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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0일 01시 10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 앞선 과제와 동일

 

 

 

 

 

문명 이야기

The story of civilization

 

 

 

6

우리 채은 르네상스 시대, 1304년 페트라르카의 탄생부터 1576년 티찌아노의 죽음까지의 기간에 이탈리아에서의 삶의 모든 국면을 전체적으로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 이 책에서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오로지 이탈리아에 국한한다.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1304~1375

 

1.르네상스의 아버지

 

49 그들은 배를 타고 제노바 해안을 지나쳤다.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리비에라 해안의 장관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산등성이로 왕관처럼 펼쳐진 마을은 경사로를 따라 푸른 바다와 연결되었다. 젊은 시인은 이것이 "지상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볼로냐는 그에게 분명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볼로냐는 학생들의 장난기와 배움의 질서와 독립적인 사상의 흥분으로 넘치는 대학 도시였다. 14세기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인간해부학 강의가 있었다. 그리고 여자 교수들도 있었다.

 

50

페트라르카는 볼로냐의 정신은 좋아했지만 법의 문자는 싫어했다. …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신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등을 찾아낼 수 있는대로 찾아내 모조리 읽엇다. 그들은 그에게 철학과 문학 양쪽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엇다. 그는 그들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처럼 글을 쓸 것을 갈망했다. 부모가 죽자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아비뇽으로 돌아와 고전문학 및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327년 수난의 금요일에 한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사랑을 거부한 일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를 자기 시대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열광적으로 자세히 묘사했지만 그녀의 신원의 비밀만은 감쪽같이 감추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뮤즈가 그의 창조물이라고 여겼다.(그러면서 그의 모든 정열이 문학의 특권이라 여겼다.)

라우라. 로라 드 사드

 

 

è 왜 페트라르카는 단테와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을까?

è 명성을 얻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가? 가치 있으나 묻혀질 수도 있지 않나. 꼭 남에 의해서 가치가 검증되어야 하나? 내 생각의 한계.

 

è위키페디아

칸초니에레(Canzoniere)

페트라르카의 서정시집이다. 1342년경 착수하여 1348년에 일단 완성, 그 후에도 얼마나 퇴고를 계속 하였는가 하는 것은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는 원고로 짐작하고도 남는다. 2부로 나뉘어 제1부는 라우라의 생전에 쓴 시로 소네트 225, 칸초네 21편 등 합계 246편이며 제2부는 그녀 사후의 시로 소네트 90, 칸초네 8편 등 합계 100편으로 되어 있다. 라우라는 베아트리체와 달리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육체를 지녔으되 사후는 '손바닥만한 땅에 묻히는' '한 줌의 흙'이 된 여성으로, 인에게는 그녀의 눈이나 가슴, 금발의 아름다움은 기쁨이자 괴로움으로, 그 심정의 기복을 자연의 묘사, 고전의 인용, 용어의 멋진 표현을 통하여 완벽한 시형으로 다듬은 시집으로 기나긴 성모의 찬송으로 끝맺고 있다. 그 밖에 정쟁(政爭)이나 교황청 비난의 시 "나의 이탈리아여"로 시작하여 "나는 외치고 외치노라. 평화, 평화, 평화라고"하는 명구로 끝나는 애국시 등도 포함한다.

 

55 여행할 때는 고전 텍스트들이 "아라비아이나 중국 상인들이 제공하는 어떤 물건보다도 더 값진 상품"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들을 찾고 사들였다. 살 수 없는 사본들은 손수 베꼈다. 그는 그리스에서 보내온 [호메로스] 한 권을 자랑으로 삼았고, 그것을 보내 준 사람에게 에우리피데스의 필사본도 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 필사본을 휴대용 참고서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이 책의 표지 안쪽에 친구들의 경력을 적어 놓았다. 중세는 많은 이교의 고전 작품을 보존하고 중세 학자들 일부는 이 작품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는 이 작품들을 보면서 숨낳은 걸작들이 잊히거나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걸작품들 되찾는 일이 그의 정열이 되었다. 르낭은 그를 가리켜 "라틴 서방에 고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도입한 첫 번째 현대인"이라고 불렀다.

è 그래서 르네상스의 아버지. 과거를 익히고 재발견하는 것이 창조의 시작인가보다.

 

56 단테가 죽었을 때 페트라르카는 이미 열일곱 살이었지만 그들의 감정에는 거대한 차이가 나타난다. 일반적인 동의에 따르면 페트라르카는 최초의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이 지상의 삶에 관심을 가질 권리를 명백하게 묘사한 최초의 작가이며, 또한 지상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증가시켰고, 부유함을 얻기 위해 노동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르네상스의 아버지였다.

è 인문주의자란, 지상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자들인가? 천상의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신학이라고 한다면즉 단테는 보다 신학적인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è 같은 페이지 : 우리 관심의 초점을 초자연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으로 대체했던 현대성에 대한 정의

è ,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대조에서 르네상스가 시작한다.

 

è 휴머니즘

http://jayou.ne.kr/bbs/bbs.htm?dbname=B0392&mode=read&premode=list&page=1&ftype=&fval=&backdepth=&seq=12&num=15

원래 모든 인간적인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세 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려는 입장을 뜻한다. 넓은 의미에서 휴머니즘은 이러한 인간성 존중의 태도를 포함하는 것을 모두 가르킨다.

좁은의미로는 14세기말 이탈리아에서 기원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확산된 이래 근대문화의 요소들 중 하나를 형성한 철학 및 문화 운동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의 휴머니즘은 인류역사에 있어 사회와 국가 조직 및 학문과 문화가 성립되어 있던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 및 사회의 여러 제도들이 형성되면 지배와 피지배, 객관적 제도와 개인적 욕구 사이에는 괴리와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인간성에 대한 왜곡과 억압에 저항하는 흐름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 시대의 인간성 존중, 인간해방의 사상은 그 시대의 인간성의 완성과 인간적 교양의 원동력으로서 작용했다. 그러한 사례들은 그리스인들의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등의 종교문화, 인도에서의 힌두교·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의 탄생, 중국의 유교문화 및 로마의 정치·법률과 관련된 실용적 문화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좁은 의미의 휴머니즘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수사학·웅변술·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세를 지나면서 상실했던 자유의 정신의 재생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인간이 합리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었으며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과 역사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것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운동은 앞서 언급한 대로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데, 단테·페트라르카·보카치오 등이 대표적인 선구자들이다. 이들을 선두로 하여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상공업의 발달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에 부와 권력이 집중됨에 따라 봉건사회의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정신문화면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어 사상의 혁신에 대한 요구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는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르네상스 운동의 전개를 촉진했다. 그는 과거와 단절하고, 철학의 1차적 목표로서 자기 지식을 해명함으로써 유럽의 소크라테스적 전통을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영향력은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보카치오, 콜루치오 살루타티의 저작 속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보카치오는 토속어를 가지고 최초로 서사시를 썼으며,데카메론 이라는 유명한 저작을 남겼다. 당시의 인본사상가들은 낡은 내세주의적 세계관에 맞서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옹호했으며,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적 교리와 규범으로부터 사회도덕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운동은 15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가져왔으며,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을 배출해냈다.

 

2.나폴리와 보카치오

 

57 나폴리에서 삶은 즐겁고 도덕은 편안하게 느슨했다. 여자들은 아름답고 접근이 쉬웠다. 시인들은 이런 사랑의 분위기에서 시를 위한 많은 주제와 자극을 찾아냈다. 이런 나폴리에서 보카치오는 성숙했다.

è 좋겠다.

 

58 페트라르카가 법을 싫어했듯이 그(보카치오)는 상업을 싫어했다. 빈곤과 시를 선택하면서 오비디우스에게 마음을 뺏겨 버렸다.

è 빈곤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수단을 일부러 선택하지 않았다. 빈곤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개념은 정말 매력적이다.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 삶을 돈에 묶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3. 계관 시인

 

62 페트라르카 - 말년에 그는 젊어 한때 치장과 의상에 그토록 신경 쓰고, 머리를 곱슬거리게 만들고 유행하는 신발에 발을 억지로 밀어 넣었던 일을 자조했다. … 명성을 갈망하고 문학적 '불멸'을 원했다. … 그는 (비록 부인하기는 하지만) 단테의 인기를 보고 어느 정도 속을 태웠다.

 

64 에피쿠로스의 이름이 무신론자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던 시대에 에피쿠로스를 찬양한다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64 이따금 그는 데카르트 방식의 의심을 가진 회의론자처럼 말했다ㅣ "나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면서 의심 자체를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 의심이 신성 모독이 되는 것들을 빼고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는 극히 진지하게 이렇듯 의심에서 제외된 것들을 인정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표현하지 않았다. 이단자가 되기에 그는 너무나도 천재적이고 편안함을 좋아했다.

è 신자로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정신적 안락함을 외면할 이유는 없다.

 

66교황당인 카풀레티 가문과 황제당원인 몬테키 가문은 뒷날 셰익스피어늬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캐풀렛과 몬터규 가문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서로 싸움을 계속했다.

 

4.리엔쪼의 혁명

 

67 리엔쪼는 로마의 끔찍한 상황에 대해 교황에게 호소하고, 수도를 지배하면서 서로 싸우고 약탈하는 귀족들에 맞설 수 있도록 교황이 로마 인민을 후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 이렌쪼는 페트라르카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유적과 고전에 의해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 귀족들은 비웃으며 리엔쪼를 저녁 식탁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아. 리엔쪼는 혁명이 일어나면 귀족들 중 일부를 골라 교수형에 처하겠노라고 공언했다. 귀족들로서는 놀라 자빠질 일이었지만 혁명은 결국 일어났다. 13475 20일에 로마 사람 패거리가 카피톨리니 언덕으로 모여들엄ㅅ다. 리엔쪼는 교황의 대리인 오르비에토 주교의 호위를 받으며 민중의 맨 앞에 섰다. 그는 공화국이 회복되었다고 선포하고 구호품을 배급하겠노라고 말했다. 민중은 그를 독재관으로 선출하고 나중의 회의에서 그에게 옛날 인 기 있던 직책인 호민관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è 문학에 페트라르카가 있었다면 정치에는 리엔쪼가 있었다 .고전의 회귀.

 

68 새로운 법정들이 치우침 없는 엄격함으로 정의를 다루었다. … 50년 동안이나 노상강도가 판을 치던 로마에 돌연 안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69 리엔쪼의 이 고귀한 꿈의 붕괴 과정은 놀랍고도 두령누 것이었다. 자유가 그렇듯이 권력도 오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다. 리엔쪼는 현실정치가가 되기에는 웅변가로서 지나치게 위대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위대한 문구, 약속, 주장들을 스스로 믿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의해 중독되었다.

è , 스스로도 믿을만큼 웅변을 잘했다. 비꼬는 말.

 

71 리앤쪼가 아비뇽으로 호송되는 도중 어디서나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려고 떼로 몰려들었다. 용감한 기사들은 그를 보호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1352 8 10일에 그는 모든 사람이 불쌍히 여길만큼 비참한 몰골로 아비뇽에 도착했다. 그는 보클뤼즈에 있던 페트라르카를 청했다. 시인은 로마 사람들을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했던 사람을 보호하라는 낭랑한 호소문을 쓰는 것으로 답했다.

 

…. 그는 자유를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옹호한 탓으로 고발당했다. 그는 수도를 넘겨준 것이 아니라 지킨 탓으로 유죄이다. 그가 지금 고발당하여 교수대에서 속죄를 해야 할 최고의 범죄란, 로마 제국이 아직 로마에, 그것도 로마 시민들의 소유로 남아 있다고 감히 선언했다는 사실 뿐이다.

 

è 정치범의 탄압에 대한 시민의 투쟁. 르네상스 시대의 예. 리앤쪼와 페트라르카.

 

73 그러나 감옥 생활이 몸을 살찌게 하고 용기는 개뜨리고 한때 빛나고 겁 없던 호민관의 정신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의 정책들은 교황당 노선을 고집하고 젊은 시절의 대담한 용기는 없어졌다. 귀족들은 아직도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재산이 없는 계층은 그가 이제 유토피아에서 치유된 조심스러운 보수주의자인 것을 알자 그에게 등을 돌렸다 권력에 돌아온 지 겨우 두 달 만에 혁명적인 폭도들이 카피톨리니 언덕으로 몰려들어 외쳤다. "인민 만세! 배신자 콜라 디 리엔쪼를 죽여라!"

 

5. 떠돌이 학자

 

74 리엔쪼는 고대 로마를 부활시키는 데 실패했다. 고대 로마는 문학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죽었다. 페트라르카는 결코 죽지 않은 로마 문학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76 페트라르카는 자신보다 이전의 인문주의자였던 알베르티노 무싸토가 세네카 형식을 빌린 라틴어 희곡 [에쩰리노 이야기]를 슨 덕분에 1314년 파도바의 계관 시인이 된 것을 보고 분명 자극을 받았다.

 

페트라르카는 파도바 대학의 교수들 중 일부가 솔직하게 '아베로에스주의'를 펼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베로에스는 개인 영혼의 불멸성에 의문을 던지고, 그리스도교를 쓸모 있는 미신으로 여기고 교육받은 사람은 그것을 버린다고 말했다.

 

6. 죠토

 

78 페트라르카가 14세기 시문학을 지배했듯이 죠토 디 본도네는 14세기 회화를 지배했다.

 

79 니콜로 피사노의 자연주의적인 조각이 그의 눈길을 선배들의 작품으로부터 살아 있는 존재들, 살아 있는 남자와 여자의 감정으로 돌리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죠토가 나타나 자기가 본 것을 그렸다."라고 말했다.

 

79 파도바로 옮긴 죠토는 3년 동안 아레나 예배당의 유명한 벽화를 그렸다. 아마도 파도바에서 그는 단테를 만났을 것이다. 이미 피렌쩨에서 그를 알았던 것 같다. 항상 재미있고 이따금 날카로운 바사리는 단테가 죠토의 "가까운 동료이며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피렌쩨의 행정관 궁전 벽화에 있는 단테의 초상화를 죠토가 그렸다고 말한다. 시인은 [신곡]에서 예외적인 상냥함으로 이 화가를 찬양하고 있다.

 

80 치마부에와 죠토의 것으로 알려진 그림들을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는 성인을 기리거나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만큼이나 많다.

 

80 죠토의 도안, 입체감, 원근법, 해부학 지식 등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적절하지 못하다. 죠토 시대 의학이 그렇듯이 미술은 막 인체를 해부하고 근육, , 인대, 신경의 위치, 구조, 기능 등을 배우기 시작하던 때였다. 만테냐와 마사쵸 같은 사람들은 이런 요소들의 대가가 되고, 미켈란 젤로는 그것을 완성해서 거의 맹목적 숭배물로 만들다시피 했다.

 

81 그렇다면 파도바와 아씨시에 있는 죠토의 작품이 미술사의 한 경계표가 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눈길을 모든 각도에서 관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리듬 있는 구성이다. 그리고 조용한 움직임의 품위이며, 부드럽고 빛나는 색채와 탁월한 이야기 서술의 흐름, 깊은 감정조차도 표현이 절제된 것, 그리고 시끄러운 장면들을 감싸고 있는 장엄한 고요함이다. 이따금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사실적인 초상화는 과거의 미술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동작에서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들이 비잔틴 미술의 경직됨과 어둠을 누르고 죠토가 승리한 요소들이다. 그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백 년 뒤 피렌쩨 미술은 그의 모범과 영감을 이어받았다.

 

82 기법의 발전은 오르카냐(Orcagna)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14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 중에서 죠토에 뒤이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안든레아 디 치오네(Andrea di Cione)였지만 그를 숭배하는 동시대 사람들이 그를 아르카뇰로(Arcagnolo, 대천사)라고 불렀고, 게으른 혀는 그것을 줄여 오르카냐라고 불렀다. … 화가로서 그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부속 스트로찌 예배당에 채색 제단화인 [옥좌에 앉은 그리스도]를 제작했다.

 

83 이탈리아 사람들은 14세기를 300을 의미하는 트레첸토라고 부른다. 15세기는 400을 의미하는 콰트로첸토, 16세기는 500을 의미하는 친쿠에첸토 등등으로 부른다.

 

7. 열흘 이야기 (데카메론)

 

84 이탈리나 문학이 최초의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룩한 곳은 피렌쩨였다. 그곳에서 귀니첼리와 카발칸티가 13세 말에 소네트의 완성된 형태를 만들었다. 그곳은 아니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단테는 이탈리아 서사 문학의 최초이자 최후의 진정한 음악을 피렌쩨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보카치오는 이탈리아 산문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고, 죠반니 빌라니는 가장 현대적인 중세 연대기를 썼다.

 

86 양심이 그녀(심리 소설인 [피암메타]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공주)가 정절을 지키지 않았음을 구짖자 그녀는 아프로디테 여신이 나타나 자신을 비겁하다고 야단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렇게 겁먹지 마라. '나는 남편이 있는데, 거룩한 하늘의 법 앞에 약속한 것이 내게 이런 일들을 금지하고 있는데…..'하고 말하지 마라. 이런 것은 공허하게 뽐내는 일이며 에로스의 힘에 맞서 천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하고 힘찬 왕자처럼 에로스는 자신의 영원한 법을 심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왕국의 다른 법에 대해 신경 쓰지 마라, 그는 그런 법들을 기본적이고 노예적인 규칙이라 여긴다."

 

1348년 흑사병이 돌기 시작한 직후 보카치오는 이 유명하고 매혹적인 연속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서른다섯 살이었다. 욕망의 열기는 시에서 산문으로 넘어갔다. 그는 미칠 듯이 사랑에 빠지는 일을 유머를 지니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피암메타도 흑사병으로 죽었다. 보카치오는 천연덕스럽게도 공을 가장 적게 들인 이야기 하나에 그 이름을 이용했다.

è 보카치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독특하다.

è 흑사병으로 생사가 오고 가는 상황에서 사랑은 유머가 되나? 이건 초월적 관점인가?

è 죽음이 닥치면 생을 확인하기 위해서 섹스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아내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남편, 산장에서 시체를 발견한 두 남녀가 시체 옆에서 섹스를 하는 영화, 그리고 흑사병이 도는 피렌체에서 데카메론을 쓰는 보카치오. 보카치오는 생의 확인을 위해 성적 표현에 탐닉했던 것일까? 아니면 죽음 앞에서 거칠 것 없어진 의지는 자연히 성으로 귀결되는가? 모든 억압을 뚫고? 마지막에는 성인가?

 

87 흑사병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폐를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고열에 시달리다가 피를 토하고 보통 사흘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는 임파선을 통한 전염으로 열이 나고 종기와 등창이 일어났다가 보통 닷새 만에 죽었다. 이 질병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면서 1348년에서 1365년 사이에 이탈리아 인구의 절반 가량이 죽었다. 시에나의 연대기 기록자는 1354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친척도 친구도 수도사도 수도원장도 시체를 따라 묘지로 가지 않으며 관청도 죽은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다. …… 도시의 많은 곳에 매우 넓고 깊은 구덩이를 파 이곳에 시체들을 던져 넣고 흙을 조금 덮었다. 구덩이가 가득 메워질 때까지 이렇게 켜를 이루며 계속 되었다. 그러고 나면 또 다른 구덩이를 팠다. 나 이뇰로 디 투라는 …… 내 손으로 다섯 아이를 한 구덩이에 파묻었다. 시체들은 하도 얕게 덮여서 개들이 파내 시체를 먹고 도시 사방으로 시체의 팔다리를 흩어 버렸다. 벨도 울리지 않고 아무도 그 무엇을 잃어도 울지 않았다. 거의 누구나 다 죽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이것은 세계의 종말"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믿었다.

 

93 [열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그런 명성을 얻은 것은 기법보다 오히려 그 도덕성에 힘입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덕성이 완전히 순결한 것이었다 해도 분명 보존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구성이 완벽하다. … 이 작품의 산문은 이탈리아 문학이 다시는 능가하지 못한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이따금 미사여구를 포함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자리에서 능변이고 생생하고 예리하며 생명에 넘치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처럼 맑다. 이것은 삶에의 사랑에서 나온 책이다. 천 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생긴 최악의 재앙 속에서 보카치오는 그 생명력으로 아름다움, 유머, 선량함, 즐거움 등이 아직도 지상을 산책하고 있음을 볼 용기를 찾아냈다. 한스 작스, 레싱, 몰리엘, 라퐁텐, 초서, 셰익스피어 등은 이 책을 읽고 경탄했다. 페트라르카 시문학 전부가 찬양받으면서 읽히지 않는 구역으로 들어간 데 반해 이 작품은 앞으로도 여전히 읽힐 것이다.

è 그 차이는 삶에의 사랑.***************

나도 삶에의 사랑으로 충만한 글을 쓰자.

 

8.시에나

 

96 [죽음의 승리]

잘 차려 입은 귀족들과 귀부인들로 이루어진 사냥 일행이 세 개의 열린 관에 이른다. 관 안에는 왕족의 시체가 썩어 가고 있다. 사냥꾼 한 명은 이 냄새에 질려 코를 막고 있다. 이 장면 위로 커다란 낫을 휘두르며 죽음의 천사가 날아간다. 공중에서는 은총의 천사들이 구원받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데려가고, 그 사이에 날개 달린 악령들이 죽은 사람 대부분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뱀들과 검은 수리들이 남자와 여자들의 벌거벗은 신체를 감고 그것을 먹고 있다. 아래쪽에서는 왕들과 여왕들, 왕자들, 주교들, 추기경들이 저주받은 자들의 구덩이 안에서 몸부림 친다. 이웃한 벽에는 동일한 화가들이 또 다른 거대한 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그려 놓았다. 오른편에는 또다른 지옥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중세 신학의 온갖 끔찍함이 여기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단테의 [지옥]이 여기서 동정심도 절제도 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96 시에나는 중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에나와 구비오, 산 지미냐노, 시칠리아 등의 지역들은 르네상스를 견디고 살아남앗다. 그들은 한번도 죽지 않고 끈질기고 미묘하게 자기들의 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9. 밀라노

 

99 결혼식 잔치의 남은 음식으로 1만 명의 남자를 먹일 수 있었다고 한다. 14세기 이탈리아는 이토록 부유했다. 같은 시기에 백 년 전쟁을 벌였던 영국은 파산 상태에 이르고, 프랑스는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을 때였다.

è 백년전쟁(위키페디아) 1337~1453

백년 전쟁(百年戰爭)은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서, 프랑스를 전장으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계속되었다. 명분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고, 실제 원인은 영토 문제였다. 백년 전쟁은 1360년의 브레티니-칼레 조약의 체결까지를 제1, 1415년의 아쟁쿠르 전투 또는 1420년의 트루아 조약의 전과 후를 제2·3기로 나눈다.

 

10. 베네찌아와 제노바

 

100 1339년에 시모네 보카네라는 선원들과 다른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혁명에 성공하고 제노바 총독이 되었다. 이런 총독 통치 방식은 제노바에서 1797년까지 계속되었다. 베르디는 한 오페라에서 이것을 기념했다.

è 베르디 오페라 <시몬 보카네라> http://m.asiae.co.kr/view.htm?no=2011041509031417444

'시몬 보카네그라' '아이다'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등으로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의 정점을 찍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Fortuino Francesco Verdi, 1813~1901)가 작곡한 작품이다. 한국의 오페라 무대가 아주 유명한 레파토리를 반복적으로 올리는 것과는 달리 국립오페라단이 준비한 '시몬 보카네그라'는 지난 2001년 단 한번 국내에서 상연되었을 뿐인 낯선 제목의 오페라로, 한국의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지휘를 맡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명훈에게 '시몬 보카네그라'는 유독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1986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정명훈이 오페라 무대 지휘자로 데뷔한 작품이 바로 '시몬 보카네그라'이기 때문이다. 감미로운 선율과 감각적인 노랫말,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로 유명한 베르디의 작품을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휘자 정명훈이 지휘하고, 고성현, 한명원, 강경해 등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이 모두 모였다면,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오페라 공포증'을 게워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1857,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된 '시몬 보카네그라' 14세기 평민 출신으로는 최초로 지중해의 해상권을 독점한 제노바 왕국의 총독 자리에 오른 실존 인물 '코르사로 보카네라'의 극적인 삶을 오페라로 옮긴 작품이다. 시대를 앞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던 보카네라처럼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역시 여러 면에서 시대를 앞섰다. 프롤로그(서막) 포함 총 4막으로 구성된 '시몬 보카네그라'는 미성의 소프라노와 테너가 아닌, 저음의 바리톤과 베이스로 구성된 네 명의 남자들이 등장, 오페라 역사상 가장 어두운 무대의 프롤로그를 연출한다. 19세기 당시 오페라의 주류 트렌드와는 확실히 차별되는 점이다. 음침하다 못해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네 남자의 저음 하모니로 한 남자의 장대한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평민파의 정치가 파올로와 피에트로의 추대로 해적에서 총독 자리로 급상승하는 시몬 보카네그라의 프롤로그로 운을 뗀 '시몬 보카네그라'는 이후 25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숨가쁘게 3막까지 달려간다. 보카네그라를 둘러싼 다양한 선, 악의 캐릭터들이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고, 보카네그라의 여러 전사(前史)들은 그의 삶을 한층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사랑과 이별, 배신과 갈등, 승리와 패배 등 낭만파 오페라의 '디폴트' 요소들 역시 '시몬 보카네그라'에서 빠지지 않는다. 무대 상단에 위치한 자막기에서 쏟아내는 자막의 속도가 다소 빠르기는 하지만 충실한 고증과 현대화 작업을 거친 탓에, 원작과 실존 인물, 클래시컬 음악의 기초 지식이 없어도 내러티브를 따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물론 여기엔 베르디 특유의 아름답고 감상적인 음악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굳이 언어의 미묘한 라임을 몰라도 문제 없다. '아이다'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해 여러 불멸의 오페라 명곡들을 창조해낸 베르디답게 '시몬 보카네그라'의 노래들 역시 섬세함과 장엄함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관객들을 매혹시킨다. 또한 무대 상단에서 내려 쬐는 핀 조명 대신 무대 측면과 후면의 빛 조명을 통해 극의 강약을 조절하며, 미니멀하게 창조된 구조물은 효과적으로 14세기 이태리의 분위기를 상징화한다. 정명훈의 적당히 '쇼맨십'이 가미된 지휘, 엄청난 성량과 곡 이해력으로 화답하는 성악가들의 훌륭한 연기와 노래는 극을 클라이맥스로 올려놓는다. 마침내 보카네그라가 모든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장대한 최후를 맞는 엔딩 장면에 오면 관객 모두 그의 입장이 되어 함께 울고 함께 웃는다. 한방 맞았다. 지독히 진부한 말이지만, 음악이 '만국 공통어'였다는 진실을 퍼뜩 되새겼다.

 

11. 14세기(트레첸토)의 황혼

 

105 보카치오는 젊은 날 [열흘 이야기]나 그 밖의 감각적인 시들을 썼던 것을 후회했다. 1361년에 죽어 가는 수도사 한 사람이 그에게 악한 삶과 쾌락적인 이야기들을 쓴 것을 책망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그가 고치기를 미루면 빠른 죽음과 지옥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을 맛볼 것이라고 예언했다.  …… 그는 이제 정통 그리스도교로 마음을 돌리고 책을 팔아 버리고 수도사가 될 생각을 했다. 페트라르카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중용의 길을 선택하라고 간청했다. 사랑의 시들과 단편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라틴과 그리스 고전을 진지하게 탐구하라고 권한 것이다.

è 권위자의 충고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응당 옳은 것이라고 여길만한 조언 역시 고차원의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충고일 수 있다. 페트라르카의 말을 들은 것은 실수였다.

 

107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기를 바란다. 글을 스고 있을 대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다면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에 젖어 있을 때 말이다." 일흔 살 생일인 1374 7 20일에 그는 책에 기댄 모습으로, 분명히 잠들었다가 죽엇다. 그는 유언장에서 긴 겨울밤에 추위를 막아 줄 외투를 살 돈 50플로린을 보카치오에게 남겼다. 1375 12 21일에 보카치오도 죽었다. 향년 예순한 살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앞으로 50년 동안의 휴경 기간을 보내고 나서야 이 남자들이 심은 씨앗이 꽃을 피우게 된다.

è 베르길리우스의 시집을 베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è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가?

è 두산대백과사전

보카치오 (Boccaccio, Giovanni ; 1313~1375.12.21)

 

 이탈리아의 소설가로서 파리 출생이다. 단테의 《신곡(神曲)》에 대해인곡(人曲)’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단편소설집 《데카메론》을 지어 근대소설의 선구자로 칭송된다. 사생아로 태어났는데 피렌체 상인이었던 아버지 보카치오 디 켈리노(보카치노라고 함)가 파리에 있을 때 어느 공주와 사랑을 맺어 생긴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또 그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엄한 계모를 피하여 나폴리에 왔다가 로베르토왕의 서출(庶出)인 마리아(그의 작품에서는 피아메타라고 부른다)와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위하여 소설가가 되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전하지만, 지금은 이 이야기가 모두 부정되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 스승의 영향으로 단테의 위대함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평생토록 단테를 존경하였는데, 후에 《단테전() Vita di Dante(1364)을 집필한 일과 만년에 피렌체의 교회에서 《신곡》 강의를 한 사실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문학자로서의 천재성이 성숙되어 《데카메론》의 전제가 되는 작품을 쓰고, 또 《데카메론》의 내용이 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업을 익히려고 간(1325∼1328) 활기찬 항구도시 나폴리에서, 그리고 근무처인 바르디은행의 융자로 번영하고 있던 안주 왕가(王家)의 로베르토왕의 궁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리에서 화려하고 방종한 향락생활도 직접 경험하였으나 1340년에 바르디은행이 파산하자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상인도 못되고 문학자도 못된 초조감 때문에 생애의 중도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1348년 페스트가 피렌체에 퍼지자, 많은 주민들이 죽어갔다. 서화(序話)에서 이를 상세히 그린 그의 대표작 《데카메론》은 이 해부터 1353년까지에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전기(前期) 인문주의기() 문단의 냉담한 평가를 받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일반 민중으로부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바르디은행의 지점을 통하여, 외국에까지 퍼져나갔고 서민들 사이에 급속히 보급되어 거리에는 변사들이 그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정도가 되었다. 인쇄술도 없었고, 종이도 귀한 시대에 설화 형식의 단편문학이 퍼진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이탈리아어는 이른바 보카치오식 산문이라는 것으로서, 오래도록 산문의 본이 되었다. 그의 재능과 학식 ·웅변은 피렌체 시민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시정부는 그를 사절로 삼아 각지에 파견하였다.

인문주의자로서의 보카치오의 활동에는, 1350년에 밀라노에서 만난 페트라르카(1304∼1374)의 영향이 크다. 또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가 신앙적인 위로를 구하였을 때, 맹신(盲信)에 흐르는 것을 막아 주었으며, 수도사 차니의 협박으로 그의 모든 산문작품을 태워버리려고 하자 현명한 충고로 이를 저지하였다. 1373년 피렌체에서 《신곡》을 강의하였으나, 병 때문에 몇 달 후에 중단하고, 첼타르도에 은퇴하여 사망하였으며 산티미켈레에자코포 교회에 묻혔다. 작품으로는 《데카메론》과 초기의 연애소설 《필로콜로》 《피아메타》, 여성을 비난한 《코르바치오》, 운문소설 《필로스트라토》 《피에졸레의 요정》, 라틴어 논문 《이교(異敎) 신들의 계보》 등이 있다.

 

 

 

12. 조망

 

108 게르만 종족의 침입으로 중앙 정부가 붕괴된 일, 6세기의 이른바 '고딕 전쟁', 이탈리아 대륙에서 룸바르디아와 비잔틴으로 나뉜 것, 교황과 황제의 대립, 그리고 알프스에서 시칠리아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세속적 권력이 나타나 교황을 포로로 만들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교황의 두려움, 즉 유럽의 영적 수뇌가 한 국가의 정치 지도자에게 복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져 이탈리아의 비통일을 만들어 냈다. 교황과 황제파는 이탈리아 전체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도시를 교호아당과 황제당으로 갈라놓았다. 이 갈등이 가라앉았을 때도 이 낡은 표현법은 새로운 갈등과 대립을 위해 이용되었으며, 미움의 용암이 삶의 모든 길로 넘쳐흘렀다. 황제당원들이 모자의 한편에 깃털을 꽂으면, 교황당원들은 다른 편에 깃털ㅇ르 꽂았다. 황제당원이 과일을 가로로 자르면 교황당원들은 세로로 잘랐다. 황제당원들이 흰 장미를 달면 교황당원들은 붉은 장미를 달았다. 크레마에서 밀라노의 황제당원들은 교회 제단에서 그리스도 조각상을 부수어 불태웠다. 이 조각상의 얼굴이 교황당원 방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당인 베르가모에서 몇몇 칼라브리아 사람들이 주막집 주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들이 마늘을 먹는 방식으로 교황당원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소심한 허약함, 집단의 불안정, 지배층의 미망 등이 다른 것과 낯선 것에 대한 항구적인 두려움, 의심, 혐오, 저주 등을 만들어 냈다.

è 마늘 먹는 방식에 대한 서술에 사용 가능.

è 미신적인 증오의 대립 구도. 늘 끊이질 않는다.

 

통일을 방해하는 이런 요소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들의 도시 입장에서 생각을 했다. 마키아벨리 같은 소수의 철학자나 페트라르카 같은 시인만이 이탈리아를 하나의 전체로 생각할 줄 알았다.

 

110 페트라르카가 성공했다면 아마도 르네상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분열이 르네상스에는 이로웠다. 큰 국가들은 자유와 예술보다는 질서와 권력을 키운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사업적 경쟁은 십자군 전쟁을 도입하고 완성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경제와 복지를 발전시켰다. 정치적 중심부가 여럿이기에 도시 국가간 싸움이 많았지만 이런 온건한 갈등은 백 년 전쟁에 의해 프랑스에 생겨난 것 같은 완전한 죽음과 파괴에는 이른 적이 없었다. 각 지역의 독립은 이탈리아가 외국의 침입에 대해 방어할 능력을 약화시켰지만, 도시들과 통치자들이 문화적 후원을 놓고 고귀한 경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건축, 조각, 회화, 교육, 학문, 시문학 등에서 서로를 능가하려는 열성을 지녔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는 괴테 시대 도이칠란트처럼 수많은 파리(Paris)가 있었다.

è 중국이 정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성장률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경제 시장에서 무한 경쟁을 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개방해서 경쟁사를 무한 경쟁 시키는 것.

 

111 그러나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탈리아의 절정을 위해 고대가 기여한 바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일은 잘못일 것이다. 르네상스는 혁명이기보다는 완성이었고, 중세의 성숙이 고대 사본과 예술의 발견보다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중세의 많은 학자들이 세속적인 고적 작품들을 알았고 사랑했다.

 

112 이렇게 해서 르네승사의 모든 기반은 페트라르카가 사망할 무렵에는 이미 오나비되었다. 이탈리아 무역과 산업의 경이로운 성장과 열성은 르네상스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부를 모아들였다.

 

2장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è 아비뇽은 프랑스에 위치

 

1. 바빌론 포로

 

115 1309년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겼다.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고 전직 보르도 주교로 프랑스의 필립 4세 덕분에 교황에 선출된 사람이었다. 필립 4세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을 분만 아니라 그를 체포하여 굴욕을 주고 거의 굶어 죽게 만들어서 그리스도교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클레멘스 5세의 삶은 로마에서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è 교황에는 어떻게 선출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교황이 될 수 있나?

 

122 "내가 교황청의 교회 기구들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중개자와 서기들이 자기들 앞에 쌓아 놓은 돈의 무게를 달고 그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늑대들이 교회의 통제 아래서 그리스도교 양 떼의 피를 마시고 있다."

 

124 페트라르카는 교황들에게 로마로 돌아갈 것을 그토록 간청했지만, 빈곤이 순결에 도움을 주었던 경우만 빼고는 로마의 도덕성도 아비뇽의 그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è 표현이 특이하다.

 

126 종교 개혁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바로 아비뇽 교황들의 바빌론 포로 시대와 뒤이어 나타나는 교황 분열 사건이었다. 그리고 교황청이 이탈리아로 돌아온 일은 교황의 위신을 회복시키고 파국을 100년 연기했다.

 

2. 로마로 가는 길

 

 

129 페루지아에서 교황 대리인의 조카 한 사람이 유부녀에게 지나치게 집착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도망치려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민 대표단이 조카에게 벌을 줄 것을 요구하자 교황 대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체 왜 이런 소동인가? 당신들은 프랑스 사람이 환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그 의미가 대단히 여러 가지로 해석되면서 교황의 사절들이 어찌나 미움을 샀던지 1375년에는 많은 국가에서 그들에 반대하여 연속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131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 당신은 교회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해야 할 일은 교회의 진자 보물인 양 떼를 모두 되찾는 일입니다. 양 떼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정말로 가난해질 것이니까요. …… 당신은 선의와 사랑과 평화의 무기로 사람들을 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전쟁의 무기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회복을 위해, 또 온 세계를 위해 무엇이 가장 좋은지 제가 하느님께 물어보니 오로지 평화! 평화! 라는 답변을 받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를 위해 평화를!

 

134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1347~1380)는 오늘날에도 방문객들이 찾아가 볼 수 있는 평범한 방에서 태어나 살고 죽었다. 지상의 하찮은 곳에서 그녀는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오는 일을 도왔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심을 되살리는 일을 도왔다. 그 신앙심은 르네상스와 뒷날 국가 통일 운동 이후까지도 살아남았다. 열다섯 살 나이에 그녀는 성 도미니크의 '고행 교단'에 합류했다. 이것은 수도사나 수녀가 아닌 '3' 집단이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그대로 세속의 생활을 하면서 가능한 한 종교와 순결의 사업에 자신을 바치는 생활이었다. 카타리나는 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방을 거의 은둔처로 만들고 기도와 신비적 명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교회에 갈 때를 빼고는 거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부모는 딸이 이렇듯 종교에 깊이 몰두하는 것이 두렵고 또 그녀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극히 힘든 집안일을 맡겼으나 그녀는 전혀 불평하지 않고 그 일을 해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예수님을 위한 작은 구석을 따로 떼어 놓았다?"라고 말하면서 어린이와 같은 명랑함을 유지했다. 다른 소녀들 같으면 세속적인 사랑에서 얻으려고 하는 온갖 기쁨, 의심, 황홀경 등을 카타리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에서 구하고 찾아냈다. 고독한 명상이 점차 집중도를 더해 가면서 그녀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애인으로 여기고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 그녀는 주님과 마음을 나누고 환상 속에서 자신이 주님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성 프란체스코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얻은 다섯 군데의 상처에 대해 하도 오래 명상한 나머지 자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서 그 상처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다. 모든 육체의 유혹이란, 악마가 자신의 커지는 사랑을 방해하려는 간계라 여겨 물리쳤다.

è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나오는 알리사와 양태가 비슷하다.

è 여성성을 부정함으로써 여성성에 얽매이게 된다.

è 여성성을 회피할 명분이 있다면 상당히 편한 삶일 것 같기도 하다.

è 현실을 부정하는 신이 도대체 왜 필요하지?

 

135 혼자만의 신앙심으로 3년을 보낸 다음 그녀는 이제 도시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여성성을 그리스도에게 바쳤듯이, 그녀는 모성의 부드러움을 시에나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바쳤다.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 곁에 마지막까지 머물렀고, 사형을 당할 죄수들 곁에서 영적인 위안을 주며 처형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함께했다. 부모가 죽으면서 약간의 재산을 남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녀는 천연두를 앓아서 얼굴을 망가뜨렸지만 그 얼굴은 그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었다.

è 그나마 그녀는 자위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존경할 만하다.

 

135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해악은 인간의 허약함의 결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피렌쩨의 르네상스 1378 - 1534

 

3장 메디치 가문의 떠오름 1378~1464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가오는 이 시대를 '리나시타(la Rinascita)' 곧 재탄생이라 불렀다. 그들에게 이것은 천 년 동안이나 야만적인 중단이 있은 다음 고전 정신이 다시 부활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전 시대가 3,4,5세기에 게르만족과 훈족이 침입하면서 끝났다고 느꼈다. 고트족의 무거운 손길은, 시들어 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로마의 예술과 생명의 꽃을 부수어 버렸다. 위험할 정도로 불안정하고 장식적으로 기묘한 건축물과 조잡하고 거칠면서 게다가 어두운 예언자들과 메마른 성인들을 표현해서 울적한 조각품을 지닌 '고트족의(=고틱=고딕)' 예술이 또 다른 침입을 했다.

 

142 그러나 르네상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대의 재탄생 이상의 일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돈, 악취를 풍기느 부르주아의 돈이 필요했다. 능숙한 경영과 싸구려 노동력이 만들어 낸 이윤. 동쪽으로의 모험적인 여행과 알프스 산을 넘는 험한 여행 끝에 물건을 싸게 사다가 비싸게 팔아서 남긴 이윤. 조심슭러운 계산, 투자, 대출 등으로 만든 이윤. 이자와 배당금이 쌓여 만든 돈. 그래서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관직과 애인을 사고도 돈이 넉넉하게 남아돌게 되어서야 비로소 미켈란젤로나 티찌아노 같은 사람의 힘을 빌려 부를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예술의 숨결로 행운을 향기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142 돈은 문명의 뿌리이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기금과 교회의 기금이 필사본들을 사들일 돈을 지불했고, 이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중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리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교회의 교리를 의심하고 지옥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여자와 남자, 예술에 드러난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 (1434~1543) 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파괴적인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계율,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146 1300년에 페데리고 오리첼라리는 이끼에서 자주색 염료를 추출하는 비밀을 동양에서 가져온 덕분에 이런 성을 얻었다.(오르첼라 = 자주색 염료). 이 기술은 염색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고, 일부 모직 제조업자들을 오늘날 용어로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3. "조국의 아버지" 코시모

 

150 메디치 집안은 코시모의 고조할아버지인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가 대담한 상업과 현명한 재정 운영을 통해 집안의 재산을 모았고, 1314년에 정의의 수호자로 뽑혔다. 아베라르도의 조카손자인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는 1378년에 정의의 수호자였는데, 폭동을 일으킨 가난한 사람들의 생각을 옹호해서 가문의 인기에 토대를 마련했다. 살베스트로의 조카손자인 죠만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1421년에 정의의 수호자였는데, 1년 세금으로 소득 1퍼센트의 2분의 1을 징수할 것을 옹호함으로써 (그 자신은 그로 인해 심한 손실을 입을 것에도 불구하고 ) 집안의 인기를 더욱 높였다. 이것은 한 사람이 지닌 자본금의 7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이전에는 인두세를 매겼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과 똑 같은 액수의 세금만 내던 부자들은 메디치 집안에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152 코시모는 이따금 폭력을 가미한 영리한 온건함으로 권력을 사용했다. 자신의 친구들이 발다치오 단기아리가 코시모의 권력을 끝장내기 위해 음모를 구민다는 의심을 품고, 그를 아주 높은 창문에서 떨어뜨려 죽게 만들었을 때 코시모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경구들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국가는 주기도문으로 통치되지 않는다."

 

153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가 그에게 상당한 액수의 대부를 요청했을 때 코시모는 에드워드 34세가 돈을 갚지 않을 것을 개의치 않고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왕은 화폐와 정치적 후원으로 그의 너그러움에 보답했다.

 

154 코시모가 부와 권력에 못지않게 문학, 학문, 철학, 예술 등을 보살핀 일은 이탈리아와 인류에 커다란 행운이었다.

 

4. 인문주의자들

156 메디치 통치 아래서, 혹은 그들의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이 이탈리아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이것은 종교에서 철학으로, 천국에서 지상으로 관심을 돌린 일이며, 깜작 놀라는 한 세대에게 세속적 사유와 예술의 풍부함을 보여 준 일이엇다. 일찍이 아리오스토는 학문에 미친 이런 남자들을 '우마니스티(인문주의자들)'라고 불렀다.

 

159 그러나 이탈리아가 점점 더 자신의 고전 전통을 회복하면서 고대 로마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그리스에 대한 경탄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라틴어를 살아있는 문학의 매체로 되살려냈다. … 그러나 그들은 [신곡] [노래 책[의 언어를 타락하고 망가진 라틴어라(거의 맞는 말이긴 하다) 여기고 단테가 이탈리아어를 선택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 결과 인문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문학의 원천과의 접촉을 잃었다.

è 예전에 이만방 선생님이 모차르트 역시 세속의 음악을 했기 때문에 당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는 의미의 강연을 했었는데 그 내용과 상통한다.

 

161 인문주의 운동은 이탈리아 전 지역으로 퍼졌다. 그러나 피렌쩨의 메디치 사람 하나가 교황이 되기 전에는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거의 피렌쩨 시민이나 아니면 그곳의 졸업생들이었다.

 

162 그는 자신의 책들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했고, 피렌쩨 젊은이들에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버리고 문학에 헌신하라고 가르쳤다. 부잣집 젊은이가 게으름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니콜리는 그에게 물었다. "삶에서의 목표가 무엇인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죠."하고 젊은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청춘이 지나고 나면 어떤 결과를 얻을 것 같은가?" 이 청년은 핵심을 파악하고 니콜리의 지도를 받았다.

 

169 위로 뻗어 올라간 아치와 높이 치솟은 둥근 천장을 지닌 고딕 양식은 고통스러운 지상에서부터 위로 치솟아 하늘을 향하는 섬세한 정신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유함과 편안함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했다. 삶에서 도망치거나 그것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지상은 천국이 되고 그들 자신이 신들이 되고 싶었다.

 

171 미켈란젤로가 백 년 뒤에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둥근 지붕을 계획했을 때 그는 브루넬레스코의 지붕을 능가할 기회를 갖데 되었다는 말을 듣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자매 지붕을 만들 것이다. 더 크지만 그러나 더 아름답지는 않다." 피렌쩨 성당의 당당한 둥근 지붕은 지금도 사방에 연합군을 거느린 것처럼 붉은 지붕 피렌쩨의 파노라마를 지배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토스카나 지방의 언덕들이 줄을 이은 한가운데에 장미꽃밭처럼 자리 잡고 있다.

브루넬레스코는 판테온에서 이 구상을 얻어오기는 했지만 자신의 둥근 지붕을 고딕 양식의 뾰쪽한 아치 선과 어울리게 만들어서 피렌쩨 대성당의 토스카나 고딕 양식과 우아하게 타협했다.

 

175 당신은 무한을 얻기 위해 애쓰고 나는 유한한 것을 위해 애쓴다. 당신은 당신의 사다리를 공중에 세우려 하고 나는 내 사다리를 지상에 세운다. …… 나로서는 내 집안의 명예와 명성이 당신 집안의 그것을 능가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마리의 커다란 개처럼 행동하기로 하자. 서로 만나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제각기 이빨을 드러내 보이고는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에 열중하고 나는 내 일에 열중하는 것이다.

 

178 폭군을 살해하려는 젊은 여인은 옷 주름에 파묻혀 있고, 적절하지 못한 평온함으로 살인을 감행하려 한다.

è 적절하지 못한 평온함.

 

183 루카 델라 로비아는 여든두 살까지 살면서 긴 생애의 세울을 잘 이용했다.ㄴ 그는 테라 코타 작품을 거의 주요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è 보았음

 

184 14세기 아틸리아에서는 회화가 조각을 지배했다. 15세기에는 조각이 회화를 지배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다시 주도권을 차지한다. 아마도 죠토의 천재성이 14세기에, 도나텔로의 천재성이 15세기에,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와 티찌아노의 천재성이 16세기에 나타난 것이 이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천재는 시대 정신의 원인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188 그의 진자 이름은 토마소 귀디 디 산 죠반니였다. 마사쵸는 '큰 토마소', 마솔리노는 '작은 토마소'라는 뜻이다. 그는 일찍이 붓을 들고서 그림을 시작했는데 어찌나 그리기를 좋아했던 지 그만 다른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의복, 자기 자신, 수입, 빚까지 죄다 잊었다.

 

189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마사쵸는 탁월한 주인인 자연에게서 말고 다른 안내를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소용없는 헛고생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완벽한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192 엘 그레코를 제외하고 어떤 화가도 프라 안젤리코처럼 그렇게 독특한 자기만의 양식을 askask sos 사람은 없다. 풋내기라도 그의 손길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선과 형태의 단순함으 죠토로 되돌아간다. 폭이 좁지만 가벼운 색채 조합(금색, 주홍, 진홍, 파랑, 초록(은 밝은 영혼과 행복한 신앙을 반영한다. 인물들은 거의 해부학적 터치가 없을 정도로 너무 단순하게 표현된다.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고 너무 창백해서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수도사나 천사나 성인이나 모두가 거의 비슷하다. 거의 낙원의 꽃들과 같은 모습이다. 이 모든 모습은 온화한 헌신, 기분과 생각의 순수함을 지닌 이상적인 정신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이러한 이상적 정신은 중세의 가장 섬세한 순간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르네상스에 의해서는 두 번 다시 포착되지 않았다. 이것은 미술에 나타난 중세 정신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194 이 시간 이후로 코시모는 그를 가두었던 일을 후회하면서 그에게 원하는 대로 드나들 자유를 주었다. …… 그의 말대로 천재들이란 하늘의 형식이지 노새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그 이후로 그는 사랑으로 필리포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에게서 더욱 많은 헌신을 얻을 수 있었다.

è 천재를 남자로 바꾸어 보면?

 

195 성적인 문란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어쩌면 바로 여자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 때문인지 필리포의 가장 섬세한 그림들은 성모 그림이다.

 

197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하고, 그런 일에 명예와 실체를 제공할만큼 지혜롭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자극해 주는 주민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보아야 한다.

 

198 금속 인쇄는 피렌쩨의 발명품 중의 하나였다. 이곳의 구텐베르크는 코시모와 같은 해에 죽었다.

 

199 (알베르티)는 그림을 그린 다음 아이들을 불러서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답을 잘 못하면 그림이 실패한 것이라고 여겼다.

 

201 코시모는 공화국을 뒤엎기는 했지만, 당파의 폭력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부자들의 자유를 없앴던 것 뿐이다. 그가 이따금 폭력을 써서 나쁜 기록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은 전체적으로 보아 피렌쩨 역사상 가장 천재적이고 평화롭고 질서가 잡힌 시대의 하나였다. … 어떤 통치자도 일찍이 코시모처럼 지혜롭게 너그러운 적이 없었다. 아니면 인류의 발전에 그렇듯 순수한 관심을 가졌던 경우는 없었다. 피치노는 이렇게 맒했다. "나는 플라톤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그러나 코시모에게 입은 덕도 그에 못지 않다. 그는 플라톤이 내게 개념을 주었던 그 미덕들을 나를 위해 현실로 만들었다." … 파테르 파트리아이, 곧 조국의 아버지라는 비명이다.

 

4장 황금시대 1464~1492

 

203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 "자신들의 목적에 우아한 구실을 주기 위해 자유의 이름"을 빌려 혁명을 선포했다.

 

208 대성당에서 이런 의식이 벌어지는 동안 살비아티 대주교, 야코포 데 파찌, 그리고 100명의 무장한 추종자들이 베키오 궁전으로 갔다. 그들은 "국민! 자유!"를 외쳐서 자기들의 목적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서 국민들은 메디치 편을 들엇다. 그들은 "공 만세"를 외쳤다.

 

211 로렌쪼 -  "내 정신이 공적인 일들의 어수선함으로 혼란스럽고 내 귀가 시끄러운 시민들의 불평으로 멍멍할 때에 내가 학문에서 기분 전화을 찾지 않는다면 그런 투쟁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학문이라는 말로 그는 온갖 형식의 지식을 추구했다.

 

214 로렌쪼가 직접 지은 시

 

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러나 쉽게 날아가 버리네

젊은이들과 아가씨들아, 지금 즐겨라

내일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니.

 

 

젊은 숙녀들과 젊은 연인들아!

바쿠스 만세, 욕망 만세!

춤추고 놀자, 노래를 부르자

달콤한 사랑이 네 가슴에 타올라라.

 

220 뒷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글로서 인문주의자들이 (대부분의 중세의 견해에 반대해서) 인간 종족에 대해 가진 높은 평가를 젊은 열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피코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은 학교에서 항상 듣는 평범한 소리다. 인간의 몸은 땅의 원소들과, 천상의 정신과, 식물의 혼과, 하등 동물의 감각과, 이성과, 천사의 정신과, 신과의 유사성이 뒤섞인 것이다."

 

221 그러고 나서 피코는 아담에게 들려주는 말의 형식으로 인간의 제한 없는 능력에 대한 신의 증언을 들려준다.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도 지상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너 자신을 믄달어 가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새로 태어날 수도 있다."

 

227 18번 노래에서 풀치는 또 다른 거인 마르구테를 등장시킨다. 그는 유쾌한 도둑이며 온건한 살인자로서, 친구를 배신했다는 악덕만 빼고는 모든 악덕을 다 인정한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가 아니면 마호메트를 믿는가 하고 모르간테가 묻자 마르구테가 대답한다.

 

나는 파랑보다 검정을 더 믿는 건 아냐,

그러나 살찐 수탉은 믿지, 삶은 것이나 구운 것이나 상관 없어.

그리고 때로는 버터도 믿어,

그리고 사람들이 사과를 구울 때면 맥주나 새 포도주도 믿지.

그러나 대개는 오래된 포도주가 나의 확고한 믿음이야,

그리고 그것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을 구해 준다.

믿음이란 가려움증과 마찬가지로 붙잡는 거니까.

믿음은 사람이 얻는 것이야. 이것, 저것, 아니면 다른 것으로 말이지.

내가 따르기로 한 믿음이 무언지 봐라.

너도 알 테지, 그리스 수녀가 내 어미요,

내 아비는 터키 사람들 속에서 브루사에 있던 율법학자였지 않나.

 

228 아스타로테는 정말로 지혜로운 악마였다. 풀치는 1483년에 이 글을 스면서 콜럼버스에 대해 놀랄 정도로 정확한 예언을 그의 입에 넣어 주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집즈롤터 해협)에 새겨진 "더는 나가지 말라(ne plus ultra)"라는 오래된 경구에 관해 아스타로테는 리날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이론인 잘못된 것임을 알아라.

대담한 선원은 서쪽 파도를 훨씬 넘어 자신의 배를 몰아 갈 것이니,

지구는 바퀴처럼 생긴 것인데도

물결은 고요하고 평평하거든.

옛날에 인간은 더욱 위대한 존재였어.

그리고 헤라클레슨느 자신이 헛되이 가로막고 있는

한계 저편으로 가장 형편없는 배라도

얼마나 멀리 나아가게 될지 안다면 얼굴이 빨개질걸.

인간은 다른 반구를 발견하게 될 거야.

모든 것은 하나의 공통된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이라

신의 신비에 의해 잘 균형을 잡은 지구는

별이라는 구체들 사이에 매달려 있지.

우리 반대편에도 도시와 나라와, 인구 많은 제국들이 있어.

옛날의 신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 채 말야.

그러나 보아라, 태양이 서쪽 길로 빠르게 가고 있지.

빛을 기다리는 종족들을 기쁘게 하려는 거야.

 

234 베로키오(Verrocchio, 진짜 눈)의 유명한 [그리스도의 세례]보다 더 불쾌한 르네상스 회화는 드물다. 세례자는 엄격한 청교도이고 대략 서른 살 정도인 그리스도는 늙은이처럼 보인다. 왼편에 있는 두 천산느 여성적이고 힘이 없아. 물론 그중 하나는 전ㅌ오적으로 그의 제자인 어린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토비아스와 세 천사]는 탁월하다. 중앙의 천산느 보티첼리의 우아함과 분위기를 미리 보여준다.

 

235 바사리가 들려주는 다음의 이야기는 아마도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그린 천사의 모습을 본 베로키오는 "다시는 붓을 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레오나르도가 그렇게 어린데도 자신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37 아테네를 빼면 피렌쩨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미술과 미술가에게 중요성을 부여했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투었고, 또 마치 우리가 오늘날 배우와 여배우 이야기를 하듯이 미술가들의 일화들을 이야기했다. 천재라는 낭만적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은 르네상스 피렌쩨였다. 곧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정신(라틴어로 genius, 곧 천재)에 이끌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44 교회는 앞으로 50년 동안 회화의 주제에서 우선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하게 된다.

 

245 1498년에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했다. 보티첼리는 르네상스의 가장 특이한 이 살인 행위에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이 비극이 있고 난 직후에 그는 복잡한 상징성을 담은 [비방]이라는 작품을 그렸던 것 같다. 고전적인 아치 통로와 멀리 떨어진 바다를 배경으로 세 명의 여인(사기, 속임, 비방)이 남루한 남자(시샘)의 안내를 받아 벌거벗은 희생자의 머리채를 끌고 법정으로 들어온다. 그곳에는 기다란 당나귀 귀를 한 판사가 앉아서 의심과 무지를 의인화한 여성들의 충고를 듣고서, 이 쓰러진 남자를 대중의 분노에 맡기려고 한다. 왼편에는 참회가 검은 옷을 입고 슬픔에 가득 찬 모습으로 벌거벗은 진실을 바라본다.

 

5장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 1492~1534

 

253 세습 권력의 이점은 계속성이고 그 맹점은 평범함이다. 피에로 디 로렌쪼는 아무 문제 없이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격과 잘못된 판단력으로 메디치 집안 통치의 기반인 인기를 잃어버렸다.

 

255 지롤라모 - 그는 부모에게 속세에서 성공하기를 바란느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것을 용서해 달라는 온건한 편지를 써 보냈다. 부모가 그에게 돌아올라고 끈질기게 설득하자 그는 분노한 답장을 보냈다. "눈먼 사람들! 어째서 아직도 울고 탄식하는 겁니까? 부모님은 기뻐해야 하는데 이렇드 나를 방해하시는군요. ….. 아직도 탄식하고 계시면 미덕을 맹세한 내게는 두 분이 적이요 원수라는 것밖에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작은 체구는 환상과 좌절된 열망, 안으로 몰아치는 폭풍으로 고통받았다. 그는 부모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아직도 두분처럼 육체입니다. 그리고 감각은 이성에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는 악마가 내 등으로 뛰어들지 않도록 격하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타락을 제어하기 위해 금식하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육체와 자부심의 요구를 의인화시켜서 사탄의 목소리라고 여겼고, 자신의 더 나은 자아의 권고도 의인화했다. ... 그는 그들의 말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을 향하여 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선택받은 예언자로서 말하기 시작했다.

è 예언자의 탄생

 

260 그는 로렌쪼와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1492년에 죽으리라고 예언했고 이 예언은 맞아 들어갔다. è 신기하군.

 

263 신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혀에 구멍을 뚫었고, 동성애자들은 잔혹한 형벌을 통해 신분을 추락하게 했다. 이렇나 개혁의 실행을 돕기 위해 사보나롤라는 교구의 소년들로 도덕 경찰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경마와 행렬과 체조놀이와, 품행 나쁜 친구와 음란한 문학과 춤과 음악 학교를 피하기로 맹세하고 또 머리를 짧게 잘랐다.

 

264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 인간은 천성적으로 미덕의 존재가 아니며 사회적 질서는 에고들, 가문들, 계층들, 종족들, 신앙들 사이의 공개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갈등 가운데서 유지되는 것이다.

 

271 사보나롤라의 사순절 기간 설교들은 로마를 향한 전쟁이었다. 교회가 세속적 권력의 확고한 토대를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한편 교회의 부가 그 타락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272 사보나롤라는 자신의 이런 노골적인 공격이 파문을 불러오리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환영했다.

è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è 자신의 예언 능력(진짜든 가짜든)

 

278 1498 5 23일에 피렌쩨 공화국은 아비를 죽이는 행동을 하였으니, 곧 공화국 창시자와 그 동료들을 처형했다. 수도사 의상을 빼앗기고 맨발이 되어 그들은 청사 앞 광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미 두 번이나 '허영'을 불태웠고, 또 불의 시련을 연출했다. 그 때마다 엄청난 구경꾼이 모여들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정부가 음식과 음료를 제공행ㅆ다. 한 사제가 사보나롤라에게 "너는 어떤 정신으로 이 순교를 당하느냐?"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많은 고통을 받으셨다." 그리고 자기가 걸고 있던 십자가상에 키스를 하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수도사들은 당당하게 종말을 향해 걸어갔다. 도메니코는 순교자의 죽음을 죽게 된 것에 감사하여 찬미가인 테데움을 노래하면서 거의 즐거워했다. 세 사람은 교수대에 매달렸다. 소년들은 그들이 질식해 죽어 갈 때에 돌을 던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그들 아래쪽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아올라 그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이 재는 성인의 유물로 여겨져 숭배되지 못하도록 아르노 강에 뿌려졌다. 일부 '울보'들은 죄를 덮어쓸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에 무릎을 꿇고서 울며 기도했다. 1703년까지는 해마다 5 23일이 되면 수도사들의 뜨거운 피가 떨어졌던 장소에 꽃들이 놓였다. 오늘날에는 포도에 난 장식판이 피렌쩨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 범죄의 장소를 표시해 주고 있다.

è 제임스 조이스의 동생이 형에게 장난으로 불러주는 테데움.

è 테데움이 유투브에서 바로 찾아진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새로운 모토가 생각나는군. "원하는 정보를 바로 손 안에". 경이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279 사보나롤라는 중세가 살아남아 르네상스에 출현한 경우이다. 르네상스는 그를 파괴했다. 그는 부의 영향 아래서, 그리고 종교적 믿음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도덕적인 붕괴를 보았다.

 

279 그는 자신의 지적인 한계를 통해, 또 용서할 수 있지만 그래도 짜증 나는 이기주의를 통해 실패했다.

è 완전 동감

 

280

사보나롤라의 위대함은 도덕 혁명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에 들어 있다. 그는 인간을 정직하고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며, 또 그리스도가 소수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성공한 일에서 사보나롤라가 실패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혁명만이 인간의 일에서 진정한 진보를 표시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런 노력이 없이 인간 이외의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일, 역사상 있었던 유혈의 전복들은 일시적이고 소용도 없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285 (피에로 디 코시모)는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깊이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허영 태우기'에 자신이 그린 나체화를 모두 가져갔다. 사보나롤라의 적들이 성 마르코 수도원을 공격했을 때 그는 사보나롤라를 방어하는 편에 합세했다. 이런 소란 중에서 그는 삼아남으면 수도사가 되겠노라 맹세했다. 그리고 이 맹세를 지켜 1500년에 프라토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5년 동안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고 종교적 수행에만 몰두했다.

è 파스칼이 수학과 과학을 버리고 신학에 몰두한 것 만큼이나 중대한 인력 낭비

è 신학은 천재의 블랙홀

 

성 마르코로 옮아오자 그는 프라 안젤리코의 장밋빛 벽화에 뒤이어 푸르고, 붉고, 검정색으로 된 자신의 걸작들을 그렸다.

è 긍정적인 수행의 시간이군. 영원히 수행하지 않아서 다행.

 

289 1570년쯤 야코포 다 엠폴리가 아눈찌아타 성당의 안뜰에서 사르토의 [그리스도의 탄생]을 베끼고 있을 때였다. 미사에 갔다가 나오던 노파 하나가 그의 옆에 멈추어 서더니 그림 앞쪽에 있는 모습을 가리켰다. "이게 나예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루크레찌아는 그보다 40년이나 더 오래 살았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6장 밀라노

300 이런 열정적인 무질서 속에서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문학, 과학, 예술을 위해 마땅히 담당해야 할 몫을 다하지 못했다. 이 도시 출신 선장들은 바다를 열심히 탐험했으나 제노바의 아들 콜럼버스가 나타났을 때 제노바는 너무 겁이 많거나 아니면 너무 가난해서 그의 꿈을 후원할 수가 없었다.

 

309 람푸냐니와 비스콘티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을지아티는 잡혀서 몸 안의 뼈가 모두 부러지거나 탈골되도록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다. 그러나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동안 그는 후회하기를 거절하고 이교의 영웅들과 그리스도교 성인들이 모두 자기 행위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고전의 구절이면서 르네상스의 구절이기도 한 말을 내뱉었다. "죽음은 괴로우나 명성은 영원하다."

Mors acerba, fama perpetua.

314 남편들은 아내들의 사랑을 눈감아 주고 그 대가로 자기들도 바람을 피웠다.

 

317 휘회와 근심에 사로잡힌 로도비코는 고독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 종교 따위는 거의 생각지도 않던 이 강인한 남자는 오로지 한 가지 소원만을 빌었다. 얼른 죽어서 베아트리체를 다시 보고 그녀의 용서를 구하고 그녀의 사랑을 되찾고 싶다는 소원이었다.

 

324 전제 군주의 통치는 이탈리아 미술에 하나의 은총이었다. 10명 이상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수도와 자기들의 추억을 장식할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을 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였다. 이런 경쟁에서 그들은 민주주의 제도에서라면 배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아름다움을 위해 투입했다. 또한 예술을 위해 인간의 노동과 천재의 결실이 그토록 많이 투입된 경우는 없었다.

 

328 다른 그림은 젊은 여인의 초상화로서 오늘날에는 로도비코의 사생아 딸이었던 비앙카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순진하게 새침하고 그러면서도 단순한 아름다움을 매우 자랑스럽게 의식하고 있는 소녀의 갈등하는 매력을 이처럼 포착한 예술가는 드물다.

 

7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331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결혼해 달라고 조르지 않아다. 그녀를 유혹했던 피에로 단토니오는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피렌쩨의 법률가였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피에로는 자기처럼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카테리나는 농부 남편을 맞아들였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피에로와 그 아내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어머니의 사랑 없이 절반쯤 안락함 속에서 양육되었다. 아마도 이런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그는 아름다운 의상에 대한 취향과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얻었을 것이다.

 

333 스물네 번재 생일이 되기 일주일 전에 레오나르도와 다른 청년 세 명이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피렌쩨 당국의 법원에 소환되었다.

 

335 레오나르도가 서른 살이 되던 1482년에 밀라노의 섭정인 로도비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망설임이나, 시간이 잔인할 정도로 짧다는 의식 같은 것은 아직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싹트는 힘들로 강해진, 청춘의 무한한 야망이 있을 뿐이다.

 

339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 그리고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많이 한다."

 

340 [최후의 만찬] 동작을 대신해서 그는 그리스도가 사도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리라는 예언을 방금 했고, 그래서 사도들이 각자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놀라움을 드러내면서 "나입니까?"하고 묻는 긴장된 장면을 선택했다.

 

348 젊은 화가가 레오나르도를 싫어하는 자신의 감정을, 악명이 자자한 모욕으로 폭발시킨 것은 아마도 이 시기였을 것이다. 어느 날 피렌쩨 사람 몇이서 산타 트리니타 광장에서 [신곡]의 구절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를 붙잡고 의견을 물었다. 그때 미켈란젤로가 나타났다. 그가 단테를 열심히 탐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 미켈란젤로가 오네요. 그가 그 시구를 설명해 줄 겁니다." 레오나르도가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생각한 미켈란젤로는 분노가 폭발했다. "당신이 직접 설명하시죠! 청동으로 주조하기 위해 말 모형을 만들고 그것을 주조하지도 못한 주제에, 부끄러운 줄이나 아십쇼! 저 밀라노 수찱들은 당신이 그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죠!" 레오나르도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노기등등해서 걸어가 버렸다.

è 레오나르도가 그 상황에 아무 말도 안한 것은 참 현명한 태도였다.

 

350 "정열에 빠진 가엾은 애인들아! 자연은 당신들의 신경이 맹목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향하여 부조리한 갈망으로 타오르게 하고, 당신들의 두뇌로 하여금 우리의 매력을 아주 분별 없이 이상화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으니그래야만 당신들은 아비가 되는 것이겠지!

 

356 그의 호기심, 도착증, 민감성, 그리고 완전욕,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냈다. 즉 시작한 일을 완성할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363 레오나르도는 잘못된 생각을 쫓고 있었다. 인간의 비행은 활강을 빼고는 새를 흉내 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372 그러나 이 모든 한계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르네상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천으로부터 한 사람이 왔었다는 것, 그가 인류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8장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376 그루터기 병원(Ospedale del Ceppo, 병원 기부금을 efjswu 넣도록 만들어진 속이 빈 그루터기에서 유래한 이름)을 위해 죠반니 델라 로비아와 조수들은 빛나는 테라 코타 돋을 새김으로 자비의 일곱 선행을 차례로 묘사한 장식 띠를 만들어 냈다.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병든

 

380 그는 르네상스의 중심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자기 속에 잠재된 완전성을 얻지 못했다. 아니면 자기 예술의 완전한 영향을 보여 주지 못했다.

 

383 3년이나 걸려 이 벽화를 그린 다음 시뇨렐리는 코르토나로 돌아와서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렸다. 이 무렵 그에게 사랑하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비극이 찾아왔다. 바사리는 이렇게 전한다. 시체가 그에게 운반되어 왔을 대 "그는 옷을 벗기게 하고 특이한 꿋꿋함으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몸을 스케치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 작품 안에 자연이 자기에게 주었다가 잔인한 운명이 도로 빼앗아 간 것을 언제까지나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è 우리가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이외의 사람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거겠지?

 

388 15세기 마지막 무렵에 시에나는 좋건 나쁘건 그 이름이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진 예술가를 한 명 배출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죠반니 안토니오 바찌였다. 그러나 음란한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소도마라고 불렀다. 그는 아름다운 소년으로 동성애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별명을 즐거운 유머로 받아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호칭이라 생각했다.

è 쏘 쿨하다.

è 왜 르네상스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써내기 위해서는 팩트를 우선 알아야 한다.

 

394 쟌파올로는 음모에 동참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백 명이나 거리와 대성당에서 죽였다. 그리고 정부 건물에 죽은 자들의 목을 매달아 놓고, 그들의 초상화를 거꾸로 걸어 놓았다. 이것이야말로 페루지아 미술의 실질적인 내용이었다.

 

399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막달레나]는 아주 아름다운 죄인이어서 신의 자비심이 아니라도 그녀를 쉽게 용서하게 된다.

 

9장 만토바 1378~1540

 

405 그는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도의 행동과 이교도 지성의 날카로운 명료함, 또 르네상스 인간의 미적 감각 등을 하나로 합치기를 원했다. 건강한 신체, 성격의 강인함, 정신의 풍부함 등을 갖춘 완전한 인간이라는 르네상스의 이상(보편인 l'uomo universal, 전인)은 비토리노 다 펠트레에게서 첫 번째 형태를 갖추고 나타나고 있다.

 

비토리노는 가난하지만 소질이 있는 사람들도 이 학교에 들어와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는 후작을 설득해서 60명의 가난한 학생들을 교육하고 보조해 줄 재정과 설비와 보조 교사들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자 비토리노는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재산으로 그 차액을 채웠다.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을 치를 돈도 남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411 성 안드레아 교회에 있는 그(만테냐)의 무덤 위에는 청동 흉상(아마도 그 자신의 작품)이 놓였다. 그것은 50년 세월을 예술에 바친 한 천재의 쓰라림과 피로를 분노한 사실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불멸'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411 이사벨라, 세계 제일의 여성 - 그녀는 지식인이 되지 않고도, 혹은 매혹적인 여성이기를 중단하지 않고도 폭넓고 다양한 문화를 지녔다. 그녀를 보고 사람들이 경탄하는 것은 그녀의 생명력, 활기, 진짜를 알아보는 예리함, 취향의 완벽함 등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말을 타고도 밤새도록 춤을 출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이든 여왕이 될 줄을 알았다.

 

 

10장 페라라 1378~1534

 

423 남자들은 여자를 찾고 숙녀들과 신사들은 밤새도록 춤을 추고 조용한 날들에는 귀부인과 아가씨들이 기사 소설을 읽었다.

 

424 루크레찌아의 시녀 중 하나인 안젤라가 알폰소의 형제 둘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이폴리토와 쥴리오였다. 생각 없이 오만한 순간에 안젤라는 이폴리토에게 그의 전부를 다 합쳐도 동생의 두 눈보다 못하다고 조롱했다. 추기경은 자객 한 떼를 거느리고 쥴리오가 가는 길에 숨어 있다가, 자객들이 동생의 눈을 막대로 쑤시는 골을 바라보았다. 쥴리오는 맏형인 알폰소에게 가서 자신을 위해 복수해 달라고 호소했다. 공작은 추기경을 가두었지만 머지않아 그가 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 주엇다. 알폰소의 무관심에 마음이 상한 쥴리오는 또 다른 형제인 페란테와 더불어 공작과 추기경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발각되고 쥴리오와 페란테는 성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1540년에 페란테는 그곳에서 죽었고 쥴리오는 158년에 알폰소 2세에 의해 석방되었다. 50년을 감옥에서 보낸 다음이었다. 그는노인이 되어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50년 전에 유행하던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석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431 과리노는 1370년에 베로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5년 동안 살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그리스 사본들을 잔득 가지고 베네찌아로 돌아왔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 상자들 중 하나가 사라졌을 때 그의 머리카락이 하룻밤 만에 하얗게 세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베네찌아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433 나의 불길이 이 싸늘한 얼음을 따뜻하게 한다면,

눈물으로 이 먼지를 살아 있는 육체로 바꾸어

네게 새로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대담하고 열렬하게

우리 소중한 인연을 끊어 버린 사람을 향해 외칠 것을,

"오 잔인한 괴물아! 사랑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라!".

 

436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 탁월한 시인(아리오스토)에게 접근할 때면, 시가 번역이 불가능한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국어로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이탈리아가 로도비코 아리오스토를 시인들 중에서 단테 다음으로 꼽는 이유를 이해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분노한 오를란도]를 영국인이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는 것 이상의 즐거움으로 읽는다. 그러나 우리는 단어를 듣지만 멜로디는 놓친다.

 

439 열 명 이상의 백작과 왕들이 안젤리카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그녀는 그들 모두와 희롱을 하고 그들이 서로 맞서게 만들고 그러고는 잘생긴 평범한 남자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맥빠진 지점에 도달한다. 그녀는 보통 여자들이 하는 대로 그의 수입을 검토해 보지도 않고 결혼한다.

è 왜 이렇게 이해되지? 그녀는 아마 자부심이 강한 여자일 테다.

 

442 자연은 그를 만든 다음 그 틀을 부수었다.

Natrua il fece, e poi roppe la stampa.

è 와우! 진짜 멋진 표현이다.

 

443 나는 그의 발에 키스를 했다. 그는 성스러운 옥좌에서 몸을 굽혀 내 손을 잡고 내 두 뺨에 키스했다. 그 밖에도 그는 내가 지불해야 할 인지세의 절반을 면제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가슴은 희망에 가득 찼지만 몸음 비에 젖고 진흙으로 더럽혀진 채 나는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

è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 - 로 끝나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11장 베네찌아와 그 영토 1378~1534

 

450 그러나 아마도 베네찌아의 부는 더 많은 부분이 해상 무역에서 온 것이다. … 유럽의 어떤 나라도 이렇나 무역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454 적들조차도 베네찌아의 통치 방식에 경탄하여 그 구조와 기능을 탐구하려 사람을 보내곤 했다.

 

456 대의회에 의해 임명된 40인의 판삳르은 능률적이고 진지한 사법부가 되었다. 법령은 명료하게 표현되었고 귀족에게나 일반에게나 똑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형벌은 시대의 잔혹성을 보여 준다. 투옥은 최소한도의 빛과 공기만을 허용하는 좁은 감방에 갇히는 것을 의미했다. 채찍질, 소인 찍기, 손발 자르기, 눈멀게 하기, 혀 자르기, 형차에 매달아 돌려 사지 찢어 죽이기, 그 밖에도 여러가지 섬세한 형벌들이 합법적이었다.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은 감옥에서 목을 졸라 죽이거나 아니면 물에 빠뜨리거나 총독의 궁전 창문에 매달거나 화형했다.

 

461 아마도 중산층이 가장 행복한 계층이었으리라. 그들은 공적인 행사와 사적인 즐거움을 모두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즐겼다. … 부자들처럼 행운을 잡으려고 법석을 떨지도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처럼 애들을 먹이고 입힐 근심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463 세속적인 방탕 및 신성 모독은, 정통 신앙 및 주일의 경건함과 함께 이탈리아인의 성격에 들어 있었다.

 

470 베네찌아 군대와 함대가 거둔 승리들, 거의 위협적으로 다가온 파멸에서 영웅적으로 다시 일어선 것 등이 후원자와 화가들의 자부심과 상상력을 일깨우고, 자기들의 모습을 미술 작품에 새겨 넣었다. 부유함은 스스로 선함, 아름다움, 참됨 등으로 바뀌지 않는 한 아물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79 오십대에 접어든 카르파쵸는 조화로운 결합과, 건축물의 배경 속에 우아한 모습들을 표현하는 육감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건축물 배경은 상상적인 구상이지만 표현된 것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성 조지는 용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이와 반대로 성 히레오니무스는 조용한 학자로 묘사되어 있으며,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방에서 사자와 단둘이 지내면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방 안에 그려진 모습은 모두 세밀화처럼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떨어진 두루말이에 있는 악보도 읽을 수가 있을 정도여서 몰멘티는 그것을 이용하여 피아노 곡을 썼다.

 

480 상인들의 창고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높은 가격에 예술가들이 고용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507년에 베네찌아 사람들은 색채 없는 삶이란 죽은 것이라고 느꼈다.

 

490 티찌아노는 1533년에 쉰여섯 살이었다. 그가 앞으로도 43년이나 더 살면서 지난 50년만큼이나 숱한 걸작들을 만들어 내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496 베네찌아 여자들은 교육을 향한 가식이 적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매력적이거나, 아니면 어머니로서 자식을 많이 두었거나, 아니면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496 1471년에 베르나르도 첸니니는 피렌쩨 인쇄소를 열었고, 폴리찌아노는 이에 당황해서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가장 멍청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천 권의 책이 되어 외국으로 퍼질 것이다."

 

504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렸네. 내 생명을 부드럽게 지켜주던 마음, 자신의 생명을 잊고 내 생명을 사랑하고 유지해 주던 그 마음, 스스로 주인이었던 그 마음, 값비싼 장식과 꾸밈과 비단과 금과 보석과 보물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가 지닌 사랑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며(그녀 자신의 말에 다르면) 만족했던 그 마음, 이 마음은 의복 대신 가장 부드럽고 우아하고 훌류유한 팔다리를 지녔다네. 그 마음은 이렇게 봉사할 때 즐거운 모습을 보였고, 또 내가 이 땅에서 만난 중에 가장 달콤하고 또 가장 품위 있는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네.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1534

 

511 그는 이따금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도 있었다. 어떤 사제가 그가 선정적인 인물들을 그린다고 비난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려진 모습들이 그토록 당신 마음을 움직인다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까?"

 

513 이곳은 천재가 태어나거나 죽는 것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천재가 그곳에 머물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장소이다. 여기에는 그들을 교육시키고 형성할 중요한 예술이나 뚜렷한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514 그러나 16세기 처음 몇 십 년 동안 코레죠의 집안은 길베르트 10세 백작과 그의 아내 베로니카 감바라가 이끌었다. 그녀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여성들 중의 한 명이다. 라틴어를 말할 수 있었고 스콜라 철학을 알았으며 교부 신학에 대한 주석을 쓰고 페트라르카 방식의 섬세한 시를 썼기에 "열 번째 뮤즈"라고 불렸다. 그녀는 작은 궁정을 예술가와 시인들의 살롱으로 만들고, 저 낭만적인 여성 숭배가 널리 퍼지는 일을 도왔던 인물이다. 르네상스의 여성 숭배는 이탈리아의 상류층 사이에서 중세의 성모 숭배를 대체하고, 이탈리아 예술은 점차 여성적인 매력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521 그러나 이제 파르미지아니노는 자신의 불행과 가난에 물린 탓인지 열렬히 연금술에 빠져서 그림을 버려두고 금을 제조할 용광로를 세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è 누구랑 비슷하다. 반면교사 삼아야겠지.

 

527 프란치아가 라파엘로와 편지로 맺은 우정은 르네상스의 가장 즐거운 에피소드의 하나이다.

 

531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는 이 집안을 권력과 문화와 암살의 절정으로 이끌었다. 그의 많은 애인들은 몇몇 아읻르을 낳았는데, 때로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동시에 일어났다. 그는 세 번 결혼했고, 간통했ㄸ나는 명목으로 두 아내를 죽였다. 또한 딸을 임신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들을 범하려고 했는데, 아들이 칼을 빼들고 반항해서 겨우 모면했다고 한다. 그는 도한 자신에게 안기기보다 차라리 죽음ㅇ르 선택한 도이치 숙녀의 시신을 강간했다.

 

540 우르비노의 공작 궁정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산악 지방의 공기, 궁정의 모임, 품위 있는 대화와 엘리자베타에게 반해서 그곳에 11년을 더 머물렀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여섯살이나 위였고, 몸무게는 거의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부드러운 정신이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기 방 거울 뒤에 그녀의 그림을 감추어 두고 그녀를 찬양하는 비밀 소네트를 썼다.

 

544 나는 이제 사는 게 아닙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여,

운명이 당신의 육체에서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갔으니,

그러나 내가 당신과 같은 무덤에 눕고

내 뼈가 당시의 뼈와 합쳐지는 날 나는 살게 됩니다.

 

13장 나폴리 왕국 1378~1534

556 시칠리아는 르네상스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우리스파와 같은 몇 명의 학자와 안토넬로 다 메씨나와 같은 몇 명의 화가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머지않아 훨씬 더 기회가 많은 이탈리아 본토로 건나가고 말았다. 팔레르모, 몬레알레, 체팔루 등지는 위대한 미술품을 간직하고 있지만 오로조 비잔틴과 이슬람교와 노르만 시대의 유품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랑스러운 섬에는 1295년부터 1409년까지 아라곤 가문의 왕과 왕비들이 잇었다. 이어서 다음 300년 동안 이 섬은 스페인 왕권의 보석이 되었다.

 

558 규모가 더 큰 예술들과 함께 이 모든 공예 분야와, 또 이들 사랑스럽고 격렬한 폭발성 기질을 가진 사라들의 노동과 사랑, 속임수와 정치적 수완, 헌신과 전쟁, 성실함과 철학, 지식과 미신, 시와 음악, 미움과 유머 등이 모두 합쳐져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고, 또 메디치가 이끄는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다시 파멸에 이르게 했다.

 

 

 

로마 르네상스 1378 - 1521

è항상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이 세상의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è르네상스는 정말 길구나!

è세계의 유수한 대학, 예를 들어 하버드 같은 곳에서는 인문학의 기초로서 르네상스를 매우 높게 평가하겠지? 상식이자 교양으로서 르네상스는 정말 중요할 것이다. 훌륭한 대학의 강의를 듣는다고 생각하자.

14장 교회의 위기 1378~1447

13 그의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결석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보니파키우스는 "황금을 향한 갈증을 그칠 줄 몰랐다."

 

17 그러나 이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이 극적인 방식으로 도망치면서 회의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요한 23세는 자신의 적들이 자신의 toddom, 범죄, 음란 등의 기록을 회의에 제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기겁을 했다. 한 위원회는 그가 그레고리우스, 베네딕투스 등과 함께 동시에 물러나기로 동의한다면 이런 불명예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는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마부로 변장하고서 콘스탄츠에서 도망쳐(1415 3 20) 오스트리아 대공이며 지기스문트의 적인 프리드리히와 함께 샤프하우젠의 성에 숨엇다. 3 29일에 그는 자기가 콘스탄츠에서 한 모든 약속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거시었고 따라서 구속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4 6일에 공의회는 결의문 "사크로상타"를 발표했다. 어던 여갓가는 그것이 "세계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공식 문서"라고 불렀다.

 

è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91283

1378 2명의 경쟁 교황(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2세와 아비뇽의 베네딕투스 13)이 선출되고, 1409년 피사 공의회가 서방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새 교황을 선출함에 따라 교황은 3명이나 되었다. 피사 공의회에서 교황에 선출된 요한네스 2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즈문트의 압력으로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그 목적은 주로 그리스도교 세계를 재통일하려는 것이었으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사상을 조사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의회에 참석한 대표들은 정치적으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인 선거방식을 채택했고, 그에 따라 4개의 세력권(이탈리아·잉글랜드·독일·프랑스)이 각각 하나의 투표권을 갖게 되었고, 추기경단도 하나의 투표권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스페인도 투표권을 받았다. 요한네스 23세는 사생활을 조사하겠다는 위협을 받자 경쟁 교황들이 동시에 사임하면 자기도 사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직후 자기가 공의회장을 빠져나가면 공의회의 권한도 사라져 결국 해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콘스탄츠에서 도망쳤다. 황제는 공의회를 계속할 것을 고집했고, 이 공의회는 교회의 전체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는 내용의 교령 '사크로상타'(Sacrosancta)를 공포하고, 또 교회의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 공의회를 자주 열어야 한다고 공포했다. 그뒤 요한네스 23세는 체포되어 폐위당하고, 그레고리우스 12세는 정식으로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을 갖는 조건으로 사임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이 교황계열의 정통임을 주장했으며, 공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베네딕투스 13세는 사임을 거부했으나 결국 폐위되었다. 1417 11월 공의회는 오도네 콜론나(교황 마르티누스 5세가 됨)를 선출함으로써 대분열을 효과적으로 치유했다. 현존하는 사크로상타의 신빙성은 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쟁점이 되어왔다.

 

21 교황들은 정치가여야만 했고, 이따금 전사이기도 했지만 성인이 될 여유는 드물었다.

 

24 1045년 이후로 그리스 정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져 있던 그리스도교가 새로 통합될 예정이라는 소식은 묻는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 공의회가 열린 다음, 교황의 우위,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의 사용, 연옥의 고통의 특성,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느냐, 아니면 성자에게서 나오느냐의 문제 등을 놓고 두 교회의 다른 점들을 서로 융합시키기 위해 다양한 위원회들이 열렸다. 그 사이에 파라라에 페스트가 발생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공의회가 피렌쩨로 옮겨 오면, 자신과 친구들의 경비로 그들을 대접하겠노라고 초대했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학식 있는 그리스 사람들이 피렌쩨로 들어온(1439) 날을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시작된 날로 꼽는다. 여기서 그리스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표현들이 합의되었다.

 

15장 르네상스가 로마를 사로잡다 1447~1492

 

30 민주주의란, 지성, 안전, 평화가 널리 퍼지면서 생긴 사치품이다.

 

32 영적인 권력으로서 르네상스 교황들은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와 화해시키는 문제에 직면했다. 인문주의는 절반은 이교적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한동안 이교의 뿌리와 가지, 그 신조와 기술을 파괴하려고 손수 나섰다. 그래서 이교의 사원과 조각상들을 파괴하는 일을 격려하거나 묵인했다. … 이런 태도를 바꾸어 로마와 그리스 시대의 유물과 고전들을 보존하고 수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의 사유에 하나의 혁명이 필요했다. 인문주의의 위세는 이미 높디 높고, 새로운 이교 운동의 자극도 강하고, 또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미 거기 하도 깊이 물들어서 교회는 그리스도교도의 삶에서 인문주의의 발전을 위한 자리를 찾아내든지, 아니면 이탈리아나 뒷날 유럽의 지식인층을 잃어버릴 위험을 각오해야만 했다. 니콜라스 5세 치하에서 교회는 인문주의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으며, 교회 자신이 새로운 문학과 예술의 편에, 아예 그 선두에 자리를 잡았다. 즐거운 백 년 동안 (1447~1534) 교회는 이탈리아의 정신에 아주 넉넉한 자유를 주었고 '필렐포는 이를 믿을 수 없는 자유'라고 말했다. 또 이탈리아 예술에 그토록 대단한 후원과 기회와 자극을 주어 로마는 곧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 하나를 즐겼다.

 

33 머지않아 사르짜나의 토마소는 고전 고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함께 사로잡혓다. 그는 자신의 수입을 거의 모두 책을 사는 데 쓰고, 비싼 필사본을 사느라 돈을 빌리고, 앞으로 언젠가 돈이 충분히 생겨서 세상의 모든 위대한 책들을 하나의 도서관에 모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했다. 바티칸 도서관은 이러한 야망에 그 기원을 가진다. 코시모는 토마소에게 자기 도서관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맡겼다. 토마소는 필사본 사이에서 행복했다. 자신이 첫 번째 르네상스 교황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è 니콜라스 5

 

34 토마소는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부심 강한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킬 일이지만, 사제관의 가난한 심부름꾼이 교황이 될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그들 중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바르바로는 플라톤의 Ran이 실현되었다고 선언했다. 철학자가 왕이 된 것이다.

 

37 그는 희년 축제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위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니콜라스는 이것을 교회의 평화와 통합의 회복에 대한 기념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의 감정과도 잘 맞았다. 라틴 그리스도교의 구석구석에서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순례자의 행렬이 밀려들어 왔다. … 순례자들이 넉넉한 봉헌물을 가져왔기에, 희년 축제가 만들어 낸 재정적 이익은 교황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그가 지은 건물의 비용과, 학자와 필사가들을 위한 비용을 모두 감당했다.

 

39 니콜라스는 상당수의 시민들이 자신을 너그럽기는 해도 전제 군주라고 여기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변했다. 의심에 시달리고, 원한에 괴롭고, 통풍으로 고통받아서 그는 빨리 늙었다. 터키 군이 5만명의 그리스도교도 시체를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을 이스람교 사원으로 만들었다는 소식(1453)이 오자 교황으로서 자신의 몯느 영고아이 아무런 소용없는 공허함으로 여겨졌다. 그는 유럽 국가들에게 함락된 동방 그리스도교의 수도를 도로 찾기 위해 십자군에 참가하라고 호소했다. … 유럽은 그런 말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43 피우스(비오) 2 : 1458~1464

에네아 실비오 데 피콜로미니는 1405년 시아네 근처 코르시냐노 마을에서 귀족 혈통의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시에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문학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법학은 그의 정신에 빈틈없는 통찰력과 질서를 부여해서 뒷날 행정과 외고 업무를 위한 토대가 되어 주었다. 피렌쩨에서 필렐포에게 인문학을 배운 후로 그는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42 이 형성기에 그는 상당히 모호한 형태를 보였다. 확고한 원칙도 없고, 성공 말고는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그냥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영리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 이런 무질서한 행동들 한가운데서도 학문에 대해서만은 정절을 지켰다. 도덕성을 망가뜨린 것과 동일한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성으로 그는 자연에 매혹되고, 여행을 좋아하고, 또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었기에 15세기의 가장 열성적인 작가이자 능변을 구사하는 웅변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43 그는 자신을 가리켜 "많은 것을 보려는 열망에 빠진(varia videndi cupidus)"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구두쇠는 많은 돈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을 그는 자주 하고 있다.

 

46 그는 젊은 날의 관능을 극복하고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교황이었다. 젊은 날의 애정 행각이나 또 교황에 맞서 공의회 편을 들었던 일들을 감추려 하지 않고 철회의 교령을 발표하여 하느님과 교회에 자신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겸손하게 요청하고 있다.

è 왜 변했을까? 진실로 학문에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è 나는 아직도 데미안의 죄악에 대한 의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48 교황 재임 마지막 시기에 피우스는 고위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개혁 프로그램 구성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는 쿠사의 니콜라스가 제출한 계획을 받아들여 그것을 교황의 교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에 개혁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관들 중 절반 정도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직권의 남용을 통해서 이익을 얻었다. 무관심과 정열적인 저항에 밀려 피우스는 패배했다. 그 사이에 도이칠란트, 보헤미아, 프랑스와의 힘든 관계들이 그의 에너지를 다 소모시켜 버리고, 그가 계획했던 십자군 전쟁은 그의 헌신을 모조리 흡수하고, 돈을 요구했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한 추기경들을 나무라고, 수도원의 기율을 강화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1463년에 그는 추기경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소를 해 보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즐거움을 위해 살고, 부를 축적하고, 거만하게 행동하고 살찐 노새와 말을 타고, 외투 자락을 뒤에 길게 끌고, 붉은 모자와 하양 두건 아래로 통통한 얼굴을 드러내고, 사냥을 위해 사냥개를 키우고 배우들과 식객들을 위해 많은 돈을 쓰면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추기경과 우리 궁정의 다른 관직을 가진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진실을 고백하자면 우리 궁정에 사치와 화려함이 지나치가.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렇듯 미움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정의롭고 분별 이쓴 것을 말할 때에도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렇듯 수치스러운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우리는 우리 선배들이 어떤 수단으로 교회를 위해 권위와 존경심을 얻었는지 물어야 한다. … 우리는 동일한 수단으로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 절제, 순결, 결백, 신앙을 위한 열성 지상에 대한 경멸, 순교를 향한 열망 등이 로마 교회를 드높이고 교회를 세계의 여주인으로 만든다.

è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어야 존경받는 양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돈이 곧 가치인데. 비단 이들이 성직자이기 때문일까? 성직자라서 돈은 많이 쌓아두되 생활은 겸손해야 하는 것인가? 다들 그러지 않는가. 훌륭한 교황 - 재산은 많았으나 생활을 겸손하다. 지휘자 정명훈이 전에 서울 시향으로부터 받는 연봉 20억원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정명훈은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하루 종일 음악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매일 일어나 음악을 고민하고 밥먹고 자는 일 밖에 하는 일이 없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스님과 같이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존경을 얻는 방법도 있기는 하겠지. 그러나 스님은 정말로 세속을 떠난 사람이고 세속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남에게 신세 지지 않고 그들과 동일한 life style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è 여주인이라는 표현, 독특하다.

 

51 마호메트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의 신앙이 무엇이든 그는 서양의 군대에 맞서 최종적으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은 교황의 약속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종교적 열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63 프란체스코 수도사이며 철학 및 신학 교수였던 사람(식스투스)이 르네상스의 첫 번째 세속화의 길을 간 교황이 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교황청을 이탈리아의 강력한 정치적 권력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진 최초의 르네상스 교황이었다.

 

67로마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적인 사면에서부터 교황직 자체까지도 말이다. 믿을 수 없는 인페쑤라의 말에 따르면 두 딸과 근친상간을 벌이고 나서 딸들을 죽인 남자가 800두카트를 지불하고 풀려났다고 한다. 보르지아 추기경에게 어째서 정의가 행해지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죽기를 원하지 않고 그가 돈을 내고 살기를 바라신다."

 

 

16장 보르지아 사람들 1492~1503

 

72 1466년에 그는 바노짜 데 카타네이와 어느 정도 항구적인 결합을 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스물네 살이었다. 불행히도 그녀는 도메니코 다리냐노와 결혼한 여자였다. 그러나 도메니코는 1476년에 그녀의 곁을 떠났다. 바노짜는 로드리고와의 사이에 네 명의 아이들을 두엇다. 1474년에 죠반니, 1476년에 체사레, 1480년에 루크레찌아, 1481년에 죠프레가 태어났다. 이들 네 사람은 바노짜의 비명에 그녀의 자식으로 기록되었고, 이런저런 기회에 로드리고 보르지아가 자신의 자식들이라고 인정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확고한 자녀 양육은 거의 부부와 같은 유대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보르지아 추기경은 다른 성직자들과 비교해 볼 때, 확고한 성실성과 안정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82 그는 한동안 아들 죠반니가 교황국가를 보호하는 일을 도와주기를 희망했지만 죠반니는 남자들을 통치하는 알렉산더의 능력은 없이, 오로지 여자들에 대한 민감성만 물려받았다.

 

85 알렉산더 6 - 그의 신앙심은 가짜였던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의 편지들은, 심지어는 쥴리아와 연관된 편지들조차도 개인적인 서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신앙심을 나타내는 구절들로 차 있다. 그는 활동적인 남자였고, 그 시대의 편안한 도덕성에 하도 익숙해져서, 그리스도교 윤리와 자신의 생활 사이에 별로 모순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학에서 철저히 정교 신앙을 가지듯이 그는 행동에서 완전히 세속적이었다.

è 왕들은 기도를 마친 후 전쟁을 하러 나가고, 교황들은 직업과 생활을 분리하지.

 

87 알렉산더는 열쇠와 제단과 그리스도를 판다네.

그 또한 옳지, 그 자신도 그것을 위해 돈을 냈으니.

è 황금 만능주의는 현대의 발명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과거에 더욱 순수한 원형이 보이지 않는가? 신앙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면.

 

88 알렉산더는 또한 대중의 여론에 너무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잔혹하게 몇 배로 부풀리는 중상모략에 드물게만 응수했다. 그는 강한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교적인 수단으로는 그것을 이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정치적 수단들(선전, 속임수, 음모, 징계, 전쟁), 로마의 귀족들과 이탈리아의 세력들 중에서 강한 국가보다 그리스도교 교회를 더 좋아하는 사람과, 또 교황청과 교황국가가 혼란을 겪고 허약한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성나게 만들었다.

è

 

4. 체사레 보르지아

 

92 죠반니가 죽은 직후 1497년에 체사레는 교황 사절 자격으로 나폴리로 가서 왕에게 관을 씌워 주는 스릴을 맛보았다. 아마도 왕관을 만진 일이 그의 피를 들끓게 했던 모양이다. 로마로 돌아오자 그는 자신의 성직 경력을 포기하게 해달라고 아버지를 졸랐다. 그를 풀어주기 위해서는 알렉산더가 추기경단 앞에서 체사레가 자신의 불법적인 아들(사생아)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알렉산더는 그렇게 했고, 젊은 사생아의 추기경 임명이 무효라고 선언되었다. 사생아 신분을 되찾은 그는 정치 게임에 열렬히 덤벼들었다.

è 진정한 아이러니군.

 

93-94

(체사레 보르지아)의 반지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네가 해야 할 바를 하라는 말이다. 그의 검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에서 나온 두 가지 구절이 새겨 있었다. 한 면에는 주사위는 던져졌다.가 새겨져 있었고, 다른 면에는 카이사르이거나 아무도 아니거나 라는 글귀였다.

 

101 과거에 다른 사람들에게 덫을 놓았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덫을 놓는 것은 적합한 일. 마키아벨리는 그와 오나전히 동감이었다. 그는 이 무렵 체사레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 체사레 보르지아

 

102 체사레는 결혼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은 아니었다. 애인들을 두었지만 누구도 오래 애인으로 삼지는 않았다. 어떤 여자가 그의 생활 안으로 점유하고 들어오기에는 그는 권력의 의지를 위해 너무 많이 마음을 뺏겼다.

 

103 체사레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사태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찌르는 능력을 깊이 존경했다. 또한 우연히 주어진 모든 기회를 잡고, 재빠르고 단호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그가 가혹한 기율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남몰래 경탄했다. 그가 뇌물, 책략, 속임수 등을 써서 적들의 숫자와 고집을 꺾고, 가능하면 군대의 전투와 사망자의 수를 줄이는 것을 좋게 여겼다. 외교관들은 민첩하고 겁이 없는 젊은 장군이 자기들보다 생각을 더 잘하고, 가장 예리하고 민감한 문제에서 자기들보다 앞서 있고, 필요할 때면 자기들이 가진 매력과 책략과 언변을 쓸 수 도 있다는 점을 분하게 여겼다.

è 악한 방법으로 선을 행하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겠구나. 기발한 접근법인데? 다만 악용될 소지가 있겠다.

 

104 로마의 소문은 '천천히 작용하는 독(cantarella)'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의 기본 성분은 비소로서, 분말 형태의 비소를 음식이나 음료에 떨어뜨리면(심지어는 미사에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에도) 인간이 그랬다고는 추적하기 어렵도록 천천히 죽음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천천히 작용하는 독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거부하고 잇다. 다만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보르지아 부자가 부자 추기경을 독살했을 것으로 믿는다.

 

105 체사레에 대해 그보다 더 고약한 이야기들도 만들어졌다. 알렉산더와 루크레찌아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그는 안마당에 사형이 확정된 몇 명의 죄수들을 풀어놓고는 그들이 이리저리 도망치는 동안 안전한 지점에서 그들에게 차례로 치명적인 화살을 소아서 자신의 활 솜씨를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는다. … 그러나 체사레가 실제로 이런 일을 행했단든 이야기보다는 외교관이 거짓말을 했다고 보는 편이 더욱 그럴싸하다. 르네상스 교황들의 역사는 상당 부분이 전쟁의 선전과 외교관들의 거짓말을 출전 삼아 쓰였다.

 

107 긴 금발 머리(너무 무거워서 그녀는 두통을 앓곤 했다.) 가볍게 춤추는 리듬 등에서 훨신 더 깊은 즐거움을 느꼈던 듯하다.

 

111 어떤 서기는 그녀(루크레찌아) "교황의 딸이며 아내이며 며느리"라고 불렀다. 이런 악담도 그녀는 조용히 체념으로 견뎠다. 오늘날 르네상스 시대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런 비난이 잔인한 비방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비방들이야말로 수백 년 동안이나 그녀의 명성을 만들어 냈다.

 

118 그러나 알렉산더의 통찰력은 정치적 도덕성의 결핍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는 한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 흐름을 예견하는 더 높은 지혜를 갖지 못했고, 또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118 알렉산더의 정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목적과 수단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목적은 전적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재산' (특히 고대 라티움 지방)을 무질서한 봉건적 남작들에게서 되찾는 것과, 교황(교회)국가들을 찬탈한 폭군들에게서 되찾는 일이었다. 알렉산더와 체사레가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들, 즉 전쟁, 외교, 속임수, 배신, 조약 위반, 동맹국 버리기 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국가들도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다.

 

119 의사들이 그에게서 피를 빼내고 있는 동안

è 이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환자가 빈혈로 고통받을 생각을 하면 현기증이 일어난다.

 

122 체사레는 왕의 군대를 이끌고 비아나에 있는 백작의 요새에 마주쳤다. 백작이 돌격했으나 체사레가 물리쳤다. 그러나 체사레는 패배한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몰아붙였다. 다시 무장을 갖춘 백작이 그에게 대항했고, 얼마 안 된느 체사레의 군대는 도망쳤다. 체사레는 단 한 명의 동료와 더불어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이것은 문제 많은 삶에 명예로운 종말이었다.

è 전에 CT simulation 방에서 과장님께 전해들은 누군가의 죽음이 생각난다. 알프스에서 등산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했었지. 나는 그의 죽음이 부러웠다. 그렇게 죽는다면 정말 최고가 아닐까? 죽을 방법을 모색해야 할까?

 

17장 율리우스 2 1503~1513

 

131 율리우스는 건강이 망가진 채 로마로 돌아갔다. 재앙에 의해 압도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패배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귀치아르디니는 이렇게 말한다.

 

교황은 자신의 희망에 의해 대단한 실망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는 전설적인 작가들이 안테우스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안테우스는 헤라클레스의 힘에 의해 기운을 잃고 땅에 떨어질 때마다 더 큰 힘과 활력을 얻었다고 한다. 역경이 교황에게 동일한 효과를 냈다. 그가 극도로 실망하고 낙담한 것으로 보일 때면 그는 정신을 되찾고, 더욱 확고하고 한결 같은 정신과 더욱 굽히지 않는 결단으로 다시 일어서곤 했기 때문이다.

è 지휘자 크렘페러를 떠올리게 한다.

è 도대체 교황과 왕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교황이 특별히 도덕적인 우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지위가 겹친달까

 

133 그가 '프랑스 병(매독)'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가혹한 소문이 돌았다. 다른 소문은 이번 질병이 절제 없이 먹고 마신 탓에 생긴 것이라고 했다. 그 어떤 처방도 그의 열을 내리는 데 소용이 없자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장례식에 대한 지시를 내리고, 라테란 공의회는 중단 없이 계속하라고 촉구했다. 자신이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추기경들에게 작별을 고하고서 살았을 대와 똑같은 용기로 죽음을 맞이했다.

è 매독으로 죽는 교황. 아이러니.

 

135 니콜라스 5세 교황이 학문 분야에서 그리스도교와 이교를 화해시킨 것처럼 자기는 미술에서 그 일을 해야겠다는 구상을 했다는 것이 그(율리우스 2)의 광대한 구상의 특징이었다. 라파엘로가 벽화들을 그려 놓은 바티칸의 방들은 고전 신화와 철학, 히브리 신학과 시, 그리스도교의 감상과 신앙의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성 베드로 성당의 저 주랑 현관과 둥근 지붕, 내부의 기둥들, 조각품, 회화, 무덤들보다 미술과 감정에서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결합을 더 잘 나타내는 것이 무엇인가? 이제 풍요로워진 로마로 몰려들어 온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 은행가와 상인들은 교황의 예를 좇아 화려한 경쟁을 벌이면서 거의 제국 시대의 영광을 지닌 궁전들을 지었다. 넓은 가로수 길들이 중세 도시의 혼잡을 뚫고, 혹은 그것을 가로지르며 뻗어 나갔다. 수많은 길들이 새로 열렸다. 그 길들 중 하나는 아직도 위대한 교황의 이름(쥴리아 가도)을 지니고 있다. 고대 로마가 그 폐허에서 솟아올라와 다시 카이사르의 집이 되었다.

 

143 이 도서관에서 라파엘로는 피콜로미니 추기경이 로마에서 사서 시에나로 가져온 고대 그룹 조각상인 [세 명의 우미의 여신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젊은 화가는 분명 자시의 기억을 돕기 위해 서둘러 그것의 드로잉을 만들었다. 그는 세 명의 나체 조각상에서 우르비노와 페루지아에서 자기에게 인상을 주었던 것과는 다른 세계와 다른 도덕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은 여성이 신의 근심스러운 어머니이기보다 아름다움을 지닌 즐거운 여신으로 나타나는 세계이며, 아룸다움을 숭배하는 것이 순결함과 경건함을 높이는 것과 똑같이 합법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세계였다.

 

146 1505년에 그는 피린쩨를 잠깐 떠나 페루지노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두 개의 주문을 완성했다. 성 안토니우스 수녀회를 위해서 제단화를 그렸는데, 그것은 오늘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한 그림의 하나이다. 아름답게 짜여진 틀 안에 그려진 그림에서 옥좌에 앉은 성모는 원즈워스의 말을 빌리자면 "경배로 숨이 멎을 듯한 수녀"처럼 보인다. - 콜론나 성모

 

156 라파엘로는 이 시기에 초상화로 오로지 티찌아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에 도달했다. 초상화는 특징적인 르네상스 산물로, 이 빛나던 시대 당당한 개인의 해방에 잘 어울리는 장르이다.

 

157 율리우스가 사랑하던 화가이며 조각가, 성급한 기질과 무시무시한 성격, 그리고 정신의 힘과 깊이라는 면에서 그와 경쟁할 만한 사람, 인류의 기록에 남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슬픈 예술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è 미켈란젤로는 베토벤과 닮은 구석이 많다.

 

159 미켈란젤로는 그 후 74년 동안 콧날이 주저앉은 코를 하고 살았다. 그렇다고 이 일이 그의 성정을 부드럽게 만들지는 못했다. 피에트로 토리지아노

 

163 정결한 여인들은 그렇지 못한 여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신선함을 보존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 피에타의 여인이 아들보다 젊은 것을 두고 한 말.

è 말이 되니? 젊은 여자에게 감정 이입이 더욱 쉽겠지.

 

167 그는 수많은 이유에서 레오나르도를 싫어했다. 그의 귀족적인 태도, 값비싸고 겉치레하는 옷차림,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 그리고 아마도 그때까지만 해도 화가로서 그가 더 큰 성공과 명성을 얻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71 1508 2월에 청동 조각상은 대성당 정문 위 제자리에 놓였다. 미켈란젤로는 3월에 피렌쩨로 돌아갔다. 아마도 다시는 율리우스 교황을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음직도 하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3년 뒤에 이 청동상은 용해되어 대포로 주조되었다.

 

173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가 받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지치고 기운이 없고 나이보다 일찍 늙었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눈은 예배당의 어두운 조명에 익숙해져서 태양 광선을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제는 책을 눈 아래에 놓는 것보다 위에 놓고 읽는 것이 더 쉬웠다고 한다.

è 예술가의 고생(!!!)에 고개가 숙여진다.

 

18장 레오 10 1513~1521

 

182 누구나 놀라고 즐거워했다. 알렉산더 6세와 체사레 보르지아의 시커먼 음모, 그리고 율리우스 2세의 전쟁과 소란과 분노를 겪은 다음, 태평스럽고 편안한 천성과 재치와 예의 바름으로,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후원으로 이미 유명한 젊은 남자가 아마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에게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185 그는 마음에 철학을 담기에는 너무 태평스러운 사람이었다. 온갖 결론들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를 그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대학 시절 이후로는 형이상학으로 마음을 힘들게 만들지 않았다.

 

189 그들은 당당한 궁정에서 300명이나 되는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그리고 그 시대에 알려진 온갖 예술과 사치품으로 궁정을 꾸몄다. 그들은 스스로 성직자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가이며 외교관이고 행정가들이었다. 그리고 로마 그리스도교의 로마 상원 의원들이었다. 그리고 상원 의원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사제의 금욕과 극기를 기대하는 외국인들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도덕적 기준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지 않고 미적 기준으로 판단했다.

 

192 레오 10 -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나는 창조주께서 인류에게 주신 것 중에서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참된 숭배만 빼고는 이러한 탐구보다 더 탁월하고 쓸모가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장식하고 그의 길을 안내해 줄 뿐만 아니라 모든 특수한 상황에 적응할 수도 있고, 역경에서는 위안이 되고, 번영할 때는 즐거움과 명예를 주는 유용한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온갖 우아함과 사회의 온갖 광채를 뺏기는 것이 되겠지요. 이러한 학문 탐구를 확보하고 확장하는 것은 주로 두 가지 상황에 달려 있느 듯이 보입니다. 이 분야에서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의 수와, 탁월한 텍스트의 넉넉한 공급이 그것입니다. 이들 중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 나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그들의 미덕을 보상하고 명예로 만들어 주고자 하는 나의 가장 정직한 소망과 성향을 앞으로도 아주 뚜렷하게 보여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98 아리오스토에게(레오의 눈에는 아마도 그가 페라라에서 충분히 보호를 받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교황은 그의 시구를 도둑질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서만을 내려주었다. 아리오스토는 서사시의 길이만큼 넉넉한 선물을 기대했다가 화를 내고 말았다. 아리오스토를 잃어버린 레오는 더 못한 광채와 더 짧은 숨결을 가진 시인들로 쉽게 만족했다. 그의 너그러움은 간혹 표피적인 재능에게도 천재에게 하듯이 넉넉한 보상을 해 주었다.

 

205 이들 고대 영혼의 신성을 생각해 보면 세계의 어머니이며 여왕인 이 고귀한 도시의 시체가 그토록 비참하게 난도질당한 것을 보면얼마나 많은 교황들이 고대 사원, 조각상, 개선문과 다른 건물들과 그 설립자들의 영광을 파손하는 일을 했던가!

 

209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교황에게 미켈란젤로에게 다른 일을 주라고 요구하자 레오는 이렇게 변명했다. 미켈란젤로의 탁월함은 인정하지만 "그는 자네도 보다시피 불안정한 사람이고 아무도 그와 잘 지낼 수가 없어." 세바스티아노는 이 대화를 친구(미켈란젤로)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성하께 자네의 불안함은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고, 그냥 자네가 위대한 작업에 헌신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또 자네가 일에 헌신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어."

이 유명한 무시무시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에너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89년 동안이나 지탱해 주기도 한, 사납게 불타오르는 힘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그 에너지를 단 하나의 목표, 곧 예술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모든 일을 다 무시해 버리는 의지의 힘이었다. 통합시키는 의지력에 의해 통제된 에너지란, 천재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형태 없는 돌을 도전으로 보고 "분노로" 그것을 잡아 망치로 때리고 끌로 파서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는 이 에너지는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삶의 하찮은 것들을 분노로 휩쓸어 내버린느 힘이기도 했다. 그 힘은 의상이나 청결함이나 표피적인 예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하고서, 약속도 깨뜨리고 우정도, 건강도 깨드리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깨뜨리고 몸과 정신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지만 그러나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회화, 가장 위대한 조각,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건축 일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이탈리아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는 개인의 당당한 아름다움과 의상의 화려함으로 빛나던 시대에 그런 일에 가장 적게 마음을 뺏긴 사람이었다.

è 사소한 것은 잊어버려라.

 

215 카스틸리오네가 라파엘로에게 그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내느냐고 묻자 그는 여러 여인들에게 들어 있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합쳐서 그들을 만들어 낸다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양한 표본들이 필요했다.

 

220 레오는 이제 자신과 라파엘로가 율리우스와 미켈란젤로에 맞서 동일한 공간에서 예술의 전투를 벌였으며, 자기들이 이겼다고 여겼다.

226 그러나 라파엘로와 키지는 이 신화(프시케와 큐피드)에서 종교적인 상징성 따위는 보지도 않고 완전한 남자와 여자들의 형태를 명상할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여기사 라파엘로의 감각주의에는 청교도의 비판을 무력하게 만드는 섬세함 과 우아함일 들어 있다.

 

216 권력과 특권을 위한 당파와 국가들 간에 되풀이되는 싸움이 단조로운 역사의 공허함이라고 느끼고, , 아름다움, 진실을 위한 헌신 이외에는 그 무엇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233 레오나르도의 섬세함과 미켈란젤로의 비극적 감각은 라파엘로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삶의 쾌락과 즐거움, 아름다움의 창조와 소유, 친구와 애인의 성실함으로 충분했다. …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미켈란젤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234 단테, 괴테, 키츠,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240 그는 예술 후원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가장 깨인 사람은 아니었다. 온갖 후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시절에 위대한 문학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리오스토와 마키아벨리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물론 그는 뱀보와 폴리찌아노를 평가했다. 미술에서의 취향은 율리우스의 그것만큼 확실하고 당당한 것이 아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아테네 학당은 그의 덕분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름다운 형태를 너무 사랑했고, 위대한 예술이 아름다운 형태 속에 감추고 있는 깊은 뜻을 너무 적게 사랑했다. 라파엘로를 너무 혹사시켰고 레오나르도를 너무 낮게 평가했고, 율리우스 2세처럼 미켈란젤로의 격한 성질을 통해 그의 천재성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위대하기에는 지나치게 안락을 좋아했다. 그를 이렇게 가혹하게 평가하기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붕괴

 

19장 지식인의 반란 1300~1534

245 어떤 세대든지 오직 적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경제적 고민에서 벗어나, 조상이나 주변의 사고방식 대신 자신만의 사고를 펼칠 여가와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사가는 또한 모든 시대에 소수의 남자와 여자들이 두뇌의 힘으로, 아니면 태생이나 상황의 이점으로, 미신과 신비주의와 경박한 믿음에서 벗어나 그것의 무한한 무지를 의식하고서 지식과 친절함을 갖춘 지성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만으로도 기쁘게 여긴다.

 

246 마키아벨리는 종교에 대해 그토록 회의적이었으면서도 "공기 중에 정령들이 득실거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위대한 일들은 기적, 예언, 계시, 하늘의 표지 등을 통해 미리 예고된다는 믿음을 가졋다. 피렌쩨 사람들은 자기들이 숨쉬는 공기가 자기들을 비할바 없이 영리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지만, 모든 중요한 일들은 토요일에 일어난다고 여겼으며, 또 어떤 거리를 통과해서 전쟁에 나가는 것이 확실한 불운이라고 여겼다.

 

250 교회의 반대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미신이 과학의 발전을 늦추었다. 출판물의 검열은 트리엔트 공의회에 뒤이어 반종교 개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중대한 장애가 되지 않았다.

 

251 이렇듯 밑에는 미신, 위에는 자유주의가 판치는 분위기에서 과학은 베살리우스가 나오기 이전 200년 동안 그저 평범한 발전을 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미술, 인문학, 시 등의 분야로 후원과 명예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며, 이탈리아의 경제적 혹은 지적 생활에서 과학적 방법과 사유에 대한 명백한 요청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같은 사람은 광범위한 우주적 전망을 갖고, 또 열성적인 호기심으로 10개 이상의 과학 분야를 건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큰 실험실도 없었고, 해부학은 이제 막 시작 단계였으며, 생물학이나 의학을 도와줄 현미경도 없고, 별들을 확대해 주거나 달을 자세히 관찰하도록 해 줄 망원경도 없었다. 고대 문헌의 발견은 고대를 이상화하는 회의적 에피쿠로스주의를 더욱 자극하고, 미래의 틀을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과학 탐구를 위해 스토아적으로 헌신하는 태도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르네상스는 미술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고, 작은 부분을 문학에, 철학에는 아주 조금, 그리고 과학에는 가장 조금 영혼을 바쳤다. 이런 의미에서 르네상스에는 페리클레스와 에스킬로스로부터 스토아주의자인 제논과 천문학가 아리스타르코스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 전성 시대의 다양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è 자금의 풍요가 반드시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과학적 사고에 대한 요구는 어떤 시대에 이루어지는가?

è 과학이 순수 예술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과학의 <순수예술로서의 아름다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은 것일까? 그 기원을 서양사에서는 그리스/로마 시대로 잡을까 했는데왜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를 답습하고 더 발전시켜 나가면서 과학의 업적에는 소홀하였는가?

 

253 가장 번창한 과학은 의학이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식욕 빼고는 무엇이든 다 희생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255 돌팔이 의사들이 여전히 수가 많았지만 의학적 치료는 더욱 조심스럽게 법으로 통제되었다. 의학 학위 없이 의료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벌금이 부과되었다. 이 경우 학위란 4년 간의 의학부 과정을 뜻했다. 어떤 의사도 동료와 상의하지 않고 중병을 진단해서는 안 되었다. 베네찌아 법은 의사와 외과 의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임상 기록을 교환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적어도 1년에 한 번 해부학 과정에 참석해서 지식을 혁신하도록 했다. 의학부를 졸업하는 학생은 환자의 질병을 절대로 질질 끌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처방을 제조하는 일을 감독할 것이며, 이 처방전에 따라 약을 짓는 약제사가 받는 요금의 일부를 받지 않을 것을 맹세해야만 했다. 같은 법률은(베네찌아, 1368) 처방전에 따라 약을 짓는 약제사의 요금을 10스쿠디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은 가치를 추정할 수 없는 동전이다. 특수한 계약에 따라, 병이 나을 경우에만 의료비를 지불하기로 한 사례들도 있다.

è 현대의 프로토콜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è 제약사의 리베이트를 금지하는 조항이 르네상스 시절에도 있었다니

 

è 그러나 항상 결과론적 해석이라는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60 '매독'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에서 가장 다양하면서도 가장 성실한 사람의 하나인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에 의해 처음으로 쓰였다. 그는 처음에 출발이 좋았다. 당시 이미 탁월한 의사들을 배출했던 명문가의 아들로 베로나에서 태어났다. 파도바에서 그는 모든 것을 다 공부했다. 코페르니쿠스와는 함께 공부했고, 폼포나찌와 아킬리니는 그에게 철학과 해부학을 가르쳐 주었다. 스물네 살에 그는 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그만두고 과학, 특히 의학 탐구에 헌신했고, 또 고전 문헌 연구를 좋아했다.

è 쫌 부러운 삶. 당시에도 의사를 배출한 가문이 명문가 가문이었던 모양이다.

 

263 삶의 두 가지 요소들이 다시 등장하면서 철학을 되살려 냈다.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갈등이 그 하나이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다시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과 아베로에스 주의로 갈라진 일이 그것이다. … 그들의 대표이자 대리인인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는 생애의 절반을 이 두 사상 체계를 화해시키는 데 바쳤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광범윟나 연구를 행했고, 심지어는 조로아스터와 공자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269 그가 빠져들었던 이런 논쟁들이 그를 지치게 하고, 그의 건강을 망치는 데 일조를 했다. 그는 이런저런 병으로 고생하다가 마침내 죽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힘든 자살 방식을 선택했으니 굶어 죽기로 한 것이다. 온갖 설득과 위협을 물리치고, 심지어는 강제에도 맞서 먹기와 말하기를 거부했다. 7일간을 이렇게 보내고 나서 그는 죽을 권리를 얻으려는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느끼고 이제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고 여겼다. "나는 기쁘게 떠난다." 그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모든 죽어야 할 존재들이 가는 곳으로."라는 대답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음식을 먹도록 마지막 권고를 했지만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è 굶어서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참 대단하다.

 

274 나폴레옹이 괴테를 만나기를 열망했듯이, 카를 5세는 볼로냐에서 마침내 귀치아르디니와 만나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귀족들과 장군들은 모두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귀족은 한 시간 안에 100명이라도 만들 수 있지만 이런 역사가는 20년이 걸려도 만들 수 없다."

 

278 마키아벨리의 지적 발전에서 전환점은 소데리니 주교의 보조자로 당시 우르비노에 있던 체사레 보르지아에게 파견된 일이었다(1502). 직접 보고를 위해 피렌쩨로 불려왔다가 아내를 얻음으로써 그는 세상에 태어난 일을 축하했다. 10월에 다시 체사레에게 급파되어 이몰라에서 합류했다 .이어서 세니갈리아에 도착해서 마침 보르지아가 자신에 맞서 음모를 꾸민 남자들을 성공적으로 함정에 빠뜨려서 목 졸라 죽이거나 가두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일들은 이탈리아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 탁월한 괴물을 직접 만난 마키아벨리에게 이것은 철학에서의 교훈이 되었다. 사상의 사람이 행동의 사람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경의를 표했다. 자신이 분석적/이론적 사색에서 위풍당당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야 할 거리를 깨닫자 젊은 외교관의 영혼에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자기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인 남자가, 2년 만에 12명의 폭군을 물리치고, 12개의 도시에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를 시대의 유성으로 만든 남자가 여기 있었다. 말을 그토록 아끼는 이 젊은이 앞에서 말이란 얼마나 허약하게 보는 것인가! 이 순간부터 체사레 보르지아는 마키아벨리 철학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니체 철학의 주인공이 된 것과 같은 일이다. 권력에의 의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존재에게서 선약을 넘어선 도덕성, 초인의 모델이 나타난 것이다.

è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남고 체사레는 역사에서만 겨우 살아남았다. 아이러니로군. 체사레는 마키아벨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270 폴리찌아노와 풀치의 문학과 피치노의 철학을 보면 로렌쪼 주변의 사람들이 내생에 대해 아무런 믿음도 갖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한 일이다. 페라라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은, 단테에게 그토록 두려울 정도로 사실로 여겨졌던 지옥을 가지고 아리오스토가 만들어 낸 갖가지 재미에서 드러난다. 르네상스 문학의 거의 절반이 성직자에 반대했다. 많은 용병대장들은 명백히 무신론자였다. 궁정인들은 분명 궁정의 여인(고급 창녀)들보다 덜 종교적이었다.(매우 탁월한 표현이다.) 공손한 회의주의는 신사의 표지이자 필수품이었다. 페트라르카는 많은 학자들의 마음속에서 이교 철학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좋아하는 것이 무지의 표지가 되었다고 탄식했다. 1530년 베네찌아에서 대부분의 상류층 인사들은 부활절 의무를 소홀히 했다. 그러니까 1년에 한 번도 고백성사에 가지 않은 것이다. 루터는 이탈리아에서 교육받은 계층 사람들이 미사에 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가서 인기 좋은 오류에 우리도 합세하자."

 

271

대학에 대해서는 어떤 사건 하나가 교수들과 학생들의 기질을 보여 준다. 폼포나찌가 죽은 직후에 그의 제자인 시모네 포르찌오가 피사 대학에서 강의를 해 달라는 초빙을 받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을 교재로 선택했다. 청중은 이 주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몇 사람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영혼이 어때요(,Quid de anima)?" 포르찌오는 [기상학]을 옆으로 치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하여]를 잡았다. 갑자기 청중은 모두 주목했다. 이 강의에서 그가 인간의 영혼은 사자나 식물의 영혼과 본질적인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저서 [인간의 정신에 대하여]에서는 그렇게 밝혔다. 그러고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에우제니오 타랄바는 1528년에 스페인 종교 재판에 고발되었는데, 젊은 시절 로마에서 공부할 때 세 명의 선생이 모두 그에게 영혼이 불멸이 아니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에라스무스는 로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간이 추기경들 사이에서 회의적인 토론의 주제가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떤 성직자는 에라스무스에게 내생에 대한 믿음의 어리석음을 설명하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비웃었다. 많은 살마들은 교황청 직원들이 미사에 대해 불경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하층 계급 사람들은 신앙을 지켰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은 분명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비토리아 콜론나의 예는 교육을 받아도 신앙심이 살아남을 수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위대한 사도신경의 영혼은 의심의 화살들로 꿰뚫렸다. 중세 신화의 장엄함음 중세가 쌓아 놓은 황금에 의해 녹이 슬어 있었다.

è 신앙이 죽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 또 교육받는 과정 동안, 신앙은 망각되었다가 다시 부활한다.

è 신앙을 가진 자들은 그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데,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도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느 사상가는 신앙에 대해 통찰한 후,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무신론자에게 더욱 적절하다. 그들은 신이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안다.

 

284 희곡으로 눈길을 돌려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무대에서 아주 뛰어난 희극 [만드라골라]를 섰다. 프롤로그는 비평가들을 향한 새로운 도전을 담고 있다. … 이 희곡은 놀라울 정도로 르네상스 도덕성을 보여 준다.  그는 어떤 여자라도 임신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 약을 먹은 다음 그녀와 동침한 최초의 남자는 머지 않아 죽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치명적인 모험을 자신이 감수하겠다고 제안한다. … 루크레찌아는 마침내 굴복하고 약을 마시고 칼리마코와 동침하고 임신한다.

è 임신이 약 때문이 아니라 남자의 변화(불임인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 기인함

è 머지 않아 죽게 된다. 인간의 여생은 100년이 안됨. 이 시간 역시 "머지 않은 시간"

엄청난 말장난이군.

 

289 누구든 국가를 창설하고 국가에 법을 부여하려는 사람은 모든 인간이 악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악한 본성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사실로 여기고 출발해야 한다. 그들의 악한 본성이 한동안 감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하며, 시간이반드시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고야 만다. … 얻고자 한느 소망은 실로 대단히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것이며, 인간은 할 수 있을 때마다 언제나 얻으려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들이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한다.

 

292 마키아벨리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신뢰성이 없음에 대해서는 신경을 ㅇ쓰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초자연적인 믿음의 체계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당히 뱃심 좋게 받아들였다. 그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거부한 부분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윤리, 선함과 온화함, 겸손, 무저항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그리스도교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비난한 부분이었다. 또 국가가 그 시민들과 똑같이 동일한 도덕적 규범에 묶여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이었다. 그릐 입장에서 보면 그는 국민이나 국가의 안전이 최고법이라는 원칙에 근거한 로마의 윤리를 더 좋아했다. "우리 나라의 안녕이라는 절대적 문제가 나타나는 곳에서 우리는 정의나 불의, 자비심이나 잔인성, 찬양이나 불명예 등을 생각할 수는 없다. 이런 모든 것을 다 옆으로 제치고 우리는 민족의 생존과 자유를 보호해 줄 그 어떤 노선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도덕성이란, 집단적 질서, 통합, 힘 등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행동의 규범이다. 정부가 국가를 방어하면서 국가가 국민에게 주입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 규범들에 의해 스스로도 제한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 그 의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외교관은 국민의 도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 "행동이 그를 고발한다면 결과가 그를 용서해 주게 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선량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애쓰면서 어떤 방식을 취하든지 그것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저지르는 기만, 잔인함, 범죄 등은 "명예로운 기만"이요, "영광스러운 범죄"이다. 그래서 로물루스가 형제를 죽인 일은 정당하다. 이제 막 생겨난 정부는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기갈기 찢기고 말 것이다. 보편적으로 합의된 '자연적인 법칙'이나 '권리'란 없다. 정치적 수완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정치란 도덕성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어야 한다.

è 동의한다. 정치가들을 욕하기야 하겠지만 이 역시 국민들의 정치적 행동일 뿐. 국민들도 결과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결과에는 만족한다.

è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하에서 타종교에 대한 배척과 정복이 무수히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쟁 사상자를 낸 원인이 바로 그리스도교 아니던가?

 

297 어느 정도 대중의 지원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사랑 없이 두려움만 얻거나, 아니면 두려움 없이 사랑을 얻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는 사랑을 버려야 한다.

 

298 군주가 모든 미덕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미덕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일은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 자비롭고 충성스럽고 인도적이고, 종교적이고 성실한 것으로 보이는 일이다. 실제로 이런 미덕을 가지는 것도 유리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필요성이 있을 때면 반대로도 행동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으로 그래야 한다. … 그는 위에 언급한 다섯 덕목들로 가득 차지 않은 말이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동정심, 충성, 인도적 요소, 종교성, 성실성 등을 보여 주어야 한다. … 자신의 행동에 색채를 부여해야 하며 또한 시치미를 뚝 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극히 단순하고 현재의 필요성에 깊이 몰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속이기가 쉽다.누구나 당신의 겉모습을 보지만 당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리고 이 드문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에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303 마키아벨리의 솔직함에는 어떤 자극의 요소가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다른 어디서보다도 생생하게, 거의 어떤 철학자도 감히 토론하려고 하지 않았던 질문에 마주치게 된다. 곧 정치가의 수오나은 도덕성에 묶여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성이란 그것을 가르치고 강요할 준비를 갖춘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들 사이의 도덕성은 국제법을 지켜야 한다는 대중의 의견과 물리적 힘을 갖춘 국제 기구가 구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 각국의 국민들은 밀림의 맹수들과 같다. 각국의 정부가 어떤 원칙을 고백하든 그들이 실제로 행하는 것은 [군주론]의 그것이 될 것이다.

è 겁나 명쾌하군. 존경스럽다.

è 결국 도덕성은 추구되어야 하는데, 추구할만한 상황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마키아벨리즘은 옹호될 수 있을까? 필요악으로써?

è 진실의 껍질은 여러겹이라서, 모든 말이 옳을 수 있다. 늘 경계하자. 진실의 창조성을 잊지 말고 늘 다른 관점의 진실을 보려고 노력하자.

 

20장 풀어진 도덕 1300~1534

309 인문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비판하는 성직자 계층과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 물론 눈부신 예외들이 있어서 지적 해방과 점잖은 태도를 함께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암브로지오 트라베르사리, 비토리노 다 펠트레, 마르실리오 피치노, 알두스 마누티우스 등. 그러나 그리스 로마 문학을 되살려 낸 소규모 지식인들 중에 압도적 다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이교도들처럼 살았다. 그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녔기에 뿌리가 뽑혔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월계관과 사례비를 구했고,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자와 그 마누라만큼이나 돈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천재성, 수입, 외모, 옷차림 등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말투가 거칠고,

싸울 때는 졸렬하고 치사했으며, 우정은 신뢰가 없고, 사랑은 덧없는 것이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아리오스토는 도덕적으로 오염될까 겁나서 아들을 인문주의자 선생에게 맡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마 운율을 갖춘 외설로 양념되어 있는 자신의 [분노한 오를란도]를 읽는 일을 아들에게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발라, 포지오, 베카델리, 필렐포 등은 도덕적으로 느슨한 생활로, 윤리와 문명의 기본적인 문제 하나를 요약해 주었다. 곧 도덕적 규범이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상벌이 필요한 것일까? 내생에 대한 믿음, 혹은 도덕적 규범이 신에게서 나왔다는 믿음이 꼭 필요한 것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è 도덕이란 무엇일까? 도덕은 주로 이타주의에 기반한 양심에서 시작하지. 벌은 마음의 고통이 곧 벌이다.

è 반성하게 하는 문구. 색깔표시.

 

313 1497년에 의사 가브리엘레 다 살로는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정상적인 웃기는 방식으로 임신되었다고 주장했는데도, 환자들의 보호를 받아 종교 재판을 벗어났다.

 

320 사보나롤라 시대에 지참금이 없어서 신랑감을 찾지 못한 소녀들이 많았다. 피렌쩨는 일종의 국립 지참금 보험, 혹은 일종의 소녀재단을 만들어서 결혼지참금을 내주고, 그녀들은 매년 일정 금액의 수수료를 지불했다.

 

320 결혼을 한 다음에도 여자들은 흔히 자시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지녔다. 그래서 로렌쪼의 아내는 계속해서 클라리체 오르시니 부인이라고 불렸다.

 

324 여성의 출현은 이 시대의 가장 밝은 측면의 하나이다. 유럽 역사에서 여성의 지위는 보통 부가 늘어나면서 함께 높아지곤 했다.

 

331 아이를 보살필 수 있는 재산이 늘어날수록 가족의 수는 오히려 줄어들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서는 인간에게 자손을 늘리라고 명령했지만 편안함은 불임을 권한다. 자녀들이 재산으로 여겨지는 시골에서도 여섯 명의 애들을 둔 가정은 드물었다. 애들이 부담이 되는 도시에서 가족은 소규모였다. 부자일수록 애들이 더 줄었고, 많은 가정은 아예 자녀를 하나도 두지 않았다. 예술가가 그린 아기나 동자들을 보면 이탈리아 가족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여주는가. 도나텔로와 루카 델라 로비아가 만든 성가대석, 또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 있는 안토니오 로쎌리노의 [이런 성 요한]에서처럼 조각 작품에서도 그렇다. 가족의 유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성실함은 이 시대의 도덕적 느슨함 가운데서 그럴수록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두드러져 보였다.

 

333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충분히 어려서 자신의 가르침과 교육에 순종하는 아내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 초기에 아내에게 어머니의 의무와 가정 경영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334 판돌피니는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는 옳았다. 상업과 공공 도덕은 르네상스 생활에서 가장 덜 매력적인 측면이었다. 오늘날처럼 그때도 미덕이 아니라 성공이 사람들의 판단 기준이었다. 공정한 판돌피니조차도 불멸을 위한 삶보다는 부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양심을 신축적으로 늘렸다. 왕들과 통치자들은 돈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동맹국을 배신하고, 가장 진지한 맹세도 깨뜨렸다. 예술가들도 이보다 더 낫지 않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선금을 받아 놓고 작품을 끝내지 않았으며 시작하지도 않는 경우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돈만은 토해 내지 않았다. 교황청은 돈 욕심에 대한 최고의 모범을 제시했다. 교황청의 위대한 역사가의 말을 다시 들어 보라.

è 황금만능주의는 차라리 고전주의로군.

 

깊이 뿌리 박힌 부패가 교황청의 거의 모든 자리를 점령했다. … 지나치게 많은 선물과 강제 징수가 모든 한계를 넘었다. 게다가 모든 부문에서 관리들이 일을 부정직하게 수행했고, 심지어는 위조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든 구석에서 교황청 관리들의 부패와 재정적 강제애 대해 극히 높은 소리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로마에서는 모든 일에 돈이 든다는 말까지 돌았다.

 

337 때로 잔인성은 집단적으로 전염성을 지녔다. 1502년에 아레쪼에서 강압적인 피렌쩨 위원회에 맞서 폭동이 일어났다. 아레쪼에 있던 피렌쩨 살마 수백 명이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가족 전체가 전멸되었다. 어떤 희생자는 옷을 벗기고 매달린 채로 불붙인 횃불이 엉덩이 사이에 꽂혔다. .. 폭력과 잔인성과 탐욕의 이야기들이 미신만큼이나 인기를 끌었다.

 

347 이탈리아의 도덕성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이탈리아 희극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비비에나의 [칼란드라]와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 같은 연극들이 이탈리아 상류층의 취향을 만족시켰다는 것, 심지어는 세련된 우르비노 같은 곳에서도 그랬다는 것,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교황들 앞에서도 공연될 수 있었다는 것은, 지적인 자유가 도덕적 타락과 결합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는 부분이다.

è 항상 우리는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 선을 어디까지로 두어야 하지?

 

352 이러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르네상스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뒤진 예술 분야였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가면서 교황청 수입이 없었고, 14세기 전제 군주의 궁정들이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탓에 이탈리아에는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위한 돈과 정신이 부족했다.

 

357 르네상스 음악의 위대한 특징은 이론이 아니며 기술적 발전도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의 세속화였다.

 

 

21장 정치적 붕괴 1494~1534

362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운이 다했다. 이탈리아가 서로 싸우는 적들과 국가들로 분열해 있는 동아,ㄴ 다른 유럽 사회에서는 도시 경제가 아니라 국민 경제의 발전이 봉건적 공국들을 군주국으로 강제로 변화시키면서 그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루이 11세 치하에서 통일을 이루었고, 봉건적 남작들을 신하로, 시민들을 애국자로 만들었다. 스페인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도가 카스티야의 아라곤과 결혼함으로써, 그리고 그라나다를 정복하고, 피로써 종교적 통일성을 확고히 함으로써 내부 통합ㅇ르 이루었다. 잉글랜드는 헨리7세 치하에서 통합을 이루었다. … 이탈리아 도시들은 오로지 약탈만 생각하는, 돈으로 산 용병대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치명적인 상처를 감당할 마음이 없는 소수의 용병부대를 가졌을 뿐이다. 한 가지 일만 더 일어나면 이탈리아의 무방비 상태는 유럽에 알려질 판이었다.

 

367 이때까지 이탈리아 전쟁은 국민을 고용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목숨보다는 경작지를 더 괴롭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탈리아 전체가 약탈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 전쟁의 해에 롬바르디아 평원이 얼마나 비옥한지 보았다. 그들은 이후로 롬바르디아를 거듭 침입했다. 프랑스 군대는 이탈리아가 갈래갈래 찢겨 정복자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373 베네찌아는 홀로 이 압도적인 동맹군에 맞섰다는 이유만으로도 동정을 얻을 만한다. 그리고 이 도시의 충성스러운 부자들과 징집된 가난한 사람들이 똑같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긴 태도로 피루스의 승리에 이를 때까지 싸웠기 때문에도 그렇다.

 

376 혼란스러워진 레오 10세의 고문관들은 마키아벨리에게 충고를 구했다. 그는 프랑스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에 반대했다. 교황청은 승리자 앞에서 마치 다른 쪽 편을 들었던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는 두 악의 세력 중 덜 나쁜 쪽인 프랑스와 협약을 맺으라고 충고했다.

è 마키아벨리답지 않은데? 도덕적 명분이 중요해질 만큼 정치적 중요성은 비등하였나?

è 마키아벨리의 조언이 긍정적이었는지, 뒷 부분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다.

 

385 클레멘스는 우유부단함을 정책을 삼았다. 생각을 극단까지 계속하고 그것이 행동을 대신하는 것이라 여겼다. 한 가지 결단을 내려야 할 이유를 백 가지나 보았지만 그에 반대할 이유도 백 가지나 보았다. 마치 부리단의 나귀가 교황의 옥좌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394 책들, 문서고, 미술품의 파괴는 엄청났다. 전혀 기율이 없는 폭도 떼거리의 지휘권을 이어받은 오랑쥬 공 필리베르가 바티칸 도서관을 자신의 사령부로 삼아서 이곳만은 보호했다. 그러나 많은 수도원과 개인 도서관들은 불꽃이 되어 날아가고 많은 소중한 문서들이 사라졌다. 로마 대학은 심하게 약탈당하고 직원들은 흩어졌다.

è 왜 이런 곳까지 파괴하지?

 

401 교황이 피렌쩨를 다룬 방식은 메디치 가문의 타락을 확인해 준 일이었다. 동시에 로마를 복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 가문을 위대하게 만든 행정적 천재성과 미적인 감식안의 불꽃을 다시 보여 주었다.

 

404 발다싸레 페루찌(B.Peruzzi)는 그보다 야망이 컸다. 그의 낭랑한 명성은 한 세대 동안 이탈리아 산맥 저편까지 울려 퍼졌다. 그는 직조공의 아들이었다.(에술가들은 대개 낮은 혈통 출신이었다. 중산층은 유용성을 먼저 구하고 노년기에 아름다움을 구할 시간이 생기기를 희망한다. 귀족층은 예술을 보호하기는 했지만 예술의 생활보다는 생활의 예술을 더 좋아했다.) … (405) 황제군이 로마를 유린할 때에도 그는 그곳에 있었다. 바사리의 말에 따르면 그는 특별히 곤욕을 치렀다. "그가 근엄하고 고귀한 모습이어서 그들이 그가 변장한 고위 성직자인 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에게 상당한 몸값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훌륭한 초상화를 그려서 자신의 낮은 신분을 입증하자 그들은 그가 가진 것을 셔츠만 빼고 모두 빼앗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그를 놓아 보냈다. 그는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상태로 시에나로 돌아갔다. 시에나 정부는 돌아온 탕아를 다시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요새 건설을 위해 그를 고용했다.

è 예술가의 아이러니란.

 

413 역사가 파스토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황들의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겨회에는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종말

 

22장 베네찌아의 황혼 1534~1576

 

419 야코포 단토이노 디 야코포 타티는 피렌쩨에서 태어났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학교 가기를 싫어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런 성향을 격려했다. 그를 상인으로 만들기를 원하던 아버지의 뜻은 꺾였다. 그래서 야코포는 조각가인 안드레아 콘투치 디 몬테 산 사비노(이름이 다 왜 이래) 밑의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는 젊은이를 몹시 사랑해서 그를 잘 가르쳤고, 야코포는 그를 아버지처럼 여기다가 나중에는 스승의 별칭인 산보니로르 자신의 성으로 받아들였다.

 

428 아리오스토는 1532년 판 [분노한오를란도]에 아레티노의 이름에 두 개의 타이틀을 덧붙여 준 2행을 삽입했다.

 

Eccoil flagello

De' principi, il divin [Peitro Aretino

왕자들의 채찍을 보라,

저 신적인 피에트로 아레티노를.

 

머지않아 시대의 가장 거칠고 가장 야비한 작가를 신적인(divine) 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429 그의 풍자문은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들의 힘은 대부분 그 시대에 너무 밀접하게 연관된 지역의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기에 지속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433 (아레티노)가 어떤 미덕을 가졌든 동물적인 기운을 잔뜩 포함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도덕적 규범을 배운 적이 없는 마음씨 착한 동물이었다.(그 시대에는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가 있는 일이지만) 그는 중요한 어떤 사람도 어떤 도덕 규범을 진짜로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438 아우그스부르크에서 돌아온 다음 티찌아노는 이제 여행응ㄴ 충분하다고 SMRRUTEK. 그는 일흔 다섯살이었고 분명히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아마 너무 바빴던 것이 그의 장수의 비결이었을 것이다. 연속적으로 그림에 빠져서 그는 죽는 것을 잊었다.

 

442 어린 시적 불확실성의 기억이 그를 마지막까지 욕심 많은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이제는 부자였다.

 

446 리돌피의 이야기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야코포(틴토레토)는 티찌아노 작업장을 떠난 다음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열심히 모작하고 실험을 함으로써 독학했다. 그는 해부학을 익히기 위해 시체를 해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물을 맹수와 같은 열렬함으로 관찰하고 또 자신의 그림에서 그것을 자세히 포착하곤 했다. 2차원에 3차원을 그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피렌쩨와 로마에 있는 고대 조각상들과 미켈란젤로 자각품의 주형을 떠서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했다. 이 주형들을 자신의 작업장에 놓고 여러 가지 명암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빛의 양, 특성, 투사 등을 변화시키면 나타나는 모습의 변화에 매혹당했다. 그러면서 점차 어두운 배경과 무거운 그림자를 지나치게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손, 얼굴, 의상, 건물, 풍경, 구름에 나타나는 명암의 장난을 그리는 전문가가 되었다. 탁월함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그 어떤 조약돌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는 조급함과 완성도의 결핍이 나타났다.(아마도 독학의 대가였던 듯. 이것은 그의 예술이 일반의 인정을 받는 일을 늦어지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러 해 동안이나 기회를 찾아다녀야 했다. 가구에 그림을 그리고, 집의 정면부에 벽화를 그리고, 건축갇르에게 낮은 가격으로 장식 일을 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자신의 그림들을 성 마르코 광장에 펼쳐 놓고 팔곤 했다. 누구나 티찌아노를 원했다. 그리고 티찌아노와 아레티노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누구도 티찌아노 말고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티찌아노가 바쁠 경우에는 보니파찌오 베로네제를 고용하도록 열렬히 노력했다. 틴토레토는 아레티노가 그림을 중매하는 일에 원망을 품었다. 그러나 뒷날 아레티노가 자기에게 와서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을 때, 틴토레토는 호주머니에서 아주 인상적인 총을 거내서 그것으로 아레티노의 거대한 몸을 측정하는 듯이 굴면서 이 두려운 협박꾼이 두려워하는 꼴을 즐겼다. 그 이후로 아레티노의 펜은 틴토레토에게 친절하게 되었다.

 

454 앙리는 이 초상화를 아주 좋아해서 화가에게 기사 작위를 주겠노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것을 면제해 달라고 빌었다.

 

465 베러네제는 세계의 가장 밝은 면을 그리기를 원했다. 그리고 비할 바 없는 광채로 그 일을 했다. 그는 삶의 즐거움에서 석양의 고아채를 내는 베네찌아를 그렸다. 그의 세계에는 오로지 잘생긴 귀족들, 당당한 마나님들, 매혹적ㅇ니 공주들, 관능적인 금발 미인들뿐이다. 그리고 절반 정도는 잔치를 즐기는 중이다.

è 르네상스는 인류의 환락의 시간 같다.

 

466 기술적인 완성은 이미 성췾되었다. 최고의 높이들은 이미 측정되었다. 이제는 느린 하강을 거쳐 18세기에 티에폴로가 장식회화에서 베로네제와 경쟁을 하고, 골도니가 공화국이 사라지기 전에 최후의 광채의 폭발 속에서 베네찌아의 아리스토파네스가 된다.

 

23장 르네상스가 이지러지다 1534~1576

469 시칠리아는 비적들의 소굴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유일한 위안은 카를 5세에게 정복당한 결과 터키 사람들의 약탈을 면제받았다는 정도였다.

 

474 노예 제도를 주요 경제 수단으로 복구한 것도 이 시대의 일이다. 교황 파울루스 3세가 1535년에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했을 때 교황은 영국 병사를 잡기만 하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노예로 삼는 것이 합법이라고 선언했다.

 

479 의학은 이탈리아가 쇠퇴하던 이 시기에 상당히 중대한 발전을 거둔 유일한 과학이었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은 여러 해 동안이나 니탈리아에서 학생과 선생 노릇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1496년에서 1506년까지, 베살리우스는 1537년에서 1546년까지.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각기 폴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훔쳐다가 이탈리아를 계속 명예롭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살리우스의 뒤를 이어 파도바 대학 해부학 교수가 된 레알도 콜롭느느 [해부학]에서 혈액의 폐순환을 상세히 설명했다. 아마도 세르베투스가 12년 전에 같은 이론을 내놓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 일이었을 것이다. 콜롬보는 파도바의 로마에서 인간의 사체를 해부했다. 성직 계츠으이 어떤 반대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88 기울어 가는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젊은 국가를 다스리는 것보다 수비다. 기운이 쇠약해진 생명력은 복종을 환영하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에 의해 다시 패배한 피렌쩨는 피곤한 채로 클레멘스 7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497 그는 자기가 "비천하게 태어나" 가족을 유명하게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498 그곳에 자리를 잡자마자 그는 싸우다가 어떤 젊은이를 찔렀다. 그를 죽였다고 믿고는 다시 로마로 도망쳤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을 상세히 살펴보고 빌라 키지와 바티칸에 있는 라파엘로의 그림들도 탐구했다.

è 죄인의 몸으로 도망쳐서 그림을 보는 기분은 어땠을까? 죄책감과 동시에 초인의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삶의 끝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끝단의 떨림을 느꼈을 것이다.

 

499 (첼리니)의 신학은 그의 도덕성만큼이나 독립적이었다. 언제나 옳았기 때문에 (한번만 빼고) 그는 신이 자기편이고, 자기 팔에 힘을 더해 주신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때 도와달라고 신에게 기도했고, 자신의 성공에 대해 그분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애인 안젤리카를 찾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에 신이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악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칠리아 마법사가 한밤중에 황량한 콜로세움으로 데려가서 바닥에 마법의 원을 그리고 불을 피우고 불꽃에 향수를 흩뿌렸다. 그리고 히브리, 그리스, 라틴어로 악령들을 불렀다. 첼리니는 눈앞에 수백 가지 환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자기가 다시 빠른 시일 안에 안젤리카와 재결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믿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밤새도록 그는 악령들을 보았다.

 

502 분명히 이 고소인은 감히 더 이상 덤비지 못했고 첼레닌느 다른 출구로 에너지를 돌릴 수 있었다. 그의 파리 작업장에는 "가난한 젊은 아가씨 카테리나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주로 작품 때문에 붙잡아 놓았다. 모델 없이는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로서 나는 그녀를 즐거움을 위해서도 이용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많은 선물에 넘어가서 조수인 파골로 미체리와도 잤다. 첼리니는 이 말을 듣고 힘이 다 빠질 대까지 그녀를 두들겨 팼다. 그의 하인 로베르타가 별 것 아닌 일로 가혹한 벌을 주었다고 그를 비난해따. "프랑스에는 뿔없는(오쟁이 지지 않은) 남편이 없다."는 것도 모른단 말인가? 다음 날 그는 다시 카테리나를 모델로 삼았다. "그동안에 어느 정도 사랑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마지막에 전날과 같은 시각에 그녀가 나를 얼마나 열 받게 만들었는지 나는 전날과 똑같이 두들겨 팼다. 이렇게 우리는 며칠간 똑 같은 일을 반복했다. … 그 사이에 나는 내게 가장 큰 명예가 되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다른 모델인 쟌느는 그에게 딸을 낳아 주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지참금을 주고, "그 순간부터 그녀와는 전혀 상종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나중에 유모에 의해 베개로 덮여 질식해 죽었다.

è 이런 개 쓰레기를 봤나.

è 만약 이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면 어떨까?

 

511 최후의 심판

레오나르도가 그를 가리켜 단테에게서 배운 사람이라 불렀던 우울한 예술가가 다시금 지옥의 소금물에 자신을 흠뻑 적시고는 그 공포를 벽으로 옮겨 노았고, 세월이 흘러도 미래의 교황들은 미사를 드릴 때면 자기들 앞에 피할 길 없이 놓인 최후의 심판을 향해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근까지 인간의 몸을 비웃고 헐뜯었던 이 종교의 수도에서, 그는 붓을 들었으나 조각가로서 수없이 많은 상태에 자세를 취한 몸들을 그렸다. 지옥의 고통에 의해 뒤틀리고 일그러진 몸, 죽은 사람들이 나른하지만 흥분해서 올라오는 모습, 운명적인 소환을 알리는 천사들의 부풀어 오른 몸,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 주고 있지만, 거인의 어깨와 헤라클레스의 팔을 지닌 채, 하느님의 계율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지옥으로 집어던지는 그 강인한 몸.

 

519 미켈란젤로는 러스킨이 말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정의를 완전히 충족시켰다. "작품 전체에 가장 위대한 발상을 가장 많은 숫자로 구현한 사람", "정신의 가장 높은 능력을 행하고 드높인" 사람이었다.

 

마치는 글

 

무엇보다도 르네상스는 물질적으로 똑똑한 소수가 단순한 다수를 경제적으로 착취한 바탕 위에 자리 잡았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의 부는 수많은 유럽 가정의 헌금에서 온 것이었다.

 

르네상스 예술은 (고발을 계속하자면) 아름답지만 고귀한 적은 드물다. 세부적으로는 고딕 예술을 능가하지만 그 장엄함, 통일성, 전체적 효과에서는 고딕만 못하다.

è 그러면 르네상스의 의의는 무엇이지?

 

529 18세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은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다시 태어났다. 볼테르와 기본에서부터 괴테와 하이네에 이르기까지, 위고와 플로베르, 텐느와 아나톨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이 정신은 계속 전해졌다. 혁명과 반혁명을 통하여, 진보와 반동을 통하여, 또한 전쟁에도 살아남아서 끈질기게 평화를 귀한 것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도처에는, 정신적 자유, 미적 감수성, 친절하고 공감이 가는 이해력이라는 유산에 양분을 주고 그것에 따라 사는 도회지의 튼튼한 정신들이 있다. 바로 정신의 나라 친구들이다. 삶의 비극을 용서하고 감각과 정신과 영혼의 환희를 포옹하는 사람들. 미움의 찬가 한가운데서, 그리고 대포의 굉음을 넘어 자기들의 가슴에 언제나 울리는 르네상스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다.

 

 

 

 

 

내가 저자라면

 

 

두번째 읽으니, 확실히 이야기가 보이고 더욱 애정을 가지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만약 사전 지식이 풍부했었더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보르지아 가문에 관한 미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팬이라면 윌 듀런트의 르네상스는 정말 재미있는 역사서였을 것이다.

 

개개별 서술의 총합이 곧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으로 윌 듀런트의 산물을 폄하할 과오를 저지를 뻔했다.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고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의미보다 실존이 우선한다. 윌 듀런트는 자신의 깊은 사고력과 문장력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지만, 이 책은 확실히 역사서이지 해설서는 아니다. 르네상스에 관한 입문서이자 백과사전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내리라고 생각한다. 더 자세한 읽기는 개인의 몫이 될 것이다.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고 단지 최상의 책을 상상한다면, 나는 당연히 시각적 컨텐츠를 더욱 보강할 것이다. 화려한 르네상스를 글과 함께 바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사진 자료를 첨부할 수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또한 지리적 위치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도도 그 때 그 때 제공한다면 좋을 것이다. 2독 하면서 이탈리아 지도를 찾아보았는데, 지리적 접근성으로 설명되는 일화가 꽤 많았다. 확실히 시각 자료는 사건을 더욱 명확하게 알게 한다.

 

인터넷을 충분히 활용한다는 가정 하에, 2012년 버전의 문명 이야기는 번역 시 장소 이름까지 원어로 알려주는 것이 좋을 뻔했다. 인물의 이름은 원어 주석이 달리지만 장소의 이름은 한글명만 표기되어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는데 제한이 많았다.

 

만약 역사서를 저술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윌 듀런트가 이 책에서 보여준 구성력을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적 구성과 횡적 구성이 유기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마치 정갈하게 놓인 서랍장 양말들을 보는 기분이다. 당연히 잘 읽히고 깔끔하다. 반평생을 저작에 힘써온 작가의 노련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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