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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3일 11시 02분 등록
 

문명이야기

르네상스 5-2

윌듀란트 지음/안인희옮김


저자에 대해서

****윌 듀런트의 다른 저서에 대한 탐구 《철학이야기》

윌 듀랜트는 《철학의 즐거움》과 《역사속의 천재탐구》 등을 출간하여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미국의 저술가이다. 그는 1917년 《철학과 사회문제》를 출간하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9년 뒤 듀랜트는 2번째 저작 《철학이야기》를 발표하였는데, 이 책은 30여 년 동안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300만 부 이상 팔렸고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이야기 철학입문서의 고전이다.


보통 철학적 저술은 너무나 전문적이어서 상당히 교양 있는 사람들도 읽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듀랜트는 철학 사상을 일반 사람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이 책은 틀림없이 철학의 대중화를 시도한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한 대중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비롯된 결과는 오히려 매우 학문적이었던 것이다. 듀랜트는 이론의 인용 말고 다른 모든 면도 일일이 원전에 의거하고 있고, 결코 어물어물 넘어가는 일이 없다. 또한 철학자의 선택도 매우 타당하고 설명도 정확하고 명석하며, 비판도 정곡을 찌르고 있다.


위대한 철학자의 학설을 이야기로 풀어 쓴 듀랜트 인생론

듀랜트는 《철학이야기》 저술을 위해 자료 수집과 분석 등의 준비 기간 11년을 거쳤으며, 이후 집필에도 3년이 넘는 시간을 들였다. 그런 만큼 그는 중요한 철학자들을 소개할 때에도 거의 그들 자신의 말, 즉 원전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철학 명저 해설’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뛰어난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여 그들의 사상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 일상인들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초연한 자세로 사색하는 듯 보였던 철학자들이 갑자기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과 어깨를 겨누고 고요한 숲 속에서 다정하게 인생을 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이렇듯 우리 독자들은 난해한 용어나 논리에 집착함이 없이 쉬운 수필을 읽듯 심원한 철학사상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듀렌트는 뛰어난 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인간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슬기로운 해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의 학설을 빌려서 쓴, 듀랜트의 ‘인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독자들은 참으로 눈부신 ‘인생의 파노라마’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가 솜씨 있는 요리사처럼 우리 탐구의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영양분 넘치는 인생론을 음미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오는 문장들


14장 교회의 위기(1378~1447)

1. 교황분열


2. 공의회와 교황들:1409~1418

***저항적인 철학자들이 거의 1세기 전에 ‘공의회 운동’의 토대를 놓았다. 오캄의 윌리엄은 교회를 성직자와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했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햇다.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다. 그 전체가 다른 어느 부분보다 더욱 우세한 권위를 갖는다. 세계 공의회는 교황을 선출하고 질책하고, 벌주고 폐위할 권한을 갖는다.(15P)


3. 교황청의 승리

***1054년 이후로 그리스 정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져 있던 그리스도교가 세로 통합될 예정이라는 소식은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438년 2월 8일에 비잔틴 형제, 콘스탄티노플의 장로 요셉, 그리고 그리스 대주교 17명과 많은 수의 그리스 주교, 수도사, 학자들이 아직도 부분적으로 비잔틴 도시인 베네찌아에 도착했다.

공의회가 열린 다음 교항의 우위,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의 사용, 연옥의 고통의 특성,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느냐, 아니면 성자에게서 나오느냐의 문제 등을 놓고 두 교회의 다른 점들을 서로 융합시키기 위해 논의 했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햇다. (24P)


15장 르네상스가 로마를 사로잡다 (1447~1492)


1. 세계의 수도

***보통은 성직자들이 로마를 다스렸다. 그들은 다양한 교회의 수입을 소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12개 국가에서 들어오는 황금과 교회에서 제공하는 고용, 또 교황들이 뿌리는 자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로마 사라들은 이런 황금의 흐름을 줄일지도 모르는 교회의 개혁에 절대 열광할 수가 없었다. (29P)


***정치지도자로서 교황들은 세속의 동료들과 동일한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들은 괸직이나 성직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2급의 사람들에게 너누어 주고 때로는 팔기도 했다. 정치적 빚을 갚기 위해 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혹은 학자나 예술가들에게 보수를 지불하거나 후원하기 위해서였다. 또 교황들은 자기 친척들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집안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율리우스 2세처럼 군대를 지휘한 경우도 있엇고, 레오 10세처럼 기만의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31P)


2. 니콜라스 2세

****사르찌나에서 가난하게 자란 토마스 파렌투첼리는 어떻게 해선지 볼로냐 대학에서 6년간 공부할 돈을 마련했다...... 지갑이 다시 채워지자 볼로냐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하여 스물두 살에 신학박사가 되었다.......토마소는 고전 시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느 자신의 수입을 거의 모두 책을 사는데 쓰고, 비싼 필사본을 사느라 돈을 빌리고 앞으로 언젠가 존이 충분히 생겨서 세상의 모든 위대한 책들을 하나으 도서관에 모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햇다. 바티칸 도서관은 이러한 야망에 그 기원을 가진다.

코시모는 토마소에게 자기 도서고나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맡겻다. 토마소는 필사본 상이ㅔ서 행복했다. 자신이 첫 번 째 르네상스 교황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굼에도 모른 채. (33P)


***20년동안 그는 페렌째와 볼로냐에서 볼로냐의 대주교 알페르가티를 위해 일햇다. 대주교가 죽자 유게니우스4세 교황은 토마소를 그의 후임자로 임명햇다. 그리고 그의 학식과 신앙심과 행정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교황은 3년 뒤에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햇다. (34P)


***"자부심 강한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킬 일이지만, 사제관의 가난한 심부름꾼이 교황이 될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라고 토마소는 말했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그들 중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바르바로는 플라톤의 꿈이 실현되었다고 선언햇다. 철학자가 왕이 된 것이다. (34P)

***전염병이 돌아 로마를 떠나 파브리아노로 피신할 때에 그는 번역가들과 필사가들이 전염병 때문에 죽지 않도록 그들을 모두 데려갔다. (35P)

☆☆☆ 자신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 간 사람들을 존경한다. 열심히 하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자리에 올라갔다는 인터뷰기사들이 생각난다.


***니콜라스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자신을 너그럽기는 해도 전제군주라고 여기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변햇다. 의심에 시달리고 원한에 괴롭고 통풍으로 고통 받아서 그는 빨리 늙었다. 터키군이 5만명의 그리스도교도 시체를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했으며 성소피아성당을 이슬람교 사원으로 만들었다는 소식(1453)이 오자 교황으로서 자신의 모든 영광이 아무런 소용없는 공허함으로 여겨졌다. 그는 유럽 국가들에게 함락된 동방 그리스도교의 수도를 도로 찾기 위해 십자군에 참가하라고 호소했다. (39P)


***니콜라스는 현실에 굴복했고, 그의 피 속에서 생며의 욕구는 시들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외교 정책에 지치고 전임자들의 죄에 대해 그가 벌을 받고 1455년 쉰여덟의 나이로 죽었다. (39P)


4. 피우스 2세(1458~1464)

***** “구두쇠는 많은 돈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지 못한다.” (43P)


****그는 교황으로서의 시간을 문학적 작업에 돌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한다.

“나는 내 의무에서 시간을 빼내지 않고 잠자는 시간을 글 쓰는데로 돌렸다. 그리고 노년의 시간에 휴식을 취할 시간을 훔쳐서 내가 지금 기억할 많나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후세를 위해 적어두고자 한다.(44P)

☆☆☆잠이란  죽은 시간이 아니라 휴식의 시간이라고 하지만 잠자는 시간을 줄여야 만 다른 일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


5. 파울루스(바오로)2세 (1464~1471)

***위대한 남자들의 생애를 살피다 보면 한 남자의 성격이 죽은 다음에 형성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통치자가 자신에 대해 기록하는 사람들을 잘 대우해 주면 그들은 사후의 거룩함으로 들어 올려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통치자가 그들을 괴롭히면 그들은 그의 시신을 악의의 꼬쟁이에 꿰어 태우거나 구어서 잉크병에 있는 가장 더러운 악명으로 사후의 이름을 더럽힌다. (53P0


6. 식스투스4세(1471~1484)

****새로운 바티칸 도서관을 짓고, 그 위에 시스티나 예배당을 지었다. 그리고 시스티나 성가대를 만들었다. 파괴된 산토 스피리토병원을 재건했는데, 이병원의 주요 병동은 약 110미터 길이에 이르며 1000명의 환자를 수용할 nt 있었다. 그는 또한 로마대학을 다시 조직하고 파울루스 2세가 설립한 카피톨리니 박물관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63P)

****프란체스코 수도사이며 철학 및 신학 교수였던 사람이 르네상스의 첫 번째 세속화의 길을 간 교황이 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는 교황청을 이탈리아의 강력한 정치적 권력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진 최초의 르네상스 교황이었다. (64P)


7. 인노켄티우스 8세 (1484~1492)

***로마에서는 무성이든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르지아 추기경에게 어재서 정의가 행해지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죽기를 원하지 않고 그가 돈을 내고 살기를 바라신다.” (67P)

***최상층의 무질서는 로마의 도덕적 무질서를 반영하는 것이고, 또 더욱 심화시켰다. 폭력, 도둑질, 강간, 뇌물, 음모, 보복 등은 일상의 질서가 되었다. 아침마다 가로수 길에는 지난밤 살해된 남자들의 시체가 나타났다.(69P)


***성직자들조차 회의를 품었다. 어떤 성직자는 미사에서 축성의 말 대신 자신이 만든 구호, 곧 “멍청한 그리스도교도들아, 누가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이라고 숭배하느냐!”하고 바꾸어 말했다는 고발을 받았다. (69P)


16장 보르지아 사람들


3. 죄인

***알렉산더가 감각적인 사람으로 독신주의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혈기왕성한 남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산 번은 그가 바티칸에서 축제를 베풀 때 희극이 공연되었는데 그는 wmf거움으로 큰소리로 웃고 또 주변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은 것과 그들을 자기 발치에 앉히게 된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는 남자였던 것이다.(84P)

***그는 황동적인 남자였고, 그 시대의 편안한 도덕성에 하도 익숙해져서 그리스도교 윤리와 생활 사이에서 별로 모순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학에서 철저히 정교 신앙을 가지듯이 그는 행동에서 완전히 세속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교호아청은 성인 아니라 정치가를 필요로 한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85P)


***이 교황들이 알렉산더가 한 것처럼 애인들과 자식들을 그렇게 세심하게 보살폈다는 기록은 없다. 그의 죄는 자연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독신주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었다. (118P)

☆☆☆ 한국불교 조계종단의 스님들, 성당의 신부와 수녀들은 독신주의원칙을 하고 있다. 교단의 법령에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독신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존경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동정심을 받고 싶어하는 그네들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몰래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고서 존경받기를 바란다는 것은 나쁜 마음이다. 차라리 성직자의 옷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원하는 방식으로 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교회가 자신의 영토를 잃어버릴 경우 지배하는 정부에 종속될 위험이 아무리 크다 해도 교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속의 방법을 채택하는 것보다는 세속의 권력을 잃어버리고 다시 저 길릴리의 어부들처럼 가난해지는 편이 아마도 교회를 위해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세속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면서 교회는 하나의 국가를 얻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3분의 1을 잃어버렸다. (119P)

☆☆☆성직자들의 사치와 부에 대해서 세상은 결코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낸다. 그들이 흥청망청 쓰는 돈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안다면 양심이 있다면 사치스런 생활을 하기가 힘들 것이다. 스님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시주돈(보시헌금)이라고 한다. 시주돈을 무서운 줄 모르고 써대는 스님들을 볼 때면 가슴 아프다. 국수 한 그릇 안 사먹고 보시했더니, 비싼 외제차 끌고 다니고, 노름하고, 세속인들보다 더 세속적으로 생활한다. 성직자가 하나의 직업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성 프란체스코의 가난이  빛난다. 그리고 위대하다.


17장 율리우스 2세


1. 전사

***교회의 관직이나 승진을 매매하는 일은 알렉산더의 예를 따랐고, 또 성 베드로 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해서 도이칠란트의 분노를 샀다. 그는 수입을 잘 관리해서 전쟁과 미술을 동시에 후우언하고도 레오 10세에게 흑자 재정을 넘겨주었다. (127P)


***마키아벨리는 대부분의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교황청ㅇ의 세속적 권력에 반대하고 있엇고, 왕처럼 군림하는 교황들에게 반대하고 있었다. (129P)


2. 로마의 건축 (1492~1513)

율리우스 2세 치하에서 르네상스는 수도를 피렌쩨에서 로마로 옮겨왓다. 그리고 르네상스 미술은 여기서 절정에 도달햇다. 그런 다음 레오 10세 치하 로마에서 르네상스의 문학과 학문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율리우스)는 다른 모든 예술을 건축 아래 종속시키고 새로운 성 베드로 성당을 그의 정신의 지표이자 교회의 상징으로 뒤에 남겼다. 그 자신은 교회의 세속덕인 권력을 수호했다.  (135P)


****라파엘로가 그려놓은 바티칸의 방들은 고전 신화와 철학, 히브리 신학과 시, 그리스도교의 감상과 신앙의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136P)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이 성 베드로 성당의 건설을 위한 면죄부 판매라고 여긴다면 율리우스 2세 교황시대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낡은 성 베드로 성당의 파괴와 새 건물 건설의 시작을 곱을 수 있다. (139P)


3. 젊은 라파엘로

  1)형성기

****<마딜레나 도니의 초상>에서 라파에로는 분명 ,모나리자>를 모방했다. 미소는 빠져있다. 도니가 미소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피렌쩨 기혼부인의 건강한 모습, 넉넉한 편안함으로 길들여진 부드럽고 통통한 반지를 낀 손, 그녀의 형태에 위엄을 부여하는의상의 풍성한 주름과 색채를 잘 잡아냈다. (145P)


***라파엘로는 부분적으로는 세익스피어의 순진함으로 남의 것을 훔치고 이런저런 방법괴 태도를 시도하고 그 모두에게서 소중한 요소를 뽑아내 이런 수집품들을 창장의 열기 속에 녹여 자기만의 양식으로 만들어 낸 덕분에 위대해진 사람이다. (145P)


****검은 베레모가 길고 검은 곱슬머리 위에 놓여있다. 얼굴은 아직 젊은 모습이고, 수염의 흔적도 없다. 길 코, 작은 입술, 부드러운 눈길이다. 모두 합쳐져 깨끗하고 신선한 정신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성을 드러내는 잊을 수 없는 얼굴(키츠의 얼굴일 수도 있는)이 되고 있다. (147~148)


2) 라파엘로와 율리우스 2세: 1508~1513

****서명의 방을 위한 계획은 숭고한 것이었다. 이 그림들은 르네상스의 문명에서 종교와 철학, 고전문화와 그리스도교, 교회와 국가 문학과 법등이 하나로 총합된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되었다. (150P)


****한쪽 벽면에 라파엘로는 거대한 반원의 형태로 삼위일체와 성인들의 모습으로 종교를, 또 성체론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논의하는 교부들과 신학박사들의 모습으로 신학을 그렷다. 그가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려고 얼마나 세심한 준비를 했던가는, 이 <성체논쟁>을 제작하기 위해 사전에 30번의 탐구르 했다는 사실로도 알 수있다.

그 결과 신과의 신비에 의해 가장 고집 센 회의주의라도 개심시킬 만큼 대단한 파노라마가 만들어졌다. (150P)


***모든 얼굴에 신뢰가 가는 전기(傳記)를 담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에게 인간을 엄어서는 품위를 부여해서 전체그림과 주제를 고기한 것으로 만들었다. 일찍이 회화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서사적 숭고함에 대해 이토록 성공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스물여덟 살이 된 이 젊은이가 똑같은 힘과 장엄함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학문과 철학의 역할도 표현할 수 있을까? 라파엘로가 그렇게 많은 독서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자신의 붓으로 말하고 눈으로 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형태와 색채의 세계에 살았고, 이런 세계에서 남자와 여자들의 심오한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한 말이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151P)


****그는 분명 서둘러 플라톤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마르실리오 피치노 등을 공부하면서 준비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과 겸손한 대화를 나누어 <아테네 학당>의 탁월한 구상을 해내야 했다. 그리스 사상의 탁월한 수백년을 나타내는 50여명의 학자들이 불멸의 순간에 거대한 이교의 주랑 현관에서 소란 반자로 장식된 아치 아래 모여 있다. <성체논쟁>으로 신학을 이상화한 바로 맞은 편 벽에 철학에 대한  예찬이 나타난다. 플라톤은 유피테르와 같은 이마에 깊은 눈과 수염과 머리가 허옇게 흘러내고 손가락 하나를 위로 쳐들어 완전한 국가를 가리켜 보인다. 그의여펭서 조용히 걷는 아리스토텔레스는 30년이나 젊은 잘 생기고 유쾌한 모습으로 손바닥을 아래로 한 손을 앞으로 뻗고 있다. 마치 스승의 원대한 이상주의를 다시 땅으로, 가능성의 영역으로 잡아끌어내리려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주장들을 손가락을 꼽아 헤아리고, 무장한 알키비아데스는 사랑스러운 태도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화음판 안에 우주의 음아을 잡으려고 애를 슨다. 아름다운 여인은 아마도 아스파시아일 것이다 헤라클리투스는 에페수스 수수께기를 쓰고 있다. 데오게네스는 옷을 벗고 아무런 걱정없이 대리석 계단 위에 비스듬이 주저앉았다. 아르키메데스는 네 명의 열중한 젊은이들을 위해서 석판에 기하학 도표들을 그리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조로아스터는 각기 구체를 들고 논쟁을 벌이는 중이다. 왼편에서 소년 하나가 책들을 들고 열심히 달려가는 중이다. 분명 서명을 받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겸손하게 수어서 거의 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라파엘로 자신도 등장하는데 이제는 콧수염이 난 모습이다.

어쨌든 이러한 지혜의 전당이 전에는 그림으로 그려진 일이 없으며, 아마도 생각조차 되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152P)


***이단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어떤 철학자도 화형을 당하지 않았다. 교황의 보호가 너무 커서 이런저런 오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떠들어 댈 수가 없는 가운데 젊은 그리스도교도는 갑자기 온갖 이교도들을 다 집합시켜서 그들을 원래의 특성대로 또 놀라울 정도의 이해심과 공감을 지니 채 그렸다. (153P)


***<물고기가 있는 성모>(프라도)는 아주 아름답다. 성모의 얼굴과 분위기, 그리고 라파엘로 자신도 그보다 더 잘 그릴 수 없을 정도의 아기 예수, 어린 토비트는 성모에게 물고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물고기의 간으로 그는 아버지의 시력을 고쳤다. 그를 데려온 천사의 의상과 성, 히에로니무스의 당당한 얼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아름답다. 구도, 색채, 빛 등의 측면에서 이 그림은 <시스티나 성모>와 견줄만한 것이다. (156P)

****라파엘로의 초상화들은 수가 많지는 많지만, 그들 모두 미술의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초상화 하나는 <빈도 알토비토>이다. 상냥하지만 기민한 젊은이, 건강하고  맑은 눈길에 소녀같이 아름다운 이 젊은이가 시인이 아니라 은행가이며 라파엘로부터 첼리니에 이르는 예술가들을 너그럽게 후원해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할까? (156P)


4. 미켈란젤로

1)젊은 시절(1475_1505)

***율리우스가 사랑하던 화가이며 조각가, 성급한 기질과 무시무시한 성격, 그리고 정신의 힘과 깊이라는 면에서 그와 경쟁할 만한 사람, 인류의 기록에 남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슬픈 예술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157P)


***미켈란젤로는 세티냐노의 대리석 채석장 근처에서 유모의 젖을 먹었으므로 출생하면서 곧바로 조각의 먼지를 숨 쉬었던 셈이다. 그는 뒷날 자신이 유모의 젖과 함께 끌과 망치를 빨아들였고 말했다. 그가 태어난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가족은 피렌체로 이사했다. (158P)


***당시 많은 예술가들처럼 고대의 최면에 완전히 빠져든 적도 없었다. 그는 고전보다는 히브리 쪽이고 정신적으로는 가톨릭보다는 개신교쪽이었다. (158P)


***기를란다요와 함께 지낸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천성과 기회가 그를 조각으로 이끌었다. (158P)


***로렌쪼가 피렌쩨에 조각학교를 새울 욕심으로 기를란다요에게 이 방향으로 재능을 보이는 학생 몇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때 기를란다요는 프란체스코 그라나치와 미첼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보내 주었다. (158P)


***어린 에술가는 메디치 궁전에서 살았다. 그리고 로렌쪼, 폴리찌아노, 피코, 피치노, 풀치 등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정치, 문학, 철학, 미술에 대해 당대 가장 개명한 이야기를 들었다. (159P)


***로마에 처음 머물 때 만든 가장 위대한 작품은 <피에타>(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모)이다. 이 작품은 지금 성 베드로 성당의 영광들 중의 하나이다. (162P)


****그녀의 얼굴은 분명 아들보다 더욱 젊은 여인의 그것이다......구경꾼들은 금세 그 온화한 얼굴과 화해를 하게 된다. 비참한 고통에 찢기지 않고 조용히 슬픔과 사랑에 잠긴 모습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체념한 채 신의 듯을 따르고 있다. 상처가 깨끗이 씻기고 온갖 수치에서 벗어난 소중한 아들의 몸은 마지막 한 순간 그를 낳아 준 여인의 무릎에서 쉬고 잇는데, 죽어서도 아름다운모습이다. 삶의 모든 정수의 비극과 구원이 이 단순한 그룹상에 나타나 있다. 종족을 이어가는 출산의 흐름, 모든 탄생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의 확실함, 그 친절함으로 우리 죽을 운명을 고귀하게 만들고, 또 새로운 탄생을 통해 모든 죽음에 도전하는 사랑, 이 작품을 미켈란젤로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프랑수아 1세가 선언했는데 그것은 옳았다.

<피에타>의 성공은 미켈란젤로에게 명성만이 아니라 돈을 자져다 주었다. (163P)

☆☆☆ 아들보다 더 젊게 조각된 성모의 얼굴엔 분명 미켈란젤로의 정신이 담겨있다.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정결한 여인들은 그렇지 못한 여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신선함을 보존한다는 것을 모르는가’라고 대꾸했다.


****정결한 여인들은 그렇지 못한 여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신선함을 보존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호색한 욕망을 마음에 전혀 품지 않은 성모님의 경우에는 얼마나 더욱 그렇겠는가? 아니 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이 젊음의 꽃이 자연적인 이유에서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또 성모의 처녀성과 영원한 순결함을 세상에 확인시켜 주기 위해 기적을 통해서도 보존도리 수 있다는 신념을 위험을 무릎쓰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163P)


***특이한 주문이 그해 8월에 그에게 내려졌다. 대성당 괸리 위원회는 4미터 길이에 이르지만 특이하게 생겨서 백 년동안이나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 둔 카라라산 대리석 덩어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위언회는 미켈란젤로에게 그것으로 조각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물었다.

조각가는 2년 반동안이나 다루기 힘든 재료를 가지고 일했다. 영웅적인 노동으로 대리석의 높이를 다 이용해서 그는 <다윗>을 만들었다. (164P)


***미켈란젤로가 조각이란 “떼어냄으로써 작업하는” 예술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도니다. 그리고 그의 시 하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돌에서 표면을 제거하기만 하면 조각상에 존재를 만들어 준다. 돌이 많이 벗겨져 나갈 수록 이 모습은 점점 더 자라난다.”

그는 자주 자신이 떨어진 돌에 파묻힌 광부를 찾아내는 것처럼 표면을 떼어 냄으로서 돌 속에 갇힌 인물상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166P)


***미켈란젤로는 아름다움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신체, 특히 남성의 신체에 관심이 많아서 이따금 신체가 보여주는 온갖 결함들을 다 표현한다. 그리고 신체는 어떤 교훈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아름다움을 포착해서 그것을 오래 보존되는 돌에 새겨 넣으려는 관점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또한 위치의 해부학, 곧 인체가 자세를 바꿀 때 팔다리, 관절, 골격 근육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167P)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이유에서 레오나르도르를  싫어했다. 그의 귀족인 태도, 값비싸고 겉치레하는 옷차림,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 그리고 아마도 그때까지만 해도 화가로서 그가 더 큰 성공과 명성을 얻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67P)


2)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 (1505~ 1513)

***그들은 너무나도 비슷햇다. 두 사람 다 불같은 성질을 지녔다. 교황은 폭군같고, 불같으며 예술가는 무뚝뚝하고 자부심이 강했다.

두 사람이 죽자 온 이탈리아가 지치고 텅 빈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미칠 듯한 에너지로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168P)

***배경에 풍경은 없다. 미켈란젤론ㄴ 한 번도 풍경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며, 인체 이외에는 자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10P)


***시스티나 천장화에서 우리는 기술적인 성취만을 느끼는 것이 안다. 원근법과 단축, 그 누구의 것과도 비할 수 없이 다양한 자세들만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전능하신 창조주가 흙으로 아담을 빚어내는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청조적인 천재의 천재의 돌풍과 숨결을 느낀다. (175)

***오기서 다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정열에 자유를 주었다. 이 장소가 교황의 예배당인데도 그의 예술의 주제와 대상은 인ㅊ체이다. 그리스 사람들처럼 그는 얼굴과 그 표정보다는 신체의 전체 구조에 더 관심을 가졌다. 시스티나 천장에는 50명의 남자와 몇 명의 여자들이 나체로 등장한다. (175P)


***시스티나 천장화- 인간의 신체가 표현의  단이자 유일한 장식의 수단이다. 전체적인 그림의 계획에서 남겨진 작은 공간들은 누드인물이 차지했다. 아름답다기보다 근육질의 강인한 몸이다. 그들에게서 성적인 연상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에너지와  생동성과 생명의 최고 구현으로서 인체가 끈질기게 표현되어 있다. 소심한 영혼들이 하느님의 집에있는 이 많은 누드를 보고 항의했으나 율리우스가 어떤 반대를 햇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분노만큼이나 도량이 넓은 사람이엇다. 그리고 보는 순간 위대한 예술을 알아보았다.

아마도 그는 자기가 승리한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미켈란젤로 안에서 들끓고 있는 이상하고 예측할 수 없는 신적인 힘에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교황, 예배당 천장에 그 힘이 스스로의 모습을 펼칠 기회를 준 일로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지도 모른다. (175P)


***율리우스는 시스티나 천장화가 완성되고 넉 달 뒤에 죽었다. 미켈란젤로는 서른 여덟 살이 되어가고 있엇다. 그는 <디윗>과  <피에타>로 이탈리아 조각가들 사이에서 으뜸이 되엇다. 시스티나 천장화로 그는 회화에서 라파엘로와 대등하거나 오히려 그를 능가했다. (176P)


18장 레오 10세 1513~1521


1. 소년 추기경

***로렌쪼는 메디치 한 사람이 교회의 권력 핵심부인 추기경단에 들어간다면 피렌쩨에서 자기 가족의 권력과 후손의 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햇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어릴 적에 장차 성직을 갖도록 운명을 정했다. 일곱 살에 소년은 머리 가운데를 밀었다. 그리고 곧 여러 성직을 받게 되었다. (177P)

***여덟 살에 이미 교황청 서기장으로 임명되엇고, 열네 살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178P)


***분명 성직 매매도 없이 죠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레오 10세라는 이름을 취했다. 그는 아직 사제도 아니었지만 이런 결함은 3우러 15일에 교정되었다.

누구나 널라고 즐거워했다. 알렉산더 6세와 체사레 보르지아의 시커면 음모 그리고 율리우스 2세의 전쟁과 소란과 분로를 겪은 다음 태평스럽고 편안한 천성과 재치와 예의바름으로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후원으로 이미 유명한 절은 남자가 아마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게 되엇다는 것은 모두에게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182P)


2. 행복한 교황

****그의 온건함과 친절함은 일부 추기경들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음모를 꾸민 것을 알고 혹독함으로 바뀌었다. (185P)

****그의 즐거움은 철학에서 익살꾼의 익살에까지 걸쳐 있었다. 아버지의 식탁에서 시, 조각, 회화, 음악, 서예, 사본장식그림, 직물, 꽃병, 유리 등 아름다움의 원천이며 기준인 여성만 빼고 모든 아름다움의 형식들을 감상하는 법을 익혓다. 예술에 대한 그의 즐거움이 너무 무차별적이어서 취향을 위한 안내자가 될 수 없었는데도 그의 예술과 문학 후원은 피렌쩨에서 조상들이 이룩한 너그러운 전통을 로마에서 계속한 것이었다. (185P)


***마리첼로 알베르니는 1527년에 로마가 “세계의 집결지”라고 불렀다....알렉산더와 율리우스가 하던 대로 로마의 도로를 새로 내거나 개선햇다. (188P)

 ***일부 추기경들은 연수입 3만 두카트를 벌어들였다. 그들은 당당한 궁정에서 300명이나 되는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그들은 스스로 성직자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 시대에 알려진 온갖 예술과 사치품으로 궁정을 꾸몄다. 그들은 정치가이며 외교관이고 행정가들이었다. 그리고 로마 그리스도교의 로마 상원의원들이엇다. (189P)


3. 학자들

****레오는 훔친 사본을 필리포 베로알도에게 보내 텍스트를 수정하고 편집해서 우아하면서도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출판하도록 했다. 레오는 이 지시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구보다 더 탁월하고 쓸모가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장식하고 그의 길을 안내해 줄 뿐만 아니라 모든 특수한 상황에 적응할 수도 있고 역경에서는 위안이 되고 번영할 때는 즐거움과 명예를 주는 유용한 것이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온갖 우아함과 사회의 온갖 광채를 뺏기는 것이 되겠지요.” (192P)


***로마에는 개인 도서관들도 많았다. 알레안드로 자신도 책을 상당히 수집했는데 그것을 베네찌아에 물려주었다. 에라스무스의 부러움을 샀던 그리마니 추기경은 여러 언어로 된 8000권의 책을 소유했다. 그는 이 책들을 베네찌아의 성 살바도르 교회에 기증햇지만 불로 소실되었다. (194P)


5)고전 예술의 복구

***시대의 이교적인 정신은 고전 예술의 존재와 구원을 통해 더욱 강해졌다. 포지오, 비온도, 피우스 2세,  그 밖의 사람들이 고전 구조의 붕괴를 탄식했으나 붕괴는 지속되었고, 돈이 흘러 들어와 낡은 로마의 유물을 가지고 더 큰 건축물을 새로 지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고대의 대리석을 가져다가 태워서 석회로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파울루스 2세는 성 마르코 궁전을 짓기 위해 콜로세움의 돌벽을 가져다 썼다. 시스투스 4세는 헤라클레스 사우너을 허물고 테베레 강의 다리 하나를 대포알로 사용했다.

미켈란젤로는 가스토르와 폴록스 사원의 기둥들을 가져다가 사원의 또 다른 기둥을 가져다가 요나의 조각상을 만들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위한 자재는 하드리아누스 기념묘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203P)

****1515년에 레오는 라파엘롤ㄹ 고대 유물 감독관으로 임명햇다. 1518년에 그는 레오에게 고전 유물의 보존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권위를 이용할 것을 간청하는 제출햇다.


   “이들 고대 영혼의 신성(神性)을 생각하보면 ..... 세게의 어머니이며 여왕인 이 고귀한 도시의 시체가 그토록 비참하게 난도질당한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교황들이 고대 사원, 조각상, 개선문과 다른 건물들과 그 설립자들의 영광을 파손하는 일을 허용했던가!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새로운 로마가 아무리 장엄하고 아름답고 또 궁전과 교회와 다른 건축물로 장식되어 잇다 해도 그것이 고대의 대리석으로 만든 석회로 단단히 접합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205P)


6. 미켈란젤로와 레오 10세

***세바스티아노는 이 대화를 미켈란젤로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덧붙엿다.

  “성하께 자네의 불안함은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고 그냥 자네가 위대한 작업에 헌신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또 자네가  일에  헌신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렷어. (210P)


***이 유명한 무시무시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에너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89년동안 지탱해 주기도 한 사납게 불타오르는 힘이엇다. 둘째로 그것은 그 에너지를 단 하나의 목표, 곧 예술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모든 일을 다 무시해 보리는 의지의 힘이엇다. 통합시키는 의지력에 의해 통제된 에너지란 천재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형태 없는 돌을 도전으로 보고, ‘분노로’ 그것을 잡아 망치로 때리고 끌로 파서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는 이 에너지는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살의 하찮은 것들을 분노로 휩쓸어 내버리는 힘이기도 했다. 그 힘은 의상이나 청결함이나 표피적인 예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하고서, 약속도 깨뜨리고 우정도 건강도 깨뜨리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깨드리고 몸과 정신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지만 그러나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회회, 가장 위대한 조각,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건축 일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햇다.

  “신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이탈리아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210P)

****그는 개인의 당당한 아름다움과 의상으 화려함으로 빛나던 시대에 그 일에 가장 마음을 뺏긴 사람이엇다. 중간 키에 넓은 어깨, 호리호리한 골격, 커다란 머리, 높은 이마 귀는 밤보다 높이 솟고 관자놀이는 귀보다 높이 부플어 오르고 지푸린 우울한 얼굴, 부러진 코, 날카롭고 작은 눈, 잿빛 머리와 수염, 이것이 전성기 미켈란젤로의 모습이엇다. 낡은 옷을 입고 그것이 거의 자기 살이 일부가 될 때까지 걸치고 다녓다.

돈은 있엇으나 가나한 사람처럼 살았다. 검소한 정도가 아니라 궁핍하게 살았다.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을 먹고 때로는 빵 한 덩이로 저녁을 대신했다. 볼로냐에서 그와 세 명의 일꾼이 한 방을 쓰고 한 침대에서 잤다. (210)


***그는 귀족의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엇으나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을 더 좋아하고 자식임보다 단순한 사람을 부유함의 사치보다 일꾼들의 노역을 더 좋아햇다. 수입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를 친척들의 생계를 위해 내주었다. 그리고 고독을 좋아했다. 삼류급 정신과 하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참을 수 없다고 여겻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계속 따라갓다.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금욕을 통해 돈을 아꼈다. (211P)


***어떤 사제가 미켈란젤로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두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예술만 해도 마누라가 너무 많아요. 그게 충분히 말썽을 만들어 냅니다. 자식을 얘기하자면 내가 앞으로 만들 작품이 내 자식입니다. 이 작품들이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 해도 어쨌든 한동안은 계속 살아갈 테니까요.”(211P)


****그는 자기 집에서 여자들이 얼씬대는 것을 참지 못햇다. 그와 레오나르도가 모두 여성의 신체적인 아름다움에 무감각햇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는 미의 정화(精華)이며 원천으로 여겨지곤 했으니 말이다. (211P)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의 성공과 인기를 질투했다. 두 예술가는 서로 존경했지만 그들의 지지자들은 서로 싸우는 비밀결사단으로 나뉘었다. (212P)


***그의 가혹한 성질과 우울한 기질은 평생동안의 비극이엇다. 때대로 그는 우울증이 광증의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 자기 예술을 죄라고 생각하고 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한 가난한 소녀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엇다. 신경증을 일으키는 삼수성은 그의 일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212P)


7. 라파엘로와 레오 10세 (1513~1520)

***그는 20여명의 화가들을 로마로 불러왓지만 그가 언제나 보살핀 거의 유일한 사람은 라파엘로 뿐이었다. 레오나르도를 시험해 보고 느림보라고 도로 쪼아냈다. (213P)


***라파엘로는 레오와 기질이나 취향이 잘 맞았다. 두 사람 다 그리tm도교 세계를 즐겁게 만들고 이 세상을 낙원으로 삼은 상냥한 쾌락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잘 놀았듯이 일도 열심히 했다. 레오는 행복한 예술가들에게 일을 잔뜩 안겨 주었다. (213P)


***서른 한 살이 된 그는 이제 의식이 뚜렷한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엇다. 아마 젊은 나이를 감추기 위해서인 듯 수염을 길럿다. 브라만테가 지은 궁전을 라파엘로는 3000두카트를 주고 사서 안락하게 아니 화려하게 살았다. 그는 젊은 귀족처럼 옷을 입엇다. 바티칸을 찾아갈 때는 제자들과 고객들로 이루어진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갓다. 미켈란젤로가 그를 나무랐다.

“장군처럼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네.”

이에 대해 라파엘로가 대꾸했다.

“당신은 교수형 집행인처럼 혼자네요.”

그는 여전히 선량한 사람이엇다. (215P)


***그의 도덕성은 그의 매너처럼 훌륭하지는 못햇다. 그는 여인들의 매력에 아주 강하게 끌리지 않고는 그들을 매혹적으로 그리지 못햇다. 그리고 <성체 논쟁.을 위한 드로잉들 뒷면에 사랑의 소네트를 썼다. 그리고 애인들을 잔뜩 두었다. 그러나 교황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가 그런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카스틸리오네가 라파엘로에게 그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내느냐고 ane자 그는 여러 여인들에게 들어있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그들을 만들어 낸다고 대답했다.(215~216P)

****그런데도 그의 성격과 작품에는 건강하고 삶을 강화시키는 톤이 들어있다. 또 갈등과 불화, 시샘, 나이에 대한 비난 등의 한 가운데서도 그의 경력에는 통일성과 평화와 명랑함이 있다. (216P)


8. 아고스티노 키지

****아르고스티노 키지는 로마의 새로운 그룹을 대표했다. 이 그룹은 보통 로마출신이 아닌 부유한 상인이나 은행가로 그들의 부는 로마의 오래된 귀족들을 밀어내고 예술가의 문인들을 향한 너그러운 후원은 오로지 교황과 추기경들하고만 겨룰 수 있는 사람들이엇다. (221P)

****시에나에서 태어난 키지는 마흔 세 살에 이탈리아의 유력한 금융업자가 되어 공화국과 왕국, 그리스도교와 이교도들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그의 금융업은 터키를 포함하여 12개국에 이르렀고 율리우스 2세의 위임을 받아 그는 명반과 소금의 전매권을 가졋다. (221P)


***키지의 향연은 카이사르 시대 루쿨루스의 그것과 맞먹는 명성을 얻었다. (222P)


***"돈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라는 로마의 격언이 행동하는 동사(타동사)를 포함했다. 돈과 애인들 다음으로 키지는 예술이 만들어 낸 온갖 아름다움의 형식을 사랑햇다. (223P)


***이 빌라에서 베풀어진, 앞에 서술한 1519년 8월 28일의 저녁 식사에서 레오의 집전으로 키지는 이미 8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충실한 애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8개월 뒤에 그는 죽었다. 라파엘로가 즉은 지 며칠 만이엇다. 80만 두카트(1000만 달러?)로 추정되는 그의 재산은 주로 자식들 사이에 분배되엇다. 장남인 로렌쯔는 낭비의 삶을 살았다.그리고 1553년에 정신병 판정을 받앗다.

☆☆☆그렇게 많은 돈을 남겨두고 억울해서 원통해서 어떻게 죽었을까?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남겨줄 유산도 없고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홀가분하다.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9. 라파엘로의 마지막 시기

***1516년에 그는 비비에나 추기경의 욕실을 베누스와 사랑의 승리를 찬양하는 벽화로 장식햇다. 1517년에 키지 저택 중앙 홀의 천장과 천장의 아치 삼각면을 위한 그림들에게 더욱 쾌락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그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얻은 이야기를 위해 천재적인 상상력을 동원햇다. (225P)


***라파엘로의 감각주의에는 청교도의 비판을 무력하게 만드는 섬세함과 우아함이 들어있다. (226P)


***이교와 그리스도교가 라파엘로에서처럼 그렇게 잘 혼합된 경우는 없었다. 왕자처럼 살고 많은 여인들을 순간적으로 사랑했고 천장에 남자와 여자 누드화를 그리면서 좋아하던 이 세속작인 젊은이는 동일한 시기에 역사상 가장 호소력이 있는 그림들을 그렸다. 자신의 적나라한 감각주의를 그대로 지닌 채 그는 언제나 좋아하는 주제인 성모그림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성모를 50번이나 그렸다.(226P)


***이제 그는 피아첸짜에 있는 산 시스트 수도원을 위해 <시스티나 성모>를 그렸다. 완전한 피라미드 구도이고 늙은 순교자 성 식스투스의 모습은 분명히 사실적이다. 새침한 성 바르바라는 약간 지나치게 아름답고 화려한 의상을 입었다. 붉은 색이 들어간 성모의 녹색 겉옷은 천상의 바람에 부풀어 올랐다. 아기 예수는 헝클어진 순수함을 지녔기에 지극히 인간적이다. 성모의 단순한 장밋빛 얼굴은 약간 슬프고 놀란 모습이다. 성모 뒤에 있는 커튼이 천사들에 의해 양쪽으로 젖혀져 그녀를 천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온 그리스도교 세계가 좋아하는 그림이고, 라파엘로가 그린 것 중에서도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227P)


***라파엘로는 모든 정도를 넘어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계속 즐겼다. 특별히 사나운 밤을 보내고 난 다음 그는 심한 열을 지닌 채 집으로 돌아왓다. 의사들은 그가 감기에 걸렷다고 생각햇다. 그가 이런 질병의 원인을 고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들은 경솔하게 방혈(防血)을 했다. 그럼으로써 원기를 회복시켜 줄 강장제가 필요한 순간에 그를 허약하게 만들었다. 상황에 맞게 그는 유언장을 만들었다. 우선 그리스도교도답게 애인이 정직하게 살 수 있도록 재산을 주어 집으로 내보냈다. 그런 다음 물건들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엇다. 그가 언제나 사랑했던 쥴리오 로마노, 피렌쩨의 죠반니 프란체스코 페니, 우르비노의 사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엇다. .....고백성사를 하고 회개한 후 그는 자신의 생일인 수난의 금요일에 삶을 마감했다. 서른일곱 살이었다.(1520년 4월 26일)


***로마의 모든 예술가들이 죽은 젊은이를 따라 그의 무덤으로 갔다. 레오는 사랑하는 화가를 읽은 것을 탄식했다. 교황의 비서 겸 시인인 뱀보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에 아주 능한 사람이 이었는데 판테온에 있는 라파엘로의 무덤을 위해 비명(碑銘)을 쓰면서 수사법을 다 버렸다.


여기 라파엘로가 잠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232P)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게서 길잡이를 내동댕이치고 거의 과격하게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분노를 느끼지 못햇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너무 행복해서 전통적인 격렬한 의미의 천재가 도리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이 갈등을 잘 해결했기에 가장 위대한 영혼들을 창조와 비극으로 이끌어가는 악마적인 정신이나 힘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는 서오와 애인들 사이를 즐겁게 왕복하는 솔직한 젊은이였다. 이것은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화해시키는 그만의 명랑한 방법이기도 하다. (233P)


****그림의 요소들을 배열하는 것, 대중의 리듬, 선의 매그러운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아무도 그와 견줄 수 없다. 그이 삶은 형태에 바쳐진 것이었다. 그는 항상 사물의 표면에 머물려는 경향을 지녓다.

레오나르도의 섬세함과 미켈란젤로의 비극적 감각은 그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삶의 쾌락과 즐거움, 아름다움의 창조와 소유, 친구와 애인의 성실함으로 충분했다. (233P)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미켈란젤로느 우리를 두렵게 하고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그는 질문하지 않고 의심도 만들어 내지 않고 어떤 두려움도 불러 일으키지 앟고 우리에게  신의 음료와도 같은 삶의 사랑스러움을 제공한다. 그는 지성과 감성 사이, 육체와 영혼 사이에 어떤 갈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피타고라스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대립의 조화이다. 그의 예술은 그것이 건드리는 모든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종교, 여인, 음악, 철학, 역사, 전쟁가지도 그 자신 행운이 많고 행복햇던 사람이라 그는 명랑함과 우아함을 사방으로 내뿜는다. (233P)


10. 정치가 레오

***이탈리아가 강해지면 유럽을 지휘하여 한 번 더 위협적인 터키에 맞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리스도교나 교황들에 유리한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엇지만 이런 계획이라면 열렬히 찬성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탈리아의 통일과 보호하는 점에서는 그렇다. 이탈리아의 통일과 보호가 바로 <군주론>의 핵심적인 생각이었다. (234P)

***돈의 결핍은 한 때 행복했던 레오의 통치를 힘들게 만들었다. 친척, 친구, 예술가, 작가, 음악가들에 대한 선물과 전례 없이 많은 궁정 유지비, 그리고 끝도 없이 돈이 필요한, 새로 짓는 성 베드로 대성당, 우르비노 전쟁 경비, 십자군 전쟁의 준비 등이 합쳐져 그를 파산 상태로 이끌었다. (237P)


****그는 꽃병의 아름다움은 볼 줄 알았지만, 알프스 저편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이 형태를 잡아나가는 것을 보지 못햇다. 그는 자기에게 오는 백 가지의 경고들을 주의하지 않고 이미 반란 중인 민족에게 더 많은 금을 요구했다. 그는 교회에 영광이며 재앙이엇다. (240P)


***그의 보호 아래서 로마는 유럽문화의 생동하는 심장부가 되엇다. 예술가들이 떼를 지어 이리오 아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시인들은 노래를 하고 재치있는 사람들은 재치의 불꽃을 만들어 냈다.(241P)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썼다.

  “로마여, 내가 너를 잊으려면 레테의 강물에 몸을 던져야 하리라.... 얼마나 소중한 자유이며 책의 방식으로 된 얼마나 대단한 보물들이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학식이고 그 얼마나 유익한 사회적 교류들이었던가! 다른 어디에서 대체 단 한 장소에서 그렇듯 학식있는 모임, 그렇게 다양한 재능들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241~242P)


붕괴 


19장 지식인의 반란 1300~1534


1. 비밀종교

****모든 시대와 민족에서 문명이란 소수의 산물이며 특권이고 책임이다. 무의마함이 끈덕지게 널리 퍼지는 일에 익숙해진 역사가는 미신의 찬란한 미래를 어느 정도 각오하게 된다.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완전한 국가들이 나올 것이란 기대도 하지 않는다. (245P)


****어떤 세대든지 오직 적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경제적 고민에서 벗어나 조상이나 주변의 사고방식 대신 자신만의 사고를 펼칠 여가와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45P)


****직업적인 마법사들은 돈을 지불한 고객들을 위해 악령의 도움을 불러내는 특별한 주문을 지니고 있엇다. 마녀들은 그렇게 도움을 주는 정령들에게 접근하는 힘을 가지고 잇다고 믿어졋다. 그들은 정령들을 애인이나 신들로 대접했다. 사람들의 믿음에 따르면 이런 여자들은 자기에게 권한을 준 정령의 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고, 한순간에 아주 먼 거리를 날아갈 수도 있으며 닫힌 대문이나 방문을 통고하라 t도 있고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들은 사랑이나 미움을 만들어내고 낙태를 시키고, 독을 제조하고, 주문이나 한 번 힐끗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248P)

☆☆☆나에게 “마법, 마녀” 라는 단어는 유럽의 중세사회를 떠올리고 상상하게 하는 하나의 키워드이다.


****교황은 여기서 “마녀들이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입장에 충실했다. 교회는 수백 년 동안이나 정령이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교황이 마법의 현실성을 인정한 일은 그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켰고 종교 재판관들에 대한 그의 경고는 마녀 박해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교서가 발표된 이듬해에 코모에서만 41명의 여자들이 마법을 행한 죄로 화형을 당했다......상냥한 레오 10세의 재임시절인 1514년에 코모에서 300명이 화형을 당했다.(248P)


2. 과학

***아름다움을 향한 중세의 사랑이 성숙하여 위대한 미술이 되었다. 그러나 중세에 과학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은 별로 없었다. (251P)


3. 의학

******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 이론에 근거를 두고 환자 치료가 이루어졌고, 방혈(防血)이 만병통치요법이엇다. 최초로 알려진 인간의 수혈은 어떤 유대인 의사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에게 행한 일이었다. 이미 보았듯이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갓다. (255P)

***고대인들에게 알려졌던 성형수술이 1450년무렵 시칠리아에 다시 나타났다. 부러진 코, 입술, 귀 등은 신체 다른 부위의 피부조각을 이식함으로써 고쳤는데, 접합선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정교햇다. (256P)


4. 철학

****삶의 두 가지 요소들이 다시 등장함으로서 철학을 되살려 냈다.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갈등이 그 하나이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다시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과 아베로에스주의로 갈라진 일이 그것이다. (263P)


***플라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도로 남았다. 그들의 대표이자 대리인인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생애의 절반을 이 두 사상 체게를 화해시키는데 바쳤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광범위한 연구를 행햇고, 심지어는 조로아스터와 공자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263P)


5. 귀치아르디니

****귀치아르디니의 정신은 시대의 회의적인 환멸을 요약해 준다. 그는 이 시대의 가장 예리한 정신의 한 사람이엇다. 우리 치향에는 지나치게 시니컬하고 우리의 희망에는 지나치게 비관적이지만, 하늘을 떠도는 탐조등처럼 시대를 훑어보고 오로지 사후의 출판만을 염두에 둔 작가의 솔직함으로 숨김없이 표현한 사람이었다. (272P)


***그는 마키아벨리처럼 시니컬해 질 수가 있다.

  “정직함은 칭찬을 얻고 위장은 비난과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정직함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쓸모가 많다. 그래서 나는 삶의 보통 상황에서는 개방적이고 정직하다가 아주 중요한 어떤 일들의 경우에만 위장을 이용하는 사람을 찬양해야겠다. 정직하다는 평판을 많이 얻을수록 이것은 더욱더 성공적이다.” (275P)


****최고의 시민들은 말로는 그렇게 외쳐도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지배와 우세함을 키우는 것만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다. 자유는 유행하는 용어일 뿐이고, 권력과 명예를 높이려는 그들의 열망을 감추어 주는 표현일 뿐이다. (275P)


6. 마키아벨리

1)외교관

****외교관, 역사가, 극작가, 철학자 등 어디에도 분류해 넣기가 어려운 한 사람이 남는다. 자기 시대 가장 냉소적인 사상가이며 고귀한 이념으로 불타던 애국자였다. 시도한 모든 일에서 실패했으나 역사에는 자기 시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 (276P)

****피렌째는 점령당하고 메디치 일가가 승리했다. 마키아벨리는 명성과 정부 직이 둘 다 잃었다. 그는 승리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햇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러나 두 명의 열렬한 젊은이들이 공화국을 다시 세울 음모를 꾸몄다가 들켯다. 이 명단에 마키아벨리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체포되어 네 번이나 호된 고문을 받앗다. 다시 붙잡힐까 겁이 나서 그는 아내와 네 아이드을 데리고 조상이 살던 산카쉬아노의 별장으로돌아갓다.

그는 남은 15년이 삶을 마지막 한 해만 빼고 극소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 재앙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움직인 책을 쓴 것은 바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279~280)


2)작가이며 인간

***피렌체 정치의 한복판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그것은 황량한 고립이었다. 이따금 그는 피렌체로 달려가 옛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고용 기회를 알아보고 싶었다. 여러 번이나 그는 메디치 일가에게 편지를 써 보냈으나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 (280P)

***다음은 당시 로마 주재 페린쩨 대사로 있던 친구 베토리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이다.

“지난 번 불행 이후로 나는 조용한 시골 생활을 하고 있네. 태양이 뜨는 것과 함께 일어나 숲으로 가서 몇 시간동안 어제의 작업을 살펴보곤 하지. ........... 책 한 권을 팔 아래 Rll고 말이야. 단테, 페트라르카, 혹은 조금 못 미치는 시인들, 불루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사람들말일세. 그들의 호색한 이야기나 사랑의 이야기를 읽고나서 자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즐겁게 흘러가지.” (280P)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와 서재로 간다네. 문지방에서 진흙과 먼지가 잔뜩 묻은 촌뜨기의 옷을 벗어 던지고 궁정의 예복을 입는 다고 생각을 한다네. 이렇게 어울리는 옷을 차려입고서 고대인들로 이루어진 고대의 궁정으로 들어가는 거지. 그들에게 충심으로 호나영을 받고 오직 나만을 위한 식살ㄹ 대접받고 부끄러움 없이 그들과 토론을 벌이고 그들 행동의 동기를 물어본다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친절하게 내게 대답을 해 주지. 이 네 시간동안 나는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고 그 어떤 말썽도 기억하지 않고, 가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아. 내 존재 전체가 그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네. 단테가 이미 들은 것을 기억 속에 보존하지 않고는 어떤 학문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나는 이들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얻은 것을 기록해서 <군주론>이라는 책자를 만들엇다네. (281P)


***그는 이것을 당시 피렌쩨를 통치하던 쥴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헌정할 계획기이엇다. 그러나 마키아벨 리가 이책을 보내기로 작정하기도 전에 쥴리아노가 죽었다.(1516) 그래서 그는 이것을 고쳐서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조에게 보냈지만 공작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답례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원고 상태로 돌아다니면서 몰래 복제되기도 했다. (283P)


*** "큐피드의 그물이 아직도 나를 얽어매고 있다. 길이 나빠도 나의 인내심을 다 없애지 못하고 어두운 밤도 나의 용기를 꺾지 못한다......내 온 마음이 사랑을 향하니 그에 대해 나는 베누스 여신께 감사를 드린다.“(283P)


3)철학자

***마키아벨리즘‘을 할 수 있는 한 공정하게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정치철학이다. 여기에는 어떤 형이상학도 신학도 유신론이나 무신론도 없으며, 결정론이나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 도 없다. 윤리학 자체는 옆으로 밀려나서 정치학에 종속된 것으로 거의 도구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가 이해한 정치학은 국가를 만들고 보존하고 보호하고 강화하는 고급 기술이다. (287P)
***그는 인류보다 국가에 더 관심이 많다. 그리고 개인을 단순히 국가의 구성원으로 본다. 그들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 말고는 시간의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개인들의 행진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어째서 국가들이 몰락하는지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없는 그 붕괴를 가능하면 오래 연기할 수 있는지 알고자 한다. (287~288P)


****지혜로운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래를 예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과거와 상의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사란 앞선 시대의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사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똑같은 정열에 따라 움직이게 될  미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필히 동일한 결과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나는 세계는 항상 똑같았으며 언제나 똑같이 많은 선과 악을 포함했다고 믿는다. 비록 시대에 따라 민족에 따라 그것이 다르게 분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288P)

☆☆☆ 마키아벨리의 역사관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된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천성적으로 사악한 인간을 법과 질서에 익숙하도록 길들이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종교이다. 그를 숭배하던 파올로 죠미오가 부르는 대로 “비꼬기 좋아하는 무신론자”인 마키아벨리는 열광적인 어조로 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종고가 따르는 일은 공화국의 위대함의 원인이다. 종교가 무시되는 것은 국가의 파멸을 초래한다. 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통치자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을 대체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289~290)


***로마인에게 있어서 미덕(용맹)이란 겸손이나 온화함이나 평화가 아니라 힘과 지성을 갖춘 강인함, 남자다움, 용감한 등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미덕이란 말로 뜻한 것이다. (293P)


****“군주가 모든 미덕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미덕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일은 쓸모가 잇다. 예를 들어 자비롭고 충성스럽고 인도적이고 종교적이고 성실한 것으로 보이는 일이다. 실제로 이런 미덕을 가지는 것도 유리한 일기는 하지만 그러나 필요성이 있을 대면 반대로도 행동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으로 그래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어록-(298P)


***"누구나 당신이 겉모습을 보지만 당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

    -마키아벨리의 어록-(298P)


***그는 통치자에게 좋은 것과 국민에게 좋은 것을 혼동했다. 그리고 권력의 보존에 대해서는 너무 많아 권력의 의무에 대해서는 너무 적게 생각하고 권력의 부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국가라는 우상을 숭배하느라 길을 잃었다. (302P)


20장 풀어진 도덕 1300~1534


1. 불사의 원천과 형태들

***르네상스의 지적인 상승을 동반한 도덕적 쇠퇴에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기본적인 사실은 아마 부(富)의 성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306P)


2. 성직자의 도덕성

***1497년에 의사 가브리엘레 다 살로는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정상적인 웃기는 방식으로 임신되었다고 주장했는데도, 환자ㅇ들의 보호를 받아 종교 재판을 벗어났다. 그는 축성된 성찬식의 빵 속에 그리스도의 몸이 들어있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들은 신적인 힘에 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별들의 영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햇다. (313P)


***같은 해에 아란다이 주교는 천국도 지옥도 없고 면죄부는 단순히 돈을 모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도 벌을 받지 않았다. (313P)


***카푸치오, 곧 두건 달린 겉옷과 성 프란체스코의 마지막 규칙을 엄수한다는 점이 달랐다. 그들은 가장 거친 천으로 된 옷을 입고 1년 내내 맨발로 지내고, 빵과 야채와 과일과 물만 먹고 살았으며 엄격하게 금식을 지키고 목재와 진흙으로 만든 빈곤한 오두막 좁은 방에서 살며, 오직 걸어서만 여행을 했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에 탁발 수도회로 발전했다. (314P)


3. 성도덕

***라파엘로는 성모를 50장이나 그렸지만, 아내는 얻지 않았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그와 의견일치를 보았던 한 가지 이다. 결혼자체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자신의 결혼이 부친의 유산을 다 낭비해 버렸다고 불평했다. (320P)


***간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상류층에서 대부분의 결혼이 경제적인 혹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외교적 결합이었기 때문에 많은 남편들은 애인을 두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느꼈다. (321)


4. 르네상스 남자

***르네상스 남자의 특질은 두 가지 초점을 중심으로 선회한다. 지적 용감성과 도덕적 용감성이다. 예리하고 깨어있는 다재다능한 정신으로 모든 인상과 사상에 열려 있고 아름다움에 민감하여 명성을 갈망한다. 자신의 모든 점재 능력을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냉혹하도록 개인적인 정신이다. 자부심이 강한 정신으로 그리스도교의 겸손을 비웃고 나약함과 비겁함을 경멸하며 관습과 도덕성과 교황들과 때에 따라서는 신까지도 무시한다. (322P)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을 강렬하게 살았다는 것, 르네상스는 충심으로 그리고 영혼과 힘으로 삶을 긍정했다. (324P)


5. 르네상스 여성

***유럽 역사에서 여성의 지위는 보통 부가 늘어나면서 함께 높아지곤 했다. (324P)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는 자신의 지성이나 미덕으로 스스로 높은 자리를 만들어 낸 여성들이 많았다. (328P)


7. 일반적인 도덕성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든 구석에서 교황청 관리들이 부패와 재정적 강제에 대해 극히 높은 소리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로마에서는 모든 일에 돈이 든다는 말까지 돌았다. (334P)

8. 훌륭한 몸가짐과 오락

****음식을 집어 입으로 나르는 일을 손가락 대신 포크가 하면서 15세기에 식탁 예법의 혁명이 일어났다.

1600년경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토머스 코리에트는 이 고귀한 관습에 깜짝 놀랏다 그는 이렇게 적엇다.

“이것은 내가 여행 중에 본 다른 어떤 s라에도 없던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이런 발상법을 잉글랜드에 도입하는데 한 몫을 했다. (341P)

***사육제때 피렌쩨에서는 행렬을 이룬 무대 차들이 신중함, 희망, 두려움, 죽음과 같은 이념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거나 자연의 원소, 바람이나 계절 등을 표현햇고, 또는 파리스나 헬레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등의 이야기들을 무언극으로 들려주고 각 장면마다  그에 어우리는 노래들을 동반햇다. 이런 가장 행렬을 위해 로렌쪼는 청춘과 즐거움에 대한 그의 유명한 송가를 썼다. (345P)


10. 음악

***대성당과 교회들, 수도원과 수녀원들에 음악이 울려퍼졌다. 베네찌아, 보로냐, 나폴리, 미라노 등지에서 수녀들은 저녁기도를 몹시 감동적으로 노래해서 사람들이 노래를 들으로 오곤 했다. 식스투스 4세는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성가대를 조직햇다. 율리우스 2세는 이에 덧붙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율리우스 성가대를 조직하고 시스티나 성가대를 위한 가수들을 훈련시켰다. (351P)

***대위법과 푸가의 복잡한 미묘함이 네 개의 독립적인 작은 흐름들을 얽어서 화음을 이룬 큰 강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해서 16세기의 이탈리아 마드리같은 이탈리아 예술의 가장 아름다운 꽃으 하나가 되엇다. 단테시대에 음악은 시의 보조자에 지나지 않았다면 지금 음악은 완전히 자란 동반자가 되었다. (354P)


11.조망

***1511년에 아탈리아를 방문한 루터는 “만일 지옥이 있다면 로마는 그 위에 세워졌다. r,리고 나는 로마에서 이 말을 들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358P)


***사보나롤라 같은 설교자들은 개혁을 향한 온갖 호소가 거부되자 하늘의 심판이 이탈리아에 내리기를 기도햇고 로마의 파괴와 그리스도교의 붕괴를 예언했다. (360P)


21장 정치적 붕괴 1494~1534


1.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발견하다 1494~1495

***부르봉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정원을 묘사하면서 이브만 한 사람 있으면 천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365P)


5. 하드리아누스 6세 :1522~1523

***하드리아누스는 바티ㄱ칸의 포로가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궁전이 베드로와 후계자보다는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는 바티칸 방들의 장식을 전부 중지시켰다....조각을 우상숭배의 유물이라 비난하고 유럽 제 1의 고전 조각품을 모아 놓고 벨베데레 궁전을 막아버렸다. 그는 도한 인문주의자들도 봉쇄햇고,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쫓아낸 이교도처럼 살고 글을 쓰는 것으로 여겨지는 시인들에 대해서도 담을 쌓았다. 381P)

***교황이 1주일 만에 해낸 일을 보고 두려움에 정신을 잃었다. (382P)


***하드리아누스가 르네상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신앙심 깊은 교황을 견디지 못한 것은 더욱 큰 범죄이며 어리석은 일이었다. (383P)


7. 로마 유린 1527

***5월 6일에 부르봉의 대군은 안개의 엄호를 받으며 성벽에 접근햇다. 그들은 연속사격을 받고 쫓겨갔다. 부르봉 자신도 총을 맞고 거의 즉사햇다. 그러나 공격자들은 공격을 되풀이 했다. 그들에게는 로마를 약탈하거나 아니면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392P)


***책들, 문서고, 미술품의 파괴는 엄청났다. 전혀 기율이 없는 폭도 떼거리의 지휘구너을 이어받은 오랑쥬 공 필리베르가 바티칸 도서고나을 자신의 사령부로 삼아서 이곳만은 보호햇다. 그러나 많은 수도원과 개인도서관들은 불꽃이 되어 날아가고 많은 소중한 문서들이 사라졌다. (394P)


***로마유린은 8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클레멘스는 천사성의 탑에서 그 골을 지켜보았다. 그는 고통을 당하는 욥처럼 신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나를 어미의 자궁에서 꺼내셨습니까? 내가 바짝 여위어서 아무도 나를 보지 앟게 하소서!” 그는 면도를 중단햇고 다시는 면도하지 않았다. (395P)


***에라스무스는 사돌레토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로마는 그리스도교신앙의 사원이며 고귀한 영혼을 위한 유모이고 뮤즈의 거처일뿐만 d니라 민족들의 어머니인 곳이었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는 자신들의 나라보다도 더욱 소중하고 달콤하고 귀한 곳이었던가! 정말이지 이것은 한 도시의 파괴가 아니라 온 세상의 파괴입니다.” (396P)


8. 승리자 카를 5세 1527~1530

***헨리 8세는 감금된 교황이 자신에게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을까봐 울시 추기경을 프랑스로 보내서 프랑수아 1세와 함께 교황을 구해낼 방도를 논의하게 했다. (397P)


9. 클레멘스 7세와 미술

****교황이 피렌쩨를 다른 방식은 메디치 가문의 타락을 확인해 줄 일이었다.  동시에 로마를 복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 가문을 위대하게 만든 행정적 천재성과 미적인 감식안의 불꽃을 다시 보여 주었다. (401P)


10. 미켈란젤로와 클레멘스 7세 1520~1534

***클레멘스 7세가 자신의 온갖 불운을 통해서도 미켈란젤로의 변덕과 적개심을 친절하게 참아냇다는 것은 그의 이야기에서 명예의 하나이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여러 임무들을 부여하고 도한 천재의 온갖 특권을 그에게 주었다. (407P)

***전쟁은 예술도 중단시켰다. 로마가 도이치 용병들의 손에 떨어졌을 때 클레멘스는 후원자 노릇을 할 수가 없엇고 미켈란젤로의 월급 50크라운도 중단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밤’의 제막식을 맞이하여 시인 쟌바티스타 스트로찌가 4행시로 문학적 주석을 표현했다.

너희가 여기서 보는 우아하게 잠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밤은 어떤 천사(미켈란젤로)에 의해

돌로 제작된 것, 삶을 지닌 채 잠자는 여인.

믿지 못하는 사람아, 그녀를 깨워라. 그녀가 네게 말해 줄 것이다. (411P)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답햇다.

나의 잠은 소중하다. 폐허와 불명예가 지배하는 한

잠은 단순한 돌 이상이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나의 큰 이점.

그러니 나를 깨우지 마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라. (412P)


11. 한 시대의 종말 1528~1534

***클레멘스는 너무 오래 살았다. 그가 즉위할 때 헨리 8세는 아직은 루터에 맞서 정교 신앙의 수호자였다. 개신교 혁명은 아직 중대한 교리상의 변화를 내노기 전이엇고, 오직 다음 세대에 트리엔트 공의회가 교회를 위해 제정하게 될 정도의 교회 개혁만ㅇㄹ 제안하고 있을 때였다. 클레멘스가 죽을 때는 영국, 덴마크, 스웨덴, 도이칠란트의 절반, 스위스가 확고하게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있었다. (413P)


종말 1534~1576


22장 베네찌아의 황혼 1534~1576


1. 다시 태어난 베네찌아

***이탈리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속박과 쇠퇴가 이루어지던 이 시기가 베네찌아에는 황금시대가 되엇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일이다. (417P)

***아드레아 가브리엘리는 성 마르코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성가대를 지휘했으며 이탈리아 전역에 울려 퍼진 마드리갈 곡들을 작곡햇다. 음악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의 공통된 정열이엇다. 대운하 양쪽에 늘어서 s궁전들의 사치와 미술품으로 장식된 내부는 오로지 로마의 은행가들과 추기경들의 궁전하고만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 (418P)


3. 티찌아노와 왕들 1530~1576

***16년동안 티찌아노는 눈부신 황제의 초상화들을 제작햇다. 오나전 무장한 카를 5세, 능라코트를 입은 카를, 수를 놓은 허리가 잘쑥한 웃옷, 하dis 반바지, 스타킹, 신발, 그리고 어울리지 앟게 흰 깃털을 꽂은 검은 모자를 쓴 모습, 황후 이사벨라와 함게 한 카를 5세, 뮐베르크 전투에서 완전무장한 모습으로 뒷발로 일어선 군마를 타고 있는 카를 - 색채와 자부심이 빛나는 작품, 근엄한 검은 옷을 입고 발코니에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모습 등이다. 이 초상화들이의상을 빼고는 대상을 이상화하려는 시도를 봉지ㅣ 않는다는 것은 화가와 왕에게 모두 영예가 되는 일이다. 이 그림들은 붙임성이 없는 카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거친 피부, 우울한 정신, 그리고 일말의 잔인성, 게다가 무거운 짐과 권위를 지닌 남자, 서유럽의 절반을 통치하는 냉혹하고 차가운 정신을 가진 황제를 보여준다. (436P)


***카를 5세의 포르투갈 출신 아내, 황후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더욱 사랑스럽다. 그녀는 1539년에 죽엇다. 그러나 황제는 4년 뒤에 티찌아노에게 무명의 화가가 그린 중간급 초상화를 주면서 이 초상화를 변화시켜서 완전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달라고 청햇다. 그 결과는 어쩌면 황후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상상의 초상화로 만들어진 이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는 티찌아노 그림 중에서도 훌륭한 것에 속한다. 섬세하고 우수에 젖은 얼굴, 극히 당당한 의상, 그녀의 이른 죽음의 전조를 위로하기 위한 듯 기도 책 한 권, 먼곳의 풍경은 녹색, 갈색, 청색의 뉘앙스를 낸다. 티찌아노는 자신의 고귀한 등급을 되풀이 성취햇다. (438P)

***아주 노년까지 그는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고 예술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행복을 찾았다. 그는 이 분야에서 자기가 대가임을 알고 있었고, 온 세계가 자신을 칭찬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손이 그 노련함을, 또 자신의 눈이 그 예리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상상력과 함께 그의 지성도 마지막까지 그 힘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어떤 화가도 그러한 기술, 색채와 질감의 그런 통제력,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의 마력을 갖지 못햇다. (443P)


4. 틴토레토 1518~1594

**** 야코포 로부스티는 염색업자의 아들이었다. 별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것을 줄인 별칭을 그의 성(姓)으로 삼아 역사에 남겻다. 그는 정말로 위대한 색채주의자라는 점에서 틴토르(염색공)가 된 것이다. (틴토레토는 작은 염색공이라는 뜻)


****그는 생앨르 통해 티찌아노가 자기에게 준 그림을 소중히 여겨 작업장 벽에 붙여놓고 회화에서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언제나 거듭나게 해주는 암시로 삼았다. 즉 미켈란젤로의 도안과 티찌아노의 색채가 그것이다. (446P)


***틴토레토의 그림은 호려한 색채와 확한 사실주의, 극적인 힘 등으로 이 이야기(성마르코가 노예를 구하는 그림)를 들려주었다. 복음서 기록자인 마르코는 복음서를 꼭 붙잡고 하늘에서 내려와 자신에 헌신한 대가로 무어 사람에 의해 막 참수형을 당하려는 사람을 구한다.

틴토레토는 이 이야기가 자기에게 제공한 모든 기회를 다 잡았다. 강력한 남자들과 우아한 여성 인물들을 그리기, 동방의 벨벳, 비단, 터번 위에 떨어지는 빛의 탐구, 죠르죠네와 티찌아노에게 배운 색채 속에 장면이 흠뻑 잠기게 하는 것이엇다. (447P)


***베로나 박물관에는 8명의 여자 악사들의 <음악회>가 있는데, 그들 중 셋은 허리까지 알몸이다. 마치 귀가 들을 수 있듯이 눈도 음악을 보아야 한다는 것만 같다.(452P)

***그의 강점은 남성적인 삶과 영웅적인 죽음의 묘사에 잇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그림들은 그도 죠르죠네와 티찌아노처럼 견고한 손길로 위태로운 곡선을 그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든 누드화들 가운데 천박한 것은 없다. 건강한 관능성이 잇을 분이다. 이들 신들과 여신들은 벌거벗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에 벌거벗고 잇다는 것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다. 단추나 레이스나 장식품으로 가리지 않은 채 태양을 온 얼굴로 온 몸으로 맞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이 신적이다. (452P)

***틴토레토는 자신의 작업장에서만 행복했고, 그곳에서 문자 그대로 밤낮 일을 했다. 그는 자기가 숭배하고 또 능가하려고 애쓰던 미켈란젤로만큼이나 고독하고 독립적이며 변덕스럽고 우울하고 신경질이고 격렬하고 자부심이 강했다. 그의 영혼이나 그의 작품에 평화는 없었다.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그는 신체와 정신과 영혼의 힘을 표면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중시했다. (453P)


***그는 또한 자신의 자화상을 남겻다. 강하고 침울한 얼굴, 심오하고 생각에 잠긴 채 수많은 세월의 흔적을 지닌 얼굴이다. 그 자신의 초상화가 그가 남긴 최고의 초상화이다. (453P)


***미켈란젤로가 형태에 루벤스가 살결에 빠져 잇엇다면 그는 숫자에 몰두해 잇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숫자 속에서도 의미심장한 디테일이 얼마나 풍성하며 관찰이 얼마나 예리하고 부분이 개인적 요소가 얼마나 다함이 없으며 예전에는 오로지 상상과 감상만이 있던 자리에 얼마나 대담한 사실주의가 드러나 있는가! (457P)


6. 조망

***우리는 오로지 피렌쩨와로마만이 그 탁월함과 광채와 범위에서 베네찌아와 겨를 수 있다는 것을 즉시 알게된다. (467P)

***십자군 전쟁이 무너지고 이슬람교도가 승리해서 이슬람교가 널리 전파되고 아비뇽의 교호아이 타락하고 교호아의 분열, 또 식스투스 4세와 알렉산더 6세 치하에서 교황청의세속화, 등이 신앙심 깊은 사람들의 신앙심마저 약하게 만들고 많은 활동적인 정신에 그냥 먹고 마시고 짝짓고 사라진다는 것보다 더 나은 철학을 남기지 못햇다는 것에 대해서는 베네찌아 사람들도 어쩔 수가 없엇다.(467P)

 

****베네찌아 화가들은 색채를 너무나 좋아해서 피렌쩨 대가들과 같은 조심스러운 도안의 경지에 이르지 못햇다. (467P)

***어떤 프랑스 사람은 “여름은 색채주의자, 겨울은 도안가”라고 말한 적이 잇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은 순수한 선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선들은 봄의 초록, 여름의 갈색, 가을의 호아금색 아래도 여전히 있다. 죠르죠네, 티찌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제의 색채의 영광 아래에도 선이 잇다. 다만 색채에 너무나 빠져서 교향곡의 구조적 형태가 그 흐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468P)


23장 르네상스가 이지러지다 1534~1576


1. 이탈리아의 쇠퇴

***루터는 반란의 주장들을 비텐베르크 교회문에 붙엿다. 종교개혁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쇠퇴의 원인이자 결과엿다. 종교개혁이 북부국가들에서 로마로 향하는 순레자들의 이동과 성직 수입을 줄엿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쇠퇴의 원인이엇다. 또 인도로 가는 지중해, 이집트 통로가 순수 항해 방식으로 대체된 점과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사이의 상업이 발전하면서 대서양 국가들을 부강하게 하고 이탈리아를 가난하게 만들엇다는 점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쇠퇴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472P)


***민중이 교회의 가르침과 구원을  부정하기 시작하고 종교 개혁이 이탈리아 안에서도 개종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을 때 가톨릭 교회의 구조 전체가 기반부터 위협을 받았다. 스스로를 국가로 여기고 또 존재를 위협받는 다른 어떤 국가와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는 관용과 자유주의에 등을 돌리고 끔찍한 보수주의로 회귀햇다. (473P)


3. 문학

*****단편소설은 <데카메론>이 고전적 형식을 만들어 낸 이후로 여전히 인기가 있엇다. 단순한 언어로 쓰이고 보통은 이탈리아 생활의 극적인 사건이 작품들이 열렬히 듣는 청중에게 큰 소리로 낭송되었다. (484P)


4. 피렌체의 황혼 1534~1574

***기울어가는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젊은 국가를 다스리는 것보다 쉽다. 기운이 쇠약해진 생명력은 복종을 환영하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에 의해 다시 패배한 피렌쩨는 피곤한 채로 클레멘스 7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488P)


5. 벤베누토 첼리니 1500~1571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탁월함의 요소를 지녓거나 탁우러함과 상당히 비슷한 요소를 지닌 사람이고 진리와 정직성을 지니고 있다면 모든 남자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생애를 서술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흔이 되기 도 전에 이런 섬세한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이 의무가 이제 나의 마음에 나타난ㅅ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난 도시 피렌쩨에 잇으며, 쉰여덟을 넘기고 있다. -벤베누토 첼리니- (497P)


7.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국면 1534~1564

***미켈란젤로는 다른 시대에 나온 통제할 수 없는 유령으로서 이 모든 세월을 게속 살아남앗다. 클레멘스 7세가 죽었을 때 그는 쉰아홉살이엇다. (509)


***그이 종교는 본질적으로 중세적이고 신비주의와 예언, 도 죽음과 지옥에 대한 생각으로 어두워진 것이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회의론이나 라파엘로의 쾌활한 무관심을 지니지 않았다. 그가 좋아한 책들은 성서와 단테엿다. 생애 마지막 무렵 그의 시는 점점 더 종교를 향했다.


이제 나의 삶은 허약한 배처럼 폭풍우 치는

바다를 지나, 최후의 심판이 내려

선한 행동과 나쁜 행동에 대해 대가를 치르기 전에

모두가 가는 그 넓은 항구에 이르럿다.

이제 나는 내 영혼을 지상의 예술의 숭배자와

노예로 만들었던 저 좋아하는 상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아노라. 모든 사람이 기꺼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범죄적인 것인가를

그토록 밝은 옷을 입은 이런 사랑의 생각들,

두 가지 죽음이 다가올 때에 그것이 대체 무엇이냐?

내가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또 다른 두려움,

그림도 조각도 이제 내 영혼을 달래어 쉬게 할 수 없나니

내 영혼은 저 위에 계신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향한다.

우리를 십자가에 고정시키기 위해 그분 의 팔이 펼쳐져 있구나.(514P)


마치는 글

****이 르네상스의 부유함이란 얼마나 끝도 없는 것인가! 폭력과 유혹, 미신, 전쟁의 한가운데 살면서도 아름다움과 예술성의 온갖 형태가 열렬히 살아있었고 그들의 정열과 예술, 건축과 암살, 조각과 간통, 회화와 비적 떼, 성모들과 기묘한 형상들, 찬가와 마카로네 시들, 음란함과 경건함, 세속성과 기도 등의 뜨거운 용암을 계속 쏟아냈으니 이 르네상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생동감이 있었던 것일까! 다른 어떤 곳에 이렇게 긍저을 말하는 삶의 깊이와 밀도가 있엇던 저기 있는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고양시키는 영감의 숨결을 느끼고 우리의 박물관들은 저 영감을 받은 열광적인 시대의 잉여물로 넘쳐난다. (524P)

***르네상스 예술은 아름답지만 고귀한 적은 드물다. 세부적으로는 고딕 예술을 능가하지만 그 장엄함, 통일성, 전체적 효과에서는 고딕만 못하다. 그리스의 완전성이나 로마의 웅장함에 도달한 경우도 드물엇다. 르네상스 예술은 죽은 고대의 영혼을 빼앗겨 건축과 조각은 고대의 이질적 형태에 종속되었다. (524P)



내가 작가라면

작가는 묘사력이 아주 뛰어나다. 다음의 문장이 마음에 든다.

  1. <물고기가 있는 성모>(프라도)는 아주 아름답다. 성모의 얼굴과 분위기, 그리고 라파엘로 자신도 그보다 더 잘 그릴 수 없을 정도의 아기 예수, 어린 토비트는 성모에게 물고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물고기의 간으로 그는 아버지의 시력을 고쳤다. 그를 데려온 천사의 의상과 성, 히에로니무스의 당당한 얼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아름답다. 구도, 색채, 빛 등의 측면에서 이 그림은 <시스티나 성모>와 견줄만한 것이다. (156P)


2. 그녀의 얼굴은 분명 아들보다 더욱 젊은 여인의 그것이다.888구경꾼들은 금세 그 온화한 얼굴과 화해를 하게 된다. 비참한 고통에 찢기지 않고 조용히 슬픔과 사랑에 잠긴 모습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체념한 채 신의 듯을 따르고 있다. 상처가 깨끗이 씻기고 온갖 수치에서 벗어난 소중한 아들의 몸은 마지막 한 순간 그를 낳아 준 여인의 무릎에서 쉬고 잇는데, 죽어서도 아름다운모습이다. 삶의 모든 정수의 비극과 구원이 이 단순한 그룹상에 나타나 있다. 종족을 이어가는 출산의 흐름, 모든 탄생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의 확실함, 그 친절함으로 우리 죽을 운명을 고귀하게 만들고, 또 새로운 탄생을 통해 모든 죽음에 도전하는 사랑, 이 작품을 미켈란젤로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프랑수아 1세가 선언했는데 그것은 옳았다.

<피에타>의 성공은 미켈란젤로에게 명성만이 아니라 돈을 자져다 주었다. (163P)

***르네상스시대에는 교회와 교황이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귀족적인 취향을 지니고 있어 건축과 회화와 조각에 열광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것은 작가의 시점이 여기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렇게 쓰여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란 무엇을 어떻게 담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색해보 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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