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콩두
  • 조회 수 275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2년 7월 23일 11시 5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지난 주에 문명이야기 5-1권 책 날개의 저자 소개를 열라 타이핑하면서 윌 듀런트 부부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 몇 가지 있었다.  1) 그들의 저서를 연대순으로 나열해보는 것, 그럼 하루 8~14시간 노동을 통해 몇 년에 한 권씩 책을 냈는 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 아이는 낳아 길렀을까? 3) 7권부터 공저자로 에이리얼 듀런트의 이름이 들어간다.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 배경, 얽힌 사연을 좀 더 듣고 싶다. 4) 윌이나 에이리얼 누군가는 문명이야기 말고 <듀런트 이야기>같은 자서전이나 에세이를 내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문명이야기 두번째 책을 읽으니 해보고 싶었던 걸 해본다. 이런 딴 짓이 재미있는데 얼마나 갈지

 

저자의 간단한 사항 정리해본다. 사진은 윌 듀런트 파운데이션에서 퍼 왔고 그에 대한사항은 민음사 <문명 이야기>에서 가져왔다.

 

윌 듀란트는 미구 매사츠세츠주 노스 애덤스와 뉴저지 주 커니의 카톨릭 부설 학교에서, 그 다음에는 저지 시의 세인트 피터스 카릴지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후 뉴저지주 사우스 오렌지에 소재한 세튼홀 칼리지에 자리를 잡고 라틴어와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쳤다. (1907~11) 이후 그는 이 평온한 신학교에서 뉴욕의 가장 진보적인 자유주의 교육 실험학교인 페레르학교로 자리를 옮겼다.(1911~13)

 life01.jpg

     

이 학교에서 1898 5 10일 러시아에서 태어난 아이다 카우프만이라는 제자와 사랑에 빠져 교직을 사임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1913)

 

arieltit.jpg

 

이후 4년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1917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1914년부터는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 역사와 문학, 철학을 강의했는데 이 강의는 이후 13년간 주2회씩 이어졌다. 1926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철학이야기>의 성공으로 1년 후 교직을 떠날 여력이 생긴다.

 life05.jpg     life04.jpg

 

듀런트 부부는 가끔씩의 평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작업 시간을(매일 8시간~14시간) <문명 이야기>에 바쳤다. 1981년에 에이리얼이 사망하고 13일 뒤 윌이 사망했다.

life03.jpg

 

 

1)     저서 시간 순 정렬

 

1926 <철학이야기>

1930년 저술 여행 (이집트와 근동, 인도, 중국, 일본 등지)

1932년 저술 여행 (일본과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폴란드 등지)

1935년 제1 <동양문명>

1939년 제2 <그리스문명>

1944년 제3 <카이사르와 그리스도>

1948년 터키와 이라크, 이란, 이집트, 유럽 등지에서 체류

1950년 제4 <신앙의 시대>

1953년 제5 <르네상스>

1954년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국에 대한 추가 연구

1957년 제6 <종교개혁>

1961년 제7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다> * 에이리얼 듀런트 공저자로 이름 들어감

1963년 제8 <루이 14세의 시대>

1965년 제9 <볼테르의 시대>

1968년 제10<루소와 혁명>

1975년 제11 <나폴레옹의 시대> * 그들은 평균 3,4년에 한 주제씩 써냈다! @@

 

2)     아이를 낳아 길렀을까?

Yes 적어도 딸 한 명은 기른 것 같다.

 

3)     공저자로 이름이 들어간 배경은?

 

이게 궁금한 나의 배경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다. 에이리얼 듀런트는 10대에 윌 듀런트를 만나 결혼했다.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것은 윌 듀런트였다. 결혼 후에 윌은 철학박사학위 코스를 밟았고, 1926년 철학이야기가 성공을 거두자 교직을 떠나 전업집필가로 살아가게 된다. 그들의 문명이야기 집필은 1930년의 여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에이리얼은 이 문명이야기 시리즈의 전 부분을 동반했다. 그런데 1960년에야 공저자가 된 것은 30년이 지난 후 그녀가 63세가 되었을 때다. 나는 그동안의 집필에서도 그녀가 일반 비서나 조수 이상의 역할을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4)     <아침마당> 듀런트 부부의 살아온 이야기 편은 있을까? 

 

 

2.   내가 저자라면

 

1)   전체적인 뼈대와 목차

 

이 책은 윌 듀런트(또는 듀런트 부부) 50년 걸려 쓴 문명이야기 시리즈 전 11권 중 다섯번째, 1951년에 나온 <르네상스> 5권 중 두 번째 책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윌 듀런트와 에이리얼 듀런트는 하루 8~14시간씩 성실 노동으로 집필해서 평균 4년에 한 문명씩을 다룬 책을 내었다. 이거야말로 해치운다, 일을 끈다, 써댄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작업량이다. 매번 감탄을 하게 된다.

 

르네상스 5-1권에서는 서곡(1300~1377), 피렌쩨 르네상스(1378~1534), 이탈리아의 축제행렬(1378~1534)을 다루었다. 그러니까 5-1권은 1300~1534년 약 230년에 대해 다룬다. 르네상스 두번 째인 이 책은 로마 르네상스(1378~1521), 붕괴기(1522~1533), 종말(1534~1576)로 나뉘어져 있고 전 23장이다. 40년에 해당하는 종말기를 빼면 1권의 시대와 중복되어 있다. 르네상스 종말이 1576년 정도라고 한다면 서곡이 울리고 완전히 마감되기 까지 쳐도 270년의 기간이 르네상스인 듯 하구나.

 

5-1권에서는 이탈리아 피렌쩨에서부터 르네상스가 올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룬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같은 인문주의자들과 아비뇽유수,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다. 2권에서는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다룬다. 5-2권의 목차를 보면 교황의 이름,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정 시대의 풍속을 말하는데 왕의 이름을 가지고 시대 구분을 하던 것과 비스무리하다. 5-2 목차에 나오는 이름 중에 사실 교황의 이름은 낯설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정도가 들어본 이름이다. 물주의 이름은 사라지고, 그 교황들이 돈을 대서 만든 예술작품과 작가들이 우리에게 더 중요해졌다니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르네상스>, 5-3, 5-4, 5-5 에는 무엇을 다루고 있을까 슬금슬금 궁금해지나 방사형 주의력 결핍 과잉 산만한 사고는 이쯤에서 접기로 한다. 상세한 목차를 베껴왔다. 내가 문명사학자였대도(이 직업명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나의 협엽자와 상당히 오랜 시간 의논을 해서 다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촘촘한 목차를 적을 것 같다. 허나 재미는 별로 없을 것을 각오해야할 듯 하다.  

 

 

로마 르네상스

 

14장 교회의 위기

1.     교황 분열

2.     공의회와 교황들

3.     교황청의 승리

15장 르네상스가 로마를 사로잡다

1.     세계의 수도

2.     니콜라스 5

3.     칼릭스투스 3

4.     피우스 2

5.     파울루스 2

6.     식스투스 4

7.     인노켄티우스 8

16장 보르지아 사람들

1.     보르지아 추기경

2.     알렉산서 6

3.     죄인

4.     체사레 보르지아

5.     류크네찌아 보르지아

6.     보르지아 집안의 붕괴

17장 율리우스 2

1.     전사

2.     로마의 건축

3.     젊은 라파엘로

4.     미켈란젤로

18장 레오 10

1.     소년 추기경

2.     행복한 교황

3.     학자들

4.     시인들

5.     고전 예술의 복구

6.     미켈란젤로와 레오

7.     라파엘로와 레오 10

8.     아고스티노 키지

9.     라파엘로 : 마지막 시기

10.   정치가 레오

 

붕괴

 

19장 지식인의 반란

1.     비밀 종교

2.     과학

3.     의학

4.     철학

5.     귀치아르디니

6.     마키아벨리

20장 풀어진 도덕

1.     불사의 원천과 형태들

2.     성직자의 도덕성

3.     성도덕

4.     르네상스 남자

5.     르네상스 여성

6.     가정생활

7.     일반적인 도덕성

8.     훌륭한 몸가짐과 오락

9.     연극

10.   음악

11.   조망

21장 정치적 붕괴

1.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발견하다

2.     새로운 공격

3.     캉브레 동맹

4.     레오와 유럽

5.     하드리아누스 6

6.     클레멘스 7 : 첫번째 국면

7.     로마 유린

8.     승리자 카를 5

9.     클레멘스 7세와 미술

10.   미켈란젤로와 클레멘스 7

11.   한 시대의 종말

 

종말 : 1534~1576

 

22장 베네찌아의 황혼

1.     다시 태어난 베네찌아

2.     아레티노

3.     티찌아노와 왕들

4.     틴토레토

5.     베로네제

6.     조망

23장 르네상스가 이지러지다

1.     이탈리아의 쇠퇴

2.     과학과 철학

3.     문학

4.     피렌쩨의 황혼

5.     벤베누토 첼리니

6.     줄어든 빛

7.     미켈란젤로 : 마지막 국면

마치는 글

 

2)   강점과 보완점

5-1 권과 유사하다. 유려하고 유쾌하고 세부사실이 든든히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 강점이다.  

 

3)   감동적인 장절

 

라파엘로의 그림들에 대한 설명을 읽다가 그의 그림이 보고 싶어졌다.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해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된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림을 함께 찾아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짭짤 쏠쏠했다.

 

143 성모의 결혼식

성모의 결혼식.jpg

144 성 미카엘

 

성미카엘.jpg

 

149 이제는 피렌쩨가 아니라 로마가 흥분시키고 자극을 주는 르네상스 세계의 중심지였다. 율리우스 2세는 이미 4년동안 바티칸의 보르지아 아파트에 살았다 그리고 벽에서 쥴리아 파르네제가 성모 노릇하는 것을 보는 데 지쳤다. 그는 존경하는 니콜라스 5세가 사용하던 네 개의 방으로 옮기고 싶었다. 그래서 이 방들을 자신의 영웅적인 위상과 의도에 어울리는 회화들로 꾸미고 싶었다. 1508년 여름 라파엘로가 로마로 왔다.

 

151 일찍이 회화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서사적 숭고함에 대해 이토록 성공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스물여덟 살이 된 이 젊은이가 똑 같은 힘과 장엄함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학문과 철학의 역할도 표현할 수 있을까? 라파엘로가 그렇게 많은 독서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자신의 붓으로 말하고 눈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다. 그는 형태와 색채에 세계에 살았고, 이런 세계에서 남자와 여자의 심오한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한 말이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156 왕관을 쓴 성모

왕관을 쓴 성모.jpg

 

215 그는 성 베드로 성당 계획안의 경우에서 보여 주었듯이 별 원망없이 수정안을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그는 탁월한 예술가들을 흉내내서 그들에게 아첨을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독립성이나 독창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고독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도덕성은 그의 매너처럼 휼륭하지 못했다. 그는 여인들의 매력에 아주 강하게 끌리지 않고는 그들을 매혹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그리고 애들을 잔뜩 두었다. 그러나 교황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가 그런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카스틸리오네가 라파엘로에게 그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델은 어디서 찾아내느냐고 붇자 그는 여러 여인들에게 들어 있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합쳐서 그들을 만들어낸다고 대답햇다. ..그의 성격과 작품에는 건강하고 삶을 강화시키는 톤이 들어있다. 또 갈등과 불화, 시샘, 나이에 대한 비난 등의 한가운데서도 그의 경력에는 통일성과 평화와 명랑함이 들어 있다. 그는 레오와 이탈리아를 소모시키던 정치를 무시했다라파엘로는 진실의 추구는 더욱 단호한 정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름다움에 봉사하는 일로 만족했다.  

 

220 라파엘로의 경이로운 생산성(37년 동안 만든 것이 미켈란젤로가 89년동안 만든 것보다 많다)

 

229 어쨎든 라파엘로는 한 명 이상의 애인을 두었다. 그래도 그는 이성보다는 아름다움에 더 민감한 예술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이상으로 애인들에게 충실했다이 예술가는 어디서 일을 하든 쉽게 가서 닿을 만한 곳에 애인들을 두곤 했던 것 같다.

 

232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그는 그 시대 가장 위대한 화가였다. 그는 숭고함에서 시스티나 천장화에 맞먹는 것을 제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그린 50점의 성모상의 아름다움에 필적하는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미켈란젤로가 더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는 세 분야에서 위대했고 또 사유와 예술에 더욱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라파엘로에 대해서 그는 깊은 탐구가 만들어낼수 있는 한 모범사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라파엘로가 모방을 통해서 다른 여러 예술가들의 탁월함을 습독했고 근면한 재능으로 그런 탁월한 점들을 결합시켜서 완성된 양식으로 만들어 낸 것을 뜻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게서 길잡이를 내동댕이치고 거의 과격하게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분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너무 행복해서 전통적인 격령한 의미의 천재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잘 해결했기에 가장 위대한 영혼들을 창조와 비극으로 이끌어가는 악마적인 정신이나 힘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율리우스2, 이어서 레오 10, 이어서 키지의 요구와 기분에 자신을 맞췄다. 그러나 언제나 그는 성모와 애인들 사이를 즐겁게 왕복하는 솔직한 젊은이였다. 이것은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화해시키는 그만의 명랑한 방법이기도 했다. 기술자라는 의미의 예술가로서는 아무도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그는 항상 사물의 표면에 머물려는 경향을 지녔다.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를 제외하고 삶이나 신앙의 신비나 모순에 깊게 빠지려고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의 섬세함과 미켈란젤로의 비극적 감각은 그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233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미켈란젤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그는 질문하지 않고 의심도 만들어 내지 않고 어떤 두려움도 불러 일으키지 않고 우리에게 신의 음료와도 같은 삶의 사랑스러움을 제공한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그림, 작업 과정에 대한 설명을 읽다가 그의 작품이 보고 싶어졌다. 그가 살아갔던 방식에 대해서 한 사람의 존재방식이려니 내버려두는 마음으로 관찰한다. 그런데 나는 그가 천재나 예술가가 아니었다면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 어떻게든 다가가서 말을 걸고, 음식을 같이 먹고, 뭐 이런 저런 돌봄활동을 하고 싶어한다.

 

162 피에타

 

 피에타.jpg

166 이것은 로댕의 조각상처럼 돌덩어리에서 절반만 밖으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피렌쩨 아카데미에서 이것을 바라보면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이란 떼어냄으로써 작업하는예술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시 하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돌에서 표면을 제거하기만 하면 조각상에 존재를 만들어 준다. 돌이 많이 벗겨져 나갈수록 이 모습은 점점 더 자라난다.” 그는 자주 자신이 떨어진 돌에 파묻힌 광부를 찾아내는 것처럼 표면을 떼어냄으로써 돌 속에 갇힌 인물상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166 다윗

 다윗.jpg

 

167 그는 이교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신실하고 심지어는 청교도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도 인체를 향한 관심이 그의 신앙심을 누르고 승리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인체의 해부학, 곧 인체가 자세를 바꿀 때 팔다리, 관절, 골격, 근육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지에 관심이 있었다. 

 

172 1508 5월부터 1512 10월까지 4년 이상 동안 미켈란제로는 시스타나 천장에서 일을 했다. 계속한 것은 아니었다. 불확실한 길이의 중단 기간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돈을 더 달라고 율리우스에게 조르기 위해 볼로냐로 찾아간 일 따위였다. 그리고 혼자서 일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안료를 갈고 회반죽을 준비하고, 이따금 작은 인물들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조수들을 두었다. 프레스코 일부는 그보다 못한 솜씨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로마로 불러온 다섯 명의 예술가들은 머지않아 모조리 해고되었다. 미켈란젤로의 개념, 도안 ,색채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나 피렌쩨 전통과 워낙 달라서 그들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법을 몰랐다. 저 받침대 위에 혼자 있다는 것이 그가 얻는 위안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그는 고통스럽지만 평화롭게 생각에 잠길 수가 있었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말 혼자 있을 때면 너는 완전히 너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말에 대한 한 예가 되었다. 기술적인 어려움 외에 율리우스 교황이 위대한 작품을 얼른 끝내서 자기에게 보여달라고 졸라서 그 자신의 문제를 덧붙여 주었다.

 

173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가 받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지치고 기운이 없고 나이보다 일찍 늙었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눈은 예배당의 어두운 조명에 익숙해져서 태양 광선을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제는 책을 눈 아래에 놓는 것보다 위에 놓고 읽는 것이 더 쉬웠다고 한다.

 

210 성하께 자네의 불안함은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고 그냥 자네가 위대한 작업에 헌신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또 자네가 일에 헌신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어.

 

 이 유명한 무시무시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에너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89년 동안이나 지탱해주기도 한 사납게 불타오르는 힘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그 에너지를 단 하나의 목표, 곧 예술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모든 일을 다 무시해 버리는 의지의 힘이었다. 통합시키는 의지력에 의해 통제된 에너지란, 천재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형태없는 돌을 도전으로 보고 분노로 그것을 잡아 망치로 때리고 끌로 파서 중요한 의미를 들어내는 이 에너지는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삶의 하찮은 것들을 분노로 휩쓸어버리는 힘이기도 했다. 그 힘은 의상이나 청결함이나 표피적인 예의 같은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하고서, 약속을 깨뜨리고, 우정도 건강도 깨뜨리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깨뜨리고 몸과 정신이 산산히 부서져 버리지만 그러나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회화, 가장 위대한 조각,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건축 일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이탈리아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는 개인의 당당한 아름다움과 의상의 화려함으로 빛나던 시대에 그런 일에 가장 적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중간 키에 넓은 어깨, 호리호리한 골격, 커다란 머리, 높은 이마, 귀는 뺨보다 솟고, 관자놀이는 귀보다 높이 부풀어 오르고 찌푸린 우울한 얼굴, 부러진 코, 날카롭고 작은 눈, 잿빛 머리와 수염, 이것이 전성기 미켈란젤로의 모습이었다. 낡은 옷을 입고, 그것이 거의 자기 살의 일부가 될 때까지 걸치고 다녔다….돈은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다. 검소한 정도가 아니라 궁핍하게 살았다.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을 먹고, 때로는 빵 한 덩이로 저녁을 대신했다. 볼로냐에서 그와 세 명의 일꾼이 한 방을 쓰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그는 귀족의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좋아하고 지식인보다 단순한 사람을, 부유함의 사치보다 일꾼들의 노역을 더 좋아했다. 수입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는 친척들의 생계를 위해 내주었다. 그리고 고독을 좋아했다. 삼류급 정신과 하찮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참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계속 따라갔다.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고, 금욕을 통해 돈을 아꼈다. 어떤 사제가 미켈란젤로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두지 않은 것을 유감이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예술만 해도 마누라가 너무 많아요. 그게 충분히 말썽을 만들어 냅니다. 자식을 얘기하자면 내가 앞으로 만들 작품이 내 자식입니다. 이 작품들이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 해도 어쨎든 한동안 계속 살아갈 테니까요그는 자기 집에서 여자들이 얼씬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친구를 위해서나 예술을 위해서나 남자들을 더 좋아했다. 여자들을 그리기는 했으나 언제나 어머니로서 성숙한 모습뿐이고 젊은 여자의 밝은 매력을 그린 적은 없었다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어쩌면 그의 경우 성으로 들어갔을 에너지가 모조리 작품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카라라에서 그는 이른 아침부터 말에 올라타고서 석수장이와 도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을 지휘하면서 낮을 보냈다. 저녁에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램프를 켜놓고 계획을 검토하고 비용을 계산하고 내일을 일을 계획하면서 보냈다. 그는 빈둥거리는 시간을 갖기도 했지만 그런 다음 갑자기 창작의 열기가 그를 다시 사로잡으면 나머지 모든 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로마 유린 같은 역사적 사건도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일에 빠져서 그는 우정을 위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헌신적인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나 다른 사람이 그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충실한 하인 르판체스코 델리 아마도리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사람은 25년 동안이나 그를 돌보았고 오랜 세월을 그와 침대를 함께 썼다.

 

그의 가혹한 성질과 우울한 기질은 평생 동안의 비극이었다. 때때로 그는 우울증이 광증의 경계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 자기 예술을 죄라고 생각하고 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 가난한 소녀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 신경증을 일으키는 감수성은 그의 일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1508년에 이미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단 한 시간 행복한 순간을 보낸 뒤로 이제 거의 15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58녀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가면서도 행복한 시간은 몇 번 밖에 갖지 못했다. 

 

514 그가 비토리아 콜론나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여자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말도 해야겠다. 그녀와의 우정은 그녀가 쉰 살, 그가 예순일곱 살이 된 1542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쉰 살의 여자는 육십 대 남자의 남은 불꽃을 쉽게 흔들어놓을 수 있는 법. 그러나 비토리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17년 전에 죽은 남편 페스카라 후작과 결합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우리의 우정이 견고하고 우리의 감정은 아주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교도의 매듭으로 묶인 것이지요.” 그녀는 그에게 143편의 소네트를 보냈다. 훌륭하지만 무시해도 괜찮을 것들이다. 그는 경탄과 헌신으로 따뜻한 소네트들을 써서 응답했다. 그러나 이 시들은 문학적 자부심으로 얼룩져 있다. 그들은 만나면 예술과 종교 이야기를 하고, 어쩌면 그녀는 교회를 개혁하려고 애쓰는 남자(루터)에 대한 자신의 공감을 고백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에게 미친 그녀의 영향은 아주 깊었다. 그녀의 경건함, 친절, 정절에는 삶의 모든 섬세한 영적 요소들이 들어있는 듯했다. 그녀가 그와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염세론 일부가 없어졌다. 그는 다시는 그들이 만나기 이전의 자신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녀가 죽었을 때 (1547

) 그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그는 어지럽혀진 듯 비탄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손에 키스했듯이 그녀의 얼굴에 키스하지 않은 자신을 질책했다.

예순일곱살에 여자를 사랑한 거로구나. 나는 나이 들어 만나는 사랑에 대해 미켈란젤로를 생각할거다. 비오는 지난 주말에 거리에서 본 70대 커플 생각이 나네.  

 

519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껏 존재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것이 당시 일부 사람들의 판단이었고 또 시간의 판단이 되었다. 그는 러스킨이 말한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정의를 완전히 충족시킨다. ‘작품 전체에 가장 위대한 발상을 가장 많은 숫자로 구현한 사람’, 정신의 가장 높은 능력을 행하고 드높인사람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현재 나에게도 영향이 있는 질문을 몇 개 만난다.

 

293 도덕적 제약을 완전히 벗어난 이런 정치적 수완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마키아벨리는 자기 시대의 핵심적 문제로 보이는 것을 다루게 되다. 곧 이탈리아에 집단의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통합과 힘을 만들어 내는 문제다. 그는 자기 나라가 갈라지고 무질서하고, 부패하고 허약한 것을 분노의 눈길로 바라본다. 여기서 유리는 페트라르카의 시대에는 드물었던 것, 곧 자기 도시를 사랑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더욱 사랑하는 유형을 보게 된다.  

 

301 대부분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군주론의 가르침은 특별한 계시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 동업자들의 비밀을 조심성 없게 폭로한 것일 뿐이다.

 

303 마키아벨리의 솔직함에는 어떤 자극의 요소가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다른 어디서보다도 생생하게, 거의 어떤 철학자도 감히 토론하려고 하지 않았던 질문을 마주치게 된다. 곧 정치가의 수완은 도덕성에 묶여 있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성이란 그것을 가르치고 강요할 준비를 갖춘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들 사이의 도덕성은 국제법을 지켜야 한다는 대중의 의견과 물리적 힘을 갖춘 국제기구가 구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 각국의 국민들은 밀림의 맹수들과 같다. 각국의 정부가 어떤 원칙을 고백하든 그들이 실제로 행하는 것은 <군주론>의 그것이 될 것이다.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로마 르네상스

14장 교회의 위기

 

1.     교황 분열

 

12 교황의 분열은 국민국가가 발달하면서 나타난 또 하나의 결과였다. 그것은 실제로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할 때에 또 앞으로 도이칠란트나 이탈리아와 경쟁하게 될 때에 교황청의 도움을 계속 얻기 위해 시도한 일이었다. 프랑스가 주도한 이 일을 보고 나폴리, 스페인, 스코틀랜드가 그 뒤를 따랐다. 잉글랜드, 플랑드르, 도이칠란튼,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포르투갈은 우르바누스를 받아들였다. 교회는 이제 경쟁 진영들 사이의 노리개가 되고 말았다.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이슬람교도의 경멸에 가득 찬 비웃음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을 가리켜 이단이며 신성 모독이라고 저주하고 파문했다. 성 카타리나는 클레멘스 7세를 가롯 유다라고 비난했다. 성 빈센트 페러는 우르바누스 6세를 그렇게 불렀다. 각 진영은 상대편에 속하는 성직자가 베푼 성사는 무효라고 주장했고, 아이들이 세례를 받아도, 고해를 하고 용서를 받아도 죽어가는 사람이 종부성사를 받아도 여전히 죽음이 찾아오면 지옥에 떨어질 죄악의 상태 그대로 남아있다고 했다. 

 

2.     공의회와 교황들

 

15 저항적인 철학자들이 거의 1세기 전에 공의회 운동의 토대를 놓았다. 오캄의 윌리엄은 교회를 성직자와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다. 그 전체가 다른 어느 부분보다 더욱 우세한 권위를 갖는다. 전체는 자신의 권위를 세계공의회(일반 공의회, 혹은 종교회의)에 위임한다. 세계공의회는 교황을 선출하고, 질책하고, 벌 주고, 폐위할 권한을 갖는다.

 

16 공의회는 두 교황 베네딕투스와 그레고리우스에게 출두라하라는 소환령을 내렸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의회는 그들이 면직되었다고 선언하고 밀라노 추기경을 교황 알렉산더 5세로 지명했다. (1409)

 

16 그 결과 이제는 교황이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 되었다.

 

19 11월 17일에 공의회의 선거위원회가 오도네 콜론나 추기경을 교황 마르티누스 5세로 선출했다.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가 그를 받아들였다. 39년간의 혼란을 겪은 다음 대분열은 끝이 났다.

 

3.     교황청의 승리

 

20 마침내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 도시의 상태를 보고 또 건물들과 사람들의 황폐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스도교의 수도는 유럽에서 가장 문명화되지 못한 도시의 하나였다. 마르티누스가 콜론나 가문 친척들을 수입과 권력이 있는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그의 특징이 되는 직권 남용을 계속했던 것은 어쩌면 바티칸에서 신체적 안전을 확복하기 위해 자기 가문을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군대가 없었다.

 

21 그는 교황청이 능률적으로 기능하도록 다시 조직했지만 관직을 파는 방법 말고는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24 그 사이에 페라리에 페스트가 발생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공의회가 피렌쩨로 옮겨오면 자신과 친구들의 경비로 그들을 대접하겠노라고 초대했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학식있는 그리스 사람들이 피렌쩨로 들어온 날(1439)을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시작된 날로 꼽는다.

 

26 교황은 피렌쩨에 머물면서 코시모 데 메디치 치하 인문주의와 예술의 발전을 알게 되었다. 페라라와 피렌쩨의 공의회에 참석했던 그리스 학자들은 절박하게 다가오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실현되면서 잃어버리거나 파괴될 고전 문헌의 보존에 대한 관심을 그의 내면에 일깨웠다.

 

15장 르네상스가 로마를 사로잡다

 

1.     세계의 수도

 

31 교황들은 이런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규모가 작은 자기들의 용병부대를 믿을 수 없었고, 언제나 탐욕스러운 국가들을 서로 반목시켜 세력 균형 정책을 취하게 만들곤 했다. 이들 국가들은 어느 한 국가가 충분히 강해져서 교황국가를 삼키지 못하게 서로 가로 막았다. 교황들은 정치적 영적 독립성을 유지할 유일한 수단으로서 자신들의 세속적인 권력을 통해 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지도자로서 교황들은 세속의 동료들과 동일한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들은 관직이나 성직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2급의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때로는 팔기도 했다또 교황들은 자기 친척들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집안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세속 정치지도자와 똑같네.

 

32 영적인 권력으로서 르네상스 교황들은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와 화해시키는 문제에 직면했다. 인문주의는 절반은 이교적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한동안 이교의 뿌리와 가지, 그 신조와 기술을 파괴하려고 손수 나섰다. 그래서 이교의 사원과 조각상을 파괴하는 일을 격려하거나 묵인했다.

 

2.     니콜라스 5

 

34 20년 동안 그는 피렌쩨와 볼로냐에서 볼로냐의 대주교 알베르가티를 위해 일했다. 대주교가 죽자(1443) 유게니우스 4세 교황은 토마소를 그의 후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의 학식과 신앙심과 행정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교황은 3년 뒤에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킬 일이지만 사제관의 가난한 심부름꾼이 교황이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그 중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바로바로는 플라톤의 꿈이 실현되었다고 선언했다. 철학자가 왕이 된 것이다.

 

34 이제 교황청의 수입을 기반으로 그는 아테네와 콘스탄티노플, 도이칠란트와 잉글랜드의 여러 도시들로 사람을 보내 그리스나 라틴어로 된 이교나 그리스도교 사본들을 찾아내고 사들였다. 그리고 교황청에 필사가와 편집자들을 잔뜩 고용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인문주의자들을 거의 모두 로마로 불러들였다. 과장을 좋아하는 베스파시아노는 이렇게 썼다. “세계의 모든 학자들이 니콜라스 교황의 시대에 로마로 왔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일부는 그의 요구를 받고 왔다.”그들의 작업에 대해서 그는 음악이나 시의 전율을 느낀 칼리프의 너그러움으로 보상을 해 주었다.

 

34 전염병이 돌아 로마를 떠나 파브리아노로 피신할 때에 그는 번역가들과 필사가들이 전염병때문에 죽지 않도록 그들 모두를 데려갔다. 그는 또 그리스도교 고전이라 할 만한 것들도 잊지 않았다.

 

35 그는 학자이자 건축가였으며 재임 이후로는 로마를 세계의 주도적인 도시로 만들기로 굳게 결심했다. 1450년 희년 축제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10만 명의 방문객이 예상되었다. 그들이 로마를 구질구질한 폐허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교회와 교황청의 위신을 위해서 그리스도교의 수도는 순례자들에게 고귀한 비율로 취향과 아름다움을 결합시킨 고귀한 건축물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성베드로의 자리(교황 직위)를 높이는 데 무한 기여할 것이다.

 

37 순례자들이 넉넉한 봉헌물을 가지고 왔기에 희년 축제가 만들어 낸 재정적 이익은 교황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그가 지은 건물의 비용과 학자와 필사가들을 위한 비용을 모두 감당했다.

 

3.     칼릭스투스 3

 

40 교회법과 외교 전문가였던 그는 법률가의 사고를 가졌고 니콜라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고전학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40 교황이 된 지 두 달 만에 조카 3명을 추기경으로 삼았다….로마는 이제 카탈루냐 사람들이 통치했다. 교황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이방인이었다.

 

4.     피우스 2

 

44 교황이 된 다음 그는 매일 일종의 회고록인 <주석>을 썼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 병에 걸릴 때까지 자신의 통치 기간의 기록이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자정까지 글을 읽고 구술하곤 했다고 동시대 사람인 플라티나는 말하고 있다. 그는 대여섯 시간 이상은 자지 않앗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시간을 문학적 작업에 돌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내 의무에서 시간을 빼내지 않고 잠자는 시간을 글쓰는 데로 돌렸다. 그리고 노년의 시간에 휴식을 취할 시간을 훔쳐서 내가 지금 기억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후세를 위해 적어두고자 한다.

 

46 그는 젊은날의 관능을 극복하고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교황이었다. 젊은 날의 애정행각이나 또 교황에 맞서 공의회 편을 들었던 일들을 감추려 하지 않고 철회의 교령을 발표하여 하느님과 교회에 자신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겸손하게 요청하고 있다.  

 

46 탁월한 학자 두 사람이 그의 시대를 기품있게 만들었다. 플라비오 비온도는 니콜라스 5세 이후로 계속 교황청 서기를 지낸 사람으로 그리스도교 르네상스의 상징이다. 그는 고대를 사랑하고 생애 절반을 고대의 역사와 유물을 서술하는데 보냈다. 그러면서도 충실한 정통 그리스도교도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피우스 교황은 그를 안내인 겸 친구로 삼았고, 그와 함께 로마 유적지를 돌아다녔다.

 

47 베싸리온은 풍부한 그리스 필사본 수집품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로마에서 그의 집은 인문주의자들의 살롱이 되었다. ..그는 필사본을 사들이고 그것을 베끼는 데 수입을 거의 다 썼다.

 

5.     파울루스 (바오로) 2

53 위대한 남자들의 생애를 살피다 보면 한 남자의 성격이 죽은 다음에 형성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통치자가 자신에 대해 기록하는 사람들을 잘 대우해주면 그들은 그를 사후의 거룩함으로 들어올려 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통치자가 그들을 괴롭히면 그들은 그의 시신을 악의의 꼬챙이에 꿰어 태우거나 구워서 잉크병에 있는 가장 더러운 악명으로 사후의 이름을 더럽힌다.

 

6.     식스투스 4

 

57 어린아이 적에 되풀이해서 병을 앓자 어머니는 그의 회복을 기도하면서 그를 성 프란체스코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아홉 살에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뒷날 수도회에 들어갔다. 한동안 델라 로베레 집안에서 가정교사로 일했고, 뒷날 그는 이성을 자신의 성으로 사용했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그곳과 다른 곳에서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 그의 강의실에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에 다음 세대의 학식있는 이탈리아 사람 모두가 그의 제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쉰세 살에 식스투스 4세가 되었다.

 

62 시스타나 예배당은 조반니노 데 돌치가 설계한 것으로 단순하고 뽐내지 않는 건축이다. 이것은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이 이용하는 절반쯤 사적인 예배당이다.

 

64 그는 교황청을 이탈리아의 강력한 정치권력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진 최초의 르네상스 교황이었다식스투스는 교황국가들을 교황의 것으로 만들고 또 로마와 그 주변을 교황들에게 안전하게 정비하려 했다는 측면에서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한 것을 용서할 지도 모른다. 그의 외교 정책이 다른 나라들이 가진 부도덕한 원칙들을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해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황이 자객들과 공모하고 대포에 축복을 내리고 그 시대에 충격을 줄 정도로 철저한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한 것을 바라보는 일은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다. 

 

7.     인노켄티우스 8

 

67 로마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적인 사면에서부터 교황직 자체가지도 말이다.

 

 

16장 보르지아 사람들

 

1.     보르지아 추기경

 

72 같은 해 로드리고의 첫아들인 페드로 루이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딸 지롤라마도 곧 태어났는데 그들의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바짜노는 로드리고와의 (그는 1468년에 사제가 되었다) 사이에 네 명의 아이들을 두었다. 이들 네 사람은 바짜노의 비명에 그녀의 자식들이라고 기록되었고, 이런저런 기회에 로드리고 보르지아가 자신의 자식들이라고 인정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확고한 자녀 양육은 거의 부부와 같은 유대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보르지아 추기경은 다른 성직자들과 비교해볼 때 확고한 성실성과 안정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부드럽고 너그러운 아버지였다.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교회에 영광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2.     알렉산더 6

 

75 대관식 후 새로운 교황은 살인자를 붙잡아서 하나의 예를 보였다. 범인은 교수형을 당하고 그이 형제도 함께 사형을 당하고 그의 집은 붕괴시켰다. 도시는 이런 엄격함을 인정해 주었다. 범죄가 꼬리를 감추었다. 로마에 질서가 회복되고 이탈리아 전국은 그토록 강인한 손길이 교회의 투구를 움켜쥔 것을 기뻐했다.

 

76 교황청 재정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알렉산더의 재정적인 능력이 필요했다. 그는 2년 만에 재정의 균형을 이루었다. 바티칸 직원의 숫자를 줄이고 경비를 삭감하고 기록은 엄격하게 하고 봉급은 즉시 지불했다. 알렉산더는 직위가 요구하는 힘든 종교적 의식들을 성심껏 수행했다. 다만 바쁜 남자의 성급함으로 행했다. 그의 의전관은 자신을 고용한 알렉산더의 명성과 오명이 영원한 것이 되도록 도운 사람이다. <연대기>에 자신이 본 것을 거의 모두, 알렉산더가 들키지 않기를 바랄 만한 것까지 모조리 기록했기 때문이다. 

 

3.     죄인

 

82 로마는 그의 국내 행정을 찬양하고, 또 머뭇거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외교를 찬양했다. 또 그의 애정행각을 온건하게 나무라고, 그가 깃털로 자식들의 둥지를 덮어준 것을 격하게 나무라고 로마에서 이상한 언행으로 인해 이탈리아 사람들의 이를 갈게 만드는 스페인 사람을 잔뜩 관직에 임명한 일을 증오심으로 나무랐다.

 

82 어떤 관찰자는 이렇게 말했다. “교황청이 10개라고 이들 사촌들을 위해서는 자리가 모자랄 것이다.”

 

85 그의 신앙심은 가짜였던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그의 편지들은, 심지어 쥴리아와 연관된 편지들조차도 개인적인 서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신앙심을 나타내는 구절들로 차 있다. 그는 활동적인 남자였고 그 시대의 편안한 도덕성에 하도 익숙해서 그리스도교 윤리와 자신의 생활 사이에 별로 모순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교황청은 성인이 아니라 정치가를 필요로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85 통치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으므로 성직을 팔고 죽은 추기경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1500년 희년축제를 충분히 이용했다.

 

88 그는 강한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수단으로는 그것을 이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4.     체사레 보르지아

 

97 1502 6 12일에 이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수석 엔지니어로 삼고서 체사레는 3차 원정을 떠났다.

 

103 그는 자신의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그가 가혹한 기율을 자주 사용하지 안는 것에 남몰래 경탄했다. 그가 뇌물, 책략, 속임수 등을 써서 적들의 숫자와 고집을 꺽고, 가능하면 군대의 전투와 사망자 수를 줄이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외교관들은 민첩하고 겁이 없는 젊은 장군이 자기들보다 생각을 더 잘하고 가장 예리하고 민감한 문제에서 자기들보다 앞서 있고 필요할 때면 자기들이 가진 매력과 책략과 언변을 쓸 수 도 있다는 점을 분하게 여겼다. 

 

5.     루크레찌아 보르지아

 

107 알렉산더는 아들에게 경탄하고 아마도 두려워하기도 했겠지만 딸에 대해서는 그의 천성이 가진 온갖 감정적 깊이를 가지고 사랑했다….그녀는 온갖 모욕과 슬픔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에게 딸로서의 한결 같은 사랑을 다했다.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젊은 시절 그녀는 사랑스렁누 얼굴이라고 서술되었다. 그리고 거칠고도 느슨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도 이혼하고 남편이 거의 자기 눈 앞에서 (친오빠에 의해) 살해당하는 꼴을 목격하는 등 그 모든 괴로움 속에서도 그녀는 경건한 마지막까지 이 사랑스러운 얼굴을 잃지 않았다.  

108 알렉산더는 그에게 남편의 성교 불능(교회법에 따라 합법적인 결혼 취소가 가능한 유일한 이유) 혼인을 무효로 만드는 일에 동의하는 지 물었다.

 

109 알렉산더가 정치적으로 스프로짜보다 더 유리한 결혼을 위해 이 결혼을 깨뜨렸다는 것이 전에는 인정되었다. 이런 짐작에 대한 증거는 없다. 루크레찌아가 괴로운 진실을 말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111 그녀는 생애 남은 기간의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오빠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지니고 있엇음을 보여주는 여러 행동을 했다. 아마도 오빠는 아버지처럼 스페인 사람의 집념으로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6.     보르지아 집안의 붕괴

 

114 1503 8월에 말라리아 열병이 교황청 식솔의 절반을 쓰러뜨리고 많은 경우는 죽었다. 로마에서의 이 시기에 같은 원인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117 그의 성격의 기본 원리는 극히 풍부한 자연성이다. 베네찌아 대사는 그를 가리켜 현세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어떤 도덕적인 경멸을 담은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정열과 감정을 통제할 줄을 모르는 낙천적 기질의 남자라는 의미였다. 이런 점은 통지가들과 정치가들 사이에 많은 외교관 유형의 냉철한 이탈리아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 (개신교 학자 리처드 가닛의 <캠브리지 근현대사>)

 

118 만일 교회의 법이 르네상스 이탈리아와 개신교 도이칠란트, 혹은 국교도 영국의 법처럼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했더라면 알렉산더의 행동에는 상대적으로 존경할만한 가정적인 요소들이 드러나 있다. 그의 죄는 자연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독신주의 원칙을 위한한 것이었다. 이런 원칙은 어차피 머지않아 그리스도교 전체의 절반(개신교)이 거부할 원칙이었다.

 

118 알렉산더의 정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목적과 수단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목적은 전적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재산을 무질서한 봉건적 남작들에게서 되찾는 것과 교화(교회)국가들을 찬탈한 폭군들에게서 되찾는 것이다. 알렉산더와 체사레가 이런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수단들, 즉 전쟁, 외교, 속임수, 배신, 조약 위반, 동맹국 버리기 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국가들도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다. 

 

119 세속적인 수단들을 그리스도의 원칙에 따르겠다고 맹세한 교황이 사용했다는 것이 우리의 감정을 손상시킨다. 교회가 지신의 영토를 잃어버릴 경우 지배하는 정부에 종속될 위험이 아무리 크다 해도(아비뇽에서 프랑스에 종속되었을 때처럼) 교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속의 방법을 채택하는 것보다는 세속의 권력을 잃어버리고 다시 저 갈릴리의 어부들처럼 가난해지는 편이 아마도 교회를 위해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세속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면서 교회는 하나의 국가를 얻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3분의 1을 잃어버렸다.

 

17장 율리우스 2

 

1.     전사

 

125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 : 권력에 환멸을 느낀 우울한 얼굴

 

율리우스 2세.jpg

 

134 그는 전쟁을 너무 좋아해서 훌륭한 행정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로마의 건축

 

135 그의 업적에서 가장 지속적인 부분은 미술 후원이다율리우스는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너무 조용하고 여성적인 것이어서 그의 성질에 맞지 않았다.

 

135 그 자신은 교회의 세속적인 권력을 수호했다. 그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밖에도 100명의 미술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것, 그리고 12번의 전쟁을 치르고도 교황청 국고에 70만 플로린의 돈을 남겼다는 사실은 역사의 기적 중의 하나였고 종교개혁의 원인 중 하나였다.   

 

3.     젊은 라파엘로

 

149 이제는 피렌쩨가 아니라 로마가 흥분시키고 자극을 주는 르네상스 세계의 중심지였다. 율리우스 2세는 이미 4년동안 바티칸의 보르지아 아파트에 살았다 그리고 벽에서 쥴리아 파르네제가 성모 노릇하는 것을 보는 데 지쳤다. 그는 존경하는 니콜라스 5세가 사용하던 네 개의 방으로 옮기고 싶었다. 그래서 이 방들을 자신의 영웅적인 위상과 의도에 어울리는 회화들로 꾸미고 싶었다. 1508년 여름 라파엘로가 로마로 왔다.

 

151 일찍이 회화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서사적 숭고함에 대해 이토록 성공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스물여덟 살이 된 이 젊은이가 똑 같은 힘과 장엄함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학문과 철학의 역할도 표현할 수 있을까? 라파엘로가 그렇게 많은 독서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자신의 붓으로 말하고 눈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다. 그는 형태와 색채에 세계에 살았고, 이런 세계에서 남자와 여자의 심오한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한 말이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4.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

 

166 이것은 로댕의 조각상처럼 돌덩어리에서 절반만 밖으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피렌쩨 아카데미에서 이것을 바라보면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이란 떼어냄으로써 작업하는예술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시 하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돌에서 표면을 제거하기만 하면 조각상에 존재를 만들어 준다. 돌이 많이 벗겨져 나갈수록 이 모습은 점점 더 자라난다.” 그는 자주 자신이 떨어진 돌에 파묻힌 광부를 찾아내는 것처럼 표면을 떼어냄으로써 돌 속에 갇힌 인물상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167 그는 이교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신실하고 심지어는 청교도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도 인체를 향한 관심이 그의 신앙심을 누르고 승리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인체의 해부학, 곧 인체가 자세를 바꿀 때 팔다리, 관절, 골격, 근육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지에 관심이 있었다. 

 

172 1508 5월부터 1512 10월까지 4년 이상 동안 미켈란제로는 시스타나 천장에서 일을 했다. 계속한 것은 아니었다. 불확실한 길이의 중단 기간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돈을 더 달라고 율리우스에게 조르기 위해 볼로냐로 찾아간 일 따위였다. 그리고 혼자서 일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안료를 갈고 회반죽을 준비하고, 이따금 작은 인물들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조수들을 두었다. 프레스코 일부는 그보다 못한 솜씨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로마로 불러온 다섯 명의 예술가들은 머지않아 모조리 해고되었다. 미켈란젤로의 개념, 도안 ,색채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나 피렌쩨 전통과 워낙 달라서 그들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법을 몰랐다. 저 받침대 위에 혼자 있다는 것이 그가 얻는 위안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그는 고통스럽지만 평화롭게 생각에 잠길 수가 있었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말 혼자 있을 때면 너는 완전히 너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말에 대한 한 예가 되었다. 기술적인 어려움 외에 율리우스 교황이 위대한 작품을 얼른 끝내서 자기에게 보여달라고 졸라서 그 자신의 문제를 덧붙여 주었다.

 

173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가 받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지치고 기운이 없고 나이보다 일찍 늙었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눈은 예배당의 어두운 조명에 익숙해져서 태양 광선을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제는 책을 눈 아래에 놓는 것보다 위에 놓고 읽는 것이 더 쉬웠다고 한다.

 

18장 레오 10

 

1.     소년 추기경

177 로마 역사에서 가장 빛나고 부도덕한 시대 하나에 자신의 이름을 주었던 교황은 아버지의 정치적 전략 덕분에 성직의 경력을 시작했다. 로렌조 데 메디치는 식스투스 4세에 의해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다. 로렌쪼는 메디치 한 사람이 교회의 권력 핵심부인 추기경단에 들어간다면 피렌쩨에서 자기 가족의 권력과 후손의 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어릴 적에 장차 성직을 갖도록 운명이 정해졌다.

 

180 공식적인 기회에 너의 마차와 의상이 보통보다 넘치기보다는 보통보다 못하게 해야 한다. 아름다운 집과 질서가 잡힌 가족이, 많은 수행원들과 화려한 저택보다 더 낫다몇 가지 훌륭한 고대의 유물을 수집하는 일이나 훌륭한 책을 수집하는 일을 통해서 또 너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것보다 학식이 있고 훌륭하게 배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너의 취향이 더욱 잘 드러난다. 초대를 받는 것보다 더 자주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라. 그렇다고 너무 자주 초대하지는 마라. 소박한 음식을 취하고 충분한 운동을 해라. 너와 같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조심하지 않으면 질병을 끌어들이기가 쉽다. 다른 사람을 너무 많이 믿기보다는 너무 적게 믿어라.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너에게 권하고 싶은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너의 건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하루 일과를 정돈하고 처리할 수 있게 해 준다. 성직을 수행하고 연구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등 너의 지위에 따른 다양한 임무가 있기에 너는 이 훈계를 따르는 일이 매우 쓸모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2.     행복한 교황

 

184 행운의 삶을 타고난 레오의 기본적인 특성은 선량함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는 말을 하고 개신교도만 빼고는(이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랄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서 가장 좋은 면을 보았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베풀어 주었기에 이런 너그러운 자선 행위는 그리스도교 재원에 대한 무거운 어음 발행과 더불어 종교 개혁을 만들어 내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186 레오는 궁정에 다수의 어릿광대와 익살꾼을 두기를 좋아했다. 이것은 아버지나 당시 앙들의 관습과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부와 성적 탐닉 다음으로 웃음을 사랑하는 로마에서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86 레오는 수도사 익살꾼들 중 한 사람이 비둘기를 한입에 삼키는 것이나 40개의 달걀을 차례로 삼키는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했다. 또 포르투갈 대사에게서 인도에서 가져온 하얀 코끼리를 받았는데 코끼리가 성하께 인사드리기 위해 세 번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몹시 기뻐했다. 또 재치나 기형이나 저능함으로 그의 명랑한 기분을 북돋워 줄 사람을 데려오는 일은 그의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그는 이따금 이런 오락에 빠져드는 일이 신체적 고통으로부터 잠시 다른 곳으로 마음을 돌리게 하고 또 세계에 대한 근심에서 마음을 잠시 풀어주고 생명을 연장해주는 일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천진한 아이 같은 어떤 요소가 있었다. 이따금 그는 추기경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대중이 거기 앉아 구경하는 것을 허용하고는 사람들에게 금화를 나누어 주었다. 이런 모든 즐거움보다도 그는 사냥을 사랑했다. 사냥은 그의 비만 성향을 조절해주었고, 도 바티칸에서 죄수처럼 살고 난 다음 탁 트인 시골 공기를 마음껏 즐기게 해 주었다. 

도련님 또는 왕자님

3.     학자들

 

193 메디치 궁전이 유린될 때 (1494) 레오의 조상들이 수집한 일부 책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책들 대부분은 성 마르코 수도사들이 사들였다. 이렇게 구해낸 책들을 레오는 아직 추기경으로 있던 시절에 사들여서 로마에 있는 자기 궁전으로 옮겼다. 라우렌티아나 도서관의 책들은 레오가 죽은 다음 다시 피렌쩨로 돌아왔다. 그것이 행운이었음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4.     시인들

 

197 이 시대의 핵심적인 영광은 문학이었다. 사무라이 시대 일본에서 농부로부터 황제까지 모두가 그랬듯이 레오 시대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그의 어릿광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시를 썼다.

 

5.     고전 예술의 복구

 

204 발굴자들이 티투스 목욕탕 근처에서 복잡한 그룹 조각상을 새로 발굴했을 때(1506) 로마 전체가 전율했다. 율리우스 2세는 쥴리아노 다 상갈로를 보내 그것을 검사하게 했다. 미켈란젤로도 함께 갔다. 줄리아노는 이 조각 작품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이건 플리니우스가 말한 <리오콘>이다.” 율리우스 2세는 그 것을 사다가 벨베데레 궁전에 두고 발견자와 그 아들에게는 평생 600두카트(7500달러?)의 연금을 주었다. 고전 조각들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 되었다. 이런 보상이 예술품을 발굴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었다. 

 

6.     미켈란젤로와 레오 10

 

210 성하께 자네의 불안함은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고 그냥 자네가 위대한 작업에 헌신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또 자네가 일에 헌신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어.

 

 이 유명한 무시무시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에너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89년 동안이나 지탱해주기도 한 사납게 불타오르는 힘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그 에너지를 단 하나의 목표, 곧 예술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모든 일을 다 무시해 버리는 의지의 힘이었다. 통합시키는 의지력에 의해 통제된 에너지란, 천재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형태없는 돌을 도전으로 보고 분노로 그것을 잡아 망치로 때리고 끌로 파서 중요한 의미를 들어내는 이 에너지는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삶의 하찮은 것들을 분노로 휩쓸어버리는 힘이기도 했다. 그 힘은 의상이나 청결함이나 표피적인 예의 같은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하고서, 약속을 깨뜨리고, 우정도 건강도 깨뜨리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깨뜨리고 몸과 정신이 산산히 부서져 버리지만 그러나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회화, 가장 위대한 조각,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건축 일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이탈리아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는 개인의 당당한 아름다움과 의상의 화려함으로 빛나던 시대에 그런 일에 가장 적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중간 키에 넓은 어깨, 호리호리한 골격, 커다란 머리, 높은 이마, 귀는 뺨보다 솟고, 관자놀이는 귀보다 높이 부풀어 오르고 찌푸린 우울한 얼굴, 부러진 코, 날카롭고 작은 눈, 잿빛 머리와 수염, 이것이 전성기 미켈란젤로의 모습이었다. 낡은 옷을 입고, 그것이 거의 자기 살의 일부가 될 때까지 걸치고 다녔다….돈은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다. 검소한 정도가 아니라 궁핍하게 살았다.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을 먹고, 때로는 빵 한 덩이로 저녁을 대신했다. 볼로냐에서 그와 세 명의 일꾼이 한 방을 쓰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그는 귀족의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좋아하고 지식인보다 단순한 사람을, 부유함의 사치보다 일꾼들의 노역을 더 좋아했다. 수입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는 친척들의 생계를 위해 내주었다. 그리고 고독을 좋아했다. 삼류급 정신과 하찮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참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계속 따라갔다.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고, 금욕을 통해 돈을 아꼈다. 어떤 사제가 미켈란젤로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두지 않은 것을 유감이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예술만 해도 마누라가 너무 많아요. 그게 충분히 말썽을 만들어 냅니다. 자식을 얘기하자면 내가 앞으로 만들 작품이 내 자식입니다. 이 작품들이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 해도 어쨎든 한동안 계속 살아갈 테니까요그는 자기 집에서 여자들이 얼씬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친구를 위해서나 예술을 위해서나 남자들을 더 좋아했다. 여자들을 그리기는 했으나 언제나 어머니로서 성숙한 모습뿐이고 젊은 여자의 밝은 매력을 그린 적은 없었다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어쩌면 그의 경우 성으로 들어갔을 에너지가 모조리 작품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카라라에서 그는 이른 아침부터 말에 올라타고서 석수장이와 도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을 지휘하면서 낮을 보냈다. 저녁에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램프를 켜놓고 계획을 검토하고 비용을 계산하고 내일을 일을 계획하면서 보냈다. 그는 빈둥거리는 시간을 갖기도 했지만 그런 다음 갑자기 창작의 열기가 그를 다시 사로잡으면 나머지 모든 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로마 유린 같은 역사적 사건도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일에 빠져서 그는 우정을 위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헌신적인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나 다른 사람이 그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충실한 하인 르판체스코 델리 아마도리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사람은 25년 동안이나 그를 돌보았고 오랜 세월을 그와 침대를 함께 썼다.

 

그의 가혹한 성질과 우울한 기질은 평생 동안의 비극이었다. 때때로 그는 우울증이 광증의 경계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 자기 예술을 죄라고 생각하고 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 가난한 소녀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 신경증을 일으키는 감수성은 그의 일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1508년에 이미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단 한 시간 행복한 순간을 보낸 뒤로 이제 거의 15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58녀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가면서도 행복한 시간은 몇 번 밖에 갖지 못했다.

 

7.     라파엘로와 레오 10

 

213 라파엘로는 레오와 기질이나 취향이 잘 맞았다. 두 사람 다 그리스도교 세계를 즐겁게 만들고 이 세상을 낙원으로 삼은 상냥한 쾌락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잘 놀았듯이 일도 열심히 했다.

 

215 그는 성 베드로 성당 계획안의 경우에서 보여 주었듯이 별 원망없이 수정안을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그는 탁월한 예술가들을 흉내내서 그들에게 아첨을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독립성이나 독창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고독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도덕성은 그의 매너처럼 휼륭하지 못했다. 그는 여인들의 매력에 아주 강하게 끌리지 않고는 그들을 매혹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그리고 애들을 잔뜩 두었다. 그러나 교황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가 그런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카스틸리오네가 라파엘로에게 그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델은 어디서 찾아내느냐고 붇자 그는 여러 여인들에게 들어 있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합쳐서 그들을 만들어낸다고 대답햇다. ..그의 성격과 작품에는 건강하고 삶을 강화시키는 톤이 들어있다. 또 갈등과 불화, 시샘, 나이에 대한 비난 등의 한가운데서도 그의 경력에는 통일성과 평화와 명랑함이 들어 있다. 그는 레오와 이탈리아를 소모시키던 정치를 무시했다라파엘로는 진실의 추구는 더욱 단호한 정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름다움에 봉사하는 일로 만족했다.  

 

220 라파엘로의 경이로운 생산성(37년 동안 만든 것이 미켈란젤로가 89년동안 만든 것보다 많다)

 

8.     아고스티노 키지

9.     라파엘로 : 마지막 시기

 

224 라파엘로는 키지를 위해서 빌라 키지에 즐거운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갈라테아의 승리>였다…. 퀴클롭스(외눈박이 거인)인 폴리페무스는 노래와 피리 연주로 요정 갈라테아를 유혹하려고 했다. 그녀는 그를 싫어해서 멀리했다. 마치 대체 누가 예술가와 결혼한단 말인가 하고 말하려는 듯 하다.

 

갈라테아의 승리.jpg

 

227 라파엘로는 그리스도 그림은 상대적으로 적게 그렸다. 그의 낙천적인 정신은 수난에 대한 생각이나 모습을 피했다. 어쩌면 레오나르도처럼 그도 신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27 떡갈나무 아래의 성가정

 떡갈나무 아래의 성가정.jpg

 

227 십자가를 지고가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고가는 그리스도.jpg  

 

229 어쨎든 라파엘로는 한 명 이상의 애인을 두었다. 그래도 그는 이성보다는 아름다움에 더 민감한 예술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이상으로 애인들에게 충실했다이 예술가는 어디서 일을 하든 쉽게 가서 닿을 만한 곳에 애인들을 두곤 했던 것 같다.

 

232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그는 그 시대 가장 위대한 화가였다. 그는 숭고함에서 시스티나 천장화에 맞먹는 것을 제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그린 50점의 성모상의 아름다움에 필적하는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미켈란젤로가 더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는 세 분야에서 위대했고 또 사유와 예술에 더욱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라파엘로에 대해서 그는 깊은 탐구가 만들어낼수 있는 한 모범사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라파엘로가 모방을 통해서 다른 여러 예술가들의 탁월함을 습독했고 근면한 재능으로 그런 탁월한 점들을 결합시켜서 완성된 양식으로 만들어 낸 것을 뜻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게서 길잡이를 내동댕이치고 거의 과격하게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분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너무 행복해서 전통적인 격령한 의미의 천재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잘 해결했기에 가장 위대한 영혼들을 창조와 비극으로 이끌어가는 악마적인 정신이나 힘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율리우스2, 이어서 레오 10, 이어서 키지의 요구와 기분에 자신을 맞췄다. 그러나 언제나 그는 성모와 애인들 사이를 즐겁게 왕복하는 솔직한 젊은이였다. 이것은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화해시키는 그만의 명랑한 방법이기도 했다. 기술자라는 의미의 예술가로서는 아무도 그를 능가하지 못했다그는 항상 사물의 표면에 머물려는 경향을 지녔다.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를 제외하고 삶이나 신앙의 신비나 모순에 깊게 빠지려고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의 섬세함과 미켈란젤로의 비극적 감각은 그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233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미켈란젤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그는 질문하지 않고 의심도 만들어 내지 않고 어떤 두려움도 불러 일으키지 않고 우리에게 신의 음료와도 같은 삶의 사랑스러움을 제공한다.    

 

10.   정치가 레오

 

마키아벨리는 그리스도교나 교황들에 유리한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지만 이런 계획이라면 열렬히 찬성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탈리아의 통일과 보호라는 점에서는 그렇다. 이탈리아의 통일과 보호가 바로 <군주론>의 핵심적인 생각이었다. 매우 제한된 군사력만을 지닌 채 이런 목표를 추구하면서 레오는 자기 시대 통치자들이 선택했던 것과 같은 정치적 수완과 외교적 수완을 모두 사용했다.

 

235 사정이 점차 드러나면서 사자가 아니라 여우인 레오를 상대하고 있음이 점차 분명해졌다.

 

238 1517년에 이미 그리스 아카데미는 재정 결핍으로 문을 닫았다. 그 자신은 절도 있게 먹고 마시면서도 절제를 모르는 자선을 계속하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도원, 병원, 자선 단체에 너그러운 지원금을 보내고 메디치 가문에 관직과 재정을 계속 퍼주고 손님들에게 호사스러운 식사대접을 계속했다. 그는 교황으로 재직하는 기간에 450만 두카트(5625달러?)의 돈을 소비하고도 죽을 때 40만 두카트의 빚을 더 남겼다. 당시의 풍자문 하나가 로마의 의견을 표현한다. “레오는 교황 3인분을 해먹었다. 율리우스 2세의 국고와 레오의 수입, 그리고 후계자의 수입을그가 죽었을 때 로마는 역사상 최악의 재정 곤란을 경험했다.

 

240 그는 꽃병의 아름다움은 볼 줄 알았지만 알프스 저편에서 개신교 종교 개혁이 형태를 잡아 나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에게 오는 백 가지의 경고들을 주의하지 않았고 이미 반란 중인 민족에게 더 많은 금을 요구했다. 그는 교회에 영광이며 재앙이었다. 그는 예술 후원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가장 깨인 사람은 아니었다. 온갖 후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시절에 위대한 문학이 나타나지 않았다.

 

241 그는 아름대운 형태를 너무 사랑했고, 위대한 예술이 아름다운 형태 속에 감추고 있는 깊은 뜻을 너무 적게 사랑했다. 라파엘로는 너무 혹사시켰고 레오나르도를 너무 낮게 평가했고, 율리우스 2세처럼 미켈란젤로의 격한 성질을 통해 그의 천재성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위대하기에는 지나치게 안락을 좋아했다. 그를 이렇게 가혹하게 평가하기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레오10세는 메디치 가문의 아들이어서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리고 자선에 후했지만 자기의 경제적 능력 이상으로 베풀었다. 이건 참 많은 걸 시사한다.

 

 

붕괴

 

19장 지식인의 반란

 

1.     비밀 종교

245 모든 시대와 민족에서 문명이란 소수의 산물이며 특권이고 책임이다.

 

245 어떤 시대든 오직 적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경제적 고민에서 벗어나 조상이나 주변의 사고방식 대신 자신만의 사고를 펼칠 여가와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가는 또한 모든 시대에 소수의 남자와 여자들이 두뇌의 힘으로 아니면 태생이나 상황의 이점으로 미신과 신비주의와 경박한 믿음에서 벗어나 그것의 무한한 무지를 의식하고서 지식과 친절함을 갖춘 지성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만으로도 기쁘게 여긴다는 것이다. 다수를 이루는 단순한 보통사람들은 땅을 갈고 파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짊어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을 하느라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힘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의 분위기에서 자신의 의견, 종교, 삶의 수수게끼에 대한 답변 등을 얻거나 아니면 조상들의 오두막집과 함께 그것을 그냥 물려 받는다.

 

2.     과학

 

251 미신 위에는 자유주의가 판치는 분위기에서 과학은 베살리우스가 나오기 이전 200년 동안 그저 평범한 발전을 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미술, 인문학, 시 등의 분야로 후원과 명예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혹은 지적 생활에서 과학적 방법과 사유에 대한 명백한 요청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52 갈릴레오는 17세기 사람이다프로데노네 오데릭, 파올로 토스카넬리(헬리 혜성에 대해 기록했고  콜럼버스에게 대서양 모험을 위한 지식과 격려를 준 것으로 유명하다)…아메리고 베스푸치

 

3.     의학

 

253 가장 번창한 과학은 의학이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식욕 빼고는 무엇이든 다 희생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54 의학에서 진보를 이룬 바탕은 해부학이 부활했다는 점이다. 성직자들은 의사 및 미술가들과 협력을 해서 이따금 자기들을 통제하는 병원에서 해부를 위한 시신을 공급해 주었다. 

 

257 의학적 치료에서 영웅적인 발전을 거두면 거의 뒤따라오듯이 새로운 질병이 나타나곤 한다는 거이 의학의 숙명인 경우가 많다. 16세기 이전에 유럽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던 천연두와 홍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59 콜럼버스의 귀환과 프랑스 병사들의 나폴리 점령 사이에는 거의 2년의 시간 차가 있어서 질병이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259 콜럼버스 이전 유럽의 유골 중에는 매독에 감염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뼈는 극히 적다.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유골에는 그런 뼈들이 상당히 많다.

 

4.     철학

 

262 첫눈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철학에 이렇다 할 결실을 제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65 폼포나찌는 자산의 사유를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가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에 함축되어 있거나 아니면 직접 표현된 것이라고 출전을 제시하는 쪽이 더욱 안전하다고 여겼다. 그의 태도는 때로는 지나치게 자신을 낮춘 것으로 죽은 권위를 위해 보조적인 자세를 취했다.

 

269 폼포나찌는 이보다 겸손한 순간에 인간 이성의 좁은 한 계를 인정하고 형이상학이 훌륭하지만 쓸모없음을 인정했다. 그는 말년에 자신을 이런 생각으로 지치고 수척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철학자를 프로메테우스에 비교해서 하늘에서 불을 훔치려고 했기 대문에 즉 신의 지식을 훔쳐 냈기 때문에 바위에 묶여 끝도 없이 독수리에게 심장을 파먹히도록 저주를 받았다고 말햇다. 신의 신비에 대해 질문하는 사상가는 프로메테우스와 같다. 종교재판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 박해하고 대중은 그를 바보라고 비웃는다.

 

270 공손한 회의주의는 신사의 표지이자 필수품이다.

 

5.     귀치아르디니

 

272 귀치아르디니의 정신은 시대의 회의적인 환멸을 요약해준다. 그는 이 시대의 가장 예리한 정신의 한 사람이었다.

 

272 그는 탁월함에 대한 정열을 지녔고, 또 글쓰기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 기율을 지녔다.

 

6.     마키아벨리

 

279 두 명의 열렬한 젊은이들이 공화국을 다시 세울 음모를 꾸몄다가 들켰다. 그들이 작성한 문서에서 후원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이 발견되었다. 이 명단에 마키아벨리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는 체포되어 네 번이나 호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공모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는 풀려났다. 다시 붙잡힐까 겁이 나서 그는 아내와 네 아이들을 데리고 조상이 살던 산카쉬아노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남은 15년의 삶을 마지막 한 해만 빼고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 재앙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듣지 못했으리라. 세상을 움직인 이 책을 쓴 것은 바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283 그에게는 좋아하기 힘든 특성들이 많다. 보르지아가 흥할 때 그는 보르지아를 이상화했다. 보르지아가 추락하자 대중에 합류하여 무너진 보르지아를 범죄자이며 그리스도에 대항한 반도라고 욕했다. 메디치 가문이 쫒겨났을 때그들을 유창한 언변으로 저주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자 자리를 얻기 위해 그들의 장화를 핥았다. 결혼 전이나 이후에도 사창가를 찾아갔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 그곳에서의 모험을 상세히 서술한 편지들을 보냈다비록 시대의 관습과는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래도 더욱 용서하기 힘든 일은 현존하는 마키아벨리의 모든 편지에서 아내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다정한 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287 마키아벨리즘을 할 수 있는 한 공정하게 검토해보기로 하자.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이토록 독립적이고 두려움이 없는 사유를 달리 찾아볼 길이 없다. 마키아벨리는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문 뱃길로 새로운 항로를 열었다고 주장할 만도 하다.

 

289 누구든 국가를 창설하고 국가에 법을 부여하려는 사람은 모든 인간은 악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악한 본성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사실로 여기고 출발해야 한다.

 

293 도덕적 제약을 완전히 벗어난 이런 정치적 수완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마키아벨리는 자기 시대의 핵심적 문제로 보이는 것을 다루게 되다. 곧 이탈리아에 집단의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통합과 힘을 만들어 내는 문제다. 그는 자기 나라가 갈라지고 무질서하고, 부패하고 허약한 것을 분노의 눈길로 바라본다. 여기서 유리는 페트라르카의 시대에는 드물었던 것, 곧 자기 도시를 사랑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더욱 사랑하는 유형을 보게 된다. 

 

301 대부분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군주론의 가르침은 특별한 계시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 동업자들의 비밀을 조심성 없게 폭로한 것일 뿐이다.

 

303 마키아벨리의 솔직함에는 어떤 자극의 요소가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다른 어디서보다도 생생하게, 거의 어떤 철학자도 감히 토론하려고 하지 않았던 질문을 마주치게 된다. 곧 정치가의 수완은 도덕성에 묶여 있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성이란 그것을 가르치고 강요할 준비를 갖춘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들 사이의 도덕성은 국제법을 지켜야 한다는 대중의 의견과 물리적 힘을 갖춘 국제기구가 구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 각국의 국민들은 밀림의 맹수들과 같다. 각국의 정부가 어떤 원칙을 고백하든 그들이 실제로 행하는 것은 <군주론>의 그것이 될 것이다.         

7.      

 

20장 풀어진 도덕

 

1.     불사의 원천과 형태들

 

306 르네상스의 지적인 상승을 동반한 도덕적 쇠퇴에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기본적인 사실은 아마 부의 성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아진 돈이 죄악의 비용을 감당해 주면 죄는 더욱 널리 퍼지게 된다. 부의 전파는 금욕적 이상을 약하게 만들었다.

 

306 부 다음으로 부도덕덕성의 주요원천은 이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이었다.

 

306 인류가 가진 자연적인 부도덕성이 풀려나올 때에 종교적 무신앙의 역할을 평가하려면 우선 교육받은 소수의 회의주의와 다수의 끈질긴 신앙심을 구분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계몽이란 소수의 것이요, 해방은 개인 적인 일이다. 정신은 모두 한꺼번에 해방되지 않는다.

 

309 천국도 지옥도 없다면 이승에서 삶을 즐겨야 하고, 또 죽은 다음에 벌 받을 걱정이 없이 입맛대로 즐길 수가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강력하고 지적인 여론만이 잃어버린 초자연적 상벌을 대신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성직 계층도 인문주의자들도 대학도 이런 과제를 감당하지 않았다.

인문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비판하는 성직자 계층과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물론 눈부신 예외들이 있어서 지적 해방과 젊잖은 태도를 함께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문학을 되살려 낸 소규모 지식인들 중에 압도적 다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이교도들처럼 살았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녔기에 뿌리가 뽑혔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월계관과 사례비를 구했고,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자와 그 마누라만큼이나 돈을 좋아했다.

 

2.     성직자의 도덕성

 

312 그들의 부도덕성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성직자들을 위해 결혼을 허용하자는 제안들이 들리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많은 수도원들은 통탄스러운 상태에 있었다. 일부 수도원에서 청빈, 순결, 복종의 핵심적 세 가지 맹세는 전적으로 무시되었다. 많은 수녀원들의 기강도 똑같이 느슨했다.

 

313 종교재판의 활동들은 성과 향연보다도 더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313 1478년에 갈레오토 마르치오는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누구라도 종교야 어찌 되었든 천국에 갈 것이라고 썼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식시투스 4세는 그를 구해주었다. 1497년 의사 가브리엘레 다 살로는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정상적인 웃기는 방식으로 임신되었다고 주장했는데도 환자들의 보호를 받아 종교재판을 벗어났다.

 

3.     성도덕

 

315 속인들의 도덕성으로 옮겨가면서 그리고 성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선 남자는 천성적으로 일부다처를 지향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야겠다. 극히 엄격한 도덕적 형벌 체계, 적절한 가난과 힘든 일, 또 마누라의 끊임없는 감시만이 남자를 일부일처제로 안내할 수있다.

과연?

 

315 상당히 혼전모험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사생아를 갖지 않는 것은 빼어난 일이지만 사생아를 가진 것이 심각하게 불명예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남편은 결혼할 때 보통 아내를 설득해서 그녀가 합법적이지 않은 후손을 받아들여 그녀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양육하게 만들었다.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것이 큰 흠은 아니었다.

 

316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그리스의 부활의 거의 필수적인 부분처럼 되었다.

 

319 사랑의 소네트를 썼을 지도 모르지만 결국 목적은 성교였다. 소설가들이 온갖 이야기를 다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결혼한 경우는 100에 한 번도 드물었다. 결혼은 재산의 문제였다. 그리고 재산은 신체적 욕망이라는 일시적 변덕에 종속될 수는 없었다. 집안의 회의를 통해서 약혼이 성립되었고,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짝을 별다른 저항도 없이 받아들였다.

 

320 결혼을 한 다음에도 여자들은 흔히 자신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지녔다.

 

321 간통이 널리 퍼져있었다. 상류층에서 대부분의 결혼이 경제적인 혹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외교적 결합이었기 때문에 많은 남편들은 애인을 두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느꼈다. 그리고 아내들은 탄식을 했을지는 몰라도 대개는 눈을 감고 (혹은 입을 다물고 ) 공격하지 않았다. 중간 계층의 남편들은 간통이란 합법적 기분 전환이라고 우겼다.

그럼 같은 수의 여자가 필요할테다. 조건을 우선한 결혼의 폐해인 거지. 르네상스 시절의 결혼의 이런 점이 현대도 별다르지 않은 듯 하다. 하나 현대는 결혼을 낭만적 사랑을 이유로 더 많이 하니까.  

 

321 16세기 남편들은 원래 비할바 없이 큰 자기들의 특권은 그대로 간직한 채 아내들의 간통은 죽음으로 벌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남편은 아내를 버릴 수도 있고, 그러고도 여전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버림받은 아내는 지참금을 돌려받고 친척들에게 돌아가서 외로운 생활을 하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런 여자가 다시 결혼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수도원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에는 지참금을 헌금으로 바칠 것이 기대되었다. 일반적으로 라핀 국가에서 간통이란 이혼에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 용인되었다. 

 

4.     르네상스 남자

 

322 르네상스 남자의 특질은 두 가지 초점을 중심으로 선회한다. 지적 용감성과 도덕적 용감성이다.

 

 

322 예술 분야에서는 중세시대처럼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익명으로 집단적 기획에 종사하는 한 사람의 장인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그는 분리된 개인으로서 작품에 자신의 개성을 각인하고, 그림에 자기 이름을 서명하며 미켈란젤로가 피에타에 한 것처럼 조각에도 자기 이름을 새긴다.

 

323 그의 부도덕성은 그의 개인주의의 일부이다.

 

324 단축하고 요약하려는 온갖 노력을 한 다음 결국 르네상스 남자유형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로지 한 가지 점에서만 공감할 수 있는,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있다. 곧 이전 어느 때보다도 삶을 강렬하게 살았다는 것, 중세는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혹은 부정하는 척 했었다. 르네상스는 충심으로 그리고 영혼과 힘으로 삶을 긍정했다.

 

5.     르네상스 여성

 

324 유럽 역사에서 여성의 지위는 보통 부가 늘어나면서 함께 높아지곤 했다그녀가 자기를 거부하면 그는 그녀를 이상적인 존재로 만든다.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을 거부하는 훌륭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승낙한 것에 대해서는 남자가 값비싸게 보상하도록 만들 줄을 안다. 여성의 그런 승낙을 생각하면 남자의 혈관은 부풀어오른다. 게다가 여자가 육체의 매력에다 정신과 성격의 우아함을 덧붙이면 그녀는 남자가 이런 측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최고의 만족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그녀가 자기 삶에서 여왕과도 같은 지배력을 갖게 해준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 평균적인 여자들의 즐거운 역할이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오로지 행운을 타고난 소수의 운명이었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집안일을 감당하느라 죽을 때까지 결혼을 미루었다. 

 

330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프랑스 계몽주의와 마찬가지로 양성적이었다. 여성들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나섰다. 남자들은 거칠고 잔인하기를 그치고 세련된 매너와 언변을 갖추었다. 온갖 느슨함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유럽이 지난 천 년 동안 알지 못했던 정도의 우아함과 세련미를 얻었다.

 

6.     가정생활

 

331 가족은 여전히 경제적, 도덕적, 지리적 연합체였다. 가족의 한 사람이 빚을 지면 보통 나머지 사람들이 갚았다. 이 시대의 개인주의에서 특이한 예외였다. 어떤 사람이라도 가족과 상의하지 않고 결혼하거나 나라를 떠나는 일은 드물었다.

 

7.     일반적인 도덕성

 

335 산업은 크기가 커지고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개인적인 관계가 사라지면서 더욱 무자비하게 되었다. 봉건제도에서 농노는 무거운 의무를 지녔지만 또 확실한 권리를 누리기도 했다. 병이 들었거나 병제적 침체기, 전쟁, 노년에 주인은 그를 보살펴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탈리아 도시에서는 조합들이 형편이 좋은 노동 계층을 위해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자유노동자는 일거리가 없을 때는 굶어 죽도록 방치되었다. 일거리를 찾게 되면 그것은 고용자의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대개는 몹시 가혹한 조건이었다.

 

336 사회적 도덕은 폭력과 자비심의 혼합체였다.

 

337 전쟁의 도덕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나빠졌다. 르네상스 초기에 거의 모든 전쟁은 용병들의 온건한 싸움이었다. 그들은 광포함 없이 싸웠고 언제 그만둬야할 지를 알았다. 병사 몇 명이 쓰러지면 곧바로 승리를 얻은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살아있는 죄수가 죽은 적보다 더 귀했다. 용병대장들이 점차 힘이 강해지고 군대가 더욱 커지고 비용이 많이 들면서 정규적인 보수 대신 정복한 도시를 약탈하는 것이 군대에 허용되었다. 약탈에 대한 저항이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을 만들어 냈고, 그래서 흘린 필의 냄새에 잔인성은 더욱 커졌다.  

 

8.     훌륭한 몸가짐과 오락

 

341 음식을 집어 입으로 나르는 일은 손가락 대신 포크가 하면서 15세기에 식탁예법의 혁명이 일어났다.

 

344 전체적으로 보아 노동과 위험, 자연적, 초자연적 공포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삶이었다.

 

9.     연극

 

346 이탈리아 연극은 이런 가면극과 사육제가 그 기원의 일부였다. 서서 이야기의 일부장 면들이 무대 차나 아니면 행렬이 지나가는 길가 특정한 지점에 만들어진 임시 무대에서 공연되곤 했기 때문이다.

 

10.   음악

 

348 음악은 이탈리아의 모든 계층에서 사랑 다음으로 중요한 오락이며 위안이었다. 몽테뉴는 1581년에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하면서 농부들이 손에 류트를 들고 그들 옆에서 양치기들이 아리오스토를 외어서 낭송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이런 일이 이탈리아 전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르네상스 회화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묘사했다.

 

349 궁정에서 음악은 사람들의 몸단장을 빼고 다른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기예였다.

 

350 통치자들은 좋아하는 교회를 선택해서 그 성가대를 후원했다.

 

351 대성당과 교회들, 수도원과 수녀원들에 음악이 울려퍼졌다. ..등지에서 수녀들은 저녁기도를 몹시 감동적으로 노래해서 사람들이 노래를 들으러 오곤 했다.

이런데 가보고 싶다. 이런 음악을 듣든지.

 

356 르네상스 악기들은 건반 악기만 빼고 모두 중동에서 기원한 것들이다.

 

357 16세기에 발전하고 실험한 것은 종교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드리갈과 궁정음악이었다. 철학, 문학과 나란히 그리고 르네상스 예술의 이교적 양상과 도덕의 해이를 반영하면서 16세기 이탈리아 음악은 성직자들의 통제를 벗어나 사랑의 시에서 영감을 구했다. 종교와 섹스 사이에 벌어진 낡은 싸움은 한동안 에로스의 승리로 결판이 났다. 성모의 지배는 끝나고 여성의 상승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지배하든 음악은 아직 여왕의 시녀였다.

 

11.   조망

 

 

21장 정치적 붕괴

 

1.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발견하다

 

361 이탈리아가 아메리카 대륙을 다시 발견한 사람을 낳기는 했으나 그에게 돈을 대준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370 스페인의 잔인성에 못지않은 스페인의 기사도정신을 발휘하여 곤살로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포로들의 몸값을 내주고 그들 모두를 프랑스 군대로 돌려보냈다. 이 사간은 위대한 선장 곤살로 군대의 사기를 회복시켰다.

 

2.     새로운 공격

 

373 율리우스 2세는 이제야 킹브레 동맹이 완전히 승리하면 교황청도 패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교황청을 종교개혁의 목소리가 이미 나오기 시작하던 북부 유럽 세력들의 자비심에 맡겨 놓는 꼴이 될 것이다.

 

3.     캉브레 동맹

 

376 그렇게 해서 킹브레 동맹의 전쟁은 끝이 나다. 여기서는 마치 춤판처럼 파트너(동맹국)들이 바뀌었고 마지막의 상황은 처음의 상황과 본질적으로 같았으며 이탈리아가 강대국들이 유럽의 지배권을 놓고 거듭 결투를 벌이는 전쟁터가 될 운명이 되었다는 것만 빼고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교황청은 파르마와 피아천짜를 프랑스에넘겨주었다 베네찌아는 북부 이탈리아의 속국들을 되찾았지만 재정적으로 고갈되었다.

 

4.     레오와 유럽

 

377 레오는 프랑스에서 이미 오랫동안 관습이 되어 있던 것을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그리고 전혀 그럴 계획은 아니었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교회와 국가를 결혼시켰고, 그럼으로써 프랑스 군주가 종교 개혁을 후원할 재정적 이유를 없애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공의회와 교황의 상대적인 힘을 놓고 프랑스와 교황청 사이에 존재하던 오랜 갈등에 끝을 냈다.

 

5.     하드리아누스 6

 

380 그는 모든 면에서 절도가 있었지만 단호함만은 절도를 몰랐다. 단순하게 생활하고 열심히 이단을 추적했기에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그의 미덕에 대한 평판이 로마에까지 이르러 레오는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382 13개월이라는 하드리아누스의 짧은 재임 기간도 개혁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개혁은 수많은 관리들에게는 지겨운 일이었고, 그래서 차츰 저항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하드리아누스가 빨리 죽기만을 바럈다. 교황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개선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탄식했다. 

 

6.     클레멘스 7 : 첫번째 국면

7.     로마 유린

 

390 그는 황제에게 자신은 도시의 피를 다 쥐어짰다고 써보냈다. 주민들의 집에 숙영하고 있던 그의 군대는 도둑질, 잔인함, 겁탈 등으로 주민들을 괴롭혔기에 많은 밀라노 사람들이 목을 매달거나 높은 곳에서 길로 떨어져 자살하고 있었다.

 

393 도시 전체에 세 살이 넘은 존재는 누구든 돈을 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 승리한 폭도들 중 절반은 도이치 사람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교황과 추기경들이 도둑이고, 로마 교회의 재산은 여러 국민들에게서 도둑질한 것이며 세상에 대한 치욕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었다. 이런 치욕을 줄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이동이 가능한 교회의 기물을 전부 차지했다.

 

394 책들, 문서고, 미술품의 파괴는 엄청났다.

 

395 로마 유린은 8일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클레멘스는 천사성의 탑에서 그 꼴을 지켜보앗다. 그는 고통을 당하는 욥처럼 신에게 소리쳤다. “어째서 나를 어미의 자궁에서 꺼내셨습니까? 내가 바싹 여위어서 아무도 나를 보지 않게 하소서그는 면도를 중지하고 다시는 면도하지 않았다.

 

8.     승리자 카를 5

 

397 1522년에 전염병이 로마를 기습해서 주민을 5 5000명으로 줄여 놓았다. 1527년에는 살인, 자살, 전쟁 등이 다시 인구를 4만명 이하로 만들었다.

 

399 그가 볼로냐에서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그렇게 몰아붙였던 남자의 발에 키스를 했을 때 이 두사람은 (한 사람은 붕괴된 교회를 대표하고, 한 사람은 방금 떠오르는 그리고 여기서 승리한 현대 국가를 대표했다.) 처음으로 서로 만났다. 클레멘스는 모든 자부심을 철회하고 황제의 공격을 모두 용서했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9.     클레멘스 7세와 미술

 

404 그는 자신의 탁월함에 너무 일찍 만족하지만 않았더라면 더욱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여가를 향한 정열이 천재의 측면을 가로막았다. 그는 어째서 한 인간이 이미 남아도는 황금을 위해서, 아니면 사후의 명성이라는 도깨비불을 쫓느라 자신을 소모시켜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의 후원자가 교황이 되고 그는 바티칸에서 한가한 성직을 받은 다음 오로지 초상화에만 전념했다. 이 분야에서 그를 능가하는 화가는 드물다.

 

406 다양한 재능을 가졌으나 페루찌는 가난하게 죽었다. 그는 자신의 기술에 알맞은 사례금을 받아내기 위해 교황들, 추기경들, 은행가들과 말다툼을 벌일 뱃심을 갖지 못했다.

 

10.   미켈란젤로와 클레멘스 7

 

408 아마도 조각가의 의도는 단순히 그의 비밀의 주물, 곧 인체를 조각하는 일이었을 거이다. 남자를 그 강인함의 온갖 광채 속에 드러내고 여자의 윤곽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말이다.

 

11.   한 시대의 종말

 

413 클레멘스 7세는 프랑수아 1세를 마르세유에서 만나 그곳에서 조카딸 카테리나를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시켰다. 메디치 가문 교황들의 가장 큰 잘못은 그들이 자기 가문을 왕가라 여기고, 이따금 가문의 영광을 이탈리아나 교회의 운명보다 더 위에 두었다는 점이다.

 

414 의심의 여지 없이 클레멘스 7세 시대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재앙이 많은 시대였다. 클레멘스가 즉위할 때 모든 사람이 환호했고, 그가 죽었을 때 모두가 환호했다. 로마의 폭도들은 거듭 그의 무덤을 훼손했다.

 

종말 : 1534~1576

 

22장 베네찌아의 황혼 (1534~1576)

 

1.     다시 태어난 베네찌아

 

417 이탈리아의 나머지 지역에서 속박과 쇠퇴가 이루어지던 이 시기가 베네찌아에는 황금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일이다.

 

418 전쟁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베네찌아는 한 번도 침입을 당한 적이 없었다. 이 도시의 집들과 상점들은 전혀 상처를 입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또 베네찌아는 본토의 식민지들을 회복했다. 이들 중에서 파도바, 비첸짜, 베로나 같은 인구가 많은 도시들은 교육, 경제, 천재 등도 공급해주었다. 베네찌아는 여전히 아드리아 해 내부와 근처의 많은 무역의 거점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도시의 주도적인 가문들을 물려받아 소중히 관리한 재산이 여전히 아주 많았다. 오래된 산업들은 계속 번창했고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았다.

 

421 이 세 사람은 확고한 친구들이 되었다. 그들은 베네찌아 예술가들 사이에서 부러움 섞인 말로 ‘3거두라고 불렸다. 많은 저녁을 함께 보내면서 사업 이야기를 하거나 그 시대가 제공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즐겼다. 야코포는 여자들의 인기라는 면에서 아레티노와 경쟁하고 오래 산다는 점에서는 티치아노와 경쟁했다.

 

2.     아레티노

 

429 아레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프랑수아 1)를 숭배 한다. 그러나 그의 감동적인 너그러움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기에 무라노의 용광로가 다 식을 정동이다.(베네찌아 교외인 무라노 섬은 유리 산업이 집중된 곳)” 기사 작위가 제안되었지만 수입이 없는 자리엿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입이 없는 기사 작위는 출입금지 팻말이 없는 벽과 같다. 누구든 그곳에 (오줌을 싸는 것 같은) 못된 짓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레티노는 자신의 펜을 카를 5세 편으로 돌리고 그에게 유례없이 성실하게 봉사했다.

 

431 그에게 명성과 행운을 가져다준 것은 그가 쓴 편지들이었다. 이들 중 많은 것은 찬양받는 사랆에게 직접 보낸 찬양의 글이다. 혹은 그들과 친한 사람들에게 보낸 글이었다. 그들은 솔직하게 선물, 연금, 혹은 다른 호의를 짜내기 위한 것들이었다. 때로는 자기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고, 언제 주어야할지를 지적한 것들도 있다. 아레티노는 이들 편지들을 쓰자마자 출판(인쇄)했다. 편지의 압력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이탈리아는 이 출판물을 움켜쥐었다. 유명한 남자와 여자들과 간접적으로 친근하게 해 주기 때문이고, 또 그 시대 다른 어떤 작가와도 비할 수 없는 독창성과 생동성, 힘을 가지고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레티노는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고 문체를 지녔다. 그는 문장을 너무 섬세하게 다듬어서 완전히 생명력을 없애는 벰보 류의 문필가들을 비웃었다그는 자신의 글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역할을 받아들였다. 직접적이고 단순한 언어로 자신의 삶의 경험과 비판, 의상과 식품의 필요성 등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었다.

 

433 아레티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마치 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나 내게로 온다. 가난한 소녀가 갇히면 내 살림으로 그 비용을 물어준다. 누구가 감옥으로 가게 되면 그 비용은 내게로 온다. 장비 없는 군인들, 운수 사나운 이방인들, 길 잃은 기사들이 수도 없이 내 집에 와서 기운을 차린다.” 그가 이따금 22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집에 두고 있다면 이것은 그들이 그의 애첩이란 뜻이 아니다. 일부는 출산을 기다리며 기 집에서 얻어먹고, 일부는 이 집에서 휴식처를 구한 것이었다. 어떤 주교가 그에게 이런 여자들 중 한 명을 위해 신발을 보내주었다는 말을 읽게 된다.  

 

3.     티찌아노와 왕들

 

436 이 초상화들이 의상을 빼고는 대상을 이상화하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화가와 왕에게 모두 영예가 되는 일이다.

 

티치아노 베누스

 

티치아노 베누스.jpg

 

    

티치아노 베누스와 아도니스

 

 티치아노 베누스와 아도니우스.jpg

 

티치아노 <장갑을 낀 남자>

 

티치아노 장갑을 낀 남자.jpg

 

  

4.     틴토레토

 

445 이 드로잉에서 티찌아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그 탁월함보다는 오히려 그 조심성 없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심성 없는 드로잉은 오랜 시간에 걸쳐 틴토레토의 결함이었기 때문이다. 전 생애를 걸쳐 티치아노를 존경했고, 티지아노가 자기에게 준 그림을 소중히 여겨 작업장 벽에 붙여놓고 회화에서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언제나 거듭 생각나게 해주는 암시로 삼았다. 미켈란젤로의 도안과 티찌아노의 색채가 그것이다.  

 

446 그의 작품에는 조급함과 완성도의 결핍이 나타났다. 아마도 독학의 대가였던 듯. 이것은 그의 예술이 일반의 인정을 받는 일을 늦어지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러 해 동안이나 기회를 찾아다녀야 했다. 가구에 그림을 그리고, 집의 정면부에 벽화를 그리고 건축가들에게 낮은 가격으로 장식 일을 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자신의 그림들을 성 마르코 광장에 펼쳐놓고 팔곤 했다.

 

450 틴토레토 <수태고지>

 틴토레토 수태고지.jpg

 

452 틴토레토 <베누스와 대장장이 신 불카누스>

 

 틴토레토 베누스 불카누스.jpg

 

5.     베로네제

 

458 지나가는 길에 2등급의 별들에게도 잠시 경의를 표하기로 하자. 그들도베네찌아의 광채의 일부였다.

 

458 베로네제 <가나의 혼인잔치>

베로네즈-가나의 혼인잔치.jpg

 

6.     조망

467 베네찌아 화가들은 색채를 너무나 좋아해서 피렌쩨 대가들과 같은 조심스러운 도안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23장 르네상스가 이지러지다

 

1.     이탈리아의 쇠퇴

 

470 볼로냐의 화의(1530)를 통해서 이탈리아의 통제권은 다음 두 가지만을 예외로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조심스러운 베네찌아가 독립을 유지하고, 형벌을 받은 교황청이 교회 국가들에 대한 주권을 그대로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470 어떤 점에서 스페인 지배는 이탈리아에는 좋은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탈리아 국가들 상호간의 전쟁을 한동안 끝장내 주었다. 1559년 이후로 스페인지배는 외국세력이 이탈리아 영토에서 전쟁하는 일을 끝냈고 이런 상태가 1796까지 연장되었다. 그것이 이탈리아 국민에게 정치적 질서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 부여하고 르네상스를 만들기도 파괴하기도 한 격한 개인주의를 가라앉혔다. 질서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안도감으로 복종을 받아들였다. 자유를 소중히 여긴 사람들은 탄색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복종을 통한 평화의 비용과 벌금이 경제에 손해를 가져오고 이탈리아 정신을 망가뜨렸다. 총독들이 자기들의 사치와 군대유지를 위해 무거운 세금, 법률의 엄격함, 곡식과 그밖의 필수품들에 대한 국가 독점 등은 산업과 상업을 방해했다.

 

471 다른 불행이 이탈리아에 일어났다. 이것은 전쟁의 황폐화와 스페인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더욱 지속적인 재앙이었다.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이 열리면서(1498) 대서양 국가들에서는 알프스를 넘어 제노바나 베네찌아로 가고 이어서 알렉산드리아로, 또 거기서 육로로 홍해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인도로 가는 복잡한 방법보다 중앙 아시아 및 극동으로 가는 더욱 값싼 운송수단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터키 사람들이 동부 지중해를 통제하면서 이 통로는 더욱 위험해지고 공물, 해적,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다….1498년 이후로 베네찌아와 제노바의 무역업과 피렌쩨의 금융업이 쇠퇴했다.

시대가 변하는 거로구나. 지리상의 발견이 이런 식으로 거대한 영향을 주네.

 

472 이 해에 루터는 반란의 주장들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였다. 종교 개혁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소퇴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종교개혁이 북부 국가들에서 로마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이동과 성직 수입을 줄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쇠퇴의 원인이었다. 또 인도로 가는 지중해-이집트 통로가 순수 항해 방식으로 대체된 점과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상업이 발전하면서 대서양 국가들을 부강하게 하고 이탈리아를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쇠퇴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473 스스로를 국가로 여기고 또 존재를 위협받는 다른 어떤 국가와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는 관용과 자유주의에 등을 돌리고 끔찍한 보수주의로 회귀했다. 그것은 사상, 연구, 출판, 언론 등에 심각한 제한을 가했다.  

 

2.     과학과 철학

 

476 카르다노는 이상하고도 매혹적인 자서전을 썼다. ..이 자서전은 놀라울 정도의 솔직함으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책의 마지막까지 계속되는 태도이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다양한 낙태 약품들을 썼는데도 소용이 없어서 나는 1501 9 24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목성이 올라가고 금성이 12궁도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나는 성기 부분을 빼고는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스물한 살에서 서른한 살까지 여자들과 함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주 나는 다른 모든 남자들이 자신들의 행운을 맛보는 것을 시샘하면서 나의 운명을 탄식했다.”..이런 병리적인 체험을 지닌 그는 성공적인 의사가 되어 허영심 빼고는 자신의 거의 모든 질병을 치료했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나가는 의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병의 만물상이었던 이 남자, 자기 병을 연구하다가 의사가 되었다. 어떤 부분이 약하기 때문에 두 배의 근육을 갖게 된다는 말이 맞다면 나는 어떤 근육을 길러갈건가? 이제 연구원은 절반이 지났다. 남은 6개월동안 그걸 만들어내야한다. 어차피 이 기간은 출발일테지만. 욕심인가? 민달팽이같은 허약하고 흐물거리는 나는.  

 

480 뤼지 코르나로는 거의 백년을 살았다. 1467년에 베네찌아에서 태어났는데 음식과 사랑의 모든 사치를 누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부자였다. 이런 방종이 그를 여러 질병의 제물로 만들었다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의사들은 모든 처방을 포기하고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란 오로지 절제하는 규칙적인 생활에 있을 뿐이라고 충고했다….머지않아 그는 하루 섭취량을 음식 350그램과 포도주 400그램으로 줄였다. 그가 들려주는 바에 의하면 1년 만에 나는 그동안의 모든 불편함에서 완전히 쾌유되었다. ..나는 아주 건강해졌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다.’그러니까 여든 셋의 나이 때 한 말읻. 그는 이런 육체적 습관의 질서와 절도가 정신과 성격의 측면에서도 질서와 절도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두뇌는 항상 명료한 상태에 있다. 우울증, 미움, 다른 정열들이 그를 떠났다. 그의 미적 감각조차도 더욱 날카로워져서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단식이 하고 싶어지는 글이다. 음식과 생활의 절제와 질서가 필요하다. 나도. 잠자는 시간이 안정되고, 먹는 음식이 절제가 되면 좀 더 활기있어질 것 같다. 들쭉날쭉, 불안정하다.

 

481 내가 먹는 얼마 안되는 음식은 예전에 불규칙하게 살던 시절에 먹던 맛있는 것들보다 더욱 맛이 좋다.

 

481 내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답고 잘 울리게 되었는지..아흔 살에 그는 온 인류에게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생활을 하라는 사랑의 권고를 썼다.

 

3.     문학

4.     피렌쩨의 황혼

 

488 기울어가는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젊은 국가를 다스리는 것보다 쉽다. 기운이 쇠약해진 생명력은 복종을 환영하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에 의해 다시 패배한 피렌쩨는 피곤한 채로 클레멘스 7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495 미켈란젤로가 그를 알레싼드로 파르네제 추기경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추기경이 1546년바사리에게 후세에게 알리기 위해 지난 200년 동안의 이탈리아를 빛낸 예술가들의 생애를 쓰라고 권했다. 로마, 리미니, 라벤나, 아레쪼, 리펜쩨에서 화가 겸 건축가로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죠르죠 바사리는 시간을 내서 우리 예술가들에 대한 사랑으로 감동되어그들의 생애를 쓰는 보답없는 작업을 했다. 1550년에 그는 <이탈리아의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의 제 1권을 냈다.

이 책들 전반에 걸쳐 나오던 바사리이름은 그 당시에 르네상스 천재들이 살아있거나 그들이 만들어낸 걸작들이 쏟아져 나오던 때 그들의 생애에 대해 쓴 사람의 것인듯

 

5.     벤베누토 첼리니

 

497 나아가 그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들, 운명의 변화와 업적들을 거리낌없이 털어놓는 능력으로 모든 자서전들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잊을 수 없는 자서전을 썼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탁월함의 요소를 지녔거나 탁월함과 상당히 비슷한 요소를 지닌 사람이고 진리와 정직성을 지나고 있다면 모든 남자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생애를 서술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흔이 되기도 전에 이런 섬세한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이 의무가 이제 나의 마음에 나타났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난 도시 피렌쩨에 있으며 쉰여덟을 넘기고 있다.

 

497 필리피노 리피의 집에서 로마의 고대 미술품을 그린 드로잉 책을 발견했다. 그는 이 유명한 모범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친구들과 함께 수도로 가는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어느 날 그와 목재 조각을 하는 젊은 지앙바티스타 타소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야기에 몰두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성 피에트로 가톨리니 문에 도달해 있었다. 첼리니는 자기들이 이미 피렌쩨에서 로마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 용기를 북돋우며 그들은 계속 걸어서 53킬로미터 떨어진 시에나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타쏘의 말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첼리니는 말을 빌릴 돈이 있었다. 두 젊은이는 한 마리 짐승을 타고 노래하고 웃으며 로마까지 갔다.” 나는 그 때 막 열아홉살이었고 이 세기도 그랬다(1519)

가벼운 가출 얘기네.

 

499 그의 신학은 그의 도덕성만큼이나 독립적이었다. 언제나 옳았기 때문에(한 번만 빼고) 그는 신이 자기 편이고, 자기 팔에 힘을 더해 주신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때 도와달라고 신에게 기도했고, 자신의 성공에 대해 그분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애인 안젤리카를 찾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에 신이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악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6.     줄어든 빛

 

506 1576년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대부분의 중요 인사들이 다 도망쳤는데 그는 자기 자리에 그대로 남아 병자들을 위로하고 쉬지 않고 방문하고 밤새도록 기도했다. 이것으로 추기경의 엄격함이 모두 용서되었다. (산 카를로 보로메오)

 

7.     미켈란젤로 : 마지막 국면

 

510 클레멘스 7세는 죽기 직전에 그에게 시스타나 예배당의 제단 뒤에 <최후의 심판> 벽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었다미켈란젤로는 못마땅했다. 그는 그림이 아니라 조각을 원했다. 붓을 들고 있는 것보다 망치와 끌을 들고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 그림을 그려야 할 벽의 크기(20*10미터)가 그를 머뭇거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510 레오나르도가 그를 가리켜 단테에게서 배운 사람이라 불렀던 우울한 예술가가 다시금 지옥의 소금물에 자신을 흠뻑 적시고는 그 공포를 벽에다 옮겨놓았고 세월이 흘러도 미래의 교황들은 미사를 드릴 때면 자기들 앞에 피할 길 없이 놓인 최후의 심판을 향해 다가오게 될 것이다.

 

513 그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중세적이고 신비주의와 예언 또 죽음과 지옥에 대한 생각으로 어두어진 것이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회의론이나 라파엘로의 쾌활한 무관심을 지니지 않았다. 그가 좋아한 책들은 성서와 단테였다. 생애 마지막 무렵 그의 시는 점점 더 종교를 향했다.

 

514 토마소 카발리에는 로마의 귀족으로 재미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가 배우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찾아왔는데(1532) 그 얼굴과 몸매의 아름다움, 거동과 매너의 우아함으로 미켈란젤로를 매혹했다.  미켈란젤로는 그만 사랑에 빠져 그를 위해 솔직한 숭배의 소네트들을 썼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미켈란젤로를 레오나르도와 함께 역사상 유명한 동성애자로 여겼다. 남자를 향한 남자의 그런 사랑의 표현들을 르네상스 시대에는 아주 열렬히 이성애를 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이었다.

 

514 그가 비토리아 콜론나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여자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말도 해야겠다. 그녀와의 우정은 그녀가 쉰 살, 그가 예순일곱 살이 된 1542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쉰 살의 여자는 육십 대 남자의 남은 불꽃을 쉽게 흔들어놓을 수 있는 법. 그러나 비토리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17년 전에 죽은 남편 페스카라 후작과 결합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우리의 우정이 견고하고 우리의 감정은 아주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교도의 매듭으로 묶인 것이지요.” 그녀는 그에게 143편의 소네트를 보냈다. 훌륭하지만 무시해도 괜찮을 것들이다. 그는 경탄과 헌신으로 따뜻한 소네트들을 써서 응답했다. 그러나 이 시들은 문학적 자부심으로 얼룩져 있다. 그들은 만나면 예술과 종교 이야기를 하고, 어쩌면 그녀는 교회를 개혁하려고 애쓰는 남자(루터)에 대한 자신의 공감을 고백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에게 미친 그녀의 영향은 아주 깊었다. 그녀의 경건함, 친절, 정절에는 삶의 모든 섬세한 영적 요소들이 들어있는 듯했다. 그녀가 그와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동안 그의 염세론 일부가 없어졌다. 그는 다시는 그들이 만나기 이전의 자신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녀가 죽었을 때 (1547

) 그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그는 어지럽혀진 듯 비탄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손에 키스했듯이 그녀의 얼굴에 키스하지 않은 자신을 질책했다.

예순일곱살에 여자를 사랑한 거로구나. 나는 나이 들어 만나는 사랑에 대해 미켈란젤로를 생각할거다. 비오는 지난 주말에 거리에서 본 70대 커플 생각이 나네.  

 

519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껏 존재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것이 당시 일부 사람들의 판단이었고 또 시간의 판단이 되었다. 그는 러스킨이 말한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정의를 완전히 충족시킨다. ‘작품 전체에 가장 위대한 발상을 가장 많은 숫자로 구현한 사람’, 정신의 가장 높은 능력을 행하고 드높인사람이었다.

 

마치는 글

 

524 무엇보다도 르네상스는 (이 용어를 이탈리아에 한정시켜서) 물질적으로 똑똑한 소수가 단순한 다수를 경제적으로 착취한 바탕 위에 자리를 잡았다.

 

525 고전 조각도르네상스를 표현할 수는 없었다. 조각에는 절제가 본질적인 것이다. 이 영속하는 매체는 본질적으로 짧을 수밖에 없는 지푸림이나 단말마의 고통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가 않다.

 

526 16세기에 초상화가 인기 있었다는 것은 벼락부자들이 생겨난 것을 암시해주고, 또 그들이 명성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열망했음을 암시해준다.

 

528 종교는 신성을 찾기 위해서 위를 쳐다보지 않았다. 고전 양식은 아무리 훌륭하고 고요해도 소란스러운 르네상스를 대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528 르네상스 회화에 대해서는 변명의 말이 한마디도 필요없다. 이것은 여전히 역사에서 이 분야의 최고 지점이다.

 

528 르네상스 회화는 비록 가장 위대한 종교화들 이부와 가장 영적이고 숭고한 것들을 창조하기는 했어도 정말로 감각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이 감각성이야말로 건강한 반응이었다. 육체는 충분히 오랫동안 구박을 당했다.

 

528 삶이 건강한 인간 형태의 사랑스러움을 다시 인정하고 예술이 그것을 강조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사고에 들어있는 )원죄와 회개와 사후의 공포에 완전히 물려 버렸다. 그래서 죽음에 등을 돌리고 얼굴을 삶으로 향했다.

 

529 고전 예술을 되살려냄으로써 르네상스는 유럽에서 오리엔트 정신(그리스도)이 천 년이나 지배한 것을 끝냈다. 이탈리아로부터 백 가지 길을 통해서 위대한 해방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프랑스, 도이칠란트, 플랑드르, 네덜란드, 영국 등지로 퍼져 나갔다.

 

529 1500년에서 1600년 사이에 서부 유럽은 이탈리아가 과학과 예술과 휴머니티로 이루어진 새로운 문명의 어머니이며 유모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IP *.154.223.199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문명이야기 5-2 file 콩두 2012.07.23 2751
1691 북리뷰 80. 모파상의 시칠리아 [1] 범해 좌경숙 2012.07.26 3284
1690 2번 읽기 - 문명이야기 [17] 레몬 2012.07.30 3714
1689 #16. 문명이야기(르네상스)_두번읽기 [3] 한젤리타 2012.07.30 2636
1688 두번읽기 - 그리스인 이야기/ 앙드레 보나르 지음 세린 2012.07.30 2428
1687 #16. 문명이야기 - 르네상스 두번읽기 file [1] [1] 샐리올리브 2012.07.30 2734
1686 두번 읽기-그리스인 이야기 1 2 3 file id: 깔리여신 2012.07.30 2304
1685 두번읽기_그리스인 이야기1.2.3 앙드레보나르 서연 2012.07.30 2405
1684 두번읽기- 그리스인 이야기/앙드레보나르 학이시습 2012.07.30 1848
1683 그리스인 이야기 1~3 file [1] 장재용 2012.07.30 2284
1682 문명이야기 두번 읽기 file 콩두 2012.07.30 2574
1681 아이와 통하는 부모는 노는방법이 다르다 _로렌스 J. 코헨 양갱 2012.07.31 4991
1680 #63. 마음사전-김소연 file [2] 미나 2012.07.31 4508
1679 율리시스 1, 2- 두번읽기 [3] id: 깔리여신 2012.08.15 4104
1678 #17. 변신이야기(오비디우스) 세번읽기 한젤리타 2012.08.26 2542
1677 #17_그리스비극 두번읽기 [1] 서연 2012.08.27 2374
1676 변신이야기 - 오비디우스 (세번읽기) file [3] 세린 2012.08.27 7441
1675 # 17. 변신이야기 두번읽기 file 샐리올리브 2012.08.27 2753
1674 변신이야기 -두 번 읽기 file [1] id: 깔리여신 2012.08.27 2660
1673 변신 이야기 file 레몬 2012.08.27 3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