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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0일 05시 45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 이전 과제와 동일함.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첫 번째 마음에 드는 글귀, ■ 두 번째 마음에 드는 글귀, ■ 나의 생각

 

1장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시대

 

50 페트라르카는 볼로냐의 정신은 좋아했지만 법의 문자는 싫어했다. "나는 부정직하게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직하게 행동할 것을 바라기 어려운 기술을 습득하는 일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내 성향에 어긋났다." 법률 논문에서 그의 관심을 끈 것이라고는 "수많은 고대 로마 문헌의 인용"이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대신 베르킬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등을 찾아낼 수 있는 대로 찾아내 모조리 읽었다. 그들은 그에게 철학과 문학 양쪽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는 그들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처럼 글을 쓸 것을 갈망했다. 부모가 죽자(1326)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아비뇽으로 돌아와 고전 문학 및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50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327년 수난의 금요일에 한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사랑을 거부한 일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를 자기 시대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열광적으로 자세히 묘사했지만 그녀의 신원의 비밀만은 감쪽같이 감추었기에 그의 친구들은 그의 뮤즈가 그의 창조물이라고 여겼다.(그러면서 그의 모든 정열이 문학의 특권이라 여겼다.) 그러나 밀라노에 있는 암브로시아 도서관에 소장된 베르길루우스 사본의 여백에 적혀 있는 글은 그가 아마도 1348년에 썼던 것으로 여겨진다.

 

  미덕으로 빼어난 사람, 그리고 내 노래를 통해 널리 찬양을 받은 사람 라우라가 처음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추후 1327년이 되는 해, 4월의 여섯 번째 날, 아비뇽 산타클라라 교회에서의 첫 번째 시각에 그 빛은 지상에서 꺼지고 말았다.

 

51 그는 음유 시인들의 땅인 프로방스에서 살았다. 음유 시인들의 노래의 메아리가 아비뇽에도 살아 있었다. 그보다 한 세대 전에 젊은 단테가 그랬듯이 페트라르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유 시인이 되어 자신의 정열을 수많은 시구로 바꾸었다.

 

51 그는 이탈리아 소네트 형식을 물려받아 그것을 어려운 운율 형식으로 만들었고 여러 세기 동안 이 형식이 이탈리아 시문학의 기본 틀을 이루었다. 강물을 따라 혹은 언덕들 사이로 산책하고, 무릎 꿇고 저녁 기도나 미사를 드리고, 방의 정적 속에서 동사와 형용사들 사이로 길을 찾아 헤매면서 다음 21년 동안 그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살아 있는 라우라에게 바치는 소네트 207편과 온갖 종류의 다양한 시들을 썼다.

 

52 지금도 페트라르카의 저 찬란한 언어는(자음에 대해 모음이 거둔 빛나는 승리)아름다움의 최고봉을 이루고 있기에 오늘날까지도 아무도 그 봉우리를 다시는 정복하지 못했다. 그의 시가 담고 있는 생각이야. 이방인이 번역할수 있겠지만 누군들 그 음악을 번역할 수가 있을까?

 

55 이 땅의 발치로부터 그는 문학의 세계 절반을 움직였다. 그는 친구들과 교황들과 왕들에게, 그리고 죽은 작가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를 향해 긴 편지를 써 보내기를 좋아했다.

죽은 고대 문인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편지를 쓴다. 어떤 느낌일까?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편지를 쓴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아내와 연애할 때가 생각난다. 퇴근 시간에 맞춰 아내 회사 앞에 도착했다. 퇴근시간이 30분 정도 남았을 때, 아내를 생각하면서 편지를 썼다.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을 그대로 편지에 옮겨 담았다. 편지를 쓸 때, 그 때의 느낌은 살아있다. 심장의 두근거림까지 담아서 아내에게 보여준다. 글을 읽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을 느낀다.

 

55 겉으로는 가톨릭교의 모든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정신으로는 고대와 더불어 살았다. 호메로스, 키케로, 리비우스 등이 살아 있는 동료들인 것처럼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자신이 영웅적인 로마 공화정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불평했다. 자신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 하나를 라일리우스라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55 르낭을 그를 가리켜 "라틴 서방에 고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도입한 첫 번째 현대인"이라고 불렀다.

 

56 그는 인간이 지상의 삶에 관심을 가질 권리를 명백하게 묘사한 최초의 작가이며, 또한 지상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증가시켰고, 부유함을 얻기 위해 노동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르네상스의 아버지였다.

 

57 나폴리에서 삶은 즐겁고 도덕은 편안하게 느슨했다. 여자들은 아름답고 접근이 쉬웠다. 시인들은 이런 사랑의 분위기에서 시를 위한 많은 주제와 자극을 찾아냈다. 이런 나폴리에서 보카치오는 성숙했다.

 

58. 페트라르카가 법을 싫어했듯이 그는(보카치오) 상업을 싫어했다. 빈곤과 시를 선택하면서 오비디우스에게 마음을 뺏겨 버렸다. 그러면서 그의 '변신이야기' '유명한 여성들의 편지'를 즐기고, '사랑의 기술'을 대부분 마음으로 배워 익혔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비너스의 성스러운 불길이 어떻게 가장 차가운 가슴에서도 타오르도록 만드는가"를 보여준다고 했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은 고전적인 남녀관계에 대한 고대 로마인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성의 대한 생각을 자극했으며, 결국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추방까지 당하게 된다. 그리고 남녀노소 누구나가 이 책을 읽었으며, 로마인들은 성에 대한 탐닉으로 발전하고 정치인들까지 타락의 길에 빠져들게 된다. 아마도 보카치오도 이 책을 즐겨 읽으면서 그 시대의 연애이야기를 글로 표현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데카메론'을 읽으면서 그 시대의 성에 대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58 보카치오에게 마리아는 아프로디테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였다. 세상에 그녀의 금발 머리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 없었고, 그녀의 악동 같은 눈길보다 더 유혹적인 것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피암메타(Fiammetta, 작은 불꽃)라 부르고 스스로 그녀의 불길 속에 타버리기를 원했다.

 

62 말년에는 자신의 생김새보다는 업적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자랑은 가장 위대한 성인들만이 피할 수가 있는 결점이다. 그의 편지들은 매력적이고 빛나는 것이지만 겸손한 척하는 태도와 솔직한 자부심이 없었다면 더욱 빛났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그렇듯이 그도 갈채를 좋아했다. 명성을 갈망하고 문학적 '불멸'을 원했다.

 

63 붓보다 더 가볍고 동의하기 쉬운 부담도 없다. 다른 즐거움들은 우리를 매혹하는 동안에 우리를 망가뜨리거나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펜은 즐거운 마음으로 붙잡고 만족한 심정으로 내려놓는다. 그것이 그 주인과 대가(大家)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수천 년 뒤에나 태어날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 지상의 즐거움 중에서 문학()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으며,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보다 더 온화하고 믿을 만한 것도 없다. 그렇듯 적은 노력이나 갈망을 바친 것만으로 삶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주인과 그토록 함께하는 것은 달리 없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만큼 나를 즐겁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없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글을 습작에 불과하지만, 언제가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 놓고 싶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언제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변경연에 들어 온지 6개월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나 자신의 탐구를 통해서 살아온 역사를 써내려 갔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새로운 나의 역사를 써내려 가고 싶다. 어쩌면 지금까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으며 현재까지 걸어온 발자취가 책의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그 과정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63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 형태와 소리로 드러난 아름다움, 자연과 여자와 남자의 아름다움에 민감해야만 했다.

 

64 마흔이 넘은 뒤로는 여자를 육체적으로 건드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문학적 활동과 아내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신체와 정신의 힘이 대단히 커야만 한다.

 

64 에피쿠로스의 이름이 무신론자라는 말과 동의로 사용되던 시대에 에피쿠로스를 찬양한다는 용기를 보여 주였다.

 

69 자유가 그렇듯이 권력도 오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다. 리엔쪼는 현실정치가 되기에는 웅변가로서 지나치게 위대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위대한 문구, 약속, 주장들을 스스로 믿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위해 중독되었다.

 

78 이제 예술가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대의 사조를 받아들여 조합이나 그룹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산품에 자기 이름을 밝혀 놓았다.

 

78 페트라르카가 14세기의 시문학을 지배했듯이 죠토 디 본도(Gitto di Bondone) 14세기의 회화를 지배했다. 이 예술가는 사방을 돌아다녔다는 점에서 페트라르카와 우열을 다투었다. 화가, 조각가, 건축가, 자본가, 세속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예술적인 개념, 실용적인 장치, 재치 있는 답변 등으로 무장하고 죠토는 평생 동안 루벤스 방식의 자신감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79 파도바로 옮긴 죠토는 3년 동안 아레나 예배당의 유명한 벽화를 그렸다. 아마도 파도바에서 그는 단테를 만났을 것이다. 이미 피렌재에서 그를 알았던 것 같다. 항상 재미있고 이따금 날카로운 바사리는 단테가 죠토의 "가까운 동료이며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피렌쩨의 행정관 궁전(바르젤로)벽화에 있는 단테의 초상화를 죠토가 그렸다고 말한다. 시인은<신곡>에서 예외적인 상냥함으로 이 화가를 찬양하고 있다.

 

81 그렇다면 파도바와 아씨시에 있는 죠토의 작품이 미술사의 한 경계표가 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눈길을 모든 각도에서 관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리듬 있는 구성이다. 그리고 조용한 움직임의 품위이며, 부드럽고 빛나는 색채와 탁월한 이야기 서술의 흐름, 깊은 감정조차도 표현이 절제된 것, 그리고 시끄러운 장면들을감싸고 있는 장엄한 고요함이다. 이따금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사실적인 초상화는 과거의 미술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동작에서 복 느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들은 비잔틴 미술의 경직됨과 어둠을 누르고 죠토가 승리한 요소들이다. 그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그로부터 백 년 피렌쩨 미술은 그의 모범과 영광을 이어받았다.

 

92 보카치오는 나폴리의 느슨한 즐거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대단히 자주 관능적인 표현으로 사랑을 생각했다. 그는 기사도의 사랑 방식을 비웃었고, 단테가 돈키호테라면 자신은 산초 판자의 역할을 맡아 했다. 두 번 결혼했으면서도 그는 자유 연애를 믿고 있었던 듯하다.

 

104 그는(페트라르카) 번성할 때는 겸손을, 불운에서는 용기를 권고한다. 지상의 승리나 재물에 행복을 연결시키지 말라고 경계한다.

 변함없는 진리임에도, 막상 번성하고 승리를 쟁취한 후에 재물을 얻었을 때, 우리들은 겸손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이 연결시킨다. 자신 스스로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겸손을 항상 생각하고, 어려울 때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가진 재물에 만족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진리가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그리고 기도할 때, 감사의 마음을 먼저 가진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번성과 재물에 감사하면 계속해서 감사하는 일에 나에게 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불우한 일이 오더라도 그것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불행 뒤에 큰 행복이 다가오리라 생각하며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104 이 무렵 그는 가장 위대한 산문 작품인 <유명한 사람들의 생애>를 썼다. 로물루스에서 카이사르에 이르는 로마 명사(名士) 31명의 전기들이다. 카이사르의 생애에 바쳐진 8절지 350분쪽 분량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카이사르의 생애에 대한 가정 철저한 서술이었다.

 

105 그는 이제 정통 그리스도교로 마음을 돌리고 책을 팔아 버리고 수도사가 될 생각을 했다. 페트라르카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중용의 길을 선택하라고 간청했다. 사랑의 시들과 단편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라틴과 그리스 고전을 진지하게 탐구하라고 권한 것이다. 보카치오는 "존경하는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여 서유럽에서 최초의 그리스 인문학자가 되었다.

 

107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기를 바란다. 글을 쓰고 있을 때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다면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에 젖어 있을 때 말이다.

 자신이 원했던 일을 찾아서 그 일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을 때, 찾아온 죽음을 얼마나 행복한 죽음일까? 그 일을 하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의미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한 평생, 헌신하고 흙으로 돌아갔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마지막 죽음을 기도를 하면서 맞이한다면 나의 죽음은 더 아름다울 것 같다. 그 때의 기도는 나 자신과 가족에 대한 감사의 기도이다. 지금까지 잘 살아온 나를 위해 감사하고, 사랑을 마음껏 나눠줄 수 있는 기회를 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감사하기 때문이다. 그 기도를 하며 행복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세상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나를 떠올릴 때 웃음 지을 수 있으리라.

 

110 페트라르카가 성공했다면 아마도 르네상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분열이 르네상스에는 이로웠다. 큰 국가들은 자유와 예술보다는 질서와 권력을 키운다.

 

112 르네상스는 혁명이기보다는 완성이었고, 중세의 성숙이 고대 사본과 예술의 발견보다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증세의 많은 학자들이 세속적인 고전 작품들을 알았고 사랑했다. 그 작품들은 보존한 사람들은 수도사들이었다.

 

2장 아비뇽의 교황들 1309~1377

 

122 "내가 교황청의 교회 기구들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중개자와 서기들이 자기들 앞에 쌓아 놓은 돈의 무게를 달고 그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늑대들이 교회의 통제 아래서 그리스도교 양 떼의 피를 마시고 있다.

 

124 언어의 대가인 페트라르카는 욕설의 어휘를 총동원해서 아비뇽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신앙심 없는 바빌론, 지상의 지옥, 악의 수채통, 세계의 하수구, 여기에는 믿음도 자비심도 종교도 신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 세계의 모든 오물과 허약함이 여기 한데 모여 있다. ..... 늙은 남자들이 뜨겁게 달아올라 비너스의 품속으로 거꾸로 뛰었다. 나이도 품위도 권력도 잊고 마치 차기들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치와 술 취함과 음란함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수치 속으로 달려든다.

 

125 그러므로 아비뇽에 있었던 모든 악덕에 대해 교황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 원인은 부유함이었다. 그것은 다른 시대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네로 시대의 로마, 레오 10세 시대의 로마, 루이 14세 시대의 파리, 오늘날의 뉴욕과 시카고 등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뉴욕과 시카고에서 대부분의 남녀들은 착실한 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온건한 정도로만 악덕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35 혼자만의 신앙심으로 3년을 보낸 다음 그녀는 이제 도시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여성성을 그리스도에게 바쳤듯이, 그녀는 모성의 부드러움을 시에나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바쳤다.

 

135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해악은 인간의 허약함의 결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인류의 모든 죄악은 하느님의 사랑의 대양 속에서 삼켜져 없어지고 만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환자들은 치유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그녀의 모습은 '마더 테레사' 수녀님을 떠올리게 한다. 상처받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녀는 신과 다름이 없다. 우리 주변에도 그러한 삶을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많다. 매달 봉사활동을 가는 지체장애자 아동센타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모습을 한 신처럼 느껴진다.

 온갖 궂은일과 불쾌감을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헌신하는 모습이 나를 항상 겸허하고, 깨워있게 만들어 준다. 함께 목욕일 시킬 때나, 대소변을 갈아줄 때에나, 밥을 먹여줄 때에나, 어떠한 보상 없이 누군가를 돌보는 삶은 언젠가, 어떤 방법으로든 하느님께서 큰 복을 주시리라 믿는다.

 

피렌쩨의 르네상스 1378~1534

 

3장 메디치 가문의 떠오름 1378~1464

 

142 일찍이 이 말을 한 사람들은 이 사건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이'재탄생'을 역사적 전망을 가지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니면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그 구성 요소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대의 재탄생 이상의 일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돈, 악취를 풍기는 부르주아의 돈이 필요했다. 능숙한 경영과 싸구려 노동력이 만들어 낸 이윤, 동쪽으로의 모험적인 여행과 알프스 산을 넘은 험한 여행 끝에 물건을 싸게 사다가 비싸게 팔아서 남긴 이윤, 조심스러운 계산, 투자, 대출 등으로 만든 이윤. 이자와 배당 금이 쌓여 만든 돈, 그래서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관직과 애인을 사고도 돈이 넉넉하게 남아돌게 되어서야 비로소 미켈란젤로나 티찌아노 같은 사람의 힘을 빌려 부()를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예술의 숨결로 행운을 향기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142~143 돈은 문명의 뿌리다.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기금과 교회의 기금이 필사본들을 사들일 돈을 지불했고, 이 필사본들이 고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정신과 감각을 자유롭게 만든 중요한 힘은 그런 사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산층의 힘이 커지면서 나타난 세속주의 덕분이었다. 또한 대학과 지식과 철학의 성장 덕분이었으며, 역사와 법을 연구해서 정신이 현실적으로 예리해진 덕분이었다. 더 폭넓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이 확장된 덕분이었다. 교회의 교리를 의심하고 지옥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성직자가 속인과 똑같이 쾌락주의적이라는 것을 보면서 교육 받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적, 윤리적 금기들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여자와 남자, 예술에 드러난 온갖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1434~1543)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파괴적인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계율,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143 로마에 아그리파가 세운 판테온은 1400년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숭배의 장소라는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포룸 광장에서는 아직도 키케로와 카이사르가 카틸리나의 운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라틴어는 카이사르가 카틸리나의 운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라틴어는 여전히 살아서 통용되는 언어였다.

 

144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맨 먼저 탄생한 것과 아주 동일한 이유로 피렌쩨에서 맨 먼저 탄생했다. 조직화된 산업, 상업의 확장 그리고 은행가들의 활동 등을 통해 꽃의 도시 피렌쩨는 14세기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베네찌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이 시대 베네찌아가 거의 모든 에너지를 쾌락과 부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면, 피렌쩨 사람들은 아마도 소란스러운 얼치기 민주주의의 자극을 통해 사상과 재치와 모든 종류의 기술을 대단히 예리하게 발달시켰다. 그러한 요소들은 이 도시를 이탈리아의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당파 싸움은 삶과 사유의 기질을 더욱 달구었다. 경쟁하는 집안들은 권력을 추구할 때처럼 예술에 대한 후원에서도 경쟁을 벌였다. 

 

145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정복당했을 때(1453)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피렌쩨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14년 전과 똑같은 환대를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고대 텍스트의 필사본들을 지니고 왔다. 이렇게 다양한 영향들이 합쳐지면서 르네상스는 피렌쩨에서 형태를 잡아 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피렌쩨는 이탈리아의 아테네가 되었다.

 

148 피렌쩨는 정치 역사는 현대 국가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맨 먼저 오래된 토지 소유 귀족들에 대한 상업 계층의 승리(1293)이고, 그 다음에는 '노동 계급'이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해 벌이는 싸움으로 이루어진다.

 

149 피렌쩨에 꼭 어울리는 좋은 결과는, 갈등과 토론이라는 전기(電氣)를 띤 분위기가 맥박을 빠르게 하고, 감각과 정신과 재치를 날카롭게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피렌쩨를 들어 올려 한 세기 동안 세계의 문화적 지도자로 만들었다.

 

153그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의 개인 식탁의 소박한 식사와 그가 예의와 평화를 위해 외국의 귀빈들에게 내놓는 화려한 연회 사이의 대조에 깜작 놀랐다. 그는 보통 인도적이고 온건하고 잘 용서하고 과묵하고 그러면서도 간결한 재치로 유명했다. 가난한 살들에게 너그러웠고 가난하게 된 친구들의 세금을 지불해 주었으며 품위 있는 태도로 자신의 권력과 자선을 감추었다.

 

158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훌륭한 그리스 고전 사본들은 이탈리아에 있다. 페트라르카에서 타쏘에 이르는 300년 동안 이 사람들은 미칠 듯한 정열로 사본들을 수집했다. 니콜로 데 니콜리는 이런 열정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을 바쳤다. 안드레올로 데 오키스는 도서관에 책을 추가하기 위해 자신의 집, 아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포지오는 책 이외에 다른 것을 위해 돈이 쓰이는 것을 보면 고통을 느꼈다.

 

166 이들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단테 사이의 천 년은 비극적인 오류요,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일로 여겨졌다. 성모와 성인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전설들은 그들의 기억에서 빛이 바래고, 이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호라티우스의 양성애적인 송가들이 그들의 마음을 차지했다. 위대한 성당들은 야만적으로 보였고, 벨베데레 아폴론을 바라본 눈길, 그것을 만져 본 손길에는 수척한 성인들의 조각상이 모든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168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세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 문학과 철학에서의 변화는 인간의 정신에 지구의 일주와 탐색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간을 교리에서 해방시키고, 또 죽음에 대한 명상 하기보다는 삶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유럽인의 정신을 해방시킨 것은 탐험가들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내가 읽고 있는 책들 대부분이 인문학이다. 인간 중심의 학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네이버 검색을 해보았더니, '자연을 다루는 자연과학(自然科學)에 대립되는 영역으로, 자연과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현상을 다루는 데 반하여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한다.' 얼마 전 세상을 등진 애플사의 '스티븐 잡스'는 아이폰을 세계적인 히트상품을 만들게 된 밑거름도 인문학이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쓰는 대상은 결국 인간이기에, 그 인간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지 않으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있는 전문가들도 자신의 영역과 인문학을 접목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상상을 풍부하게 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어낸다. 결국, 제품에 반영되었을 때, 복잡한 설명서가 아닌 작동을 하면서 제품을 이해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곧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욕구이다. 나의 꿈도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에 인간적 감성이 흐르는 글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언젠가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인간탐구를 계속해 나아가야겠다.

 

168~169 그러나 점차 인문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더욱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르쳤다. (남자나 여자, 특히 벌거벗은) 건강한 인간 육체에 대한 정직한 경탄이 교육받은 계층에 널리 퍼졌다. 르네상스 문학에서 삶을 다시 인정하게 된 일과, 저승에 대한 중세 방식 사유에 저항하게 된 일은 미술에도 세속적인 경향을 부여했다. 이탈리아의 아프로디텔르 성모의 자리에 앉히고, 이탈리아의 아폴로를 성인 세바스찬으로 묘사함으로써 로렌쪼 마니피코와 그 이후 시대의 화가들은 이교의 모티프들을 그리스도교 예술에 도입했다.

 

169 "이 비참한 고딕 건축물을 창안한 사람은 저주를 받아라!" 이렇게 안토니오 필라레테는 1450년에 외쳤다. "야만적인 사람들이 이런 것을 이탈리아에 들여 온 것이 분명하다. 이 유리벽들은 이탈리아의 태양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171 크루넬레스코의 달걀 이야기는 온 세상에 다 알려진 것이다. 그가 다른 예술가들에게 달걀을을 세우는 법을 보여준 이야기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실패한 다음 그 속을 비운 달걀의 끝을 무디게 만들어서 테이블에 세웠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방식이라면 자기들도 할 수 있다고 항의하자 그는 자기가 성당의 지붕을 만들고 나면 그들은 비슷한 항의를 할 거라고 대꾸했다. 그가 이 주문을 따냈다. 14년 동안(140~1434)그는 간혹 중단기를 겪으면서 이 작업에 매달렸다. 수많은 난관들과 싸우면서 대략 39.9미터 크기의 둥근 지붕을 성당 벽의 꼭대기로 들어올렸다.

 

175 그러나 코시모 시대 피렌쩨에서 조각기 최초의, 그리고 가장 유명한 승리를 거둔 분야는 돋을새김 분야였다.

 

178 그의 가장 섬세한 작품은 코시모의 주문을 받고 1430년에 주조되어, 메디치 궁전 안마당에 놓였다가 지금은 바르젤로 미술관에 있는 청동의 <다윗>이다. 여기서 뻔뻔스러운 누드 모습이 르네상스 조각에 등장하고 있다. 젊은 신체의 호가고한 감촉을 지닌 날렵한 소년, 옆모습이 지나치게 그리스인과 닮은 얼굴, 그리고 투구는 분명 너무 그리스 방식이다. 여기서 도나텔로는 사실주의를 옆으로 밀쳐내고 상상력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더욱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거의 대등한 작품이다.

 처음 얼굴만 보았을 때, '다윗'이라는 생각보다는 여자의 얼굴이라고 느꼈다. 머리결과 아래로 향한 눈은 여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몸매가 여자처럼 가냘프다. 왼손이 허리에 받친 모습만 보더라도 일반적인 남자들이 포즈하고는 달리 우아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도나텔로는 '여자 모델을 보면서 '다윗'을 상상하며 조각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다윗'을 보라, 얼마나 남성적이고 늠름한 모습인가? 두 작품에서 공통적인 것은, 곧게 뻗은 우측다리에 몸의 균형이 잡혀있는 모습에서 '다윗'의 자신감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문헌을 찾아보니, 15세기 중반 이후로 섬세하고 가냘픈 팔다리, 우아함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체는 우락부락한 특성을 잃어버리고 날씬해 졌으며, 관절도 가늘어 졌다. 위대하고 단순하던 선은 좀 더 작고 섬세한 움직임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정교한 조형물에서 기쁨을 얻었다. 극히 섬세하게 튀어 나오거나 들어간 것까지 일일이 느꼈다. 사람들은 동작을 원했으며, 고요함과 닫혀진 것이 아니라 긴장을 원했다. 손가락은 의도적인 우아함으로 펼쳐졌고, 신체를 틀거나 머리를 굽히는 형태들이 많았으며, 미소도 많고, 감동에 가득 차서 위를 올려다보는 모습도 묘사되었다. 억지로 꾸며낸 특성이 자리를 차지해서 자연스러운 감정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다윗은 잘라온 적장의 머리 위에 한발을 가볍게 딛고, 긴 칼을 꽂고 머리를 숙인 채 시름에 잠겨있다. 싸움의 승리감에 도취된 것 같지는 않다. 골리앗의 이마엔 그가 던진 돌이 아직도 박혀 있는데, 한 손에는 돌을 상징적으로 들고 있다. 단순한 두 발의 대치를 보여주는 고전 양식의 "콘트라 포스토Contrapposto"의자세에서 한 발에 몸무게를 싣고 한발은 자연스럽게 굽히고 있는 다비드의 유연한 숙고의 자세 "폰더레이션 ponderation"으로 도나텔로가 바꾸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179 도나텔로는 미술이란 언제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오랜 진실을 스스로 다시 발견했지만, 이 진실을 위해 의미심장한 형식을 선택하고 드러내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많은 명사들이 그의 끌에 자신을 맡겼다가 때로 실망하곤 했다.

 

179~180 교회 앞 광장에 현대 최초의 중요한 기마상을 세웠다.(1453) 의심의 여지없이 로마에 있는 말을 탄 아우렐리우스 상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얼굴과 분위기는 철저히 르네상스 방식이다. 이상적으로 표현된 철학자 황제가 아니라 분명히 동시대의 인물인 것이다. 두려움 없고, 가차 없고, 강력한 베네찌아 용병대장 '가타멜라타(달콤한 고양이)상이다.

 

184~185 1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회화가 조각을 지배했다. 15세기에는 조각이 회화를 지배했다. 16세기 회회가 다시 주도권을 차지한다. 아마도 죠토의 천재성이 14세기에, 도나텔로의 천재성이 15세기에,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와 티찌아노의 천재성이 16세기에 나타난 것이 이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185 조각이 이 일을 해내기에는 시간과 노고와 돈이 너무 엄청나게 들었다. 성급하고 풍부하던 시대에 그리스도교의 이상과 이교의 이상이라는 이중의 영역을 표현하기에는 회화가 훨씬 더 쉬웠다.

 

185~186 르네상스 미술은 신체와 영혼, 얼굴과 표정을 다 잡아내려고 했다. 그것은 경건함, 애정, 정열 고통, 회의, 관능, 자부심, 힘의 온갖 영역과 감정을, 그것의 표현을 찾아 내려고 했다. 오직 끈질긴 천재만이 대리석 청동, 점토 등으로 이런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기베르티와 도나텔로가 그렇게 햇을 때 그들은 조각의 영역 안으로 회화의 방식과 원근법과 뉘앙스를 도입하고, 생생한 표현을 위해서 황금시대 그리스 조각에서 요구되던 이상적 형식과 평온한 조화를 희생시켰다.

 

186 조각이 그리스 시대 최고의 표현 방식이었듯이, 이제는 영역을 넓히고 형태를 다양하게 하고, 또 기술을 발전시킨 회화가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그리고 특징적인 미술 영역이 되었다. 바로 르네상스의 얼굴이며 영혼이 된 것이다.

 

189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마사쵸는 탁월한 주인인 자연에게 말고 다른 안내를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소용없는 헛고생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완벽한 작품을 통해 보여 주었다."

 

190 프라 안젤리코와 더불어 회화는 미적인 표현이자 즐거움이면서 둥시에 종교적 수행이 되었다. 그는 많은 그림에서 기도 드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먼저 기도를 올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없었다. 사나운 삶에서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그는 모든 것을 신의 보상과 사랑의 찬사라고 여겼다.

 나 또한, 기도를 먼저 드리고,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매번 깜박하고 그냥 쓰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기도를 드리면서, 이런 말을 해본다.

 "하느님, 아버지 오늘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중한 시간이 주어진 만큼, 엉뚱한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좋은 떠 오른 생각이 떠올라 물 흘러가듯이 나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축복해주시고, 나 중심이 아닌 내가 사물과 사람을 바라볼 때에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여유를 허락해 주시고, 관찰한 느낌을 좋았을 때, 멋진 이야기가 떠올라서 좋은 느낌과 연결되어, 독자들이 깊이 공감하는 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191 수도사들이 어떤 여행자라도 받아들여서 환대를 하도록 되어 있는 병원 입구 위에 걸리 아치형 창에서 안젤리코는 나중에 그리스도임이 밝혀지는 나그네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든 나그네를 그리스도를 대하듯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193 내가 또 다른 아펠레스(고대 그리스의 화가-옮긴이)였다는 것이 내 자랑이

     되지 않게 하소서.

 

     , 그리스도여, 내가 얻은 모든 것을 당신의 신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일부는 지상을 위한 일이었고 일부는 천국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나 죠반니는 토스카나 도시 피렌쩨의 자식었습니다.

 

201 어떤 통치자도 일찍이 코시모처럼 지혜롭게 너그러운 적이 없었다. 아니면 인류의 발전에 그렇듯 순수한 관심을 가졌던 경우는 없었다. 피치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플라톤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그러나 코시모에게 입은 덕도 그에 못지 않다. 그는 플라톤이 내게 개념을 주었던 그 미덕들이 나를 위해 현실로 만들었다." 그의 통치 아래서 인문주의 운동은 활짝 꽃피어났다.

 

4장 황금시대 1464~1492

 

211 그는 피치노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내 정신이 공적인 일들의 어수선함으로 혼란스럽고 내 귀가 시끄러운 시민들의 불평으로 멍멍할 때에 내가 학문에서 기분 전환을 찾지 않는다면 그런 투쟁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학문이라는 말로 그는 온갖 형식의 지식을 추구했다.

 

213 그는 영향력을 발휘해서 강한 국가에 맞서 약한 국가를 방어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나라들 사이의 이익 추구와 싸움을 화해시키고, 모든 전쟁 원인을 싹부터 잘라내려고 애썼다. 이 행복한 10년 동안(1480~1490) 피렌쩨는 정치, 문학, 예술에서 그 영광의 절정에 도달했다.

 

213 귀치아르디니는 이렇게 말했다. "피렌쩨가 폭군을 가져야 한다면 이보다 더 낫거나 더 즐거운 폭군은 있을 수가 없다." 상인들은 정치적 자유보다 경제적 번영을 더 좋아했다. 재산이 어는 계층은 공공사업이 늘어난 덕분에 계속 바빴고, 로렌쪼가 빵과 놀이를 공급해 주는 독재 정치를 용서했다. 마상 창 시합은 부자들을 유혹했고, 경마는 중산층에게 짜릿한 기쁨을 주었으며 축제의  행렬은 주민 전체를 즐겁게 했다.

 

216 유럽 전역을 통해 자기 시대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사람이라고 찬양 받던 이 사람의 모습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덕성과 매너, 복합성과 다양성을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221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 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짐승은 어미의 몸에서 나올 때 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고의 정신(천사들)은 시작부터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하느님 아버지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 - 죠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

 하느님께서 인간이 탄생할 때 모든 가능성의 씨앗을 함께 주셨다. 그 씨앗을 얼마나 잘 키우는 것이 각자 개인의 몫이다. 이 책을 통해서 얻어진 가장 값진 말인 것 같다. 내 안에 모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는 말이 얼마나 큰 용기를 가지게 하는가? 이 말은 아직 자신의 꿈을 실천해 옮기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그의 말은 많은 예술가들의 도전과 용기에 힘을 실어 주었다.

 지금의 나에게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 포커스를 맞추고 열심히 노력해 간다면 그 분야에 우뚝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큰 힘이 된다. 어려운 순간이 와도 잊지 말고 하느님이 주신 그 씨앗을 생각하면서, 매일 씨앗에 물을 주며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어야겠다.

 얼마 전 방송에서 두 개의 화분에 씨앗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해주고, 한쪽은 나쁜 말을 해주도록 했다. 결과는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키운 식물은 튼실하게 자라주었고, 나쁜 말과 욕설을 해준 식물은 싹을 피우다가 그만 지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를 보았을 때에도 우리 안에 심어진 가능성의 씨앗도 얼마나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키워 나가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꿈이 실현될 것이다.

 

 

224  천사들의 찬양을 받기 위해 하늘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

     이것을 보자마자 쓸어올렸네.

     그 순수한 빛깔의 손으로 이 게으른 머리카락을,

     친절하고 상냥한 그 얼굴.

     그 눈길로부터 불꽃같은 영혼, 그 달콤한

     사랑의 영혼을 그녀는 내 영혼을 향해 던졌네.

     그것을 알아챈 순간

     완전히 불타오름을 내 어찌 피할 수 있으리.

 

237 천재라는 낭만적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은 르네상스 피렌쩨였다. 곧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적인 정신에 이끌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43~244 그는(산드로 보틸첼리) 분명 로랜쪼와 쥴리아노를 위해 <베누스의 탄생>(1480)을 그렸다. 새침 떠는 누드의 여인이 황금의 조개껍질을 타고 바다에서 솟아 나온다. 그녀의 긴 황금색 머리카락이 유일한 옷가지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서풍이 바람을 일으켜 그녀를 해변으로 불어 보낸다. 왼편에서는 꽃무늬가 들어간 흰옷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시모네타일까?) 여신에게 그 사랑스러움을 가릴 외투를 주고 있다. 이 그림은 우아함의 걸작이다. 이 그림에서 도안과 구도가 모든 것이다. 색채는 오히려 부수적이고, 사실성은 무시되고 있으며 모든 것은 떠다니는 선의 리듬을 통해 공기와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져 있다.

상당히 매혹적인 그림이다. 가운데 연신의 모습을 중심으로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바람을 불어주고, 흰 옷을 입은 님프가 해안으로 달려와 베누스에게 꽃을 수놓은 외투를 내밀고 있다. 안정적인 구도 안에서 베누스 여신의 매혹적인 모습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흩날리는 꽃잎들은 등장하는 인물들도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 준다. 그리고 서풍의 바람을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로 연출시키며, 아름다운 미의 여신의 탄생을 말해주고 있다.

 

5장 사보나롤라와 피렌쩨 공화국 1492~1534

 

262 베키오 궁전에는 이런 대회의를 개최할 방이 없었으므로 시모네 폴라유올로에게 내부를 개조해서 500인실을 만들돌고 했다. 이 방에서 분과별 회의가 가능했다. 8년 뒤 이 방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서로 마주보는 벽에 벽화를 그리는 그 유명한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

 

263 이러한 개혁의 실행을 돕기 위해 사보나롤라는 교구의 소년들로 도덕 경찰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경마와 행렬 체조 놀이와 품행 나쁜 친구와 음란한 문학과 춤과 음악학교를 피하기로 맹세하고 또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들 희망 소년단은 교회를 위해 헌금을 얻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노름하려고 모인 사람들을 쫓아 보내고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이라고 판정되면 여자들이 걸친 옷을 찢어 버렸다

 

264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법. 인간은 천성적으로 미덕의 존재가 아니며 사회적 질서는 에고들, 가문들, 계층들, 종족들, 신앙들 사이의 공개적인 혹은 비밀스러운 갈등 가운데 유지되는 것이다. 피렌쩨 공동체에서 강력한 요소가, 본능의 배출구로서 혹은 이윤의 원천으로서 술집과 사창가와 도박장을 갈망했다.

 인간의 내부의 선과 악이 존재하듯이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도 그 적절한 균형과 긴장감 속에서 역사를 흘러가고 있다. 인간 스스로가 타락하고 싶은 욕구는 선함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욕구처럼 강하다. 그 한 가운데에서 강인한 의지로서 타락의 욕구를 순간 순간 이겨내고 있다. 글의 내용에도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부분을 도입했을 때, 반응은 열광적이다.

 글을 쓰는 시간과 장소도 마찬가지다. 좀 더 어려운 상황으로 갈수록 부족함이 글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 그리고, 유혹의 문턱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새로운 감각들이 깨어난다. 그러한 글들은 긴장감을 가지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흡입한다. 하지만, 마음이 평온한 상태이거나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여유로운 상황에서는 글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다. 고민과 고통들이 자신에게 쉽게 순화되어 글로서 드러나기가 힘들며, 단순한 감상에 젖는 넋두리로 단어는 촛점을 흐리고 만다.

 이러한 긴장감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정치가요, 예술가요, 작가의 모습인 것 같다. 그 선과 악의 중간에서 긴 장대를 한 가운데 쥐고 외줄타기를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279 그러나 미술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프라 바르톨로메오는 사보나롤라 초상화에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 페랄의 지롤라모의 초상화"라고 적었다.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자주 듣고 그의 설교문을 열심히 읽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서 붓을 움직이고, 또 제단 뒤편에 두려운<최후의 심판>을 이끌어 간 것은 바로 사보나로라의 정신이었다.

 

280 사보나롤라의 위대함은 도덕 혁명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에 들어 잇따. 그는 인간을 정직하고 선하고 정의롭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혁명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며, 또 그리스도가 소수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이끌고 성공한 일에서 사보나롤라가 실패한 것이 ㅈㄴ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혁명만이 인간의 일에서 진정한 진보를 표시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런 노력이 없이 인간 이외의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일, 역사상 있었던 유혈의 전복들은 일시적이고 소용도 없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282 1520~1524년 사이에 미켈란젤로는 추기경 쥴리오 데 메디치를 위해서 성 로렌쪼 예배당에 에 새로운 성구실을 고안했다. 단순한 4각형에 아담한 둥근 천장을 가진 이 방은 오늘날 미켈란젤로의 가장 섬세한 조각들이 들어 있는 방, 곧 메디치 무덤으로 온 세계에 알려져 있다.

 

286 대부분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그도 일곱 살에 견습공노릇을 시작하여 아주 빠르게 발전했다. 스승인 피에로는 젊은이의 도안 솜씨에 경탄했다. 그리고 휴일에 작업장 문을 닫으면 사르토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베키오 궁전의 500인실을 위해서 그린 유명한 밑그림의 모습들을 스케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288 그 음영(깊이와 입체감의 명료함)의 대가다움은 티찌아노와 틴토레토와 베로네제의 풍성한 색채보다도 더욱 끌리는 면이 있다. 사르토에게는 다양성이 부족하다. 그의 그림들은 너무 협소한 주제와 감정의 영역 안에서만 움직인다. 보통의 모습에 사랑스럽고, 나중에는 싫증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울 뿐이다.

 

289 미술에서 피렌쩨의 위대한 시대는 1430년 코시모가 망명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1530년 안드레아 델사르토가 죽으면서 끝났다.

 

290  그러나 위대한 현은 건드려졌고 그 음악이 반도 전체를 꿰뚫고 메아리쳤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 심지어는 프랑스, 스페인, 헝가리, 도이칠란트, 터키 등지에서 주문이 피렌쩨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미술가들이 그 지식과 양식을 배우기 위해 피렌쩨로 떼를 지어 찾아왔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위대한 현은 건드려졌고, 그 음악이 반도 전체를 꿰뚫고 메아리쳤다"

이 글을 쓰고 나에게도 르네상스의 영감들이 전해져 온다. 이 책에서는 음악에 대한 부분을 다루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시대의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르네상스의 영감들이란, 내가 글을 쓰는데, 인간중심을 따뜻한 감성들을 녹아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내가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독자들이 단순히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만드는 노력이었다면, 지금은 그러한 이야기에 인문학과 접목을 시도하고 싶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이 표현했던 사랑과 즐거움의 상징적인 의미들을 내 글 속에도 담아낸다. 그럼으로써 독자들이 좀 더 깊이 있게 나의 글을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보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있는 인문학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이번 두 번 읽기를 통해서 인간의 감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내 마음의 호수에 깨달음이라는 돌이 던져지고, 그 소리 없는 파장은 점점 더 커져서 물결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 마음에 와 닿게 된다. 그리고 잔잔한 감동이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어 퍼져간다. 나에게 르네상스 정신이란 '잔잔한 물결' 이다. 처음 시작은 작은 물결이지만 멈추지 않고 끝없이 퍼져 나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지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축제 행렬 1378~1534

 

6장 밀라노

 

306 그러나 아버지 쟌갈레아쪼에게서는 한곳에 앉아 있는 요기로 나타났던 것이 필리포에게서는 한 곳에만 앉아 있는 용기로 나타났던 것이 필리포에게서는 한곳에만 앉아 있는 소심함으로 나타났다.  그는 늘 암살 공포에 시달렸고, 인간의 믿을 수 없는 속성에 대한 괴로운 신념에 시달렸다. 그는 밀라노의 포르타 죠비아 성에 틀어박혀 먹고 뚱뚱해지고, 미신을 품고 점성술사들을 좋아했다.

 

310 그는 잘생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대한 남자들이 그랬듯이 그도 또한 관심을 분산시키는 이 결함(잘 생긴 것)을 면제 받았다. 그의 얼굴은 너무 통통하고 코는 너무 길고 구부러진 데다 턱은 지나치게 넓고 입술은 너무 꼭 다물어졌다.

 

314 피렌쩨가 사보나롤라 앞에서 벌벌 떨면서 사랑과 예술의 허영들을 불태우던 시기에 음악과 느슨한 도덕성이 로도비코의 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남편들은 아내들의 사랑을 눈감아 주고 그 대가로 자기들도 바람을 피웠다. 가면무도회가 빈번했고 수많은 즐거운 의상들이 수많은 죄악을 가려 주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마치 이 도시의 성벽 안에 빈곤이 활개 치고 있지 않다는 듯이, 마치 나폴리가 밀라노를 붕괴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다는 듯이

 

326 대성당이 쟌갈레아쪼 비스콘티의 기념비이고 파비아 수도원(체르토사 디 파비아)이 로도비코와 베아트리체의 사원이라면, 대병원(오스페달레 마죠레)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짜의 단순하지만 당당한 기념비이다.

 

7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331 르네상스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은 1452 4 15일에 피렌쩨에서 약 95킬로미터 떨어진 빈치 마을 근초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딸이었던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결혼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녀를 유혹했던 피에로 단토니오는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피렌쩨의 법률가였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 피에로는 자기처럼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카테리나는 농부 남편을 맞아들였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피에로와 그 아내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어머니의 사랑 없이 절반쯤 귀족적인 안락함 속에서 양육되었다. 아마도 이런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그는 아름다운 의상에 대한 취향과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얻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에 대한 욕심이 없는, 그저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만족하는 마음을 물려받는 것 같다.

 

332 그가 열다섯 살이 되자 아버지는 그를 피렌쩨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으로 데려가서 이 재능 많은 예술가에게 아들을 견습생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했다. 교육받은 사람은 누구나 바사리가 전해 주는 이야기를 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중에서 왼편에 있는 천사를 그렸다는 것, 그리고 스승은 이 천사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해서 그림을 포기하고 조각에 전념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릴 적 부터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제자의 그림에 주눅이 들어서, 조각에 전념했다는 이야기는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렇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여러 가지 일화가 많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그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많았지만 보여주는 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지 않고, 누군가의 입으로 전해져 온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러한 행동들이 오히려 그의 작품을 더 신비스럽고 위대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333 당시 이탈리아에 동성애가 그토록 널리 퍼져 있었는데 오직 자신과 몇 명의 친구들만 그렇게 심문을 받은 것에 대해 레오나르도가 미심쩍게 여긴 것은 합당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가두었던 일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피렌쩨를 용서하지 않았다.

 

334 그러나 실은 그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인체의 모든 자세와 행동, 젊은이와 늙은이의 모든 얼굴 표정, 동물과 식물의 모든 기관과 움직임, 들판에서 밀이 물결치는 모양에서부터 공중을 나는 새들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산들이 침식되거나 높아지는 것, 물과 바람의 흐름과 소용돌이, 날씨의 변화, 기압의 변화, 하늘의 무진장한 만화경,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끝없이 놀라웠다. 그는 수천 페이지의 공책을 그들에 관한 관찰과 수많은 형태의 스케치로 채웠다.

 이러한 수 많은 관찰의 반복을 통해서, 대상의 생명이 존재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파악하는 통찰을 그는 가지게 된다. 이 구절을 보면서, 갑자기 드로잉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욕심인 것 같고, 글로서 그러한 드로잉과 비슷한 '풀어내기'연습을 하고 싶다. 대상을 보고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을 그냥 풀어내는 것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감상적인 느낌의 나열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않는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은유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고, 다른 분야나 다른 사물들과 연관시켜 생각한 느낌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로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철학자였으며, 과학자가 되어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켰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거장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335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시작하면서 너무 풍부한 상상을 했고, 세부적인 것들에 실험적으로 빠져들면서 자기를 잊었다. 원래의 주제를 넘어서 인간, 동물, 식물, 건축 형태, 바위 산, , 구름, 나무들의 끝도 없는 모습을 신비스러운 명암으로 바라보았다. 그림의 기술적인 완성보다는 그 철학에 빨려 들어갔고, 의미를 드러내느라 바빠서 이 인물들에게 색을 주는 일처럼 덜 중요한 작업은 다른 사람들 손에 넘긴 것이다.

 그의 관심은 대상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그 대상에서 느껴지는 상징적인 의미, 다시 말하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자연을 그토록 좋아하고 즐겨 그린 부분이 바로 이러한 표현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라고 했는데, 저는 화가가 대상에게 느끼는 순간의 느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직관이 상당히 뛰어난 사람으로 정지해 있던 움직이는 사물이든 그 순간을 포착하여 작품 속에 여러 가지 표정이나 자세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의 글도 그의 그림처럼 다양한 의미들을 표현하고 싶다. 그가 작품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먼저 전체적인 구상을 하고 밑그림을 드로잉한다. 안정된 구도 속에 조금씩 사물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가 느꼈던 순간의 의미와 상징들을 표정이나 자세로 일단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주제, 의미, 철학이 담긴 부분을 서서히 강조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의 장기인 음양에 대한 적절한 효과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배경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채워 넣는다. 분명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와 충분히 어울릴만한 자연을 그린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린 사물과 자연은 하나가 되어 그의 작품 속에 녹아 든다. 보는 사람들도 그 작품으로 빠져들어간다.

 만약에 내가 글을 쓰는 것도 그러한 순서와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 어떤 사물을 관찰하더라도 자신감 있게 써내려 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하나의 시스템, 메뉴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1. 먼저, 무슨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마음 속으로 정해본다.

 2. 전체적인 밑그림, 즉 구상을 통해서 서론 본론 결론에 대한 구성을 대략적으로 적어본다.

 3. 그 주제에 어울릴만한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일단 기억 속에 끄집어내서 적어본다.

 4. 나의 글감 창고(관련자료,인용데이타,)에서 내 이야기와 어울리는 문구들을 찾아본다.

 5. 말하고자 하는 주제, 나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정리해주는 인용문구들이 하나로 어울릴 수

   있게 나의 생각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마무리한다.

 

338 시간이 흐르면서 색채는 어두워졌지만 아마도 화가 자신이 어두컴컴한 효과를 의도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욱한'(sfumato)'이라 표현하는 몽롱한 분위기로 채워졌다. 이것(바위 동굴 속의 성모)은 레오나르도의 가장 위대한 그림 중의 하나다. 오직 <최후의 만찬>,<모나리자>,<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만이 이 그림을 능가하는 걸작이다.

 <바위 동굴 속의 성모>를 보고 있으며, 밝은 빛을 통해서 인물들의 얼굴을 신성하게 비추고 있다. 그리하여 암흑과도 같은 우리의 미래, 인생여정에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지'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음양에 대한 효과를 작품의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극대화시켜 주는 것 같다.

 

339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 그리고(바사리가 덧붙인 말에 따르면)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많이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두 가지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고 레오나르도는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에 어울리는 모습을 구상하는 것과 유다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그리고 자기는 어쩌면 너무나 자주 만나는 수도원장의 얼굴을 유다 얼굴의 모델로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슬쩍 덧붙였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지역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사도들의 모습에 도움이 될 만한 얼굴과 머리들을 찾고 있었다. 이런 탐색을 수없이 하면서 그는 여러 모습들을 선택해서 이 그림 안에 용해시켜 넣어 이 걸작의 기적을 만든 개성 뚜렷한 머리들을 찾고 있었다. 이런 탐색을 수없이 하면서 그는 여러 모습들을 선택해서 이 그림 안에 용해시켜 넣어 이 걸작의 기적을 만든 개성 뚜렷한 머리들을 그토록 놀랍게 표현했다.

 일상적인 업무를 할 때에도, 일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하는 것과 그냥 무작정 부딪쳐서 일을 하는 것과는 시간적인 부분이나 에너지 소모적인 차원에서나 상당한 차이가 난다. 먼저 구상을 하고 난 뒤에 업무진행을 했을 때는 예상적인 문제점들은 사전에 인지해서 수시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지만, 반면 부딪치는 방법은 많은 시행착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소모적인 부분이 많다. 그림을 그릴 때나 글을 쓸 때, 구상 즉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도 동일한 이유다. 위대한 작품은 순간, 떠오른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탁월한 구상과 꾸준한 습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340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의 뒤편에 있는 세 개의 창문을 통하여 풍경을 도입했다. 동작을 대신해서 그는 그리스도가 사도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리라는 예언을 방금 했고, 그래서 사도들이 각자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놀라움을 드러내면서 나입니까?”하고 묻는 긴장된 장면을 선택했다. 성찬식 장면이 선택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13개의 얼굴은 모두 움직이지 않은 채 판에 박힌 듯한 진지함으로 얼어붙어 있었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여기서는 과격한 신체적 행동 이상의 것이 있다. 정신이 탐색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 예술가가 하나의 그림 안에서 그렇게 많은 영혼을 드러낸 경우는 두 번 다시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들 사도들을 위해 수도 없이 습작 스케치를 했다. 이들 중 일부, 즉 큰 야고보, 빌립보, 유다 등은 오직 렘브란트와 미켈란젤로하고만 견줄 수 있는 섬세함과 힘찬 필치로 그려져 있다.

 

344 그보다 스물두 살 아래인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부러진 코와 그토록 대조를 이루는 레오나르도의 아름다운 모습에 분개했고, 또 가난했던 그는 레오나르도가 그렇게 부유한 생활을 유지할 경비를 어디서 찾아내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345 안나의 베일을 쓴 머리에서 성모의 발에 이르기까지(맨발이지만 그러나 성스럽도록 아름다운) 이것은 기술의 승리다. 밑그림에서 실패했던 삼각형 구도는 여기서 완전하게 성공하고 있다. 안나, 성모, 아기 예수 그리고 양의 네 개의 머리들이 하나의 풍부한 선을 이룬다. 아기와 성 안나는 마리아를 향하고 있으며, 여자들의 비할 바 없는 의상이 넉넉한 공간을 가득 채운다. 레오나르도 붓의 '자욱한' 특성이 모든 윤곽을 부드럽게 만든다. 마치 그림자가 살아 있는 그들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 같다. 밑그림에는 성모의 얼굴에, 그림에서는 안나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미소는 이후 50년 동안이나 레오나르도의 후계자들 사이에 계속 살아 유행이 된다.

 이 그림을 보면서, 작품 안에 등장하는 대상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과 머리, 옷의 주름이 조화롭게 배치되었으며,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위와 물은 웅장하면서도 생동감이 있어, 대상에게도 그러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어 어우러진다.

 

347 그해 10월에 피렌쩨 정부의 수반인 핑트로 소데리니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게 베키오 궁전 500인회의실 벽에 벽화를 그려 달라고 제안했다.

 

350 여러 세기를 통하여 그녀에게 행운을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 미소이다. 눈 속에 방금 나타난 생기와 입술의 양끝이 유쾌하게 살짝 올라간 모습. 그녀는 대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인가?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연주하는 악사들의 노력을 향해서일까? 아니면 수없이 많은 날들을 애쓰고도 끝을 내지 못하는 화가의 부지런함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모나리자가 미소 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여성이 남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정열에 빠진 가엾은 애인들아! 자연은 당신들의 신경이 맹목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향하여 부조리한 갈망으로 타오르게 하고, 당신들의 두뇌로 하여금 우리의 매력을 아주 분별없이 이상화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으니…. 그래야만 당신들은 아비가 되는 것이겠지! 이 보다 더 웃기는 일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도 덫에 걸리기는 마찬가지. 우리 여자들은 당신들의 그런 열중보다도 더 호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그래도 사랑스러운 바보들아,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여전히 기쁜 일이고, 사랑을 받을 때면 삶이 되살아난다.”

 

351~352 아니면 모나리자가 보여 주는 것은 레오나르도 자신의 미소였던 것일까? 여성의 손길의 부드러운 접촉을 연상시키지 않는 도착된 영혼의 미소. 사랑이나 천재에게 외설스러운 해체 말고 다른 운명은 없다고, 인간의 건망증 속에 가물거리며 스러져 가는 작은 명성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던 영혼의 미소일까?

 <모나리자>는 대상의 내면을 표현한 위대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을 본 모든 사람들이 잊을 수 없는 부분 또한 모나리자의 '미소'이다. 수 많은 전문가들의 그 '미소'의 의미들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모델을 바라본 레오나르도의 그 때 그 순간의 감정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아마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상황에서 그와 모나리자의 감정이 서로 일치되어, 행복한 감정으로 작품에 표현되지 않았나, 상상해본다.

 그리고 작품 속의 인물과 배경간의 경계는 뚜렷하기 보다 구분되지 않는 모호함이 서로가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의 눈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다.

 

356 그의 장점은 그의 단점들의 더 나은 측면이다. 성적인 도착증은 아마도 그에게 일에 몰두할 여지를 남겨 주었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민감함은 보통 사람의 눈길에는 보이지 않는 현실의 단면들을 그에게 열어 보였다. 그는 특이한 얼굴을 가진 사람의 뒤를 좇아 수많은 거리들을 통과하여 하루 종일 따라 다니다가 나중에 작업장에서 마치 그 모델을 이리로 데려온 것처럼 훌륭하게 그 얼굴을 스케치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일 강은 현재 지상의 모든 바다에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을 바다로 내보냈다.” 따라서 모든 바다와 강은 셀 수 없이 여러 번이나 나일 강의 입을 통과한 셈이다.”

 현재, 나의 장점이 단점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단점의 어느 일부분이 현재를 나를 지탱시키면서 살아가게 한다.

 누가 보더라도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생활의 단조로움에 쉽게 지쳐버리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단점은 자꾸 새로운 곳으로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분명히 현재의 모습에 충실하면서 더욱더 몰입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쏠려진 관심이 오히려 현재를 나에게 에너지를 가져다 준다.

 지금의 변경연 생활이 그렇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니?'라고 말한다. 지금 회사에서 나의 위치는 허리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자리다. 그 역할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변경연이 생활이 그러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바쁜 가운데에서도 줄여주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몸은 힘들어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정신적인 즐거움이 삶을 주도해가고 있는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민감함으로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왔을 때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통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었다. 구름에서 시작한 빗방울이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는 과정을 거치듯이 그의 눈에 들어온 새로운 생각의 파편들은 그의 머리 속에 훌륭한 아이디어로 재 탄생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이 태어난 바다로 헤엄쳐서 가지만, 그는 역사의 바닷속으로 멋진 배를 만들어 띄운다. 

 

356 그의 호기심 도착증, 민감성, 그리고 완전욕,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냈다. 즉 시작한 일을 완성할 능력이 없거나 의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그는 구성, 색채, 혹은 도안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으로 모든 예술 작품을 시작했다가 해결책이 발견되는 순간 작품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술은 구상과 도안의 문제이지 실질적인 실천이 문제가 아니었다. 실행은 그보다 못한 정신의 작업이었다. 아니면 그는 자신의 끈질긴, 마지막에는 끈질기지 못한 손길이 실현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섬세함, 중요성, 완성도 등을 자신에게 요구했다가 절망에 빠져 노력을 포기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바로 그 같은 경우다. 그는 너무 빨리 한 가지 일이나 주제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너무 많은 일들에 관심이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통합하는 목표, 주도하는 이념이 없었다. 보편인(전인)’은 빛나는 부분들을 이어 붙여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능력들을 지녔기에 그들을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내 시간들을 낭비했다.”

 

357 그는 5000쪽에 달하는 글을 썼지만 단 한 권도 완성하지 못했다. 양으로만 따지면 그는 화가라기보다 저술가였다. 그는 자신이 120종의 원고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중 50종이 남았다.

 

358 그의 기본 원칙은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은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 화가여, 보라, 들판에 나가거든 여러 사물들에 주의를 돌리고 사물을 차례로 하나씩 자세히 바라보고 이들 별 가치가 없는 것들 중에서 여러 가지를 골라내라.”

 자연을 보면서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 그것은 느낌이 온 것이다. 그 느낌대로 관찰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쓴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써내려 간다. 그 과정에서 멋진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전체적인 구상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연습은 자연 속에서 해야만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다. 밀폐된 공간이나, 닫혀진 생각 속에서는 발생되기 힘들다.

 자연을 탐구한다는 것은 내면의 나를 탐구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연을 보더라도 어떤 현상이든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도 마찬가지다. 항상 변화하고 변덕스러운 것이 마음이다. 그러한 것을 풍광과 마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응하면서 사진 찍듯이 어떤 순간을 포착했을 때,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고 적어가는 과정이다. 똑같이 복사한다면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기술은 향상 될지 몰라도 새로운 창조는 더디기만 할 것이다. 이것은 남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이카루스'와 같다. 진정한 나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늘 높이 날아올라서 멋진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내가 꿈꾸는 세계를 향해 멀리 날아갈 수 있다.

 

359 아마도 인간보다도 자연이 더 그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자연은 중립이고, 악을 나쁜 것이라고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편견 없는 눈길에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많은 풍경화들을 그렸고, 그것을 소홀히 한다고 보티첼리를 나무랐다. 그는 펜으로 정성스럽게 꽃들의 덩굴을 따라갔다. 나무, , 바위, , 구름, 호수 따위 배경을 줌으로써 마법과 깊이를 첨가하지 않은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이렇게 중립적인 자연을 통해서, 그림의 구체적인 원리를 터득해나가지 않았을까? 다양한 계절을 통한 변화의 모습들, 멀리 보이는 것과 가까이 보이는 것의 다름, 동물들의 여러 가지 표정과 동작들, 그러한 모습들을 꾸준히 관찰한 레오나르도는 자연의 중립적인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도 똑같이 담아서 그림 속에 표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묘사하게 되고, 빛과 색의 퍼지는 효과, 명암의 구성을 통해서 대상의 철학적 본질까지도 표현하게 된다. 그의 그림에는 이러한 빛과 그림자가 골고루 섞여져 있어서 구석구석 확인할 수 있다. 밝은 빛이 있는 곳에서는 '젊음의 생기'가 어두운 빛이 있는 곳에서는 '인생의 황혼'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364 그의 시대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방법을 실험보다는 경험과 동일시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기억하라, 물에 대해서 논할 때는 먼저 경험을 인용하고 나서 이치를 말하라.” 한 사람의 경험이란 현실의 극히 미세한 단편 이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경험을 독서로 보충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대리 경험인 셈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책을 통해서 보충해 가는 것은 가장 쉽고 빠른 방법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쉬운 방법들을 알고 있으면서 행동으로 옮기기 힘들어 한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지배적이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러한 힘든 과정을 수행하고 있지만, 어떤 때는 힘이 부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꾸준한 반복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위대한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고 끊임없이 읽고 쓰는 작업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런 도약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이치를 꿰뚫는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364 “어떤 생각을 논함에 있어 권위를 인용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작업하지 말고 자신의 (경험의) 기억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자기 시대 사상가들 중 가장 덜 신비적이었다. 연금술과 점성술을 거부했고 한동안은 모든 점성술사들이 거세되기를기대했다.

 

364 “수학이나 수학에 기초한 그 어떤 요소를 적용할 수 없을 경우 확실성이란 없다.” 그리고 당당하게 플라톤의 말을 되풀이했다.” 수학자가 아닌 사람은 내 작품의 어떤 부분도 읽지 말 것.

 

369 그는 어떤 구절에서는 겸손과 열렬함으로 신에게 말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 서는 신을 자연, 자연의 법칙, ‘필연성과 동일시했다. 생애 마지막 시기까지 신비적인 범신론이 그의 신앙이었다.

 

370 그는 단순한 유언을 했으나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교회의 모든 성사를 요구했다. 한번은 이렇게 적었다. “하루를 잘 보내면 그 잠이 달다. 그렇듯이 삶을 잘 보내면 그 죽음이 달다.”

 최선을 다해 보낸 하루가 모이고 모여서 나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기꺼이 맞이 할 수 있으리라, 다만 유혹을 이기지 못해 후회되는 하루가 몇몇 섞여 있어서 그리 달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이 글을 읽고 느낌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죽음을 달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혼자 있는 이 시간, 나의 유혹을 이기며, 나를 지배하는 이 순간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다.

 

372 그는 르네상스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토록 강하고 격렬하던 시대를 대표하기에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신사적이고 내성적이고 섬세했다. 그리고 보편인도 아니었다. 그의 다양성에는 정치가나 행정가의 자질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르네상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천으로부터 한 사람이 왔었다는 것, 그가 인류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8장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382 오늘날 우피찌에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도 아마 로렌쪼를 위해 그렸을 것이다. 성모는 크지만 아릅답고, 배경에는 벌거벗은 남자들이 그려져 잇다. 여기서 어쩌면 미켈란젤로는 도니의 <성가정>을 위한 암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391 서쪽으로는 토스카나, 남쪽으로는 라티움, 그리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변방지대에 막힌 채 산이 많은 움브리아 지방이 이곳저곳에 테르니, 스폴레토, 아씨시, 폴리뇨, 페루지아, 구비오 같은 도시딜을 자랑한다.

 

9장 만토바 1378~1540

 

401 누구나 페루지노 회화의 결점들을 안다. 과장된 감상, 슬픔에 젖은, 인위적인 신앙심, 언제나 똑 같은 갸름한 얼굴과 리본 모양의 머리, 그리고 겸손하게 앞으로 숙인 머리, 심지어는 단호한 카토와 대담한 레오니다스까지도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407 그는 고대 로마에 빠져 그 영웅들을 이상화하고 그 예술을 숭배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 절반은 로마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미술은 이러한 젊은 날의 사랑을 통해 많은 장점을 얻었고 동시에 결함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런 모범으로부터 도안의 당당한 품위와 엄격한 순수성을 배웠지만 그러나 그의 그림은 조각적인 형태의 돌과 같은 냉정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411 “라 프라마 돈다 델몬도.(세계 제일의 여성)” 시인 니콜로 다 코레죠는 이사벨라 데스테(Isavella d’Este, 에스더 가문의 이사벨라)를 이렇게 불렀다. 소설가 반델로(Bandello)자유롭고 너그러운 이사벨라에게서 무엇을 최고라고 칭찬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상냥한 아름다움, 절도, 지혜,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태도 중에서 말이다. 그녀는 교육받은 르네상스 여성을 역사상 걸작의 하나로 만들어 주는 교양과 매력을 대부분 지녔다. 그녀는 지식인이 되지 않고도, 혹은 매혹적인 여성이기를 중단하지 않고도 폭넓고 다양한 문화를 지녔다.

 

416 그녀는 극성스럽게 값을 흥정했다. 소박한 나라의 재정이 그녀의 생각을 받쳐 주기에는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수집품은 작지만 물건마다 각 분야에서 소중한 것들이다. 그녀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만테냐, 페루지노, 프란치아의 회화 작품들을 가졌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죠반니 벨리니에게 끈질기게 그림을 부탁했다. 그들은 그녀가 현찰보다는 찬사로 보상하는 사람이라고 여겨 그녀의 부탁을 물리쳤다. 또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그림이 무엇을 나타내야 하고, 어떤 것을 그려야 하는지 항상 간섭했다.

 

418 또한 남편 쟌프란체스코나 아들 페데리고가 정치적 재앙의 가장자리에 설때마다 이들 정복자들을 한 사람씩 유머로, 아첨으로, 매력으로 홀렸다. 1519년에 아버지 뒤를 이어받은 페데리고는 유능한 장수이며 통치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부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만토바 궁정을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아마도 이런 모욕을 피해 이사벨라는 로마로 가서(1525) 다른 아들 에르콜레를 추기경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다. 클레멘스 7세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추기경들은 그녀를 환영하고 콜론나 궁전에 그녀 일행을 위해 살롱을 만들어 주었기에 그녀는 그곳에 오래 머물고 있다가 로마 유린 기간 동안(1527)이 궁전에 갇히게 되었다. 그녀는 그 유능함을 이용해서 거기서 도망치고, 아들에르콜레를 위해 간절히 바라던 추기경 자리를 얻고, 승리에 가득 차서 만토바로 돌아왔다.

 

10장 페라라 1378~1534

 

423 사람들 생활의 중심점은 12세기의 대성당이었다. 엘리트 그룸은 니콜로 2세가 외국의 침략이나 내부의 폭동에서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1385) 거대한 성(카스텔로)을 더 좋아했다. 7세대에 걸쳐 복구하고 형태를 변화시키면서 이 성의 거대한 탑들은 아직도 도시의 중앙 광장을 지배하고 있다.

 

424 공정함을 위해 당시 성직 임명이 적절함과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시대의 외교적 결합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야겠다.

 

436 내게 샤를과 그의 군대가 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림자 속에 쉬면서 부드럽게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추수하는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본다. , 그대 나의 필리스여, 너의 하얀 손을 가지각색 꽃들 사이로 뻗쳐 네 목소리가 만드는 음악에 맞추어 내게 화관 하나를 짜 주렴.

 

440  분노하고 불친절하고 거친 사람들이

     바닷가 야수에게 바친

     아름다운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

     자연이 처음으로 그녀의 사랑스러운 형태를 빚을 때처럼

     알몸으로 가장 작은 베일 한 조각도

     그 살결의 하얀 백합과 붉은 장미들을 가리지 않았으니,

     한여름 더위도 한겨울 추위도 망가뜨리지 못한

     아름답게 빛나는 팔다리에 어린 저 광채를.

 

     그에게는 그녀가 설호석고나 대리석으로

     조각가가 기술을 다해 만든 조각상을

     바위에 붙여 놓은 것으로 보였으리,

     그가 만일 그녀 뺨의 장미와 하얀 꽃 사이로

     흘러내린 맑은 눈물이

     사과처럼 단단한 젖가슴을

     적시는 것을 못 보았다면, 그리고 산들바람이

    황금빛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을 못 보았다면.

 

아리오스토는 이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글을 쓴다. 그는 자신의 시구의 마법을 통해 우리를 비현실적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요정들과, 마법의 무기들과 여러 가지 마법으로 신비롭게 만든다.

 

11장 베네찌아와 그 영토 1378~1534

 

449 많은 해자로 둘러싸인 성에 안전하게 앉은 베네찌아는 이탈리아 본토의 정치적 흥망성쇠에 대해 면역을 가진 듯이 보였다. 이 도시의 부와 힘은 점점 커져서 마치 이탈리아의 머리에 옥좌를 놓고 앉은 여왕처럼 보였다. 1495년 프랑스 대사 자격으로 이곳에 도착한 필립 드 코미네는 이 도시를 가리켜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승리에 가득 찬 도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적대국인 밀라노에서 온 피에르토 가솔라는 그 아름다움과 당당함과 부를 묘사할 길이 없다고 여겼다. 117개의 섬, 150개의 운하, 400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대운하(카날 그란데)의 유유한 물의 산책로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길을 보고 코미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라고 표현했다.

 

459 15세기 마지막 몇 십 년, 그리고 16세기의 처음 몇 십 년은 베네찌아 생활에서 가장 화려한 광채의 시기였다. 터키와는 평화를 이룩하고, 아프리카 지역과 대서양의 입구를 둘러싼 지중해 지역에서 아직 심각한 위축을 겪기 전이라 세계 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이 베네찌아 섬들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돈으로 섬들마다 교회들을 세우고, 운하 주변으로 궁전들이 벽처럼 늘어서고, 궁전마다 소중한 금속과 값비싼 가구들로 가득 채우고, 여자들은 아름다운 의상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뛰어난 화가들을 잔뜩 배출하고, 벽걸이를 단 곤돌라의 화려한 축제와 가면을 쓰고 벌이는 사랑놀이가 흘러넘치고, 바다에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469 베네찌아 예술의 영광은 성 마르코 성당과 총독 궁전 다음으로는 그 회화에 있다. 많은 힘들이 합쳐져 화가들을 후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다른 곳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도 교회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했다. 당시 글을 읽을 수 잇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교회는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설교의 효과를 지속시키키 위해서 그림과 조각상들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세대마다, 교회마다, 수도원마다 『수태고지』, 『그리스도의 탄생』, 『경배』, 『성모마리아가 에리자베트를 방분함』, 『문안』, 『어린이 학살』, 『이집트로 도망감』, 『그리스도의변모』, 『최후의 만찬』, 『십자가에 매달림』, 『그리스도의 매장』, 『부활』, 『승천』, 『순교』등의 그림이나 조각을 소장하려 했다.

 

476 『레오다노의 총독』을 보라. 이해의 깊이, 눈의 예리함, 벨리니 손길의 재치 등은, 이탈리아의거의 모든 강대국과 알프스 북쪽 유럽까지 합세한 기습에 맞서 베네찌아 사람을 지휘하여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남자의 확고하고 침착한 힘을 잡아 내고 있다!

 

482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색채보다는 구상에 있었다. 드레스덴 미술관의 가격을 측정할 수 없는 보물인 『잠자는 베누스』를 그렸을 때 그는 어쩌면 그녀가 순수하게 감각적인 의미에서 유혹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는 유혹적이다. 동시에 이 작품은 베네찌아 미술이 그리스도교 주제에서 이교도 주제 및 감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베누스에는 도발적이거나 암시적인 요소는 없다. 그녀는 불확실한 이유에서 자연 속에 완전히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다. 붉은 쿠션과 하얀 비단 의상을 깔고 누었는데, 오른팔로 머리를 받치고, 왼손이 나뭇잎 노릇을 하고, 완전히 드러난 다리 하나가 그 아래 감추어진 다리 위해 걸쳐져 있다. 미술 작품이 여성의 몸의 부드러운 살결을 이렇게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자연스러운 포즈의 우아함을 이렇게 드러내 주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벌거벗은 미녀와 어울리기 힘든 순수함과 평화가 깃들어 있다. 죠르죠네는 여기서 스스로 선악을 넘어 미적 감각이 욕망을 누르도록 만들고 있다.

 '미적 감각이 욕망을 누르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작품을 보면 그녀의 얼굴은 어떤 욕망을 자극하는 얼굴이라기 보다는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순수함이 묻어난다. 이러한 미적 감각의 표현이 '욕망을 누른다고' 하는 것일까?

 고등학교 때 한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는 만화를 열심히 그렸다. 주로 포르노 그림을 그렸는데, 매주마다 책을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고는 했다. 성관계에 대한 장면을 묘사할 때에는 대부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자는 베누스'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림의 베누스도 꿈을 꾸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욕망이 무의식 중에 그림처럼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미적 감각이 욕망을 누른다기 보다는 잠재된 욕망을 사실적으로 재미있게 표현한 것처럼 해석이 된다.

 

487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의 사랑』은 현대적인 제목을 달고 잇어서 티찌아노가 되살아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 그림이 처음으로 언급되었을 때는(1615) 『치장한 아름다움과 치장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도덕이 아니라 이야기를 치장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세속적인나체는 티찌아노의 그림 중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밀로의 베누스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스러운숙녀도 세속적이다. 보석을 박은 허리띠가 눈길을 끌고, 비단 드레스는 만져 보라고 재촉 하는 것 같다. 그녀는 아마도 『플로라』와 『화장하는 여인』을 위해 포즈를 취했던 바로 그 풍만한 여자일 것이다. 충분히 오래 바라보는 구경꾼은 이 두 모습 뒤에 있는 복잡한 풍경을 보게 된다. 식물과 꽃들과 두툼한 관목의 숲, 양떼를 몰고 가는 양치기, 두 명의 연인들, 토끼를 쫓는 사냥꾼과 개들, 도시와 그 탑들, 교회와 그 종탑들, 죠르죠네 방식의 녹색 바다, 구름 낀 하늘.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우리가 모른다 해도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잠시 머물도록만들어진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파우스트가 생각한 영혼의 가지가 아닌가?

 

488 티찌아노가 바쿠스에서 그리스도로, 베누스에서 성모에게로 넘어갔다가 또 돌아왔다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그는 그런 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1518년 그는 프라리 교회를 위해서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을 제작했다. 곧 『성모의 승천』이었다.

 

490 여기서 잠시 티찌아노 베첼리를 그대로 놓아두기로 한다. 그의 후기 경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533년 이후로 그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가 된 사람(카를 5세 황제)이 관련된 정치적 사건들의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티찌아노는 1533년에 쉰여섯 살이었다. 그가 앞으로도 43년이나 더 살면서 지난 50년만큼 이나 숱한 걸작들을 만들어 내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503 예민한 벰보는 친구들인 비비에나, 키지, 라파엘로 등이 죽은 다음 로마가 유령의도시라고 느꼈다. 그래서 페트라르카처럼 그는 파도바 근처 시골집에서 건강과 편안함을 찾았다. 쉰 살이 된 그는 온화한 플라톤 방식으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었다. 다음 22년간 그는 모로시나라는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그에게 세 아이를 낳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명성이 베풀어 주지 못한 안락함과 위안과, 염려와 보살핌을 주었다.

 

504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렸네, 내 생명을 부드럽게 지켜 주던 마음, 자신의 생명을 잊고 내 생명을 사랑하고 유지해 주던 그 마음, 스스로 주인이었던 그 마음, 값비싼 장식과 꾸밈과 비단과 금과 보석과 보물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가 지닌 사랑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며(그녀 자신의 말에 따르면)만족했던 그 마음. 이 마음은 의복 대신 가장 부드럽고 우아하고 훌륭한 팔다리를 지녔다네. 그 마음은 이렇게 봉사할 때 즐거운 모습을 보였고, 또 내가 이 땅에서 만난 중에 가장 달콤하고 또 가장 품위 있는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네.

 

그는 그녀가 죽어 가면서 남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을 당신에게 맡겨요.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그 애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드려요. 그들은 모두 당신의 아이들입니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속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주님의 성체를 평화로운 영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한참 쉬고 난 다음 그녀는 덧붙였어. “하느님과 함께하세요.” 그리고 몇 분 뒤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네. 삶을 통해 고단하게 방황하던 나를 밝게 비쳐 주던 성실한 별이었던 그 눈을 말일세.

 

12장 에밀리아와 마르케 1378~1534

 

519 그렇게 짧은 생애로 그가 이룩한 것은 엄청나다. 라파엘로가 처음 40년 동안 보여 준 것만 빼고는 레오나르도, 티찌아노, 미켈란젤로 그 누가 이룩한 것보다 도 더 많았다. 코레죠는 선의 우아함, 윤곽의 부드러운 입체감, 인간 육체의 살아 잇는 살결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아주 대등했다. 그의 색채는 흐르는 듯한, 빛을 발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것은 반사와 투명성이 살아 있고, 보라, 오렌지, 핑크, 청색, 은색 등의 색채로 뒷날 베네찌아 화가들의 빛나는 밝은 광채보다 더욱 부드럽다. 그는 명암법의 대가였다.

 

531 그들은 음모, 배신, 칼의 도덕 말고 다른 어떤 도덕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들의 현실을 힘없이 반영한 것이다. 피와 철이 잉크로 바뀌었을 분이다. 현실에서 비스마르크의 정책이 니체의 펜을 통해 책으로 바뀐 일과 같다.

 

541 딸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이 실망하실 거라곤 생각 안 해요. 그렇지만 전보다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세 번이나 고약한 열 발작을 겪었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고, 다시는 열병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더 쓰지 못하겠어요.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생각합니다.

                                                

                                             -고통으로 약간 지친 당신의 아내 이폴리타-

 자신이 아픈 가운데에서도 남편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 아내의 마음이 애절하다. 짧지만 아내의 진심이 담겨있는 내용이어서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평상시에 나는 아내를 얼마만큼 생각하고 위하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한다. 가끔씩 아내에게 내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써야겠다. 아니, 짧은 메모라도 아내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사랑을 담은 메세지를 보내야겠다.

 

543 쥴리오 로마노가 이 기념묘를 설계하고, 벰보는 이 무덤을 위해 우아한 비명을 작성했다. 그러나 돌에 새겨진 가장 아름다운 말은 카스 틸리오네 자신이 아내의 무덤을 위해서 썼던 시구이다. 그녀의 유해는 이제 그녀의 뜻에 따라 그의 유해와 나란히 묻혔다.

 

          Non ego nunc vivo coniunx dulcissima vitam

          Corpora namque tuo fata mean abstuleunt,

          Sed vitam tumulo cum tecum condar in isto,

          Iungenturque tuis ossibus ossa mea:

 

          나는 이제 사는 게 아닙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내여,

          운명이 당신의 육체에서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갔으니.

          그러나 내가 당신과 같은 무덤에 눕고

          내 뼈가 당신의 뼈와 합쳐지는 날 나는 살게 됩니다.

 지금처럼 아내와 영원히 함께 하면서 같은 날 함께 눕고 싶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에서도 함께 태어나 아내를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항상 나는 아내를 꼭 끌어안거나, 손을 잡고 있을 때면 사랑이 담긴 기도를 한다. 그러한 내 마음이 아내에게 전해져서, 함께 같은 생각을 하도록 좋은 기운을 보내고 있다. 내 생각이지만, 그러고 나면 아내의 표정은 한결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3장 나폴리 왕국 1378~1534

 

556 시칠리아는 르네상스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우리스파와 같은 몇 명의 학자와 안토넬로 다 메씨나와 같은 몇 명의 화가를 배출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머지 않아 훨씬 더 기회가 많은 이탈리아 본토로 건너가고 말았다. 팔레르모, 몬레알레, 체팔라 등지는 위대한 미술품을 간직하고 있지만 오로지 비잔틴과 이슬람교와 노르만 시대의 유품들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땅을 소유한 봉건 영주들은 15세기보다는 11세기를 더 좋아했고, 기사 계급이 지닌 학문에 대한 경멸 혹은 무시를 그대로 지닌 채 살았다. 그들이 착취한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색깔이 풍부한 의상과 밝은 모자이크와 침울한 희망의 종교, 그리고 사랑과 폭력에 관한 노래와 단순한 시()말고는 달리 문화적 표현을 찾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섬에는 1295년부터 1409년까지 아라곤 가문의 왕과 왕비들이 있었다 이어서 다음 300년 동안 이 섬은 스페인 왕권의 보석이 되었다.

 

558 규모가 더 큰 예술들과 함께 이 모든 공예 분야와, 또 이들 사랑스럽고 격렬한 폭발성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노동과 사랑, 속임수와 정치적 수완, 헌신과 전쟁, 성실함과 철학, 지식과 미신, 시와 음악, 미움과 유머 등이 모두 합쳐져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고, 또 메디치가 이끄는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다시 파멸에 이르게 했다.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문명이야기 르네상스 5-2 

 

14장 교회의 위기(1378~1447)

 

12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성 카타리나가 불같은 교황에게 경고를 보냈다. “온건함과 ….. 선의와 평화로운 마음으로 할 일을 하십시오. 과도함은 건설보다 파괴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위해서 당신의 천성에 들어 있는 성급함을 조금 자제하십시오.”

 

15장 르네상스가 로마를 사롭잡다(1447~1492)

 

30 국가도 교회도 인쇄술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거나 널리 퍼지지 않은 시대에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니콜라스 5세는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인쇄하기 7년 전, 인쇄술이 로마에 도착하기 30년 전,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첫 출판물이 나오기 58년 전에 교황이 되었다. 민주주의란, 지성, 안전, 평화각 널리 퍼지면서 생긴 사치품이다.

 

33 니콜라스 5세 치하에서 교회는 인문주의를 향한 팔을 활짝 벌렸으며, 교회 자신이 새로운 문학과 예술의 편에, 아예 그 선두에 자리를 잡았다. 즐거운 백 년 동안(1447~1534)교회는 이탈리아의 정신에 아주 넉넉한 자유를 주었고 필렐포는 이를 믿을 수 없는 자유라고 말했다. 또 이탈리아 예술에 그토록 대단한 후원과 기화와 자극을 주어 로마는 곧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 하나를 즐겼다.

 

35 그리고 이탈리아 유명한 인문주의자를 거의 모두 로마로 불러들였다. 과장을 좋아하는 베스파시아노는 이렇게 썼다. “세계의 모든 학자들이 니콜라스 교황의 시대에 로마로 왔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일부는 그의 요구를 받고 왔다.”

 

36 이 번역들에 대해 필렐포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는 멸망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이민을 왔다. 이 지역은 어차피 옛날에 대 그리스라고 불렸던 곳이다.” 마네티는, 니콜라스가 교황으로 재임하던 8년동안 그 이전의 500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보다 더 많은 그리스 작가들이 번역되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확한 말이기보다는 오히려 감사의 표현이었다.

 

39 터키 군이 5만 명의 그리스도교도 시체를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교 사원으로 만들었다는 소식(1453)이 오자 교황으로서 자신의 모든 영광이 아무런 소용없는 공허함으로 여겨졌다. 그는 유럽 국가들에게 함락된 동방 그리스도교의 수도를 도로 찾기 위해 십자군에 참가하라고 호소했다.

 

43 그는 탐욕스러운 관심으로 도시와 시골 풍경들만이 아니라, 산업, 생산물, 정치적 상황, , 매너, 도덕성 등까지도 서술했다. 페트라르카 이후로 어떤 이탈리아 사람도 시골 생활에 대해 이토록 다정하게 글을 쓴 적이 없다.

 

43 그는 자신을 가리켜 많은 것을 보려는 열망에 빠진사람이라고 표현 했다. “구두쇠는 많은 돈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을 그는 자주 하고 있다. 가벼운 펜대를 역사 분야로 돌려서 유명한 동시대 사람들의 짧은 전기, 프리드리히 3세의 전기와 후스 전쟁 이야기, 그리고 인류사의 윤곽을 썼다.

 현재 쏟아져 나오는 책들의 홍수에 살고 있다. 처음엔 '그러한 수 많은 책들 속에서 나에게 어울리는 책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 한 권의 책이라도 내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인연이 되면 그 책과 언제가 만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하지만 조금씩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 하나의 책들이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깨달음도 있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변경연에 와서 그 수 많은 책들 중에 어떤 책이 나와 어울리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꾸준히 사랑하는 하는 책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책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어떤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44 그는 교황으로서 시간을 문학적 작업에 돌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한다. “나는 내 의무에서 시간을 빼내지 않고 잠자는 시간을 글 쓰는 데로 돌렸다. 그리고 노년의 시간에 휴식을 취할 시간을 훔쳐서 내가 지금 기억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후세를 위해 적어 두고자 한다.”

 

45 교황으로서 그는 검소하고 단순하게 살았다. 바티칸에서 그의 살림 비용은 최저로 기록되었다. 의무가 허용하는 한 그는 시골의 교회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이 아니라 정직하고 겸손한 시골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이따금 그는 나무 그늘 아래나 올리브 숲, 아니면 서늘한 샘가나 냇가에서 추기경 회의를 열거나 외국 사절을 맞아들였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자신의 이름과 운율을 맞추어) ”실바룸 아마토르(숲을 사랑하는 사람)라 불렸다.

 

51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면 지상의 어떤 왕자도 당신의 영광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의 권한을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당신이 그리스와 동방의 황제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폭력으로 차지하여 불의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합법적으로 당신의 소유물이 될 것입니다….. , 얼마나 완벽한 평화가 올 것인가! 시인들이 노래하는 아우구스투스 대제의 황금시대가 돌아올 것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우리 편이 된다면 동방 세계 전체가 머지 않아 그리스도교도가 되겠지요. 하나의 의지가 온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며, 이 의지는 바로 당신의 의지인 것이지요!

 

53 위대한 남자들의 생애를 살피다 보면 한 남자의 성격이 죽은 다음에 형성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통치자가 자신에 대해 기록하는 사람들을 잘 대우해 주면 그들은 그를 사후의 거룩함으로 들어 올려 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통치자가 그들을 괴롭히면 그들은 그의 시신을 악의의 꼬챙이에 꿰어 태우거나 구워서 잉크병에 있는 가장 더러운 악명으로 사후의 이름을 더럽힌다. 파울루스 2세는 플라티나와 사이가 나빴다. 플라티나는 파울루스에 대한 전기를 썼는데, 이 교황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가 이 전기를 토대로 삼고 있다. 이 전기는 그를 허영과 화려함과 탐욕의 괴물 같은 모습으로 후세에 전해 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역사가들도 인간인지라 자신에게 후하게 대해준 왕들에 대해서 후한 평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가들도 비평을 받는 이유도 이러한 헛점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도 업체에 대한 평가를 맡고 있어서, 주관적인 부분이 평가에 반영되는 이유가 종종 있다. 내가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이 오너가 생각하는 마인드가 어떤지가 제일 중요하다. 기업은 오너의 생각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점검사항들이 있지만 오너의 마인드가 좋으며, 점검사항들의 평가 점수도 조금 후하게 주는 편이다. 언제가 나도 피평가자의 위치에 올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 때 나는 어떤 마인드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궁금해진다.

 

54 만일 선출되면 터키에 맞서 전쟁을 할 것이고, 세계공의회를 소집할 것이고, 또 추기경의 수를 24명으로 제한하고, 그들 중에 교황 친척의 수를 1명으로 제한할 것이며, 서른 살이 안 된 사람은 절대 추기경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고, 모든 중요한 일에 대해 추기경들과 상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선출되자 오랜 전통에 따라, 권력을 지니게 된 지금, 합의 각서 이행을 거부했다. 대신 추기경들의 연간 수입을 최소 4000플로린(10만 달러?)으로 올려 주어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57~58 혼란에 둘러싸이고, 낯선 사람들에 대한 불신감에 가득 차고, 가족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식스투스 4세교황은 탐욕스러운 조카들을 권력과 수입이 많은 자리에 앉혔다. 그가 가장 사랑한 사람들이 가장 고약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자리의 이익을 챙겨서 이탈리아 전체가 그들을 경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 교황 시기의 주요한 재앙이었다.

 

62 그는 또한 로마 대학을 다시 조직하고, 파울루스 2세가 설립한 카피톨리니 박물관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것은 유럽 최초의 공공 박물관이다.

 

67 로마에서는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적인 사면에서부터 교황직 자체까지도 말이다.

 

16장 보르지아 사람들 1492~1503

 

76 그러나 그는(알렉산더 6) 풍자와 논쟁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허용했다. 도시 위트의 날카로운 말을 들으면 그는 웃어넘겼다. 아들 체사레 부르지아가 그런 작자들에겐 기율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자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페라라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마는 자유도시입니다. 누구든 자기 좋을 대로 말하고 쓸 수가 있어요. 그들은 나에 대해 나쁜 말을 많이 하지만 난 마음 쓰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웃음에 대해 관대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어린 성장과정에 큰 아픔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너그럽고 관대해 질 수 있다. 이러한 지도자를 가진 국민들을 자유롭다. 자신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누군가를 풍자하면서 생각의 자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표현의 즐거움을 통해서 풍부한 상상을 펼칠 수 있다.  

 

78~79 페르디난드의 행복한 명상의 대가로 알렉산더는 그에게 두 개의 아메리카를 선물해 주었다. 콜럼버스는 알렉산더가 교황직에 오르고 나서 두 달 만에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 선물했다. 포르투갈은 칼릭스투스 3세의 칙령(1479)에 따라 신세계가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칼릭스투스 칙령은 대서양 해안에 있는 모든 땅은 포르투갈의 것임을 확인해 준 것이었다. 스페인은 이 칙령이 오로지 대서양 동쪽의 해안들만을 뜻하는 것이라고 대들었다. 이 나라들이 거의 전쟁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 알렉산더는 두 개의 교령(1493 5 3일자와 4일자)을 내려서 스페인에는 서쪽에서 발견된 해안을, 포르투갈에는 동쪽 해안을 할당해 주었다. 그것은 남극에서 북극에 이르기까지 상사의 선을 그려서, 아조레스와 베르데 곶 제도 서편의 해안을 스페인의 동맹국으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두 경우 다 새로 발견된 섬들에 그리스도교도가 거주하지 않았을 것과 정복자들이 그곳의 새로운 주민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교황의 승인은 물론 칼로 이루어진 정복을 확인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반도의 세력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게 해 주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자기들이 그동안 살았던 땅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80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종교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수단일 뿐이다.

 이 글을 읽고 있으니깐, 기독교 생활을 하고 있는 현직 대통령이 떠오른다. 현직 교회의 장로이면서 시장 임기 중에 '서울시 봉헌'이라는 언급으로 비난을 받곤 했다. 기독교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과연 그가 순수한 마음의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는 물음표를 던진다. 처음 하느님에게 마음의 문을 열 때와는 다르게 현재는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권력의 수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80~81 알렉산더는 굴복하고 바티칸으로 돌아와서, 샤를이 자기 앞에 세 번이나 무릎 꿇는 것을 즐기고, 또 그가 교황의 발에 키스하려는 것을 너그럽게 말리고, 왕에게서 프랑스의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알렉산더를 폐위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철회된 것이다.

 

83 귀치아르다니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교황들은 자식들을 조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83 쥴리아 파르네제는 그 아름다움이 특별했는데 금발머리로 특히 유명했다. 그녀가 이 머리를 풀면 그것은 발치까지 굽이쳐 흘러내렸고, 이것은 알렉산더보다 덜 정력적인 남자라도 온몸의 피를 흔들어 놓을 만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를 아름다운 여자라고 불렀다. 사누도는 그녀가 교황이 좋아하는 사람, 대단한 아름다움과 이해심을 가진, 품위있고 상냥한 젊은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88 알렉산더는 칼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그의 귀족 적들은 그의 또 다른 적인 율리우스 2세가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은 가운데 글의 전쟁에서 이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알렉산더의 이미지가 역사에 남았다.

 

90 성직 임명의 대가로 받는 돈이 없이 어떻게 교황청을 운영할 수입을 얻을 것이냐 하는 질문에 봉착하자 교황은 설득력 잇는 답변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91 피 냄새를 맡은 사냥개와 같은 힘으로 사냥하러 나갔다.

 

93~94 그의 반지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 있었다. “Fays ce que dois, advien que pourra.” , “어떤 일이 일어나든 네가 해야 할 바를 하라.”라는 말이다. 그의 검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에서 나온 두 가지 구절이 새겨 있었다. 한 면에는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가 새겨져 잇었고, 다른 면에는 “Aut Caesar aus nullus. 카이사르이거나 아무도 아니거나.”라는 글구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지은 <로마인 이야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는 장면이 떠오른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묵묵히 행동해가는 영웅들이 모습이다.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점도 핑계가 될 수 있다. 주어진 시간에 조금이라도 실천해 나가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다. 이미 내 인생에 주사위는 던져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사위 숫자만큼 나의 말을 옮기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97 1502 6 12일에 이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수석 엔지니어로 삼고서 체사레는 3차 원정을 떠났다.

 

101 이 포위에서(어쩌면 다른 포위에서도)체사레 보르지아는 레오나르도의 전쟁 기계 일부를 사용했다. 그중 하나는 이동 가능한 탑을 이용하여 300명의 병사를 적군의 성벽 꼭대기로 올려 보내는 기계였다.

 

104~105 로마의 소문은 천천히 작용되는 독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의 기본 성분은 비소로서, 분말 형태의 비소를 음식이나 음료에 떨어뜨리면(심지어는 미사에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에도)인간이 그랬다고는 추적하기 어렵도록 천천히 죽음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107 알렉산더는 아들에게 경탄하고 아마도 두려워하기도 했겠지만 딸에 대해서는 그의 천성이 가진 온갖 감정적 깊이를 가지고 사랑했다.

 

107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 그녀는 사랑스러운 얼굴이라고 서술되었다.

 

115 속임 수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평생 동안 다른 것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무도 나중에 깨뜨릴 약속을 그보다 더 강하게 맹세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일에 성공했다. 그가 세계의 이 부분을 그토록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7 그의 성격의 기본 원리는 극히 풍부한 자연성이다. 베네찌아 대사는 그를 가리켜 현세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어떤 도덕적인 경멸을 담은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정열과 감정을 통제할 줄을 모르는, 낙천적인 기질의 남자라는 의미였다. 이런 점은 통치자들과 정치가들이 사이에 많은 외교관 유형의 냉철한 이탈리아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 그들의 이해심은, 실제로는 자기 시대 대부분의 통치자들보다 더욱 인간적이었던 알렉산더에 대해 부당한 편견을 지니 것이었다. 과도한 현세성이 그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만들어냈다. 도덕적인 고려나 다른 어떤 종교적 개념들로 방해받지 않았기에 그는 나머지 다른 점에서는 절도가 있고 삼가는 사람이었는데도, 한 가지 종류의 강한 감각성을 드러냈다 조금 더 나아 보이는 가족 사랑이라는 겉모습을 뒤집어쓴 이 감각성으로 인해 그는 온갖 정의의 원칙들을 위반했다. 물론 여기서도, 그의 대리인 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성수(聖水)’만으로 이룰 수가 없는 것 중에서 어쩔 수 없는 것만을 행했을 뿐이다. 다른 한편 그의 친절함과 쾌할한 성격은 그를 통상적인 의미의 폭군이 되지 않도록 해 주었다. ….

국민의 물질적 번영을 염려하는 통치자라는 측면에서 그는 자기 시대 최고의 통치자들에 속한다. 실질적인 정치가로서 당시의 어떤 통치자와도 겨룰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이 통찰력은 정치적 도덕성의 결핍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의 통찰력은 정치적 도덕성의 결핍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는 한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 흐름을 예견하는 더 높은 지혜를 갖지 못했고, 또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17장 율리우스 2 1503~1513

 

125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를 10년 동안 전쟁과 소란 속으로 몰아넣고, 외국의 군대에서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고, 낡은 성 베드로 성당을 허물고 브라만테와 다른 100명의 미술가들을 로마로 데려오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찾아내어 격려하고 그들의 방향을 정해 준 사람,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온 세계에 새로운 성 베드로 성당과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그리고 바티칸의 방들을 선물해준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이다. “보라, 여기 한 남자가 있다!”

 

127 알렉산더는 외교관이 될 수 있었지만 율리우스는 그것이 극히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맞대 놓고 그들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는 사나움과 격함이라는 점에서 자주 한계를 넘어섰으며, “이런 잘못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커졌다.” 그의 언어처럼 그의 용기도 한계를 몰랐다. 병에 짓눌리고 전투로 부상을 당했다가도 그는 도로 회복되어 적들을 다시 기습하여 놀라게 했다.

 

128 마키아벨리는 대부분의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교황청의 세속적 권력에 반대하고 있었고, 왕처럼 군림하는 교황들에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리오니는 자신의 목숨을, 그리고 죽음 다음의 명성보다는 아마도 자신의 영혼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

 

137 이런 점에서 보면 자신들의 부를 개인적인 사치가 아니라 사원과 대성당들을 짓는 데 사용한 고대 그리스와 중세 유럽이 훨씬 훌륭한 정신이었다. 그런 건물들은 모두의 소유이고 자랑이고 영감이었으며, 사람들의 집이며 동시에 신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138 이 시기 건축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은 도나토 브라만테이다.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왔을 때 그는 이미 쉰여섯 살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유적지를 탐색하면서 그의 내면에서 고전 양식을 르네상스 건축에 적용하고 싶다는 젊은이의 열정이 불타올랐다.

 누구라도 로마.그리스 유적을 보고 있으면, 어떤 영감에 사로 잡히지 않을까? 나 또한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그러한 유적을 보고 있으면 내면의 영혼이 감응하고는 멋진 영감을 떠올릴 것으로 기대해본다. 그리하여 주제를 떠올리고 글로 담아내기 위한 열정에 빠져들 것이다.

 

153 이 벽화 「파르나쏘스」에서 아폴론은 신성한 산꼭대기에 몇 그루의 월계나무 아래 앉아 비올을 들고 소리 없는 소곡들을 켠다. 그의 오른편에 뮤즈는 아주 우아한 편안함으로 사랑스러운 젖가슴을 바로 옆의 벽에 잇는 성인들과 현자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호메로스는 눈먼 황홀감에 젖어 6우각 시들을 낭송하고 단테는 이들 여신들과 시인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화해할 길 없는 엄격함을 지니고 있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오스, 티불루스, 또 시간이 혼란스러운 다른 시인들, 곧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아리오스토, 산나짜로와 최근 이탈리아의 덜 중요한 목소리들도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젊은 화가는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준다.

 

157 율리우스가 사랑하던 화가이며 조각가, 성급한 기질과 무시무시한 성격, 그리고 정신의 힘과 깊이라는 면에서 그와 경쟁할 만한 사람, 인류의 기록에 남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슬픈 예술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158 1475 3 6일에 카프레제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와 마찬가지로 대천사에게서 이름을 따왔고, 4형제 중 둘째였다. 그는 세티냐노의 대리석 채석장 근처에서 유모의 젖을 먹었으므로 출생하면서 곧바로 조각의 먼지를 숨 쉬었던 셈이다. 그는 뒷날 자신이 유모의 젖과 함께 끌과 망치를 빨아들였다고 말했다.

 어릴 적 성장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어린 시절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이 고스란히 내면의 무의식 세계에 자리하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바닷가였다. 넓은 동해바다에서 친구들이랑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묻어있는 '월래 바닷가' 해변에 가곤 한다. 대학교 때 많이 들렀으며, 요즈음에는 아이들이랑 함께 가서 아빠가 공부하던 곳, 친구들과 놀던 곳을 보여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여주곤 한다.

 현실에 살면서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하고자 할 때나 도전을 하고자 할 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래를 준비하고자 할 때, 나의 과거를 돌이켜 본다. 그 곳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영감을 얻곤 한다. 나의 과거, 역사가 튼튼하게 지탱해줄 때 미래의 모습도 닮아가지 않을까?

 그 때 바라보았던 바닷가의 모습, 친구들과의 추억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으면서 현재의 내가 만들어진 느낌이다. 미켈란젤로도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의 그러한 기억들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으며, 평생 동안 예술가의 길을 가도록 인도했을 것이다.

 힘들 때일수록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극복해나갈 수 있다. 그러한 경험들이 쌓일수록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원하는 꿈을 이루어갈 수 있으리라.

 

158 소년은 기를란다요의 가르침에다가 자신이 피렌쩨 시내들 돌아다니면서 배운 것을 덧붙였다.

무엇이든지 예술을 위한 대상으로 보았다. 그의 친구 콘디비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주 생선 시장으로 가서 지느러미의 모양과 색깔을 살펴보고, 또 그 눈의 색깔과 몸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탐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세부 사항들을 그림에서 극단적인 근면함으로 재생하였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사물을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몇 번 본적이 있다. 한 명은 중학교 때 친구 형이었다. 그 형은 만화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일본 만화에서 보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만화책 형식으로 네모 칸에 장면들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 어떤 비행기가 폭발하는 장면을 그릴 때에도 뭉개구름처럼 연기가 피어 오르는 모습이 사실처럼 느껴졌다. 옆에 앉아서 나도 따라 해보았지만,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의 얼굴 선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그린다고 하더라도 균형이 맞지 않거나 왠지 어색한 느낌이다. 나는 단지 그들의 그림을 빼기고 있었지만, 그들은 장면들을 아주 세부적으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습작(드로잉)을 통해서 감각들을 익힌 상태다. 선과의 간격, 어둡고 밝은 부분에 대한 표현들을 통해서, 장면 하나하나의 생동감을 주고, 내면의 마음을 담아낸다. 글 쓰기도 마찬가지로 선의 간격들처럼 단어가 어떤 문장에 어떤 간격으로 들어가야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서 명암을 통해서 기쁨과 어둠을 느낄 수 있듯이 글 또한, 이야기를 전개시켜 가면서, 밝고 어둔운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

 

158~159 기를란다요와 함께 지낸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천성과 기회가 그를 조각으로 이끌었다.  다른 미술학도들처럼 그도 메디치 가문이 고대의 조각과 건축물 수집품을 전시한 정원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는 이 대리석 조각상 몇 개를 특별한 관심과 기술로 베꼈다. 로렌쪼가 피렌쩨에 조각 학교를 세울 욕심으로 기를란다요에게 이 방향으로 재능을 보이는 학생 몇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기를란다요는 프란체스코 그라나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보내 주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가 미술의 장르를 이렇게 바꾸는 것을 보고 망설였다. 아들이 결국은 돌이나 깎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정말로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라우렌찌아나 도서관을 위해 필요한 대리석을 깍는 일을 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소년은 조각상을 만들게 되었다. 온 세상은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사튀로스를 조각한 이야기를 안다. 쓸모 없게 된 대리석 조각을 다듬어서 늙은 판신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나가던 로렌쪼가 이토록 늙은 판신이 그토록 완벽하게 이빨을 죄다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한마디 하자 미켈란젤로가 단 한 방에 위쪽 턱에 붙은 이빨 하나를 부러뜨려 이 잘못을 수정한 이야기도 안다. 소년의 작품과 재능을 보고 로렌쪼가 그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여 아들처럼 대우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모두 안다. 2년 동안(1490~1492) 어린 예술가는 메디치 궁전에서 살았다. 그리고 로렌쪼, 폴리찌아노, 피코, 피치노, 풀치 등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정치, 문학, 철학, 미술에 대해 당대 가장 개명한 이야기를 들었다. 로렌쪼는 그에게 훌륭한 방을 내주고, 개인적 경비로 쓰라고 한 달에 5두카트(62.5달러?)씩 주었다. 미켈란젤로가 어떤 작품을 만들든지 그것은 그 자신의 것으로서, 그가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가 있었다.

 이 얼마나 멋진 경험이고, 배움인가? 과연 우리들에게 당대 최고의 거장들과 식사를 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현재 나는 그러한 거장들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는데, 실제 그러한 기회를 경험한 미켈란젤로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지금 나는 부럽지 않다. 내가 하고 싶고 꿈꾸는 분야의 최고 스승 밑에서 수련을 받고 있으며, 훌륭한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63 '정결한 여인들은 그렇지 못한 여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신선함을 보존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호색한 욕망을 마음에 전혀 품지 않은 성모님의 경우에는 얼마나 더욱 그렇겠는가! 아니, 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이 젊음의 꽃이 자연적인 이유에서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또 성모의 처녀성과 영원한 순결함을 세상에 확인시켜 주기 위해 기적을 통해서도 보존될 수 있다는 신념을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예술가들은 인간, 사물, 자연에게 숨어있는 젊음과 신선함을 보는 능력이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부분을 순식간에 읽어낸다. 어둠과 슬픔까지도 끄집어낸다. 그리하여 작품을 통해서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감정들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고개 숙인 아름다운 성모의 모습'은 인간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166 피렌쩨 아카데미에서 이것을 바라보면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이란 떼어냄으로써 작업하는예술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시 하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돌에서 표면을 제거하기만 하면 조각상에 존재를 만들어 준다. 돌이 많이 벗겨져 나갈수록 이 모습은 점점 더 자라난다.” 그는 자주 자신이 떨어진 돌에 파묻힌 광부를 찾아내는 것처럼 표면을 떼어 냄으로써 돌 속에 갇힌 인물상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나라의 건물 앞을 지나가다 보면 건물이름이 새겨진 큰 돌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었는데, 그 돌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니깐, 차라리 예술가의 손을 통해서 멋진 작품을 조각하는 것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미켈란젤로처럼 단순히 사물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보는 노력을 해보자, 그 느낌을 그려보고, 글로서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자. 얼마나 창조적인 작업인가? 우리가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한 번 바라보자.

 

167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도 인체를 향한 관심이 그의 신앙심을 누르고 승리하고 있다. 그는 또한 위치의 해부학, 곧 인체가 자세를 바꿀 때, 팔다리, 관절, 골격, 근육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유독 그의 그림에서 살아 움직이는 근육의 모습을 관찰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조각상이 마치 살아있는 느낌으로 표현되어, 불멸의 작품으로 후세에 남겨지기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러한 관심은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어 그의 바램 대로 현실화 되었다. 어떤 작가이든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른 예술작가들과 차별화 할 수 있는 주제로 접근해야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불멸의 작가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나는 어떤 차별화를 통해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러한 차별화를 찾기 이전에 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부터 풀어내서 뼈대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위에 섬세한 근육을 그려가는 작업을 이어가야 한다. 아직은 미흡한 형태이지만, 끊임없는 습작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마저도 작품 속에 자신이 표현하는 욕구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더욱 살리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러한 노력이 있어야 탁월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168 그들은 너무나도 비슷했다. 두 사람 다 불 같은 성질을 지녔다. 교황은 폭군 같고 불같으며, 예술가는 무뚝뚝하고 자부심이 강했다. 두 사람 다 정신과 목표에서 거인들이고 자기보다 나은 것을 참지 못하고 타협을 모르며 하나의 거대한 기획에서 또 다른 거대한 기획으로 넘어가고 자기들의 시대에 자기들의 개성의 인장을 확실하게 찍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죽자 온 이탈리아가 지치고 텅 빈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미칠 듯한 에너지로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 완벽주의자다. 율리우스는 전쟁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군사들을 이끌었듯이 미켈란젤로도 또한 모든 작품에서 원료 쓰이는 대리석을 직접 구하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철저히 혼자였다. 그들은 레오나르도의 말처럼 "혼자 있을 때면 너는 완전히 너 자신의 주인이 된다"라는 말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율리우스 교황은 자신과 비슷한 미켈란젤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서 자신의 원하는 작품들을 맡긴 것이다. 미켈란젤로 또한 율리우스의 만남을 통해서 위대한 작품을 하나씩 완성시켜 나갈 수 있었다.

 시스타나 예배당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특히 인상적이다.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마무리 해가고 있을 때, 율리우스 교황이 '언제 끝나나'라고 묻는다. 미켈란젤로의 답변은 모든 예술가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내가 이 예술을 만족시키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모두 다하면 끝납니다."

 

169 율리우스 2세는 이것을 승인하고 미켈란젤로에게 대리석을 살 돈으로 2000두카트를 주어 카라라로 보냈다.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을 사 오라는 지시였다. 그곳에서 미켈란젤로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을 보자, 이 작은 산을 거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서 꼭대기에 불을 켜면 멀리 있는 뱃사람들에게 횃불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170 1513년 무렵에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을 베꼈던 첼린니는 젊은이의 열광을 가지고 이렇게 서술했다. “ 그 동작이 하도 훌륭해서 고대의 예술이나 현대의 예술을 막론하고 이 정도의 탁월함의 높이에 도달한 작품은 없다.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가 뒷날 저 위대한(시스타나) 예배당을 완성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도달한 힘의 표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173 그는 레오나르도의 말 혼자 있을 때면 너는 완전히 너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말에 대한 한 예가 되었다.

 '혼자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주신이 되어야 한다.' 혼자 있을 때 생활에 리듬이 깨지곤 하는 나에게 꼭 와 닿는 말이다. 천천히 나를 들여다보면서 나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시간임에도 엉뚱한 시선에 관심을 빼앗기고,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다른 일에 몰입을 하는 것이다. 공간이 혼자가 아닌 곳, 많은 사람들 속에 혼자 있을 때, 나는 나를 발견한다. 그 안에서 나의 존재는 인정받기를 원한다. 혼자 있을 때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책을 펼친다. 그리고 남을 의식하면서 책을 읽는다. 참 바보스런 모습이다.

 

18장 레오 10 1513~1521

 

178~179 너와 너의 안녕을 염려하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섭리의 높으신 은혜에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 가문에 내린 많은 영광과 은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특별히 너 개인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 온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직위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이 은혜는 그 자체로 아주 중요하지만, 여기 수반된 상황과 특별히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와 네가 어린 나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중요해진다. 그래서 내가 네게 말해 줄 첫째 일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너의 미덕과 신중함이나 너의 애태움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를 통해서 일어난 것임을 기억하고, 또 이 은혜에 대해서는 오로지 경건하고 순결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통해서만 보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는 말이다. 네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장차 성년이 되면 더욱 큰 결실을 맺을 수도 있다는 합당한 기대를 갖게 되기에, 이런 임무들을 수행할 너의 의무는 그럴수록 더욱 커지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또 인내심을 가지고 너의 직업에 어울리는 연구들을 해서 이른 나이에 얻은 높은 직위의 짐을 덜도록 노력해라. 지난해 동안 네가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주 성찬식과 고해를 하러 가곤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대단히 만족했다. 이런 일들과 비슷한 임무들을 수행하는 일에 스스로 익숙해지는 것보다 하늘의 은총을 얻을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는 나도 생각지 않는다…..

 

179 현재의 동료들에게 미덕이 적을수록 너는 더욱 확고한 태도로 이런 어려움에 맞서야 한다. 그들 중 몇 사람은 훌륭하고 학식을 쌓은 사람들임을 나도 안다. 그들의 생활은 모범적인 적이며, 네게 그들을 행동의 모범으로 삼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을 열심히 따라야하는 가운데 너는 더욱 잘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고, 또 네 나이와 상황의 특수성에 비례해서 너의 동료들보다 더욱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선의 허물을 피하라. 행동이나 말에서 온갖 겉치레의 유혹을 벗어나라. 돈을 너무 아끼지 말고 지나치게 진지하게 보이지도 마라. 때가 되면 너는 이런 충고를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하고 행하게 되리라 희망한다.

 

180 너희 행동과 담화가 아주 작은 어려움도 만들어 내지 않는 방향을 선택하라. 그것을 위해서 추기경들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교제할 때 공손하고 정중한 말씨를 쓸 것을 권한다….. 이번에 로마를 처음 방문하는 기회이니 너로서는 스스로 말을 많이 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이다.

공식적인 기회에 너의 마차와 의상이 보통보다 넘치기보다는 보통보다 못하게 해야 한다. 아름다운 집과 질서가 잡힌 가족이, 많은 수행원과 화려한 저택보다 더 낫다. …. 비단과 보석은 너의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적당하지 않다. 몇 가지 훌륭한 고대의 유물을 수집하는 일이나 훌륭한 책을 수집하는 일을 통해서 또 너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것보다 학식이 있고 훌륭하게 배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너의 취향이 더욱 잘 드러난다. 초대를 받는 것보다 더 자주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라. 그렇다고 너무 자주 초대하지는 마라. 소박한 음식을 취하고 충분한 운동을 해라, 너와 같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조심하지 않으면 질병을 끌어들이기가 쉽다......

다른 사람을 너무 많이 믿기보다는 너무 적게 믿어라.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네게 권하고 싶은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너의 건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하루 일과를 정돈하고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성직을 수행하고, 연구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등 너의 지위에 따르는 다양한 임무가 있기에 너는 이 훈계를 따르는 일이 매우 쓸모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아마 특별한 기회에 교황의 은총을 얻도록 주선해 달라는 청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힘들게 하지 마라. 여러 가지 간청으로 자신을 가장 조금 괴롭힌 사람들에게 그는 가장 너그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성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따금 그와 조금 더 공감이 잘 되는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해라. 네가 그에게서 친절함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가 친절을 베푸는 일이 즐거움이 되도록 온건함과 겸손함으로 행동하라. 잘있거라.

 이 내용는 로렌쪼가 그의 둘째 아들인 죠반니 데 메디치(레오 10)가 로마로 향해 길을 떠날 때 쓴 편지다.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오른 아들을 위해서 삼가 해야할 내용과 실천에 옮겨야 하는 덕목들이 담겨져 있다. 지금 현재 생활에도 마찬가지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 있다면, 먼저

1. 내가 네게 말해 줄 첫째 일은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2.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또 인내심을 가지고 너의 직업에 어울리는 공부를 해라.

3. 위선의 허물을 피하라. 행동이나 말에서 온갖 겉치레의 유혹을 벗어나라. 돈을 너무 아끼지 말고 지나치게 진지하게 보이지도 마라.

4. 공손하고 정중한 말씨를 쓸 것을 권한다

5. 다른 사람을 너무 많이 믿기보다는 적게 믿어라.

6.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7. 네가 그에게서 친절함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가 친절을 베푸는 일이 즐거움이 되도록 온건함과 겸손함으로 행동하라.

 정리해보면 일곱 가지의 실천 덕목들이다. 지금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들이다. 그리고 나의 아들들에게도 편지를 써서 보내주고 싶은 글이다.

 

184 개혁을 위한 교서는(1514 5 3) 그를 통해 수입이 즐어들 직책에 있는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기에 그것의 실행을 위해 격렬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을까를 알아보지요.” 이것이 그의 성격이었으며 그의 성격이 곧 그의 운명이었다.

 

189 로마는 거대한 강물이며 바다였다. 루터는 와서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불쾌감을 느꼈다. 에라스무스는 와서 보고 황홀감에 빠졌다. 수많은 시인들은 사투르누스의 통치시대(고대의 황금시대)가 되돌아왔다고 선언했다.

 

210 이 유명한 무시무시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에너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89년 동안이나 지탱해 주기도 한, 사납게 불타오르는 힘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에너지를 단 하나의 목표, 곧 예술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모든 일을 다 무시해 버리는 의지의 힘이었다. 통합시키는 의지력에 의해 통제된 에너지란, 천재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형태 없는 돌을 도전으로 보고, ‘분노로그것을 잡아 망치로 때리고 끌로 파서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는 이 에너지는 자신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삶의 하찮은 것들을 분노로 휩쓸어 내버리는 힘이기도 했다. 그 힘은 의상이나 청결함이나 표피적인 예의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눈이 멀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하고서, 약속도 깨뜨리고 우정도, 건강도 깨뜨리고, 나중에는 정신까지 깨뜨리고 몸과 정신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지만 그러나 작품은 완성되었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회화, 가장 위대한 조각, 그리고 가장 위대한 건축 일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이탈리아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자신의 모든 열정을 작품에 쏟아 부었다. 그리하여 불멸의 작품을 완성했다. 모든 인간관계와 잡념을 뒤로하고 작품에 대한 생각에만 집중한 결과이다. 에너지 활용 측면에서는 정말이지 효율적인 관리이다. 지금 내 삶은 여러 가지 에너지로 분산되어 있다. 직장생활, 가정, 그리고 변경연 생활이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의 목표는 에너지의 집중이 아니라 효율적인 분배를 통한 균형 잡힌 생활이다. 그 가운데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작품은 거장들처럼 위대한 결과물이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온 삶을 기록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주고 그들의 꿈을 실현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내 주변에도 이렇게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에 대한 몰입으로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인생을 뒤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에너지를 조금만이라도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면 어떨까 라는 아쉬움을 가져보지만, 그들은 그것이 최선인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생활이 정점이 이르렀을 때, 발생한 사건들을 종종 보았다. 돌보지 않은 몸으로 갑자기 쓰러져 병원응급실로 실려간 일, 자녀의 자살 시도로 그제서야 자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일들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그러기 전에 나는 가끔씩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해준다. 죽자 살자, 일하면 정말 죽게 된다고 말이다.

 

211 그는 귀족의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을 더 좋아하고, 지식인보다 단순한 사람을, 부유함의 사치보다 일꾼들의 노역을 더 좋아했다. 수입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는 친척들의 생계를 위해 내주었다. 그리고 고독을 좋아했다. 삼류급 정신과 하찮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참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계속 따라갔다.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금욕을 통해 돈을 아꼈다. 어떤 사제가 미켈란젤로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두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예술만 해도 마누라가 너무 많아요. 그게 충분히 말썽을 만들어 냅니다. 자식을 얘기하자면 내가 앞으로 만들 작품이 내 자식입니다. 이 작품들이 그리 큰 가치가 없다고 해도 어쨌든 한동안은 계속 살아갈 테니까요.”

 

211 그와 레오나르도가 모두 여성의 신체적인 아름다움에 무감각했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는 미의 정화(精華)이며 원천으로 여겨지곤 했으니 말이다.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어쩌면 그의 경우 성()으로 들어갔을 에너지가 모조리 작품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212 그는 빈둥거리는 기간들을 갖기도 했지만 그런 다음 갑자기 창작의 열기가 그를 다시 사로잡으면 나머지 모든 일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로마 유린 같은 역사적 사건도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216 라파엘로는 진실의 추구는 더욱 단호한 정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름다움에 봉사하는 일로 만족했다.

 

220 라파엘로의 경이로운 생산성은(37년의 생애 동안에 미켈란젤로가 89년 동안 이룩한 것보다 더 많다.)그의 작품을 공정하게 요약하기를 어렵게 한다. 거의 모든 작품이 걸작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자이크, 목판, 보석, 메달, 도자기, 청동 그릇과 돋을 새김, 향수그릇, 조각, 궁전 등을 도안했다.

 

230~231 라파엘로는 이 두 장면을 다 취해서 그들을 합치고, 시간과 장소의 통일성을 얻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했다. 산꼭대기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공중으로 떠올라 있고, 그의 얼굴은 황홀경으로 변화되어 있으며 그의 의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빛으로 빛나는 희색이 되었다. 그이 한편에는 모세가 다른 편에는 엘리야가 있다. 그들 아래에 평평한 곳에 세 명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누워 있다. 산 아래쪽에는 절망한 아버지가 정신이 나간 아들을 앞으로 밀어붙인다. 어머니와 다른 여인이 (두 사람 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소년의 양옆에서 무릎을 꿇고 그곳에 남은 아홉 사도들에게 치유를 간청하고 있다. 사도들 중 한 사람은 책에 깊이 빠져 있다가 깜짝 놀라고 있다. 다른 사람은 변모한 그리스도를 가리키면서 오직 그분만이 소년을 치유라 수 있음을 알린다. 아마도 라파엘로가 마무리 작업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그림의 위쪽 부분이 찬양받고, 아래쪽에 나타난 어떤 조잡함과 억지의 요소가 비난받는 것이 보통이다. 아래쪽은 줄리오로마노가 그렸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인물 둘이 아래쪽 전면에 나타난다. 책을 읽다가 놀란 사도와 어깨를 드러낸 채 빛나는 의상을 한 무릎 꿇은 여자가 그들이다.

 

232 로마의 모든 예술가들이 죽은 젊은이를 따라 그의 무덤으로 갔다. 레오는 사랑하는 화가를 잃은 것을 탄식했다. 교황의 비서 겸 시인인 벰보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는데 판테온에 있는 라파엘로의 무덤을 위해 비명을 쓰면서 수사법을 다 버렸다.

 

   Ille Hic Est Raphael(여기 라파엘로가 잠들다)

 위대한 거장들에게 붙은 여러 가지 수식어구들은 어떻게 보면 거추장스럽다. 오히려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이 큰 것이다. 현재 사회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브랜드처럼 말이다.

 

232 미켈란젤로가 더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는 세 분야에서 위대했고, 또 사유와 예술에 더욱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라파엘로에 대해서 그는 깊은 탐구가 만들어 낼 수 잇는 한 모범적 사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라파엘로가 모방을 통해서 다른 여러 예술가들의 탁월함을 습득했고, 근면한 재능으로 그런 탁월한 점들을 결합시켜서 완성된 양식으로 만들어 낸 것을 뜻했을 것이다.

 

233 라파엘로는 너무 행복해서 전통적인 격렬한 의미의 천재가 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잘 해결했기에 가장 위대한 영혼들을 창조와 비극으로 이끌어 가는 악마적인 정신이나 힘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율리우스 2, 이어서 레오 10세 이어서 키지의 요구와 기분에 자신을 맞췄다. 그러나 언제나 그는 성모와 애인들 사이를 즐겁게 왕복하는 솔직한 젊은이였다. 이것은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화해시키는 그만의 명랑한 방법이기도 했다.

 나와 비슷하다. 나 또한 내면의 갈등을 잘 해결하는 편이어서, 비극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부족하다. 단지 내면의 행복을 따뜻하게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233 레오나르도의 섬세함과 미켈란젤로의 비극적 감각은 그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삶의 쾌락과 즐거움, 아름다움의 창조와 소유, 친구와 애인의 성실함으로 충분했다. 러스킨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옳았다. 고딕 조각과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라파엘로이전회화에는,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성모와 관능적인 베누스들보다 더욱 깊이 영혼으로 내려가는 신앙과 희망의 섬세함, 단순함, 성실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율리우스 2세」와 「진주의 성모」는 전혀 표피적인 작품이 아니다. 그들은 남자의 야망과 여성의 부드러움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다. 「율리우스 2세」는 「모나리자」보다 더욱 위대하고 깊이가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세」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처럼 내면의 철학과 온화한 마음까지 보여준다.

 

233 레오나르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미켈란젤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라파엘로는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그는 질문하지 않고, 의심도 만들어 내지 않고 어떤 두려움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우리에게 신의 음료와도 같은 삶의 사랑스러움을 제공한다. 그는 지성과 감정 사이, 육체와 영혼 사이에 어떤 갈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종교, 여인, 음악, 철학, 역사, 전쟁까지도. 그 자신 행운이 많고 행복했던 사람이라 그는 명랑함과 우아함을 사방으로 내뿜는다. 천재에 유사했던 덕에 그는 가장 위대한 존재의 바로 아래쪽에, 그러나 그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단테, 괴테, 키츠.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그의 작품인 <아테네 학당>에서 그의 성품과 기질이 잘 나타나 있다. 위대한 철학자의 모습과 당대 최고의 화가들의 모습을 자신의 철학대로 표현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말이다. 자신의 모습을 위대한 영웅들과 나란히 그려 놓은 것은 그들을 대하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자신의 열정도 그들과 뒤지지 않다는 자신감이다. 결국 그의 바램 대로 그는 역사 속에 르네상스 시대에 위대한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글을 쓰는 나 또한, '나도 작가다'라는 자신감으로 나의 생각을 섬세하게 표현해야겠다. 그러한 자신감을 읽는 독자들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붕괴

 

19장 지식인의 반란 1300~1534

 

245 모든 시대와 민족에서 문명이란 소수의 산물이며 특권이고 책임이다.

 

245 어떤 세대든지 오직 적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경제적 고민에서 벗어나, 조상이나 주변의 사고방식 대신 자신만의 사고를 펼칠 여가와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45~246 그렇듯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도 문명은 소수의,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다수를 이루는 단순한 보통 사람들은 땅을 갈고 파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짊어지고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을 하느라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힘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246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판이니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들을 위해 생각을 하도록 했다. 전통 신학의 매혹적이고 위안을 주는, 용기도 주고 두려움도 주는 경이로움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이것은 접촉, 배움, 미술 등을 통해 매일 새로 다가왔다.) 여기에 자신들도 몇 가지를 덧붙였다. 악마학, 마법, 징조, 점치기, 점성술, 성 유물 숭배, 그리고 교회에 의해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대중 형이상학이 되는 기적 이야기 등이었다.

 

249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인류의 열광이 다양한 종류의 점쟁이들을 후원해 왔다. 즉 손금쟁이, 꿈 해몽가, 점성술사 등이다. 특히 점성술은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이탈리아에 수가 많고 세력이 강했다.

 

250 귀치아르디니는 이렇게 소리쳤다. “점성술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백 가지 틀린 말을 하고 단 하나만 맞혀도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믿어 준다. 다른 사람들은 백 가지 진실을 말하고 단 하나만 틀리게 말해도 온갖 신뢰를 다 잃어버리는데 말이다.”

 

252 르네상스는 미술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고, 작은 부분을 문학에, 철학에는 아주 조금, 그리고 과학에는 가장 조금 영혼을 바쳤다.

 

268 그래서 그것(우화와 동화)들은 미덕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삶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고, 죄가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인정해 주었다. 영원한 형벌은 사람들을 대단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인간의 대다수는 영원히 좋은 것에 대한 희망보다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좋은 일을 한다. 형벌이 영원한 선보다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274 모든 종교는 가설과 신화에 근거하고 잇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질서와 도덕적 기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이런 것은 용서 할 수 잇는 일이다. 귀치아르디니늬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고 무법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관습, 도덕성, , 아니면 강제로 언제나 통제해야 할 존재이다. 종교는 보통은 이런 목적을 위해서 가장 덜 불쾌한 수단이다. 그러나 종교가 타락해서 풍속을 강화하지 않고 오히려 풍속을 해치는 영향을 발휘할 경우에 사회는 고약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사회의 도덕적 규범에 대한 종교의 후원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귀차아르디니는 비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275 정직함은 칭찬을 얻고 위장은 비난과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정직함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쓸모가 많다. 그래서 나는 삶의 보통 상황에서는 개방적이고 정직하다가 아주 중요한 어떤 일들의 경우에만 위장을 이용하는 사람을 찬양해야겠다. 정직하다는 평판을 많이 얻을수록 이것은 더욱더 성공적이다.

 

278 자기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인 남자가, 2년 만에 12명의 폭군을 물리치고, 12개의 도시에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를 시대의 유성으로 만든 남자가 여기 있었다. 말을 그토록 아끼는 이 젊은이 앞에서 말이란 얼마나 허약하게 보이는 것인가! 이순간부터 체사레 보르지아는 마키아벨리 철학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니체 철학의 주인공이 된 것과 같은 일이다. 권력에의 의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구현하고 있는 존재에게서 선악을 넘어선 도덕성, 초인의 모델이 나타나 것이다.

 

281 「군주론」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네. 이 책에서 나는 이 주제에 대해 할 수 잇는 한 깊이 생각 속으로 들어갔네. 군주의 특성을 논하고, 어떤 종류의 특성들이 있는지, 이들은 어떻게 획득하는지, 어떻게 유지되는지, 또 어째서 잃게 되는지 등을 논했네.

 

283 비록 시대의 관습과는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래도 더욱 용서하기 힘든 일은 현존하는 마키아벨리의 모든 편지에서 아내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다정한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288 지혜로운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래를 예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과거와 상의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사란 앞선 시대의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사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똑 같은 정열에 따라 움직이게 될 미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사란 필히 동일한 결과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나는 세계는 항상 똑같았으며, 언제나 똑같이 많은 선과 악을 포함했다고 믿는다. 비록 시대에 따라, 민족에 따라 그것이 다르게 분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자만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이번 주에 주어진 과제다 나의 역사 50페이지 쓰기다. 나는 이번 과제에 대한 이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처음에 제출했던 20p지는 내가 살아온 과거의 역사이며 내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적어온 칼럼과 앞으로 쓸 내용들은 미래의 새로운 역사들이다. 그 중간 시점에 다시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이다. 50페이지를 단순한 역사의 단편들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형식으로 담아내고 싶다. 먼저, 어린 시절에 느꼈던 아픔들이 서두에 나오고, 점점 긍정적인 삶으로 변해가는 모습으로 그려간다, 중간에서 겪게 되는 똥쟁이 시절의 사건 사고들이 재미와 흥미를 가지게 해주고, 신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현재 마음으로는 나에게 이야기하기 보다는 나의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써가고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 배우고 얻은 인문학적인 내용이 접목되면 공감이 깊이가 달라질 것이다. 이번 작업도 재미있는 글쓰기 작업이 될 것 같다.

 

288 가장 가르침이 풍부한 역사의 규칙들 중에는 문명과 국가의 성장과 멸망이라는 현상도 잇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아주 복잡한 문제를 극히 단순한 공식으로 처리한다. “용맹함은 평화를 만들어 낸다. 평화는 휴식을 만들고 휴식은 무질서를 만든다. 무질서는 파괴를 만든다.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겨난다. 질서에서 용맹함이 생긴다. 그리고 용맹으로부터 영광과 행운이 나온다. 따라서 무기가 탁월한 시대에 뒤이어 문자가 빼어난 시대가 나타나고, ….. 철학자들보다 먼저 위대한 전사들이 온다는 사실을 지혜로운 남자들이 관찰했다.

 

289 천성적으로 사악한 인간을 법과 질서에 익숙하도록 길들이는 가장 훌륭한 수단은 종교이다.

 

292 그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초자연적인 믿음의 체계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이류로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당히 뱃심 좋게 받아들였다. 그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거부한 부분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윤리, 선함과 온화함, 겸손, 무저항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그리스도교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비난한 부분이었다.

 

293 한 국가가 확장을 그치면 그것은 멸망을 시작한다. 전쟁의 의지를 잃어버리면 이미 끝장난 국가이다. 평화가 너무 오래 유지되면 그것은 힘을 약하게 하고 분열을 일으킨다. 이따금씩 전쟁을 하는 것은 기율과 활력과 통일성을 회복시켜 주는, 민족의 강장제이다. 공화제 시대 로마인들은 언제나 전쟁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293 로마인에게 미덕(용맹)이란 겸손이나 온화함이나 평화가 아니라 힘과 지성을 갖춘 강인함, 남자다움, 용감함 등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미덕이란 말로 뜻한 것이었다.

 

296 그러므로 군주(통치자)는 도덕성과 정치적 능력, 개인적 양심과 공적인 이익을 명료하게 구분해야 하고, 또한 개인으로 보면 사악함이라 불릴 만한 일이라도 국가를 위해서 행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297 통치자는 종교를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개인적인 신념이야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 종교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군주가 실제로 미덕을 갖추는 것보다 미덕이 잇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유리한 일이다.

 

298 군주가 모든 미덕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미덕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일은 쓸모가 잇다. 예를 들어 자비롭고 충성스럽고 인도적이고, 종교적이고 성실한 것으로 보이는 일이다. 실제로 이런 미덕을 가지는 것도 유리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필요성이 있을 때면 반대로도 행동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으로 그래야 한다. …. 그는 위에 언급한 다섯 덕목들로 가득 차지 않은 말이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잇는 사람들에게 동정심, 충성, 인도적 요소, 종교성, 성실성 등을 보여 주어야 한다. …. 자신의 행동에 색채를 부여해야 하며 또한 시치미를 뚝 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극히 단순하고 현재의 필요성에 깊이 몰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속이기가 쉽다. …. 누구나 당신의 겉모습을 보지만 당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리고 이 드문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에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299~300이탈리아가 자신의 해방자를 맞아들일 그 사랑을 누가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복수의 갈망, 어떤 고집스러운 신념, 어떤 헌신, 어떤 눈물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표현 할 수 있는가? 어떤 문인들 그에게 열리지 않을까? 누가 그에게 복종을 거부할까? 우리 모두에게 야만인의 지배는 콧구멍에 들어 있는 악취이다. 그러므로 이 유명한 집안이, 정당한 시도를 할 때 얻게 되는 용기와 희망으로 이 책임을 떠맡고 이 집안의 깃발 아래 우리 나라가 고귀해지고, 이 집안의 보호 아래서 저 페트라르카의 말이 진실이 되어야 한다.

 

   어른이 되면 광기에 맞서 무기를 집어들리라,

   싸움은 짧으리,

   고대인의 용기가 아직도

   이탈리아의 혈관 속에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301 매콜리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마키아벨리의 철학이란 오래전부터 이미 전제 군주들에 의해 『군주론』의 원칙들에 길들여져 잇던, 탁월하고 부도덕한 이탈리아의 자연 반사광이라고 설명했다.

 

20장 풀어진 도덕 1300~1534

 

306 르네상스의 지적인 상승을 동반한 도덕적 쇠퇴에는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기본적인 사실은 아마 부의 성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308 점점 더 큰 비율의 주민들이 도덕적 규범이 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계율이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라 여겨지고, 하늘과 지옥에서의 초자연적인 상벌이 효력을 잃자 도덕규범이 두려움과 효과를 잃어버렸다. 금지들이 사라지고, 편리함의 계산법이 대신하게 되었다. 죄의 감정, 잘못의 두려움이 시들었다. 양심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모든 사람은 각기 전통적으로는 옳지 않을지라도 자기에게 편해 보이는 일들을 했다. 사람들은 더는 선하기를 원치 않고 강하기를 원했다. 많은 개인들은 마키아벨리가 나오기 훨씬 전에 이미 힘과 기만의 특권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이런 것을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통치자들에게만 승인해 주었다.

 

324 오로지 한 가지 점에서만 공감할 수 있는, 여러 유형의 남자들이 있었다. 곧 이전 어느 때보다도 삶을 강렬하게 살았다는 것, 중세는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혹은 부정하는 척 했었다. 르네상스는 충심으로, 그리고 영혼과 힘으로 삶을 긍정했다.

 

333 남자의 행복의 원천은 공직이나 명성에 있지 않고 아내와 아이들, 경제적인 성공, 좋은 평판, 좋은 친구들에 있는 것이다.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가 충분히 어려서 자신의 가르침과 교육에 순종하는 아내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 초기에 아내에게 어머니의 의무와 가정 경영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번영하는 생활은 건강, 재능, 시간, 돈을 경제적으로 반듯하게 사용하는 데서 온다. 건강은 절제와 운동과 적절한 식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잇다. 재능은 종교와 모범을 보고 정직한 성격을 형성 하는 것과 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 잇다. 돈은 수입과 지출과 저축을 조심스럽게 계산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얻을 수 잇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보다도 농장이나 부동산에 투자한다. 그것은 그와 가족에게 시골에 거주할 장소를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곡식, 포도주, 기름, 가금, 목재,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다른 많은 것들을 제공해 준다. 도시에도 집을 소유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녀들은 그곳의 교육 시설을 이용할 수가 있고, 산업 기술 일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은 한 해의 대부분을 별장과 시골에서 보내는 것이 좋다.

 나의 행복의 근간도 가족이다. 평온한 가족이 뒷받침 되고 있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믿고 있다. 물론 힘든 위기의 순간도 있지만, 그러한 경험이 이제는 이해와 존중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데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러한 바탕이 되는 아내와 관계는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서 아이들의 표정이 밝고 긍정적이다. 가족이 화목함이 나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

 경제적인 지출도 나 중심적이기 보다 가족에 우선한다. 어떤 때는 소박하다 못해 찌질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렇게 찌질한 모습을 상당부분 감싸주는 것 같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많은 감사하는 일이 생긴다는 전혀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345 사육제 때 피렌쩨에서는 행렬을 이룬 무대 차들이 신중함, 희망, 두려움, 죽음과 같은 이념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거나(알레고리)자연의 원소, 바람이나 계절 등을 표현했고, 또는 파리스와 헬레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등의 이야기들을 무언극으로 들려주고, 각 장면마다 그에 어울리는 노래들을 동반했다.

 

358 나는 이탈리아에 딱 한 번 갔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바이지만 그곳에 9일밖에 머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고귀한 도시 런던에서 9년 동안 들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죄의 자유를 이 한 도시에서 목격했다. 그곳에서는 죄를 지을 자유가 있음을 보았다. 형벌을 받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마치 런던에서 아무런 비난 받지 않고 구두를 신을지 슬리퍼를 신을지 결정할 자유가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 방식을 받아들인 영국인은 악마의 화신이라는 말을 확정된 격언처럼 인용한다.

 

21장 정치적 붕괴 1494~1534

 

371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관은 만족을 모르는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후로 1707년까지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의 속령으로 남아 있게 된다.

 

386 프랑수아 1세는 용감하게 행동했다. 군대가 퇴각하는 동안 그는 앞장서서 적의 대열로 나가 직접 적을 죽였다. 그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데도 그는 계속 싸웠다. 마지막에 완전히 지쳐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어 그는 몇몇 대장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적들이 에워싼 텐트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절반만 자주 인용되곤 한다. “명예만 빼고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뚱이도 안전합니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 있던 카를 5세는 포로로 잡은 그를 마드리드 근교 성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396 에라스무스는 사돌레토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로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원이며 고귀한 영혼을 위한 유모이고 뮤즈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어머니인 곳이었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는 자신들의 나라보다도 더욱 소중하고 달콤하고 귀한 곳이었던가! …. 정말이지 이것은 한 도시의 파괴가 아니라 온 세상의 파괴입니다.”

 

401 그사이에 피렌쩨가 도시의 방어를 위해 고용한 장군 말라테스타 발리오니는 포위군과 배신적인 계약을 맺었다. 그는 적군을 도시 안에 들어오게 하고 자신의 총구를 피렌쩨 사람을 향해 겨누었다. 굶주리고 조직이 무너진 공화국은 항복했다.(1530 8 12)

 

408 시스티나 예배당의 그림이 르네상스 회화의 정점이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붕이 르네상스 건축의 정점인 것과 마찬가지다.(이들 모두 미켈란젤로의 작품) 무덤들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서 절정이던 시절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모습을 재현하려는 노력은 없다. 쥴리아노는 로마 장군의 의상을 입었고, 로렌쪼는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411 ‘의 제막식을 맞이하여 시인 쟌바티스타 스트로찌가 4행시로 문학적 주석을 표현 했다.

 

    너희가 여기서 보는, 우아하게 잠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밤은 어떤 천사(미켈란젤로)에 의해

    돌로 제작된 것. 삶을 지닌 채 잠자는 여인.

    믿지 못하는 사람아, 그녀를 깨워라, 그녀가 네게 말해 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해 칭찬의 재담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용서했지만 해석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시들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내주는 4행시에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나의 잠은 소중하다, 폐허와 불명예가 지배하는 한

    잠은 단순한 돌 이상이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나의 큰 이점.

    그러니 나를 깨우지 마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라.

 

종말 1534~1576

 

22장 베네찌아의 황혼 1534~1576

 

427 “베네찌아로 가겠습니다. 오직 거기서만 정의가 공평한 저울 접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라고 아레티노는 말했다. 1527 3월에 베네찌아에 도착해서 대운하 옆에 집을 얻었다. 그는 얕은 바다 저편의 전망에 홀딱 반했고, 그의 말대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 도로의 풍부한 통행에도 반했다. 그는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베네찌아에서 영원히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435   여기 토스카나 시인 아레티노가 누워 있다.

      신만 빼고 모든 사람에 대해 고약한 말을 했던 사람,

      변명으로는 나는 그()을 몰랐다.”고 말하던 사람.

 

437 1535년 볼로냐에서 파울루스 3세는 티찌아노 초상화의 대담한 사실주의를 경험했다. 예순일곱의 나이로 지쳤으나 불굴의 면모를 지닌 그는 흘러내리는 교황의 의상을 입고 긴 머리와 한때는 강력하던 몸을 덮은 수염을 지니고, 귀족적인 손에 권위의 반지가 뚜렷하다. 이것은 라파엘로가 그린「율리우스 2세」와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섬세하고 가장 심오한 초상화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작품이다.

 

442 티찌아노의 가장 흥미로운 초상화들은 그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여러 번이나 자신의 모습을 그렸고 마지막으로는 여든 아홉 살 때의 모습을 그렸다. 그라도에 있는 「자화상」앞에 서면 우리는 주름이 졌지만 그래도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흐름에 깨끗이 씻긴 얼굴을 보게 된다. 테두리 없는 모자는 그의 흰머리를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 붉은 수염이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다. 커다란 코는 힘을 호흡하고 푸른 눈은 약간 진지한 모습으로 실제보다 죽음이 더 가까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손은 붓을 들고 있고 위대한 예술가의 열정은 아직 다 소모되지 않았다.(총독들이나 원로원 의원들이나 상인들이 아니라)이 사람이 바로 50년 동안 베네찌아의 주인이었다. 덧없는 귀족들과 왕들에게 불멸의 모습을 부여하고, 자기가 선택한 도시를 르네상스 역사에서 피렌쩨, 로마와 나란히 세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느낌은 어떨까? 양면의 모습을 가진 내면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좀 더 긍정적이고 훌륭한 모습으로 보여주려는 욕심이 있지 않을까?

 군에 입대해서 처음 자대 받던 날이 생각난다.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 속에 있는 나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에 엉성한 군복을 입고, 이등병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왜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던지, 카메라가 있으면 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 거울 속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앞으로 어떻게 군생활을 해야 할지에 대한 두렵고 어두운 생각들로 생소하게 다가온 것 같았다.

 티찌아노처럼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초상화의 느낌은 달라진다. 노년의 얼굴은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다고 하지 않은가? 티찌아노를 보면서, 나는 순간의 사진보다도 인간의 내면까지 보여주는 초상화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443 아주 노년까지 그는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고, 예술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행복을 찾았다. 그는 이 분야에서 자기가 대가임을 알고 있었고, 온 세계가 자신을 칭찬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손이 그 노련함을, 또 자신의 눈이 그 예리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상상력과 함께 그의 지성도 마지막까지 그 힘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446 그는 생애을 통해 티찌아노를 대단히 존경했고, 티찌아노가 자기에게 준 그림을 소중히 여겨 작업장 벽에 붙여놓고 회화에서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언제나 거듭 생각나게 해 주는 암시로 삼았다. 미켈란젤로의 도안과 티찌아노의 색채가 그것이다.

 

457 이 그림들을 앞에 놓고 우리가 느끼는 최종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반응의 감정이다. 이것은 대형 양식의 예술이다. 다른 예술가들은 이를 테면 라파엘로처럼 아름다움을 그렸고, 이를테면 미켈란젤로처럼 힘을 그리고, 렘브란트처럼 영혼의 깊이를 그렸다. 그러나 여기 이 우주적인 유화에는 (도시의 소음처럼, 아니면 기도할 때면 침묵에 잠긴 대중처럼, 아니면 수천 가정의 애정 어린 친근함처럼)인류가 등장한다. 다른 어떤 예술가도 이렇게 대규모로 인류를 본 적이 없었다.

 

461 베로네제의 신화들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은 총독 궁전에 있는 「에우로파의 납치」이다. 어두운 색채의 나무들이 있는 풍경, 날개 달린 아기들이 화한을 내려뜨리고, 에우로파(페니키아 공주)는 즐거운 모습으로 사랑스러운 황소에 올라타고 있고, 황소는 그녀의 아름다운 다리 하나를 핥고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유피테르가 변신한 모습이다. 하늘나라의 행운아 카사노바는 여기서 신적인 취향을 보인다. 여왕과 같은 의상을 차려입은 에우로파는 베로네제의 가장 성공적인 여성 인물이다. 그려를 찾아 정말 하늘을 떠날 만한 모습인 것이다.

 

467 베네찌아 화가들은 색채를 너무나 좋아해서 피렌쩨 대가들과 같은 조심스러운 도안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도 훌륭한 도안가들이었다. 어떤 프랑스 사람은 여름은 색채주의자, 겨울은 도안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은 순수한 선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선들은 봄의 초록, 여름의 갈색, 가을의 황금 색 아래도 여전히 있다. 죠르죠네, 티찌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제의 색채의 영광 아래에도 선이 있다. 다만 색채에 너무나 빠져서 교향곡의 구조적 형태가 그 흐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470 1559년 이후로 스페인 지배는 외국 세력이 이탈리아 영토에서 전쟁하는 일을 끝냈고 이런 상태가 179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이 이탈리아 국민에게 정치적 질서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 부여하고, 르네상스를 만들기도 파괴하기도 한 격한 개인주의를 가라앉혔다.

 

480 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의사들은 모든 처방을 포기하고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란 오로지 절제하는 규칙적인 생활에 있을 뿐이라고 충고했다. “나는 견고한 것이건 유동식이건 환자에게 처방된 것과 같은 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섭취해서는 안되었다. 그것도 아주 소량만 먹어야 했다.” 고기를 먹는 것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언제나 절제를 지켜야 했다. 머지않아 그는 하루 섭취량을 음식 350그람과 포도주 400그람으로 줄였다. 그가 들려주는 바에 따르면 1년만에 나는 그동안의 모든 불편함에서 완전히 쾌유되었다. …..나는 아주 건강해졌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다.” 그러니까 여든셋의 나이 때 한 말이다. 그는 이런 육체적 습관의 질서가 절도가 정신과 성격의 측면에서도 질서와 절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두뇌는 항상 명료한 상태에 있다. …. 우울증, 미움, 다른 정열들이그를 떠났다. 그의 미적 감각조차도 더욱 날카로워져서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481 와서 한번 내 건강함을 보시라.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말에 올라타고 계단과 낮은 산에 오르는 것을, 내가 얼마나 즐겁고 만족하는지를, 그리고 온갖 마음의 고민과 지겨운 생각들에서 벗어나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기쁨과 평화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신께 감사드리는 바이지만 입맛을 비롯한 나의 모든 감각들은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 내가 먹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은 예전에 불규칙하게 살던 시절에 먹던 맛있는 것들보다 더욱 맛이 좋다. …. 집으로 돌아오면 한두 명이 아니라 열한 명이나 되는 손주들이 늘어선 것을 본다.  그들이 노래하고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참으로 즐겁다. 나 자신도 함께 노래하고 하는데 나는 전보다 더 맑고 잘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 .… 그러므로 내 삶은 살아 있는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며, 나는 내 삶을 정열에 사로잡힌 젊음과 바꾸고 싶지 않다.

 

481 “건강화 힘이 완전한여든 여섯 살에 그는 두 번째 책을 써서 몇몇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보내는 삶의 즐거움을 표현했다. 아흔한 살에 그는 세 번째 책을 덧붙여서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의 손으로 하루 여덟 시간씩 글을 쓴다. ….. 이 일에 더해 다른 시간에는 걷고 노래를 한다. …… 식탁을 떠날 때면 노래를 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내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답고 잘 울리게 되었는지!” 아흔 두 살에 그는 온 인류에게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생활을 하라는 …… 사랑의 권고를 썼다. 그는 자신의 수명이 백 년을 채울 것이라 예상했고, 감각, 느낌, 생명력 등이 점차 줄어드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기대했다. 그는 1566년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일부 사람들은 아흔아홉 살이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백세 살이나 백네 살이라고 말한다. 그의 아내도 그의 권고를 지켜서 거의 백 살이나 살았다고 하며 신체적으로 완전한 편안함과 영적인 안정감을 지닌 채 죽었다.

 

497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탁월함의 요소를 지녔거나 탁월함과 상당히 비슥한 요소를 지닌 사람이고 진리와 정직성을 지니고 있다면 모든 남자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생애를 서술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흔이 되기도 전에 이런 섬세한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의무가 이제 나의 마음에 나타났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난 도시 피렌쩨에 있으며, 쉰여덟을 넘기고 있다.

 

502 나의 판결이 불공정하게 나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방어를 위해 지니고 다니던 큰 검에 의지했다. 나는 언제나 훌륭한 무기들을 지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를 고소한 사람을 맨 먼저 공격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의 다리와 팔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 그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가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업게 만들었다.

 

508 르네상스 로마에 작별의 눈길을 던져 보면 이 도시가 1527년의 재앙에서 회복한 그 속도에 놀라게 된다. 클레멘스 7세는 파괴를 막기보다 회복하는 데서 더 많은 기술을 보여 주었다. 그가 카를 5세에게 항복한 일은 교황국가들을 보호해 주었고, 이곳의 수입이 교회 기율의 회복과 로마의 부분적인 재건을 위해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종교 개혁의 효과로 수입이 줄어든 일이 아직은 교황청 재정에 뚜렷한 영향을 보이지 않았다. 파울루스 3세 치하에서 르네상스의 정신고 영광은 한 순간 되살아나는 듯이 보였다.

 

511 미켈란젤로의 내명에 있는 조각가가 화가를 망쳤다. 나날이 더욱 종교적으로 되어 가던 이 엄격한 청교도 예술가는 강력한 근육질의 몸들을 색채로 조각했다. 그동안 미술과 문학이 행복한 아이들이나 우아한 젊은이들이나 나긋나긋한 소녀들로 표현했던 천사들은 여기서 하늘을 달리는 근육질의 전사들이 되고 말았다.

 

519 동안, 혹은 섬세한 드로잉의 학문은…. 회화, 조각, 건축의 원천 및 핵심이며 모든 표현의 형식, 또 모든 학문 형식의 원천이며 핵심이다. 이 분야에서 대가가 된 사람은 대단한 보물을 소유하는 셈이다. …. 인간 두뇌와 손의 모든 작업들은 도안 자체이거나 도안의 분과이다.

 

520 화가로서 그는 끝까지 도안가로 남았다. 언제나 색채보다 선에 더 관심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형태를 도안하고자 했으며 예술에서 인간의 태도를 포착하거라 도안을 통해 삶의 철학을 전달하고자 했다.

 

520~521 조각은 그에게 있어서 열병이었다. 그의 생각에 대리석이 비밀을 숨기고 있으므로 자신은 그것을 드러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비밀을 바로 그의 내면에 있었고 완전히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친숙한 것이었다. 그가 내면의 환상을 외부로 드러내 형태를 만들어 주는 싸움에서 도나텔로가 그를 조금 도와주었고, 델라 퀘르치아는 조금 더 많이, 그리스 사람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 사람들과 똑같이 예술의 주요 부분을 인체에 할당하고, 얼굴은 보편적인 모습을 띠고 거의 판에 박힌 듯한 모습으로 그대로 두었다. 메디치 무덤들에 나타난 여성 인물들의 모습이 그 예이다.

 

522 우리는 미켈란젤로에게 찬사를 바친다. 그가 길고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창작을 계속하고, 미술의 모든 주요 영역에서 걸작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이른바 살과 피를 찢고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의 정신과 마음에서 터져 나오면서 그를 한동안 출산 뒤의 허약함 속에 남겨 두곤 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수십만 번이나 망치와 끌질을 통해, 연필과 붓질을 통해서 형태를 얻는 것을 본다. 불멸의 주민들처럼 그들은 하나씩, 오래 지속되는 아름다움과 의미의 형상들 속에 자리를 잡아 간다. 우리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며, 또 선과 악, 고통과 사랑스러움, 파괴와 숭고함이 뒤섞인 듯이 보이는 우주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재의 모습, 물질에 의미를, 형태나 생각에 고귀함을 부여하는 천재의 모습이 드러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지성을 이루는, 삶과 정신과 법칙에 아주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삶 가까이에서 친근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배경 그림이 인물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명암의 차이를 통해 대상의 내면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작품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통이 필요로 하며,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작품들이 인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되는 과정을 보았다. 이렇게 유한한 인간의 삶을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불멸의 작품으로 만드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은 끊임없는 연습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며,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더욱 집중해서 차별화 하는 것이다.

 

 

■ 내가 저자라면

 

<문명이야기>를 두 번 읽으면서 역사 속에 르네상스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 시대의 대표적인 거장들의 삶의 모습과 작품을 위한 그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그림으로만 접했던 그들의 작품을 상세한 설명으로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윌 듀런트'라는 역사학자 시각으로 바라본 르네상스는 인류 문명을 인간 중심으로 바꿔놓은 일대 변혁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물질적인 부를 가진 소수가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다수를 착취하는 바탕 위에서 자리잡은 변화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교황과 예술가들의 삶, 또한 하급 무산자들의 땀의 존재로 인해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러한 부유함과 권력이 르네상스를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불멸의 작품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시대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은 조각과 회화, 그리고 문학 분야에 걸쳐 영향을 준 사건들과 인물들을 탐색하고 해석하고 있다.

그 시대의 위대한 거장들이 고대 로마와 그리스 문화유산을 통해 인간의 감성을 표현했듯이 그 이후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에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을 나는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필요한지와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은 꿋꿋한 의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도 평온한 삶에서 보다 열악한 환경과 긴장감이 있는 가운데에서 영감을 떠오르는 것이고, 그러한 다양한 경험들이 작품에 반영되었을 때,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다는 진실을 발견했다.

내가 <문명이야기> 다시 쓰는 작가가 된다면, 윌듀런트처럼 여러 분야들의 역사적인 흐름을 기술하기 보다는 한 분야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 분야는 예술가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르네상스 시대의 모습들이다. 거장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수집해서 작품 속에 담겨진 이야기와 연결하고 싶다. 거장들의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읽어 나갈 수 있는 형식이다. 거기에 현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함께 비교해 본다면 예술가들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현실에서 분야별로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죠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이다. 이러한 소중한 '가능성의 씨앗'을 얼마나 잘 키우느냐가 각자 개인의 몫이다. 내 안에 모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는 말이 얼마나 큰 용기를 가져다 주는가? 이 말은 아직 자신의 꿈을 실천해 옮기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지금의 나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 집중해서 하나씩 실천해 간다면, 그 분야에 우뚝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큰 힘이 된다. 어떤 어려운 순간이 오더라도 잊지 말고 하느님이 주신 그 씨앗을 생각하면서, 매일 씨앗에 물을 주며,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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