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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3일 09시 24분 등록

문명이야기 5-2

 

윌 듀란트

 

 

 

1. 저자에 대하여

    * 지난주 북리뷰 참고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로마 르네상스

    14장 교회의 위기 (1378~1447)

    1. 교황 분열 : 1378~1417

    p12 과도함은 건설보다 파괴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p13 교회는 이제 경쟁 진영들 사이의 정치적 노리개가 되고 말았다. 

    상호간의 미움은 가장 쓰라린 전쟁 때처럼 그렇게 뜨거웠다. 


    2. 공의회와 교황들 : 1409~1418

      p17 마침내 요한 23세는 1414년 11월 5일에 공의회를 열기로 동의했다. 세 교황들 중에서 한 명만 참석했다. 추기경 22명, 대주교 33명, 주고 150명, 수도원장 100명, 신학 박사 300명, 대학 대표 14명, 왕자 26명, 귀족 140명, 사제 4000명 등이 이 공의회를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로 만들었다. 


      p19 그는 이 그룹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모든 그룹이 각기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체면을 보존했다고 해석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불확실한 언어로 표현해서 모두가 최소한의 개혁만을 받아들이게 했다. 



      3. 교황청의 승리 : 1418~1447

        p20 마르티누스는 용기를 가지고 이런 어려움에 맞서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 인문주의자 한 사람인 포지오 브라치올리를 교황 비서로 임명했다. 


        p21 시간의 빠른 망각 속에 시들었다. 


        p23 민족주의의 종교 개혁이 루터보다 1세기 앞서서 이미 이루어진 듯했다. 


        p24 그리스도교 세계의 환희는 짧았다. 


        p25 교황은 피렌쩨에 머물면서 코시모 데 메디치 치하 인문주의와 예술의 발전을 알게 되었다. 페라라와 피렌쩨의 공의회에 참석했떠 그리스 학자들은, 절박하게 다가오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실현되면서 잃어버리거나 파괴될 고전 문헌의 보존에 대한 관심을 그의 내면에 일깨웠다. 



        15장 르네상스가 로마를 사로잡다 (1447~1492)

        1. 세계의 수도 

        p27 니콜라스 5세 교황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옥좌에 올랐을 때 로마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시대(270~275)의 성벽을 둘러싸고 있던 로마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넓이였고, 또 그 지역과 주민은 베네찌아, 피렌쩨, 밀라노의 주민 수보다 적었다. 


        p28 그들은 ‘브라비’를 이용해 반란을 진압하고, 서로 싸웠다. 브라비란 그들이 고용해서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도록 훈련을 시킨 튼튼한 깡패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p30 민주주의란, 지성, 안정, 평화가 널리 퍼지면서 생긴 사치품이다. 



        2. 니콜라스 5세: 1447~1455

          p33 머지않아 사르짜나의 토마소는 고전 고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함께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의 수입을 거의 모든 책을 사는 데 쓰고, 비싼 필사본을 사느라 돈을 빌리고, 앞으로 언젠가 돈이 충분히 생겨서 세상의 모든 위대한 책들을 하나의 도서관에 모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했다. 


          p34 이제 니콜라스 5세가 된 이 사람은 세 가지 목적을 가졌다. 좋은 교황이 되는 것, 로마를 새로 건설하는 것, 그리고 고전 문학, 학문, 예술을 복원하는 것 등이었다. 


          p35 그들의 작업에 대해서 그는 음악이나 시에 전율을 느낀 칼리프의 너그러움으로 보상을 해 주었다. 

          마네티와 조수들에게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전 성서를 새로 번역하라고 명했다. 


          p36 이 번역들에 대해 필렐포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는 멸망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이민을 왔다. 이 지역은 어차피 옛날에 대 그리스라고 불렸던 곳이다.”


          p39 니콜라스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자신을 너그럽기는 해도 전제 군주라고 여기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변했다. 의심에 시달리고, 원한에 괴롭고, 통풍으로 고통받아서 그는 빨리 늙었다. 

          티콜라스는 현실에 굴복했고 그의 피 속에서 생명의 욕구는 시들었다. 




          3. 갈릭스투스 3세 : 1455~1458

            p41 그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들은 그를 음모에서 보호해 줄 것이다. 

            피콜로미니 추기경이 후계자로 선출되자 로마는 지난 200년 만에 처음으로 커다란 환호성을 질렀다.




            4. 피우스(비오) 2세 :1458~1464

              p43 거의 무에서 출발한 에네아스 실비우스가 펜을 움직여 교황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요한 일들은 법이 아니라 무기에 의해 결정된다.”

              “구두쇠는 많은 돈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지 못한다.” 


              p44 “그는 침대에 누워 자정까지 글을 읽고 구술하곤 했다.”라고 동시대 사람인 플라티나는 말하고 있다. “그는 대여섯 시간 이상은 자지 않았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시간을 문학적 작업에 돌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한다. “나는 내 의무에서 시간을 빼내지 않고 잠자는 시간을 글 쓰는 데로 돌렸다. 그리고 노년의 시간에 식을 취할 시간을 훔쳐서 내가 지금 기억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후세를 위해 적어 두고자 한다.” 


              p45 그는 이제 쉰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모험 많은 삶이 그의 건강에서 많은 세금을 거두었기에 이미 늙은이처럼 보였다. 

               “실바룸 아마토르(숲을 사랑하는 사람)”


              p49 여러분은 이렇듯 수치스러운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우리 선배들이 어떤 수단으로 교회를 위해 권위와 존경심을 얻었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는 동일한 수단으로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절제, 순결, 결백, 신앙을 위한 열성, 지상에 대한 경멸, 순교를 향한 열망 등이 로마 교회를 드높이고 교회를 세계의 여주인으로 만든다. 



              5. 파울루스(바오로) 2세 : 1464~1471

                p53 위대한 남자들의 생애를 살피다 보면 한 남자의 성격이 죽은 다음에 형성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통치자가 자신에 대해 기록하는 사람들을 잘 대우해 주면 그들은 그를 사후의 거룩함으로 들어 올려 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통치자가 그들을 괴롭히면 그들은 그의 시신을 악의의 꼬챙이에 꿰어 태우거나 구워서 잉크병에 있는 가장 더러운 악명으로 사휘의 이름을 더럽힌다. 


                p55 그는 라틴 이름을 폼포니우스 라에투스라 짓고 고대 로마의 옷을 입고서 강의실에 나타나곤 했다. 새벽에 그의 강의를 들으러 몰려드는 군중을 수용할 강의실이 없었다. 일부 학생들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정에 오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경멸하고, 그 설교자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자신의 학자들을 그리스도교 도덕보다는 스토아 도덕으로 가르쳤다. 





                6. 식스투스 4세 : 1471~1484

                  p57 교황의 역사에서 가장 기묘한 변신 하나를 통해 그는 거의 하룻밤 만에 정치가이며 전사로 변했다. 

                  식스투스는 로마에 질서를 회복하고, 교황국가에서 교황사절의 권위를 되살리고, 이탈리아를 교황의 통합적인 통치 아래 두겠노라고 작정했다. 


                  p60 전쟁과 예술과 권력을 사랑한 확고한 황제 사제였던 식스투스는 망설임이나 술책 없이 거친 힘과 주저하지 않는 용기를 끝까지 밀어붙여 자신의 목표를 추구했다. 


                  p61 적대적인 베네찌아 대사 한 사람은 식스투스가 “교황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얻기 위해 펜과 잉크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했다고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현대 국가에도 타당한 말이다. 




                  7. 인노켄티우스 8세 : 1484~1492

                    p65 식스투스의 실패는 그가 죽은 다음 로마에 혼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p69 이런 최상층의 무질서는 로마의 도덕적 무질서를 반영하는 것이고, 또 더욱 심화시켰다. 

                    이와 같은 종교적 회의주의가 널리 퍼졌다. 




                    16장 보르지아 사람들(1492~1503)

                    1. 보르지아 추기경

                    p74 교황으로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정복할 수 없는 알렉산더의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이교의 교황을 위한 이교적인 시작이었다. 




                    2. 알렉산더 6세

                      p76 그리고 페라라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마는 자유 도시입니다. 누구든 자기 좋을 대로 말하고 쓸 수가 있어요. 그들은 나에 대해 나쁜 말을 많이 하지만 난 마음 쓰지 않습니다.” 


                      p80 알렉산더는 굴복하고 바티칸으로 돌아와서, 샤를이 자기 앞에 세 번이나 무릎 꿇는 것을 즐기고, 또 그가 교황의 발에 키스하려는 것을 너그럽게 말리고, 왕에게서 프랑스의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 들였다. 그러니까 알렉산더를 폐위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철회된 것이다. 


                      p81 이제 그는 세속 국가의 정복으로부터 교황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교황국가, 좋은 군대, 훌륭한 장군이 필수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3. 죄인

                        p84 그는 남자였던 것이다. 당시의 많은 성직자들이 그랬뜻이 그는 성직자의 독신주의가 힐데브란트의 오류였다고 느끼고, 추기경도 여자와 함께 지내는 즐거움과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다른 한편 자녀들을 향한 그의 헌신은 이따금 교회의 이익보다 더 많이 그의 관심을 차지했기에, 사제의 독신주의를 규정한 교회법이 지혜로운 것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p85 그의 신앙심은 가자였던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의 편지들은, 심지어는 쥴리아와 연관된 편지들조차도 개인적인 서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신앙심을 나타내는 구절들로 차 있다. 


                        p87 알렉산더는 열쇠와 제단과 그리스도를 판다네. 

                        그 또한 옳지, 그 자신도 그것을 위해 돈을 냈으니. 


                        p88 그의 행운의 별이 갑자기 떨어지고 자랑스럽고 행복한 세상이 완전히 흔들린 것처럼 보였을 때 그는 마키아벨리 방식의 부도덕성을 다 잃어버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과 교회를 개혁하겠노라고 맹세했다. 


                        p90 6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개혁 프로그램을 작성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진지하게 이 일에 임해 아주 탁월한 개혁안을 제출했다. 이 규정들이 시행되었다면 아마도 교회는 종교 개혁도, 반 종교 개혁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직 임명의 대가로 받는 돈이 없이 어떻게 교황청을 운영할 수입을 얻을 것이냐 하는 질문에 봉착하자 교황은 설득력 있는 답변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저항적인 세계에서 교회에 현실적, 재정적 힘을 실어줄 강력한 정치적 구조를 향한 꿈으로서, 교황의 정신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었다. 그는 개혁을 하루씩 뒤로 미루었다. 




                        4. 체사레 보르지아

                          p91 “위대하고 빼어난 영리함과 탁월한 소질을 가진 젊은남자, 명랑하고, 즐겁고 항상 기분 좋은사람”

                          “외모와 재치에서 형인 간디아 공작보다 훨씬 뛰어나다.” 


                          p93~94 그의 자부심은 이런 외모와 맞먹는 것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네가 해야 할 바를 하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이거나 아무도 아니거나.”라는 글귀였다. 


                          p98 이 시점까지, 긜고 가장 문제가 많은 그의 모험이 있고 난 다음에도 한 명의 주교, 한 명의 왕, 뒷날 음흉함으로 유명해진 한 명의 외교관이 체사레를 찬양하고 또 그의 행동과 그 목적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지가 있는 일이다. 


                          p102 그의 내면에 애정이란 아주 조금 밖에 없었는데 그 대부분을 누이인 루크레찌아에게 쏟아부었다. 그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한계 안에서 그는 루크레찌아를 사랑했다. 


                          p102~103 어떤 여자가 그의 생활 안으로 점유하고 들어오기에는 그의 권력의 의지를 위해 너무 많이 마음을 뺏겼다. 


                          p105 르네상스 교황들의 역사는 상당 부분이 전쟁의 선전과 외교관들의 거짓말을 출전 삼아 쓰였다. 




                          5. 루크레찌아 보르지아 : 1480~1519

                            p107 알렉산더는 아들에게 경탄하고 아마도 두려워하기도 했겠지만 딸에 대해서는 그의 천성이 가진 온갖 감정적 깊이를 가지고 사랑했다. 


                            그것은 당시 모든 선량한 소녀들이 겪는 정상적인 과정이었고, 또 낭만적 사랑이라는 선택의 지혜에 의존하는 우리 시대의 결혼보다 그런 결혼이 더 많은 불행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다. 


                            p111 어떤 서기는 그녀를 “교황의 딸이며 아내이며 며느리”라고 불렀다. 이런 악담도 그녀는 조용한 체념으로 견뎠다. 오늘날 르네상스 시대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런 비난이 잔인한 비방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비방들이야말로 수백 년 동안이나 그녀의 명성을 만들어 냈다. 






                            6. 보르지아 집안의 붕괴

                              p115 마키아멜리는 귀치아르디니와 같은 의견이었다. 그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속임 수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평생동안 다른 것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무도 나중에 깨뜨릴 약속을 그보다 더 강하게 맹세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일에 성공했다. 그가 세계의 이부분을 그토록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118 그의 죄는 자연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독신주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런 원칙은 어차피 머지않아 그리스도교 세계의 절반(개신교)이 거부할 원칙이었다. 


                              알렉산더와 체사레가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들, 즉 전쟁, 외교, 속임수, 배신, 조약 위반, 동맹국 버리기 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국가들도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다. 


                              p122 체사레는 단 한명의 동료와 더불어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이것은 문제 많은 삶에 명예로운 종말이었다. 체사레 보르지아의 생애에 있는 많은 요소들은 우리는 소화할 수가 없다. 

                              보통 그는 목적의 달성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아마도 병을 인해) 자신의 불행을 용기와 품위로 맞이할 힘이 없었다. 오직 그의 죽음만이 그의 삶에 희미한 고귀함의 빛을 가져다 주었다. 






                              17장 율리우스 2세 (1503~1513)

                              1. 전사(戰士)

                              p125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세의 탐색하는 듯한, 심오한 초상화를 앞에 두면 쥬리아노 델레 로베레가 교황의 직위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의 하나였다는 것을 즉시 알아 볼 수 있다. (중략)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를 10년 동안 전쟁과 소란 속으로 몰아넣고, 외국의 군대에서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고, 낡은 성 베드로 성당을 허물고 브라만테와 다른 100명의 미술가들을 로마도 데려오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찾아내어 격려하고 그들의 방향을 정해준 사람,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온 세계에 새로운 성 베드로 성당과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그리고 바티칸의 방들을 선물해 준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이다.”보라, 여기 한 남자가 있다!”


                              p126 그의 격한 성질을 아마도 첫 호흡을 하면서부터 그의 특징이었을 것이다. 

                              그는 알렉산더와 정반대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보르지아 추기경은 명랑하고 낙천적이고 선량했다. 반명 율리우스는 강직하고 의젓하고 정열적이고 참을성이 있고, 쉽게 화를 내고 이 싸움에서 바로 저 싸움으로 넘어가고, 전쟁 때를 빼고는 진짜로 행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p128 율리우스는 페루지아에서 시간을 잃지 않았다. 그의 진짜 목표는 볼로냐였다. 


                              p129 프랑스 대사가 그에게 베네찌아에 대한 프랑스의 승리를 전하면서 “하느님이 원하셨다”라고 덧붙였을 때 율리우스는 화를 내며 대답했다. “악마가 그것을 원했다!”라고. 


                              p131 교황은 자신의 희망에 의해 대단한 실망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는 전설적인 작가들이 안테우스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안테우스는 헤라클레스의 힘에 의해 기운을 잃고 땅에 떨어질 때마다 더 큰 힘과 활력을 얻었다고 한다. 역경이 교황에게 동일한 효과를 냈다. 그가 극도로 실망하고 낙담한 것으로 보일 때면 그는 정신을 되찾고, 더욱 확고하고 한결같은 정신과 더욱 굽히지 않는 결단으로 다시 일어서곤 했기 때문이다




                              2. 로마의 건축 : 1492~1513

                                p135 그의 업적에서 가장 지속적인 부분은 미술 후원이었다. 율리우스 2세 치하에서 르네상스는 수도를 피렌쩨에서 로마로 옮겨 왔다. 그리고 르네상스 미술은 여기서 절정에 도달했다. 그런 다음 레오 10세 치하 로마에서 르네상스의 문학과 학문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 밖에도 100명의 미술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것, 그리고 12번의 전쟁을 치르고도 교황청 국고에 70만 플로린의 돈을 남겼다는 사실은 역사의 기적 중의 하나였고, 종교 개혁의 원인 중의 하나였다. 


                                p138 이 시기 건축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은 도나토 브라만테이다.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왔을 때 그는 이미 쉰여섯 살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유적지를 탐색하면서 그의 내면에서 고전 양식을 르네상스 건축에 적용하고 싶다는 젊은이의 열정이 불타올랐다. 

                                (대가들은 보통 사람과 다르고, 대가들은 대가들끼리 비슷한 점이 있다. 죽을 때까지 젊은이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p140 “넓고 큰 길을 새로 내서 늙고 힘없는 영혼들이 말을 타고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축복 받은 영혼들을 위해 더욱 쾌적한 집이 되도록 천국을 새로 짓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제안을 거절하자 브라만테는 그럼 지옥으로 내려가서 옛날 지옥은 지금쯤 불에 타 버렸을 테니까 더 나은 새 지옥을 짓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질문했다. “진지하게 말해 보게, 어쩌자고 내 교회를 망가뜨렸나?” 브라만테가 그를 위로하려고 했다. “레오 교황에 새 교회를 지어 드릴 겁니다.” “그럼 좋아.” 베드로가 말했다. “자넨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천국 문 앞에서 기다려야겠네.” 

                                 새 교회는 1626년에 완성되었다. 



                                3. 젊은 라파엘로

                                1. 형성기 : 1483~1508

                                p141 브라만테가 죽은 다음 레오 10세는 그의 뒤를 이어 새 베드로 성당 건설을 감독하는 직책에 서른한 살 된 젊은 화가를 임명했다. 그는 브라만테의 둥근 지부으이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기에는 너무 젋었지만 그래도 역사상 가장 행운아이고 가장 성공적이고 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화가였다.


                                p148 1508년 라파엘로는 피렌쩨에서 그의 삶의 흐름을 변화시킨 부름을 받았다. 



                                         2.  라파엘로와 율리우스 2세 : 1508~1513

                                  p149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의 거대한 기념묘를 위한 조각을 하면서 동시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성당을 새로 설계하는 중이었다. 목수인 베로나의 프라 죠반니는 스탄쩨를 위해 문과 의지를 조각하고 있었다. 페루지노, 시뇨렐리, 페루찌, 소도마, 로토, 핀투리키오 등이 이미 벽에 그림을 시작한 상태였다. 카라도쏘라 불리던 암브로지오 포파는 자기 시대의 첼리니로서 온갖 종류의 금세공을 하고 있었다. 


                                  p150 ‘서면의 방’을 위한 계획은 당당하고도 숭고한 것이었다. 이 그림들은 르네상스의 문명에서 종교와 철학, 고전 문화와 그리스도교, 교회와 국가, 문학과 법 등이 하나로 통합된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되었다. 

                                   그 결과 신앙의 신비에 대해 가장 고집 센 회의주의자라도 개심시킬 만큼 대단한 파노라마가 만들어졌다. 

                                   

                                  p151 그러나 이제 스물여덟 살이 된 이 젊은이가 똑같은 힘과 장엄함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학문과 철학의 역할도 표현할 수 있을까? 라팔엘로가 그렇게 많은 독서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자신의 붓으로 말하고 눈으로 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형태와 색체의 세계에 살았고, 이런 세계에서 남자와 여자들의 심오한 행동으로 표현되니 않은 한 말이란 하찮은 것이 지나지 않았다. 


                                  p153 이렇게 해서 젊은 화가는 “음악이 없이는 삶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 준다. 


                                  p154 파라엘로는 이곳에서 힘을 다 소진했기에 이토록 거대한 탁월함을 다시 성취할 수는 없었다. 





                                  4. 미켈란젤로

                                  1. 젊은 시절 : 1475~1505

                                  p157 율리우스가 사랑한 화가이며 조각가, 성급한 기질과 무시무시한 성격, 그리고 정신의 힘과 깊이라는 면에서 그와 경쟁할 만한 사람, 인류의 기록에 남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슬픈 예술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p157~158 미켈란젤로는 자신에게 한두 방울 귀족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가차없는 탐구의 결과 그가 잘못 생각 했음이 밝혀졌다. 


                                  p158 그는 뒷날 자신이 유모의 젖과 함께 끌과 망치를 빨아들였다고 말했다. 

                                  당시 많은 예술가들처럼 고대의 최면에 완전히 빠져든 적도 없었다. 그는 고전보다는 히브리 쪽이고, 정신적으로는 카톨릭보다는 개신교 쪽이었다. 

                                  그는 글보다 드로잉을 더 좋아했다. 이것은 드로잉의 고약한 점이었다. 

                                   무엇이든지 예술을 위한 대상으로 보았다. 그의 친구 콘티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주 생선 시장으로 가서 지느러미의 모양과 색깔을 살펴보고, 또 그 눈의 색깔과 몸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탐궇ㅆ다. 그리고 이 모든 세부 사항들을 그림에서 극단적인 근면함으로 재생하였다. 

                                   기를란다요와 함께 지낸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천성과 기회가 그를 조각으로 이끌었다.


                                  p159 이 시기에 사보나롤라가 청교도적인 개혁의 불같은 복음을 설교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주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잊지 않았다. 아니면 부패한 이탈리아의 종말을 알리는 이 수도사의 성난 외침이 사람이 빽빽이 들어찬 대성당의 고요를 뚫고 지나갈 때 그의 젊은 피를 관통하던 그 전율을 결코 잊지 ㅇ낳았다. 


                                  p161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도 미켈란젤로는 예술가들이 거의 시민 수만큼이나 많은 도시에서 예술로 먹고살기란 어려운 일임을 느꼈다. 


                                  p163 재밌고도 용서할 수 있는 생각이다. 구경꾼들은 금세 그 온화한 얼굴과 화해를 하게 된다. 비참한 고통에 찢기지 않고, 조용한 슬픔과 사랑에 잠긴 모습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체념한 채 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 상처가 깨끗이 씻기고, 온갖 수치에서 벗어난 소중한 아들의 몸은 마지막 한순간 그를 낳아 준 여인의 무릎에서 쉬고 있는데, 죽어서도 아름다움 모습이다. 삶의 모든 정수와 비극과 구원이 이 단순한 그룹상에 나타나 있다. 종족을 이어가는 출산의 흐름, 모든 탄새엥 대한 형벌로서 죽음의 확실함, 그 친절함으로 우리 죽을 운명을 고귀하게 만들고, 또 새로운 탄생을 통해 모든 죽음에 도전하는 사랑. 이 작품을 미켈란젤로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프랑수아 1세가 선언했는데, 그것은 옳았다. 


                                  p166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돌에서 표면을 제거하기만 하면 조각상에 존재를 만들어 준다. 돌이 많이 벗겨져 나갈수록 이 모습은 점점 더 자라난다. 


                                            2.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 : 1505~1513

                                    p171 “거대한 청동상으로 내 조각상을 만들어 주기 바란. 그러니까 성 페트로니오의 정면부에 놓은 조각상 말이야.” 미켈란젤로는 조각으로 돌아갈 수 있어 기뻤다.


                                    “내가 이 모든 일을 처음 부터 다시 해야 한다면 난 그 일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 


                                    p172 1508년 5월부터 1512년 10월까지 4년 이상 동안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천장에서 일을 했다. 


                                    p173 그는 레오나르도의 말, “혼자 있을 때면 너는 완전히 너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말에 대한 한 예가 되었다.  

                                    “내가 이 예술을 만족시키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모두 다 하면 끝납니다.” 


                                    p175 이번 천장화로 그는 회화에서 라파엘로와 대등하거나 오히려 그를 능가했다. 그가 정복할 세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미켈란젤로를 위대한 조각가, 화가, 도안가로 볼 때 많은 예술가들 중 내게 가장 매력적인 사람으로 다가온다. 엄청 끌린다.)





                                    18장 레오 10세 (1513~1521)

                                    1. 소년 추기경

                                    p179 모범의 영향은 그 자체로 이미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마도 너를 부패하게 하고 악으로 이끌려고 특별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너 스스로도 이미 알아챘을지 모르겠다마는 그렇게 이른 나이에 그토록 대단한 직위를 얻게 된 일이 시샘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 네가 그런 명예를 얻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사람들은, 네가 일반 대중의 좋은 평가를 없애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남몰래 너의 명예를 줄이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선의 허물을 피하라. 행동이나 말에서 온갖 겉치레의 유혹을 벗어나라, 돈을 너무 아끼지 말고 지나치게 진지하게 보이지도 마라. 때가 되면 너는 이런 충고를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하고 행하게 되리라 희망한다. 


                                    p180 다른 사람을 너무 많이 믿기보다는 너무 적게 믿어라.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네게 권하고 싶은 한가지 규칙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너의 건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하루 일과를 정돈하고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p182 누구나 놀라고 즐거워했다. 알렉산더 6세와 체사레 보르지아의 시커먼 음모, 그리고 율리우스 2세의 전쟁과 소란과 분노를 겪은 다음, 태평스럽고 편안한 천성과 재치와 예의 바름으로,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후원으로 이미 유명한 젊은 남자가 아마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에게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2. 행복한 교황

                                    p184 행운의 삶을 타고난 레오의 기본적인 특성은 선량함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는 말을 하고, 개신교도만 빼고는 모든 사람에게서 가장 좋은 면을 보았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베풀어주었기에, 이런 너그러운 자선 행위는 그리스도교 재원에 대한 무거운 어음 발행과 더불어 종교 개혁을 만들어 내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p185 그는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고유의 삶을 살도록 해 주었다. 


                                     

                                     

                                    3. 학자들

                                    p190 셈 언어 학문을 정착시킨 것은 그의 공로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방금 쇠퇴하기 시작한 그리스 연구를 회복시킨 사람도 레오였다. 


                                    p192 이것은 인간의 삶을 장식하고 그의 길을 안내해 줄 뿐만 아니라 모든 특수한 상황에 적응할 수도 있고, 역경에서는 위안이 되고, 번영할 때는 즐거움과 명예를 주는 유용한 것입니다. 


                                    p193 레오는 어떤 문헌이 인류를 이롭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을 교회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 시인들

                                    p197 이 시대의 핵심적인 영광은 문학이었다. 사무라이 시대 일본에서 농부로부터 황제까지 모두가 그랬듯이, 레오 시대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그의 어릿광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시를 썼다. 


                                    5. 고전 예술의 복구 

                                    p204 예술가와 인문주의자들의 물결이 밀려 들어오면서 붕괴의 정도가 약해지고, 옛 기념물들을 보존하기 위한 운동이 생겨났다. 교황들은 이교의 조각과 건축물 잔해를 수집해서 바티칸과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보관했다. 

                                    발굴자들이 티투스 목욕탕 근처에서 복잡한 그룹 조각상을 새로 발굴햇을 때 로마 전체가 전율했다. 


                                    p206 예술과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발굴된 유물의 영향이 작용했다. 

                                    문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이교의 신화로 바꾸고, 낙원 대신 올림포스를 밀어 넣었다. 회화에서 고대의 영향은 이교적 주제라는 형식을 취했다. 


                                    6. 미켈란젤로와 레오 10세 

                                    p210 이 유명한 무시무시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에너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89년 동안이나 지탱해 주기도 한, 사납게 불타오르는 힘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그 에너지를 단 하나의 목표, 곧 예술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모든 일을 다 무시해 버리는 의지의 힘이었다. 통합시키는 의지력에 의해 통제된 에너지란, 천재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형태 없는 돈을 도전으로 보고, ‘분노로’ 그것을 잡아 망치로 때리고 끌로 파서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는 이 에너지는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삶의 하찮은 것들을 분노로 휩쓸어 내버리는 힘이기도 했다. 그 힘은 의상이나 청결함이나 표피적인 예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하고서, 약속도 깨뜨리고 우정도, 건강도 깨뜨리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깨뜨리고 몸과 정신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지만 그러나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회화, 가장 위대한 조각,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건축 일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이탈리아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p211 그는 귀족의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을 더 좋아하고, 지식인 보다 단순한 사람을, 부유함의 사치보다 일꾼들의 노역을 더 좋아했다. 수입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는 친척들의 생계를 위해 내주었다. 그리고 고독을 좋아했다. 

                                     “예술만 해도 마누라가 너무 많아요. 그게 충분히 말썽을 만들어 냅니다. 자식을 얘기하자면 내가 앞으로 만들 작품이 내 자식입니다. 이 작품들이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 해도 어쨌든 한동안은 계속 살아갈 테니까요.” 


                                    p212 단 한 시간 행복한 순간을 보낸 뒤로 이제 거의 15년이 지나갔습니다. 


                                    7. 라파엘로와 레오 10세 : 1513~1520

                                    p213 그는 20여 명의 화가들을 로마로 불러왔지만 그가 언제나 보살핀 거의 유일한 사람은 라파엘로뿐이었다. 

                                    라파엘로는 레오와 기질이나 취향이 잘 맞았다. 


                                    p217 젊은 예술가는 새로운 기법에 대단히 욕심이 많았다.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친구인 라파엘로를 비밀리에 데리고 가서 시스티나 천장화가 완성되기도 전에 그림을 보여 주었다. 라파엘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어쩌면 그의 자부심에 아직도 남아 있던 겸손함으로 그는 자신의 재능보다 훨씬 더 강력한 천재를 보고 있다고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p220 라파엘로의 경이로운 생산성은 그의 작품을 공정하게 요약하기를 어렵게 한다. 거의 모든 작품이 걸작이기 때문이다. 


                                    8. 아고스티노 키지

                                    p221 아고스티노 키지는 로마의 새로운 그룹을 대표했다. 이 그풉은 보통 로마 출신이 아닌 부유한 상인이나 은행가로 그들의 부는 로마의 오래된 귀족들을 밀어내고, 예술가와 문인들을 향한 너그러운 후원은 오로지 교황과 추기경들하고만 겨룰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9. 라파엘로의 마지막 시기 

                                    p225 여기서 그는 아폴레이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얻은 이야기를 위해 천재적인 상상력을 동원했다. 


                                    p226 자신의 적나라한 감각주의를 그대로 지닌 채 그는 언제나 좋아하는 주제인 성모 그림으로 돌아오곤 했다. 


                                    p229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추기경에 임명될 것이라는 희망에서 결혼을 미루었다고 말하고 있다. 추기경 자리에 올라서는 데 결혼은 가장 방해가 되는 일이었다. 


                                    p232 미켈란젤로가 더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는 세 분야에서 위대했고, 또 사유와 예술에 더욱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라파엘로에 대해서 “그는 깊은 탐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한 모범적 사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라파엘로가 모방을 통해서 다른 여러 예술가들의 탁월함을 습득했고, 근면한 재능으로 그런 탁월한 점들을 결합시켜서 완성된 양식으로 만들어 낸 것을 뜻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게서 길잡이를 내동댕이치고, 거의 과격하게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분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너무 행복해서 전통적인 격렬한 의미의 천재가 될 수가 없었다. 

                                     

                                    p233 그는 율리우스 2세, 이어서 레오 10세, 이어서 키지의 요구와 기분에 자신을 맞췄다.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미켈란젤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그는 질문하지 않고, 의심도 만들어 내지 않고 어떤 두려움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우리에게 신의 음료와도 같은 삶의 사랑스러움을 제공한다. 그는 지성과 감정 사이, 육체와 영혼 사이에 어떤 갈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피타고라스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대립의 조화이다. 그의 예술은 그것이 건드리는 모든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종교, 여인, 음악, 철학, 역사, 전쟁까지도. 그 자신 행운이 많고 행복했던 사람이라 그는 명랑함과 우아함을 사방으로 내뿜는다. 

                                    천재에 유사했던 덕에 그는 가장 위대한 존재의 바로 아래쪽에, 그러나 여전히 그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단테, 괴테, 키츠,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10. 정치가 레오

                                    p237 돈의 결핍은 한때 행복했던 레오의 통치를 힘들게 만들었다. 


                                    p240 그는 예술 후원에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가장 깨인 사람은 아니었다. 온갖 후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시절에 위대한 문학이 나타나지 ㅇ낳았다. 


                                    p241 이 시대는 그의 이름을 지녔다. 그리고 그것이 옳을 것 같다. 그가 로마 르네상스에 인장을 찍기보다는 오히려 빼앗아 갔지만 그래도 피렌쩨에서 부와 취향의 메디치 전통을 로마로 가져온 사람은 그였다. 

                                    그 자신은 이 절제를 모르는 시대에 특이할 정도로 금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에라스무스  “로마여, 내가 너를 잊으려면 레테의 강물에 몸을 던져야 하리라. 얼마나 소중한 자유이며, 책의 방식으로 된 얼마나 대단한 보물들이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기픈 학식이고, 그 얼마나 유익한 사회적 교류들이었던가! 다른 어디서 대체 단 한 장소에서 그렇듯 학식 있는 모임, 그렇게 다양한 재능들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p242 대체 어디서 한 번 더 하나의 도시에 10년 동안 이렇듯 많은 인재들이 모인 것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붕괴 

                                    19장 지식인의 반란(1300~1534)

                                    1. 비밀 종교

                                    p245 모든 시대와 민족에서 문명이란 소수의 산물이며 특권이고 책임이다. 무의미함이 끈덕지게 널리 퍼지는 일에 익숙해진 역사가는 미신의 찬란한 미래를 어느 정도 각오하게 된다.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완전한 국가들이 나올 것이란 기대도 하지 않는다. 어떤 세대든지 오직 적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경제적인 고민에서 벗어나, 조상이나 주변의 사고방식 대신 자신만의 사고를 펼칠 여가와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가는 또한 모든 시대에 소수의 남자와 여자들이 두뇌의 힘으로, 아니면 태생이나 상황의 이점으로, 미신과 신비주의와 경박한 믿음에서 벗어나 그것의 무한한 무지를 의식하고서 지식의 친절함을 갖춘 지성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만으로도 기쁘게 여긴다. 

                                     그렇듯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도 문명은 소수의,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다수를 이루는 단순한 보통 사람들은 땅을 갈고 파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짊어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을 하느라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힘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의 분위기에서 자신의 의견, 종교,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답변 등을 얻거나, 아니면 조상들의 오두막집과 함께 그것을 그냥 물려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판이니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들을 위해 생각을 하도록 했다


                                    p250 귀치아르디니는 이렇게 소리쳤다. “점성술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백 가지 틀린 말을 하고 단 하나만 맞혀도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믿어준다. 다른 사람들은 백 가지 진실을 말하고 단 하나만 틀리게 말해도 온갖 신뢰를 다 잃어버리는 데 말이다.”


                                    2. 과학

                                    p251 이렇듯 밑에는 미신, 위에는 자유주의가 판치는 분위기에서 과학은 베살리우스가 나오기 이전 200년 동안 그저 평범한 발전을 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미술, 인문학, 시 등의 분야로 후원과 명예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혹은 지적 생활에서 과학적 방법과 사유에 대한 명백한 요청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중세의 사랑이 성숙하여 위대한 미술이 되었다. 그러나 중세에 과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은 별로 없었다. 


                                    p251~252 르네상스는 미술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고, 작은 부분을 문학에, 철학에는 아주 조금, 그리고 과학에는 가장 조금 영혼을 바쳤다. 

                                    (현대는 경제에 우리의 영혼을 바치고 있나? 대중문화에? 우리는 지금 어떤 분야에 우리 각자의 영혼을 바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 부분이다.)


                                    3. 의학

                                    p254 문명화된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의사들은 인류의 가장 탐나는 존재이며, 또 가장 풍자를 받는 존재라는 명예를 두고 여자들과 경쟁을 벌이곤 했다. 


                                    p260 ‘매독(syphilis)’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에서 가장 다양하면서도 가장 성실한 사람의 하나인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에 의해 처음으로 쓰였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농경가>>를 모범 삼아 라틴어러 <매독, 혹은 프랑스 병에 대하여>라는 특이한 시를 썼다. 


                                    4. 철학

                                    p262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은 죠르다노 브루노이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그의 가련하고 영웅적인 회의주의 발언들을 생각이나 한단 말인가?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 철학의 세계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표현함으로써 철학적 혁명을 예비했다. 그러나 발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너무나 영리해서 자기들의 신념을 그냥 책상에 놓아두지 않았다. 


                                    p263 삶의 두 가지 요소들이 다시 등장하면서 철학을 되살려 냈다.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갈등이 그 하나이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다시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과 아베로에스(이슬람교 전통과 그리스 사상을 통합시켰다.)주의로 갈라진 일이 그것이다. 


                                    p264 말은 많은 사람들처럼 하되 생각은 극소수의 사람처럼 하라. 


                                    p265 지혜는 분명 계속 환생을 하거나 아니면 메아리처럼 보인다. 수없이 많은 오류의 세대를 거치면서도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p266 정신은 오로지 물체를 통해서 세상에 작용할 수가 있다. 따라서 죽을 운명을 지닌 껍질보다 오래 살아남아 신체에서 분리된 영혼이란 아무런 기능도 없고 도움도 주지 못하는 망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폼포나찌는 우리는 그리스도교도이며 신앙심이 깊은 교회의 아들로서 개인 영혼의 불멸성을 믿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p267 보이지 않는 원인에 의존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자연적인 것을 경멸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실성은 어떤 확실한 개연성으로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기적이란 그 힘과 방법이 오직 부분만 우리에게 알려진 자연적 힘의 특이한 표출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정령이나 신의 탓으로 돌린다. 자연 원인이라는 이러한 관점을 부인하지 않은 채 그는 점성술을 상당히 받아들였다. 인간의 생명만이 천체의 움직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단체들도, 심지어는 종교까지지도 하늘의 영향에 따라 부흥하거나 멸망한다고 여겼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도 타당하다. 폼포나찌의 말에 따르면 당시 현재의 순간에 그리스도교가 죽어 가고 있다는 표지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교도로서는 이 모든 것을 다 헛소리로 여겨 부정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5. 귀치아르디니

                                    p272 우리 취향에는 지나치게 시니컬하고, 우리의 희망에는 지나치게 비관적이지만, 하늘을 떠도는 탐조등처럼 시대를 훑어보고, 오로지 사후의 출판만을 염두에 둔 작가의 솔직함으로 숨김없이 표현한 사람이었다. 


                                    p275 정직함은 칭찬을 얻고 위장은 비난과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정직함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쓸모가 많다. 그래서 나는 삶의 보통 상황에서는 개방적이고 정직하다가 아주 중요한 어떤 일들의 경우에만 위장을 이용하는 사람을 찬양해야겠다. 정직하다는 평판을 많이 얻을 수록 이것은 더욱더 성공적이다. 


                                    6. 마키아벨리

                                    1. 외교관

                                    p276 자기 시대 가장 냉소적인 사상가이며 고귀한 이념으로 불타던 애국자였다. 시도한 모든 일에서 실패했으나 역사에는 자기 시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 니콜로 마키아벨리.


                                          2.     작가이며 인간

                                    p280 태양이 뜨는 것과 함꼐 일어나 숲으로 가서 몇 시간 동안 어제의 작업을 살펴보곤 하지.(중략) 단테, 페트라르카, 혹은 조금 못 미치는 시인들,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사람들 말일세.(이 부분을 읽고나니 시칠리아 갈때 단테와 함께 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살짝 든다. ^^)


                                    p281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와 서재로 간다네. 문지방에서 진흙과 먼지가 잔뜩 묻은 촌뜨기의 옷을 벗어 던지고 궁정의 예복을 입는다고 생각을 한다네. 이렇게 어울리는 옷을 차려입고서, 고대인들로 이루어진 고대의 궁정으로 들어가는 거지. 그들에게 충심으로 환영을 받고 오직 나만을 위한 식사를 대접받고, 부끄러운 없이 그들과 토론을 벌이고, 그들 행동의 동기를 물어본다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친절하게 내게 대답을 해 주지. 이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고, 그 어떤 말썽도 기억하지 않고, 가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운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아. 내 존재 전체가 그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네. 단테가 이미 들은 것을 기억 속에 보존하지 않고는 어떤 학문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나는 이들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얻은 것을 기록해서, <<군주론>>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네. 


                                    p287 생명과 희망의 불꽃이 깜빡거리다가 꺼지고 그의 육체에는 영혼이 없어졌다. 

                                    “아무리 훌륭한 찬양의 말도 이토록 위대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비명은 마침내 통일된 이탈리아가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의 꿈을 기억하는 것을 목격했다 


                                                3.       철학자

                                    p287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이토록 독립적이고 두려움이 없는 사유를 달리 찾아볼 길이 없다. 마키아벨리는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문 뱃길로 새로운 항로를 열었다고 주장할 만도 하다. 


                                    p288 인간의 천성이 절대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의 철학, 곧 통치의 학문이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혜로운 사람이 말하기를 미래를 예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과거와 상의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사란 앞선 시대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사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똑같은 정열에 따라 움직이게 될 미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똑같은 정열에 따라 움직이게 될 미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사란 필히 동일한 결과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략) 나는 세계는 항상 똑같았으며, 언제나 똑같이 많은 선과 악을 포함했다고 믿는다. 비록 시대에 따라, 민족에 딷라 그것이 다르게 분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행운은 우리 활동의 절반을 결정한다. 그래도 여전히 다른 절반은 우리가 결정하도록 남겨져있다.”


                                    p289 얻고자 하는 소망은 실로 대단히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것이며, 인간은 할 수 있을 때마다 언제나 얻으려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들이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한다. 


                                    천성적으로 사악한 인간을 법과 질서에 익숙하도록 길들이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종교이다. 


                                    p292 마키아벨리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은 볼테르, 디드로, 페인, 다윈, 스펜서, 르낭 등의 반감과는 아주 다르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거부했으나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규범은 유지하고 존중했다. 이런 태도는 니체에까지 계속되었고,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을 완화시켰다. 


                                    p297 그러나 통치자가 사랑 없이 두려움만 얻거나, 아니면 두려움 없이 사랑을 얻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는 사랑을 버려야 한다. 


                                          4.      고찰

                                    p302 그는 국가라는 우상을 숭배하느라 길을 잃었다. 


                                    p303 도덕성이란 그것을 가르치고 강요할 준비를 갖춘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들 사이의 도덕성은 국제법을 지켜야 한다는 대중의 의견과 물리적 힘을 갖춘 국제 기구가 구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 각국의 국민들은 밀림의 맹수들과 같다. 


                                    페트라르카에서 마키아벨리에 이르는 200년 동안 이탈리아의 지적 반란을 돌아보면, 그것의 정수와 기초는 단순히 다른 세계를 향한 훈련된 관심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이 점처 커진다는 점도 알 수 있다. 


                                    p304 이 모든 것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빛나는 정신의 해방이 도덕성에 대한 초자연적 존재의 승인을 없앴다. 그리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대체할 다른 어떤 가치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 결과 모든 금지를 거부하고, 또 충동과 욕망을 풀어놓고, 즐거운 태도로 부도덕성을 잔뜩 만들어 냈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들이 그렇게 행한 이후에 역사가 목격하지 못한 규모로 신화를 산산이 부수고 정신을 해방시키고 도덕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20장 풀어진 도덕(1300~1534)

                                    1. 불사의 원천과 형태들

                                    p306 그들은 인생은 즐겨야 하고, 모든 쾌락은 유죄임이 입증되지 않는 한 무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적인 관점에서 점점 더 공감을 갖게 되었다. 여성의 매력이 신학의 금지에 대해 승리했다. 


                                    p309 사람들은 더는 선하기를 원치 않고 강하기를 원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비판하는 성직자 계층과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물론 눈부신 예외들이 있어서 지적 해방과 점잖은 태도를 함께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암브로지오 트라베르사리, 비토리노 다 펠트레, 마르실리오 피치노, 알두스 마누티우스 등. 


                                    2. 성직자의 도덕성

                                    p312 지상의 소금은 그 맛을 잃었다. 


                                    p314 종교 재판의 활동은 성(性)과 향연보다도 더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3. 성도덕

                                    p315 교육과 사회적 위치라는 측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대등함이 더 커진 것이 남녀 사이에 새로운 지적 동지 관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4. 르네상스 남자 

                                    p322 지적 해방과 도덕적 해이가 결합되어 ‘르네상스 남자’가 만들어졌다. 이런 명칭을 쓰기에 적합할 만큼 전형적인 유형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대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10가지 이상의 남자들의 유형이 있다. 

                                     직업이 사람을 만든다. 

                                    르네상스 남자의 특질은 두 가지 초점을 중심으로 선회한다. 지적 용감성과 도덕적 용감성이다. 


                                    p323 보편인이란 구상이 대담하고 행동이 단호하며 언변은 유려하고 기예에 뛰어나고 문학과 철학에 능하며, 궁정에서는 여자들과 잘 지내고 전쟁터에서는 병사들과 잘 지내는 사람이다. 


                                    p324 오로지 한 가지 점에서만 공감할 수 있는,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있었다. 곧 이전 어느 때보다도 삶을 강렬하게 살았다는 것. 중세는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혹은 부정하는 척 했었다. 르네상스는 충심으로, 그리고 영혼과 힘으로 삶을 긍정했다. 


                                    5. 르네상스 여성

                                    p324 여성의 출현은 이 시대의 가장 밝은 측면의 하나이다. 유럽 역사에서 여성의 지위는 보통 부가 늘어나면서 함께 높아지곤 했다. 


                                    p326 아름다움 자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를 좇아서 “여러 부분들의 구성, 통일성, 결합에서 나오는 정돈된 조화이고, 일치이다. 각 부분은 다시 그 자체로 균형이 맞고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러나 합쳐져 전체를 이루기 전에 그들끼리 서로 달라야 한다.”


                                    p330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프랑스 계몽주의와 마찬가지로 양성적이었다. 여성들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나섰다. 남자들은 거칠고 자인하기를 그치고 세련된 매너와 언변을 갖추었다. 온갖 느슨함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유럽이 지난 천 년 동안 알지 못했던 정도의 우아함과 세련미를 얻었다. 


                                    6. 가정생활

                                    p331 애드링 부담이 되는 도시에서 가족은 소규모였다. 부자일수록 애들이 더 줄었고, 많은 가정은 아예 자녀를 하나도 두지 않았다. 

                                    가족은 여전히 경제적, 도덕적, 지리적 연합체였다. 


                                    7. 일반적인 도덕성

                                    p334 공정한 판돌피니조차도 불멸을 위한 삶보다는 부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양심을 신축적으로 늘렸다. 


                                    p338 종교적 신앙이 시들자 많은 사람의 마음에서 선악의 관념이 유용성의 관념으로 대체되었다. 

                                    관습은 힘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8. 훌륭한 몸가짐과 오락

                                    p341 대화의 기술(bel parlare), 말하자면 지성, 세련됨, 예의, 명료함, 재치 등은 르네상스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다. 


                                    9. 연극

                                    p347 이탈리아의 도덕성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이탈리아 희극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지적인 자유가 도덕적 타락과 결합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 주는 부분이다. 


                                    10. 음악

                                    p349 거의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이 노래를 잘 불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단순한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테너, 알토, 베이스가 받쳐주는 가운데 소프라노가 멜로디를 주도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보다 이전 시대에는 테너가 멜로디를 주도했기에 ‘테너’라는 이름을 얻었다. (tenore는 중심 내용이라는 뜻)소프라노라는 명칭은 이 음악이 나머지보다 위에 놓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p352 나는 우리 인간의 비참함에 대하여 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그리스 단어(Kyrie eleison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에 귀를 기울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다고 확실하게 단언한다. 그리고 음악이 우리를 부드럽게 하고 달래 주는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p353 정말이지 시는 언제나 노래 아니면 적어도 낭송되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던가?


                                    p354 단테 시대에 음악은 시의 보조자에 지나지 않았다면 지금 음악은 완전히 자란 동반자가 되었다. 노랫말을 불분명하게 하거나 감정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하나로 합쳐 영혼을 두 배나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적인 기교로 교육받은 정신을 즐겁게 했다. 


                                    p357 르네상스 음악의 위대한 특징은 이론이 아니며 기술적 발전도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의 세속화였다. 


                                    11. 조망

                                    p357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도덕성은 정말로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의 그것보다 더 나쁜것이었던가? 비교를 하기란 어렵다. 모든 증거가 선택이기 때문이다. 


                                    p360 통치에서 배제된 채, 부를 잔뜩 가진 사람들은 쾌락을 좇고, 그들이 세이렌의 품에 안겨 있을 때 외국의 세력이 침입해서 그들을 놀라게 했다. 


                                    21장 정치적 붕괴(1494~1534)

                                    1.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발견하다 :1494~1495

                                    p362 그동안 축적된 이탈리아의 부가 도시들을 높여 최고의 광채와 예술로 데려가던 한 세대 동안에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 운이 다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운이 다했다. 


                                    2. 새로운 공격 : 1496~1505


                                    3. 캉브레 동맹 : 1508~1516 

                                    p374 이제 교황은 너무 늦게 이탈리아에 감동적인 표어를 주었다. “야만인들을 몰아내라!” 


                                    p375 1515년 8월에 그는 다시 4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프랑수아 1세) 이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군대였다. 스위스 사람들이 싸우러 나왔다. 밀라노에서 몇 마일 떨어진 마리냐노에서 이틀 동안 격심한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수아 자신도 롤랑처럼 싸웠고, 슈발리에 드 바야르에게서 즉석 기사 작위를 받았다. 스위스군은 이 전쟁에서 1만 3000명이 전사했다. 그들과 스포르짜는 밀라노를 포기했고, 이 도시는 다시 프랑스의 차지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황폐해졌다. 그러나 예술과 문학은 비극적 사건들의 자극을 받은 탓이었는지 아니면 번영을 누린 과거의 힘에 의해서였는지 한동안 더 번창했다. 가장 나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4. 레오와 유럽 :1514~1521


                                    5. 하드리아누스 6세 : 1522~1523

                                    p382 교황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개선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탄식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의 능력이란 얼마나 많이 그 시대에 달려 있는 것인가!” 그는 생각에 잠겨 옛 친구인 헤체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디트리히, 우리가 루벵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383 하드리아누스가 르네상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럴운 일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신앙심 깊은 교황을 견디지 못한 것은 더욱 큰 범죄이며 어리석은 일이었다. 


                                    6. 클레멘스 7세 : 첫 번째 국면

                                    p384 어떤 교황도 그렇게 훌륭하게 시작한 적이 없었다. 혹은 그토록 비참하게 끝낸 사람도 없었다. 


                                    p386 “명예만 빼고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뚱이도 안전합니다.” 


                                    7. 로마 유린 : 1527

                                    p394 추기경 한 사람은 구덩이에 빠뜨려진 채 정해진 시간 안에 몸값을 가져오지 않으면 산 채로 파묻힐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몸값은 마지막 순간에 도착했다. 

                                    책들, 문서고, 미술품의 파괴는 엄청났다. 


                                    p395 죽은 자들의 수는 헤아릴 길이 없었다. 

                                    로마 유린은 8일 동안 계속되었다. 

                                    “어째서 나를 어미의 자궁에서 꺼내셨습니까? 내가 바싹 여위어서 아무도 나를 보지 않게 하소서!” (클레멘스)


                                    p396 에라스무스는 사돌레토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로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원이며 고귀한 영혼을 위한 유모이고 뮤즈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어머니인 곳이었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는 자신들의 나라보다도 더욱 소중하고 달콤하고 귀한 곳이었던가! 정말이지 이것은 한 도시의 파괴가 아니라 온 세상의 파괴입니다.”


                                    8. 승리자 카를5세 : 1527~1530

                                    p400 교황과 황제의 동맹은 피렌쩨 사람들의 피를 통해 봉인되었다. 


                                    9. 클레멘스 7세와 미술

                                    p401 교황이 피렌쩨를 다룬 방식은 메디치 가문의 타락을 확인해 준 일이었다. 동시에 로마를 복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 가문을 위대하게 만든 행적적 천재성과 미적인 감식안의 불꽃을 다시 보여 주었다. 


                                    p402 분명히 고통이 그를 단단하게 하고 어느 정도까지 강하게 했다. 


                                    p404 그는(세바스티아나) 자신의 탁월함에 너무 일찍 만족하지만 않았더라면 더욱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여가를 향한 정열이 천재의 측면을 가로막았다. 그는 어째서 한 인간이 이미 남아도는 황금을 위해서, 아니면 사후의 명성이라는 도깨비불을 좇느라 자신을 소모시켜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쾌활한 사람이었다. 


                                    10. 미켈란젤로와 클레멘스 7세 : 1520~1534 

                                    p 410 그러나 유리우스의 영묘를 건설한 때처럼 다시 교황과 예술가의 마음은 손이 행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만들어 냈고, 교황은 이 기획이 완성될 때까지 살 수가 없었다. 


                                    p411 미켈란젤로는 극소수의 삶의 즐거움만을 누렸다. 그에게는 자신의 정신과 대등한 정신을 지닌 친구가 없었다. 여자들은 그에게는 평화를 위협하는 부드러운 해체로만 여겨졌다. 가장 위대한 승리도 지치게 만드는 노력과 고통의 산물이었고, 우수에 젖은 명상과 도망칠 수 없는 패배의 미완성 교향곡들이었다. 


                                    삶의 비판을 조각했던 예술가. 


                                    p412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해 칭찬의 재담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용서했지만 해석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시들 주엥서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내 주는 4행시에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나의 잠은 소중하다, 폐허와 불명예가 지배하는 한

                                     잠은 단순한 돌 이상이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나의 큰 이점. 

                                     그러니 나를 개우지 마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라. 


                                    11. 한 시대의 종말 : 1528~ 1534

                                    p414 의심의 여지 없이 클레멘스 7세 시대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재앙이 많은 시대였다. 클레멘스가 즉위할 때 모든 사람이 환호했고, 그가 죽었을 때 모두가 환호했다. 로마의 폭도들은 거듭 그의 무덤을 훼손했다 .


                                    종말(1534~1576)


                                    22장 베네찌아의 황혼(1534~1576)

                                    1. 다시 태어난 베네찌아

                                    p417 이탈리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속박과 쇠퇴가 이루어지던 이 시기가 베네찌아에는 황금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일이다. 


                                    p423 그 때문에 우리는 르네상스를 생각할 때면 건축이나 조각을 생각하지 않고 무엇보다 회화를 생각하게 된다. 회화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전통을 가볍게만 지닌 채 성격이 맞지 않는 비잔틴 방식에서 벗어나 스위스로 시대의 진짜 목소리와 색채가 되었기 때문이다. 


                                    2. 아레티노 : 1492~1555

                                    p423 1492년이 기억할 만한 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저 왕자들의 채찍이며 공갈자들의 왕자인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이해의 성 금요일에 세상에 태어났다. 


                                    열두 살에 이미 성숙해진 그는 자신의 행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페루지아에서 제본업자의 조수 자리를 얻었고,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하여 뒷날 탁월한 비평가 겸 감식가가 되었다. 그 자신도 그림을 좀 그렸다. 


                                    p430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발가벗겨지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이 글들은 정말 못된 짓들을 폭로했고, 위대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용감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온갖 종류의 거리의 언어를 문학에 이용하고, 특히 문학적 살인을 위해 이용했기 때문이다. 아레티노는 성과 죄악에 대한 인간의 관심을 십분 활용했다. 


                                    p431 유명한 구절에서 그는 비방이야 말로 “진실을 말하는 일”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이것은 그의 삶에 대한 간명한 변명이다. 


                                    p432 그는 자신의 글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역할을 받아들였다. 직접적이고 단순한 언어로 자신의 삶의 경험과 비판, 의상과 식품의 필요성 등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었다. 산더미 같은 위선적인 편지들 사이로 몇 편의 다이아몬드 같은 편지들이 섞여 있다. 


                                    3. 티찌아노와 왕들 : 1530~1576

                                    p438 아우그스부르크에서 돌아온 다음(1552) 티찌아노는 이제 여행은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는 일흔다섯 살이었고 분명히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아마 너무 바빴던 것이 그의 장수의 비결이었을 것이다. 연속적으로 그림에 빠져서 그는 죽는 것을 잊었다. 


                                    p440 팔십 대에도 여성 나체화를 전성기 시대에 그린 것들만큼이나 완벽하게 만들어낸 이 화가의 상상력이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이들 신화적인 그림들보다 초상화들이 더욱 위대하고 깊이가 있다. 


                                    p442 티찌아노의 가장 흥미로운 초상화들은 그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여러 번이나 자신의 모습을 그렸고 마지막으로는 여든아홉 살 때의 모습을 그렸다. 프라도에 있는 <자화상> 앞에 서면 우리는 주름이 졌지만 그래도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흐름에 깨끗이 씻긴 얼굴을 보게 된다. 테두리 없는 모자는 그의 흰머리는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 붉은 수염이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다 커다란 코는 힘을 호흡하고 푸른 눈은 약간 진지한 모습으로 실제보다 죽음이 더 가까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손은 붓을 들고 있고 위대한 예술가의 열정은 아직 다 소모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불확실성의 기억이 그를 마지막까지 욕심 많은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이제 부자였다. 


                                    p443 아주 노년까지 그는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고, 예술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행복을 찾았다. 


                                    4. 틴토레토: 1518~1594

                                    p448 그는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16세기 베네찌아에 종교적인 예술가는 거의 없었다. 절반 정도는 이교적인 혹은 이슬랍교도 동방에 의해 영혼과 영토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술이 그의 종교였고, 그것을 위해 그는 밤과 낮을 다 바쳤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마리아와 아기 이야기, 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비극, 성인들의 고통과 기적 이야기, 그리스도의 심판의 자리에 죽은 자들이 모이는 저 이야기보다 화가의 상상력을 더 자극하는 주제들이 또 어디 있을까? 


                                    p451 틴토레노틑 가장 위대한 그림 하나를 그렸다.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는 마치 수의처럼 흰 옷을 입은 채 피로와 체념에 잠겨 고요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빌라도는 피에 굶주린 폭도들의 뜻에 따른 죄악을 손에 씻어 없애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구도의 힘과 크기에서, 그리고 예술적 효과 면에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도전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작품이다. 


                                    p453 자기가 숭배하고, 또 능가하려고 애쓰던 미켈란젤로만큼이나 고독하고 독립적이며 변덕스럽고 우울하고 신경질이고 격렬하고 자부심이 강했다. 그의 영혼이나 그의 작품에 평화는 없었다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그는 신체와 정신과 영혼의 힘을 표면적 아름다움보다 더 중시했다. 


                                    p456 그는 인류를 다수로 보았다. 그리고 싸우고 경쟁하고 사랑하고 즐기고 고통받는 다수 인간의 모습으로 삶과 역사를 해석했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병들고 병신이 된, 구원받은 혹은 저주 받은 존재들. 그는 두려울 정도로 거대한 유화들을 그렸다. 


                                    5. 베로네제 : 1528~1588

                                    p465 그러나 그는 표면적인 선율에 너무 즐겁게 집중하기 때문에 섬세하게 함축된 음, 비극적인 불협화음과 깊은 화음을 듣지 못한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위대한 회화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의 눈길은 너무 빠르고 그의 예술은 너무나 열심이기에 자기가 본 모든 것을 그리지 못하고, 단순히 상상된 것을 그린다. 


                                    그들은 그가 어째서 그토록 어울리지 않는 것들, 즉 앵무새들, 난쟁이들, 도이치 사람들, 어릿광대들, 미늘창을 가진 군인들을 <레위 사람의 집에서의 잔치>에 그렸는가 물었다. 베로네제는 대담하게 자신의 “임무는 내게 좋게 보이는 대로 그림을 장식하는 것이다. 그림은 크고 많은 인물들이 들어갈 공간이 있다. 그림에 생긴 빈 공간이 채워질 필요가 있을 때면 나는 상상력이 알려주는 대로 인물들을 그려 넣는다.”라고 대답했다. 


                                    6. 조망

                                    p468 지중해의 한쪽 끝에 터기 사람이 차지하고, 다른 쪽 끝은 아메리카 대륙의 황금을 찾는 유럽에 버림받아 베네찌아의 경제가 몰락에 이르렀으 ㄹ때에도 베네찌아의 미술과 문학은 이 도시의 영광을 노래했다. 아마도 예술가와 시인들이 옳았을 것이다. 


                                    23장 르네상스가 이지러지다(1534~1576)

                                    1. 이탈리아의 쇠퇴

                                    p472 종교 개혁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쇠퇴의 원이이자 결과였다. 종교 개혁이 북부 국가들에서 로마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이동과 성직 수입을 줄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쇠퇴의 원인이었다. 또 인도로 가는 지중해-이집트 통로가 순수 항해 방식으로 대체된 점과,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상업이 발전하면서 대서양 국가들을 부강하게 하고 이탈리아를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면 종교 개혁은 이탈리아 경제적으로 쇠퇴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p472~473 교회가 부유하고 안전한 동안 지식인 계츠잉 민중의 신앙심을 혼란케 하려는 시도만 하지 않으면 지식인 계층에게 사상의 자유를 상당히 허용했던 저 신사 협정이 도이치 종교 개혁, 영국의 국교 분리, 스페인의 헤게모니를 통해 끝나고 말았다. 


                                    p474 지적인 후퇴에는 어느 정도 도덕적 발전이 수반되었다. 


                                    2. 과학과 철학

                                    p476 니콜라 타르탈리아는 3차 방정식을 해결할 길을 찾아냈다. 그는 제로니모 카르다노에게 자신의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카르다노는 이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출판했다. 타르탈리아는 그에게 대수로 결투를 하자고 도전장을 냈다. 


                                    p477 그는 분명 처음으로 이차 방정식이 마이너스 근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데카르트가 나오기 훨씬 전에 타르탈리아와 더불어 그는 대수를 기하학에 적용하려는 생각을 했었다. 

                                    (생각보다 이차방정식의 해를 정확히 구한 때가 지금과 가까이 있는 시대라는 사실이 놀랍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비해 방정식 풀이는 한참 뒤에 발견하게 됬다는 것도 놀랍다. 그래서 기하학이 모든 수학의 기초라고 하는가보다.)


                                    p479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온갖 목적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진리의 인식보다 더 가치가 있거나 더 즐거운 것은 없는 것 같다.” 


                                    p481 “건강과 힘이 완전한” 여든여섯 살에 그는 두 번째 책을 써서 몇몇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보내는 삶의 즐거움을 표현했다. 아흔한 살에 그는 세 번째 책을 덧붙여서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의 손으로 하루 여덟 시간씩 글을 쓴다.

                                    (반성하게 되는 부분)


                                    아흔두 살에 그는”온 인류에게 규칙적이고도 절도 있는 생활을 하라는 사랑의 권고”를 썼다. 


                                    3. 문학

                                    p483 이탈리아 학문의 위대한 시대는 이제 끝났다. 1526년 율리우스 체사레 스칼리거가 베로나에서 프랑스의 아쟁으로 이주하면서 프랑스가 그 횃불을 넘겨받았따. 

                                    진정한 영감은 공기가 더 잘 통하는 곳으로 도망쳤다. 미켈란젤로는 문학 아케데미에 속하지 않았다. 


                                    4. 피렌쩨의 황호 : 1534~1574

                                    p488 기울어 가는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젊은 국가를 다스리는 것보다 쉽다. 기운이 쇠약해진 생명력은 복종을 환영하기 때문이다. 


                                    p491~492 죠반니 다 볼로냐는 더욱 재능이 뛰어난 경쟁자였다 두아이에서 태어난 그는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젊은 시절 로마로 갔다. (1561) 1년 동안 그곳에서 공부한 다음 자신의 점토 작품을 들고 나이 든 미켈란젤로에게 찾아갔다. 늙은 조각가는 그것을 손에 잡고 닳아 빠진 손가락과 무거운 엄지로 이곳저곳 누르더니 몇 분 만에 그것을  훨씬 더 의미있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죠반니는 이 방문을 결코 잊지 못했다. 84년 생애의 나머지 기간 내내 그는 이 거장과 같아지겠다는, 긴장된 야망을 품고 노력했다. 


                                    5. 벤베누토 첼리니 : 1500~1571

                                    p497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탁월함의 요소를 지녔거나 탁월함과 상당히 비슷한 요소를 지닌 사람이고 진리와 정직성을 지니고 있다면 모든 남자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생애를 서술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흔이 되기도 전에 이런 섬세한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의무가 이제 나의 마음에 나타났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난 도시 피렌쩨에 있으며, 쉰여덟을 넘기고 있다. 


                                    p498~499 “이들 다양한 예술 분야들은 서로 완전히 달라서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다른 분야의 일을 시도하면 똑같이 성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온갖 힘을 다하여 이 모든 분야에 똑같이 숙달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적절한 자리에서 내가 목표를 달성했음을 보여 줄 생각이다.”

                                     첼리니는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허풍을 떨지만 하도 일관성 있게 열렬히 글을 쓰고 있어서 우리는 마침내 그를 믿게 된다. 


                                    6. 줄어든 빛

                                    p508 르네상스 로마에 작별의 눈길을 던져 보면 이 도시가 1527년의 재앙에서 회복한 그 속도에 놀라게 된다. 클레멘스 7세는 파괴를 막기보다 회복하는 데서 더 많은 기술을 보여 주었다. 

                                    일부 예술은 죽어 가고 있었고, 다른 예술은 태어나거나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파르네제 추기경과 같은 집에 살았던 크로아티아 사람 쥴리오 클로비오는 마지막 위대한 사본 장식가였다. 


                                    7.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국면 : 1534~1564

                                    p509 미켈란젤로는 다른 시대에서 나온, 통제할 수 없는 유령으로서 이 모든 세월을 계속 살아남았다. 


                                    p510 “30년 동안이나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일하기를 원해 왔소. 이제 내가 교황이 되었는데 나를 실망시키겠소?


                                    1535년에 승리에 찬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바티칸의 책임 건축가, 조각가, 화가로 임명하고 또 그가 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함을 인정하는 교서를 발행했다. 예술가는 교황청의 식구가 되었고 1년에 1200크라운(15,000 달러?) 씩의 종신 연금을 받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못마땅했다. 그는 그림이 아니라 조각을 원했다. 붓을 들고 있는 것보다 망치와 끌을 들고 있을 때 더 행복했다. 그림을 그려야 할 벽의 크기가 그를 머뭇거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1535년 9월에 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그림을 시작했다. 

                                     그의 삶의 거듭난 실망들이 어쩌면 내면에 쓰라린 마음으로 쌓였다가 신적인 분노로 쏟아져 나왔떤 것일까. 


                                    p512 오늘날 이 벽화를 보는 우리는 이것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니엘레의 천 가리개 작업과, 1726년에 계속된 일부 인물에 의상 입히기 등 덧칠을 통해서, 또 400년 동안의 먼지, 초의 그을음, 자연스럽게 색이 어두워지는 현상 등으로 손상된 것이기 때문이다. 


                                    p513 그가 좋아하는 책들은 성서와 단테였다.

                                    (아, 단테와 함께 가야 할까? ㅎㅎ 왜이렇게 단테을 좋아하지?) 


                                    이제 나의 삶은 허약한 배처럼 폭풍우 치는

                                    바다를 지나, 최후의 심판이 내려

                                    선한 행동과 나쁜 행동에 대해 대가를 치르기 전에 

                                    모두가 가는 그 넓은 항구에 이르렀다. 

                                    이제 나는 내 영혼을 지상의 예술의 숭배자와 

                                    노예로 만들었던, 저 좋아하는 상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아노라, 모든 사람이 기꺼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범죄적인 것인지를,

                                    그토록 밝은 옷을 입은 이런 사랑의 생각들

                                    두 가지 죽음이 다가올 때에 그것이 대체 무엇이랴?

                                    내가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또 다른 두려움. 

                                    그림도 조각도 이제 내 영혼을 달래어 쉬게 할 수 없나니. 

                                    내 영혼은 저 위에 계신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향한다. 

                                    우리를 십자가에 고정시키기 위해 그분의 팔이 펼쳐져 있구나. 


                                    p518 미켈란젤로는 여든아홉 살까지 일을 계속했다. 

                                    “내가 너무 늙어서 죽음이 자주 내 소매를 잡아끌며 나더러 같이 가자 하네.”


                                    p519 “영혼은 신에게, 몸은 대지에, 재산은 가까운 친척들에게 남겼다.” 그는 1564년 2월 18일에 여든아홉의 나이로 죽었다.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껏 존재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것이 당시 일부 사람들의 판단이었고 또 시간의 판단이 되었다. 그는 러스킨이 말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정의를 완전히 충족시켰다. “작품 전체에 가장 위대한 발상을 가장 많은 숫자로 구현한 사람”, 곧 “정신의 가장 높은 능력을 행하고 드높인”사람이었다. 그는 도안가로 시작했고, 도안의 대가였다. 그의 드로잉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소중하게 보관한 선물이며 또 가장 소중한 도둑질 품목에 속했다. 


                                    p520 화가로서 그는 끝까지 도안가로 남았다. 언제나 색채보다 선에 더 관심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형태를 도안하고자 했으며  예술에서 인간의 태도를 포착하거나 도안을 통해 삶의 철학을 전달하고자 했다. 


                                    자신의 주제를 강하고 장식이 없는 모습으로 그대로 두었다. 그의 정신으 높은 비전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비전에 형식을 주어서 시뷜레들, 예언자들, 성인들, 영웅들,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의 예술은 인체를 매체로 사용했고, 이런 인간의 형태들이 그의 희망과 두려움, 혼란스러운 철학, 마음에 쌓인 종교적 신앙의 고통스러운 구현이기도 했다


                                    그는 모든 표면들을 형태의 요소로 만드는 대신 표면들을 조각으로 뒤덮으려 했다. 


                                    p521 그의 탁월함이 발전의 한 계열을 완성하고 또 고갈시키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뒤로는 어찌할 바 없는 모방과 퇴락의 한 시기가 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다음 천천히 새로운 분위기와 전통이 자란다. 새로운 구상, 이상, 혹은 기술이 수많은 기묘한 실험들을 통해 형성되면서 독창적이고 신선한 형식을 만들어 낸다. 


                                    마지막 말은 겸손의 말이 되어야 한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우리가 신들을 평가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신성을 인정할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감식안이 그들의 사당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영웅 숭배하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p522 우리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며, 또 선과 악, 고통과 사랑스러움, 파괴와 숭고함이 뒤섞인 듯이 보이는 우주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재의 모습, 물질에 의미를, 형태나 생각에 고귀함을 부여하는 천재의 모습이 드러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지성을 이루는 삶과 정신과 법칙에 아주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치는 글

                                    p525 이런 이유에서 르네상스의 가장 뛰어난 조각 작품들은 대부분 무덤이나 <피에타>들이다 쉬지 않는 인간이 여기서 마침내 평화를 얻기 때문이다. 


                                    p526 르네상스는 찬란한 시대였지만 그 온갖 표현들을 통해, 과시와 성실하지 못함, 값비싼 의상을 펄펄 날리기, 내면의 강인함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미심쩍은 권력의 공허한 구조물임을 알리는 한 줄기 요소가 드러나 있다. 잔인한 폭도들이 건드리거나 모호하고 성난 수도사가 멀리서 외치는 소리에 그만 와르르 무너져 버릴 어떤 요소인 것이다. 


                                    p526~527 이 두 가지가 합쳐져 더욱 크고 공정한 관점이 될 수가 없다면 말이다. 물론 르네상스 문화는 노동하는 빈민의 등짝 위에 세워진 귀족주의적인 상부 구조이다. 그러나 유감이지만 어떤 문화인들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문학과 미술은 의심의 여지없이 어느 정도 부가 집중되지 않고는 생겨나기 어렵다. 공정한 작가들을 위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이 땅을 갈고 곡식을 키우고 옷감을 짜고 잉크를 만든다. 


                                    도덕적 느긋함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지적 해방의 대가이다. 이 대가가 아무리 무거워도 해방은 현대 세계의 탄생에 꼭 필요한 것이며 오늘날 우리 정신의 숨결이다. 


                                    고전 문헌과 철학을 부활시킨 열성적인 학문은 주로 이탈리아의 업적이다. 그곳에서 이 부활과 해방으로부터 최초의 현대 문학이 생겨났다. 


                                    p528 삶이 건강한 인간 형태의 사랑스러움을 다시 인정하고 예술이 그것을 강조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죽음에 등을 돌리고 얼굴을 삶으로 향했다.


                                    p529 한동안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 사이의 긴장, 신학 논자애, 종교 전쟁 등이 르네상스의 영향을 뒤덮고 압도해 버렸다. 

                                    이 불행한 비참 가운데 에라스무스, 베이컨,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이서으이 소리를 외쳤고, 그것에 신선하고 강한 발언을 부여했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위해 강력한 구조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탈리아와 르네상스의 정신은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다시 태어났다. 


                                    p530 삶의 비극을 용서하고 감각과 정신과 영혼의 환희를 포옹하는 사람들. (바로 정신의 나라 친구들이다.) 미움의 찬가 한가운데서, 그리고 대포의 굉음을 넘어 자기들의 가슴에 언제나 울리는 르네상스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다. 



                                    3. 내가 저자라면

                                     

                                     2권은 대가들을 소개하는 부분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들의 타락, 붕괴, 전쟁,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한 부분은 썩 재밌지 않았다. 잔인하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몇몇 있었다. 읽는 내내 반복되는 부분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식을 축적하는 면에서는 좋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서술할 때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와 레오 10세,  미켈란젤로와 클레멘스 7세,  미켈란 젤로 -마지막 국면 이렇게 4부분으로 나눠서 미켈란젤로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줬다. 윌 듀란트가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한 흔적이 보인다.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었는데 그것은 로마 르네상스, 붕괴, 종말 이렇다. 그리고 각각의 하위 구성요소는 인물, 지역, 개념 등으로 나눠져있다. 여러가지 내용을 시대순, 역사순으로 통일성 있게 배열했다는 점이 좋았다. 방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나로써는 놀랄 일이다. 문장마다 저자의 문체 덕분에 마음을 무찔러들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이번 저자라면은 좀 더 보충해야겠다.

                                    IP *.142.2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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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2 49.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_에너 퀸들러 지음 한젤리타 2013.04.30 2988
                                    1571 (카를 융) 주역을 사랑한 영혼의 안내자 file 보따리아 2017.11.12 2988
                                    1570 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18] 香山 신종윤 2007.04.22 2989
                                    1569 [리뷰012] 한국사신론, 이기백 [3] 香山 신종윤 2007.06.14 2990
                                    » 문명이야기 2 - 윌 듀란트 [5] 세린 2012.07.23 2989
                                    1567 #25 니체 - 즐거운 지식 file [1] [1] 샐리올리브 2012.10.22 2992
                                    1566 마키아벨리, 군주론(살짝 수정) 박소정 2006.06.15 2993
                                    1565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1] 예원 2009.06.21 2994
                                    1564 바디샵의 영적인 비즈니스(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書元 이승호 2009.09.19 2994
                                    1563 [리뷰] 나를 가슴뛰게 하는 에너지, 강점 [1] 최우성 2011.01.09 2994
                                    1562 부동산투자는 과학이다-24 [2] 도명수 2006.10.05 2995
                                    1561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1] 효인 2009.10.19 2995
                                    1560 [리뷰] 행복의 정복 최우성 2011.01.17 2995
                                    1559 [11] <파블로 네루다>- 인용문 [2] 수희향 2009.06.16 2996
                                    1558 17. 칼융 자서전_발췌하고 코멘트 맑은 김인건 2010.06.28 2996
                                    1557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세번 읽기) 루미 2011.12.31 2996
                                    1556 2. 변신이야기_오비디우스 file [7] 권윤정 2012.04.21 2996
                                    1555 10년 후 한국... 하지웅 2005.04.24 2997
                                    1554 Working -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 [1] 종종 2015.03.23 2997
                                    1553 데카메론- 보카치오 [1] [1] id: 깔리여신 2012.06.04 2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