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세린
  • 조회 수 2428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2년 7월 30일 08시 26분 등록

그리스인 이야기 

앙드레 보나르 지음 / 김희균,양영란 옮김, 강대진 감수 


1. 저자에 대하여 

 지난 북리뷰 참고.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빨간색 : 처음 읽기 땐 강력하게 무찔러 들었던 글귀 

파란색 : 처음 읽기 때 나의 의견 

분홍색 : 두번 읽기 때 강력하게 무찔러 든 글귀

보라색 : 새로 들어온 글귀 

초록색 : 나의 생각 


1) 그리스인 이야기 1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까지)

Chapter 1 그리스 문명의 탄생

p11 인간은 모두 원시인으로 시작했다. 

앙드레 보나르가 진화론을 따랐던 모양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인간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인 걸까? 아니면 둘 중 하나를 믿고, 그 믿음대로 살면 되는걸까? 이 문장은 우리의 근원, 어디서부터,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말한다. 인간은 모두 원시인이었다고. 


p15 문명은 원시인들의 토양에서 차츰 싹을 틔우고 자라 온 것이다. 필요하니까 발명을 했고, 우연히 기후가 좋아 생산량이 늘어났고, 그래서 문명을 이룬 것일 뿐이다.

 그럼, 잔인하기 그지없는 그리스 원시인들이 만들어낸 이 문명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그 정체를 차근차근 파헤쳐볼 것이다. 하지만 미리 성급하게 결론을 말하면, 그리스 문명은 바로 우리의 문명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문명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이다. 


<그리스인도 처음에는 원시인이었다>

p16 문명이란 무엇인가? 그리스 말로 문명화된 인간이라고 할 때, ‘문명화된’ 이라는 말은 ‘길들여진’, ‘교육을 받은’, 혹은 ‘접붙인’ 이라는 뜻이다. 문명화된 인간, 다시 말해서 접붙인 인간이란 좀 더 영양이 풍부하고 좀 더 맛있는 열매를 맺을 줄 아는 인간을 말한다

 문명화된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깨달아 알고, 자연에 대해 반격을 가할 수 있다. 문명은 인간을 생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모여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사람들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과학과 예술을 향유한다. 실재 세계는 물론이고, 예술 작품을 통해서 상상의 세계에서도 살아가게 된다. 실재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힘이 과학이라면, 상상 속에서 또 하나의 실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예술이다. 과학과 예술로 무장한 인간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이요 인간됨이다 .인간됨은 다시 새로운 발견과 창조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p18 요컨대 농부로 시작해서 뱃사람으로 진화해온 것이 그리스 문명의 내력이다. 


p19 그리스인들이 또 하나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은 시(詩)다. 사물을 시적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고심하던 그리스 민족은 소위 문학과 만난다. 

 그리스 말은 풀과 샘물처럼 부드럽고 힘찼으며, 미묘한 생각들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 사람의 마음속에서 각양각색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을 포착해낼 만큼 풍부했다. 부드럽고 강렬한 음악도 알았고, 잘 다듬어진 플루트의 음색도 알았고, 풀피리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문학이 아니었다. 


p20 기원전 7세기와 6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들은 사물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세상을 이루는 것들의 법칙을 알아내는 것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그리스의 과학은 이때 생겨났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알고 싶어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지식을 인간을 위해 요긴하게 쓰고자 했다. 수학을 만들었고, 천문학을 개발했다. 물리와 의학의 기본 지식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그들은 어째서 그것들을 발명하고 발견하는 데 매진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질문하고 싶었던 부분을 질문해줬다. ‘어째서?’, ‘봉사하기 위해서!’ 

 인간은 지적 호기심을 타고나는 가보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욕구가 없다면 아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욕구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힌다. 우리에게 지적욕구가 없었다면 문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p21 그리스 문명의 목적은 하나다. 자연에 맞서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것,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그리스 민족의 문명은 인간의 문명이었다. 인간에게 봉사하는 문명이었다. 


p22 <프로메테우스, 인간 진화의 신화적 증인>


p23 <무식한 유목민, 토착 에게인에게 문명을 배우다>


p27 크레테의 여인들은 그리스의 여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렸다. 기원전 5세기가 되어서도 그리스 여인들은 크레테 여인들과 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할 정도였다. 크레테 여인들은 아주 다양한 일을 했다. 최근에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에게해 주변에 산재해 있던 오래된 민족들에서도 여성의 지위는 아주 높았다고 한다. 어떤 민족은 모계사회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가계는 모계를 따라 전승되었다. 여인들이 오히려 여러 남자를 거느린 채 공동체를 지배했다. 


p31 <경쟁하는 도시국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도시가 형성되기에 유리한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는 도시가 형성되기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p34 우리는 흔히 나쁜 의미에서 야만족이라는 딱지를 붙이지만, 야만족의 본래 의미는 그리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p35 “자유롭고 싶고 누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스가 여느 민족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피게네이아는 “야만족은 노예를 키우고, 그리스 민족은 자유를 키운다”는 명언을 남겼다. 


p35 <척박한 환경이 바다 너머를 꿈꾸게 하다>

 산은 인간을 보호하지만 바다는 그럴 수 없다. 산은 경계를 나누지만, 바다는 경계를 허문다. 


p36 바다는 두렵고도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그리스 말로 바다는 ‘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길을 떠난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바다를 찾아라. 이 말은 자신의 길을 찾으라는 말과 같다. 라고 한 후 위의 인용문을 이용하면, 자기 길을 찾으라는 주제로 글을 쓸 때 요긴할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에게해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교통로였다. 유럽의 뱃사람들이 소아시아까지 가는 동안에 망망대해는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든 자그마한 육지라도 볼 수 있었다. 마치 아이들이 냇물을 건너기 위해 놓은 징검다리처럼 에게해 위에는 수많은 섬이 떠 있었다. 

 수 세기 동안 도적질이나 하면서 살았던 그리스 민족은 한편으로는 상인의 기질을, 다른 한편으로는 시인의 기질을 타고났다. 

 솔론과 아이스퀼로스와 헤로도토스, 플라톤의 여행은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이집트로 가고, 소아시아와 바뷜로니아에 다녀오고, 퀴레네와 시켈리아까지 갔다. 

(우리 이번 여행도 차원이 다른 여행이 될거다. 우리 팔팔이 첫 책의 제목으로 ‘여행의 차원’도 괜찮겠다. 훗)


p37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나침반 삼아 그리스인들은 위대한 이웃집을 찾아간다. 그리스인들은 바다를 넘으면 살기 좋은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로 가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8세기에 이민 행렬이 시작되었다. 

(나는 무엇을 나침반 삼아 위대한 것을 찾아갈까? 우리는 무엇을 북극성으로 삼고 위대함을 보러 가고 있는가? 그리스인들이 바다를 넘으면 살기 좋은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아마 우리도 무언가를 하면, 무엇을 얻으면, 무엇이 되면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도 두려움 없이 이민행렬을 시작한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인들처럼 우리 삶의 이민 행렬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 삶의 이민을 시작해야한다.’가 더 적절한 표현이려나? 이 부분을 잘 활용하면 우리 삶에서의 변화를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살기 좋은 땅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살기 좋은 어떠한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일 수 있으므로. 만족하는 지위, 만족할 만한 부, 만족하는 업적 등이 될 수 있겠다. 

밀레토스의 어부들은 흑해 주위에 90개가 넘는 도시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p37<올리브와 포도주의 나라>

 “그리스 문명은 배고픔을 먹고 자랐다.” 헤로도토스는 그렇게 고백했다. 


p39 마시자! 뭐하러 등불 밝힌 밤이 오기를 기다리겠는가? 해가 반 주먹도 남지 않았는데. 친구여, 찬장에서 커다란 잔을 꺼내게.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 준 이 선물은 현세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이니. 포도주 한 잔에 물 두잔을 섞어서 자, 파도타기로, 건배! 


p40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진실의 거울’이라 부른다. 몇 잔 마시면 사람 속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 말은 맞는 말 같다. ^^


p42 결국 사유재산 제도는 강자가 강자를 위해서 만든 제도였다. 


p43 장인 계급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들은 의사와 시인이었다. 

위대한 그리스 역사는 각종 사회계급이 발생하고 발전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문명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p44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한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후나 토지, 바다와 같은 자연조건도 있었고, 역사적인 사건이나 전설도 있었고, 계급 투쟁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도 한몫 거들었다. 이런 것들이 용광로처럼 섞여서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하면 소위 문명의 탄생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 된다. 

(한 인간의 삶의 발전의 원동력도 한두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재능, 타고남, 노력 뿐만 아니라 인맥과 같은 조건도 있고, 역사적인 사건이나 전설도 있다. 그리고 기회와 사회경제적인 요인도 한몫한다. 훌륭한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변이 그를 돕기도 하고, 더 훌륭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 것 같다. 문명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그리스의 기적’이 만들어진 걸까? 그렇지는 않다. 어떤 학자들은 기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기적은 없다. 그것은 비과학적인 단어이고, 따라서 그리스답지 않다. 기적은 과학이 아니므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설명을 감탄으로 치환하는 것 뿐이다. 

 진실은 이렇다. 그리스 민족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그들의 수단을 가지고 문명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신이 기적처럼 나타나서 특별한 재능을 부여했을리 없다. 문명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분투해온 것들의 결과물이다. 그 안에 그리스 민족이 끼어 있을 뿐이다. 


p45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니다. 인류의 발전 단계에서 한 걸음 더 올라섰을 뿐이다. 그와 비슷한 예는 수도 없이 댈 수 있다. 

 그리스 문명은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문명이 발달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은 거꾸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면 세계가 다시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세계는 서로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다. 인간은 세계를 바꾸고 세계는 다시 인간을 바꾼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문명의 본질이다. 인간과 세계의 접합, 인간과 세계의 융합을 지향한다. 인간과 세계는 대립하는 당사자로서 서로 싸우고 투쟁한다. 그러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어나간다. 문명을 완성하는 것이다. 


Chapter 2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p49 호메로스는 인간의 고결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죽이고 죽을 뿐인 그들의 용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나선 자들, 그들의 희생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p50 전쟁에 투입된 인간들에게는 용기와 우정과 사랑이라는 무기가 있다. 연민은 복수보다 강한 법이다. 고결한 사랑을 아는 인간은 신만큼이나 위대한 법이다. 호메로스는 그런 인간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p52 젊은 영웅 아킬레우스는 힘과 민첩성, 열정과 용기를 갖춘 최고의 전사였다. 지는 법도 없었고 지치지도 않았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갖춘 아킬레우스가 구경만 하고 있자, 그리스군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아이아스는 소년들이 아무리 끌어당겨도 꿈적하지 않는 당나귀처럼 용맹으로 치면 아키렐우스에게 뒤지지 않는 전사였고, 오뒷세우스는 사람의 마음을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p54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싸움은 <<일리아스>>의 백미다. 


<<일리아스>>의 탄생

p55 호메로스가 이 모든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들이다. 호메로스는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을 엮어 하나의 시편에 담고, 하나의 드라마로 완성했을 뿐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던가. 작가에게는 전해지는 많은 에피소드들을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에 대한 창의적인 관점이 필요한것 같다. 자신만의 사유, 생각, 관점, 시각이 필요하다. 나만의 것이면 더 좋다. 그럼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내줄 수 있으므로. 


p56 그들은 지나간 시절의 전쟁 얘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요즘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 듣기를 좋아할까? 돈 잘 버는 법? 행복하게 사는 법? 좋아하는 일 찾는 법?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아할지 고민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그리스의 셰익스피어, 호메로스>

p58 호메로스의 재능은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는 데 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도 4명의 남자가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사의 품격’의 작가도 4명의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한 것이다. 작가들에게는 그러한 능력도 필요한 것 같다. 


p60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운명 앞에 한번 대들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아이아스와 디오메데스 : 묵직한 용기, 날렵한 용기>

p61 탈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용기는 묵직하다. 저항의 용기다. 


p63 공격은 몰라도 수비에는 아이아스만 한 전사가 없다.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는 죽으나 사나 자리를 지킨다. 말 그대로 단순한다. 경계석 같다. 돌처럼 서서 경계를 지킨다. 그가 있는 한 누구도 넘어올 수 없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그를 탑 혹은 벽이라고 부른다. 단단하기가 콘크리트 같다. 


 우리 뒤에 뭐가 남았는가?

 든든한 성채라도 서 있는가?

 아니다. 여기가 우리 죽을 자리다. 

 우리밖에 없다. 구원의 빛은 싸움에 있다. 

 

 기댈 것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두 주먹 불끈 쥔 힘으로

 여기서 끝내자. 내 목숨 내가 지키든지 

 아니면, 깨끗하게 끝을 보든지


 p66 호메로스는 디오메데스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가 싸울 때마다 투구 깃에 불꽃이 튀게 한다. 그게 디오메데스의 상징이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신과 싸운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디오메데스가 유일하다. 디오메데스만이 혼자서 아프로디테를 쫓고, 아폴론과 맞서고, 전쟁의 신 아레스를 친다. 디오메데스가 쓰러뜨린 트로이아 장수를 구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나서자 디오메데스는 미의 여신에게 대들었다. 감히 여신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이다. 


p68 그 순간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는 글라우코스의 셈법을 흐리게 했다. 

       금으로 된 무장과 청동으로 된 무장을 바꾼 것이다. 

       소 백 마리를 주고 고작 아홉마리를 받은 셈이다. 


디오메데스가 노골적으로 흡족해했다는 구절은 없다. 다만 디오메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호메로스는 이런 식으로 서사시의 진부함을 비트는 재주가 있다. 영웅이라고 해서 욕심이 없을 수 없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어보는 리얼리스트다. 


<파리스의 변명>

p69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파리스와 형 헥토르의 대립은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다. 


p72 사랑은 자기가 하지만 사랑 자체는 신의 속성이다. 따라서 파리스 안에는 두 가지가 공존한다. 하나는 경솔하고 비루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한 신이다. 한편으로 파리스는 보잘것 없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신 아프로디테를 몸에 담고 있다. 아프로디테의 충만함과 완전함, 경이로움이 그에게 있다. 파리스라는 인간의 생애는 결국 반쯤 신의 포로다. 


p73 헬레네는 정돈된 삶을 지향한다. 


p74 헬레네는 남편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헬레네로 인해 사단이 나고, 두 나라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것이야마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헬레네는 아프로디테를 닮아서 아름답다. 그리고 남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다. 


<아킬레우스 : 현재에 충실한 인간형>

p75 아킬레우스는 젊음과 힘을 상징한다. 


p76 그는 혈기왕성하다. 그래서 약한 자들은 주로 그에게 기댄다. 그가 힘센 자이기 때문이다. 


p78 아킬레우스는 산속 깊은 계곡에서 시작한 사나운 불길 같다고 했다. 빽빽한 숲에 불이 붙고, 때마침 광풍이 일어 불꽃이 사방으로 넘실댄다. 전쟁터에 나가면 아킬레우스는 꼭 그 불길 같다. 누구를 쫓기만 하면 반드시 끝을 보고야 만다. 그 학살의 기세가 너무 세서 검은 흙바닥은 금세 피로 물든다. 


p79 분노는 사람의 심장을 쇳덩어리로 만든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p83 아킬레우스는 삶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주 열렬히 사랑한다. 다만 그는 현재를 사랑할 뿐이다. 지금의 감정과 지금의 움직임만 사랑한다. 오로지 거기에만 충실하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삶이고 전부다. 살인도, 분노도, 눈물도, 사랑도, 연민도, 그는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무슨 철학자들처럼 공평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처럼 모든 것을 공평하게 끌어안는다. 고통도 기쁨만큼 즐겁다. 파트로클로스가 죽고 나서 아킬레우스는 학살의 즐거움에 몰두한다. 호메로스의 말대로 “그의 심장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때, “무기는 그에게 날개가 되어 사람들 위를 날아다니게 한다.” 


p84 무사하게 지나가는 삶보다는 명예로운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명예를 추구한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간다. 거기서는 죽음이 오히려 삶이다. 명예를 이루다가 죽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명예롭게 살게 될 테니까 말이다. 시대를 넘어 영원히 사는 길. 아킬레우스는 그런 길을 택했다. 


<헥토르 : 공동체를 사랑하는 고결한 인간>

p87 헥토르도 아킬레우스만큼 용감한 사람이지만, 그 둘은 성격이 다르다. 아킬레우스는 천성적으로 용감한 사람이고, 헥토르는 배워서 용감해진 사람이다. 훈련을 통해 용기를 배웠고, 그것이 그의 몸에 녹아든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하면 신이 나는 사람이지만, 헥토르는 전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헥토르의 용기야말로 최상급의 용기다. 두려움이 뭔지 알지만,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나의 올해 키워드는 ‘용기’이다. 실행해보기 전에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하다 놓친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도 중요하지만, 별 것 아닌 일에는 용기 있게, 그동안 해보지 않은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또한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도 다른 것을 재고 따지기 전에 ‘용기 있는 선택’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도 훈련을 통해 용기를 배우고 싶다. 


p89 헥토르의 용기는 사색과 품위에서 나온다. 

 헥토르는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때로 본질을 꿰뚫는 아름다움이 있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의 용기는 사색과 품위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본질을 꿰뚫는 아름다움이 있단다. 나의 용기는 어떤가?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하는가? 지금 하고 있는 훈련이 용기를 갖기 위한 훈련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것이 용기의 좋은 거름이 될 거다. 

 헥토르가 갖춘 품위는 그저 단어로서 존재하는 품위가 아니다. 헥토르의 품위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데 있고, 필요하다면 조국을 위해 죽는 데 있고, 아내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데 있다. 헥토르의 용기는 현자들의 용기와 다르다.


p91 헥토르는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힘보다는 통합하게 하는 힘이 더 강하다고 믿는다


p94 헥토르에게 죽음의 순간은 투쟁의 순간이다. 그는 신들이 점지한 운명에 맞서는 인간이다. 훗날 다음 세대들이 위대했다고 칭송해 마지않을 인간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으려 한다. 

 호메로스의 인본주의에는 이처럼 진실하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 가족을 사랑하고 보편적 가치를 숭상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사랑하며 싸우는 인간이 있다. 헥토르가 그렇다. 그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죽음과 싸운다. 그의 부르짖음은 더 나은 인간의 모습을 향한 부르짖음이다. ‘다음 세대’인 우리가 그 부르짖음을 듣게 되기를 헥토르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p92 <<일리아스>>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있었고, 그들이 인류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이끌어왔으며,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싸우고 있다. 인간이 가진 양면성. 

내 안에도 양면성이 있다. 이 양면성이 서로 화해하고 좋은 방향으로 융합되면 좋을텐데 나는 아직 양면성의 화합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선과 악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융합될 수 있고, 윈윈할 수 있을텐데 나는 아직 대비되는 두 가지 차원의 악수를 허락하지 못한다. 풀어내고 싶은 숙제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해서라기 보다, 나 스스로 그러고 싶어졌음 좋겠다. 


Chapter 3 오뒷세우스와 바다 

p99 호메로스의 두 번째 서사시는 인간이 이룬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바다를 장악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뱃사람들과 상인 계급의 노래>

p105 크게 보면 <<오뒷세이아>>는 안내도다. 모험을 즐기는 자들, 선원들, 이민자들, 쇠를 구해서 무기를 만들고자 하는 부자들을 위한 여행 안내서다. 


<세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p109 기원전 8세기, 뱃사람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처참한 삶이었고 짐승만도 못한 삶이었다. 자연치고도 가장 혹독한 자연을 맨주먹으로 맞서는 일이니까 말이다. 


p111 결국 오뒷세우스는 남들보다 먼저 미래를 본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위험한 존재들이 들끓는 땅이지만, 그리스 민족은 여기저기에다 커다란 도시를 세울 것이다. 벌써 기초공사를 시작한 곳도 있고 말이다.

 모험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행하고 나면 남들보다 먼저 미래를 볼 수 있다. 모험이란 그런 것이다. 


p112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차 있는 인물이다. (오뒷세우스) 

이 구절을 읽을 즈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인간은 이제 무엇을 발견하러 떠날 것인가? 우리의 호기심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우주에도 집을 짓고 온다던데...... 우주 너머에는 무엇을 있을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바다 건너 어떤 땅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이미 거의 다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외부로 뻗어나갔던 호기심이 이제 인간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는 더이상 바다 건너 미지의 땅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궁금해 한다. 인간의 정신 세계. 뇌 속. 인간의 마음. 심리.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리스 철학자들도 인간의 내면에 대해 궁금해 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려왔지만, 어떤 보편적인 것에 대한 질문, 본질의 추구에서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각 개인의 내면세계 탐구로 향해가고 있는 것 같다. 외부로 향했던 호기심이 이제 내부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질을 분석하고, 내가 누구인지, 아주 많은 개성들을 분석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무궁무진한 세계로 인간의 호기심이 뻗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호기심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것이 궁금하다. 이것 자체를 알고 싶다. 내가 파고들어가고 싶은 콘텐츠. 나는 평생 무엇을 파헤치면, 깊숙히 연구하면 평생에 걸쳐 엮어내는 저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 나의 호기심에게 묻는다. “WHAT????”


바다에 대한 꿈과 투쟁의 기록

p112 자연은 오뒷세우스에게 공포의 대상이고 꿈꾸는 대상이고, 바라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자연을 마주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다시 창조하기도 한다. 동물들은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전부지만, 인간은 자연을 다시 창조한다. 자연의 힘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워진다. 인간이 사는 세계를 아름답게 건설한다. 이와 같은 창조의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파이아케스인들과 나우시카아 공주가 사는 섬 이야기다. 


p118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헤엄치는 법을 배우는 그리스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오뒷세이아>>다. 아이들은 글도 <<오뒷세이아>>로 배운다. 읽고 암송하면서 저절로 글을 익힌다. <<오뒷세이아>>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민족의 시다.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 오뒷세우스>

p118 문제가 닥치면 오뒷세우스는 늘 생각한다. 행동하기 전에 궁리한다. 위험한 일이 닥칠 때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짓은 생각이고 궁리다. 잔꾀를 부리는 수준이 아니다. 훨씬 더 정교한 생각을 한다. 오뒷세우스가 문제를 푸는 방법은 단순하고 확실하다.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는 자신을 ‘아무도 아니다’이라고 소개해서, 나중에 퀴클롭스가 “no one이 내 눈을 멀게 했다”라고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지혜를 낸다. 


p120 어떤 싸움에서도 오뒷세우스는 바다와 운명에 물러서지 않는다. 기필코 자기 몫을 지킨다. 그의 무기는 용기와 지혜다. 우스워 보이지만 그것은 보통 무기가 아니다. 사람과 사물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무기다. 

(기필코, 나의 몫을 지켜야 한다. 나의 몫을 지키기 위해 내가 가진 무기는 무엇인가? 언젠가 친구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당신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나의 무기는 무엇일까?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갈고 닦아 나만의 무기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사물을 나의 편으로 만드는 그 무기를 나도 갖고 싶다. 연구원 생활을 6개월 하고 난 후, 여행을 가기 전 계속 하게 되는 생각. 나는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시간과 돈을 얼만큼 투자하며, 그것을 습관화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어중이 떠중이는 되기 싫은데, 나는 아직 내 색깔을 찾지 못했다. 내 몫은 내가 지켜야 할텐데)



p121 오뒷세우스는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이다. 인간의 지혜는 실질적이고 창조적이다. 세상에 대한 의미 없는 지식을 쌓아놓은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그런 지혜다.

지혜의 대명사 솔로몬. 한 명 더 알게 됨. 오뒷세우스. <<오뒷세이아>>를 읽을 때는 모험에 집중하고, 스토리에 집중해서 오뒷세우스가 어떤 인물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는데, 도움을 많이 받게 됐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으며, 모험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를 사랑하는 아버지로만 파악했었는데, 그에게 지혜가 있었음을 인식하니 그가 새로운 인물로 보인다. 


p122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인간이 모범이고, 다음 세대의 모범이다. 호메로스가 만들어낸 미래형 인간이다. 


Chapter 4 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p126 서정시라면 최소한 아르킬로코스나 삽포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르킬로코스는 한마디로 말해서 유럽 서정시의 아버지다. 

아르킬로코스의 시는 무엇보다도 간결하다. 규칙적인 리듬을 탄다. 그러면서 사랑과 풍자를 노래하는데, 말 많은 영웅담과는 확실히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아르킬로코스의 서정시 전통은 삽포가 이어 받는다. 삽포가 서정시의 꽃을 피우고, 최고조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파로스의 서정 시인>

p129  신은 가장 견디기 힘든 슬픔 가운데서도 치유를 예비하나니, 그것은 자꾸만 단단해지는 우리들 심장이다. 오늘은 내가 아프고, 내가 피 흘리며, 내가 울부짖을 것이며, 내일은 네 차례라고 하자. 그리고 이제 슬픔은 여인네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단단하게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영웅담 대신 사랑과 풍자>


<사랑하며 꼬집는 독설가>

p135 아르킬로코스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죽이고 보니 겨우 일곱 명 잡자고 우리 천 명짜리 군대가 생난리를 피운 거로군. 

영웅의 업적을 칭송하기는 커녕, 영웅의 굴욕을 폭로하고 있다. (호메로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p138 아르킬로코스의 독설과 풍자는 훗날 많은 희곡작가들의 훌륭한 모범이 된다. 그 가운데도 아르킬로코스의 독설이 특별한 이유는 애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며 꼬집는다. 그래서 더욱 아프다. 

 아르킬로코스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다. 독설은 독설이되, 수가 높은 독설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여우는 할 줄 아는 게 많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하나밖에 모른다. 그래도 그 하나 덕에 명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아르킬로코스가 할 줄 아는 게 바로 “상처 준 자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일이다.” 

 아르킬로코스는 그런 싸움을 하고 있다. 싸움의 와중에서 여린 아르킬로코스도 당연히 상처를 입겠지만 말이다. 


<시대에 대한 독설>

p140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의 시구들을 가득 채운 그 ‘명예’를 참을 수가 없다. 명예는 봉건사회의 덕목이고, 우매한 대중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명예롭기보다는 행복해야 한다. 즐거워야 한다. 그게 바로 아르킬로코스의 철학이다. 


p141 아르킬로코스는 인생이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하며, 그를 위한 투쟁만이 가치 있다고 말한다. 

 서사시에서 영웅은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킨다. 아킬레우스도 그렇고, 헥토르도 그렇고, 심지어 여자인 헬레네도 그렇다. 죽음으로써 다음 세대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아르킬로코스는 다르다. 죽음은 그저 사라지는 거라고 본다.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 

 죽고 나면 명예는 잊히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살아 있으라. 살아 있음의 멋을 즐겨라. 죽음은 상실에 불과하다. 


p143 아르킬로코스의 핏속에는 자유가 흐른다. 

 그가 숙명적으로 품고 살아야 했던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는 시를 하나 보자. 

 

 가슴이여, 내 가슴이여, 고칠 길 없는 내 가슴이여. 

 힘을 내라. 적들에 맞서 반격을 준비하라. 

 사악한 자들의 늪에서 실족치 마라. 

 이겼다고 교만에 들뜰 일도 아니고 

 졌다고 빈집에 웅크려 있을 일도 아니다. 

 승리를 즐기고, 패배를 쓰라려 하되, 지나치지 마라. 

 삶에 언제나 있을 높낮이를 배우라. 

 모르는 곳에서 고통이 문득 닥쳐오리니

 내 가슴이란. 


p147 아르킬로코스를 기점으로 서사시가 막을 내리고, 참여시가 등장하게 된다. 



Chapter 5 열 번째 뮤즈, 삽포

p151 삽포는 이상한 나라다. 경이로운 세계다. 옛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수수께끼’다. 


<최초의 여성 시인>

 p151 기원전 600년경, 레스보스 섬의 뮈틸레네. 삽포는 아프로디테와 미의 세 여신, 뮤즈(시, 음악, 학예를 관장하는 여신)를 숭상하는 여성 종교 단체의 장이었다. 


p152 삽포는 결혼을 했고, ‘금꽃’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으며, 삽포의 제자도 모두 결혼을 할 것이다. 결혼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행복의 완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진실하고, 직선적인>

p155 그를 보노니, 보는 것만으로도 붉어지는가. 

영혼의 길을 잃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은 볼 수 없고, 입을 말할 수 없으며, 

몸 전체가 불타고 바뀌는구나. 

  • 삽포 시의 흔적이 있는 라신의 사랑 노래


p155~156 삽포의 시 


그대 앞에 얼굴을 맞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저 사람은 아무래도 

신인가 보다. 


웃음이 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그대를 

본 순간

입술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혀에 물기가 없으며 

작은 불꽃이 일제히 피부 아래로 흐른다. 

눈은 볼 수 없고 

귀는 우- 우- 거릴 뿐. 


흐르는 땀은 무엇이며

몸은 어째서 떨리지 않는 곳이 없는가. 

풀포기보다 더 파래진 나는 

아마 이대로 죽는가 보다. 


p157 삽포의 시는 솔직하고 과학적이다. 삽포는 사실만 적는다. 감정이 주가 아니다. 감정이 남긴 결과를 보고하는 게 주다. 무슨 연애시처럼 형용사가 난무하지 않는다. 명사와 동사만 쓴다. 그걸로 모든 상처를 표현하고, 모든 사건을 보고한다. 


p158 삽포가 너무도 솔직하고 정확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은 사랑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가운데 절정은 당연히 내 몸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장면이다. 

 어둠 가운데 불이 타오르고 있다. 시인은 어둠을 그리고 어둠 속에 불꽃을 지른다. 그 불꽃이 중요하다. 감정도, 그 감정이 향하는 대상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독자들은 그냥 불꽃만 보면 된다. 이제 그 불꽃은 끝까지 장렬하게 타오를 것이고, 완전히 타서 사라질 것이다. 어둠 속에 빛나는 불꽃, 그것이 삽포의 사랑이다. 


삽포 이전의 사랑은 불탄 적이 없다. 

p158 그녀가 최초다. 


p159 삽포 이전의 사랑은 불탄 적이 없다. 물론 사랑이 사람의 가슴을 데워 무딘 감각을 일깨운 적은 있다. 희생과 욕망과 부드러움을 자극하고, 심지어 잠자리로 연인을 이끈 적은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기쁨을 얻었고, 후회와 슬픔을 얻었다. 하지만 삽포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다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p160 삽포의 에로스는 몸에 남은 상처로 표현될 뿐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프다. 상처가 남는다. 사지가 다 부서져 나가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쓰라린다. 그게 사랑이다. 따라서 삽포에게 사랑은 끔찍한 짐승을 닮았다. 알 수 없는 세상의 힘이고, 쿵쿵거리며 엄습해오는 짐승의 발자국이다. 


다시 에로스가 온다. 사지를 부수며 고문하는, 

부드럽고 고통스러운 그는 내가 이길 수 없는 괴물이다. 


아무리 재주가 좋은 인간이라도 이 사랑이라는 것을 길들일 수 없다는 의미다. “이길 수 없는 괴물” 대신 “맞서 싸울 수 없는 야수”라고 하는 편이 좀 더 나을 듯하다. 

(사랑과 결혼은 다른 것인가?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맞서 싸울 수 없는 야수 인가? 싸울 수 있는 야수인가? 나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사랑을 지켜내기에 내겐 힘이 없다. 힘을 길러야 한다.) 


p161 “산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떡갈나무를 꺾어 넘어뜨리듯이, 사랑이 내 영혼을 흔들고 있다.” 


<서정시의 꽃이 활짝 피다>

p161 모든 감정에는 대상이 있다. 누구를 만나서 기쁘고, 누구로부터 멀어져서 슬프다. 그렇게 우리는 기뻤다, 슬펐다는 반복한다. 


p163 사람이란 때로 세세히 알고 있는 것보다도 잘 모르는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목소리만 비슷해도 걸음걸이만 비슷해도, 삽포는 고통과 기쁨에 젖는다. 목소리나 걸음걸이만 봐도 사랑인 줄 안다. 그것이면 족하다. 기호 하나가 삽포에게는 전부이며, 기호 하나로 대상과 나는 합체하여 이윽고 폭발한다. 


p164 때로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더 생생할 수도 있다. 주로 깜깜한 밤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외로이 침대에 누워 지금은 없는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할 때,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데, 그게 너무도 생생하다. 그래서 눈을 감고 온 감각을 모아 들어보면, 그는 정말 어둠 저편에서 두터운 어둠을 뚫고 거짓말같이 살아온다

(인간의 상상, 생각, 회상 등의 강력함. 결국 병도 걸린다. 상사병.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더 생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아직 현실은 아니지만 미래를 그리고,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아주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p167 사랑과 우리를 이어주는 방식은 현실세계의 소통과는 차원이 다르다. 말로 아는 것이 아니다. 보고 아는 것이 아니다. 형상을 보고 아는 게 아니다. 소리로 아는 게 아니다. 그냥 아는 것이다. 이렇게 삽포의 시는 현실에서 벗어나 순수한 존재의 세계로 들어간다


<호메로스의 적대적 자연, 인간과 교감하는 삽포의 자연>

p173 쓰라리고 아팠던 사랑의 시간이 지나 세상은 고요해지고, 고요한 밤하늘을 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사랑의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별빛이 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사랑은 나와 적절한 거리에 올라붙어 빛난다. 그 틈을 비집고 새소리가 들리고, 꽃이 피고, 나뭇가지가 소리를 낸다. 그러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고, 사랑 노래는 자연에 대한 노래로 바뀐다. 


<젊음의 꽃망울을 사랑한 시인>

p176 

젊음의 꽃망울을 사랑했다. 

사랑이 왔다. 

그것은 반짝임이었고, 순간이었다. 

(정말 좋다. 다시 읽어도 좋다. 김희균 교수님도 이 부분이 참 좋다고 하셨는데, 좋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이 ‘그냥 좋다’. 삽포를 사랑하나보다. )


Chapter 6 솔론과 민주주의 

p182 희극에 들어 있는 촌철살인의 언어들은 시민들에게 삶의 진실을 알려주었으며, 인간과 운명의 어긋남이 비극을 통해 애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있었으며, 거리에서, 가게에서, 광장에서 철학적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상과 천상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내 마음 속에서 떠오른 생각 하나. 기원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발견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문명을 만들어 가기 위해, 생각해내고, 창조해 내야 할 것들이 주변에 많았으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물론 우리도 마차가지이지만. 평생 알려고 해도 다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발견한 많은 것들을 먼저 배워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미 발견된 것들이 너무 많고 문서화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먼저 주입으로 머리에, 정신에 넣어야 한다. 수학만 해도 피타고라스의 정리, 원주각의 성질, 최단거리는 직선인 것 등 정말 많은 정의와 정리, 증명과 성질등을 배워야 한다. 그들이 이뤄낸 문명의 결과가 현재 학생들에게,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발견과 발명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들이 되었다. 음, 그들이 행복한 것일까? 우리가 행복한 것일까? 학생들은 말한다. 그냥, 아무것도 모른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발견된 많은 지식들이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에겐 그들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그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들이 발견할 당시의 상황처럼 교과서가 씌여지고, 학생들이 수학 개념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토론하고, 합의점을 찾아 정의를 내리고, 성질을 발견하여 정리를 만드는 작업을 한 후 수학자들이 마련해 놓은 것들과 비교 분석하며, 진리를 알아 간다면, 더 좋은 수업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학생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그것들이 왜 필요한지 느낄 수 있을까? 아, 이러려면 교사들도 다시 공부해야 할 것이다. 많이 공부하고, 교육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이다. 새로운 교육과정이 나오려나? 이런 생각을 했다.)


민주주의의 태동 : 화폐의 등장과 상인의 부상 

p187 민주주의라는 찬란한 기차가 전진하는 길에 ‘돈놀이’와 ‘노예제도’, ‘성차별’이 얼마나 답답한 방해물이었는지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이제 막 민주주의라는 꽃이 피어야 할 시기에 동전이 만들어지고, 역사의 물길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p188 귀족은 피도 피지만 후천적인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육의 효과성 


<귀족이자 시인이자 자수성가한 상인>

p188 시인이자 입법자였던 솔론의 얘기를 중심으로 풀어보기로 한다. 

 

p189 솔론은 할 일을 다 끝내고 법제도를 완성한 다음에도 해외로 나간다. 그런 호기심이 솔론을 키웠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젊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솔론은 스스로도 “하루라도 뭔가 배우지 않은 날이 없다”고 고백한다. 


p191 살라미스를 내준 게 아테나이구나. 

나는 차라리 폴레간드로스나 

시킨노스 사람이라 불리겠다. 

지중해 전체가 떠들 거다. 

살라미스도 내준 아테나이인이라고. 


이제 진격할 때가 아닌가. 

아름다운 살라미스를 위해 싸우자. 

우리를 짓누르는 수치를 벗어던지자. 

시는 민중을 선동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귀족과 평민의 중재자>

p193 아테나이를 죽어가는 민주주의에서 구할 유일한 희망, 그것은 지형이었다. 


<빚을 탕감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다>

p197 솔론의 개혁 조치, 즉 빚을 탕감하는 조치로 인해 부자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을 물론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그동안 너무 많이 해먹었다. 그걸 밷어내게 한 것뿐이다. 솔론은 빚 때문에 신음하는 농민들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더 이상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했다.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당시 그리스 어느 도시에도 이런 획기적인 법은 없었다. 앗티케 반도가 처음이었다. 

요즘도 푸어가 많다던데. 하우스 푸어, 워킹 푸어, 학자금 푸어, 전월세 푸어, 웨딩 푸어. 예전보다 더 일하고, 더 많이 버는 데도 푸어가 되는 현실은 왜 일까? 빚을 지고 살아야만 살 수 있는 구조. 일년에 4천만원 씩 30년 벌면 12억 벌 수 있는데, 아파트 값이 몇 억 씩 하니, 평생 내집마련 못하고 살며, 빚내고 이자내며 살 수 밖에 없는 악순환. 솔론이 필요한 때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빚을 탕감하는 조치가 필요한 것 같다. 


<외로운 개혁주의자>

p198 과감하고도 단호한 개혁 조치를 단행하면서 솔론이 특히 신경 썼던 점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솔론은 두 계급 모두에 대해서 전선을 그었다. 그럼으로써 정의를 지키고자 했다. 이 첨예한 계급 갈등의 시기에 정의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최초의 시민 법정>

p200 가장 부유한 시민들은 가장 높은 공직으로 가는 대신에 부담도 더 지도록 했다. 


<최초로 노예제도에 반기를 들다>

p202 솔론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이 엄청난 일을 기획하고 완성한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정의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솔론은 신을 믿는 것처럼 정의를 믿었다. 정의가 그에게는 신이었다. 


Chapter 7 노예와 여자 

<노예제도 위에 서 있는 민주주의>


<노예는 왜 생겨났을까?>

p208 포로를 노예로 삼기 시작한 것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관여했던 첫 번째 상행위는 노예를 사고파는 일이었다. 전쟁 포로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발전의 동력은 바로 돈이었다. 


p210 사람을 사냥해서 노예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 시장에 내 놓을 싱싱한 사람을 사냥해왔었다고 한다. 사람을 사냥하다니...... 망연자실.  


<생각하고 말귀를 알아듣는 기계>

p211 “연장도 가끔은 다듬어주어야 하고 잘 들게 하려면 기름칠도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노예에게 밥을 주는 것이다. 


p212 우리의 철학자 플라톤은 확실한 원칙을 제시했다. 즉 재물은 용도가 다르다. 용도가 다르면 대우도 다르다. 대우가 다르다고 해서 불만을 품는 것은 노예가 할 일이 아니다. 노예는 재물이고, 재물의 용도는 주인이 정하는 것이지, 노예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풀어주고 말고는 주인 마음이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꿈꾸는’ 철학자도 그런 말을 지껄였다. 


p213 그 문명에서조차 노예사냥이라는 비인간적인 일들이 버젓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문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문명 국가로보이는 그리스도 실상은 노예제 사회였다. 도대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문명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노예들의 역할>


<노예제도라는 암 덩어리>

p222 분명한 사실은 노예제도는 암 덩어리와 같다는 점이다. 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가로막는 암이다. 기계가 발달하지 않아서 노예를 쓴다. 그렇다면 노예를 쓰는 한 기계를 서둘러 발명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노예제도는 기계의 발명을 늦추는 요인이 된다. 기계가 없으면 노예를 쓰면 되고, 노예제도가 존속하는 한 별로 걱정할 게 없다. 

 이와 같은 기계와 노예 사이의 악순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즉 과학 발전의 동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과학 발전을 방해하게 된다. 

 노예제도는 발전의 장애물이다


p223 결국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p224 에우리피데스는 그런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노예는 천한 사람이고, 시민은 그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점을 부인한 최초의 작가였다. “많은 노예들은 노예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지만, 영혼만큼은 시민들보다 더 자유롭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휴머니즘이고, 이론다운 이론이다. 

p224~225 기원전 4세기 희극에서는 심지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노예도 나온다. “주인님, 주인님이나 저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살과 뼈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는 없습니다. 운명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이 말은 기원전 5세기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의 제자인 알키다마스가 한 말과 비슷하다. 그는 “신은 우리를 모두 자유롭게 만들었다. 자연은 노예를 만들지 않는다” 라고 했다. 기원전 5세기의 사고방식치고는 진짜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p225 기독교는 당연히 낮은 계층에서 많은 신도를 모으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과 노예, 특히 여성들 사이에 퍼졌다.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노예제도는 금세 없어지지 않았다. 이 암덩어리는 폭력 아니고서는 타도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뿌리가 깊었다. 


문명이 발달하고,인간의 자유가 신장된다는 것, 그것은 맞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다. 사회적 억압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교묘하다.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말라고. 노예제도는 그만큼 달콤한 제도라서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p231 “최고의 여자는 남자가 그녀에 대해서 좋다 싫다 말하지 않게 하는 여자”라는 얘기를 공공연히 했다고 한다. 그런 페리클레스가 아스파시아를 자기 여자로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성은 집안일 돌보는 부속품>

p232 문제는 어떻게 해서 여성의 지위가 이처럼 낮아졌는가 하는 점이다. 어떻게 전설에 나오는 안드로마케와 알케스티스가 아스파시아가 되었는가 말이다. 아무 존재감 없는 아내가 되고, 첩이 되고, 아이 낳아주는 농가 되고,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언젠가 여성들이 한 번 크게 진 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계사회의 지도자라는 지위에서 떨어져 그리스 고전주의 시대의 가장 비천한 인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여자는 남자와 싸움에서 진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그저 추측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니라 금속을 발명하고 전쟁을 하게 된 시점부터 여성이 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민주주의>


Chapter 8 신과 인간

<신들의 탄생>

p240 다른 원시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에서 종교가 발생한 이유도 인간의 무력함 때문이다. 세상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힘, 즉 신과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삶을 이해하기 쉬워질 것 같다. 신과 화해를 이룬 인간은 그 힘을 인정함과 동시에, 인간의 무력함에 집중하기 보다, 인간의 주도성,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p241 사람들은 신이 개입한 거라고 믿었다. 좋은 쪽일 수도 있고, 나쁜 쪽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인간이 모르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낯설다. 그리고 놀랍다. 신이란 그런 것이다. 두려운 힘이며,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힘이다. 그 힘 앞에 놓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경외’라는 단어를 썼다


p247 즉 대지는 곡식을 키우고, 우리를 키운다. 그리고 우리가 죽고 나면 대지의 신이 우리를 품어, 대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데 사용한다. 곡식이 우리를 키우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곡식을 키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지하세계로 되돌아가야 한다. 지하세계는 무섭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영생을 준비하는 곳이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낳은 괴물 이야기>

p250 사람들이 배를 탄 이유는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로 바다를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다에서 사람들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고, 세계에 대한 인식의 눈을 떴다. 


p250~251 퀴클롭스 : 인간에 대해 적대적, 반사회적, 배, 법, 의회도 다 싫어함. 

 카륍디스 : 지나는 배들을 모조리 삼킴

스퀼라 : 턱 세 개와 죽음처럼 시커먼 이빨이 달린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키르케와 세이렌 : 인간을 유혹하는 요정. 


p251 자연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하게 된 신들>

p256 호메로스의 말을 빌리면, 신들 사이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따라서 플루트를 들고 나와 멋들어진 춤 한판을 추든, 음악에 맞춰 몸을 감미롭게 흔들어대든, 신들은 즐거워할 것이다. 그들 자신이 인간의 형상과 다르지 않고, 인간처럼 춤과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올륌포스에서 내려와 신전에 기거하게 된 신들>

p256 신을 인간으로 제일 먼저 조작한 것은 호메로스였다. 


p259 도덕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혹시 나쁜 결과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그래서 생긴 게 도덕률이다. 하지만 신들에게는 그따위가 필요 없다. 


p260 그리스 사람들이 신을 예배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신과 같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한계를 뛰어넘고 싶다. 신처럼 존재의 기쁨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신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p260 ‘오만’한 인간에 대해 신들은 분노한다. 신들은 ‘질투’가 많은 존재라서 인간이 자기들과 비슷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요컨대 ‘오만’과 ‘질투’는 고대 종교의 영원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사람들은 두 개념을 던져 버린다. 즉 신에 맞서면서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스 비극에는 수도 없이 그런 장면이 나온다. 비극이 비극인 이유는 인간이 신에 대항하여 무모한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이야기 해주신 ‘오만’의 개념이 떠오른다. 6월 오프 수업때 해주셨던 이야기. “마르시아스의 이야기가 있다. 아테네의 피리를 우연히 주워서 불어 대가가 되었다. 그는 아폴롤에게 도전을 하는데, 진 놈은 껍질을 벗기기로 하는데 판결을 무사이들이 하였으므로 편견이 있을 수 있다. 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중얼대던 마이다스도 벌을 받는다. 예술가들은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겨지는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신에게 대적해 볼만큼 뛰어나보고 싶은 것이다. 오만이란 “룩 다운 오픈” 즉 내려보는 것이다. 다른 오만은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신이 되는 것이다. 마르시아스의 내용은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닌,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를 다룬 예술 작품이 많은데 마르시아스의 껍질이 벗겨지는 모습은 고통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환희에 차 있다. 르네상스만 가도 이 독법을 알고 있다. 단테도 “신이여, 내 껍질을 홀딱 벗겨 주소서.”라고 말한다. 이는 한 분야에서만은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꿈, 비전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만하지 않고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어렵다. 꿈이라는 것은 굉장한 오만이다. 다른 사람들을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보이지 않고 그 생각과 다르며, 이 생각을 자기 자신은 믿어주는 것.  그래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라크네와 마르시아스의 이야기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신화의 이야기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매우 달라질 수 있다. “네 분수를 알아라.(메데나, 즉 서양식 겸손을 알아야 한다).”라는 주제와 “신의 경지(그러나 하나에 있어서만은 신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이것이 신의 계명이다.”)라는 두 가지 미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준이에게 말했듯이, 모든 것과 싸우지 마라. 그러나 하나만큼 하고는 치열하게 싸워라. 이것이 바로 신의 경지에 오르는 법이다. 에너지가 너무 많은 곳에 분산되어 있으면 경지에 오르기 힘들다.” 오만=북극성=신의 경지! )



p261 그리스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신을 끊임없이 의인화해서 그리스 종교가 노리를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서 보여주는 일이다. 인간이 다다라야 할 최호 지점이 올륌포스 신이다. 그 간격을 그리스 사람들은 끊임없이 좁혀가고 있다. 

그리스 종교는 인간을 닮으면서 힘을 잃었다. 신들은 그리스 국가와 합쳐지고 말았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신들의 역할도 바뀐다>

p266 그리스 사람들은 자유를 좋아하지만, 무한정한 자유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모이라가 바로 인간과 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유보다 위에 있는 원칙이다. 거기서 모이라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비유하자면 중력의 법칙, 별들의 운행 법칙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 인과법칙 같은 세상의 법칙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법칙이 혹은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인간의 목적이란 궁극적으로 그 법칙 혹은 질서를 언젠가 알아내는 데 있다고 믿는다


<종교가 아닌 인간 중심의 철학>

p269 기원전 5세기,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이 힘을 얻던 시대에는 정의로운 신이 인간의 영혼과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아이스퀼로스의 영원한 주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Chapter 9 비극 : 아이스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p273 그리스인의 업적 가운데 가장 고결하고 위대한 것은 비극이다. 비극은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 속에 존재하는 공포와 희망의 버무림이다. 그것들을 잘 결합해서 완벽한 작품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비극이다. 


p275 비극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즉 “주인공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 주인공의 액션을 내 액션으로 혼동하는 것”이 비극이다. 


 그렇다면 비극의 주인공은 누구를 적으로 삼아 싸우는가? 무엇보다 인간들의 삶에서 늘 부딪히는 것들과 싸운다.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억압하는 것들과 싸운다. 주인공이 싸우는 이유는 불의가 승리하면 안 되기 때문이고, 죽음이 덮치면 안 되기 때문이고, 법죄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나라의 법도가 폭력의 법도에 물러서서는 안되기 때문이고, 적들을 정복해서 문명인으로 탈바꿈시켜야 하기 때문이고, 신이 인간의 정의를 훼손하게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고, 제아무리 힘 센 신도 인간의 자유를 훼방 놓게 허락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의 주인공은 인간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싸운다. 힘들어도 용기 있게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p277 비극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자연에 대적하는 인간, 프로메테우스>

p282 내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이유는

죽어 없어질 인간에게 선물을 하사한 탓이오. 

훔쳐온 불꽃

가늘고 깊은 회향풀 줄기 속에 넣어두었다가 

인간들에게 주었으며, 

그로써 인간은 모든 기술을 습득하여

나날이 발전하게 되었으니. 


p285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전형이다. 

자연의 노예에 불과한 인간에게 이성과 지혜를 준 프로메테우스를 찬양한다. 


p287 우리가 프로메테우스를 응원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우스에게 맞서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을 목도한 시인은 신의 불의에 맞서 일어선다. 그동안 수많은 인간들이 겪어온 고난을 생각해보면, 제우스가 인간을 몰살하려고 했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때마다 영웅들은 반항했고, 저항했다. 아이스퀼로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도 같은 저항정신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신의 정의와 운명 사이의 화해>

p295 아가멤논의 내면에서 일어난 싸움의 기록이다. 

 소용돌이 그득한 아울리스 바닷가,(where)

 돛을 매고 떠날 준비를 하며

 병사들이 웅성거리는데

 아카이아 함대의 수장 아가멤논은 (who)

 운명의 장단을 맞추며

 제 발로 액운을 쫓아가는 구나. 

(중간 생략)


 “안 따르면, 운명이 나를 칠 것이고

 따르려면 저 어린 자식을 죽여

 가정과 가문을 조각 내고

 고귀한 피를 내 손에 받쳐

 제단에 뿌려야 하리니. 


 어느 쪽도 내 길이 없다. 

 이대로 험한 바다에 나가 

 내 소중한 전우들을 잃어야 하는가. 

 제단에 딸자식의 피를 뿌리고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바람을 잠재워야 하는가. 

 신들은 이 길을 원하는가. 

 피로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는가. 


 p299 누굴 죽일지는 신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p300 캇산드라의 독백중에서 


 무섭도다, 저 계략. 

 보이는 구나, 

 지옥의 올가미. 

 함정, 그래, 음모.

 이불 속 공범, 살인자. 

 복수의 여신들이여, 내려오소서. 

 돌로 저 살인자를 쳐죽이소서. 

 죽이소서. 


p302 <<아가멤논>>부터 지금까지 관객들은 더러운 욕정과 죄악의 구렁텅이들을 지나왔다. 왕이고 왕비인 인간들조차 저렇게 싸구려 욕망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죽이더니, 갑자기 반미치광이들처럼 날뛰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사람다운 남매 둘이 나타나 무대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있다. 

 

p303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 합창단이 모두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여기다. 


p304 오레스테스 : 어떻게 해야하지? 어머니를 죽여?

 퓔라데스 : 신의 말을 따를래, 사람들 말을 따를래?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게 낫지 않을까? 


p305 그런 의미에서 <<코에포로이>>는 운명과 맞선 싸움에서 결국은 지고야 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에우메니데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오레스테스의 재판 부분이다. 이 재판은 모든 비극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p306 재판 결과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렸다. 반은 무죄, 반은 유죄 평결을 내린 것이다. 이때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아테네 여신은 오레스테스의 편을 들었고, 그래서 무죄 석방되었다. 


 그럼으로써 운명은 정의로 바뀌었다. 

 

p307 운명 대신 섭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꾼 시인>

p307 아이스퀼로스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첨예한 싸움을 과감하게 건드린다. 신들과 인간이 결국 조화 가운데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시인은 그 시점에서 신의 세계조차 정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Chapter 10 시민 페리클레스 

p311 예수가 태어나기 500년 전에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있었다. 한 시대에 자기 이름을 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p312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 장본인이다. 

페리클레스에게는 네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페리클레스는 머리가 좋다. 

 둘째, 말을 잘한다.

 셋째, 아테나이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넷째, 사심이 없다. 

 지능과 웅변, 애국심, 성실성, 결정적으로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를 잘 이해하고 있고, 아테나이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p313 조형예술을 발전시킨 것도 그리스 민족의 심장에 생명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 

“용기가 자유를 낳고, 자유가 행복을 낳습니다. 우리가 이 두려운 전쟁 앞에서 용기를 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일깨웠고, 그로 인해 그리스 사람들은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페리클레스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누구나 예견하지만 제대로 대비할 수 없는 죽음 때문이었다. 죽음이 계획의 완성을 방해했다. 또 한편으로는 페리클레스가 가지고 있던 애국심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르게 읽었기 때문이다. 즉 아테나이 제국주의로 읽은 것이다.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했던 명연설가>

p317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페리클레스가 대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그는 이성의 화신이었다. 창조적이고 열정적이고 과학적이고 정확하며 예술적이고 통찰력이 넘쳤다”고 한다.

(연설에 대하여. 스피치에 대해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창조적이고 열정적이고 과학적이고 정확하며 예술적이고 통찰력이 넘쳤다는 건, 연설의 신이었다는 이야기? 콘텐츠를 찾아야 한다. 콘텐츠를 찾는 것이 내게 있어 창조성이며, 통찰력이 될 것이다. 현재 내 콘텐츠를 찾기 위한 다음 행보를 살짝 정했다. ‘한국 청소년 리더십 센터’의 강사로 활동을 시작하고 싶다. 그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길 원한다. 


<민주주의, 꽃피자마자 시들다>

p318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페리클레스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한 바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듣기에는 기분 나쁠지 몰라도, 페리클레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p322 페리클레스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는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에 방해가 되었고, 심지어 시들게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제국으로 가는 길>


<아테나이 제국과 억압적 민주주의>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

p330 ‘순수한 아름다움’의 절정이었다.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 시민들의 심미안 자체가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했다. 


p334 파르테논은 페이디아스의 걸장 중의 걸작이다. 

 사실 페이디아스와 소포클레스와 페리클레스는 한팀이었다. 그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것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안티고네>>라는 작품을 쓸 당시에 소포클레스는 조달청의 재정 담당이었다. 즉 동맹국에서 징발된 물자들을 배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왕>>같은 대작을 쓰고 있다고 해서 시민으로서 중요한 공직을 수행할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다. 정치 성향은 서로 다르지만 세 사람 공히 같은 시대에 아테나이를 이끌었다. 소포클레스는 연극으로, 페이디아스는 아크로폴리스 재건축으로, 페리클레스는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다. 


p335 파르테논은 수학 공식 속에 갇힌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건축물이다. 수학이 아닌 감성을 건드리는 건축물이다. 파르테논에는 질서가 있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살아 숨 쉬는 질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파르테논에 쓰인 직선은 실제 직선이 아니다. 마치 우리 삶에서 마주치는 직선들이 완벽한 직선이 아닌 것과 같다. 원도 마찬가지다. 고르지가 않다. 파르테논에 구현된 수학은 딱 떨어지는 수학이 아니다. 조금씩 빗나간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예술적으로 약간씩 뒤튼 것이며, 그럼으로써 각면들이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다. 파르테논은 살아 있는 건축물로 만든 힘은 바로 비틀기에 있다


p336 도대체 이 건축물에 어느 것 하나 아귀가 맞는 것이 없다. 그게 오히려 건축물 전체에 안정감을 주고, 역동성을 부여한다는 이 기막힌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르테논은 한마디로 영원하다. 그것도 부동자세의 영원함이 아니라, 움직임의 영원함이다

 

p339 이처럼 파르테논 신전을 구성하는 수학은 생명체의 수학이다. 

 파르테논은 로잔 성당에 비해 작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멎게 하는 위엄이 있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규모보다 비율이 중요하며, 신전을 보고 나면 크기 생각은 잘 안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파르테논 앞에 섰을 때,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굳이 과장할 생각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파르테논을 보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행복하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를 볼 때 느끼는 행복과 비슷하다

건축물을 보면 느끼는 감정이 몇 개 있다.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웅장함에 눌려 기가 꺾기거나, 세세한 조각과 무늬들을 보며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깃들었겠구나 한다. 건축물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아주 제한적이다. 근데 앙드레 보나르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행복을 느낀단다. 생명체를 볼 때 느끼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단다. 사진을 찾아 봤지만,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잘 느낄 수 없다. 사실 6.5도 8.3도의 기울기는 아주 미세하기에 눈으로 알아차리가 힘들다. 기둥들이 안정감 있게 모여있는 모습을 식별해 내고 싶었는데 사진으로는 불가능했다. 실제로 보고 싶다. 신혼여행은 그리스로 가야 할까보다. 생명체를 보는 듯한 행복감에 젖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즐거운 신혼여행이 되지 않을까? 


<영광과 실패>

p343 페리클레스의 영광과 실패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닫게 된다. “문명은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문명이라야 한다” 그리스 문명은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과 용기라는 열매를 주었다. 하지만 그 열매 속에는 쓴맛이 도사리고 있다. 그게 없어지기 위해서는 다시 몇 세대가 더 흘러야 했다. 






2) 그리스인 이야기 2 (소포클레스에서 소크라테스까지)

 Chapter 1 안티고네의 약속

p11 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  


p12 사실 비극이란 아테나이 민중들을 민주주의와 시민 자유의 옹호자로 만들어 준 역사의 압력에 그들의 시적인 언어로 기록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 : 한계를 초월하려는 영웅의 투쟁>

p13 비극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로운 인간들의 교육이야말로 시인 본연의 임무였다. 비극은 원칙적으로 상당히 교육적인 장르다. 

 시인이 관객에게 보여주는 극적인 투쟁 장면은 인간 본성이 지니는 힘의 확장, 초월, 인간을 영웅으로 끌어올리는 투쟁을 담고 있으며, 이는 비극의 고유한 주제이기도 하다


p14 영웅의 죽음은 비극적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비극적인 것은, 우리 인간의 현실에서, 소포클레스와 그와 동시대를 산 인간들의 경험 속에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신들의 존재다. 신들은 인간의 초월, 영웅으로 피어나려는 인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 비극들은 하나같이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인간, 장애물에 부딪힘으로써 미지의 세계와 대면해 위대함의 새로운 차원을 열려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p14~16 그렇지만 연속되는 시련을 통해서 인간 조건이라고 하는 좁디좁은 감옥은 차츰 넓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영웅의 승리와 죽음이 담보가 된다. 비극은 항상 지속되고 변화하는 인간 세상의 미래를 다루며, 이를 표현하고 변화시킨다. 

(연속되는 시련을 통해서 나는, 내 조건이라고 하는 좁디좁은 감옥은 차츰 넓어졌는가? 마침내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라는 이 예언적인 문장이 현실이 되기 위해 나는 어떤 시련을 겪어내야 할까? 삶 자체가 연속되는 시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나는 편안함을 향한 갈망과 꿈을 이루고 싶은 욕망이 싸우고 있음을 본다. 편안함을 추구하면 비극적인 상황을 만날 일은 현저히 줄어 들 것 같다. 근데, 승리하기 위해, 무언가 이루기 위해 뛰어들면 비극적인 상황을 많이 만나게 될 것 같다. 나는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노선을 정해야 한다. 이미 정해졌다면, 완전히 받아들이고 싶다.)


아니, 그 어떤 위대한 비극도 완전히 끝나는 법은 없다. 모든 비극은 마지막까지도 열려 있다. 새로운 별들을 향해 열린 광대한 하늘을 어떤 약속들이 유성처럼 관통한다. 비극은 존재하는 동안, 곧 그 비극을 태어나게 한 조건들을 털어내고 다른 사회에서 여러 형태로 변신해가는 동안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기도 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빛나기도 하며, 그 위대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기도 한다. 모름지기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들의 영속성은 이런식으로 설명된다. 


<안티고네와 크레온, 대립되는 가치의 충돌>

p16 과거의 언어로 우리에게 가장 현대적인 가르침을 주는 작품도 바로 <<안티고네>>다. 


p20 고대의 시인은 감상이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거부한다. 


p21 안티고네는 말하자면 인간 존재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떨어져버리지 않을 것임을 보장해주는 담보였다. 


p22 이 어슴푸레한 빛(새벽빛인지 석양빛인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가운데에서, 우리는 ‘무적의 에로스’를 찬양하는 합창단과 함께, 우리를 고양시키는 진실을 찾아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p24 여주인공이 생을 마감하는 고통과,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비판하려 드는 노인들 앞에서 고독의 씁쓸함을 노래하는 안티고네의 탄식 장면, 이 근사한 절구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적인 주제 중 하나를 보여준다. 


p25 비극에 으레 등장하는 주제, 즉 삶에 대한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죽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제를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 찬란하게 빛나는 진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26 그리스 비극은 공포가 인생의 영원한 모습임을 모르지 않는다. 공포는 단호하게 극을 휘어잡고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닮은꼴 성격, 상반된 영혼>

p27 <<안티고네>>는 가치관의 문제를 제기한다. 


p28 <<안티고네>>에서는 어디까지나 실존의 갈등, 개성이 강하고 각자 다르게 생긴 인간들, 개인들의 갈등이 작열한다. 

 모든 시인들 중에서도 비극 시인은 자신 안에서 또 우리 안에서 싸움을 벌이는 자식들, 그렇지만 결국 시인 자신이자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자식들의 불협화음을 통해서만 목소리를 들려준다. 


p29 동일한 성격을 지닌 정반대의 영혼, 타협할 줄 모르는 결연한 의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투지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불관용과 가차 없음으로 부정한 의지. (안티고네와 크레온)


p31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안티고네는 이스메네에게 일침을 가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셋째 딸 코딜리아와 같은 생각이다. 


“전부를 주지 않을 거면 아무것도 주지 말 것”


p32 모름지기 모든 고귀함은 배타적이다. (앙드레 보나르는 안티고네가 사랑하는 하이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평가들의 의견과 함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감)


<안티고네, 개인의 양심의 상징>

p37 무릇 모든 열정이 그렇듯이, 이 사랑은 안티고네의 내면에서 굶주린 불길처럼 활활 타오른다. 이 불길 속에서 다른 모든 사랑은, 단 하나의 강렬한 사랑의 불꽃 주변에서 빛을 잃은 채 한 줌의 재로 타버린다. 


p39 “나는 증오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p41 시인이 창조한 이 인물은(안티고네) 이 대목에서(위의 대사) 창조자인 시인마저도 넘어선다. 세월마저도 넘어선다.......


<크레온, 국가 권력의 상징>

p41 반면 크레온에게 모든 것은 이기심이다. 나는 이 말을 고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이기심 말이다. 


p43 크레온의 본성은, 그의 원칙에 입각해서 볼 때, 불임성이다. 그가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모든 진실은, 이 저주받은 땅에서 머리로 받아들이는 진실이며, 공허한 진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임성이 뭘까? (질문)


p43 이 위대한 왕의 본질은 따지고 보면 두려움이다. 무기력과 연결되는 두려움. 


<우리와 닮아 미워할 수 없는>

p44 안티고네의 고독은 인간이라고 하는 모든 피조물이 생의 마지막 투쟁에서 보여주는 불가피한 고독이다. 그것은 영혼의 고독이 아니다. 안티고네는 이 순간 자신보다 먼저 죽은 이들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사랑하는 오빠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안티고네를 완전한 신성과 하나가 되도록 이끈다. 


p45 반면 시인의 천재성이 탄생시킨 모든 고통 받는 인물들, 그 인물들에게로 향하는 연민의 한가운데에서 크레온은 가장 참담한 고독을 맛보아야 한다. 

 하지만 공포심을 조장하는 인물인 동시에 참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봉착한 크레온, 이를테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기막힌 실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크레온을 시인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각인시킨다. 


 크레온은 우리가 늘 경험하는 비극적인 일상의 일부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아니 자신의 위치에서 옳았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포클레스는 그 과실, 즉 분열되어 있는 우리의 인간성과 그 인간성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계에 대해 뼈저린 인식을 안겨준다. 


p46 우리는 안티고네이면서 동시에 크레온이며,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소포클레스의 천재성과 예술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다. 그는 너무도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등장인물 각각의 삶에 동참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인물들이 우리 앞에 등장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에 우리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동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의 삶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들을 너무나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모두 옳다. 

 젊은 파수꾼마저도 입을 여는 순간, 안티고네를 체포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그녀를 죽일 것이 뻔한 폭군에게 안티고네를 넘겨주어야 하는 처지를 곤혹스러워한다.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게 사는 것은 인간 본성의 중요한 특성이며, 그는 이 특성에 충실했을 뿐이다. 


p47 우리는 또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지키는 것은, 불행하게도 크레온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크레온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p48 비극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 작가가 예술적 기량과 애정을 가장 발휘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같은 통찰력 있는 연민이 담긴 대목이다. 

 예술적인 진실과 우리가 느끼는 쾌감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속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대립하는 가치들의 화해와 조화로운 삶>

p48 이렇듯 소포클레스는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형상들을 일깨운다. 그는 꾹 다문 우리의 입을 열게 만든다. 그는 우리의 말못하는 복잡한 의식 세계를 밝은 빛 가운데로 이끈다. 우리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수치심 때문에 제풀에 어둠 속으로 사그라진 모든 것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갈등이 대미를 장식할 때 우리는 심하게 동요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 삶의 가능태로서 제대로 파헤쳐지지 않은 채 남아 있던 풍요로움이 비로소 눈앞에 드러나는 광경을 보며 기쁨으로 전율한다. 


p49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가능태라고 하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p49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가 우리의 내면적인 삶이 지니는 무질서를 환하게 조명하는 것은 결국 그것으로부터 질서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비극적인 갈등으로부터 그는 우리의 풍요로운 감정들의 단순한 나열을 뛰어넘는 즐거움, 즉 이것들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이것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비극 작품 <<안티고네>>는 그러므로 우리 인간 존재가 안고 있는 무수히 많은 형상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그 균형 속에서 우리 주변에 놓인 사물들의 총체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세계는 스스로를 지탱하고 설명된다. 


p50 그 결과 우리는 인생의 복합성, 인간 존재와 그 존재의 단일성, 의미가 지니는 풍요로움이 주는 기쁨을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맛보게 된다. 모든 것이 전체를 이루는 가운데 풍요로움 속에서 우리의 삶을 포착하며, 그 삶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비극 작품은 가치의 제안, 아니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의 제안이며, 모색으로서 우리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준다. 크레온과 안티고네, 이 두 인물은 서로 대립하면서 의지하며 결국 포개지는 인간 삶의 양면 같은 존재들이다. 


p51 크레온에게 질서의 극한은 파시즘이다. 

 모든 것이 국가에 귀속된다고 믿는 크레온의 세계에 비해서 안티고네의 우주는 훨씬 광대하다. 


양심은 절대적인 요소다. 선과 악의 구분, 정치적 질서가 정의하는 구분은 양심 앞에서 사라져버린다. 


“당신의 국경이라는 것이 죽은 자들에게도 과연 의미가 있는지 어느 누가 안단 말입니까?

(안티고네)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죽음을 통해서 자신이 상징하는 정신적인 질서가 정치적 질서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p52 한결같이 진실하며 소중한 가치들의 대립으로 더욱 입체감을 얻게 되는 안티고네-크레온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선혈 낭자한 자살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인물들과 맺고 있는 그 어떤 관계의 파괴도 초래하지 않는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현실성을 획득하며, 삶의 원칙으로서, 조화 속에서 시인의 천재성과 그의 선택을 받은 피조물 안티고네의 숭고함에 복종한다. 안티고네는 모두로부터 버림받았거나 모두로부터 격리되었으나, 결국 모두로부터 여왕이자 지고하고 숭고한 진실의 주인으로 추앙받는다. 


p53 안티고네가 자유라면, 크레온은 운명이다. 

안티고네는 우리의 영혼을 노예로 만들려는 완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을 지켜주는 보루다. 


 역사상의 모든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항상 국가의 권력과 충돌해왔다. 공동체는 반드시 필요하며,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크레온은 이를 설득력 있게 대변한다. 그 자신이 바로 공공질서가 요구하는 엄격하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한 모든 것의 현현이다. 


<개인의 자유가 꽃피는 사회에 대한 약속>

p55 우리는 비극 한가운데서 인간적인 새로운 세계, 안티고네가 더 이상 고통 받지 ㅇ낳을 세계, 크레온이 더 이상 참담해하지 않아도 좋을 세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이제까지 자신을 분열시키던 검을 들고 운명과 동등한 위치에서 맞서 싸움으로써 비극적인 힘을 무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Chapter2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p61 특히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뮈론과 폴뤼클레이토스,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뤼시포스 등 고전시대의 세 거장들은 모두 청동 조각 전문가들이다. 


<나무로 신들의 형상을 깎다>

p63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첫 번째 연장, 즉 손을 훈련시키는 일이 필요했다. 


p64 “신화는 단순히 그리스 예술의 병기창일 뿐 아니라, 그리스 예술을 기른 젖줄”이기도 했다. 


<그리스 최초의 조각, ‘사모스의 헤라’>
p69 그런데 사실 신은 ‘재현’될 수 없다. 세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을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벌거벗은 남자의 입상 쿠로스>

p70 쿠로스는 첫째 젊음으로 충만한 신을 의미한다. 


p74 앞으로 나와 있는 다리는 항상 왼쪽 다리다. 여기서 우리는 이집트 조각이 그리스 조각에 미친 영향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예술은 하나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것을 정면성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 법칙은 이집트 예술 전반에 나타나며, 그리스 예술은 500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법칙에서 탈피했다. 


<옷을 입은 여자의 입상, 코레>

p79 그리스 조각에서 의복은, 남자가 그것을 입는 경우, 또는 여자가 그것을 벗는 경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막힌 수단이 된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으로 재현한 신의 이미지>

p80 인간이라고 하는 피조물을 점점 더 확고한 방식으로, 곧 살집과 더불어 살아 있는 모습처럼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구나 조각가들은 자신들이 끊임없는 열정을 기울여 파헤쳐가는 인체를 신의 몸이라고 간주했으므로 그 의미는 한층 더 증폭된다. 남자와 여자의 몸, 그것은 신에 대한 가장 나은 재현, 신의 가장 정확한 이미지였다. 결국 그 같은 이미지를 조각하면서 그리스 예술가들은 그리스 민족이 섬기는 신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말 할 수 있다. 


p85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몸에 대한 사랑, 이것이 바로 석조 조각가의 창조력을 이끄는 이중의 방향타다


<부동자세에 움직임을 부여한 조각가, 뮈론>

p86 자연에서도 이따금씩 그렇지만 예술에서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몇몇 시도가 있는 듯 마는 듯하다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새로운 것이 태어나곤 하기 때문이다. 


p87 뮈론은 그의 작품 ‘원반 던지는 사람’과 더불어 우리를 행동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가 안내하는 세계에서는 불현듯 움직임이 최고의 권위로 지배하며, 인간은 균형에 의해서 지탱되는 힘에 취한다. 이런 점에서 뮈론은 조각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대인인 아이스퀼로스가 연극에 있어서 행위의 창시자인 것처럼 말이다. 


p89 ‘원반 던지는 사람’의 단계에서 우리는 이미 인체 골격과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토대를 둔 조각가의 사실주의가 단순한 현실 복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상은 재상되기에 앞서 조각가에 의해 다시 한 번 성찰되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 인간이라는 피조물과 진리에 대한 애정>

p92 고전주의 시대의 조각 작품 가운데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으로서의 본분 또는 신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자들이 누리는 고귀한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 


<가장 이상적인 인체 비율의 탄생>

p92 폴뤼클레이토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그리스 예술의 결정적인 시기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사실주의적인 완벽함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따라서 고전주의적인 인본주의의 정점에 위치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p95 폴뤼클레이토스는 틀림없이 퓌타고라스로부터 배웠을 텐데, 인간의 구조에서 숫자가 가지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이를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걸작품이란 머리카락 한 가닥의 차이까지 찾아낼 만큼의 수많은 계산의 결과”라고 말했다

(걸작품. 수많은 계산의 결과. 예술가의 끊임없는 탐구, 노력 없이는 걸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겠는가? 걸작품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린 끊임없이 자아를 탐구하고, 연구하며,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게 된다. 그러면 결과는 주어지게 되지 않을까? 걸작품 인생으로 말이다. 


<신들을 조각하는 거장, 페이디아스>

p96 “예술에는 완벽의 정도가 있으며, 이는 자연에 성숙한 정도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라고 라브뤼예르는 말했다. 페이디아스의 천재성은 정확하게 이 성숙 지점에 위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예술은 상고 시대 예술에 비해서 훨씬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금 일종의 원시인, 그러니까 고전주의 이전 시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p97 페이디아스는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고, 사물들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p99 그만큼 고대에 신들은 인간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다. 


<대중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신들>

p100 평화란 그가 보기에 그리스 민족의 용기와 지혜의 산물이었다. 


p103 어쨌든 ‘신을 만드는 사람’이 빚어낸 제우스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는 모름지기 위대한 작품이란 세기를 거듭하면서 꾸준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전달되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바로 이 당대의 진리, 그러니까 고전적 사실주의가 아니겠는가. 


Chapter 3 과학의 탄생 :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p107 인류의 역사에서는 마치 폭발처럼 갑작스럽게 새로운 형태의 행동이나 사고가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아시아 대륙에 위치한 그리스, 그러니까 이오니아에서 기원전 7세기 말 무렵에 탈레스와 그를 따르는 학파와 더불어 과학, 즉 합리적인 과학 지식이 출현한 것도 그런 식이었다. 


p108 아닌 게 아니라 합리적인 과학과 ‘신화’를 서로 배척하는 대립되는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이 두 가지가 오랜 세월 동안 뒤섞여 있었음을 부인하는 처사나 마찬가지다. 또 이 두 가지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장애를 극복하고, 우주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으로 인해서 인간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애써왔음을 모르는 척하는 처사다


<신화와 과학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

p108 지극힌 순진한 상태로나마 이 과학은 인간이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이며, 언어와 사고는 사회생활의 결과물임을 간파했다. 또한 당시의 과학은 스스로를 기술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인간이 주변 환경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p109 활의 발명은 구석기 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6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활은 저장된 에너지를 사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활은 엄연히 기계에 해당한다. 

 적대적이며 이상하고, 비극적인 외부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보호할 새로운 수단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운명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리를 고안해냈다. 인간에게 윤리란 살고 죽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굶주림에 대항해서는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다양한 방식을 생각해냈다.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계곡에서는 기원전 60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2천 년이라는 기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기술 혁명이 고대 문명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상의 집결지, 이오니아>

p115 

 금발의 아프로디테가 없다면, 그게 무슨 삶이란 말입니까? 그게 무슨 즐거움이란 말입니까? 아! 비밀스러운 사랑, 꿀처럼 달콤한 선물, 사랑하는 여인과의 잠자리, 유일하고 매력적인 청춘의 꽃, 이런 것들이 더 이상 나를 흥분시키지 못할 때 나를 죽게 해주십시오....... 고통스럽지만 노령이 찾아와 아름다움과 추함이 마구 뒤섞이고, 인간에게 오로지 괴로운 걱정만이 남을 때, 걱정이 가슴을 후벼댈 때 나를 죽게 해주십시오. 그때가 되면 환한 햇살 아래에서도 나는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나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나는 여자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것입니다. 아! 신께서는 노령을 남루하게 만드셨습니다. 


p116 화폐, 은행, 어음 - 이오니아의 발명품

 그런데 이 모든 발명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며, 우리 시대, 아니 우리의 아득한 후손들에게까지 전수되어야 할 가장 훌륭한 발명은 뭐니 뭐니 해도 과학의 발명이다. 


<신을 배제하고 세계를 설명하다>

p117 탈레스는 단순한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몇몇 촌철살인의 경구들 중에서 그의 천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무지는 무거운 짐”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p118 과학의 목적은 흔히 말하듯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p121 탈레스에게 물은 원초적인 물질로, 이 원초적인 물로부터 흙이 생겨났으므로, 흙이란 물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공기와 불도 수증기, 즉 물의 발산물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은 물에서 태어나며 물로 돌아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최초의 유물론자, 탈레스>

p123 당시에 그리스인들은 이미 기하학적인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언제나 그렇듯이 정확한 기술에서 출발하는 이 학문을 발명해냈다. 훗날 수학이라고 불리게 될 학문은 앗쉬리아인들과 이집트인들에 의해서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


p124 그리스인들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이유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학 기하학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첫째는 항해였고, 둘째는 신전건축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탈레스는 어느 날 우연히 신전 기둥의 둥근 초석 건축과 관련하여 기하학적인 발견을 했다고 한다. 는 그반원 안에 포함된 각은 직각이며,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음을, 다시 말해서 반원의 지름의 원주각은 직각임을 증명해 보였다. 

 퓌타고라스(또는 퓌타고라스 학파, 아니 아주 오래전에 활동한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직각삼각형의 빗변을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면적은 삼각형의 크기에 상관없이 항상 나머지 두 변을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면적의 합과 같음을 증명했다. 이렇게 해서 오리엔트인들이 개별적으로 적용하던 규칙이 기하학의 보편적인 정리가 되었다. 


p127 그리스인들은 이렇듯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기하학이라고 하는 학문을 창조했다. 

 덕분에 인간들은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엄격한 법칙을 읽을 수 있었다. 


<탈레스의 후계자들>

p131 탈레스는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연구하지 않았다. 과학이란 연구자들의 협업이 있어야만 발전할 수 있다. 

우선 (1)아낙시만드로스가 있다. 그는 최초의 지도를 작성했다. 


p132 ‘그노몬’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로, 이를 이용해서 해시계를 만들었다. 그노몬은 쇠막대인데, 이것을 평평한 땅에 수직으로 세워 그림자의 변화를 관찰했다. 


  1. 크세노파네스 : “황소와 발, 사자에게 손이 달려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이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서 신을 재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황소와 말, 사자로 신의 모습을 재현할 것이다.”


  1. 아낙사고라스나 엠페도클레스


p133 탈레스의 후계자들이 발견한 것중 하나는 천체에서 해마다 진행되는 태양의 정확한 움직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음(音)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정확한 수학적 값어치의 발견이다. 기원전 5세기에 일부 학자들은 이것에 친숙했던 것이다. 


<상식의 조롱거리가 된 천재>

p134 과학이란 참으로 인간에게는 어렵기 그지없는 정복의 대상이다. 상식에 도전해야 하며, 상식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고대 유물론자의 사라진 저서들>

p135 데모크리토스는의 유물론은  그와 탈레스를 갈라놓는 한세기라는 시간 속에서 파르메니데스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도전을 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반대 의견을 반박함으로써 또 안정과 변화를 동시에 뛰어넘음으로써 데모크리토스는 자신만의 답을 찾아갔으며 나름대로 자연의 체계를 정립해갔다. 여기에는 이들의 세부적인 논쟁은 건너뛰고, 데모크리토스가 세운 자연의 체계를 살펴보려 한다. 


p137 그리스의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데모크리토스 역시 타고난 여행가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항상 이들 동양의 지혜를 대표하는 현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스의 현자들은 세계를 누비고 다녔으며, 방랑 여행으로부터 많은 것을 생산해냈다. 

 소크라테스만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나름대로 이 점을 내세웠다.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보유한 데모크리토스는 이집트에서는 화학을 접했으며, 올바른 지식이든 잘못된 지식이든간에 어쨌든 자연사에 관해서도 풍부한 경험을 보탰고, 칼데아인 또는 이집트인들로부터 수학과 천문학의 기본 개념들을 배웠다. 

 이들 유물론자들은 예리하게 우리의 영혼을 찌르고, 그것이 남기는 상처는 풍성함으로 다가온다. 

 데모크리토스는 고대인들의 말처럼 “모든 것에 대해서 글을 썼다.”


p138 데모크리토스는 수학에 대해서 글을 썼다. 그의 수학적 발견을 증언한 아르키메데스에 따르면 뛰어난 논문들이라고 한다. 

그의 저작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원자설, 최초의 무신론적인 학설>

p139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 그리고 자신의 두뇌만을 이용해서, 누군가가 원자를 분해하고 물질을 파괴하기 훨씬 전에 물질은 파괴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될 경우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p141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다. 수많은 원자들이 구형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그 안에서는 가장 무거운 원자들이 구의 중심을 차지하고, 가장 가벼운 원자들은 가장자리 쪽으로 밀려난다. 가장 무거운 원자들은 대지를 이룬다. 이 대지 내부에서 가장 가벼운 원자들은 물을 이루고, 물은 대지의 표면에서 움푹 파인 곳에 깃들어 있다. 이보다 더 가벼운 원자들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형성한다. 


<인간은 “물과 진흙 속에서 태어난 우연의 산물”>
p143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과 진흙 속에서 태어난 우연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물질을 사랑한 이유로 가장 핍박받았던 학자>

p146 모순의 인정이 궁극적으로 대화로 이어졌다는 것은 문제의 해결, 즉 진리의 추구에만 집착하는 연구자로서의 강건한 정신을 보여준다. 


p147 우리가 그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는 분명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소명을 타고났는지를 확인해줄 것이다. 인간이 원초적 진흙에서 나왔다고 믿었던 만큼, 그는 우리를 열광적으로 흥분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진화의 한 지점에 도달했으며, 앞으로의 진화를 만들어갈 장본인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p148 “자고로 자기 고향에서 인정받는 선지자는 없는 법”이라고 라퐁텐은 평했다. 


Chapter 4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 운명에 화답하기 

p151 이제 다시 인간의 삶과 세계를 파헤치는 또 다른 방식, 즉 그리스 비극으로 돌아가보자. 

과학 이야기를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문학적 인간이 되었나? 그리스 비극이 내게 이렇게 흥미 진진한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오이디푸스 신화>

p152 신들이 방향타를 쥐고 이끄는 이 세계에서 과연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고귀하고 영예로운 인간의 파멸>

p153 “관객들은 보시오. 끝까지 꽉 조인 태엽, 그런까 한 인간의 계산된 파멸을 위해 지옥 같은 신들이 완벽하게 구축한 장치가 한 인간의 일생을 따라 천천히 풀려가는 과정을 지켜보시란 말이오.”


장 콕토가 현대적으로 해석한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는 이런 말로 막을 올린다. 


p156 오이디푸스는 진실되며 참된 인간이다. 그가 높은 영예를 누리는 것은 마땅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에게 느끼는 첫인상이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같은 장소에, 그러니까 계단 위쪽에 두 눈이 피범벅이 된 채 나타난다. 고귀함의 정점에 대비되는 비참함의 절정을 나타내는 이미지다. 


p157 그런데 관객들에게는 모든 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며 신이 미리 세워놓은 계획에 따른 빈틈없는 실행이지만 오이디푸스에게는 돌발적인 사고와 우연의 연속으로 비친다. 

우리의 삶도 이럴까? 이런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존재인가? 


<눈부신 진실 앞에서 스스로 두 눈을 찌르다>

p160 왕비는 라이오스 왕이 ‘삼거리에서’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세부 사항이 오이디푸스의 잠재의식을 파고들어, 그때까지 잊고 있던 기억들을 뒤흔들어놓았다. 


p164 여기서 시인은 적절한 꾀를 내어 문제의 목동이 공교롭게도 삼거리 살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하인과 동일 인물이 되도록 극을 전개시킨다. 이 대목에서 소포 클레스가 보여주는 경제의 원칙은 극 전체가 지니는 간결한 구성 스타일에 잘 어울린다. 


진실은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장님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p165 현기증 나게 몰아치던 극중의 행위는 갑자기 서정적인 기나긴 탄식으로, 이별과 회한, 자신으로의 회귀가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멈추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극의 말미에서 행위는 주인공의 마음속으로 내면화되기 때문이다. 


<인간 조건에 대한 성찰, 그리고 계속되는 삶>

p165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 모든 비극은 재앙으로 막을 내린다. <<오이디푸스 왕>>은 주인공이 끔찍하기 그지없는 시련 속에서 완전히 부서져버린다는 면에서 가히 비극 장르의 압권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 같은 해석은 틀렸다. 소위 서정적이라고 하는 대미에 오이디푸스의 답이 들어 있음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장면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이 위대한 작품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p166  <<오이디푸스 왕>>은 물론이고, 그 어떤 그리스 비극도, 아테나이인들에게 무기력한 체념, 백기투항을 부추기지 않았따. 절망의 몸부림, 버림받은 데 대한 항의로 보이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두 노인(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과 그들이 속한 민족의 파괴할 수 없는 저항력의 핵심, 이른바 ‘영혼의 힘’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파멸의 운명을 맞은 오이디푸스의 내면에서 또 다른 삶이 박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삶은 이제 곧 늠름하게 전진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이 자신을 향해 던진 그 돌들을 주워 새로운 무기로 삼을 것이다. 그는 싸우기 위해 다시 살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삶은 인간 조건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성찰을 거친 후의 삶이 될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종반부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성찰이다. 

이 비극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내내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의 불안과 긴장을 향해 기만적으로 우리를 잡아 끄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극 전체가 신들의 교묘한 협업이 만들어낸 살인 사건, 즉 이 극에 등장하는 진정한 범죄인 죄 없는 한

인간의 살인으로 수렴하고 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우리를 쥐락펴락했던 그 처절한 극중 행위는 결코 우리를 주인공의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대답, 그때까지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했던 대답, 신들에 의해서 파멸당한 오이디푸스가 신들에게 제시할 대답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 대답이 무엇인지는 지금부터 살펴보자. 


<이제는 오이디푸스가 신들에게 화답할 차례>

p167 비극적 울음을 운다는 것은 숙고하는 것이다.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머리로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극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시적인 작품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고 그 의미를 지적인 언어로 재구성하려 드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신에 대한 반항>

p168 우리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오이디푸스는 결백하다. 죄를 지은 자는 신이다. 라고. 

오이디푸스는 결백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서로 볼 때,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한 게 아닌 이상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p170 신들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비아냥거림이다. 무 아잘못도 없이 신들 때문에 죄인이 된 오이디푸스를 신들이 비웃는다면, 어떻게 그 주인공의 운명을 우리 인간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우리 인간들은 비극이라면 신을 고발하는 행위, 인간에게 내려진 부당한 처사에 항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게 된다. 


p174 아니, 당사자인 오이디푸스가 분통해하지 않는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분기탱천한단 말인가? 그와 더불어 우리는 신들의 질서, 정의를 넘어서 인간에게 부과되는 그 질서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

p174 분개심, 반항심이 첫 번째 반응이라면, 이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성찰의 두 번째 단계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릇 모든 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의 조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열어준다. 

 이 작품은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최고의 권한을 지닌 한 인간이 인간을 거부하는 자, 곧 신과 충돌하는 비극을 다루고 있다. 

 시인은 오이디푸스를 완벽한 인간으로 제시한다. 그는 지혜, 판단력, 어떠한 경우에도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통찰력을 구비하고 있다. 그는 또한 결정력, 에너지, 행동에 생각을 불어넣는 능력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가 가능한 사람이다. 그리스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고스와 에르곤, 즉 사고와 행동의 주인이다. 요컨대 그는 생각하고 설명하며 행동하는 사람이다. 


p175 숙고를 통한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항상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숙고를 통한 행동, 공동체를 위한 행동의 주체, 이것이 고대인들이 생각한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가 운명에게 보이는 유일한 허점이 있다면 단지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조건을 지배하는 우주의 법칙에 복종한다는 사실뿐이다. 


 p176 현실이란 하나의 총체다. 인간의 행위 각각은 이 총체 속에서 나름대로의 울림을 지닌다. 

 행동하는 사람은 그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존재(그 사람의 행위)를 분리해내는 셈이며, 이렇게 분리된 새로운 존재는 그 존재를 생산해낸 자도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이 세계에서 반응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 새로운 존재를 제일 처음으로 만들어낸 자는 이 존재로 인해 생겨나는 마지막 반응에 이르기까지 책임(법적인 책임이 아니라 사실상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도 인간은 반응한다. 여기에 바로 인간의 비극이 있다. 우리는 모든 행위에 노출되어 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인간 오이디푸스는 당연히 더 많은 행위와 대면해야 한다. 

인간은 단지 자신이 의도한 바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낸 사건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결과를 미리 계산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고, 따라서 그 결과를 사전에 방지할 수도 없는 상태라고 해도 말이다. 


p177 인간은 세계의 삶에 균형을 맞추어주는 모든 힘을 알 수 없다. 천성적으로 무분별을 타고난 우리 인간의 선의는 그러므로 인간을 불행으로부터 조금도 지켜주지 못한다. 

 진실이 주는 기쁨은 우리를 분노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문득 모든 인간의 운명의 전범으로 다가온다. 

 오이디푸스는 그저 인간이었다. 다른 어느 인간보다 훨씬 성공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의 삶은 온통 선행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렇게 잘 구축된 삶이 한순간에 갑자기 무기력해지고, 우주의 재판정 앞에서 인간이 이룬 일들의 덧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다니. 


p178 모든 행동에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이따금씩 이 행동의 끝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 우리는 안다. 적어도 이 점만큼은 분명하다. 거짓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 보이던 세계, 지혜와 덕목의 힘으로 다가오는 시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세계, 우리가 제어 가능하다고 상상했던 현실은 갑자기 불투명해진다. 그 현실을 우리에게 저항하며,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나 존재, 법칙으로 가득 차버린다. 우리는 원래 다 그런 법임을, 우리의 삶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광대한 삶, 어쩌면 우리에게 형을 가하는 광대한 삶의 한 귀퉁이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또렷한 눈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사실 장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아주 하찮다는 걸, 아니 우리를 향한 여러 우주의 섭리 중에서 오직 하나, 생물학 법칙에 의해 우리에게 형을 내리는 그것만이 확실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실명에 놀라운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 상징은 무수히 많은 암시를 내포한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무지를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아니, 그는 이보다 훨씬 많은 역할을 한다. 그는 인간 지식의 공허함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암흑 속에서 새로운 빛을 만난다. 그것은 또 다른 지식,즉 우리  주변에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다. 이 모호한 존재에 대한 깨달음은 이미 실명이 아니다. 그건 엄연히 시선이다. 


p179 두눈을 찌르는 행위는 그 엄청난 결과로 인해 우리를 극의 가장 심오한 의미, 의미의 정점으로 이끈다. 

 운명이 그에게 마련해놓은 벌을 그는 스스로 요구했고,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그가 한 최초의 몸짓이었다. 신들도 자유로운 인간인 그를 어찌할 수 없을 터였다. 오이디푸스는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의지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격렬하게 합류했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인 것 같다. 신을 한순간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대목이다. 


<신의 뜻에 대한 지지와 해방>
p180 이처럼 비극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의미는 지지인 동시에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p181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이중적인 움직임인 사랑. 여기서 사랑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현실과 그 현실이 부과하는 조건을 존중한다는 것이며, 둘째, 살아 있는 피조물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삶을 향한 도약을 뜻한다

하나의 질서, 하나의 존화, 실존의 충만감. 움직이는 사랑이 가진 의미 중 두번째, 살아 있는 피조물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삶을 향한 도약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온다. 삶을 향한 도약이라, 어렵다. 좋은데, 어렵다. 



p182 또한 오이디푸스는 이 질서와 조화, 실존의 충만감에는 위협이 따르며, 그 위협은 위대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망가뜨린 세계를 지지한다. 그 세계는 설령 우리가 사는 세계를 향해 어떤 시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신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p183 신은 수수께끼이며 질서다. 신은 고유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 신은 모든 것을 알며, 전능하다. 그러니 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신이 우리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해도, 적어도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신의 지혜,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지혜와 협약을 맺었다는 결론 정도는 내릴 수 있을 것이다. 


p184 신의 존재를 깨닫고, 신은 엄정하게 정의할 수는 없으나 확실한 존재임을 인정한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신을 경험한 순간부터, 그는 신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p186 이처럼 인간은 운명에 대답했다. 인간을 복속시키려던 운명의 시도에 인간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노년에 다시 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p187 소포클레스는 죽음이 다가오자 이 비극에서 인간의 조건과 신의 조건 사이에 하나의 가교를 놓으려고 시도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인간과 신, 즉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심연을 건너보려고 시도한 유일한 그리스 비극이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오이디푸스>

p191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그러므로 평화와 투쟁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흐름의 끝에 놓여있다. 그의 죽음은 투쟁의 결과이며 기다림의 완성이다. 


p192 오이디푸스는 세 가지 덕분에 시련 속에서도 버텨왔노라고 딸에게 말한다. 세 가지 중 첫째는 인내다. 그는 ‘사랑하다’의 의미도 담고 있는 이 용어를 선택하여 제일 앞에 두었다. 두 번째로는 체념을 꼽는다. 이 체념 또한 존재와 사물들에 대한 사랑과 혼동될 수도 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면서 가장 효과적인 덕목은 ‘영혼의 단호함’, 즉 불행마저도 어찌지 못하는 자연적인 고귀함, 관대함이다

인내(사랑하다), 체념, 영혼의 단호함. 즉 자연적인 고귀함, 관대함. 삶의 지표가 될만한 이유가 된다. 


p193 아주 간단하게도 그는 신은 신이고, 자신은 결백하다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깨달은 것이다. 


p198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것처럼 보인다.(가령 니체 같은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게 보일 것이다). 운명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 말이다. 


<죽음, 삶의 투쟁 끝에 찾아오는 평화와 휴식>

p202 소포클레스는 죽음만이 인간의 삶을 완성시켜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건 그에게 별다른 충격이 아니었다. 인간은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났다. (오이디푸스는 아예 대놓고 “나는 고통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산다는 건 고통과 마주칠 위협 속에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고통으로 내모는 삶의 한시성은 동시에 우리의 해방을 완성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인간도 고통을 벗어날 재간이 없는 것일까? 우리의 노력이 고통을 줄이는 데 몇 퍼센트나 영향을 줄 수 있을까? 


p203 소포클레스는 죽음에 대해 평화, 삶의 감추어진 원천인 이 평화 말고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


p204 어쨌거나 우리도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비극 전체가 우리를 부드러운 끈으로 묶어서 받쳐준다고도 할 수 있다. 하늘이 바뀌었다. 하늘이 모처럼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때부터 이 비극 속에 등장하는 평화로운 순간, 평온한 대화, 잔잔하게 주의를 기울여주는 친구들의 모습. 말과 나무의 찬란한 아름다움. 재잘재잘 지저귀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구구거리는 산비둘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듯이 꾸역꾸역 이어져온 오이디푸스(그리고 소포클레스)의 기나긴 생애. 

 이렇듯 죽음을 다룬 작품 전체에 삶의 소중함이라는 가치가 항수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 의미는 마지막 장면, 신들이 오이디푸스의 육신에 주는 보잘것없는 선물에 의해 정점에 도달한다. 


 그가 살아온 그대로 그는 남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짧지만 강력한 문장이다.) 


p205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영웅의 불멸성은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개인의 멀찌감치 떨어진 사후 세계에서의 불명성이 아니다. 그 불멸성은 오히려 그가 삶이라는 달리기 경주를 마친 장소에서 신들이 죽음의 형태, 죽어서 땅에 묻힌 그의 육신, 아테나이 공동체의 적들에게 보여주는 분노에 부여한 불멸성이다. 


p206 인간은 운명을 이기고 넘어서며, 천재성이나 불행을 통해서 영웅들의 하늘을 수놓는다. 오이디푸스와 소포클레스도 이 하늘에서 당연히 한자리씩 차지할 권리가 있다. 


Chapter 5 핀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승리자를 찬미하는 테바이의 시인>

p216 핀다로스는 “인간을 위한 모든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가지 유형의 남자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세 가지 유형의 남자란 “뛰어난 영감을 지닌 시인, 아름답게 치장한 남자, 영광으로 빛나는 남자”들이다. 


<전쟁보다 운동 경기가 관심사>

p217 기원전 490년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480년과 479년에 페르시아 전쟁을 겪게 된 것이다. 


p218 인간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체를 온전하게 소유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젊음이 주는 아름다운 팔다리”가 그에게는 인간의 삶이 정복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다. 이 가치는 지속적인 의지와 육체적, 도덕적 금욕이라는 값을 치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그리스 언어의 대가>

p224 치욕에 답하기 위해 그의 시가 존재한다는 식이다. 


p225 첫 행부터 마지막 행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보기 드물고 환상적인 꽃처럼 피어나는 문체가 탄생한다. 


<군주들의 조언자>

p225 판다로스는 시켈리아로 여러 차례 여행했다. 

나도 간다! 드디어, 보기만 한 시칠리아에 내 발을 디딘다. 


p226 그는 그들의 조언자이자 친구였다. 조언자인 동시에 칭송자라고 하는 어려운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토대로 단호한 도덕적 강론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때문에 그보다 훨씬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박퀼리데스에게 적잖은 주문을 빼앗겼다. 


p229  이번엔 코로니스의 초상화를 통해서 제시되는 교훈을 살펴볼 차례다. 불가능을 탐하지 말 것이며, “우리 발 앞에 놓인 것”을 직시하라. 그런데 도대체 우리 발 앞에 무엇이 놓여 있단 말인가? “죽어야 하는 인간 조건”이 놓여 있다. 

여기서 시인은 용기 있고 멋진 말을 던진다.  “오,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삶을 갈구하지 마라. 대신 너에게 주어진 활동의 장에 지치도록 탐닉하라.”

죽을 운명 앞에 놓이기 전까지 활동하라는 이 말. 지치도록 탐닉하라. 젊음을 들끊게 하는 말이다. 


자네의 인생에 언제나 갠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닐 테지. 하지만 자네만 그런 게 아니라네. 과거의 영웅들을 생각해보게나. 그러면 일반적인 행동 지침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떠오를 걸세. “진리의 길을 아는 인간(핀다로스에게 진리란 대부분의 경우 현실을 의미한다.) 현실의 길을 따르는 인간은 신이 그에게 허락해준 행복을 누릴 줄 안다. 하지만 높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끊임없이 바뀐다.” 


p230 “비록 가진 것 없이 비천하다고는 하나, 나는 위대한 사람 가운데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네.” 자부심에 가득 찬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알고 있노라고 선언한다. 그는 시인이므로 그가 쓴 송가들이 그에게 영예를 안겨준다. 히에론처럼 막강한 권력자가 드물듯이 자신처럼 위대한 시인도 드물다는 암시가 아니겠는가. 한순간 우리는 그보다 훨씬 후대에야 등장하는 프랑스 시인의 메아리를 미리 듣는 듯 하다. 


<해묵은 신화에 순수한 아름다움을 불어넣다>

p233 아름다움은 감정 속에도 태도 속에도 깃들어 있다. 아름다움의 이 두가지 체제에는 고귀함이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모든 태도, 모든 감정이 한결 같이 위대함을 지향한다. 

아름다움. 코칭을 하면 모든 태도, 모든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부분 아름다운 감정, 아름다운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테론을 위한 송가>

p234 핀다로스는 비극적인 정서를 지닌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신들의 선의와 신성함을 말하는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 전체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희망하는 방향으로 경도되어 있다. 


p240 핀다로스에게 인간의 생존이란 매우 소박한 형태를 취했다. “인간의 지속은 영원하다. 자손이 없어서 망각 속으로 떨어지게 되는 종족이 아니라면 영원히 살 것이며, 그런 종족은 고통 따위는 알지 못한다.”


<찬미하며 충고하는 시인>

p244 히에론의 첫째가는 덕목은 핀다로스가 다른 시에서도 밝혔듯이 영혼의 단호함이다. 


p245 고귀한 군주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최악의 잘못은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 다시 말해서 ‘원숭이’처럼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핀다로스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말한다. “너는 알게 된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 원숭이는 아이들에게는 아름답다. 언제나 아름답지.” 이것은 말하자면 델포이의 주제인 “너 자신을 알라”의 도덕적 교훈 버전이다. “너는 알게 된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라는 핀다로스의 말을 가지고 괴테가 “있는 그대로의 네가 되거라”라는 멋진 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살아왔던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도 배우게 된다. 각자의 인생이 다르고, 운명이 다를텐데도, 앞의 것을 참고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잘 깨닫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까? 자기자신을 아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기 때문에, 이전 인간의 삶을 참고하여 나의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과연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다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을 충고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안다.’는 명제가 과연 실현가능한 것일까? 


<군주의 덕목과 이상을 제시하다>

p247 이들 중에서 청춘을 아무런 위험도 없이 그냥 시들어버리게 하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만의 고유한 고귀함이 뿜어내는 매력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이들은 고귀한 삶, 쉽지 않은 삶을 택했다. 히에론에게 바친 첫 번째 올림피아제 송가에서 펠롭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탄탈로스의 아들이며, 펠로폰네소스라는 이름은 그에게서 나왔다.- 옮김이)가 영웅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을 보라. 펠롭스는 기도한다. “커다란 위험이란 두근거리는 마음이 없는 투사는 원하지 않는 법이다. 어차피 죽어야 하는 목숨이라면, 어째서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서, 모든 모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무기력하게 늙어가기만을 기다린단 말인가? 


p248 “아름다운 시가 지닌 음성은 영원히 울린다. 그 음성 덕분에 비옥한 대지의 공간과 바다를 가로질러 아름다운 행위의 영광이 꺼지지 않고 찬란하게 빛난다.” 

이 감탄스러운 행은 어떠한가? “시인의 노래가 없다면, 모든 덕성은 침묵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Chapter 6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p252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같은 독립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을 이 땅의 다른 민족들과 확연하게 구별 짓는 특징이다. 


<호기심 많은 최초의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

p254 헤로도토스는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궁금했을까? 그는 모든 것에 대해서 궁금했다. 사람들이 무얼하면서 어떠게 사는지가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진기함에 대한 취향이 때론 오류를 낳다>

p256 헤로도토스가 지닌 두 가지 열정적인 취향, 즉 기가 막히게 재미난 이야기나 희한한 사람들에게 쏠리는 취향과 진실을 향한 취향은 어느 모로 보나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기아라는 비참한 현실과 지리학의 탄생>

p260 다만 그와 같은 천재성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 모두 갖추어지더라도 반드시 그 천재성이 발현된다는 법은 없으며, 오히려 전혀 발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음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과학과 문학은 그런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세계 일주>>, 바뷜론 이야기 

p265 “페르시아인들은 자식이 다섯 살이 되면 교육을 시작하며, 이교육은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이들이 가르치는 것은 말타기, 활쏘기, 진실을 말하기, 이렇게 고작 세 가지뿐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을 교육한다는 것을 우리도 배워, 교육해야 한다. 진실한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어렵지만, 꼭 해야하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p266 여하튼 당시 그리스의 직접적인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놀라움이 되고, 심지어 감탄이 되기도 한다. 


<헤로도토스가 상상한 지구, “납작한 원 형태”>


<스퀴티아의 풍습과 점술을 소개하다>

p269 헤로도토스가 먼저 강조하는 것은 침략에 맞서서 저항하는 스퀴티아인들의 독창성이다. 적이 침략해오면, 이들은 일단 퇴각한다. 자신들이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광대한 들판으로 적군을 유인하는 것이다. 이들은 풀이 무성한 드넓은 들판이라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할 뿐 아니라 들판을 가로지르며 이들에게 방어선을 제공하는 큰 강의 도움도 받는다.


p273 그리스인들은 고귀한 품성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다른 인간들과 가까운  존재임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측면에서의 인간성을 통해서 그런 느낌을 공유했다. 잔인하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의 인본주의는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관념론이나 이상주의에만 치우친 인본주의가 아니었다. 


<식인 풍습에 관한 기록>

<판타지에 가까운 인도 이야기>

p278 “인도의 동쪽에는 모래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들이 있다. 그런 사막에서는 개보다 조금 작지만 여우보다는 큰 개미들을 볼 수 있다.” 이 개미들은 원래 마르모트였던 것 같다. 인도 사람들은 마르모트를 ‘개미’라고 부르는데, 그건 녀석들이 땅을 파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일 강의 수원을 찾아>


<그리스적이지 않은 것에 매혹된 역사가>

p285 헤로도토스가 섭렵한 나라들 중에서 이집트는 진실과 진기함이 동시에 담긴 역사와 지리를 추구했던 헬도토스의 진가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나라였다. 


p286 그의 연구가 맞건 틀리건, 그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신비를 파헤치고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그의 끈기야말로 미래에 대한 가장 값진 약속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하여, 미래에 가장 값진 약속을 이해행 줄 수 있을까?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추구했던 어떠한 과정이 미래에 대한 가장 값진 약속이 될 수 있다면 가치있는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p287 그는 기쁨에 들떠서 아주 희한한 의식들을 수도 없이 끌어 모았다. 그는 도를 넘는 엉뚱함을 대면했을 때도 충격에 빠지거나 분노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스의 풍습과 다른 것일수록 이 유유자적하고 열린 정신의 소유자를 매혹했다. 그는 어느 순간 이집트에 대해서, 일부 민간 설화나 새뮤얼 버틀러의 <<에리훤>>같은 소설에나 나옴직한 “거꾸로 가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정립하고서는 즐거워했다. 


p290 악어는 물속에서는 전혀 보지 못하지만, 일단 물 밖으로 나오면 대단한 시력을 자랑한다. 물속에 살기 때문에 주둥이 속에는 거머리가 우글거린다. 다른 네발짐승과 모든 조류는 악어를 피해 다닌다. 오직 악어새만이 악어와 평화로운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데, 그건 악어새들이 악어에게 일종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p292 이집트 이야기 : 페로가 실명의 벌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끝났을 때 받은 신탁. 남편 외에 다른 남자라고는 알지 못하는 여자의 소변으로 두 눈을 씻으면 시력을 되찾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페로스는 제일 먼저 아내의 소변으로 눈을 씻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풍습이 다름을 인정했던 열린 정신의 소유자>

p293 풍습은 일상적인 실천에 집착하는 각각의 종족의 사고방식 위에서는 마치 굴레처럼 짓누르는 반면, 풍습 총체에 대한 인식, 즉 종족 각각의 풍습이 다양하며 따라서 서로 모순될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은, 역사가들에게는 정신의 해방을 도와주는 도구로 작용한다. 


p294 어느 날 다레이오스는 가까이 지내는 그리스인들에게 얼마를 주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육신을 먹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레이오스는 사람들이 칼라티아이라고 부르는 인도인들을 오게 했다. 이들에게는 돌아가신 부모의 육신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다레이오스는 그리스인들이 보는 앞에서 칼라티아이들에게 물었다. 통역이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그대로 옮겨주었다. 얼마를 주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시신을 화장하겠는가? 그러자 인도인들은 언성을 높이면서 제발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처럼 풍습의 힘은 막강하다!


그러니 핀다로스의 시에 등장하는 ‘풍습은 세상을 지배하는 여왕’이라는 말보다 더 맞는 말은 없다. 

어쩐지 몽테뉴의 한 구절을 읽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Chapter 7 인본주의 의학의 꽃, 힙포크라테스 

p297 힙포크라테스는 오랜 전통에 의지해가면서, 기원전 5세기에 의학의 프로메테우스로 부상했다. 


<<힙포크라테스 전집>>, 성소 중심의 의학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향

p302 <<힙포크라테스 전집>>은 주로 세 부류의 의사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이론에 치중하는 의사들, 즉 모험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철학자들 부류다. 두 번째는 이들의 대척점에 위치한 크니도스 학파에 속한 의사들로서, 이들은 사실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 번째는 힙포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즉 코스 학파의 의사들이다. 이들은 관찰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관찰 결과만을 가지고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세 번째 부류의 의사들은 말하자면 실증적인 정신의 소유자들로서, 자의적인 추축을 거부하고 항상 이성에 의지했다. 


<이론만 중시하는 궤변적 의학>


<관찰된 사실만을 맹신하는 크니도스 학파>

p308 이처럼 의사들의 묘사는 상당히 표현이 풍부하다. 일부 특징들은 주목을 끈다. 가령 환자는 숨을 쉬기 위해서 질주하는 말처럼 “콧구멍을 열고, 여름날 찌는 듯한 더운 공기 때문에 기진한 개들처럼 혀를 길게 내민다.” 이런 이미지들은 매우 정확하면서 충격적이다. 


p311 “신체의 본질이 의학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이 정도면 일반적으로 만나는 크니도스학파의 경험주의를 대번에 뛰어넘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대담한 문장을 남긴 저자는 인체의 모든 부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메스를 쥐고 심장을 적출한 필리스티온>

p313 두 개의 심실은 인간 생명의 원천이다. 그곳에서부터 강이 흘러나오면서 인체 내부 전체에 물을 공급한다. 이 두 심실에 의해서 영혼의 거주지에 관개용수가 공급된다. 이 생명의 원천이 말라버리면, 인간은 죽게 된다. 


p314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가 느끼는 놀라움 자체가 ‘학문’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다. 학문이란 진실과 ‘적절한 통찰력’, 시행착오 같은 것들이 절묘하게 혼합되는 가운데 서서히, 아주 서서히 축적되어간다. 학문의 축적은 아주 오랜 세기가 지나도록 바벨탑 이야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학자들이 저지른 실수들은 장기적 안목에서 볼 때 적잘한 통찰력만큼이나 도움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수란 언제나 수정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수, 실패에서 배울 것이 있다. 실수를 저지르려거든, 완전한 실수를 저지르라는 말이 생각난다. 실패하려거든 완전한 실패를 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최선을 다한 후, 실패하면, 그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방법이 바뀌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완전한 실패, 최선을 다하지 않은 실패를 저지르면 우린 또 다시 같은 실패,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수정되기를 요구하는 실수를 보고, 무심코 지나치지 말자. 그래야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이다. 


<<힙포크라테스 전집>>에 대한 간략한 분석이 이제 막 태동기에 들어선 새로운 학문의 갈지자 횡보를 보여주는 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코스 섬의 의사, 힙포크라테스>

p317 처음에 인간은 야생 동물이나 마찬가지로 모든 식재료를 날것으로 먹었다. 이 과격하고 거친 섭생 방식은 높은 사망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보다 훨씬 ‘유순한’ 섭생 방식을 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질병만 보지 않고 사람을 보다>

p321 이렇듯 제멋대로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각들은 환자를 검진하는 방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단순한 관찰의 테두리를 뛰어넘으며, 거장의 머릿속에서 결정적인 단어가 튀어나오게 된다

 “환자의 몸을 살피는 일은 거창한 작업이다.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언어, 추리력 등을 모두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단어, 즉 추리력이라고 하는 말이야 말로 우리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힙포크라테스의 저작 중에서 가장 유명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격언>>(라블레는 몽펠리에의 학생들에게 힙포크라테스가 쓴 그리스 원전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는 1531년 당시로는 초유의 사건이었다. 라블레는 또한 최초로 이 책의 현대판본을 내놓기도 했다.)은 힙포크라테스가 환자를 검진하던 중에 섬광처럼 떠오른 단상들은 즉석에서 기록해두었다가 한꺼번에 묶어서 내놓은 모음집이다. 


p322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격언은, 오랜 시간 담금질해온 방법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밀도 높은 문장으로 유명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험은 유동적이며, 판단은 어렵다.의사로서 쌓아올린 경력 전부, 다시 말해서 실패와 위험, 그리고 마침내 임상을 토대로 하는 학문, 어려움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진단을 내림으로써 질병을 정복하게 되는 그 경력이 모두 이 한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여기서 경험은 ‘유동적인’ 토양에 어렵사리 뿌리를 내린 추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경험은 유동적이며(그렇다. 끊임없이 흘러 움직인다.), 판단은 어렵다. (정말 어렵다. 어려운 거다.))


p323 힙포크라테스가 정의하는 의학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정신 신체 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생태계 및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인간을 다루는 의학을 가리킨다. 


p325 힙포크라테스는 병을 고치는 의사이기보다 건강을 지켜주는 의사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인본주의 의학을 꽃피우다>

p327 “지성을 의술의 어느 분야에나 적용해야 마땅하다”


p328~329 힙포크라테스는 대부분의 경우 성찰이라는 말을 정신의 항구적인 태도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이를 지속을 의미하는 시제와 함께 사용한다. 


p334 자연은 스승없이 행동한다. 

깨달음은 곧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 문명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고전적인 주제다. 



p335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유동적인 경험”의 현장에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의사는 겸손하지만 매우 효율적인 생명 제조자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무가 아닌 현실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의사도 그가 환자의 몸에서 발견한 것, 즉 관찰되고 활용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부터 건강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힙포크라테스 선서>

p335 학문의 발전은 결과의 축적보다는 방법의 정당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책 한권을 쓰기 위해서도, 아마 어떠한 철학, 나만의 학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책을 한권 내고 말 것이 아니라면, 나의 책은 발전해야 할텐데, 그때 정당한 방법으로 이루어나가야겠다. 이 문장은 내게 교훈적이다.)


p336 높은 지적 수준, 겸손함, 사고의 고양, 이 모든 것이 힙포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그 자신도 실천에 옮긴 도덕적 태도를 통해 동시에 찬란하게 완성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의술에 대한 열정>

p341 “사소한 실수”라면 환자 앞에서 인정해야 한다. 의사는 오랜 기간 양식 있는 스승 밑에서 수련을 거쳤으므로 대체로 심각한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로 인해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면, 환자 앞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환자의 안정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의사는 자신의 실수를 기록으로 남겨 후배들이 지침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조금 의아했다. 심각한 실수를 인정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그럴까? 의료 사고도 운명인가? 인간은 모두가 다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인데 말이다. 흠, 뭐라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p343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의술에 대한 사랑은 의사의 인류애를 받치는 두 기둥이다. 


<노예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는 의학>

p346 더구나 의사가 환자를 판단하는 어조가 환자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동일한 것을 보면, 힙포크라테스의 인본주의가 추구하는 학문적인 관심과 인간에 대한 호의를 짐작할 수 있다. 


Chapter 8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p349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이라면,  모든 종류의 웃음이 동시에 들어있는 웃음이다. 풍자적인 웃음과 기쁨의 웃음이라는 두 개의 축을 가진 웃음이다. 그러니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웃음을 포함할 수밖에. 


첫째, 분노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웃음이다. 

p351 그런데 순(順)웃음도 있음을 잊지 말자. 순웃음은 사물에 대한 사랑, 시골에 대한 사랑, 빵과 포도주, 평화 등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가장 기본적인 재화들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웃음이다. 


p352 “인간은 살아 있는 생명체 중에서 웃을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 “웃음은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이라고 말이다. 

 풍자적인 웃음과 서저적인 웃음, 이렇게 두 부류의 웃음은 분리하기도 어렵지만 공통된 기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치유의 기능이다. 아르스토파네스는 자칭 아테나이 사회의 ‘선생님’, 아테나이 민중을 가르치는 교육자였다. 웃음은 그가 제공하는 치료법의 한 부분이다. 되찾은 기쁨 속에서 인간은 충만함을 만끽하고, 사회는 균형을 찾는다.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 즉 정화 작용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에게 상식을 돌려주는 웃음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모두 환자들인데, 웃음이 우리에게 건강을 되돌려준다. 

 서로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로 묶여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두 가지 웃음은 현실과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거나 서로 대립하는 것을 억지로 떼어놓지 않는다. 

웃음이 치료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웃음 치료사’들을 지지해줄 수 있는 강력한 증거를 발견했다. 그리스인 이야기에는 없는게 없구나. 감탄함. 


<분노를 머금은 풍자의 웃음>

p358 희극의 역사에서 병정의 가면은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라는 인물만큼이나 널리 애용되었다. 


p360 한편 아리스토파네스는 동시대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던 소크라테스에게 현학적인 학자의 가면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p361 “민중을 지배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지. 잘 섞고, 주물럭거리고, 여러 가지 재료들을 한꺼번에 범벅을 만들고 달콤한 몇 마디 말로 대중들을 사로잡고, 고기찜을 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말을 하는 거라니까.” 


<기쁨으로 충만한 서정적인 웃음>

p363 그 기쁨의 웃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 웃음은 앗티케 시골 마을의 잔치에서 온다. 


<한바탕 웃음으로 드러나는 희화적 진실>

p366~367 그곳에서 그는 그가 작품 전반에 걸쳐서 줄기차게 옹호하는 전원생활에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들판이나 정원에 핀 꽃들을 알았으며, 하늘을 나는 새들의 이름과 노랫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관목 숲에 사는 요정의 음성을 들었다. 가래와 괭이를 다룰 때면, 금속의 연장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며 가슴 깊이 농부들이 느끼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또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천진하게도 그 세대의 상징인 거대한 ‘남근’을 온갖 색으로 치장한 다음 농장 소유주와 그의 가족들이 그것을 들고 곡물이 자라는 밭과 포도밭 주변을 거니는 엄숙하면서도 즐거운 마을 축제에도 참석했다.

 

p369 그의 희극이 풍자적인 동시에 서정적이라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랄한 분노의 감정을 분출하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비아냥과 독설, 권력자들에게나 민중들에게 퍼붓는 가장 천박한 쓰레기로 뒤덮인 진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외설스러움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시’라고 하는 왕관을 쓰고 나온다. 


<전쟁없는 도시를 꿈꾸는 <<아카르나이인들>> >


<  <<뤼시스트라테>>, 여자들의 파업 선언>

p373 평화를 너무도 간절하게 사랑하는 까닭에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절제를 강요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파네스가 던진 질문이다. 

 

p374 그가 고안해낸 상황. 천재적인 단순성이 빛나는 설정은 무대에서 과감하도 못해 음란한, 그렇지만 너무도 유쾌하고 건강해서 남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여인들이 자연의 법칙을 거부한 결과는 대단히 치밀하게 전개된다. 

 연인들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다. 


p375 이 작품은 모든 인간에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 곧 평화를 사랑하며, 아니 그보다 더 원초적으로 삶에 대한 사랑과 한바탕 웃음이 들어 있는 작품이다. 삶에 대한 사랑이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육체적인 사랑과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을 통해서만 영속될 수 있지 않은가? 


<아테나이 민중의 소망을 담은 <<평화>>  >

p380 그의 상상력이 빚어낸 행동들은 무척 환상적이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현실, 즉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스 민족이 요구하는 평화라고 하는 현실을 더 깊이 들어다보도록 이끈다. 


<팍팍한 현실에 웃음을 주는 풍자 시인>

p381 오히려 ‘파라다이스’ 즉 인간이 어느 때라도 갈 수 있는 유일한 정원, 인간에게 노동과 노동의 결실, 일용할 양식과 휴식을 동시에 제공하는 유일한 정원, 특히 그리스인들이 피조물간의 원초적인 형제애, 동물들과 나무들과의 우정, 신들과의 친근한 교류 등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정원을 선사하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한다. 이 정원은 바로 자연이다. 


<자연과의 합일에서 원초적인 기쁨을 찾는 <<새>> >

p390 새들은 이제 인간의 신이 되었다. 신들은 인간이 행복과 빵을 얻는 자연 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지, 우리를 신으로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우리에게서 예언자 뮤즈를 얻게 되는 셈이지. 

 미풍과 계절, 

 겨울, 여름, 따뜻한 햇볕을 알려주는 뮤즈. 

 우리는 당신에게서 멀리 도망가지 않아. 

 저 높은 곳, 구름 속에서, 

 제우스처럼 근엄하게 앉아 있지 않는다니까. 곁에 있으면서, 

 우리는 당신에게, 당신과 당신 아이들에게, 

 당신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부와 건강,    

 생명과 평화, 젊음, 춤과 축제, 

 그리고 ...... 새 젖도 주겠어. 


 p391 새 젖이라는 단어는 물론 농담이다. 새의 젖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리스어로는 ‘완벽한 행복’을 뜻한다. 


아리스토파테스는 풍자 시인인 동시에 즐거움, 삶과 자연, 자연 속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세속적인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기도 하다. 

 

p392 그는 웃음 속에서 새들로 하여금 새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신통계보학을 전개시키게 한다. 


p394 아리스토파네스의 시는 절대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의 작품 일부를 두고 볼 때, 도대체 웃음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꿈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우리의 시인은 자신의 조상들이 섬겨왔던 종교와 비슷한 형태를 지닌 숭배를 꿈꾸었다.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p395 아리스토파네스는 꿈을 꾸고, 신명나는 놀이를 벌인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꿈과 놀이를 벌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과 놀이는 깊이 숨겨진 우리의 본성, 우리의 과거, 우리의 조상, 우리 민족에게서 애써서 퍼올려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꿈과 놀이는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꿈과 놀이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인가? 그걸 배워가는 시간인 것 같다. 꿈과 놀이. 나를 표현하는 것. 그러려면 나도 우선 아리스토파네스처럼 어떤 한 분야에서 진지해져야겠다.)


나무 사이에서 놀기만 한다고 해서, 새와 나무를 사랑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새들에 대한 숭배를 떠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라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했다



p396 아리스토파네스가 자연 속에서 찾아낸 존재와 사물들을 희극을 위해 사용하기를 멈추고, 문득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 대목도 있다.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헛소리의 망령에 혼을 빼앗긴”것 같은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아리스토파네스는 “신의 음성”인 매미나 꾀꼬리처럼 평소 과묵함 속에 침잠해 있던 자연이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음성에 불과해 보인다.


Chapter 9 지는해

p403 오포라는 막바지에 접어든 여름의 영광을 뜻한다. 오포라는 동시에 이제 막 시작되려는 가을을 의미한다. 태양은 이제 지평선을 향해 내려간다.


<문명의 황금기에 드리워진 그늘>

p403 하나의 문명은 역사가 재미삼아 즐겨보는 일종의 놀이, 미래의 학자들에 의해 분류되어야할 관습과 작품의 덩어리가 아니다. 하나의 문명이란 오히려 하나의 민족이 자신들과 남들을 위해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기회, 아니 일련의 기회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전쟁과 내부 분열>

p404 우선 전쟁의 상시화를 들 수 있다. 전쟁은 2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p408 전쟁은 폭력을 가르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으로 하여금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게 만든다.”


<고삐 풀린 제국주의>


<민주주의의 붕괴>

p410 문화적 창조 행위는 기원전 6세기부터 5세기 말엽까지 풍성하게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의 말기에 해당하는 기간에는 창조가 창조를 낳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었다. 


p414 “난 민중을 알죠. 그자들을 어떻게 낚아야 하는지 안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내 사유물이나 다름없죠”라고 그는 말한다. (클레온)


<소송 망국 아테나이>

p417 판관들에게 매일 필요한 만큼의 소송을 제공하기로 한 협약 조항을 정치가들은 정확하게 준수한다. 이것이 바로 아테나이의 불행이다. 정치가들은 밀고자들에게 부탁한다. 한몫 두둑하게 챙길 수 있는 일에 자신들이 직접 뛰어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밀고자들은 아테나이 민주주의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최악의 기생충이었다. 


<시민의 감소와 노예의 급증>

p424 자유노동력 대비 노예노동력의 급증은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노예 급증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도시국가들의 점진적인 쇠퇴를 기다려야 한다. 도시국가들의 점진적인 쇠퇴에는 그리스 문명이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대두된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는데, 우리는 아직 그 시기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니 미래를 너무 성급하게 앞당기지는 말자. 


<쇠락하는 도시>

p426 헬레니즘 시대의 막바지를 지배하는 비참함의 이미지가 그리스의 지평선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리는 그 이미지가 온갖 부정한 방식으로 긁어모은 부의 이미지와 더불어 아리스토파네스의 예언자적인 희극 <<플루토스>>에서 내내 중첩되어 나타난 것을 본다. 


p427 아테나이의 삶에서 돈이 가지는 위력을 <<플루토스>>보다 더 잘 표현한 작품이 없다.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비참함의 문제를 주제로 제시한다. “돈에 대한 사랑이 우리 모두를 지배한다”고 극중 인물이 선언하지 않는가. 

돈이 가지는 위력이라.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돈’ 때문에 인간의 삶이 좌지우지 되는 것은 매한가진가보다. 돈을 떠나 살 수는 없어도, 돈의 지배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인간에게 봉사하라고 만들어 놓은 돈이 인간의 봉사를 받고 있으니, 비참함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p431 그리스 민족은 전쟁과 비참함, 퇴행을 거듭하는 제도, 문학과 예술, 이성과 지혜, 지칠 줄 모르는 용기 등과 더불어 앞으로 천 년 동안 줄기차게 뛸 것이다. 


Chapter 10 소크라테스라는 수수께끼

p435 독특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했던 그의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의 죽음이 가져온 엄청난 다산성이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들 또는 적수들 중에서 일군의 증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진술은 비록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러 세기에 걸쳐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과 그가 일생을 바친 진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p436 그에게는 진리가 삶보다 더 소중했던 것일까? 


<소크라테스 문제 : 어떤 소크라테스가 진짜인가?>

p436 우선 아리스토파네스가 있다. 그는 기원전 423년,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 <<구름>>을 발표했다. 이 무렵 소크라테스는 마흔 여섯 살이었다. <<구름>>이 발표된 이후로도 24년이나 더 활동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희생양에게 “잘난 체하는 타지인 학자”의 가면을 씌웠다. <<구름>>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특성을 지녔다. 무신론자이며 젊은 층을 타락시키는 자. <<구름>>에 나타난 이 두가지 특성은 그로부터 24년 후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고소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기록의 힘. 말의 힘. 시인의 예언력 등을 캐취할 수 있다. 


p437 소크라테스 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 플라톤,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팁포스


p439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측 증인 : 소크라테스 고소문 작성자 폴뤼크라테스가 적격이다. 

치근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구가 대거 쏟아져 나왔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말을 보존하고 있다는 전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이 대다수다. 


p441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파네스와 플라톤,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팁포스, 크세노폰, 그리고 다른 모든 증인들이 언급하는 사실들이 일치할 때에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간주하려 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엄격성은 말도 안 된다. 어떤 사실에 대해 증인들의 말이 만장일치로 수렴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일, 제일 수상쩍은 일이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증인들은 모두가 같은 대담에 참석했던 것도 아니다. 역설적인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한날 한시에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들이 소크라테스를 같은 시기에 안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단 말인가? 나이와 직업, 기질, 사고 등 모든 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이거나, 최소한 비슷한 증언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더구나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을 증언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서 증언해야 한다는 말이다. 


p442 소크라테스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해석이 모두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으며, 따라서 그가 실존했던 인물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444 소크라테스는 소일거리가 아니다. 그는 우리를 살아가도록 만드는 생명체다. 역사적이고 직설적인 생명체, 요컨대 하나의 통합체다. 나는 그를 그렇게 간주할 것이다. 다양한 증언들 중에서 나에게 충격을 주는 것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에 충격을 가한 것들을 택해 나를 인도하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p445 이 인물을 잡으려고 하면 아이러니라는 그럴싸한 가면 속으로 달아나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선사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물은 최초의 철학자>

p445 그는 신동은 아니었다. 마흔 살이 되어서야, 그나마도 신이 그에게 신호를 보냈기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이방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 그리스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지혜가 담긴 그 글귀를 읽었다. 이리저리 한눈파는 순례자의 눈으로 한번 쓱 읽은 게 아니었다. 젊은 시절 내내 그의 마음속에서는 “너는 누구냐? 너는 무슨 쓸모가 있느냐? 너는 무엇을 아느냐? 네가 아는 것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등의 질문이 메아리쳤다. 

오, 지금 내게 하는 질문 같다. 네가 아는 것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p446 그는 열렬하면서도 동시에 숙고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ㄷ. 열정적인 기질과 냉정한 이성을 겸비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되, 분별 있게 그렇게 하고자 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인들은 그에게 이 세상에서 그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 즉 신들과 인간들에 대해서 말해주는 존재였다. 


p447 시인들과의 교류는 그에게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뭉서을 추구하는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흔히 ‘자연철학자’라고 불리던 이 학자들이야 말로 그에게 인식의 열쇠를 건네준 장본인일 것이다. 이들은 그에게 세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소크테스는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머지않아 살기 위해 그가 풀어야 하는 유일한 질문,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시인들처럼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우주를 탐색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식과 별똥별을 아무리 탐구한다 한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안에서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 인간 각자의 안에서 소곤거리다가 문득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학생들이 매일 같이 하는 질문. 수학 배워서 뭐해요? 살면서 쓸일도 없는데...... 한다. 아무래도 철학과목이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에 들어와야 할 것 같다. 우리 안에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 인간 각자의 안에서 소곤거리다가 문든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교육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인데, 도대체 왜 지식만을 주입하고 있는것일까? 새로운 교육과정이 필요한 때이다. 근데 왜 철학은 교과목에 넣지 않았을까? 아무도 그 해답을 모르기 때문일까? 해답을 원한다기 보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아주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고민해보게 기회를 열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교과목 편성에 대한 의문이다.  


<영혼의 산파>

p448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그에게 가르쳐줄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데,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인간으로서의 진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p449 산파였던 어머니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에 종사한 셈이다. 


p450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영혼을 생산해내는 기술을 창조하고 싶어했다. 


점진적인 학습 끝에 소크라테스는 마침내 그가 찾던 것이 무엇인지,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는 인간으로부터 인간 안에 깃들어 있으며 인간과 관계있는 진실을 이끌어낼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에 관한 학문을 찾고 있었다. 그는 결단력 있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산파였던 어머니의 직업을 물렵다는다. 인간의 영혼이 잉태하고 있는 진실의 열매로부터 영혼을 꺼내주는 산파가 될 것이었다. 


 그는 영혼의 산파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러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는 젊은 시절 얼마나 오랫동안 암흑 같은 시간 속을 달려야 했던가? 진실을 찾겠다는 의지로 점철된 그 어려운 길에서, 정신적인 장애물들과 중첩되는 육체적인 장애물들은 또 얼마나 많이 만나야 했던가? 

후배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암흑 같은 시간 속을 계속 달리고 있다는 그녀에게 이 부분을 발췌하여 주고 싶다. 계속 생각만 하고 있다고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아주 큰 힘이 될 것 같다. 소명을 발견하는 일이라는 것이 쉽게 되지 않기에 더 값지고, 발견하면 축복이 되는 일일거다. 조급히 생각하지 말고, 생각과 고민을 놓치지도 말고,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어두운 터널을 계속 달리길, 가길 바라본다. 나도 마찬가지다. 


<무지를 폭로하는 거리의 철학자>

p451 내면의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이 소명,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명을 그는 어느 날 델포이의 신을 통해서 분명하게 전달받는다. 틀림없이 고집스렁누 거부의 대가였을 것이다. 


신탁이 옮읆은 증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 해준 신탁)서는 이미 정립되어 있는 모든 지혜를 찬찬히 검토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p452 오직 그만이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할 정도로 현명했으므로, 그것은 적절한 처사였다. 

참으로 희한한 직업이며, 참으로 희한한 현자였다. 30년 동안 줄곧 그는 질문하고, 반박하며, “바람을 뺐다.” 30년 동안 줄곧 그는 모두를 비웃었으며, 그 자신도 비웃음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도 1인 기업. 스스로를 고용한 사람. 직업을 창조해 낸 철학자였다. 


p452 30년 동안 그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으며, 빈축을 샀고, 절망하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p454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소크라테스가 여러 세기를 앞서가는 선구자이며, 낡은 외투만 하더라도 소크라테스를 기념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즐겨 입게 될 그 외투가 수도사의 제복이 될 것임을 알 도리가 없었다. 


p455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내린 정의를 요모조모 뜯어본다. 그중에서 어느 단어의 의미가 모호한 것 같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이어진다. 이 모호한 단어를 정의해보세. 혹은 요리나 말 사육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야에서 사례를 하나 들어보세. 두 사람의 대담은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 다시 시작된다.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움과 명백함, 겉보기엔 에둘러 가는 것 같지만 정곡을 찌르는 지적으로 가득찬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예” 또는 “아니요”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퍼붓는 이 추남 앞에서, 그럴듯하게 들리는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선수인 정치가는 번번이 말을 중단당하고, 반듯한 논리에 의해 추궁당하면서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는 급기야 법은 불법이라고 버럭 결론을 짓게 된다. 그리고 정의란....., 에, 또, 정의란... 그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 


p456 하지만 대중들은 일단 실컷 웃긴 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불안 심리가 발동한다.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뭘하자는 걸까? 말을 이용한 대량 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로라하는 인사들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자들의 입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이끌어내려는 집요함은 뭐란 말인가? 


<소피스트들의 전성시대>

p459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코스 등은 새벽 동이 트기 무섭게 아테나이의 유복한 집안 ㅈ럼은이들이 이들 집의 문을 두드릴 만큼 인기를 누렸다. 


<영원한 의심자>

p461 한편 아테나이의 평균적인 시민들에게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영원한 의심자, 끊임없이 질문으로 대화 상대방의 사고를 마비시키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개념을 거부하고 무지함을 고백하라고 권유하는 이 인물은 소피스트들 중에 단연 최고였다. 


p462 좀 더 은밀한 대담을 나누는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머릿속에서 지적인 나태함에 의해 차곡차곡 쌓인 잘못된 개념들을 깨끗하게 비우는 세척 작업을 한 후, 오류에서 벗어나게 된 그들의 영혼이 진실을 열망한다면, 그때부터 어머니가 늘 하던 산파 작업을 통해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들의 내부에 깃들어 있던 지혜를 끌어내도록 인도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의 소재가 되다>


<두 가지의 오해 : 무신론자, 타락시키는 자>

p466 기원전 423년에 공연된 작품에서 두 가지 죄목을 거론하여 그에게 선고를 내렸듯이, 기원전 399년 법정에 제출된 기소장에도 이와 똑같은 두 가지 죄목이 명시되어 있었음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여기서 무지는 가장 진정한 경외심의 가장 순수한 증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현자는 얼마나 신에 근접해 있는가. 아마도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접근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알 수 없는 신, 그는 이 신을 온전히 정의롭고 선한 존재,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 모든 지혜를 지니고 있는 자의 모습으로만 그리며, 이 같은 뛰어남만이 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내부에서 끈기 있고 참을성 있는 검토를 통해서 정의와 선함의 법칙을 파헤친다.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운명을 완벽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 법칙은 그의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그 법칙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잘 알려지지 않은 신, 지고의 선 자체인 신이 아니라면 누가 그 같은 법칙을 인간의 영혼 속에 심어두었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선함의 법칙을 파헤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을 완벽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믿었음. 근데 정의와 선함의 법칙이 모든 인간에게 있고, 그 법칙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단다. 정의와 선함의 법칙? 지고의 선 자체인 신? 우리 영혼속에 그 법칙을 심겨두었다? 양심을 이야기 하는 걸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성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한다. 끈기 있고 참을성 있는 검토. 여기서 말하는 끈기와 참을성은 보통 1,2년 안에 끝나는 것이 아닐것이다. 어쩌면 죽을때까지도 가져가야할 성품 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법칙이 있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p467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민족을 고양시키고, 이들에게 진정한 선에 대한 의식, 즉 선택이 주는 위험성과 고귀함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p470 “나한테 중요한 단 한 가지는 바로 거리로 나가, 젊은이가 되었건 노인이 되었건, 당신들을 만나, 그처럼 열정적으로 당신들의 육체나 재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영혼과 그 영혼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이다. 나의 사명은 당신들에게 부는 덕성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덕성이야말로 인간들에게 번영의 원천이자 공적, 사적 재화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소크라테스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중에서 두 명이 아테나이에 재앙이 겹치는 동안 이 도시의 악령 같은 존재로 지목받았다. 우선 알키비아데스, 헤르메스 신의 조각들을 모독하고, 자신의 집에서 친구들과 비의를 패러디했으며, 그럴듯한 장밋빛 약속으로 아테나이를 시켈리아 원정길에 오르도록 꼬인 다음 정작 자신은 적군 진영으로 넘어가 자신이 지닌 천재적인 재능을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와 더불어 조국을 폐허로 만드는 데 사용한 배신자 알키비아데스는 바로 소크라테스가 가장 아낀 제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p473 우리는 여기서 그의 죽음이 지니는 심오한 의미와 만나게 된다.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의미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한 번 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의 면모를 보여주며,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한다. 우리가 입수한 자료들만 가지고는 왜 그가 죽기를 원했는지, 정말 그는 죽기를 원했던 것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적어도 확실한 이유를 제시 할 수 없다. 


p474 그의 가르침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오늘날까지 여전히 살게 되었다. 


<재판>

p475 소크라테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자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조차 업섹 되었다고 한다. 


p479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면, 그 결정은 내가 아닌 당신들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들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p480 나는 당신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신이 당신들에게 내려준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사형에 처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할 겁니다. 그는 계속 판관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소리 지를 것 없습니다. 아테나이 시민 여러분. 자신의 재물과 목숨을 남을 위해 내놓는 사람에게는 신성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유죄 판결>

p482 무엇이 되었든 벌을 제안한다는 것은 스스로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일이었고, 판관들로 하여금 가장 참담한 불의, 즉 죄없는 사람을 벌하도록 방관하는 일이었다. 


“나에게 보상을 달라, 그게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p483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진실은 한층 더 강력하게 공격해올 겁니다. 진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의 소리는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만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메세지이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밝혀지는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대화>

p486 부당하게 형을 선고받은 시민은 법이 정한 형벌을 피해도 좋은가? 부당하게 형을 선고받았다고 해서 그 자신도 불의를 행하고, 악에는 악으로 대할 권리를 가지는가? 불복종 행위를 통해서 무질서의 사례가 되어도 좋은가? 도시로부터 이제까지 받았던 온갖 혜택들을 그 도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답해도 좋단 말인가? 분명 그렇지 않다. 악은 언제나 악이며, 따라서 항상 피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입에서는 이 같은 논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p487 소크라테스를 심판한 판관들은 법을 무시하라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유죄라고 선고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그 사람이 탄원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죽어서 영원한 이름을 남기다>

p487 생애 마지막 날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하루 종일 죽음과 죽음이 인간의 이성에게 선사하는 불멸에의 희망에 대해서 토론하며 보내기를 원했다. 


p488 그가 추구한 불멸성은 혼자서만 좋아라 만족하는 그럴듯한 거짓말이 아니라 이성의 확실함을 토대로 정립되는 깨달음의 불멸성이었다. 

그와 함께 탐구하던 이들이 내세운 모든 반대 의견들을 그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반대 의견들은 그에게 논증을 좀 더 단단하게 다지고, 그가 저지른 실수를 고치라는 재촉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삶으로부터 치유되어야 마침내 무지로부터도 치유될 수 있는 건 아닌지.......


p488~489 크리톤이 물었다. “소크라테스, 자네를 어떻게 매장해야 하겠나?” 

소크라테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야 뭐, 마음대로 하게나. 물론 자네들이 나를 붙잡을 수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말일세.” 용감한 크리톤은 조금 후면 시체가 되어 버릴 그의 육신을 감히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그는 영원히 살아남으리라고 판단했어야 마땅한 핵심 덩어리 앞에서 어떻게 매장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반드시 알아두게나, 크리톤. 부정확하게 말을 하는 건 영혼에 해악을 가하는 거라네.” 

 그러니 죽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듯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육신의 해체가 그의 삶의 종착역이 아니며, 그가 제자들의 영혼 속에서 지속하게 될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우리가 이해했다면 말이다. 이 충성스러운 영혼들은 그 후 그를 기리는 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곳, 끊임없이 지식 탐구라는 모험을 시작하는 장소가 되었다. 






3) 그리스인 이야기 3 (에우리피데스에서 알렉산드로스까지)


Chapter 1 쇠락과 새로운 발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p11 문명은 다음 세대에 올 인간들을 위해서, 마치 귓가를 멤도는 과거에 대한 추억처럼 아련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후세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펼쳐나갈 때, 또 새로운 창작품을 내놓을 때 그 추억들을 적절히 배합하기도 한다. 


p12 문명의 쇠퇴기는 동시에 새로운 발견의 시기이기도 하다. 문명은 변화를 거듭할 뿐 죽지 않는다. 문명의 삶이란 말하자면 항구적인 태어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p12 이 책에서는 그리스 세계에서 보자면 매우 암울했던 두 세기, 즉 기원전 4세기와 3세기를 조명하게 될 것이다. 바로 도시국가들의 쇠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세기다. 


p13 그런데 이 두세기에 두 명의 대철학자가 새로운 토대 위에 고대 도시국가를 복권시키기 위한 방책을 모색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그들이며, 많은 철학자들이 두 사람의 뒤를 이었다. 

 이렇듯 그리스 문명은 쇠망하면서, 이와 동시에 사회와 사상의 격변을 통해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이것이 기원전 4세기와 3세기에 나타나게 된 본질적인 지향점이라고 하겠다. 


비극의 완성, 에우리피데스 

p17 그는 인간의 삶에 끼치는 신의 영향력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안에 깃들어 있는 열정의 역할을 통해서 인간을 설명하려 노력했으며, 의지의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허물어지는 인간을 표현하기도 했다. 바꿔 말해서, 에우리피데스는 인간을 쥐고 흔들며, 때로는 파멸의 길로 이끄는 인간 내부의 비극적인 요소, 인간적인 열정이 지니는 비극적인 면을 통해서 인간을 설명하고자 했다. 


p18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적인 요소를 우리들 마음속에 들어 있으나 (우리 자신의 마음보다 우리와 더 가까운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려지지는 않은 심연 속에 위치시킨다. 그 때문에 그는 우리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폭탄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폭발한다

일어나는 사건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폭탄이 그런것 아닐까? 


최초의 여성 심리 비극, <<메데이아>>

p21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데에서 오는 씁쓸함. 그 누구보다도 남성적인 영혼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씁쓸함, 여자라는 저급한 신분에 따라 저급하게 취급되는 데에서 오는 씁쓸함. 


p24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거나, 바라거나 둘 중 하나다. 


p25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늘 그렇듯이, 우리 행동의 뿌리를 파헤치는 데에서 희열을 느낀다

이아손에게서 차마 고백하기 어려운 우리 자신의 치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억압당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재주야말로 에우리피데스 예술의 비법 중의 하나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을 상처받기 쉽게 만들며, 메데이아는 그 사실을 몸소 뼈저리게 겪고 있다


자식을 살해하는 어머니 

p28 연극 역사상 처음으로 극적인 갈등이 오로지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다. 


p29 우리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고 믿게 하는 것은 악마가 늘 사용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그 말에 넘어가는 순간 정말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나의 분노는 나의 결심보다 강하다네.”


“나의 분노”, 이는 다시 말해서 정념이며, 메데이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악마, 살인적인 증오를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정념을 다루다

p31 메데이아는 누구인가? 그녀는 물론 괴물이다. 하지만 우리와 너무도 가까운 괴물이다. 우리 중의 누구라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예외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것 또한 인간 조건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메데이아는 무엇보다도 정념으로 미쳐가는 영혼이다. 


p32 지배에 대한 끔찍한 갈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악마(악마라는 말은 이 작품 속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로 변해버렸으며, 그 악마를 그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나머지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 것이다. 이 ‘악마’는 그녀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힘일까? 아니면 도저히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존재의 비이성 속에 늘 깃들어 있던 분노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심리와 소유욕. 심리적인 힘은 우주를 움직이는 힘과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들 자신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과연 우주와 구분되는가? 에우리피데스가 발견한 심리적 사실주의는 결국 우리를 이 질문으로 이끈다.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의 악마적인 정념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소속감, ‘코스모스’에의 복속을 강조한다. 이것을 의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p33 요컨대 비극적 진실은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힘이다. 


그가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즉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복잡다단함이다. 또한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이 힘은, 우리 자신이 그 힘에 대항할 수 없고, 그 힘은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적사건에 대해 많이 생각했었다. 인간의 마음. 알지 못하는 마음의 복잡다단함. 마음의 복잡다단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런데, 그 힘에 대항할 수 없고, 그 힘은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므로 대항할 수 있고, 파괴를 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통제 불가능한 마음에 초점 맞추지 말고, 통제 가능한 생각으로 마음의 방향을 잡아보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다. 물론 생각의 흐름도 통제하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말이다. 얼른 융의 책을 읽고 싶어진다.) 


Chapter 2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 나타난 비극성 

p37 일반적으로 다양한 요소들(신의 의지, 예기치 못한 우연적인 상황, 등장인물들의 감정, 특히 비극적 영웅의 감정선 등)이 관객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주인공의 죽음을 향해 수렴하도록, 아니 그렇게 보이도록 극의 얼개가 짜인다. 


부조리한 신탁에 굴복하는 아버지, 아가멤논

p40 신랄할 정도로 진실에 천착하는 에우리피데스는 거짓 가치의 거품을 빼는 데에서 쾌감을 느낀다. 위대한 장수이며, 왕 중의 왕인 아가멤논, 군대와 정치가, 그가 증오하는 제사장들에게 마음에 품고 있는 가장 절실한 욕망(사랑하는 딸의 구원), 인간의 의식이나 자연의 섭리에 합당한 이 욕망(여신의 요구에도 불구하고)을 강제하는 대신, 모든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용기, 즉 두려움이라는 궁지에 몰리는 이 한심한 아가멤논은 인간의 영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읽는 에우리피데스가 창조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이다. 


p41 에우리피데스는 다시 한 번 우리의 본능(좋건 나쁘건 상관없다), 우리의 정당한 감정(가족애, 조국애, 명예욕 등)이 명확한 사고나 단호한 의지, 모두가 동의하는 원칙 등에 의해서 절제되고 통제되며 제어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연에 의해 아무 방향으로나 튀며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는 데에 인간 조건의 비극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거짓 모성, 클뤼타임네스트라 

p44 그녀의 마음은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을 회유할 수 없다. 클뤼타임네스트라라고 하는 어머니의 고통은 순수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천박함과 뒤섞여 있다. 


우연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적 요소 

p47 그런데 도대체 누가 일이 이렇게 되도록 시종일관 생각하고, 지켜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우연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는 다름 아닌 부재가 우리를 농락하며, 이 가공할 만한 부재의 이름은 바로 우연이다


부조리한 전쟁에 대한 고발 

p50 불행을 제압하기 위해 각자가 자신의 의지를 내보여야 하는 순간에 인간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합의의 부재.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행동할 뿐이다. 각자가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면, 마주잡은 손들은 슬그머니 풀어지게 마련이다. 이피게네이아는 자신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손마저 뿌리친다.

 모름지기 인간의 모든 성공엔 재앙이 뒤따르는 법이다. 


p51~52 인간과 관련해서는 모든 것을 명쾌하게 파악하기란 어려우며,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간다.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모호한 가운데 투쟁을 벌이면서, 불행 속에서 사는 형제자매들, 흔히 사회라고 하는 기제의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불확실성 때문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또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잘 안될 수도 있다고 미리 방어기제도 작동시킬 수 있다. 불확실성은 인간에게 두 가지 마음을 주는데, 불확실 하므로, 너무 희망적이지도, 너무 절망적지도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또, 인간의 마음의 힘을 믿고, 불확실성 안에 있는 긍정성을 바라며 어떠한 일을 하게 된다. 마음의 힘은 신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일 수도 있겠다. 위험하면서도, 뛰어들게 되는 것 같다. 


p52 시는 비극성의 암흑 속에 광명을 가져다주고, 눈물 속에서 희열을 맛보게 한다. 


비극성 너머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일별

p52 시인은 우리에게서 세계의, 코스모스(이 아름다운 그리스 단어는 세계, 질서, 아름다움을 동시에 의미한다)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에너지를 일깨워준다. 우리가 이 비인간적인 극, 이 비극 속으로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비극성을 넘어서는 곳에서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느끼며, 이것이 코스모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호한 소리, 시의 소리(이미지, 음악, 리듬), 이 세계의 다양한 삶, 사물의 색, 존재의 음악, 빛과 그림자의 유희, 방망이질치는 우리의 심장 박동임을 알게 된다. 


p53 비극을 통해서, 비극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으로 살기를 배우며, 신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인간인 우리 자신의 약한 마음으로부터 기인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야 하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배운다


p57 모든 운명의 주인인 제우스는 어떤 이들에게는 태양이 가득 내리쬐는 바다로 출발하는 기쁨을 허락해주고, 

나에게는 땅속 음지에서의 괴로운 기다림을 명령하는 걸까요? 

오, 필요의 신, 무자비한 여신이시여

오, 생명의 시간이여, 죽음을 학습하는 무서운 시간이여

(신에게 이유를 묻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이유가 있나? 신은 그저 마음대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 아닐까? 인간은 오히려 신이 내게 태양이 가득 내리쬐는 바다로 출발하는 기쁨을 허락해주길 기도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기도를 마친 후, 그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일반은총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심은대로 거두는 그 진리를 위로 삼아.)


p58 그리스 비극은 우리를 공포와 동시에 희열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우리의 마음은 야성적인 희열 속에서 춤춘다


Chapter 3  비극 <<박카이>>

p62 신의 신비, 신의 필요성은 작가로서의 에우리피데스의 굴곡 많은 삶을 여러 갈래로 찢어놓았다. 그는 신을 믿다가 신을 모독하기를 반복했다. 


신을 믿지 않는 펜테우스 

p67 “정신이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도다!” 정말로 놀라운 에우리피데스가 아닐 수 없다. 신비에 관한 그의 감수성은 여러 세기를 앞선다. 


불경한 펜테우스를 벌하는 디오뉘소스 

p70 자연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풍성하게 내어준다. 

하지만 자연이 주는 이 모든 안락함은 에덴동산의 평화를 흔들어놓는 불경한 자에 대해서는 진노로 변한다.

신은 자연 그 자체로, 마음먹기에 따라 한없이 너그러울 수도 있고, 한없이 폭력적일 수도 있으며, 아무도 그를 저지할 수 없다. 


상반된 평가 : 신에 대한 부정 혹은 개종 선언

p76 모든 비극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존하는, 또는 현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계에 대한 반항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모든 비극은 또 다른 의미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가상 뒤에 시에 의해서 드러나는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세계, 아니 시에 의해서 드러난 세계에 대한 믿음 해우이라고 할 수 있다. 


p77 <<박카이>>는 그를 산산이 갈라놓는 칼, 그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상처, 즉 결코 완전하게 채워지지 않는 신에 대한 욕망이라고 하는 상처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p82~83 오직 인간만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살며, 바로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다. 인간은 대자연의 가장자리에 자기만의 고립된 세계를 구축하고는 그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신으로부터 분리 되었으므로, 지혜가 아니라 광기라고 해야 마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광기의 수수께끼를 다루었으며, 광기를 분리라고 정의했다. 자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삶 전체가 그에게는 광기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혜 따위는 포기해야 한다! 이방인의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혜는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 나오는 지혜(소위 인간의 지혜)에 중성적이며 매우 지적인 단어, 지혜에 인위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단어 소포(sophon)이 쓰인 반면, 두 번째 지혜에는 소피아(sophia), 즉 인간이 비판정신을 버림으로써 되찾게 되는 지혜가 쓰였음은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지혜로 쓰인 단어는 특히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오래된 여성 단어로, 살아 있으면서 생산적인 지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사고만을 고집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시인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일행 속에 합류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미친 자, 즉 영감을 받은 자가 됨으로써 인간은 자기 안에서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p84 나는 에우리피데스가 “신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이 같은 신성, 이 같은 열광(가장 충만한 의미로서의 열광)에 도달했으며, <<박카이>>에 등장하는 합창단이 노래하는 시의 힘을 빌려 우리들까지 그리로 인도하려 한다고 확신한다


신의 정의를 묻다

p89 에우리피데스의 어떤 비극 작품도 삶의 모든 부름을 향해 열려 있는 이 작품만큼 의미심장하지 않다. 플라톤이 온 영혼을 다해 철학자이기를 원했듯이, 에우리피데스가 얼마나 ‘온 영혼’을 다해 시인이었는지를 이 작품보다 더 잘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 

(나는 온 영혼을 다해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영혼을 건 승부. 난 무엇에, 어디에, 나의 영혼을 걸 것인가? 중요한 질문이다.)

실존을 위해서 아무리 격렬하게 상반되는 요구들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는 당당하게 이 모든 요구를 감수한다. 


Chapter4 투퀴디데스와 도시국가들간의 전쟁

p93 그리스 쇠락의 대장정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명철하고 올곧은 판관이며 고대 세계, 아니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역사가 중의 한 사람인 투퀴디데스가 등장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두 인물, 니키아스와 클레온 

p95 니키아스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우연으로 하여금 자기 대신 결정을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p99 클레온은 일종의 교조주의자, 급진주의자로서, 머릿속에 이미 꽉 짜인 체계가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서 얻은 가르침이 그 체계를 비집고 들어설 여지라고는 없었다. 남들에게 끊임없이 훈계를 늘어놓는 반면, 남들의 충고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그에게서는 권위적이고 학자연하는 지식인 냄새가 났다. 뮈틸레네에 대한 그의 논고를 놓고 사람들은 그것이 “허영심 많은 교육자의 연설”이라고 평가했다. 

(강사. 말하는 사람.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느냐는 나 하기 나름일 것이다. ‘진정성 있는 강사’. 슬로건 하나 만들어 봐야겠다.)


클레온은 말하자면 비겁자가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p101 투퀴디데스는 이항대립적인 리듬으로 생각하고 글을 썼다. 


p103 그의 글에서 모든 것은 대칭적인 구조를 통해서 표현되는데, 이따금씩 ‘비대칭적’ 요소들을 삽입시킴으로써 다양화를 꾀하고 우리의 주의를 끌며, 지나치게 단조로운 말장난이 될 수도 있었을 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요컨대, 투퀴디데스는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그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내면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 대화는 지나치게 압축적이고 밀도 높으며 일견 모순 되는 것들이 집약되어 있어서 처음엔 모호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을 따라서 계속 이어지다가,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이 미로 같은 길을 함께 따라 걷기로 결심한 독자들에게 어느 순간 문득 명확해진다. 투퀴디데스에게는 단순하고 일의적인 인물이나 상황은 거의 없다. 

 각각의 존재는 항상 보이지 않는 이면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투퀴디데스의 글은 이처럼 매서운 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재화(빵, 자유, 영예 등)를 차지하느냐 빼앗기느냐, 이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때때로 논쟁의 긴장감은 대리석처럼 찬란하면서 묵직한 촌철살인 같은 문장으로 귀착된다. 사다리처럼 단순하면서 곧은 문장, 가령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던진 보석 같은 문장 하나는 백 문장 보다 빛난다. 행복은 자유 안에 깃들어 있고, 자유는 용기 안에 깃들어 있음을 안다면, 전쟁의 위험과 당당히 맞서라.” 

(행복, 자유, 용기. 이 세 단어가 한 문장안에 들어 있으면서 논리적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 나를 흥분하게 한다. 전쟁의 위험과 당당히 맞서라는, 나의 운명과 당당히 맞서라? 내 비전과 당당히 맞서라? 정도로 바꾸면 좋겠다. 

 나의 행복은 자유 안에 깃들어 있고, 자유는 용기 안에 깃들어 있음을 안다면, 주어진 운명과 당당히 맞서라. 너무 비장한가 싶기도 하다. 패러디 하기 좋은 문장!)


신을 배제하고 사실에 근거한 최초의 역사 기록

p104 투퀴디데스는 역사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 법칙은 얼마든지 이해 가능한 것이다. 그 법칙들을 안다는 것은 역사의 토대 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다. 물리학 법칙을 알면 물리적인 세계, 즉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시민들을 위해, 아테나이의 주권자들을 위해, 정치가들에게 역사라고 하는 틀 위에서 개인과 민족을 행동하게 만들어주는 법칙을 알려주기 위해 글을 썼다. 이것이 그가 미래의 인간들에게 제공하는, 미래의 인간들이 그들의 이성에 따라, 도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게 될 ‘영원을 위한 산물’,  ‘재산’,  ‘보물’이다.

 모든 학자는 무신론자일 수밖에 없다. 신을 살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p105 투퀴디데스는 레우킵포스의 말을 오래도록 숙고했다. “우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사건은 합리적인 원인의 결과로, 필연성의 지배하에서 발생한다.”

“내 저술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과 인간의 정념이 언젠가 초래하게 될 유사한 사건들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p106 역사에 대한 모든 설명은 주로 인간의 본성,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 귀착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저마다 다른 신앙, 필요, 제도를 지닌 환경에 놓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연구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조셉 캠벨이 연구한 것도 이런 것이었다. 차이를 보고, 비교했다. 중요한 일을 한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온 신경을 기울여 이 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것저것 다 따지고 보면, 결국 역사를 설명하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항상 인간,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변주를 펼치는 인간이다. 오직 인간 본성의 상대적인 안정성만이 역사 변천의 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 법칙 중의 하나를 설정하면서 투퀴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유보 조항을 덧붙인다. “인간의 본성이 지금처럼 유지된다면,” 이 유보 조항은 역사가들이 자신들이 세운 가설을 다룰 때 보이는 신중한 태도를 다른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잘 보여준다



아테나이 제국의 흥망사를 탐구하다 


이익이 인간 활동의 동기라는 관점

p109 인간은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원초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은 이 힘을 존재를 위해 절대 파괴할 수 없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이 힘은 곧 살려는 욕망이다. 산다는 것은 우선 지속하는 것이며, 존재의 안전을 강화하는 것이다. 투퀴디데스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만 죽음과 맞선다.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복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하는 것이다. 

소유와 지속, 이것이 생존 본능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익’이 될 것이다. 이익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활동을 좌우하는 동기다. 

(결혼이라는 것은 결국 둘이 함께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을 하려면 존재의 안전을 강화해야 하고 삶의 복지를 확보해야 한다. 소유와 지속, ‘이익’을 따지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편하게 살려면 살수록 더 따지게 되겠지? )

온갖 동기들이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투퀴디데스에 따르면, 대중들을 움직이기 위해,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은밀한 동력을 발동시키기 위해 이익 또는 이익의 동의어(유용성, 소득, 이점 등)를 언급하지 않는 행동가란 없다. 이러한 단어들은 그의 작품을 관류하는 키워드다. 


도시국가, 민족국가, 국가, 이런 것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익 집단, 개인들의 이해관계의 총합이다. 투퀴디데스가 보기에, 국가란 고대에 너무도 쉽게 받아들여지던 것처럼, 고유한 이해관계를 지닌 새로운 존재가 결코 아니다. 국가는 총체가 아니며 계약의 공간일뿐이다. 개인적인 이해관계 사이의 계약은 다른 어떤 틀보다 도시국가라는 틀 안에서 가장 잘 보호받을 수 있었다. 


“역사란 살고자 하는 의지 사이의 투쟁”

p112 항복하려는 자 위에 군림하면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국가가 생존한다는 것은 매 순간 닥치는 새로운 시련에 온 힘을 투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도시국가도 무기력 속에서 생존을 지속할 수는 없다”고 알키비아데스는 덧붙인다. 


p113 이렇듯 삶은 역동성이다. 하나의 민족에게는 남을 이기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만이 자신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투퀴디데스가 즐겨 쓰는 그리스어 단어 플레오넥시아(pleonexia)는 ‘이기다’와 ‘뛰어나다’를 동시에 의미한다. 

역사란 살고자 하는 의지의 전개, 살고자 하는 의지 사이의 투쟁이다. 


아테나이를 넘어서지 못한 역사 인식의 한계

p116 결론적으로 투퀴디데스의 저술은 아테나이의 성공사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민주주의와 아테나이의 영광이 실추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결국 아테나이의 역사를 통해서 그 실패를 인식하고 실패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인간 정신이 부상하는 성공의 순간이었다. 


Chapter 5 데모스테네스와 도시국가 시대의 몰락

p119 피곤에 지친 민족을 상대로 얻은 뒤늦은 승리,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와 불균등한 투쟁, 연설가로서의 재능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반항적인 기질, 적대적인 행운, 그를 이미 내쳐버린 역사에서 억지로 얻어냈다. 


말더듬이에서 명연설가로 

p120 더 중요한 건 데모스테네스만의 고유한 빛깔이라면 높은 정치적 도덕성, 특권은 남들을 위한 봉사의 대가여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 아테나이라는 국가의 영예에 대한 확고한 존중, 평화에 대한 사랑, 자폐 상태에 빠진 아테나이의 정책에 대한 반대 등을 꼽을 수 있다. 


p122 그의 초기 연설들은 청중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는 결국 민회에 모인 사람들이 가장 경청하는 연설가로 우뚝 섰다

(비록 초기엔 웃음거리였지만 사람들이 가장 경청하는 연설가로 서게 됐다는 점이 부럽다. 처음엔 기대주였다가 실망을 안겨주는 연설가보다 훨씬 낫다.)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와 거짓 평화 

p125 긴 시간을 두고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다시 말해서 때가 올 때까지 사건의 추이를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이때다 싶은 순간이 오면 번개같이 치고 들어가는 비상한 능력이 있었다. 

기회는 순간이라고 이야기 했던 대목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기회를 포착하는 모습이 꼭 번개 같이 치고 들어가는 비상한 능력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특히 겉으로는 평화를 추구하면서 실제로는 전쟁을 하는 데 능했다. 


필립포스의 야심을 폭로하다 

p129 두 눈을 크게 뜨고 우박이 떨어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저 그 우박이 자신들의 밭이 아닌 남의 밭에만 떨어지기를 비는 사람들 같다. 우박의 방향을 바꾸는 일, 누가 도대체 그 일을 생각한단 말인가? 


아테나이의 마지막 투쟁가 

p132 그는 아테나이 민중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p134 내가 생각하기엔 속 좁고 치졸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위대하고 참신한 대담성을 기대할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이란 그들의 습관과 어울리게 마련이다. 

(감정도 습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탐구할 때 감정적 대처 또한 바라볼 줄 알면 좋겠다. 내가 습관적으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그뿐 아니라, 나는 내가 여러분에게 이 같은 악습을 알려줌으로써 악습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솔직함이라는 덕목을 모든 주제에 대해서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만 해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민주주의의 몰락, 전제 왕정의 부상

p139~141 이소크라테스는 “당신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야만인 모두에게 선의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아! 그럴듯 하나 문장은 어디까지나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노예 상태로 사느니 죽음을 택한 자유주의자

p141 바르바로스들의 모든 지배 방식에 맞서서 아테나이는 도시국가의 민주정 형태를 제시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인본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그리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p142 데모스테네스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탐구할 대상이며, 분열의 상징이다. 그가 단순히 웅변에 능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자유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그를 영웅으로, 페르시아의 첩자로, 소박한 변론가로, 심지어는 성인으로, 아무튼 상당히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해왔다. 그가 추앙을 받건 수모를 당하건, 여하튼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Chapter 6 플라톤 정치적 대망

p145 “친애하는 호메로스여, 어떤 도시가 자네 덕분에 더 나은 통치를 펼쳤는가? 어떤 사람들이 자네 덕분에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했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호메로스를 필두로 하여 시 전체에 대해서 내린 그 유명한 사망 선고를 접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배울점이 있다면, 바로 내가  쓸 책이 어떤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킬 것인가이다. 고민이다. 삼십세가 쓸 수 있는 책, 아니 삼십세가 아직 쓰지 않은 책, 그런데 내가 쓸 수 있는 책. 그것을 쓰고 싶다.)


정의로운 도시를 만들겠다는 야심가 

p148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났으며, 도덕은 강자를 억누르기 위한 약자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형태의 통치체제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체제는 귀족정이다. 


p149 플라톤도 이곳으로 온다. 그는 전적인 신뢰로 소크라테스를 대한 최초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적인 반박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근사한 놀이인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p150 아테나이인들은 기원전 405년에 마지막 함대마저 잃고 말았다. 60척 3단 노선들이 그물망에 걸렸으며, 3~4천 명의 포로들이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그날 밤 아테나이에서는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테나이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살아 남은 자신들을 위해서는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이 사건을 다룬 한 역사가는 기록했다. 


p155 스승을 되찾으면서 플라톤은 그때까지 거부해오던 험난한 정치 참여의 길로 들어선다. 노년에 쓴 같은 편지에서 그는 청년 시절 자신의 우유부단함, 흔들림과 그 출구를 고백한다. 그는 또한 훗날 그의 모든 행동, 즉 철학적, 정치적 행동의 틀이 될 적절한 형식도 제시한다. 

 “나는 국가의 해악은 순수하고 진정한 철학자 종족이 권력을 잡게 되거나, 국가 지도자들이 신의 도움으로 진정으로 철학에 입문하게 될 때까지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욕망에 저항할 수 없이 강렬하게 이끌린다.” 


p156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며,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유일한 재화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가 행동에 돌입하기에 앞서서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역설 중의 하나 (“불의를 감내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는 자보다 훨씬 행복하다” 이 역설은 소크라테스의 역설인 동시에 오르페우스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에 맞추어 정립해야 할 것이다. 


아카데메이아, 정치 인재 양성소

p157 플라톤의 학당, 고대 말엽에 생겨난 이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에너지의 보고였다. 이곳에서는 말하자면 폭발적인 힘을 제조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고대를 계승하게 될 새로운 시대를 주닙했다. 이 새로운 시대란 기독교 세계를 의미한다. 


쉬라쿠사이에서 추방당한 철학자

p158 시켈리아에서는 다른 하늘, 다른 경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켈리아는 나에게도 다른 하늘, 다른 경험을 선사 해줄까? 그렇겠지. 기대된다. 


p159 플라톤의 저술에는 소크라테스를 제외하면 디온만큼 섬광을 보이는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국가>>, 아테나이 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 

p162 그가 지극히 엄정한 사고력과 상상력으로 도시의 혁신, 시민 재교육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도는 궁극적으로 인간 영혼을 구원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인류 역사 내내 지속 되어왔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이 실패를 실패로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인류의 새로운 출발을 독려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에우리피데스에 대해서도 비슷한 언급을 했는데, 요컨대 역사에서 새로운 시작이 아닌 실패나 종말은 없다

(나의 역사를 다시 정리할 때 쓸 수 있는 문장이다. 나는 실패가 많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들이었다. 내가 나의 내적사건을 정리하면서 ‘실패’에 집착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봐야겠다. 이제 내게 일어난 내적사건들을 실패로 바라보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바라봐야겠다. 아, 이 짧은 문장을 통해 내 삶이 더 아름다워진 것 같다.)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정의로운 국가

p166 교회의 군사들, 바꿔 말해서 사제들은 전적으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규정한 카톨릭교회에서 통용되는 청빈 서약, 정결 서원 등이야말로 재산과 여자의 공동 소유만큼이나 반자연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는 어쨌거나 돈이라는 미끼 없이, 또 여자라는 매개 없이, 개인으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해 전적으로 봉사하도록 한다는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 


p169 인간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인간을 만든다. 안정된 세기들이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플라톤이 <<국가>>를 쓰면서 민주주의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세기로부터 여러 세기가 지난 후, 민주주의를 향한 행보는 안정된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코뮌과 더불어 보란 듯이 재개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1789년 .......... 1848년에도....... 계속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를 뒤흔든 열흘......”로 이어진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Chapter 7 플라톤식 아름다움과 환상

p173 “우리가 사는 세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탐구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의 눈이 보는 것, 우리의 귀가 듣는 것, 이것은 모두 실재인가? 아니, 그것은 실재 그 자체인가, 아니면 실재의 가상에 불과한가?

 플라톤은 실재, 즉 상식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감각적인 것, 색채, 형태, 소리의 세계를 사랑하는 시인이었다. 


p174 이렇듯 향긋한 나무와 풀 냄새가 플라톤의 마지막 산책, 마지막 탐구에 동반한다. 


p175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는, 언어의 마술사 플라톤의 붓끝에서 아이스퀼로스나 판다로스의 시 세계에 비할 만큼 휘황찬란한 광채를 발한다. 


동굴의 비유, 이데아의 철학

p178 실제적인 존재들을 바라보기 위해서 포로들은 우선 동굴, 즉 자신의 육체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바꿔 말하면 죽어야 한다. 감각적인 세계로부터의 이탈은 노력과 고통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를 진정한 세계로 이끄는 “험난하고 바위투성인” 오솔길은 철학적 성찰, 변증법적 방식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혼, 영혼의 고귀한 부분, 즉 이성이 감각의 증언을 떨쳐버리고, 험난하고 기나긴 수련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범, 즉 완벽한 형태를 깨닫도록 인도한다. 우리가 실재라고 여기는 물체들은 이 전범의 조악한 모방품에 지나지 않는다. 


p180 플라톤의 철학은 관념철학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념철학과는 다른 이데아, 즉 영혼만이 알 수 있는, 또는 다시금 알아볼 수 있는 영원한 본질의 객관적인 존재에 관한 철학이다. 우리의 영혼은 이 같은 천상의 존재들과 어울려 살다가, 플라톤이 영혼의 감옥이라고 부르는 것(그보다 앞서서 퓌타고라스 학파가 그렇게 주장했다), 즉 맹목적적이며 필연적으로 소멸하게 되어 있는 우리의 육체 속으로 추락했다. 


감각의 세계와 관념의 세계

p181 이성은 날개 달린 두 마리 말을 정면에서 몰아야 하며, 신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따라서 이 말들을 하늘로 올라가게 해야 한다. 영혼들의 행렬은 그러므로 영원한 이데아, 즉 자체로서의 아름다움, 자체로서의 정의가 절대 속에서 머물고 있는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야 한다. 


육체와 감각적 삶의 부정

p185 “나는 저승에서 왕으로 지내는 것보다, 지상에서, 태양 아래에서 가난한 농부를 돕는 날 품팔이 일꾼으로 사는 편이 더 좋다.”

 이 한마디는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를 더할 나위 없이 잘 요약한다.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오래전에 죽음을 맞은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 안에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p186 그렇다. 새로운 소크라테스, 죽음을 넘어선 플라톤 안에서 사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자신인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미래인 플라톤은 지상에서의 삶은 “죽음의 학습”에 불과하다고 힘을 주어 주장한다. 인간의 끈질긴 희망, 가장 확실한 존재 이유는 내세에 있다. 


p187 우리는 일단 우리가 죽어야만(이성이 우리에게 그렇게 경고한다)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한 것, 즉 지혜를 향유할 수 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는 삶. 일단 내가 죽어야만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분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내가 죽어야 할지, 내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엄청 팔딱거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대가가 될 수 있을까?) 


<<파이돈>>,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려는 시도 

p190 사실상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제시되는 논리라기보다 대담에 참가하는 자들의 충실함이다. 


신비주의와 금욕주의 

p193 진정한 철학자의 영혼은 자신의 해방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정념과 쾌락, 슬픔, 두려움을 삼간다네. 커다란 기쁨과 커다란 고통, 끝을 모르는 두려움과 욕망 뒤에서 병에 걸리거나 재산을 잃는 따위의 일상적인 해악만이 아니라 가장 심각하고 고악한 해악을, 그나마도 그런 것을 겪는다는 느낌조차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겪게 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 


p194 플라톤이 저 유명한 소마-세마, 즉 육체는 곧 무덤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이탈리아의 퓌타고라스 학파를 통해서였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무덤”이라고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말한다. <<고르기아스>>는 <<파이돈>>보다 먼저 쓰인 대화편으로 소크라테스와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대화들 가운데에서는 마지막이지만, 플라톤의 신비주의가 등장하는 저술로는 최초다. 


죽음과 내세라는 철학적 주제

p195 현재의 삶,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은 선명함과 밝음이라는 질서를 갈구하는 데 반해서 우리는 일종의 죽음-무질서 속에서 산다. 질서를 소유하고 있는 영혼은 실존을 소유한다. 자기 안에 실존이라는 재화를 간직하고 있는 영혼은 선하며 행복하다. 


기독교 탄생의 예고 : 영혼을 심판하는 신 

p198 방종과 방탕, 자만심과 무절제로 가득 찬 영혼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게 마련이지. 


p201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발생 이전 마지막 몇 세기 동안의 혼란과 무질서, 그 후로도 발생하게 될 또 다른 혼란과 무질서의 난맥상 속에서 인간의 절망에 매달릴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확신이며, 가장 효과적인 위안이었다. 


아테나이의 절망이 낳은 플라톤 철학

p202 그러나 어린 나무가 저항할 여지가 없는 강력한 힘으로 땅을 헤치고 나오는 것처럼 솟아난 이 문명은 도약에도 불구하고, 솟아오르는 힘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창의력에 있어서 불충분함, 결핍, ‘기능 이상’ 등 대지와 하늘을 정복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신호들을 보여왔다. 


육체 노동에 대한 경멸

p206 그렇지만 진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p207 요컨대 아테나이에서 노예제도는 경제 발전이라는 필요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p208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적 태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을 다른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순수한 아름다움의 관조, <<향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기독교 신학에 편입된 플라톤

p213 <<고백론>>의 다음 장면은 너무도 유명하다. 정원에서 기도 중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에서 노래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들은 것 같았다. 아이는 “이걸 집어서 읽어봐, 이걸 집어서 읽어봐”라고 노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얼마 전부터 그의 손을 떠나지 않던 바울 사도의 책을 집어들고 아무 데나 펴서 읽었다. “진수성찬이나 요란한 연회, 성관계, 난봉질을 금하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고 더 이상 육욕을 만족시키려고 애쓰지 말라!”


p214 이날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흑백논리를 멀리하고, 방탕한 생활을 청산했으며, 어머니와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산속에 은둔하면서 그리스인들이 ‘철학자의 삶’이라고 부르던 삶. 이미 기독교 수도사들의 삶이 되어버린 삶을 영위했다. 


가장 그리스적인 산문 작가 

p216 그리스어에서 ‘시’라는 말은 시를 의미하기에 앞서 발명과 창조를 뜻한다


대화편, 진실을 찾는 영원한 속삭임

p220 플라톤의 대화편은 엄격한 논증이 지니게 마련인 인위적인 건조함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의 대화편은 생기발랄한 리듬이며, 또 다른 하나의 대화, 즉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사고가 서로 추격하고 겹치고 대체되면서 진실을 찾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탐구를 계속하는 대화의 아롱거리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의 저술을 감각적으로, 그러니까 한입 깨물면 깔깔한 입안에 달콤한 즙이 흥건히 고이는 잘익은 과일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생한 그리스어가 주는 관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플라톤의 문장이 상상을 뛰어넘는 희열로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면, 자신의 안에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언약을 일깨우며, 자신의 존재 전체(영원히, 아니 단 한순간만이라도 분리될 수 없이 하나가 된 영혼과 육체)를 사로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멸을 만들어 내는 그의 문장만이 인간의 부조리한 몽상(영원한 삶)을, 마치 배고프면 한입 깨물어 먹는 빵조각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준다는 것도 느낄 것이다. 


p221 이성이 이성의 결여, 즉 정신착란을 의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죽음은 어디까지나 죽음, 즉 무다. 


Chapter 8 아리스토텔레스와 생명체 

p225 천재란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걸까? 

자신들의 직업, 즉 철학하는 일에 필요한 능력을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렸음을 의미한다. 천재라는 말은 그러니까 뛰어넘기, 새롭게 발견하기, 즉 창조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철학이 일종의 처세술이라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변화시킴으로서 이 기술을 구체적으로 바꾸어놓았으므로, 두 사람 이후의 인간들은 그전의 인간들과 같을 수가 없게 되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비판한 아카데메이아의 학생

p227 “나는 플라톤을 좋아한다. 하지만 진리를 더 좋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 대해 플라톤은 “어린 망아지가 엄마 엉덩이에 발길질 해대는 격”이라고 평했다. 


플라톤은 예순 살이 넘었어도 자신의 철학을 고인 물처럼 가두어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정립한 철학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 가치를 확인하거나 문제를 제기했다. 스승과 제자의 우정은 이처럼 수렴되거나 상충하는 비판을 통해서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닮고 싶은 부분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할 수 있으면 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열려있어야지. 열리자. 나에 대한 비판, 문제제기에 대해 가시를 세우는 비겁함(?), 못난 짓은 그만두자.)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 

p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왕은 이제 열네 살이 된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전담할 스승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점찍었다. 


아테나이의 영원한 이방인

p231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케이온에서 10여 년간 가르쳤다. 알렉산드로스의 사망으로 그는 또다시 아테나이를 등져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그정도로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아테나이인들의 중오는 대단했다. 


자연의 합목적성을 탐구하는 박물학자

p232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과 그 안에서 서식하는 모든 존재를 알고 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 이 세계의 의미를 꿰뚫어 간파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려는 불같은 지적 호기심이었다. 


p235 그에게 영혼이란 모든 동물의 생명의 원칙이다. 


p236 생명체들이 타고난 이 운명, 궁극적인 존재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은 말하자면 매 순간 이 세계가 지닌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 본성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

p238 현대의 저자들이 어깨를 으쓱대면서 찾아내는 오류란 늘 같은 것들이다. 열 가지 남짓한 오류들이라...... 수천 가지 항목 중에서 고작 열 개 남짓한 오류라니.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방대한 처녀지인 생물계, 쥘 베른에 의해서 마침내 넘어서게 된 세계보다 훨씬 광대하고 훨씬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를 다루면서 불과 열 개 정도의 실수만 남겼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성과인가! 


뛰어난 관찰과 해부학적 묘사 


인간에게 귀착되는 동물론

p250 뛰어나게 신성한 존재(즉 인간)의 기능은 사고와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능은 인간의 하체가 무거웠더라면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게는 합리적인 사고와 상식의 유연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무게와 육체적인 요소가 승승장구하면 몸은 어쩔 수 없이 지면을 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연은 네발짐승들에게 팔과 손을 주는 대신 몸 아래쪽에 몸을 받치기 위한 앞다리를 주었다. 이렇게 해서 영혼(생명의 활력)이 몸의 무게를 받칠 수 없었던 동물들은 네 개의 발을 가지게 되었다. 


p252 다른 동물들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수단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들이 이 수단을 다른 수단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손은 모든 것을 움켜쥘 수 있고, 오래도록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최초의 동물 분류 작업

p260 “나에게는 린네와 퀴비에가 각각 방법은 다르지만 일종의 신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옛날 예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하면 초등학생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찰스 다윈이 한 말이다. 


생명체에 관한 학문의 창시자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철학자 

p262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체가 단조로운 건 사실이다. 그의 장점이라면 과장이라고는 없이 간결하고 사물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강력한 현실주의자다. 


p263 하지만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동시에 친근하고 익숙한 실존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생명체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근원, 즉 욕망에 따라 자손을 번식해나가는 삶, 배고픔을 느끼는 삶, 허기를 달래고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치열한 삶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p264~265 이러한 주장의 진실은 유년 시절의 인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즉각적으로 간파할 수 있다. 어린아이에게서는 장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나 떡잎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시기를 놓고 볼 때, 어린아이의 영혼과 동물의 영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들에게서 어떤 특성은 완전히 동일하며, 어떤 특성들은 상당히 비슷하며, 어떤 특성들은 상동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전혀 정신 나간짓이라고는 할 수 없다. 


Chapter 9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성 또는 우애에 관하여 

p269 역시 혜성같이 나타나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며 이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 이전에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난제를 대번에 해결하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도저히 빼도 박도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진 사건의 추이를 돌연 돌파해버리며,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로 인한 극도의 혼란이 막아놓은 길을 뻥 뚫어버린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특출한 인물 중의 하나다.


p271 그는 말하자면 군주가 통치하는 근대국가를 탄생시켰다. 


필립포스와 올륌피아스의 아들

p272 정복에 나선 그는 자신의 외교적 수완과 교활함이 뿌려놓은 열매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무르익기만을 기다렸다가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으로 그 열매를 줍기만 하면 되었다. 


p273 그를 필립포스의 아들이라기보다 어머니 올륌피아스의 아들이었다. 

그가 물려받은 지능이 그만의 독자적인 열정과 만나, 그 열정이 정한 방향으로 뻗어나가 마침내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올륌피아스의 아들에게 지성이란 단지 광명이며 진로에 대한 확고한 인식, 마음먹은 행동을 실천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그에게 지성이란 따뜻한 온기이며, 태양열이 그러하듯이 활력을 창조하는 데 일조하는가 하면 파괴에 가담하기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열정적인 지성은 가장 높은 강도, 즉 화상 정도가 아니라 대단한 불길을 낳는 불덩어리였다.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보게 될 원정 기간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의 계획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출발하여 끊임없이 이 계획을 확대하고 새로이 발견하며, 이와 동시에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해간다. 


p274 요컨대 알렉산드로스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 


유럽의 새로운 정복자 


페르시아 원정, 정복자에서 해방자로 

p277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그는 장병들과의 첫 대면에서부터 자신의 신념을 전파하는 재능을 타고났다. 

(신념. 알렉산드로스가 신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실력. 그리고  실력을 갖추기 위해 타고난 재능, 열정, 노력 등이 아니었을까?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가지고 또 이기는 결과를 낳는 것 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것 같다.) 


p281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곳에서 오래된 신전들을 복구하고 새 신전을 건축하였으며, 축제를 신설하고 행사 행렬을 이끄는가 하면 굴복한 도시들에게 과거의 특권을 되돌려주기도 했다. 여러 세기 동안 유럽과 아시아, 헬라스인과 바르바로스가 한 몸이 되어 뒤섞이던 유서 깊은 항구들에서도 이민족 간의 우정, 스토아학파적인 ‘조화’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추구한 꿈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p282 알렉산드로스는 이 기회에 가장 덜 근사하고 가장 덜 낭만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이집트 정복

p287 그가 이집트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떠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디오뉘소스 신의 무녀인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륌피아스는 자신의 꿈속으로 또 침대 속으로 그녀를 찾아오는 신의 환영을 늘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과연 누구의 아들일까?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신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의 소유자 알렉산드로스는 제우스-암몬의 성소를 찾아가는 이 여정을 계획한 것이었다. 


다리우스의 죽음

p290 마케도니아 쪽에서는 불과 1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온 데 비해 페르시아 쪽에서는 수십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역사는 뒤바뀌었다


p294 동쪽으로 진군, 인도까지 가다


그리스 인본주의와 불교 인본주의의 만남 

p296 그리스와 인도의 만남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p297 불교가 지닌 금욕적인 특성은 소크라테스로부터 파생되어 그리스에서 확산되기 시작하여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이미 견유학파와 더불어 만개했던 금욕주의와 희한하게도 잘 어울렸다. 이 경향은 또한 플라톤의 금욕주의와도 썩 잘 결합했다. 


“인간이 사랑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수행자들 중의 한 사람이 “모든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권능 있는 자가 된 후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자”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데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p298 이렇듯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를 지날 무렵에는 그리스식 지혜와 힌두식 지혜가 마주치고 있었다. 


그리스인과 이민족의 통합을 꿈꾸다 

p302 여러 해가 지났다. 하지만 아주 여러 해는 아니었다.(운명이란 초라하다.)


마케도니아의 왕, 그리스인들의 수호자, 이집트의 파라오, 아시아의 왕, 이 모든 칭호는 백성들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준 것이었다. 


p303 알렉산드로스는 어디에서나 알렉산드로스여야 했으며, 자신에게 속한 모든 지역, 즉 알려진 세 개의 대륙에서 똑같고 유일한 알렉산드로스여야 했다. 그는 자신을 통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정복했으며 자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민족의 통합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는 이들 민족 사이에 화합이 지배하기를 원했다. 그리스인들과 바르바로스들 사이의 화합. 


p304 알렉산드로스가 왕의 친위대에 페르시아 제후의 아들들도 선발하겠노라고 하자 마케도니아인들의 참았던 분노는 드디어 폭동으로 표면화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저러한 음모를 엄격하게 진압했다. 


p305 그보다는 위대함의 절정에 도달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지극히 정당한 자만심이라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도대체 이 새로운 정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p306 그런데 도대체 바르바로스란 누구인가? 이 용어는 원래 그리스어를 못하는 사람, 목에서 “바르-바르-바르” 소리를 내는 사람, 다시 말해서 짐승의 울음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르바로스는 비그리스인일 뿐 아니라 이방인, 상스럽고 무식한 저급한 존재, 아예 노예로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p309 모든 땅을 이성이 지배하는 살 만한 곳으로 만들며, 모든 인간들을 똑같은 정부의 똑같은 통치(똑같은 나라의)를 받는 시민으로 만들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p310 그는 또한 보편적인 평화, 화합, 결합, 그리고 모든 인간들 사이의 원활한 교류를 완성시키고자 했다. 


p311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스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 알렉산드로스가 품고 있던 가장 대담한 꿈이었으며, 이집트 성소에서 은밀하게 신의 부름을 받은 그가 고대 사회, 그가 정복한 두 동강 난 사회의 단일성을 위해 내건 대원칙이었다. 


p312 신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아버지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선한 자들을 특히 아끼신다. 

 여기서 보듯이, “모든 인간은 공통적인 아버지”인 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와 비그리스의 구분이 선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구분으로 대체된다. 

(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구분. 인간이 만들어낸 구분.)


두 얼굴 : 형제애와 불관용

p317 동방과 서방이 최초로 형제애를 맺는 예식은 기원전 324년 2월에 거행되었으며, 이는 여러 민족들에게 알렉산드로스가 보편적이고 지속적이기를 바랐떤 화합과 우애의 징표였다. 


p318 알렉산드로스와 스승의 결별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사이의 태생적인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제자의 거부에서 기인한다. 


p319 알렉산드로스는 길들여지지 않아 거칠고,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청소년이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므로, 평생을 야성적인 청소년으로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거친 야수라도 천재적인 야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인본주의에 사로잡힌 야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교육했고, 그리스 문명의 독자성이라는 개념ㅇ르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그를 실망시켰다. 알렉산드로스는 교육 덕분에 그리스 문명에 심취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와 헤어진 이후로 그를 형성하고 교육한 것은 전쟁과 비그리스 세계의 정복 계획이었다. 


p324 알렉산드로스는 누가 뭐래도 공간의 정복자였따. 그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영원히 파괴했으며, 그 대신 이집트, 페르시아, 인더스강, 펀자브 지역까지 자신의 제국을 넓혔다. 그는 후계자들에게 그 당시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제논은 그 이후에 등장한다. 제논은 공간의 정복자가 아니라 인류 공동체의 정복자다. 하긴 알렉산드로스도 인류 공동체의 정복자였다. 그 후 타르수스의 파울루스가 나타나 “신 안에서는 인간들의 어떤 특별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파울루스와 예수의 사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할례를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 유대인과 그리스인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형제애가 이렇게 해서 활짝 문을 열었다. 


제왕의 죽음

p325 6월 13일. 올뤼피아스와 필립포스의 천재적인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갑작스럽게 오른 열을 이기지 못하고 평균 수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서른세 살도 채 안 된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현대인들의 성숙이 유독 느리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서른세 살도 채 안 된 나이에 죽음을 맞이 했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다. 서른 살인 내 나이가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다.)


Chapter 10 질서라는 탈을 쓴 무질서, 두 명의 프톨레마이오스 

p330 새로운 시대를 장식하는 가장 놀라운 현상은 민중의 퇴장이다. 


제국의 분열과 후계자 전쟁

p333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2세, 이 두 왕은 어느 모로 보나 감탄을 자아낸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즉 구원자로 알려진 포톨레마이오스 1세는 입지전적인 인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의 새로운 왕, 프톨레마이오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세기의 악녀 아르시노에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의 전성기 

p347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문화에 완전히 문외한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스승, 그러니까 문헌학자인 제노도토스나 최초로 그리스어 사전을 펴낸 시인인 코스의 필레타스 등 박식한 교수들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p350 그리스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희한하고 동양적인 사고로 똘똘 뭉쳤으며, 로마 제국이 영리하게도 제국 건설에 이용한 이 신비주의적이며 다분히 정치적이고 감상주의적인 숭배가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활짝 꽃피었던 것이다. 


Chapter 11 책의 전성시대, 알렉산드리아 : 도서관과 박물관 

헬레니즘 문화의 꽃, 알렉산드리아 

p356 알렉산드리아의 자랑거리는 항구와 저 유명한 등대다. 


p357 등대는 곧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아랍인들의 첨탑도 이 등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하늘을 이 등대의 불빛보다 찬란한 두 개의 빛으로 수놓았다. 시와 과학의 불빛이었다. 


새로운 문화 수도 

p358 견유학파,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등 주요 학파의 대표들은 모두 프톨레마이오스의 부름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p361 “닭장 속에 갇혀서 주는 먹이나 받아 먹는 가금류”라고 표현했던 교수-연구원들은 약 100명 정도였다. 박물관의 경영은 뮤즈의 제사장과 총재가 맡았다. 


최초의 도서관

p362 이집트는 오랜 문화 국가이며 따라서 많은 소장품을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의 파라오들도 개인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중 한 도서관에는 이집트 문자로 ‘정신의 피난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p364 알렉산드로스 이후에는 파피루스와 양피지의 대량 생산, 그리고 특히 식견 있는 노예들이 필경사로 대거 진출함으로써 책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으며, 덕분에 덜 비싼 값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서기 이후로는 소설의 시대가 열렸으며, 이는 독자의 증가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발전과 알렉산드리아의 쇠퇴 

p367 세워진 지 한 세기하고도 반이 지났을 무렵 박물관과 도서관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p369 기독교의 발전은 박물관 쇠퇴의 주요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서력기원이 시작된 초기 몇 세기 동안 박물관에서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던 과학 교육은 다신교 신앙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휘파티아는 4세기 말엽부터 5세기 초엽까지 강의했다. 그런데 사제들에 의해서 광신도가 된 대중들은 415년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휘파티아를 강제로 끌어내 사지를 찢은 다음 시신을 조각 냈다. 퀴릴로스 주교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이교도 살해 사건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와 시인들

p370 그런데 여기서 박물관과 도서관, 두 기관은 설립 초기에는 힘 자라는 데까지 모든 그리스 문명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p372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란 사실 간단했다. 학문은 학업의 결실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학문의 발전에 필수적인 천재성은 이 과정에 하나의 사슬처럼 편입되어 다음번 사슬이 이어질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리스토텔레스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탐구로서의 학문의 길을 열었다. 무한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이 같은 탐구는 사실을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p373 기원전 3세기와 2세기 무렵에 활약한 위대한 수학자들은 대개 박물관에 살면서 강의를 하곤 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면 단연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를 꼽을 수 있다. 


Chapter 12 알렉산드리아의 과학 : 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

p379 과학은 이오니아에서 기원전 7세기경 탈레스와 더불어 태어났다. 고전시대에는 데모크리토스, 힙포크라테스와 코스 학파, 투퀴디데스 등과 더불어 과학은 활활 타올랐다. 알렉산드리아 시대, 곧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는 과학이 가장 활발하게 꽃핀 시기였다. 그리스 문명의 말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인간 영혼의 에너지, 발명가로서의 천재성, 대중들의 호기심 등 고전주의 시대에 신전의 건축, 찬란한 비극 작품의 탄생 등의 예술적 창조를 이끌었던 이 세 가지 요소들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열정으로 과학적 발견에 투자되었다. 


p380 연구를 통해서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사람들이 바로 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현대는 누가, 어떤 직업군이 인류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


천문학의 발달 


퓌타고라스 학파, 지구는 둥굴다는 최초의 주장

p382 바로 지구의 형태와 지구가 우주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문제였따. 


p383 퓌타고라스 학파는 기원전 6세기 무렵에 벌써 최초로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p385 이렇듯 퓌타고라스 학파는 약 2세기 동안 여러 단계를 거쳐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자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가설 : 지구는 자전을 하고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과학보다 강한 종교적 믿음 

p389 이들 학자들은 아리스타르코스의 가설은 가상, 즉 ‘현상’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현상을 구해내야 한다”고 힙파르코스는 말했다. 이는 우리가 관찰한 대로의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의 표명으로, 정당한 것이다. 


지구 중심설과 지구 부동설 

p392 1615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던 갈릴레이는 로마에서 열린 종교재판에 참석해서 그 이론을 포기하겠다는 언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돈다는 제안은 잘못 된 것이며 이단이라고 만천하게 공표되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은 금서 목록에 올랐따. 


천문학, 점성술에 자리를 내주다. 

p393 나는 칼데아의 종교였다가 헬레니즘 문화 지역으로 옮겨왔으며, 수학자들을 비롯한 쟁쟁한 학자들이 연구에 몰두하던 분위기에 덩달아 학문 흉내 내기에 열을 올렸던 점성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Chapter 13 지리학 : 퓌테아스와 에라토스테네스 

p397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은 바야흐로 탐험의 시대, 지리 연구의 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이루어진 수많은 여행 중에는 상거래를 위한 여행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목적을 위한 여행도 적지 않았다. 지리학자들은 이 같은 여행을 토대로 정확한 세계 지도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p398 한 명은 여행가이자 대륙 발견자, 해상 항로 탐험가인 동시에 학자이 퓌테아스이며, 다른 한 명은 수학자인 동시에 지리학자, 지도 제작 전문가인 에라토스테네스다. 


새로운 땅과 바다의 발견자, 퓌테아스 

p398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에서 인도를 발견할 무렵, 그는 서방에서 주석의 바다와 호박의 바다를 발견한다. 퓌테아스의 목표는 주석 항로와 호박 항로를 발견하고 주석의 바다(오늘날의 도버 해협)와 호박의 바다(오늘날의 북해)에 인접한 나라들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p399 퓌테아스는 주석의 바다가 가까워짐에 따라 진행 속도를 늦추었다. 그는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향로에서 마주치게 되는 섬들을 일일이 기록했으며,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름도 적었다. 이들의 언어로 미루어 맛살리아 후배지로 켈트족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섰다고 짐작했다. 이로써 그는 골 지역을 일주한 최초의 그리스인이 되었다. 이 시기라면 카이사르가 등장하기 3세기 전임을 명심해야 한다. 


p401 ‘바다 허파’라는 표현은 바다가 ‘숨’을 내뿜어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불투명한 안개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된다.


p402 퓌테아스는 헤로도토스나 다른 연대기 작가들처럼 바르바로스들의 풍습에 대단한 호기심을 보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퓌테아스가 매우 정확한 관찰자였으며, 그의 저술은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 정석으로 자리잡았다. 


p403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 모험 소설 작가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는데, 그들은 퓌테아스가 묘사한 여러 나라들을 자신들이 상상하는 소설의 무대로 활용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자기 시대에만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두세 명의 인물을 더 소개함으로써 당시의 모험 열기와 지리적 호기심 열전을 펼쳐 보일까 한다. 


또 다른 탐험가, 에우튀데모스와 힙팔로스 


지구 둘레를 잰 에라토스테네스

p405 에라토스테네스는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대표적인 인물이며, 지리학만으로 제한하기에는 너무도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p408 다른 한편으로 에라토스테네스는 지표면에서 육지와 바다의 비율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추측했다. 


율리우스 달력의 고안자 

p412 그 밖에도 에라토스테네스는 이른바 율리우스력이라고 하는 달력을 발명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1세기에 사용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달력 체계는 1년을 365와 4분의 1일로 잡으며, 윤년을 두었다. 다른 달력 체계에 비해 1년이 족므 더 길지만, 무질서하게 난립했던 고대 다력 체계들 중에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Chapter 14 의학 : 아르키메데스, 헤론, 그리고 증기기관에 관하여 

박물관에서 최초로 의학을 강의한 헤로필로스 

p416 헤로필로스의 의학 강의에는 인간 사체의 공개적인 해부가 곁들여졌다는 증언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대단한 혁명이었으며, 미래의 진보를 약속해주는 상징이었다. 


p417 그는 동맥과 정맥을 구별했으며, 동맥과 정맥 모두가 혈액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문을 강력한 힘으로 열어젖히자 광대한 새로운 지평이 보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생리학의 아버지, 에라시스트라토스 

p419  그는 뇌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했으며, 뇌의 기능에 주목했다.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을 최초로 구분해낸 사람도 에라시스트라토스였다. 그는  또한 동맥과 정맥을 구분하면서, 동맥에는 맥박이 있는 반면, 정맥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새 한 마리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아무동물이나 한 마리를 금속 용기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먹이를 주지 말고 그대로 둔 다음에 다시 녀석의 무게를 재면, 먼젓번보다 훨씬 가벼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실체에 있어서 상당한 증발이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이 증발은 눈이 아니라 이성적인 추리에 의해서만 인정할 수 있다. 


p420 그 뒤를 이은 세기에도 그리스 의학은 결코 완전히 잊히지 않았다. 의학 연구는 과학의 다른 분야들과는 달리 로마 시대에도, 중세에도 맥이 끊어지는 일 없이 지속되었다. 일시적인 변덕으로 내동댕이치기에는 그 유용성이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p421 미신이 판을 치던 중세에도 위대한 의사가 배출되거나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기란 없었다. 

인간이 이루어낸 정복이니 인간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기술자들의 본고장이 된 알렉산드리아 

p422 그리스 과학은 의학이나 생물학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도, 산술과 기하학, 천문학 지도 제작 등에 많은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인류 문명에 공헌했다. 이 지식이란 따지고 보면 엄격한 논리학을 토대로 삼고 있으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너무도 조화롭고 너무도 구속력 강하며 인간 정신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너무도 잘 부합하는 일체를 이룬다. 


p423 유서 깊은 이집트(또는 동방)의 경험주의와 그리스 합리주의의 만남(바닥을 치고 도움닫기를 하는 마지막 기회), 이질적인 것들끼리의 융합은 그리스 학자들의 기계 좋아하는 전통을 소생시켰을 것이다. 

(새로운 발견을 위한 학습. 지식은 지식으로 연결되어 신지식이 된다. 연결, 고리의 중요성.)


아르키메데스, “지렛대만 주면 지구를 들어올리겠다”

p423 제2의 오뒷세우스라고 할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87년에 태어났다. 

 적분 방식이라고 하면 이보다 적어도 2천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는 방식이 아닌가. 퓌타고라스 학파가 이루어놓은 성과물과 이를 완성시킨 에우클레이데스의 업적, 그리고 그와 동시대 인물들에 의해서 알려진 새로운 발견과 더불어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적 방식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공간에 대한 지식을 물체의 이론적 형태, 다시 말해서 완벽한 형태, 곧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지식으로 승화시켰다. 물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모두 기하학적 형태에 근접하며, 따라서 우리가 물질세계에 제대로 반응하기 위해서는 그 형태들이 지니는 고유한 법칙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p424 그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간단한 기계’ 다섯 가지, 즉 제릿대, 쐐기, 도르래, 무한 나사 그리고 권양기를 모아서 하나의 이론을 만들었다. 


p425 기원전 212년에 로마인들이 쉬라쿠사이를 포위하자, 쉬라쿠사이가 낳은 가장 영광스러운 아들들 중의 하나인 지혜로운 아르키메데스는 일련의 전투용 기계들을 발명했고, 이 때문에 로마의 쉬라쿠사이 침공은 3년 가까이 실패를 거듭했다. 기계의 효용성과 관련하여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증명이 어디 있겠는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헤론

p428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는 그 증기기관으로 무엇을 했을까? 고대인들은 그걸 가지고 무얼 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아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발명품은 오늘날의 노르만디호나 퀸 메리호 같은 거대한 여객선이 대양을 가로지르게 해주는 엄청난 동력을 지녔음에도 고대인들은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테나이에서 알렉산드리아 또는 맛살리아로 오고 가는데 여전히 노젓는 일꾼을 이용했다. 


노예 사회라는 한계에 갇힌 과학 기술

p430 과학의 역사에서는 항상 새로운 지식과 발견과 그 지식의 실질적인 쓰임 사이에 엄청난 사치가 있게 마련이다. 

 가령 전쟁 같은 절실한 필요가 개입하지 않는 한,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발견을 완성시키는 데 그다지 신속하지 않은 모양이다. 

(인간에게는 절실한 필요가 아주 중요하다. 간절함 없이는 위대함이 발현되기 힘든 것 같다.)


p434 요컨대 헤론이 자신의 발명품인 증기기관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려고 했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노예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증기기관 일화는 대단히 교훈적이다. 이 이야기는 문명이란 대중의 상승 의지가 있을 때에만 발전 과정 중에 부딪히게 되는 일정한 장애를 넘어설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와 동시에 인류의 그 어떤 위대한 발명도 영원히 소멸되는 법이 없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굉장한 모험, 천일야화를 천 배, 만 배, 아니 수십만 배를 부풀린 동화 같은 인류의 역사를 따라가노라면, 반드시 하나의 주체와 만나게 되어 있다. 항상 존재감이 넘치며 세기가 거듭될 때마다 한층 현명하고, 양식 있고, 적극적으로 발전해가는 주체, 유산되어버린 우연을 건져 올려 새 삶을 부여하여 새싹을 틔우고 풍성한 잎을 자라나게 하며 탐스러운 과실을 맺게 하는 주체를 우리와의 조우를 위해 달려오는 미래 속에서, 매 순간 우리에게는 현재가 되는 미래속에서 만나게 된다. 바로 인간의 천재성이라고 하는 주체다. 

 희망이 있는 한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Chapter 15 시로의 회귀 : 칼리마코스,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가 쓴 <<아르고나우티카>>

고전의 답습을 철저히 배제한 칼라마코스 

p442 시는 서사시에 등장하는 위력적인, 위력적이지만 더러운 강물보다 순수한 샘물, 가느다란 물줄기에 불과해도 한 방울 한 방울이 소중한 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빅토르 위고와 이따금씩 소홀함이 보이는 위고의 위대한 작품보다는 호세-마리아데 헤레디아와 그의 잘 가다듬어진 소품들을 추구했다고나 할까. 물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영감을 대체 할 수는 없으며, 칼리마코스 자신도 그 점을 잘 알았다. 하지만 영감이 고갈되고, 누구나 별로 힘들이지 않고 5막짜리 비극을 뚝딱 써내거나, 장단단격 육각시로 신화적인 주제를 가지고 24개 노래로 구성된 서사시를 시도해볼 정도로 창작이 식은 죽 먹기가 되어버린 시대에, 시가 다시 어려워져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시를 구하는 길이었다. 


p443 영웅주의는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신이란 더 이상 행동의 원칙이 아니었으며,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투쟁하게 만들거나, 투쟁을 통해서 스스로를 뛰어넘게 만드는 신비스러운 요구가 될 수 없었다. 신은 단순히 위로를 제공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인간은 신의 품 안에서 자신을,자신과  자신의 비참함을 잊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p444 인간들은 이제 개인적인 흥미를 좇았다. 개인들은 더 이상 도시국가의 영광이나 신을 위한 봉사, 숙명적인 정념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딱딱한 과학 논문이 되어버린 시 

p445 만일 <<안티고네>>보다 새로운 별의 발견이 이들을 더 흥분시킨다면, 어쩌겠는가. 내면 세계보다는 물리적인 외면 세계를 소재로 시를 쓰는 수밖에. 하지만 인간과 인간이 지닌 문제, 인간의 신비 등을 제쳐둔다면, 시가 끔찍한 위기를 맞게 되는 건 불을 보듯이 뻔한 노릇이다. 


스승에 반대하는 호메로스 추종자 

p447 <<아르고나우티카>>를 칼리마코스에 대항하는 저항의 깃발처럼 흔들면서 아폴로니오스가 광고 효과를 노린 것이라면, 그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아야 한다. 


호메로스의 서투른 모방, <<아르고나우티카>>


서술에는 약하고 묘사에는 뛰어난 서사 시인 

p455 오뒷세우스의 모험은 오뒷세우스를 새롭게 특징짓는다. 오뒷세우스는 포세이돈이나 칼륍소, 페넬로페 또는 운명이 제시하는 시련을 겪을 때마다 매번 조금씩 성장한다. 용기, 적절한 기계를 제조함으로써 운명에 반격을 가하는 기발함, 시간을 두고 준비하는 계책 등 모든 면에서 그는 성장한다. 오뒷세우스는 매번 운명에 응답하므로써 인간으로서의 그의 자질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주인공의 무기력이란 물론 인물을 창조해야 하는 시인의 무기력이기도 하다. 


p457 이렇듯 여자들 사이의, 자식 가진 어머니들 사이의 경쟁심이 함축되어 있는 이 장면에서는 톡 쏘는 듯한 맛이 느껴진다. 


성공적인 한 폭의 그림, 사랑에 빠진 메데이아 

p461 메데이아의 눈앞에 방금 전에 흘러간 순간들이 다시금 나타난다. 그가 입은 옷, 그의 입에서 나온 말, 그가 의자에 앉아 있던 자태, 그가 궁 밖으로 나올 때의 걸음걸이 등 모든 것이 새록새록 메데이아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자 생각이 어지러워지며 이 세상 남자들 중에서 그런 남자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속삭인다. 


p466 마침내 새벽이 부드러운 광선을 보내는가 싶더니, 도시에서는 벌써 만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p467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두 사람은 산 중턱 바위틈을 뚫고 나란히 성장해오면서 바람의 침묵 속에서 부동자세를 유지해온 참나무나 전나무 같았다. 


모험담이 아니라 지리서 


두 명의 아폴로니오스 : 연애소설과 지리학 소고 

p473 그는 마음속 깊이 호메로스를 사랑했으며, 젊고 야심 많았던 시절엔 그에 버금가는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이따금씩 상당히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는 그가 자신이 선택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지리학적 서사시라는 독특한 형태를 부여한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는 서사시에는 전혀 재능이 없었으며, 당시 문인들이 전부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스케일로 이야기를 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p474 아폴로니오스는 그리스가 마지막으로 창조해낸 이 분야, 새로운 문학 장르의 창시자였으며, 그 자신도 알지 못한 이 분야의 선구자였다. 


연애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태동

p476 낭만주의란 이처럼 상반되는 가치들이 인간 존재의 마음속에서 서로 얽히고 뒤척이면서 상대방을 밀어내는가 하면 밀려나는 움직임의 연속이다

죽음으로 돌진하는가 하면 어느새 한달음에 삶을 향해 뛰어오른다. 


베르길릿우스에게 계승된 낭만주의

p478 그보다 훨씬 유명한 그의 후계자가 있다. 아이네아스와 디도의 사랑 노래를 쓰면서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의 네 번째 노래에서 <<아르고나우티카>>의 세 번째 노래를 가져다 쓰며 이를 완성시키고 변형시킨다. 


Chapter 16 테오크리토스의 낙원

p483 여럿이 공유하는 즐거움을 통해서 문학은 공동체에 보탬이 되고자 했으며, 공동체의 행위를 효과적으로 조율하고자 했다. 


p484 그리스 문학이란 인간의 인간 자신에 대한 성찰이며, 공동의 행위를 위한 에너지 비축이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요컨대 그리스 문학은 순수한 오락거리, 무상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랑에 빠진 외눈박이 거인의 노래, <<퀴클롭스>>

p486 테오크리토스는 사실주의와 일상적인 심리 묘사를 통해 신화를 현대화하는 동시에 그를 뛰어넘었다. 


하찮은 일상에 아름다움을 부여한 최초의 목가 시인

p487 시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삶의 체험이라기보다는 삶에서 출발하는 아름다운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시켈리아 농부들의 노래에서 탄생한 전원시 

p493 코마타스 : “나무딸기 아네모네를 

담을 타고 올라가는 덩굴장미에 비교해서는 안 되지.”

라콘 : “능금을 참나무의 도토리에 비교해서는 안 되지. 

녀석들은 참나무 껍질처럼 꺼칠한데, 능금은 꿀 피부를 가졌거든.”


코마타스 : “내 애인은 내일 나한테서 비둘기를 받을 거야

내가 노간주 나무 둥지에서 녀석을 잡을 거거든.”

라콘 : “내가 갈색 암양 털을 깎으면, 외투용으로 크라티다스는 아주 좋은 양털을 받게 될 걸세”


경합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경합이 진행될수록 우리는 민간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노래 속으로 점점 더 깊숙하게 들어간다. 


p496 예술, 즉 원석 상태인 시적 금속을 세련된 귀금속으로 변신시키는 연금술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누가 감히 어느 지점에서 예술이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긴,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출발점은 분명 온전히 대중적인 곳, 대지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농부 기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주의적 풍자 희극의 압권 <<쉬라쿠사이의 여인들>>


전원의 풍경과 삶을 사랑했던 시인 

p500 테오크리토스의 시 세계는 진실이면서 동시에 시다. 여기에서 진실이란 감각과 체험이라는 재료에 대한 시인의 충실함을 가리킨다. 한 편 시란 요컨대 음색과 리듬, 감각의 취사선택, 이미지 등을 통해 진실을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인간미 물씬 풍기는 농부들의 등장

p507 요리조리 달아나는 가축, 엉겅퀴가 가득 피어난 풀밭, 사랑했지만 죽음이 앗아가버린 여인, 외양간 뒤에서 음란한 짓을 즐기는 호색한 주인 등이 전원생활의 구성요소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은 테오크리토스의 예술 덕분에 삶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 


시적 진실의 두 요소 : 사랑과 자연 

p511 “이제, 제비꽃들이 나무딸기 위로도 엉겅퀴 위로도 꽃을 피울 거라네. 

신선한 수선화가 노간주나무를 환하게 만들어주리라!

모든 것이 거꾸로 되거라!

너희들, 소나무들아, 배를 열리게 하거라!

다프니스가 죽으니, 사슴들아, 개들을 못살게 굴어라!

산부엉이야, 꾀꼬리들에게 승리를 거두거라!”


도시의 삶에서 길어 올린 시골에 대한 향수 

p512 “시는 인간의 기분을 치료한다. 시는 부드러움이지만, 그 부드러움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부드러움’이라는 말은 테오크리토스의 작품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 

 시는 인간에게 삶과 전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휴식이라고 할 수 있는 몽상, 삶에 대한 향수 어린 사랑, 삶에 대한 달콤한 망각, 삶을 대신할 수 있는 몽상을 제공한다. 


p515 “오 행복한 코마타스여, 너는 이 매혹적인 모험을 경험했으며, 이 상자 안에 갇혀 있었고, 온 계절을, 시련의 여름을, 벌꿀을 먹으며 견뎌냈구나. 아! 그런데 너는 이제 더 이상 산 자들 가운데 있지 않구나! 나는 산에서 기쁘게 너의 노래를 들으며, 너의 아름다운 염소들을 돌볼 거라네. 그러니 너는 털가시나무나 소나무 아래서 부드러움의 음악에 몸을 누이거라, 신성한 코마타스여......”


Chapter 17 다른 형태의 도피 : 헤론다스와 사실주의적 풍자 희극, 그리스의 소설<<다프니스와 클로에>>

p522 생긴 그대로의 세계 속에서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되, 마주한 그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스 문학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제일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위대함에 다가가려는 욕망을 지녔을 뿐 아니라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인 이 세계 속에서 그의 위치를 제대로 가늠해야 하며,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과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칙을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헤론다스의 풍자 희극, <<뚜쟁이>>, <<질투>>

천박함의 극치, <<여자 파는 상인>>


새로운 경향 : 천박한 현실을 모방하는 문학

p532 그런데 고대 민족들의 자양분이 되고 휴식처가 되어준 그 큰 나무를 우리는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그 나무의 그늘로부터 도피하는 쪽을 택했다. 


문학의 쇠퇴와 소설이라는 오락의 탄생

p533 하지만 기독교 시대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형태의 도피가 등장한다. 바로 그리스 소설이다. 문학사를 통틀어 이보다 더 간단한 시간 보내기, 심심풀이 오락, 놀이에 가까운 문학 장르가 과연 있었을까? 



최초의 연애소설, <<다프니스와 클로에>>

p538 중요한 건 우리 안에서 문득 솟아올라 우리를 이끌어가는 쾌감의 정도가 아니겠는가. 


자신의 마음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았던 괴테는 롱고스의 소설을 엄청 좋아했다. 괴테는, 에케르만에 따르면, 이 작품이 지성과 예술, 취향에 있어서 걸작품이라고 말했으며, 거장 베르길리우스의 작품보다 오히려 한 수 위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자연에서 태어난 사랑이야기

p540 이상화된 풍경. 하지만 절대로 ‘프랑스식’ 정원처럼 추상적이지는 않은 풍경(로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플라타너스와 소나무, 실편백나무와 월계수 등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자라고, 많은 짐승들이 출몰하며, 산토끼들이 포도밭에서 깡충거리며, 개똥지빠귀와 산비둘기는 하늘을 날고, 벌레들이 붕붕거리는 지극히 구체적인 풍경. 


자연은 이제 막 태어나는 사랑의 공모자다. 


사랑의 쾌락에 눈떠가는 시골의 연인들

p541 오,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부드러운 사랑이여,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의 이미지를 어쩌면 이리도 감칠맛 나게 복제했단 말인가! 


p543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을 찾을 때 느끼는 동요, 무지함으로 인한 수치심,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 짐작만 하고 넘어가는 수줍음, 이런 감정들은 과연 희귀한 것일까? 깜찍하게도 두 사람이 서서히, 두 노인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으로 인한 병에 유일한 처방이라고 알려진 “벌거벗고 함께 자기”(아미요 주교는 정확하게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이렇게 옮겼다!)를 실천에 옮기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두 사람이 첫날밤에 한 침대에서 “밤새도록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사냥에 나선 고양이들처럼 눈을 감지 못하고” 실컷 사랑을 나눈 뒤 흡족해 하는 광경은 또 어떤가.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 문학을 힘차게 관통하고 있는 이교도적 자연주의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따. 


p544 사랑은 더이상 삽포나 에우리피데스의 시에 나타난 것처럼 존재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얼음장 같은 죽음으로 몰아가는 질풍노도가 아니다. 사랑은 이제 서서히 저물어가는 맑게 갠 날에, 아름답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여인과 함께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남자와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다. 

 클로에, 너의 다프니스는 피어나는 꽃보다, 시냇물의 노랫소리보다 소중하고 아름답구나. 아! 그의 품에 안긴 너는 그의 새끼 염소로구나! 이런 식으로 사랑의 달콤함은 이 세계의 부드러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요정과 신들과 농부들이 함께하는 전원시 


Chapter 18 에피쿠로스와 인간의 구원

p551 ...... 왜냐하면 그건 대표적인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 숭배만큼 정신에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정신을 숭상하는 정신은...... 이게 뭔지 알겠나? 너무 잘 알지. 

-프랑시스 퐁주, <<대지>>

역사는 계속 된다. 


p552 바로 에피쿠로스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그저 친구가 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 그가 이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기를!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철학자 

p553 동시대인들이나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에피쿠로스와 그의 가르침만큼 열광적인 옹호와 극단적인 반대를 동시에 불러일으킨 사람이나 교리는 없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라는 용어만 놓고 보더라도, 프랑스어에서 이 용어는 그다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다. 향락주의자, 감각주의자 또는 이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아예 난봉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에피쿠로스를 거의 신과 동격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는 인간들이 쓸데없는 두려움과 고답적인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온한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해방자이며, 치유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준 치료사다. 사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 아니 얼마든지 치유 가능한 어리석음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질병의 고통 속에서 영혼의 기쁨을 탐색하다 

p554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자, 에피쿠로스는 몇 해 동안 가난 속에서 망명자 생활을 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직 어린 나이에 거의 독학으로 행복의 비결을 터득했으며, 스스로 이를 실천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했다. 그 후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으나,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진 터라, 이미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성찰로 단단하게 무장하고 있었으며,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요컨대 그는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벌써 어른이 되어 있었다. 


 p555 죽음을 맞이하는 날, 그는 진실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을 탐색하고 마감하면서 총체적인 소감을 기록했다. “오늘이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 나의 마지막 날이라네. 방광의 고통과 복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항상 극심하며, 조금도 격렬함이 덜어지지 않았지.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항해서, 나는 우리가 과거에 나눴던 대담을 회상할 때면, 영혼의 기쁨을 내세운다네. 사춘기 때부터 나의, 그리고 지혜의 변함없는 친구였던 자네가 메트로도로스의 자녀들을 잘 돌봐주어야 하네.” 


아테나이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철학적 대안 

p561 아테나이에서는 기원전 4세기가 막을 내려가는 고통스러운 시기에, 한동안 나라에서 나서서 가난한 자유시민들에게 식량과 임금의 배급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기도 했다. 


p561 경제가 와해되어가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삶은 너무도 불확실한 나머지 모든 것이 우연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았다. 


지상에서의 개인의 행복이라는 화두 

p564 소박하고 제한적인 행복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확실하고 누구나 자신의 두 손으로 길어 올릴 수 있는 행복을 말이다. 

(그가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은 현재의 삶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고 한다.스 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행복. 내가 내 두 손으로 길어 올릴 수 있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 작은 것으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또 큰 것을 바라기도 하는 마음이 있다.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p565 에피쿠로스 철학의 위대한 점은 플라톤이나 그의 뒤를 이은 기독교처럼, 하늘로의 도피를 제안하는 대신 지상에서 무언가 할 것을 제안했다는 데에 있다. 


“철학을 하는 척 해서는 안 된다. 병이 들었을 때에는 건강을 되찾으려는 척을 해서는 안 되며, 실제로 건강을 되찾아야 한다.” 인간을 인간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유일한 치료라고 할 수 있는 진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한순간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빨리 치료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행복은 기다려주지 않는 시급한 요구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짧다. “우리들 각자는 이제 막 태어난 것 같다는 심정을 안고 삶과 작별한다.” 


죽음과 신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해방

p566 우리가 가진 으뜸가는 두려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어디를 가나 따라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분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황당한 기분전환을 즐기고 있을 때에도 이 생각은 줄곧 인간을 사로잡으며, 새로운 지평선이 열리지 않도록 꽉 막아버린다. 죽음에 대한 생각 앞에서 인간은 마치 곧 끝 모를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와 현기증으로 가득 찬다. 


죽음 다음가는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의 공포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 신에 대한 공포다. 인간은 신들이 높은 하늘에서 그들을 살피고, 관찰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p567 자, 그렇다면 죽음과 신에 대한 공포라는 이중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류는 비참한 수렁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공포는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일까? 에피쿠로스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는 두 가지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계가 무엇인지를 인간들에게 이해시켜야 하며, 이 부조리한 존재,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죽은 존재인 신들에게 그 어떤 자리도 내주지 말아야 한다. 


p570 “태양은 세계를 돌고, 커다란 목소리로 우리에게 행복을 위해 이제 그만 깨어나라고 외친다.” 


플라톤 관념론에 반대편에 선 유물론


신의 섭리가 아닌 원자 운동으로 세계를 설명

p574 그러므로 모든 것은 첫째, 원자의 운동, 둘째, 인간의 필요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획득해가는 제어능력, 이렇게 두 가지만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p575 에피쿠로스는 문명이란 “경험과 노동의 열매”라고 말했다. “시간과 인간의 노력이 모든 발명품들을 생산하고 이것들을 공명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절을 했을 때나 마찬가지로 그것을 의식조차 할 수 없다. 


p576 고통이 잠시만 중단되면, 단순한 필요, 아주 기초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이 타고난 소명을 수행하는 데 충분하다. 인간을 훼손하고 그를 소리 지르게 만드는 고통을 멀리 떼어놓기만 하면, 인간이 자신을 완벽하다고 느끼는 데 충분하다. 인간의 소명은 바로 기쁨이며, 이는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니 고통을 없애라.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빵과 물이면 만족했던 ‘쾌락’주의자

p577 행복해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요구 사항이 이토록 검박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우리는 당시 사회가 처해 있던 처절한 절망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p578 현자는 삶이란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안다. 삶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날, 이날의 매 순간이다. 행복의 매 순간, 즐거움 속에서 충족된 욕구 각각(이때 욕구가 소박한 욕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것은 충족 여부다), 즐거움의 매 순간은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로써 세계는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 삶은 제대로 살아진다. 흘러가는 시간은 더 이상 배반당한, 즉 충족되지 않은 욕구의 연속이나 잃어버린 재화, 위협당하고 실망만 안겨주는 희망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시간에 휩쓸리지 않고, 기쁨의 소유 속에 머무르게 된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할 일이다. 우리는 오늘, 지금,현재를 살면 된다. 이왕이면 기쁘게, 즐겁게, 최선을 다하면서 살면, 좋겠다.)


p580 용기는 흰 돛에 수놓은 붉은 줄처럼 그리스 민족에게서 태어난 첫째가는 덕목으로, 그리스의 역사 전체를 관류한다. 시간과 더불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크라테스 이후 용기는 현실 존중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토대를 둔 성찰하는 용기, 이성적인 용기로 변했다. 경탄할 만한 고대의 지혜가 공교롭게도 고대가 막을 내려가는 무렵에 꽃을 피운 것이다!


노예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은 에피쿠로스적인 우정

p581 에피쿠로스는 우정 속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실현했다. 그는 우정 속에서 선함을 발휘하고, 우정 속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인간, 그와 똑같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피와 살로 이루어졌으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아픔을 나누어 가지며, 동시에 육체를 가장 유효한 도구로 삼는 공통의 기쁨과 공통의 쾌락, 즉 상대방을 사랑하는 축복을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우정의 출발점이다. 


우정, 다시 말해서 필요한 것을 나누고, 소박한 쾌락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제한적인 지혜의 결실이다. 


p582 그는 말하자면 누구나 찾아와서 목을 축이고 가는 넉넉한 샘물이었던 것이다. 


p584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면 누구나 받게 마련인 시련, 곧 죽음을 기다리는 지원자가 아니던가. 


p585 다른 부류에서는 우정은 어디까지나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으나 에피쿠로스 집단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행복하고 평온한 삶이라는 철학적 목적 

p586 인간의 삶은 공동체 안에서 치유될 수 있다. 우정은 그러므로 지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혜 그 자체다. 결국 영혼의 평화는 이처럼 스승과 제자의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찾아지며, 이때의 평화란 동요가 없음을 뜻하는 ‘이타락시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평온, 완전한 행복주의, 지고의 조화를 의미한다. 


p589 그는 사춘기의 가장 심각한 욕구가 말과 행동에 규범이 되어줄 만한 멘토를 발견하는 것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청소년기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기독교에 의해 왜곡된 에피쿠로스 철학

p592 “나이가 들면서 삶의 석양을 향해 인도되자, 매 순간 나의 행복의 충만함에 대한 향수 어린 노래를 부르며 이 세계에 작별을 고하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불시에 죽음을 마지하게 될까 두려워 좋은 품성을 가진 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아니 몇 며잉 되더라도 상관없고 하여간 단 한 사람이라도 절망에 빠져 있다면, 그리고 그를 도와주라는 부름을 받는다면, 나는 그에게 최선의 충고를 주기 위하여 나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오늘날, 앞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전염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모두 병자들이다. 이들은 세계에 대한 그릇된 믿음으로 인한 병자들이며, 양 떼들처럼 모방을 통해 서로 서로 병을 전파하는 탓에 병이 더욱 깊어진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죽은 다음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도 우리와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이곳을 지나가게 될 이방인까지도 도우라고 지시한다. 책에 적힌 좋은 말들은 이미 널리 퍼졌으므로, 나는 이 벽을 이용해서 공개적으로 인류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기로 결심했다” 


p593 신들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행복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다. 


플라톤의 꿈은 희한하리만티 기독교적 ‘진리’ 속에서 형상화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굶주림이 허기진 식인귀처럼 전세계를 떠돌던 고대 말엽이니만큼 “먹고 마시는 데 열중하는 철학”, 복부의 쾌락을 추구하는 철학은 더 이상 먹을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p594 에피쿠로스 철학은 결코 죽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진정한 여러 얼굴들 중의 하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혁명들이 우리가 사는 우주를 전복시킨다. 혁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으며, 때로는 이 흐름을 가속화한다. 새로운 계급, 새로운 민족, 계급 없는 민족들이 이 세계를 관통한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유산은 그들의 것이다. 그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읽은지 2~3주가 지나서 그런지, 다시 읽으면서 ‘이런 문장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뽑아놓은 글귀들이 정말 주옥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스인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요소가 아주 많았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인간을 탐구하며, 인간 조건에 대한 연구로 살아가는 것 같다. 인간의 진리에 이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문명도 만들고, 작품도 만들며, 역사가 창조와 쇠퇴을 오갈 수 있게 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그리스인 이야기를 통해 ‘나를 탐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연구원 상반기를 마치면서 몇 주간 계속 해서 내게 질문하게 된다. “나의 시간과 노력, 경제적인 투자를 어디에 할 것인가? 무엇에 할 것인가? 나의 콘텐츠는 무엇인가?”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질문할 수 있게 된 것에 현재 만족한다. 시칠리아 여행을 통해, 그동안의 것들을 정리하면서,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특히 첫 번째 책의 주제가 정해졌으면 좋겠다. 

 두번째 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이야기 부분은 흥미를 끌지 못했다. 문학작품 이야기가 나왔을 때, 비극이야기를 전개했을 때 나는 흥미를 보였고, 밑줄도 더 많이 긋게 되었다. 나는 철학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부분이 자꾸 끌리는 것 같다. 논리적이고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편인줄 알았는데, 책을 읽을 때는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끌린다. 미래를 이야기하고, 성숙하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나의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낙관적 미래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까? 인간에게는 불확실성이 있는데, 불확실성은 대립되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적이거나 절망적이거나. 나는 희망적인 쪽에 자꾸 관심이 가고, 희망을 볼 수 있게 하려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나의 책의 독자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과잉 자기 계발은 아니어도, 위로와 함께, 좀 더 나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스인 이야기를 두 번 읽으면서 계속 한 생각이다. 

 현대인 이야기를 쓸 정도의 탐구는 되어 있지 않지만, 현대인이 이 시대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사고와 생각을 고양시키려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미래를 바라봐야 하는지, 또 내면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읽고 싶고, 쓰고 싶다. 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내면의 반응, 반응의 습관화 등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다. 

 8기 연구원 동기 윤정(콩두)언니의 잡념처럼 나도 이러저러한 잡념이 들었다. 한국인 이야기도, 한국 서른살 여자 이야기도, 뭐 없지만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계속 생각해볼 일이다. 



IP *.142.242.2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92 문명이야기 5-2 file 콩두 2012.07.23 2752
1691 북리뷰 80. 모파상의 시칠리아 [1] 범해 좌경숙 2012.07.26 3284
1690 2번 읽기 - 문명이야기 [17] 레몬 2012.07.30 3714
1689 #16. 문명이야기(르네상스)_두번읽기 [3] 한젤리타 2012.07.30 2637
» 두번읽기 - 그리스인 이야기/ 앙드레 보나르 지음 세린 2012.07.30 2428
1687 #16. 문명이야기 - 르네상스 두번읽기 file [1] [1] 샐리올리브 2012.07.30 2735
1686 두번 읽기-그리스인 이야기 1 2 3 file id: 깔리여신 2012.07.30 2305
1685 두번읽기_그리스인 이야기1.2.3 앙드레보나르 서연 2012.07.30 2405
1684 두번읽기- 그리스인 이야기/앙드레보나르 학이시습 2012.07.30 1848
1683 그리스인 이야기 1~3 file [1] 장재용 2012.07.30 2284
1682 문명이야기 두번 읽기 file 콩두 2012.07.30 2574
1681 아이와 통하는 부모는 노는방법이 다르다 _로렌스 J. 코헨 양갱 2012.07.31 4992
1680 #63. 마음사전-김소연 file [2] 미나 2012.07.31 4508
1679 율리시스 1, 2- 두번읽기 [3] id: 깔리여신 2012.08.15 4104
1678 #17. 변신이야기(오비디우스) 세번읽기 한젤리타 2012.08.26 2543
1677 #17_그리스비극 두번읽기 [1] 서연 2012.08.27 2374
1676 변신이야기 - 오비디우스 (세번읽기) file [3] 세린 2012.08.27 7443
1675 # 17. 변신이야기 두번읽기 file 샐리올리브 2012.08.27 2754
1674 변신이야기 -두 번 읽기 file [1] id: 깔리여신 2012.08.27 2664
1673 변신 이야기 file 레몬 2012.08.27 3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