업을 자신이 직접 해내고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가 일에 착수한 것은 41세가 되어서나 가능하였다.

 

1917, 듀런트는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논문 <철학과 사회 문제>를 저술하였다. 이 저술에서 그는 철학이 점차 쇠퇴한 이유가 사회의 실제 문제를 회피하여 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그의 강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듀런트는 뉴역의 한 교회에서 철학과 문학 등을 강의하면서 시사와 학문에 목말라하는 대중들을 위해 강의서로서 <철학 이야기, 문명 이야기>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학교를 개설하여 성인 교육을 시작하였다. 우연히 <Little blue books>의 출판자가 그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강의 내용을 출판해볼 것을 권유받았다. 듀런트는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간곡한 요청으로 결국 허락하였다. 주제의 폭을 넓혀가면서 책은 <철학 이야기>라는 제목의 시리즈로 11권이나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수십개의 나라로 번역되었다.

책의 성공으로 생계의 문제로부터 자유를 얻은 듀런트는 오랜 꿈을 기억해냈다. 버클의 뒤를 이어 <문명 이야기>를 저술하는 것이다. 이 저술을 위해 듀런트는 만 50년을 투자하였다. 그의 책은 고등학교 졸업자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여졌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방대한 조사량과 지적 노동의 산물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디테일이 살아 있다. 더불어 사건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우러나오는 견해가 책의 진가를 더욱 높였다.

듀런트로 1981 96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그가 심장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그의 아내는 듀런트가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먹기를 중단하였다. 아내의 죽음을 전해들은 후 듀런트의 심장도 멈추었다. 둘은 같은 시간에 생을 마감한 후, 같은 공간에 나란히 묻혔다.

듀런트는 결코 명성을 위해 책을 집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문명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전해주기 위해 헌신하였다. 그의 열성적인 독자로 마하트마 간디, 조지 버나드 쇼, 버트런트 러셀 등이 있다.

 

 

 

 

 

 

 

 

 

로마 르네상스 1378 - 1521

항상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이 세상의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14장 교회의 위기 1378~1447

17 그러나 이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 극적인 방식으로 도망치면서 회의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요한 23세는 자신의 적들이 자신의 toddom, 범죄, 음란 등의 기록을 회의에 제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기겁을 했다. 한 위원회는 그가 그레고리우스, 베네딕투스 등과 함께 동시에 물러나기로 동의한다면 이런 불명예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는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마부로 변장하고서 콘스탄츠에서 도망쳐(1415 3 20) 오스트리아 대공이며 지기스문트의 적인 프리드리히와 함께 샤프하우젠의 성에 숨엇다. 3 29일에 그는 자기가 콘스탄츠에서 한 모든 약속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거시었고 따라서 구속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4 6일에 공의회는 결의문 "사크로상타"를 발표했다. 어던 여갓가는 그것이 "세계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공식 문서"라고 불렀다.

 

è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91283

1378 2명의 경쟁 교황(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2세와 아비뇽의 베네딕투스 13)이 선출되고, 1409년 피사 공의회가 서방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새 교황을 선출함에 따라 교황은 3명이나 되었다. 피사 공의회에서 교황에 선출된 요한네스 2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즈문트의 압력으로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그 목적은 주로 그리스도교 세계를 재통일하려는 것이었으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사상을 조사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의회에 참석한 대표들은 정치적으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인 선거방식을 채택했고, 그에 따라 4개의 세력권(이탈리아·잉글랜드·독일·프랑스)이 각각 하나의 투표권을 갖게 되었고, 추기경단도 하나의 투표권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스페인도 투표권을 받았다. 요한네스 23세는 사생활을 조사하겠다는 위협을 받자 경쟁 교황들이 동시에 사임하면 자기도 사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직후 자기가 공의회장을 빠져나가면 공의회의 권한도 사라져 결국 해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콘스탄츠에서 도망쳤다. 황제는 공의회를 계속할 것을 고집했고, 이 공의회는 교회의 전체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는 내용의 교령 '사크로상타'(Sacrosancta)를 공포하고, 또 교회의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 공의회를 자주 열어야 한다고 공포했다. 그뒤 요한네스 23세는 체포되어 폐위당하고, 그레고리우스 12세는 정식으로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을 갖는 조건으로 사임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이 교황계열의 정통임을 주장했으며, 공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베네딕투스 13세는 사임을 거부했으나 결국 폐위되었다. 1417 11월 공의회는 오도네 콜론나(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됨)를 선출함으로써 대분열을 효과적으로 치유했다. 현존하는 사크로상타의 신빙성은 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쟁점이 되어왔다.

 

21 교황들은 정치가여야만 했고, 이따금 전사이기도 했지만 성인이 될 여유는 드물었다.

 

24 1045년 이후로 그리스 정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져 있던 그리스도교가 새로 통합될 예정이라는 소식은 묻는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 공의회가 열린 다음, 교황의 우위,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의 사용, 연옥의 고통의 특성,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느냐, 아니면 성자에게서 나오느냐의 문제 등을 놓고 두 교회의 다른 점들을 서로 융합시키기 위해 다양한 위원회들이 열렸다. 그 사이에 파라라에 페스트가 발생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공의회가 피렌쩨로 옮겨 오면, 자신과 친구들의 경비로 그들을 대접하겠노라고 초대했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학식 있는 그리스 사람들이 피렌쩨로 들어온(1439) 날을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시작된 날로 꼽는다. 여기서 그리스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표현들이 합의되었다.

 

15장 르네상스가 로마를 사로잡다 1447~1492

 

30 민주주의란, 지성, 안전, 평화가 널리 퍼지면서 생긴 사치품이다.

 

32 영적인 권력으로서 르네상스 교황들은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와 화해시키는 문제에 직면했다. 인문주의는 절반은 이교적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한동안 이교의 뿌리와 가지, 그 신조와 기술을 파괴하려고 손수 나섰다. 그래서 이교의 사원과 조각상들을 파괴하는 일을 격려하거나 묵인했다. … 이런 태도를 바꾸어 로마와 그리스 시대의 유물과 고전들을 보존하고 수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의 사유에 하나의 혁명이 필요했다. 인문주의의 위세는 이미 높디 높고, 새로운 이교 운동의 자극도 강하고, 또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미 거기 하도 깊이 물들어서 교회는 그리스도교도의 삶에서 인문주의의 발전을 위한 자리를 찾아내든지, 아니면 이탈리아나 뒷날 유럽의 지식인층을 잃어버릴 위험을 각오해야만 했다. 니콜라스 5세 치하에서 교회는 인문주의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으며, 교회 자신이 새로운 문학과 예술의 편에, 아예 그 선두에 자리를 잡았다. 즐거운 백 년 동안 (1447~1534) 교회는 이탈리아의 정신에 아주 넉넉한 자유를 주었고 '필렐포는 이를 믿을 수 없는 자유'라고 말했다. 또 이탈리아 예술에 그토록 대단한 후원과 기회와 자극을 주어 로마는 곧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 하나를 즐겼다.

 

33 머지않아 사르짜나의 토마소는 고전 고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함께 사로잡혓다. 그는 자신의 수입을 거의 모두 책을 사는 데 쓰고, 비싼 필사본을 사느라 돈을 빌리고, 앞으로 언젠가 돈이 충분히 생겨서 세상의 모든 위대한 책들을 하나의 도서관에 모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했다. 바티칸 도서관은 이러한 야망에 그 기원을 가진다. 코시모는 토마소에게 자기 도서관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맡겼다. 토마소는 필사본 사이에서 행복했다. 자신이 첫 번째 르네상스 교황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è 니콜라스 5

 

34 토마소는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부심 강한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킬 일이지만, 사제관의 가난한 심부름꾼이 교황이 될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그들 중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바르바로는 플라톤의 Ran이 실현되었다고 선언했다. 철학자가 왕이 된 것이다.

 

37 그는 희년 축제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위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니콜라스는 이것을 교회의 평화와 통합의 회복에 대한 기념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의 감정과도 잘 맞았다. 라틴 그리스도교의 구석구석에서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순례자의 행렬이 밀려들어 왔다. … 순례자들이 넉넉한 봉헌물을 가져왔기에, 희년 축제가 만들어 낸 재정적 이익은 교황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그가 지은 건물의 비용과, 학자와 필사가들을 위한 비용을 모두 감당했다.

 

39 니콜라스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자신을 너그럽기는 해도 전제 군주라고 여기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변했다. 의심에 시달리고, 원한에 괴롭고, 통풍으로 고통받아서 그는 빨리 늙었다. 터키 군이 5만명의 그리스도교도 시체를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을 이스람교 사원으로 만들었다는 소식(1453)이 오자 교황으로서 자신의 몯느 영고아이 아무런 소용없는 공허함으로 여겨졌다. 그는 유럽 국가들에게 함락된 동방 그리스도교의 수도를 도로 찾기 위해 십자군에 참가하라고 호소했다. … 유럽은 그런 말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48 교황 재임 마지막 시기에 피우스는 고위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개혁 프로그램 구성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는 쿠사의 니콜라스가 제출한 계획을 받아들여 그것을 교황의 교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에 개혁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관들 중 절반 정도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직권의 남용을 통해서 이익을 얻었다. 무관심과 정열적인 저항에 밀려 피우스는 패배했다. 그 사이에 도이칠란트, 보헤미아, 프랑스와의 힘든 관계들이 그의 에너지를 다 소모시켜 버리고, 그가 계획했던 십자군 전쟁은 그의 헌신을 모조리 흡수하고, 돈을 요구했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한 추기경들을 나무라고, 수도원의 기율을 강화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1463년에 그는 추기경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소를 해 보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즐거움을 위해 살고, 부를 축적하고, 거만하게 행동하고 살찐 노새와 말을 타고, 외투 자락을 뒤에 길게 끌고, 붉은 모자와 하양 두건 아래로 통통한 얼굴을 드러내고, 사냥을 위해 사냥개를 키우고 배우들과 식객들을 위해 많은 돈을 쓰면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추기경과 우리 궁정의 다른 관직을 가진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진실을 고백하자면 우리 궁정에 사치와 화려함이 지나치가.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렇듯 미움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정의롭고 분별 이쓴 것을 말할 때에도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렇듯 수치스러운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우리는 우리 선배들이 어떤 수단으로 교회를 위해 권위와 존경심을 얻었는지 물어야 한다. … 우리는 동일한 수단으로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절제, 순결, 결백, 신앙을 위한 열성 지상에 대한 경멸, 순교를 향한 열망 등이 로마 교회를 드높이고 교회를 세계의 여주인으로 만든다.

è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어야 존경받는 양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돈이 곧 가치인데. 비단 이들이 성직자이기 때문일까? 성직자라서 돈은 많이 쌓아두되 생활은 겸손해야 하는 것인가? 다들 그러지 않는가. 훌륭한 교황 - 재산은 많았으나 생활을 겸손하다. 지휘자 정명훈이 전에 서울 시향으로부터 받는 연봉 20억원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정명훈은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하루 종일 음악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매일 일어나 음악을 고민하고 밥먹고 자는 일 밖에 하는 일이 없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스님과 같이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존경을 얻는 방법도 있기는 하겠지. 그러나 스님은 정말로 세속을 떠난 사람이고 세속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남에게 신세 지지 않고 그들과 동일한 life style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è 여주인이라는 표현, 독특하다.

 

51 마호메트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의 신앙이 무엇이든 그는 서양의 군대에 맞서 최종적으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은 교황의 약속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종교적 열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63 프란체스코 수도사이며 철학 및 신학 교수였던 사람(식스투스)이 르네상스의 첫 번째 세속화의 길을 간 교황이 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교황청을 이탈리아의 강력한 정치적 권력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진 최초의 르네상스 교황이었다.

 

67로마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적인 사면에서부터 교황직 자체까지도 말이다. 믿을 수 없는 인페쑤라의 말에 따르면 두 딸과 근친상간을 벌이고 나서 딸들을 죽인 남자가 800두카트를 지불하고 풀려났다고 한다. 보르지아 추기경에게 어째서 정의가 행해지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죽기를 원하지 않고 그가 돈을 내고 살기를 바라신다."

 

 

16장 보르지아 사람들 1492~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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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1466년에 그는 바노짜 데 카타네이와 어느 정도 항구적인 결합을 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스물네 살이었다. 불행히도 그녀는 도메니코 다리냐노와 결혼한 여자였다. 그러나 도메니코는 1476년에 그녀의 곁을 떠났다. 바노짜는 로드리고와의 사이에 네 명의 아이들을 두엇다. 1474년에 죠반니, 1476년에 체사레, 1480년에 루크레찌아, 1481년에 죠프레가 태어났다. 이들 네 사람은 바노짜의 비명에 그녀의 자식으로 기록되었고, 이런저런 기회에 로드리고 보르지아가 자신의 자식들이라고 인정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확고한 자녀 양육은 거의 부부와 같은 유대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보르지아 추기경은 다른 성직자들과 비교해 볼 때, 확고한 성실성과 안정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è 심지어 교황들도 이렇게 연애질을 해대는데 난 뭐지!!!!!!

 

82 그는 한동안 아들 죠반니가 교황국가를 보호하는 일을 도와주기를 희망했지만 죠반니는 남자들을 통치하는 알렉산더의 능력은 없이, 오로지 여자들에 대한 민감성만 물려받았다.

 

85 알렉산더 6 - 그의 신앙심은 가짜였던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의 편지들은, 심지어는 쥴리아와 연관된 편지들조차도 개인적인 서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신앙심을 나타내는 구절들로 차 있다. 그는 활동적인 남자였고, 그 시대의 편안한 도덕성에 하도 익숙해져서, 그리스도교 윤리와 자신의 생활 사이에 별로 모순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학에서 철저히 정교 신앙을 가지듯이 그는 행동에서 완전히 세속적이었다.

è 왕들은 기도를 마친 후 전쟁을 하러 나가고, 교황들은 직업과 생활을 분리하지.

 

87 알렉산더는 열쇠와 제단과 그리스도를 판다네.

그 또한 옳지, 그 자신도 그것을 위해 돈을 냈으니.

è 황금 만능주의는 현대의 발명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과거에 더욱 순수한 원형이 보이지 않는가? 신앙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면.

 

88 알렉산더는 또한 대중의 여론에 너무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잔혹하게 몇 배로 부풀리는 중상모략에 드물게만 응수했다. 그는 강한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수단으로는 그것을 이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정치적 수단들(선전, 속임수, 음모, 징계, 전쟁), 로마의 귀족들과 이탈리아의 세력들 중에서 강한 국가보다 그리스도교 교회를 더 좋아하는 사람과, 또 교황청과 교황국가가 혼란을 겪고 허약한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성나게 만들었다.

è

 

93-94

(체사레 보르지아)의 반지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네가 해야 할 바를 하라는 말이다. 그의 검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에서 나온 두 가지 구절이 새겨 있었다. 한 면에는 주사위는 던져졌다.가 새겨져 있었고, 다른 면에는 카이사르이거나 아무도 아니거나 라는 글귀였다.

 

101 과거에 다른 사람들에게 덫을 놓았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덫을 놓는 것은 적합한 일. 마키아벨리는 그와 오나전히 동감이었다. 그는 이 무렵 체사레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 체사레 보르지아

 

102 체사레는 결혼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은 아니었다. 애인들을 두었지만 누구도 오래 애인으로 삼지는 않았다. 어떤 여자가 그의 생활 안으로 점유하고 들어오기에는 그는 권력의 의지를 위해 너무 많이 마음을 뺏겼다.

 

103 체사레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사태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찌르는 능력을 깊이 존경했다. 또한 우연히 주어진 모든 기회를 잡고, 재빠르고 단호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그가 가혹한 기율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남몰래 경탄했다. 그가 뇌물, 책략, 속임수 등을 써서 적들의 숫자와 고집을 꺾고, 가능하면 군대의 전투와 사망자의 수를 줄이는 것을 좋게 여겼다. 외교관들은 민첩하고 겁이 없는 젊은 장군이 자기들보다 생각을 더 잘하고, 가장 예리하고 민감한 문제에서 자기들보다 앞서 있고, 필요할 때면 자기들이 가진 매력과 책략과 언변을 쓸 수 도 있다는 점을 분하게 여겼다.

è 악한 방법으로 선을 행하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겠구나. 기발한 접근법인데? 다만 악용될 소지가 있겠다.

 

104 로마의 소문은 '천천히 작용하는 독(cantarella)'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의 기본 성분은 비소로서, 분말 형태의 비소를 음식이나 음료에 떨어뜨리면(심지어는 미사에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에도) 인간이 그랬다고는 추적하기 어렵도록 천천히 죽음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천천히 작용하는 독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거부하고 잇다. 다만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보르지아 부자가 부자 추기경을 독살했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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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어떤 서기는 그녀(루크레찌아) "교황의 딸이며 아내이며 며느리"라고 불렀다. 이런 악담도 그녀는 조용히 체념으로 견뎠다. 오늘날 르네상스 시대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런 비난이 잔인한 비방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비방들이야말로 수백 년 동안이나 그녀의 명성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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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그러나 알렉산더의 통찰력은 정치적 도덕성의 결핍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는 한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 흐름을 예견하는 더 높은 지혜를 갖지 못했고, 또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118 알렉산더의 정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목적과 수단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목적은 전적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재산' (특히 고대 라티움 지방)을 무질서한 봉건적 남작들에게서 되찾는 것과, 교황(교회)국가들을 찬탈한 폭군들에게서 되찾는 일이었다. 알렉산더와 체사레가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들, 즉 전쟁, 외교, 속임수, 배신, 조약 위반, 동맹국 버리기 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국가들도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다.

 

122 체사레는 왕의 군대를 이끌고 비아나에 있는 백작의 요새에 마주쳤다. 백작이 돌격했으나 체사레가 물리쳤다. 그러나 체사레는 패배한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몰아붙였다. 다시 무장을 갖춘 백작이 그에게 대항했고, 얼마 안 된느 체사레의 군대는 도망쳤다. 체사레는 단 한 명의 동료와 더불어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이것은 문제 많은 삶에 명예로운 종말이었다.

è 전에 CT simulation 방에서 과장님께 전해들은 누군가의 죽음이 생각난다. 알프스에서 등산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했었지. 나는 그의 죽음이 부러웠다. 그렇게 죽는다면 정말 최고가 아닐까? 죽을 방법을 모색해야 할까?

 

17장 율리우스 2 1503~1513

 

131 율리우스는 건강이 망가진 채 로마로 돌아갔다. 재앙에 의해 압도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패배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귀치아르디니는 이렇게 말한다.

 

교황은 자신의 희망에 의해 대단한 실망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는 전설적인 작가들이 안테우스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안테우스는 헤라클레스의 힘에 의해 기운을 잃고 땅에 떨어질 때마다 더 큰 힘과 활력을 얻었다고 한다. 역경이 교황에게 동일한 효과를 냈다. 그가 극도로 실망하고 낙담한 것으로 보일 때면 그는 정신을 되찾고, 더욱 확고하고 한결 같은 정신과 더욱 굽히지 않는 결단으로 다시 일어서곤 했기 때문이다.

 

133 그가 '프랑스 병(매독)'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가혹한 소문이 돌았다. 다른 소문은 이번 질병이 절제 없이 먹고 마신 탓에 생긴 것이라고 했다. 그 어떤 처방도 그의 열을 내리는 데 소용이 없자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장례식에 대한 지시를 내리고, 라테란 공의회는 중단 없이 계속하라고 촉구했다. 자신이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추기경들에게 작별을 고하고서 살았을 대와 똑같은 용기로 죽음을 맞이했다.

è 매독으로 죽는 교황. 아이러니.

 

143 이 도서관에서 라파엘로는 피콜로미니 추기경이 로마에서 사서 시에나로 가져온 고대 그룹 조각상인 [세 명의 우미의 여신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젊은 화가는 분명 자시의 기억을 돕기 위해 서둘러 그것의 드로잉을 만들었다. 그는 세 명의 나체 조각상에서 우르비노와 페루지아에서 자기에게 인상을 주었던 것과는 다른 세계와 다른 도덕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은 여성이 신의 근심스러운 어머니이기보다 아름다움을 지닌 즐거운 여신으로 나타나는 세계이며, 아룸다움을 숭배하는 것이 순결함과 경건함을 높이는 것과 똑같이 합법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세계였다.

 

146 1505년에 그는 피린쩨를 잠깐 떠나 페루지노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두 개의 주문을 완성했다. 성 안토니우스 수녀회를 위해서 제단화를 그렸는데, 그것은 오늘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한 그림의 하나이다. 아름답게 짜여진 틀 안에 그려진 그림에서 옥좌에 앉은 성모는 원즈워스의 말을 빌리자면 "경배로 숨이 멎을 듯한 수녀"처럼 보인다. - 콜론나 성모

 

156 라파엘로는 이 시기에 초상화로 오로지 티찌아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에 도달했다. 초상화는 특징적인 르네상스 산물로, 이 빛나던 시대 당당한 개인의 해방에 잘 어울리는 장르이다.

 

159 미켈란젤로는 그 후 74년 동안 콧날이 주저앉은 코를 하고 살았다. 그렇다고 이 일이 그의 성정을 부드럽게 만들지는 못했다. 피에트로 토리지아노

 

163 정결한 여인들은 그렇지 못한 여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신선함을 보존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 피에타의 여인이 아들보다 젊은 것을 두고 한 말.

è 말이 되니? 젊은 여자에게 감정 이입이 더욱 쉽겠지.

 

167 그는 수많은 이유에서 레오나르도를 싫어했다. 그의 귀족적인 태도, 값비싸고 겉치레하는 옷차림,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 그리고 아마도 그때까지만 해도 화가로서 그가 더 큰 성공과 명성을 얻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71 1508 2월에 청동 조각상은 대성당 정문 위 제자리에 놓였다. 미켈란젤로는 3월에 피렌쩨로 돌아갔다. 아마도 다시는 율리우스 교황을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음직도 하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3년 뒤에 이 청동상은 용해되어 대포로 주조되었다.

 

173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가 받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지치고 기운이 없고 나이보다 일찍 늙었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눈은 예배당의 어두운 조명에 익숙해져서 태양 광선을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제는 책을 눈 아래에 놓는 것보다 위에 놓고 읽는 것이 더 쉬웠다고 한다.

è 예술가의 고생(!!!)에 고개가 숙여진다.

 

18장 레오 10 1513~1521

 

182 누구나 놀라고 즐거워했다. 알렉산더 6세와 체사레 보르지아의 시커먼 음모, 그리고 율리우스 2세의 전쟁과 소란과 분노를 겪은 다음, 태평스럽고 편안한 천성과 재치와 예의 바름으로,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후원으로 이미 유명한 젊은 남자가 아마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에게 안심이 된느 일이었다.

 

185 그는 마음에 철학을 담기에는 너무 태평스러운 사람이었다. 온갖 결론들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를 그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대학 시절 이후로는 형이상학으로 마음을 힘들게 만들지 않았다.

 

192 레오 10 -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나는 창조주께서 인류에게 주신 것 중에서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참된 숭배만 빼고는 이러한 탐구보다 더 탁월하고 쓸모가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장식하고 그의 길을 안내해 줄 뿐만 아니라 모든 특수한 상황에 적응할 수도 있고, 역경에서는 위안이 되고, 번영할 때는 즐거움과 명예를 주는 유용한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온갖 우아함과 사회의 온갖 광채를 뺏기는 것이 되겠지요. 이러한 학문 탐구를 확보하고 확장하는 것은 주로 두 가지 상황에 달려 있느 듯이 보입니다. 이 분야에서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의 수와, 탁월한 텍스트의 넉넉한 공급이 그것입니다. 이들 중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 나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그들의 미덕을 보상하고 명예로 만들어 주고자 하는 나의 가장 정직한 소망과 성향을 앞으로도 아주 뚜렷하게 보여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05 이들 고대 영혼의 신성을 생각해 보면 세계의 어머니이며 여왕인 이 고귀한 도시의 시체가 그토록 비참하게 난도질당한 것을 보면얼마나 많은 교황들이 고대 사원, 조각상, 개선문과 다른 건물들과 그 설립자들의 영광을 파손하는 일을 했던가!

 

209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교황에게 미켈란젤로에게 다른 일을 주라고 요구하자 레오는 이렇게 변명했다. 미켈란젤로의 탁월함은 인정하지만 "그는 자네도 보다시피 불안정한 사람이고 아무도 그와 잘 지낼 수가 없어." 세바스티아노는 이 대화를 친구(미켈란젤로)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성하께 자네의 불안함은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고, 그냥 자네가 위대한 작업에 헌신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또 자네가 일에 헌신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어."

이 유명한 무시무시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에너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89년 동안이나 지탱해 주기도 한, 사납게 불타오르는 힘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그 에너지를 단 하나의 목표, 곧 예술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모든 일을 다 무시해 버리는 의지의 힘이었다. 통합시키는 의지력에 의해 통제된 에너지란, 천재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형태 없는 돌을 도전으로 보고 "분노로" 그것을 잡아 망치로 때리고 끌로 파서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는 이 에너지는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삶의 하찮은 것들을 분노로 휩쓸어 내버린느 힘이기도 했다. 그 힘은 의상이나 청결함이나 표피적인 예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하고서, 약속도 깨뜨리고 우정도, 건강도 깨드리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깨뜨리고 몸과 정신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지만 그러나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회화, 가장 위대한 조각,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건축 일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이탈리아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는 개인의 당당한 아름다움과 의상의 화려함으로 빛나던 시대에 그런 일에 가장 적게 마음을 뺏긴 사람이었다.

 

215 카스틸리오네가 라파엘로에게 그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내느냐고 묻자 그는 여러 여인들에게 들어 있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합쳐서 그들을 만들어 낸다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양한 표본들이 필요했다.

 

220 레오는 이제 자신과 라파엘로가 율리우스와 미켈란젤로에 맞서 동일한 공간에서 예술의 전투를 벌였으며, 자기들이 이겼다고 여겼다.

226 그러나 라파엘로와 키지는 이 신화(프시케와 큐피드)에서 종교적인 상징성 따위는 보지도 않고 완전한 남자와 여자들의 형태를 명상할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여기사 라파엘로의 감각주의에는 청교도의 비판을 무력하게 만드는 섬세함 과 우아함일 들어 있다.

 

233 레오나르도의 섬세함과 미켈란젤로의 비극적 감각은 라파엘로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삶의 쾌락과 즐거움, 아름다움의 창조와 소유, 친구와 애인의 성실함으로 충분했다. …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미켈란젤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234 단테, 괴테, 키츠,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240 그는 예술 후원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가장 깨인 사람은 아니었다. 온갖 후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시절에 위대한 문학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리오스토와 마키아벨리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물론 그는 뱀보와 폴리찌아노를 평가했다. 미술에서의 취향은 율리우스의 그것만큼 확실하고 당당한 것이 아니었아.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아테네 학당으 그의 덕분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름다운 형태를 너무 사랑했고, 위대한 예술이 아름다운 형태 속에 감축 ㅗ있는 깊은 뜻을 너무 적게 사랑했다. 라파엘로를 너무 혹사시켰고 레오나르도를 너무 낮게 평가했고, 율리우스 2세처럼 미켈란젤로의 격한 성질을 통해 그의 천재성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위대하기에는 지나치게 안락을 좋아했다. 그를 이렇게 가혹하게 평가하기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붕괴

 

19장 지식인의 반란 1300~1534

245 어떤 세대든지 오직 적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경제적 고민에서 벗어나, 조상이나 주변의 사고방식 대신 자신만의 사고를 펼칠 여가와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가는 또한 모든 시대에 소수의 남자와 여자들이 두뇌의 힘으로, 아니면 태생이나 상황의 이점으로, 미신과 신비주의와 경박한 믿음에서 벗어나 그것의 무한한 무지를 의식하고서 지식과 친절함을 갖춘 지성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만으로도 기쁘게 여긴다.

 

246 마키아벨리는 종교에 대해 그토록 회의적이었으면서도 "공기 중에 정령들이 득실거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위대한 일들은 기적, 예언, 계시, 하늘의 표지 등을 통해 미리 예고된다는 믿음을 가졋다. 피렌쩨 사람들은 자기들이 숨쉬는 공기가 자기들을 비할바 없이 영리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지만, 모든 중요한 일들은 토요일에 일어난다고 여겼으며, 또 어떤 거리를 통과해서 전쟁에 나가는 것이 확실한 불운이라고 여겼다.

 

250 교회의 반대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미신이 과학의 발전을 늦추었다. 출판물의 검열은 트리엔트 공의회에 뒤이어 반종교 개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중대한 장애가 되지 않았다.

 

251 이렇듯 밑에는 미신, 위에는 자유주의가 판치는 분위기에서 과학은 베살리우스가 나오기 이전 200년 동안 그저 평범한 발전을 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미술, 인문학, 시 등의 분야로 후원과 명예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혹은 지적 생활에서 과학적 방법과 사유에 대한 명백한 요청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같은 사람은 광범위한 우주적 전망을 갖고, 또 열성적인 호기심으로 10개 이상의 과학 분야를 건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큰 실험실도 없었고, 해부학은 이제 막 시작 단계였으며, 생물학이나 의학을 도와줄 현미경도 없고, 별들을 확대해 주거나 달을 자세히 관찰하도록 해 줄 망원경도 없었다. 고대 문헌의 발견은 고대를 이상화하는 회의적 에피쿠로스주의를 더욱 자극하고, 미래의 틀을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과학 탐구를 위해 스토아적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르네상스는 미술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고, 작은 부분을 문학에, 철학에는 아주 조금, 그리고 과학에는 가장 조금 영혼을 바쳤다. 이런 의미에서 르네상스에는 페리클레스와 에스킬로스로부터 스토아주의자인 제논과 천문학가 아리스타르코스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 전성 시대의 다양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è 자금의 풍요가 반드시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과학적 사고에 대한 요구는 어떤 시대에 이루어지는가?

è 과학이 순수 예술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과학의 <순수예술로서의 아름다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은 것일까? 그 기원을 서양사에서는 그리스/로마 시대로 잡을까 했는데왜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를 답습하고 더 발전시켜 나가면서 과학의 업적에는 소홀하였는가?

 

253 가장 번창한 과학은 의학이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식욕 빼고는 무엇이든 다 희생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255 돌팔이 의사들이 여전히 수가 많았지만 의학적 치료는 더욱 조심스럽게 법으로 통제되었다. 의학 학위 없이 의료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벌금이 부과되었다. 이 경우 학위란 4년 간의 의학부 과정을 뜻했다. 어떤 의사도 동료와 상의하지 않고 중병을 진단해서는 안 되었다. 베네찌아 법은 의사와 외과 의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임상 기록을 교환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적어도 1년에 한 번 해부학 과정에 참석해서 지식을 혁신하도록 했다. 의학부를 졸업하는 학생은 환자의 질병을 절대로 질질 끌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처방을 제조하는 일을 감독할 것이며, 이 처방전에 따라 약을 짓는 약제사가 받는 요금의 일부를 받지 않을 것을 맹세해야만 했다. 같은 법률은(베네찌아, 1368) 처방전에 따라 약을 짓는 약제사의 요금을 10스쿠디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은 가치를 추정할 수 없는 동전이다. 특수한 계약에 따라, 병이 나을 경우에만 의료비를 지불하기로 한 사례들도 있다.

è 현대의 프로토콜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è 제약사의 리베이트를 금지하는 조항이 르네상스 시절에도 있었다니

 

è 그러나 항상 결과론적 해석이라는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60 '매독'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에서 가장 다양하면서도 가장 성실한 사람의 하나인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에 의해 처음으로 쓰였다. 그는 처음에 출발이 좋았다. 당시 이미 탁월한 의사들을 배출했던 명문가의 아들로 베로나에서 태어났다. 파도바에서 그는 모든 것을 다 공부했다. 코페르니쿠스와는 함께 공부했고, 폼포나찌와 아킬리니는 그에게 철학과 해부학을 가르쳐 주었다. 스물네 살에 그는 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그만두고 과학, 특히 의학 탐구에 헌신했고, 또 고전 문헌 연구를 좋아했다.

è 쫌 부러운 삶. 당시에도 의사를 배출한 가문이 명문가 가문이었던 모양이다.

 

 

269 그가 빠져들었던 이런 논쟁들이 그를 지치게 하고, 그의 건강을 망치는 데 일조를 했다. 그는 이런저런 병으로 고생하다가 마침내 죽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힘든 자살 방식을 선택했은이 굶어 죽기로 한 것이다. 온갖 설득과 위협을 물리치고, 심지어는 강제에도 맞서 먹기와 말하기를 거부했다. 7일간을 이렇게 보내고 나서 그는 죽을 권리를 얻으려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느끼고 이제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고 여겼다. "나는 기쁘게 떠난다." 그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모든 죽어야 할 존재들이 가는 곳으로."라는 대답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음식을 먹도록 마지막 권고를 했지만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274 나폴레옹이 괴테를 만나기를 열망했듯이, 카를 5세는 볼로냐에서 마침내 귀치아르디니와 만나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귀족들과 장군들은 모두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귀족은 한 시간 안에 100명이라도 만들 수 있지만 이런 역사가는 20년이 걸려도 만들 수 없다."

 

278 마키아벨리의 지적 발전에서 전환점은 소데리니 주교의 보조자로 당시 우르비노에 있던 체사레 보르지아에게 파견된 일이었다(1502). 직접 보고를 위해 피렌쩨로 불려왔다가 아내를 얻음으로써 그는 세상에 태어난 일을 축하했다. 10월에 다시 체사레에게 급파되어 이몰라에서 합류했다 .이어서 세니갈리아에 도착해서 마침 보르지아가 자신에 맞서 음모를 꾸민 남자들을 성공적으로 함정에 빠뜨려서 목 졸라 죽이거나 가두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일들은 이탈리아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 탁월한 괴물을 직접 만난 마키아벨리에게 이것은 철학에서의 교훈이 되었다. 사상의 사람이 행동의 사람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경의를 표했다. 자신이 분석적/이론적 사색에서 위풍당당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야 할 거리를 깨닫자 젊은 외교관의 영혼에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자기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인 남자가, 2년 만에 12명의 폭군을 물리치고, 12개의 도시에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를 시대의 유성으로 만든 남자가 여기 있었다. 말을 그토록 아끼는 이 젊은이 앞에서 말이란 얼마나 허약하게 보는 것인가! 이 순간부터 체사레 보르지아는 마키아벨리 철학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니체 철학의 주인공이 된 것과 같은 일이다. 권력에의 의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존재에게서 선약을 넘어선 도덕성, 초인의 모델이 나타난 것이다.

è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남고 체사레는 역사에서만 겨우 살아남았다. 아이러니로군. 체사레는 마키아벨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284 희곡으로 눈길을 돌려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무대에서 아주 뛰어난 희극 [만드라골라]를 섰다. 프롤로그는 비평가들을 향한 새로운 도전을 담고 있다. … 이 희곡은 놀라울 정도로 르네상스 도덕성을 보여 준다.  그는 어떤 여자라도 임신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 약을 먹은 다음 그녀와 동침한 최초의 남자는 머지 않아 죽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치명적인 모험을 자신이 감수하겠다고 제안한다. … 루크레찌아는 마침내 굴복하고 약을 마시고 칼리마코와 동침하고 임신한다.

è 임신이 약 때문이 아니라 남자의 변화(불임인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 기인함

è 머지 않아 죽게 된다. 인간의 여생은 100년이 안됨. 이 시간 역시 "머지 않은 시간"

엄청난 말장난이군.

 

289 누구든 국가를 창설하고 국가에 법을 부여하려는 사람은 모든 인간이 악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악한 본성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사실로 여기고 출발해야 한다. 그들의 악한 본성이 한동안 감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하며, 시간이반드시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고야 만다. … 얻고자 한느 소망은 실로 대단히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것이며, 인간은 할 수 있을 때마다 언제나 얻으려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들이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한다.

 

292 마키아벨리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신뢰성이 없음에 대해서는 신경을 ㅇ쓰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초자연적인 믿음의 체계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당히 뱃심 좋게 받아들였다. 그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거부한 부분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윤리, 선함과 온화함, 겸손, 무저항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그리스도교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비난한 부분이었다. 또 국가가 그 시민들과 똑같이 동일한 도덕적 규범에 묶여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이었다. 그릐 입장에서 보면 그는 국민이나 국가의 안전이 최고법이라는 원칙에 근거한 로마의 윤리를 더 좋아했다. "우리 나라의 안녕이라는 절대적 문제가 나타나는 곳에서 우리는 정의나 불의, 자비심이나 잔인성, 찬양이나 불명예 등을 생각할 수는 없다. 이런 모든 것을 다 옆으로 제치고 우리는 민족의 생존과 자유를 보호해 줄 그 어떤 노선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도덕성이란, 집단적 질서, 통합, 힘 등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행동의 규범이다. 정부가 국가를 방어하면서 국가가 국민에게 주입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 규범들에 의해 스스로도 제한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 그 의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외교관은 국민의 도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 "행동이 그를 고발한다면 결과가 그를 용서해 주게 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선량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애쓰면서 어떤 방식을 취하든지 그것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저지르는 기만, 잔인함, 범죄 등은 "명예로운 기만"이요, "영광스러운 범죄"이다. 그래서 로물루스가 형제를 죽인 일은 정당하다. 이제 막 생겨난 정부는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기갈기 찢기고 말 것이다. 보편적으로 합의된 '자연적인 법칙'이나 '권리'란 없다. 정치적 수완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정치란 도덕성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어야 한다.

è 동의한다. 정치가들을 욕하기야 하겠지만 이 역시 국민들의 정치적 행동일 뿐. 국민들도 결과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결과에는 만족한다.

è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하에서 타종교에 대한 배척과 정복이 무수히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쟁 사상자를 낸 원인이 바로 그리스도교 아니던가?

 

297 어느 정도 대중의 지원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사랑 없이 두려움만 얻거나, 아니면 두려움 없이 사랑을 얻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는 사랑을 버려야 한다.

 

303 마키아벨리의 솔직함에는 어떤 자극의 요소가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다른 어디서보다도 생생하게, 거의 어떤 철학자도 감히 토론하려고 하지 않았던 질문에 마주치게 된다. 곧 정치가의 수오나은 도덕성에 묶여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성이란 그것을 가르치고 강요할 준비를 갖춘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들 사이의 도덕성은 국제법을 지켜야 한다는 대중의 의견과 물리적 힘을 갖춘 국제 기구가 구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 각국의 국민들은 밀림의 맹수들과 같다. 각국의 정부가 어떤 원칙을 고백하든 그들이 실제로 행하는 것은 [군주론]의 그것이 될 것이다.

è 겁나 명쾌하군. 존경스럽다.

è 결국 도덕성은 추구되어야 하는데, 추구할만한 상황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마키아벨리즘은 옹호될 수 있을까? 필요악으로써?

è 진실의 껍질은 여러겹이라서, 모든 말이 옳을 수 있다. 늘 경계하자. 진실의 창조성을 잊지 말고 늘 다른 관점의 진실을 보려고 노력하자.

 

20장 풀어진 도덕 1300~1534

309 인문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비판하는 성직자 계층과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물론 눈부신 예외들이 있어서 지적 해방과 점잖은 태도를 함께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암브로지오 트라베르사리, 비토리노 다 펠트레, 마르실리오 피치노, 알두스 마누티우스 등. 그러나 그리스 로마 문학을 되살려 낸 소규모 지식인들 중에 압도적 다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이교도들처럼 살았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녔기에 뿌리가 뽑혔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월계관과 사례비를 구했고,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자와 그 마누라만큼이나 돈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천재성, 수입, 외모, 옷차림 등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말투가 거칠고,

싸울 때는 졸렬하고 치사했으며, 우정은 신뢰가 없고, 사랑은 덧없는 것이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아리오스토는 도덕적으로 오염될까 겁나서 아들을 인문주의자 선생에게 맡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마 운율을 갖춘 외설로 양념되어 있는 자신의 [분노한 오를란도]를 읽는 일을 아들에게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발라, 포지오, 베카델리, 필렐포 등은 도덕적으로 느슨한 생활로, 윤리와 문명의 기본적인 문제 하나를 요약해 주었다. 곧 도덕적 규범이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상벌이 필요한 것일까? 내생에 대한 믿음, 혹은 도덕적 규범이 신에게서 나왔다는 믿음이 꼭 필요한 것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è 도덕이란 무엇일까? 도덕은 주로 이타주의에 기반한 양심에서 시작하지. 벌은 마음의 고통이 곧 벌이다.

è 반성하게 하는 문구. 색깔표시.

 

320 사보나롤라 시대에 지참금이 없어서 신랑감을 찾지 못한 소녀들이 많았다. 피렌쩨는 일종의 국립 지참금 보험, 혹은 일종의 소녀재단을 만들어서 결혼지참금을 내주고, 그녀들은 매년 일정 금액의 수수료를 지불했다.

 

320 결혼을 한 다음에도 여자들은 흔히 자시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지녔다. 그래서 로렌쪼의 아내는 계속해서 클라리체 오르시니 부인이라고 불렸다.

 

324 여성의 출현은 이 시대의 가장 밝은 측면의 하나이다. 유럽 역사에서 여성의 지위는 보통 부가 늘어나면서 함께 높아지곤 했다.

 

333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충분히 어려서 자신의 가르침과 교육에 순종하는 아내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 초기에 아내에게 어머니의 의무와 가정 경영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337 때로 잔인성은 집단적으로 전염성을 지녔다. 1502년에 아레쪼에서 강압적인 피렌쩨 위원회에 맞서 폭동이 일어났다. 아레쪼에 있던 피렌쩨 살마 수백 명이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가족 전체가 전멸되었다. 어떤 희생자는 옷을 벗기고 매달린 채로 불붙인 횃불이 엉덩이 사이에 꽂혔다. .. 폭력과 잔인성과 탐욕의 이야기들이 미신만큼이나 인기를 끌었다.

 

347 이탈리아의 도덕성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이탈리아 희극이 형성되었다는 겅슨 불행한 일이었다. 비비에나의 [칼란드라]와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 같은 연극들이 이탈리아 상류층의 취향을 만족시켰다는 것, 심지어는 세련된 우르비노 같은 곳에서도 그랬다는 것,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교황들 앞에서도 공연될 수 있었다는 것은, 지적인 자유가 도덕적 타락과 결합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는 부분이다.

è 항상 우리는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 선을 어디까지로 두어야 하지?

 

352 이러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르네상스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뒤진 예술 분야였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가면서 교황청 수입이 없었고, 14세기 전제 군주의 궁정들이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탓에 이탈리아에는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위한 돈과 정신이 부족했다.

 

357 르네상스 음악의 위대한 특징은 이론이 아니며 기술적 발전도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의 세속화였다.

 

 

21장 정치적 붕괴 1494~1534

 

367 이때까지 이탈리아 전쟁은 국민을 고용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목숨보다는 경작지를 더 괴롭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탈리아 전체가 약탈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 전쟁의 해에 롬바르디아 평원이 얼마나 비옥한지 보았다. 그들은 이후로 롬바르디아를 거듭 침입했다. 프랑스 군대는 이탈리아가 갈래갈래 찢겨 정복자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45373 베네찌아는 홀로 이 압도적인 동맹군에 맞섰다는 이유만으로도 동정을 얻을 만한다. 그리고 이 도시의 충성스러운 부자들과 징집된 가난한 사람들이 똑같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긴 태도로 피루스의 승리에 이를 때까지 싸웠기 때문에도 그렇다.

 

385 클레멘스는 우유부단함을 정책을 삼았다. 생각을 극단까지 계속하고 그것이 행동을 대신하는 것이라 여겼다. 한 가지 결단을 내려야 할 이유를 백 가지나 보았지만 그에 반대할 이유도 백 가지나 보았다. 마치 부리단의 나귀가 교황의 옥좌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394 책들, 문서고, 미술품의 파괴는 엄청났다. 전혀 기율이 없는 폭도 떼거리의 지휘권을 이어받은 오랑쥬 공 필리베르가 바티칸 도서관을 자신의 사령부로 삼아서 이곳만은 보호했다. 그러나 많은 수도원과 개인 도서관들은 불꽃이 되어 날아가고 많은 소중한 문서들이 사라졌다. 로마 대학은 심하게 약탈당하고 직원들은 흩어졌다.

è 왜 이런 곳까지 파괴하지?

 

401 교황이 피렌쩨를 다룬 방식은 메디치 가문의 타락을 확인해 준 일이었다. 동시에 로마를 복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 가문을 위대하게 만든 행정적 천재성과 미적인 감식안의 불꽃을 다시 보여 주었다.

 

413 역사가 파스토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황들의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겨회에는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종말

 

22장 베네찌아의 황혼 1534~1576

 

419 야코포 단토이노 디 야코포 타티는 피렌쩨에서 태어났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학교 가기를 싫어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런 성향을 격려했다. 그를 상인으로 만들기를 원하던 아버지의 뜻은 꺾였다. 그래서 야코포는 조각가인 안드레아 콘투치 디 몬테 산 사비노(이름이 다 왜 이래) 밑의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는 젊은이를 몹시 사랑해서 그를 잘 가르쳤고, 야코포는 그를 아버지처럼 여기다가 나중에는 스승의 별칭인 산보니로르 자신의 성으로 받아들였다.

 

429 그의 풍자문은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들의 힘은 대부분 그 시대에 너무 밀접하게 연관된 지역의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기에 지속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438 아우그스부르크에서 돌아온 다음 티찌아노는 이제 여행응ㄴ 충분하다고 SMRRUTEK. 그는 일흔 다섯살이었고 분명히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아마 너무 바빴던 것이 그의 장수의 비결이었을 것이다. 연속적으로 그림에 빠져서 그는 죽는 것을 잊었다.

 

442 어린 시적 불확실성의 기억이 그를 마지막까지 욕심 많은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이제는 부자였다.

 

454 앙리는 이 초상화를 아주 좋아해서 화가에게 기사 작위를 주겠노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것을 면제해 달라고 빌었다.

 

466 기술적인 완성은 이미 성췾되었다. 최고의 높이들은 이미 측정되었다. 이제는 느린 하강을 거쳐 18세기에 티에폴로가 장식회화에서 베로네제와 경쟁을 하고, 골도니가 공화국이 사라지기 전에 최후의 광채의 폭발 속에서 베네찌아의 아리스토파네스가 된다.

 

23장 르네상스가 이지러지다 1534~1576

469 시칠리아는 비적들의 소굴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유일한 위안은 카를 5세에게 정복당한 결과 터키 사람들의 약탈을 면제받았다는 정도였다.

 

474 노예 제도를 주요 경제 수단으로 복구한 것도 이 시대의 일이다. 교황 파울루스 3세가 1535년에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했을 때 교황은 영국 병사를 잡기만 하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노예로 삼는 것이 합법이라고 선언했다.

 

488 기울어 가는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젊은 국가를 다스리는 것보다 수비다. 기운이 쇠약해진 생명력은 복종을 환영하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에 의해 다시 패배한 피렌쩨는 피곤한 채로 클레멘스 7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498 그곳에 자리를 잡자마자 그는 싸우다가 어떤 젊은이를 찔렀다. 그를 죽였다고 믿고는 다시 로마로 도망쳤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을 상세히 살펴보고 빌라 키지와 바티칸에 있는 라파엘로의 그림들도 탐구했다.

è 죄인의 몸으로 도망쳐서 그림을 보는 기분은 어땠을까? 죄책감과 동시에 초인의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삶의 끝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끝단의 떨림을 느꼈을 것이다.

 

499 (첼리니)의 신학은 그의 도덕성만큼이나 독립적이었다. 언제나 옳았기 때문에 (한번만 빼고) 그는 신이 자기편이고, 자기 팔에 힘을 더해 주신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때 도와달라고 신에게 기도했고, 자신의 성공에 대해 그분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애인 안젤리카를 찾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에 신이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악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칠리아 마법사가 한밤중에 황량한 콜로세움으로 데려가서 바닥에 마법의 원을 그리고 불을 피우고 불꽃에 향수를 흩뿌렸다. 그리고 히브리, 그리스, 라틴어로 악령들을 불렀다. 첼리니는 눈앞에 수백 가지 환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자기가 다시 빠른 시일 안에 안젤리카와 재결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믿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밤새도록 그는 악령들을 보았다.

 

511 최후의 심판

레오나르도가 그를 가리켜 단테에게서 배운 사람이라 불렀던 우울한 예술가가 다시금 지옥의 소금물에 자신을 흠뻑 적시고는 그 공포를 벽으로 옮겨 노았고, 세월이 흘러도 미래의 교황들은 미사를 드릴 때면 자기들 앞에 피할 길 없이 놓인 최후의 심판을 향해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근까지 인간의 몸을 비웃고 헐뜯었던 이 종교의 수도에서, 그는 붓을 들었으나 조각가로서 수없이 많은 상태에 자세를 취한 몸들을 그렸다. 지옥의 고통에 의해 뒤틀리고 일그러진 몸, 죽은 사람들이 나른하지만 흥분해서 올라오는 모습, 운명적인 소환을 알리는 천사들의 부풀어 오른 몸,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 주고 있지만, 거인의 어깨와 헤라클레스의 팔을 지닌 채, 하느님의 계율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지옥으로 집어던지는 그 강인한 몸.

 

519 미켈란젤로는 러스킨이 말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정의를 완전히 충족시켰다. "작품 전체에 가장 위대한 발상을 가장 많은 숫자로 구현한 사람", "정신의 가장 높은 능력을 행하고 드높인" 사람이었다.

 

마치는 글

 

무엇보다도 르네상스는 물질적으로 똑똑한 소수가 단순한 다수를 경제적으로 착취한 바탕 위에 자리 잡았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의 부는 수많은 유럽 가정의 헌금에서 온 것이었다.

 

르네상스 예술은 (고발을 계속하자면) 아름답지만 고귀한 적은 드물다. 세부적으로는 고딕 예술을 능가하지만 그 장엄함, 통일성, 전체적 효과에서는 고딕만 못하다.

è 그러면 르네상스의 의의는 무엇이지?

 

529 18세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은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다시 태어났다. 볼테르와 기본에서부터 괴테와 하이네에 이르기까지, 위고와 플로베르, 텐느와 아나톨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이 정신은 계속 전해졌다. 혁명과 반혁명을 통하여, 진보와 반동을 통하여, 또한 전쟁에도 살아남아서 끈질기게 평화를 귀한 것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도처에는, 정신적 자유, 미적 감수성, 친절하고 공감이 가는 이해력이라는 유산에 양분을 주고 그것에 따라 사는 도회지의 튼튼한 정신들이 있다. 바로 정신의 나라 친구들이다. 삶의 비극을 용서하고 감각가 정신과 영혼의 환희를 포옹하는 사람들. 미움의 찬가 한가운데서, 그리고 대포의 굉음을 넘어 자기들의 가슴에 언제나 울리는 르네상스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다.

 

 

 

 

 

 

 

 

 

 

 

 

 

 

 

 

 

내가 저자라면

 

원래 비평은 건설적이어야 하지만 오늘은 조금 솔직하게 써보겠다.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듯 썼으면서 동시에 방대한 정보량을 담아낸 저술 - 이것이 책의 객관적 총평인데 사실 나는 동감하기 힘들었다.

 

전에도 이야기 하였듯이 여지없이 "(him, he)"가 연발되어 어느 순간에는 이해하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읽기 위한 읽기를 하고 있다. 특히 무엇이 중요한 내용인지 일목 요연하게 짚어주는 맥이 없다. 책의 맥이라고는 자잘하게 분절되어 있는 소제목의 미덕 이외에는 별반 찾을 수 없다. 서술형의 매력에 너무 심취한 탓일까?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핵심 키워드를 인터넷에서 뒤져보면 윌 듀런트의 글보다 훨씬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서술형이어서 재밌기라도 한가? 글쎄, 소설과 같은 재미 역시 생각하기 어렵다. 이 책은 굉장히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도 콤팩트하게. 마치 시험 정리 요약본을 보는 기분이다. 마치 한 때 유행했던 어설픈 서술형의 교과 참고서와 같은 느낌이다. 윌 듀런트는 확실히 타고난 이야기꾼은 아니다. 이 책은 마치 백과사전와 이야기책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주저앉은 느낌이다.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꾸역꾸역 읽고 있으면 당연히 재미가 없을 것이다. 듀런트가 굳이 재미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할 말은 없다.

 

인터넷에서 키워드만 치면 모든 정보가 쏟아지는 이 세기에 문명 이야기의 의의는 아무래도 철학적 해석에 있을 것이다. 듀런트가 르네상스를 어떻게 정의하고 르네상스의 거물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정보로서의 가치 이상에 획을 긋게 한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르네상스가 무엇인지 솔직히 감이 잘 안온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상식 이상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게 되진 않는다. 내가 방만한 독자였기 때문일까? 숲을 종주했는데 숲을 알 수 없다. 단지 느낌만 있을 뿐, 이 숲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 행글라이딩이 하고 싶어진다.

 

전집 11권의 분량으로 가격의 문제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진도판이 실리지 않은 것은 큰 결점이다. 가장 최선의 책을 만든다는 목표 하에 보자면, 그림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해당 그림이 나와주어야 완벽한 설명이라고 볼만하다. 독자가 글만 봐서 "그런 그림이 있다더라."라고 아는 것과 "이 그림이 바로 그 그림이다."라고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는 풍문이고, 후자는 정말로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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