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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0일 08시 51분 등록
 

그리스인이야기  50개의 문장


1. **** 문명은 인간을 생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모여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사람들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과학과 예술을 향유한다. 실재 세계는 물론이고, 예술작품을 통해서 상상의 세계에서도 살아가게 된다. 실재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힘이 과학이라면, 상상 속에서 또 하나의 실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예술이다. 과학과 예술로 무장한 인간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이요 인간됨이다. 인간됨은 다시 새로운 발견과 창조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문명이란 이처럼 발견과 창조의 연속이라고 정의해 두기로 하자. (16~17P)

☆☆☆문명이 바로 동물과 인간의 구분을 가져오며, 인간들의 삶을 아름답게 풍요롭게 가꾸어주며, 정신적인 성숙을 가져온다.


2. ***호메로스의 비유법을 따라가 보면, 디오메데스는 확실히 특이한 인간형이다. 농부들이 애서 쌓아놓은 둑과 과수원 철책을 송두리째 쓸고 지나가는 물살을 닮았다.....본질적으로 디오메데스는 오만하지 않다. 다만 불꽃이 그를 담대하게 할 뿐이다. 그는 정열적이다. 하지만 정열에도 색깔이 있다. 아킬레우스의 정열이 우울하고 엄숙한 것이라면, 디오메네스의 정열은 밝고 경쾌하다. 광신도의 열정이다. (66P)

☆☆☆정열에도 색깔이 있다는 이 말에 맘에 든다. 아킬레우스의 정열이 우울하고 엄숙한 것이라면, 디오메네스의 정열은 밝고 경쾌하다. 광신도의 열정이다. 사람들의 열정이 어떤 색깔인지 세심히 관찰해보아야겠다.


3. ***인간의 눈으로 이 질문에 똑똑히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은 파리스라는 인물의 본질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이 성격을 분석하깅 nl해서는 참고해야 할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종교다. 종교적 체험이라는 면을 도외시하고는 파리슬ㄹ 정확히 볼 수 없다. 파리스는 진지하게 형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하고 있다.


미의 여신이 내게 준 선물을 욕되게 하지마라.

신이 준 것은 마음대로 버릴 수 없다.

은총이기 때문이다.

은총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는 은ㅊ총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프로디테로부터 잘생긴 외모를 받았고 여자 꼬이는 재주를 받았다. 미와 사랑은 신의 것이고, 신의 은총이다. 파리스는 선택을 받았을 뿐이다. (71~72P)

☆☆☆탁월한 외모와 재주는 신의 선택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신에게 선택받을 수는 없다. 모든 이가 신에게 선택받는 다면 차별성이 없어진다. 그 대신 신에게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또 다른 잇점을 준다. 용감성이라든가, 근면성, 성실함, 인내력, 친화력, 리더쉽 등 또 다른 선물을 받게 된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라 생각한다. 좀더 깊게 생각해보면 내가 지니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신의 은총으로 선물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4. 아킬레우스는 이처럼 제 영혼의 사막을 건너 가장 쓸쓸한 곳으로 전진하고 있다. 스스로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를 포기할 것이고 동료들이 죽건 말건 괜념치 않겟다고 했다. .....아킬레우스는 삶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주 열렬히 사랑한다. 다만 그는 현재를 사랑할 뿐이다. 지금의 감정과 지금의 움직임만 사랑한다. 오로지 거기에만 충실하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삶이고, 전부다. 살인도 연민도 눈물도 사랑도 연민도 그는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무슨 철학자들처럼 공평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처럼 모든 것을 공평하게 끌어안는다. 고통도 기쁨만큼 즐겁다. (82~83P)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삶이고, 전부다.’ 붉게 타오르는 장미처럼 좀더 열정적으로  살 수는 없을까? 이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싶다. 타고 다 타서 재가 되도록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 싶다.


5. 솔직하고, 진실하고, 직선적인 : 다음은 삽포의 시다.


그대 앞에 얼굴을 맞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저 사람은 아무래도

신인가 보다.


웃음이 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그대를

본 순간

입술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혀에 물기가 없으며

작은 불꽃이 일제히 피부 아래로 흐른다.

눈을 볼 수 없고

귀는 우- 우- 거릴 뿐.


흐르는 땀은 무엇이며

몸은 어째서 떨리지 않는 곳이 없는가.

풀포기보다 더 파래진 나는

아마 이대로 죽는가 보다.


지금 우리는 열정의 소용돌이 안에 잇다. 여기서 군주는 에로스다. 욕망이 삽포를 때리고 삽포는 그 때리는 숫자를 세고 있다 그래서 이건 전투시다. 에로스가 삽포를 공격하는데 삽포는 한 대 한 대 맞을 때마다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진다. 형상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고, 심장이 뛰고, 피가 온 몸으로 잘 돌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 사지가 하나둘 말을 듣지 않는다. 의식도 말을 듣지 않는다. 사지가 죽으면서 삽포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 심장에서 피가 없어지고 목청에서 소리가 없어지고, 혀에서 물기가 없어지고, 핏줄에서 피 대신 불꽃이 흐른다. 눈은 제 기능을 잃었고, 귀는 맥박만 세고 있다. 급기야 온 몸이 떨리더니 시체처럼 파래진다. ...의식이 죽음을 보는 순간 몸이 가라앉는다. 그렇다 이제 죽는 것이다. (155~157)


삽포의 시는 솔직하고 과학적이다. 삽포는 사실만 적는다. 감정이 주가 아니다. 감정이 남긴 결과를 보고하는 게 주다

삽포의 시에는 슬픔, 괴로움, 그리움 같은 고상한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질투나 증오, 번민 같은 것은 삽포에게 전혀 힘든 게 아니다. 문제는 육체적 고통이다. 초기 시에 보면 삽포라는 이 자연주의자가 사랑하는 소녀를 떠나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소녀 옆에는 약혼자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다. 삽포는 사랑하는 그 소녀를 떠나보내는 육체적 고통을 보고한다. 슬픔 따위는 표현하고 싶지도 않다. 문제는 몸이 죽도록 아프다는데 있다. 귀가 안 들리고 눈이 멀게 하는 지독한 고통이 몸 구석구석에 엄습한다.(157P)

☆☆☆이런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고 어느 예술가가 말했다. 어느 술자리에서 사랑으로 인해 죽을 만큼 아파보았느냐고 물었다. 사랑하다 죽어도 좋을 만큼의 사랑, 앞뒤 어떤 계산도 있지않은 오로지 그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진실로 좋아하는 사랑, 그런 사랑을 해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 지금 내 인생은 너무 늦다.

 

6. 수 천 년도 넘는 존속기간도안 그리스 종교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왔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의 교조를 갖지는 못했다. 만약에 그랬다면 조금 이해가 쉬웠겠지만 그리스 종교에는 교리문답도 없었고, 시도신경도 없었다. 기껏해야 ‘설교’라는 단어 정ㅇ도가 연극 같은데 나올 따름이었다. 성직자도 없었다. 신전을 지키는 몇몇 사제들 빼고는 무슨 종교인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리는 것도 줄 도시의 관리들이었다. 소위 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예전부터 해오는 관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따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의 종교는 자유분방하다. 버릴 수도 있고 변절할 수도 있다. 믿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239~240P)

☆☆☆우리가 신화로 알고 있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종교라는 것이 새삼 놀랍다. 체게화되어 있지 않고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종교가 오랜 세월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던 것은 강요하지도 않고 자유분방하기 때문이었다.


7. 귀족이자 시인이자 자수성가한 상인

솔론은 귀족 출신이다. 아테나이의 마지막 왕을 배출한 가문이었지만, 기원전 7세기 중반에 갑자기 몰락하고 만다. 솔론이 성장하던 기원전 7세기 무렵은 산업과 무역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고, 솔론은 앗티케에서 나는 올리브를 해외에 파는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귀족이자 시인이었던 한 청년이 상인이 된다.

솔론 스스로도 “하루라도 뭔가 배우지 않은 날이 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솔론은 가문의 부를 복원하고 창창한 나이에 계획대로 아테나이에 돌아왔다. 당시 사람들이 기억하기에 솔론은 합리적이고 인간적이었다. 귀족들도 그를 좋아했고 평민들도 그를 좋아했다. 플루타르코스가 지적한 것처럼 “귀족들은 솔론이 부자라서 좋았고, 평민들은 그가 인간적이라서 좋았다.”  (188~189P)

☆☆☆부와 인간미를 모두 갖추기는 힘들다.


솔론은 과감하고도 신중하게 아테나이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솔론이 만든 헌법에는 모든 사람들이 신분과 경제력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누리는 권리가 있었는데, 바로 민회에서의 투표권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조치엿다. 민회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평등하고 누구나 발언할 수 있다. 물론 민회가 정치 권력을 무한정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평등의 원칙이 도입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며, 민회는 앞으로 핵심 통치 기구로 부상할 것이다. (200~201)

☆☆☆민주주의 탄생은 인류에게 크나큰 선물이다. 인간의 권리를 확정한 견고한 제도이다. 평등의 원칙이 없다면 지금 우리는 암흑의 시대를 살고있음에 틀림없다. 


7. ***삽포 이전의 사랑은 불탄 적이 없다; 삽포는 누구를 흉내 낸 적이 없다. 그녀가 최초다.

삽포 이전의 사랑은 불탄 적이 없다. 샆포의 사랑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다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삽포의 시에서 에로스는 아무런 형체가 없다. “어떻게 할 수 없고”, “어떻게 해 불 수 없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덫을 놓아 잡을 수도 없다. 잡으려 하면 바로 부서지고 말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보니 사랑은 아름다웠고 쓰라렸을 뿐이다. 아무리 되돌아보며 생각해내려 해도 사랑은 형체가 없다. 아프로디테는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에로스는 그렇지 않다.....삽포의 에로스는 몸에 남은 상처로 표현될 뿐이다. 상처가 남는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프다. 상처가 남는다.


“다시 에로스가 온다. 사지를 부수며 고문하는,

부드럽고 고통스러운 그는 내가 이길 수 없는 괴물이다.”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은 아무리 재주가 좋은 인간이라도 이 사랑이라는 것을 길들일 수 없다는 의미다. 사랑에 대한 삽포의 수사는 이처럼 은유적이다.


“산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떡갈나무를 꺾어 넘어뜨리듯이,

사랑이 내 영혼을 흔들고 있다.“


삽포가 경험한 사랑은 태풍처럼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힘이다. 그리고 지금 삽포의 영혼은 사랑으로 인해 뿌리째 뽑혀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159~ 161)

***호메로스의 적대적 자연, 인간과 교감하는 삽포의 자연 : 삽포의 자연은 신비로운 옷을 벗고 인간에게 내려온다. 가까이 다가와 친구가 되며, 존재가 되고, 인간과 더불어 교감을 나눈다. 가령 잠에서 깨어났을 때 삽포는 혼자인 것 같았다.


“달도 지고, 플레이아데스도 지고,

자정이다. 나는 혼자 잠에 든다.”


달도 지고, 별도 가고, 시간이 흐른다. 하지만 삽포는 혼자가 아니다. 밤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애절함 뒤에 슬그머니 자연이 내려오는 것이다. 자연주의 혹은 상징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171~173)

☆☆☆삽포의 시는 불꽃이요, 붉은 장미꽃이다. 뜨거운 열정이다.


8. 아폴론은 미래를 뛔뚫어 알며, 계시를 내려주는 신이다. 파르낫소스 계곡 어귀 델포이의 성소에도 아폴론의 신전이 서 있는데, 그리스 사람들도 외국인들도 이리로 몰려들곤 했다. 아폴론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래서 신전은 늘 시끄럽다. 아폴론은 개인의 앞날에 대해서도 또는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신도들이 몰려든다.****물론 신탁을 전해주는 성직자들이 이런 고급 정보를 구해오는 루트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신도들은 잘 모르지만 여행 전문가로부터 성직자들이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물론 신의 정보가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다.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호도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주요한 사실은 신이란 궁극적으로 인간보다 전능하고 자유롭다는 점을 모든 사람들이 합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폴론은 인간보다 위에 있는 아주 가까운 신이다. (255P)

☆☆☆ 그 시대에도 이미 신탁의 구조를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많은 제왕들과 사람들은 신탁에 의지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신탁이 고대의 방식과 조금 다를 뿐 그렇게 이루어지고 그렇게 소비되어지고 있다. 사주, 타로를 비롯한 굿 등 미래를 점치는 사업은 한국에서는 2조 시장이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장경제이다. 여기에다 영혼을 팔아먹는 종교사업까지 보태면 그 시장은 거대한 시장이다. 알 수 없는 미래, 보이지 않는 영혼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흔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 같다. 더 교묘하게 발전해 나가는 것 같다.


9. 신을 인간으로 제일 먼저 조작한 것은 호메로스였다. 그는 <일리아스>에서 살아움직이는 신을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신의 존재를 감지하게 되었다. 신은 단순히 살아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눈물도 흘리고 웃음도 터뜨린다.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머리는 검은색보다 더 검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이다. 여신의 드레스에서는 현기증나게 흰색과 깊은 푸른색, 그리고 샛노란색을 볼 수 있다. 신의몸을 감사고 있는 얇은 면사포는 ‘햇빛처럼’ 우리를 눈멀게 한다. 헤라는 뽕나무 열매만큼이나 많은 보석을 달고 있고, 제우스는 의복을 만들 때 금을 아끼지 않는다. 외투도 금이고 홀도 채찍도 다른 장신구도 모두 금이다. 

양쪽으로 땋은 헤라의 머리는 몸 양옆에서 리듬을 타고, 몸에 뿌린 행수는 너무도 강렬해서 하늘과 당을 채우고도 남는다. 아테네의 눈에서는 섬광이 내비치고 아프로디테는 대리석처럼 빛난다.

인간은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편다. 인간의 형상을 한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우리 귀가 멀고 눈이 멀 지경이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 있다.

모습만 강렬할 뿐 아니라 움직임도 강렬하다. 영웅과는 다르다. 영웅이라고 해봐야 힘만 다를 뿐 우리 생각을 뛰어넘는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신은 다르다. 인간의 향상을 한 신이라서 가깝게 느껴질 수는 있다. 즉 부엉이나 조약돌보다는 말이 좀 통할 것 같고, 기도도 잘 들어줄 것만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은 신이다. 신을 신답게 하는 뭔가가 반드시 있다. (258P)

☆☆☆신에 대해 심도있게 논리적으로 적고 있다. 우리가 믿는 신, 만들어진 신이 아닌가.


10.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슬픔이 가득한 곳이며, 신이 사는 세상은 기쁨으로 충일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신은 다른 조재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우리는 진짜 신을 만난다. 그제야 신들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깊이 깨닫게 된다. 가장 확실한 차이는 신들은 끊임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웃음과 생기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258P)

☆☆☆신을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척박하고 힘든 삶을 생각한다. 비록 인간이 만든 신일지라도 그것에 기대면 삶의 힘듦도 잊을 수 있을뿐더러, 죽음 이후엔 뭔가 보장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혹한 삶이여!


11. 신들을 향한 인간의 종교 감정은 복잡하다. 신은 알 수 없는 힘이기에 두렵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신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인간들은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어딘가에 이곳과 다른 세상이 있다. 가깝지만 확실히 다른 곳이 잇다. 거기에는 영원한 존재가 산다. 우리와 닮았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바로 신들이 산다. 올림포스 산에 사는 그들은 걱정도 고통도 없다.

정의도 괘념치 않는다. 도덕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혹시 나쁜 결과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그래서 생긴 게 도덕률이다. 하지만 신들에게는 그따위가 필요없다. (259P)

☆☆☆원래 우리의 삶이 올림푸스의 신들처럼 저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자유, 자유롭게 그렇게 살면 얼마나 홀가분하고 좋을까? 도덕, 정의, 신의, 노동 등 이런 것에 대한  규칙과 원칙을 규정해놓고 올가미처럼 옭아매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런 의문들을 가져본다. 나도 올림푸스 여신이 되고 싶다.



12. 비극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즉 주인공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 주인공의 액션을ㄹ 내 액션으로 혼동하는 것이 비극이다. 나 자신이 눈앞에 펼쳐진 싸움을 수행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극중에서 주인공이 ‘나’라고 호명하는 순간 관객인 내가 칼끝에 선 듯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비극의 매력이다. (275P)

☆☆☆이것이 바로 연극의 힘이 아닐까?


13. 비극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싸움은 운명에 대적하는 싸움이다. 싸우는 이유는 운명에 순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 운명이다. 그 운명을 넘지 않고는 인간의 전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지독하고 끔찍한 운명과 싸워야 한다.(276P)

☆☆☆ 내가 살아가는 그 자체가 운명이 아닐까 싶다. 나의 항로를 내가 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내 삶에는 내 의지와 혹은 우연이라는 우주의 의지에 의해서 살려지는 것 같다.  내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우연과 필연에 의해서 벌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14.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창의적인 정신을 대표한다. 기술과 과학과 발명을 통해 자연에 대적하는 인간이 바로 프로메테우스다. 즉 지금 프로메테우스가 벌이는 싸움은 프로메테우스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싸움이다. 인간이 제우스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몰살시키고자 하는 자연력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사움의 와중에서 인간은 집을 지었고, 동물을 길들였고, 쇠를 만들었고 천문학과 수학, 의학, 문자 등을 발명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전형이다. (284~285)

프로메테우스가 지기는 했지만 정복당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프로메테우스를 응원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우스에게 맞서기 때문이다.(287P)

☆☆☆인간의 전형, 인간은 동굴생활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연과 투쟁하고 도전해왔다. 투쟁과 도전은 인간의 역사를 말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창의적인 정신을 꼽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창조하고 노력하고 도전해야 한다.


15. 파르테논은 수학 속에 갇힌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건축물이다. 수학이 아닌 감성을 건드리는 건축물이다. 파르테논에는 질서가 있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살아 숨쉬는 질서다.

이유는 간단하다. 파르테논에 쓰인 직선은 실제 직선이 아니다. 마치 우리 삶에서 마주치는 직선들이 완벽한 직선이 아닌 것과 같다. 원도 마찬가지다. 고르지가 않다. 파르테논에 구현된 수학은 딱 덜어지는 수학이 아니다. 조금씩 빗나간다. 일부러 그렇게 햇다. 예술적으로 약간씩 뒤튼 것이며 그럼으로써 각 면들이 살아 움직이게 했다. 파르테논을 살아있는 건축물로 만든 힘은 바로 이 비틀기에 있다. (335P)

☆☆☆우리 삶에서 마주치는 직선이 완벽한 직선은 없고, 완벽한 원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어디 한 군데가 모나거나 부족하거나 조금 찌그러지거나 그런 것이다. 약간씩 뒤틀린 그런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기둥들은 몸통에 두툼하게 살이 붙어서 내리쬐는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아낼 기세다. 동시에 뒤에 있는 기둥보다 시각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듯한 효과를 낸다. 만약 모든 기둥 사이의 거리가 똑같았다면 기둥 자체가 약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약간식 균형을 깨뜨림으로서 오히려 네 각을 지키는 기둥들에 안정감을 부여하게 된다.

이처럼 파르테논 신전을 구성하는 수학은 생명체의 수학이다. 파르테논은 아크로폴리스의 땅 위에 풍성한 열매를 단 채로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같다. (338~339)


***살아있는 파르테논은 무수히 많이 복제되었다. 수 세기동안 파리에서 뮌헨까지, 워싱턴에서 모스크바까지, 은행 앞에 , 교회 앞에 베껴다 세웠다. 심지어 파리의 마들렌 성당은 파르테논을 본뜬 괴물 수준이다. 하지만 파르테논은 한 토양의 산물이고 구체적인 역사의 산물이다. (339P)

☆☆☆파르테논의 공법이 지금까지도 응용되고 무수히 복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완전하지 않은 공법이 완전한 공법인가?


16. 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그리스인 2/ 11P)


17. 영웅의 죽음은 비극적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비극적인 것은 우리 인간의 현실에서, 소포클레스와 그와 동시대를 산 인간들의 경험 속에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신들이 존재다. 신들은 인간의 초월, 영웅으로 피어나려는 인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 비극들은 하나같이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인간, 장애물에 부딪힘으로써 미지의 세계와 대면해 위대함의 새로운 차원을 열려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인간의 야심은 더욱 더 단단해진다. 영웅의 행동 덕분에 인류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리스인2/ 14P)

☆☆☆인류는 극한상황을 극복하는 가운데 발전해왔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생존하려는 욕구와 극복해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목적의식을 가지게 된다. 비극이란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운명이 앞에 놓여 있을 때를 말한다. 거대한 비극이란 보통의 인간에게  일어난다기 보다 큰 권력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 때 그 비극이라는 것은 참 맛이 나는 것이다. 


18. 비극의 끝까지 맞닿은 신들의 침묵, 깊은 우물처럼 인간의 다툼과 외침을 끌어안고 있던 침묵, 그 침묵이 갑자기 울림이 되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침묵은 명쾌하게 울린다. 머지않아 또다시 인간의 외침에 묻혀버리게 될지라도 반쯤 열린 신들의 침묵은 인간의 지혜가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을 가리킨다. 신의 음성은 순간적으로 명료하고 또렷하게 울린다. 하지만 이 말이 지니는 투명성이란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이미 천둥을 예고하고 있는 , 납처럼 무겁게 드리운 하늘의 빛이다. (그리스인2/ 25P)

☆☆☆비극은 아무 조짐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천둥과 번개를 칠 것처럼 어두운 빛으로 다가오는데, 무언가에 도취한 인간들은 그 기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19. 그가 운명에게 보이는 유일한 허점이 있다면 단지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조건을 지배하는 우주의 법칙에 복종한다는 사실 뿐이다. 오이디푸스의 과오를 그의 의지에서 찾으면 안된다. 이 우주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우리가 선한 의도를 가졋는지 악한 의도를 가졋는지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인간은 우리가 인간의 수준에서 구축한 도덕이라는 잣대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우주는 오로지 행위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그 행위가 우주의 질서, 우리의 삶을 내포하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한 질서를 방해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그리스인2/ 175~176)

☆☆☆인간은 결국 우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다. 비극과 같은 인생, 희극과 같은 인생도 내 의지를 떠난 우주의 에너지에 의해서이다. 정말 그럴까?


20.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도 인간은 반응한다. 여기에 바로 인간의 비극이 있다.

인간은 단지 자신이 의도한 바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낸 사건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스인2/ 176P)

☆☆☆나를 포함한 내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서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21. 인간은 세계의 삶에 균형을 맞추어주는 모든 힘을 알 수 없다. 천성적으로 무분별을 타고난 우리 인간의 선의는 그러므로 인간을 불행으로부터 조금도 지켜주지 못한다. 이것이 소포클레스가 그의 비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깨달음이다. (177P)


22. 모든 행동에는 대사를 치루야 하며 이따금씩  행동의 끝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거짓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 보이던 세계, 지혜와 덕목의 힘으로 다가오는 시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세계, 우리가 제어가능하다고 상상했던 현실은 갑자기 불투명해진다. 그 현실은 우리에게 저항하며,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나 존재, 법칙으로 가득 차버린다. (그리스인2/ 178P)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생의 비극이다. 자유의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 몸의 장기들도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주의 법칙, 존재의 법칙, 사물의 법칙으로 곽 차버린 세상에서 살아가자니 얼마나 힘들까. 그래서 인욕을 배워야 하고 분노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명상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여!


23. 우리의 삶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광대한 삶, 어쩌면 우리에게 형을 가하는 광대한 삶의 한 귀퉁이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또렷한 눈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사실 장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리스인2/ 178P)

☆☆☆생을 우습게 보았다가, 재탕이 되는 줄로 착각했다가 난 지금 엄청 힘든 생을 살고 있다. 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광대하다.


24.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불행에 협력하여 스스로 그 불행을 정점으로 몰아간 순간, 그가 숙고 끝에 결정한 행위를 통해서 신들이 그를 향해 빚어낸 불행의 절대적인 이미지를 완성한 순간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추었고, 그는 그 바퀴를 넘어섰다. 오이디푸스는 장벽의 다른 쪽으로 넘어갓다.

신의 존재를 깨닫고 신은 엄정하게 정의할 수는 없으나 확실한 존재임을 인정한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신을 경험한 순간부터 그는 신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184P)

☆☆☆운명에 끄달리지 않고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신들도 건드리지 못한다. 자신의 의지로 사는 사람은 우주의 에너지나 신의 장난 그런 것들을 믿지 않고, 믿지 않기에 아무 것과도 관련이 없는 것이다. 오직 나의 자유의지만이 남는 것이다.


25. 오이디푸스는 개인적인 잘못이라기보다는 무지의 소치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행동하는 모든 존재가 대면하게 마련인 삶의 법칙에 의해 벌을 받았다. 그가 저지른 유일한 잘못은 그의 존재 그 자체, 알 수 없는 법칙의 세계에서 살아야만 하는 숙명 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그에게 내려진 파멸의 굴레는 벌이라는 성격은 완전히 배제된 채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그를 겨냥할 뿐이다. (그리스인2/ 200P)



26. 자연과의 합일에서 원초적인 기쁨을 찾는 <새>

 “오! 작은 새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덤불숲 전체를 꿀로 가득 채우는구나.” (그리스인2/ 384P)


27. 희극적 행위의 발명은 우리의 삶과 비슷하기에 그럴듯하면서도 어딘지 다른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점에서 현실과 어느 정도 괴리가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극에서 자연의 법칙, 이성의 원칙이 우리의 현실에서와는 약간 다르게 작용하는 일련의 세계를 제시한다. 마치 중력의 법칙이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훌쩍 멀리 뒤거나 어마어마한 무게를 들어올리는 것이 가능한 행성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리스인2/ 370P0

☆☆☆우린 왜 희극보다 비극에 더 끌리는 것일까? 우리 안에 슬픔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28. 일식과 별똥별을 아무리 탐구한다 한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안에서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 인간 각자의 안에서 소곤거리다가 문득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447P)

☆☆☆내면을 관조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바깥으로 향한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29. 소크라테스는 또한 우리는 이제까지 기도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십시오, 하는 식의 기복적인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고 햇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신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2/ 457P)

☆☆☆신은 이미 알고 있지만 구해 줄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신에게 빌지 말고 자신에게 기도하라.


30. 그는 우선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관들을 상대로 말햇다.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진실은 한층 더 강력하게 공격해 올 겁니다. 진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의 소리는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만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483P)


31. 크리톤이 물었다.

“소크라테스, 자네를 어떻게 매장해야 하겟나?”

소크라테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야 뭐, 마음대로 하게나. 물론 자네들이 나를 붙잡을 수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말일세.”

크리톤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반드시 알아두게나. 부정확하게 말을 하는 건 영혼에 해악을 가하는  거라네.”

육신의 해체가 그이 삶의 종착역이 아니며 그가 제자들의 영혼 속에서 지속하게 될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우리가 이해했다면 말이다.

이 충성스러운 영혼들은 그를 기리는 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곳, 끊임없이 지식탐구라는 모험을 시작하는 성소가 되었다. (그리스인2/ 488~489P)

☆☆☆그의 영혼은 영원히 매장되지 않고 수천 년 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철학은 몰라도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다. 그의 영혼은 한 번도 잠들어 본 적이 없고, 매장당해 본 적이 없다.


32. 그는 인간의 삶에 끼치는 신의 영향력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안에 깃어 있는 열정의 역할을 통해서 인간을 설명하려 노력했으며, 의지의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허물어지는 인간을 표현하기도 했다. 에우리피테스는 인간을 쥐고 흔들며 때로는 파멸의 길로 이끄는 인간 내부의 비극적인 요소, 인간적인 열정이 지니는 비극적인 면을 통해서 인간을 설명하고자 했다.(그리스인3/ 17P)


33. 메데이아는 복수의 성공,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가운데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녀 앞에는 지금까지 그녀의 힘을 회복시켜 주던 장애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성마저도 넘어섰다. 이제 승리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는 허공에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우리는 메데이아의 죽음(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그녀의 우명이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본성이 이끌어가는 운명이 종착 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말이다. (그리스인3/ 33P)

☆☆☆죽음으로 완성되는 우리네 인생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겟다. 완전한 승리를 쟁취했지만 악에 의한 성취이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은 파탄이 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


34. 매번 불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악의에 찬 인물처럼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독가스처럼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다가 인간 영혼의 모공을 통해 몸속으로 스며들어 몸을 부패시키는 식이다. 바꿔 말해서 사건의 틈새를 파고들어 행을 불행으로 바꾸어놓는다. 서둘러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너무 늦게 쓴 편지 혹은 수취인의 주소를 잘못 쓴 편지 정도만으로도 운명을 뒤바꿔놓기엔 충분하다.(그리스인3/ 50P)

☆☆☆운명이란 질긴 것 같지만 유리알처럼 연약하고 투명하다. 행과 불행이 비치는 데도 기어이 불행을 선택하게 되는 인간의 운명, 이럴 땐 필경 신이 운명의 끈을 낙아채고 있는 것 같다.


35. 운명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순간에 구원의 힘이 잠간 자취를 감추거나 반대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선한 의지들이 단결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을 때 약간의 틈새만 생겨도 모든 것은 그것으로 끝이다. 이 같은 마음의 틈새, 존재의 미묘한 결핍을 통해서 이피게네이아의 운명은 결정된다.(그리스인3/ 50P)

☆☆☆ 마음의 틈새, 이 틈새가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겨울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두고 황소바람이라 한다. 틈이 작기 때문에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그 욕구 혹은 에너지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급기야는 온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고야 만다. 이것이 틈새의 속성이다.


36. 비극을 통해서 비극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으로 살기를 배우며, 신들뿐 아니라 우리자신, 인간인 우리 자신의 약한 마음으로부터 기인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야 하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배운다. 그리고 크고 작은 부침이 끊이지 않는 그 운명의 끝에는 언제나 피할 수없이 이해 할 수 없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그리스인3/ 54P)

☆☆☆우리의 삶은 비극에 속하며, 그 비극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이 만만치 않다.


37. 시인은 사랑과 죽음이 등장하는 곳이면 늘 붙어 다니는 물체들이 이미지들을 촘촘하게 엮어 이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자연의 세계에서 얻은 이미지들로 감각적인 세계가 지니는 아름다움의 편린들이다. 사랑과 죽음은 이러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사랑과 죽음은 녹색 초원과 나무, 이 초원에서 풀을 뜯는 짐승들, 하늘을 나는 새, 여신, 하늘, 강, 황금, 상아....의 아름다움과 하나가 되며, 그런 것들로 치장된다. 

사랑과 죽음은 목동들의 부름, 그들이 부는 피리소리, 밝은 빛깔 모래 위에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여인네들의 발과 어우러진다. 에로스의 화살은 쌍둥이 화살, 신에 대한 감사의 이중적인 화살로 표현된다. (그리스인3/ 54P)

☆☆☆시인이 만들어내는 죽음과 사랑의 이미지는 아름다움의 편린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읽어야 한다.


38. 플라톤은 타라스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 오르페우스주의자들과 어울렸다. 이들은 유랑하는 걸인들로 신전의 입구에 자리 잡고서 조악한 부적들을 건넸으며, 입으로는 쉬지 않고 주줄을 암송했다. 사실 오르페우스주의자들은 가난하고 불상한 사람들이었다. 비참함과 배고픔으로 가득한 삶에서 오르페우스주의는 이들에게 팍팍한 삶을 잊게 해주는 피난처이자 죽음을 약속해주는 일종의 꿈이었다. (그리스인 3/ 158P)

☆☆☆ 배고픔이 철학을 하게 해준다는 말을 확인했다고나 할까.


39. 인간은 부동의 낙원에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역사는 배제하려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인간을 만든다. 안정된 세기들이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그리스인3/ 169P)

☆☆☆역사는 반복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 하고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역사의 반복 속에서 국가, 인간의 삶 또한 반복되는 것이다. 외형만 달라졌을 분이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별반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40. 그는 태양과 별을 사랑했으며, 하늘과 바람결에 실려 가는 구름, 미풍에 흔들리는 나무, 푸른 초원과 강물, 물과 수면에 비쳐서 늘 바뀌는 존재와대상의 그림자를 사랑했다. 그의 저술에는 자연의 세계가 늘 흐드러지게 넘친다. 백조와 매미들은 그의 신화 속에서 즐겁게 노닌다. 키가 큰 플라타너스의 그림자, 샘물의 신선함, 보랏빛 포도송이의 향기 등이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가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누는 대화의 배경처럼 등장한다. (그리스인3/ 174P)

☆☆☆‘플라톤은 실재, 즉 상식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감각적인 것, 색채, 형태, 소리의 세계를 사랑하는 시인이었다.’고 한다.


41.  아킬레우스는 후회없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호기롭게 탕진했다. 바뀌 말해서 자신의 삶을 정념의소용돌이 속에서 흥청망청 낭비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죽음은 유일한 불멸성인 영예를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였다.(그리스인3/ 184P)


42. 오딧세우스는 지옥세계와 대면해야 하는 위협에 처했을 때, 그곳에서 그를 만난다. 오뒷세우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엘뤼시온 들판이라고 하는 죽은 자들의 낙원에서 그가 누리는 왕의 조건에 대해 묻는다. 아킬레우스는 갑자기 힘을 되찾은 듯 분명하게 대답한다.


“나는 저승에서 왕으로 지내는 것보다 지상에서 태양 아래에서 가난한 농부를 돕는 날품팔이 일꾼으로 사는 편이 더 좋다.”


이 한 마디는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를 더할 나위없이 잘 요약한다. 서글픈사후 세계의 위안에 대한 지상에서의 현재 삶이 가지는 으뜸가는 유일무이한 가치를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스인3/ 185P)

☆☆☆지금 이순간을 사랑하는 아킬레우스가 마음에 든다. 화려한 먼미래를 꿈꾸기보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43. 우리는 고대적인 실존의 축이 슬그머니 이동하는 것을 느낀다. 현재의 삶, 기쁨과 고통, 용기와 나약함, 지혜와 무지 속에서 사는 일시적인 현재의 삶은 더 이상 그에 앞서서 수많은 시인들과 현자들이 역설한 것처럼 우리의 가장 값진 재산, 우리 존재의 가장 확실한 중심이 아니다. 지상에서의 삶, 유일하고 제한된 삶, 우리의 유일한 재산, 소중하고 대체 불가능한 육체적인 삶은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삶이 아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진정한 삶을 위한 서곡, 말하자면 일종의 학교, 죽음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에 불과하다.


새로운 소크라테스, 죽음을 넘어서 플라톤 안에서 사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자신인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미래인 플라톤은 지상에서의 삶은 “죽음에의 학습”에 불과하다고 힘을 주어 주장한다. 인간의 끈질긴 희망, 가장 확실한 존재 이유는 내세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감옥에서 사약을 마시는 스승의 얼굴에서 완벽한 평온함, “놀라운 평정심”을 읽을 수 있었다. (185~186P)

☆☆☆ ‘삶은 죽음에의 학습’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말은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웰다잉을 생각하게 한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은 무엇이고 잘 죽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너무나 주관적인 견해 아닐까 싶다.


44. 영혼을 위해서 괘락과 육체의 치장 따위는 자신의 인격에 맞지 않을뿐더러 선보다는 악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것들이라는 이유로 이것들을 내던진 자, 오로지 학문이 주는 쾌락에만 몸을 던지고 영혼을 남에게서 빌린 장식이 아닌 자신만의 장식, 그러니까 절제와 정의 용기, 자유, 진실 같은 것으로 치장한 자를 신뢰해 보아야 하네! 이자는 평온하게, 운명이 자신을 부를 때 길을 떠날 수 있기를, 다른 세계로 떠날 순간을 기다린다네. (191P)


45. 행동하는 영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철학을 하는 것이라네. 다시 말해서 궁극적으로 고통 없이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지.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191P)


46. 플라톤이 저 유명한 소마-세마, 즉 육체는 곧 무덤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이탈리아의 퓌타고라스 학파를 통해서였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무덤’이라고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말한다. (194P)


47. 플라톤은 현재의 삶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죽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이 삶은 덕성이어야 한다. 점점 더 엄중하고 엄격한 덕성의 실천이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을 절대 단념하지 않았다. (195P)


48. 플라톤은 이 문제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탈리아 퓌타고라스주의에 힘입어 더욱 명확하게 다시금 제기했다. "불의가 이 세계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혼을 벌거벗기는 죽음의 순간이 오면 고약한 자들의 내면의 비참함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임을 확신하자, 영혼이 지금이라도 치유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영혼이 영원히 불의 속에서 살게 하는 자들은 불행하도다. (그리스인3/196P)

☆☆☆ <성철스님의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책과 비교해서 생각해 볼 것.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은 누구나 겸허해지고 자신의 죄를 반성하게 된다.


49. 플라톤에 뒤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누스의 방식을 이어받아, 육체를 넘어선 영혼의 시선으로 신을 관조하는 법, 눈에 보이는 창조된 사물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신의 완벽함을 식별해내는 법을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나 플라톤 두 사람 모두에게 이 완벽함이란 존재 안에 투사된 신의 이데아를 가리킨다. 아우구스티누스 학설에 의해 기독교 신학에 편입된 것은 비단 플라톤의 사고만이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신비주의의 대부분, 변질된 영혼의 신으로부터의 일탈 등을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과 그의 수제자인 플로티노스에게서 끌어왔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기독교라는 환상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215P)

☆☆☆ 기독교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볼 수 있는 글이다.


50. "자연이 빚어놓은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합목적성이며, 그것도 아주 고도의 합목적성이다. 그런데 생명체의 형성이나 번식을 주관하는 합목적성이야말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합목적성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까? 그는 각각의 존재, 각각의 기관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특별한 운명을 위해 자연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한 합목적성이다.

자연은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 생명체들이 타고난 이 운명, 궁극적인 존재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은 말하자면 매 순간 이 세계가 지닌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매 순간 기쁨의 절정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스인3/ 236P)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면목을 보았고 느꼈다. 자연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존재이유를 부여한 그는 위대하다.


51. “자연은 불필요한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 “조직하고 제조하며 창의력이 풍부하다”고 말한다. 자연은 “원하고” 언하는 목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다”자연은 그러므로 창조하는 힘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주어진 조건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인3/ 256P)

☆☆☆자연에게는 군더더기가 없다. 자연은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소비하는데 비해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자연을 착취할 수 밖에 없다.


52. 아리스토텔레스의 인본주의란 궁극적으로 식물로부터 생겨나서 동물 잔체를 관류하여 인간에게 이르는 생명, 살아있는 존재를 이성의 빛으로 인도하는 흐름을 가리킨다.(265P)


53. 그리스 인본주의와 불교 인본주의의 만남: 그리스와 인도의 만남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고대사가 낳은 세 가지 인본주의 가운데 두 가지, 즉 그리스 인본주의와 불교 인본주의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지닌 금욕적인 특성은 소크라테스로부터 파생되어 그리스에서 확산되기 시작하여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이미 견유학파와 더불어 만개했던 금욕주의와 희한하게도 잘 어울렸다. 이 경향은 또한 플라톤의 금욕주의와도 썩 잘 어울렸다.(296~ 297P)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합쳐진 것이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간다라미술이 탄생한 것이다.


54.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아스>를 미치도록 좋아했다. 그는 저녁이면 잠들기 전에 <일리아스>를 읽고 또 읽었다. 머리맡에 칼과 함께 놓고 잘 정도였다. 이 죽음의 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간에 대한 격렬하고 역설적인 긍정으로 무장한 알렉산드로스, 전쟁터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던 그가 아킬레우스가 뤼카온을 내려치면서 한 말 (“그러니 이제 죽거라. 친구여, 너보다 훨씬 나은 파트로클로스도 죽었다.”) 을 떠올리지 않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죽음을 선사하는 몸짓 속에까지 스며 있는 우정의 흔적은 죽음을 맞이해야 할 공동의 필요에 따라 직면하여 모든 인간,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적과 친구를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결합시키는 형제애의 매우 특별한 표시가 아닐까?(308_309)

☆☆☆ 알렉산더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곳곳에 드러난다. 


55. 그리스의 시는 모두 그리스만의 자연을 담고 있으며 이 자연은 실제적인 동시에 몽상적이다. 이는 눈부신 빛과 소리, 냄새로 가득 찬 아리스토파네스와의 자연과는 다른 종류의 자연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는 가래가 뿜어내는 광채 속에서 땅을 일구며, 마을에서는 두엄이 썩어가는가 하면, 로즈마리의 향기가 나고 새로 담근 포도주가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여인네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풍만한 가슴을 맡기며, 울타리에서는 이름모를 작은 새들이 재잘되고 햇빛에 환장한 매미도 기를 쓰고 목청을 높인다. 이는 또한 헤시오도스의 떨떠름하고 성마른 자연과도 다르다. (그리스인3/ 540P)

☆☆☆ 앙드레 보나르의 문장력과 묘사력이 돋보이는 글이다. 그의 활발발한 문장과 깊은 철학적 사유가 책 여기저기에서 빛이 난다.


56. 루크레티우스는 ‘기품 있는 열정’이라고 표현되는 문체를 빌려, 이렇게 선언했다.

  “그는 신이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지혜라고 일컫는 삶의 법칙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자신이 정립한 학문을 통해 이간의 실존을 수많은 폭풍과 수많은 암흑으로부터 끌어내어 이루 말할 수없는 평온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그리스인3/ 553P)


57.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그는 벌써 환자이기도 했다. 편지에서도 드러나듯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감수성을 소유한 그였지만, 그의 몸을 갉아먹는 위와 방광의 병,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아무런 치료도 기대할 수 없었던 그 질병이 주는 고통으로 심신을 단련시킨 그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 질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스인3/ 554P)

☆☆☆질병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질병을 공부삼아 철학자의 길로 들어선 이들도 있다.

58. 에피쿠로스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기원전 306년에 정원을 구입했다. 꽃이 만발한 이 자그마한 정원에서 그는 죽을 대까지 제자들을 가르쳤다. 죽음을 맞이하는 날, 그는 진실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을 탐색하고 마감하면서 총체적인 소감을 기록했다.

  “오늘이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 나의 마지막 날이라네. 방광의 고통과 복통은 여느 대와 다름없이 항상 극심하며 조금도 격렬함이 덜어지지 않았지. 하지만 l 모든 것에 대항해서 나는 우리가 과거에 나눴던 대담을 회상할 때면 영혼의 기쁨을 내세운다네. 사춘기 때부터 나의, 그리고 지혜의 변함없는 친구였던 자네가 메트로도로스이 자녀들을 잘 돌봐주어야 하네.”(555P)

☆☆☆에피쿠로스의 유언 속에는 그의 일생과 철학이 함축되어있다.


59. 인간은 불행하다고 에피쿠로스는 단언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기쁨을 위해 태어났다. 에피쿠로스는 기쁨의 필요성, 기쁨의 소박함, 기쁨의 즉각성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기쁨은 언제나 우리가 손을 내밀면 잡힐 만한 곳에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현실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가 가진 으뜸가는 두려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 앞에서 인간은 마치 곧 끝 모를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와 현기증으로 가득 찬다.(566P)

☆☆☆인간의 비극은  유한성을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이 탐욕에 눈멀게 한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온 것처럼 생각하고 산다면 우리의 시간들은 날마다 축복과 행복과 만족으로 가득 찰 것이다.


60.죽음 다음가는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의 공포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 신에 대한 공포다. 인간은 신들이 높은 하늘에서 그들을 살피고 관찰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며, 신의 지고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이를 우습게 여기는 인간에게는 벌을 내린다고 믿는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들은 신탁을 경청하며 제사장들에게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하며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묻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에는 엄청난 부조리와 광기, 심지어 때로는 범죄까지도 판을 치게 된다. 신화적 전통에 따르면 종교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루어지는 범죄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루크레티우스는 이 대목에서 저 유명한 분노의 외침을 들려준다.

   “종교 때문에 우리가 다다르게 되는 중죄의 심연!”

죽음과 신에 대한 공포라는 이중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류는 비참함의 수렁 속에서 살아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죽음과 신에 대한 두 가지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 부조리한 존재,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죽은 존재인 신들에게 그 어떤 자리도 내주지 말아야 한다. (567p)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납득할 수 있지만, 신에 대한 공포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학교로부터 그렇게 교육받앗다. 복을 주는 이는 누구고, 죄를 내리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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