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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0일 10시 4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앙드레 보나르(1888-1959)

 

 

1888년 스위스 로잔에서 탄생.

1915-28년 로잔중학교와 고전 김나지움에서 학생을 가르침

1928-957 30년 동안 로잔 대학 그리스어, 그리스문학 교수를 지냄

1949년 ‘스위스평화운동’의 회장으로 추대되어 평화활동을 계속함.

1952년 냉전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 ‘국제평화수호자대회’참석차 동베를린으로

가던 중 스위스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됨. 집행유예로 풀려남.

            그 후  그리스 문명사 연구와 집필에 매진.

 

 

앙드레 보나르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저항하는 ‘참여하는 인문주의자’였다.

자신의 작품 <프로메테우스> <안티고네>등에서는 주인공에게서 저항과 참여의 정신을 찾고자 했음.

 

 

그리스인이야기는 한평생 그리스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은퇴한 뒤에 심혈을 기울여 쓴 노작이다.

일단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1400쪽이 넘는 책이다. 1954 1 1957 2 1959 3

그가 작고하기 며칠 전에 출간되었다. 스위스에서 불어판으로 출간된 이 책은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일찍이 각국어로 번역 출간됨. 그리스 문명사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음.

 

<두 번 읽기 나의 의견>

 

그 동안 읽었던 책들의 요점정리편이다. 아주 조금 줄기가 섰다. 신화를 읽고 듣고 보고 하면서 그리스에 대한 애정이 많이 생겼다. 함께 안타까움도 생긴다. 현재의 그리스를 보면서 말이다.

인류문명의 발생지 이면서 신화의 나라 신화의 고장 인류의 모태인 나라가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모멘텀이 있어야 가능할까. 고민해본다. 이번 연구원 여행지 시칠리아를 둘러보면서 당시 지중해를 주릅 잡던 그리스인들이 그곳에 있을까. 로마 원형극장은 게임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상승에너지를 얻기 위한 타원형,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제일 좋은 자리에 극장을 만들었다. 연극공연을 위해서.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서 바람이 시원해지는 저녁 무렵에 모여 앉아 연극을 관람했을 그리스인들을 생각해본다. 21세기의 현실은 팍팍하지만 상상속에서는 수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본다. 현업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지 그리스의 어제와 오늘.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를 계속 생각 중이다.

 

1.2권 나의 의견

 

일단 방대한 양에 압도되었다. 양에 압도된 나를 구제해준 것은 내용이었다. 일단 재미있다.

오래 전 이야기이고 이제 몇 달 신화를 읽었다고 줄거리가 혼동되기는 하지만 친숙한 이름들이 주루룩 나온다. 신화를 읽으면서 해석하지 못했던, 나의 의식수준에서는 알기 어려움을 노작가를 통하여 알게 되는 기쁨도 컸다. 30년을 그리스와 함께한 작가이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싶으니 방대한 분량에 대하여도 이해가 되었다.

새삼 느끼는 일이다. 신화가 우리생활에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또 하나는 내 나라의 역사는 잘 알고 있는가 이다. 지금 내게 더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을지 모르는 서양문화의 근간이기는 하나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피는 나의 조상의 피인데, 그것에 대한 이해는 또 얼마나 하고 있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열심히 책을 보고 글을 적는다는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공부 꺼리를 내게 던져준다. 기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조급함도 생긴다. 살다가 할 일없을 때 하는 것이 공부라고 하셨다. 나의 스승은. 이제 할 일이 많지 않으니 책을 열심히 봐도 좋겠다.

그리스인이야기는 출판사의 말이 아니라도 곁에 두고 볼 책이다.  

 

3

 

그리스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신화의 고장이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학문이 태동한 곳. 민주주의가 태동한 곳. 유목민에서 농민, 상인으로 또 뱃사람으로 척박한 현실을 타게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나라이다. 물론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을 수 있다. 그 중에서 앙드레 보나르는 노예제도를 많이 이야기한다. 1.2.3권에 걸쳐 중간 중간 이야기를 한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몰락원인도 노예제도로 꼽는다 . 우수한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이유도 노예제도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맞는 말이다 싶다. 인간은 눈앞에 방법이 있을 때 한치 앞을 내다보는 것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긴 호흡으로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 삶의 지혜이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한다. 후대의 어느 순간에 플라톤이 이겼지 싶다. 기독교와 맞물리는 사상. 혹시 정치적인 목적과도 부합되었을지도, 제일 마지막에 에피쿠로스를 배치한 것.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참조 : 그리스인이야기1 김희균옮김. 강대진감수 2, 3양영란 옮김. 강대진 감수

출판/책과 함께

http://well.hani.co.kr/7879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print.asp?article_num=50110415161946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70027.html

 

1번 읽기

2번 읽기

2번 읽기 느낌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Chapter 1 그리스 문명의 탄생

 

11 인간은 모두 원시인으로 시작했다. 그리스인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원시 부족의 하나였을 뿐이다. 원시부족들은 천천히 성장해서 하나의 문명을 이루기도 하고,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다행히 그리스는 문명을 이뤘다. 문명을 이룬 데 그친 게 아니라, 화려한 꽃을 피웠다. 후세에 길이 남을 걸작이 수도 없이 탄생했다. 소포클레스가 그렇고, 힙포크라테스가 그렇고, 파르테논 신전이 그렇다. 문명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없는 문명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도 처음에는 원시 부족이었다. 동물에서 시작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동물의 속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인간이 동물이니까. 당연하다. 그리스 문명 이라고 하면 수도 없이 많은 분야에 인물들이 있다. 그 중 저자는 유독 세 가지를 꼽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운명에 화답하는 필멸의 인간,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는 의술, 인간이 만들어낸 신전. 필멸의 인간이 불멸의 신의 집을 만든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는 하다.

 

14 그리스 사회는 좋게 말해서 문명과 원시 시대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시간이 흘러 없어질 만도 한데, 라고 생각했던 시기에도 원시적인 풍습은 계속되었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그것이 그리스 문명의 몰락을 재촉한 한 요인이 되었다.

 

내가 하는 일하고 요즘 그리스하고는 너무나 밀접하다. 정치가 개인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평소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조금 달라졌다면 이제는 관심을 갖기는 할려고 하는데 그리스라는 나라는 근래에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나라이다. 이번 기회에 그리스라는 나라의 역사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질에 대하여 이해의 도가 높아지려나…기대하고 있다.  

 

15 테바이를 제외한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새로 태어난 아이를 버릴 권리가 있었다. 큰길가나 신전 앞 계단 등이 갓난아이를 버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런 이런…참 나쁜 놈들이다. 아버지의 권리라…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하나, 21세기에 태어남을. 꼭 그렇지는 않겠지. 지금이 그때보다 더 잔인한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가장이 자신의 아이를 버릴 권리가 있다고는 하나 그들도 인간인지라 남들 눈에 잘 보이는 곳과 인간과 신이 교통하는 것을 택했나 보다. 누군가가 거두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겠지.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류 역사의 첫 천 년 동안 여자들은(아이올리스 지방을 제외하고)거의 노예나 다름 없었다.  살림하고 아이 만드는 일에 쓰이는 노예가 여자였다.

 

15 그리스 민족이 발을 붙이고 산 땅에는 온갖 미신과 혐오스러운 풍습이 가득했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의 문명도 마찬가지다. 문명은 원시인들의 토양에서 차츰 싹을 틔우고 자라온 것이다. 필요하니까 발명을 했고, 우연히 기후가 좋아 생산량이 늘어났고, 그래서 문명을 이룬 것일 뿐이다.

 

필요해서 발명을 했다는 것과 발명을 하고 나니 여유가 생겨 또 발명을 하는 선 순환 구조이다.

일단 선 순환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만들어지면 여유가 생긴다. 특히 밥벌이에서 자유로워야 가능한 일임.

 

16 그리스 문명은 바로 우리의 문명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문명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명이다. 푸른 장밋빛의 그리스, 이성과 예술의 꽃을 피워낸 그리스. (Taine)과 르낭(Renan)

칭송해 마지않던 영원하고 달콤한 그리스는 인간의 땀과 피가 흠뻑 젖은 땅에서 태어났고, 지금부터 서서히 그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문명의 뿌리는 돈이다. 시대에 따라 부의 형태는 다르지만 부의 축적이 문명 태동의 근간이다.

 

16 그리스인도 처음에는 원시인이었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그리스 말로 문명화된 인간이라고 할 때, ‘문명화된’이라는 말은 ‘길들여진’,’교육을 받은’ 혹은’접붙인’이라는 뜻이다. 문명화된 인간, 다시 말해서 접붙인 인간이란 좀 더 영양이 풍부하고 좀 더 맛있는 열매를 맺을 줄 아는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문명이란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서 생산력이 늘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그 문명 덕에 사람들이 목숨을 보전한다.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윈시인들은 그저 자연의 법칙을 깨달아 알고, 자연에 대해 반격을 가할 수 있다. 문명은 인간을 생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모여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사람들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과학과 예술을 향유한다. 실재 세계는 물론이고, 예술 작품을 통해서 상상의 세계에서도 살아가게 된다. 실재하는 세계를 파악하는 힘이 과학이라면 상상 속에서 또 하나의 실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예술이다. 과학과 예술로 무장한 인간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이요 인간됨이다. 인간됨은 다시 새로운 발견과 창조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아주 정확한 정의는 아니겠지만 문명이란 이처럼 발견과 창조의 연속이라고 정의해두기로 하자.

 

18 처음 보는 바다에 처음 만들어본 배를 타고 나가는데 어떻게 무섭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리스인들은 어떤 시인의 말처럼 “가난 때문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바람과 파도가 지배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건을 싣고 나가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 노력 끝에 결국 바다를 정복했고, 당대 최고의 상인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요컨대 농부로 시작해서 뱃사람으로 진화해온 것이 그리스 문명의 내력이다.  

 

19 그리스인들이 또 하나 배운 게 있다면, 그것은 詩시다. 사물을 시적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고심하던 그리스 민족은 소위 문학과 만난다. 물론 그리스 언어에는 문학이라는 단어도 없었다. 단지 표현력이 풍부한 작품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을 뿐이다.  

 

19 힘든 일을 하면서 노동요를 부르는 것은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다른 원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노동의 고단함을 달랬다. 그리스 시인들은 이처럼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노동요의 리듬을 개발해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시, 정확히 말하면 서사시다. 오래 전 영웅들의 삶을 풍부하고도 절제된 리듬에 담아낸 시다. 서사시는 우선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후세에 알려졌다.

구전의 힘은 강한 것 같다. 잠시 전에 한 제약회사에서 사무실에 와서 획기적인 치료제를 소개한다며 치매치료제를 소개하고 갔다. 21세기 우리를 위협하는 첫 번째 질병. 치매. 나이불문하고 환자 발생율이 증가한다고. 이유는 IT기기 탓에 머리를 쓰지 않는다고, 스마트 폰, 네비게이션 등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느라 정작 뇌는 쪼그라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기나긴 서사시가 구전으로 전해져 온다는 것은 감동적이다. 노동요를 함께 부르던 그들과 달리 각자 이어폰을 끼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공부도 일도 한다. 노동요대신 일까?

 

19 음악과 춤에 가깝고, 사람들의 일상에 훨씬 더 밀접하게 관련된 시였다. 조롱하거나 기뻐하거나 흥겨워하거나 훈계하는 일상적인 행위들을 표현하면서,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즐거운 노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서정시다.  

 

20 서사시, 서정시, 극시, 이 세 가지 장르에는 언어로 빚어낸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가 있다. 고통과 희망이 있다, 상상의 세계에서 마주치는 꿈과 환상이 있다.  

 

20-21 기원전 7세기와 6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들은 사물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세상을 이루는 것들의 법칙을 알아내는 것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그리스의 과학은 이때 생겨났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알고 싶어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지식을 인간을 위해 요긴하게 쓰고자 했다. 수학을 만들었고, 천문학을 개발했다. 물리와 의학의 기본 지식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그들은 어째서 그것들을 발명하고 발견하는 데 매진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에게 득이 되고, 인간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모든 인간들이 그것을 누리게 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리스 문명은 도시를 위한 문명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중심과 그 주위의 농지를 묶어 구획된 도시에만 문명이 있었다. 도시는 문명의 힘으로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은 평등하게 문명을 향유할 권리를 가졌다. 그리스의 도시는 이처럼 국민주권의 원리를 구현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불완전하게나마 민주주의를 고안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21 그리스 문명의 목적은 하나다. 자연에 맞서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것,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그리스 민족의 문명은 인간의 문명이었다. 인간에게 봉사하는 문명이었다.

 

 

22 프로메테우스, 인간 진화의 신화적 증인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말처럼 원시인에서 문명으로 진화해왔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증인이었을 뿐이다.

 

내가 인간들에게 합리적 이성이 무엇인지 눈뜨게 해주었거늘, 이 불쌍한 족속들의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흘러왔는지….인간들은 눈이 있으되 보지 못했고, 귀가 있으되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몰랐다. 그저 원숭이들처럼 그 기나긴 생애 내내 이 무질서한 세상 속에서 흔들리고만 있었다. 하늘 아래 집을 지을 줄도 몰랐다. 벽돌이 무엇인지, 대들보와 천장이 무슨 소용인지도 몰랐다. 땅속의 개미들처럼, 어두운 지옥과도 같은 토굴 속에 갇혀 지냈다. 계절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알 리 없었고, 하늘을 보고서도 겨울과 꽃피는 봄과 열매가 무르익은 여름이 어떻게 오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알지도 모른 채 그저 살아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불쌍한 이 족속들을 위하여 천지의 운행을 읽어내는 기술을 알려주었으며, 모든 지식의 시작이랄 수 있는 숫자를 가르쳤다. 이 세상의 일들과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해낸 것들을 기록하고 남길 수 있는 글자도 가르쳐주었다. 글자야말로 모든 기술 가운데 으뜸인 것이다. 그들의 힘든 노동을 덜기 위하여 짐승의 목에 쟁기를 거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그런 후에야 사나운 소들도 인간에게 봉사하기 시작했고, 들판을 마구 달리는 말도 인간이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말은 수레를 끌었고, 마차는 왕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바다로 나가는 인간들을 위해 나는 돛단배를 선물하기도 해싿. 어디 그뿐인가. 인간이란 본디 병에 걸리면 죽을 도리밖에 없는 족속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약을 만들었고, 병을 치유하는 향유를 만들었다. 시들어가던 인간들이 기운을 차리고 강건해졌다….나는 그들에게 땅에서 나는 보물들을 주었으니, 금과 은이 그것이었으며, 청동과 쇠가 그것이었다….이제야 비로소 인간들은 과학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23 무식한 유목민, 토착 에게인에게 문명을 배우다.  

25 오늘날 페르시아와 인도, 유럽으로 흩어져 살게 된 족속들은 원래 같은 동네에 살면서 같은 언어를 썼던 것 같다. 사람들 얘기로는 현재 우랄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의 평원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이 인도유럽어족이라고 한다. 이 인도 유럽어족이 기원전 3000년경 각자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27 에게인들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유적 어디를 둘러보아도 성곽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원전2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에게해로 밀려든 그리스인들은 처음에 에게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에게인들이 훨씬 앞선 민족이었다는 말이다. 그리스인들은 심지어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1400년경에 반란을 일으켜 크놋소스 궁전을 불태우게 된다. 그로부터 그리스인들은 에게인들의 신과 신화, 기술을 전수받아 자신의 역사를 시작한다.  

 

28 그리스의 배는 에게해를 넘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해안선을 따라 찔끔찔끔 내려가거나 이 섬 저 섬으로 옮겨 다니면서 도적질을 일삼았다. 그리스인에게 바다는 교역의 장이 아니라 범죄의 거점이었다.

 

29 트로이아 전쟁에 얽힌 수많은 일화들이 영웅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전쟁의 원인은 순전히 경제적인 것이었다. 강도들 간의 세력 다툼이었다. 이 구질구질한 전쟁의 기록이 바로 [일리아스].  

현대의 전쟁도 원인은 같다. 자국의 먹고 사는 문제 또는 그 이상의 경제적 이득이 동기의 원인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 쿠션 더 넣은 것이라고 할까. 표면적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어린아이의 거짓말처럼 눈에 보인다. 스스로 만들어낸 논리라는 것도 유치할 정도로 뻔한 경우가 허다하다. 아는 자의 눈에는, 열심히 탐구하는 자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고 공부하지 않은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명분아래 자행되고 있는 총성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31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11세기, 10세기, 9세기의 어두운 밤에 그리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날은 차츰 밝아오고 있었다.  

 

31 그리스 땅을 보면 도드라지는 것은 산과 바다 두 가지다.  

 

32-33 그리스 역사에서 30년 이상 된 전쟁은 있었을지언정 30년 이상 지속된 평화는 없었다. 도시들끼리 이처럼 자주 다퉜던 역사가 항상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다툼은 다양한 형태의 경쟁으로 나타났다. 도시는 운동으로도 겨루었고, 문화로도 겨뤘다. 소위 게임이 성행했다. 가장 큰 운동 경기인 올림픽이 열릴 때면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다. 이 축제 기간에는 외교관이든 운동선수든 구경꾼이든 자유롭게 남의 나라를 넘나들었다. 나라들 간에만 경기를 한 것도 아니었다. 시민들 사이에도 늘 경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아테나이에는 비극이나 희극, 서정시 경연이 열렸다. 상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었다. 담쟁이넝쿨로 만든 관을 쒸워 주거나 무화과나무 한 무더기를 주는 것이 전부였다.  

 

33 아테나이 등에서는 미인대회가 열린 적도 있다. 미인대회는 지방마다 달랐고, 남성들의 미인대회가 있는가 하면 여성들의 미인대회도 있었다. 아테나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는 상으로 방패를 받기도 했다.

 

미스 미스터 코리아 뽑는 것과 같은 건가 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33 도시에 영예를 안겨준 승자들은 그에 걸맞은 상을 받았다. 도시의 중심이랄 수 있는 시청에서 먹고 잘 수 있는 것, 그게 상이었다.  

 

35 이집트와 바뷜로니아의 앞선 문명을 그리스인들도 충분히 존중했다. 다만, “자유롭고 싶고 누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스가 여느 민족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피게네이아는 “야만족은 노예를 키우고, 그리스 민족은 자유를 키운다.”는 명언을 남겼다. 물론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37 올리브와 포도주의 나라

그리스인들이 뱃사람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들은 배가 고팠기에 배를 만들고 바다로 나갔다. 그리스는 실로 가난한 땅이었다. “그리스 문명은 배고픔을 먹고 자랐다.”헤로도토스는 그렇게 고백했다. 땅은 척박했다. 언덕은 돌 투성이였고, 날씨는 가물었다. 들판에 풀이 자라고 꽃들이 만개하는 봄은 짧고 부질없었다. 날이 개면서 여름이 찾아왔고, 모든 것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39 마시자! 뭐하러 등불 밝힌 밤이 오기를 기다리겠는가? 해가 반 주먹도 남지 않았는데. 친구여, 찬장에서 커다란 잔을 꺼내게.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 준 이 선물은 현세의 고통을 잇게 해주는 것이니. 포도주 한 잔에 물 두 잔을 섞어서 자, 파도타기로, 건배!

 

40 포도주 예찬론은 여러 군데서 읽을 수 있다. 호라티우스 이전에 레스보스의 알카이오스가 “나무를 심으려거든 무조건 포도나무부터 심으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진실의 거울’이라 부른다. 몇 잔 마시면 사람 속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술은 알맞게 마시면 혈액순환을 도와 식욕을 돋구고 스트레스나 욕구불만을 부드럽게 한다. 또한 신진대사를 높여 피로를 푸는 효능이 있다. 그러나 일정수준이 넘어서면 대뇌피질의 작용을 저하시켜서 긴장상태가 풀어지고 무의식안에 함께하던 또 다른 자기가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사람 속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평소에는 속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 속이라는 것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어서 또한 무엇이 있는지도 알기가 어렵기도 하다. 술에 대한 예찬을 예나 지금이나 유효하다. 특별히 포도주는 신의 물방울이라는 히트작이 있을 정도로 오랜시간 인간에게 사랑받는 술 중 하나이다.

 

40 이처럼 그리스인들이 가난하게 산 이유는 척박한 땅과 낙후된 기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분배의 불평등이다.  

 

43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모여서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권력을 가진 자, 그리고 그 권력 위에 군림하던 신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하지만 역사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44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한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후나 토지, 바다와 같은 자연조건도있었고, 역사적인 사건이나 전설도 있었고, 계급 투쟁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도 한몫 거들었다. 이런 것들이 용광로처럼 섞여서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하면 소위 문명의 탄생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의 기적이 만들어진 걸까? 그렇지는 않다. 어떤 학자들은 기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기적은 없다. 그것은 비 과학적인 단어이고, 따라서 그리스 답지 않다. 기적은 과학이 아니므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설명을 감탄으로 치환하는 것 뿐이다. 진실은 이렇다. 그리스 민족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그들의 수단을 가지고 문명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신이 기적처럼 나타나서 특별한 재능을 부여했을 리 없다. 문명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분투해온 것들의 결과물이다. 그 안에 그리스 민족이 끼어 있을 뿐이다.  

 

45 그리스 문명은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45 인간은 세계를 바꾸고 세계는 다시 인간을 바꾼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문명의 본질이다. 인간과 세계의 접합. 인간과 세계의 융합을 지향한다. 인간과 세계는 대립하는 당사자로서 서로 싸우고 투쟁한다. 그러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어나간다. 문명을 완성하는 것이다.  

 

Chapter 2.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49 위대한 시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그리스 민족의 전쟁사다. 정복욕에 불타서 혹은 신의 부름을 받아서 전쟁에 나선 영웅들의 이야기다. 가장 끔찍한 재앙에 투입된 인간들, “신 가운데 가장 더러운 신이며, 피를 마시고 사는”아레스의 포로가 된 인간들의 이야기다.

호메로스는 지금부터 그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인간의 고결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죽이고 죽을 뿐인 그들의 용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자기 대를 이을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죽음을 앞둔 늙은이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적장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상황은 이렇다. 장군들은 탐욕과 야망에 들떠 있다. 장군들이 섬기는 신은 전능하며 힘이 세다. 가끔씩 시기에 불타고, 사소한 이익에 흔들리고, 곧 죽을 인간들에 대해서는 무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전투가 있고,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에 투입된 인간들에게는 용기와 우정과 사랑이라는 무기가 있다. 연민은 복수보다 강한 법이다. 고결한 사랑을 아는 인간은 신만큼이나 위대한 법이다. 호메로스는 그런 인간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죽음의 그늘이 가득 드리워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역설적으로 곧 끝나고 말 생에 대한 찬사이고, 목숨보다 그리고 신보다 더 위대한 인간들에 대한 증언이다.  

 

50 전설이 되어버린 트로이아 전쟁은 오늘날 그리스 본토라고 불리는 뮈케나이의 아카이아인들과 소아시아의 아이올리스인들 사이의 경쟁심이 발단이 되었다. 이 가운데 시인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끄집어냈다. 첫째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이고, 둘째는 그리스 연합군을 이끄는 뮈케나이의 왕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알력이고 마지막 셋째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아를 정복하는 장면이다.  

 

53 아폴론의 개입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는 헥토르와의 일대일 전투에서 무참히 죽고 말았다. 가장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접한 아킬레우스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머리를 쥐어 뜯으며 땅바닥에 드러누운 아킬레우스는 입은 옷을 찢고, 얼굴에 흙을 뒤집어썼다. 울고 또 울었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마음먹기도 했다.(하지만 그리스인은 자살을 비겁한 자의 피난처라고 생각했다). 아가멤논에게 받은 상처가 아직 생생한 터에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아킬레우스를 괴로움의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슬픔은 삶에 대한 욕구에 불을 질렀다.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자기 민족과 둘도 없는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것이다.

 

바닥을 치면 솟아오르게 되어있다. 단단한 바닥을 짚어야 하는 것이다. 슬픔이 바닥일수도 있고 고통이 바닥일수도 있다. 일층이 바닥일수도 있고 지하동굴이 바닥일수도 있다. 순간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바닥을 칠 것이고 그러면 솟아오를 것이다. 인간이니까 가능한 일 중에 하나다.

 

55 시편의 마지막은 이랬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죽인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시신이라도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아킬레우스는 늙은 아비의 간청을 들어주었고, 헥토르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 헥토르를 애도하는 노래가 트로이아 성안에 울려 퍼지고, 여인들의 울음소리는 오래도록 그칠 줄 몰랐다.

 

56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종래의 구전 설화를 문학 작품으로 바꾼것이라고 한다. 이전의 시들이 즉흥적인 것이었다면, 호메로스의 시는 정교하게 다시 만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 최초의 서사시라고 부르는 이 작품은 상인 계급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 글이 없던 시절 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것을 호메로스라는 이오니아 시인이 풍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예술 작품을 승화시켰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야기들을 재구성해서 파피루스에 글로 남긴 것이 바로 <일리아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상인 계급이 똑 같은 얘기에 예술적 가치를 더했고 형태를 입혔다. 그것이 상인 계급에 의해 여러 도시로 퍼져나가 그리스 민족 전체의 유산이 되었다. 민중시<일리아스>는 이렇게 태어났다. 시인이 시를 다시 만들었으며, 새로운 시대를 맞은 그리스 민족의 시가 되었고, 마침내 우리 모두의 시가 되었다.

 

61 아이아스의 용기는 고집스럽다. 달려들어 공격하지도 않는다. 수퇘지 같은 몸은 공격형이 아니다. 성격도 꼭 그렇다. 바보는 아니지만, 단순하다. 어렵고 복잡한 것은 싫어한다. 그리고 전령들이 아킬레우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단순한 아이아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깟 브리세이스 때문에 칼을 거두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말이다.  

 

63 그 한 여자 대신 일곱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전리품도 더 얹어준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여자가 가장 소중한가? 경우에 따라 다르지. 때론 가장 소중하지…그랑블루 이런 남자 멋지다.

 

63 공격은 몰라도 수비에는 아이아스만 한 전사가 없다.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는 죽으나 사나 자리를 지킨다. 말 그대로 단순하다. 경계석 같다. 돌처럼 서서 경계를 지킨다. 그가 있는 한 누구도 넘어올 수 없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그를 탑 혹은 벽이라고 부른다. 단단하기가 콘크리트 같다.  

 

64 기댈 것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두 주먹 불끈 쥔 힘으로

여기서 끝내자. 내 목숨 내가 지키든지

아니면, 깨끗하게 끝을 보든지.  

 

64 디오메데스의 용기는 날렵하다.

 

65 그는 맡은 임무만 끝내고 마는 성격이 아니다. 미친 사람처럼 죽어라고 맨 앞에 선다. 모든 장수들이 헥토를 앞에서 뒷걸음질을 칠 때 그는 홀로 갑옷을 고치고 섰다. 그게 디오메데스다. 손에 준 창도 디오메데스를 닮아 반쯤은 미쳐 있다. 그 스스로 고백하기를, “이 놈의 창은 내 손 안에만 들어오면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66 그는 정열적이다. 정열에도 색깔이 있다. 아킬레우스의 정열이 우울하고 엄숙한 것이라면, 디오메데스의 정열은 밝고 경쾌하다. 광신도의 열정이다. 광신도는 그리스 말로 신의 기운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69-70  파리스가 댄 이유라는 것도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  

 

내 슬픔을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방 안에 나를 가두어두었지.  

 

가면 간다. 안 가면 안 간다. 확실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 마누라가

나가 싸우라고 자꾸 나를 떠밀고 있어.  

 

마누라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한테 파리스는 꾸지람을 듣는다. 그렇게도 그는 잘도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때마다 변명도 횡설수설이다.

 

알아, 알아

승리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늘 자리를 옮기는 법이니까.

옷 좀 입을 테니까 기다려.

먼저 가 있으면 뒤따라가든지….

내가 오히려 형보다 먼저 도착할걸.

 

자랑스러운 트로이아 전사의 말투가 아니다.

무기를 들어도 파리스는 겁쟁이의 무기를 든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무기는 단연코 활이다. 활을 들고 있는 한 적과 일대일로 맞붙을 일이 없다. “무릎이 덜덜 떨리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필요가 없다. 파리스는 동료들을 앞에 세워두고, 혹은 비속 뒤에 숨어서 활을 쏜다. 적이 활에 맞으면 그제야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71 헥토르가 욕을 해대자, 파리스는 순순히 자신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자기의 아름다움과 사랑은 욕하지 말라고 대꾸했다. 진지하게 그는 형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하고 있다.  

 

미의 여신이 내게 준 선물을 욕되게 하지 마라.

신이 준 것은 마음대로 버릴 수 없다.

은총이기 때문이다.

은총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73 파리스의 정반대 편에 헬레네가 있다. 둘 다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파리스와 헬레네는 속마음에서 극과 극이다. 헬레네는 기본적으로 도덕 관념에 충실하다. 천하의 아프로디테가 그녀 마음에서 사랑이 활활 타오르게 해도, 헬레네는 한사코 거부한다. 파리스는 신을 따르지만 헬레네는 신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둘 다 멋지고 아름답다. 멋지고 아음다운 것을 긁어낼 수는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의 운명은 잔인하다. 헬레네는 정돈된 삶을 지향한다. 가족끼리 평화롭고 온전하던 때가 못내 그립다.  

 

나는 내 온전한 방과 가까운 친지들과 사랑하는 딸을 두고 떠났다.

그리고 지금 눈물 속에 시들고 있다.  

 

헬레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트로이아인들을 십분 이해한다.  

 

74 신은 인간의 질서니 인간의 법도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신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질서를 따르는 헬레네를 포로로 삼아서 인간 세상을 흔들어놓는다. 헬레네는 아프로디테의 먹잇감이다. 아프로디테가 헬레네 속에 들어온다. 헬레네는 아프로디테를 닮아서 아름답다. 그리고 남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다.  

인간의 질서니 법도니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해낸 그럴싸한 방안이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조금씩 인간에서 신에게로 가까이 가고 있는 듯하다. 규칙위반자가 점점 늘어난다는 이야기이다.

 

75 헬레네는 아름다움을 갈구하지 않았다. 꾸민 적도 없고, 꾸밀 의지도 없다. 다만 신으로부터 받았을 뿐이다. 헬레네의 아름다움은 운명이다. 그래서 더욱 쓰리다.  

 

미인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좋을 이유이다. 몇 달 전에 유명배우의 인터뷰 글이었다. 자신은 남자를 만나서 차를 한잔만 마셔도 스캔들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 그 사람하고 인연인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남들은 가볍게 차 한잔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의 유명세때문에 족쇄가 된다. 그러다보니 몇 남자 만나보지 않았는데 그들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살아보면 별다른 남자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 누구나 이기적이지만 특히 남자는 이기적이다라고 결론을 맺는 노 여배우를 보면서 아름다움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위안을 받았다.

 

75 아킬레우스:현재에 충실한 인간형

 

아킬레우스는 젊음과 힘을 상징한다. 그는 우선 나이가 어리다. 이제 겨우 스물 일곱 살이다.  

 

79 도대체 여신에게서 태어난 아킬레우스라는 이자는 사람인가, 짐승인가? 나는 아킬레우스가 기본적으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이다. 그것이 아킬레우스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열쇠다. 그는 우정에 약한 만큼 증오에도 약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 감염되어 있고, 영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지만,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인간이다. 따라서 감정의 포로가 되기 쉽다. 우리는 뤼카온을 불쌍하게 여기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분노로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는 사람의 심장을 쇳덩어리로 만든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킬레우스는 슈퍼맨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감정에 흔들리지만, 신은 감정에 초연한 법이니까.

아킬레우스는 상수라기보다는 변수다. 지배자라기보다는 피지배자다. <일리아스>는 총 네 개의 축이 있다. 브리세이스, 아가멤논, 파트로클로스,헥토르다. 아킬레우스는 축이 아니다. 네 걔의 축 사이를 제 감정에 못 이겨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는 데 불과하다. 사랑과 증오 사이에 잡혀 있다. 아킬레우스의 영혼은 그래서 늘 폭풍이 불고 흐림이다.

 

80 감정과 상처와 행동이라는 단순한 도식 안에 아킬레우스가 존재한다. 그는 결국 헥토르를 죽였다. 그 정도면 감정이 풀릴 법도한데 아킬레우스는 그럴 수 없는 모양이다. 아직도 평정을 되찾지 못한 것이다.

 

81 운동 경기는 끝났다.

전사들은 배로 흩어졌다.

밥을 먹고 달콤한 잠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친구 생각에 울고만 있다.

모든 것을 길들이는 잠도

그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파트로클로스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이리저리 뒤척일 뿐이다.

함께한 날들이 떠오른다.

수많은 전투, 끝도 없이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던 날들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웅크려도, 바로 누워도, 엎드려도

눈물이 난다.

문들 일어나 슬픔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앞세워

바다로 갔다.

곶과 범선 위로 해가 떠올랐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달고

친구의 무덤 주위를 세 바퀴 돌았다.

다시 막사로 돌아와 시체를 내려놓았다.

헥토르의 얼굴은 먼지 속에 처박혀 있다.  

 

다들 잠든 밤에 감정 하나가 얼마나 단단하게 아킬레우스를 장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분노

가 의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강한 분노는 강한 행동으로만 풀린다.

분노는 그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미안해할 때 풀린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는 죽고 죽임을 당하는 것만이 선이니 다른 방도는 없겠다 싶다.

 

84 프리아모스는 무릎을 꿇고 헥토르의 손에 키스를 했다.

죽은 아들의 피 냄새가 남아 있는 끔찍한 손이었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장례라도 치르게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아킬레우스는 갑자기 고향에 있는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늙은 프리아모스를 일으켜 세운다. 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한 사람은 친구를 위해 울고, 한 늙은이는 죽은 아들을 위해 우는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친구의 무덤을 백 바퀴를 돈다 한들 친구가 살아올 것도 분노가 풀릴 것도 아니다.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돌려주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방편이었을 것이다. 자발적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프리아모스가 명분을 만들어 주었네.

 

87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하면 신이 나는 사람이지만, 헥토르는 전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89 “가장 확실한 계시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거다.

 

92 안드로마케와 그의 아들 아스튀아낙스는 헥토르가 말하는 조국이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다. 싸우러 나가기 전에 그는 안드로마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 트로이아와 왕과 여기 이 용감한 백성들이 다 죽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트로이아에 닥쳐올 불행보다고, 어머니와 왕과 적들의 칼에 무참하게 쓰러질 내 형제들의 비참한 죽음보다도 훨씬 더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 갑옷을 입은 아카이아인들이 당신의 자유를 빼앗아갈까 봐, 당신을 슬프게 할 까 봐…당신은 낯선 사람들의 옷을 짜고, 물을 긷고,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하겠지. 당신이 남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나마저 죽고 나면 당신도 많이 울 텐데. 다른 거 없소. 그저 당신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당신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걸 보기 전에, 흙이 나를 빨리 덮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오.

 안드로마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헥토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그들 부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두 부부의 마지막 대화에는 고전문학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무엇인가가 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사랑하고 존경한다. 헥토르는 아내를 사랑할 때도, 아이들을 사랑 할 때도, 아내와 자식들을 한 사람으로서 사랑한다. 살붙이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헥토르에게는 다른 것이 아니다.

 

헥토르가 전장에 나가면서 부인에게 하는 말이다. 장수의 모습보다는 살가운 지아비의 모습이 보인다. 헥토르가 조국을 사랑한다는 뜻은 ‘살붙이’를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93 헥토르는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했다. 칼을 놓치고 아킬레우스 앞에서 죽어가면서, 헥토르는 사람을 했고 평화를 꿈꾸었다. 그러나 신은 헥토르를 버렸다. 바로 옆에 동생 데이포보스가 있는줄 알았지만, 그것은 동생으로 변장한 아테네였다. 속은 것이다. 동생에게 무기를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운명은 그런 것이다. 눈이 멀도록 강렬한 빛 속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보고 말았다.  

 

95 <일리아스>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있었고, 그들이 인류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이끌어왔으며,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Chapter 3

 

오뒷세우스와 바다

 

문명은 노력과 업적의 기록이다. 호메로스의 두 번째 서사시는 인간이 이룬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바다를 장악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용기와 인내, 지혜를 총동원해서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중심인물이 바로 오뒷세우스였다.  

 

100 호메로스라는 이름 자체가 한 사람을 지칭하기 보다는 한 가족, 한 무더기의 음유시인들을 총칭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2500년 동안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103 뱃사람과 상인 계급의 노래

신천지에 도착한 그리스 민족은 바다가 뭔지도 몰랐고 배를 어떻게 타는지도 몰랐다. 바다는 에게인들의 전공이었다. 에게인들은 돛을 달고 노를 저어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호메로스가 ‘중요한 해로’라고 지칭한 길들을 찾아낸 것도 그들이었다. 가령 소아시아 해변으로 가는 길, 이집트로 통하는 길, 시켈리아를 거쳐 지중해 서부로 가는 길 등 에게인들은 여러 곳에 손을 뻗쳤다. 초창기에는 주로 ‘벙어리 물물교환’을 했다. 배를 약간 멀리 세운 다음 걸어와서 바꾸고 싶은 것을 해변에 내려놓고, 다시 배로 돌아가 기다린다. 그러면 원주민들이 값이 비슷하게 나가는 물건으로 바꿔준다. 한두 번 물물교환을 하다가 신뢰가 쌓이면 본격적으로 물건을 사고 팔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 고상한 상행위보다는 단순한 해적질이 더 편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보통 펠라스고이족을 해적의 원조라고 부른다. 그리스 민족의 본격적인 해적질이 시작되기 전에 말이다. 

해적질이 더 편했던 조상을 두고 있는 그리스이다. 그리스의 현재 상태와 예전의 그리스를 비교하는 것이 흥미롭다.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만큼 제 몫을 못 찾고 있는 나라는 없는듯하다. 일단 엄청 신사적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혹시 예의나 도덕을 이야기하며 절대 먼저 누군가를 침략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 답이 될까?

 

103 에게인들 만큼 바다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수백 년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스 민족은 땅에서 살아온 민족이다. 양 몇 마리 끌고 다니는 것으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다가 땅을 갈아 곡식을 심었다. 바다는 그보다도 한참 후에 배웠다. 무엇보다 농사만 지어서는 수요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품이 필요한데, 그걸 얻으려면 동쪽으로 가야 했다. 부자들은 금 막대기도 필요했고, 보석과 향수, 자수가 박힌 옷감, 보랏빛으로 곱게 물들인 옷도 필요했다. 모두 동쪽에만 있는 아이템이었다. 물론 서쪽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 즉 땅이 있었다. 짐작하겠지만 땅을 보면 군침을 흘릴 거지들이 그리스 땅에 한둘이 아니었다.  

 

104 동쪽이든 서쪽이든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민족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다급한 아이템은 금속이었다. 쇠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구할 수 있었지만, 주석은 그리스일대에 전무했다. 주석은 구리를 청동으로 만들어준다. 모양도 잘 나오고 쉽게 깨지지 않는 청동을 얻기 위해서는 주석을 찾아 나서야 했다. 도리스인들이 쳐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쇠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지만, 적어도 기원전8세기에는 청동이 최고였다. 그 이후도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몸을 감싸는 무구로는 청동이 제격이었으니까 말이다. 무구는 총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에 투구가 있고, 어깨부터 배까지 몸체가 있고, 다리에 각반이 있고, 왼쪽 팔에 방패가 있다.  그런 무구를 만들려면 반드시 주석을 수입해와야만 했다.

 

105 크게 보면<오딧세이아>는 안내도다. 모험을 즐기는 자들, 선원들, 이민자들, 쇠를 구해서 무기를 만들고자 하는 부자들을 위한 여행 안내서다. 그리스 사회의 온갖 잡동사니들의 척후병 역할을 한 것이 오뒤세우스였던 셈이다.

 

106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뒷세이아>에는 아버지의 귀환이라는 공식이 있다. 지중해의 개쳑자나 바다를 누비는 영웅의 이야기이기 전에 귀향의 기록이다.

 

아버지는 늙어서 돌아오거나, 몰래 돌아오지만 세 가지 증거를 보고 아버지인지 알 수 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오뒷세이아>에도 어김없이 그런 증거가 나온다. 아버지만이 활을 구부릴 수 있고, 침대를 직접 만들었으며, 어머니만 아는 상처가 있다.

 

112 내가 퀴클롭스를 만나러 간 이유는 타이르기 위해서다. 손님한테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괴상한 괴물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 살을 뜯는 거인’ 을 보고 싶었고, 키르케를 보고 싶었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이와 같이 <오딧세이아>에는 세계에 대한, 혹은 존재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있다. 그리스인에게 자연은 위험한 존재들이 사는 무서운 곳이다. 동시에 신비의 보고이기도 하다. 신비를 보고 싶고, 샅샅이 뒤지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알고 싶다. 오뒷세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문명인이다.  

 

112-115 동물들은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전부지만, 인간은 자연을 다시 창조한다. 자연의 힘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워진다. 인간이 사는 세계를 아름답게 건설한다. 이와 같은 창조의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파이아케스인들과 나우시카공주가 사는 섬 이야기다. 파이아케스인?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지도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냥 바다 한가운데 온갖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비옥한 섬에 사는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해두자. 스케리아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천국이다. 스케리아의 자연은 자연이기에 앞서 예술 작품이다. 아름답고 웅장하고 매혹적이다.  

 

115 그들의 배는 심지어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아간다고 한다. 타고 있는 자가 마음속에 원하는 길을 인도해준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안개 속에서 헤맬 일도 전혀 없다. 스케리아는 그런 곳이다. 춤과 노래의 땅이고, 요정들이 사는 천국이다. 그리스민족은 스케리아를 단지 꿈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테리아로 가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그들의 가슴속에 스케리아는 언젠가 지구상에 구현해야 할 나라의 대명사다. 지혜와 평화를 숭상하는 시민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스케리아다.

 

조금 지나면 이런 로봇배를 만들 수 있으려나…?  생각대로 움직이는 배는 아직 없는 듯한데…

 

117 “신이신지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간청을 드립니다. 만약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이라면 틀림없이 제우스 신의 따님 아르테미스일 것 같습니다. 생김새나 키가 아르테미스의 상을 꼭 닮은 게 말이에요. 혹시 하늘에 사시는 신이 아니라 땅에 사시는 저랑 같은 사람이라면, 당신의 어머니나 아버지. 형제들 모두 매일 행복하겠지요. 당신이 그 싱그러운 자태로 춤추는 걸 볼 때마다 가족들 모두 기쁨으로 복받쳐 오르겠고요. 당신과 함께 살 집으로 가는 남편은 또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언젠가 저는 아폴론의 신전에서 종려나무 줄기가 땅 속에서 솟아나 위로 뻗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싶어 정신이 멀었고, 한참 동안 쳐다보았습니다….오늘 제가 당신을 마주한 심정이 그때와 같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요.

 

숲 속에 숨어 있다가 깨어난 오뒷세우스가 나우시카공주에게 하는 말이다. 그의 작업용 멘트가 압권인데…

 

118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 오뒷세우스

 

<오뒷세이아>는 뱃사람들의 시 그 이상이다. 오뒷세우스도 그냥 뱃사람이 아니다. 자연 앞에서, 운명 앞에서 인간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모범이다. 문제가 닥치면 오뒷세우스는 늘 생각한다. 행동하기 전에 궁리한다. 위험한 일이 닥칠 때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짓은 생각이고 궁리다. 잔꾀를 부리는 수준이 아니다. 훨씬 더 정교한 생각을 한다. 오뒷세우스가 문제를 푸는 방법은 단순하고 확실하다.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해법. 그 문제가 진행되면 발생할 장단점. 극단의 상황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는 것. 그것이 늘 지혜로운 해법의 중심이다.  계획한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은 경우를 대비하는 것. 그 상황을 고려하여 미리 생각해두는 것 꼭 필요하다. 리스크의 사전점검차원이다. 뜻하지 않은 위험에 노출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당황하거나 걱정이 앞서면 일의 순서를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단순 명쾌한 생각의 정리를 위한 평소에 신중함이 필요하다.

 

119 일 처리는 깔끔하고 정교하다. 불에 달군 말뚝을 쥔 오뒷세우스와 선원들은 퀴클롭스의 눈에 꽂고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휘휘 젓는다. 눈의 뿌리까지 확실히 뽑히도록 말이다.  

 

120 오뒷세우스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신이 배반할 때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일단은 먼저 자기 자신을 믿는다. 결국 맨몸으로 바다에 버려진 오뒷세우스는 이틀 밤낮 동안 죽을 힘을 다해 헤엄을 쳤다. 그렇게 해서 다다른 곳이 바로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이었다. 이긴 것이다.

 

믿음이 필요하다면 제일 먼저 자신이 믿을만하지 않겠는가…내가 아닌 타인을 믿는 것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나 확률적으로 보면 스스로를 믿는 편이 더 나을듯하다.  

 

121 오뒷세우스는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이다. 인간의 지혜는 실질적이고 창조적이다. 세상에 대한 의미 없는 지식을 쌓아놓은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그런 지혜다. 신과 적들은 인간이 가는 길목마다 방해꾼을 심어놓고 인간을 끊임없이 불행의 나락으로 인도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지혜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 ‘재주꾼’오뒷세우스가 이기는 이유다.  

 

오뒷세우스는 온갖 것을 다룰 줄 안다. 목수이고, 항해사이며, 석공이고, 마구장이다. 도끼와 쟁기와 배의 키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칼을 다루듯이 인간의 도구를 다룬다. 하지만 그가 만든 것 중 최고 걸작은 다름 아닌 가정이다. 행복한 가정,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을 친구로 포섭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호메로스가 말하듯이 오뒷세우스의 ‘악의 없는 지혜’가 반짝이는 대목도 바로 거기다.  

 

오뒷세우스  입장에서 보면 행복한 가정일수 있다. (전쟁)을 위하여 떠났다가 귀향길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그 모든 것을 탁월한 능력으로 극복했고 무사히(?)귀환에 성공했다. 집에 와보니 가족(부인, 아들, 집안식솔들…)모두 무사하다. 서로 힘을 합쳐 가장이 없는 사이 괴롭히던 사람들을 물리친다. 반대를 생각해보자. 가장의 부재로 힘들게 살았던 세월을 격은 가족을. 그들에게도 과연 행복한 가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122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스퀼라와 바다 소용돌이가 도사리는 자연이라는 끔찍한 운명 앞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오뒷세우스가 앞서 싸우고 있다. 인간이 온전하게 이 세상에 살면서 자연을 정복해가는 길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인간의 모험이고, 다음 세대의 모험이다. 호메로스가 만들어낸 미래형 인간이다.  

 

Chapter 4 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125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까지는 서정시의 시대였다.

 

126 서정시라면 최소한 아르킬로코스나 삽포 정도는 되어야 한다.  

 

파로스의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는 파로스에서 태어났다. 에게해에 불쑥 솟은 파로스섬은 대리석덩어리다. 흙 몇 센티미터만 파내면 대리석이 나올 정도다. 기원전 7세기 조각가나 건축가에게 대리석은 별로 쓸모없는 돌이었다. 그 단단한 것을 다룰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127 가난한 땅에는 반드시 빈부차가 있었다. 가난한 자들보다 아주 조금 돈이 많은 부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했다. 그러다가 종기가 곪아 터지듯이 폭동이 일어났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사람들은 지겨운 고향을 등지고 이민을 떠났다. 기원전7세기 그리스에서는 이민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128 파로스에서 자란 아르킬로코스는 무화과 열매와 생선으로만 배를 채운 것은 아니었다. 그를 살찌운 또 다른 양분은 호메로스의 시였다.  

 

129 “모두가 울고 모두가 슬퍼하도다. 페리클레스여. 울지 않는 시민이 없으며, 축제에도 향연에도 기쁨이 없다. 차라리 폭풍우가 부자들을 집어삼켰더라면! 이다지 심장이 커지지는 않았을 것을! 그러나 친구여, 신은 가장 견디기 힘든 슬픔가운데서도 치유를 예비하나니, 그것은 자꾸만 단단해지는 우리들 심장이다. 오늘은 내가 아프고, 내가 피 흘리며, 내가 울부짖을 것이며, 내일은 네 차례라고 하자. 그리고 이제 슬픔은 여인네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단단하게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운다고 슬픔이 끝나지는 않으리니, 차라리 한바탕 축제로 이 슬픔을 다스릴 일이다.바로 위와 같은 구절이 아르킬로코스의 진면목이다. 그는 죽음을 솔직하게 대면한다. 그럼으로써 진부한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지 몰라도 남들과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것이 바로 아르킬로코스의  풍자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는 인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매춘부를 이렇게 묘사한다.  

 

바위 위 무화과나무로 까마귀들이 날아들듯이

동네 노리개에게 낯선 사내들이 붙는구나.  

 

131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누가 당신의 이성을 그리 흔들었는지요? 이날까지는 그나마 균형이 뭔지 아는 분이었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험한 말을 해대는지 아시는지요? 엄숙한 약속을 어기셨고,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제우스 신이여, 내 혼례고 뭐고 다 망가졌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죗값을 치르게 해야죠.

사랑한 네오블레의 아버지를 목표로 한 서정시다. 아예 저주에 가깝다.

 

133 그럴 수 있다면 네오블레의 손을 만지고 싶다….그리고 달아오른 그녀 몸에 내 몸을 밀어 넣고, 허벅지끼리 마구 문지르고 싶다.  

 

134 “내 삶에는 두 개의 군주가 있다. 하나는 에뉘알리오스이고, 다른 하나는 여신 뮤즈다.” 즉 한편으로는 이름난 장군의 오른팔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신 뮤즈의 대변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군인으로서 그의 삶은 힘들고 괴로웠다. 그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빵도 창을 꽂아 먹고, 이 스마르 포도주도 창으로 휘젓고, 취하면 창끝 위에 벌렁 드러눕고 그런 삶이었다.

 

136 아르킬로코스는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나타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페리클레스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뭘 그렇게 먹고, 마시고, 돈도 안 치르는가? 친구 찾아 우연히 들어온 놈이 염치도 없이 싹싹 비우는 꼴 좀 보라.

 

사람의 탐심은 여러 가지 인데 그 중에는 식탐도 만만치 않은 듯하다. 무엇에서 연유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식탐이 많은 사람을 유독 싫어하는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138 여우는 할 줄 아는 게 많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하나밖에 모른다. 그래도 그 하나 덕에 명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140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의 시구들을 가득 채운 그 ‘명예’를 참을 수가 없다. 명예는 봉건사회의 덕목이고, 우매한 대중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명예롭기보다는 행복해야 한다. 즐거워야한다. 그게 바로 아르킬로코스의 철학이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즐거움을 잃어버리는구나.

 

눈치 때문에 행복을 못 찾는 사람도 있고 욕심 때문에 행복을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고민해보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 가는 길에 만족하며 그 안에서 한 발자욱도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싶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른 인간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바르지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사람한테는 더 이상 대안이 없는 것 아닌가.

 

141 아르킬로코스는 인생이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하며, 그를 위한 투쟁만이 가치 있다고 말한다.

서사시에서 영웅은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킨다. 아킬레우스도 그렇고, 헥토르도 그렇고, 심지어 여자인 헬레네도 그렇다. 죽음으로써 다음 세대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아르킬로 코스는 다르다. 죽음은 그저 사라지는 거라고 본다.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  

 

죽고 나면 명예는 잊히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살아 있으라. 살아 있음의 먹을 즐겨라. 죽음은 성실에 불과하다.  

 

궁극은 삶이다. 모든 것은 그 다음이다.

 

143 아르킬로코스는 전사지만 솔직한 전사다. 용감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중요할 뿐이다. 비로소 해방된 한 인간으로서 아르킬로코스는 자유중의자에 가깝다. 마치 개의 목에 끔직한 상처를 남기는 끈을 한사코 거부하는 여우(라풍텐의 우화에 나오는 길들여지지 않은 여우)를 닮았다. 목에 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바로 자유다.

 

가슴이여, 내 가슴이여, 고칠 길 없는 내 가슴이여.

힘을 내라. 적들에 맞서 반격을 준비하라.

사악한 자들의 늪에서 실족치 마라.

이겼다고 교만에 들뜰 일도 아니고

졌다고 빈집에 웅크려 있을 일도 아니다.

승리를 즐기고, 패배를 쓰라려 하되, 지나치지 마라.

삶에 언제나 있을 높낮이를 배우라

모르는 곳에서 고통이 문득 닥쳐오리니

내 가슴이란.

 

144 오라. 술통에서 포도주 한 잔 가득 꺼내어 들고 갑판 난간에 늘어서서, 바람에 섞어 마시자. 우리도 사람인데 어떻게 맨 정신으로 이 꼴을 볼 수 있겠는가.

 

살과 살을 맞대는 싸움, 칼끝에 닿는 남의 살의 감촉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적들이 다가오는 순간에 그 아슬아슬한 공포도 이미 체득한 바다.

 

Chapter 5 열 번째 뮤즈, 삽포

 

최초의 여성시인. 기원전 600년경, 레스보스 섬의 뮈틸레네. 삽포는 아프로디테와 미의 세 여신. 뮤즈(, 음악, 학예를 관장하는 여신)를 숭상하는 여성 종교 단체의 장이었다.  

 

152 삽포가 운영한 뮤즈의 신전은 음악학교나 예술원도 아니었고, 전문학교도 아니었다. 예술이 좋아서 예술을 배운 게 아니었고, 예술을 직업으로 삼으려고 배운 게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아프로디테를 경외하고, 음악과 춤 등을 배우면서 자세를 가다듬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제자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면 되는 것이었다. 삽포는 결혼을 했고, ‘금꽃’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으며, 삽포의 제자들도 모두 결혼을 할 것이다. 결혼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행복의 완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53 삽포의 말에 따르면 모름지기 여성은 얼굴에 빛이 나야 한다. 눈에는 은총이 가득하고, 걸음마다 사랑이 넘쳐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아름다움을 전수하는 데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특히 여성의 몸에서 발산되는 아름다움을 드러냈던 아프로디테, 꽃과 바다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아프로디테, 삽포의 제자들은 아프로디테의 재능과 가르침을 흉내 내면서 여성으로 자란다. 아름다움이 온몸에 발산되고 행복이 넘친다. 이를 보면서 삽포는 기쁨에 젖는다.

 

155 솔직하고, 진실하고, 직선적인

그를 보노니, 보는 것만으로도 붉어지는가.

영혼이 길을 잃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은 볼 수 없고, 입은 말할 수 없으며,

몸 전체가 불타고 바뀌는구나.  

 

그대 앞에 얼굴을 맞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저 사람은 아무래도

선인가 보다.

 

웃음이 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그대를

본 순간

입술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혀에 물기가 없으며

작은 불꽃이 일제히 피부 아래로 흐른다.

눈은 볼 수 없고

귀는 우--거릴 뿐.

 

흐르는 땀은 무엇이며

몸은 어째서 떨리지 않는 곳이 없는가

풀포기보다 더 파래진 나는

아마 이대로 죽는가 보다.

 

지금 우리는 열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다. 여기에 군주는 에로스다. 욕망이 삽포를 때리고 삽포는 그 때리는 숫자를 세고 있다. 그래서 이건 전투시다.

 

심장소리가 들릴듯하여 가슴을 누르고 있다. 눈은 맞출 수가 없다. 마음에 일고 있는 무엇을 들킬까봐. 피부아래로 불꽃이 튀면 어떤 느낌일까. 온몸이 달아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되겠지 싶다. 온 세상이 한 사람을 빼고 배경이 되는 순간. 그 배경은 암흑이다. 정신을 불러와서 제자리에 앉히고 보면 빛나는 햇살의 봄인데.

 

157 죽음이 멀지 않았다.

 

삽포의 시는 솔직하고 과학적이다. 삽포는 사실만 적는다. 감정이 주가 아니다. 감정이 남긴 결과를 보고하는 게 주다. 무슨 연애시처럼 형용사가 나무하지 않는다. 명사와 동사만 쓴다. 그걸로 모든 상처를 표현하고 모든 사건을 보고한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시간만큼 엉덩이를 붙이고 글을 쓰다 보면 가능할까 모르겠다.  

 

157 삽포는 숨기는 법이 없다. 솔직하고 진실하고 직선적이다.  

 

158 독자들은 그냥 불꽃만 보면 된다. 이제 그 불꽃은 끝까지 장렬하게 타오를 것이고, 완전히 타서 사라질 것이다. 어둠 속에 빛나는 불꽃, 그것이 삽포의 사랑이다.  

 

159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기쁨을 얻었고, 후회와 슬픔을 얻었다. 하지만 삽포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다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삽포의 시에서 에로스는 아무런 형체가 없다. “어떻게 할 수 없고”,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덫을 놓아 잡을 수도 없다. 잡으려 하면 바고 부서지고 말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보니 사랑은 아름다웠고 쓰라렸을 뿐이다. 아무리 되돌아보며 생각해내려 해도 사랑은 형체가 없다. 아프로디테는 인간의 형성으로 나타나지만, 에로스는 그렇지 않다. 긴장한 청년의 모습도 아니고 화살을 쏘는 사람의 모습도 아니다. 삽포의 에로스는 몸에 남은 상처로 표현될 뿐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프다. 상처가 남는다. 사지가 다 부서져 나가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쓰라리다. 그게 사랑이다. 따라서 삽포에서 사랑은 끔찍한 짐승을 닮았다. 알 수 없는 세상의 힘이고, 쿵쿵거리며 엄습해오는 짐승의 발자국이다.  

 

다시 에로스가 온다. 사지를 부수며 고문하는

부드럽고 고통스러운 그는 내가 이길 수 없는 괴물이다.  

 

어떻게 살 수 없고,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지나고 나서 보니 사랑은 아름다웠고 쓰라렸을 뿐이다. 상처가 남는다. 사지가 다 부서져 나가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쓰라리다. 그게 사랑이다. 사랑은 끔찍한 짐승을 닮았다. 알 수 없는 세상의 힘이고, 쿵쿵거리며 엄습해오는 짐승의 발자국이다.

알고 시작한다. 사랑이 이렇다는 것을 말이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시작을 해도 늘 같은 반복이다. 사랑은 늘 첫사랑이다.

 

160 사랑이 무슨 팔다리가 달린 것은 아니다. 그냥 괴상한 어떤 것이다.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아무리 재주가 좋은 인간이라도 이 사랑이라는 것을 길들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길 수 없는 괴물대신 맞서 싸울 수 없는 야수라고 하는 편이 좀 더 나을 듯하다. 어쨌거나 사랑에 대한 삽포의 수사는 이처럼 은유적이다. 기어 다니는 짐승이며, 괴물 같고, 엄청나게 힘이 센,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사랑이 지금 삽포의 몸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고 있다.

산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떡갈나무를 꺾어 넘어뜨리듯이, 사랑이 내 영혼을 흔들고 있다.” 삽포는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에 빗대어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삽포가 경험한 사랑은 태풍처럼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힘이다. 그리고 지금 삽포의 영혼은 사랑으로 인해 뿌리째 뽑혀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짐승이나 바람처럼 무서운 사랑은, 억지로 버티고 선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납기 그지없는 신을 닮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두운 날씨 가운데도 삽포는 사랑과 맞선다.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는 곳 너머 청명하고 고요한 하늘을 꿈꾸고 있다. 몸은 죽을 듯이 아프지만,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놓는 어떤 것, 그것이 바로 삽포 속에 살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라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삽포의 은유가 참으로 기막히게 절묘하다. 다른것은 직선이 좋은듯한데 유독 이 쟝르만은 직선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162 웃음이 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171 호메로스의 자연에는 깊은 심연이 나오고,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으며, 사나운 폭풍이 불어온다. 인생의 쓰라린 면들을 상징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무엇이며, 인간이 이길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런 자연을 인간이 사랑할 여지가 없다. 자연에서 위로를 찾을 수도 없고, 현세에서 겪는 고통을 위무할 작은 메아리조차 들을 수 없다. 그게 호메로스의 자연이다. 삽포의 자연은 신비로운 옷을 벗고 인간에게 내려온다. 가까이 다가와 친구가 되며, 존재가 되고, 인간과 더불어 교감을 나눈다. 가령 잠에서 깨어 났을 때 삽포는 혼자인 것 같았다.

 

달도 지고, 플레이아데스도 지고,

자정이다. 나는 혼자 잠이 든다.  

 

173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사랑은 나와 적절한 거리에 올라붙어 빛난다. 그 틈을 비집고 새소리가 들리고, 꽃이 피고, 나뭇가지가 소리를 낸다. 그러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고, 사랑 노래는 자연에 대한 노래로 바뀐다. 이처럼 삽포의 시에서는 사랑이 불탄 후에 자연이 부활한다. 사랑의 불꽃이 자연의 몸체에 들어가 빛을 발한다.

 

177 젊음의 꽃망울을 사랑했다.

사랑이 왔다.

그것은 반짝임이었고, 순간이었다.

 

사랑이 왔음을 아는 순간 사라지는 어떤 반짝임이다. 사랑은.  

 

Chapter 6 솔본과 민주주의

 

181 그리스 문명이 시작된 곳은 소아시아 지방이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이곳에서 도시가 생겼고, 문명이 시작되었다. 호메로스와 아르킬로코스는 이오니아 사람이고, 삽포는 아이올리스 사람이다. 그리스 최초의 과학자, 철학자도 여기서 나왔고, 최초의 대리석 조각도 신전도 그랬다.

 

183 민주주의의 태동: 화폐의 등장과 상인의 부상

<안티고네>와 파르테논 신정이라는 걸작을 누리기 전에, 기원전 8세기 아테나이가 먼저 해결해야 했던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해법을 찾는 데만 200년이 걸렸는데, 그 해법이 바로 민주주의였다.

 

185 기원전8세기 그리스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뚜렷이 구분되는 사회였으며 지배자인 귀족들만 무기와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였다. 그래서 계급 투쟁이 하나의 상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8세기가 끝나갈 무렵 중요한 변수 하나가 그리스 문명 위로 떠오른다. 바로 동전, 화폐다. 동전은 두 가지 면에서 계급투쟁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들어 계급 간 편차를 더욱 심화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자들 중 신흥 부자로 만들어 기존의 귀족들과 새로운 차원의 권력 투쟁을 벌이게 했다.

 

186 나라에서 정확한 무게를 재서 동전을 만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소아시아의 뤼디아였다.

 

187 먼저 아내와 자식을 내놓고,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을 내놓는다. 몸이란 마지막에 파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 장기매매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된다. 방법을 찾다 찾다 마지막에 가는 곳이지 싶다. 예나 지금이나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 끝에선 사람들. 사람이라는 것에서 무엇이 다를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많이 잘못한 것 때문에 그랬을까. 우주의 질서를 알 수 없는 인간이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세월이 흘러도 사람을 살게 하는 욕망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고, 갈수록 미쳐 돌아가는 지점들이 보인다.  

 

189 솔론이 성장하던 기원전7세기 무렵은 산업과 무역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고, 솔론은 앗티케에서 나는 올리브를 해외에 파는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197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당시 그리스 어느 도시에도 이런 획기적인 법은 없었다. 앗티케 반도가 처음이었다. 개인파산제도를 만듦과 통한다.  

 

일종의 패자부활전이다. 현대의 개인파산제도이다. 무엇이든 한쪽을 쏠림현상이 일어나면 부작용이 동반되고 그러면 해법을 찾는다. 그것 중의 하나이다. 이것도 민주주의하에서 일어나는 모럴해저드의 일종 아닐까. 단면을 보고 모럴해저드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게임에는 룰이 있어야하고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어느 사회이건 출발선이 똑같지 않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201 “그리스는 시민이 결정하고, 시민은 연설이 좌우하게 된 것이다. 프랑수아 페넬롱(1651-1715 프랑스의 신학자,시인)

 

202 무엇보다 솔론은 정의의 전도사다. 그는 귀족을 국가의 꼭대기에 올려놓으면서 그들에게 많은 의무를 부과했다. 귀족들에게도 정의를 요구한 것이다. 돈도 많고 힘도 세면서 국법이나 신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끔찍한 시를 쓰기도 했다.  

 

Chapter 7 노예와 여자

 

207 그리스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추구한 ‘민중의 지배’라는 목표는 시작부터 흠이 있었다. 어긋났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으며, 문명 자체가 몰락한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계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노예제도, 다른 하나는 여성의 열악한 지위다.

 

208 노예제도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유형 가운데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지독한 것이다. 그래서 중세에 와서는 노예제 대신 농노제가 생겨났고, 현대에 와서는 식민지와 임금 노동이라는 새로운 착취 구조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인간은 약육강식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사 이래로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그러나 투쟁의 성과가 금세 나타나지는 않았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는 권력의 문제이다. 권력에는 돈도 지위도 사랑도 있다. 포장지만 바뀌었을 뿐이다.

 

208 노예는 왜 생겨났을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노예제도가 생긴 이유는 사회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 사회에는 노예가 없었다. 아주 옛날에는 부족 간 전쟁에서 포로가 생기면 날로 혹은 구워서 먹었다. 그 다음에는 그냥 죽이고 말았다. 포로를 노예로 삼기 시작한 것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결국 노예를 사고파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관여했던 첫 번째 상행위는 노예를 사고파는 일이었다. 전쟁 포로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을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발전의 동력은 바로 돈이었다.

 

노예라 함은 몸이 상품이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 이를 말한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똑같다. 현대인들의 삶이 특히 사회생활 인구의 50%가 직장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  

 

211 노예는 ‘생각하는 기계’였다. 기계는 기계인데 생각하고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노예의 장점이었다.  

 

213 우리는 가끔 예우를 갖춘 언어로 그리스 문명에 대해 말한다. 위대하고, 아름답고, 영원한 창조의 문명으로 그리스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문명에서조차 노예사냥이라는 비인간적인 일들이 버젓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지만. 하지만 사실이다. 문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문명 국가로 보이는 그리스도 실상은 노예제 사회였다. 도대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문명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불러도 된다면 그리스 문명이 바로 그런 문명이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문명, 언제든 야만 상태로 회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슬아슬한 문명이었던 것이다.

 

223 결국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자기가 처한 조건과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생각을 구성하는 요소에 조건과 환경이 포함된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삶의 여정에 따라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걸 보면 당연한 거란생각.

 

225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자유가 신장된다는 것, 그것은 맞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다. 사회적 억압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교묘하다.

 

227 에게해의 여러 민족들, 즉 펠라스고이족과 뤼디아인도 모계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민족들의 특성은 평화를 존중한다는 점이었다. 크놋소스 궁전에는 요새가 없었다. 주업도 농업이었다. 농사는 여성들이 하는 일이며,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들은 한곳에 정주하게 되고, 문명화된다. 농업에 주력한다는 얘기는 사회가 조금 더 발전했다는 뜻이다. 그 발전된 사회에서 여성은 존경을 받고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그리스 문학에서도 많은 여성이 매력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특히 고전문학에서 그랬다. 우선<일리아스>의 안드로마케와 헤카베가 있으며, <오뒷세이아>의 페넬로페가 있다. 나우시카아가 있고, 아레테가 있다. 아레테는 파이아케스인의 왕비이자 누이로서, 왕의 의사결정을 좌지우지 했다.

 

안드로마케, 트로이아전쟁의 영웅 헥토르의 아내. 헥토르가 마지막으로 전장에 나가면서 안드로마케와 나눈 대화는 부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고대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생각하면 드문케이스이다. 헤카베, 헥토르의 어머니. 페넬로페, 오뒷세우스의 아내. 전장에 나간 남편을 20년간 기다린 일부일처제의 원형을 보여준다. 나우시카아, 스케리아 섬의 왕 알키노오스의 딸. 오뒷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던중 칼립소에 붙들려 7년간을 지내고 마침내 섬을 탈출하는데 다시 포세이돈의 눈에 띄어 풍랑을 만나고 표류하던 중 스케리아섬에 흘러 들게 된다. 이때 나우사키아가 오뒷세우스를 구해주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도움을 준다.

 

228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서 불을 움치고, 그 불을 인간들이 받게 되자, 제우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래서 몇몇 신들에게 특명을 내려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었다. 진흙을 구워서 교활하고 뻔뻔스럽고 탐욕스러운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였다. 여성은 “괴물”이면서,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도망칠 길 없는 함정”이었다. 남자가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것도 여자 때문이다. 겁을 잔뜩 먹은 동물 남자를 괴롭히는 것이 여자였다. 이처럼 헤시오도스는 여성의 교태와 잔꾀와 음행에 관해서 독설을 퍼부었다.  

 

228 세모니데스는 여성을 열 가지 종류로 나누고, 각 종류별로 적당한 짐승 혹은 사물을 지정했다.

1.     암퇘지, 그녀의 집에 들어가 보면 돼지 우기가 따로 없다. 방마다 온갖 것들이 나뒹굴고, 피둥피둥한 여자가 제 몸만큼이나 더러운 옷가지들 사이에 앉아 있다.

2.     여우형, 온갖 사술에 능하다.

3.     이야기통, 비방과 잡담이 특기고, 암캐의 후손답게 하루 종일 직기를 멈추지 않으며, 남편조차 아내의 입을 닫을 방도가 없다. 심지어 돌로 이빨을 다 부러뜨려도 소용이 없다.

4.     게으른 등, 땅만큼이나 무거워서 옮길 재간이 없다.

5.     물의 딸, 엄마만큼이나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다. 어떤 때는 너무 성질을 부려서 제어가 안 되는데 또 어떤 때는 여름날의 바다처럼 잔잔하고 고요하다.

6.     당나귀형, 고집불통이며 게걸스럽고 방탕하다.

7.     족제비형, 도둑질과 범죄에 능하다

8.     여쁜 암말, 공주병이 심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아놓은 쓰레기를 창밖으로 버릴 줄도 모른다. 하루에 두세 번 목욕을 하며, 온몸에 향수를 범벅으로 묻히고, 늘 머리에 꽃을 꽂는다. “그런 부인은 외간남자들 눈요기로는 좋으나, 남편에게는 오래된 고질병과 같다.”

9.     원숭이형, 싸움질에 능하다.”그런 여자를 아내로 둔 남편이야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다.”

10.  꿀벌처럼 부리전한 여자, 있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열중 아홉은 이상한 여자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그럴듯하다. 그런데 나는 여자가 아닌가 보다.

 

232 공창제도를 고안한 장본인이 솔론이었다.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일탈을 방지할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232 금속을 발명하고 전쟁을 하게 된 시점부터 여성이 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구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석과 섞어서 청동으로 된 무기를 만들었다. 철을 발견한 다음에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무기를 만들었다. 곧이어 아주 짭짤한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바로 전쟁이었다.  

 

232 에게 문명이 무너진 시기에 여성들의 우월한 지위도 끝이 났고, 일부일처제가 시작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들이 전쟁을 통해서 획득한 재물을 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식이란 자기 피를 가진 자식을 말한다. 그래서 자기 피만 받는 여자가 필요했고, 나머지 다른 여자는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피가 가지고 있는 특성. 어떤 통계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기는 하던데.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간의 강력범죄를 조사해보면 피해를 보는 확률이 피가 섞인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10배 높다고 함. 그래서 인가. 일단 재물을 상속하고자 하는 욕구, 그것도 핏줄에게 주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일부일처제가 정착되었다. 무엇이든 필요에 의해서 제도가 만들어지기는 하나 여자가 사람이 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일까. 아직도 아니기도 하지만…이유가 어찌되었건 일부일처제는 합리적인 제도는 아니라고 생각함. 특히 100세시대를 이야기하는 21세기에는.  

 

235 혹시라도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발명했다고 한다면, 그 발명품이란 어린아이의 입안에 난 이와 같다. 반드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민주주의였다. 곧이어 그리스는 죽고 새로운 민주주의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  

 

Chapter 8  신과 인간

 

240 대대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바로 종교였다.

 

240 인간과 신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는 것. 그것이 그리스 종교의 커다란 특징이다.  

 

240 신들의 탄생, 다른 원시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에서 종교가 발생한 이유도 인간의 무력함 때문이다. 세상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자연에도 있고, 사회 내에도 있고, 심지어는 인간 안에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이다. 위협이다. 자연에 무슨 힘이 존재한들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게 자꾸 인간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242 그리스 사람들이 처음에는 농부였다가 나중에 뱃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스의 신도 마찬가지다. 신들은 들에 있었고, 숲에 있었고, 강에 있었고, 샘에 있었다. 그러다가 바다로 갔다. 그리스에는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았다. 게다가 일정치도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는 늘 물 흐르는 강이 신성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을 건너려면 먼저 기도를 하고 손을 닦았다. 강어귀나 샘물에 오줌을 누는 것도 금지되었다. 농부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그렇게 가르쳤다. 게다가 강은 들판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키운다. 그래서 그리스 아이들은 성인이 되고 나서 긴 머리를 처음으로 자른 날, 그 자른 머리를 강에 제물로 바쳤다. 그처럼 그리스에는 강마다 신이 있다. 그 강의 신은 하나같이 황소몸통에 인간의 얼굴을 가진 모습니다. 유럽 일대가 다 그렇다. 강의 요정은 전통적으로 황소와 연결되어 있다. 반면 그리스에서 물의 요정은 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물과 말, 두 개가 결합한 신이다.  

 

243 허리 아래는 말이고 허리 위로는 사람인 켄타우로스는 시와 예술과 관련이 있다. 원래 켄타우로스라는 뜻은 ‘물을 묶고 있는 자”라는 뜻이다.  

 

사튀로스는 봄을 불러오는 괴물로 나온다. 그리스 사람들은 봄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에 대해서조차 확인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반드시 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245 그리스 말로 데메테르는 곡식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호메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테메테르는 이아시온이라는 인간과 곱게 간 밭을 침대 삼아 정분을 맺었고, 그 사이에 태어난 것이 플루토스다. 플루토스란 부자라는 뜻이다. 고대 사회에서 富부는 창고에 쌓아둔 곡식의 양으로 측정된다.

 

247 대지는 곡식을 키우고, 우리를 키운다. 그리고 우리가 죽고 나면 대지의 신이 우리를 품어, 대지를 비옥하게 만드는 데 사용한다. 곡식이 우리를 키우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곡식을 키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지하세계로 되돌아가야 한다. 지하세계는 무섭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영생을 준비하는 곳이다.

 

250 사람들이배를 탄 이유는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로 바다를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다에서 사람들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고 세계에 대한 인식의 눈을 떴다.  

 

여괴 카륍디스와 스퀼라르 보자. 카륍디스는 지나는 배들을 모조리 삼켜버리는 소용돌이고, 스퀼라는 턱 세걔와 죽음처엄 시켜먼 이빨이 달린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다. 뱃사람들이 보기에 자연이란 그런 괴물들처럼 끔찍하고 파괴적인 그 무엇이다.  

 

251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모든 괴물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인간이 금지된 구역으로 들어가고, 양면성을 띤 자연의 포로가 되어 어두컴컴한 세계로 들어가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힌다.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이 끝나면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자연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오뒷세우스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연에 이길 수 있었다.  

 

252 오래 전 조상들이 자연의 신비와 공포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면, 오뒷세우스는 아주 잠깐씩이지만 웃을 줄도 알 만큼 성장했다. 그때쯤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치부하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의 성질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괴물 같은 신과 잔인한 요정에게 인간의 얼굴을 입히게 되었다. 그래야 좀 더 이해 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252 포세이돈은 집도 있고 암피트리테라는 배우자도 있다. 그는 물고기와 바다에 사는 괴물들과 기타 이상한 족속들의 왕이다.

 

253 제우스는 하늘과 날씨, 천둥과 폭풍우의 신이었으며, 켜켜이 쌓인 구름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이제 점점 제우스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집을 보호해주고, 소금과 빵과 기본적인 식량을 관리해주며, 집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주는 신으로 인식된 순간부터, 사람들은 제우스를 성격 좋은 집주인으로 혼동한다. 낯선 사람이든 노숙자든 반갑게 맞아주는 인간성 좋은 신이 제우스다. 신 중에도 가장 힘센 신인 제우스가 어느새 지상을 내려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256 신을 인간으로 제일 먼저 조작한 것은 호메로스였다. 그는 <일리아스>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을 보여주었다.  

 

258-259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슬픔이 가득한 곳이며, 신이 사는 세상은 기쁨으로 충일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신은 다른 존재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우리는 진짜 신을 만난다. 그제야 신들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깊이 깨닫게 된다. 시인들은 신이 기쁨에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했다. 신이 세상을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것도, 인간과 신에게 부과된 삶의 조건이 다르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가장 확실한 차이는 신들은 끝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웃음과 생기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메로스의 말대로 “눈물은 인간의 것이고, 웃음은 신의 것이다.” 그런 신들을 향한 인간의 종교 감정은 복잡하다. 신은 알 수 없는 힘이기에 두렵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신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인간들은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어딘가에 이곳과 다른 세상이 있다. 가깝지만 확실히 다른 곳이 있다. 거기에는 영원한 존재가 산다. 우리와 닮았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바로 신들이 산다. 올림포스산에 사는 그들은 걱정도, 고통도 없다. 정의도 괘념치 않는다. 도덕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혹시 나쁜 결과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고, 그래서 생긴 게 도덕률이다. 하지만 신들에게는 그 따위가 필요 없다. 도덕률을 어긴 인간에게는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몰라도 신들은 아니다. 기쁨에 못 이겨 이상한 짓을 한들,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신들은 사랑은 하고 질투도 하고 노여워도 하면서 도덕은 없다…? 결론은 하고 싶은 것만 한다.

 

259 사람들은 올림포스를 올려다보고 추앙한다. 하지만 정작 그 위에 사는 신들은 인간들의 삶에 무감하다. 그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존재한다. 신들은 인간의 삶에 간섭하는 경찰이 아니다. 해나 나무나 강과 매한가지다. 인간을 도와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 아름다움을 뽐내며 ‘존재’할 뿐이다. 그런 신들을 마주할 때 인간들은 뭘 느낄까? 이런 저런 도덕률과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신들, 인과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엄청난 힘을 행사하는 존재들. 그 앞에서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인과법칙이라고 하는 것 불교교리의 근본이다. 원인과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연緣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반드시 정해진 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들의 세계나 인간들의 세계나 별반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  

 

260 그들이 신을 예배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신과 같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한계를 뛰어넘고 싶다. 신처럼 존재의 기쁨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신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오만과 질투는 고대 종교의 영원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사람들은 두 개념을 던져 버린다. 즉 신에 맞서면서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스 비극에는 수도 없이 그런 장면이 나온다. 비극이 비극인 이유는 인간이 신에 대항하여 무모한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비극에 나오는 쓰러지는 인간은 용감하다. 그리고 그것은 반대로 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비극에서는 인간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고, 신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262 신에 대한 경배가 인간 자신에 대한 경배로 바뀌는 순간에 종교는 진부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진을 위한 새로운 무기를 집어들 수 밖에 없다. 그게 바로 과학이다.

 

인간이 집어 든 과학이 지구를 힘들게 하고 있다. 신과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문제이다. 문명과 과학 진화 성장 이런 단어들이 지구에 몸살을 가져온다.

 

265 돌무더기에서 진화한 헤르메스다. 헤르메스는 장난기 많고 명민한 신이며, 여행자와 상인, 자영업자, 무역상의 신이다.

 

266 인간들은 영악한 존재라서 신들을 제멋대로 의인화해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 제우스 혹은 아폴론을 그런 목적으로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의인화되지 않고, 높은 곳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은 신이 있다. 지배 계급이 숨겨놓은 건지, 인간의 이성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바로 운명의 신, ‘모이라여신이다. 이 신은 인간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반대한다. 모이라는 단 한 번도 인간이 되어본 적이 없다. 우주의 법이고, 보이지 않는 질서인 그 신은 요지부동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신들이 흩뜨려놓은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267 모이라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성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전혀 추축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모이라는 세상의 질서이고, 지금은 어렴풋하지만 언젠가는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즉 인간 위에 군림하는 모이라도 인간의 생각 혹은 인간의 과학, 인간의 이성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결국 우리가 사는 우주는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그리스 사람들은 알아차리고 있다. 우주라는 단어는 질서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Chapter 9 비극 : 아이스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273 그리스인의 업적 가운데 가장 고결하고 위대한 것은 비극이다. 비극은 간단히 말해서, 우리 속에 존재하는 공포와 희망의 버무림이다. 그것들을 잘 결합해서 완벽한 작품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의 가장 기본적인 공식은 신과 인간의 정의 실현에 있었다.  

 

275 비극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즉 “주인공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 주인공의 액션을 내 액션으로 혼동하는 것”이 비극이다. 나 자신이 눈앞에 펼쳐진 싸움을 수행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극중에서 주인공이 ‘나’라고 호명하는 순간, 관객인 내가 칼끝에 선 듯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비극의 매력이다.

 

276 우리의 주인공은 인간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서 싸운다. 힘들어도 용기 있게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276 비극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싸움은 운명에 대적하는 싸움이다. 싸우는 이유는 운명에 순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 운명이다. 그 운명을 넘지 않고는 인간의 전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지독하고 끔찍한 운명과 싸워야 한다. 싸움은 당연히 어렵다. 하니반 어려워도 불가능해도 싸울 것이며, 아테나이 시민들도, 우리도 주인공 편에 서 있을 것이다. 신은 주인공을 저주해도 관객들은 그러지 않는다. 주인공이 싸우다 죽어도 관객들은 절망하기보다는 오히려 희열을 느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관객들은 주인공의 죽음 앞에서 기쁨을 느낀다. 안티고네의 죽음이 그렇고, 알케스티스의 죽음이 그렇고, 힙폴뤼토스의 죽음이 그렇다. 그 주인공들의 싸움을 보면서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동류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인공도 관객도 모두 인간이다. 그래서 같이 싸웠고, 주인공의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운명과 대적하다 맞은 죽음에서 관객들은 오히려 희망을 본다. 언젠가 운명을 넘어서리라는 희망을 본다. 그게 아니라면 죽음과 비극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이 이상한 족속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비극은 비유법을 쓰지 않는다. 신화를 있는 그대로 가져온다. 비극의 세대를 대표하는 두 사람, 즉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는 아주 종교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신화를 진실로 믿는다. 천상에 사는 신의 세계에는 인간을 온통 파멸로 몰고 갈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운명의 신이 바로 그 힘의 일종이다. 전설에 따르면 제우스도 잔인한 군주의 하나였고, 인간의 전멸을 가슴 깊이 바란다고 한다.

 

277 비극작가는 “시민을 더 나은 사람으로 교육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존경을 받는다. 여기서 더 낫다는 말은 더 강하다는 말이다. 비극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278 신과 인간의 싸움에서 인간이 결국 이길 것인가? 그리스 사람들은 승리를 낙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도 정의가 승리하는 법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안다. 정의란 그렇게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보니까 알게 되었다. 정의가 달성된다는 믿음으로 살았다. 승리를 낙관할 수 없는 삶은 슬프다. 현실에서는 언제 정의가 쉽게 달성되는 사회가 될까. 영원히 오지 않을까?

 

278 부자들의 자리에 잔인하고 자의적이며 무서운 운명의 신이 있고, 가난한 자들의 자리에 인간보다는 조금 더 강하고 용감하며 위대한 영웅들이 있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싸우고, 인류를 위해 싸운다.  

 

279 비극이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의 투영이다. 그래서 진보적이다. 아픈 부분을 자극하고 혁명을 독려한다. 얼핏 보기에는 화해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 화해하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불의에 맞서 싸우라고 부추긴다. 그래야 공동체에 화해가 있고 발전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비극은 진보를 넘어 혁명적 자세에 가깝다.

 

283 아이스퀼로스가 읽은 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건네준 신, 그 이상이다. 그는 인간의 창의적인 정신을 대표한다. 기술과 과학과 발명을 통해 자연에 대적하는 인간이 바로 프로메테우스다. 즉 지금 프로메테우스가 벌이는 싸움은 프로메테우스의 싸움이기보다는 인간의 싸움이다. 인간이 제우스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몰살시키고자 하는 자연력과 싸우는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의 와중에서 인간은 집을 지었고, 동물을 길들였고, 쇠를 만들었고, 천문학과 수학, 의학, 문자 등을 발명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전형이다. 

 

285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증오의 제물이라면 이오는 제우스의 사랑의 제물이다. 그런 이오를 보면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분노에 몸을 떤다.

 

294 이해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그 운명이란 조상 대대로 쌓아온 잘못에 대해 아가멤논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가멤논이 속한 아트레우스 집안의 죄를 아가멤논이 감당해야 했고, 게다가 그 스스로도 사람을 죽이는 우를 범했으므로, 운명을 피할 길이 없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294 아이스퀼로스 생각으로는 우리 중 누구도 나의 죄만 지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의 죄, 내가 속한 공동체의 죄도 지고 가야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도 공범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죄를 지은 가족을 죽이지 않는 한 우리도 공범이다. 아이스퀼로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법도와 운명은 그렇다.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지고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가멤논 자신이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운명의 화살이 그를 향하지는 않는다. 그 역시 무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전대의 죄까지 뒤집어써야 한다. 그가 죄를 짓는 순간 아트레우스 가문의 후손들을 노리고 있던 운명의 여신에게 딱 걸린 셈이다. 죄를 지음으로써 말이다.

 

307 아이스퀼로스는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들과 인간이 결국 조화 가운데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Chapter 10 시민 페리클레스

 

313 “용기가 자유를 낳고, 자유가 행복을 낳습니다. 우리가 이 두려운 전쟁 앞에서 용기를 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페리클레스

 

317 세상은 혼돈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법칙에 따라 질서를 갖추게 되었으며, 그 법칙이란 다름아니라 이성이며, 세상은 이성이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페리클레스가 숭상하는 종교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세계 위에 군림하는 신이며, 다른 하나는 그 신이 현현한 인간이었다.  

 

319 공직사회의 문호 개방과 급료 지급, 이것이 페리클레스가 생각한 민주주의 개혁의 내용이었다.

 

336 파르테논은 한마디로 영원하다. 그것도 부동자세의 영원함이 아니라 움직임의 영원함이다.

 

2

 

Chapter 1 안티고네의 약속

 

11 거룩한 성수나 멸군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눈물과 피로 쓰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글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그렇지 싶은 생각을 요즘 하게 되었다. 공부의 깊이가 생기면 더하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14 모든 비극들은 하나같이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인간, 장애물에 부딪힘으로써 미지의 세계와 대면해 위대함의 새로운 차원을 열려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인간의 야심은 한층 더 단단해진다. 장애물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대다수 인간들의 척후를 자처하면서 스스로를 뛰어넘으려는 영웅은 인류의 수호자이자 인도자다.

 

그리스비극을 처음 접했을 때의 어리둥절함이 생각난다. 강력사건이다. 그리스의 그 시대로 가면 잘 이해가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의 극단. 치정과 복수. 원시 그대로의 삶이다. 어떤 부분은 이 천년 이상의 갭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이고 또 어떤 부분은 갭이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분노와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잘 포장하고 사는 걸까. 인간의 무의식에는 도대체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 건가. 내가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말들이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헸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은 모두다 일어난다.’ 내가 하던 이야기이다. 뭘 알고 했던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생각나는 대로 했던 이야기인데, 이젠 말을 할때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16 비극은 항상 지속되고 변화하는 인간 세상의 미래를 다루며, 이를 표현하고 변화시킨다.

 

18 안티고네는 외삼촌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한다. 신들의 법, “글자로 쓰이지 않은 법” , 영원한 법, 양심을 지배하는 법, 정신 나간 왕이 제멋대로 정한 법보다 더 높은 법에 복종했노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25 비극에 으레 등장하는 주제, 즉 삶에 대한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죽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제를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 찬란하게 빛나는 진실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삶에 전적인 사랑. 죽을 힘을 발휘하는 일. 전적인 공감이 잘 안 된다. 시칠리아의 그리스극장에 가서 앉아 지중해를 바라보면 어떤 느낌이 내게 올까? 삶에의 전적인 사랑이 외부로 에너지를 쓰면 타인을 내부로 에너지를 쓰면 자신을 죽인다고 했다. 외향이 아닌 나는 내향인 것 같다. 몇 년전 죽음을 생각하다보니 그것이 타살이 아닌 자살로는 가능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를 죽이고 남을 해치는 행위. 소극적 비극스토리 이다.

 

39 안티고네의 성격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은 바로 안티고네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다. 그녀는 폴뤼네이케스를 조국의 적으로 증오하기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39 나는 증오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이것이야말로 타고난 연인, 사랑에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는 연인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삶이 환경이 증오를 만드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은 아님은 분명한데, 같은 상황을 해석하는 차이는 존재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을 이야기함이다.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이건 어느정도 타고 나는 것 같다. 기질.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질말이다.

 

43 크레온이 위험에 처한 도시 생각에 분노로 몸을 떨 때, 그는 혹시 분노가 아닌 두려움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까? 이 위대한 왕의 본질은 따지고 보면 두려움이다. 무기력과 연결되는 두려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점점 더 고립되어가는 크레온은 주변에 온통 적들과 음모가 판을 친다고 생각한다.

 

분노와 두려움은 동의어이다. 표현의 문제이니까. 자살과 타살이 같은 맥락이듯이

 

47 우리는 또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지키는 것은, 불행하게도 크레온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 속담에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란 말이 있다. 꼭 같은 의미는 아닌데 잘생긴 나무는 제일 눈에 띄고 사람에게 좋은 용도에 쓰이느라 잘려나간다. 어떤 곳에도 선택되지 않은 못생긴 나무가 고목이 된다는 의미이다. 고상하고 점쟎은 역할을 누구나 하고 싶어한다. 공동체를 위해서라기 보다 자신의 역할을 본성에 따라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 나도 자주 본다. 회사라는 공동체에 몸담으면 그 고유목적 이윤추구를 위하여 일을 하기를 원한다. 수단이나 방법에 있어서는 행위하는 자가 알아서 하고 보여주는 것은 잘 보여주라는 의미이다. 공동체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이 싫으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47-48 알다시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고상한 생각이 아니라 거칠고 상스러운 행동이 아니겠는가. 행동과 저급함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경우를 우리는 인간 조건의 필수적인 요소, 우리를 가장 짓누르는 인간 본성의 일부로 파악한다. 우리는 안티고네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에 앞서서 크레온의 묵직한 흙으로 빚어졌다. 그렇지 않다고 저항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극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 작가가 예술적 기량과 애정을 가장 발휘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같은 통찰력 있는 연민이 담긴 대목이다. 즉 우리는 ‘심술궂은’ 등장인물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심술궂은’ 등장인물들을 마음 밖으로 내치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예술적인 진실과 우리가 느끼는 쾌감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속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Chapter 2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61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에 이어진 세기들은 이들 청동 작품 원본들을 보관하기보다는 녹여서 종이나 화폐, 심지어 무기 같은 다른 물건들을 만드는 편을 선호했다.

 

이런…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이런 삶을 살아왔지 싶다.

 

65 미켈란젤로가 말했듯이 “우리는 손이 아닌 머리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니 자유로운 머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장애물들과 싸우면서 작품을 창조해낸다. 장애물을 하나씩 극복할 때마다 예술가는 가치 있는 작품을 남기게 된다.

신을 재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예술가는 신성에 대한 존중과 신과 대면해야 하는 인간의 대담성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를 가리켜 그리스비극은 각각 아이도스와 휘브리스라고 한다. 따라서 신앙심은 장애인 동시에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창작 의지를 부추기는 촉매였다.

 

69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듯이, 조각상은 삶을 향해 솟아오른다.  

 

79 그리스 조각에서 의복은 남자가 그것을 입는 경우, 또는 여자가 그것을 벗는 경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막힌 수단이 된다.  

 

87 뮈론은 그의 작품 ‘원반 던지는 사람’과 더불어 위를 행동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가 안내하는 세계에서는 불현듯 움직임이 최고의 권위로 지배하며 인간은 균형에 의해서 지탱되는 힘에 취한다. 이런 점에서 뮈론은 조각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Chapter 3 과학의 탄생: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108 신화와 과학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

모든 사고는 처음엔 이미지와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플라톤이 고전시대가 저물어가던 무렵에도 여전히 자신의 사고를 개진하기 위해 빈번하게 신화를 애용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플라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오래된 신화들을 해석하고 새로운 신화들을 만들어냈다. 그리스에서 이제 막 태동하는 과학은 보기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과 훨씬 많이 닮았다. 지극히 순진한 상태로나마 이 과학은 인간이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이며, 언어와 사고는 사회생활의 결과물임을 간파했다. 또한 당시의 과학은 스스로를 기술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인간이 주변 환경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109 적대적이며 이상하고, 비극적인 외부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보호할 새로운 수단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운명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리를 고안해냈다. 인간에게 윤리란 살고 죽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굶주림에 대항해서는 먹을 꺼리를 마련하는 다양한 방식을 생각해냈다.

 

윤리의 부재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될 테니까 말이다.

 

113 포도밭이나 곡물 재배용 밭을 소유한 땅주인들, 철을 제련하거나 양털을 짜는 자들, 양탄자를 짜거나 천에 염색을 하는 자들, 호화로운 무기를 생산하는 장인들, 그리고 상인이나 배를 소유한 선박주와 선원들, 이렇게 세 부류의 계급이 정치 참여권을 놓고 격돌했으며, 서로 기선을 제압하려고 분기충천한 가운데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발명되었다. 이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뱃사람들의 세력을 등에 없은 상인계급이었다.  

 

117 아르킬로코스나 탈레스가 속한 사회적 계급이 추구하는 정신과 그들의 연구는 실증적이었다. 두 람은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아마도 신은 모든 방면에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영원한 물질과 다르지 않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신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미지의 것을 또 다른 미지의 것으로 설명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했으며, 그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인간적인 삶의 리듬을 익혀야 한다”고 말년의 아르킬로코스는 주장했으며, 이는 장차 도래하게 될 과학과 철학의 언어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34 가엾은 녀석,

네 발 밑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주제에,

미리 위에 있는 것을 읽어보겠다고?

 

발 밑을 잘 보는 사람은 하늘을 절대 올려다 보지 않지에피소드. 나는 키가 작다. 작아서 불편한 점이 그리 많지는 않다. 물론 멋진 청바지를 롱다리로 입고 십을 때까 있고, 가디건을 멋드러지게 입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런 것이 삶이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가끔 내게 필요한 물건을 찾을 때가 있다. 어디다 두었는지 가물가물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있을 법한 곳을 찾게 되는데, 꼭 낮은 곳부터 찾는다. 높은 데는 올려다 보지 않는다. 습관이지 싶다. 언제나 나의 행동방경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145 자신이 실제로 얻은 결과와 앞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 사이의 괴리를 통감하는 연구자라면 말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이 같은 순간이면 연구자는 가장 아름다운 소명을 부여 받은 사람이며, 자연현상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목표야말로 왕관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147 데모크리토스는 고대에 가장 핍박 받는 학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물질을 사랑하고 찬미하며, 우리의 영혼이 물질로 만들어졌다고 감히 주장했으니, 후대 사람들로부터 ‘악마의 앞잡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그로 인해 학자로서의 명성과 그가 이룩한 성과물을 잃었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그는 언제나 글을 읽고 글을 쓰는 데에만 전념했다. “책만 읽다가 정신이 돌았다니까!” 압데라 사람들이 그를 어떤 말로 비방했는지 라퐁텐이 쓴 글을 보자.

 

“그 어떤 수로도 그자의 말대로라면, 세계를 제한할 수 없대. 어쩌면 말이지, 세계는 무한히 많은 데모크리토스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도 모르지.

 

시대를 앞서가는자늘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 사실 어떤 일에 미치지 않고서는 남들과 다른 성과가 나오기는 어렵다. 진리다.

 

Chapter 4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 운명에 화답하기

 

151 인간의 삶과 세계를 파헤치는 또 다른 방식, 즉 그리스비극으로 돌아가 보자, 과학과 철학만큼이나 비극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한 방편으로 제시된다.  

 

새삼 공감을 하는 중이다. 더 해야 하지만.

 

153 인간의 행복을 이루는 내부 구조를 폭발시켜버릴 정도로 굉장한 지옥 또는 악마 같은 기계, 아니 신의 기계의 움직임. 극중 행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와 인간 심리를 구성하는 톱니바퀴들이 이 참담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맞물려 돌아간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확실히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톱니바퀴의 맞아떨어짐이 즐거움을 주는 건가. 아니면 비극다음의 희망이 즐거움을 주는 것인가.

 

167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을 우리에게 머리로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극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시적인 작품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고 그 의미를 지적인 언어로 재구성하려 드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175 그리스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로고스와 에르곤, 즉 사고와 행동의 주인이다. 요컨대 그는 생각하고 설명하며 행동하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숙고를 통한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항상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이 점이야말로 오이디푸스라는 인간의 완벽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면이다.

 

181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서 그는 신들의 행위, 그를 벌하기 위해 신들이 준비한 행위, 그에게 크나큰 타격을 입힐 그 행위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는 이 행위를 자신의 두 손으로 스스로에게 가했다. 신들의 행위를 인간의 행위로 만든 것이다. 이는 곧 그것이 자유로운 행위였음을 의미한다.

 

188-191 투쟁 장면들은 따라서 노인 오이디푸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마지막 남은 힘을 그러모으며, 그가 간절하게 기다리는 죽음을 준비하는 장면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기억 속에서 삶의 고통들을 되짚어본다. 그 기억들은 이제 곧 그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게 될 것이다. 평화스러운 이 모든 감정의 흐름은 우리를 오이디푸스의 예정된 죽음이 주는 평안으로 이끈다. 이 죽음으로 비극은 장엄하게 완성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그러므로 평화와 투쟁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흐름의 끝에 놓여 있다. 그의 죽음은 투쟁의 결과이며 기다림의 완성이다.  

 

Chapter 5 핀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229 불가능을 탐하지 말 것이며, “우리 발 앞에 놓은 것”을 직시하라. 그런데 도대체 우리 발 앞에 무엇이 놓여 있단 말인가? “죽어야 하는 인간 조건”이 놓여 있다. 여기서 시인은 용기 있고 멋진 말을 던진다. “오,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삶을 갈구하지 마라. 대신 너에게 주어진 활동의 장에 지치도록 탐닉하라.” 이것이 바로 그가 환자에게 주는 충고였다. 아르클레피오스는 틀림없이 여러 차례 수술을 통해서 환자를 치료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죽을 운명을 타고났음을 상기하라. 그 순간이 올 때까지는 행동하라.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 열심히 살면 안되나?

 

230 “진리의 길을 아는 인간, 현실의 길을 따르는 인간은 신이 그에게 허락해준 행복을 누릴 줄 안다. 하지만 높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끊임없이 바뀐다.

 

Chapter 6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252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같은 독립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을 이 땅의 다른 민족들과 확연하게 구별 짓는 특징이다. 그 덕분에 그리스인들은 아시아나 이집트 군주의 백성이 아닌 자유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254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이 무얼 하면서 어떻게 사는지가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를테면 인간의 실존조건이며 신체적 특성, 인간들을 즐겁게 하는 쾌락의 원천, 인간들이 섬기는 신,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과거 또는 이와는 대조적인 인간 삶의 원시성등. 인간과 인간이 이루어놓은 업적, 인간과 인간이 벌이는 모험, 자연적인 생태계속에서 희한한 풍습을 만들어가면서 사는 인간의 모습, 요컨데 이것이 <히스토리아이>의 중심을 이루는 주제다.

 

260 지리학은 배고픔, 대부분의 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지독한 기아에서 탄생했다. 고대인들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가장 활동적이었던 민족 중의 하나인 그리스 민족은 배고픔 때문에 비옥하지 못하고 경작이 어려우며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은 땅을 박차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곡물 산지 세 곳은 스퀴티아(현재 우르라이나),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다.

 

 

275 헤로도토스는 그래도 나름대로 취사선택을 하고, 늘 하던 방식대로 들은 이야기는 모두 전달하되 남의 말 잘 믿는 그로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경우 나름대로의 선을 그어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278 대륙의 남쪽 끝에 위치한 지역들은, 헤로도토스가 보기에 가장 소중한 자연 자원의 보고였다. 가령 인도는 황금의 땅이고 아라비아는 온갖 향료의 땅이었다.

 

293 풍습은 일상적인 실천에 집착하는 각각의 종족의 사고방식 위에서는 마치 굴레처럼 짓누르는 반면, 풍습 총체에 대한 인식, 즉 종족 각각의 풍습이 다양하며 따라서 서로 모순 될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은, 역사가들에게는 정신의 해방을 도와주는 도구로 작용한다.

 

Chapter 7 인본주의 의학의 꽃, 힙포크라테스

 

302 <힙포크라테스 전집>은 주로 세 부류의 의사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이론에 치중하는 의사들, 즉 모험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철학자들 부류이다.

두번째는 이들의 대척점에 위치한 크니도스 학파에 속한 의사들로서, 이들은 사실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 번째는 힙포크라테스와 그 제자들, 즉 코스 학파의 의사들이다. 이들은 관찰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관찰 결과만을 가지고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렸다. 세 번째 부류의 의사들은 말하자면 실증적인 정신의 소유자들로서, 자의적인 추측을 거부하고 항상 이성에 의지했다. 이 세 부류의 저자들은 성소 중심의 의학에 반대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세 번째 부류의 의사들만이 유일하게 의학을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321 “환자의 몸을 살피는 일은 거창한 작업이다.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언어, 추리력등을 모두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단어, 즉 추리력이라고 하는 말이야말로 우리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322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험은 유동적이며, 판단은 어렵다”

 

짧은 인생을 길게 사는 방법. 예술.

지나간 기회에 아쉬워하지 말고 다가올 기회를 생각하며 사는 것.

판단은 어렵지만 판단후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경우의 수에 따라 해보면 흥미로움.

 

323 힙포크라테스가 정의하는 의학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정신 신체 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생태계 및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인간(육체와 영혼)을 다루는 의학을 가리킨다.

 

325 의사는 환자가 포도주를 좋아하는지, 식탐이 있는지, 쾌락을 즐기는지, 또는 손쉬운 쾌락보다는 노력하기를 즐기는지, 가령 운동을 좋아하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환자가 속한 사회적 생태계, 그 중에서도 물리적 환경이 의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힙포크라테스는 사회적 생태계가 거기에 속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뛰어난 통찰력과 확고한 의지로 밝혀낸다. 유럽과 아시아의 상당수 나라가 그의 연구 결과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한몫 거들었다.  

 

환자를 이렇게 봐야하는데 이런 의료체계를 갖으려면 비용부담이 많이 되겠다. 그래서 주치의가 필요하다. 반드시.

 

333 인간의 치유는 자연의 도움과 인간 신체기관의 도움이 어우러져 이루어진다. 힙포크라테스의 목표는 자연의 치유 행위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얼핏 보기엔 매우 소박하다 <전염병>에는 “자연은 질병을 고쳐주는 의사”라는 대목도 나온다. “자연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에 길을 열어준다. 자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혀는 혼자 알아서 모든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고,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은 자연이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알아서 이행한다.

 

Chapter 8 아리스토파네스의 웃음

 

351 풍자극은 또 신교육의 폐해를 백일하에 드러냈으며, 팔짱낀 무심한 민중들에게 세 치 혀가 맹목적으로 군림하는 파렴치한 상황에도 일갈을 가했다.

 

 

369 신랄한 분노의 감정을 분출하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비아냥과 독설, 권력자들에게나 민중들에게 퍼붓는 가장 천박한 쓰레기로 뒤덮인 진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외설스러움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시’라고 하는 왕관을 쓰고 나온다. 민중적인 웃음. 술집에서 들려 나오는 웃음이 섬세한 아이러니, 보기 드문 유머, 교묘한 패러디 등과 어울어진다. 하지만 이렇듯 들쭉날쭉한 어조 속에서도 모든 요소들은 아리스토파네스라고 하는 작가만이 지니고 있는 색깔을 드러낸다.  

 

373       리스토파네스는 고대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대다수 민중들의 고충을 모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젊은 피, 기근, 비참함 등은 그리스 세계 도처로 확산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20년 동안 고충은 줄곧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용감하게도 가장 외설스럽고 가장 우스꽝스러운 희극적인 행위를 고안해냈다.  

 

375 삶에 대한 사랑이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육체적인 사랑과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을 통해서만 영속될 수 있지 않은가.  

 

Chapter 9 지는 해

 

401 이 황금기는 더도 아니고 고작 50년 정도 지속되었으며, 주로 기원전 5세기 후반부를 가리킨다.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50년이라고 하면, 어느 여름날 하루 정도나 될까…”정오의 열기 속에서, 태양 때문에 정신이 나간 매미는 소리를 지른다”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노래했다.  

 

418 밀고자들은 아테나이 민주주의에 빌붙어서 먹고 사는 최악의 기생충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작품에는 그런 자들이 득시글거린다. 밀고는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극성을 부렸다. 첫째, 판관들이 그날그날의 급여를 받기 위해서, 둘째, 패전이 임박해지면서 당파 간의 갈등이 첨예화하는 양상을 보인 까닭에 아테나이는 이래저래 소송 망국이라는 참담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431 그리스민족은 전쟁과 비참함, 퇴행을 거듭하는 제도, 문학과 예술, 이성과 지혜, 지칠 줄 모르는 용기 등과 더불어 앞으로 천 년 동안 줄기차게 뛸 것이다. 아네타이의 길거리에서 소크라테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묻는다.  

 

Chapter 10 소크라테스라는 수수께끼

 

435 독특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했던 그의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의 죽음이 가져온 엄청난 다산성이다.  

 

437 <구름>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특성을 지녔다.

첫째, 신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자연현상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는 가랑비나 폭풍우를 제우스의 행동이 아닌 구름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다. 이런 의미 즉 어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이다. 두 번째 특성은 궤변학을 일삼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희극 시인의 눈에 비친 궤변학이란 “법정에서 가장 설득력이 약한 논변을 가장 설득력이 강한 논변으로 바꿔놓는 학문”으로 이는 젊은 층에게 자신이 저지른 실수, 가령 간통을 저지르고도 형벌을 피할 수 있는 영악한 수단을 제공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눈에 비친 소크라테스의 두 가지 특성(무신론자이며 젊은 층을 타락 시키는 자)이 그로부터 24년 후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고소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445 나는 누구인가를 물은 최초의 철학자.

그는 끈끈이대나물 껍질 같은 피부 속에 들어 있는 괴상망측한 정신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는 이 영혼,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이방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 그리스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지혜가 담긴 그 글귀를 읽었다. 이리저리 한눈 파는 순례자의 눈으로 한번 쓱 읽은 게 아니었다. 젊은 시절 내내 그의 마음속에서는 “너는 누구냐? 너는 무슨 쓸모가 있느냐? 너는 무엇을 아느냐? 네가 아는 것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등의 질문이 메아리쳤다, 그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열렬하면서 동시에 숙고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열정적인 기질과 냉정한 이성을 겸비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걸되, 분별 있게 그렇게 하고자 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을 아는 유일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447 자연의 신의 영역이며, 인간의 정신은 인간에게 속한다. 일식과 별똥별을 아무리 탐구한다 한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안에서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 인간 각자의 안에서 소곤거리다가 문득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인간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길을 회피하고, 천체 속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질문에 대해 침묵하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하챦은 과학 따위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학파들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고대인들로 하여금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보다 철학을 중시하도록 이끈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은 가히 엄청나다. 잠정적으로 과학을 도외시하며 인간에 대한 인식만을 추구하는 ‘철학’을 택하다니, 이 얼마나 치명적인 선택인가! 소크라테스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 정신, 아니 당시 표현대로라면 인간 영혼의 정복만큼 그가 집착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고려할 때, 명확한 규범에 따라 정신적인 학문을 정립시키기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성큼성큼 여러 세기를 건너뛰기를 즐겼다….

 

3

 

쇠락과 새로운 발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메데이아>

 

11 문명은 발전 과정에서 자연적인 존재들, 이를테면 식물들과 같은 단계를 밟는다. 씨앗이 배테되어 싹이 나며, 성장하고, 흔히 문명의 고전시대라고 하는 시기에 만개했다가 피었던 꽃이 시들고, 노화하며, 쇠락기에 접어들어 결국 죽는다. 어쩌면 문명은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문명은 다음 세대에 올 인간들을 위해서, 마치 귓가를 맴도는 과거에 대한

추억처럼 아련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후세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펼쳐나갈 때, 또 새로운 창작품을 내놓을 때 그 추억들을 적절히 배합하기도 한다. 문명은 실패 속에서도, 다시 말해서 특정 시기까지는 출산에 이르지 못하고 유산만 거듭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무화無化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희망의 불씨로 남아 있으면서 인규의 기억 속에서 다시 타오를 날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을 뒤채고 있는 것이다.

 

12 문명의 쇠락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첫째, 무슨 이유로, 또 어떠어떠한 조건들이 결합했을 때 인류 공동체가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게 되며, 그 가치가 사라져갈 때 무엇을 상실하게 되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 모호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게 마련인 태동기보다 훨씬 극명하게 드러난다.

 

노화기에 접어든 공동체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호흡이 힘들어지면서 숨이 가빠오며, 행동이 둔해진다. 요컨대 삶의 몸짓이 버거워진다.

 

13 그리스 문명은 쇠망하면서, 이와 동시에 사회와 사상의 격변을 통해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이것이 기원전 4세기와 3세기에 나타나게 된 본질적인 지향점이라고 하겠다.

 

16 노예제도나 여자의 생존조건, 남녀평등, 인간의 삶에 대한 신들의 역할, 신 또는 우연의 본질 등에 관심을 가졌다. 에우리피데스는 인간이 대면한 문제라면 모든 것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비참한 삶, 약점, 고독 등 자기시대와 그 시대를 동요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들에 관심을 보였다.

 

17 에우리페데스는 인간을 쥐고 흔들며, 때로는 파멸의 길로 이끄는 인간 내부의 비극적인 요소, 인간적인 열정이 지니는 비극적인 면을 통해서 인간을 설명하고자 했다. 서정시,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고대 말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소설, 르네상스 이후의 현대적 비극의 자양분이 되어줄 이러한 발견, 문학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라고 해도 손색없는 이 발견은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에게서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 에우리피데스만의 개성이었다.

 

18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적인 요소를 우리들 마음속에 들어 있으나(우리 자신의 마음보다 우리와 더 가까운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려지지는 않은 심연 속에 위치시킨다. 그 때문에 그는 우리와 휠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폭탄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폭발한다.

 

19 그 여자에 대해서는 몹시 격렬하고 사나운 불 같은 영혼을 가졌다는 점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 여자에게 몰아 닥친 운명은 여자의 안에, 다시 말해서 여자 자신도 우리도 알지 못하는 어느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21 “아이를 한 번 낳느니 차라리 방패를 들고 전쟁터에 세 번 나가는 편이 나으리!

31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정념을 다루다. 메데이아는 누구인가? 그녀는 물론 괴물이다. 하지만 우리와 너무도 가까운 괴물이다. 우리중의 누구라도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녀는 잃어버린 사랑과 상처 입은 자존심이라는 단계를 밟아가며 이아손을 증오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그녀는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이아손, 자신의 힘을 무시하는 이아손을 증오할 뿐이다.

 

32 지배에 대한 끔찍한 갈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악마로 변해버렸으며, 그 악마를 그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나머지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 것이다. 이‘악마’는 그녀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힘일까? 아니면 도저히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존재의 비이성 속에 늘 깃들어 있던 분노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며, 오직 그 힘이 자신의 의지보다 강하다는 것만 안다.

 

우리는 과연 우주와 구분되는가? 에우리피데스가 발견한 심리적 사실주의는 결국 우리를 이 질문으로 이끈다.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의 악마적인 정념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소속감, ‘코스모스’에의 복속을 강조한다. 이것을 의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비극적 진실은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힘이다.

 

33 그가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즉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복잡다단함이다. 또한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이 힘은, 우리 자신이 그 힘에 대항할 수 없고, 그 힘은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 나타난 비극성

 

47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는 다름 아닌 부재가 우리를 농락하며, 가공할 만한 부재의 이름이 바로 우연이다.

 

49 악의에 찬 인물처럼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독가스처럼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다가 인간 영혼의 모공을 통해 몸 속으로 스며들어 몸을 부패시키는 식이다.

 

51 모름지기 인간의 모든 성공엔 재앙이 뒤따르는 법이다.

 

53 비극을 통해서, 비극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으로 살기를 배우며, 신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인간인 우리 자신의 약한 마음으로부터 기인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야 하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배운다. 그리고 크고 작은 부침이 끊이지 않는 그 운명의 끝에는 언제나 피할 수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비극<박카이>

 

66 왕은 다짜 고짜 화를 내는 성마른 성질과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숭배를 막기 위해서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붓는 경솔함으로 인하여, 분별 있는 종교의 제사장에 대해서 성급한 판단을 내린다.

 

67 “정신이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도다!” 정말로 놀라운 에우리피데스가 아닐 수 없다. 신비에 관한 그의 감수성은 여러 세기를 앞선다.

복잡한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하겠다. 정신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은 깊은 샘물을 파고 나서 마시는 한잔의 물과 같을 것 같다. 시원함. 청량감 갈증해소.

 

68 펜테우스는 잠시 흔들린다. 신성한 것에 대해 그가 좀 더 유연한 영혼을 가졌다면 이처럼 평온한 위엄 속에서 재빨리 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해 왕 앞에 선 예언자의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71 한 순간 신은 인간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더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이 아닌가. 디오니소스는 그러니 이제 인간을 장악하려고 마음먹는다. 선의의 증표였던 온화함은 감언이설이 되어버렸다.

 

76 모든 비극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존하는, 또는 현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계에 대한 반항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모든 비극은 또 다른 의미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가상 뒤에 시에 의해서 드러나는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세계, 아니 시에 의해서 드러난 세계에 대한 믿음행위라고 할 수 있다.

 

79 신의 신비에 대해 마음을 닫는 것은 인간인가? 아니면 신이 인간의 접근을 방해하는 것일까? 기적이 난무한다. 그런데 펜테우스만이 그 기적을 보려고 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신 때문에 그는 기적에 대해서 무감각한 걸까?

 

80 편테우스처럼 에우리피데스도 신을 갈구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기보다는 상대방 즉 신이 문을 닫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82 “지혜는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앞에 나오는 지혜(소위 인간의 지혜)에 중성적이며 매우 지적인 단어, 지혜에 인위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단어 소폰(sophon)이 쓰인 반면, 두 번째 지혜에는 소피아(Sophia), 즉 인간이 비판정신을 버림으로써 되찾게 되는 지혜가 쓰였음에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지혜로 쓰인 단어는 특히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오래된 여성단어로, 살아 있으면서 생산적인 지혜를 가리킨다.

 

83 박코스를 알게 되는 것은 기쁨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의 주요 테마다. 춤추고 노래하는 기쁨, 피리 소리와 포도주를 즐기는 기쁨, 아프로디테와 뮤즈들의 즐거움, 이것이 지적인 지혜를 단념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디오늬소스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열리는 삶이다. 자연, 즉 고대인들의 정서에 따르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신성 그 자체인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려는 이 같은 종교를 우리는 범신교라고 부른다.

 

디오니소스를 알게 되는 것. 아프로디테와 뮤즈들의 즐거움. 인간이 가지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종교, 철학과 과학등 인간을 지혜롭게 하는 데에는 모두 한 몫을 한다. 종교적인 인간이 꼭 지혜롭다고는 이야기 하기 힘들다. 자연과 교감하는 모습이 인간적이고 신에게로 가는 길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88 그는 그의 신이 너무도 확연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마 그 신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어쩌면 그는 또 다른 신을 기다리는 걸까?

 

분명 인간의 영역에서 설명 불가능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현세에 존재하는 특정종교의 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제3의 힘.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구체적인 모습이나 형태를 단정지을 수 없을 뿐이다.

 

투퀴디데스와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

 

97 그가 행동에 나선다면, 그건 언제나 한 발 늦었을 때였다.

휴먼인덱스, 사람들은 확률적으로 다수의 행동에 동참할려고 한다. 그것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든다. 심리적으로 최소한의 안전판 역할을 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하지 않은 유형 두 가지, 한 발 먼저 행동하는 자와 한발 늦게 행동하는 자. 기질과 확신의 문제이겠다.

 

103 행복은 자유 안에 깃들어 있고, 자유는 용기 안에 깃들어 있음을 안다면, 전쟁의 위험과 당당히 맞서라.

 

전쟁의 위험은 현대의 일의 위험과 같겠지. 전쟁이란 것이 작은 도시 국가들 사이에 일상화 되어있었고, 문명의 경계선에서는 그 경계선을 넘는 행위로 전쟁을 치렀다.

자유를 위한 용기. 그것만 전쟁의 명분은 아니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인 경우가 더 많았던 시절도 있고, 단순히 명분을 위한 전쟁도 있다.

 

104 ‘한 순간의 즐거움’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저술은 ‘영원을 위한 산물’, 즉 미래 세대를 위해 제공하는 재산이다.

 

인간이 스스로 삶을 살다 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04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시민들을 위해, 아테나이의 주권자들을 위해, 정치가들에게 역사라고 하는 틀 위에서 개인과 민족을 행동하게 만들어주는 법칙을 알려주기 위해 글을 썼다. 이것이 그의 미래의 인간들에게 제공하는 미래의 인간들이 그들의 이성에 따라, 도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게 될 ‘영원을 위한 선물’, ‘계산’, ‘보물’이다.

 

모든 학자는 무신론자일 수밖에 없다. 신을 살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하는 유용한 역사의 저변에는 하나의 가설이 깔려 있으며, 그 가설은 합리주의적인 가설이다. 역사의 법칙은 원칙적으로 우리의 이성의 법칙과 합치한다는 가설이다.

 

106 결국 역사를 설명하는 열쇠를 쥐고 있은 것은 항상 인간,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변주를 펼치는 인간이다.

 

인간과 자연, 형성과 변형을 되풀이하고, 되풀이가 새로움을 낳는다.

긴 시간을 펼쳐놓고 보면 많은 변화가 있은 것 같아도 또 그 것을 관통하는 원형이 존재하는 형태이다.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인지에 관한 연구는 끝이 없다.

 

109 투퀴디데스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만 죽음과 맞선다.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복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하는 것이다. 소유와 지속, 이것이 생존 본능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익’이 될 것이다. 이익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활동을 좌우하는 동기다.

 

인간 움직임의 동기는 이익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는 자주 다른 이유를 단다.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서이다. 속물이 되기 싫음이겠지. 인간이 기본적으로 속물임을 인정하자. 그것이 덜 속물일수 있는 첩경이다.

 

113 역사란 살고자 하는 의지의 전개, 살고자 하는 의지 사이의 투쟁이다.

 

116 비난 받아 마땅한 일로 간주되던 행동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늘 사용하던 단어의 일상적인 의미를 바꾸어버린다. 가령 지각없는 대담무쌍함이 정당성을 위한 용기 있는 희생으로 치부되며, 절제되지 않은 광기가 진정한 남성성으로 간주되는 식이다어느 누구도 굳이 선해지려고 애쓰지 않는다….중립적으로 남아 있으려는 시민들은 극단적인 양측의 극성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간다

 

데모스테네스와 도시국가 시대의 몰락

 

129 두 눈을 크게 뜨고 우박이 떨어지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그저 그 우박이 자신들의 밭이 아닌 남의 밭에만 떨어지기를 비는 사람들 같다. 우박의 방향을 바꾸는 일, 누가 도대체 그 일을 생각한단 말인가?

 

행동하지 않는 자.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모르는 자. 결과는 똑같다. 그 차이는 자신만 알 뿐이다.

 

130 필핍포스와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부상하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그리스의 변경 지대를 중심으로 왕정체제가 슬며시 정착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스 최초의 민주적인 도시국가 아테나이, 그리고 아테나이와 더불어 도시국가라고 하는 모범적인 정치체제에 충실했던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의 수호자는 오직 데모스테네스(그는 물론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환상을 갖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단호함에 손톱만큼의 흔들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 사람 뿐이었다. 아니, 백 번을 양보해서 거의 한 사람뿐이었다고 해두자. 도시국가란 자유롭고 대등한 지위를 가진 시민들의 공동체이며, 최고 주권을 지닌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자주 독립 수호를 소중히 여긴다. 데모스테네스에게 도시국가의 민주주의 체제란 그리스 문명이 낳은 가장 높은 수준의 가치였다.

 

132 아테나이 민중들은 아테나이 제국으로 군림하며 축적한 부를 이용해서 용병을 사고, 그 용병들이 자신들의 대신해서 자유시민들의 특권을 지켜주기를 원했다.

 

132 그는 아테나이 민중들의 정치에 관한 무관심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그런 일은 자신들이 선택한 ‘주인들’에게 맡겨버리는 편을 선호했다. 이 주인들이란 그들의 마음에 들려고 애를 쓰는 아첨꾼에 불과했다. 일상생활에서는 허구한 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언론이 민회에서는 포플리즘을 구사하는 아첨꾼들에게만 언론의 자유를 허락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정치임에도 그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예전에도 그랬었나보다.  정치인과 민중(유권자)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들이다.

 

136 뇌물을 받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고백한 사람을 비웃는다.

 

137 데모스테네스는 마흔여덟 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개 병사로 전투에 참가했다.

 

142 이미 죽어버린 아테나이의 민주주의를 위해 데모스테네스는 죽음을 택했다. 그는 노예 상태로 사는 것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을 선호했다.

 

플라톤의 정치적 대망

 

플라톤 이전에 그리스 문학은 시가 중심이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시인은 젊은 층은 물론 도시국가 전체의 교육을 담당했다. 플라톤 이후에 그리스 문학은 지혜, 과학, 철학이 중심이 되었다.

 

149 벌거벗은 운동선수처럼 아름다운 카르미데스가 온다벌거벗은 운동선수처럼 아름다운

카르미데스. 그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소크라테스마저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그의 감탄에는 항상 약간의 아쉬움이 뒤따랐다.“그런데 저 아름다움에 아주 사소한 한 가지 요소만 덧붙여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가지 요소라니, 그게 뭡니까?” 라고 크리티아스가 묻는다.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네.” 소크라테스가 대답한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유한하다. 아주 짧다. 가끔 본다. 저 사람 젊었을 때 참 예뻤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인간이다. 영혼이 아름다운 자. 왔다가는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방법이다.

 

153 마치 죽음이 이제까지 영위해온 삶보다 훨씬 더 명료하게 그가 아테나이 민중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보여준다고 믿는 것 같았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마셨다.

 

155 “철학자들이 국가의 왕이 되지 않는 한, 또는 현재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진정하고 충분히 자격 있는 철학자가 되지 않는 한, 정치 권력과 철학이 동일 인물 안에서 결합하지 않는 한…국가를 좀먹는 해악은 물론, 인류의 해악마저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156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며,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유일한 재화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가 행동에 돌입하기에 앞서서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역설 중의 하나(“불의를 감내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는 자보다 훨씬 행복하다.”이 역설은 소크라테스의 역설인 동시에 오르페우스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에 맞추어 정립해야 할 것이다.

 

157 플라톤의 학당, 고대 말엽에 생겨난 이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에너지의 보고였다. 이곳에서는 말하자면 폭발적인 힘을 제조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고대를 계승하게 될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다. 이 새로운 시대란 기독교 세계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국가>를 저술하고, 이어서 <법률>을 집필했다. 이 두 저술은 정치에 대한 그의 변치 않는 소명을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보여준다.

 

157 플라톤은 항상 이탈리아 남부와 시켈리아에 매력을 느꼈다. 이미 오래전부터 덕성이 필연적으로 학문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던 플라톤이 타라스의 아르퀴타스와 만난 것도 그곳이었다. 아르퀴타스는 수리역학과 음향학의 선구자이며 당시 상당한 권위를 누리던 퓌타고라스 학파에 속하는 철학자였다.

 

158 비참함과 배고픔으로 가득한 삶에서 오르페우스주의는 이들에게 팍팍한 삶을 잊게 해주는 피난처이자 죽음을 약속해주는 일종의 꿈이었다.

 

159 우리는 정확하게 어떤 형태로 플라톤이 디오뉘시오스에게 백성을 통치하는 철학적 방식을 설득하려 했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디오뉘시오스는 격분했고, 플라톤은 강제로 라케다이몬 배에 태워져 어느 날 아침 아이기나 섬에 버려졌다. 그곳에서 그는 노예시장에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웬 너그러운 사람이 그를 사서 친구들과 철학의 세계로 그를 돌려보냈다. <고르기아스>에서 인간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자로 범죄를 저지르나 처벌을 받지 않는 독재자의 초상을 제시한 플라톤은 몸소 겪은 경험을 통해서 그 같은 인물을 잘못 건드린 철학자에게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후대의 철학자 베이컨은 경험한 것 만이 지식이다라고 했다. 탁상공론행정을 접할 때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현장과 이상의 불일치를 요즘도 많이 본다. 절대권력이 가지는 폐해이다. 좋은 말과 좋은 의미가 모두에게 통하는 것도 아니다. 비단 절대권력을 가진 자 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번 시칠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시라쿠사에 관한 자료중에 플라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그리스인이야기를 먼저 읽었었는데 자세히 읽지 않았었다는 반증..! 이다.

 

160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를 철학에 입문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디드로 역시 예카테리나 대제를 움직이지 못했다. 쉬라쿠사이의 두 디오뉘시오스 왕을 상대로 시도한 플라톤의 실험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디온은 살해당했다. 기원전 354년 쉬라쿠사이 권력자의 스승이었던 그는 플라톤의 표현처럼 정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진정한 철학자왕이 통치하는 세상을 보고 싶어했던 플라톤의 마지막 희망도 날아갔다. 플라톤은 젊은 친구의 죽음 앞에서 씁쓸한 눈물만 흘렸다. 디온의 살해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환멸감을 안겨주었다.

 

160 그는 그의 목숨을 앗아간 자들의 고약함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의 어리석음, 변태성, 탐욕성이 그 정도로 깊었음은 짐작하지 못했다네.

 

162 역사에서 새로운 시작이 아닌 실패나 종말은 없다.

 

인생도 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164 플라톤은 전쟁이라면 악성 전염병만큼이나 혐오했다. 하지만 그는 “평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마저도 상실한 나머지 제일 먼저 쳐들어오는 적 앞에 무릎을 끓는 무기력함도 경계했다.

 

165 말이나 소의 종자를 개량하는 생산자들의 방식에서 받은 영감과 짐승과의 허무맹랑한 비교를 통해 작성한 우생학적 고려가 적잖이 포함되어 있다.

 

167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플라톤의 철학이 인간의 마음을 가장 심각하게 소외시키는 이론 중의 하나로 보인다. 세월과 더불어 그의 철학은 심지어 위안의 종교처럼 발전되어갔다. 이론상의 약점에 대한 방증이 아니겠는가.

 

169 인간은 부동의 낙원에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역사는 배려하려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인간을 만든다. 안정된 세기들이란 겉보기만 그럴 뿐이다. 플라톤이 <국가>를 쓰면서 민주주의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세기로부터 여러 세기가 지난 후, 민주주의를 향한 행보는 안정된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코뮌과 더불어 보란 듯이 재게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1789년 …1848년에도…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를 뒤흔든 열흘…”로 이어진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플라톤식 아름다움과 환상

 

173 플라톤은 실재, 즉 상식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감각적인 것, 색채 형태, 소리의 세계를 사랑하는 시인이었다. 플라톤은 일생 동안 줄곧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이 물리적인 세계에 열렬하게 매료되었다. 그의 저작은 이를 화사하게 보여준다. 그는 태양과 별을 사랑했으며, 하늘과 바람결에 실려가는 구름, 미풍에 흔들리는 나무, 푸른 초원과 강물, 물과 수면에 비쳐서 늘 바뀌는 존재와 대상의 그림자를 사랑했다. 그의 저술에는 자연의 세계가 늘 흐드러지게 넘친다. 백조와 매미들은 그의 신화 속에서 즐겁게 노닌다. 키가 큰 플라터너스의 그림자, 샘물의 신선함, 보랏빛 포도송이의 향기 등이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가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나누는 대화의 배경처럼 등장한다.

 

174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자연의 걸작품으로서의 인간의 정밀한 아름다움, 성년이 되면 무르익게 될 청소년들, 체력 단련장에서 운동하는 청소년들의 우아함을 사랑했다. 단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그들 신체의 우아함 속에 배움으로 불타오르며 선해지려는 의지로 가득한 영혼이 자리하고 있어야 했다.

 

181 플라톤은 우리에게 육체의 감옥에 갇히기 전에 천상을 주유하던 영혼을 보여준다. 여기서 영혼은 날개 달린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비유된다. 두 마리 말 중에서 한 마리는 흰색이며, 영광과 덕성, 진실을 모두 겸비했다. 이 백마는 우리의 고귀한 정념, 아름다움과 선함을 향한 우리의 본능적인 노력을 상징한다. 다른 한 마리는 퉁퉁하고 꼬였으며, 검은색에 목은 짧고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으며, 콧구멍에 털이 잔뜩 났다. 또한 폭력적인 성향을 지녔으며, 고삐를 힘껏 잡아당겨야 겨우 멈춘다. 이 검은 말은 우리를 불의로 이끄는 저급한 정념을 가리킨다. 이 상징적인 마차를 모는 마부는 바로 우리 영혼의 고귀한 부분, 즉 이성이다. 이성은 날개 달린 두 마리 말을 정면에서 몰아야 하며, 신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따라서 이 말들을 하늘로 올라가게 해야 한다. 영혼들의 행렬은 그러므로 영원한 이데아, 즉 자체로서의 아름다움, 자체로서의 정의가 절대 속에서 머물고 있는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야 한다.

 

184 플라톤이 기원전4세기의 그리스에서 전개해나가던 세계관의 심오한 참신성과 만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대의 삶은 죽음과 내세를 향하지 않았다. 고대의 삶은 지상에서의 재화의 생산과 정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인간이 지상에서 사는 즐거움, 짧은 기간이나마 최대한 용감하게, 최대한 올바르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최대한 영웅적으로 사는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었다.

 

종교적 인간이 아닌 나는 고대의 삶의 형태가 좋다. 죽음과 내세를 향하지 않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185 “나는 저승에서 왕으로 지내는 것보다, 지상에서, 태양 아래에서 가난한 농부를 돕는 날품팔이 일꾼으로 사는 편이 더 좋다.

 

나도!

 

185 죽음은 여러 번 씩 현자를 육체적 삶의 어려움으로부터 행방시켜주어야 한다.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 이라고 오래 전에 죽음을 맞은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 안에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186 인간의 끈질긴 희망, 가장 확실한 존재 이유는 내세에 있다. 이처럼 이제부터는 우리 영혼의 불멸성이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며, 이를 내포한다.

 

186 육체는 우리를 사랑과 욕망, 두려움, 수천 가지의 공상, 수많은 경박스러움으로 채운다. 너무도 가득 채우기 때문에 속담에도 있듯이 우리에게는 좋은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다. 전쟁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혁명이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육체와 육체가 품는 정념에서 온다. 모든 전쟁은 부를 축적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우리는 육체를 통해서 부를 축적해야만 하지 않는가? 그 때문에 우리는 육체의 노예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철학을 생각할 시간이 없는 이유다!

 

187 육체의 광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순수한 우리는 우리만큼 자유롭고 순수한 물체들과 더불어 살게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의 힘으로 순수한 본질을 깨닫게 될 것임을 나는 소망한다. “육체의 광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순수한” (그리고 그보다 앞서서 나온) “부패…염증….육체의 오점”등 육체에 대한 모멸적 표현, 육체와 감각적인 삶에 대한 경멸적 표현으로 채워진 이 대목을 보라.

 

191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다면, 순수해진 영혼은 육체로부터 아무것도 끌고 가지 않는다네, 육체와 더불어 일생 동안 자발적인 그 어떤 교류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와 반대로 늘 육체를 멀리하며 자체로서 숙고하며, 그것만을 유일한 소일거리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지…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영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철학을 하는 것이라네, 다시 말해서 궁극적으로 고통 없이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지.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192 보고, 만지고, 먹고, 마시고, 사랑의 쾌락을 맛보는 것 외에는 실재가 없다고 믿게 된다면,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는 모호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얼마든지 이해 가능하고 파악 가능한 것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피하게 된다면, 그런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게 될 때, 자신의 본성이 온전함과 자유로움을 되찾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195 죽어서 우리의 무덤인 육체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삶,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 삶은 이미 죽음이며, 우리에게 온갖 부조리한 행동을 저지르게 만들며, 정념의 방탕을 가져오는 무분별이다.

 

197 “불의가 이 세계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영혼을 벌거벗기는 죽음의 순간이 오면 고약한 자들의 내면의 비참함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임을 확신하자, 영혼이 지금이라도 치유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영혼이 영원히 불의 속에서 살게 하는 자들은 불행하도다!

 

203 정당하건 과도하건 욕심이 모든 사회 계층에서 분출되어 나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약속했던 비인간적인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항상 바닥을 응시하거나, 짐승들처럼 식탁 쪽으로 몸을 숙이고서 그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거나 서로 교미했으며, 누가 가장 많은 쾌락을 차지할지를 정하기 위해 발길질을 해대며 머리를 들이받거나,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뿔 또는 쇠편자를 서로에게 죽도록 공격을 가했다.

 

205 그리스 문명 전체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던 균열을 잘 살펴보기로 하자. 공동체(비록 유사 민주정 체제의 고동체라고 할지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앟는다)내에 노예제도가 마구잡이로 성행하게 만든 고대인들의 무분별을 새삼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노예제도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들이 세운 문명을 파괴하고 그들의 실존마저 위협했다. 그런데 솔직히 이와 같은 무분별함은 전혀 놀라운 것이 없다. 당시 사람들은 전방위로 무차별적으로 성장해나가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었다. 새로 정복한 땅에 새로운 신전을 건립하고 극장을 짓고,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항해에 나서야 했으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물건들을 교환하고, 도처에 인간들이 살고 있음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은 훗날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인간을 위해 봉사하게 될 적절한 도구 땨위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에게는 도구와 기계의 부재가 특별히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무제한적이라고 믿을 정도로 많은 다른 도구들과 기계들, 즉 노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08 “생명 있는 기계”, 즉 노예가 많으면 “생명 없는 기계”의 제작이 불필요하다.

 

거의 대부분의 고대인들은 이 같은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풍부한 노예 노동력은 기계의 발명을 불필요하게 만들며, 기계의 부재는 노예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현대에 노예제도는 없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노예와 다름없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된다. 풍부한 기계들. 발전하는 기술, 이제는 사람이 중심인 사람만이 가능한 역할에 대한 고찰이 없으면 또다시 삶은 노예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자연으로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213 <고백록>의 다음 장면은 너무도 유명하다. 정원에서 기도 중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에서 노래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들은 것 같았다. 아이는 “이걸 집어서 읽어봐, 이걸 집어서 읽어봐”라고 노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얼마 전부터 그의 손을 떠나지 않던 바울 사도의 책을 집어 들고 아무 데나 펴서 읽었다. “진수성찬이나 요란한 연회, 성관계, 난봉질을 금하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고 더 이상 육욕을 만족시키려고 애쓰지 말라!

 

214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엄청난 양의 저술을 통해서 우리는 “플라톤 학파의 글’로 무장한 그를 매개로 하여, 기세등등한 이단 사상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카톨릭교회의 가장 순수한 교리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218 최초의 철학은 신들의 원초적인 언어다.

 

220 한입 깨물면 깔깔한 입안에 달콤한 즙이 흥건히 고이는 잘익은 과일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생생한 그리스어가 주는 관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플라톤의 문장이 상상을 뛰어넘는 희열로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며 자신의 안에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언약을 일깨우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사로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멸을 만들어내고, 천사를 만들어내는 그의 문장만이 인간의 부조리한 몽상(영원한 삶), 마치 배고프면 한입 깨물어 먹는 빵조각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준다는 것도 느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생명체

 

225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 두 사람은 비단 철학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도 매우 위대한 인물들이다. 둘 다 단연 천재급이다.

 

천재라는 말은 그러니까 뛰어넘기, 새롭게 발견하기, 즉 창조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철학이 일종의 처세술이라면, 플라톤과 아이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변화시킴으로써 이 기술을 구체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므로, 두 사람 이후(알렉산드로스는 같은 시대에 활약한 세 번째 천재라고 할 수 있다)의 인간들은 그전의 인간들과 같을 수가 없게 되었다.

 

227 “나는 플라톤을 좋아한다. 하지만 진리를 더 좋아한다” 아이스토텔레스의 비판에 대해 플라톤은 “어린 망아지가 엄마 엄덩이에 발길질 해대는 격”이라고 평했다.

 

스승과 제자의 우정은 이처럼 수렴되거나 상충하는 비판을 통해서 견고하게 유지되었다.

 

229 중용을 전파하는 사도, 실현 가능한 것에 토대를 둔 상식을 설파한 철학자와 불가능한 것에 집착하며, 불가능한 것을 현실로 만든 대담무쌍한 청년 사이에 이루어진 이 놀랍고 역설적인 결합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알렉산드로스(14)담당스승 아리스토텔레스

 

232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과 그 안에서 서식하는 모든 존재를 알고 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 이 세계의 의미를 꿰뚫어 간파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려는 불 같은 지적 호기심이었다.

 

235 그에게 영혼이란 모든 동물의 생명의 원칙이다.

 

237 밀이 잘성장하라고 제우스 신이 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차갑게 식게 되며, 일단 차가워진 수증기는 물로 변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250 “인간은 직립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인데, 그것은 인간으이 본성과 본질이 신성하기 때문이다. 뛰어나게 신성한 존재(즉 인간)의 기능은 사고와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능은 인간의 하체가 무거웠더라면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게는 합리적인 사고와 상식의 유연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영원토록 엎드려 있어야 할 운명”이다!

 

251 식물은 ‘머리’가  땅속에 들어가 있으므로, 감수성을 상실함은 물론 지능도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256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부분이다. 멀고 먼 여정이지만. 자연과 과학의 중간, 신의 존재.

 

263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동시에 친근하고 익숙한 실존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생명체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근원. 즉 욕망에 따라 자손을 번식해나가는 삶, 배고픔을 느끼는 삶, 허기를 달래고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치열한 삶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엔 멀게만 느껴졌던 동물의 세계는 책장을 넘길수록 이상한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이 같은 감정들이 전혀 아무런 과장 없이 펼쳐지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아니 우리의 오장육부를 한층 더 강력하게 휘어잡는다. 살아 있는 생명체 각각으로 보자면 일시적이지만 지구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 전체를 놓고 보면 영속적인 삶은 그렇게 우리 앞에 펼쳐진다.

 

생명은 인간과 식물에게 공통적인 재화임에 틀림없다.

 

265 우리의 동류성, 풀과 꽃, 나무, , 물고기, 야수들의 세계와 우리 사이의 형제애를 한층 더 공고하게 다져주며,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성 또는 우애에 관하여

 

269 아무리 참을성 많고, 아무리 능란한 손가락으로도 절대 풀 수 없다고 여겨졌던 이 매듭을 앞에 두고 알렉산드로스는 그걸 풀기 위해 씨름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단칼에 그 매듭을 잘라버렸다.

 

272 그는 밥 먹듯이 그럴듯한 거짓말을 뿌렸으며, 약속을 어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의 운을 드러내고 말고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승리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목표를 정하면 그는 곧장 그의 열정이 식어버리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그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281 오래된 신전들을 복구하고 새 신전을 건축하였으며, 축제를 신설하고 행사 행렬을 이끄는가 하면 굴복한 도시들에게 과거의 특권을 되돌려주기도 했다.

 

297 알렉산드로스가 “인간이 사랑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수행자들 중의 한 사람이 “모든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권능 있는 자가 된 후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자”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데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평생 동안 과일 열매를 맺는 인도의 대지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죽고 난 후에는 번거로운 동반자인 육체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307 헤로도토스의 호기심과 즐거움, 열정은 인간 지성의 결정판이나 에너지 넘치는 활약상, 여러 나라와 민족의 진기한 풍습과 만날 때마다 자유롭게 폭발한다.

 

324 알렉산드로스는 누가 뭐래도 공간의 정복자였다. 그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영원히 파괴했으며, 그 대신 이집트. 페르시아, 인더스강, 펀자브 지역까지 제국을 넓혔다. 그는 후계자들에게 그 당시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질서라는 탈을 쓴 무질서, 두 명의 프톨레마이오스

 

331 예술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책의 전성시대, 알렉산드리아:도서관과 박물관

 

357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하늘을 이 등대의 불빛보다 찬란한 두 개의 빛으로 수놓았다. 시와 과학의 불빛이었다.

 

361 박물관은 말하자면 최초의 대학이었다.

 

362 그 중 한 도서관에는 이집트 문자로 ‘정신의 피난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364 필라텔포스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레르게테스는 귀중하고 희귀한 책들을 구입하기 위한 지출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엄청난 액수의 보증금을 물고 아테나이에서 기원전 4세기에 필사되었으며, 아테나이의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는 공인된 비극 전집을 임대했다. 일단 책이 손에 들어오자 그는 보증금을 포기하고 그 책을 두고두고 보관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

 

389 아낙사고라스는 아테나이법정에서 태양은 불타는 암속이며 달은 흙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리학:퓌테아스와 에라토스테네스

 

397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은 바야흐로 탐험의 시대, 지리 연구의 시대를 열었다. 대중들의 호기심과 상인들의 돈벌이 욕심 또한 알렉산드로스 원정에 참가했던 동반자들의 이야기 덕분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대지의 면적이나 바닷길, 육로 등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얻으려는 학자들의 탐구욕도 이에 못지 않았다. 기원전3세기 무렵에 이루어진 수많은 여행 중에는 상거래를 위한 여행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목적을 위한 여행도 적지 않았다. 지리학자들은 이 같은 여행을 토대로 정확한 세계 지도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각 지역 주민들의 풍습과 알려진 지역들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겠다는 야심도 감추지 않았다.

 

 

의학:아르키메데스, 헤론, 그리고 증기기관에 관하여

 

416 과학과 관련된 활동이 그리스에서 이집트로 옮겨오면서 생겨난 가장 놀라운 변화는 바로 시체 해부가 너무도 당연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보존하는 전통을 유지해온 이집트에서는 관습적으로 가족 친지들의 해부를 일종의 장례 의식처럼 친근하게 여겼으므로, 박물관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을 위해서 인체 해부 금지라는 그리스적인 조항이 해제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23 유서 깊은 이집트의 경험주의와 그리스 합리주의의 만남(바닥을 치고 도움닫기를 하는 마지막 기회), 이질적인 것들끼리의 융합은 그리스 학자들의 기계 좋아하는 전통을 소생시켰을 것이다.

 

431 노예제도는 기계의 사용을 저해한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당시 노동력은 전혀 비용이 들지 않았으며, 노예제도가 존속하는 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저장고를 보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435 희망이 있는 한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로의 회귀:칼리마코스,로도스의 아폴리니오스가 쓴 <아르고나우티가>

 

 

454 휘라스가 물병을 샘물에 담그자,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휠라스의 청동 물병 속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요정은 휠라스의 아름다운 입술에 입 맞추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왼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팔꿈치를 잡고서 휠라스를 물속으로 이끌었다….

 

476 이 여자는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듯이, 즉각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이 감정에, 이 마력에 바친다. 그러는 동시에 여자는 매 순간 내어주려는 자기 자신을 되찾아오거나 되찾아오려고 시도한다. 낭만주의란 이처럼 상반되는 가치들이 인간 존재의 마음속에서 서로 얽히고 뒤척이면서 상대방을 밀어내는가 하면 밀려나는 움직임의 연속이다. 첫눈에 반한 운명의 순간에 이어지는 밤중 내내 메데이아라고 하는 인물은 전적인 수줍음과 전적인 정념 사이를 헤아릴 수도 없이 여러 차례 오간다. 요컨데 메데이아는 빅토르 위고 식으로 말하자면 천당에 올라갔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죽음으로 돌진하는가 하면 어느새 한달음에 삶을 향해 뛰어오른다.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러 생을 마감하게 해줄 독약을 꺼내는 일화, 눈물이 흘러내리고, 죽음과 접촉하려는 순간 문득 솟아오르는 즐거웠던 순간들의 이미지, 죽음을 밀어버리고 기쁨을 향해, 이아손과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그 이미지들, 이 장면은 문자 그대로 낭만주의의 결정판이다(결정판이라고 하면 완벽함을 의미한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이 장면이 그리스 문학에서 유일무이한 장면이라고 확신한다. 정념과 정념으로 인해 파생되는 대조의 효과 외에, 아폴로니오스에게는 낭만주의적이라고 형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면모가 있는데, 바로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자연을 결부시킨다는 점이다

 

테오크리토스의 낙원

 

484 취향을 살려 교양을 높이는 것을 휴식이라고 여기는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486 그는 사랑에 빠지면서 비로소 자신의 못생긴 용모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사랑이 기운 센 그를 사납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유순하고 섬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갈라테이아에게 그는 그저 자신의 오두막으로 와서 곁에 앉아만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보기에 내가 너무 거칠고 퉁명스럽다면 나를 상대해줄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내가 참나무 장작을 마련해놓았으니 화롯불 곁에 앉아만 있어요. 나는 혼자서 슬픔을 견딜 테니까난 당신이 입술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저 손등에나 키스할 겁니다….그는 순진하며, 그가 연인에게 주겠노라고 제시하는 선물들이 또 감동적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달의 흔적을 간직한 열한 마리의 암사슴과 네 마리의 아기 곰을 기를 겁니다….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눈꽃을 따올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양귀비 꽃다발을 만들어 줄 겁니다. 그런데 하나는 여름에 피고 다른 하나는 겨울에 나오니, 두 지를 동시에 당신에게 줄 수는 없겠군요

 

487 우리는 삶과 꿈의 경계에 놓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시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삶의 체험이라기보다는 삶에서 출발하는 아름다운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열정에 대한 몽상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시적인 변화를 통해 평온해지며 빛을 발하게 되는 사랑의 고통 같은 것들 말이다.

 

500 그 어떤 시의 세계도 우선 진실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 테오크리토스의 시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501 기후가 좋은 계절이면 목동들은 산을 떠나지 않으면서 이 초원 저 초원으로 옮겨 다닌다. 그럴 때면 주로 풀밭에서 별을 벗 삼아 야영을 하지만, 이따금씩 동굴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동굴에 부엌을 설치해서 반 혈거인들 처럼 산다는 말이다.

 

505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온 세상을 주고 싶은데, 실제로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노래밖에 없다. 그의 노래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음에 대한 탄식으로 끝난다. “당신의 자태는, 그건….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513 돈이면 만사형통인 이 세계에 그 자신도 심한 염증을 느꼈다. 그는 이 고단한 세계에서 나무와 풀밭, 맑은 물에 대한 향수를 길어 올렸으며, 양치기들의 소박한 생활에 대한 부러움을 전파했다. 그는 말하자면 청춘의 샘, 자연의 세계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천진함을 새삼스럽게 발견했다는 일종의 환상을 선사했다.

 

 

다른 형태의 도피:테론다스와 사실주의 풍자 희극, 그리스의 소설<다프니스와 클로에>

 

522 인간이 위대함에 다가가려는 욕망을 지녔을 뿐 아니라 약점(여기서 나는 비천함이 아니라 분명 약점이라고 말한다)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인 이 세계 속에서 그의 위치를 제대로 가늠해야 하며,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과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칙을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제까지 그리스문학이 추구해왔던 목표였다.

 

525 온종일 당신은 나를 나무랄 거리를 찾고 있군요. 비틴나, 나는 노예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낮이고 밤이고 당신 심기를 살피며 불안해하느니 그 편이 나을 것 같소.

 

포기한 노예가 아니라 포기한 남자다. 남자임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 많지

 

532 그리스 문학은 귀로 듣기 위하여, 몸으로 체험하기 위하여 존재했다.

 

540 햇빛에 환장한 매미도 기를 쓰고 목청을 높인다.

 

543 “벌거벗고 함께 자기를 실천에 옮기는 장면을 상상해보라….두 사람이 첫날밤에 한 침대에서밤새도록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사냥에 나선 고양이들처럼 눈을 감지 못하고실컷 사랑을 나눈 뒤 흡족해 하는 광경은 또 어떤가.

 

544 사랑은 더 이상 삽포나 에우리피데스의 시에 나타나는 것처럼 존재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얼음장 같은 죽음으로 몰아가는 질풍노도가 아니다. 사랑은 이제 서서히 저물어가는 맑게 갠 날에, 아름답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여인과 함께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남자와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다. 다프니스, 너의 클로에는 우유를 살짝 곁들여 같은 잔으로 마시는 포도주처럼, 그의 입에서 너의 입술로 전해지는 피리 소리가 빚어내는 멜로디처럼, 아름답고 부드럽구나. 클로에. 너의 다프니스는 피어나는 꽃보다, 시냇물의 노랫소리보다 소중하고 아름답구나. ! 그의 품에 안긴 너는 그의 새끼 염소로구나! 이런 식으로 사랑의 달콤함은 이 세계의 부드러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에피쿠로스와 인간의 구원

 

551 역사가 마무리 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역사는 계속된다.

 

552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그저 친구가 되는 것으로 만족했다.

 

553 그른 인간들에게 가장 천박한 유물론, 즉 먹고 마시는 유물론을 제시했으며, 신에 대한 경멸을 가르치고, 세상에돼지들의 학교를 선사했다.

 

그는 인간들이 쓸데없는 두려움과 고답적인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온한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해방자이며, 치유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준 치료사다. 사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 아니 얼마든지 치유 가능한 어리석음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루크레티우스는기품 는 열정이라고 표현되는 문체를 빌려. 이렇게 선언했다. “그는 신이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지혜라고 일컫는 삶의 법칙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자신이 정립한 학문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수많은 폭풍과 수많은 암흑으로부터 끌어내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

 

560 노동자들의 삶은 제어가 불가능한 자본의 힘에 종속되게 마련이다. 그리스 사회에서 노예 노동의 본격적인 활용은 소규모 생산자들의 대대적인 몰락을 가져왔다. 요컨대 노예 노동은 자유노동자 계급의 왜곡과 소멸을 초래한 것이다.

 

566 인간은 불행하다고 에피쿠로스는 단언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기쁨을 위해 태어났다. 에피쿠로스는 기쁨의 필요성, 기쁨의 소박함. 기쁨의 즉각성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기쁨은 언제나 우리가 손을 내밀면 잡힐 만한 곳에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현실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란 말인가? 우리가 가진 으뜸가는 두려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어디를 가나 따라다닌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은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분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황당한 기분전환을 즐기고 있을 때에도 이 생각은 줄곧 인간을 사로잡으며, 새로운 지평선이 열리지 않도록 꽉 막아버린다. 죽음에 대한 생각 앞에서 인간은 마치 곧 끝 모를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와 현기증으로 가득 찬다

 

3.     내가 작가라면

 

목차와 뼈대에 대하여

 

1

1.그리스문명의 탄생

2.<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즘

3.오뒷세우스와 바다

4.아르킬로코스, 시인과 시민

5.열 번째 뮤즈, 삽포

6.솔론과 민주주의

7.노예와 여자

8.신과 인간

9.비극: 아이스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10.시민 페리클레스

 

 

2

1.     안티고네의 약속

2.     돌을 조각하고 청동을 주조하다

3.     과학의 탄생: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4.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운명에 화답하기

5.     핀다로스, 시인들의 왕자, 왕자들의 시인

6.     구대륙 탐험에 나선 헤로도토스

7.     인본주의 의학의 꼭, 힙포크라테스

8.     아리스토카네스의 웃음

9.     지는 해

10.  소크라테스라는 수수께끼

 

3

 

1. 쇠락과 새로운 발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메데이아>

2.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 나타난 비극성

3. 비극<박카이>

4. 투퀴디데스와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

5. 데모스테네스와 도시국가 시대의 몰락

6. 플라톤의 정치적 대망

7. 플라톤식 아름다움과 환상

8. 아리스토텔레스와 생명체

9.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성 또는 우애에 관하여

10. 질서라는 탈을 쓴 무질서, 두 명의 프톨레마이오스

11. 책의 전성시대, 알렉산드리아:도서관과 박물관

12.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

13. 지리학:퓌테아스와 에라토스테네스

14. 의학:아르키메데스, 헤론, 그리고 증기기관에 관하여

15. 시로의 회귀:칼리마코스 로도스의 아폴리니오스가 쓴 <아르고나우티가>

16. 테오크리토스의 낙원

17. 다른 형태의 도피:테론다스와 사실주의 풍자 희극, 그리스의 소설<다프니스와 클로에>

18. 에피쿠로스와 인간의 구원

 

<두번읽기>

 

그리스인 이야기이지만 인류의 이야기이다. 신화의 이야기이다. 철학과 과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문학의 대부분은 신화이고 그리스인 이야기는 또한 신화이다. 인류가 살아온 살아갈 이야기의 합이다. 깊이를 더하자면 부문별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21세기의 그리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신화의 나라이고 유럽의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그리스신화에 한 줄을 대고 싶어서 안달인 나라인데 지금은 세계경제의 애물단지 같이 되어버렸다. 터닝포인트가 필요한 시점이지 싶다.

 

<1.2>

3권에 18챕터까지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책을 읽으면서 난감했던 생각이 든다. 여기 다시 헤로도토스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있다. 변신이야기를 읽으며 오딧세이아를 읽으며 처음 접한 신화들은 나를 많이 혼란스럽게 했다. 점점 신화에 빠져드는 나를 보를 것이 모두 정해진 길로 한발 들여놓은 느낌이다. 그리스문명사를 연구한 노 교수가 필생의 역작을 엮은 책이다.

그 넓이와 깊이를 모르는데 다른 말이 필요하다기 보다. 몇 십년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엮어낸 책들에게서 공통점을 본다. 그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저자가 사망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이세상에서 할 일을 언제까지 다하고 오라는 신의 부름을 받는것처럼. 앙드레 보나르도 마지막 3편이 나오고 며칠 뒤에 작고했다. 필생의 작업을 위해 신은 목숨까지 담보해주는 모양이다.

다 읽고 나면 그리스에 대하여 아주 조금 알아 질려나 싶다. 두고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문명의 발생국가에서 지금의 그리스까지 그 흥망을 보면서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고민을 더 해 볼 일이다.

 

<3>

1.2.3권을 다 읽었으나 전체적인 내용이 짜임새 있게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두 번 읽기에 조금 더 기대를 하고 있다. 2012년 지금 당장 그리스란 나라가 계속 이슈가 되고 있는 터라 어떻게 이루어진 나라이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역할이 컸다. 저자는 그리스인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며칠 되지 않아 삶을 마감했다. 평생을 업으로 삼았던 터전이라 애착이 많았을 테고 그 일을 마무리할 때 까지 열정을 다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심오함을 발치도 따라가기 힘든 독자로선 더 할말이 없지만 서양역사의 많은 부분이 기독교역사와 맞물리는 상황에서 마지막에 에피쿠로스와 인간의 구원이란 주제를 다룬 것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감동적인 장절

 

1

 

159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기쁨을 얻었고, 후회와 슬픔을 얻었다. 하지만 삽포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다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삽포의 시에서 에로스는 아무런 형체가 없다. “어떻게 할 수 없고”,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덫을 놓아 잡을 수도 없다. 잡으려 하면 바고 부서지고 말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보니 사랑은 아름다웠고 쓰라렸을 뿐이다. 아무리 되돌아보며 생각해내려 해도 사랑은 형체가 없다. 아프로디테는 인간의 형성으로 나타나지만, 에로스는 그렇지 않다. 긴장한 청년의 모습도 아니고 화살을 쏘는 사람의 모습도 아니다. 삽포의 에로스는 몸에 남은 상처로 표현될 뿐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프다. 상처가 남는다. 사지가 다 부서져 나가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쓰라리다. 그게 사랑이다. 따라서 삽포에서 사랑은 끔찍한 짐승을 닮았다. 알 수 없는 세상의 힘이고, 쿵쿵거리며 엄습해오는 짐승의 발자국이다.

 

내게도 사랑은 이런 모습이다. 이렇게 왔다 간다. 이렇게 무섭다. 이렇게 살을 태운다. 그리고 삶을 태운다. 삶을 지탱하게 한다.

 

228 세모니데스는 여성을 열 가지 종류로 나누고, 각 종류별로 적당한 짐승 혹은 사물을 지정했다.

11.  암퇘지, 그녀의 집에 들어가 보면 돼지 우기가 따로 없다. 방마다 온갖 것들이 나뒹굴고, 피둥피둥한 여자가 제 몸만큼이나 더러운 옷가지들 사이에 앉아 있다.

12.  여우형, 온갖 사술에 능하다.

13.  이야기통, 비방과 잡담이 특기고, 암캐의 후손답게 하루 종일 직기를 멈추지 않으며, 남편조차 아내의 입을 닫을 방도가 없다. 심지어 돌로 이빨을 다 부러뜨려도 소용이 없다.

14.  게으른 등, 땅만큼이나 무거워서 옮길 재간이 없다.

15.  물의 딸, 엄마만큼이나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다. 어떤 때는 너무 성질을 부려서 제어가 안 되는데 또 어떤 때는 여름날의 바다처럼 잔잔하고 고요하다.

16.  당나귀형, 고집불통이며 게걸스럽고 방탕하다.

17.  족제비형, 도둑질과 범죄에 능하다

18.  여쁜 암말, 공주병이 심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아놓은 쓰레기를 창밖으로 버릴 줄도 모른다. 하루에 두세 번 목욕을 하며, 온몸에 향수를 범벅으로 묻히고, 늘 머리에 꽃을 꽂는다. “그런 부인은 외간남자들 눈요기로는 좋으나, 남편에게는 오래된 고질병과 같다.”

19.  원숭이형, 싸움질에 능하다.”그런 여자를 아내로 둔 남편이야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다.”

20.  꿀벌처럼 부리전한 여자, 있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열중 아홉은 이상한 여자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그럴듯하다. 그런데 나는 여자가 아닌가 보다.  

 

2

 

47-48 알다시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고상한 생각이 아니라 거칠고 상스러운 행동이 아니겠는가. 행동과 저급함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경우를 우리는 인간 조건의 필수적인 요소, 우리를 가장 짓누르는 인간 본성의 일부로 파악한다. 우리는 안티고네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에 앞서서 크레온의 묵직한 흙으로 빚어졌다. 그렇지 않다고 저항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극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 작가가 예술적 기량과 애정을 가장 발휘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같은 통찰력 있는 연민이 담긴 대목이다. 즉 우리는 ‘심술궂은’ 등장인물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심술궂은’ 등장인물들을 마음 밖으로 내치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예술적인 진실과 우리가 느끼는 쾌감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속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325 의사는 환자가 포도주를 좋아하는지, 식탐이 있는지, 쾌락을 즐기는지, 또는 손쉬운 쾌락보다는 노력하기를 즐기는지, 가령 운동을 좋아하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환자가 속한 사회적 생태계, 그 중에서도 물리적 환경이 의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힙포크라테스는 사회적 생태계가 거기에 속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뛰어난 통찰력과 확고한 의지로 밝혀낸다. 유럽과 아시아의 상당수 나라가 그의 연구 결과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한몫 거들었다.

 

333 인간의 치유는 자연의 도움과 인간 신체기관의 도움이 어우러져 이루어진다. 힙포크라테스의 목표는 자연의 치유 행위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얼핏 보기엔 매우 소박하다 <전염병>에는 “자연은 질병을 고쳐주는 의사”라는 대목도 나온다. “자연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에 길을 열어준다. 자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혀는 혼자 알아서 모든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고,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은 자연이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알아서 이행한다.

 

447 자연의 신의 영역이며, 인간의 정신은 인간에게 속한다. 일식과 별똥별을 아무리 탐구한다 한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안에서 소곤거리는 작은 목소리, 인간 각자의 안에서 소곤거리다가 문득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인간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길을 회피하고, 천체 속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질문에 대해 침묵하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하챦은 과학 따위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학파들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고대인들로 하여금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보다 철학을 중시하도록 이끈 소크라테스의 영향력은 가히 엄청나다. 잠정적으로 과학을 도외시하며 인간에 대한 인식만을 추구하는 ‘철학’을 택하다니, 이 얼마나 치명적인 선택인가! 소크라테스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다. 인간에 의한 인간 정신, 아니 당시 표현대로라면 인간 영혼의 정복만큼 그가 집착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고려할 때, 명확한 규범에 따라 정신적인 학문을 정립시키기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성큼성큼 여러 세기를 건너뛰기를 즐겼다….

 

3

 

263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동시에 친근하고 익숙한 실존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이상하고 비인간적인 생명체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근원. 욕망에 따라 자손을 번식해나가는 삶, 배고픔을 느끼는 삶, 허기를 달래고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치열한 삶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엔 멀게만 느껴졌던 동물의 세계는 책장을 넘길수록 이상한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이 같은 감정들이 전혀 아무런 과장 없이 펼쳐지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아니 우리의 오장육부를 한층 더 강력하게 휘어잡는다. 살아 있는 생명체 각각으로 보자면 일시적이지만 지구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 전체를 놓고 보면 영속적인 삶은 그렇게 우리 앞에 펼쳐진다.

 

364 필라텔포스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레르게테스는 귀중하고 희귀한 책들을 구입하기 위한 지출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엄청난 액수의 보증금을 물고 아테나이에서 기원전 4세기에 필사되었으며, 아테나이의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는 공인된 비극 전집을 임대했다. 일단 책이 손에 들어오자 그는 보증금을 포기하고 그 책을 두고두고 보관했다.

 

476 이 여자는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듯이, 즉각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이 감정에, 이 마력에 바친다. 그러는 동시에 여자는 매 순간 내어주려는 자기 자신을 되찾아오거나 되찾아오려고 시도한다. 낭만주의란 이처럼 상반되는 가치들이 인간 존재의 마음속에서 서로 얽히고 뒤척이면서 상대방을 밀어내는가 하면 밀려나는 움직임의 연속이다. 첫눈에 반한 운명의 순간에 이어지는 밤중 내내 메데이아라고 하는 인물은 전적인 수줍음과 전적인 정념 사이를 헤아릴 수도 없이 여러 차례 오간다. 요컨데 메데이아는 빅토르 위고 식으로 말하자면 천당에 올라갔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죽음으로 돌진하는가 하면 어느새 한달음에 삶을 향해 뛰어오른다.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러 생을 마감하게 해줄 독약을 꺼내는 일화, 눈물이 흘러내리고, 죽음과 접촉하려는 순간 문득 솟아오르는 즐거웠던 순간들의 이미지, 죽음을 밀어버리고 기쁨을 향해, 이아손과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그 이미지들, 이 장면은 문자 그대로 낭만주의의 결정판이다(결정판이라고 하면 완벽함을 의미한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이 장면이 그리스 문학에서 유일무이한 장면이라고 확신한다. 정념과 정념으로 인해 파생되는 대조의 효과 외에, 아폴로니오스에게는 낭만주의적이라고 형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면모가 있는데, 바로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자연을 결부시킨다는 점이다.

 

486 그(퀴클롭스)는 사랑에 빠지면서 비로소 자신의 못생긴 용모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사랑이 기운 센 그를 사납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유순하고 섬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갈라테이아에게 그는 그저 자신의 오두막으로 와서 곁에 앉아만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보기에 내가 너무 거칠고 퉁명스럽다면 나를 상대해줄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내가 참나무 장작을 마련해놓았으니 화롯불 곁에 앉아만 있어요. 나는 혼자서 슬픔을 견딜 테니까…난 당신이 입술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저 손등에나 키스할 겁니다….그는 순진하며, 그가 연인에게 주겠노라고 제시하는 선물들이 또 감동적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달의 흔적을 간직한 열한 마리의 암사슴과 네 마리의 아기 곰을 기를 겁니다….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눈꽃을 따올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양귀비 꽃다발을 만들어 줄 겁니다. 그런데 하나는 여름에 피고 다른 하나는 겨울에 나오니, 두 지를 동시에 당신에게 줄 수는 없겠군요

 

544 사랑은 더 이상 삽포나 에우리피데스의 시에 나타나는 것처럼 존재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얼음장 같은 죽음으로 몰아가는 질풍노도가 아니다. 사랑은 이제 서서히 저물어가는 맑게 갠 날에, 아름답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여인과 함께하는 시간,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남자와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다. 다프니스, 너의 클로에는 우유를 살짝 곁들여 같은 잔으로 마시는 포도주처럼, 그의 입에서 너의 입술로 전해지는 피리 소리가 빚어내는 멜로디처럼, 아름답고 부드럽구나. 클로에. 너의 다프니스는 피어나는 꽃보다, 시냇물의 노랫소리보다 소중하고 아름답구나. ! 그의 품에 안긴 너는 그의 새끼 염소로구나! 이런 식으로 사랑의 달콤함은 이 세계의 부드러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553 그는 인간들이 쓸데없는 두려움과 고답적인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온한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해방자이며, 치유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준 치료사다. 사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 아니 얼마든지 치유 가능한 어리석음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루크레티우스는기품 있는 열정이라고 표현되는 문체를 빌려. 이렇게 선언했다. “그는 신이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지혜라고 일컫는 삶의 법칙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자신이 정립한 학문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수많은 폭풍과 수많은 암흑으로부터 끌어내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

 

그는 에피쿠로스이다. 플라톤보다 한 세기 후, 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말에서 기원전 3세기 1사분기에 걸쳐 생존했던 철학자.

 

566 인간은 불행하다고 에피쿠로스는 단언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기쁨을 위해 태어났다. 에피쿠로스는 기쁨의 필요성, 기쁨의 소박함. 기쁨의 즉각성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기쁨은 언제나 우리가 손을 내밀면 잡힐 만한 곳에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현실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란 말인가? 우리가 가진 으뜸가는 두려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어디를 가나 따라다닌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은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분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황당한 기분전환을 즐기고 있을 때에도 이 생각은 줄곧 인간을 사로잡으며, 새로운 지평선이 열리지 않도록 꽉 막아버린다. 죽음에 대한 생각 앞에서 인간은 마치 곧 끝 모를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와 현기증으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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