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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3일 08시 30분 등록

문명이야기 - 르네상스 5-2

 

-. 윌 듀런트 지음

-. 안인희 옮김, 민음사, 2011

  

 

■ 저자에 대하여

 

 

1. 탄생과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1985 ~ 1907)

188511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North Adams)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캐나다인인 Joseph Durant Mary Allard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저지에 있는 가톨릭 교구의 부속학교에서 선생님 수녀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종교의 열정이 강한 그였기에 그가 성직자가 되는 것에 대한 어떤 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00년 그는 성 베드로 학교에 입학을 하고, 1903년에 학교의 도서관에서 다양한 철학자와 무신론자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확고하게 가졌던 종교에 대한 신념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종교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2. 스피노자의 만남과 평생 반려자와의 결혼(1907 ~ 1925)

1907년에 졸업을 하고 뉴저지의 South Orange의 세튼 홀 대학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와 기하학 등을 가르쳤다.(1907~1911) 1909년 그가 속해 있던 비밀조직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 마르크스를 통합하려는 연구를 시작한다. 이때 스피노자를 만나면서 그의 삶에 철학자로서의 길이 열렸다. 이후 그는 이 평온한 신학교에서 뉴욕의 가장 진보적인 자유주의 교육 실험 학교인 페레르 학교로 자리를 옮기는데(1911~1913), 이 학교에서 1898 5 10일 러시아에서 태어난 '아이다 카우프만'이라는 제자와 사랑에 빠져 교직을 사임하고, 191313살 연하인 그녀와 결혼한다. 이후 4년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1917년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1914년부터는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 역사와 문학, 철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이 강의는 이후 13년간 주 2회씩 계속 이어졌다.

 

 

3. '철학이야기'의 성공으로 '문명이야기'을 쓰다.(1926~1957)

1926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철학 이야기'의 성공으로 1년 후 교직을 떠날 여력이 생긴 듀런트 부부는 가끔씩의 평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업 시간을(매일 8시간에서 14시간) <문명이야기(The Story of Civillization)에 바쳤다. 보다 철저한 준비를 위해 1930년에는 이집트와 근동, 인도, 중국, 일본 등지를 직접 탐방하고 1932년에 다시 일본과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폴란드 등지를 방문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문명 이야기> 시리즈의 제1 <동양 문명>(1935)이다. 이후 몇 번인가의 유럽 방문을 거쳐 제2 <그리스 문명>(1939)과 제3 <카이사르와 그리스도>(1944)가 준비된다. 1948, 터키와 이라크, 이란, 이집트, 유럽 등지에서 체류하며 제4 <신앙의 시대>(1950)를 저술하고, 1951년에는 제5 <르네상스>(1953)를 출간했으며, 1954년부터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구에 대한 추가 연구를 시작해 종교 개혁을 새롭게 조망한 제6 <종교 개혁>(1957)을 발표했다.

 

 

4. '문명이야기'의 완결은 공동저자인 아내의 헌신으로 가능했다.(19~1957)

<문명이야기>을 쓰는데 있어 듀런트 여사의 역할을 매년 그 비중이 커져 갔으며, 7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1961)에서는 그 기여도가 너무나 커 책 표지에 두 사람의 이름이 공저자로 나란히 오르게 된다. <루이 14세의시대>(1963) <볼테르의 시대>(1965), <루소의 혁명>(1968년에 퓰리처상 수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5년 제11 <나폴레옹의 시대>(의 출간을 끝으로 50년에 걸친 이 대작은 완결된다. 에이리얼 류런트(Ariel Durent) 1981 10 25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윌 듀런트도 그로부터 13일 후 11 7일에 96세를 일기로 그녀를 뒤따랐다.

 

 

5. 저자에 대한 평가

윌 듀런트는 50년에 걸쳐 인류의 문명사를 관찰한 열한 권의 저작인 <문명이야기>을 완성했다. 인류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는 그의 책을 통해서 경이로운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권력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희로애락에서 역사적인 정치가, 사상가, 예술가, 시인들이 가지는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적인 약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와 그렇지 않고 휩쓸려서 고통을 겪게 되는 어리석음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윌 듀런트의 곁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 에이리얼이 있었다. 이들은 1913년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거의 같은 시기에 죽기까지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삶의 동반자였고, 이상적인 동료관계였다. 이러한 행복한 결혼생활이 수 많은 저작을 만들어낸 밑거름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인류의 어두운 역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그의 글은 냉철함과 긍정적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나 또한 나의 아내와 함께 공동의 관심사를 가진 일을 평생에 걸쳐 함께 하고 싶다. 그리하여 윌 듀런트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고 마음이 솟아난다.

 

 

6. 출저

역사 속의 영웅들(윌듀런트 지음, 안인희 옮김, 황금가지, 2002)

이탈리아 문학의 연구(한형곤 지음,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9)

http://cinchmina.tistory.com/entry/16-Will-DurantJoseph

사진출저 : 타임지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 이야기

 

 

 

 

■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

 

 

14장 교회의 위기(1378~1447)

 

12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성 카타리나가 불같은 교황에게 경고를 보냈다. “온건함과 ….. 선의와 평화로운 마음으로 할 일을 하십시오. 과도함은 건설보다 파괴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위해서 당신의 천성에 들어 있는 성급함을 조금 자제하십시오.”

 

15장 르네상스가 로마를 사롭잡다(1447~1492)

 

30 국가도 교회도 인쇄술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거나 널리 퍼지지 않은 시대에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니콜라스 5세는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인쇄하기 7년 전, 인쇄술이 로마에 도착하기 30년 전,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첫 출판물이 나오기 58년 전에 교황이 되었다. 민주주의란, 지성, 안전, 평화각 널리 퍼지면서 생긴 사치품이다.

 

33 니콜라스 5세 치하에서 교회는 인문주의를 향한 팔을 활짝 벌렸으며, 교회 자신이 새로운 문학과 예술의 편에, 아예 그 선두에 자리를 잡았다. 즐거운 백 년 동안(1447~1534)교회는 이탈리아의 정신에 아주 넉넉한 자유를 주었고 필렐포는 이를 믿을 수 없는 자유라고 말했다. 또 이탈리아 예술에 그토록 대단한 후원과 기화와 자극을 주어 로마는 곧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 하나를 즐겼다.

 

35 그리고 이탈리아 유명한 인문주의자를 거의 모두 로마로 불러들였다. 과장을 좋아하는 베스파시아노는 이렇게 썼다. “세계의 모든 학자들이 니콜라스 교황의 시대에 로마로 왔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일부는 그의 요구를 받고 왔다.”

 

36 이 번역들에 대해 필렐포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는 멸망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이민을 왔다. 이 지역은 어차피 옛날에 대 그리스라고 불렸던 곳이다.” 마네티는, 니콜라스가 교황으로 재임하던 8년동안 그 이전의 500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보다 더 많은 그리스 작가들이 번역되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확한 말이기보다는 오히려 감사의 표현이었다.

 

39 터키 군이 5만 명의 그리스도교도 시체를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교 사원으로 만들었다는 소식(1453)이 오자 교황으로서 자신의 모든 영광이 아무런 소용없는 공허함으로 여겨졌다. 그는 유럽 국가들에게 함락된 동방 그리스도교의 수도를 도로 찾기 위해 십자군에 참가하라고 호소했다.

 

43 그는 탐욕스러운 관심으로 도시와 시골 풍경들만이 아니라, 산업, 생산물, 정치적 상황, , 매너, 도덕성 등까지도 서술했다. 페트라르카 이후로 어떤 이탈리아 사람도 시골 생활에 대해 이토록 다정하게 글을 쓴 적이 없다.

 

43 그는 자신을 가리켜 많은 것을 보려는 열망에 빠진사람이라고 표현 했다. “구두쇠는 많은 돈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을 그는 자주 하고 잇다. 가벼운 펜대를 역사 분야로 돌려서 유명한 동시대 사람들의 짧은 전기, 프리드리히 3세의 전기와 후스 전쟁 이야기, 그리고 인류사의 윤곽을 썼다.

 

44 그는 교황으로서 시간을 문학적 작업에 돌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한다. “나는 내 의무에서 시간을 빼내지 않고 잠자는 시간을 글 쓰는 데로 돌렸다. 그리고 노년의 시간에 휴식을 취할 시간을 훔쳐서 내가 지금 기억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후세를 위해 적어 두고자 한다.”

 

45 교황으로서 그는 검소하고 단순하게 살았다. 바티간에서 그의 살림 비용은 최저로 기록되었다. 의무가 허용하는 한 그는 시골의 교회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이 아니라 정직하고 겸손한 시골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이따금 그는 나무 그늘 아래나 올리브 숲, 아니면 서늘한 샘가나 냇가에서 추기경 회의를 열거나 외국 사절을 맞아들였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자신의 이름과 운율을 맞추어) ”실바룸 아마토르(숲을 사랑하는 사람)라 불렸다.

 

51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면 지상의 어떤 왕자도 당신의 영광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의 권한을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당신이 그리스와 동방의 황제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폭력으로 차지하여 불의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합법적으로 당신의 소유물이 될 것입니다….. , 얼마나 완벽한 평화가 올 것인가! 시인들이 노래하는 아우구스투스 대제의 황금시대가 돌아올 것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우리 편이 된다면 동방 세계 전체가 머지 않아 그리스도교도가 되겠지요. 하나의 의지가 온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며, 이 의지는 바로 당신의 의지인 것이지요!

 

53 위대한 남자들의 생애를 살피다 보면 한 남자의 성격이 죽은 다음에 형성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통치자가 자신에 대해 기록하는 사람들을 잘 대우해 주면 그들은 그를 사후의 거룩함으로 들어 올려 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통치자가 그들을 괴롭히면 그들은 그의 시신을 악의의 꼬챙이에 꿰어 태우거나 구워서 잉크병에 있는 가장 더러운 악명으로 사후의 이름을 더럽힌다. 파울루스 2세는 플라티나와 사이가 나빴다. 플라티나는 파울루스에 대한 전기를 썼는데, 이 교황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가 이 전기를 토대로 삼고 있다. 이 전기는 그를 허영과 화려함과 탐욕의 괴물 같은 모습으로 후세에 전해 주고 있다.

 

54 만일 선출되면 터키에 맞서 전쟁을 할 것이고, 세계공의회를 소집할 것이고, 또 추기경의 수를 24명으로 제한하고, 그들 중에 교황 친척의 수를 1명으로 제한할 것이며, 서른 살이 안 된 사람은 절대 추기경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고, 모든 중요한 일에 대해 추기경들과 상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선출되자 오랜 전통에 따라, 권력을 지니게 된 지금, 합의 각서 이행을 거부했다. 대신 추기경들의 연간 수입을 최소 4000플로린(10만 달러?)으로 올려 주어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57~58 혼란에 둘러싸이고, 낯선 사람들에 대한 불신감에 가득 차고, 가족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식스투스 4세교황은 탐욕스러운 조카들을 권력과 수입이 많은 자리에 앉혔다. 그가 가장 사랑한 사람들이 가장 고약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자리의 이익을 챙겨서 이탈리아 전체가 그들을 경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 교황 시기의 주요한 재앙이었다.

 

62 그는 또한 로마 대학을 다시 조직하고, 파울루스 2세가 설립한 카피톨리니 박물관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것은 유럽 최초의 공공 박물관이다.

 

67 로마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적인 사면에서부터 교황직 자체까지도 말이다.

 

16장 보르지아 사람들 1492~1503

 

76 그러나 그는 풍자와 논쟁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허용했다. 도시 위트의 날카로운 말을 들으면 그는 웃어넘겼다. 아들 체사레 부르지아가 그런 작자들에겐 기율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자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페라라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마는 자유도시입니다. 누구든 자기 좋을 대로 말하고 쓸 수가 있어요. 그들은 나에 대해 나쁜 말을 많이 하지만 난 마음 쓰지 않습니다.

 

78~79 페르디난드의 행복한 명상의 대가로 알렉산더는 그에게 두 개의 아메리카를 선물해 주었다. 콜럼버스는 알렉산더가 교황직에 오르고 나서 두 달 만에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 선물했다. 포르투갈은 칼릭스투스 3세의 칙령(1479)에 따라 신세계가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칼릭스투스 칙령은 대서양 해안에 있는 모든 땅은 포르투갈의 것임을 확인해 준 것이었다. 스페인은 이 칙령이 오로지 대서양 동쪽의 해안들만을 뜻하는 것이라고 대들었다. 이 나라들이 거의 전쟁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 알렉산더는 두 개의 교령(1493 5 3일자와 4일자)을 내려서 스페인에는 서쪽에서 발견된 해안을, 포르투갈에는 동쪽 해안을 할당해 주었다. 그것은 남극에서 북극에 이르기까지 상사의 선을 그려서, 아조레스와 베르데 곶 제도 서편의 해안을 스페인의 동맹국으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두 경우 다 새로 발견된 섬들에 그리스도교도가 거주하지 않았을 것과 정복자들이 그곳의 새로운 주민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교황의 승인은 물론 칼로 이루어진 정복을 확인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반도의 세력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게 해 주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자기들이 그동안 살았던 땅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80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종교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수단일 뿐이다.

 

80~81 알렉산더는 굴복하고 바티칸으로 돌아와서, 샤를이 자기 앞에 세 번이나 무릎 꿇는 것을 즐기고, 또 그가 교황의 발에 키스하려는 것을 너그럽게 말리고, 왕에게서 프랑스의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알렉산더를 폐위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철회된 것이다.

 

83 귀치아르다니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교황들은 자식들을 조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83 쥴리아 파르네제는 그 아름다움이 특별했는데 금발머리로 특히 유명했다. 그녀가 이 머리를 풀면 그것은 발치까지 굽이쳐 흘러내렸고, 이것은 알렉산더보다 덜 정력적인 남자라도 온몸의 피를 흔들어 놓을 만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를 아름다운 여자라고 불렀다. 사누도는 그녀가 교황이 좋아하는 사람, 대단한 아름다움과 이해심을 가진, 품위있고 상냥한 젊은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88 알렉산더는 칼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그의 귀족 적들은 그의 또 다른 적인 율리우스 2세가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은 가운데 글의 전쟁에서 이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알렉산더의 이미지가 역사에 남았다.

 

90 성직 임명의 대가로 받는 돈이 없이 어떻게 교황청을 운영할 수입을 얻을 것이냐 하는 질문에 봉착하자 교황은 설득력 잇는 답변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91 피 냄새를 맡은 사냥개와 같은 힘으로 사냥하러 나갔다.

 

93~94 그의 반지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 있었다. “Fays ce que dois, advien que pourra.” , “어떤 일이 일어나든 네가 해야 할 바를 하라.”라는 말이다. 그이 검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에서 나온 두 가지 구절이 새겨 있었다. 한 면에는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가 새겨져 잇었고, 다른 면에는 “Aut Caesar aus nullus. 카이사르이거나 아무도 아니거나.”라는 글구였다.

 

97 1502 6 12일에 이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수석 엔지니어로 삼고서 체사레는 3차 정을 떠났다.

 

101 이 포위에서(어쩌면 다른 포위에서도)체사레 보르지아는 레오나르도의 전쟁 기계 일부를 사용했다. 그중 하나는 이동 가능한 탑을 이용하여 300명의 병사를 적군의 성벽 꼭대기로 올려 보내는 기계였다.

 

104~105 로마의 소문은 천천히 작용되는 독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의 기본 성분은 비소로서, 분말 형태의 비소를 음식이나 음료에 떨어뜨리면(심지어는 미사에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에도)인간이 그랬다고는 추적하기 어렵도록 천천히 죽음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107 알렉산더는 아들에게 경탄하고 아마도 두려워하기도 했겠지만 딸에 대해서는 그의 천성이 가진 온갖 감정적 깊이를 가지고 사랑했다.

 

107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 그녀는 사랑스러운 얼굴이라고 서술되었다.

 

115 속임 수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평생동안 다른 것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무도 나중에 깨뜨릴 약속을 그보다 더 강하게 맹세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일에 성공했다. 그가 세계의 이 부분을 그토록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7 그의 성격의 기본 원리는 극히 풍부한 자연성이다. 베네찌아 대사는 그를 가리켜 현세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어떤 도덕적인 경멸을 담은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정열과 감정을 통제할 줄을 모르는, 낙천적인 기질의 남자라는 의미였다. 이런 점은 통치자들과 정치가들이 사이에 많은 외교관 유형의 냉철한 이탈리아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 그들의 이해심은, 실제로는 자기 시대 대부분의 통치자들보다 더욱 인간적이었던 알렉산더에 대해 부당한 편견을 지니 것이었다. 과도한 현세성이 그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만들어냈다. 도덕적인 고려나 다른 어떤 종교적 개념들로 방해받지 않았기에 그는 나머지 다른 점에서는 절도가 있고 삼가는 사람이었는데도, 한 가지 종류의 강한 감각성을 드러냈다 조금 더 나아 보이는 가족 사랑이라는 겉모습을 뒤집어쓴 이 감각성으로 인해 그는 온갖 정의의 원칙들을 위반했다. 물론 여기서도, 그의 대리인 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성수(聖水)’만으로 이룰 수가 없는 것 중에서 어쩔 수 없는 것만을 행했을 뿐이다. 다른 한편 그의 친절함과 쾌할한 성격은 그를 통상적인 의미의 폭군이 되지 않도록 해 주었다. ….

국민의 물질적 번영을 염려하는 통치자라는 측면에서 그는 자기 시대 최고의 통치자들에 속한다. 실질적인 정치가로서 당시의 어떤 통치자와도 겨룰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이 통찰력은 정치적 도덕성의 결핍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의 통찰력은 정치적 도덕성의 결핍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는 한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 흐름을 예견하는 더 높은 지혜를 갖지 못했고, 또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17장 율리우스 2 1503~1513

 

125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를 10년 동안 전쟁과 소란 속으로 몰아넣고, 외국의 군대에서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고, 낡은 성 베드로 성당을 허물고 브라만테와 다른 100명의 미술가들을 로마로 데려오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찾아내어 격려하고 그들의 방향을 정해 준 사람,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온 세계에 새로운 성 베드로 성당과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그리고 바티칸의 방들을 선물해준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이다. “보라, 여기 한 남자가 있다!”

 

127 알렉산더는 외교관이 될 수 있었지만 율리우스는 그것이 극히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맞대 놓고 그들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는 사나움과 격함이라는 점에서 자주 한계를 넘어섰으며, “이런 잘못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커졌다.” 그의 언어처럼 그의 용기도 한계를 몰랐다. 병에 짓눌리고 전투로 부상을 당했다가도 그는 도로 회복되어 적들을 다시 기습하여 놀라게 했다.

 

128 마키아벨리는 대부분의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교황청의 세속적 권력에 반대하고 있었고, 왕처럼 군림하는 교황들에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리오니는 자신의 목숨을, 그리고 죽음 다음의 명성보다는 아마도 자신의 영혼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

 

137 이런 점에서 보면 자신들의 부를 개인적인 사치가 아니라 사원과 대성당들을 짓는 데 사용한 고대 그리스와 중세 유럽이 훨씬 훌륭한 정신이었다. 그런 건물들은 모두의 소유이고 자랑이고 영감이었으며, 사람들의 집이며 동시에 신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138 이 시기 건축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은 도나토 브라만테이다.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왔을 때 그는 이미 쉰여섯 살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유적지를 탐색하면서 그의 내면에서 고전 양식을 르네상스 건축에 적용하고 싶다는 젊은이의 열정이 불타올랐다.

 

153 이 벽화 「파르나쏘스」에서 아폴론은 신성한 산꼭대기에 몇 그루의 월계나무 아래 앉아 비올을 들고 소리 없는 소곡들을 켠다. 그의 오른편에 뮤즈는 아주 우아한 편안함으로 사랑스러운 젖가슴을 바로 옆의 벽에 잇는 성인들과 현자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호메로스는 눈먼 황홀감에 젖어 6우각 시들을 낭송하고 단테는 이들 여신들과 시인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화해할 길 없는 엄격함을 지니고 있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오스, 티불루스, 또 시간이 혼란스러운 다른 시인들, 곧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아리오스토, 산나짜로와 최근 이탈리아의 덜 중요한 목소리들도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젊은 화가는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준다.

 

157 율리우스가 사랑하던 화가이며 조각가, 성급한 기질과 무시무시한 성격, 그리고 정신의 힘과 깊이라는 면에서 그와 경쟁할 만한 사람, 인류의 기록에 남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슬픈 예술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158 1475 3 6일에 카프레제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와 마찬가지로 대천사에게서 이름을 따왔고, 4형제 중 둘째였다. 그는 세티냐노의 대리석 채석장 근처에서 유모의 젖을 먹었으므로 출생하면서 곧바로 조각의 먼지를 숨 쉬었던 셈이다. 그는 뒷날 자신이 유모의 젖과 함께 끌과 망치를 빨아들였다고 말했다.

 

158 소년은 기를란다요의 가르침에다가 자신이 피렌쩨 시내들 돌아다니면서 배운 것을 덧붙였다.

무엇이든지 예술을 위한 대상으로 보았다. 그의 친구 콘디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주 생선 시장으로 가서 지느러미의 모양과 색깔을 살펴보고, 또 그 눈의 색깔과 몸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탐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세부 사항들을 그림에서 극단적인 근면함으로 재생하였다.”

 

158~159 기를란다요와 함께 지낸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천성과 기회가 그를 조각으로 이끌었다.  다른 미술학도들처럼 그도 메디치 가문이 고대의 조각과 건축물 수집품을 전시한 정원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는 이 대리석 조각상 몇 개를 특별한 관심과 기술로 베꼈다. 로렌쪼가 피렌쩨에 조각 학교를 세울 욕심으로 기를란다요에게 이 방향으로 재능을 보이는 학생 몇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기를란다요는 프란체스코 그라나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보내 주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가 미술의 장르를 이렇게 바꾸는 것을 보고 망설였다. 아들이 결국은 돌이나 깎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정말로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라우렌찌아나 도서관을 위해 필요한 대리석을 깍는 일을 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소년은 조각상을 만들게 되었다. 온 세상은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사튀로스를 조각한 이야기를 안다. 쓸모 없게 된 대리석 조각을 다듬어서 늙은 판신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나가던 로렌쪼가 이토록 늙은 판신이 그토록 완벽하게 이빨을 죄다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한마디 하자 미켈란젤로가 단 한 방에 위쪽 턱에 붙은 이빨 하나를 부러뜨려 이 잘못을 수정한 이야기도 안다. 소년의 작품과 재능을 보고 로렌쪼가 그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여 아들처럼 대우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모두 안다. 2년 동안(1490~1492) 어린 예술가는 메디치 궁전에서 살았다. 그리고 로렌쪼, 폴리찌아노, 피코, 피치노, 풀치 등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정치, 문학, 철학, 미술에 대해 당대 가장 개명한 이야기를 들었다. 로렌쪼는 그에게 훌륭한 방을 내주고, 개인적 경비로 쓰라고 한 달에 5두카트(62.5달러?)씩 주었다. 미켈란젤로가 어떤 작품을 만들든지 그것은 그 자신의 것으로서, 그가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가 있었다.

 

163 정결한 여인들은 그렇지 못한 여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신선함을 보존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호색한 욕망을 마음에 전혀 품지 않은 성모님의 경우에는 얼마나 더욱 그렇겠는가! 아니, 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이 젊음의 꽃이 자연적인 이유에서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또 성모의 처녀성과 영원한 순결함을 세상에 확인시켜 주기 위해 기적을 통해서도 보존될 수 있다는 신념을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166 피렌쩨 아카데미에서 이것을 바라보면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이란 떼어냄으로써 작업하는예술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시 하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돌에서 표면을 제거하기만 하면 조각상에 존재를 만들어 준다. 돌이 많이 벗겨져 나갈수록 이 모습은 점점 더 자라난다.” 그는 자주 자신이 떨어진 돌에 파묻힌 광부를 찾아내는 것처럼 표면을 떼어 냄으로써 돌 속에 갇힌 인물상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167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도 인체를 향한 관심이 그의 신앙심을 누르고 승리하고 있다. 그는 또한 위치의 해부학, 곧 인체가 자세를 바꿀 때, 팔다리, 관절, 골격, 근육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168 그들은 너무나도 비슷했다. 두 사람 다 불 같은 성질을 지녔다. 교황은 폭군같고 불같으며, 예술가는 무뚝뚝하고 자부심이 강했다. 두 사람 다 정신과 목표에서 거인들이고 자기보다 나은 것을 참지 못하고 타협을 모르며 하나의 거대한 기획에서 또 다른 거대한 기획으로 넘어가고 자기들의 시대에 자기들의 개성의 인장을 확실하게 찍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죽자 온 이탈리아가 지치고 텅 빈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미칠 듯한 에너지로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169 율리우스 2세는 이것을 승인하고 미켈란젤로에게 대리석을 살 돈으로 2000두카트를 주어 카라라로 보냈다.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을 사 오라는 지시였다. 그곳에서 미켈란젤로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을 보자, 이 작은 산을 거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서 꼭대기에 불을 켜면 멀리 있는 뱃사람들에게 횃불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170 1513년 무렵에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을 베꼈던 첼린니는 젊은이의 열광을 가지고 이렇게 서술했다. “ 그 동작이 하도 훌륭해서 고대의 예술이나 현대의 예술을 막론하고 이 정도의 탁월함의 높이에 도달한 작품은 없다.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가 뒷날 저 위대한(시스타나) 예배당을 완성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도달한 힘의 표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173 그는 레오나르도의 말 혼자 있을 때면 너는 완전히 너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말에 대한 한 예가 되었다.

 

18장 레오 10 1513~1521

 

178~179 너와 너의 안녕을 염려하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섭리의 높으신 은혜에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 가문에 내린 많은 영광과 은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특별히 너 개인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 온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직위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이 은혜는 그 자체로 아주 중요하지만, 여기 수반된 상황과 특별히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와 네가 어린 나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중요해진다. 그래서 내가 네게 말해 줄 첫째 일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너의 미덕과 신중함이나 너의 애태움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를 통해서 일어난 것임을 기억하고, 또 이 은혜에 대해서는 오로지 경건하고 순결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통해서만 보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는 말이다. 네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장차 성년이 되면 더욱 큰 결실을 맺을 수도 있다는 합당한 기대를 갖게 되기에, 이런 임무들을 수행할 너의 의무는 그럴수록 더욱 커지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또 인내심을 가지고 너의 직업에 어울리는 연구들을 해서 이른 나이에 얻은 높은 직위의 짐을 덜도록 노력해라. 지난해 동안 네가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주 성찬식과 고해를 하러 가곤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대단히 만족했다. 이런 일들과 비슷한 임무들을 수행하는 일에 스스로 익숙해지는 것보다 하늘의 은총을 얻을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는 나도 생각지 않는다…..

 

179 현재의 동료들에게 미덕이 적을수록 너는 더욱 확고한 태도로 이런 어려움에 맞서야 한다. 그들 중 몇 사람은 훌륭하고 학식을 쌓은 사람들임을 나도 안다. 그들의 생활은 모범적인 적이며, 네게 그들을 행동의 모범으로 삼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을 열심히 따라하는 가운데 너는 더욱 잘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고, 또 네 나이와 상황의 특수성에 비례해서 너의 동료들보다 더욱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선의 허물을 피하라. 행동이나 말에서 온갖 겉치레의 유혹을 벗어나라. 돈을 너무 아끼지 말고 지나치게 진지하게 보이지도 마라. 때가 되면 너는 이런 충고를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하고 행하게 되리라 희망한다.

 

180 너희 행동과 담화가 아주 작은 어려움도 만들어 내지 않는 방향을 선택하라. 그것을 위해서 추기경들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교제할 때 공손하고 정중한 말씨를 쓸 것을 권한다….. 이번에 로마를 처음 방문하는 기회이니 너로서는 스스로 말을 많이 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이다.

공식적인 기회에 너의 마차와 의상이 보통보다 넘치기보다는 보통보다 못하게 해야 한다. 아름다운 집과 질서가 잡힌 가족이, 많은 수행원과 화려한 저택보다 더 낫다. …. 비단과 보석은 너의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몇 가지 훌륭한 고대의 유물을 수집하는 일이나 훌륭한 책을 수집하는 일을 통해서 또 너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것보다 학식이 있고 훌륭하게 배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너의 취향이 더욱 잘 드러난다. 초대를 받는 것보다 더 자주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라. 그렇다고 너무 자주 초대하지는 마라. 소박한 음식을 취하고 충분한 운동을 해라, 너와 같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조심하지 않으면 질병을 끌어들이기가 쉽다......

다른 사람을 너무 많이 믿기보다는 너무 적게 믿어라.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네게 권하고 싶은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너의 건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하루 일과를 정돈하고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성직을 수행하고, 연구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등 너의 지위에 따르는 다양한 임무가 있기에 너는 이 훈계를 따르는 일이 매우 쓸모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아마 특별한 기회에 교황의 은총을 얻도록 주선해 달라는 청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힘들게 하지 마라. 여러 가지 간청으로 자신을 가장 조금 괴롭힌 사람들에게 그는 가장 너그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성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따금 그와 조금 더 공감이 잘 되는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해라. 네가 그에게서 친절함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가 친절을 베푸는 일이 즐거움이 되도록 온건함과 겸손함으로 행동하라. 잘있거라.

 

184 개혁을 위한 교서는(1514 5 3) 그를 통해 수입이 즐어들 직책에 있는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기에 그것의 실행을 위해 격렬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을까를 알아보지요.” 이것이 그의 성격이었으며 그의 성격이 곧 그의 운명이었다.

 

189 로마는 거대한 강물이며 바다였다. 루터는 와서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불쾌감을 느꼈다. 에라스무스는 와서 보고 황홀감에 빠졌다. 수많은 시인들은 사투르누스의 통치시대(고대의 황금시대)가 되돌아왔다고 선언했다.

 

210 이 유명한 무시무시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에너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89년 동안이나 지탱해 주기도 한, 사납게 불타오르는 힘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에너지를 단 하나의 목표, 곧 예술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모든 일을 다 무시해 버리는 의지의 힘이었다. 통합시키는 의지력에 의해 통제된 에너지란, 천재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형태 없는 돌을 도전으로 보고, ‘분노로그것을 잡아 망치로 때리고 끌로 파서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는 이 에너지는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삶의 하찮은 것들을 분노로 휩쓸어 내버리는 힘이기도 했다. 그 힘은 의상이나 청결함이나 표피적인 예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하고서, 약속도 깨뜨리고 우정도, 건강도 깨뜨리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깨뜨리고 몸과 정신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지만 그러나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회화, 가장 위대한 조각,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건축 일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이탈리아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211 그는 귀족의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을 더 좋아하고, 지식인보다 단순한 사람을, 부유함의 사치보다 일꾼들의 노역을 더 좋아했다. 수입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는 친척들의 생계를 위해 내주었다. 그리고 고독을 좋아했다. 삼류급 정신과 하찮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참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계속 따라갔다.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금욕을 통해 돈을 아꼈다. 어떤 사제가 미켈란젤로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두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예술만 해도 마누라가 너무 많아요. 그게 충분히 말썽을 만들어 냅니다. 자식을 얘기하자면 내가 앞으로 만들 작품이 내 자식입니다. 이 작품들이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 해도 어쨌든 한동안은 계속 살아갈 테니까요.”

 

211 그와 레오나르도가 모두 여성의 신체적인 아름다움에 무감각했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는 미의 정화(精華)이며 원천으로 여겨지곤 했으니 말이다.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어쩌면 그의 경우 성()으로 들어갔을 에너지가 모조리 작품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212 그는 빈둥거리는 기간들을 갖기도 했지만 그런 다음 갑자기 창작의 열기가 그를 다시 사로잡으면 나머지 모든 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로마 유린 같은 역사적 사건도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216 라파엘로는 진실의 추구는 더욱 단호한 정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름다움에 봉사하는 일로 만족했다.

 

220 라파엘로의 경이로운 생산성은(37년의 생애 동안에 미켈란젤로가 89년 동안 이룩한 것보다 더 많다.)그의 작품을 공정하게 요약하기를 어렵게 한다. 거의 모든 작품이 걸작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자이크, 목판, 보석, 메달, 도자기, 청동 그릇과 돋을 새김, 향수그릇, 조각, 궁전 등을 도안했다.

 

230~231 라파엘로는 이 두 장면을 다 취해서 그들을 합치고, 시간과 장소의 통일성을 얻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했다. 산꼭대기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공중으로 떠올라 있고, 그의 얼굴은 황홀경으로 변화되어 있으며 그의 의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빛으로 빛나는 희색이 되었다. 그이 한편에는 모세가 다른 편에는 엘리야가 있다. 그들 아래에 평평한 곳에 세 명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누워 있다. 산 아래쪽에는 절망한 아버지가 정신이 나간 아들을 앞으로 밀어붙인다. 어머니와 다른 여인이 (두 사람 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소년의 양옆에서 무릎을 꿇고 그곳에 남은 아홉 사도들에게 치유를 간청하고 있다. 사도들 중 한 사람은 책에 깊이 빠져 있다가 깜짝 놀라고 있다. 다른 사람은 변모한 그리스도를 가리키면서 오직 그분만이 소년을 치유라 수 있음을 알린다. 아마도 라파엘로가 마무리 작업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의 위쪽 부분이 찬양받고, 아래쪽에 나타난 어떤 조잡함과 억지의 요소가 비난받는 것이 보통이다. 아래쪽은 줄리오로마노가 그렸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인물 둘이 아래쪽 전면에 나타난다. 책을 읽다가 놀란 사도와 어깨를 드러낸 채 빛나는 의상을 한 무릎 꿇은 여자가 그들이다.

 

232 로마의 모든 예술가들이 죽은 젊은이를 따라 그의 무덤으로 갔다. 레오는 사랑하는 화가를 잃은 것을 탄식했다. 교황의 비서 겸 시인인 벰보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는데 판테온에 잇는 라파엘로의 무덤을 위해 비명을 쓰면서 수사법을 다 버렸다.

 

   Ille Hic Est Raphael(여기 라파엘로가 잠들다)

 

232 미켈란젤로가 더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는 세 분야에서 위대했고, 또 사유와 예술에 더욱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라파엘로에 대해서 그는 깊은 탐구가 만들어 낼 수 잇는 한 모범적 사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라파엘로가 모방을 통해서 다른 여러 예술가들의 탁월함을 습득했고, 근면한 재능으로 그런 탁월한 점들을 결합시켜서 완성된 양식으로 만들어 낸 것을 뜻했을 것이다.

 

233 라파엘로는 너무 행복해서 전통적인 격렬한 의미의 천재가 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잘 해결했기에 가장 위대한 영혼들을 창조와 비극으로 이끌어 가는 악마적인 정신이나 힘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율리우스 2, 이어서 레오 10세 이어서 키지의 요구와 기분에 자신을 맞췄다. 그러나 언제나 그는 성모와 애인들 사이를 즐겁게 왕복하는 솔직한 젊은이였다. 이것은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화해시키는 그만의 명랑한 방법이기도 했다.

 

233 레오나르도의 섬세함과 미켈란젤로의 비극적 감각은 그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삶의 쾌락과 즐거움, 아름다움의 창조와 소유, 친구와 애인의 성실함으로 충분했다. 러스킨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옳았다. 고딕 조각과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라파엘로이전회화에는,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성모와 관능적인 베누스들보다 더욱 깊이 영혼으로 내려가는 신앙과 희망의 섬세함, 단순함, 성실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율리우스 2세」와 「진주의 성모」는 전혀 표피적인 작품이 아니다. 그들은 남자의 야망과 여성의 부드러움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다. 「율리우스 2세」는 「모나리자」보다 더욱 위대하고 깊이가 있다.

 

233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미켈란젤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그는 질문하지 않고, 의심도 만들어 내지 않고 어떤 두려움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우리에게 신의 음료와도 같은 삶의 사랑스러움을 제공한다. 그는 지성과 감정 사이, 육체와 영혼 사이에 어떤 갈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종교, 여인, 음악, 철학, 역사, 전쟁까지도. 그 자신 행운이 많고 행복했던 사람이라 그는 명랑함과 우아함을 사방으로 내뿜는다. 천재에 유사했던 덕에 그는 가장 위대한 존재의 바로 아래쪽에, 그러나 그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단테, 괴테, 키츠.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붕괴

 

19장 지식인의 반란 1300~1534

 

245 모든 시대와 민족에서 문명이란 소수의 산물이며 특권이고 책임이다.

 

245 어떤 세대든지 오직 적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경제적 고민에서 벗어나, 조상이나 주변의 사고방식 대신 자신만의 사고를 펼칠 여가와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45~246 그렇듯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도 문명은 소수의,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다수를 이루는 단순한 보통 사람들은 땅을 갈고 파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짊어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을 하느라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힘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246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판이니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들을 위해 생각을 하도록 했다. 전통 신학의 매혹적이고 위안을 주는, 용기도 주고 두려움도 주는 경이로움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이것은 접촉, 배움, 미술 등을 통해 매일 새로 다가왔다.) 여기에 자신들도 몇 가지를 덧붙였다. 악마학, 마법, 징조, 점치기, 점성술, 성 유물 숭배, 그리고 교회에 의해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대중 형이상학이 되는 기적 이야기 등이었다.

 

249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인류의 열광이 다양한 종류의 점쟁이들을 후원해 왔다. 즉 손금쟁이, 꿈 해몽가, 점성술사 등이다. 특히 점성술은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이탈리아에 수가 많고 세력이 강했다.

 

250 귀치아르디니는 이렇게 소리쳤다. “점성술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백 가지 틀린 말을 하고 단 하나만 맞혀도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믿어 준다. 다른 사람들은 백 가지 진실을 말하고 단 하나만 틀리게 말해도 온갖 신뢰를 다 잃어버리는데 말이다.”

 

252 르네상스는 미술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고, 작은 부분을 문학에, 철학에는 아주 조금, 그리고 과학에는 가장 조금 영혼을 바쳤다.

 

268 그래서 그것(우화와 동화)들은 미덕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삶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고, 죄가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인정해 주었다. 영원한 형벌은 사람들을 대단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인간의 대다수는 영원히 좋은 것에 대한 희망보다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좋은 일을 한다. 형벌이 영원한 선보다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274 모든 종교는 가설과 신화에 근거하고 잇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질서와 도덕적 기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이런 것은 용서 할 수 잇는 일이다. 귀치아르디니늬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고 무법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관습, 도덕성, , 아니면 강제로 언제나 통제해야 할 존재이다. 종교는 보통은 이런 목적을 위해서 가장 덜 불쾌한 수단이다. 그러나 종교가 타락해서 풍속을 강화하지 않고 오히려 풍속을 해치는 영향을 발휘할 경우에 사회는 고약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사회의 도덕적 규범에 대한 종교의 후원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귀차아르디니는 비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275 정직함은 칭찬을 얻고 위장은 비난과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정직함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쓸모가 많다. 그래서 나는 삶의 보통 상황에서는 개방적이고 정직하다가 아주 중요한 어떤 일들의 경우에만 위장을 이용하는 사람을 찬양해야겠다. 정직하다는 평판을 많이 얻을수록 이것은 더욱더 성공적이다.

 

278 자기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인 남자가, 2년 만에 12명의 폭군을 물리치고, 12개의 도시에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를 시대의 유성으로 만든 남자가 여기 있었다. 말을 그토록 아끼는 이 젊은이 앞에서 말이란 얼마나 허약하게 보이는 것인가! 이순간부터 체사레 보르지아는 마키아벨리 철학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니체 철학의 주인공이 된 것과 같은 일이다. 권력에의 의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존재에게서 선악을 넘어선 도덕성, 초인의 모델이 나타나 것이다.

 

281 「군주론」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네. 이 책에서 나는 이 주제에 대해 할 수 잇는 한 깊이 생각 속으로 들어갔네. 군주의 특성을 논하고, 어떤 종류의 특성들이 있는지, 이들은 어떻게 획득하는지, 어떻게 유지되는지, 또 어째서 잃게 되는지 등을 논했네.

 

283 비록 시대의 관습과는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래도 더욱 용서하기 힘든 일은 현존하는 마키아벨리의 모든 편지에서 아내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다정한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288 지혜로운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래를 예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과거와 상의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사란 앞선 시대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사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똑 같은 정열에 따라 움직이게 될 미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사란 필히 동일한 결과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나는 세계는 항상 똑같았으며, 언제나 똑같이 많은 선과 악을 포함했다고 믿는다. 비록 시대에 따라, 민족에 따랄 그것이 다르게 분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288 가장 가르침이 풍부한 역사의 규칙들 중에는 문명과 국가의 성장과 멸망이라는 현상도 잇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아주 복잡한 문제를 극히 단순한 공식으로 처리한다. “용맹함은 평화를 만들어 낸다. 평화는 휴식을 만들고 휴식은 무질서를 만든다. 무질서는 파괴를 만든다.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겨난다. 질서에서 용맹함이 생긴다. 그리고 용맹으로부터 영광과 행운이 나온다. 따라서 무기가 탁월한 시대에 뒤이어 문자가 빼어난 시대가 나타나고, ….. 철학자들보다 먼저 위대한 전사들이 온다는 사실을 지혜로운 남자들이 관찰했다.

 

289 천성적으로 사악한 인간을 법과 질서에 익숙하도록 길들이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종교이다.

 

292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초자연적인 믿음의 체계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이류로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당히 뱃심 좋게 받아들였다. 그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거부한 부분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윤리, 선함과 온화함, 겸손, 무저항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그리스도교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비난한 부분이었다.

 

293 한 국가가 확장을 그치면 그것은 멸망을 시작한다. 전쟁의 의지를 잃어버리면 이미 끝장난 국가이다. 평화가 너무 오래 유지되면 그것은 힘을 약하게 하고 분열을 일으킨다. 이따금씩 전쟁을 하는 것은 기율과 활력과 통일성을 회복시켜 주는, 민족의 강장제이다. 공화제 시대 로마인들은 언제나 전쟁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293 로마인에게 미덕(용맹)이란 겸손이나 온화함이나 평화가 아니라 힘과 지성을 갖춘 강인함, 남자다움, 용감함 등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미덕이란 말로 뜻한 것이었다.

 

296 그러므로 군주(통치자)는 도덕성과 정치적 능력, 개인적 양심과 공적인 이익을 명료하게 구분해야 하고, 또한 개인으로 보면 사악함이라 불릴 만한 일이라도 국가를 위해서 행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297 통치자는 종교를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개인적인 신념이야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 종교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군주가 실제로 미덕을 갖추는 것보다 미덕이 잇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유리한 일이다.

 

298 군주가 모든 미덕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미덕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일은 쓸모가 잇다. 예를 들어 자비롭고 충성스럽고 인도적이고, 종교적이고 성실한 것으로 보이는 일이다. 실제로 이런 미덕을 가지는 것도 유리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필요성이 있을 때면 반대로도 행동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으로 그래야 한다. …. 그는 위에 언급한 다섯 덕목들로 가득 차지 않은 말이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잇는 사람들에게 동정심, 충성, 인도적 요소, 종교성, 성실성 등을 보여 주어야 한다. …. 자신의 행동에 색채를 부여해야 하며 또한 시치미를 뚝 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극히 단순하고 현재의 필요성에 깊이 몰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속이기가 쉽다. …. 누구나 당신의 겉모습을 보지만 당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리고 이 드문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에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299~300이탈리아가 자신의 해방자를 맞아들일 그 사랑을 누가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복수의 갈망, 어떤 고집스러운 신념, 어떤 헌신, 어떤 눈물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표현 할 수 있는가? 어떤 문인들 그에게 열리지 않을까? 누가 그에게 복종을 거부할까? 우리 모두에게 야만인의 지배는 콧구멍에 들어 있는 악취이다. 그러므로 이 유명한 집안이, 정당한 시도를 할 때 얻게 되는 용기와 희망으로 이 책임을 떠맡고 이 집안의 깃발 아래 우리 나라가 고귀해지고, 이 집안의 보호 아래서 저 페트라르카의 말이 진실이 되어야 한다.

 

   어른이 되면 광기에 맞서 무기를 집어들리라,

   싸움은 짧으리,

   고대인의 용기가 아직도

   이탈리아의 혈관 속에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301 매콜리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마키아벨리의 철학이란 오래전부터 이미 전제 군주들에 의해 『군주론』의 원칙들에 길들여져 잇던, 탁월하고 부도덕한 이탈리아의 자연 반사광이라고 설명했다.

 

20장 풀어진 도덕 1300~1534

 

306 르네상스의 지적인 상승을 동반한 도덕적 쇠퇴에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기본적인 사실은 아마 부의 성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308 점점 더 큰 비율의 주민들이 도덕적 규범이 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계율이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라 여겨지고, 하늘과 지옥에서의 초자연적인 상벌이 효력을 잃자 도덕규범이 두려움과 효과를 잃어버렸다. 금지들이 사라지고, 편리함의 계산법이 대신하게 되었다. 죄의 감정, 잘못의 두려움이 시들었다. 양심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모든 사람은 각기 전통적으로는 옳지 않을지라도 자기에게 편해 보이는 일들을 했다. 사람들은 더는 선하기를 원치 않고 강하기를 원했다. 많은 개인들은 마키아벨리가 나오기 훨씬 전에 이미 힘과 기만의 특권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이런 것을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통치자들에게만 승인해 주었다.

 

324 오로지 한 가지 점에서만 공감할 수 있는,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있었다. 곧 이전 어느 때보다도 삶을 강렬하게 살았다는 것, 중세는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혹은 부정하는 척 했었다. 르네상스는 충심으로, 그리고 영혼과 힘으로 삶을 긍정했다.

 

333 남자의 행복의 원천은 공직이나 명성에 잇지 않고 아내와 아이들, 경제적인 성공, 좋은 평판, 좋은 친구들에 있는 것이다.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충분히 어려서 자신의 가르침과 교육에 순종하는 아내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 초기에 아내에게 어머니의 의무와 가정 경영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번영하는 생활은 건강, 재능, 시간, 돈을 경제적으로 반듯하게 사용하는 데서 온다. 건강은 절제와 운동과 적절한 식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잇다. 재능은 종교와 모범을 보고 정직한 성격을 형성 하는 것과 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 잇다. 돈은 수입과 지출과 저축을 조심스럽게 계산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얻을 수 잇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보다도 농장이나 부동산에 투자한다. 그것은 그와 가족에게 시골에 거주할 장소를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곡식, 포도주, 기름, 가금, 목재,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다른 많은 것들을 제공해 준다. 도시에도 집을 소유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녀들은 그곳의 교육 시설을 이용할 수가 있고, 산업 기술 일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은 한 해의 대부분을 별장과 시골에서 보내는 것이 좋다.

 

345 사육제 때 피렌쩨에서는 행렬을 이룬 무대 차들이 신중함, 희망, 두려움, 죽음과 같은 이념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거나(알레고리)자연의 원소, 바람이나 계절 등을 표현했고, 또는 파리스와 헬레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등의 이야기들을 무언극으로 들려주고, 각 장면마다 그에 어울리는 노래들을 동반했다.

 

358 나는 이탈리아에 딱 한 번 갔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바이지만 그곳에 9일밖에 머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고귀한 도시 런던에서 9년 동안 들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죄의 자유를 이 한 도시에서 목격했다. 그곳에서는 죄를 지을 자유가 있음을 보았다. 형벌을 받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마치 런던에서 아무런 비난 받지 않고 구두를 신을지 슬리퍼를 신을지 결정할 자유가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 방식을 받아들인 영국인은 악마의 화신이라는 말을 확정된 격언처럼 인용한다.

 

21장 정치적 붕괴 1494~1534

 

371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관은 만족을 모르는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후로 1707년까지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의 속령으로 남아 있게 된다.

 

386 프랑수아 1세는 용감하게 행동했다. 군대가 퇴각하는 동안 그는 앞장서서 적의 대열로 나가 직접 적을 죽였다. 그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데도 그는 계속 싸웠다. 마지막에 완전히 지쳐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어 그는 몇몇 대장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적들이 에워싼 텐트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절반만 자주 인용되곤 한다. “명예만 빼고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뚱이도 안전합니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 있던 카를 5세는 포로로 잡은 그를 마드리드 근교 성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396 에라스무스는 사돌레토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로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원이며 고귀한 영혼을 위한 유모이고 뮤즈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어머니인 곳이었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는 자신들의 나라보다도 더욱 소중하고 달콤하고 귀한 곳이었던가! …. 정말이지 이것은 한 도시의 파괴가 아니라 온 세상의 파괴입니다.”

 

401 그사이에 피렌쩨가 도시의 방어를 위해 고용한 장군 말라테스타 발리오니는 포위군과 배신적인 계약을 맺었다. 그는 적군을 도시 안에 들어오게 하고 자신의 총구를 피렌쩨 사람을 향해 겨누었다. 굶주리고 조직이 무너진 공화국은 항복했다.(1530 8 12)

 

408 시스티나 예배당의 그림이 르네상스 회화의 정점이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붕이 르네상스 건축의 정점인 것과 마찬가지다.(이들 모두 미켈란젤로의 작품) 무덤들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서 절정이던 시절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모습을 재현하려는 노력은 없다. 쥴리아노는 로마 장군의 의상을 입었고, 로렌쪼는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411 ‘의 제막식을 맞이하여 시인 쟌바티스타 스트로찌가 4행시로 문학적 주석을 표현 했다.

 

    너희가 여기서 보는, 우아하게 잠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밤은 어떤 천사(미켈란젤로)에 의해

    돌로 제작된 것. 삶을 지닌 채 잠자는 여인.

    믿지 못하는 사람아, 그녀를 깨워라, 그녀가 네게 말해 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해 칭찬의 재담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용서했지만 해석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시들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내주는 4행시에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나의 잠은 소중하다, 폐허와 불명예가 지배하는 한

    잠은 단순한 돌 이상이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나의 큰 이점.

    그러니 나를 깨우지 마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라.

 

종말 1534~1576

 

22장 베네찌아의 황혼 1534~1576

 

427 “베네찌아로 가겠습니다. 오직 거기서만 정의가 공평한 저울 접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라고 아레티노는 말했다. 1527 3월에 베네찌아에 도착해서 대운하 옆에 집을 얻었다. 그는 얕은 바다 저편의 전망에 홀딱 반했고, 그의 말대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 도로의 풍부한 통행에도 반했다. 그는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베네찌아에서 영원히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435   여기 토스카나 시인 아레티노가 누워 있다.

      신만 빼고 모든 사람에 대해 고약한 말을 했던 사람,

      변명으로는 나는 그()을 몰랐다.”고 말하던 사람.

 

437 1535년 볼로냐에서 파울루스 3세는 티찌아노 초상화의 대담한 사실주의를 경험했다. 예순일곱의 나이로 지쳤으나 불굴의 면모를 지닌 그는 흘러내리는 교황의 의상을 입고 긴 머리와 한때는 강력하던 몸을 덮은 수염을 지니고, 귀족적인 손에 권위의 반지가 뚜렷하다. 이것은 라파엘로가 그린「율리우스 2세」와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섬세하고 가장 심오한 초상화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작품이다.

 

442 티찌아노의 가장 흥미로운 초상화들은 그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여러 번이나 자신의 모습을 그렸고 마지막으로는 여든 아홉 살 때의 모습을 그렸다. 그라도에 있는 「자화상」앞에 서면 우리는 주름이 졌지만 그래도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흐름에 깨끗이 씻긴 얼굴을 보게 된다. 테두리 없는 모자는 그의 흰머리를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 붉은 수염이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다. 커다란 코는 힘을 호흡하고 푸른 눈은 약간 진지한 모습으로 실제보다 죽음이 더 가까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손은 붓을 들고 있고 위대한 예술가의 열정은 아직 다 소모되지 않았다.(총독들이나 원로원 의원들이나 상인들이 아니라)이 사람이 바로 50년 동안 베네찌아의 주인이었다. 덧없는 귀족들과 왕들에게 불멸의 모습을 부여하고, 자기가 선택한 도시를 르네상스 역사에서 피렌쩨, 로마와 나란히 세운 바로 그 사람이었다.

 

443 아주 노년까지 그는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고, 예술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행복을 찾았다. 그는 이 분야에서 자기가 대가임을 알고 있었고, 온 세계가 자신을 칭찬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손이 그 노련함을, 또 자신의 눈이 그 예리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상상력과 함께 그의 지성도 마지막까지 그 힘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446 그는 생애을 통해 티찌아노를 대단히 존경했고, 티찌아노가 자기에게 준 그림을 소중히 여겨 작업장 벽에 붙여놓고 회화에서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언제나 거듭 생각나게 해 주는 암시로 삼았다. 미켈란젤로의 도안과 티찌아노의 색채가 그것이다.

 

457 이 그림들을 앞에 놓고 우리가 느끼는 최종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반응의 감정이다. 이것은 대형 양식의 예술이다. 다른 예술가들은 이를 테면 라파엘로처럼 아름다움을 그렸고, 이를테면 미켈란젤로처럼 힘을 그리고, 렘브란트처럼 영혼의 깊이를 그렸다. 그러나 여기 이 우주적인 유화에는 (도시의 소음처럼, 아니면 기도할 때면 침묵에 잠긴 대중처럼, 아니면 수천 가정의 애정 어린 친근함처럼)인류가 등장한다. 다른 어떤 예술가도 이렇게 대규모로 인류를 본 적이 없었다.

 

461 베로네제의 신화들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은 총독 궁전에 있는 「에우로파의 납치」이다. 어두운 색채의 나무들이 있는 풍경, 날개 달린 아기들이 화한을 내려뜨리고, 에우로파(페니키아 공주)는 즐거운 모습으로 사랑스러운 황소에 올라타고 있고, 황소는 그녀의 아름다운 다리 하나를 핥고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유피테르가 변신한 모습이다. 하늘나라의 행운아 카사노바는 여기서 신적인 취향을 보인다. 여왕과 같은 의상을 차려입은 에우로파는 베로네제의 가장 성공적인 여성 인물이다. 그려를 찾아 정말 하늘을 떠날 만한 모습인 것이다.

 

467 베네찌아 화가들은 색채를 너무나 좋아해서 피렌쩨 대가들과 같은 조심스러운 도안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훌륭한 도안가들이었다. 어떤 프랑스 사람은 여름은 색채주의자, 겨울은 도안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은 순수한 선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선들은 봄의 초록, 여름의 갈색, 가을의 황금 색 아래도 여전히 있다. 죠르죠네, 티찌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제의 색채의 영광 아래에도 선이 있다. 다만 색채에 너무나 빠져서 교향곡의 구조적 형태가 그 흐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470 1559년 이후로 스페인 지배는 외국 세력이 이탈리아 영토에서 전쟁하는 일을 끝냈고 이런 상태가 179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이 이탈리아 국민에게 정치적 질서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 부여하고, 르네상스를 만들기도 파괴하기도 한 격한 개인주의를 가라앉혔다.

 

480 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의사들은 모든 처방을 포기하고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란 오로지 절제하는 규칙적인 생활에 있을 뿐이라고 충고했다. “나는 견고한 것이건 유동식이건 환자에게 처방된 것과 같은 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섭취해서는 안되었다. 그것도 아주 소량만 먹어야 했다.” 고기를 먹는 것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언제나 절제를 지켜야 했다. 머지않아 그는 하루 섭취량을 음식 350그람과 포도주 400그람으로 줄였다. 그가 들려주는 바에 따르면 1년만에 나는 그동안의 모든 불편함에서 완전히 쾌유되었다. …..나는 아주 건강해졌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다.” 그러니까 여든셋의 나이 때 한 말이다. 그는 이런 육체적 습관의 질서가 절도가 정신과 성격의 측면에서도 질서와 절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두뇌는 항상 명료한 상태에 있다. …. 우울증, 미움, 다른 정열들이그를 떠났다. 그의 미적 감각조차도 더욱 날카로워져서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481 와서 한번 내 건강함을 보시라.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말에 올라타고 계단과 낮은 산에 오르는 것을, 내가 얼마나 즐겁고 만족하는지를, 그리고 온갖 마음의 고민과 지겨운 생각들에서 벗어나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기쁨과 평화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신께 감사드리는 바이지만 입맛을 비롯한 나의 모든 감각들은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 내가 먹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은 예전에 불규칙하게 살던 시절에 먹던 맛있는 것들보다 더욱 맛이 좋다. …. 집으로 돌아오면 한두 명이 아니라 열한 명이나 되는 손주들이 늘어선 것을 본다.  그들이 노래하고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참으로 즐겁다. 나 자신도 함께 노래하고 하는데 나는 전보다 더 맑고 잘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 .… 그러므로 내 삶은 살아 있는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며, 나는 내 삶을 정열에 사로잡힌 젊음과 바꾸고 싶지 않다.

 

481 “건강화 힘이 완전한여든 여섯 살에 그는 두 번째 책을 써서 몇몇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보내는 삶의 즐거움을 표현했다. 아흔한 살에 그는 세 번째 책을 덧붙여서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의 손으로 하루 여덟 시간씩 글을 쓴다. ….. 이 일에 더해 다른 시간에는 걷고 노래를 한다. …… 식탁을 떠날 때면 노래를 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내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답고 잘 울리게 되었는지!” 아흔 두 살에 그는 온 인류에게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생활을 하라는 …… 사랑의 권고를 썼다. 그는 자신의 수명이 백 년을 채울 것이라 예상했고, 감각, 느낌, 생명력 등이 점차 줄어드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기대했다. 그는 1566년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일부 사람들은 아흔아홉 살이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백세 살이나 백네 살이라고 말한다. 그의 아내도 그의 권고를 지켜서 거의 백 살이나 살았다고 하며 신체적으로 완전한 편안함과 영적인 안정감을 지닌 채 죽었다.

 

497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탁월함의 요소를 지녔거나 탁월함과 상당히 비슥한 요소를 지닌 사람이고 진리와 정직성을 지니고 있다면 모든 남자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생애를 서술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흔이 되기도 전에 이런 섬세한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의무가 이제 나의 마음에 나타났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난 도시 피렌쩨에 있으며, 쉰여덟을 넘기고 있다.

 

502 나의 판결이 불공정하게 나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방어를 위해 지니고 다니던 큰 검에 의지했다. 나는 언제나 훌륭한 무기들을 지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를 고소한 사람을 맨 먼저 공격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의 다리와 팔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 그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가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업게 만들었다.

 

508 르네상스 로마에 작별의 눈길을 던져 보면 이 도시가 1527년의 재앙에서 회복한 그 속도에 놀라게 된다. 클레멘스 7세는 파괴를 막기보다 회복하는 데서 더 많은 기술을 보여 주었다. 그가 카를 5세에게 항복한 일은 교황국가들을 보호해 주었고, 이곳의 수입이 교회 기율의 회복과 로마의 부분적인 재건을 위해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종교 개혁의 효과로 수입이 줄어든 일이 아직은 교황청 재정에 뚜렷한 영향을 보이지 않았다. 파울루스 3세 치하에서 르네상스의 정신고 영광은 한 순간 되살아나는 듯이 보였다.

 

511 미켈란젤로의 내명에 있는 조각가가 화가를 망쳤다. 나날이 더욱 종교적으로 되어 가던 이 엄격한 청교도 예술가는 강력한 근육질의 몸들을 색채로 조각했다. 그동안 미술과 문학이 행복한 아이들이나 우아한 젊은이들이나 나긋나긋한 소녀들로 표현했던 천사들은 여기서 하늘을 달리는 근육질의 전사들이 되고 말았다.

 

519 동안, 혹은 섬세한 드로잉의 학문은…. 회화, 조각, 건축의 원천 및 핵심이며 모든 표현의 형식, 또 모든 학문 형식의 원천이며 핵심이다. 이 분야에서 대가가 된 사람은 대단한 보물을 소유하는 셈이다. …. 인간 두뇌와 손의 모든 작업들은 도안 자체이거나 도안의 분과이다.

 

520 화가로서 그는 끝까지 도안가로 남았다. 언제나 색채보다 선에 더 관심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형태를 도안하고자 했으며 예술에서 인간의 태도를 포착하거라 도안을 통해 삶의 철학을 전달하고자 했다.

 

520~521 조각은 그에게 있어서 열병이었다. 그의 생각에 대리석이 비밀을 숨기고 있으므로 자신은 그것을 드러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비밀을 바로 그의 내면에 있었고 완전히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친숙한 것이었다. 그가 내면의 환상을 외부로 드러내 형태를 만들어 주는 싸움에서 도나텔로가 그를 조금 도와주었고, 델라 퀘르치아는 조금 더 많이, 그리스 사람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 사람들과 똑같이 예술의 주요 부분을 인체에 할당하고, 얼굴은 보편적인 모습을 띠고 거의 판에 박힌 듯한 모습으로 그대로 두었다. 메디치 무덤들에 나타난 여성 인물들의 모습이 그 예이다.

 

522 우리는 미켈란젤로에게 찬사를 바친다. 그가 길고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창작을 계속하고, 미술의 모든 주요 영역에서 걸작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이른바 살과 피를 찢고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의 정신과 마음에서 터져 나오면서 그를 한동안 출산 뒤의 허약함 속에 남겨 두곤 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수십만 번이나 망치와 끌질을 통해, 연필과 붓질을 통해서 형태를 얻는 것을 본다. 불멸의 주민들처럼 그들은 하나씩, 오래 지속되는 아름다움과 의미의 형상들 속에 자리를 잡아 간다. 우리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며, 또 선과 악, 고통과 사랑스러움, 파괴와 숭고함이 뒤섞인 듯이 보이는 우주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재의 모습, 물질에 의미를, 형태나 생각에 고귀함을 부여하는 천재의 모습이 드러나 잇는 곳에서, 우리는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지성을 이루는, 삶과 정신과 법칙에 아주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 내가 저자라면

 

문명이야기 르네상스 2편에서는 이탈리아 로마가 교회의 힘으로 세계의 수도로 성장하고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는 교황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위대한 예술가들이 르네상스 시대를 주도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술가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이고,  그리고 정치인 마키아벨리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황 중심적인 이야기 전개로 르네상스 예술 거장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작품에 대한 세밀한 설명이 다소 부족했다. 물론 훌륭한 교황들이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해줌으로 그들의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되기는 했지만, 독자의 관심은 교황의 삶보다는 성장하면서 자주 접해온 예술가들의 작품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미켈란젤로의 성장과정을 읽으면서, 자녀들이 자라는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와 무모할 정도의 열정이 불멸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작품을 위해서 모든 역량을 집중시킨 인물이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공통점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목표를 세우면 다른 일들은 무시해 버렸다. 약속도 깨트리고, 우정도, 건강도 잃으면서 몸과 정신이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로 인해 위대한 작품은 탄생되었다. 그리고, 조각과 회화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면서, 오히려 그러한 고민들을 통해 단점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장점들을 그의 작품 속에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라파엘로는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신중했다. 자신이 충분히 체득하고 소화한 뒤에야 자신의 그림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면서 거장들의 작품을 능가했다.

내가 작가라면, 교황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신 이러한 르네상스 거장들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고 싶다. 역사적인 사건의 흐름이 다소 끊어지더라도 르네상스 시대의 영웅의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리고, 거장들의 삶의 모습과, 실제 작품들이 탄생하기까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려가고 싶다. 이번 책에서 부족한 작품의 감상을 위해서 도움이 된 영상자료는 NHK에서 제작한 '르네상스의 거장들'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팔엘로의 삶과 작품을 담아낸 영상에는 이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부족했던 작품들의 세밀한 모습들은 보여주면서 나의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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